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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본군의 갬블(2)
1차 세계 대전 후 세계의 형세를 보면 평화가 점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관동군이 방자하게 중국의 동북을 침범함으로 하여 실상은 국내모순이 점점 격화되였던 것이다. 1921년에 아홉 개 나라대표가 미국의 워싱톤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는 두가지 조약 즉 <<九国 협약>>과 <<해군 협정 >>을 맺은바있는데 일본은 그에 따라서 군비를 대단히 축소했던 것이다.
1921년에 일본은 군비가 7.3 억 엔이였던것이 1930년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과중한 부담을 덜고 국민의 빈한한 생활수평을 골고루 높혀주자는 목적에서 군비를 1억엔 이하로 대폭적으로 줄이였으니 보면 원래의 40%밖에 안되였던 것이다. 일본 육군의 소득자금만 봐도 당초예산의 십분의 2~3밖에 되지 않았다. 례를 들면 대포와 포탄을 만들던 오사카 총공장 하나만 봐도 직공이 1.5만명이던 것을 2,500명으로 콱 줄이였으니 보면 6분의 5가 해고되였거니와 무기 생산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이같은 대규모의 무장해제는 군사 부문의 이익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줄곧 군사 우선의 원칙을 추구하다보니 직업군인을 많이 양성시켰던 것이다. 직업군인으로 놓고 보면 사실 싸움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을바에야 국가가 그 많은 군인을 그저먹여살릴수도 없잖은가, 그래서 해고를 시킨 것인데 그같은 해고가 그들에게 밥통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군인들의 상실감과 불안감이 대체 어떠했겠는가는 불보듯이 빤했다. 누구나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밥통잃은 군인들은 어떻게 하나 전쟁을 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관동군은 1919년에 설립되였는데 그 전신은 남맘철로수비대로서 대련에 주둔하다보니 “关东州”라는 그곳의 지명을 따서 “관동군”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9.18사변이 기실은 일본 관동군의 젊은 터키 장교(소장파)였던 이타가키, 이시하라, 도이하라 겐지 등의 무단적인 계획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였지 실상은 일본군부에서 전적으로 계획하고 일으킨 것은 아니였던 것이다.
사변이 났을 때 관동군은 병력이 2만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동북전역을 공점하기는 어려웠다. 하기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을 중국의 북동에 이동해야지 그러지 않을 시에는 관동군이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였다. 일본 군부에서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중국부대가 출동하지 않았으니 천만중 다행이였지....
일본수상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사태가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육군대신과 협상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하야시 센 주로 사령에게 병사들을 까딱움직이지 말고 명령을 기다리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개방구만큼 여기고 듣지 않았다. 하야시 센 주로가 수상을 존중하고 그의 말을 곰상히 듣고 지시를 준수했더라면 9.18사변은 요절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야시 센 주로 역시 광신적인 군국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더 말할 것 없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3만명넘는 군대를 몰아 관동군을 도와줬으니 일본군은 실력이 오르기 마련이였다.
한편 그 사건이 벌어진 후 장개석정부는 군사적인 저항보다도 외교적인 방법으로 동북3성의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하여 중국은 그해 9월 21일에 “국제련맹”에다 기소(起訴)한 것이다. 그당시 일본은 “국제련맹”의 상임리사국(영구회원)으로서 다카쓰키 내각에서도 관동군이 동북삼성의 사태를 크게 만드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해의 9월25일에 일본대표는 “국제련맹”에서 일본정부의 태도를 아래와 같이 표명했다.
1) 일본은 중국령토에 대한 야심이 없다.
2) 일본의 군사행동은 당지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였다.
3) 일본군은 즉각 철거 할 것이다.
그당시 일본육군대신과 총참모장은 즉시 군대를 철거하라 했다. 그러나 관동군사령부는 그 지시를 전혀 듣지 않고 1931년 10월 18일에 금주(锦州)에 있는 장학량군대를 맹렬히 들이치는 괴변으로 공공연히 맛섰던 것이다. 그때 심양에 와 있던 일본령사는 관동군의 두목들을 찾아 정부는 이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련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관동군 군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거니와 심지어 군도를 빼들고 “당신은 우리들의 일을 간섭할 참인가? ” 고 하면서 그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니 동북삼성의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931년 12월 11일, 다카쓰키 내각은 몰락하고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새로 성립되였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손중산의 친한친구였다. 그는 손중산이 일본에 망명갓을 적에 여러면으로 돌봐준 일로 하여 국민정부의 적잖은 상층인물들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하기에 그는 사인관계를 통하여 평화적인 수단으로 동북삼성의 위기를 해결하려했던 것이다.
그해의 12월 20일에 이누카이 쓰요시는 남경에다 특사를 보내여 국민정부의 고위급인물들과 회담케 했다. 그러나 총리의 그 비밀 평화회담내용이 그만 유출되는 통에(전보로 인해) 군대내에 잠복했던 격진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말았다.
한가지 더있었다.
1932년3월1일, 도이하라 겐지의 계획에 따라 “만주국”이 세워져 아이신줘로 푸이가 등극했다. 하지만 이누카이 쓰요시가 권력을 잡은 일본내각은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누카이 쓰요시내각은 일본 우익분자들의 분노를 더 격발시킨 것이다. 1932년 5월 15일밤, 10여명의 해군청년장교와 육군사관 견습생들이 총리관저에 침입하여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살했다. 이 일이 력사에는 "5·15 사건"으로 기록되여 알려지고있다.
이누카이 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은 일반인의 내각이던것이 군사 정권의 두려움에 위축되여 제구실을 못하는 내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총 끝에 쓰러진 일본수상이 이누카이 쓰요시 하나뿐이 아니다. 일본의 재정능력으로는 군벌의 공격적인 확장야망을 충족시킬 수 없게되니 군벌과 정부사이의 모순은 격화되여 그따위 반란과 암살사건이 련이어 일어났던 것이다.
1930년 10월 14일,일본수상 하마구치 유키오가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해군 군비를 축소하고 일본해군의 규모를 제한할것을 동의했다가 일본우익분자들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했는데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여 치료못하고 일년후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1936년 일본 황도파(皇道派) 군인들이 발동했던 “2·26병변”에서 재정부장 다카하시는 군사지출을 최소로 적게하자고 했다가 “반역자”로 몰려 살해되였다. 1930부터 1937년에 이르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수상 둘과 재정부장 둘이 우익의 군국주위분자들의 총에 맞아 생명을 잃은 것이다.
일본의 우익분자들은 군국주의자들로서 전쟁만이 일본이 살아나갈 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있다. 일본의 전쟁야심은 그같은 자들에 의하여 생기는바 그 뿌리는 깊고도 깊은것이다. 화근이다. 그런 전쟁광신자들이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은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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