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
김송죽
꼭 해답하기 바란다.
<<강경애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수 없다.>>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나의 두 문장이 련이어 싸이트에 오르니 반응이 인차 생겼다. 이미 짐작한바였고 바라는바였다. 나는 나의 이 두 문장이 문학계뿐만아니라 온 연변땅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것을 알고있다. 당연한 일이다. 물의를 일으켜야 한다! 일으켜도 크게 일으켜야 한다! 이것도 내가 바라는것이다!
우선 내 자신이 접수하지 않을 수 없는것은 강경애의 문학비를 세운 일도 몰랐거니와 강경애원상복구한 일도 인제야 알게되였으니 내가 너무나 “정보에 무관”했다는 지적이다. 나는 확실히 그러했다. 이게 몇핸가? 그 기간에 뭘하고있다가 뚱딴지같이 이제야 튀여나와서 이러는가 할 것이요, 다 안정된 평온을 뒤흔든다고 할 것이요, 소란을 피우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고의적으로 이날을 기다려온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기바란다. 하기에 나는 나의 첫문장의 첫머리에 그 원인을 명백히 밝혔던것이다. 변명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뭔가. 만약 10여년전 그 당시에 정녕 알았더라면 나는 골이 터지더라도 나서서 “강경애문학비”를 못세우게 견결히 막았을 것이다.
한데 내가 “정보에 무관”한 사람이라는 그 리유로 강경애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하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백년이 지났다해도 운운할 일은 운운해야한다. 당신들이 연변땅에다 “강영애문학비”를 세우지 않는다해도 그녀의 “친일행각”, “살인공모죄”는 아무 때건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언녕 문학계에 반영하리라 작심했지만 너무 미룬것이 잘못이다. 나는 내가 쓴 김좌진전 <<설한>>을 문학평론가 최삼용선생께도, 이미 작고한 연변대학의 정판룡선생과 권철선생 두분께도 증송했으니 연변에서는 어느 정도 알게되였으리라 믿은것도 있은것이다.
나의 두 번 째문장을 읽어본 분이 “한국 광복회장의 이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고 하는데 당신이 운운하는 알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묻노니, 그래 당신은 그의 저작을 대체 몇권이나 읽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학자라면 독서에 무관하지는 않았을 텐데. “요란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다”는데 나는 당신의 그 말이 무리하기 짝이 없다고 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독립투사였고 당당한 력사학가인 이광훈선생을 너무나 하찮게 보고 고의적으로 비방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졸열한 행위로 밖에 되지 않는다. 좀 성근하고 자중하는게 좋겠다.
한국 광복회 회장 李康勳先生이 력사의 흐름과 대사건에 “관건적인 족적”을 남길만한 인물은 아니였다는데는 그것이 그래 그가 쓴 저작을 믿을수 없는 리유로 된단말인가? 그가 당신이 말하는 이른바 “관건적인 족적”은 남기지 않았어도 그 당시 신민부의 간부였고 김좌진장군의 장례문제를 토의하느라 만주 유지 95명이 모였을 때도 참석하여 토론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사건당시 그곳에 있은것이다. 이광훈은 자기의 회억록에다 “강영애는 김봉환의 동거녀”였다고 밝혔거니와 “백야 김좌진장군 교사공범”이라고 딱 찍어 말했다. 그의 회고록뿐만이 아니였다. 김좌진장군의 재종제 시야 김종진의 “전기”에다도 그같이 밝히였다. 그 전기는 김종진과 함께 김좌진을 찾아와 그를 설득시켜 원래의 新民部를 韓族總聯合會로 개조케 한 무정부주의자 李乙奎(본명 金明源)가 쓴 것이다. 나는 그 전기를 의거(依據)로 삼은것이다. 그는 山市站 韓人學校에 普通通信處를 세우고 김장군의 장례를 주관하기도했다. 이광훈과 같이있은 증거다. 당신들이 말하는 “관건적인 종적”을 남길만한 사람이란 표준이 대체 무엇인가? 이런 사람이 쓴 글도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리해를 돕기위해 두분의 상황을 알린다.
◎ 李康勳: 大統領表彰 駐中日公使暗殺
◎ 李乙奎: 大同團事件으로 四二九六年三月一日. 建國功勞大統領表彰受賞
나는 당신들은 똑똑한 근거도 없어갖고 제멋대로 억측한다고 본다.
(1) 김좌진전이 한쪽세간의 풍설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이라고?
(2) 분분한 소문의 한갈래를 받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3) 그것을 주장하느라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실을 외곡한다고?
(4) 그런식으로 력사학자도 아니면서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고?
