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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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좌진이 시종바란것은 대동단결 댓글:  조회:3524  추천:25  2010-01-28
             김좌진이 시종바란것은 대동단결                     <<한국현대사>> 5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5. 獨立軍의 統合運動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여가자 이러한 기운(氣運)은 동북만주 지방으로도 퍼져갔다. 이리하여 1925년초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는 북로군정서, 독립군단, 중동선교육회(中東線敎育會) 등 적기단(赤旗團)을 제외한 각 단체의 대표자가 회합하여 부여통일회의(夫餘統一會議)를 열었다. 회의결과 동북만주 소재지의 각 단체를 통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키로 하고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는 한편, 별동대 80명을 두어 자위(自衛)와 모연(募捐)에 종사토록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의 핵심은 전 북로군정서로서 김좌진 등이 청산리싸움이후 시베리아에 가서 군대를 정비한 후 국내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실패하자 북만주로 돌아와서 신민부를 조직한 것이다. 1925년 3월 10일에 선출한 신민부진용을 보면,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一名學韶),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羅仲昭),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등이며, 그 후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독립군의 간부가 될 사관을 양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는 이합과 집산을 거듭하면서 성장하였으나 일본군의 대학살과 미쯔야협정으로 대다수의 단체는 해체되거나 유명무실해지고 다만 남만주의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의 신민부 등이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갔다. 그러나 날로 강화되는 일본군의 병력증강과 이와 반비례하여 고전을 겪고있는 독립군 활동의 상황으로 미루어 이들 세 단체의 통합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대규모로 동원된 적 앞에는 독립운동단체의 총집결만이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27년 8월하순, 마침내 이상 세 단체의 대표자 300여 명은 통합에 대한 모색을 하기위해 길림에 모여 통합에 대한 구체안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정의부의 대표 김동삼(金東三)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광복의 제일요(第一要)는 혈전(血戰)인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앞에는 각 단체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光復戰)을 감행하기전에 3단체 군부(軍部)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합작은 지상명령이니 여하한 장애가 있더라도 합작하여야 한다.    각 부의 대표들도 이같은 취지에 찬동하고 이듬해 5월에 이르기까지 장시일에 걸쳐 합작에 관한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는 각 단체안에 파벌이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정의부안에는 촉성회파(促成會派)와 협의회파(協議會派)가 대립하여 촉성회측의 이청천, 이종건(李鐘乾), 최명수(崔明洙), 김상덕(金尙德), 김동삼(金東三) 등은 정의부에서 탈퇴하여 버렸고, 신민부에도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가 대립하여 군정파의 김좌진, 황학수(黃學洙) 등은 신민부에서 이탈하여버렸다. 그리고 참의부도 분렬되여 김희산(金希山) 등 주류는 촉성회를 지지하고 심용준(沈龍俊) 등은 협의회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3부의 통합운동은 1928년 5월에 이르러 실패로 돌아가고 양분된 세력은 각각 따로 통합운동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정의부의 잔류파와 신민부의 민정파, 그리고 참의부의 심용준파 등은 이해 11월 15일 길림성 대둔(大屯)에서 따로 회합하여 통일단체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때의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현익철(玄益哲), 민사위원장에 김이대(金履大), 경제위원장에 장승언(張承彦), 외교위원장에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에 이웅(李雄), 교육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 법무부위원장에 현정경(玄正卿), 교통위원장에 김돈(金敦)이였고 사령관은 이웅이 겸하였다.    한편 정의부 탈퇴파와 참의부주류파, 신민부의 군정파도 임시혁신의회(臨時革新議會)를 조직하여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황학수, 이청천, 김승학(金承學) 등 16명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상과 같이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결렬되여 두 개의 단체가 출현하자 김좌진은 독립군지도자들의 파벌투쟁에 실망하여 잠시 자성기간(自省期間)을 갖기 위해 표면적인 군사활동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김좌진은 1929년 봄 정신(鄭信), 민무(閔武) 등 부하와 함께 옛 신민부 자리인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자치련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물론 이것은 군사단체가 아닌 교포의 자치기관이였다. 그러나 한동안 자숙하며 새로운 독립투쟁을 모색하던 김좌진에게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930년 1월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옛부하에게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거성을 잃은 지사들의 충격은 컸다. 특히 김좌진을 아끼던 옛 동지들은 새로운 각오로 통일되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을 염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본 3부의 대표들은 동만주의 교민대표 전성호(全盛鎬), 김동진(金東鎭), 북만주의 교민대표 이응서(李應瑞), 임시정부의 홍진(洪震) 등의 지지를 얻어 1930년 7월 전기 한족자치련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각 부에 소속되였던 독립군중에서 정수분자들을 뽑아 독립당군(獨立黨軍)을 편성하고 당에는 6개의 위원회를 두는 한편 중앙당부, 지당부(支黨部)를 설치하고 만주전역의 독립단체를 총망라하여 전영을 강화하였다. 초기의 한국독립당간부는 중앙위원장 홍진, 총무위원장 신숙(申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훈(安勳), 군사위원장 이청천, 경리위원장 최호(崔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 등이였다.    한국독립당이 창설된 무렵의 객관적 정세는 독립운동단체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여 만주지방을 방임상태에 두었고, 일본 제국주의는 이 틈을 타서 만주지방을 침식해가고 있었다. 미쯔야협정이후 일본군경은 직접 선두에 서서 중국경찰을 동원하여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체포, 학살하고 있었다. 특히 1931년에 이르러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관동군(關東軍)과 만주국군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한국독립군과 중국의 반만군(反滿軍)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독립군은 종래와 같은 분산적이고 소규모인 유격전만으로는 적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한 한국 독립당에서는 1931년 11월 2일 길림성 오상현 대석하자(五常縣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1.  36구(區)의 전 군구(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정개적(整開的)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모든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한다.    3.  특파원을 길림성 항일군(抗日軍)당국에 보내여 한중합작을 추진한다.    이상의 결의에 따라 이달 10일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12일에는 신숙, 남대관을 대표로 선발하여 중국군과의 합작문제를 협의하게 하였다.                                          김송죽     2010. 1. 28                   한국독립군은 일제와 영용히 싸웠다                      <<한국현대사>> 5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6.  韓中聯合軍의 結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선발된 신숙, 남대관 등은 곧 중국의 호로군(護路軍)) 사령관이며 길림성 자위군(自衛軍) 총지휘관인 정초(丁超)를 찾아가 한준련합군(韓中聯合軍)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한 중국측의 반응은 퍽 좋았다. 이리하여 1931년 12월 11일 독립군총사령관 이청천이 직접 정초와 구체적인 연합군결성의 방안을 토의하고 다음과 같으 점에 합의를 보았다.   .1. 한중 양군은 최악의 경우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장기항전을 계속한다.    2. 중동철로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1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3. 전시의 후방훈련은 한국군 장교가 담당하고 군수품과 일체의 자료는 중국인이 맡는다.    이렇게 연합군을 편성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미처 부대편성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 만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당해 연합군은 처음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즉 1932년 2월 12일 일본, 만주 양군은 공군의 엄호하에 중동선을 따라 진격해 온 것이다. 연합군은 이를 요격하여 선전하였으나, 식량과 탄약의 부족으로 후퇴를 거듭했고, 총사령 이청천은 친솔부대를 지휘하여 동빈현(同賓縣)에서 격전을 하다 흑룡강성 통하현(黑龍江省通河縣)으로 퇴각하여 각 부대를 수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독립군부대는 적의 긴밀한 경계망 때문에 약 2개월동안이나 상호련락이 두절되였다. 그러나 3월 2일 쌍성(雙城)의 한국독립당 제3지부당에서는 비상연석회의를 열고 각지의 독립당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각지의 독립당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정남전(鄭藍田)을 흑룡강성 총사령부에 보내여 독립군의 정셰를 알리였다. 한편, 이규보(李圭輔), 조경한(趙擎韓: 화보 p.4참조)으로 하여금 아성현(阿城縣)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考鳳林)을 찾아가 한중연합군의 결속을 더 굳게 다짐시켰다. 이렇게 하여 독립당군의 수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대리로 추대하여 다음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은 1932년 8월 독립군 3,000명과 중국군 25,000명을 동원하여 하얼삔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달 9일에 있은 아성현전투에서 의용군 이해기(李海起)부대가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하얼삔 공략계획을 포기하고 고봉림군과 합작하여 쌍성보(雙城堡)를 공격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쌍성보는 합장선(哈長線)의 요충지이며 주요산물의 집산지로서 전략적가치가 큰 곳이였다.    9월 3일 총사령 이청천이 흑룡강에서 1개 지대를 이끌고 독립군에 합류함으로써 독립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마침내 독립군은 14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도중에서 만난 만주국군의 산만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동안에 200여리를 전진하여 쌍성남쪽 5리쯤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서 고봉림부대와 만나 작전계획을 세웠다. 고봉림부대는 쌍성의 동, 남 양문으로 진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서문안에서는 만주군 3여단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독립군의 맹공격에 못배겨 북문으로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고 있던 의용군 홍창대(紅槍隊)가 이를 맞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3만군대가 3개월간 유지할 물자를 노획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주력부대는 적의 탈환작전을 고려하여 성내에서 50리 되는 우가장(牛家莊)에 일단 철수하였다. 과연 적군은 대부대로서 쌍성을 공격하여 왔는데, 이때 우군(友軍)인 중국군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립군은 싸우지도못하고 쌍성을 도로 적군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독립군측은 조경한, 차철(車撤) 등을 북만주에 보내여 산군(散軍)을 수습하고 한편으로는 쌍성보의 재점령을 준비하였다.    쌍성보의 제2차 전투는 11월 17일에 시작되였다. 연합군은 2개부대로 갈라져 진격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먼저 성내에 들어가 각종 선전문을 살포하여 무혈 개성(開城)을 촉구하였다. 한편독립군은 1대를 200명으로 하는 15개의 부대를 편성하여 선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총공격은 이날오후 6시에 개시되였다. 적은 수류탄과 박격포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우리 독립군에 의해 다수의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쌍성 북교(北郊)를 점령한 독립군 산포대(山砲隊)는 쌍성시가를 포격하여 만주군 요인의 주택을 전파했으며 일본군 1개중대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드디여 만주군 수뇌부는 부하전원을 이끌고 항복을 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입성하여 주민을 진무하고 전리품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군신(軍神)은 연합군에게 승리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이달 20일 하얼삔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 부대가 비행기의 엄호아래 반격해왔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전군을 7대로 나누어 박 요지를 점거하고 1주야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을 벌렸으나 이틑날 우군의 1각이 무너짐으로써 전선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독립군은 무너져가는 전선을 독려하여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고봉림부대의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부득히 쌍성을 버리고 약 500여 리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이 입은 타격은 막심하였으나 이에 못지 않게 독립군의 손실도 컷다. 특히 적지 않은 손실을 본 고봉림부대는 적과 더불어 휴전협의까지 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이달 27일부터 중국군과 분리하여 단독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고봉림부대와의 연합전선이 분리되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1월 29일 오상현 사하자(五常縣沙河子)에서 중앙대회를 열고 사후대책을 론의하였다. 이때에 결의된 사항은 다음 3개항이였다.    1. 군사활동지점을 동만주의 연길(延吉), 왕청, 동녕(東寧), 훈춘, 녕안(寧安)으로 정한다.    2. 상기 지방의 중국 구국군(救國軍) 수뇌와 합작한다.    3. 이미 훈련을 끝마친 각 군구(軍區)의 장정을 다시 징집한다.    이상의 결의에 따라 강진해(姜鎭海), 심만호(沈萬浩), 공진원(公震遠)등 한국독립당대표 3인은 중국 구국군사령관 왕덕림(王德林 )과 합작을 교섭하기 위해 녕안으로 갔다. 그러나 때마침 왕덕림이 남경(南京)에 출장중이였으므로 제14사장(師長) 채세영(蔡世榮)과 상의하여 잠정적으로 한중련합군의 조직을 협정하였다. 한편 한국독립당은 이 잠정적 협정을 정식으로 발효(發效)시키기 위해, 김상덕(金尙德), 신숙을 남경의 중앙정부에 파견하여 이 협정의 승인을 청원케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독립군은 중국 구국군과의 연합토일군(聯合討日軍)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연합토일군의 조직에 성공한 독립군은 채세영 군대와 함께 1933년 2월 25일 경박호(鏡泊湖) 동쪽으로 공동행군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만주군 순회 유격 기병대 약 2,000명이 연합군을 추격하고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곧 경박호량쪽에 매복하고 적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만주군은 무심코 지나치다가 연합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무수한 인마를 잃고 일대 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한중련합 토일군은 첫승리를 거두었다.    연합군은 두 번째로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개가를 올렸다. 1933년 3월 연합군은 사도하자에서 사병의 징모와 훈련을 강화하며 앞으로있을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신포(申砲)가 령도하는 원종교(元倧敎)시도들 약 500명이 자진 편입해와서 연합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과 만주군은 약 1개사단을 동원하여 연합군을 고격해 왔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작전태세를 완료하고 그들을 대기하고 있었다. 즉, 독립군은 4로(路)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을 유인하고 제 2, 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뒷산 분수령에 대기하였으며, 제4로군을 이도하자(二道河子)입구에 매복시켜 적의 후방을 끊고 적의 치중대(輜重隊)를 습격케하였던 것이다.    4월 15일 마침내 전투는 벌어졌다. 미리 세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적을 대기하고있던 연합군앞에 적의 1개사단은 너무도 미약했다. 이 전투에서 적은 반수이상이 사살됨으로써 참패를 당하고말았다. 승전한 연합군은 이 기세를 타고 무림자(武林子), 금창구(金敞口), 황가툰(黃家屯) 등에 유격대를 파견하여 적의 패잔병을 기습하여 20여차례의 싸움 끝에 적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사도하자에서 대승한 한중연합군은 그 승세를 리용하여 녕안성(寧安城)을 점령할 목적으로 6월7일 전군을 3로(路)로 나누어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기로하였다. 그리하여 기병대로 편성된 제1로군은 마안산(馬鞍山)을 경유하여 동목단강(東牧丹江)연안에 진출하여 적의 후원부대를 습격하고, 1여단의 군대로 편성된 제2로군은 영안성과 동경성중간에 매복했다가 교통로와 통신기관을 파괴하고 주력부대인 제3로군은 죄우익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공격케 하였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6월 7일 밤 동경성에 대한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3시간에 걸친 치렬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드디여 패색(敗色)을 나타내여 북문(北門)능 열고 도망했으나 이들은 매복했던 연합군에게 전멸당했고, 만주군 여장(旅長) 곽새재(郭世才)만이 겨우 호위병 몇을 데리고 도망쳤을 뿐, 성안에 있던 만주군은 모두 연합군에 추항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곧 입성하여 백성들을 선무하고, 사도하자 전투에서 얻은 것보다 더많은 전리품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전략상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영안성에는 적의 부대가 주둔하고있어 연합군의 병력으로는 이를 공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연합군은 일단 동경성을 버리고 주력부대를 왕청현, 동녕현사이의 산간으로 옮겨 병력을 분산하여 주둔했다. 이같이 연합군은 승전하고도 점령지점을 확보할 실력이 없어 산간지방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6월 28일 연합군은 다시 전군을 노송령(老松嶺)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있던 일본 이이쓰까부대(飯塚部隊)는 이들 연합군을 전멸시킬 계획하에 주야로 행군을 계속하여 7월 1일 저녁에는 대전가(大甸街) 남쪽 5리지점에 있는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곧 이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상 유리한 지점인 대전자령(大甸子嶺)의 요지로 이동하여 7월 3일 새벽 작전태세를 완료하였다. 원래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을(乙)자 모양으로 굽이진 고개인데 거리는 약 2리나 되었다. 그리고 량옆에는 험한 절벽이 있어 기여올라갈 수가 없게 되었으며 높이는 약 800~1000m쯤이고 그 속에 무성한 수림이 밀생하고있는 곳이였다.    대전령의 연합군부대는 독립군이 약 500명, 중국군이 약 2,000명으로서 이들은 3대로 나뉘여 각 요지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공격의 주도권은 소수일망정 독립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지인줄도 모르고 일본군은 대전자령을 넘어왔다. 연합군의 공격은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넘어 후미(後尾)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개시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대항할 여유도 없이 4시간만애 전멸하고 도망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 전투는 독립군사상 특기할 대승으로서, 이때에 로획한 전리품은 군복 3,000착(着 ), 박격포 5문, 군용물자 20마차, 담요 3000매, 평사포 3문, 소총 1500정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의 분배문제로 독립군과 중국 구국군 사이에는 감정대립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9월 1일에 있은 동녕현공격에 중국군은 약속한 후속부대를 파견하지 않아 독립군은 3일동안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중국군은 독립군총사령 이청천이하 수십명의 고급간부를 구금하고 무장을 강제로 몰수하였다. 이같은 감정대립은 곧 화해되였으나 이후 독립군은 중국군과 관계를 끊고 중국본토로 이동했던 것이다.    때마침 상해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의 중추적 장교를 양성키로 결정하고 이청천을 그 책임자로 선정하고 상해로 오도록 요청해왔다. 그리하여 이청천은 조경한(趙擎韓), 오광선(吳光鮮), 공진원(公震遠) 등 간부를 데리고 상해로 갔고, 그밖의 청년간부들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이와같이 하여 만주에서 수십년 동안 악전고투하며 독립투쟁을 하던 지사들은 점차 중국본토로, 또는 임시정부로 떠나버려 이때부터 만주에서는 대규모의 무장운동이 없어지고 소규모의 전투만 곳곳에서 계속되였을 뿐이였다.                                                    김송죽    2010. 1. 28.              “화요파는 김좌진장군을 잘못 살해했다. 김좌진은 독립운동가고 항일영웅이다.” 중앙에서 참석한 여러날의 변론 끝에 이미 똑똑히 내린 결론이다. 그에 대한 평판(評判)을 한건데 이제다시 번안하자고 드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중국에서는 김좌진 문제를 다시는 론쟁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0    신민부와 신민보 사건 댓글:  조회:3816  추천:23  2010-01-26
