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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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의용군항일운동과 토비 댓글:  조회:7273  추천:12  2011-06-16
        의용군항일운동과 토비        (장편소설 <<관동의 밤>> 머리말을 대신하여)                                김송죽   “9.18사변”이 일어나자 당시 유생력량을 집중하여 반인민적인 내전을 벌리고있던 장개석은 동북군에 “절대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산해관 이남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투항행위였다.    하지만 일본침략군의 도살과 유린을 받아 망국멸족의 위협을 심심히 느끼고있던 동북 여러 민족 인민의 반일감정은 점점 높아갔는바 드디여는 민족을 불문하고 각 계급과 계층이 항일투쟁에 궐기하는 고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동북군경(軍警)의 부분적인 애국군관 이를테면 마점산(馬占山), 리두(李杜), 풍점해(馮占海), 소병문(蘇炳文), 왕덕림(王德林)과 같은 사람들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구국군(救國軍), 자위군(自衛軍)의 기발을 들고 항전에 나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동북의 광범한 로동자, 농민, 지식분자들은 물론 부분적인 지주들마저 구국군과 자위군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종교형식의 반일조직이였던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槍會)에 들어 항전에 나섰다.    그들뿐만이 아니였다. 허다한 록림대 역시 분분히 “반일삼림대”의 기발을 들고 침략자를 때려엎는 혈전에 떨쳐나섰으니 1932년 여름까지 상술한 항일무장인원수가 무려 30여만ㅡ 이것이 바로 한때 동북에서 성세호대하였던 의용군 항일운동인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는 록림대란 바로 토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불가사이한 일 같지만 당시는 토비도 항일에 나섰었다. 그때의 의용군성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땅을 잃고 파산당한 농민이 50%, 퇴역군인이 25%, 지식분자가 5%, 토비가 20%였다. 한즉 20%의 그 토비무장력이 동북의 의용군항일운동에서 일으킨 작용을 우리는 결코 도외시할수도 무시할수도 없다는 그것이다.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니 아닌가!        어느때부터인지는 딱히 알수 없지만 인간이 살고있는 이 대천세계에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ㅡ 비(匪)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를 어떤 곳에서는 호자(胡子)나 향마(向馬)라 했고 어떤 곳에서는 토비(土匪), 마적(馬賊) 혹은 비적(匪賊), 봉자수(烽子手), 강도(强盜)라 불렀다.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이 무리들도 점차 변하면서 발전하고 성숙해져 자기들의 조직기구를 가지게 되었고 두령을 선거하는 방법이 있게 되었으며 자기들의 종교와 신앙이 따로 생겨났고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었으며 지어는 자기들만의 언어와 풍속도 따로 생겨나 하나의 “업종”을 이루게되였던것이다.        예전에 동북을 일명 관동(關東), 혹은 만주(滿洲)라 불렀다. 청조말부터 민국년간 여기에 토비가 소털같이 많았다고 하니 그것은 국세가 혼란했던 당시의 형세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중국에는 “개가 급하면 사람을 물고 사람이 급하면 록림객이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사실 틀리는 말이 아니다. 나쁜짓을 하고 쫓기우다 죽을 고비에 이르러 승천입지(昇天入地)를 할수도 없으니 토비로 된 자가 있고 빚을 지고 갚을 길없으니 도망쳐 토비로 된 자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길림회정(吉林滙征>>에 기재된걸 보면 명조(明朝)의 영락(永樂)년간부터 조정에서 일을 저지르고 추방된 죄신(罪臣)들이 관동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산은 높고 황제는 먼지라 그런자들 중 어떤 불량한들은 토비로 전락되고만것이다.    재물을 탐내여 토비로 된 자가 있는가 하면 벼슬을 하기 위해서 토비로 된 자도 있었다. 오죽하면 “벼슬꿈을 품었거든 토비노릇부터 하라”는 말까지 나놨겠는가!    한때 동북에서 패왕(覇王)으로 불리웠던 장작림(張作霖)이 바로 그렇게 해서 출세한 사람이다. 그의 출신이 바로 토비였던거다.        토비를 류자(綹子)라 하는데 관동의 토비는 주로 막잡이(遵土匪)와 살부제빈(殺富濟貧) 두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다.    막잡이ㅡ 이런 류자들은 기와가마(큰 부호)는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전문 가난한 백성의 물건을 로략질하거나 인질을 잡아갔다. 보통 7,8명이 작당하여(起局이라 함) 싸다니면서 나쁜짓을 서슴없이 감행했는데 지어는 혼자서 이름을 내걸고 해먹는 놈도 있었다. 백성들이 제일 미워하고 중오한것이 바로 이러한 막잡이토비였다.     살부제빈ㅡ 이런 류자는 전자와 성질이 확연히 달랐다. 그들이 주로 노린것은 대부호인 “큰 기와가마”였다. 이런 토비는 류자수가 수백명 지어는 천여명에 이르는것도 있었는데 두령은 담략이 있고 수하에 둔 팔대금강(八大金剛)이라는 내외사량팔주(內外四樑八柱)도 모두 지모가 출중한 자들로 지도부를 결성하고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구국구민(救國救民)”의 기발을 들고 나선 토비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까지 토비로 취급하겠는가 하겠지만 실은 당시 동북의 무장실태를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규정짓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개념상에서 절대 틀리지 않는다. 왜서 그들까지 토비 범주에다 넣게 되는가? 주되는 원인이라면 청말이거나 민국초는 물론 “9.18사변”이 일어난 후에도 그들은 어느 한 정당켠에도 서지 않았거니와 아예 정당 같은것은 믿지 않고 나라의 집권계층에 불만을 품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논것은 물론 기국(起局)으로부터 전반에 이르는 습속, 규률이나 조직형태같은것이 모두 류자의 방식을 본땃기 때문이다.    한편 또 구군대(舊軍隊)중 어떤자들은 수하인원들을 끌고 나와 지반을 닦고 그멋대로 패왕노릇을 했으니 그들역시 토비에 속한것이다.        살부제빈의 깃발을 든 큰 토비무리거나 구국구민의 기발을 든 큰 토비무리를 볼것 같으면 다가 기국 할 때부터 나라의 법 같은건 개떡같이 여기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것을 락으로 삼고 자유를 제창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막잡이 떨거지 토비와는 달라서 일반적으로 백성에게 해를 주지 않고(그들의 10계률을 보아서.) 토호와 대부호 혹은 돈많은 자들만 목표로 삼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지어 도와주었다. 하기에 백성들한테는 미움을 사지 않았다. 그러한즉 따지고 보면 그들 우두머리를 두뇌가 없다고 여길것이 아니였다.    평상시 그같이 료략질을 일삼아 온 그들이였건만 일단 외적이 국토를 침략하면 종전의 계급모순은 잠시 제쳐놓고 민족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항쟁에 나섰다. 왜서 그렇게 했겠는가? 한것은 바로 그들이 가슴심처로부터 내가 중국사람이 옳으냐? 옳다면 침략자를 몰아내고 내 국토를 지켜야 한다고 자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오가 있음으로 하여 그들은 그 어느 한 정당의 설복이나 고동을 받지 않고서도 자발적으로 외적을 항격해나설수 있은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의로운 애국행동은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념원과 맞는것이다. 하기에 그 행동은 광범한 인민대중의 갈채와 지지를 받게 되었던것이다.        동북 토비가 의용군 항일운동에서 주도적역할을 논것은 물론 아니다. 워낙 인간성이란 꼬물만큼도 없는 적잖은 지방토비들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 같은건 근본 념두에 두지도 않았거니와 불난틈에 도적질하듯 그 혹심한 재난의 와중에도 료락질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질까봐 겁나서 산속깊이 숨어 형세 발전이나 보면서 안일한 나날을 보낸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량심있는 류자들은 그러지를 않았다. “9.18사변”이 일어나자 상점(常占), 청산호(靑山好), 군자인(君子仁), 사계호(四季好), 공평(公平), 로삼성(老三省)을 비롯한 무려 20여개의 이름이 쟁쟁하던 상습토비와 국(局)을 새로 만든 천호(天虎), 조참모장(趙參謀長), 진군(陳軍), 전사령(田司令), 명산(明山)을 비롯한 여러 토비조직들은 용약 항일에 떨쳐나섰던것이다. 성화(聖化)에서 활동하고있던 무송의 왕지도(王志道)와 같은 유명한 토비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 로씨야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용약 떨쳐나서 싸웠을 뿐만아니라 후에는 또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항일운동에서 적극적으로 싸웠던것이다.        당시 의용군은 주로 백성들의 손에 널려있는 총들을 거둬가지고 자체를 무장해야 했었다. 그러다보니 총들이 각양각색이여서 탄알이 떨어지면 구입하기가 과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하였다. 그들은 총외에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도 갖고있었다. 한데 그 수자가 얼마안되였다. 인원에 비하면 무기는 태부족인 형편이였던것이다. 그 실례로 료녕의용군만 보아도 그러했다. 료녕의용군은 초기 집계된 인원수가 20만명이 넘었는데 총은 13만여자루밖에 안되였으니까. 하여 그들은 부득불 창이나 칼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다.        1932년도 화천현 타요자금광(지금은 화남현에 속함)에서 금광을 지키는 일본군의 손에서 무장을 빼앗아 자기를 무장하고 기국한 기치중(祁致中)의 명산대(明山隊)는 후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일련군 제11군으로까지 발전하였는바 전성기에는 1,200명의 호탕한 기병대로까지 발전했다. 그 대오를 개조하여 강력한 항일무장부대로 만들기 위해 내부로 뚫고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로심초사를 한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치부주임이 되어 26세의 열혈의 생명을 바친 우리 조선족동포청년 김정국(金正國)이다.        항일에 나섰던 오랜 상습토비들은 거개가 총을 잘 쏘는데다 지형에도 익숙하였기에 유격전을 하는데서 언제나 선줄을 끌었다. <<성화료원(星火療原>> 제4집에 실린 “설야에 당니귀를 끌다”라는 글을 보면 1933년도 겨울에 항일군을 소멸하려고 나섰던 300명의 일본군 “토벌대”가 도리여 이쪽의 유인술에 걸려들어 멋모르고 북만의 미궁과도 같은 림해(林海)에 기여들었다가 길을 잃어 나가지도 못한채 엄동설한에 몽땅 강시(殭屍)로 되었는데 이듬해 눈이 녹고 날씨가 더워지니 사체(死體)썩는 냄새가 골안을 꽉 메워 숨쉬기조차 어려워서 거기로는 사람은 물론 지어는 짐승마저도 얼씬하지 않았다고한다.    하길래 토비는 이켠에서나 저켠에서나 다가 수편(收編)하려는 대상이였다. 명산대와 같이 공산당에 수편되여 항일을 끝까지 견지한 의용군이 있는가 하면 해림(海林)의 8대대(八大隊)처럼 그 어느쪽에도 수편되지 않고 고집스레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방황하다가 나중에는 특무의 간계에 들어 자멸하고 만 의용군부대도 있다. 어떤 토비의용군은, 이를테면 해림 위호산의 장락산(독수리)과 같은자는 몇 번 싸워보고 리득이 없을것 같으니 항일을 하다가 집어치우고는 광복이 날 때까지 산속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선대로부터 해먹던 짓이나 계속하면서 살았다.    또한 소본량(邵本良)과 같은 토비는 일본군에 수편되여 동변도소비 소장총사령(東邊道巢匪小將悤司令)의 급을 위임받고 일본군이 대준 대량의 무기를 들고 일본군비행기와의 배합하에 항일군토벌에 선두로 나서기까지 했다. 일제는 그자를 충복으로 써먹기 위해 심양에다 “소공관”을 지어주고 시녀까지 여럿을 붙여주었다. 그야말로 령혼까지 적에게 완전히 매수된 무치한 한간이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런자들과는 달리 비록 토비출신이기는 하지만 민족심이 살아있는 의용군용사들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주보중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1939년의 초여름, 한때 수천명의 삼림대를 거느려서 이름이 온 동북땅에 날리였던 토비두령 제영전(濟永全)은 위호령(威虎領)에서 마지막 혼자남을 때까지 단신으로 싸우다가 순난한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발성적인 항쟁이였던 동북의 의용군항일운동은 발기초부터 군사, 정치, 물자공급 등 여러방면에서 허다한 곤난을 갖고있었다. 하여 그 운동은 1933년부터 차츰 가라앉게 된 것이다. 30여만의 대오는 오래가지 못하고 붕괴의 일로를 겉게 되었고 얼마 안되는 부대만이 산속에 들어가 항일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대오들은 동북 각지에서 일본침략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안기였는바 동북의 항일전쟁사상에 그들이 쌓은 불후의 업적은 결코 부정할수 없는것이다. 우리의 사학연구에서 실사구시적인 원칙을 지켜 이 점을 충분히 긍정해주고 이를 사료에 남기는것이 바른 자세가 아닐가고 말하고싶다.
110    반도의 혈(5) 댓글:  조회:5767  추천:42  2011-05-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穴)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5.           7월이 다 가고있는 어느날. 서일은 뜻밖에 귀한 손님을 맞이했다. 서울에서 신채호가 찾아 온 것이다. 친구간에 그립던차 서로 만나는지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여기루는 어떻게 돼서?》   《옥저의 옛 땅이 대체 어떤모양인가 볼려구요.》    신채호의 대답이였다. 선생들은 모두 그가 자료수집을 하느라 지방고찰을 나선 사학가인줄로 알았다. 서일은 선생들에게 그가 바로 여러분이 매일 보고있는 大韓每日申報의 주필 신채호라고 알려주었다. 신문사 기자라면 공개적으로 채방을 다니는 것이 직업이니 구태여 신분을 감춰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경원학교 선생들은 모두 명망있는 신문사의 기자가 학교를 찾아온데 대해서 고맙게 여기면서 그를 각별히 친절스레 대했다.   《나는 원산서 배로 청진에 이르러 거기 도청에 들렸다 곧바로 예까지 오는 길입니다. 채방도 채방이려니와 이번에는 주로 구적(舊蹟)을 찾아보자구 떠났지요.》    서일은 물론 박기호나 경원학교의 선생모두가 그의 말을 곧이들었다.   신채호는 얼마전에 이태리의 독립운동지도자 삼걸(三傑)의 업적을 찬양하는 전기의 서문을 써서 신문에 팔표한바있다. 구절구절 깊은 감명을 주는 그 글은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분발시키는 활력소와도 같은지라 지금도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쓴 작자 신채호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지경 심목중에 너무나 친절스레 다가오는 이름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생들은 지어 호기심에 그보고 이번에는 어떤 글을 쓰려는가고 무람없이 캐묻기까지 했다.    《이 지방에서 살았던 여진(女眞)의 두령을 써볼가합니다.》    한데 이런 소리를 듣고 어떤 선생들은 아니 여기서 언제 녀진족이 살았더냐고 머리를 기웃거리는것이였다. 제 고장의 력사건만 분명 모르고있는지라 신채호는 그들에게 함북도가 옛날에는 옥저(沃沮)의 땅이였는데 4군(4四郡)을 두었을 때는 현토군(玄菟郡)이라했고 그 뒤에는 삭방도(朔方道)라 불리여 여진(女眞)의 근거지였다는 것과 옛이름은 영길도(永吉道), 함길도(咸吉道), 영안도(永安道)였고 그때도 의연히 도청소재지는 청진(淸津)이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신채호는 과연 력사를 연구하느라 다니는 사람같아보였다.    그러나 그가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것은 신문보도감을 얻자거나 력사연구를 하기위해서가 아니였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되지 않을 한가지 극비밀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신채호는 서일과 박기호만있는 앞에서 고종황제의 퇴위와 이로 인하여 서울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신문들에 보도가 나갔으니  잘알고있을거라면서 요즘은 서울이 내내 음침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는것이 마치 폭풍우의 전야와도 같다면서 서울시민의 폭동에 관해서 쓴 7월 21일자 첫기사는 바로 자기가 쓴것이라 덧붙여 알려주었다.   《그날 김규식조교역시 멋지게 잘 싸웠지. 시위대를 불러내여 시민폭동에 합세케했으니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운겁니다. 그는 왜놈이 죽도록 미워 이를갈면서 지금도 서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일을 거들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의병장들을 따라배우라 일깨워준걸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앞에서 자기는 아무때건 의병장이 되어 크게 싸워보리라 맹세까지 했거든요.》   《거참 반가운 소식인걸! 만나거든 전하시오, 내가 축하하더라구요.》    박기호가 서일의 말끝을 받아서 그한테 물어보았다.   《한데 요즘은 신문에 소식이 막히는 것 같은데 대체 웬 판국입니까?》   《말두마시오. 통감부 마쯔이로 경무총장이 각 신문사 사장과 발행인을 불러 회를 소집하고는 뭐라했는지 압니까. 한일관계가 소격(疎隔)케 하거나 지방에서 항일무력활동을 하는 것을 의병이라 칭해서는 아니된다느니 은연중 동정하여 이를 선동해서도 안니된다느니 하면서 주의사항 네가지를 시달한겁니다. 그러니 어디 사실진상을 제대로 까밝힐수가 있어야지 원.》    신채호는 언론계에 대한 탄압이 점점 더 가혹해가니 일구란설이라면서 통감부가 방금 내온 신문지법(新聞紙法)이라는게 어떤것인가 좀 보라했다.           신채호는 또한 이또오 히로부미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탄압하여 그 신문이 본래의 취지를 잃게 만들어놓고는 지금은 또 외국인이 자유로 꾸려 온 大韓每日申報마저 눈에 든 가시같이 여기면서 없새치우려고 갖은 수단을 다쓰고있는 중이라했다. 그러니 이 신문역시 서일이 예견했던 바와 같이 십분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였다.    신채호가 경원에 온것은 서울소식을 알려주자는게 아니요 자기들의 신문이 당하는 처지를 공소하자는것도 아니였다. 그렇다면 극비밀적인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인즉 서일을 신민회(新民會)에 가담시키는것이였다. 신채호는 서일과 함께 그의 집에서 밤을 지내면서 조용히 이 말을 끄집어냈다.    