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이 시종바란것은 대동단결
<<한국현대사>> 5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5. 獨立軍의 統合運動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여가자 이러한 기운(氣運)은 동북만주 지방으로도 퍼져갔다. 이리하여 1925년초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는 북로군정서, 독립군단, 중동선교육회(中東線敎育會) 등 적기단(赤旗團)을 제외한 각 단체의 대표자가 회합하여 부여통일회의(夫餘統一會議)를 열었다. 회의결과 동북만주 소재지의 각 단체를 통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키로 하고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는 한편, 별동대 80명을 두어 자위(自衛)와 모연(募捐)에 종사토록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의 핵심은 전 북로군정서로서 김좌진 등이 청산리싸움이후 시베리아에 가서 군대를 정비한 후 국내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실패하자 북만주로 돌아와서 신민부를 조직한 것이다. 1925년 3월 10일에 선출한 신민부진용을 보면,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一名學韶),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羅仲昭),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등이며, 그 후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독립군의 간부가 될 사관을 양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는 이합과 집산을 거듭하면서 성장하였으나 일본군의 대학살과 미쯔야협정으로 대다수의 단체는 해체되거나 유명무실해지고 다만 남만주의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의 신민부 등이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갔다. 그러나 날로 강화되는 일본군의 병력증강과 이와 반비례하여 고전을 겪고있는 독립군 활동의 상황으로 미루어 이들 세 단체의 통합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대규모로 동원된 적 앞에는 독립운동단체의 총집결만이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27년 8월하순, 마침내 이상 세 단체의 대표자 300여 명은 통합에 대한 모색을 하기위해 길림에 모여 통합에 대한 구체안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정의부의 대표 김동삼(金東三)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광복의 제일요(第一要)는 혈전(血戰)인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앞에는 각 단체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光復戰)을 감행하기전에 3단체 군부(軍部)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합작은 지상명령이니 여하한 장애가 있더라도 합작하여야 한다.
각 부의 대표들도 이같은 취지에 찬동하고 이듬해 5월에 이르기까지 장시일에 걸쳐 합작에 관한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는 각 단체안에 파벌이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정의부안에는 촉성회파(促成會派)와 협의회파(協議會派)가 대립하여 촉성회측의 이청천, 이종건(李鐘乾), 최명수(崔明洙), 김상덕(金尙德), 김동삼(金東三) 등은 정의부에서 탈퇴하여 버렸고, 신민부에도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가 대립하여 군정파의 김좌진, 황학수(黃學洙) 등은 신민부에서 이탈하여버렸다. 그리고 참의부도 분렬되여 김희산(金希山) 등 주류는 촉성회를 지지하고 심용준(沈龍俊) 등은 협의회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3부의 통합운동은 1928년 5월에 이르러 실패로 돌아가고 양분된 세력은 각각 따로 통합운동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정의부의 잔류파와 신민부의 민정파, 그리고 참의부의 심용준파 등은 이해 11월 15일 길림성 대둔(大屯)에서 따로 회합하여 통일단체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때의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현익철(玄益哲), 민사위원장에 김이대(金履大), 경제위원장에 장승언(張承彦), 외교위원장에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에 이웅(李雄), 교육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 법무부위원장에 현정경(玄正卿), 교통위원장에 김돈(金敦)이였고 사령관은 이웅이 겸하였다.
한편 정의부 탈퇴파와 참의부주류파, 신민부의 군정파도 임시혁신의회(臨時革新議會)를 조직하여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황학수, 이청천, 김승학(金承學) 등 16명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상과 같이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결렬되여 두 개의 단체가 출현하자 김좌진은 독립군지도자들의 파벌투쟁에 실망하여 잠시 자성기간(自省期間)을 갖기 위해 표면적인 군사활동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김좌진은 1929년 봄 정신(鄭信), 민무(閔武) 등 부하와 함께 옛 신민부 자리인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자치련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물론 이것은 군사단체가 아닌 교포의 자치기관이였다. 그러나 한동안 자숙하며 새로운 독립투쟁을 모색하던 김좌진에게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930년 1월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옛부하에게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거성을 잃은 지사들의 충격은 컸다. 특히 김좌진을 아끼던 옛 동지들은 새로운 각오로 통일되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을 염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본 3부의 대표들은 동만주의 교민대표 전성호(全盛鎬), 김동진(金東鎭), 북만주의 교민대표 이응서(李應瑞), 임시정부의 홍진(洪震) 등의 지지를 얻어 1930년 7월 전기 한족자치련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각 부에 소속되였던 독립군중에서 정수분자들을 뽑아 독립당군(獨立黨軍)을 편성하고 당에는 6개의 위원회를 두는 한편 중앙당부, 지당부(支黨部)를 설치하고 만주전역의 독립단체를 총망라하여 전영을 강화하였다. 초기의 한국독립당간부는 중앙위원장 홍진, 총무위원장 신숙(申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훈(安勳), 군사위원장 이청천, 경리위원장 최호(崔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 등이였다.
