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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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본군의 갬블(1)
2015년 04월 01일 12시 54분  조회:2375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일본군의 갬블(1)

 

   갬블(豪赌)이란 도박을 가리킨다.

   1931년 9월 18일 22시 20분, 봉천(심양)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관동군 철로수비대는 남만철로 류조호(柳条湖) 구간의 철길을 제손으로 폭파해서 장작림이 탄 렬차를 전복하고는 엉뚱하게도 그것은 중국군대가 자기들과 전쟁을 하자고 꾸민 수작이라 걸고들면서 폭사된 이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의 군부가 있는 북대영(北大营)을 진공했다.

   이때 장기간 약담배를 피운데다 상한에 걸려 북평(북경)에 가서 협화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중이던 장학량은 제 처와 함께 전문(前门)밖에 있는 극장에서 매란방(梅兰芳)이 공연하는 경극 우주봉(宇宙锋)을 구경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였다 

   당시 북대영을 지킨 최고지휘관은 동북군 제7려 참모장 조진반 대령(赵镇藩上校)이였는데 그는 일본군이 쏘는 총소리를 듣자 긴급히 동북군참모장 영진(荣臻)을 찾아 보고하는 한편 그와 대책을 연구했다. 영진(荣臻)은 료녕성주석 장식의(臧式毅)와 같이 긴급히 장학량에게 상황을 알리였던것이다.      한편 급전을 받은 장학량은 “일본정부가 관동군을 공제하겠지”, “사태가 더 커지지 말아야겠는데” 하면서 장개석이 엿새전인 9월 12일에 석가장(石家庄)에서 “오로지 국제련합에 제출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 일율로 저항하지 말라”고 한 지시에 따라서 영진(荣臻)에게 전보로 “ 련합국의 평화목적을 존중하기 위해서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대영을 지키고있었던 6,800명 군대가 일본군 500명에게 패주를 하는 꼴이 되고말았다. 량군의 충돌에서 일본군은 22명이 죽었으나 동북군인은 10배도 넘는 320명의 죽음을 내면서 쫓기웠던 것이다.

 

   1931년 9월 19일 새벽 6시30분에 북대영이 함락되고 따라서 봉천이 함락되고말았다. 려순에 있었던 일본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중장은 소속 부대에다 진격하여 점령하라 명령을 내렸거니와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중장에게 제발 증원 부대를 속히 보내여 원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은 일본 관동군은 불과 12시간밖에 안되는짭은 사이에 선후로 심양, 단동, 영구, 무순, 해성, 료양, 본계, 사평 등 남만철로와 안봉철로연선의 18개 성진(城镇)을 먹어버린것이다.

   그 다음날 장춘이 함락되였는바 동북주둔군 길림성 부사령장관공서 참모장인 희흡(熙洽)은 21일에 지어 부대를 거느리고 적에게 투항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틑날에는 료녕, 길림 두 성이 적들의 손에 함락되고말았다. 일본군으로 놓고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희한한 대승리로 사시(史詩)를 엮어가는 승승장구였다. 

   10월초에 관동군은 흑룡강성을 진공하기 시작했는데 이쪽에서는 수비대의 일부가 또 적에게 투항하고말았다. 그래도 성정부의 대리주석 겸 군사총지휘였던 마점산(马占山)은 1만명에 이르는 자기 부대를 지휘하여 맛서 싸웠다. 그러다가 힘이 안되겠으니 11월 18일에 그만 치치하얼을 내놓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흑룡강성의 주요한 도시들을 공점하고나서 료서지구(辽西地区)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32년1월3일에 금주를 함락했고, 그 뒤를 이어서 2월5일에는 할빈마저 함락했다. 일본군은 이같이 4개월 18일밖에 안되는 짧디짭은 기간에 동북3성 100만 평방km를 벼락같이 점령했으니 그 면적은 일본본토의3배나 되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세인을 놀래우는 대승(大勝)이였다. 그것은 그들 일본의 침략사에서 창조한 대단히 휘황한 기록이 되였거니와 후대들에게 보여준 그야말로 멋스런 자랑이면서 따라서 본보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관동군이 벌린 한차례의 시합갬블(一场豪赌) 즉 굉장한 도박이였던 것이다. 일본은 그 도박에서 이겼길래 사기가 구중천에 올랐지만 중국은 무능을 드러내면서 치욕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얌전하다고 세상사람이 우러러보았던가?!