신민회란 保護條約이 체결되였음을 듣고 지난해에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안창호(安昌浩)가 이달들어 동지 이갑(李甲),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조성환(曹成煥), 신채호(申采浩), 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조직하고있는 비밀결사였는데 그 목적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방면으로 진흥운동을 전개하여 국가의 실력을 발휘하자는것이였다. 조직방법은 매우 주밀하였는바 회원간에는 두사람이상이 서로 알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서일은 자기의 생명과 자산(資産)을 회의 명령에 의하여 납공하기로 서약하고 주저없이 이 비밀조직에 가입했다.      이틑날 아침 일찍이 일어난 신채호는 희연이가 오심(惡心) 구토를 하는 것을 보고 저으기 놀래며 왜 저러느냐 빨리 병원에 가 보이지 않고 되겠느냐했다. 서일은 제 병인데 뭐 하면서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딸애가 3살먹으니 처가 임신을 해서 입덧이 나 그런다는 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색시얻어 장가갈 궁리는 전혀 하지도 않는 신채호라 그런 지식은 깜깜 무지였던것이다. 서일이 말해서야 비로소 깨달음이 있게되는지 그는 빙그레 웃더니 서일보고 전에 들을라니 서선생은 2대독자라 하는 것 같던데 이천서씨(利川徐氏)네 가문에는 어떤 인물이 났느냐고 물었다.    이에 서일은 고려공신 서희(徐熙)가 있지 않느냐, 자기는 바로 그이의 36대손이라 알려주었다.   《아, 그렇군요! 서희라....내가 고려사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거란의 군사가 협박해 옴에 왕이 땅을 할양하여 강화를 하자하니 그렇게 하는 것은 만세의 치옥이라며 반대해 나섰던 분이 아닙니까. 다른 대신들은 적이 두려워 담판하러 감히 나가지 못하자 이라 하여 자청 대담히 나가 담판석상에서 설전으로 적장을 굴복시켜 결국 유리한 강화를 맺은 장군말입니다.》   《그렇소. 바로 그분이 나의 조상이 되는거요. 거란이 80만 대군을 몰아와 무조건 항복을 강복(降伏)하자 성종은 곧 군신회의를 열어 협의했다누만. 헌데 대개 항복하자고 하면서 서경이북의 령토를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공론이 분분했다는가. 선종은 원래 학문을 숭상하여 문화정책을 중요시한 왕이라 백성을 병화에 휩쓸어넣지 않으려는데서 차라리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는 곡식을 백성들이 마음대로 갖게 하고 그래도 남은 량곡은 대동강에 버리라 명령했다오. 이럴때 그분이 나섰지. 왕을 찾아 감히 론계(論啓)하기를 고 해서 왕이 그것을 중치케했다오.》   《론계가 옳았지!》   《그분은 계속 결전을 주장하면서 만약 강화를 하더라도 싸워 유리한 립장에서 교섭해도 늦지 않다고 상주해 왕을 깨우치게 하셨다오.》   《대바른 주장이였지. 나라에 그런 충신이 없이야 어찌 기둥이 바로서리오. 과연 좋은 분이였지! 고금 우리의 력사에 명장, 명신이 많았으나 한치의 혀를 무기삼아 소국이면서 대국을 상대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입구의 비리를 통박하여 그자들로 하여금 회군케 한 실례야 찾기 힘들지요. 안그렇습니까? 서희의 기지활달한 외교술이 아니였다면 80만대군을 몰고 달려드는 대조귀인(글안의 부마)의 그 오만무례한 강복을 물리칠수 없었을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제 국토를 지켜내자면 외적과는 의례 그렇게 강하게 맛서야 하는건데 지금의 대신들을 보면....》    신채호는 력대의 충신에다 지금의 이완용, 손병희 따위의 5적신 7적신을 비기면서 나라대권을 쥐고있는 그자들의 비겁과 무능을 한탄했고 오로지 자신의 안녕만을 바라고 매국배족을 일삼는 더러운 그 행위에 치가 떨린다면서 저주했다.   《그놈들을 어떻게 진멸을 못할가?》   《그러게말입니다. 년초에 집단암살이 성공했어야할건데...》   신채호는 라철, 오기호등의 5적암살행동이 실패한 것을 맹랑해 하면서 그때의 성원중 몇은 지금도 경찰에 붙잡히지 않고있으니 그네들은 아무때건 이제 다시행동하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렇구말구. 꼭 그럴거우.》    서일은 말해놓고 웃었다. 신채호가 왜 그러느냐 묻길래 그는 탈주자중의 한 사람인 이홍래가 바로 자기 집에서 근 서너달을 숨어 지내다가 얼마전에 연해주에 건너갔노라 알려주면서 그는 참을성보다 열혈이 더 끓는 사람이니 형세가 새로워진것을 알면 이제 곧 다시건너올거라했다.    그의 추측은 신통히도 들어맞았다. 신채호가 서울로 돌아가자 바로 이틑날 이홍래가 돌아온 것이다. 연해주에서 만주로 건너가 거기 한인동포가 많이 모여 사는 용정촌에서 지내다가 거기서 고종황제가 적신들의 억압에 못견디여 퇴위하고 그로 하여 서울시민들이 분노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신협약이 맺어진건 아십니까?》    《알지. 알구말구. 알구서왔는데.》    《서울서 일어났던 시민폭동은 그만 갈앉고말았답니다. 신채호선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하루밤지내구는 방금 어제 돌아갔는데 그가 그럽디다.》    서일이 알려주자 이홍래는 아 그런가 한발짝만 일찍왔더면 함께 동무해서 서울로 갔을건데 하면서 며칠 쉬라고 권하는것도 마다하고 겨우 하루밤을 지내고는 부덕부덕 떠났다. 박대하를 찾아가 꺼져가는 의병운동을 어떻게 다시일으켜보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반일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에 눌려 그만 주저앉아 재기를 시도하면서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모든 반일투사의 감정을 대표하기도했다.     한편 적대측은 한국민의 이러한 반일기세를 꺾어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있었다.     통감부. 이또오 히로부미는 부통감 소네 아라스께와 함께 하세가와사령을 불러다 대책을 강구하고있었다.    《당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가지. 첫째는 배일의 냄새가 나는 보수론자는 도태시키는 것이요. 통감부의 총무장관, 농상공무총장, 경무총장이하 일본인관리는 한국의 궁중, 정부 각 부의 차관을 비롯하여 중요한 직위에 초빙되여 직접 시정개선을 담당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체의 반일행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지속적인 탄압을 가해서 그 기세를 여지없이 꺽어버리거니와 아예 뿌리까지 쑥 뽑아버리는것이요.》    이또오 히로부미가 굳어진 낯색에 살기까지 피여올리면서 집요한 투로 알려주었다.    《통감각하! 첫째는 이제 곧 집행해야 할 정책이겠지만 둘째야 우리가 이미전부터 해온것이 아닙니다.》    하세가와사령은 어딘가 애매한 듯이 변명쪼로 말했다.    《하세가와사령, 내 말의 뜻을 모르겠소?... 문제는 그렇게 해왔는가 안해왔는가가 아니구 효과가 어떤가 그거란말이요. 그래서?....어디말해보오.》    《아, 그렇습니까. 각하의그  말씀 저를 깨우쳐주는구만요! 과연 그렇습니다. 효과를 봐야지요! 행동을 어떻게 취했건 효과가 없으면야 그건 헛짓에 불과하지요. 지금 보면 우리 손에 의하여 분쇄되여 그 조직이 이미 소실된 것으로 여겨온 의병대였건만 귀신같이 다시살아나 기세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은것입니다. 과연 모진 자들이지요.》    하세가와사령이 이같이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로 나오자 소네 아라스께부통감이 그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세가와사령! 좀 더 구체적인걸 말해줄 수 없겠소?》    《그러지요. 지난해에 일어난 순창의병과 홍천의병 그리고 산남의병을 볼 것 같으면 그 도당의 괴수들이 죽어버려 대오는 해산된 것으로 인정해왔는데 근일들어 일부가 재기를 하고있습니다. 특히 산남의 무리경우 총수였던 아들이 죽으니까 아비가 대신 총수로 되여서 복수를 다짐하고 나오는지라 이 읍 저 읍을 전전하면서 기세를 부림이 과연 대단합니다. 얼마전에  청하의 우리 군이 그의 손에 손실을 입었거니와 청송과 신성에서도 습격을 련속받아 그같은.....》    하세가와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말하다 보니 그만 자기의 실수를 다 털어내고말았다.    《가만! 그 산남의 그자는 대체 누군데?》    이또오 히로부미는 귀담아 듣더니 이마살을 찌프려 가며 물었다.    《각하! 산남의병진의 총수는 환갑이 이미 지난 정환직이라는 관리입니다. 전에 경주부윤과 중추원의관을 지낸바가 있은걸로 조사되고있습니다.》    《그도 관리였단말이지, 오!....》    하세가와의 보고는 이또오 히로부미로 하여금 는 그의 결책을 더욱 굳히면서 한국군대를 빨리 해산시키게끔 부채질하기까지다.    이에 앞서 통감부는 전에 벌써 군사비를 절약한다는 구실로 군제를 개정하여 군대수를 줄이였다. 그 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참장(參將)이하 각 군관이 서울에 주재한 자가 336명, 병사가 9,640여명이였고 각지방에 흩어져있는 진위대장병이 4,070여명뿐이였는데 고종황제의 양위문제로 군대안에는 분격(忿激)한 기분이 한창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군대를 해산시킨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이 일은 이미 극비로 지켜온 일본의 정책으로서 이제 남은건 시간문제였다.    하다면 일본은 왜 이것마저 해산시키려할가?...한 것은 그것이 비록 미약하기는하나 민족적인 반일항쟁력량으로 변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각하! 한국군대를 당장 해산시킨다는 말씀이시죠?》    하세가와는 통감이 말을 꺼내놓자 돌연함을 느끼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를 향해 그렇게 하게되는 리유를 설명했다.    《이 군대를 보면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농민이거나 아니면 평민출신의 자식들인거요. 그러한즉 하세가와사령, 이네들이 민족적으로 각성해서 반일을 한다면 그래 총구멍을 어느쪽으로 돌릴 것 같소?》    《거야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우리 쪽에다  돌리겠지요.》    《바로 그렇단말이요. 이번의 서울시민폭동을 보지 않았소. 개별적이기는하지만 바로 그같이 되였단말이요. 하세가와 사령, 내 말이 어떤가?》    《예, 각하!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세가와가 머리숙여 수긍하는것을 보고 소네 아라스께가 동을 달았다.     《한즉 우리는 서둘러 손을 써야하는거요.》    이또오 히로부미는 머리를 가로젓고나서 그의 말에 수정을 가했다.    《손을 쓰되 우리가 직접 먼저써서야 안되지. 절대루. 우리는 우선 국왕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오. 군대해산은 바로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 단행되는것으로 백성들이 인식하게끔 만들어놓는단말이요.》    하세가와는 물론 소네 아라스께마저도 이또오 히로부미의 계략에 다시한번 탄복했다.    모략이 이쯤서자 이또오 히로부미는 한걸음 나아가서 이완용과 함께 군대해산을 밀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왕(순종)에게 군대정리사업을 해야 한다면서 왕의 명령인 를 만들게끔 든장질했다.    일은 아귀가 착착 맞아갔다.    이런차 이완용이 군대해산에 관련해서 보내는 가 이또오 히로부미통감의 손에 들어오가까지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이로써 일본은 폭동이 일어날시 이를 진압할수 있는 합법적권한을 얻을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주둔 일본군총사령 하세가와는 무력을 각 병영의 주변과 서울시내의 요소요소마다에 급급히 배치하였다.    통감부가 한국군대 강제해산에 관해 작성한 구체계획은 이러했다.                  ((일문), 이와나미서점, 1966년판, 204~205페지)         먼저 전투부대를 해산하여 그 전투력을 말살한 다음 기타부대를 없새려는것이였다. 무기 등을 빼앗는 것은 한국군대의 전투력을 마비시키기 위함이였다.    하세가와사령은 이또오 히로부미로부터 이번 기회에 실력을 보이라는 암시를 받은지라 한결 용기가 솟구쳤다.    《일로전쟁을 멋들어지게 해냈을라니 내가 이까짓것 하나 못해낼가.》    자신만만해 하는 그였다.    함북도 경원에 8월 1일자 大韓每日申報가 도착한 것은 3일후. 서일은 신문에 실린 왕의 를 보고 몹시 놀랬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서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신문을 동댕이치며 웨치였다.    《에잇, 썩어빠진 왕님아! 네놈이 환장을 했구나, 환장을 했어!》    곁사람들이 그의 격노한 모양을 보고 더 놀랬다. 여직 한번도 그가 이렇게 까지 흥분하면서 격분하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국왕을 마구욕지걸이하니 아니 저 선생이 저러다 경치면 어쩔라구 하면서 걱정하고 마음을 조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나무람하거나 제지하려 드는 자는 없었다. 여지껏 무분별하게 덤빈적이 없고 서일은 또 절 때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들왔기 때문이다. 일단 주견을 세우면 그 단호함이 대쪽같아 그 누구도 감히 꺾지 못못한다는것도 잘아는 그들이였다.    《경비를 절약하고 후생을 위하면 그래 군대를 해산해야 하는가? 리치에 맞지도 않는 소리지!》    《내 생각에도 그러해. 그건 순 구실이다!》    박기호의 감정이 그와 딱 맞게 흐르고 있었다.    《국가의 방위임무를 다할수 없으면 다하도록 훈련을 시키거나 조치를 대여 다하도록 강하게 만들어야지 그러지는 않고 군대를 해산해서야 되는가? 지금의 군대로는 그래 혁신하지 못한단말인가? 사관을 양성못한단말인가? 전혀 맞지도 않는 리유지. 앞으로 징병법을 발표하겠거든 할게지 군대는 왜서 해산하는가말이다. 안그런가?》    《그것도 리유가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또 유사시라는건 대체  어느때를 말하는건가? 굶주린 이리떼 궐안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날름거리는데 이때를 내놓고 그래 어느때에 수위가 필요하단말인가?》    《나젊은 임금님이 벌써 로망을 하느냐? 나라망쳐먹느라 환장했지!》    서일의 말에 모두들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인차 저마끔 사색에 잠긴다. 그저웃어만넘길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새임금(순종)은 왜 등극하자마자 제 나라의 군대를 급급히 해산시키는가? 과연 무엇대문에? 이것 역시 일본의 작간이 아닐까?....모두들 정신차리면서 왈가왈부 떠들기 시작했다.                            추풍이 소슬하니                        영웅의 득의시(得意時)라                       장사가 없을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나 불러보세                          한양성중 바라보니                        원쑤놈이 왜놈이요                        원쑤놈이 간신이라                        삼천리 우리 강산                        오백년 우리 종사                        무너지면 어이할까                          의병들아 일어나서                        왜놈들을 쫓아내고                        간신들을 타살하여                        우리 금상 봉안하고                        즐기고 노래하세                        우리 대한 만만세라....       경원거리에서 목청을 뽑아가며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를 그는 의병을 다니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실신하거라했다.
109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4 댓글:  조회:5702  추천:40  2011-05-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穴)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4.      내각에서 임금의 양위를 진정하고 총감부에서는 일본 외상 하야시를 맞아 요구조건을 밀모하자 이런 기미를 탐지한 애국지사들은 국사가 긴박함을 알고 동지를 련합하여 활발한 선전으로 민중을 불러 일으켜 그들을 투쟁에 궐기시켰다. 그리하여 온 서울은 급기야 죽탕모양으로 부글부글 끓어번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함북도 경원은 깜깜이였다. 멀고 멀어서 구석지다 보니 서울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소식도 늘 뒤늦게야 알려지기 마련이였다.      《선생님, 전번주 목요일날 서울에 온 하야시는 어떤 인물입니까?》    월요일 조회시간에 반장이 물어보길래 서일은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    《일본국 외상말이지? 그는 올해 나이 57살인데 영국에 가서 유학하고는 여지껏 외교일만 연구해 온 사람입니다. 46살때부터 화란, 로씨야, 영국공사 등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낸바있고 올해는 백작이 되였지요. 는 말을 입에 달고있는 인물입니다.》    《선생님, 그가 그렇게 좋은 사람일가요?》    《알록달록 보기 고운 꽃뱀이 독이 더 있다는 소리를 못들었습니까?》     학생들은 웃었다.    《선생님의 비유가 과연 적중합니다. 침략자치고 달콤한 말을 하지 않은자가 어디있습니까.》     서일은 한마디 더했다.    《능구렁이 나무에 오름은 새를 잡아먹자거나 아니면 둥지의 알을 훔쳐먹자는게지요. 그자가 왜 우리 나라에 기여들었을가? 거기에 대해서는 학생 모두 스스로 곰곰이 점쳐보기 바랍니다.》    이러자 중구난방의 추측들이 쏟아졌다.    나중에는 그자가 온것은 이번 해아밀사사건을 빙적(憑籍)하여 또 한 번 어떤 조약을 강요해 조선의 권리를 앗아내자는 수작이라는 것으로 귀결이 났다.     《두고 보시오. 그 추측이 아마 틀리지 않을겁니다.》    이러고 지내던 차 아니나다를가 7월 20일자 大韓每日申報가 도착해서 학교뿐 아니라 온 경원이 왁작들끓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이걸 보시오! 서울서 폭동이 일어났답니다!》     학생 하나가 손에 신문을 쥐고 높은 목청으로 웨쳐대며 달려왔다.     신문을 받아 쥔 서일은 가슴이 울렁이였다.                      경원학교는 이날 교학을 중지했다.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우리 서울가봅시다! 어서요!》    키가 꺼두룩하고 운동을 잘해 또래들 속에서는 꽤 명망이 있는 학생이 우쭐거리며 나섰다.    《선생님, 갑시다! 우린 선생님따라서라면 현애지각에라도 가렵니다.》        이러면서 당장 서울로 올라가 보자고 덤벼치는 학생이 여럿되었다.    서일역시 마음동하지 않은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 없었다. 이럴수록 랭정히 사고해야했다. 아무런 파악도 없이 급한 행동을 취해서는 어떻게 하는가. 선생이면 이럴 때 학생을 책임지고 관리를 잘해야지. 그럴러면 우선 그들을 잡아 눌러 흩어지지 말게 해야한다. 집회를 하자. 그래서 조성된 형세를 놓고 변론을 하게 해서 그들 스스로 입지(立志)를 하게끔 하자. 서일은 이같이 마음을 먹고 학생들을 집합시켰다. 그래놓고는 그들앞에 누구든 교문을 나가서는 안된다. 지금부터 변론을 하련다고 선포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야시가 오니 좋은 일은 없지요. 건데 적신들이 황제를 페위시키려한다니! 그자들이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전날 그한테 질문하던 반장 학생이 이번에도 선참물어왔다.    《생각해보시오. 아무리 적신인들 감히 그럴수 있을가?》    《선생님은 이또오 통감이 뒤에서 추긴거다 그겁니까?》    《바로 그렇지. 일본이 안시키구야 그렇게 할 담량이 있을가?》    《건데 임금님을 왜서 페위시키렵니까?....》    《저희들의 말을 아니듣고 역으로 반일을 하니까 그러지. 