  신민부와 <신민보>사건                                                               김송죽     화요파는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다. 그자들은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 그것이 “혁명”인줄로 알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분렬을 조장했다. 하기에 국제공산당으로부터 해산을 선고받은것이다. 하건만 흩어지지 않고 비법적인 조직활동을 계속한 이 잔얼은 결국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보기좋게 넘어가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나는 먼저번의 문장에서 화요파는 미런한 짓을 했다고 견책했다. 오늘 나는 한마디 더 보태야겠다, 화요파는 민족의 력사앞에 두고두고 지탄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내가 감히 그리고 이같이 떳떳이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남의 칼을 빌어 피를 본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일제가 반간책(反間策)을 쓰느라 요언을 날조하여 김좌진을 추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집단적인 획책을 꾸미여 끝끝내 그의 목숨을 해치고야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일제가 해내기어려웠던 일을 그자들이 대신해서 해준 그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그자들의 집단적인 미런한 행동은 독립혁명에 막대한 해를 끼쳤다는것은 더 말할것 없다.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하다가 희생한건 의용(義勇)이라 하겠지만 죽을때까지 잘못을 반성할줄을 몰랐다면 그것은 악질(惡質)인 것이다. 나는 전에 화요파에 들었던 모든이들을 놓고 말하는게 아니다. 생을 마칠때까지 자기를 반성할줄은 모르고 오히려 자기를 “용감한 투사”로 분장했던 잔얼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다.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가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순전한 날조고 악의를 품은 지독한 모독인 것이다. 사실은 전연 그렇지 않다. 한데 화요파였던 자가 꾸며낸 그것이 지어는 소설로까지 묘사되여 진짜인듯이 세상에 퍼졌으니 지천(地天)이 낯을 붉힐 한심한 일이 아닌가!    뭐,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로인들은 이 일을 잘안다고? 되지도 않는 소리다. 어떻게 잘알수있는가?  1920년대초면 태여나지도 않았을거요 태여났다해도 철부지 어린애였을텐데 어떻게 잘알수가 있는가말이다. 기껏해야 독립군을 원쑤로만 여긴 화요파가 항간에 퍼뜨러진 풍우란설을 들은것이였겠지. 안그런가?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에서 굶어 자진하였다”는데 그야말로 백주발검(白晝拔劍)할 한심한 날조인 것이다.    량환준은 독립군의 력사를 제대로 알기나하고 그런소리를 줴쳤는가?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백포종사 서일은 쏘련에 건너갓던 독립군이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라도 함)을 겪은지 8달만에 뒤를 이어서 토비들 손에 “당벽진참안”까지 겪고보니 너무도 참혹하고 눈앞이 캄캄해나는지라 전도에 절망하여 자결한것이지 제 독립군의 행실에 기막혀 자결한건 아니였다.    량환준은 대체 심보가 어떻게 되여먹었기에 명명백백한 토비들의 행실을 김좌진과 독립군에 뒤집어씨운건가?         자유시사변이란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월린의 국제군이 싸할린의용대(朴일리아부대, 니항군이라도 함)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로하여금 자유시(불라고베쉔스크)의 정세를 감시케하는 동시에 제 29연대가 로령지역(露領地域)의 자유시로 이동한 朴일리아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건을 말하는것이다. 손잡고 독립혁명을 하려고 쏘련에 건너간 독립군은 흑룡주 공산계렬의 오하묵과 싸할린의용대 박일리아지간의 군권쟁탈에 말려들어 참중한 희생자만 낸것이다. 이날의 무장충돌에서 싸할린의용대와 독립군부대는 전사자가 272명, 흑룡강을 건너오려고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가 31명, 행방불명이 250명, 포로된 자 917명이였다.    한데 <<자유시사변>>이 있은지 두달만인 8월 26일에 또 <<당벽진사변>>이 발생해서 김좌진은 전혀 예산못했던 혹심한 타격을 받았다.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여 독립군들이 로씨야로 건너갈 때 그와 가장 의기상투했던 동지자 총재였던 백포종사(白浦宗師) 서일(徐一)은 둔병제로써 전체독립군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당벽진에 남았다. (당벽진은 밀산남쪽 흥개호가의 중로변경에 있는 황량한 곳) 그런데 주력이 떠난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그날에 한무리의 토비들떼가 마치도 피에 굶주린 악마같이 급작스레 덮쳐들어 그곳에서 농사짖고있던 독립군을 전부 살해하여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이다. 너무도 참혹한 훼멸이였다!    이틑날. 서일은 시교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가 데리고있던 청년병사들이 전부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는지라 비통하기 그지없은 절망끝에 이에 책임을 지고 대종사 라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허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백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믈고 길궁한데 인간가는 길이 어디메뇨!>>를 크게 읊조리고는 그만 자결하고만것이다.          그것은 “청보산패” 마적단이 한 짓이였다. 횡포하기 그지없는 그 토비무리는 그후 50여명이 따로 작당하여 북만의 동강(同江)근처에서 또 무고한 허저족 40명을 살해하는 <<고태자참>>까지 빚어냈다가 그해 즉 1923년 겨울에 허저족이 주도가 되어 조직된 “복수대”의 숙청에 들어 끝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토비를 류자(liuzi)라 하는데 그 토비무리서 세 번째 인물 즉 규률을 장악하는 수이샹(水香)이 진사해(陣四海)란 자였는데 <<자유시사변>>때 니항군청년과 함께 흑룡강에 뛰여들어 표류하다가 허저인의 손에 간신히 구원된 북로군전사 정민호(鄭敏鎬)가 그자는 바로 <<당변진참안>>을 주도한 자였다는 것을 알고는 6년간의 끈질긴 추격끝네 끝끝내 통쾌하게 잡아치워 복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동강의 허저인 나쟈로인한테서 이 사실을 알고는 사료들을 모아 연구하여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1998년도에 <<연변문학>>에 절반까지 련재되였다가 지난해 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온정한 책으로 묶이여 세상에 나온것이다. 장편소설인데 책명은  <<관동의 밤>>이다.  리해를 돕기위해 소설가 최국철이 쓴 소개의 글을 올린다.         “김송죽의 두번째 장편소설《관동의 밤>이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688 쪽에 87만자에  달하는 이 장편소설은  력사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소설은 ‘9.18’사변후 항일의용군의 항일과 토비들의 항일을 다루고있는데 민족청년 정민호를 주인공으로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스토리가 굴곡적이다. 특히 허저(인)족의 풍속과 토비들의 생활은 허구가 아닌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 타민족 문화를 접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특정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는 우리 민족의 반일, 항일 력사를 다른 측면에서 알수 있다.“ /연변일보   나는 30년 넘어 전문 북만토비를 연구하면서 그에 대한 론문도 쓴 사람이다. 한데 량환준은 사실을 외곡하면서 한심한 날조로 독립군을 모독하니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화요파의 “거물”이였고 로당원이였다는 사람이 그래 그러는 것이 직책이였단말인가? 아무리 남을 잡아먹어도 분수있지. 공산당원의 본분이 이러는거야 아니지?        항일무장부대로서의 북로군정서는 건립되여서부터 백성들에게서 걷어들이는 군자금에 이뢰한것만은 사실이다. 지어는 조선에 까지 가서 군자금모집을 하다가 모집자가 희생된 이들도 있는것이다. 한데 내가 여기서 똑똑히 알려주고싶은건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선것은 그때 만주에 거주했던 30만에 이르는 대종교도들이였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각지의 시교당이 책임지고있었다. 제일 숨이 가빳을 때는 “청산리전쟁”직전 무기살 돈을 장만하는 한편 로령을 넘나들며 서둘렀을 때였다. 그후에는 차츰 적어지다가 아예 거둬치우고 자급자족했다.    량환준은 이런 사실을 알기나했는가? 북로군정서가 세운 신민부가 “군자금”을 거두면서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는데 대체 어느 백성들을 그토록 못살게굴었단말인가? 하다면  독립군은 어떻게 북만에 발을 붙이고 생존했겠는가? 아래에 한국의 력사학가 박영석(朴永錫)선생의 글 인용문과 나의 글을 간단히 실으니 읽어보면 아마 판단이 생기리라 본다.    “북로군정서는 在滿韓人社會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가장 큰 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였다. 더구나 이 북로군정서는 檀君을 중심으로 한 救國宗敎團體일 뿐만아니라 大倧敎 救國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로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이 된 단체인 동시에 民族軍隊의 性格을 띤 强力한 獨立軍部隊였다.” 〔大倧敎의民族意識과 獨立運動〕『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1988, pp. 155~183.        1.   “둔병전”을 하자면 토지가 있어야하는데 돈이 없지 땅을 어떻게 구한단말인가?“    김좌진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에서는 조선동포들은 물론 중국백성들까지 모르는 이라고는 별반없었다. 그같이 청산리투쟁에서 혁혁한 위훈을 떨치였던 이 독립군장령은 아직 그 위망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이같이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지방당국과 교섭하여 되도록 관계를 좋게하려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이국땅에 발을 붙이자고 보니 그렇게 해야지 달리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산시(山市)에 아직 미개간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친히 나서서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주요한 둔병지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앞의 2헥타르되는 밭에 장태콩을 심어먹기 위해 성이 마씨(馬氏)인 지주한테서 사고는 임자없는 습지판에 물도랑을 빼고 98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황지촌에 있는 얼마가량의 땅도 먼저 몇해간 부쳐먹다가 땅세를 적당히 물기로 지방관부와 협상했고 녕안의 땅 얼마가량도 그런 방법으로 차지했다.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끝에 사전자(沙田子)에도 수한전합해 5헥타르있게됐고 고령자, 석두하자, 백모자, 해림 등 여러곳들에 논과 천수답들이 얼마간씩 다 있게되였다.    한편 신민부는 무장인원을 내놓고는 이젠 나이 많고 잔약하거나 남정북전에 고생많이했고 몹시 피로해진 900여명 독립군들을 <<재향군인>>이라 이름을  짓고 안착해서 농사짓게 했다.    공농제(公農制)의 실시를 위해 이런 <<재향군인>>들은 붙임땅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원도 많고 적게 나뉘여졌는데 그네들은 자기가 간 곳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렇지만 조직성과 규률성만은 의연했는바 유사시에 손에 무장만 잡고 나서면 여전히 당당한 전투원이였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軍區制),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자기관할내의 18세이상 40세이하의 청년과 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계획있게 시켜서 장차 맞이할 항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려 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정예군인양성을 목적해서 목릉현경내에 있는 소수분(지금의 綏陽), 팔리평(八里坪)골안에다 사관학교를 세웠다. .....둔덕에 묘하게도 흡사 비행장같은 널다란 공지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공지의 서북쪽끝머리에 자그마한 삼각산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고려옛성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즉 사관학교는 고려옛성의 동쪽에 위치한 셈이다. 하여 이름을 성동사관학교라 지어부르게 된것이다.    성동사관학교는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취임하여 련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해 그후 500여명의 사관생을 길러냈다.    신민부는 발족하면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각계각층이 모여서 다만 항일과 자주와 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 뭉쳐 일제타도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적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순응 병진한다>>는 선언을 한바가 있었기에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일제는 신민부의 일거일동에 주목했고 간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노리였던거다. 지어 주요간부의 목에 거액의 현상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로 잠입, 암해음모를 획책하고있었기 때문에 령수급인물들은 주위의 경계를 특별히 심하게  해야했었다.    김좌진은 고정지점이 거의 없다싶이 지냈다.                2.    그런데 인제는 당지의 중국군경이 독립운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해 1925년 11월하순 어느날 밤, 신민부의 보안대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있는 류운초(柳雲樵)의 집에서 보안대 대장 문동봉을 비롯한 림강(林崗), 리강훈(李康勳) 등 젊은 대원 8명이 회의를 하다가 녕안군경 수십명의 돌연습격을 받아 모두 체포되여 녕안감옥에 갇히우고말았다. 다행히 권총 몇자루만 압수당하고 기밀문건들은 류운초부인이 감쪽같이 뒷문으로 빼돌리였다.    할빈일본령사관에서는 체포된 독립투사들을 매수하려고 온갖책동을 다했다. 그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볼장은 다 보는지라 신민부측에서는 자기의 사람을 빼내오기 위해서 박남파(朴南坡)와 조성환을 내놓아 주구배의 무고만 믿고 남의 나라 독립투사를 함부로 가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중국 중앙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게 했다. 했지만 허사였다.    어리석은 중국관료는 언론계의 항의와 비난을 받고서야 6개월만에 강금했던 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갑수(申甲洙)와 박순보(朴順甫) 두 청년은 병에 걸려 억울하게 옥사하고말았다.    이무렵 김좌진의 가정은 녕안에 있었는데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있는 처 오씨의 궁색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근본 집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보니 오씨는 헝겊신을 지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형편이였다. 너무도 곱게 자라난 량반의 딸이 그렇게 살아가노라니 오죽 지겨웠으랴. 게다가 딸 옥남(玉南)이마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있으니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것이 보기가 너무 안되여 그래도 권화산(權華山)로인이 가끔 들릴때마다 얼마간씩 돈을 주어 돕군 했다.    어느날 감옥을 나온 24살의 리강훈이 중국사람 4명을 고용하여 담가로 옥남이를 메여다 목단강역 부근 동포부락에 있는 김좌진한테로 가져와 로씨야인의 병원에서 병을 보이게끔하려 했다. 그의 행실이 기특해서 모두 칭찬했고 오석 김혁은 그의 호를 청뢰(靑雷)라 지어주기까지 했다. 옥남이는 이틑날 죽고말았다.    ..........    <<남아의 한번 실수에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나 나는 다른 날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글귀를 고국땅에 남겨놓고 훌쩍 떠나왔던 김좌진이였다. 그가 늙은이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온지 어언 10년철, 언제면 고향땅을 다시 밟겠는지 앞길이 묘연했다. 부인 오씨는 전해에 딸 옥남이가 죽자 조선 고향에 돌아간 후론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필경은 고생이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좌진은 홀아비로 살아가게 됐다.    김좌진에게는 만주로 들어오기전에 계동의 김계월을 만나 그한테서 본 서자 하나와 아우인 시정 김동진(時旌 金東鎭)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문한(文漢)이가 지금 조선 안성읍내(安城邑內)의 외조모집에 있을 뿐 더는 없다. 본처 오숙근이 만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집간도 없어서 70고령의 어머님을 지금 석두하자에 있는 동생에게 맡겨 모시고있다. 이런 형편에 <<8로>>들은 일곱번이나 편지를 해 오숙근더러 북만에 들어와 살림살이를 다시 하라고 권유했건만 헛수고였다. 본인이 한사코 들어오지 않으려는데야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모면키 어려운 액운과 요사가 빈번한데 대를 이어줄 자식 하나라도 더 보게 해야 할게 아니냐 하는것이 장로들의 생각이였다. 그래서 수차의 의논 끝에 여기서 맞춤한 색시감을 구해 백야를 재혼시키자는 것으로 의견이 둥글어졌는데 때마침 림정의 만주대표였던 김대지(金大池)도 해림에 왔다가 이 일을 알게 되어 후일은 자기가 책임지마고 하면서 이를 동의했던 것이다.        3.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는 멀지 않은 대안이 우리의 심령속에 있나니 성품을 수양하고 닦으라. 인간의 암흑을 깨뜨려버리고 리상의 경지에 이를것이니 단군의 후손들은 의지와 행동을 한데 이으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어서 널리 배포했다.    한편 일제는 만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일제는 전해(1925년)의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三矢)를 시켜 봉청성 경찰청장 우진(于珍)을 매수해 이른바 <<미쯔야협정>>이라는것을 맺게했다. 그것은 중국관헌이 조선반일운동자를 체포하여 일본경찰관에 인도할것과 조선인반일단체의 해산, 무기몰수, 호상간의 정보교환 등을 규정한 비밀협정이였다.    이무렵 동삼성은 물론 중국전지역에 걸쳐 독립운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가고있었다.    이런판에 1926년 4월에 들어와서 항일단체인 신민부는 경을 치르었다. 일본의 할빈령사관에서 김일성(金一星)이와 강경애(姜敬愛)가 써서 <<신민보>>에 낸 글이 반일적이라고 트집잡고 흑륭진(黑隆鎭)에 있던 신민부의 기관보를 돌연습격하여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黙)과 경사국장 리광진(李光鎭)을 체포해갔다. 그리하여 전해에 창간호를 낸 이래 동포계몽과 구국교양을 활발히 해오던 이 신문은 창간 한돐만에 활동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경애는 소설을 쓰는 녀 초학자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리고 김일성(본명은 김봉환)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사람이였다. 그들은 동거했다.        이때는 공산주의계렬의 내부도 자못 복잡했다.    1919년 9월 5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철훈을 의장으로 하는 전로한인공산당(全俄韓人共産黨)(후에는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개칭)이 건립되였다. 이 당은 차츰 요하, 녕고탑, 돈화 등지에 당조직을 내오고 당원을 적극발전시키였다. 그러면서 연해주에서 <<선봉>>, <<동아공산신문>>, <<신세계>>, <<적기(赤旗)>>, <<로동세계>> 등의 신문, 잡지와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만주 각지에 광범히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는 1925년 4월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만주에다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만주총국(朝鮮共産靑年會滿洲總局)을 설립하고 그아래에다 북만, 동만, 남만 3개 구역국(局)을 두어 농민들을 조직하고 청년들을 령도하며 민족주의단체들을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울 임무를 주었다. 그해 조선공산당북만구역국(朝鮮共産黨北滿區域局)의 령도밑에 녕안일대에는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와 중서청년련맹(中西靑年聯盟)이 결성되여 자체로 <<로력청년(勞力靑年)>>간행물까지 꾸리였다.    다른 한편 1921년 1월에 조직되였던 서울청년회계통의 한 종파집단으로서 주로 화요파와 대립되였던 서울파가 다시 신 구 량파로 갈라진 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이해(1926년)에 만주로 밀려들어와 그 전해에 일본 도꾜에서 조직된 초기 맑스ㅡ레닌주의사상단체였던 일월회파 및 만주총국과 결탁하여 4월에 레닌주의자련맹(列寧主義者聯盟)이라는 그루빠를 만들고 자칭 엠엘파라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엠엘파를 반대하기 위하여 서울구파와 상해파가 협력하여 서상파를 만들어냈다.    한즉 만주의 공산진영 역시 여러 종파집단으로 하여 사분오렬되여있었다.    대동단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5월에 중동로연선의 여러 청년단체들은 대표를 아성현(阿城縣)에 보내여 그곳에서 대표련석회의를 열어 북만조선인청년총련맹(北滿朝鮮人靑年總聯盟)을 설립하고 <<농군(農軍)>>이란 간행물을 꾸리여 각지의 청년들에게 무산계급리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이들도 자기의 조직을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년들을 조직하여 야학교를 꾸리고 운동회를 열고 문예공연을 하는 등 형식으로 군중들에게 반제, 반봉건의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청년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혁명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즈음에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끌려갔던 김봉환이 얼마지나지 않아 무사히 풀려나온것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에 갇혔던 독립군이 그가 할빈일본령사관의 고등경찰 마쯔시마와 조용히 마주앉아 담화하는것을 보고 소식을 밖에 내보내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자식이 왜 무사히 나왔어?>>    <<그자식이 자수하고 풀려나온거나 아니여?>>    모두들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김좌진역시 그에 대해 의문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김혁, 정신 등을 비롯한 여러 수뇌들과 함께 신민부의 사업을 계속 한걸음도 처지지 않겠끔 하려했다.                                 (장편전기 <<설한>> 193~196페지. 흑룡강인민출판사)                                                    2010. 1. 24.