한국독립당이 창설된 무렵의 객관적 정세는 독립운동단체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여 만주지방을 방임상태에 두었고, 일본 제국주의는 이 틈을 타서 만주지방을 침식해가고 있었다. 미쯔야협정이후 일본군경은 직접 선두에 서서 중국경찰을 동원하여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체포, 학살하고 있었다. 특히 1931년에 이르러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관동군(關東軍)과 만주국군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한국독립군과 중국의 반만군(反滿軍)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독립군은 종래와 같은 분산적이고 소규모인 유격전만으로는 적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한 한국 독립당에서는 1931년 11월 2일 길림성 오상현 대석하자(五常縣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1. 36구(區)의 전 군구(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정개적(整開的)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모든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한다.
3. 특파원을 길림성 항일군(抗日軍)당국에 보내여 한중합작을 추진한다.
이상의 결의에 따라 이달 10일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12일에는 신숙, 남대관을 대표로 선발하여 중국군과의 합작문제를 협의하게 하였다.
김송죽 2010. 1. 28
한국독립군은 일제와 영용히 싸웠다
<<한국현대사>> 5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6. 韓中聯合軍의 結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선발된 신숙, 남대관 등은 곧 중국의 호로군(護路軍)) 사령관이며 길림성 자위군(自衛軍) 총지휘관인 정초(丁超)를 찾아가 한준련합군(韓中聯合軍)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한 중국측의 반응은 퍽 좋았다. 이리하여 1931년 12월 11일 독립군총사령관 이청천이 직접 정초와 구체적인 연합군결성의 방안을 토의하고 다음과 같으 점에 합의를 보았다.
.1. 한중 양군은 최악의 경우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장기항전을 계속한다.
2. 중동철로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1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3. 전시의 후방훈련은 한국군 장교가 담당하고 군수품과 일체의 자료는 중국인이 맡는다.
이렇게 연합군을 편성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미처 부대편성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 만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당해 연합군은 처음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즉 1932년 2월 12일 일본, 만주 양군은 공군의 엄호하에 중동선을 따라 진격해 온 것이다. 연합군은 이를 요격하여 선전하였으나, 식량과 탄약의 부족으로 후퇴를 거듭했고, 총사령 이청천은 친솔부대를 지휘하여 동빈현(同賓縣)에서 격전을 하다 흑룡강성 통하현(黑龍江省通河縣)으로 퇴각하여 각 부대를 수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독립군부대는 적의 긴밀한 경계망 때문에 약 2개월동안이나 상호련락이 두절되였다. 그러나 3월 2일 쌍성(雙城)의 한국독립당 제3지부당에서는 비상연석회의를 열고 각지의 독립당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각지의 독립당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정남전(鄭藍田)을 흑룡강성 총사령부에 보내여 독립군의 정셰를 알리였다. 한편, 이규보(李圭輔), 조경한(趙擎韓: 화보 p.4참조)으로 하여금 아성현(阿城縣)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考鳳林)을 찾아가 한중연합군의 결속을 더 굳게 다짐시켰다. 이렇게 하여 독립당군의 수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대리로 추대하여 다음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은 1932년 8월 독립군 3,000명과 중국군 25,000명을 동원하여 하얼삔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달 9일에 있은 아성현전투에서 의용군 이해기(李海起)부대가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하얼삔 공략계획을 포기하고 고봉림군과 합작하여 쌍성보(雙城堡)를 공격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쌍성보는 합장선(哈長線)의 요충지이며 주요산물의 집산지로서 전략적가치가 큰 곳이였다.
9월 3일 총사령 이청천이 흑룡강에서 1개 지대를 이끌고 독립군에 합류함으로써 독립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마침내 독립군은 14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도중에서 만난 만주국군의 산만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동안에 200여리를 전진하여 쌍성남쪽 5리쯤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서 고봉림부대와 만나 작전계획을 세웠다. 고봉림부대는 쌍성의 동, 남 양문으로 진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서문안에서는 만주군 3여단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독립군의 맹공격에 못배겨 북문으로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고 있던 의용군 홍창대(紅槍隊)가 이를 맞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3만군대가 3개월간 유지할 물자를 노획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주력부대는 적의 탈환작전을 고려하여 성내에서 50리 되는 우가장(牛家莊)에 일단 철수하였다. 과연 적군은 대부대로서 쌍성을 공격하여 왔는데, 이때 우군(友軍)인 중국군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립군은 싸우지도못하고 쌍성을 도로 적군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독립군측은 조경한, 차철(車撤) 등을 북만주에 보내여 산군(散軍)을 수습하고 한편으로는 쌍성보의 재점령을 준비하였다.