제거를 하자는겁니다. 그는 장애물이였으니까.》    《그를 페위시켜놓고는요?》    《그리구는 저들의 말을 곰상곰상 들어줄 태자를 골라서 그 자리에 앉힐겁니다. 선생님, 그렇지요? 제 생각입니다.》    다른 학생이 대신말했다.    서일은 그 말이 옳다, 바로 그렇다면서 좀 더 명백히 알려주었다.    《일본은 고종황제를 퇴위시킴으로써 한국정부까지 완전히 제놈들의 침략에 리용할수 있게끔 만들자는겁니다. 그때가서 새로 등극한 황제는 괴뢰로 되고.》    《선생님, 정말로 그 지경에 이르면 국민은 어떻게 될가요?》    《학생은 그걸 몰라서 물습니까? 노예가 되지.》    학생들은 한결같이《와ㅡ》했다. 심히 불쾌했던 것이다. 이번만이 아니였다. 전에도 서일은 말한바있다.  2천만 조선민족이 자칫하면 왜놈의 노예로 전락되리라고. 그때의 일깨움이 현실로 다가오고있음에 학생들은 다시금 경악하고 있었다. 저마다 제 생각을 내놓고 한바탕 운운했다.    《왜놈들은 지도에 그려진 우리 대한제국을 색깔마저 완전히 변하게 만들자고 듭니다. 내가 접때도 말했듯이 인간으로 태여나 남의 노예가 되여 개, 돼지만도 못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기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안그런가?.... 그런고로 우리는 분발을 해야한다.  싸우다 망한 민족은 다시 부흥을 할 날이 있지만 싸우지도 않고 망하는 민족은 영원히 망해버려 남의 노예로나 되고맙니다.  학생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주시오.》    서일이 말을 채 끝맺지도 않았는데 팔을 걷으며 나서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 그렇다면 우리도 나가 총들고 싸워야 함이 옳지 않을가요. 지금 당장 나가 싸우고 싶습니다. 강릉의 학교교원 정해관도 제자들을 거느리고 일진회의 사무실을 들부시고나서 의병이 되어 싸웠다잖습니까?》   《나는 아직은 그러고싶은 맘이 없습니다. 건 왜냐구?....한마디로 말해서  시기상조이길래. 학생은 나의 말을 명심해 들으시오. 두고보오만 불원간에 나가 싸울날은 올겁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가 일떠나서 싸우지 아니하고는 아니될 것입니다. 무기는 지능자의 손에 쥐여져야 하는겁니다. 오직 그래야만이 싸워도 철저한 사상을 갖고 명지하게 싸울수 있게 될 겁니다. 아직은 어린 몸이니 모두들 마음바로잡고 덤비지를 마시오. 지금 내 앞에 놓인 급선무는 지식을 많이 배우면서 애국심을 기르는것이라 생각해야합니다.》   사생모두가 심각한 태도로 숙연했다.    이날도 서일의 연설은 그들에게 심각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신채호는 어떻게 보내고있을가? 신문기자니까 분주히 돌아칠거야.》   퇴교시 박기호가 하는 말이다.   《그야 제 직책을 다하누라 동분서주를 하겠지. 안그래?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때를 당하고 보니 나는 김규식이도 생각나는구나. 그는 서울에 있으니까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 눈으루 직접보고있을거다. 그리구는  가만있을려구하지 않을거다. 열혈이 끓는 군인이니까.》    그 말이 옳았다. 열혈이 끓고있는 김규식은 집구석에 처박혀있지를 않았다. 바로 신문에 실린 보도가 생기게 된 그 18일날의 동틀무렵에 누군가 달려와 불길한 소식을 퍼뜨려 김규식은 얼른 옷을 주어입고는 밖으로 뛰여나갔다. 거리는 그사이 벌써 백의현관(白衣玄冠)으로 메워져 있는지라 알아보니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왕궁을 주시하고있었다고 한다.   《그래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김규식이 사태를 알려느데 때마침 학생모양의 청년 하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격앙된 목청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여러분 다들 들으시오! 지금 내각적신들이 임금을 페하고 나라를 팔려하니 우리가 어찌 죽기로 싸우지 아니하랴! 사세는 급박해 오고있습니다.》    2천여명의 서울시민은 이 소리를 듣자 술렁댔다.   《임금을 페하다니 이게 웬 소린가?!....》   《적신들이 역모를 하는구나!》   《릉지처참을 해치울 놈들!》    격분의 웨침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민족적 울분에 휩싸인 군중들은 일본의 침략적인 죄행을 저주하고 규탄하면서 시위와 롱성투쟁을 벌리였다.    반일기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갔고 대렬도 늘어났다. 애국문화운동단체인 자강회(自强會)와 동우회(同友會) 회원들 그리고 기독교청년회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에서 이에 참가했다.    동우회원들은 재빨리 《결사회》를 조직했다.    시위대오는 두대로 나뉘여 한 대오는 일당(日黨)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國民新聞社)를 습격하였다. 김규식이도 이 대오에 끼이였다. 그는 분노한 사람들을 이끌고 신문사내에 뛰여들었다. 신문사 사원들이 행동을 저지시키려들자 김규식은 주먹으로 답새겨 하나하나 밖으로 쫓아냈다. 그가 그러는 사이에 다른이들은 기계를 뚜드려 부수고 가옥을 헐었다.   이때 다른 한 대오는 대한문앞에 모여 사태를 연설하며 목청을 모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황제페하는 적신의 말을 듣고 양위를 체행(遞行)하지 마옵소서. 감심매국(甘心賣國)하는 역적들은 우리들이 맹세코 죽이고야말겠나이다!》    그러나 밤은 깊어갔고 궐문은 헌병과 순사들이 굳게 지키고있었다. 이러한즉 외부의 실지상황이 구중(九重)에 들릴리도없거니와 내각의 진상도 새여나오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니 드디여 급격한 행동을 더 하지 않고 헤여지고말았다.    19일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고종황제의 조서(詔書)는 내리고말았다.    서울의 인심은 극도로 격분하여 광분도 하고 질주도 하였다.    김규식은 잠을 깨자마자 다시뛰여나갔다.    그는 가다가 길에서 마침 신채호를 만났다.    《어제밤도 나왔댔소?》    신채호가 물는말이였다.    《나왔지. 내가 일진회놈들의 신문사를 파괴했지요. 신기자는 어제?...》    김규식이 알려주고 물으니    《나는 궁성밖 모임에 끼여들었다가 신문사로 돌아갔소.》    신채호는 이러면서 이날 발행할 신문의 판면에 실을 보도 두편을 쓰느라 잠깐 눈을 붙여 등걸잠을 자고 나왔노라했다.     김규식은 그를 다시보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에는 피발이 일어서고 있었다. 윤기도는 까만 하이칼라와 코밑에 멋스레 자래운 팔자수염, 자그마한 몸체에 강단있게 생긴 이 선각자 언론인은 피로마저 잊고 돌아치니 과연 불굴의 투사다왔다.           《여기 소식이 언제면 함북에 갈가? 이 일을 서일선생이 알면 대뜸 달려오자구할텐데....난 어쩐지 그를 한번 더 보고싶습니다.》     김규식은 초면에 인상이 깊었던 경원의 그 한 교원을 잊지않고있었다.     《그래? 나역시. 동지를 포섭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그는 열혈남아요!》    신채호가 하는 말이였다.    고종이 퇴위했다는 소리를 듣자 서울의 모든 점포들이 문을 닫고 상인들도 거리에 나왔다. 서울시민들은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방망이와 몽둥이를 들고 떨쳐나서서 거리를 메꾸었다. 각 학교들이 서로 련계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호소하니 학생들은 구름같이 모여 조수와 같이 밀려나갔다.    수많은 군중이 궐문밖에 모이여 살기가 가득찼다. 금시 무슨 일이 터질것만같았다. 순경들이 해산시키려고 강압적으로 몰아쫓는것도 모르는척 하고 기와장이며 조약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시위는 마침내 폭동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서울시민의 폭동에 당황해난 일제는 연설한 청년을 선동분자라 하여 체포구금하였다. 그러나 그로하여 군중들의 분노성이 더 높아지자 그만 석방하고말았다. 이번에는 분노한 군중을 무마해보려는 수작이였다.    19일 이날 오후에는 민중이 더많이 모여서 왜놈의 순경과 충돌하니 돌이 날으고 혹은 맨주먹으로 격투를 하기도하였다. 그러다보니 사상자를 내게 된건데 일본군은 자기들에게 피해가 생기는것을 보자 군중을 향해서 총을 란사하여 사람 여럿이 죽고 상하였다.    이때는 김규식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시위보병 제1련대 제3대에 달려가서 그들에게 가만히 보고만있을건가 시민들과 합세하여 싸워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3대의 100여명의 군인들이 오후에 지휘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동(典洞) 병영을 뛰여 나와 군중들의 대렬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두 대로 나뉘여였다.    이때 또 따로 수천 민중이 종로에 모여서 격렬한 연설을 하며 열혈을 뿜는데 왜순경 50여명이 와서 해산시키려 했다. 이러는 판에 마침 전동 병영에서 나와 갈라진 한 대오의 수십명 군인이 시위군중을 탄압하는 경찰들에게 사격하였고 다른 한 대오는 종로파출소를 습격하여 왜경 3명을 죽이고 6명을 부상케 하니 군중은 원조를 얻은지라 기세가 더 떨치였다.    일부 봉기자들은 남대문과 서대문, 전차정거장과 서대문밖에 있는 일본군의 포병영을 불사르고 파괴하려 하였고 일부봉기자들은 한강철교의 파괴를 계획하였다. 다른 또 일부의 봉기자들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창덕궁우로 가는 것을 습격해 처단할 준비를 갖추었다.    김규식은 각 병영을 뛰여다니면서 거기에 남아있는 군인들을 동원시켜 투쟁에 나서게 했다. 이때 한 시위대오는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하고있었다.    1907년 7월 21일자 大韓每日申報는 이날의 정경을 아래같이 보도했다.                                  《잘하는구나!》    서일은 신문을 읽고 몹시 격동했다. 당장 달려가 자기도 그 속에 끼이고 싶고 실황을 사진으로 눈에 찍어 넣고 싶었다. 그럼에도 교단은 한발자국도 떠날 수 없는 그였다. 학생들은 그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였고 그는 그러한 사랑스러운 제자들을 책임져야했다. 당장 뛰여갈 양으로 움찔거리는 학생들을 달래여 눌러놓아야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중 통쾌감을 제일주는 것은 적신들에 대한 타격이였다. 동우회원 강태현(姜泰鉉)이와 송영근(宋榮根) 등 몇이서 조직한 결사대는 이완용의 집과 이전 내부대신이였던 이지용의 집을 습격하여 불지르고 왜경찰서를 습격하며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집을 파괴하여 형세가 더욱 맹열하였다 한다. 한편 군중의 필사적인 반항에 겁을 집어먹은 이완용내각의 친일대신들은 저마다 일본측에 보호를 의뢰하였는바. 이완용은 일본인거리의 왜성구락부에, 법부대신 조중웅은 일본인의 구락부에 피신하였고 내부대신 임선준과 군부대신 이병무와 탁지부대신 고영희 등은 각기 저들 집에 일본군대를 불러들여 호위케했다고 하며 다른 여러 대신들은 자기 집에는 있을 수 없어서 통감부가까이에 있는 송병준의 집에 모여들어 정부의 회의장소도 거기로 옳기였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20일날 오전 8시 급급히 서둘러 중화전(中和殿)에서 간단한 즉위식을 거행하여 황태자를 등극시켰다. 그리고는 고종황제를 《태상황》《태황제》라 불렀다.    이 소식이 함북의 경원까지 전해왔다.    《허, 새 황제 등극이라! 일본군과 헌병의 삼엄한 경계속에서 거행되였으니 그 꼴이 어떠했을가? 의례 문무백관의 축복과 기악의 연주속에서 즐거웠어야 할 등극식이 되려 살벌한 분위기에 싸늘하였을테지.》    박기호가 하는 말이였다.    《끝장이다! 끝장이다! 이젠 끝장이다! 500년의 이조왕조가 이젠 존재를 끊마치게 되는구나! 아아....》        누군가 슬픔을 내뿜고있었다.    《고종이 퇴위했다지. 어리숙한 아들이 이제 뭘 해낼가. 가엽은 이조왕조여, 어이하여 이꼴이 되느냐? 가엽은 네가 이제는 완전히 일본의 리용물로 변했구나!》              또 다른 누군가 내뿜는 한탄이였다.   《황태자가 왕의 자리를 이었다니 그럴사한걸. 이 역시 이또오의 조작극일거다. 귀막고 방울훔치듯이 어리석게도 제딴에는 약은꾀를 쓰고있는거다. 왜 그러는가구?....거야 명백하잖은가. 일본은 이렇게 함으로써 왕의 계승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날 수 있는 백성의 분노를 무마하자는 수작인거다.》   서일이 말했다.                                   22일 통감부에서 이런 포고를 냈다. 이 포고는 일본의 야심과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의 꿍꿍이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얼려먹었다. 그러나 좀이라도 자각이 있는 사람은 반신반의하면서 정신차렸다.       《어디서....거짓 수작은 잘 피운다.》    박기호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난을 쳐도 분수있지. 그것도 말이라고 죄치는가. 다시 올라설 임금이면 왜 퇴위를 시켰느냐? 철없는 애들이나 그걸 곧이듣겠는지, 원.》    서일은 통감의 회유적인 수작을 쓰거워했다.    이 포고문으로 인하여 경원학교는 또 한번 안정을 잃었다.    서일은 사생들에게 통감부의 말을 믿지 말라고 했다.    어느 학생이 손을 썼는지 그 포고위에다 이런 글을 써서 덛붙여놓았다.                            여러 신문들이 별다른 소식을 내지 않았다. 서울의 각 아문(중앙관청)들은 정무를 중지하였고 상인들은 가게방을 닫았으며 개성, 평양 및 모든 항구도시들은 철시를 하였다는 내용의 보도를 하였을 뿐 서울시민들의 폭동이 어떻게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더 언급 하지 않고 있었다.    촉각이 예민한 서일은 이렇게 분석했다.   《통감부가 신문보도를 통제하는거야. 서울시민의 폭동은 십중팔구 일본군의 탄압과 회유기만책동에 그만 실패를 했구. 물론 백성, 군인을 얼마간 각성시켰겠지만. 조직적으로 그를 이끌어주는 령도자가 있어야하는건데...》    《맹랑하게 됐구나!》    박기호의 탄식이였다.    소식이 페쇄되여 갑갑하던 차 경원에서는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가 이갑(李甲), 어담(魚潭), 림재덕(林在德) 등과 밀모하여 양위식을 거행하는 날 그 소속의 근위대를 끌고 들어가서 여러 역신을 죽이고 황위를 회복하려 하였는데 이완용 등이 그 소식을 듣고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말하여 박영효는 제주(濟州)로 귀향하고 이갑, 어담, 림재덕 등은 투옥되였다는 소식이 뒤늦게나마 새롭게 들려왔다.    《이완용 그놈은 아마 제 명을 다 살고 죽을 모양이구나. 더러운 짓은 다해가면서도 요리조리 죽을 고비는 묘하게도 넘기는 걸 보면. 조물주는 우리 배달민족을 망하게 하느라 저따위 인간을 만들어 낸게 아닐가.》    학생도 백성도 적신의 묘한 피사술(避死術)에 혀를 내둘렀다.    서울시민의 폭동은 가라앉고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엄청 큰 폭동이 일본의 야욕에 의하여 온양되고있었다. 이를 대처하느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평양에서 1개 대대의 일본군을 서울로 옮겨오는 한편 수상 사이온지에게 전보를 쳐 1개 혼성려단의 군대를 급파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로서 막이 내린건 아니다. 절대루. 아니구말구. 우리는 시세를 잘 관망하면서 림기적인 응부책을 대야하리라.》    서일은 말했다. 그 혼자뿐니 아니였다. 경원학교의 사생모두가 고종황제퇴위를 선줄로 이제 련쇄적인 반응이 말하자면 어떤 사건이나 변들이 련달아 생기리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기도 하고 예견하기도했다. 이 나라는 근세에 들면서 내내 다재다난의 와중에 시달림을 받고있지 않는가. 그래서 국민모두를 점쟁이로 만들고 있으니 과연 기막히는 운명이다!    아니나다를가, 7월 24일 일본, 한국간에 이 맺어졌다. 이 조약이 1907년(정미)에 맺어졌고 7개 조항으로 되었다하여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조약에 의하여 대한정부는 통감의 동의가 없으면 조선인 고등관을 임명하거나 파면할수 없게 되었으며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은 무조건 관리로 임명하여야 한다. 그뿐이 아니였다.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가 없이는 외국인을 용빙할수도 없게 되었다.    《망할자식들! 권리를 다 빼앗는 판이로구나! 나라의 립법권, 내정권, 관리임명권, 파면권, 일본인관리임명권에 외국인고용의 금지권이라....통감이 다 틀어쥐였으니 이제 우리한테 남은게 무엇이냐?》    《남은건 죽는 권리밖에 없다!》    서일도 박기호도 원통하여 땅을 치며 부르짖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 조약의 내용을 강행적으로 집행하기 위하여 종래 고문 또는 참여관으로 있던 일본일을 다 해임하고 그 관리들을 한국정부와 지방관청(도감영) 각 부의 차관으로 들여앉히였다.    《차관이란게 뭐냐? 조선인장관의 다음자리라? 말은 좋다. 그게 다 형식이지. 형식이구말구. 실지로는 그놈들이 각 부의 권한을 다 쥐는거야.》    서일의 말이였다.    《그렇구말구. 그러구는 신협약의 내용을 착착 집행하자는게지 뭐야.》    박기호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차관정치를 창안한 목적을 까밝히였다.    《종래 통감은 외교권을 틀어쥐고 시정에 대해서는 겨우 소극적인 충고권을 가지였을 뿐이였어. 그러나 이같이 함으로써 이제는 적극적으로 한국정부를 지도할 권한을 가진게 아닌가. 한국정부의 기능이 이제는 명실공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고말았다! 왜놈이 이 나라의 자주권을 더욱더 란폭하게 유린하게 되었구나!....그래 어느 개놈들이 나라를 이같이 팔아먹느냐?》    서일이 통분하여 웨치는 것을 보고 박기호가 이번 조약을 가(可)로써 찬성한 7적의 이름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였다.    《총리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송병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대신 임선준, 학부대신 이재곤,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고영희.》    이또오 히로부미의 지모는 실로 난당이였다!        《제의 양위는 한정대신(韓廷大臣)의 의사로 행(行)한 것이니 이것으로써 일본에 사죄하였다할수 없다.》    이것은 새황제가 즉위하여 8월 2일부터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제3 영친왕 은(垠)을 책봉하여 황태자로 봉하게 되자 이또오 히로부미가 한 말이다. 황제가 양위를 하게끔 추긴게 누구였던가? 위협적인 언사로 압력을 가한건 누구였던가? 바로 이또오 히로부미 그가 아니였는가? 사람의 깝지를 쓰고 이렇게 까지 철면피할 수야!....그럼에도 이완용 등 7적신은 찍소리 한마디 못했거니와 이또오 히로부미가 황제양위로 일본에 사죄가 되지 않는다면서 요구조건 7조를 내놓자 그것을《지당한 일》이라 했던것이다.   《금차 이또오 통감께서와 하야시 외무대신께서 한국의 내치가 문란한데 비추어 7조를 내놓음에 조약을 체결하려하오니 페하께서 윤하하옵시오.》    이완용은 입궐하여 이같이 순종황제에게 상주하고는 량국위원이 모인 통감부에 가서 조약에 서명하였던 것이다.   《나야 방금 위에 올랐으니 뭘 아오? 경들이 알아서 선처하도록 하오.》   어리숙한 황제는 조약문을 제 눈으로 한 번 보지도 않고 이러면서 재가를 제꺽해버렸으니 뭐라고 말을 할가. 귀신이 들어도 곡을 할 지경 한심한 판이였다!   《네놈들이 무능한 황제의 등을 타고 롱간을 부리는구나! 저 씨알머리를 말려도 시원찮을 7역신이 이 나라의 대권을 잡고 왜놈의 개가 되어 민족을 팔고 나라를 파니 세상은 장차 어떻게 되어갈가? 아아, 암흑의 란세여!》    나라와 민족을 구해낼 길을 찾아야 했다. 서일은 그 사명이 배달의 후예로 태여난 자기의 두 어깨에도 지워졌음을 한번다시 심심히 느끼였다.             
