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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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2010년 01월 11일 19시 52분  조회:2106  추천:20  작성자: 김송죽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      


 (북경) 김송죽



  연변의 문단에서 강경애에 대한 료해를 진일보 명확히 하게끔 도우려는데서 한국 광복회 회장 이광훈선생과 그의 글을 소개한다.

  이광훈회장의 경력

   1903年 江原道 金花 出生.
   1909年부터 8年間 私塾에서 漢學을 배움.
   1920年 4月부터 上海에 根據한 臨時政府國務總理室에 1年間 奉仕.
   1921年부터 3年間 間島師範學校에서 修學.
   1925年 北滿 新民部에 加擔.
    同年 10月 日帝무리에게 매수된 寧安懸警에 逮捕되여 8名의 府員과 함께 근 1年間 獄苦를 치룸.
   1926年 9月부터 1932年까지 기관傘下 各學校에서 校務를 擔當.
   1932年 겨울 再次 滿洲를 脫出 上海로 亡命.
   1933年 駐中 日本使節 等을 폭살하려던 六三亭義擧에 앞장섰다가 日警에게 체포되어 日本으로 押送되고 1945年 8.15解放으로 東京府中監獄에서 出獄 됨.
   1945年 尹奉吉, 李奉昌, 白貞基 等 3義士유해를 本國으로 奉還하고 國民葬을 주선.
   1946年부터 1960年 4.19전까지 僑胞社會에서 民團幹部로 活動하다가 歸國.
   1969年부터 1983年 6月까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실무자, 독립유공자공적 심사위원으로 봉사하였음.
   1983年 7月  尹奉吉義士 기념사업회 會長.
   1988年 大韓民國光復會 會長.
 
   著書
   在日時 <<海外獨立運動史>>. 독립운동편찬위원회 간행인 독립운동     사 제1권 <<의병항쟁사>>. <<독립운동사 대사전>> 卷1, 卷2.
   共著
    독립운동사 제5권 <<독립군 전투사>>
    독립운동사 제7권 <<의렬투쟁사>>
    정음사 간행 <<抗日獨立運動史>>(내가 겪은 독립운동)
    瑞文堂 刊行 <<武裝獨立運動史>>.
    同 <<大韓民國臨時政府史>>.
    其他 기관지의 連載人物인 史論 等 發表된 論文 다수.

    1990년 3월 한국의 歷史編纂會 출판부에서는 광복회 회장 이광훈선생의 편저로 된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을 발행했는데 656페지에 달하는 이 두터운 책에는 적잖은 진귀한 사진과 함께 대한독립항쟁사의 70명 순국선열들의 전기가 수록되여 있다. 보귀한 자료들이다. 이광훈회장은 머리말에『편찬위원회의 실무자로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연 수많은 선렬들의 피눈물 어린 문헌을 다루게 되어 간간이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대목에 부딪힐 때마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희석(稀釋)되어 가는 독립정신의 앙양(昻揚)에 무상의 계명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자기가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리유를 말했다.  

   이 책에 10페지되는 <<백야(白冶) 긴좌진(金佐鎭) 장군>>전기도 들었는데 거기에 밝혀진 강경애에 유관한 자료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이중삼중의 적에게 신민부(新民府)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중에 남방(南方)에서 만주로 들어온 이을규(李乙奎), 김종진(金宗鎭) 등 혁명투사들을 받아들이여 자유연합원리(自由聯合原理)에 의한 한족총련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거창한 새출발을 하려할 때에 불세출(不世出)의 애국영웅(愛國英雄)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은 흉탄(兇彈)에 맞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백야(白冶) 긴좌진(金佐鎭)장군을 살해한 주동자(主動者)는 밀양(密陽)출신의 김봉환(金鳳煥)으로(일명 一星) 김성숙(金星淑)(임시정부국무위원)과 같이 동래(東來) 범어사(梵魚寺)에 승적(僧籍)을 두었었다.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중국북경(中國北京)으로 가서 레닌, 마르크스주의에 공명(共鳴)하고 활동하다가 김성숙(金星淑)은 남방(南方)으로 가고 김봉환(金鳳煥)은 북만(北滿)으로 향하여 혁명투사들의 내왕(來往)이 빈번한 중동선해림참(中東線海林站) 역에 정착하였다. 이 시가(市街)는 공산주의자들이 래왕도 빈번하나 정착한 한인(韓人)은 대개 표면상으로는 신민부관내(新民府管內)이므로 신민부의 부원(府員)이며 지방 총변부(總辨府)의 사무소도 여기에 위치해있었으나 김봉환(金鳳煥)은 여류문인 강경애(姜慶愛)와 동거생활(同居生活)을 하면서 신민부(新民府)의 기관지(機關紙),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기고(寄稿)하여 부(府)의 사업을 옆에서 내조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할빈시로 갔다가 일본영사경찰(日本領事警察)에 체포되어 심문(審問)을 받고있던 중 할빈 일본총사령관경찰서(日本總司令官警察署)의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 취체담당경부(取締擔當警部)로 한국말에도 능숙한 송도(松島)라는 자가 놈들 상부(上部)의 지시를 받고 해림(海林)에 있는 김(金)의 애인 강경애(姜慶愛)를 꾀어 할빈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돼 있는 김을 면회(面會)케하여 결국 김봉환(金鳳煥), 강경애(姜慶愛), 송도(松島) 3자(者)가 밀회(密會)를 나눈 뒤 즉석에서 김봉환이 석방되였다. 김봉환도 고등교육을 받은 자라 번민이 많지만, 왜놈의 감언리설(甘言利設)에 넘어가 나쁜 마음을 품게되였다. 무거운 형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옥고(獄苦)를 면하게 되었으니 일제의 은혜도 생각해야 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대륙(大陸)의 호랑이로 제일 무서워하고 꺼리는 김좌진(金佐鎭), 또 애인과 공락(共樂)하면서 생활보장도 될것 같으므로 전력으로 일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여 김좌진장군의 목숨을 해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자기의 부하 박상실(朴尙實)을 시켜 흉행(兇行)을 저질렀다. 만인(滿人)이 함께 저주할 대역죄를 지은 것이다.』