 

   사변이 일어나던 그때 동북3성에 널려있은 일본군을 보면 다해봤자 두 개의 사퇀(師團)에다 6개 려단 모두해서 1.04만명의 병력에다 재향군인 즉 퇴오군인이 1만명, 경찰 3000명까지 합해봤자 모두해서 2.34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당시의 형편을 보면 그들이 지원받을 수있는 것이란 조선에 있는 2개의 사퇀(師團)이였으니 그 인원까지 합쳐도 3만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중국은 어떠했는가?       

   그당시 동북에는 20만이넘는 중국군대가 있었는데 17개의 보병려에다 기병려 3개와 1개사에 이르는 보병이 4개성 1개 구에 나뉘여서 수비를 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평진(平津)일대에는 또 동북군 11만이 있었으니 증원하면서 그 즉시로 대적했더라면 적수(敵手)를 얼마든지 물리치고 쫓아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변이 일어나던 그날 밤부터 적수(敵手)에게 당하기만 했던 북대영의 동북군 독립제7려는 동북에 있는 군대치고는 전투력이 제일강한 려였다. 그렇건만 어떻게 됐는가? 저항을 포기했으니 무슨 꼴이 되었는가!?.....

   중국은 심양에 있는 무기창고의 무기를 몽땅잃었거니와 항공기 260대, 중포와 야포 250문, 야포알 10만개, 포탄 40만발, 박격포 600문, 박격포알 40만발을 잃었다. 그리고도 보총 15만자루, 탄알 300만발이나 적의 손에 빼앗긴 것이다. 후에 일본군은 프랑스제 <<느로땅크>>를 사용했는데 그 땅크는 심양에서 마점산부대의 것을 빼앗은 것이였다. 이듬해인 1932년 상해 128 Songhu 캠페인(淞沪抗战)때 일본군이 사용한 비행기도 역시 동북군손에서 빼앗은 것이였다.

   일본은 무기가 많게되니 그것을 갖고 자기들의 본토에서 징병을 했던 것이다. 중국이 바로 일본을 무장시켜줫다고 봐야겠다. 중국은 만약 그 무기들을 잃지 않고 그것으로 1~2개월내에 일본군과 맛서 싸웠더라면 어떠했을가?  중국은 일본군을 얼마든지 제 섬나라로 쫓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으니 양호우환(養虎憂患)이 되고 만 것이다.

 

   9.18사변직전에 동북군장령 황현성(黄显声)은 총 20만자루를 비밀리에 각 현에다 나눠준적이 있는데 항일의용군과 항일련군은 바로 그 총을 손에 잡고 싸움에 나섯던 것이다.

   그런데 웃머리들은 무슨 형국(形局)이였던가? 9.18사변이 나던 그 날, 동북육군 감독장 장학량은 베이징에서 제부인을 데리고 연극구경을 했고 중국의 최고사령관이라는 장개석은 30만 대규모의 병사를 휘동하여 제3차 홍군근거지를 포위토벌을 하느라고 영수호(永绥号) 군함을 타고 난징에서 쟝시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집안부터 평정하고나서 왜적을 물리친다”는 제 신조에 따른 행동이였던 것이다. 동북군의 웃머리들 중 마점산(马占山)같이 그의 그 신조의 부당성(不當性)을 인식한 사람이 몇 명 만 더 있었어도 천리강산을 일본에다 공손히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5만에 이르는 동북군이 적군에  항복했고 15만의 병력은 산해관쪽으로가버리다보니 5만의 일본군은 마치도 무인지경에 들어선것 같이 동북전장을 휩쓴게 아닌가!.

 
    국민당정부의 그같은 부저항정책이 결국은 전국인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애국적인 학생들은 난징정부의 외교부를 들부시였다. 외교부 장관 왕정정(王正廷)은 학생들의 손에 얻어밪기까지 했다. 한편 상해의 80만 노동자들은 대표를 남경에 파견하여 청원했다. 그리고 각 성의 대도시들에서는 로동자, 학생들이 련달아 항일시위를 활발히 벌렸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기세를 한사코 내리눌렀던 것이다. 1931년 10월 5일 광저우 군경은 지어 청원을 온 학생과 민중을 향해서 총을 쏴 10명이 그 당장에서 죽었다. 그리고 12월 1일에는 남경에서 항일민중 30여명이 맞아서 몸이 상했거니와 180여명이나 경찰에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던것이다.
   외세(外勢)에는 어쩌지 못하면서 국민탄압에는 그같이 용기를 부렸으니 민중이 어찌 분노하지 않으랴?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 )에 떨고있는 비참한 중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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