108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3 댓글:  조회:5546  추천:34  2011-05-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穴)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3.         이홍래는 근 3개월가량이나 경원에서 무사히 숨어지냈다. 시간이 오래가서 그런지 아니면 체포해야 할 자가 너무많아 그러는지 이제는 경찰당국에서 그를 추적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홍래는 어부로 가장해 류배지 지도(智島)에 가서 라철과 동지들을 만나 위문하려는 엉뚱한 궁리까지 했다.     《아니 무슨 외람된 생각을 그리합니까? 유람 할 궁리를 하고 그러는거나 아닙니까?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자구하다니 원! 자기를 붙잡자는 통집령이 나붙지 않았다구 그토록 행동을 하자구해서야 됩니까. 그따위 과분한 생각을랑은 싹싹 거두시오.》    서일은 지도(智島)에 가보자고 말을 꺼내는 그를 되게 나무렸다.   《의병이 즘즘하다고 끝난걸까요. 아니지. 일본은 촉각을 그냥 곤두세우고있는겁니다. 항쟁이 거의사라져 가는 상태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언제건 다시들고일어나리라 보이는 를 색출하느라 눈에 쌍불을 켜고 있지요. 게다가 일진회분자들이 앞잡이로 되여 냄새를 맡고있으니 위험은 의연히 존재해서 멋없이 나돌다가는 정말 잡히고 말 것입니다.》    이홍래의 생각은 사실 과분한 모험이라 박기호도 겯들어 충고했다.    이홍래는 생각을 굴리더니 그럼 잠시 만주나 연해주에 가있어볼가했다.    서일이나 박기호의 생각에도 차라리 그편이 나을것 같아서 동의했다.      이러던차 때마추 전날 딸애 죽청이를 데리고 금동리에 갔던 희연이가 경원에 돌아왔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바람 이달문이 이제는 총상이 거진 다 낳아 연해주로 건너갈 생각을 하더라고 알려주었다.    《오, 그렇답니까! 잘됐군요!》    이홍래가 기뻐했다. 자기가 그를 모시고 가자는 생각이 불현 듯 난거다.     마침 토요일이라 서일과 박기호는 그들의 월경을 도와줄 겸 바래주려고 함께 금동리로 향했다.    이달문은 희연의 말과 같이 그동안 큰할아버지 내외분의 극진한 구완으로 총상이 과연 거진 다 나아서 연해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홍래가 함께 연해주로 가리라 하니 그는 무척 반가와했다. 이러던차 마치 원격조작에 움직이듯이 연해주에서 계화가 이달문을 호송하러 오기까지 했다.    《묘하다! 참 묘해! 때마추 잘 모였다!》    큰할아버지께서는 밝은 얼굴이 되여서 계화를 향해 지금 그곳 연해주서 동포들이 살아가는 형편이 대체 어떤모양인가고 물었다. 그래서 말이 나오고 나오다보니 그것이 마침내는 몇해전 간도관찰사(間島觀察使)로 만주에 파견되였다가 지금은 로씨야에 가있는 이범윤(李範允)의 행적(行蹟)을 추적하는 얘기로 가지가 뻗어나갔다.    《듣자니 그분 간도루 건너가서 우리 사람 살도리를 잘 해놨다데. 그게 정말이우?》    큰할아버지께서 물는 말에 이달문이 대답을 했다.    《형님! 안그러믄 거짓말이겠수. 내가 눈알이 하나뿐이오만 제대루 보구다니오. 동포가 땀동이를 흘려 황무지를 개간해서 그걸 겨우 옥토루 만들어 놓으면 난데없는 청인 지주가 나타나 어쩌는지를 아우. 했단말이오. 그게 억탈이 아니구 뭐겠수. 그래서 결국은 계약이라는걸 맺고는 반작농사를 하게되는거우다. 농사지어 고라니좋은일한다구 땅은 제가 개간해놓구서 한심하게두 그 꼴이였수다.》     계화가 말을 이었다.    《그저 그렇기만 해두 괜찮지. 우리 동포들 보고 너희들이 만주땅에서  그냥 살겠거든 청인의 풍속을 따르라고 강요를 했던겁니다. 청복을 입고 청나라의 변발을 하라고까지 말입니다. 그래놓고는 불응을 하면 경작지를 몰수한다 추방을 한다....가혹한 처사를 빈번히 당했던겁니다. 물론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생활이 많이 좋아들갑니다.》    《그 다 이관리사의 덕분일테지. 의례 그래야지.》     큰할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눈을 내리깐다. 무엇을 생각하실가?     흉년이 그리 들어도 고향떠날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없는 분이다.     청나라 사람들은 한청간(韓淸間)에 간도귀속문제가 발단된 이래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간도땅에 발을 붙인 조선사람들을 몹시 박해하였던 것이다. 그 탓으로 동포들은 청나라 사람의 박해에서 보호해줄 것을 정부에 여러번 요청하여 정부에서는 이에 응하여 통정대부(通情大夫)인 여옥(汝玉) 이범윤을 간도시찰특사(間道視察特使)로 파견했던거다. 그가 정식으로 관리사로 임명된 것은 간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듬해 즉 1903년 7월이였다. 당시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이던 김규홍(金奎弘)이 북간도일대가 본래는 조선땅이였으므로 거류민의 조세법을 정하고,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관(保護官)을 두어야 한다는 상주(上奏)에 의한것이였다.            《이관리사는 거기 건나가 동포들의 참상을 돌아보고 나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병력에 의해야 한다고 느꼈던지 정부에 보호병을 보내줄걸 요청했으나 정부가 파병을 하지 않았다더군요, 그렇지요? 그때 만약 파병을 했더면야 량국간 충돌은 불가피했을겁니다.》    서일이 자기가 알고있는바를 한마디 비쳤다.    계화는 그렇다면서 그후 이범윤이 한 일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분은 생각던 끝에 하는 수 없이 그만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의로 산포수와 장정들을 모아 산포대를 만들었지요. 모아산에다 하나 마안산에다 하나 이렇게 두곳 병영을 설치했고 두도구에다가는 서울에서 연발총을 들여와 포병을 훈련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거게는 산포수하구 거민장정만이 아니구 전에 강제해산을 당한 구한국군하고 의병도 포함했지요.》    《암 그렇구말구. 형님, 나도 한참은 거게 몸붙이구 있었수다.》    이달문이 이제야 그 일을 말해 큰할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아따 이 사람아, 동생은 황병길의 그 뭐라더라, 노랑포수의병대에 들어서 왜놈허구 싸우지를 않았나. 거게는 언제?... 싸바라다니기두 했네.》    《안그러면 홀아비신세에 이제 뭘하겠수, 기껏 싸대다 껍뻑하는게 차라리 났지.》    《이번 연추가거들랑 색시 얻어 가정이루구 살아. 고생작작허구.》    큰할아버지께서 관심해 타이르는 말씀이건만 이달문은 그걸 건숭으로 받아넘기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과연 의병에만가있는모양이다.    《이범윤은 늙은이와 홀로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보살핌이 각별했지요.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부락을 순찰하여 위로하고 호구를 자세히 조사하여 팔순이상의 노인에게는 은총을 베풀어 경로사상을 앙양하고 애민의 뜻을 폈던겁니다. 행정이 미치지 못하던 간도에다 어문을 세워 자율적인 행정을 하고 10호를 1통으로 하고 10통을 1촌으로 만들어서는 통장에 촌장을 두어 매사에 상부상조하도록했지요. 청국에 대한 조세납부를 거부케 하고 대신에 그 조세를 우리네 정부에 내도록 해서 그로써 관청을 짓거나 련병의 비용으로 충당을 했던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동포를 괴롭히던 청국향약을 실효케 함으로써 안심하고 살도록했지요. 그같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니까 간도동포사회에서는 그분 인망이 대단히 높았던겁니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네는 그 일을 어떻게 그리두 잘아는가?》    큰할아버지는 의아쩍은 눈매로 계화를 여겨본다.    《제가 내내 그의 수하에서 지내온건데 왜 모를까요.》    《오, 그런가! 하하하....》    큰할아버지께서 파안대소했다.    《그러니 저분은 이범윤의 사람이구나!》    박기호의 뇌임이였다.         서일의 눈길이 다시 계화쪽으로 갔다. 그가 오늘따라 돋보였다. 서일은 서울갔다가 신채호한테서 들은 얘기를 다시금 상기했다. 신채호는 지금 연해주에 가있는 이범윤이 국채보상운동에도 호응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한인촌 가두에 격문을 게재(揭載)하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 운동을 후원하라고 제창하였다고 알려준바 있다. 대단한 활동가다.    1904년 로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이범윤은 부하 500여명을 소집하여 일찍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마패(馬牌)를 가지고 로씨야군에 가담하여 일본군을 공했다. 그러면서 한편 그의 세력은 간도에서도 확장되였다. 그렇게 되자 청나라에서는 그를 두러워 미워하면서 한국정부에다 그를 간도땅에서 철수하게끔 조처하라고 강경히 요구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1905년 5월에 정부에서는 이범윤더러 귀환하라고 지시했다. 허나 그는 그 지시에 불응하고 로일전쟁이 끝나자 부하들을 이끌고 로씨야 연해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독립투사 양성의 기지를 얻자고 리네위치장군을 찾아갔더랬습니다. 그 장군이 로일전쟁당시 만주군총사령이였으니까요. 이범윤은 로씨야군을 위해서 참전한 대가로 토지 하부(下付)를 요청해보았습니다. 건데 그게 마음과 같이 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령으로 넘어간건데 연추에 본거를 잡고.... 예 그렇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있지요. 우선 부하들의 취업, 생계를 마련해주고는 최재형이하고 이위종하고 함께 동의회를 조직해 의병을 규합했지요. 지금도 역시.... 이제 때가 닥쳐오면 동산재기를 할겁니다.》    계화가 알려주었다. 이만하면 해외정황이 대략 개괄이 되였다.    《애국애족심이 강한분이지! 이범윤선생의 덕행과 용기와 슬기는 모든 혁명자가 따라배워야 할 바이로다!》    서일은 목청에 감격을 담아 뇌이였다.    이달문과 계화, 이홍래는 이날 야반에 무사히 월경했다.              그들을 보내놓고나서 서일은 박기호와 헤이그밀사 사건을 놓고 우심(憂心)에 깊이 잠겨 다시금 운운하기 시작했다.    《력사에 그 어느 나라가 남에게 의존해서 진정으로 제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이룩하였던가? 없다, 없어, 없구말구. 자주독립을 보장해주리라는 일본의 양언(佯言)을 믿어준 것 부터가 워낙 잘못된것이였다. 청일전쟁도 그렇구 로일전쟁도 그렇구 그게 과연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하는 전쟁이였던가? 새빨간 거짓말. 동양의 패권을 저들이 쥐려구 싸우면서도 그따위 듣기좋은 소리만 쳤으니 그건 보살의 낯짝에 가리워진 흉계였지. 부덕의한 짓을 하지 않고는 살아못가는 악종들! 모략이 출중한 침략자들은 이제 구실을 달아 우리 임금과 정부를 더 바싹 협박하려들 것이다.》    《건 왜서?》    《저희들의 야심을 한계단 더 높힐려구.》    《과연 그럴가?》    《왜 안그래. 두고 봐, 안그러는가구.》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다 빼앗아가구서도?》    《외교권내놓고 다른건 빼앗을게 없나 뭐. 걸탐스러운 도적놈의 눈에는 부지깽이도 장물로 돼보이는거다. 이제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든 권리를 하나 하나 다 빼앗아내자구할게다. 안 그러는가 보라. 그자들은 이 나라를 색깔이 완전히 변하게 만들자고들거다.》    서일이 하는 말이 결코 헛소리아니였다. 그는 제대로 보아낸것이다.    해아밀사의 분사(憤死)소식이 전해오자 온 조선국민이 비감에 잠기면서 분노하여 일본을 성토했다. 하니만 지모가 난당이요 조선침략의 괴수인 이또오 히로부미는 만국회의에 한국의 밀사가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차라리 이번의 사건을 좋은 기회로 역리용하려고 궁리하고는 7월 3일에 벌써 그 진상을 본국정부에 향해 질문하면서 제의했던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영리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력사이래 일본의 다시얻기 힘든 인재는 이같이 지독한 모략으로 자신의 천부적인 재질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총명한들 도박에 내건 제 생명을 끝가지 지켜낼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전날이였다. 비구름이 해를 가리워 날씨는 찌뿌둥했다. 통감부는 어둠침침한 방안을 밝히느라 한낮내내 전등을 켜놓았다. 창문들은 꽁꽁 닫겨져 있고 어느 하나 열어놓은 것이라곤 없었다. 해충이 날아들어 그런다지만 사실은 의병의 총알이 날아들거나 의사의 수류탄이 날아들까봐 무서워서였다. 물론 일본군이 통감부를 철통같이 수위하고하고는 있지만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것으로도 안심되지 않았던 것이다.    《국면일변의 호기야! 호기구말구!....우리에게 호기를 준거야! 그러고말고. 호기를 준거란데두!....》    몸을 의자 등받이에 실은 이또오 히로부미는 두 팔을 머리우로 높이 올리뻣혀 기지개를 한바탕 크게 켜고는 기세가 올라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로이때 소네 아라스께 부통감이 그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각하는 지금 누구하고 대화를 하십니까?》    《정부하고 하고있네. 내 주장은 말일세.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거든. 자네는 안그런가? 이제 우리는 의 준비공작을 결속지어야 할것이요.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이또오 히로부미는 어지간히 흥분이 되어 대꾸하면서 소네 아라스께의 그 너부죽한 얼굴을 다시금 보았다. 올해 나이 58세, 로련한 이 관료파의 수령은 아직 환갑전이건만 머리에 흰서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도 나이가 8살이나 어려서인지 얼굴의 근육질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살결이 마른 무우쪽같이 시들어가고있는 자기같은건 비할바도 못되게 아직은 그래도 풍염한 그의 얼굴을 부러운 눈매로 다시봤다. 중의원부의장에서 사법대신, 농상대신, 대장대신을 엇바꿔지내다가 이제는 부통감이 되어 여기까지 와서 내내 조석을 같이하고있는 소네 아라스께는 그와 손벽이 맞게 배합이 잘되고있는 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종을 왕의 자리에서 내쫓아야겠네.》    이또오 히로부미는 창밖의 날씨처럼 음침한 낯색을 지은채 말했다.    《꼭 그럴필요가 있다고봅니까? 》    《그렇지, 꼭 그럴 필요가 있지. 고종황제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는 하오만 때때로 엇서고만있으니 어디 참겠는가. 여지껏 반일을 일삼는 자들에게 리용되여왔고 앞으로는 그 편으로 아예넘어가버릴수도있는 존재야.  그러니 아예 내려놔야해. 안그런가?》      로련한 모사(謀士)는 고종황제를 처리할 구체적인 방안까지 언녕 모색하고 있은것이다.     부통감은 입을 다시열고 물어왔다.    《그리구는 누구를 그 자리에 올려 앉힐 작정입니까?》    《그한테 척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잖은가.》     《아, 그를말이지?....》    《그렇네. 왠고하면 척왕자는.... 소시적부터 신심이 그닥  활달하지 못하고 정치상에서도 하등의 독자적으로 운용하는바가 없거니와 성격이 온양하고 독실하여 오로지 평화를 애호하니 애비 리태왕과는 전혀 형이 다른 사람인거요. 왕위를 교체하여 황태자가 왕의 자리를 이엇다는 것을 표면에 나타냄으로써 왕위계승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날 수 있는 백성들의 분노를 우리는 무마할수도 있는것이요. 안그런가?》    《정녕 그러하다면야 더 연구해 볼 필요도 없지요. 저의  생각에도 그렇게 함이 명지한 처사일 것 같습니다.》    소네 아라스께는 동감임을 표시했다.    자기와 부통감사이 부전조개 이맞듯이 의견분쟁이 없이 의합이 맞는지라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틑날 전보로 동경에 문의하는 한편 속히 조선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의 장악을 더욱 강화할 방책을 정부로부터 세울 것을 촉구했다.    이번 해아사건을 빙적(憑籍)하여 페위(廢位)를 단행키로 맘먹은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같이 본국정부에 전보를 치고나서는 지체없이 고종황제를 찾아갔다. 그는 가을배추같이 푸르뎅뎅한 낯색을 하여갖고 고종황제를 향해 그대는 왜서 일본을 적대시하는가, 차라리 선전포고를 내릴게지 하고 힐난의 언사를 무엄스레 던졌거니와 돌아와서는 신임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다놓고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다.   《황제가 한일협약을 무시하고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적행위를 하였으니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리유가 있는것이요. 귀하는 총리대신의 책임을 지고 황제에게 주청하여 처결을 촉구하시오.》    이것은 고종황제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뜻이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가 시키대로 죄여 친 무시무시한 소문이 광풍이나 탄것 같이 삽시에 온 조선일판에 쫙 퍼졌다.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개전(開戰)하려 한다.》   《하세가와가 궁궐을 향하여 포격을 할것이다.》   《어가가 도오꾜오에 친히 건너가 일황에게 사죄해야 한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속에서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려고 적극돌아쳤다. 그는 급급히 각원들을 모아놓았다. 그리고는 경원궁으로 달려가 고종황제를 모셔왔다. 밀사사건의 사후책을 토의하기 위한 어전회의를 열기 위함이였다. 이완용은 마치도 자기혼자만이 기막힌 나라의 처지를 지극히 관심하는 양으로 황제를 향해서 간청했다.   《페하! 이번 밀사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일 두나라의 관계는 전에없이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즉 시급히 선후책을 강구해얄 것 같습니다.》    나라운명에 관게되는 이때를 당하여 고종황제는 무엇이라 말했으면 좋을지 궁리가 잘 나지 않았다. 일본 군경의 삼엄한 감시속에 외계와는 일체 단절되여 조언을 드리거나 감히 올바르게 론계(論啓)하는 사람도 없었던것이다.     다른 대신들도 어쩌면 좋을지 몰라 난색을 지은채 황제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어찌하여 이지경을 당해야만 하는가?.... 숨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갑갑하게 내리누를 뿐이였다....     한편 일본의 동경에서는 즉각 내각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진지한 토론을 거쳐 기본상 이또오 히로부미의 제의를 채납하여 첫째로 조선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며 둘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왕태자(리척)를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자는 주되는 내용으로 《한국처리방침》이라는 정부의 새 결정을 채택한 것이다.    7월 12일, 이또오 히로부미의 제안을 수락한 일본정부는 극비의 전보를 통감에게 쳐 《한국처리방침》을 곧 집행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의 내정권까지 완전히 삭탈하려 드는 판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외무대신 하야시가 이제 한국에 오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정부가 이 소문을 들으므로써 위협을 더 느끼고 고종황제에게 압력을 바싹 가해 그가 퇴위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자는 목적이였다.    통감부의 꼭두각시로 돼버린 신임총리대신 이완용은 속이 안달아나는 것 처럼 시급히 각원들을 모여놓고 회의를 열었다.      《일본에서 이제 외무대신까지 오리라는데 어쩌면 좋겠소?》     이제 나이 곧 50줄에 오르게 되는 이완용은 멋을 내느라 잘 다듬은 까만 팔자코수염을 볼따구지와 함께 실룩거리고나서 입을 열어 여러 각원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어찌할 것 있소? 하야시외무대신이 래한하기전에 우리는 황제페하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하는 것이 만전지책인가 하오.》    송병준이 선듯이 그와 손벽을 맞추었다.    몇몇 대신이 송병준의 말에 동조했다.    이날 10여년이나 일본에 가 있으면서 흑룡회의 핵심인물이자 지금은 통감부 고문노릇을 하고있는 정객 우찌다의 지성어린 보살핌과 살뜰한 가르침을 받아 뼈속까지 충효가 배일지경 배달혼을 깡그리 잃어버린채 주구로 전락되고 만, 새로 농상공부대신의 벼슬자리에 높이 올라앉은 일진회의 두목 송병준이 갑갑함을 못참겠다면서 어전에서 뻐젓이 사리였다.    《페하! 해아밀사사건은 정치상 중대문제인즉 일본으로서는 문죄하는 일이 있을터이니 종사위기가 조석에 박도하였습니다.... 만일 이또오가 이 책임을 문책하고 하세가와 대장이 대한문을 향하여 포문을 열게 되면 어찌하렵니까. 일본 외무대신이 불일간 래한(來韓)한다 하니 그렇게 되면 어떠한 요구가 있을지 모르거니와 페하의 취하실 길에는 두가지 방책이 있으니 1은 어가가 친히 동경에 건너가 일본황제에게 사죄하는것이요 2는 페하께서 대한문에 나아가서 하세가와 대장에게 직접 강복(降伏)하는 것입니다.》    (과연 네놈이 아니구는 입밖에 내니 못할 말을 하는구나,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경은 도대체 누구의 신하인가? 병준의 위인이 저러한 줄을 미리 알았던들 벌써 중용하였으면 종사위기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로다.》     고종은 진노하여 한마디 던지고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정으로 들어가버렸다.    각 대신이 송병준의 무도한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땀을 흘렸건만 이완용은 낯빛이 태연했다.    이틑날 즉 7월 17일 밤에 이완용 등 7대신이 선위(禪位)할 것을 끈덕지게 주청(奏請)하니 분통이 터진 고종황제는 노하여 책상을 치며 꾸짖고 일축하였다    《경들은 신하된 몸으로 어이하여 짐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는가? 짐이 퇴위한다면 장차 이 나라는 어떻게 될것인가? 짐이 양위하고싶은 생각이 없는 한 누가 강요해도 짐은 받아들일수 없노라.》    이러면서도 속은 이미  다 얼어버린 황제였다.     (이 일을 과연 어쩌면 좋을고?....)    고종황제는 통감부에 알려 이틑날 이또오 히로부미를 입궐케했다.    지체없이 와서 황제를 알현하는 이또오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있었다.    고종황제는 기가 꺾여 물었다.    《밀사사건으로 근자 일부 대신들은 짐에게 양위를 권하고있는데 통감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렇겠지. 이제야 궁둥이에 붙는 불을 끄자는구나.)    웃음집이 흔들거린 이또오 히로부미는 시치미를 떼면서  아닌보살을 했다.    《그것은 귀국 황실내의 문제니 외신은 간여할바가 아닌가합니다.》    이 얼마나 점잖고도 천연덕스러운 응변인가!    고종은 그가 모략을 꾸미고있는게나 아닐가 의심하면서 어렴풋한 희망을 걸고있었다. 흡사 백장을 찾아 구원을 바라는 면양과도 같이. 리지를 잃어버린 신뢰감은 이같이 순진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 스스로 자신을 우롱당하게 하는것이다.    이완용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고종황제보고 어전회의를 열라고 또 한바탕 닥달을 놓았다.    고종황제는 협박에 못이겨 침음을 하며 자결까지 하려하였다. 그는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피살된 일을 다시금 회억했다. 외교술이 출중하다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여러해를 조선에 와 있으면서도 그와 민비를 자기쪽으로 끌어 붙이지 못하였으니 결국은 실패하고 돌아간것이다. 그가 가고 미우라 고로오가 대신왔다. 자기는 불경이나 연구하지 정치에는 흥취없다면서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표명했었다. 그래 그런줄로만 믿고서 그를《독경공사》라 비웃지를 않았던가. 그런 자가 언녕 속에다는 잔인한 흉계를 품고 기여들었을줄이야 그 누가알았으랴. 그자는 실로 마구잡이로 흉포를 부린 살인악마였다. 고종황제는 한때 그를 굳게 믿어준 자기가 너무나 멍청이여서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죽지 말고 살아서 내 나라를 건져내야한다.)   고종황제는 자결을 단념했지만 결국 적신(賊臣)의 강박에 견디지 못해 태자에게 정무(政務)를 대리케한다는 조서를 내리고말았다. 대리와 양위는 형식상으로 비슷하면서도 실지에서 판이하니 정무를 대리한다면 신군(新君)은 소조(小朝)라 하고 구군(舊君)은 대조(大朝)라 하여 소조(小朝)는 명령을 받들어 집행하게 되고 국가대권은 의연히 대조(大朝)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만족할 이또오 히로부미가 아니였다.    《어찌자는건가? 그냥 벗텨볼참인가?... 내가 바라는건 그게 아니란말이요. 알겠지?》    그는 이러면서 이완용, 송병준 등을 추겨 기어히 양위를 실행케 했다.    18일 밤 내각에서 계속 임금의 양위를 주청(奏請)하고 통감부에서는 외무상 하야시를 맞아 그와 요구조건을 밀모하였다.
