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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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노력은 무용한 것
2010년 01월 26일 12시 20분  조회:2863  추천:32  작성자: 김송죽
 

부질없는 노력은 무용한 것

                                                            김송죽

   

   장춘식선생의 글 <<강경애의 행적에 대한 일 고찰>>을 방금 읽어보고 곧 이 글을 쓴다. 반론이라 취급해도 좋다.  

   장선생의 론리대로 하면 이제 또 강경애의 전기를 새로만들어야겠다. 그럴 필요가 뭔가, 이미 있는것만도 족한데. 나는 우선 강경애의 전기에서 “론쟁”에 유관한 부분만을 독자앞에 내놓으련다. 


  『1929년 겨울에 간도에 건너가서 룡정일대에 거주하면서 림시교원질도 하고 무직의 고통도 겪으면서 고생하다가 1931년에 고향에 돌아와 그해 8월에 처녀작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 1932년 다시 간도 룡정촌에 건너가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려가면서 장편 <<인간문제>>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조선일보>>간도지국장을 맡아보기도하였다.

   그러나 1936년부터 고질이 도져서 1939년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여 부득불 창작을 중지하였으며 나중에는 귀가 멀고 눈조차 보지 못하게 되어 병마의 시달림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문학학습사전>> 542페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장춘식선생은 론문에서

  『1929년과 1931년에 발표된 강경애의 두 평론문은 고향 장연에서 집필 탈고한 것으로 보는것이 옳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강경애는 1929년부터 1931년초까지는 장연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썻다.

   

   강경애의 글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明日)의 길’을 읽고” 가 1929년 10월 3~7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되였다. <<문학학습사전>>에 강경애는 1929년 겨울에 간도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그가 간도로 건너오기전 고향에서 썼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나도 이 점을 긍정한다.

   다른 한 문장 “양극동군의 신춘평론ㅡ반박을 위한 반박”이 <<조선일보>>에 난것이 1931년 2월 11일자라했으니 강경애가 조선에 있었다는 근거로 잡는데 내 생각에도 틀리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 하면 강경애는 1931년에 만주에서 고향으로 갔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문제시되는건 딱히 어느달 어느날에 돌아갔는지 알 수 없는 그것이다. 내 짐작컨대는 1931년 1월이나 2월에 나갔으리라는 거다. 왜 이같이 보는가? 그것은 고향에 간 강경애가 8월에 첫장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수필이나 단편소설이나 중편소설이면 몰라도 그가 발표한 것이 장편소설이였으니 창작시간이 대단히 길었을것이다. 그 “반박을 위한 반박”문장 하나를 발표하고는 내내 첫장편집필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렇고 볼때 정월달이나 2월달에 고향으로 가서 내내 장편원고를 써 8월에 발표했다는거다.

   연구문제는 1930년 11월 28~29일 <<조선일보>>에 “조선여성들이 밟을 길”이 발표된 그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원고는 강경애가 만주에서 써서 그것을 인편에 보내지 않았나하는 거다. 왜냐하면 그때는 지금의 남북한처럼 꼭 막힌것도 아니고 백성이 비교적 자유로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드나드는 일이 많았으니까말이다. 검열이 영 없은건 아니지만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기자들의 래왕도 빈번했으니까 그들이 가는 걸음에 보냈을 수도 있었던것이다. 그렇지 않을가? 


   << 문학학습사전>>에는 강경애가 

  『1929년 가을에 간도에 건너가서 룡정일대에 거주하면서 림시교원질도 하고 무직의 고통도 겪으면서 고생하다가 1931년 고향에 돌아와 그해 8월에 처녀작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다.>>고 했다.

   어느것이 더 믿음성있는가? 사전에서는 1929년 가을부터 1931년 고향으로 돌아갈 때 까지의 고생한 행적이 믿음성있게 밝혀져있지 않는가!

  

   장선생은 추리를 거쳐『특히 간도 이주행적은 거의 사실확인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라고 하는데는 영 도리가 없는게 아니지만 그것을 딱 확인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전번의 앞글에서도 지적한 바이지만 장선생의 아래글구를 다시내놓고 보자.