쌍성보의 제2차 전투는 11월 17일에 시작되였다. 연합군은 2개부대로 갈라져 진격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먼저 성내에 들어가 각종 선전문을 살포하여 무혈 개성(開城)을 촉구하였다. 한편독립군은 1대를 200명으로 하는 15개의 부대를 편성하여 선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총공격은 이날오후 6시에 개시되였다. 적은 수류탄과 박격포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우리 독립군에 의해 다수의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쌍성 북교(北郊)를 점령한 독립군 산포대(山砲隊)는 쌍성시가를 포격하여 만주군 요인의 주택을 전파했으며 일본군 1개중대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드디여 만주군 수뇌부는 부하전원을 이끌고 항복을 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입성하여 주민을 진무하고 전리품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군신(軍神)은 연합군에게 승리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이달 20일 하얼삔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 부대가 비행기의 엄호아래 반격해왔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전군을 7대로 나누어 박 요지를 점거하고 1주야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을 벌렸으나 이틑날 우군의 1각이 무너짐으로써 전선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독립군은 무너져가는 전선을 독려하여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고봉림부대의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부득히 쌍성을 버리고 약 500여 리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이 입은 타격은 막심하였으나 이에 못지 않게 독립군의 손실도 컷다. 특히 적지 않은 손실을 본 고봉림부대는 적과 더불어 휴전협의까지 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이달 27일부터 중국군과 분리하여 단독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고봉림부대와의 연합전선이 분리되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1월 29일 오상현 사하자(五常縣沙河子)에서 중앙대회를 열고 사후대책을 론의하였다. 이때에 결의된 사항은 다음 3개항이였다.
1. 군사활동지점을 동만주의 연길(延吉), 왕청, 동녕(東寧), 훈춘, 녕안(寧安)으로 정한다.
2. 상기 지방의 중국 구국군(救國軍) 수뇌와 합작한다.
3. 이미 훈련을 끝마친 각 군구(軍區)의 장정을 다시 징집한다.
이상의 결의에 따라 강진해(姜鎭海), 심만호(沈萬浩), 공진원(公震遠)등 한국독립당대표 3인은 중국 구국군사령관 왕덕림(王德林 )과 합작을 교섭하기 위해 녕안으로 갔다. 그러나 때마침 왕덕림이 남경(南京)에 출장중이였으므로 제14사장(師長) 채세영(蔡世榮)과 상의하여 잠정적으로 한중련합군의 조직을 협정하였다. 한편 한국독립당은 이 잠정적 협정을 정식으로 발효(發效)시키기 위해, 김상덕(金尙德), 신숙을 남경의 중앙정부에 파견하여 이 협정의 승인을 청원케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독립군은 중국 구국군과의 연합토일군(聯合討日軍)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연합토일군의 조직에 성공한 독립군은 채세영 군대와 함께 1933년 2월 25일 경박호(鏡泊湖) 동쪽으로 공동행군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만주군 순회 유격 기병대 약 2,000명이 연합군을 추격하고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곧 경박호량쪽에 매복하고 적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만주군은 무심코 지나치다가 연합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무수한 인마를 잃고 일대 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한중련합 토일군은 첫승리를 거두었다.
연합군은 두 번째로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개가를 올렸다. 1933년 3월 연합군은 사도하자에서 사병의 징모와 훈련을 강화하며 앞으로있을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신포(申砲)가 령도하는 원종교(元倧敎)시도들 약 500명이 자진 편입해와서 연합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과 만주군은 약 1개사단을 동원하여 연합군을 고격해 왔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작전태세를 완료하고 그들을 대기하고 있었다. 즉, 독립군은 4로(路)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을 유인하고 제 2, 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뒷산 분수령에 대기하였으며, 제4로군을 이도하자(二道河子)입구에 매복시켜 적의 후방을 끊고 적의 치중대(輜重隊)를 습격케하였던 것이다.