107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 댓글:  조회:5888  추천:33  2011-05-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                            서울을 떠난 서일은 귀향길에 함흥에 들려 거기서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을 만나보고 이틑날에는 배편으로 경성(鏡城)에 들리였다, 그저지날 수는 없는 곳이였다. 그사이 함일사범학교는 변화가 많았다. 갈 사람은 가고 낯모를 이들이 들어와 교사진은 바뀌였다.     지우인 현천묵을 만나보았다.    《지난해 가을 이운협교장선생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나니 학교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것같다. 어디 안착이 돼줘야지. 나도 이젠 있기가 싫구.》    그가 하는 말이였다. 함일사범의 교원들 중에 해외로 빠져나간 이가 여럿이고 더러는 의병에 참가하기도했다고 한다.    《그래도 넌 마음진정하고 교육구국을 그냥 해나가는게 바람직하다. 이것도 너에 대한 한차례 고험이 될수 있으니까, 안그래? 참을성을말이다.》    《건데 넌 대체 무슨 바람불어 여기룬 왔나?》    그가 묻길래 서일은 갑작스레 서울에 갔다오게 된 연유를 알려줬다.    《가만있자, 여기 우리 경성치도 하나 라철을 무척 숭배하네라.》    현천묵이 두눈을 슴벅럭거리더니 어디론가 달려가서 초면의 젊은이를 하나 데리고 다시나타났다.     활발해 보이는 그 청년은 친절스레 서일의 손을 잡았다.    《나 최익항이요. 만나보게 돼서 기뻐. 방금 듣자니 서울갔다오는 길이라며?....그래 어떻게 됐소? 라철 그분이....하여간 대단한 분이지. 안그렇소? 그런 일을 감히 벌린걸 보면 담량이 이만저만 아니란말이요. 내 맘에 드오. 그의 애국심에 대해서 국민모두가 칭송해야 할 바라고 보오.》    《한데 그런 분이 지금 령어의 몸이 됐으니 세상이 꺼구로 된게 아니고  뭐야. 평리원에서 이제 어떻게 판결이 내릴는지는 지켜봐야하오.》     서일의 말이 끝나자 현천묵이 화제를 돌렸다    《보라구 만국평화회의도 그렇지. 대표자출석여부를 정하지 않았다니 이제 그 회의참석여부가....》    《뭐라? 만국평화회의라니, 그게 열린다나?!》    서일은 초문이라 다구쳐 물었다.    《왜 오늘 신문 보지를 않은모양이지?》    현천묵은 친구가 눈이 둥그래지니 최익항이 보다말고 손에 그냥 접어 들고 온 신문을 채듯 달라해서 주었다.    《이 신문은 못봤어, 미처....》    서일이 일면 대답하며 펼쳐 보니 이해 즉 1907년 4월 15일자 大韓每日申報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고사할터인데, 고사할터인데?....대표자출석여부라, 출석여부라?....》     서일은 고개를 지르숙이며 곱잡아 뇌였다.    《왜그래?....》    《뭐가 의문돼서?....》     그가 사색에 깊이빠지는 것을 보고 성묵이도 최익항이도 자못 의아해하였다.    《접때도 언젠가 한번 소식보도가 나잖았는가. 기회가 얼마나 좋아. 이런 회의에 우리 한국의 대표가 참가해 그 자리에서 을사보호조약은 엉터리다, 그것은 일본이 무력적인 위협을 해가면서 제멋대로 강제적으로 체결한것이다, 이렇게 만방에 호소하고....그리함으로써 각국의 협력을 얻어 국권회복을 도모함이 좋잖을가 하는 생각이 나는구나.》    《일본이 우리 나라 외교권을 앗아갔는데 대표를 어떻게 파견하나?》    《설사 파견을 한다해도 일본이 천방백계를 다해 방해할거야.》    서일이 하는 말을 듣고 성묵이도 최익항이도 그건 전혀 가망이 없다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일역시 그저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해볼 뿐이지 실은 가망성이란 안개속같이 히미해보였다.    는 1898년 8월에 짜리로씨야 황제 니꼴라이2세가 세계 각국에 군비확장을 제한하여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자고 제기한 발기에 따라 이듬해의 4월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26개 나라 대표가 모여 회의를 한 것이 그 시초로 되었다.       이번의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억울함을 세계에 호소할수 없을가?... 가슴에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끓고있는 애국지사들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노려왔다.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자들은 내정의 크고 작은 사항들을 전적으로 간섭할뿐만아니라 주권을 박탈하고 자유를 속박하며 안으로는 각 부의 고문이 정사를 주관하였고 밖으로는 헌병과 순사가 각지에 널려서 경계가 심했다. 황실에 대한 감찰과 제재가 더욱 엄하였다. 크던 작던 신료(臣僚)와 신관(臣官), 관처(官妻)에 까지도 신표(信標)가 없으면 출임을 금하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송변준을 교사(敎唆)하고 비등(妃藤)과 결탁하여 임금의 언동을 물샐틈없이 정찰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지어는 왕실에서 소유한 금은과 밭과 토지마저 조사하여 탈취하였다. 황제는 한낮 갇힌 몸이요 국민은 이미 노예화하고 만 것이다. 정리(正理)니 공리(公理)니 하는건 약자를 어루만지며 기편하는 구실에 불과한것이요 평화란 기실은 쟁탈이였고 보호란 삼키려는 것이였다.    는 발기자의 의도와는 달리 제국주의렬강이 식민지재분할을 모의하는 리용물로 되고있었다. 바로 일본의 구미에 맞게.    이럼에도불구하고 한오리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강에 빠진 자 짚오라기잡듯 이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부재 이상설(溥齋 李相卨)과 같은 사람이였다. 벌써 화란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이 기회에 일본의 침략상을 만방에 호소함으로써 각국의 협력을 얻어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생각으로 극비밀리에 임금과 련락을 취하여 임금의 수결(手結)과 옥새(玉璽)가 찍힌 백지친임장(白紙親任狀)을 받는데 성공하였을뿐만아니라 며 는 밀지(密旨) 사찰(私札)까지 받았던거다.    지난해인 1906년 5월 10일(음력 4월 17일) 이상설은 선친(先親)의 제사가 끝나자 최후로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배편으로 로씨야의 울라디보스톡으로 밀행하였다. 그는 거기에 정착한 뒤 동포들을 계도(啓導)하면서 시기를 기다리다가 평화회의가 다음해로 연기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8월에 북간도 용정촌으로 건너가 그곳에다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 되는 서전서숙(瑞典書塾)을 세웠운 것이다.    이상설도 오늘의 이런 소식을 알게 되면 어쩔가?.... 이 일은 오로지 임금만이 아는것이였다.   《시세를 관망하고 연구해야 한다. 제발 덤비지 말아다구. 우리야 행동을 해도 같이해야지, 안그러냐?》    서일이 경성을 떠나면서 새로 사귄 친구 최익항까지 들으라고  성묵이한테 단단히 일러준 말이다.    객을 주어 싣고 경성만을 떠난 로씨야인의 려객선은 출렁이는 동해물결을 혜가르면서 달리였다. 며칠전에 서일이 서울로 올라갈적보다는 선객이 썩 많아서 만선(滿船)이였다. 체대가 크고 피부색이 희며 어디든 생김새가 다른 서양사람 몇을 내놓고는 혹 변장을 하고 다니는 일본 사람이 있겠지만 배에 오른 선객 다수가 동포였다. 한데 그들중에는 적잖은 객이 괴나리 보집을 든 리향민(離鄕民)이였다. 고향을 떠나가는 서러움, 그것이 페부에 까지 잦아들어 눈물이 앞을 가리건만 떠나가야만 하는 그네들의 정착지는 어딜가? 기약할수 없는 앞날이거니 그것은 또 어떠할가?....배는 파도를 가르느라 힘겹게 나간다. 원한과 고달픔과  갸날픈 희망이 착잡하게 엉켜붙은 이네들의 시름겨운 인생을 실어나른다.              쪽발이 왜놈은 들어오고           강릉집 순돌이네는 타향살이 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누구를 원망하랴           쪼그라진 제 팔자 원망해야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누군가 이따위 노래를 불러댔다.    서일이 고개를 돌려가며 찾아보니 몸이 비쩍 마른 50대의 사나인데 면목아는 사람을 부러 놀리느라 가사를 그따위로 지어 부르는 것이였다.    《남소리 말구 제 꼴 제 주제나 좀 보구서 그러우, 부평초신세에.》    순돌이 애비일시 분명한 엇비슷한 나이의 농민사나이가 도루수를 먹여 떠돌이꾼모양의 사나이는 벌씬 웃더니 그만 머쓱해서 입을 다문다. 그런다고 끝난 것은 아니였다. 지금은 어디건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세상일을 론하기가 십상이라 실없이 무심코 지어 부른 노래가 화제거리로 되였다.    《그 다 노래라 부르오. 어쩜 제 팔자탓이라 말할가? 생각해 보우. 그 다 쪽바리 왜놈들이 들어온 탓이 아니겠소. 그러니께 제 팔자도 팔자려니와 우선은 왜놈을 원망해야지, 안그러우?》    누군가 이런 말을 해서 사람들은 너 한 마디 나 한 마딘데 서울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래 통감의 감독하에 거류민단이 일본인을 조선으로 계속 끌어오고있는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 다 내 나라가 힘약해니께 그리된게 아니겠소. 왜놈들을 쪽발이라구 놀려는 줘두 우리보담은 강하니께 별수없잖어.... 안그러우?》    하면서 자포자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족적 자부심도 자존심도 잃어가고 있었다. 서일은 그저 보고만 듣고만있을수는 없는 일이라 끼여들어 한마디했다.    《저 좀 말해봅시다. 방금 듣자오니 저분이 별수없다는데 거 무슨말씀을 그리합니까. 사실인즉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들가운데는 강한 나라도 있고 약한 나라도 있는데 강한 나라라 하여 언제나 강한것도 아니요 약한 나라라하여 늘 약한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한 나라가 언제나 존재하고 약한 나라는 언제나 망하는것도 아니지요. 강한 나라가 그 강함만을 믿고 오만하고 방자하게 놀다가는 도리여 약해져 망할 날이 있을거요 반대로 내가 약한 것이 두려워 분발하면 강하게 되어 그를 이기고 세상에 떳떳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배사람들은 올해 27살인 서일의 정수한 몰골을 다시다시 여겨본다. 젊은이가 뼈굳고 기백이 있음에 탄복하여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배는 오래오래 달려 마침내 대륙과 란도(卵島)사이의 바다를 지나 조산만(造山灣)의 웅기항에 가 닿았다. 서일은 웅기에서 하선(下船)했다. 거리구경도 할 새 없었다. 그는 송진산(松眞山)을 지나면서 그 아래 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들리였다. 전에도 늘 들려 하루밤을 지내군 했던 자그마한 려인숙이 그지간 크게 확건을 시작하고 있었다. 주인이 말했다.    《내가 왜 이러겠수. 이사군이 날따라 느니까 이러지요. 이국땅 바라고 떠나는 이들이 마지막 하루밤이라도 편히 주무시도록 조처를 해야지, 안그런가, 젊은이!》     서일은 코등이 시큼해났다.     그는 이틑날 새벽일찌기 일어나 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경흥(慶興)에 이르러 한끼 배를 불리고 다시 북쪽을 향해 그냥걸어 어슬엮에 용남리(龍南里)에 가 닿았다. 이만히면 걸음새가 대단히 날랜축이였다.    용남리는 북쪽에 강이 있다. 한데 이날따라 놓은지 오래여 허술한 다리가 끊어져 서일은 고생스레 도강을 해야했다. 다행히 물이 깊지 않았다. 해도 옷을 벗어 꿍쳐서 머리우로 치켜들고 건너야했다. 한데 강에 들어서서 몇발짝 안가 뒤로부터 총성이 들려왔다. 서일은 허둥대며 강을 건넜다. 대안에 방금 오르자 총성은 또다시났다. 그는 대체 웬일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나의 장면이 안겨왔다. 강저쪽, 방금 그가 건너던 곳에서 한 사람이 총을 놓아 접근하는 상대쪽을 견제하고 그의 부추김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한 부상자가 절뚝거리며 강에 뛰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람은 앞으로 전진도 못하고 그만 꼭그라져 허우적이였다. 분명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있는 의병들이였다.     만사불구하고 구해줘야했다. 서일은 꿍쳐들었던 옷을 얼른놓고 강에 다시뛰여들었다. 정신이 어떻게 돌아 재우쳤는지를 그도 알수 없었다. 다리 에 총상을 입은 의병을 둘쳐업고 안깐힘을 써가며 이쪽으로 건너와 내려놓았다. 그리고나서 다시 보니 애꾸눈이다. 아니 이분은 이달문어른아닌가!    《하 이거!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더 캐고 물을 계제가 못되였다.    저쪽 의병은 총을 련속놓아 추격자들을 반격하면서 강을 건너왔다.    적들은 강을 감히 건너오지 못한채 이켠을 항해서 한바탕 란사를 하고나서 그만 물러갔다.    이달문을 호송해 온 의병은 나이 중년에 이른 사나이였는데 위급한 고비에 도와줘서 대단히 고맙다면서 자기를 계화(桂和)라고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말을 하는데 이렇게 공교로울변이라구야, 그들은 서일의 도움을 받으려고 금동리 마을로 향한 것이 아닌가!    간밤에 의병소부대가 로씨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경찰서를 습격했다. 이달문은 헛총을 몇방놓고 그만 운수나쁘게 다리를 맞았다. 그래서 더 싸워보지도 못하고 현장을 떠나 피신했다가 지금  금희동으로 가는건데 적 수색대에 발각되여 추격을 받다보니 방금 본 그런 장면이 출현된 것이다. 부상자를 몸이 성한 그들 두사람이 거진 업고가다싶히해야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워 경계를 해야했다. 부상자도 고통스러워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서일은 한마디 더 캐 물을 수도 없었다.    이럭저럭  금희동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큰할아버지 큰할머니는 그들이 이런 모양으로 느닷없이 나타남에 저으기 놀랬다. 서일은 오다가 당한 일을 말했다. 두 늙은 내외는 그제야 몇 년전에 신세를 지고가서 구면이 된 이달문과 그가 제 전우라며 소개하는 계화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지간 어데가 떠돌았게 여적 그림자도 안뵈였나?》    큰할아버지께서 이달문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이였다.    《형님, 말도마시우. 내 지내온 일 일구난설이외다.》    이달문의 후생은 그야말로 고난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동학당란이 일어나자 그를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군대가 행실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마누라와 시집도 안간 딸년이 그때 야수같은 그자들한테 릉욕당하고 죽어버린통에 홀몸으로 난 그는 여기까지 와 서일이네 집에서 여러날을 묵으면서 떠돌이를 하다가 생각이 돌아 갑산에 가 거기 산속에 있으면서 포수질로 몇해를 이럭저럭 지냈다. 그러다가 두해전인 1905년 7월에 늙은 몸으로 함경도지방의 포수들이 모여서 조직된 노랑포수의병대에 가입했던 것이다. 의병대를 내놓고 다른데는 갈곳도 없었으니 의병대를 곧바로 제 집처럼 여기게 된 그였다. 의병장은 나이가 아직 30살미만인 황병길(黃丙吉이)이였고 인원은 약 100명가량되였다.      이달문은 그해 7월 23일에 있은 백사봉가까이의 호안동골짜기 싸움에 참가했고 그후에 있은 신틀바위전투와 회령군 옥성동전투에도 참가해 적을 소탕했던 것이다. 그 의병대는 부령, 회령 지방에서 내내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토벌책동이 강화되자 투쟁을 다시급 벌릴 계획밑에 두만강을 건너 로씨야 연해주지방으로 간것이다...    《임자도 달문이허구랑 같이 노랑포수의병대에 있수?》    큰할아버지께서 계화를 향해 물는 말이였다.    《아니요. 난 노우기에프스크서 사는데 경흥을 잘 아는지라 길잡이를 나섰던거외다.》    《가만있자 이자 러시아 어디에 있다했지?》    《노우기에프스크에요. 아라사말로는 그렇고, 우리 만로는 보통 연추(煙秋)추라고들 하지요.》    《그렇다면 최재형이를 알겠구먼. 그가 거기서 산다는데.》    《알다말다. 우린 늘 만나는데요.》    《아, 그렇소! 그 사람 지냄이 어떻소? 듣자니 몇해간 러시아군대에 붙어 우육류 용달상을 해서 거부가 됐다는데.... 러시야 수도에 가 황제도 만나보고 훈장도 많이 탓다더군. 아무튼 잘 돼야지. 그분 그래 지금은 무사히 잘 지내오?》    《잘 지내지요. 건데 로인님은 어찌하여 그를 그리도 잘 아십니까?》    《아따 한고향 사람인데 왜 몰라. 뒷동네서 태여나 자라다 소시적에 연해주로 건너간걸세. 그후 몇번 왔다갔더랬지. 고향이 그리워서. 같은 달이래도 고향달이 더 밝다고 몸은 떠나갔어두 맘은 떠나지를 않는 곳이 아마 제 난 고향인가 보지. 안그러우?》    《과연 그런가봅니다. 그분은 애국심이 남달이 강한분입니다. 지금 거기서 사는 우리네 한국동포치고 그분의 보살핌을 받잖은 이가 거의없지요.》    계화는 근년들어 소식이 끊어져 몹시 알고파하는 큰할아버지에게 인망높은 최재형의 근황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었다. 최재형은 씨베리아 재유동포(在留同胞)를 위해서 민생안정과 민족교육에 전념한다고, 사재(私財)를 희사(喜捨)하고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도헌(都憲)직에서 얻은 년봉(年俸)은 모두 교포학생을 류학시키는 학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화는 최재형은 지난 로일전쟁때부터는 본격적인 항일을 시작했는바 해군소위로 임명되여 통역관으로 활약하는 한편 남부집회소 감독으로 로씨야에 귀화한 교포들을 규합하여 항일무력전에 참가케 할 책임을 지고 로씨야군대와 교섭하여 전쟁필수품인 무기를 제공받은 사실과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李範允)과 상의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중추기구인 무장단체를 만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기구가 명칭이 동의회(同意會)인데 최재형이 회장, 이범윤이 관리군(管理軍)의 지휘관으로 로일전쟁때 일군에 대항해 싸운것이다.    《잘하는구먼! 과시 의기있는 대장부로세!》    큰할아버지는 찬탄하면서 고개를 돌려 서일을 보았다. 너도 잘 들었지 하고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너도 그이를 따라 배워 기개를 날려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 같기도했다.    이제 다시 추격받는 날이면 두사람 다 얼마 피하지도 못하고 체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달문은 한동안  금희동에 숨어 민간료법으로라도 총상을 치료하기로 하고 계화 혼자서 먼저 로씨야로 건너갔다. 상병보호는 큰할아버지께서 전적으로 맡았다. 서일은 한시름놓으면서 경원으로 갔다.    안해 희연이는 그지간 딸 죽청이한테 한글을 배워주면서 규합총서(閨閤叢書)를 통달할 것 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편자미상(編者未詳)인 그 책은 1869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부녀자들 대상으로 한 순국문으로 된 사전종류인데 일상 지킬 범절을 비롯하여 약주방문, 장초법, 어육, 염색법 다방면에 걸쳐 실려있었다. 이홍래가 가방속에 넣어 온 것을 보라고 그한테 준거다.    이홍래는 박기호네 집에 숨어있으면서 눈이 가매 기다리고있었다.    서일은 서울에 갔다온 경과를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7월초의 어느날에 라철 등은 대한제국 평리원의 판결을 받았다.           라철은 검사들이 논고할 때 태도가 추호도 굽힘이 없었다.    《내가 난적(亂賊)을 토주(討誅)하려 하였으니 마땅히 주란적률(誅亂賊律)이 법문(法文)에 있으면 형벌을 받아도 좋으나, 이제 법관이 5적을 정부로 간주하여 전복률(顚覆律)로 단죄하니 결국 법문의 본의가 아니다.》    그는 이같이 한국인 검사가 매국역적을 암살하려 한 의거에 내란죄를 적용한 것은 부당하다고 통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던것이다.    이럼에도불구하고 재판은 열리였다. 재판에서 라철을 비롯하여 18명이 형(刑)을 선고받았다. 라철은 형기 10년, 이용태와 민형식은 교수형, 오기호는 5년을 각각 구형. 그후 7월 12일에 민형식 외 1명은 황주군 철도(鐵島)로, 라철 외 11명은 지도(智島)로, 이승대 외 12명은 진도(珍島)로 각각 유배(流配)되였다. 더구나 이때는 고종황제에 대한 강제적인 양위(讓位) 때문에 라철을 비롯한 이들을 인천까지 호송하여서는 일본군함에다 해군과 경찰이 무장경계를 하면서 까지 이들을 류배지에 호송하였던 것이다.      (1907년 12월 7일에 라철과 오기호는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였다.)    《이제 나는 어쩐다?....이대로 주저앉는단말인가? 그래서야 안되지. 동지의 원쑤를 갑지 못하면 난 의리가 없는 놈이다.》    이홍래는 제 혼자서라도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는 것 같았다.      7월 14일에 만국회의에 밀사로 파견된 이준(李儁)이 화란국의 수도 해아(海牙)에서 분사(憤死)했다는 소문이 급기야 온 조선땅에 짝 퍼져 돌풍을 일으켰다. 국민 모두가 놀랬다. 너무나도 뜻밖의 새로운 소식이였기때문다.    통감부에 장악된 한국의 통신기관이 상세한 내막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민은 내막을 인츰 알수 없었고 그 때문에 더더욱 안정을 못했다. 경성학교에서는 교학마저 중지했다.    《리준, 그는 의렬투사다!》    사생모두가 그의 비장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애도했다.    이준은 평리원검사였다. 그는 의정부참찬을 지낸 이상설과 함께 이번의 만국회의에 밀사로 가기위해 처음부터 갖은 애를 다 쓴 사람이다.    6월 5일에 개최된 제2차 만국회의는 47개 나라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미국대통령의 《세계평화를 찬송》하는 연설로 부터 시작되였다. 그 연설이 끝나 각국대표들이 의안을 제출하는 때에 이상설, 이준 그리고 그들이 로씨야에서 함께 데리고 떠난 로씨야주재 한국공사관서기 이위종(李瑋鍾) 이렇게 세사람이 돌연히 나타났다. 그들은 평화회의의장인  로씨야대표 넬리도프(NELIDOP)를 방문하고 회의에 참석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인 한국인을 회의에 참가케 하는 여부는 회의장(會議長)의 권한이 아니라는 리유로 거절당하였다. 이상설 등은 영, 미, 불, 화 등 대표를 역방하고 을사보호조약은 한국황제의 윤허(允許)가 없는것이라고 력설하면서 회의에 참석발언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기자 월리암 토마스(WILLIAM THOMAS)를 통하여 일본이 한국주권을 강탈한 진상을 발표했다. 그리고나서 월리암이 주최한 국제협회 석상에서 이위종이 한시간동안이나 유창한 불란서어로 한국문제를 피력했다. 도도하게 쏟아져 나오는 열변ㅡ그것은 피눈물의 공소였다!      7월 5일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에 호소문을 제출했다.           이에 왜적의 대표는 크게 놀라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되였음즉 한국황제가 참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신임장을 보냈는가를 전보로 한국황제께 조회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전보를 들고 황제께 나아가 사실이 있는가없는가 질문하면서 위협하여 라는 본의아닌 전보를 치게하였다.    일본 도오꾜오는 밀사문제를 둘러싸고 조야(朝野)의 물의가 대단했다.    7월 14일 의회에서 각국대표들은 아무리 한국밀사를 동정하였으나 형식상 밀사의 호소를 받아드릴수 없었다. 이리하여 이준은 드디여 분사(憤死)하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국으로 가고만 것이다.                               