   이광훈회장은 『선열들의 거룩한 행장은 피와 눈물로 써야 될 조국광복의 화신(化身)』이라면서 『없어서는 안될 값진 자료임으로 인멸(湮滅)될 염려가 없지도 않아 우선 자료로 남겨둘 의미에서도 사계(斯界)에 관심을 가지신 대가에게 제공하여 일고의 참고라도 된다면 다행』이라고 했다. 

   하다면 그때 흉행을 획책한 김봉환이 몸을 잠그고 있은 조공만주총국(朝共滿洲總局) 아성지부(阿城支部)의 한 개 조직인 해림(海林)의 “화요파”는 어떠한 상황이였는가? 

   그에 대해서 료해하려면 먼저 조선공산당부터 알 필요가 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에 서울에서 일부 맑스ㅡ레닌주의소조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창건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에서 맑스ㅡ레닌주의가 보급되고 로동운동이 장성한 결과에 이루어진 합법적인 산물이였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의 로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의 추동력으로 되었다. 공산당이 창건된 후 맑스ㅡ레닌주의사상은 더욱 광범히 로동자, 농민대중속에 보급되였으며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은 조선국내각지에서 더욱 힘차게 일어났다.
  
  『그러나 공산당은 자체가 가지고있는 결함들로 인하여 대중운동을 목적지향성있게 통일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으며 맑스ㅡ레닌주의 제원칙들을 실천속에서 정확히 구현하지 못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당시 당의 지도부에 기여든 화요파, 엠엘파, 서울파 등 각종 파벌에 속한 종파분자들의 무원칙한 파벌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하여 1928년 조직된 력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었다.』  (<<대중 정치용어사전>>조선로동당 출판사 1964년. 323페지)

   『엠엘파ㅡ 서울파가 신, 구 량파로 갈라진 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1926년 4월에 일월회파 및 공청만주총국파 등과 결탁하여 <<레닌주의자동맹>>이란 그루빠를 조작하였는데 이를 엠엘파라고 한다. 엠엘파분자들은 192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에 기여들어 당시 당지부가 검거된 기회를 리용하여 당내 <<헤게모니야>>를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들 간의 싸움은 극도에 달하였다.』 (동사전 513페지)

   『화요파ㅡ 1924년에 <<신사상연구회>>를 개편하여 조직한 화요회계통의 종파집단을 말한다. 화요파는 1920년대 우리 나라에서 장성발전하는 로동운동과 기타 대중운동을 분렬시키고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이다.』 (동사전 455페지)
   