9    부질없는 노력은 무용한 것 댓글:  조회:2861  추천:32  2010-01-26
  부질없는 노력은 무용한 것                                                             김송죽        장춘식선생의 글 <<강경애의 행적에 대한 일 고찰>>을 방금 읽어보고 곧 이 글을 쓴다. 반론이라 취급해도 좋다.      장선생의 론리대로 하면 이제 또 강경애의 전기를 새로만들어야겠다. 그럴 필요가 뭔가, 이미 있는것만도 족한데. 나는 우선 강경애의 전기에서 “론쟁”에 유관한 부분만을 독자앞에 내놓으련다.    『1929년 겨울에 간도에 건너가서 룡정일대에 거주하면서 림시교원질도 하고 무직의 고통도 겪으면서 고생하다가 1931년에 고향에 돌아와 그해 8월에 처녀작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 1932년 다시 간도 룡정촌에 건너가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려가면서 장편 <<인간문제>>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조선일보>>간도지국장을 맡아보기도하였다.    그러나 1936년부터 고질이 도져서 1939년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여 부득불 창작을 중지하였으며 나중에는 귀가 멀고 눈조차 보지 못하게 되어 병마의 시달림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문학학습사전>> 542페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장춘식선생은 론문에서   『1929년과 1931년에 발표된 강경애의 두 평론문은 고향 장연에서 집필 탈고한 것으로 보는것이 옳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강경애는 1929년부터 1931년초까지는 장연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썻다.        강경애의 글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明日)의 길’을 읽고” 가 1929년 10월 3~7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되였다. <<문학학습사전>>에 강경애는 1929년 겨울에 간도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그가 간도로 건너오기전 고향에서 썼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나도 이 점을 긍정한다.    다른 한 문장 “양극동군의 신춘평론ㅡ반박을 위한 반박”이 <<조선일보>>에 난것이 1931년 2월 11일자라했으니 강경애가 조선에 있었다는 근거로 잡는데 내 생각에도 틀리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 하면 강경애는 1931년에 만주에서 고향으로 갔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문제시되는건 딱히 어느달 어느날에 돌아갔는지 알 수 없는 그것이다. 내 짐작컨대는 1931년 1월이나 2월에 나갔으리라는 거다. 왜 이같이 보는가? 그것은 고향에 간 강경애가 8월에 첫장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수필이나 단편소설이나 중편소설이면 몰라도 그가 발표한 것이 장편소설이였으니 창작시간이 대단히 길었을것이다. 그 “반박을 위한 반박”문장 하나를 발표하고는 내내 첫장편집필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렇고 볼때 정월달이나 2월달에 고향으로 가서 내내 장편원고를 써 8월에 발표했다는거다.    연구문제는 1930년 11월 28~29일 <<조선일보>>에 “조선여성들이 밟을 길”이 발표된 그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원고는 강경애가 만주에서 써서 그것을 인편에 보내지 않았나하는 거다. 왜냐하면 그때는 지금의 남북한처럼 꼭 막힌것도 아니고 백성이 비교적 자유로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드나드는 일이 많았으니까말이다. 검열이 영 없은건 아니지만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기자들의 래왕도 빈번했으니까 그들이 가는 걸음에 보냈을 수도 있었던것이다. 그렇지 않을가?     << 문학학습사전>>에는 강경애가    『1929년 가을에 간도에 건너가서 룡정일대에 거주하면서 림시교원질도 하고 무직의 고통도 겪으면서 고생하다가 1931년 고향에 돌아와 그해 8월에 처녀작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고 했다.    어느것이 더 믿음성있는가? 사전에서는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고향으로 돌아갈 때 까지의 고생한 행적이 믿음성있게 밝혀져있지 않는가!       장선생은 추리를 거쳐『특히 간도 이주행적은 거의 사실로 확인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라고 하는데는 영 도리가 없는게 아니지만 그것을 딱 확인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전번의 앞글에서도 지적한 바이지만 장선생의 아래글구를 다시내놓고 보자.   『아무리 본인의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한두번의 단편적인 언급을 근거로 행적을 판단하는것은 좀 무리라고 하겠으나』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강경애 그 본인이 한두번 진술한것이라 해서,  단편적인 언급이라해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게 어디 말이 되는가? 장선생의 론리대로 하면  강영애 그 본인의 말한것보다는 장선생이 연구, 추리, 조사해낸게 더 믿음성이 있다는게 아닌가? 과연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다면 오로지 공공연히 사실을 오도하게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장선생은 『여러 진술에서 드러난 시간관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앞뒤가 들어 맞는다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장선생이 관건적이며 가장 알맹이로 잡아쥐어야 할 강경애 본인의 “진술”과 “언급”을 믿지 않은것은 대단한 실책이면서 과오인 것이다. 두말할 것 있는가, 한두번의 진술이건 단편적인 언급이건 본인이 한 말이면 무조건 믿어야지 안믿어서야 어디되는가, 대중앞에 내놓고 시비해보라.      그리고 리복림이요 량환준이요, 아무리 어찌고 어째도 그래도 어디로 보나 광복회 회장 이광훈(李康勳)선생이나 리을규(李乙奎)선생은 다가 김좌진장군이 암살될시 그 현장목격자였던만큼 그 누구보다 신빙성이 있는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니? 그래 이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사람을 어디가서 찾는단말인가? 우리는 그들을 어디까지나 존중해야하거니와 응당 믿어야하는 것이다. 그 두분이 왜서 다 같으게 저의들의 회억록에 “강경애는 김봉환의 동거녀”라했고 “김좌진장군교사공범”이라 밝혔겠는가. 아무렴 없는 일을 짜고서 그같이 허무하게 꾸며댔단말인가? 그럴 수 있을가? 하필이면 왜 “여문인 강경애”, “화요파 김봉환”이라 딱 찍었겠는가말이다.    내가 나의 첫문장에서 김좌진전을 쓴 과정을 말하면서 필수되는 자료들은 거의 김좌진의 딸 김강석(金剛石)누님한테서 얻은거고 리을규가 쓴 <<시야 김종진>>을 의거로 삼았다했고 그보다도 내가 더 믿음이 간것은 강석누님이 “소설인지 뭔지 쓴다는 에미나색끼가 그 화요파 사내새끼하고 들어붙어 놀면서 짜고 그 짓을 한거야!”하고 몇 번이나 곱씹어 저주를 퍼붓는 그것이였다고 했다. “소설을 쓴다는 에미나”가 강경애고 “화요파 새끼”란 김봉한을 가리킨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 김좌진이 암살되던해에 겨우 두 살을 잡았는데 산동에서 들어간 한족(漢族)리씨 손에 있다가 장례를 치르고는 독립군들의 손에서 자라면서 그들이 알려줘  머릿속에 꼭 박혔기에 내내 저주를 품어왔다고 한다. 그래 있지도 않은 일을 독립군들이 꾸며 그렇게 알려줬겠는가? 그럴리야 만무한게 아닌가!  이거야 더 변론할 여지가 없잖은가!    장춘식선생은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김헌순의 주장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하겠다. 강경애가 황해도출신이고 광복후 강경애의 남편인 장하일이 조선에 나가서 활동했기 때문에 김헌순의 이런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데 나도 바로 그 생각이다.           전에 량환준선생이 살아계셨을적에 김좌진피살설을 놓고 조선족력사학계가 두 진영으로 대립된였던 것도, 중국민족학회의 한중관회장을 중심으로 강경애의 남편이 한짓이라고 주장한 것도 다 무리가 아니였다고 본다. (동거인 김봉환을 남편이라했을 수도 있었고.)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론쟁이 격렬했던 것 만은 분명한데 내 생각에는 이제는 더 강경애를 감싸려고 계속 강짜를 부리지 말고 이 일을 계기로 그를 새로이 재다시연구하고 평론하는것만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본다. 내가 그 어떤 개인적인 악감을 먹고 강경애를 명성더럽게 한다고는 생각말라. 내 출발점은 그렇지 않은거다. 그녀를 제대로 규명하자는 것 뿐, 우리 모두가 후세에 욕먹을 짓을 하지 말자는 거다. 나를 늙으막에 웃기지 말라는데 그말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연변의 온 문학계에 미움을 사고 짓몰리우더라도 할말은 하고 할 일은 마감까지 해야겠다. 내 고집이 굳어질 뿐이다.                                                           2010. 1. 23
8    기발한 반론에 탄복한다! 댓글:  조회:3016  추천:17  2010-01-26
    기발한 반론에 탄복한다!                                                                   김송죽         이번것이 나의 다섯 번째 문장이다. 도대체 누가 리지를 상실하고있는지 모르겠다. 낸지 아니면 당신인지. 내가 당신께 “그리도 당당하다면 내처럼 시시비비에 이길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 당신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내놓으라”고 한 것이 그래 “리지를 상실”하고있는건가? 나더러 “문장에 도리가 없고 마구우격다짐”이라는데 증명을 하나하나 라렬하고 그것을 해석해도 “우격다짐”이 되는건가? 과연 누가 우격다짐인가? 왜 내놓으라는 증건은 내놓지 않고 얼버무리는건가? “이렇게 소중한 자료를 여기서 꺼내여 랑비하고싶지 않다”고 하지? 그게 어디 리유가 되기나한가말이다.    어느 문장엔가는 김좌진이 리복림에 의해 사살 됐다하고 이제는 리봉림이 또한가지 박상실이라는 이름이 있다면서 그가 직접 김좌진을 쏴 죽였다고 한다. 왜 이러는가? 꾸며대도 앞뒤가 어울리면 몰라도.    “당시 할빈에 살았던 한의사 정수강이라는 사람이 구해준 총이였으며 그 총이 브라우닝 6발이라는 자세한 정보까지 다 있다”지? 그래 그따위 정보를 어떻게 믿으란말인가? 정수강이란 사람이 그런 총을 리봉림에게 주었을 수도 있다. 한데 문제는 총을 준게 중요한게 아니라 과연 리복림이가 그 총으로 김좌진을 쏘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 <<개보다 못한 놈! 그놈을 붙잡아 각찢어놓고말테다!>>    한 독립군전사는 격분하여 부르짖으며 연자방아 찧는 말을 풀어 타고 흉수가 도망쳤다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산시마을을 기민하게 빠져나와 신안진쪽으로 줄행랑을 놓고있던 흉수ㅡ 박상실(朴相實)은 독립군이 말타고 자기를 추격하고있음을 발견하고는 얼른 길옆 늪가의 갈숲에 몸을 숨기였다가 저격하여 그를 사살했다.    때마침 신안진쪽에서 산시로 오고있던 조선농민 둘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사람은 얼른 엎드려 몸을 숨겼으나 다른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선채 놀라 허둥지둥하다가 역시 박상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박상실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람목숨 셋이나 앗아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나의 <<설한>>에 씌여진 당시의 정경이다.        리봉림이 김좌진을 암살하고나서 과연 무고한 농민마저 가리지 않고 살해했을가? 그럴수는 없다.          “30년대 동아일보 등 그때 신문보도를 가장 유력한 증거로 내세우는데 웃기는 일”이란말이지?   “그때 신문이 김일성이나 양정우가 죽었다고 엉터리보도를 수십번도 넘게 했었지만 다 엉터리로 판명되였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 총을 쏜게 박상실이였다는 보도도 믿을 수 없는 엉터리였단말인가? 정영 엉터리보도였다면 당신의 말과 같이 엉터리로 판명되였을게 아닌가. 몇심년이 지났는데도 김좌진암살과 박상실 압송에 대한 보도가 엉터리로 판명되지는 않았다. 왜서인가? <<동아일보>>가 보도를 정확히했기 때문이 아닌가.    엉터리보도를 실었으면 그게 대체 어느 신문인가? <<동아일보>>인가 아니면 <<독립신문>>인가 아니면 적지(敵紙) <<大板朝日新聞>>인가  <<長春實業新聞>>인가?  나는 적의 신문인 <<大板朝日新聞>>, <<長春實業新聞>>따위가 일제의 장악, 조정하에 독립혁명진영을 허물어뜨릴 목적으로 “김좌진이 할빈령사관에 귀순했다”느니 “조일만이 굴복했다”느니 “김일성이 죽었다느니”, “양정우가 죽었다느니” 등등 제나름의 온갖 험악한 요언들을 날조한걸로 알고있다. 시간이 오래흘렀는데도 그것이 “엉터리로 판명”되지 않은 <<동아일보>>와 <<독립신문>>의 보도를 “유력한 증거”로 삼는데는 웃길게 뭔가? 사실보도를 믿는것도 그래 웃기는건가?    당신은 “량재문이나 지희겸, 리연록, 량환준 등 사람들은 김좌진사살사건 당사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지인들”이라는데 그들 다가 사건현장에 있었던거야 아니겠지? 묻노니, 그래 김좌진암살당시 그 사건현장에 있었던 증견자 신민부간부였던 이광훈이나 리을규보다 그네들이 더 신빙성이 있단말인가? 그들이 더 신빙성있다고 믿는다면 그거야 말로 과연 웃길일이 아니고 뭔가? 당신은 시비를 거꾸로 하고있다. 그렇지 않은가?        “리복림이 또 다른 별명이 바로 박상실이였다”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가?  어느 력사기재에 그렇다는 것이 있는가말이다? 접수되는건 그 세월에 많은 혁명자들이 자신을 음페하기 위해 이름을 여러 가지로 썼다는 것이다. 헌데 같은 이름자가 10이건 20이건 30이건 그게 우리의 시비에 무슨 소용있는가? 리복림의 다른 한가지 이름이 공도진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박상실이란 이름이 또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리복림에게 “박상실”이란 그런 이름이 또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은 필시 어느 화요파분자가 리봉림이 직접 김좌진에게 총을 쏜 걸로 만들기 위해서 꾸며낸것이라고 보지 달리 좋게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박상범(朴尙範) 혹은 김신준(金信俊)이라고도 한 박상실(朴相實)은 이듬해에 적에게 붙잡혀 총살당했으니까. 그러나 리복림이야 살아서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거고 항일을 계속하지 않았는가! 그가 아성호로군의 손에 붙잡혀 총살당한 그 박상실의 망매(魍魅)야 아니겠지?     김좌진이 암살된 그 이듬해인 1931년 9월 11자 <<동아일보>>는     “金佐鎭氏下手人 朴相實에 死刑判決      阿城縣護路軍에게 逮捕되여 執行次로 奉天에 押送”이란 보도를 실었다. 똑똑하게 “金佐鎭下手人朴相實”이라 했다. 그것이 그래 거짓보도였단말인가?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은 판결받아 죽은거다. 묻노니, 그래 세상에 어떤 바보가 “내가 바로 박상실이요”하고 제 목숨을 바친단말인가? 자기가 흉수아니면서 굳이 리복림 그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칠수 있을가? 과연 그럴가? 이거야말로 ‘천방야담“에서나 꾸며질 일이 아니고 뭔가!  만약 과연 그런일이 있었다면 해방후 그는 꼭 대단한 렬사가 되어 할빈에 있는 ”동북렬사기념관“에 사진이 의젓이 나붙었을 것이다. 한데 나는 거기에는 그런 이름가진 렬사가 있는걸 보지 못했다. 정녕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사진이 없어 붙히지 못했다면야 필경 당사에는 빼놓지 않고 올랐을거요 올라도 그저오르지 않고 대단한 영웅으로 만민이 우러러 칭송을 영원히 받으면서 올랏을거다. 그렇지 않은가? 화요파로서 제 종파본질을 고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에 고급간부로 까지 되였다가 희생한 대단한 사람인 항일투사 리복림을 대신해서 제 목숨을 선듯 내놓은 희생자 되니까. 그렇지 않은가? 나는 당신보다 확실히 ”력사공부“”를 적게해서 그런 사료는 보지 못했으니 력사공부를 많이한 당신이 이 기회에 독자여러분이 다 보게끔 증명자료를 내놓기바란다. 이제는 말로만 그냥 증명하노라 싱갱이를 말고. “소중한 자료를 여기서 꺼내여 랑비”한다고? 그게 어디 말이 되는가? 그러지 말고 당당하게 나오란말이다.    그럴수 있는가? 대답하라. 그것을 내놓지 못하면 나는 당신의 반론은 무던히 애를 써 꾸며낸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강경애에게 개인적으로 그 어떤 혐원이 있어서 이런다고 생각말라. 나는 이미 말한것이다. “강경애 그의 작품이 얼마나 적극적이든 진보적이든 간에 그것을 론할 일이 아니다”고. 친일파라해도 경중은 다르지 않는가. 강경애는 이광수, 최남선과는 아주 영 다른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의도는 없다. 우선 력사와 민족앞에 그녀가 어떤 인물이였는가를 바르게 규명해놓고 보자는거다. 그것이 바로되면 오래전부터 있었던 말성을 다시번복하지 않고 아퀴를 지을것이다.  그런다면 좋지않는가.    나를 늙으막에 웃기지 말라는데 충고한마디 하겠으니 받아주기 바란다.   『구멍은 깎을수록 커지고 불을 종이에 살 수는 없는것이다.』                                                                  2010. 1. 20
7    미런한 짓을 한 “화요파” 댓글:  조회:4356  추천:17  2010-01-26
  미런한 짓을 한 “화요파”                 리광인 “김좌진장군피살을 론함”에 대한 반론                                                        김송죽         리광인선생은 량환준생전의 증언을 그대로 믿으면서 내놓았는데 나는 이제야 론쟁이 가심화되는 리유를 좀더 명확히 알게되였다. 아무튼 좋은일이다. 내가 량환준선생이 김좌진장군피살설을 놓고 구술한 것을 읽어보고 깨닫게 된것은 바로 량환준선생은 전혀 회개할줄을 모르는 완고한 파벌쟁의 전형이였다는 것이다. 과연 어쩌몀.... 사람이 허심하지 못하면 그지경이 되고마는 것이다.     첫째, 그가 살아 시종고집해온 김좌진장군살해 리유를 보자.     “북만의 민족주의단체인 신민부의 반동두목 김좌진은 1929년에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는 松島)와 결탁하여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적이 되었다. 그는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하였고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여주었다. 김좌진은 이 돈으로 산시(山市ㅡ해림서쪽)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첩을 얻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편 <<동성철도사령부와>>와 결탁하여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 신민부무장부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치떨리는 살인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조공만주총국(즉 화요파)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서 김좌진을 없애치우려고 결정지었다.”고 했다.    김좌진이 과연 그러했단말인가? 여기서 한가지, 신민부의 독립군이 무장을 갖고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서 수상해보이는 사람은 수색, 체포한 것은 사실이다. 신민부는 그때 부(府 )를 보위하는 무장대원이 500여명가량되었는데 그들은 신민부의 동정을 탐지하려는 밀정을 방지하기 위해 그같은 보위조취를 엄하게 댄 것이다. 그게 뭐가 잘못된건가? 그래 내부로 기여드는 적의 밀정도 방지하지 말아야한단말인가?    화요파는 그래 무슨 “정부”를 갖고있었는가? 분렬을 일삼으면서 독립혁명보다 파쟁에 더 눈에 피가 져 돌아치다보니 종당에는 조선공산당을 파멸에로 몰아갔기에 공산국제로부터 해산을 선고받았은 잔당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는가를 보라!  윗과 같이 김좌진장군을 살해한 리류를 댔는데 김좌진이 과연 그렇게 했단말인가? 그것은 일제가 반간책(反間策)을 쓰느라고 일부러 조작하여 퍼뜨른 소문이였는데 하요파는 그 소문을 딱 믿어주고 독립혁명진영의 난국을 한창힘겹게 헤쳐나가고잇던 제 사람을 적으로 몰고 죽이는 미런한 짓을 한것이다.         1920년 10월, 조선독립전쟁사상에서 금자탑이 되는 청산리리대첩!    상해림시정부의 <<독립신문>> 제91호, 1921년 1월 21일지에는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부하 300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중 적이 자상사살한 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독립신문>>은 이어 1921년 2월 25일지에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상해림시정부에 보낸 일본침략군의 참패와 독립군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싫었다.                                                            적의 실패리유      (1) 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은 적을 경시하는 것인데 심산 협곡을 별로 수         색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陷沒)을 당함이며 (2) 국지전(局地戰)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중에서 종종         자상(自傷)충돌을 당함이며 (3)  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비겁심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不精)하여 1발의 효과가 없는       란사(亂射)를 행할 뿐이였다.                                                        아군의 전승(全勝)리유     (1)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奮勇)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량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발휘함이요.  (3) 응기수변(應機隨變)의 전술과 예민(銳敏),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       (意表)에 출함이다.        전반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3,300여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측은 전사자 60명과 부상자 90여명에 달하였다. 청산리회전소식은 재빨리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에까지 퍼졌다. 지어는 일본에서까지 커다란 편폭으로 청산리회전에 대한 보도를 실었다. 이로하여 김좌진장군은 명장으로 세상에 이름날리였고 원쑤들은 참패를 승인하여 훗날 청산리골에다 <<초혼비>>까지 세우고는 이를 븍븍 갈면서 갖은 방법을 다하여 김좌진장군은 없애치우려고 별렸다.     당시 상해에서 발간된 림시정부에서 낸 <<독립신문>>을 보라.                           金佐鎭씨의 活動    『敵紙 大板朝日新聞 級 長春實業新聞에 大韓獨立軍團總司令 金佐鎭씨가 哈爾濱 敵領事館에 歸順하였다는 設을 記載하였으나 此는 全然無根함이요. 敵은 우리 사업을 妨害키 위하여 反間策을 弄함인것인즉 此에 속을 리가 없으러니와 氏는 오직 實力을 養成키 위하여 今年度부터 吉林省 某地方에 屯田制를 大規模로 實行하기로 하고 一方으로는 士官養成所를 設立하야 現今 百餘名의 士官을 敎授하는 中이라더라. 』       림시정부에서 이같이 똑똑히 알려줫건만 화요파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는가?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서 당파싸움을 “혁명”으로 여기면서 해산을 선고했건만 흩어지지 않고 종파활동을 계속했던 이 비법의 사이비한 혁명자 화요파잔얼은 결국 일제의 반간책에 보기좋게 넘어가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세상에 그래 이보다 더 미런한 짓도있는가? 신민부 독립군측에서는 치를 벌벌 떨면서 김장군의 원쑤를 값겠다고 토공대(討共隊)를 내왔으니 그그게 그래  누구탓이였는가? 그게 그래 화요파가 미런해서 자초한게 재앙이 아니고뭔가. 서로 붓잡고 죽이고..... 그게 그래 화요파 빚어진 악과가 아아니였는가말이다? 가뜩이나 단합되지 않아 위기로 몰리고있던 독립혁명진영은 그사건으로 하여 거의  붕괴의 지경에 이르어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말았던 것이다! 적의 간계에 속아넘어가지 말라 경고했음에도 제편 사람을 원쑤로 보고 살해한 화요파, 그들은 대체 원쑤를 몇이나 섬멸하고 그런 엄청난 꼴불견의 죄악적인 짓을 했는가? 그래놓고서는 되려 제쪽에서야 그것을 정당화하느라 무던히도 오래 비방과 모욕을 날조해오지 않았는가!.... 력사와 민족의 앞에 미안하고 부끄러운줄을 알아야 할 대신에.   공도진(최동범, 리봉림)의 김좌진암살설은 순전히 해방후까지 살아남은 화요파가 꾸며낸 “영웅담”에 불과한 것이다. 원인은 종파활동을 혁명으로 여겨온 그들자신의 공적(功績)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제와는 맞지도 않게 억다짐으로 항일을 하다가 희생한 리봉림을 독립혁명수령을 죽인 흉수로 만들어버리면서 기어코 영웅같이 만들자고 드니 그 작법이  우습기 어리석기 짝이 없다.    량환준이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가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고했는데 순전한 날조고 악의를 품은 지독한 모독이다. 이에 대하여 장차 반박하려한다. 량환준은 신민부와 한족총련합회의 내막도 잘 모르면서 이러니저러니니 어처구니없다. 후에다시보기로 하자. 
6    근거없는 모독은 하지 말자 댓글:  조회:3131  추천:25  2010-01-26
                          근거없는 모독은 하지 말자                                                              김송죽                                                                리광인 선생은 김좌진이 반동조직인 한족총련합회를 조직했다는데 그것이 이른바 반동적인 조직이였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지적하기바란다.    다년간 투쟁사를 가진 신민부가 해체되고 새로 건립된 그 조직이 도대체 어떤것인였는지 조직대강을 보기바란다.                    韓族總聯合會의 組織大綱    一 . 本聯合會의 目的과 事業      本聯合會는 在滿韓僑의 政治的 文化的 經濟的 向上發展을 圖謀하며 同時에 抗日救國의 完遂를 爲하여 在滿同胞의 總力을 集結한 僑胞들의 自己自治的 協同組織體임.    二 . 本聯合會는 本會의 目的達成을 爲하여 左의 事業을 行한다.      1. 僑胞들의 集體定着事業, 僑胞의 流浪防止, 集團部落促成.      2. 營農指導와 改良, 共同販賣, 共同購入, 經濟的 相助金庫設置 等을 目的하          는 協同組合事業.      3. 敎育, 文化事業. 卽 小學, 中學의 設立運營, 各地組織의 連락連絡및 僑胞          들의 消息, 僑胞들의 生活改善, 農業技術指導 等을 爲한 定期刊行物刊行,          巡廻講演, 巡廻文庫設置, 成人敎育과 獎學制度.      4. 靑壯年에 對한 農閑期의 短期軍事訓鍊.      5. 中學出身者로서 軍事幹部養成을 爲한 軍事敎育機關의 設立運營.      6. 抗日게릴라부대의 敎育訓練, 計劃指導를 받으며 地方治安을 爲한 地方組織體의 治安隊의 編成指導 等을 위한 統率部設置.      三. 議事機關과 執行部       各部落自治班은 班民總會를 決議機關으로하여 事業計劃, 豫算의 審議 및 責任者 와 代表者의 選擧를 行하며區分會에는 各班代表者會議, 總聯合會에는 地域代表者 및 區分代表者總會를 議決機關으로 하여 事業計劃, 預決算의 審議決定 및 各組織과 聯關事項의 審議, 各府署責任者의 船渠를 行한다.    執行部의 部署는 總聯合會에 委員長, 副委員長, 農務, 敎育, 軍事, 財政, 組織宣傳, 社會保健, 靑年, 總務의 各部를 設立하고 各部에는 副委員長과 次長을 둔다. 涉外는 總務部가 맡는다. 各地域聯合會以下의 組織의 執行部署는 總聯合會의 府署에 準하여 그 地方實情에 맞도록 適宜하게 둘것.