좋다! 그럼 내가 그래 굳이 당신들이 금고봉처럼 여기면서 내세우는 그 80년대초엽까지 연변에서 살아계시면서 연변교육출판사 사장을 지낸 화요파 거물급인물 량환준선생의 ”증명“도 꼭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묻노니, 당신들이 내놓은 말처럼 그가 대체 어떤 ”관건적인 족적“을 남겼는지 대답해보라! 당신들은 지금 내앞에서 궤변을 부리고있으니 어처구니없다. 당신들은 량환준이 ”김좌진장군을 직접 사살한 사건의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또 친하게 지냈던 산증인“이라면서 량환준선생이 공도진(이봉림)께서 직접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봉림이 김좌진을 죽이였다는 증거는 뭔가 그것을 내놔라. 량환준이 그한테서 직접 들었다해도 전혀 믿을 수 없다. 과연 리봉림이 ”딱친구” 량환준에게 김좌진을 죽인게 자기였다고 말했다면 리봉림은 알짜 나발을 불기 좋아하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리복림이 정말 그런 거짓말을 했을가? 그럴리없다. 구천에 간 항일투사를 그런식으로 증명인으로 내세우지 말라. 그를 살인흉수로 만드는것으로밖에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한심한 모독이다.
“모두 짜고들어 몰아붙이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그때는 내가 공도진에게 잘못들었던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번복하기도했다”는 사람의 말을 곧이듣는 당신들이야말로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공산당원이면 의지가 대개 굳은줄로 아는데 필경 로당원이였을 “거물급”인물이 태도가 그렇게 애매했다니 리해가 되지 않는다. 안그런가? 적에게 고문당했으면 몰라도 동지들이 몰아붙인다해서 그가 그런 애매한 소리를 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런 사람의 증명을 다 믿는단말인가? 량환준선생도 남에게서 들은 소리를 옮긴것이지 목격자는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사람을 증명으로 내세우는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피우는거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고있는게 아닌가?
“더욱 주요한 증인은 흑룡강성 화천현 위생국장을 담당한적 있었던 항일투사 량재문도 리복림의 밑에서 교통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김좌진은 리복림에 의해 사살사실을 잘 알고있었고 력사학자들이 량재문을 방문하여 취재할 때 이와같은 사실을 증명한바있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는 나도들었다. 나는 그곳서 50여년간을 살다가 북경에 온지 이제 몇 해 안된다. 나는 그분한테서 들은게 아니라 떠도는 소문을 들은것이다. 아마 어느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겠지. 하기에 나는 일부러 할빈에 계시는 성당사연구소 소장 김우종교수를 찾아가 당사연구실에서 그와 김좌진 피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바있다. 김우종교수도 꼭같은 풍문을 들었다면서 리봉림이 바로 공도진이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나보고 리복림에 대해서는 어느만큼이나 료해하고있느냐고 질문하는데 까놓고말해서 나는 사료들을 보고 당신들이 알고있는것 만큼이나 알았지 리복림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연구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째도 김좌진암살을 직접 획책한 자는 강경애동거인 화요파 김봉환(일명 金一星)이였지 리봉림이 될 수 없음이 명명백백 했으니까.
그 당시의 <<동아일보>>에 공개된 “新民府首領 金佐鎭被殺說 해림에서 청년에게 사격돼 事實眞假는 尙未判”이란 제목의 보도를 보라,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청년에게 사살을 당하였다.”했지 리봉림이라고도 공도진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신문 2월 3일자 <<동아일보>>의 “凶報를 確傳하는 白冶金佐鎭訃音”이라는 보도에도 보라. 김좌진을 암살한 흉수는 김일성(金一星)이라했지 다른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다. 왜서 그렇게 보도했겠는가? 리유는 바로 화요파 젊은이 김봉환(金一星)이 이 엄청난 흉계를 획책한것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래도 믿지 않을건가?
이듬해의 <<동아일보>>9월 11자 신문에는 “故金佐鎭氏下手人 朴相實에 死刑判決”이라는 보도를 실었다. 한것은 그가 바로 김봉환의 사주를 받고 직접 김좌진장군에게 총을 쏜 흉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래 그 당시 신문에 난 이러한 보도들도 믿지 말아야 한단말인가?