   사실이 말하다싶히 조선공산당은 분렬된 종파지간의 알륵과 갈등으로 서로 물고 뜯고 하여 혁명에 해만 끼치였기에 1928년에 이미 공산국제에서 해산시킨것이다. 하건만 원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화요파성원이였던 김동환같은 자는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거니와 “사이비한 혁명자”의 본성을 고치지 않은채 이른바의 “주의주장”을 운운하면서 진정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있는 혁명자들을 적대시하였거니와 종당에는 원쑤 일제의 충견으로 완전변질하여 “만인이 함께 저주할 대역죄”를 짓고 만 것이다.
   녀류작가 강경애는 어떤 인물이였가? 그의 작품이 얼마나 적극적이든 진보적인든 간에 그것을 론할 일이 아니다. 국경을 두번이나 넘나들었던 그녀의 발자국은 그저 졻다란 간도땅에만 찍혀진게 아니였다. 내가 쓴 김좌진전 <<설한>>에도, 이광훈선생이 쓴 대한독립항쟁사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에도 밝혀진바와 같이 그녀는 북만까지 깊숙이 들어와 활동한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강경애는 간도용정사람인 장하일에게 시집가기 전에는 조공만주총국 아성지국의 화요파사람 김봉환의 동거녀였는데 “신민보사건”에 걸려 일본령사관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되여 있는 제 애인을 빼내오고는 역적이 되어 일제가 시키는대로 애인과 함께 흉살을 꾸민 용서못할 죄범이 된 것이다. 이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강경애를『백야 김좌진장군 암살교사공범』이라 한건 틀리지 않다. 어쩌면 틀린단말인가? 그가『용정의 비암산에 강경애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 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도 인물이 없는가』격분한것도 당연하다. 왜 격분하지 않고 한탄이 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2005년 문화인물”로 강경애를 선정했다는데 나는 선정위원회의 그 “각 시, 도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았다는 “13명전문가”의 수평도 그렇고, 한국문화부의 어른들이 대체 지식수양을 제대로 갖추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일을 당하여 국가보훈처에서 국장을 지낸 분의 제의도 받아들일줄을 모르다니? 민주가 발양되는 국가여서 그 꼴인가?
     
   연변도 마찬가지다. 한국관광부의 결정이였다고 믿고 깊은 고려도 없이 그저받아들인게 아닌가? 응당믿어야 할데를 믿지 않고 도외시한것 같다. 국가보훈처나 아니면 대한민국광복회와 물어나보았는가? 탐문이라도 했더라면 일이 이같이는 되지 않았으리라. 전에는 채 연구되지 않아서 모르고있었다면 리해가 되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 시대를 겪어온 사람의 진술마저도 믿으러 하지 않는다면 리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강경애의 문제는『친일행적』에 드는것이니 그 엄중성을 가히 짐작하리라믿는다. 한데도 어떻게 하고있는가?.... 강경애가 김좌진암살에 참여한 공범인것이 빤한데도 시간적관계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추리해낸 년도수 1931을 의거로 삼아 강경애가 김좌진암살공범으로 될사이도 없었다느니 어떻다니 주장을 세우는건 무리인 것이다. 한 두 번의 단편적인 언급이였다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진술이였다면 근거가 철저하니 믿어야 한다. 그것이 정신병자가 죄친 허튼소리야 아니였겠지?

   연변 비암산중턱에다 “강경애 문학비”를 세웠다면 필경 문예계에서 처음 발기를 했을것이요 정부차원에서도 지지와 동의를 했을것만은 사실인데 과연 의문스럽다. 어쩌면 이같이 중대한 문제를 얼떨떨히 대하고 처리한단말인가? 왜 좀 유관부문에 물어 연구해보지도 않고 서둘렀는가말이다? 내가 말하는 “유관부문”이란 광복회와 국가보훈처를 념두에 둔것이다. 친일행각에 대한 조사는 물론 그 결정과 처리문제에 들어가서는 아마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제일 발언권이 있으리라 믿는다. 한데도 그들의 말과 증명을 믿지 않는다면 그래 누구의 말, 누구의 증명을 믿는단말인가? 연변에서는 이 점을 알고있었겠건만 너무나 무시한게 아닌가?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것은 규정해야한다, 후세에 욕을 먹지 않으려거든!  
              
                                               
                                                 