1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 댓글:  조회:5981  추천:29  2011-05-06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2부)                      1       고종의 무능을 늘 한탄해 온 서일이 그에 대한 견해가 돌아서게 된 것은 1907년 1월 16일 고종이 런던트리뷰운지 특파원에게 소위 보호조약(保護條約)이란 짐이 아는 바가 아니라고 부인한 6항목의 친서를 수교(手交)한 것을 大韓每日申報가 전재한 것을 보고서였다.    사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야심을 오래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력이 약하다보니 그를 감히 맞서서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먹히우고 마는 처지를 당하게 되어 오로지 자기의 무능을 통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지금와서는 사력(死力)을 다해서라도 기우러진 나라를 다시일쿼세워 보려고 안깐힘을 쓰고있었다. 런던트리뷰운지 특파원에게 친서로써 乙巳保護條約은 무효라고 표명한 것이 그 행동의 일측면이 될 것이다.    그에 앞서서 고종은 乙巳保護條約이 강제로 늑결(勒結)되면서 국권이 상실되여 감은 물론 자기는 결국 이또오 히로부미가 다루는 꼭두각시처지에 놓이게 된거요 신념(宸念)은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지라 어느날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을 불렀던 것이다.    나이 환갑에 이른 정환직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다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 벼슬을 하고있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대바른 고급관리요 충신이였다. 불혹의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寺)로 부터 삼남도오령(三南都五領), 삼남검찰사겸토포사(三南檢察使兼討捕使),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척결하여 공이 많다.    그를 불러온 고종은 오열(嗚咽)을 하면서 물었다.    《경은 화천지수를 아는가?》    정환직이 왜 모르랴.    화천지수(華川之水)의 유래인즉 이러하다. 고대 중국 제(齊)나라의 임금 경공(頃公)이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생사(生死)가 눈앞에 닥쳐왔을 때에 장군 봉축부(奉丑父)가 임금과 옷을 바꾸어 입고서 수레우에 올라앉았다. 말을 몰고 있는 임금이 적에게 체포될 순간, 봉축부는 그보고 화천에 가서 물 한잔만 떠오라고 하였다. 임금은 다행히 그 기회를 타서 도피할 수 있었고 봉축부는 대신 체포되여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임금은 나더러 의병을 일으켜 대신 나가 싸워달라는 뜻이로다!)    동엄 정환직은 숙연히 밀조(密詔)를 받고나서 눈물을 머금고 어전을 물러나왔다. 그는 우선 관직을 사퇴하고 큰아들 용기(鏞基)와 남산의병진을 이끌고 싸웠다. 배달민족은 이같이 조국애와 골육지정(骨肉之情)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님과 동생이 또는 윤리도덕적 감정으로 스승과 제자, 남과 남이 일심동체되여 싸웠다. 비장한 희생을 많이 내면서도 항쟁을 계속하였다.    박기호가 당일의 大韓每日申報를 보라고 들고 와서 서일과 그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대화가 오갔다.    박기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임금님은 애국의 열이 불타 온 땅에서 의병투쟁이 자꾸재발하는걸 이제는 속으로는 은근히 반가와 하시는 것 같구, 그러면서 다른면으로는 일본이 회유와 공갈로 국권을 하나하나 빼앗아 내는 형편이니 자못 심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계시는 것 같구나.》    《그러시면서 빼앗긴 국권은 기어히 회복해보려 하심이 명백하다.》    《국권을 남한테 다 빼앗기면야 허수아비지 뭐야. 그래갖구야 어떻게 구천에 가있는 조종을 대할가,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래두 사력을 다해서 국권을 되찾으셔야지. 안그래? 만대에 오욕을 남기지 않으시려거든.》    《의례 그래야지. 그런데 .... 가만있자, 이 신문에 신채호의 문장이 또 났다지. 우리의 친구 하나가 신문지를 무대삼아 결심대루 싸워나가니 반갑구나!....일본의 침략성, 간악성을 기탄없이 까밝히고 악질친일분자를 규탄함이 구절구절 예리하니 실로 실물폭탄의 실력을 릉가하는 종이폭탄이로다!》    이 말에 박기호도 동감하면서 그의 글은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분발시키는 활력소구실을 한다고 찬평(讚評)했다.    《일본은 그 신문에 뻗친 독수를 걷어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신문의 안전이 늘 근심이다. 지독한 일본놈들이지. 그놈들은 오장이 어떻게 돼먹었는지 세상 못해내는 짓이 없으니까.》    서일은 오늘 역시 신채호의 안전까지 념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이 예측은 옳았다. 大韓每日申報가 통감부의 비위를 다시 한번 크게 거슬리여 일본은 신문사 사장인 영국인 배설추방공작을 더 활발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일본측은 大韓每日申報의 기사를 번역하여 영국측에 제시하면서 배설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등 외교경로를 통한 압력을 가하면서 그 자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매컨지는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일인(日人)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그의 생활에 불편을 주려고 애썼으며 그의 사업을 방해하고자 갖은 짓을 다했다. 일인들은 그의 우편물에 늘 장난을 쳤고, 신문사종업원들은 이러저러한 구실로 위협 또는 체포했으며 그의 집안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어느날 신문에 놀라운 소식이 또 났다. 한차례의 조직적인 정부대신 집단암살행동이 일본군경에 의해 마침내 제지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라철, 오기호 등이 5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보도한것이였다.    《원, 어떻게들했으면 또 실팬가? 역적대신들을 일거에 소탕하자고 했으면 우선 계획부터 대단했을텐데 한놈도 없애지 못하다니 원! 에에...》    서일은 보던 신문을 맥없이 던진채 그 보도는 되도록 새겨두지 않으려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맹랑하게만 여겨져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고있는데 어느날 꿈밖에 이홍래가 바람같이 경원에 나타날줄이야!    《아니! 이선생도 그 행동에 참여를 했단말입니까, 그래?》    《그렇네. 걷보기는 펀펀할 것 같으리오만은 지금 나는 똥줄이 달아서 피신을 다니는 놈일세.》    이홍래가 하는 말이였다.    그랬다, 걷모양보구야 누군들 그를 탈주자로 의심하랴. 우선 외형부터 보자. 서양복을 정갈하게 입고 구두신고 멋진 가죽가방까지 척 들었으니 짜장 출장을 나선 어느 회사직원같지를 않은가.    《하하, 대단히 배포유한분이네요!》    《하하하!....》     서일도 박기호도 그가 똥줄이 달았다는 소리에 웃음이 나갔다.    이날은 월요일이였다. 서일은 그를 우선 제 집에다 숨겨 푹 쉬라해놓고는 저녁켠에 퇴교를 해서야 박기호와 함께 조용히 다시마주앉았다.    《거사를 이루자던 날이 3월 25일이니까.... 우리야 신문을 보구서 그 날을 알지요. 오늘이 4월 1일이라 그러니 꼭 한주일만이구려! 한데 가만있자, 그러면....그렇게 먼데서 이레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행동이 실로 과연 잽싸기도합니다! 축지법을 쓴거야 아니겠지요? 불가사이야, 불가사이!》    서일이 손가락을 굽혔다폇다 꼽고나서 머리를 젓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까 이선생하던 얘기를 잊었나. 똥줄달아 도망치는 중이라잖어.》    박기호가 말해서 희연이와 죽청이까지도 웃었다.          《그래두 불가능이야, 날개있어서 날아왔으면 몰라두.》    서일은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홍래는 이때에야 비로서 중도에 있었던 일 한가지를 실토했다.    《내가 날개있어서 빨리왔을가. 오다가 부정행실이 좀 있었네. 들어들보라구. 난 그날 집에 피끗들렸다가 곧추 정거장쪽으루 내뺐지. 거기에 때마침 떠나는 차가 있더군. 짐을 반가량 싫은 무개화차였어. 올라가 보니께 경의선이라, 차는 북쪽으루 달리데. 마침 잘됐다했지. 잘되다말다. 그놈의 차가 정거장에 오래눌러붙지를 않구 고맙게두 가구가구해서 이틀만에 나는 평양에 도착했던거네. 거기서 내려버렸지. 압록강쪽은 아마두 경계가 더 심할거다 생각을 해서였지. 그래 어떻게 됐겠나, 방향을 이리루 돌린거지. 안오자니 영락없이 잡힐 것 같구. 오자니 아득하구.... 양덕에 이르러 말 한필을 훔쳐 타구 그냥 달리구 달려왔네. 그러다 청진에 채못닿아서 말이 그만 거품을 물고 눈깔을 까뒤히는게 죽을 거 같으데. 그래 그놈을 네갈데루 가거라 팽가치고는 도보루 예까지 온걸세.》    《그 입은 옷도 훔친겁니까?》    《아니여. 옷은 청진서 내 돈주고 사 입은거네.》    《그럼 가방은요?》    《그건 집에 있던거네. 나오면서 부러 유유히 들구나왔지. 멋부리면 나을거 같아서.》     (자기를 변장하느라 무던히도 신경을 썼구나.)    서일은 웃음을 입에 문채 가방쪽에 눈길을 던졌다가 거두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그러니까 이선생은 월경을 작정하고 이리루 오신게로군요, 그렇죠?》    《........》    이홍래가 묵묵부답인걸 보자 박기호가 롱을 걸었다.    《아닌게 아니라 똥줄이 달아두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아무렴 만주까지 도망을 치다니요 원. 혼빵났지요?》    《혼빵나그러는게 아니라 성공하지도 못하구 잡히면 그때는 더 맹랑한 꼴이라 재미없어서 그러는거네. 숨을 돌렸다가 다시와서 한번 또 해봐야지.》     이홍래는 이러면서 자기의 실수를 털어놓았다.    《내가 거느리는 패는 권중현이를 잡자구 했드랬지. 아느새있으려니까 그자가 오데. 건데 사인교에 앉아 꺼들거리는 꼴이 어찌두 눈에 시던지 내가 고만에 고 소래기를 치면서 달려나갔지. 먼저 갈겨놓고 봐야했을건데 그만.... 피스톨을 꺼내 겨누자니 그자의 호위병들이 왁 달려들어 끄잡아당기데. 그래서 난.... 강상원이 갈겼네. 그런데 아뿔싸, 맞히지를 못했네. 재차 갈긴것도.... 그가 체포되는걸 보구 난 날 잡으려는 놈을 둘러메쳐 넉장을 놓고는 그만 내뺐던거네.》    《아니 건데 소리는 왜 쳤습니까? 그럴려거든 차라리 하실거지.》    서일의 입에서도 놀림말이 나와서 모두들 웃었다.    《그러게 말이네. 이런 꼴루서 되자니께.... 난 그놈은 잡았다했지. 서툴렀어. 우린 너무도 서툴렀어.》    이홍래도 얼굴은 웃고있어도 맹랑해 하는 빛이 력력했다.    그날 각 대신을 예궐(詣闕)의 도상(途上)에서 일제히 거결(擧決)할 것을 결정하고 내온 부서를 볼 것 같으면 이러했다.        參政大臣 朴齊純의 암살책임자는 吳基鎬의 결사대 수명    內部大臣 李址鎔의     ,,        金東弼의     ,,        軍部大臣 權重顯의     ,,        李鴻來의     ,,        學部大臣 李完用의     ,,        朴大夏의     ,,      法部大臣 李載克의     ,,        徐泰運의     ,,         前軍部大臣 李根澤의   ,,        李容彩의     ,,            이근택은 총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오지 않아 참살될 것을 모면하였다. 이완용의 저격을 맡았던 일대는 시장하여 주막집에 잠시 들린 틈에 이완용이 지나감으로써 역시 실패하고말았다.    서일은 이홍래의 구술을 다 듣고나서 결론적인 평을 했다.    《내가 보건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면 애국열정과 매국노에 대한 분노가 앞선나머지 치밀한 계획과 세심한 노력을 소홀히 한 탓이로구먼.》    《그 말이 맞네. 아마 그런 것 같네.》    이홍래는 착오적인 결함을 승인하면서 일이야 어떻게 됐던간에 라철선생이나 오기호선생이나 결코 이것으로 끝내자고는 하지 않을거라했다.    《이것으로 끝내지 않으면 어쩔텝니까? 이선생은 이제 서울로 다시금 올라가보렵니까? 관두시오. 그런 모험스러운 짓은 하지두마시오. 지금 경찰에서 잡아낼려구 눈에 쌍불을 켜고있을텐데.... 용맹이 너무 과해두 안됩네다. 나돌지 말구 여게 꾹 배겨있으시오, 쫓지를 않을테니.》    서일은 웃방을 내주면서 그를 두문불출하게 단단히 뒤를 눌러놓았다.    이홍래는 그지간 이 의병대 저 의병대를 전전하면서 혹은 격문을 써주기도 하고 혹은 함께 싸우기도 하였다면서 그러는 사이 경상북도 금산군의 박대하를 알게 된 것이라면서 같은 민영환의 부하인 김동필, 이용채와 함께 의병을 다시금 일으키려다가 라철을 찾아가 조언을 바란즉 그가 하는 말이 나라를 팔아먹는 5적부터 주살(誅殺)해버려야 한다기에 그러면 그래보자고 거사에 참여를 했노라면서 오기호가 조직한 유신회에 대해서, 그와 라철(아인영)이 주장해온 민간외교로선에 대해서 제나름의 평가를 했다.       서일은 이홍래가 몇해전에 라철의 조언(助言)을 듣고 월경의병장의 노릇을 착실하게 해낸 일을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라철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분일가 그를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이 또다시 무럭무럭 났다.    이러던차 4월 2일자 서울의 친일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들에 라철이 오기호, 김동식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했다는 소식보도가 났다.    《자수를 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야?!》    이홍래가 신문을 보더니만 펄쩍 뛰였다. 그리고 얼굴은 보기조차 흉할 정도로 이그러 지면서 갈피잡기 어려운 생각에 착잡해지는것이였다.    《이것 안보입니까, 정부는 이 사건을 정부정복을 목적으로 한 내란사건으로 규정하고 체포된 자들을 평리원으로 이송하였다구요. 이런데도 뛸쳐나가 볼셈입니까? 스스로 법망에 걸려들 짓은 하잖는게 좋겠습니다.》         서일은 움찔거리는 그를 다시 한 번 꾹 눌러놓았다.    3월 25일의 거사가 실패하였으나 라철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급급히 재거사(再擧事)를 계획하고 박대하를 지방에 내려보내여 결사대원을 모집케했다. 한데 이때에 서창보(徐彰輔)가 실수하여 수사당국에 체포됨으로 하여 사건의 전모(全貌)가 밝혀져서 동지들은 륙속 체포되였다. 이렇게 되자 라철은 가만히 보고만있을 수 없어서 이광수와 이용채에게 거사를 부탁하고 동지 둘과 함께 자진하여 평리원(平理院)을 찾아가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니 벌을 하겠거든 나를 하라면서 자수한 것이다. 이어서 이기 와 이광수도 자수하였고 이용태외 19명이 하나하나 체포되는 판이였다.    체포되지 않고 피신한 것은 이홍래와 박대하, 이용채, 서태운 뿐이였다.    날이 점점 가면서 그 사건에 관한 소식은 신문에서 점점 가라앉았다.    《잡히지 않은 이들은 멀하는지?.... 라철은 어떻게 되는지?....》    이홍래는 소식을 몰라 답답하니 속에서 털이난다했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이홍래모양으로 계속 숨어있을거요 체포된 사람은 판결을 기다릴것이오만 그는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같아서 그냥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서일이 학교에 출근한 후라도 훌 떠나가지는 못했다. 감히 그럴수 없었다. 서일의 집에다 몸을 숨기는 한 주인의 허락없이는 일체의 자유적인 행동은 금하기로 단단히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꼭마치 쇠초롱에 갇힌 야수와도 갔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냐?》    서일은 친구앞에서 사정이 딱함을 얘기했다.    《그래두 절대루 내놓지는말아야지, 놈들이 눈에 쌍불켜고 찾는판인데 나가기는 어디루 나간다구. 번들번들 나돌다가는 영락없이 잡히고말거다, 안그래?.... 그래두 안전하기야 여기가 제일이지.》    박기호의 말이였다.    《나도 그 주장인데.... 아마도 내가 서울에 한번 갔다와얄 것 같다.》    《정황알아본다 그거지? 건데 그걸 어떻게? 누구와?....》    《우선 신채호를 만나서.... 그인 언론인이니 알수도 있지 않을가?》    《지금은 보다싶히 재판소라는건 싹 다 왜놈과 그 주구들의 손에 들어간건데 저들이 하는 일을 그한테 알려주기나 할가. 설혹 알려준다해두 실속대로 알려줄가. 그런 기자들하구는 옹추간이 됐을건데.》    박기호가 하는 말인데 과연 그럴법한 일이기도한지라 더 말을 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 이홍래의 앞에 이 말을 꺼내보았다. 그랬더니 이홍래는 급기야 낯이 확 밝아지는것이였다. 그는 내심으로는 언녕부터 서일이 한번 서울에 가줬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상설은 로씨야서 북간도로 건너갔다니 만날 수 없는거구....》    《자결순국을 한 민영환의 유서를 읽으면서 통곡하던 그분말이지요?》    《맞어. 그건 어떻게 알우?》    《서울갔다가 마침 봤지요. 종로서 자기도 죽겠노라구 야단쳤던걸요.》    《그랬소. 야단을 쳤어. 병원가 구급을 하구서야....》    《그분 만주가서는 뭘하시게?》    《용정서 서전의숙을 세우고 글을 가르킨대. 그렇지, 우당선생이 계시니 그분하고 물으면 혹 알수 있겠어.》    《우당이 누구신데?》    《우당을 몰라? 이회영말이여. 그분의 동생 성재 시영선생도 있구. 이시영이야 알겠지, 김홍집의 사위말이요. 그인 전에 외부교섭국장을 지냈잖아. 평양감찰사로 있다가 그만두고 중추원의관으루 전임해서는 한성재판소장으루 게시네. 그들 6형제 대부들은 다가 애국심이 대단한 분들이요. 건 그렇구 그분들은 더구나 라철과는 모두 친분이 두터우니 도와나설거네.》    보아하니 이홍래는 그들의 관계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이회영은 1898년 무술(戊戌) 중추(中秋)에 이상설, 여준(呂準) 등과 남산 홍엽정(紅葉亭)에 모여서 내외정세를 검토하면서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불쌍한 백성과 일본을 비롯한 열국의 독아(毒牙)가 엇바꾸어 핍박해 옴에 난국타개책(難局打開策)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던 끝에 이상설의 서재를 회의실로 정하고 방략을 연구했는데 라철은 그때 그네들과 동지적인 혈맹을 맺은 것이다.    을사해인 1905년 11월상순 어느날 이상설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알선으로 로일강화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얻은 일본은 이또오 히로부미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어떤 조약을 제출케 하고자 파유(派遺)했으니 이는 한차례의 음모요 한국에 대한 치명적인 것이 될 것 같으니 이에 대한 강구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바 있다. 그때 이회영은 올것이 왔다고 탄식하면서 어찌 방관하랴 이상설이 현재 참찬(參贊)으로서 요직에 있으니 참정대신 한규설과 숙의(熟議)하여 불리한 조약은 한사코 거부하도록 하고 이시영은 외부교섭국장에 있으니 외부대신 박제순을 설득하게 하는 한편 고종황제의 결의 여하가 관건이니 황제가까이에 있는 민영환에게 부탁하여 어떠한 제안이던 불리한 것은 완강히 거부하도록 상주(上奏)하도록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라철이 오기호 등 동지들과 함께 민간외교를 나섰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이르러는 결국 이모양이 된 것이다.    서일은 함흥에 계시는 친부(親父)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보러 갔다와야겠다며 곧 서울을 향해 장도의 길에 올랐다.    이홍래는 박기호가 주인사내없는 집에 있기 불편할것이라면서 제 집으로 모셔갔다.    서일은 서울에 당도하자바람으로 大韓每日申報社부터 찾아갔다. 마침 신채호가 출장을 하지 않아서 생각대로 만날 수 있었다. 신채호는 느닷없이 나타난 서일을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신채호는 대구를 중심으로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적극 참가하여 필봉으로써 이를 고무하면서 즐기던 담배까지 끊고 있었다. 서일이 그의 앞에서 선문도 없이 이같이 문득 찾아오게 된 연유를 말했더니 그는 아 그런가, 라철은 과연 전민이 존경하고 흠양할 분이다, 5적을 암살하려던 거사가 비록 실패는했지만 이들의 애국정신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면서 자기도 체포된 이들의 형편을 무척 알고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우회영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때 우회영은 서울에 있지 않아 만나보지 못하고 그의 아우 이시영(李始榮)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장인 이홍집이 명성황후 조화(遭禍)와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으로 인하여 역적으로 몰려 무참하게 살해되자 이상설, 여조현(呂祖鉉) 등 명사(名士)들과 산정(山亭) 야사(野寺)에서 10여년간 정치학과 법학만을 연구하다가 이제 다시 관직을 맡고 사업을 시작한 이시영이다. 그는 자기보다 10살도 더 손아래인 두 젊은이가 라철을 비롯한 5적암살건 관련자들의 형편과 운명에 대해서 각별히 관심하면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발분(發奮)하는것을  보고 감격했다. 그는 자기도 같은 심정이니 구원에 진력하리라면서 지금 平理院 재판장으로 권력을 쥐고있는 이윤용(李允用)을 5역적과 꼭같이 잔인, 교할한 인간이라 욕했다.    이윤용은 1854년생이고 홍성대원군의 사위다.    《그 녀석은 염통에 붙었다 간에 붙었다 하는 그 재간하나를 내놓구 뭐가 더 있을가. 낯가려운줄도 모르는 처세술? 고약하지. 의리란 개보다도 없는 자일세. 홍선대군 때에는 그한테 잘보여서 사위까지 됐지. 후에는 민비헌테 알랑거리며 달라붙어 양덕현감노릇을 한게 아닌가. 한때 병조참판질도 허구. 형조판서를 지낼때는 어땠나 보게. 좌포도 우포도 그걸 도맡아 다했으니....그래서 경무사로까지 오른게 아닌가. 그런 녀석이 아관파천때는 친로파내각엘 가담했단말이요.》     이시영이 하는 말이였다.    《그러다 심기일전해 이젠 친일주구질이지요. 그렇지요? 더럽기가 부덕쥐같은 놈입니다! 듣자니 이완용이하구 형님동생하며 끔찍스레 지낸다는군요. 이름자까지 비슷하겠다. 모르는 사람은 다 그들을 진짜 형제로 믿을 수도 있지요. 합니다만 정말 너절한 배짝입니다.》     신채호가 역적들의 우정을 경멸했다.    《그렇군 그래. 그가 한때는 이준용의 왕위찬탈음모에도 가담을 했었지. 그런 놈이 글쎄 이 나라의 사법권을 틀어쥐고 있으니 원....저따위 간신역적들이 지금 망국에 채질하고 있음을 눈뜨고 보면서도 어쩌지를 못하니 국민일원으로서의 무능함과 자책감이 뼈를 에일때가 많습니다.》    서일이 이런 말을 해서 이시영은 다시본다. 과연 네가 우국충정을 지닌 젊은이로구나 하며 대견해 함이 그의 얼굴빛에 력력했다.    그들 셋이 평리원에 가 알아보니 아직은 사건관련자를 체포중이여서 재판이 어느때 가서 열릴지 미결이라는 것이 거기의 답복이였다. 그러나 한가지 명확한 것은 라철을 위시한 자수자와 이미 체포된 자에 대한 재판에 대해서는 평리원 심판장 이윤용이 사건의 중대성을 논하여 이 안건을 판사(判事) 김정묵(金正黙)에게 위임했다는 것과 사건의 담당검사는 이건호(李建鎬), 정석규(鄭錫圭), 박유관(朴有觀) 등이라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를 끄당겨본다?)    이시영은 속으로 생각을 굴려보다가 이 일은 아마도 만계(萬計)를 다해서 고종을  움직이게 하는게 득책이라면서 제 속구구를 내놓았다.    《그렇게 되면야 오죽좋겠습니까. 춤을 출 일이지요.》    《그럼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재판은 모면키 어렵겠지만 그것이 내리더라도 경하게 내리거나 실효가 무기력해지기를 서일도 신채호도 다같이 바라는거다.     이시영은 능력껏 힘써보마고 했다.     서일은 이번 서울걸음에 친구 하나를 새로 사귀게 되었다. 육군연성학교 조교로 있는 김규식(金奎植)이란 청년이였다.    《인사하게. 이분은 함북 경원서 교육사업을 하고계시는 나의 지기지우 서일선생이시오.》     신채호가 그를 서일에게 소개하면서 각별히 덧붙이였다.    《대바르고 용감한 청년이요. 동지로 사귈만한.》     김규식은 나이 19살이라는데 나이에 비해 퍽 숙성해보였다. 서일은 키골이 장대해서 거인다운 그의 풍염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듬직해 보여 좋군! 천자가 일부당천의 장군감이야!》     칭찬에 김규식은 되려 파겁을 못한 소년모양으로 송구스러워했다.    《전 아직 어립니다. 선배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많이 받아야겠습니다.》    《선배란 신념이 같을 때 만이 그 자격이 있는거니 굳게 믿어도 될 것이오만 역적간신이 속출하고있는 이런 혼암의 세계에서는 조석으로 맘이 같잖은 자들도 있는거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것이오.》    《과연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금의 대신만 놓고봐도 어느 하나 애국자로 표방하지 않은 자 있습니까. 기중에는 한때 자주독립을 요란스레 부르짖어 많은 사람의 스승으로 선배로 흠앙의 대상이 되어 떠받들리던 자도 있습니다만 심기일전해서 지금은 왜의 꼭두각시로 놀아대고있잖습니까.》    김규식은 이러면서 이번 집단적인 5적암살행동이 실패로 끝났음에 몹시 아수해하였다. 그러면서 한편 또 체포된 자들의 처지를 동정도 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야 어찌 직책을 다한다하리오.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을 알고있을게요. 그들은 다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신명을 나라위해 바친 유명한 의병장아니오. 우리 민족은 혈관속에 그들의 충효사상과 구국정신이 흐르고있길래 국난을 당할때마다 용감히 일떠나 항쟁하는게 아니겠소. 나는 규식이도 구국명장이 돼여주길 바라오!》    서일은 갈라질 때 그의 손을 잡고 이같이 간곡히 부탁했다.   