5    리광인선생의 글에 답함 댓글:  조회:3550  추천:22  2010-01-26
  신민부와 <<신민보>>사건                                                             김송죽     화요파는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다. 그자들은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 그것이 “혁명”인줄로 알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분렬을 조장했다. 하기에 국제공산당으로부터 해산을 선고받은것이다. 하건만 흩어지지 않고 비법적인 조직활동을 계속한 이 잔얼은 결국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보기좋게 넘어가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나는 먼저번의 문장에서 화요파는 미런한 짓을 했다고 견책했다. 오늘 나는 한마디 더 보태야겠다, 화요파는 민족의 력사앞에 두고두고 지탄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내가 감히 그리고 이같이 떳떳이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남의 칼을 빌어 피를 본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일제가 반간책(反間策)을 쓰느라 요언을 날조하여 김좌진을 추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집단적인 획책을 꾸미여 끝끝내 그의 목숨을 해치고야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일제가 해내기어려웠던 일을 그자들이 대신해서 해준 그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그자들의 집단적인 미런한 행동은 독립혁명에 막대한 해를 끼쳤다는것은 더 말할것 없다.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하다가 희생한건 의용(義勇)이라 하겠지만 죽을때까지 잘못을 반성할줄을 몰랐다면 그것은 악질(惡質)인 것이다. 나는 전에 화요파에 들었던 모든이들을 놓고 말하는게 아니다. 생을 마칠때까지 자기를 반성할줄은 모르고 오히려 자기를 “용감한 투사”로 분장했던 잔얼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다.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가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순전한 날조고 악의를 품은 지독한 모독인 것이다. 사실은 전연 그렇지 않다. 한데 화요파였던 자가 꾸며낸 그것이 지어는 소설로까지 묘사되여 진짜인듯이 세상에 퍼졌으니 지천(地天)이 낯을 붉힐 한심한 일이 아닌가!    뭐,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로인들은 이 일을 잘안다고? 되지도 않는 소리다. 어떻게 잘알수있는가?  1920년대초면 태여나지도 않았을거요 태여났다해도 철부지 어린애였을텐데 어떻게 잘알수가 있는가말이다. 기껏해야 독립군을 원쑤로만 여긴 화요파가 항간에 퍼뜨러진 풍우란설을 들은것이였겠지. 안그런가?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에서 굶어 자진하였다”는데 그야말로 백주발검(白晝拔劍)할 한심한 날조인 것이다.    량환준은 독립군의 력사를 제대로 알기나하고 그런소리를 줴쳤는가?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백포종사 서일은 쏘련에 건너갓던 독립군이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라도 함)을 겪은지 8달만에 뒤를 이어서 토비들 손에 “당벽진참안”까지 겪고보니 너무도 참혹하고 눈앞이 캄캄해나는지라 전도에 절망하여 자결한것이지 제 독립군의 행실에 기막혀 자결한건 아니였다.    량환준은 대체 심보가 어떻게 되여먹었기에 명명백백한 토비들의 행실을 김좌진과 독립군에 뒤집어씨운건가?         자유시사변이란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월린의 국제군이 싸할린의용대(朴일리아부대, 니항군이라도 함)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로하여금 자유시(불라고베쉔스크)의 정세를 감시케하는 동시에 제 29연대가 로령지역(露領地域)의 자유시로 이동한 朴일리아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건을 말하는것이다. 손잡고 독립혁명을 하려고 쏘련에 건너간 독립군은 흑룡주 공산계렬의 오하묵과 싸할린의용대 박일리아지간의 군권쟁탈에 말려들어 참중한 희생자만 낸것이다. 이날의 무장충돌에서 싸할린의용대와 독립군부대는 전사자가 272명, 흑룡강을 건너오려고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가 31명, 행방불명이 250명, 포로된 자 917명이였다.    한데 <<자유시사변>>이 있은지 두달만인 8월 26일에 또 <<당벽진사변>>이 발생해서 김좌진은 전혀 예산못했던 혹심한 타격을 받았다.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여 독립군들이 로씨야로 건너갈 때 그와 가장 의기상투했던 동지자 총재였던 백포종사(白浦宗師) 서일(徐一)은 둔병제로써 전체독립군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당벽진에 남았다. (당벽진은 밀산남쪽 흥개호가의 중로변경에 있는 황량한 곳) 그런데 주력이 떠난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그날에 한무리의 토비들떼가 마치도 피에 굶주린 악마같이 급작스레 덮쳐들어 그곳에서 농사짖고있던 독립군을 전부 살해하여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이다. 너무도 참혹한 훼멸이였다!    이틑날. 서일은 시교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가 데리고있던 청년병사들이 전부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는지라 비통하기 그지없은 절망끝에 이에 책임을 지고 대종사 라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허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백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믈고 길궁한데 인간가는 길이 어디메뇨!>>를 크게 읊조리고는 그만 자결하고만것이다.          그것은 “청보산패” 마적단이 한 짓이였다. 횡포하기 그지없는 그 토비무리는 그후 50여명이 따로 작당하여 북만의 동강(同江)근처에서 또 무고한 허저족 40명을 살해하는 <<고태자참>>까지 빚어냈다가 그해 즉 1923년 겨울에 허저족이 주도가 되어 조직된 “복수대”의 숙청에 들어 끝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토비를 류자(liuzi)라 하는데 그 토비무리서 세 번째 인물 즉 규률을 장악하는 수이샹(水香)이 진사해(陣四海)란 자였는데 <<자유시사변>>때 니항군청년과 함께 흑룡강에 뛰여들어 표류하다가 허저인의 손에 간신히 구원된 북로군전사 정민호(鄭敏鎬)가 그자는 바로 <<당변진참안>>을 주도한 자였다는 것을 알고는 6년간의 끈질긴 추격끝네 끝끝내 통쾌하게 잡아치워 복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동강의 허저인 나쟈로인한테서 이 사실을 알고는 사료들을 모아 연구하여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1998년도에 <<연변문학>>에 절반까지 련재되였다가 지난해 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온정한 책으로 묶이여 세상에 나온것이다. 장편소설인데 책명은  <<관동의 밤>>이다.  리해를 돕기위해 소설가 최국철이 쓴 소개의 글을 올린다.         “김송죽의 두번째 장편소설《관동의 밤>이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688 쪽에 87만자에  달하는 이 장편소설은  력사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소설은 ‘9.18’사변후 항일의용군의 항일과 토비들의 항일을 다루고있는데 민족청년 정민호를 주인공으로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스토리가 굴곡적이다. 특히 허저(인)족의 풍속과 토비들의 생활은 허구가 아닌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 타민족 문화를 접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특정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는 우리 민족의 반일, 항일 력사를 다른 측면에서 알수 있다.“ /연변일보   나는 30년 넘어 전문 북만토비를 연구하면서 그에 대한 론문도 쓴 사람이다. 한데 량환준은 사실을 외곡하면서 한심한 날조로 독립군을 모독하니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화요파의 “거물”이였고 로당원이였다는 사람이 그래 그러는 것이 직책이였단말인가? 아무리 남을 잡아먹어도 분수있지. 공산당원의 본분이 이러는거야 아니지?        항일무장부대로서의 북로군정서는 건립되여서부터 백성들에게서 걷어들이는 군자금에 이뢰한것만은 사실이다. 지어는 조선에 까지 가서 군자금모집을 하다가 모집자가 희생된 이들도 있는것이다. 한데 내가 여기서 똑똑히 알려주고싶은건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선것은 그때 만주에 거주했던 30만에 이르는 대종교도들이였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각지의 시교당이 책임지고있었다. 제일 숨이 가빳을 때는 “청산리전쟁”직전 무기살 돈을 장만하는 한편 로령을 넘나들며 서둘렀을 때였다. 그후에는 차츰 적어지다가 아예 거둬치우고 자급자족했다.    량환준은 이런 사실을 알기나했는가? 북로군정서가 세운 신민부가 “군자금”을 거두면서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는데 대체 어느 백성들을 그토록 못살게굴었단말인가? 하다면  독립군은 어떻게 북만에 발을 붙이고 생존했겠는가? 아래에 한국의 력사학가 박영석(朴永錫)선생의 글 인용문과 나의 글을 간단히 실으니 읽어보면 아마 판단이 생기리라 본다.    “북로군정서는 在滿韓人社會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가장 큰 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였다. 더구나 이 북로군정서는 檀君을 중심으로 한 救國宗敎團體일 뿐만아니라 大倧敎 救國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로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이 된 단체인 동시에 民族軍隊의 性格을 띤 强力한 獨立軍部隊였다.” 〔大倧敎의民族意識과 獨立運動〕『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1988, pp. 155~183.        1.   “둔병전”을 하자면 토지가 있어야하는데 돈이 없지 땅을 어떻게 구한단말인가?“    김좌진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에서는 조선동포들은 물론 중국백성들까지 모르는 이라고는 별반없었다. 그같이 청산리투쟁에서 혁혁한 위훈을 떨치였던 이 독립군장령은 아직 그 위망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이같이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지방당국과 교섭하여 되도록 관계를 좋게하려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이국땅에 발을 붙이자고 보니 그렇게 해야지 달리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산시(山市)에 아직 미개간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친히 나서서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주요한 둔병지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앞의 2헥타르되는 밭에 장태콩을 심어먹기 위해 성이 마씨(馬氏)인 지주한테서 사고는 임자없는 습지판에 물도랑을 빼고 98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황지촌에 있는 얼마가량의 땅도 먼저 몇해간 부쳐먹다가 땅세를 적당히 물기로 지방관부와 협상했고 녕안의 땅 얼마가량도 그런 방법으로 차지했다.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끝에 사전자(沙田子)에도 수한전합해 5헥타르있게됐고 고령자, 석두하자, 백모자, 해림 등 여러곳들에 논과 천수답들이 얼마간씩 다 있게되였다.    한편 신민부는 무장인원을 내놓고는 이젠 나이 많고 잔약하거나 남정북전에 고생많이했고 몹시 피로해진 900여명 독립군들을 <<재향군인>>이라 이름을  짓고 안착해서 농사짓게 했다.    공농제(公農制)의 실시를 위해 이런 <<재향군인>>들은 붙임땅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원도 많고 적게 나뉘여졌는데 그네들은 자기가 간 곳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렇지만 조직성과 규률성만은 의연했는바 유사시에 손에 무장만 잡고 나서면 여전히 당당한 전투원이였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軍區制),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자기관할내의 18세이상 40세이하의 청년과 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계획있게 시켜서 장차 맞이할 항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려 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정예군인양성을 목적해서 목릉현경내에 있는 소수분(지금의 綏陽), 팔리평(八里坪)골안에다 사관학교를 세웠다. .....둔덕에 묘하게도 흡사 비행장같은 널다란 공지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공지의 서북쪽끝머리에 자그마한 삼각산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고려옛성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즉 사관학교는 고려옛성의 동쪽에 위치한 셈이다. 하여 이름을 성동사관학교라 지어부르게 된것이다.    성동사관학교는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취임하여 련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해 그후 500여명의 사관생을 길러냈다.    신민부는 발족하면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각계각층이 모여서 다만 항일과 자주와 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 뭉쳐 일제타도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적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순응 병진한다>>는 선언을 한바가 있었기에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일제는 신민부의 일거일동에 주목했고 간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노리였던거다. 지어 주요간부의 목에 거액의 현상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로 잠입, 암해음모를 획책하고있었기 때문에 령수급인물들은 주위의 경계를 특별히 심하게  해야했었다.    김좌진은 고정지점이 거의 없다싶이 지냈다.                2.    그런데 인제는 당지의 중국군경이 독립운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해 1925년 11월하순 어느날 밤, 신민부의 보안대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있는 류운초(柳雲樵)의 집에서 보안대 대장 문동봉을 비롯한 림강(林崗), 리강훈(李康勳) 등 젊은 대원 8명이 회의를 하다가 녕안군경 수십명의 돌연습격을 받아 모두 체포되여 녕안감옥에 갇히우고말았다. 다행히 권총 몇자루만 압수당하고 기밀문건들은 류운초부인이 감쪽같이 뒷문으로 빼돌리였다.    할빈일본령사관에서는 체포된 독립투사들을 매수하려고 온갖책동을 다했다. 그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볼장은 다 보는지라 신민부측에서는 자기의 사람을 빼내오기 위해서 박남파(朴南坡)와 조성환을 내놓아 주구배의 무고만 믿고 남의 나라 독립투사를 함부로 가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중국 중앙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게 했다. 했지만 허사였다.    어리석은 중국관료는 언론계의 항의와 비난을 받고서야 6개월만에 강금했던 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갑수(申甲洙)와 박순보(朴順甫) 두 청년은 병에 걸려 억울하게 옥사하고말았다.    이무렵 김좌진의 가정은 녕안에 있었는데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있는 처 오씨의 궁색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근본 집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보니 오씨는 헝겊신을 지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형편이였다. 너무도 곱게 자라난 량반의 딸이 그렇게 살아가노라니 오죽 지겨웠으랴. 게다가 딸 옥남(玉南)이마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있으니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것이 보기가 너무 안되여 그래도 권화산(權華山)로인이 가끔 들릴때마다 얼마간씩 돈을 주어 돕군 했다.    어느날 감옥을 나온 24살의 리강훈이 중국사람 4명을 고용하여 담가로 옥남이를 메여다 목단강역 부근 동포부락에 있는 김좌진한테로 가져와 로씨야인의 병원에서 병을 보이게끔하려 했다. 그의 행실이 기특해서 모두 칭찬했고 오석 김혁은 그의 호를 청뢰(靑雷)라 지어주기까지 했다. 옥남이는 이틑날 죽고말았다.    ..........    <<남아의 한번 실수에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나 나는 다른 날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글귀를 고국땅에 남겨놓고 훌쩍 떠나왔던 김좌진이였다. 그가 늙은이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온지 어언 10년철, 언제면 고향땅을 다시 밟겠는지 앞길이 묘연했다. 부인 오씨는 전해에 딸 옥남이가 죽자 조선 고향에 돌아간 후론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필경은 고생이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좌진은 홀아비로 살아가게 됐다.    김좌진에게는 만주로 들어오기전에 계동의 김계월을 만나 그한테서 본 서자 하나와 아우인 시정 김동진(時旌 金東鎭)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문한(文漢)이가 지금 조선 안성읍내(安城邑內)의 외조모집에 있을 뿐 더는 없다. 본처 오숙근이 만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집간도 없어서 70고령의 어머님을 지금 석두하자에 있는 동생에게 맡겨 모시고있다. 이런 형편에 <<8로>>들은 일곱번이나 편지를 해 오숙근더러 북만에 들어와 살림살이를 다시 하라고 권유했건만 헛수고였다. 본인이 한사코 들어오지 않으려는데야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모면키 어려운 액운과 요사가 빈번한데 대를 이어줄 자식 하나라도 더 보게 해야 할게 아니냐 하는것이 장로들의 생각이였다. 그래서 수차의 의논 끝에 여기서 맞춤한 색시감을 구해 백야를 재혼시키자는 것으로 의견이 둥글어졌는데 때마침 림정의 만주대표였던 김대지(金大池)도 해림에 왔다가 이 일을 알게 되어 후일은 자기가 책임지마고 하면서 이를 동의했던 것이다.        3.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는 멀지 않은 대안이 우리의 심령속에 있나니 성품을 수양하고 닦으라. 인간의 암흑을 깨뜨려버리고 리상의 경지에 이를것이니 단군의 후손들은 의지와 행동을 한데 이으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어서 널리 배포했다.    한편 일제는 만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일제는 전해(1925년)의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三矢)를 시켜 봉청성 경찰청장 우진(于珍)을 매수해 이른바 <<미쯔야협정>>이라는것을 맺게했다. 그것은 중국관헌이 조선반일운동자를 체포하여 일본경찰관에 인도할것과 조선인반일단체의 해산, 무기몰수, 호상간의 정보교환 등을 규정한 비밀협정이였다.    이무렵 동삼성은 물론 중국전지역에 걸쳐 독립운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가고있었다.    이런판에 1926년 4월에 들어와서 항일단체인 신민부는 경을 치르었다. 일본의 할빈령사관에서 김일성(金一星)이와 강경애(姜敬愛)가 써서 <<신민보>>에 낸 글이 반일적이라고 트집잡고 흑륭진(黑隆鎭)에 있던 신민부의 기관보를 돌연습격하여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黙)과 경사국장 리광진(李光鎭)을 체포해갔다. 그리하여 전해에 창간호를 낸 이래 동포계몽과 구국교양을 활발히 해오던 이 신문은 창간 한돐만에 활동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경애는 소설을 쓰는 녀 초학자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리고 김일성(본명은 김봉환)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사람이였다. 그들은 동거했다.        이때는 공산주의계렬의 내부도 자못 복잡했다.    1919년 9월 5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철훈을 의장으로 하는 전로한인공산당(全俄韓人共産黨)(후에는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개칭)이 건립되였다. 이 당은 차츰 요하, 녕고탑, 돈화 등지에 당조직을 내오고 당원을 적극발전시키였다. 그러면서 연해주에서 <<선봉>>, <<동아공산신문>>, <<신세계>>, <<적기(赤旗)>>, <<로동세계>> 등의 신문, 잡지와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만주 각지에 광범히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는 1925년 4월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만주에다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만주총국(朝鮮共産靑年會滿洲總局)을 설립하고 그아래에다 북만, 동만, 남만 3개 구역국(局)을 두어 농민들을 조직하고 청년들을 령도하며 민족주의단체들을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울 임무를 주었다. 그해 조선공산당북만구역국(朝鮮共産黨北滿區域局)의 령도밑에 녕안일대에는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와 중서청년련맹(中西靑年聯盟)이 결성되여 자체로 <<로력청년(勞力靑年)>>간행물까지 꾸리였다.    다른 한편 1921년 1월에 조직되였던 서울청년회계통의 한 종파집단으로서 주로 화요파와 대립되였던 서울파가 다시 신 구 량파로 갈라진 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이해(1926년)에 만주로 밀려들어와 그 전해에 일본 도꾜에서 조직된 초기 맑스ㅡ레닌주의사상단체였던 일월회파 및 만주총국과 결탁하여 4월에 레닌주의자련맹(列寧主義者聯盟)이라는 그루빠를 만들고 자칭 엠엘파라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엠엘파를 반대하기 위하여 서울구파와 상해파가 협력하여 서상파를 만들어냈다.    한즉 만주의 공산진영 역시 여러 종파집단으로 하여 사분오렬되여있었다.    대동단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5월에 중동로연선의 여러 청년단체들은 대표를 아성현(阿城縣)에 보내여 그곳에서 대표련석회의를 열어 북만조선인청년총련맹(北滿朝鮮人靑年總聯盟)을 설립하고 <<농군(農軍)>>이란 간행물을 꾸리여 각지의 청년들에게 무산계급리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이들도 자기의 조직을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년들을 조직하여 야학교를 꾸리고 운동회를 열고 문예공연을 하는 등 형식으로 군중들에게 반제, 반봉건의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청년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혁명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즈음에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끌려갔던 김봉환이 얼마지나지 않아 무사히 풀려나온것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에 갇혔던 독립군이 그가 할빈일본령사관의 고등경찰 마쯔시마와 조용히 마주앉아 담화하는것을 보고 소식을 밖에 내보내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자식이 왜 무사히 나왔어?>>    <<그자식이 자수하고 풀려나온거나 아니여?>>    모두들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김좌진역시 그에 대해 의문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김혁, 정신 등을 비롯한 여러 수뇌들과 함께 신민부의 사업을 계속 한걸음도 처지지 않겠끔 하려했다.                                 (장편전기 <<설한>> 193~196페지. 흑룡강인민출판사)                                                    2010. 1. 24.                   리광인선생의 글에 답함                                                        김송죽    리광인선생, 선의적인 글을 보낸다니 우선 감사합니다.    한데 반론은 해야겠습니다. 나는 나이 70을 먹도록 남과 싸움한번 하지 않다가 몇해전에 내가 50여년간 살던 고장을 떠나면서 딱 한번 남을 때려봤습니다. 눈에 피지고 얼굴반쪽이 시퍼렇게 되게. 8.15해방직후, 나는 토비숙청을 나간 아버지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되자 그의 소속부대에서 자란건데 안옥균이라는 군인분이 나어린 나에게 근 3년간이나 가혹할지경 대적훈련과 사살훈련을 시키면서 참을 \"忍\"자를 배워주었던 겁니다. 죽을 고비에 들기전에는 절대 손을 쓰지 말거라, 재간믿고 손을 쓰다간 불행을 자초하리라고 단단히 일렀던겁니다. 그래 \"문화혁명\"때에 나는 매맞고 짓몰리면서도 맹세대로 용케 참은건데 장×선생만은 가냥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 일기책과 장편소설원고를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고 없애버렸거니와 내가 그 고장을 떠날 때 까지도 한마디의 사과의 말도 없이 되려 뻔뻔스레 자기는 내한테 미안한 일을 한적이 없다면서 싼좡(算帳)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래 내 손맛을 보였던겁니다.        