4월 15일 마침내 전투는 벌어졌다. 미리 세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적을 대기하고있던 연합군앞에 적의 1개사단은 너무도 미약했다. 이 전투에서 적은 반수이상이 사살됨으로써 참패를 당하고말았다. 승전한 연합군은 이 기세를 타고 무림자(武林子), 금창구(金敞口), 황가툰(黃家屯) 등에 유격대를 파견하여 적의 패잔병을 기습하여 20여차례의 싸움 끝에 적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사도하자에서 대승한 한중연합군은 그 승세를 리용하여 녕안성(寧安城)을 점령할 목적으로 6월7일 전군을 3로(路)로 나누어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기로하였다. 그리하여 기병대로 편성된 제1로군은 마안산(馬鞍山)을 경유하여 동목단강(東牧丹江)연안에 진출하여 적의 후원부대를 습격하고, 1여단의 군대로 편성된 제2로군은 영안성과 동경성중간에 매복했다가 교통로와 통신기관을 파괴하고 주력부대인 제3로군은 죄우익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공격케 하였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6월 7일 밤 동경성에 대한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3시간에 걸친 치렬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드디여 패색(敗色)을 나타내여 북문(北門)능 열고 도망했으나 이들은 매복했던 연합군에게 전멸당했고, 만주군 여장(旅長) 곽새재(郭世才)만이 겨우 호위병 몇을 데리고 도망쳤을 뿐, 성안에 있던 만주군은 모두 연합군에 추항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곧 입성하여 백성들을 선무하고, 사도하자 전투에서 얻은 것보다 더많은 전리품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전략상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영안성에는 적의 부대가 주둔하고있어 연합군의 병력으로는 이를 공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연합군은 일단 동경성을 버리고 주력부대를 왕청현, 동녕현사이의 산간으로 옮겨 병력을 분산하여 주둔했다. 이같이 연합군은 승전하고도 점령지점을 확보할 실력이 없어 산간지방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6월 28일 연합군은 다시 전군을 노송령(老松嶺)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있던 일본 이이쓰까부대(飯塚部隊)는 이들 연합군을 전멸시킬 계획하에 주야로 행군을 계속하여 7월 1일 저녁에는 대전가(大甸街) 남쪽 5리지점에 있는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곧 이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상 유리한 지점인 대전자령(大甸子嶺)의 요지로 이동하여 7월 3일 새벽 작전태세를 완료하였다. 원래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을(乙)자 모양으로 굽이진 고개인데 거리는 약 2리나 되었다. 그리고 량옆에는 험한 절벽이 있어 기여올라갈 수가 없게 되었으며 높이는 약 800~1000m쯤이고 그 속에 무성한 수림이 밀생하고있는 곳이였다.
대전령의 연합군부대는 독립군이 약 500명, 중국군이 약 2,000명으로서 이들은 3대로 나뉘여 각 요지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공격의 주도권은 소수일망정 독립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지인줄도 모르고 일본군은 대전자령을 넘어왔다. 연합군의 공격은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넘어 후미(後尾)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개시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대항할 여유도 없이 4시간만애 전멸하고 도망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 전투는 독립군사상 특기할 대승으로서, 이때에 로획한 전리품은 군복 3,000착(着 ), 박격포 5문, 군용물자 20마차, 담요 3000매, 평사포 3문, 소총 1500정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의 분배문제로 독립군과 중국 구국군 사이에는 감정대립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9월 1일에 있은 동녕현공격에 중국군은 약속한 후속부대를 파견하지 않아 독립군은 3일동안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중국군은 독립군총사령 이청천이하 수십명의 고급간부를 구금하고 무장을 강제로 몰수하였다. 이같은 감정대립은 곧 화해되였으나 이후 독립군은 중국군과 관계를 끊고 중국본토로 이동했던 것이다.
때마침 상해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의 중추적 장교를 양성키로 결정하고 이청천을 그 책임자로 선정하고 상해로 오도록 요청해왔다. 그리하여 이청천은 조경한(趙擎韓), 오광선(吳光鮮), 공진원(公震遠) 등 간부를 데리고 상해로 갔고, 그밖의 청년간부들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이와같이 하여 만주에서 수십년 동안 악전고투하며 독립투쟁을 하던 지사들은 점차 중국본토로, 또는 임시정부로 떠나버려 이때부터 만주에서는 대규모의 무장운동이 없어지고 소규모의 전투만 곳곳에서 계속되였을 뿐이였다.
김송죽 2010. 1. 28.
“화요파는 김좌진장군을 잘못 살해했다. 김좌진은 독립운동가고 항일영웅이다.” 중앙에서 참석한 여러날의 변론 끝에 이미 똑똑히 내린 결론이다. 그에 대한 평판(評判)을 한건데 이제다시 번안하자고 드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중국에서는 김좌진 문제를 다시는 론쟁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