105    한번 다시 숙고해 볼 일 댓글:  조회:4587  추천:34  2011-04-27
  에쎄이            한번다시 심사숙고 해 볼 일 지난해의 상반년에 나는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하는 글을 외국에서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에 올리고는 외국인과 인터뷰를 한 나젊은 민권환경운동가 호가(胡佳)가 법에 기소된 후 북경제1급법원으로부터 국가전복죄로 3년 6개월의 직역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게되였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200여일 가택연금을 당한적이 있는 호가(胡佳)는 그 전해의 11월에 유럽의회인권소위원회에 중국의 인권실태에 대해 증언한 것으로 하여 년말이 되자 내란혐의죄로 체포되였다고 한다.    신화통신은 호가(胡佳)가 중국의 정치 및 사회제도를 비방하고 국가전복을 선동한 혐의로 이같이 판결했노라고 보도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그가 과연 감히 국가전복을 꾀하였단말인가? 그럴수 있을가? 어쩐지 믿음이 덜가는 보도였다.    이에 미국의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중국을 방문하는 기간 중국정부에 호가(胡佳)를 석방 할 것을 촉구했고 일부 서방의 정부들도 중국에 석방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지어 중국에 주재하고있는 미국대사관은 신화통신의 보도가 나오자 이와 관련하여 성명까지 발표하였는바 그 내용인즉 중국은 북경올림픽개최를 계기로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개선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후에 더 큰 론쟁과 마찰이 생기였다.    열악한 환경과 좋지 않은 분위기속에서 복역중인 호가(胡佳)가 바로 2008년의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거론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벌써 예고된 바였다. 7년전인 2001년에 벌써 코피 아난유엔총장이 예견한바가 있었거니와 마찬가지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주관하는 노르웨이평화연구소의 슈타인퇴네손 소장도 최근상은 중국의 반체제인사에게 돌아 갈 것이라면서 호가(胡佳)부부를 가장 유력한 수상후보자로 꼽았던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까놓고 말해 이건 그들 젊은 부부가 중국의 불만족스러운 인권문제와 함께 체제개혁의 필요성을 심심히 느끼고 그 해결방도를 찾기 위해 남먼저 대담히 발벗고 나서서 선줄을 끈 것이요 희생도 불사하고 모험을 감행했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도 우리 나라가 지금은 퍽 자유스럽고 전보다 나아진게 사실이지만 아직도 모든 종류의 사회갈등이 끊임없이 쌓이고있으며 따라서 불만이 끊지 않고있는 것이다. 인권문제 하나만봐도 그렇다. 그것이 자연적, 력사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등 여러요인에 기인되여 아직 허다한 문제점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해결이 너무나도 굼떠서 국민의 갈망에 미처 따르니 못하는 것이다. 허니까 성급한 자는 자연히 불만이 야기되여 두덜대기마련인데 그런다고 잡아 가두어서야 문제가 해결이 될건가? 국가정부가 그것을 불량한 자의 불량한 짓으로 보지 말고 좋기는 아량있게 대해줌이 낳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형벌을 어디다 써야 하는가. 그것은 지각없이 경거망동하는 무모한 자를 다스림에나 적합할게 아닌가.    개혁개방을 한지가 이젠 30년이 썩 넘는다. 력사가 흐르니 시대가 많이 변하였다. 그런데도 탄압봉을 계속 휘두르다니? 정부는, 나라를 운전하는 어른분들은 이제 더는 조폭하지 말고 너그러운 자태로 국민모두의 인권을 존중하고 요구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무엇이 자유고 무엇이 인권인가?    이렇든 저렇든 상은 받아안게 되어진 운명이였는지 호가(胡佳)가 국가적인 엄한 항의에 의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게 되니 이번에는 그 대신으로 유럽에서 가장 권위있는 인권상인 “사하로프상”의 스므번째 수상자로 되었다. 그가 그렇게 되니 이번에도 정부는 또 모진 반발이였다.    “범죄자에게 상을 주다니..... 이것은 내정간섭이다” 라고 하면서.    대체 범죄가 무엇인가?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규명하기에 달린게 아닐가?    노벨상이건 사하로프상이건 그것이 국제적인 행사이니 상본신이 내포하고있는 본의와 취지 그대로 권위가 있는 것이여서 세상 그 어느 상보다 가치가 높은건 더 말할 것 없다. 가까운 일본이나 인도는 물론 한국에서도 그 상을 받았다. 한데 우리 중국은 왜서 여직 한번도 받지 못하는가? 대체 어느때 가서야 그런 상을 받게 될 건가? 자국민에게 그런 상이 내려진다면 정부는 응당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서 전혀 상반되는 현상이 생기는건가? 이것이야말로 한번다시 심사숙고 해 볼 일이 아니겠는가?! 서로 반목하면서 대방을 공격하고 해치는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그 살벌한 랭전의 시기는 언녕 지난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온 세계의 인류가 화합하고 우의를 키우면서 공동의 진보와 행복과 발전을 위해 서로돕고 이끄는, 그래서 심히 변화뒤여 가는 경쟁의 활기로운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각국에서 세계의 최고상을 쟁취하려는 욕망역시 더 커지면서 경쟁에 말려들고있는 이때다.    호가(胡佳)에게 기어코 상을 주려는 이들이 그래 “죄인”도 가려볼 줄을 모르는 위인이였던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한데 왜서 불쾌한 마찰이 생기는가말이다.    한가지 일이 새삼스레 상기된다. 1958년도와 1970년도의 일이니 인젠 꽤 오래된다. 그 두 번의 노벨문학상수상자는 소설 <<닥터지바고>>를 쓴 구쏘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소설 <<수용소군도>>를 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였다.    한데 애석하게도 그 두 수상자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을 리용하여 국가정부를 꾀하였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정부의 터무니없는 비난과 압력으로 하여 감히 시상금을 받지 못하였거니와 쏘련작가협회회원명단에서 이름마저 긁히우고말았다. 그는 지어 공민권마저 박탈하려 하기에 심리적인 고통을 앓다가 이듬해인 1960년 5월 30일에 그만 죽고말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1년반도 채 안되는 거다.    솔제니친은 출생지가 북깝까즈였는데 조국보위전쟁시기에 입대하여 두 번이나 공을 세워 포병련장으로까지 되었다. 그러한 그가 1945년 2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친구한테 보낸 편지에서 쓰딸린을 비평한 구절이 발각되는 통에 체포되여 로개농장에 끌려갔다. 그는 거기서 혹독하기 그지없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겪다가 겨우 목숨을 살려낸건데 후에 흐루쇼브의 지지를 받아 그것을 폭로하는 소설 <<수용소군도>>를 써냈던거다.   그 소설은 출판되자 세상을 놀래웠다. 한데 후에 쏘련의 정치형세가 변하면서 그는 되려 비판받기 시작했다. 쏘베트중앙위원회는 그의 국적마저 박탈하려했다. 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거기서 미국의 영예공민으로 살다가 예리친이 집정해서야 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것이다.    파스테르나크보다는 퍽 오래살다 죽은 그는 소설가였거니와 예리한 안목으로 사회의 병집을 보아낼 줄을 아는 비평가이기도했다.    우리는 지금 옥살이를 하고있는 호가(胡佳)를 어떻게 볼것인가?   원로급에 이르는 공산당원 16명이 련명으로 호금도주석에게 중국의 체제개혁을 촉구하면서 조직화된 반대파를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답변이 어떨지는 몰라도 요즘 듣자니 우리 나라에서도 2년내에 처음으로 국가인권행동계획이 제정되리라는 것이 정부의 태도라 한다. 그것이 국가존중과 인권보장이라는 헌법원칙과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과학적발전관실천을 위한 중요한 조치라니 두손들어 찬동이요 갈채를 보낼 일인데 그것이 과연 어떻게 실현이 될 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호씨모양으로 감옥행을 하는 사람이 더는 나오지 말아야할텐데....                        김송죽 북경에서.  2009. 3. 17.
104    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 (2) 댓글:  조회:5199  추천:29  2011-04-23
               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2) 서양성직자의 견증: 장헌충은 발광적인 도살자였다.  1.력사상 농민\"기의자\"는 거의가 건달이였는바 그들은 다가 흉악잔인하게 백성을 도살했다.   중국대륙에서는 자고로 크고 작은 도살이 멎지 않고 이어내려왔다. 중국사람의 목숨이라는건 마치 나무, 풀, 돌, 흙같이 무기력해서였던지 그 누구에게나 포위섬멸당하였으니 그 처경이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한무리의 들개와도 같았던것이다.... 그 많은 도살을 외국사람이 나서서 한건 얼마안되고 거의다가  제 중국사람이 나서서 한 것이였다. 중국사람으로서 제 중국사람을 죽이는 그따위 행위야말로 더 말할수 없이 흉악하고도 지독하게 참혹했으니 인간성이란건 그야말로 아예 싹다 잃어버리고만 것이였다. 양주(揚州) 10일간도살이나 가정(嘉定)에서의 세 번도살이나 성도성도륙(成都城屠戮) 같은것들을 보면 다가 조대가 바뀔때마다 아래우가림이 없이 한바탕 하는 짓이였다. 기의를 할때마다 무자비한 도살이였다. 마치도 그러한 도살이 잇어야만이, 낡은 왕조를 피로씻어야만이 새 왕조를 세울수 없었던모양이다. 그러한 도살이 없이는, 피로 물들이는 그런한 제사가 없이는 봉기라는 기발을 세울수 없을것 같았던모양이다. 력사상의 농민기의를 볼것같으면 그 본래의 동기와 목적이 압박에 반항하고 밥그릇을 빼앗아오기위해서 왕조를 뒤엎자는것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처음기대와는 왕왕 다르게 변해버렸는바 그들은 처음에 다졌던 맹약같은건 철저히 버리고 피묻은 칼을 백성들게 돌렸던 것이다. 백정의 칼로 백성의 머리는 무자비하게 자른것이다. 그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마구살해하는 폭도(幅度)는 점점 더 넓어졋거니와 그에 따라서 수단도 더더욱 잔인해졌거니와 방법또한 가지가지로 많아졌것이다. 생각해도 끔찍하기만하니 저주를 어떻게 퍼부어야할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보면 그들은 다가 호미를 쥐엿던 손에 칼을 쥐고 반항의 깃발을 올렸지만 후에는 자기의 그 기의목적같은건 인츰잊어버리고 되려 손에 철붙이라곤 쥔것이 없는 백성들에게 칼날을 들이 댄 것이다. 황소(黃巢)는 순전히 제가 시험쳐 미끌어진 일로 하여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있다가 기의를 일으켜 두목으로 된 자였다. 그는 기의하자 발광적으로 성(城)을 들이쳐 도륙을 냈는데 800만이 넘는 무고한 백성의 선혈과 생명으로써 제 개인적인 원쑤와 원한을 푼 것뿐이이지 다른건 없었다. 홍수전(洪秀全)은 어떠했는가? 그는 \"누구나 밭을 다룰것이요 다같이 밥도 먹게 되리니 입고 먹는게 넉넉하게되리라\"는 기치를 들고 기의를 했지만 남경(南京)을 점령하자 인차 전제(專制)와 피비린 도살을 감행하기 시작한것이다. 리자성(李自成)은 어떠했는가? 농민기의군의 수령으로 된 이 악당역시 온 북중국(北中國)일판에서 도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 고 또 하나 당년에 리자성의 의형제로 된 장헌충(張獻忠)은 어떠했는가? 류망악당으로서 농민기의군의 두목이 된 그자의 반동적인 폭력하에 온 남중국(南中國)은 깎이다싶히 황량해졌다. 어느 한사람이 통계를 내봤는데 장헌충이 남중국에서 도살한 백성이 천만아래의 수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소시적에 력사를 배웠다. 교과서에 농민기의를 언제나 아주 위대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더없이 광휘로운일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이제 다 커서 알고보니 그런게 아니였다. 중국의 그많은 농민기의를 보면 백성을 도살하는데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흉악했는바 지어는 인간성이란건 침략자들만도 더 없었던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늘에 와서 우리 중국의 농민기의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기의가 그래 로고대중을 위해서였던가 아니면 제 개인을 위한것이였던가? 그네들이 들고나온건 도대체 어떤 목적에서였는가? 제 개인의 원쑤를 갑자는건가, 아니면 원한을 풀자는건가? 그러고도 자기는 황제라했다니? 혹자는 제가 세상을 한번 제패(獨覇)하려고 한게 아니였는지?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다싶이 허다한 농민기의가 성공한 후이면 그 잔혹함이 낡은 조대의 그 봉건적인 전제에 비해 더하면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던것이다. 때문에 농민기의는 봉건제도를 뒤엎기는 새려 중국인민들을 봉건통치배들의 통치하에 노예살이를 더하게 만든것 뿐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건만도 우리는 왜 지금까지도 력사를 속이고있는건가? 왜서 잔인에다 분칠을 하고있는가? 또 왜서 폭력을 노래하며 찬양하는건가?  우리가 농민기의를 번번히 도금하면서 찬가를 부르는건 도대체 무슨 어떤한 목적에서인가? 그 한무리의 악당권력자들의 죄를 제멋대로 벗겨주고 애써 감추면서 덮어놓고 면류관을 씌우기까지 하는데 기실 진상을 밝히고 보면 결과는 어떠한가? 지금은 우리를 철저히 실망케하면서 극도로 분노케 하거니와 우리들로하여금 곱절 민주와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서광이 비치여 피뿌린 중국대지를 깨여나게 하는 것이다. 농민기의가 평민백성들을 도살한 진면모를 가일층 철저히 까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사천으로, 성도로 가서 농민수령이였다는 장헌충의 그 살인백정의 칼이 그 아름다운 그곳의 땅과 도시를 어떻게 오르내리면서 어떻게 무고한 사람들을 찌르고 짜르고했는가를 한번 보기로 하자. 2. 장헌충(張獻忠)이 성도(成都)를 도룩낸 일은 외국의 성직자가 증명했다. 張獻忠, 字秉忠, 號敬軒, 明萬歷古三十四年(1606年) 9月18日에 섬서성 정변현 학탄향 류거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 글을 좀 읽기는했지만 무뢰한, 불량배였고 건달이였다. 그는 군대에서 죄를 졌길래 언녕 목이 잘리울 신세였건만 몰골생김새가 용맹스러운덕에 목숨을 건진거다. 明崇禎(명숭정) 3년(1630), 장헌충은 명(明)을 반대하는 米脂起義(미지기의)에 적극향응했었다. 그후 얼마안가서 그와 李自成 등은 高迎祥(고영상)한테 들어붙어 고영상을 츰왕(闯王)이라 칭하고 장헌충과 리자성은 호(號)를 츰장(闯將)이라했다. 츰장(闯將)이란 막 뛰여드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崇禎(숭정)8年(1635), 장헌충과 리자성은 어느날 자그마한 일로해서 사이가 벌어져 장헌충은 제부대를 거느리고 장강류역을 공격해갓고 리자성은 황하류역으로 공격해 들어간것이다. 그때로부터 중국대지에는 두갈래의 농민기의군이 나져 한갈래는 북방을 한갈래는 남방을 석권하게되였던것이다. 남쪽으로 나간 장헌충은 선후하여 호북,호남일대의 명나라 정부군과 싸우면서 작전상 \"적이 진공하면 나는 퇴각하고 적이 퇴각하면 나는 때리는 전술\'\"과 \"적의 주력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찾아 치는 전술\"을 썻길래 싸우면 이기고 지는 일이 적었기에 갈수록 세력이 커졌던것이다. 이 기간에 그는 기편적인 정치놀음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明王朝에 가짜로 귀순(歸順)하는 것이였다. 조정은 그의 속내를 모르고 믿어주면서  중임을 맡기였다. 그러자 그는 낯색을 고쳐갖고 돌연히 조정의 군대를 습격해 산산히 부셔뜨린것이다. 좀지나 그는 리자성과 다시손잡고 긴밀히 합작하였는바 말로는 공동히 명왕조를 반격한다했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그는 리자성이 믿어주고 자기와 적극배합하면서 경비를 늦출 때 변덕스레 마음을 달리먹고 인마를 확충하여 제 지반을 닦은것이다. 장헌충은 이같이 간교무치하고 비렬한 수단으로 번번히 군사상의 승리를 거둔것이다. 장헌충은 호남전부를 장악할 생각에 호북의 남부와 광동, 광서북부의 땅을 늘구었던것이다. 崇禎(숭정)17년(1644) 정월, 장헌충은 부대를 거느리고 사천(四川 )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사천에 들어서자 여러 지방무장의 저항을 받게되였지만 강대한 군력을 갖고있는 그의앞에는 거의 무인지경이나답지 않았다. 8월초아흣레날, 장헌충의 농민기의군은 四川의 首(수부)府인 成都(성도)를 공략했다. 성도를 공략하자 장헌충은 즉시 각로(各路)의 제후세력(諸侯勢力)을 뽑아버림으로써 사천의 국면을 철저히 공제한것이다. 국세가 온정되자마자 임금(帝)으로 되고싶었던 장헌충은 급급히 나라이름부터 \"大西\"라 짓고는 개원(改元)년호를 \"대순\"이라했고 成都(성도)를 西京(서경)이라 고치여 수부로 정했다. 그런데 大西政權이라는 것이 기구설치나 전제제도나 완전히 력대봉건왕조의 그것대로였지 개혁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다. 장헌충은 그같이 뻐젓이 자칭 황제로 되었던것이다. 그는 정궈늘 공고하게 하느라 자기의 네 양자를 왕자라 하여 손가망을 평동왕(平東王)이라, 류문수를 무남왕(撫南王)이라, 리정국을 안서왕(安西王)이라, 애능기를 정북왕(定北王)라 하여 각각 임명했다. 하여 그때로부터 사천의 동, 남, 서, 북을 그의 양자와 친신들이 맡아서 지킨것이다. 장헌충이 성도를 수부로 정한것은 성도가 보배땅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도평원은 물산이 풍부할뿐만아니라 기후가 일년사시절 봄같은데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좋았다. 