이만하면 나도 광인선생처럼 \"삼사후행(三思後行)\"을 아는 셈이 되겠죠? 한데 이번일에는 \"忍\"을 집어치우기로했습니다. 늘그막에 웃긴다고 짓몰릴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리선생은 내가 \"김좌진의 딸이라는 분한테 들은 얘기고, 전 광복회 이광훈회장의 견해니 그럴수밖에 없겠지요\"하는데 그건 틀리는 소립니다. 광인선생은 내가 그리도 제 주견없이 \"남의 견해\"에 노는사람같아보입니까? 나는 김강석누님의 \"告訴\"를 듣고는 김좌진전을 쓸 생각을 굳힌거고 그한테서 자료들을 많이 얻었다고했습니다. 리을규가 쓴 <<시야 김종진전>>도 그가 내놓은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옛 <<동아일보>> 어장도. 이광훈의 글은 <<설한>>이 출판된지 4년지나 서일의 손자가 제 할아버지의 전기도 써달라면서 빌려준겁니다. 그런데 강경애에 대해서 내가 쓴것이 아광훈선생이 쓴것과 맞아떨어지라 나는 내가 틀리게 쓴게 아니였음을 긍정하게 된거고 리을규도, 이광훈도 다가 그 시대사람, 그당시 목격자였의니 그 누구보다도 신빙성이 있다고 확고히 단언하게 된겁니다. 이렇게 하는게 그래 잘못입니까? 바꿔놓고 광인선생이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할가요?    광인선생은 \"어느한 력사인물, 어느한 력사사건에 대하여 흥취를 가지면 그 인물,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자료들을 다 들여다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맞는말이지요. 리선생은 그래 내가 그만한 상식도 모르고 력사인물전기를 쓴 줄로 압니까?    \"깊은 연구를 하지 않으며 여기저기서 베껴내고 자기의 연구성과처럼 자처하다가는 골탕을 먹게\"된다는데 리선생의, 그건 대체 무슨말입니까? 나를 글도적놈으로  도적놈을 몰아붙이자는건가? 리선생은 력사인물전기가 어떻게 씌여지는지를 알기나하고 그런소립니까? 그렇게 몰아붙여도 좋지만 우리의 이 론전이나 끝난다음에 손쓰기 바랍니다. 방향을 돌려버리려고는 말고.    이건 론문도 소설도 아닙니다. 주인공과 유관되는 자료들, 여기저기에서 모이는 자료들이 없이 제 주관대로 쓰면 안됩니다. 인물전기를 창작으로 여기고 달려든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만다는걸 리선생은 알기나하고그럽니까?  전기를 쓰는데 그것이 어쩌면 \"연구성과처럼 자처\"하는게 됩니까? 내가 김좌진전기를 씀에 틀린것이 있다면 꼬집어내서 어디 골탕을 먹여보시구려! 나도 선의적인 충고를 한마디 하겠습니다. 리선생은 지금이라도 문학공부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리선생의 눈에는 내가 앞뒤를 모르고하는 좌충우돌하는 인간같아보이는 모양인데 어디 내가 \"당하게\"끔 맘대로 들이쳐보구려. 나는 광인선생의 능력을 볼텝니다. 제발 方向轉移는 말고.    <<설한>> 281페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으로 달려가 그곳 역전근처에 있는 지난해 이미 해산을 선고받고서도 종파활동을 중지하지 않고있는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한 잔존기관(화요파)을 돌연습격하여 김봉환 일명 김일성(金一星)외 한명을 잡음과 동시에 문건을 압수했다.    그 압수해낸 문건에서 예측한바와 같이 이번의 흉계는 그네들이 꾸미였고 권총을 직접 쏜 흉수 박상실은 김봉환의 사주를 받아서 한짓이라는것이 밝혀졌다.\"     광인선생의 생각에는 그네들이라는게 누구를 가리킨것 같습니까?        리선생은 내가 댓글에 \"진실\"이라는 아이디글이 나타나니 뛰고있다고 나무리는데 그래 아닌 \"진실\"도 받아주고 공개적인 멸시와 무함도 죽치고 받아주라는 말입니까? 그렇게는 못하겠는걸. 남이 나를 돌로 치면 나도 돌로 받아쳐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실례되는게 아니겠지?    리광인선생의 글과 장춘식선생의 글을 나오는건 다 읽어봤습니다.    나는 나를 설득시키고 굴복시킬만한 글이 나오기를 바람니다.    리선생은 \"진실님의 댓글을 보면 박식하고 력사지식이 대단히 풍부하고 김좌진장군암살전후를 잘알고있는 분으로\" 알려진다고 했지? 참 알다가도 모를일입니다. 아무렴 리선생의 수평이 그정도란 말입니까? 나는 그 댓글을 보고 그가 어떤 분인지 력사지식이 형편없고 김좌진의 암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사람으로 박에 보이지 않다군요.    공도진이 리복림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박상실이 바로 공도진이라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라했습니다. 공도진이 박상실이라면 믿을수 있는 근거를 내놓으시오. 내놓라했습니다. 억지로 꾸미지는 말고.        강경애의 력사를 다시쓰고 연구도 다시해야합니다. <<신민보>>사건에 김일성(金一星)과 강영애(姜敬愛)가 련루되니 강경애는 19살아니면 20살 때 북만으로 들어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1925년이 아니면 1926년이 된다는 말이지요. 딱 두만강을 건너 용정에 들리여야만이 증거로 되는겁니까? 압록강을 건너 들어왔을수도 있지요. 김좌진도 로인처럼 가장해갖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던겁니다. 강경애가 그때는 소설을 쓰노라고 한 초학자였습니다. 그러하니 그의 초기의 글 한두편을 갖고 고증한다는건 믿기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문인으로 되기에 이르는 기간의 작품을 보면 확실히 반일정서가 맥을 이루는데 그것은 그가 일찍부터 홍색의 짐보사상과 접촉했다는 증거로 됩니다. 조공만주총국의 젊은 화요파성원이였던 김일성(김봉환)과 동거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사상에 물든 것으로 여겨지게된다는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리선생은요? 당시의 환경이 그를 무산계급켠에 서는 작가가로 성장하게끔 만들었다는 겁니다. 후에 시집을 가서 남편이 된 장하일리 그녀를 성장시킨것이 아니라 장하일이 되려 제 처한테서 사상을 배우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내 분석이 이러합니다. <<신민보사건>>을 일으킨걸 보시오. 그녀나 김보환(金一星)이나 보시오, 얼마나 대담하게 반일선전을 했습니까.    강경애의 도만(度滿)이 1931년이였다는 설은 전혀 밑을수 없는겁니다. 보편적으로 가장 오랜전부터 믿어왔던 김헌순의 주장마저도 이제는 부정하게 되는데 뚜렸한 근거도 없이 몇편글로 추리해낸걸 어떻게 믿을수 있단말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반론을 쓴거니 더 말치않겠습니다.    우리는 되려 리을규선생에게 강경애를 다시금 연구하게 해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그의 령전에라도.         리선생은 나더러 \"다시다시 력사공부를 진진하게 하면서 잘 검토해보라\"는데 력사공부를 하면 이이상 어떻게 더 진진하게 하랍니까. 나더러 량환준선생의 회고담이나 증언을 믿어야한다는 강박은 아니겠지? \"그때는 내가 공도진에게서 잘못들엇는지 모르겠다\"는 따위의 얼빤한 소리나하고 생판 꾸며낸 거짓말들을 어떻게 믿으란말입니까? 리선생님이나 곱다랗게 믿고 우겨보시오. 나는 그러지 않을텝니다. 내가 조선공산당이였던 사람을 싸잡아 다 모욕한다고는 여기지 마십시오. 나는 앞글에서 다 말했습니다. 중국공산당에 들어 항일을 하다가 희생한 렬사나 지사들은 저도 존중합니다. 저는 렬사의 자식이기에 혁명에 피흘렸다면 각별한 정감이 드는겁니다. 그러니 저를 無智覺한 사람으로는 보지 마시오. 그러나 화요파였다면 나는 그 사람을 달리봅니다. 편견이 아닙니다. 그들의 지난 행실ㅡ력사가 나를 이토록 만든겁니다. 바탕이 검은걸 어떻게 희게보랍니까? 어떻게 동정하랍니까? 이러면 나를 너무지독하게 무정한 인간으로 보겠지만 나는 원쑤일제가 반간책을 쓴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원쑤의 속을 후런히 풀어준, 그래서 미런한 짓을 했다는 화요파는 민족과 력사앞에는 죄인이라고 보는겁니다. 아무리생각해도 잘 볼수는 없습니다. 조선공산당을 부인한다하여 중국조선족의 피어린 력사,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무시한다고는 보지 마시오. 그런건 아닙니다.        나는 지금도 의연히 김좌진암살설에 들어가서는 그당시 목격자들의 공술이 신빙성이 더있다고 여기길래 이광훈을 거듭언급한거지 까닭없이 올리추는건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래 량환준의 증명이 맞다고 우기는것은 대체 뭡니까? 그건 올리추는게 아닙니까?    잘못된 력사는 고쳐야 합니다. 거짓말로 백성을 그냥 속이고 후대를 속여서는 안됩니다. 례를 들것 같으면 지난때 중앙쏘베트구역 5차의 반\"토벌\"력사를 보면 제 1,2,3차 반\"토벌\"은 모택동의 지휘로 승리를 취득하였다말하고 제 5차 반\"토벌\"은 공산국제로부터 온 리덕이 지휘하여 엄중한 실패를 했다면서 제4차 반\"토벌\"은 누가 지휘했다는 말이 없이 그저 모택동의 정확한 군사사상의 영향으로 승리를 취득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당시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4차 반\"토벌\"은 1932년말부터 1933년 기간이였는데 그때 모택동은 이미 쏘베트구역중앙령도회의에서 틀리게 홍1방면군지휘의 직무를 철소하였기에 홍군을 떠나 지방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다시는 모택동이 지휘했다고 말하지 말아야한다고 합니다.    제4차 반\"토벌\"에 대해서 소극장군이 명확하게 말한것입니다.    \"제4차 반‘토벌’은 주은래, 주덕이 지휘하여 많은 승리를 취득한 것이다. 이는 진실한 력사인 것이다. 여실히 말하여 력사의 진면모를 회복시켜야한다.\"    옳은 말이지요. 력사는 진짜말을 해야지요. 연구계에서는 지금 중공의 력사도 다시써야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가는데 그래 그러면 반당이 되는겁니까?       나는 조선공산당이 원쑤로 보고 제일증오한 민족주의자 김좌진장군죽음은 억울하다면서 집단적인 살해를 회책한 화요파를 성토했고 그들을 죄인으로 규탄하고 나섯습니다. 그래 그러니 내가 반당이 되는겁니까? 반동으로 되는겁니까? 반동으로 몰던 반당으로 몰던 몰겠거던 어디 몰아보지요. 그래도 나는 할말은 해야겠습니다. 이쯤한건 각오했으니까.    1993년7월초 흑룡강 해림에서 중앙의 참석하에 열었던 <<中國朝鮮族歷史學會金佐鎭將軍硏討會>>는 4일간의 변론 끝에 화요파가 “김좌진을 살해한것은 잘못한 일이다. 김좌진은 독립투사고 항일영웅”이라고 결론내렸고 그를 평판(評判)했습니다. 지금와서 어떤 사람은 그 평판을 뒤집자고드는데 어리석은 일입니다.    리광인선생, 충고가 선의적이라니 감사합니다. 력사공부를 부지런히 해야지요.                                                                       2010. 1. 26.
4    [re] 물음에 답합니다 댓글:  조회:3890  추천:21  2010-01-21
물음에 답합니다    이광훈선생이 쓴 책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에서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란 글에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해림(海林)에 있는 김(金)의 애인 강경애(姜慶愛)를 꾀어 할빈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돼 있는 김을 면회(面會)케하여 결국 김봉환(金鳳煥), 강경애(姜慶愛), 송도(松島) 3자(者)가 밀회(密會)를 나눈 뒤 즉석에서 김봉환이 석방되였다.”    내가 쓴 <<설한>>에는 내용이 기본상 같으나 웃글과 꼭같지는 않습니다.    “김봉환은 본래 통도사(通度寺)의 중으로서 일찍이 김성숙(김성숙, 림정국무위원)과 함께 북경에서 공산당에 들었는데 입당후 임무를 맡고 북만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애인인 강경애와 같이 해림에 있으면서 독립군과 잘 어울려 한때 인간적으로 좋은 인물로 평을 받은 자다. 그런자가 <<신민보>>사건으로 할빈의 일본령사관원에게 체포되였던거고 마쯔모도의 흉계에 넘어가 량심을 바꿔넣고 풀려나온것이다.”     이광훈선생의 글에서는 강경애의 성명을 한자로 밝혔지만 저의 글에는 한자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쓰는 걸 별로 개의치 않았으니까요. 그랬다고 문제시될거야 없겠지요? 나는 그 시대의 만주땅에 들어와 활약한 녀문인으로는 강경애 한사람뿐인줄로 알거니와 동성동명의 녀문인은 없은걸로 압니다. 리광훈선생이 조선이름자 강경애를 한자로 응당 姜敬愛라 써야할 것을 姜慶愛라 썼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강경애의 경자가 본래 한자로 慶이였던지. 아무튼 敬이나 慶이나 발음이 꼭 같으니까 쓰는이가 그것을 혼동하고 잘못쓰는 경우야 흔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큰 문제로 될수야 없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에서 문제로 삼자고 꼬집고들면야 공연한 시끄러움으로 번질수는 있겠지만.    다시언급하려는건 30년대의 녀문인 강경애는 한사람이였다는 겁니다. 김좌진장군이 암살된 후 연변의 장하일이 동성동명의 녀인을 안해로 삼은적이 없습니다. 이 점은 선생도 잘아실겁니다.    다시론해볼 가치있다면 제기해보시오.      북경  김송죽  1010. 1. 18. >> [ 김송죽 ] 님의 글 > > >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   > > 김송죽> > > >     꼭 해답하기 바란다.>    <<강경애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수 없다.>> >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    나의 두 문장이 련이어 싸이트에 오르니 반응이 인차 생겼다. 이미 짐작한바였고 바라는바였다. 나는 나의 이 두 문장이 문학계뿐만아니라 온 연변땅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것을 알고있다. 당연한 일이다. 물의를 일으켜야 한다! 일으켜도 크게 일으켜야 한다! 이것도 내가 바라는것이다! > >    우선 내 자신이 접수하지 않을 수 없는것은 강경애의 문학비를 세운 일도 몰랐거니와 강경애원상복구한 일도 인제야 알게되였으니 내가 너무나 “정보에 무관”했다는 지적이다. 나는 확실히 그러했다. 이게 몇핸가? 그 기간에 뭘하고있다가 뚱딴지같이 이제야 튀여나와서 이러는가 할 것이요, 다 안정된 평온을 뒤흔든다고 할 것이요, 소란을 피우다고 할 것이다. > > 하지만 이건 내가 고의적으로 이날을 기다려온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기바란다. 하기에 나는 나의 첫문장의 첫머리에 그 원인을 명백히 밝혔던것이다. 변명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뭔가. 만약 10여년전 그 당시에 정녕 알았더라면 나는 골이 터지더라도 나서서 “강경애문학비”를 못세우게 견결히 막았을 것이다.    한데 내가 “정보에 무관”한 사람이라는 그 리유로 강경애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하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백년이 지났다해도 운운할 일은 운운해야한다. 당신들이 연변땅에다 “강영애문학비”를 세우지 않는다해도 그녀의 “친일행각”, “살인공모죄”는 아무 때건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 > 나는 이 일을 언녕 문학계에 반영하리라 작심했지만 너무 미룬것이 잘못이다. 나는 내가 쓴 김좌진전 <<설한>>을 문학평론가 최삼용선생께도, 이미 작고한 연변대학의 정판룡선생과 권철선생 두분께도 증송했으니 연변에서는 어느 정도 알게되였으리라 믿은것도 있은것이다. > >    나의 두 번 째문장을 읽어본 분이 “한국 광복회장의 이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고 하는데 당신이 운운하는 알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묻노니, 그래 당신은 그의 저작을 대체 몇권이나 읽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학자라면 독서에 무관하지는 않았을 텐데.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는데 나는 당신의 그 말이  무리하기 짝이 없다고 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독립투사였고 당당한 력사학가인 이광훈선생을 너무나 하찮게 보고 고의적으로 비방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졸열한 행위로 밖에 되지 않는다. 좀 성근하고 자중하는게 좋겠다.        한국 광복회 회장 李康勳先生이 력사의 흐름과 대사건에 “관건적인 족적”을 남길만한 인물은 아니였다는데는 그것이 그래 그가 쓴 저작을 믿을수 없는 리유로 된단말인가?  그가 당신이 말하는 이른바 “관건적인 족적”은 남기지 않았어도 그 당시 신민부의 간부였고 김좌진장군의 장례문제를 토의하느라 만주 유지 95명이 모였을 때도 참석하여 토론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사건당시 그곳에 있은것이다. 이광훈은 자기의 회억록에다 “강영애는 김봉환의 동거녀”였다고 밝혔거니와 “백야 김좌진장군 교사공범”이라고 딱 찍어 말했다. 그의 회고록뿐만이 아니였다. 김좌진장군의 재종제 시야 김종진의 “전기”에다도 그같이  밝히였다. 그 전기는 김종진과 함께 김좌진을 찾아와 그를 설득시켜 원래의 新民部를 韓族總聯合會로 개조케 한 무정부주의자 李乙奎(본명 金明源)가 쓴 것이다. 나는 그 전기를 의거(依據)로 삼은것이다. 그는 山市站 韓人學校에 普通通信處를 세우고 김장군의 장례를 주관하기도했다. 이광훈과 같이있은 증거다. 당신들이 말하는 “관건적인 종적”을 남길만한 사람이란 표준이 대체 무엇인가? 이런 사람이 쓴 글도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리해를 돕기위해 두분의 상황을 알린다.   ◎ 李康勳: 大統領表彰 駐中日公使暗殺 ◎ 李乙奎: 大同團事件으로 四二九六年三月一日. 建國功勞大統領表彰受賞    나는 당신들은 똑똑한 근거도 없어갖고 제멋대로 억측한다고 본다.    (1) 김좌진전이 한쪽세간의 풍설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이라고?    (2) 분분한 소문의 한갈래를 받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3) 그것을 주장하느라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실을 외곡한다고?    (4) 그런식으로 력사학자도 아니면서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고?      좋다! 그럼 내가 그래 굳이 당신들이 금고봉처럼 여기면서 내세우는 그 80년대초엽까지 연변에서 살아계시면서 연변교육출판사 사장을 지낸 화요파 거물급인물 량환준선생의 ”증명“도 꼭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묻노니, 당신들이 내놓은 말처럼 그가 대체 어떤 ”관건적인 족적“을 남겼는지 대답해보라! 당신들은 지금 내앞에서 궤변을 부리고있으니 어처구니없다. 당신들은 량환준이 ”김좌진장군을 직접 사살한 사건의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또 친하게 지냈던 산증인“이라면서 량환준선생이 공도진(이봉림)께서 직접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봉림이 김좌진을 죽이였다는 증거는 뭔가 그것을 내놔라. 량환준이 그한테서 직접 들었다해도 전혀 믿을 수 없다. 과연 리봉림이 ”딱친구” 량환준에게 김좌진을 죽인게 자기였다고 말했다면 리봉림은 알짜  나발을 불기 좋아하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리복림이 정말 그런 거짓말을 했을가? 그럴리없다. 구천에 간 항일투사를 그런식으로 증명인으로 내세우지 말라. 그를 살인흉수로 만드는것으로밖에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한심한 모독이다.     “모두 짜고들어 몰아붙이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그때는 내가 공도진에게 잘못들었던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번복하기도했다”는 사람의 말을 곧이듣는 당신들이야말로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공산당원이면 의지가 대개 굳은줄로 아는데 필경 로당원이였을 “거물급”인물이 태도가 그렇게 애매했다니 리해가 되지 않는다. 안그런가? 적에게 고문당했으면 몰라도 동지들이 몰아붙인다해서 그가 그런 애매한 소리를 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런 사람의 증명을 다 믿는단말인가? 량환준선생도 남에게서 들은 소리를 옮긴것이지 목격자는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사람을 증명으로 내세우는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피우는거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있는게 아닌가?      “더욱 주요한 증인은 흑룡강성 화천현 위생국장을 담당한적 있었던 항일투사 량재문도 리복림의 밑에서 교통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김좌진은 리복림에 의해 사살사실을 잘 알고있었고 력사학자들이 량재문을 방문하여 취재할 때 이와같은 사실을 증명한바있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는 나도들었다. 나는 그곳서 50여년간을 살다가 북경에 온지 이제 몇 해 안된다. 나는 그분한테서 들은게 아니라 떠도는 소문을 들은것이다. 아마 어느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겠지. 하기에 나는 일부러 할빈에 계시는 성당사연구소 소장 김우종교수를 찾아가 당사연구실에서 그와 김좌진 피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바있다. 김우종교수도 꼭같은 풍문을 들었다면서 리봉림이 바로 공도진이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 >    당신들은 나보고 리복림에 대해서는 어느만큼이나 료해하고있느냐고  질문하는데 까놓고말해서 나는 사료들을 보고 당신들이 알고있는것 만큼이나 알았지 리복림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연구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째도 김좌진암살을 직접 획책한 자는 강경애동거인 화요파 김봉환(일명 金一星)이였지 리봉림이 될 수 없음이 명명백백 했으니까.    그 당시의 <<동아일보>>에 공개된 “新民府首領 金佐鎭被殺說 해림에서 청년에게 사격돼 事實眞假는 尙未判”이란 제목의 보도를 보라,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청년에게 사살을 당하였다.”했지 리봉림이라고도 공도진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신문 2월 3일자 <<동아일보>>의 “凶報를 確傳하는 白冶金佐鎭訃音”이라는 보도에도 보라. 김좌진을 암살한 흉수는 김일성(金一星)이라했지 다른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다. 왜서 그렇게 보도했겠는가? 리유는 바로 화요파 젊은이 김봉환(金一星)이 이 엄청난 흉계를 획책한것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래도 믿지 않을건가?    이듬해의 <<동아일보>>9월 11자 신문에는 “故金佐鎭氏下手人 朴相實에 死刑判決”이라는 보도를 실었다. 한것은 그가 바로 김봉환의 사주를 받고 직접 김좌진장군에게 총을 쏜 흉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래 그 당시 신문에 난 이러한 보도들도 믿지 말아야 한단말인가?     한즉 리복림이 김좌진을 “직접사살”했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고 뭔가? 한데도 지금까지도 얼빤한 증거를 내들고 침방울을 튕기니 력사지식이 내보다 많은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들의 글에 다른 하나의 표연한 구절, “리복림에 의해 사살된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어느정도 리유가 서는것 같지만 그도 당신들의 주장을 긍정해주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왜 리유가 서는것 같다고 하는가? 그것은 리복림이 그당시는 “화요파”사람이였고 활약자였던것만은 사실이였기 때문이다. 그 누가 김좌진을 암살했던지간에 다른 어느파가 아니고 바로 “화요파”가 꾸미고 저지른 집단적 행위였으니까말이다. 그때의 형편을 보면 “화요파사람”이라 하면 싸잡아 다 김좌진을 살해한 흉범으로 몰아치는 판이였다. 이것도 사실인 것이다.    해방후에 편찬한 <<海林縣誌>>를 보면 백야 김좌진장군은 1993년 7월초에 중앙에서 내려와 평판하기전까지 줄곧 “반동분자”로 락인되여 있었다. 그때는 나라의 정치형세가 그러했으니 그의 암살을 획책했던 “화요파”사람들은 그 누구나 다가 저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떳떳이, 지어는 흡사 대공이라도 세운것 처럼 여기고 자신을 표백했던것만은 사실이다. 과연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짓들이였다, “김좌진을 리봉림이 암살했다”는 명학한 증거도 없어갖고 무던히 오래 버티여냈으니!     “리연록 자신이 구국군에서 공작 할 때 김좌진을 살해했던 리복림을 직직접도와준 일을 이야기하였다.”고 하는데 절반은 믿을 수 있으나 절반은 믿을 수 없다. 리연록이 리복림을 도와줬을 수 있다. 도와줫겠지. 그러나 리연록이 김좌진을 리봉림이 직접살해했다고 말한건 아니지 않는가. 당신들 어디 말해보라, 리연록이 리봉림을 도와준 일이 어쩌면 문제의 증거로 된단말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엠엘파 지희겸 회고담 발표, “리복림이 김좌진을 죽이고 아성으로 도망쳐 온 것을 만났다고 증명”했다는데 그건 그가 그럴수 있다고 본다. 김좌진이 화요파의 손에 살해된 것을 알자 모험대장 고강산이 치를 떨면서 화요파를 싹 다 잡아치우겠다면서 눈에 쌍불켜고 펄 펄 날뛰였으니까. 화요파사람을 싸잡아 다 흉수로 락인했던 살벌한 세월이였다. 이런 형편에 리봉림은 아성으로 도망친 거고 지희겸은 “그가 김좌진을 죽였다”고 했을 수 있은것이다. 지희겸이 목격자는 아니지 않는가. > >    이광훈이 “공산주의자들이 대륙의 호랑이로 보고 제일 무서워하고 꺼리는 김좌진”이라고 한 것을 봐서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를 제일 미워한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그 전까지는 주의주장이 다름으로 하여 모순이 있어서 가끔 마찰은하지만 대방을 상해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김좌진의 사람들에게 납치되여 귀가 잘리우기도 하고....”는 그 후의 일인것이다.  전후의 일을 한데뒤섞지 말아야 한다.    이점은 김좌진이 당시 전만주의 독립혁명자들을 한데 묶어세 울 목적으로 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회를 내온 것만으로도 증명이 되는 것이다.“빌억먹을놈의 당파심!” 이는 그가 독립진영내의 분렬을 제일 싫어하고 분렬조작자들을 증오한 표현이다. 그가 시종 부르짖은것은 한데 뭉치고  단결하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견강한 항일투사였던 그가 살해된 후에는 “살인마귀”로 변하고말았다. 이 모든 것이 본성이 악렬하여 불렬활동을 “혁명”으로 여긴 화요파의 소행이였다! 하늘이 내려다보고있다. 