한즉 리복림이 김좌진을 “직접사살”했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고 뭔가? 한데도 지금까지도 얼빤한 증거를 내들고 침방울을 튕기니 력사지식이 내보다 많은 당신들이야말로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들의 글에 다른 하나의 표연한 구절, “리복림에 의해 사살된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어느정도 리유가 서는것 같지만 그도 당신들의 주장을 긍정해주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왜 리유가 서는것 같다고 하는가? 그것은 리복림이 그당시는 “화요파”사람이였고 활약자였던것만은 사실이였기 때문이다. 그 누가 김좌진을 암살했던지간에 다른 어느파가 아니고 바로 “화요파”가 꾸미고 저지른 집단적 행위였으니까말이다. 그때의 형편을 보면 “화요파사람”이라 하면 싸잡아 다 김좌진을 살해한 흉범으로 몰아치는 판이였다. 이것도 사실인 것이다.
해방후에 편찬한 <<海林縣誌>>를 보면 백야 김좌진장군은 1993년 7월초에 중앙에서 내려와 평판하기전까지 줄곧 “반동분자”로 락인되여 있었다. 그때는 나라의 정치형세가 그러했으니 그의 암살을 획책했던 “화요파”사람들은 그 누구나 다가 저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떳떳이, 지어는 흡사 대공이라도 세운것 처럼 여기고 자신을 표백했던것만은 사실이다. 과연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짓들이였다, “김좌진을 리봉림이 암살했다”는 명학한 증거도 없어갖고 무던히 오래 버티여냈으니!
“리연록 자신이 구국군에서 공작 할 때 김좌진을 살해했던 리복림을 직직접도와준 일을 이야기하였다.”고 하는데 절반은 믿을 수 있으나 절반은 믿을 수 없다. 리연록이 리복림을 도와줬을 수 있다. 도와줫겠지. 그러나 리연록이 김좌진을 리봉림이 직접살해했다고 말한건 아니지 않는가. 당신들 어디 말해보라, 리연록이 리봉림을 도와준 일이 어쩌면 문제의 증거로 된단말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엠엘파 지희겸 회고담 발표, “리복림이 김좌진을 죽이고 아성으로 도망쳐 온 것을 만났다고 증명”했다는데 그건 그가 그럴수 있다고 본다. 김좌진이 화요파의 손에 살해된 것을 알자 모험대장 고강산이 치를 떨면서 화요파를 싹 다 잡아치우겠다면서 눈에 쌍불켜고 펄 펄 날뛰였으니까. 화요파사람을 싸잡아 다 흉수로 락인했던 살벌한 세월이였다. 이런 형편에 리봉림은 아성으로 도망친 거고 지희겸은 “그가 김좌진을 죽였다”고 했을 수 있은것이다. 지희겸이 목격자는 아니지 않는가.
이광훈이 “공산주의자들이 대륙의 호랑이로 보고 제일 무서워하고 꺼리는 김좌진”이라고 한 것을 봐서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를 제일 미워한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그 전까지는 주의주장이 다름으로 하여 모순이 있어서 가끔 마찰은하지만 대방을 상해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김좌진의 사람들에게 납치되여 귀가 잘리우기도 하고....”는 그 후의 일인것이다. 전후의 일을 한데뒤섞지 말아야 한다.
이점은 김좌진이 당시 전만주의 독립혁명자들을 한데 묶어세 울 목적으로 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회를 내온 것만으로도 증명이 되는 것이다.“빌억먹을놈의 당파심!” 이는 그가 독립진영내의 분렬을 제일 싫어하고 분렬조작자들을 증오한 표현이다. 그가 시종 부르짖은것은 한데 뭉치고 단결하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견강한 항일투사였던 그가 살해된 후에는 “살인마귀”로 변하고말았다. 이 모든 것이 본성이 악렬하여 불렬활동을 “혁명”으로 여긴 화요파의 소행이였다! 하늘이 내려다보고있다. 그자들의 작간으로 오도된 력사가 김좌진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을,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제에게 빼앗긴 고국땅을 되찾자고 만주땅에 들어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피흘리며 싸워온 모든 독립군을 지금까지도 우습게 보면서 지어는 추악하고 흉악한 토비로까지 몰아붙이니 그야말로 격노발검(激怒拔劍)할 일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화요파”사람의 “증언”을 들고 맞서려드는 사람들은 듣거라, 오죽했으면 사전에 마저 화요파를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겠는가? 다시 한번 숙고하기 바란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 것 처럼 어거지를 부린다”고 하는데 그렇다, 나는 “력사학가”아니면서 제 주장을 뻗치고있다. 나는 력사를 알려고 열중해온 일개 소인글쟁이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내가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외람되는 짓을 했다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교대한다. 나는 어느핸가 력사학회에서 <<중국조선족이 걸어온 력사발자취총서>>를 펴낼 때 과외편집작가로 초빙하니 그에 응하여 북만일판을 편력하면서 력사자료들을 수집했다. 성정부에서 떼여준 소개신을 들고 요하, 부금, 화천, 가목사, 심양 그리고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 등을 찾아가 뒤질만한 당안들은 다 뒤지였다. 