2010.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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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의문
날자:2010-01-18 11:25:56
위 전기에 나오는 강경애(姜慶愛)는 우리가 알고 있는 녀류작가 강경애(姜敬愛)와는 한자명이 다르군요. 글쓴이가 옮기면서 오식한 건가요, 아니면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인가요?
2   작성자 : 진실
날자:2010-01-12 01:31:09
\"유력한 견증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림\"이라고 하시는데, 이광훈은 그 시대 정확히 그 사간의 간련자는 아니다. 그도 세간을 풍설을 얻어들었을 뿐이지만, 직접 관련자들에게서 사실을 전해들은 당사자들이 적지않게 해방후까지 중국에 살아있었다. 리연록장군 - 항일련군 4군 군장 - 해방후 삼강성 성장을 지내면서 흑룡강의 토비부대를 숙청하는 일을 전반 지휘했다. 사문동 리화당 등 유명한 토비들이 모조리 리연록이 직접 조직 지도하였던 부대에 의해 숙청되였다. 리연록은 1980년까지 살았는데...그도 회고담을 발표하여 자신이 구국군에서 공작할 때 김좌진을 사살했던 리복림을 직접 도와준 일을 이야기하였다 지희겸- 연변대학 력사학교수였다. 일찍 조선공산당 엠엘파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주하중심현위 (오늘의 상지시) 제1임 서기였고 리복림은 그의 밑에서 한때 일했던 적이 있었다. 지희겸도 회고담을 발표하였는데 그가 말하는것을 적어둔 록음테프가 보관되여있다. 지희겸도 리복림이 김좌진을 죽이고 아성으로 도망쳐온것을 만났다고 증명했다. 더욱 주요한 증인은 흑룡강 화천현 위생국장을 담임한적 있었던 항일투사 량재문도 리복림의 밑에서 교통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김좌진은 리복림에 의해 사실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력사학자들이 량재문을 방문하여 취재할 때 이와같은 사실을 증명한바 있다. 김송죽씨! 한국 광복회장의 증명이 이들 직접 생존했던 관련자들의 친구나 전우들이 회고했던 증명보다 더 신빈성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한국 정부에서도 리복림의 사살설에 대하여 한마디도 부정하지 못하고 잇습니다. 그들에게는 증인이 없으니까요. 김송죽씨의 \"설한\'은 이런 한쪽만의 세간의 풍설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이고 그것을 주장하느라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실을 외곡하려고 하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력사학자도 아니면서 력사를 아는척하고 어거지를 부리시면 안됩니다. 강경애를 모독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1   작성자 : 진실
날자:2010-01-12 01:18:37
한국 광복회장의 이력이 대단한것은 사실이지만, 요란하기만 할뿐 알맹이가 없다. 그 시대에 분주스럽게 뛰어다녔던 열혈청년이였던것은 사실이지만 력사의 흐름과 대사건에 관건적인 족적을 남길만한 인물은 아니였음을 알수 있다 또한 그의 이력서에서 김좌진장군의 피해사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지도 못하다. 때문에 그의 증언이나 기술도 그때 세간에 나돌았던 분분한 소문의 한 갈래를 받아 기술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좌진장군을 직접 사살한 사건의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또 친하게 지냈던 산증인이 지난 세기 80년대 초엽까지 연변에서 살았다] 연변교육출판사 사장을 담임한바 있었던 화요파 거물 량환준선생이였고 량환준선생은 자신의 딱친구인 공도진 (바로 리복림)에게서 적집 들었다. 후에 공도진이 아성현위 제1서기가 된후 량환준도 아성현위 선전부장직을 담임했던적이 있었다. 후에 조선족 력사학계는 김좌진 피살설은 놓고 두개 진영으로 대립했다 연변대학의 박창욱 등 학자들을 중심으로 공도진의 사살설을 인정했고 중국민족사학회 한중관회장을 중심으로 강경애의 남편이 한 짓이라고 주장했다. 흑룡강에서는 주로 해림시에서 시장을 담임했던적 있있었던 원시희 등 사람들이 김좌진의 이름을 빌어 흑룡강땅에 투자유치를 하려는 목적으로 한국 정부와 접촉까지 시도했고 당시 한국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에게까지 입김을 넣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활동을 진행한바 있다. 그들은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사살당했다는 사실을 극력 부정해야 했다. 물론 리복림이 조선공산당원 시절에 김좌진을 사살했지만. 그는 인차 중국공산당원에 가입했으며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의 고위직에 올랏다. 죽을 때까지 북만성위위 조직부장이였고 합동유격사령원이였다. 중국민족사학회에서는 량환준이 살았을 때 모셔다놓고 당신이 증언한것이 틀렸다고 몰아붙였던 적도 있는데, 당시는 한준광 (일찍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담임) 등이 길림성인대 주임 최림 등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렸다 그들의 학술회에 초청되였던 량환준은 80고령이였고 조금 치매증세도 있었다 모두 짜고들어 몰아붙이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그때 내가 공도진에게서 잘못 들었던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번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량환준은 죽기전에 이와관련한 회고담을 글로 적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력사를 그런식으로 외곡해버렸다고 증언했다 김송죽을 포함하여 흑룡강사람들이 김좌진장군의 피살설은 어떤 경제적 목적으로 굳이 다르게 오도하는것은 옳지 않다. 김좌진은 항일투사이지만 분명한것은 철두철미한 반공분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김좌진의 손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항일청년들의 피가 묻혀있다 때문에 그때 형편에서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공산당 화요파가 무장대원을 파견하여 김좌진을 사살한것에는 그들로서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들을 찾아오는 사회주의 청년들이 중동선상의 철도를 지나다니다가 김좌진의 사람들에게 잡혀 납치되기도 하고 귀가 잘리기도 하고... 이런 사실을 김송죽씨는 왜 외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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