그자들의 작간으로 오도된 력사가 김좌진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을,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제에게 빼앗긴 고국땅을 되찾자고 만주땅에 들어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피흘리며 싸워온 모든 독립군을 지금까지도 우습게 보면서 지어는 추악하고 흉악한 토비로까지 몰아붙이니 그야말로 격노발검(激怒拔劍)할 일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화요파”사람의 “증언”을 들고 맞서려드는 사람들은 듣거라, 오죽했으면 사전에 마저 화요파를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겠는가? 다시 한번 숙고하기 바란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 것 처럼 어거지를 부린다”고 하는데 그렇다, 나는 “력사학가”아니면서 제 주장을 뻗치고있다. 나는 력사를 알려고 열중해온 일개 소인글쟁이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외람되는 짓을 했다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교대한다. 나는 어느핸가 력사학회에서 <<중국조선족이 걸어온 력사발자취총서>>를 펴낼 때 과외편집작가로 초빙하니 그에 응하여 북만일판을 편력하면서 력사자료들을 수집했다. 성정부에서 떼여준 소개신을 들고 요하, 부금, 화천, 가목사, 심양 그리고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 등을 찾아가 뒤질만한 당안들은 다 뒤지였다. 그래서 유용한 자료들을 찾아내는 게 내 즐거움이였다. 제 돈을 팔아가면서 까지. 내가 이 말을 하면 당신들은 자식이 “력사학가”도 아닌게 주제넘는 짓을 했다고 할 것이다. 어느핸가 청명절기간에 모교에서 청하니 나는 900명 사생앞에서 꼬박 두시간 동북항일투쟁사를 강의한 적도 있다. 당신들은 력사학가도 교수도 아닌 주제에 “력사를 아는척”했구나 하고 웃을것이다. 나는 력사제재를 다루는 소설쟁이다. 그러니 자연히  력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방직후 “조선족인민들이 당의 령도밑에서 사문동, 마희산 등 토비무리들과 영용히 싸워이긴 피의 력사를 기록한 작품”을 써낸것이다. 먹물을 적게 먹어 지식이 얕다보니 초고를 써서 18년만인 1984년에 연변에서 출판한 나의 첫 장편소설이다. 당신들은 또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그런 글을 쓰니 그꼴이였지 하고 웃으리라 본다. 한데 나는 그 누구든 “력사학가”가 아니라도 얼마든 력사제재를 다루고 소설을 써낼수 있다는 신심이 골수에 박힌통에 력사학가인 당신들 앞에 비난의 대상이 된 모양이다. 나는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순전히 력사가 맥을 이룬 두 번째의 장편 김좌진전기를 써낸것이다. 그리고 근년에는 세 번째 장편도.  87만자 가량되는 그 책은 북만토비의 항일력사를 다룬것이다. 행운인 것은 민족출판사분들은 다가 지성인들이여서 내 형편, 내 글을 알아주고 내돈 들지 않고 책을 좋게 내준것이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북만토비연구가”로 본다. 당신들처럼 어마어마하게 “력사학가”신분이 아니지만  이따위 자호로나 자신을 안위해야지 별 방법없다. 당신들이 “력사학가도 아나면서 력사를 아는척” 한다고 나를 비난하는데도 도리가 영 없는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당신들에게 묻고싶은것은 력사학가가 돼야만이 력사관련의 글을 쓸 자격이 되는냐 하는 것이다.  그놈의 규제는 어느 빌어먹을 후례자식이 정해놓은건가? > >    “김송죽을 포함하여 흑룡강사람들이 김좌진 피살설은 어떤 경제적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해전에 백야 김좌진장군암살지에 장군의 석상을 세웠다니 김강석누님을 모시고 함께 산시(山市)에 갔다왔을 뿐인데 나를 “어떤 경제적 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한다니 험한 소리다. 경제와 내가 글을 쓴게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말인가? 이렇게 날조해도 되는건가?  당신들이 나를 무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싶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어른들인지 내가 그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당신들은 공공연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 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고 나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이런 비난을 듣고보니 새삼스레 내가 “문화대혁명”때 당한 일이 회상된다. 소설을 쓴것이 죄가 되었다. 나는 등척을 보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나를 등척의 졸개라며 잡아내여 투쟁했다. 하루는 마을사람들 앞에까지 나선건데 로당원이요 우리마을에서는 제일 어른이라는 분이 나보고 공부를 얼마했느냐고 묻길래 나는 초중을 졸업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어른분이 하는 소리가 “야 이놈아, 네가 소설을 쓴다구? 거꾸로 들고 쪽 훓어봤자 똥물밖에 없는 주제에. 야, 야, 메스껍다 메스꺼워!” 하면서 춤까지 뱉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철부지 애들을 추겨 새끼로 내 목을 매여 회술레를 했다.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나는 박사도,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주제에 책을 쓴 것으로 하여 그와 꼭같은 비난을 받고있다.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느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느니.    묻노니, 그래 력사학가라야만이 왈가왈부할 자격이 되는가?    관속에 들어가는 사람에도 막말은 하지 말랬다. 인간의 제일 악한 심보가 타인의 인격을 모욕하는것이다.    좋다, 당신들이 그리도 당당하다면 나처럼 시시비비에 이길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 당신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대답하라!  정녕 내놓는다면 나는 굴복할것이요 그러지를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을 내 발까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을것이다. 그대가 교수건, 박사건, 력사학가건 !                                                                 2010. 1. 14. > > > > >
3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 댓글:  조회:2507  추천:32  2010-01-15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      김송죽     꼭 해답하기 바란다.            나의 두 문장이 련이어 싸이트에 오르니 반응이 인차 생겼다. 이미 짐작한바였고 바라는바였다. 나는 나의 이 두 문장이 문학계뿐만아니라 온 연변땅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것을 알고있다. 당연한 일이다. 물의를 일으켜야 한다! 일으켜도 크게 일으켜야 한다! 이것도 내가 바라는것이다!     우선 내 자신이 접수하지 않을 수 없는것은 강경애의 문학비를 세운 일도 몰랐거니와 강경애원상복구한 일도 인제야 알게되였으니 내가 너무나 “정보에 무관”했다는 지적이다. 나는 확실히 그러했다. 이게 몇핸가? 그 기간에 뭘하고있다가 뚱딴지같이 이제야 튀여나와서 이러는가 할 것이요, 다 안정된 평온을 뒤흔든다고 할 것이요, 소란을 피우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고의적으로 이날을 기다려온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기바란다. 하기에 나는 나의 첫문장의 첫머리에 그 원인을 명백히 밝혔던것이다. 변명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뭔가. 만약 10여년전 그 당시에 정녕 알았더라면 나는 골이 터지더라도 나서서 “강경애문학비”를 못세우게 견결히 막았을 것이다.    한데 내가 “정보에 무관”한 사람이라는 그 리유로 강경애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하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백년이 지났다해도 운운할 일은 운운해야한다. 당신들이 연변땅에다 “강영애문학비”를 세우지 않는다해도 그녀의 “친일행각”, “살인공모죄”는 아무 때건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언녕 문학계에 반영하리라 작심했지만 너무 미룬것이 잘못이다. 나는 내가 쓴 김좌진전 을 문학평론가 최삼용선생께도, 이미 작고한 연변대학의 정판룡선생과 권철선생 두분께도 증송했으니 연변에서는 어느 정도 알게되였으리라 믿은것도 있은것이다.     나의 두 번 째문장을 읽어본 분이 “한국 광복회장의 이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고 하는데 당신이 운운하는 알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묻노니, 그래 당신은 그의 저작을 대체 몇권이나 읽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학자라면 독서에 무관하지는 않았을 텐데.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는데 나는 당신의 그 말이  무리하기 짝이 없다고 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독립투사였고 당당한 력사학가인 이광훈선생을 너무나 하찮게 보고 고의적으로 비방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졸열한 행위로 밖에 되지 않는다. 좀 성근하고 자중하는게 좋겠다.        한국 광복회 회장 李康勳先生이 력사의 흐름과 대사건에 “관건적인 족적”을 남길만한 인물은 아니였다는데는 그것이 그래 그가 쓴 저작을 믿을수 없는 리유로 된단말인가?  그가 당신이 말하는 이른바 “관건적인 족적”은 남기지 않았어도 그 당시 신민부의 간부였고 김좌진장군의 장례문제를 토의하느라 만주 유지 95명이 모였을 때도 참석하여 토론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사건당시 그곳에 있은것이다. 이광훈은 자기의 회억록에다 “강영애는 김봉환의 동거녀”였다고 밝혔거니와 “백야 김좌진장군 교사공범”이라고 딱 찍어 말했다. 그의 회고록뿐만이 아니였다. 김좌진장군의 재종제 시야 김종진의 “전기”에다도 그같이  밝히였다. 그 전기는 김종진과 함께 김좌진을 찾아와 그를 설득시켜 원래의 新民部를 韓族總聯合會로 개조케 한 무정부주의자 李乙奎(본명 金明源)가 쓴 것이다. 나는 그 전기를 의거(依據)로 삼은것이다. 그는 山市站 韓人學校에 普通通信處를 세우고 김장군의 장례를 주관하기도했다. 이광훈과 같이있은 증거다. 당신들이 말하는 “관건적인 종적”을 남길만한 사람이란 표준이 대체 무엇인가? 이런 사람이 쓴 글도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리해를 돕기위해 두분의 상황을 알린다.   ◎ 李康勳: 大統領表彰 駐中日公使暗殺 ◎ 李乙奎: 大同團事件으로 四二九六年三月一日. 建國功勞大統領表彰受賞    나는 당신들은 똑똑한 근거도 없어갖고 제멋대로 억측한다고 본다.    (1) 김좌진전이 한쪽세간의 풍설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이라고?    (2) 분분한 소문의 한갈래를 받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3) 그것을 주장하느라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실을 외곡한다고?    (4) 그런식으로 력사학자도 아니면서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고?      좋다! 그럼 내가 그래 굳이 당신들이 금고봉처럼 여기면서 내세우는 그 80년대초엽까지 연변에서 살아계시면서 연변교육출판사 사장을 지낸 화요파 거물급인물 량환준선생의 ”증명“도 꼭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묻노니, 당신들이 내놓은 말처럼 그가 대체 어떤 ”관건적인 족적“을 남겼는지 대답해보라! 당신들은 지금 내앞에서 궤변을 부리고있으니 어처구니없다. 당신들은 량환준이 ”김좌진장군을 직접 사살한 사건의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또 친하게 지냈던 산증인“이라면서 량환준선생이 공도진(이봉림)께서 직접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봉림이 김좌진을 죽이였다는 증거는 뭔가 그것을 내놔라. 량환준이 그한테서 직접 들었다해도 전혀 믿을 수 없다. 과연 리봉림이 ”딱친구” 량환준에게 김좌진을 죽인게 자기였다고 말했다면 리봉림은 알짜  나발을 불기 좋아하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리복림이 정말 그런 거짓말을 했을가? 그럴리없다. 구천에 간 항일투사를 그런식으로 증명인으로 내세우지 말라. 그를 살인흉수로 만드는것으로밖에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한심한 모독이다.     “모두 짜고들어 몰아붙이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그때는 내가 공도진에게 잘못들었던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번복하기도했다”는 사람의 말을 곧이듣는 당신들이야말로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공산당원이면 의지가 대개 굳은줄로 아는데 필경 로당원이였을 “거물급”인물이 태도가 그렇게 애매했다니 리해가 되지 않는다. 안그런가? 적에게 고문당했으면 몰라도 동지들이 몰아붙인다해서 그가 그런 애매한 소리를 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런 사람의 증명을 다 믿는단말인가? 량환준선생도 남에게서 들은 소리를 옮긴것이지 목격자는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사람을 증명으로 내세우는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피우는거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있는게 아닌가?      “더욱 주요한 증인은 흑룡강성 화천현 위생국장을 담당한적 있었던 항일투사 량재문도 리복림의 밑에서 교통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김좌진은 리복림에 의해 사살사실을 잘 알고있었고 력사학자들이 량재문을 방문하여 취재할 때 이와같은 사실을 증명한바있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는 나도들었다. 나는 그곳서 50여년간을 살다가 북경에 온지 이제 몇 해 안된다. 나는 그분한테서 들은게 아니라 떠도는 소문을 들은것이다. 아마 어느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겠지. 하기에 나는 일부러 할빈에 계시는 성당사연구소 소장 김우종교수를 찾아가 당사연구실에서 그와 김좌진 피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바있다. 김우종교수도 꼭같은 풍문을 들었다면서 리봉림이 바로 공도진이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나보고 리복림에 대해서는 어느만큼이나 료해하고있느냐고  질문하는데 까놓고말해서 나는 사료들을 보고 당신들이 알고있는것 만큼이나 알았지 리복림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연구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째도 김좌진암살을 직접 획책한 자는 강경애동거인 화요파 김봉환(일명 金一星)이였지 리봉림이 될 수 없음이 명명백백 했으니까.    그 당시의 에 공개된 “新民府首領 金佐鎭被殺說 해림에서 청년에게 사격돼 事實眞假는 尙未判”이란 제목의 보도를 보라,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청년에게 사살을 당하였다.”했지 리봉림이라고도 공도진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신문 2월 3일자 의 “凶報를 確傳하는 白冶金佐鎭訃音”이라는 보도에도 보라. 김좌진을 암살한 흉수는 김일성(金一星)이라했지 다른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다. 왜서 그렇게 보도했겠는가? 리유는 바로 화요파 젊은이 김봉환(金一星)이 이 엄청난 흉계를 획책한것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래도 믿지 않을건가?    이듬해의 9월 11자 신문에는 “故金佐鎭氏下手人 朴相實에 死刑判決”이라는 보도를 실었다. 한것은 그가 바로 김봉환의 사주를 받고 직접 김좌진장군에게 총을 쏜 흉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래 그 당시 신문에 난 이러한 보도들도 믿지 말아야 한단말인가?     한즉 리복림이 김좌진을 “직접사살”했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고 뭔가? 한데도 지금까지도 얼빤한 증거를 내들고 침방울을 튕기니 력사지식이 내보다 많은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들의 글에 다른 하나의 표연한 구절, “리복림에 의해 사살된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어느정도 리유가 서는것 같지만 그도 당신들의 주장을 긍정해주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왜 리유가 서는것 같다고 하는가? 그것은 리복림이 그당시는 “화요파”사람이였고 활약자였던것만은 사실이였기 때문이다. 그 누가 김좌진을 암살했던지간에 다른 어느파가 아니고 바로 “화요파”가 꾸미고 저지른 집단적 행위였으니까말이다. 그때의 형편을 보면 “화요파사람”이라 하면 싸잡아 다 김좌진을 살해한 흉범으로 몰아치는 판이였다. 이것도 사실인 것이다.    해방후에 편찬한 를 보면 백야 김좌진장군은 1993년 7월초에 중앙에서 내려와 평판하기전까지 줄곧 “반동분자”로 락인되여 있었다. 그때는 나라의 정치형세가 그러했으니 그의 암살을 획책했던 “화요파”사람들은 그 누구나 다가 저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떳떳이, 지어는 흡사 대공이라도 세운것 처럼 여기고 자신을 표백했던것만은 사실이다. 과연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짓들이였다, “김좌진을 리봉림이 암살했다”는 명학한 증거도 없어갖고 무던히 오래 버티여냈으니!     “리연록 자신이 구국군에서 공작 할 때 김좌진을 살해했던 리복림을 직직접도와준 일을 이야기하였다.”고 하는데 절반은 믿을 수 있으나 절반은 믿을 수 없다. 리연록이 리복림을 도와줬을 수 있다. 도와줫겠지. 그러나 리연록이 김좌진을 리봉림이 직접살해했다고 말한건 아니지 않는가. 당신들 어디 말해보라, 리연록이 리봉림을 도와준 일이 어쩌면 문제의 증거로 된단말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엠엘파 지희겸 회고담 발표, “리복림이 김좌진을 죽이고 아성으로 도망쳐 온 것을 만났다고 증명”했다는데 그건 그가 그럴수 있다고 본다. 김좌진이 화요파의 손에 살해된 것을 알자 모험대장 고강산이 치를 떨면서 화요파를 싹 다 잡아치우겠다면서 눈에 쌍불켜고 펄 펄 날뛰였으니까. 화요파사람을 싸잡아 다 흉수로 락인했던 살벌한 세월이였다. 이런 형편에 리봉림은 아성으로 도망친 거고 지희겸은 “그가 김좌진을 죽였다”고 했을 수 있은것이다. 지희겸이 목격자는 아니지 않는가.     이광훈이 “공산주의자들이 대륙의 호랑이로 보고 제일 무서워하고 꺼리는 김좌진”이라고 한 것을 봐서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를 제일 미워한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그 전까지는 주의주장이 다름으로 하여 모순이 있어서 가끔 마찰은하지만 대방을 상해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김좌진의 사람들에게 납치되여 귀가 잘리우기도 하고....”는 그 후의 일인것이다.  전후의 일을 한데뒤섞지 말아야 한다.    이점은 김좌진이 당시 전만주의 독립혁명자들을 한데 묶어세 울 목적으로 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회를 내온 것만으로도 증명이 되는 것이다.“빌억먹을놈의 당파심!” 이는 그가 독립진영내의 분렬을 제일 싫어하고 분렬조작자들을 증오한 표현이다. 그가 시종 부르짖은것은 한데 뭉치고  단결하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견강한 항일투사였던 그가 살해된 후에는 “살인마귀”로 변하고말았다. 이 모든 것이 본성이 악렬하여 불렬활동을 “혁명”으로 여긴 화요파의 소행이였다! 하늘이 내려다보고있다. 그자들의 작간으로 오도된 력사가 김좌진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을,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제에게 빼앗긴 고국땅을 되찾자고 만주땅에 들어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피흘리며 싸워온 모든 독립군을 지금까지도 우습게 보면서 지어는 추악하고 흉악한 토비로까지 몰아붙이니 그야말로 격노발검(激怒拔劍)할 일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화요파”사람의 “증언”을 들고 맞서려드는 사람들은 듣거라, 오죽했으면 사전에 마저 화요파를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겠는가? 다시 한번 숙고하기 바란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 것 처럼 어거지를 부린다”고 하는데 그렇다, 나는 “력사학가”아니면서 제 주장을 뻗치고있다. 나는 력사를 알려고 열중해온 일개 소인글쟁이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외람되는 짓을 했다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교대한다. 나는 어느핸가 력사학회에서 를 펴낼 때 과외편집작가로 초빙하니 그에 응하여 북만일판을 편력하면서 력사자료들을 수집했다. 성정부에서 떼여준 소개신을 들고 요하, 부금, 화천, 가목사, 심양 그리고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 등을 찾아가 뒤질만한 당안들은 다 뒤지였다. 그래서 유용한 자료들을 찾아내는 게 내 즐거움이였다. 제 돈을 팔아가면서 까지. 내가 이 말을 하면 당신들은 자식이 “력사학가”도 아닌게 주제넘는 짓을 했다고 할 것이다. 어느핸가 청명절기간에 모교에서 청하니 나는 900명 사생앞에서 꼬박 두시간 동북항일투쟁사를 강의한 적도 있다. 당신들은 력사학가도 교수도 아닌 주제에 “력사를 아는척”했구나 하고 웃을것이다. 나는 력사제재를 다루는 소설쟁이다. 그러니 자연히  력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방직후 “조선족인민들이 당의 령도밑에서 사문동, 마희산 등 토비무리들과 영용히 싸워이긴 피의 력사를 기록한 작품”을 써낸것이다. 먹물을 적게 먹어 지식이 얕다보니 초고를 써서 18년만인 1984년에 연변에서 출판한 나의 첫 장편소설이다. 당신들은 또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그런 글을 쓰니 그꼴이였지 하고 웃으리라 본다. 한데 나는 그 누구든 “력사학가”가 아니라도 얼마든 력사제재를 다루고 소설을 써낼수 있다는 신심이 골수에 박힌통에 력사학가인 당신들 앞에 비난의 대상이 된 모양이다. 나는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순전히 력사가 맥을 이룬 두 번째의 장편 김좌진전기를 써낸것이다. 그리고 근년에는 세 번째 장편도.  87만자 가량되는 그 책은 북만토비의 항일력사를 다룬것이다. 행운인 것은 민족출판사분들은 다가 지성인들이여서 내 형편, 내 글을 알아주고 내돈 들지 않고 책을 좋게 내준것이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북만토비연구가”로 본다. 당신들처럼 어마어마하게 “력사학가”신분이 아니지만  이따위 자호로나 자신을 안위해야지 별 방법없다. 당신들이 “력사학가도 아나면서 력사를 아는척” 한다고 나를 비난하는데도 도리가 영 없는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당신들에게 묻고싶은것은 력사학가가 돼야만이 력사관련의 글을 쓸 자격이 되는냐 하는 것이다.  그놈의 규제는 어느 빌어먹을 후례자식이 정해놓은건가?     “김송죽을 포함하여 흑룡강사람들이 김좌진 피살설은 어떤 경제적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해전에 백야 김좌진장군암살지에 장군의 석상을 세웠다니 김강석누님을 모시고 함께 산시(山市)에 갔다왔을 뿐인데 나를 “어떤 경제적 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한다니 험한 소리다. 경제와 내가 글을 쓴게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말인가? 이렇게 날조해도 되는건가?  당신들이 나를 무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싶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어른들인지 내가 그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당신들은 공공연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 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고 나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이런 비난을 듣고보니 새삼스레 내가 “문화대혁명”때 당한 일이 회상된다. 소설을 쓴것이 죄가 되었다. 나는 등척을 보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나를 등척의 졸개라며 잡아내여 투쟁했다. 하루는 마을사람들 앞에까지 나선건데 로당원이요 우리마을에서는 제일 어른이라는 분이 나보고 공부를 얼마했느냐고 묻길래 나는 초중을 졸업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어른분이 하는 소리가 “야 이놈아, 네가 소설을 쓴다구? 거꾸로 들고 쪽 훓어봤자 똥물밖에 없는 주제에. 야, 야, 메스껍다 메스꺼워!” 하면서 춤까지 뱉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철부지 애들을 추겨 새끼로 내 목을 매여 회술레를 했다.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나는 박사도,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주제에 책을 쓴 것으로 하여 그와 꼭같은 비난을 받고있다.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느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느니.    묻노니, 그래 력사학가라야만이 왈가왈부할 자격이 되는가?    관속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막말은 하지 말랬다. 인간의 제일 악한 심보가 타인의 인격을 모욕하는것이다.    좋다, 당신들이 그리도 당당하다면 나처럼 시시비비에 이길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 당신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대답하라!  정녕 내놓는다면 나는 굴복할것이요 그러지를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을 내 발까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을것이다. 그대가 교수건, 박사건, 력사학가건 !                                                                 2010. 1. 14.  