  『아무리 본인의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한두번의 단편적인 언급을 근거로 행적을 판단하는것은 좀 무리라고 하겠으나』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강경애 그 본인이 한두번 진술한것이라 해서,  단편적인 언급이라해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게 어디 말이 되는가? 장선생의 론리대로 하면  강영애 그 본인의 말한것보다는 장선생이 연구, 추리, 조사해낸게 더 믿음성이 있다는게 아닌가? 과연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다면 오로지 공공연히 사실을 오도하게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장선생은 『여러 진술에서 드러난 시간관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앞뒤가 들어 맞는다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장선생이 관건적이며 가장 알맹이로 잡아쥐어야 할 강경애 본인의 “진술”과 “언급”을 믿지 않은것은 대단한 실책이면서 과오인 것이다. 두말할 것 있는가, 한두번의 진술이건 단편적인 언급이건 본인이 한 말이면 무조건 믿어야지 안믿어서야 어디되는가, 대중앞에 내놓고 시비해보라.  

   그리고 리복림이요 량환준이요, 아무리 어찌고 어째도 그래도 어디로 보나 광복회 회장 이광훈(李康勳)선생이나 리을규(李乙奎)선생은 다가 김좌진장군이 암살될시 그 현장목격자였던만큼 그 누구보다 신빙성이 있는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니? 그래 이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사람을 어디가서 찾는단말인가? 우리는 그들을 어디까지나 존중해야하거니와 응당 믿어야하는 것이다. 그 두분이 왜서 다 같으게 저의들의 회억록에 “강경애는 김봉환의 동거녀”라했고 “김좌진장군교사공범”이라 밝혔겠는가. 아무렴 없는 일을 짜고서 그같이 허무하게 꾸며댔단말인가? 그럴 수 있을가? 하필이면 왜 “여문인 강경애”, “화요파 김봉환”이라 딱 찍었겠는가말이다.

   내가 나의 첫문장에서 김좌진전을 쓴 과정을 말하면서 필수되는 자료들은 거의 김좌진의 딸 김강석(金剛石)누님한테서 얻은거고 리을규가 쓴 <<시야 김종진>>을 의거로 삼았다했고 그보다도 내가 더 믿음이 간것은 강석누님이 “소설인지 뭔지 쓴다는 에미나색끼가 그 화요파 사내새끼하고 들어붙어 놀면서 짜고 그 짓을 한거야!”하고 몇 번이나 곱씹어 저주를 퍼붓는 그것이였다고 했다. “소설을 쓴다는 에미나”가 강경애고 “화요파 새끼”란 김봉한을 가리킨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 김좌진이 암살되던해에 겨우 두 살을 잡았는데 산동에서 들어간 한족(漢族)리씨 손에 있다가 장례를 치르고는 독립군들의 손에서 자라면서 그들이 알려줘  머릿속에 꼭 박혔기에 내내 저주를 품어왔다고 한다. 그래 있지도 않은 일을 독립군들이 꾸며 그렇게 알려줬겠는가? 그럴리야 만무한게 아닌가!  이거야 더 변론할 여지가 없잖은가!

   장춘식선생은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김헌순의 주장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하겠다. 강경애가 황해도출신이고 광복후 강경애의 남편인 장하일이 조선에 나가서 활동했기 때문에 김헌순의 이런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데 나도 바로 그 생각이다.   

   

   전에 량환준선생이 살아계셨을적에 김좌진피살설을 놓고 조선족력사학계가 두 진영으로 대립된였던 것도, 중국민족학회의 한중관회장을 중심으로 강경애의 남편이 한짓이라고 주장한 것도 다 무리가 아니였다고 본다. (동거인 김봉환을 남편이라했을 수도 있었고.)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론쟁이 격렬했던 것 만은 분명한데 내 생각에는 이제는 더 강경애를 감싸려고 계속 강짜를 부리지 말고 이 일을 계기로 그를 새로이 재다시연구하고 평론하는것만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본다. 내가 그 어떤 개인적인 악감을 먹고 강경애를 명성더럽게 한다고는 생각말라. 내 출발점은 그렇지 않은거다. 그녀를 제대로 규명하자는 것 뿐, 우리 모두가 후세에 욕먹을 짓을 하지 말자는 거다. 나를 늙으막에 웃기지 말라는데 그말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연변의 온 문학계에 미움을 사고 짓몰리우더라도 할말은 하고 할 일은 마감까지 해야겠다. 내 고집이 굳어질 뿐이다.   


    

                                                  2010.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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