그래서 유용한 자료들을 찾아내는 게 내 즐거움이였다. 제 돈을 팔아가면서 까지. 내가 이 말을 하면 당신들은 자식이 “력사학가”도 아닌게 주제넘는 짓을 했다고 할 것이다. 어느핸가 청명절기간에 모교에서 청하니 나는 900명 사생앞에서 꼬박 두시간 동북항일투쟁사를 강의한 적도 있다. 당신들은 력사학가도 교수도 아닌 주제에 “력사를 아는척”했구나 하고 웃을것이다. 나는 력사제재를 다루는 소설쟁이다. 그러니 자연히 력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방직후 “조선족인민들이 당의 령도밑에서 사문동, 마희산 등 토비무리들과 영용히 싸워이긴 피의 력사를 기록한 작품”을 써낸것이다. 먹물을 적게 먹어 지식이 얕다보니 초고를 써서 18년만인 1984년에 연변에서 출판한 나의 첫 장편소설이다. 당신들은 또 력사학가도 아닌 주제에 그런 글을 쓰니 그꼴이였지 하고 웃으리라 본다. 한데 나는 그 누구든 “력사학가”가 아니라도 얼마든 력사제재를 다루고 소설을 써낼수 있다는 신심이 골수에 박힌통에 력사학가인 당신들 앞에 비난의 대상이 된 모양이다. 나는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순전히 력사가 맥을 이룬 두 번째의 장편 김좌진전기를 써낸것이다. 그리고 근년에는 세 번째 장편도. 87만자 가량되는 그 책은 북만토비의 항일력사를 다룬것이다. 행운인 것은 민족출판사분들은 다가 지성인들이여서 내 형편, 내 글을 알아주고 내돈 들지 않고 책을 좋게 내준것이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북만토비연구가”로 본다. 당신들처럼 어마어마하게 “력사학가”신분이 아니지만 이따위 자호로나 자신을 안위해야지 별 방법없다. 당신들이 “력사학가도 아나면서 력사를 아는척” 한다고 나를 비난하는데도 도리가 영 없는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당신들에게 묻고싶은것은 력사학가가 돼야만이 력사관련의 글을 쓸 자격이 되는냐 하는 것이다. 그놈의 규제는 어느 빌어먹을 후례자식이 정해놓은건가?
“김송죽을 포함하여 흑룡강사람들이 김좌진 피살설은 어떤 경제적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해전에 백야 김좌진장군암살지에 장군의 석상을 세웠다니 김강석누님을 모시고 함께 산시(山市)에 갔다왔을 뿐인데 나를 “어떤 경제적 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한다니 험한 소리다. 경제와 내가 글을 쓴게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말인가? 이렇게 날조해도 되는건가? 당신들이 나를 무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싶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어른들인지 내가 그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당신들은 공공연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 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고 나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이런 비난을 듣고보니 새삼스레 내가 “문화대혁명”때 당한 일이 회상된다. 소설을 쓴것이 죄가 되었다. 나는 등척을 보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나를 등척의 졸개라며 잡아내여 투쟁했다. 하루는 마을사람들 앞에까지 나선건데 로당원이요 우리마을에서는 제일 어른이라는 분이 나보고 공부를 얼마했느냐고 묻길래 나는 초중을 졸업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어른분이 하는 소리가 “야 이놈아, 네가 소설을 쓴다구? 거꾸로 들고 쪽 훓어봤자 똥물밖에 없는 주제에. 야, 야, 메스껍다 메스꺼워!” 하면서 춤까지 뱉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철부지 애들을 추겨 새끼로 내 목을 매여 회술레를 했다.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나는 박사도,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주제에 책을 쓴 것으로 하여 그와 꼭같은 비난을 받고있다.
“력사학가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린다”느니 “역사학가인 나도 안그러는데 자네가 뭘안다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가?”느니.
묻노니, 그래 력사학가라야만이 왈가왈부할 자격이 되는가?
관속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막말은 하지 말랬다. 인간의 제일 악한 심보가 타인의 인격을 모욕하는것이다.
좋다, 당신들이 그리도 당당하다면 나처럼 시시비비에 이길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 당신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대답하라! 정녕 내놓는다면 나는 굴복할것이요 그러지를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을 내 발까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을것이다. 그대가 교수건, 박사건, 력사학가건 !
2010.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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