2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댓글:  조회:2105  추천:20  2010-01-11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북경) 김송죽  연변의 문단에서 강경애에 대한 료해를 진일보 명확히 하게끔 도우려는데서 한국 광복회 회장 이광훈선생과 그의 글을 소개한다.   이광훈회장의 경력    1903年 江原道 金花 出生.   1909年부터 8年間 私塾에서 漢學을 배움.    1920年 4月부터 上海에 根據한 臨時政府國務總理室에 1年間 奉仕.   1921年부터 3年間 間島師範學校에서 修學.   1925年 北滿 新民部에 加擔.    同年 10月 日帝무리에게 매수된 寧安懸警에 逮捕되여 8名의 府員과 함께 근 1年間 獄苦를 치룸.   1926年 9月부터 1932年까지 기관傘下 各學校에서 校務를 擔當.   1932年 겨울 再次 滿洲를 脫出 上海로 亡命.    1933年 駐中 日本使節 等을 폭살하려던 六三亭義擧에 앞장섰다가 日警에게 체포되어 日本으로 押送되고 1945年 8.15解放으로 東京府中監獄에서 出獄 됨.    1945年 尹奉吉, 李奉昌, 白貞基 等 3義士유해를 本國으로 奉還하고 國民葬을 주선.   1946年부터 1960年 4.19전까지 僑胞社會에서 民團幹部로 活動하다가 歸國.   1969年부터 1983年 6月까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실무자, 독립유공자공적 심사위원으로 봉사하였음.   1983年 7月  尹奉吉義士 기념사업회 會長.   1988年 大韓民國光復會 會長.    著書   在日時 <<海外獨立運動史>>.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인 독립운동     사 제1권 <<의병항쟁사>>. <<독립운동사 대사전>> 卷1, 卷2.   共著     독립운동사 제5권 <<독립군 전투사>>    독립운동사 제7권 <<의렬투쟁사>>    정음사 간행 <<抗日獨立運動史>>(내가 겪은 독립운동)    瑞文堂 刊行 <<武裝獨立運動史>>.     同 <<大韓民國臨時政府史>>.     其他 기관지의 連載人物인 史論 等 發表된 論文 다수.     1990년 3월 한국의 歷史編纂會 출판부에서는 광복회 회장 이광훈선생의 편저로 된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을 발행했는데 656페지에 달하는 이 두터운 책에는 적잖은 진귀한 사진과 함께 대한독립항쟁사의 70명 순국선열들의 전기가 수록되여 있다. 보귀한 자료들이다. 이광훈회장은 머리말에『편찬위원회의 실무자로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연 수많은 선렬들의 피눈물 어린 문헌을 다루게 되어 간간이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대목에 부딪힐 때마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희석(稀釋)되어 가는 독립정신의 앙양(昻揚)에 무상의 계명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자기가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리유를 말했다.      이 책에 10페지되는 <<백야(白冶) 긴좌진(金佐鎭) 장군>>전기도 들었는데 거기에 밝혀진 강경애에 유관한 자료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이중삼중의 적에게 신민부(新民府)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중에 남방(南方)에서 만주로 들어온 이을규(李乙奎), 김종진(金宗鎭) 등 혁명투사들을 받아들이여 자유연합원리(自由聯合原理)에 의한 한족총련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거창한 새출발을 하려할 때에 불세출(不世出)의 애국영웅(愛國英雄)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은 흉탄(兇彈)에 맞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백야(白冶) 긴좌진(金佐鎭)장군을 살해한 주동자(主動者)는 밀양(密陽)출신의 김봉환(金鳳煥)으로(일명 一星) 김성숙(金星淑)(임시정부국무위원)과 같이 동래(東來) 범어사(梵魚寺)에 승적(僧籍)을 두었었다.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중국북경(中國北京)으로 가서 레닌, 마르크스주의에 공명(共鳴)하고 활동하다가 김성숙(金星淑)은 남방(南方)으로 가고 김봉환(金鳳煥)은 북만(北滿)으로 향하여 혁명투사들의 내왕(來往)이 빈번한 중동선해림참(中東線海林站) 역에 정착하였다. 이 시가(市街)는 공산주의자들이 래왕도 빈번하나 정착한 한인(韓人)은 대개 표면상으로는 신민부관내(新民府管內)이므로 신민부의 부원(府員)이며 지방 총변부(總辨府)의 사무소도 여기에 위치해있었으나 김봉환(金鳳煥)은 여류문인 강경애(姜慶愛)와 동거생활(同居生活)을 하면서 신민부(新民府)의 기관지(機關紙),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기고(寄稿)하여 부(府)의 사업을 옆에서 내조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할빈시로 갔다가 일본영사경찰(日本領事警察)에 체포되어 심문(審問)을 받고있던 중 할빈 일본총사령관경찰서(日本總司令官警察署)의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 취체담당경부(取締擔當警部)로 한국말에도 능숙한 송도(松島)라는 자가 놈들 상부(上部)의 지시를 받고 해림(海林)에 있는 김(金)의 애인 강경애(姜慶愛)를 꾀어 할빈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돼 있는 김을 면회(面會)케하여 결국 김봉환(金鳳煥), 강경애(姜慶愛), 송도(松島) 3자(者)가 밀회(密會)를 나눈 뒤 즉석에서 김봉환이 석방되였다. 김봉환도 고등교육을 받은 자라 번민이 많지만, 왜놈의 감언리설(甘言利設)에 넘어가 나쁜 마음을 품게되였다. 무거운 형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옥고(獄苦)를 면하게 되었으니 일제의 은혜도 생각해야 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대륙(大陸)의 호랑이로 제일 무서워하고 꺼리는 김좌진(金佐鎭), 또 애인과 공락(共樂)하면서 생활보장도 될것 같으므로 전력으로 일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여 김좌진장군의 목숨을 해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자기의 부하 박상실(朴尙實)을 시켜 흉행(兇行)을 저질렀다. 만인(滿人)이 함께 저주할 대역죄를 지은 것이다.』    이광훈회장은 『선열들의 거룩한 행장은 피와 눈물로 써야 될 조국광복의 화신(化身)』이라면서 『없어서는 안될 값진 자료임으로 인멸(湮滅)될 염려가 없지도 않아 우선 자료로 남겨둘 의미에서도 사계(斯界)에 관심을 가지신 대가에게 제공하여 일고의 참고라도 된다면 다행』이라고 했다.    하다면 그때 흉행을 획책한 김봉환이 몸을 잠그고 있은 조공만주총국(朝共滿洲總局) 아성지부(阿城支部)의 한 개 조직인 해림(海林)의 “화요파”는 어떠한 상황이였는가?    그에 대해서 료해하려면 먼저 조선공산당부터 알 필요가 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에 서울에서 일부 맑스ㅡ레닌주의소조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창건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에서 맑스ㅡ레닌주의가 보급되고 로동운동이 장성한 결과에 이루어진 합법적인 산물이였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의 로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의 추동력으로 되었다. 공산당이 창건된 후 맑스ㅡ레닌주의사상은 더욱 광범히 로동자, 농민대중속에 보급되였으며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은 조선국내각지에서 더욱 힘차게 일어났다.      『그러나 공산당은 자체가 가지고있는 결함들로 인하여 대중운동을 목적지향성있게 통일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으며 맑스ㅡ레닌주의 제원칙들을 실천속에서 정확히 구현하지 못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당시 당의 지도부에 기여든 화요파, 엠엘파, 서울파 등 각종 파벌에 속한 종파분자들의 무원칙한 파벌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하여 1928년 조직된 력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었다.』  (<<대중 정치용어사전>>조선로동당 출판사 1964년. 323페지)   『엠엘파ㅡ 서울파가 신, 구 량파로 갈라진 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1926년 4월에 일월회파 및 공청만주총국파 등과 결탁하여 <<레닌주의자동맹>>이란 그루빠를 조작하였는데 이를 엠엘파라고 한다. 엠엘파분자들은 192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에 기여들어 당시 당지부가 검거된 기회를 리용하여 당내 <<헤게모니야>>를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들 간의 싸움은 극도에 달하였다.』 (동사전 513페지)   『화요파ㅡ 1924년에 <<신사상연구회>>를 개편하여 조직한 화요회계통의 종파집단을 말한다. 화요파는 1920년대 우리 나라에서 장성발전하는 로동운동과 기타 대중운동을 분렬시키고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이다.』 (동사전 455페지)       사실이 말하다싶히 조선공산당은 분렬된 종파지간의 알륵과 갈등으로 서로 물고 뜯고 하여 혁명에 해만 끼치였기에 1928년에 이미 공산국제에서 해산시킨것이다. 하건만 원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화요파성원이였던 김동환같은 자는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거니와 “사이비한 혁명자”의 본성을 고치지 않은채 이른바의 “주의주장”을 운운하면서 진정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있는 혁명자들을 적대시하였거니와 종당에는 원쑤 일제의 충견으로 완전변질하여 “만인이 함께 저주할 대역죄”를 짓고 만 것이다.    녀류작가 강경애는 어떤 인물이였가? 그의 작품이 얼마나 적극적이든 진보적인든 간에 그것을 론할 일이 아니다. 국경을 두번이나 넘나들었던 그녀의 발자국은 그저 졻다란 간도땅에만 찍혀진게 아니였다. 내가 쓴 김좌진전 <<설한>>에도, 이광훈선생이 쓴 대한독립항쟁사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에도 밝혀진바와 같이 그녀는 북만까지 깊숙이 들어와 활동한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강경애는 간도용정사람인 장하일에게 시집가기 전에는 조공만주총국 아성지국의 화요파사람 김봉환의 동거녀였는데 “신민보사건”에 걸려 일본령사관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되여 있는 제 애인을 빼내오고는 역적이 되어 일제가 시키는대로 애인과 함께 흉살을 꾸민 용서못할 죄범이 된 것이다. 이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강경애를『백야 김좌진장군 암살교사공범』이라 한건 틀리지 않다. 어쩌면 틀린단말인가? 그가『용정의 비암산에 강경애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 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도 인물이 없는가』격분한것도 당연하다. 왜 격분하지 않고 한탄이 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2005년 문화인물”로 강경애를 선정했다는데 나는 선정위원회의 그 “각 시, 도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았다는 “13명전문가”의 수평도 그렇고, 한국문화부의 어른들이 대체 지식수양을 제대로 갖추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일을 당하여 국가보훈처에서 국장을 지낸 분의 제의도 받아들일줄을 모르다니? 민주가 발양되는 국가여서 그 꼴인가?          연변도 마찬가지다. 한국관광부의 결정이였다고 믿고 깊은 고려도 없이 그저받아들인게 아닌가? 응당믿어야 할데를 믿지 않고 도외시한것 같다. 국가보훈처나 아니면 대한민국광복회와 물어나보았는가? 탐문이라도 했더라면 일이 이같이는 되지 않았으리라. 전에는 채 연구되지 않아서 모르고있었다면 리해가 되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 시대를 겪어온 사람의 진술마저도 믿으러 하지 않는다면 리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강경애의 문제는『친일행적』에 드는것이니 그 엄중성을 가히 짐작하리라믿는다. 한데도 어떻게 하고있는가?.... 강경애가 김좌진암살에 참여한 공범인것이 빤한데도 시간적관계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추리해낸 년도수 1931을 의거로 삼아 강경애가 김좌진암살공범으로 될사이도 없었다느니 어떻다니 주장을 세우는건 무리인 것이다. 한 두 번의 단편적인 언급이였다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진술이였다면 근거가 철저하니 믿어야 한다. 그것이 정신병자가 죄친 허튼소리야 아니였겠지?   연변 비암산중턱에다 “강경애 문학비”를 세웠다면 필경 문예계에서 처음 발기를 했을것이요 정부차원에서도 지지와 동의를 했을것만은 사실인데 과연 의문스럽다. 어쩌면 이같이 중대한 문제를 얼떨떨히 대하고 처리한단말인가? 왜 좀 유관부문에 물어 연구해보지도 않고 서둘렀는가말이다? 내가 말하는 “유관부문”이란 광복회와 국가보훈처를 념두에 둔것이다. 친일행각에 대한 조사는 물론 그 결정과 처리문제에 들어가서는 아마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제일 발언권이 있으리라 믿는다. 한데도 그들의 말과 증명을 믿지 않는다면 그래 누구의 말, 누구의 증명을 믿는단말인가? 연변에서는 이 점을 알고있었겠건만 너무나 무시한게 아닌가?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것은 규정해야한다, 후세에 욕을 먹지 않으려거든!                                                                                                                 2010. 1. 4.
1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수 없다 (김송죽) 댓글:  조회:2324  추천:38  2010-01-09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수 없다                                                          김 송 죽        나는 요즘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조성일선생이 쓴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글을 읽어보고 적이 놀랬다. 강경애에 대한 “명예원상복구”라니? 어쩌면 이럴수가 있는가, 어쩌면? 거듭되는 의문과 함께 “아차, 이거 내가 너무나 등한했구나, 등한했어! 이렇게 될줄은 몰랐지! 늦었구나, 늦었어!”하는 후회와 자책감이 가슴을 들때리니 참을 수 없어 뒤늦게나마 이렇게 필을 든다.        나는 1998년도에 룡정시 비암산중턱에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를 세운일도, 그녀를 한국에서 2005년도 “문화인물”로 선정한 일도,  그 일로 하여 <<월간조선>>에 오동룡기자가 쓴 “백주발검(白晝拔劍)”기사가 나오게 된 일도 여지껏 전혀모르고 있었다. 여러해지났건만 통 깜깜이였으니..... 과연 참!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한마디ㅡ 연변에서 “강경애명예원상복구”는 근본 잘못된 일이라는 그것이다.     나는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의 전기를 쓴 사람이다. 내가 쓴 그 책의 이름은 <<설한>>인데 글자는 32만자, 1994년도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세상에 나왔다. 설한(雪恨)이란 한을 푼다는 뜻이다. 내가 쓴 그 백야 김좌진장군전기에도 녀류작가 “강영애는 김좌진암살주범의 동거녀”로 지적되였다. 다시말해 그녀는 “김좌진장군암살교사공범”이라는거다. 이는 사실이다. 나도 전에는 강경애를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글을 쓴 찬송할만한 녀류작가로 여겼었다. 그런데 백야 김좌진전을 쓰면서 알고보니 강경애는 존경이 아니라 응당 타매를 받아야 할 녀문인이여서 실망이 갔다. 이는 숨길 수 없는 내 감정이다.        리해를 돕기위해 아래에 몇조목나누어 말하련다.      1. 백야 김좌진전을 쓰게 된 계기       나는 <<할아버지와 태극기>>를 써서 <<흑용강신문>>에 투고했는데 신문사의 편집은 나의 그 회억문의 제목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유물>>로 고쳐 1991년 1월 5일자 신문에 냈다. (그해 한국에서 출간한 <<고국소식>>3호에는 원제목을 그대로달았다)    그 회억문에서 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룩한 북로군정서 총사령 김좌진장군의 항일업적을 찬양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마 나의 그 글이 맨처음으로 그의 항일업적을 공개적으로 긍정한 것일거라고 본다. 나의 할아버지는 성명이 김석길(金錫吉)인데 대종교도였고 김좌진을 잘알고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안도 순안에서 3.1만세운동에 나섯다가 일경의 지명수배를 받게되니 제자 9명을 데리고 만주로 솔가도주한것이고 그 9명제자는 왕청에서 북로군정서에 가입했다고 한다. 백포종사(白圃宗師) 서일(徐一)이 창건한 이 대종교부대를 대한군정서라했는데 상해림시정부의 제의에 의해 이름을 바꾼것이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총사령은 김좌진이였다.    할아버지는 사망하기 한해전인 1958년(내가 중학을 졸업한 이듬해) 여름에도 나를 만나 김좌진의 위인됨을 알려주었고 청산리전투를 겪고나서 쏘련으로 건너간 제자들의 소식을 몰라 뇌였던것이다.    일은 과연 묘하게 번지였다. 1991년 3월 11일, 나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우연히 나를 찾고있는  김강석(金剛石)녀사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김강석은 김좌진장군의 딸이다.(그때까지도 국경넘어 공개되지 않았기에 한국에서는 김좌진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형편이였다.)  김좌진은 고향에 본부인 오숙근이 있긴했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 부득불한 환경에서 39세 되던해인 1927년 6월 3일(음력5월 4일)에 흑룡강성 해림근처 산시(山市)에서 독립군원로들과 림정특파원이였던 김대지(金大志)의 보증을 얻어 본이 김해인 김영숙(金英淑)녀인과 재혼을 한 것이다.    그 이듬해의 6월말에 만삭이 된 김영숙은 해림에 갔다가 산시로 돌아오는 도중 산속에서 딸을 낳고 그 자리에서 정체모를 자객의 손에 피살되였다. 그같이 세상에 태여난 생명이였다. 애명이 산조(山鳥)인 강석이는 너무도 기구한 운명이였다. 그날 뒤에 오던 독립군 김기철과 강익선에게 구원된 그는 산동에서 이사를 온 한인(漢人)리씨 부부의 손에서 2년간을 자라다가 김좌진장군의 장례를 치르고는 독립군에서 찾아다 기른것인데 참의원장 리범윤이 그의 이름을 강석(剛石)이라 지은것이다.    그는 낡아버린 “목단강사진관”웃층에 살고있었다.    나는 내보다 12살이나 손우인 그를 누님이라 불렀다. 강석누님은 <<흑룡강신문>>에 난 나의 글을 보고 찾기시작했노라면서 초면인 나의 손목을 붙잡고는 울었다. 장밤을 내내 울기만했다. 그레서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이틑날도 그러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있어봐야 울음속에 영 파묻기우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사흩날 저녁편차로 내집이 있는 가목사(佳木斯)로 돌아오고말았다, 강석누님이 격정을 삭히고 마음을 진정한 다음에 다시만나보기로 하고.    사람이 얼마나 압제받았으면 그 지경에 이르럿을가? 과연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다!    넉달이 채 안되는 그날은 7월 8일이였다.    “동생 공산당원아니요?”    내가 다시찾아갔을적에 누님이 나를 만나자 물어보는 첫마디가 이러했다. 그것은 어느정도 경계를 품고있는 탐문이였다. 나는 머리를 가로젓고나서 입을 열어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공천단원이였을 때 공사내 일곱 개의 중소학교의 련합단지부 선전위원을 맡은적은 있어도 공산당에는 들지 않았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누님은 의문이 되는지 아니 그 좋은 조건에 왜 여지껏 남 다 드는 당에도 들지 못했는가고 캐묻는 것이였다. 나는 그한테 “나는 무신론자다, 교를 믿지 않고 어느 당파에도 들지 않을 것이며  일생을 오로지 문학에 바칠것이다.”라는 나의 립장을 알려주었다. 그는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여 나는 모든건 창작자유를 찾자는 것이요 이렇다는 것을 일기에 까지 써놓았다가 그만 “문화대혁명”때 “위대한 혁명”을 요란스레 웨쳐대는 “혁명자”들의 손에 초중시절부터 써온 내 일기책들을 다 빼앗겼고 그 밀비로 4년간 투쟁과 온갖 모욕을 다 받다가 나중에는 판결에 넘겨 감옥에 갖혔던 일을 알려주었다. 10가지나 되는 죄명으로 기소되였는데 같혀있는 기간 네 번 심사와 자변을 걸쳤다. 기실은 판결할 죄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되니 왜선지 내가 글쓰는것을 아니꼽게보고 4청때부터 원고료를 받아 학교에 들여놓지 않고 혼자쓰는건 자산계급사리사욕이라며 우습게 놀던 “혁명자”가 나를 판결하지 않으면 온 공사의 5천명반란자가 “문화대혁명”을 헛한게 아닌가 하면서 하다못해 “그믈에서 빠진 우파분자”란 모자라도 씌워달라는 것이였다. 과연 억척스레 물고늘어졌다. 9명 예심원은 웃었고 나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였던것이다.   그제야 누님은 웃으면서 안색을 고치였다. 동생이 혁명렬사자식인데도 그같이 곡절을 겪었으니 그놈의 “문화혁명”이라는게 한심하기도하지 하면서 나를 진정 믿어주기시작했다.   강석누님은 고생스레 자라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보니 반문맹이나답지 않았지만 기억력하나만은 놀라울지경 좋았다. 그는 가슴속에 서린 한이 너무나 많았다. 내가 두 번째 갔을 때도 울음절반 목이 메여 말을 제대로 못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모시고 사시(山市)로 갔다. 거기가 옛적 독립군이 북만에서 세운 <<신민부>>본부가 있던 곳이고 백야 김좌진장군의 피해처이기도 했거니와 더욱히는 거리가 5리가량 되는 동북산에는 강석누님이 지극히 보살핀 덕에 김좌진의 구광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였던것이다.    그번걸음에 나는 이틀간 묵으면서 김좌진장군의 전기를 쓸 생각을 굳히였다. 내가 이렇다는 속타산을 내비쳤더니 강석누님은 무등 기뻐하면서 수십년간을 숨겨온 자료들을 내놓았다. 귀중한것들이였다.  나는 그 자료들에 의거하여 김좌진전기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강석누님은 독립군에 대해서 아는것이 적지 않았다. 내가 강석누님을 찾아 채방한것이 다섯 번이였는데 그사이 6살에 짐좌진장군의 양아들이 된 75세에 나는 한족늙은이 손진청(孫鎭靑)도 두 번 만나보았다.          2. 불행을 심은 마찰        김좌진장군피살시의 정형을 교대할 필요가 있을것 같아 <<설한>>의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한족총련합회가 이같이 중학교를 세우고 정미소까지 세우니 소문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각지에서 주민들이 축하대표를 보내거나 격려의 편지가 날아왔으며 류랑하는 품팔이꾼들은 물론 산재한 농민들이 어서빨리 큰 마을로 모여들자는 욕망과 움직임이 보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응당이면 그러지 말아야 했고 얼마든지 피면할 수도 있었을 한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족총련합회가 성립된지 이제 겨우 두달밖에 안되는 10월초의 어느날, 신안진에서 김종진이 자기를 찾아와 독립군과의 타협을 청하는 사람을 구축했던 것이다. 일의 경과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했던 김남천(金南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보고 자기들은 이제부터 이전의 반목을 해소해버리고 한족련합회와 손잡고 가깝게 지내기를 바라니 용의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런것을 김종진은 김장군에게는 물론, 다른 간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제 혼자 사사의 감정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는 인간도리에 위반된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면서 그더러 공산주의부터 청산하라느니 인간본래의 자태로 돌아오라느니 해서 대방을 격노케 만들었다. 일은 잘못번저져서 며칠후에 어느 부농집마당에서 량자사이에는 격렬한 공개변론까지 벌어졌다. 그 결과 선의를 품고 찾아왔던 저쪽은 뼈에 사무칠 지경의 적의만 품고 돌아가고말았다. 이쪽에서는 주먹들고 구호까지 웨쳐대면서 그네들을 쫓아버리고는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악과보응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 스스로 면치 못할 우환을 만들어놓았음을 어찌 알았으랴. 만약 이 일을 처음부터 김좌진이 알았더면 어떻게 대했겠는가?    이 일이 있은지 얼마안되여 공산당이 작당해서 습격하리라는지 로씨야에서 암살대가 넘어오리라는지 온갖의 풍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김좌진은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는 松島라고도 함)와 결탁하였다느니,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한다느니,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주었다느니, 김좌진은 그 돈으로 산시(山市)에 정미소를 차렸고 제 친구의 녀편네를 빼앗아 타락한 생활을 하고있다느니 하는 가지가지 험악한 요언이 나돌았다.            이에 대처해 한족총련합회에서는 내부인원들에게 경각성을 높이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림시정부의 <<독립신문>>은 아래와 같은 글을 실어 대중에게 알리였다.                         金佐鎭씨의 活動    敵紙 大板朝日新聞 級 長春實業新聞에 大韓獨立軍團總司令 金佐鎭씨가 哈爾濱 敵領事館에 歸順하였다는 設을 記載하였으나 此는 全然無根함이요. 敵은 우리 사업을 妨害키 위하여 反間策을 弄함인것인즉 此에 속을 리가 없으러니와 氏는 오직 實力을 養成키 위하여 今年度부터 吉林省 某地方에 屯田制를 大規模로 實行하기로 하고 一方으로는 士官養成所를 設立하야 現今 百餘名의 士官을 敎授하는 中이라더라.    형세가 이같이 험악해 가건만도 김좌진은 일신의 안전은 제쳐놓고 조직공작대의 보고를 받을라니 상의하여 새 지시를 내릴라니 벌려놓은 공사를 진척시킬라니.... 그야말로 침식마저 잃어가면서 누코뜰 새없이 돌아쳤다.    이때는 그혼자만 바삐보낸것이 아니라 한족총련합회의 간부전체가 조직건설을 하느라고 불물을 헤아리지 않고 악전고투를 했다.    이러는 중에 어느덧 1930년이 돌아왔다. 분투로써 실천을 기약하는 새해였다.    ...........    1930년 1월 24일(단기 4263년) 오전 7시경. 예고랄가, 김장군은 아침 진지 들다가 수저가 홀연 뚝 부러졌다. 과연 기분잡치는 괴사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정미소에서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 발동기는 할빈에서 사온것인데 아직 제대로 부릴만한 기술자가 없어서 고장나면 장군이 손수 고치고 운전도 했다. 그런것이 돌아가다니!    김장군은 정미소에 가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서향의 정미소 널대문을 막 열려는 순간 <<땅!>> 하고 음지에서 괴한이 쏜 권총탄알이 그의 몸으로 날아왔다.    <<어느놈이 이래?>>    가슴을 맞은 김좌진은 돌아다보고 한마디 더 했다.    <<이 철부지같은 놈! 네가 역적이였구나!>>    <<땅!>>    반역자의 저주로운 탄알이 다시 날아와 그를 쓰려뜨렸다.    만주독립운동의 대들보는 이렇게 부러지고말았다! 』    3. 진상규명과 처리   『이외의 흉변을 당하고보니 사람들은 망연자실하여 손발이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난국을 꾸준히 헤쳐오던 거인이 갑작스레 꺼꾸러지니 북만주의 독립운동진영은 마치 키를 잃은 배와도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서 한족총련합회는 권화산부위원장의 장악하에 정신, 황학수 등 중진들이 즉시로 간부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암살흉수를 붙잡고 이번의 흉변을 조작한 원인을 규명해야했다. 회의는 또한 이 일로 일어난 불안한 기분을 빨리 가라안히기 위해 각지에 파견되였던 조직선전대원들을 소환하기로 했다.    한편 군사위원장 리붕해는 림시치안대를 긴급조직하여 중동로의 독립군진영을 수비방어함과 동시에 흉수를 잡기 위해서 지방의 중국치안당국에 의뢰하면서 즉시 수사에 달라붙었다.    도주자와 꼭 련계가 있는 다른자가 있을것이였다.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으로 달려가 그곳 역전근처에 있는 지난해 이미 해산을 선고받고서도 종파활동을 중지하지 않고있는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한 잔존기관(화요파)을 돌련습격하여 김봉환 일명 김일성(金一星)외 한명을 잡음과 동시에 문건들을 압수했다.    그 압수해낸 문건에서 예측한바와 같이 이번의 흉계는 그네들이 꾸미였고 권총을 직접 쏜 흉수 박상실은 김봉환의 사주를 받아서 한짓이라는것이 밝혀졌다.       박상범(朴尙範) 혹은 김신준(金信俊)이라고도 부르는 박상실은 임무를 맡은후 팔리고개(산시)에 와 근 반년가량이나 족제비잡이를 하면서 혹은 신을 사서 주는 등 수단으로 독립군과 가까이했고 백야장군주위의 경호와 배치 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그짓을 한것이다. 그런데 그자가 죄악적인 피비린 반역을 하고는 어디로 도망쳤는지 당장 붙잡을 재간이 없었다.    그를 시킨 김봉환은 본래 통도사(通度寺)의 중으로서 일찌기 김성숙(金星淑, 림정국무위원)과 함께 북경에서 공산당에 들었는데 입당후 임무를 맡고 북만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애인인 강경애와 같이 해림에 있으면서 독립군과 잘 어울려 한때 인간적으로 좋은 인물로 평을 받은 자다. 그런자가 <<신민보>>사건으로 할빈의 일본령사관원에게 체포되였던거고 마쯔모도의 흉계에 넘어가 량심을 바꿔넣고 풀려나온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만약 공산당이 알았어도 가만두진 않았을 것이다.    심문해서 알아낸것인데 그자는 김좌진이 맑스주의자인 자기들이 제일미워하는 무정부주의자와 결탁했기에 증오감이 생겨 죽이었다는거다. 모든 악과를 그 한사람에게 집중시키면서 흉모를 꾸미였다고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자가 공산당간판을 걸고 살해의 리유를 정당화하려는 궤변에 불과한것이지 기실은 할빈일본령사관의 사촉에 배기지 못해 밀약을 최후로 집행하여 반역자의 흉심을 드러낸것이다.    독립군은 수일간 엄한 조사 끝에 체포한 두사람을 처단해버렸다.』        『<<동아일보>> 9월 11일부는 김종진의 피살에 대해 아래와같이 보도했다.        “최근 한족총련합회 군사부 위원장으로 활동중이던 시야 김종진씨는 지난 8월 26일 중국 중동선 해림역부근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가해자는 박래춘(朴來春), 리백호(李白虎), 리익화(李益和) 등 3명으로 주의 충돌인듯하다.”    그리고 백야 김좌진장군을 살해한 박상실이 아성현호로군총사령부(阿城懸護路軍總司令部)의 손에 체포되여 그곳 회심처(會審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형을 집행코저 봉천(심양)으로 압송되였다는 기사도 함께 실음과 동시에 독립군모험대장 고강산 역시 체포된 소식도 보도되였다.    함혹한 세월이였다!』         4. 김좌진전을 쓴 과정    이미 우에서 언급하다싶히 내가 백야 김좌진장군의 전기를 쓰면서 필수되는 자료들은 거의가 김강석누님의 손에서 나온것이다. 1958년도까지 마지막생존한 독립군 8로들과 자주상종하면서 사회가 무서워서 거의 숨어살아온 그녀는 정황을 아는 것이 많았거니와 유익한 자료들을 보관하고있는것도 적지 않았다. 여러장의 <<동아일보>>는 물론 김좌진장군의 사진과 독립군이 통신에 사용하던 “郵甁”, 청명절이 오면 흩어진 독립군들이 구광을 찾아가 세워놓고 제를 지내군했다는 나무비석까지..... 나는 강석누님이 보관해온 김좌진의 재종제인 <<시야 김종진전>>(리을규)을 보았는데 거기에 강경애는 김좌진암살을 책동한 김봉환의 애인이라 밝혀졌고 김봉환이 할빈일본령사관에 갇혔다가 강경애와 같이 나오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보다 내가 더 믿음이 간것은 강석누님이 “소설인지 뭔지 쓴다는 에미나색끼가 그 화요파 사내새끼하고 들어붙어 놀면서 짜고 그 짓을 한거야!”하고 몇 번이나 곱씹어 저주를 퍼붓는 그것이였다. “소설을 쓴다는 에미나”가 강경애고 “화요파 사내새끼”는 김봉환을 가리키는것이다. 강석누님은 그 둘을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다. 어렸을적 독립군들이 알려줘서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하고있다는것이였다.        내가 쓴 <<설한>>원고를 제일먼저 읽어본 이는 흑룡강성당사연구소소장 김우종교수다. 김교수는 원고를 보고 맘든단면서 만약 중국에서 감히 출판하지 못할시에는 한국에 연줄을 달아서라도 출판이 되게끔 적극협력하리라 했고 현지답사때는 책에 넣을 사진도 여러장 찍어주었던 것이다. 원고가 출판사에 들어간 것은 1992년 5월이다. 먼저 김강석누님에게 내용을 읽어드린 후에 넘긴것이다.    1992년 7월에 나는 다시금 할빈에 가 성당사연구실의 김우종교수를 만나 재다시 김좌진에 대해서와 원고수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993년 1월 18일, 연변에서 중국조선족력사학회 비서장 김원석씨가 우리집에 두 번째와서 7월경에 “김좌진장군연구토론회”가 해림에서 있게된다고 알리였다. 그사이 그는 나의 원고를 한부 푸린트하여 갖고 한국에 건너가 독립협회회장 이광훈선생에게 뵈이고 그의 평가와 의견을 청취했던것이다. 년세가 93고령에 온른, 우리 민족 모두가 경모해야 할 이 독립운동가는  근 백여가지 문제를 집었는데 내가 쓴 김좌진전을 기본상 긍정하면서도 근 1/3가량은 의분부호를 쳤고 지어는 김좌진한테 딸이 있다는게 웬말인가, “조작극이 아니냐?”고 의문부호를 쳤다. 그럴 수 있는것이다. 그는 19살나이때 김좌진을 만나러 오다가 적에게 체포되여 김좌진을 만나도 못보고 액하감옥에 갇혀 꽤 오랜 세월을 보낸것이다. 이에대한 세절은 내가 쓴 책에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쓴 그 원고에서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암살교사 공범으로 취급한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肄儀)도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알고있는것과 맞다는 태도일 것이다.      5. 결속어        1993년 7월 1일~5일,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토론회”가 열리였는데 그것은 중국조선족력사학회에서 주최하고 중앙통전부를 비롯한 중앙민족사무위원회와 당사연구소, 마레주의학원의 교수들 그리고 무려 60여명에 달하는 동북각성 당사연구소의 연구원들과 민족사무위원회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대회였다. 회의는 륭중했다.    그 회의에 내놓은 의제는 “백야 김좌진을 어떻게 봐야하느냐?”였다. 즉다시말해서 그가 반변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를 죽인것이 옳으냐 아니면 잘못이냐 하는것이였는데 찬반이 갈라져 변론은 그야말로 불티가 나게 열렬했던 것이다. 이렇다느니 아니다느니, 증거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있어도 부족하다느니 어떻다느니.....    나중에 김좌진이 암살되기 한해전인 1929년초에 봉천경찰서에서 그를 비롯한 신민부(新民部) 군정파와 민정파의 수령급인물들을 체포하려한 <<中華民國十八年一月五日奉天全省警務處訓令第三一九號令>>을 내놓는 사람이 있었다. 적위당안에서 들춰낸 문건이였던것이다.    사실이 빤하다. 변절하고 투항한 사람이면 적이 체포하려했겠는가?  더 찧고 까불것도 없었다. “그 누가 어떤 원인을 잡고 그랬던지간에 백야 김장군을 암살한 것은 엄연히 잘못한 짓이다. 그는 독립투사고 항일영웅인 것이다.” 회의는 이같이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중국조선족력사학회 회장은 우리 중국에서는 김좌진문제를 다시연구도 의론도 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번회의에 참가한 내가 각고 끝에 김좌진전을 써냈는데 읽어보니 괜찮다, 고려말고 되도록 속히 내기를 바란다, 출판경비가 어렵다면 우리가 도와줄것이라 고 태도표시까지 했던것이다.    한데도 어떤 사람은 김좌진을 그같이 평판하는데 불복하고 나서는 것이였다. 사실이야 어떻던간에 지금도 그래 공산당이 한 일이면 다가 옳은것으로 평해야 한단말인가? “당내는 진짜말을 제창하고 당사는 진짜말을 해야한다” 이는 소극(蕭克)장군이 별세하면서 남긴 말이다.    2004년 5월, 할빈에 있을 때 한국 EBC에서 취재를 왔기에 나는 중국과 한국 두나라지간에 력사문제시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관점을 표달하고나서 중국에서는 항일이 끝나자 친일파, 한간을 숙청하는 작업부터해서 우환이 없는데 듣자니 한국에서는 매국노의 자식이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고 법에 상소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나졌다니 어떻게 된건가, 국가와 정부는 력사에 책임지는 각도에서 이미 늦기는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분자를 색출, 규명하는 작업이라도 해얄게 아닌가고 촉구한바있다. 그때 나는 강경애를 념두에 두고 중국조선족문학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헌데 새 장편을 집필하느라 머리를 앓다보니 그만 오래도록 미루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에 이르러 연변의 일을 알게되니 신경이 곤두서게된다.     어쨌다고 강경애를 올리세우는건가? 그한테 대체 무슨 공이 있다고?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강경애가 백야 김좌진장군의 암살교사공범이라고 주장”한 것은 옳은것이다. 그가 “문화부장관에게 두차례에 걸쳐 강경애에 대한 문화인물지정철회 민원을 제기”한 것도 옳은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교사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다?” 국가보훈처에서 그래 근거없는 소리를 했단말인가? 전 광복회회장을 지냈던 이광훈의 회고록에 의해 추적해 펴낸 기사였다면 옳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강경애를 모독하는 “백주발검”이 된단말인가? 사실을 밝혀도 모독인가? 그렇지 않을것이다. 이광훈은 독립혁명을 해온 원로급인물인바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한다. 그런분의 증언(회고록)을 믿지 않고 그래 누구의 증명을 믿을건가?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용정의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도 인물이 없는가>>고 격분한것도 옳거니와 한탄한것도 옳은것이다. 왜 격분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을가?     강경애가 1929년에 간도에 건너왔다가 1931년에 고향에 돌아갔고 1932년에 다시 간도룡정촌에 온것은 이미 여러 사료들에 밝혀진 것이고 믿을만한 것이다. 한데 왜서 새삼스레 다시연구하여 혼란을 비져내는가? 새 연구가 나왔다는데 대체 어느 사료에 그런 긍정적인 답이 나왔단말인가? 나는 연구가의 그 출발점이 우선 의심스럽다. 력사는 실재한 사실이지 뜯어고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진정 참다운 사학연구가라면 이 점을 알고있으리라믿는다.        20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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