산이 병풍마냥 성도평원을 둘러싼것이다. 장헌충은 이런데서 황제노릇을 하게됐으니 자기는 벼개를 높이베고 발편잠을 잘수있다고 생각한 했던것이다. 대서정권을 세우고 황제로 되었건만 싸움질과 살육이 습관으로 되었던 장헌충은 별스레 공허와 정막감에 갑갑해났다. 하여 그는 불교나 믿어 볼가 하는 궁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느날 그는 성도에 있는 대자사(大慈寺)에 분자향하러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높다란 문턱에 걸채여 하마터면 넘어질번했다. 다른사람의 부축을 받은 그는 노발대발하여 그 절에 있는 중을 모조리 죽여버리라 명령했다. 그리하여 아랫것들은 칼을 빼들고 그즉시 절의 중들을 싿 다 죽여버린것이다. 장헌충은 그렇게 절의 중들을 다 죽이고도 성이 풀리지 않아 이번에는 아예 성도주위에 있는 절간들의 중마저 하나 빼놓지 않고 싹 다 죽여버리라 명령한 것이다. 하여 그의 군대는 성도주위의 절들에 있는 중을 도살하는 작전을 벌린건데 삽시간에 살기가 충천하면서 그 많던 절간들은 피로 물들이였거니와 불에 타서 재로돼버린 것이다. 그번에 살해된것이 2000이 넘었으니 장헌충의 한번 노여움에 목숨을 살려낸 중이 거의없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장헌충이 이같이 중을 대량으로 살해할적에 교리를 전도하느라 성도에 와있은 두 외국성자는 이같이 잔인무도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장헌충은 그 소리를 듣자 대노하여 그들마저 죽여버리자고 끌어당겼다. 그래놓고 다시생각해보는 그둘은 다가 외국사람인지라 죽여서는 좋을것 같지 않아 살려준것이다. 하지만 장헌충은 그들을 선선히 놓아주지 않고 줄곧 제 신변을 떠나지 못하게 련금(軟禁)을 했던것이다. 장헌충역시 황제로 되어서는 의례 재지있고 덕행이 뛰여난 사람을 불러들이였는바 科擧(과거)로써 출사(出士)하여 일을 담당할만한 뽑아들이는 것으로 자기의 정권을 튼튼히 하려했다. 하여 그는 방을 내붙이고 광고를 하여 인재를 선발하려한것이다. 사천은 력사이래 재자가인이 운집한곳이라 이같이 놓은 일에 응하는 자연히 떼를 지어 모여들이 마련이였다. 시험에 붙기만 하면 일자반급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응시에 나선 재자들이 사면팔방에서 성도에 모여들었던것이다. 한데 바로 시험을 치는 그날이였다. 시험치러 온 학자 하나가 그만 장헌충을 노엽혔다. 심청이 매우 불괘해난 장헌충은 그즉시로 호령을 내려 시험장에 모인 1만7천명이 넘는 재자(才子)들을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죽여버렸다. 그러노라니 성도의 청양궁내(靑羊宮內) 비여있던 마당에서는 력사에 류례없는, 학자를 살해하는 대규모적인 참극이 발생되였던것이다. 학자들에게  반격능력이라고는 없었다. 하여 칼날이 번쩍일때마다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피발이 공중에 날렸던것이다. 어떤 학자는 도망치려햇지만 거퍼 열발작도 못가 붙잡혀 다리가 잘리였고 배가 갈리여 내장을 뽑히웠다. 혈장이 오장육부와 혼합되여 땅바닥에 흘렀고 사람은 고통속에 죽어갓다. 어떤 학자는 욕설을 퍼부었다가 즉시 혀를 잘리우고 머리껍지가 벗겨지고는  살해되였다. 어떤 학자는 무서워 떨다가 바지에 오줌을 싸고 꿇어엎디여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칼에 찔려 죽었다. 어떤 학자는 제 목숨을 살려보려고 살인자를 도와주는 수를 썻지만 의례 칼을 맞았으니 화를 면치못한것이다. 이번의 학자대도살은 옹근 반나절이나 지속된건데 청양궁은 안팍이 짙은 피비린내에 잠기였고 도살된 시체가 산같이 무지였다. 후에 도살현장을 정리하게되였는데 붓과 벼루를 한데다 모아놓으니 그역시 산같이 커다란 무지가 되었다. 장헌충이 학자들을 그같이 대도살을 함으로 하여 사천의 지식계는 원기를 잃어 오래도록 춰서지 못했으니 거의 쑥밭이되나다름없었다. 서양으 그 두 성직자는 그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어졌고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속에 죽어갓다\" 장헌충은 그 두 외국성직자를 제 곁에 잡아두고 늘 그네들이 포교하는것을 듣기는했지만 천주교의중의 仁愛 즉 어짐과 사랑을 꼬물도 배워내지 못했거니와 되려 더 잔폭한 자로 되고말았다. 그가 말했다. \"구라파 각국의 풍속은 성스러운 법률에서 왔길래 순수하게 아름다운것이다. 그렇길래 그따위 성률은 여기 사천사람에게는 무익한거다. 에덴의 고집은 악과 같으니 성교성령을 따르려말고 나의 칼을 따라야 한다.....\" 장헌충이 보기에는 승려가 다 악인같아서 어명을 내려 도살하게했다는거다. 바로 이것이였다, 농민기의자는 다가 천하를 얻고나서도 의연히 사면초가를 당한 것만같아 두려워 어찌할바를 모르는 심태였던 것이다. 하여 천사람을 잘못죽이더라도 봉건제왕은 하나도 빼놓지않고 진압해야한다는  수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헌충은 이른바 란당이라는것을 진압하고나서는 그들을 급하게 제꺽 죽여버리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껍지를 바르게했던것이다. 껍지를 바르면서 장헌충은 허다한 규정을 내왔다. 1),껍지바를 때 죽지 말고 고통스레 죽게해야한다.  2),손이 무르지 말고 맵짜야 한다. 그 누가 손이 무르면 누구의 껍지를 바른다. 3),껍지바르는 시합을 한다. 많이 바르면 상을 주고 적게 바르면 죽인다. 이러한 규정들이 있었기에 껍지바르는데 참가한 자들은 다가 잔인하기 더 말할것 없거니와 동작은 날래면서도 매우조심했던것이다. 담이 약한 자는 인피를 바르고나서는 심리상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서 정신이 붕괴되면서 정신이상에 걸려 스스로 백정의 칼을 놓고는 다시들지 못했다. 그러니 노기가 긇어번진 장헌충은 그들이 지독하지 못한건 란당과 내통하기때문이라면서 칼을 놓은 사람을 하나하나 다 달아매고 깝지를 발랐다. 이같이 장헌충과 함께 기의를 했고 함께 정권을 빼앗아 낸 사람마저도 무참하게 고통스레 죽엇던것이다. 장헌충은 마음이 약한 사람의 껍지를 발랐을뿐만아니라 그의 식솔마저 다 붙잡아다가는 늙건 젊건 녀성이건 아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껍지를 발라 고통스레 죽게했던것이다. 장헌충은 사람의 몸에서 벗겨낸 껍지를 대나무장대에다 널어 말리였는데 거리를 채울지경이엿다. 그리하여 성도의 어떤 거리는 바람이 불면 피가 뻘겋게 발린 인피가 펄럭거리는 소리에 몹시 시끄러웠던 것이다. 하건만 거리마다 인피가 날리는 것을 보는 장헌충의 거동은 떳떳했다. 앞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길을 내게하고 뒤에서는 따라가며 호위해주니 웃음이 끊지 않았던것이다.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은 영아까지도 살해했으니 그가 제일로 여긴건 잔인 그것이였다. 하루는 장헌충이 자기를 반란하는 자의 처를 붙잡앗는데 그녀는 임신한 몸이였다. 임신부의 쑥 내민 배를 보자 불쑥 흥미동한 장헌충은 그녀의 배를 가르고 밴 애기의 모양이 어떤지 보자고했다. 하여 그는 그녀의 배를 가르게 한 것이다. 애기를 끄집어냈다. 장헌충은 그 애기를 보니 기분이 몹시 잡치여 이 애기를 죽여버리지 않았다가는 20년후에는 적수가 또 하나 생길거니 제일 절묘한 방법으로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생각을 굴리였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마침내 그는 칼고 창을 땅에다 배게 세워놓은 후 애기를 공중에 올려뿌려 어떻게 찔려 죽는가를 보았다. 그게 재미있을 것 같앗다. 하여 장헌충은 온 성도시를 수색하여 임신부녀는 모두 붇잡아들이게했다. 붙잡아 온 임신부는 다가 그같이 배가 갈리였다. 장헌충은 이렇게 출생하지도 않은 영아와 부녀를 수많이 살해한 것이다. 꼭같은 할복이였는데 장헌충이 그번에 한 할복살해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였다. 하루는 그의 수하사람이 그한테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도리를 얘기했다. 장헌충은 잠자코 듣더니 그게 참 좋은것 같다면서 그보고 \"네 배속에는 어찌하여 그리 많은 학문이 들어있느냐?\" 고 했다. 수하의 그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는줄로 알고 득의연하여 웃었다. 한데 그런것이게 아니였다. 장헌충은 낯색이 돌변하더니 큰 소리로 호령했다. \"여봐라! 이놈의 배를 가르고 그놈의 학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거라!\" 그래서 그의 배는 칼날에 갈리운건데 장헌충은 배안을 이리뒤적 저리뒤적 보고는 한마디 내던졌던것이다. \"더러운 냄새만 피우는 밸이지 여기 어디 학문이 있다구, 원!\" 장헌충의 그같은 황당무계와 변태는 이미 극도에 이르었던것이다. 그가 하루는 갑자기 녀인의 전족(쪽발)을 보고푼 생각이 나니 그 자리로 령을 내려서는 성도성내 어느 한 녀인의 발목에서 잘라 궁에 들여온 전족(쪽발)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흠상했다. 이틑날에는 그가 들어있는 궁뜰악에 그같이 잘라온 전족이 산처럼 쌓이였다. 장헌충은 제 귀비(貴妃)를 데리고 같이 그것을 흠상했다. 그러다 그는 홀연 그 쪽발산꼭대기를 뾰족하게 하면 보기좋을 것 같으니 칼을 뽑아 귀비의 발목을 잘라 올려놓았다. 그래놓고는 보면서 \"하하하...\"대소했다. 장헌충의 이같은 행위는 권력이 팽창된 후이면 생겨나는 심리변태로서 일종 철저한 무신앙자(無信仰者)의 꼴이라해야 할 것이다. 전에는 인간대접을 못받아본 사람이, 억압과 고통을 다 받아본 사람이, 릉욕을 받을대로 받아본 사람이 일단 번신하여 주인이 되면 그의 광열, 잔인, 포악과 음험은 수만배의 능량으로 튀여나와 자신이 잃어버렸던 평형을 잡는 것으로 보상을 받자고 드는 것이다. 장헌충은 말할것 없이 그런 인간이였던것이다. 중국의 력사에는 농민기의자가 만았지만 다가 그러했다. 그들이 문명을 압살하고 인성을 허물어버린것을 보면 그 하나하나 더 흉악했던 것이다. 몇천년의 중국력사는 그같이 그 모양의 압살과 훼멸로 악순환을 해왔기에 다가 이 괴벽한 틀을 시종벗어나지 못했던것이다. 장헌충이 사천을 평정하긴했어도 한중(漢中)은 끝내 수복하지 못한것이다. 삼국때부터 내려오면서 한중(漢中)은 사천땅에 든것이였다. 여기로부터 고려해서라도 장헌충은 한중을 수복해야만이 사천을 완전히 얻었다고 볼것이다. 허나 장헌충은 그곳을 수복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말았던것이다. 그때로부터 그는 성도에서 누군가 정보를 내보내고있는게 아닌가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내부간첩을 없애야겠다고 맘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가 내부간첨이고 그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내부간첩이 빠져나가지 못하게하느라 장헌충은 성문을 닫아걸고 대규모적인 도살을 감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외국의 두 성직자는 그 번의 대규모도살도 역시 침히 목격한것이다. 그중 안사탁(安司鐸)이란 중국이름을 쓰던 성직자는 그때의 일을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645년 겨울 11월 22일, 헌충은 먼저 암암리에 한사람을 시켜 거짓말을 꾸며 보고하게 만들어 군중들을 미혹시켰다. 적의 큰 부대가 당장 들이닥칠테니 당장 병마를 조련시켜 적을 막아야 한는것이였다. 담음날, 인마를 집결시키고 보니 당장 전쟁판으로 나가는것만같았다. 장헌충은 자기가 꾸민 악독한 모략을 각 영의 군관에게 통지하여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깨끗이 죽여버리라 명령했다. 詭言(궤언ㅡ속이는 말) \" \'백성들이 적과 내통하여 대군을 사천에 끌어들이여 거사를 도모하려고 하니 비도를 잡으려면 성내의 주민부터 멸해야할것이다. 그런즉 비밀리에 준비를 잘하면서 정보가 새여 나가게 말아야할것이다 \' 운운. 대도살은 래일하련다. 비적을 소멸하고는 즉시 강을 건너 적군을 맞을것이다.\" 이틑날, 대도살이 시작되였다. 서방의 그 두 성자는 어떻게 했는가? 안사택(安司擇)을 동문의 성루에다는 안배하여 그가 성루에 올라가 보게끔 했고 리사택(李司擇)은 성남의 성루에 올라가 보게했다. 시간이 되자 장헌충은 동쪽성의 공지와 남쪽성의 공지에 나누어서 근 20만에 달하는 무고한 백성들을 무차별적이 대도살을 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안사택(安司擇)은 이렇게 회억했다. \"무고한 남녀백성들이 살해되였다. 그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은 아츠러웠고  비참하기 짝이없어 볼수 없었다. 피가 도랑물처럼 흐르니 가슴은 칼로 에이는 것 같건만 그들을 구원해 줄 발법은 없었다\" 이때에 그들 두 성직자는 울음을 삼켜가면서 장헌충에게 제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빌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근본 장헌충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안사택은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붙잡히운 백성이 무수히 많았는데 그들은 남문 제방뚝다리가에 몰켜있었다. 그들은 장헌충이 오는것을 보자 모두 땅에 꿇어엎여 울면서 애걸복걸했다. \'대왕만세! 대왕은 우리가 기다린 왕이요, 우리는 대왕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국법을 어긴적도 없는는 무고한 백성인데 어이하여 죽이는거요? 어이하여 백성을 이렇게 겁먹이는거요? 우리는 병사도 아니요, 우리 한테는 무기도 없습니다. 우리는 적도 아니고 법을 지키는 량민이니 대왕께서 제발 살려주기를 비나이다.\' 운운.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게 그런 애걸이 무슨 소용이랴, 인면수심(人面獸心)인 장헌충은 듣는 둥 마는 둥 한마디 물어보는 말도 없이 되려 백성들이 적과 내통했다고 욕을 퍼질렀다. 그러자 말탄자들이 뛰여들어 마구짓밟아놓으면서 미친듯이 을러댔다. \"죽일건 죽여야 한다, 반역자들!\" 군사들은 급속히 달려들어 무차별적인 대도살을 감행했다. 과연 원통한 일이였다! 무죄한 백성들이 그같이 참살당하고마니 원성도 사라졌다. 시체는 쌓이여 산이 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이 되었다. 강에 던져진 시체가 물길을 막으니 강은 흐르지 못해 범람하면서 배도 다닐수 없게되였다.\" 안사택(安司擇)이 도살 전 과정을 다 보고나니 황혼이 되어 해는 서산을 넘고있었는데 처량하기짝이 없었다. 정신이 거의 붕괴의 지경에 이른 그는 허든거리면서 돌아왔다. 그는 오면서 길가에 널린 시체들을 보았는데 아직 채 죽지 않은 어린아이의 신음소리 들리였다. 하여 서양의 이 성직자는 그 아이에게 성수(聖水)를 뿌리여 그 애의 령혼이 천국에 갈것을 빌었다. 안사택(安司擇)은 돌아오는 길에 그런 아이를 열둘이나 보고 설수를 뿌려줬던것이다. 이 두 서양의 성직자는 천주교의를 전하려고 사천에 온것이였는데 천만뜻밖에도 농민기의자두령 하나가 그들 앞에서 일장의 대도살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참혹스러운 비극을 놀아댄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대립되는 두 세계관이였다! 성도에서의 대립되는 이 두 세계관은 최종적으로 문명이 야만에 굴복하는가, 인애가 잔폭에 굴복하는가, 신앙이 망나니에게 굴복하는가, 上帝(상제)가 장헌충에게 굴복하는가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특색이 갖추고있는 인치(人治)였고, 이것이 바로 서양사람으로서는 리해할 수 없는 동방의 포악이였고, 이것이 바로 유가문화(儒家文化)의 침윤(浸潤)하에서 중국의  망나니정권과 악당혁명이였다. 장헌충(張獻忠)은 성도(成都)에서 그같이 대도살을 하고나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계속하여 또 사천(四川) 각 주(州)와 시(市) 현(縣) 을 다니면서 종족을 멸종시킬 대도살을 했던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남녀로소와 성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여 멸살하려들엇기에 거의 남기지 않은것이다.\" 그같은 피비린 대도살적인 공포는 온 사천(四川)을 휩쓸었기에 사람들은 사처로 흩어지다보니 땅은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 황페해졌고 쌀뒤주는 비여 가마에 집어넣을것이 없었다. 먹을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잡아먹고 늙은것은 어린것을 잡아먹었으며 너린것은 병자를 잡아먹어 사천이란 이 땅은 처처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던것이다. 장헌충은 사천사람들을 핍박하여 한무리 또 한무리씩 굶주린 승냥이떼로 만들었고 사천사람들을 핍박하여 서로 삼켜버리는 짐승으로 변해버리게 한 것이다. 토지가 황페하게 되니 장헌충(張獻忠)은 군량을 걷어들일 수 없었다. 하여 그는 령을 내려 죽인 사람고기를 절이고 햄을 만들어 구대식용으로 했던것이다. 이 기간에 성도(成都) 각지에 시체들이 널리면서 온역(溫疫)이 돌아 옛적부터 내내 아름답고도 부유해서 천부(天府)의 나라로 불리였던 성도평원은 \"만호귀신노래\"하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성도성(成都城)의 어떤 시체들은 미처 파묻지 못해 강과 우물에 처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 있는 두갈래의 강은 다가 막혀서 배가 다닐 수 없었다. 그것뿐아니다. 성도성안에 있는 만여개나되는 우물은 시체가 차서 먹을 물조차없었다. 장헌충은 그같이 성도사람을 다 죽이고나서는 한중(漢中)을 수복(收復)하려고 준비했다. 출발전에 그는 온 성도를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기가 들어있었던 궁전마저도 가만두지 않고 온 성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것이다. 그가 그같이 한 목적은 다른게아니였다. 만일 출정이 실패한다면 적에게 성도를 오섭서리 넘겨줘야하니 그렇게는 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때는 벌써 淸大順三年(청대순3년)이였는데 漢中(한중)은 청조의 통치를 받았던것이다.  재다시출발하여 한중(漢中)을 수복하기전 이틀간에 장헌충은 또 두차례나 살인을 했다. 한차례는 군대내에 있는 늙고 병들고   잔약한 자였다. 그는 이런 사람들은 싸움을 해내지 못하거니와 량식만 축낸다는것이였다. 그다음 한차례는 그들의 처와 자식이였다. 그는 그들을 살려주면 적편으로 넘어가 우리와 해내자고 달려들것리라면서 직접 제손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모든게 그가 짐작한바와 같이 이번의 출정은 승리를 걷우지 못했거니와 장헌충은 사천서충현(四川西充縣)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에서 습격해 오는 청군이 마구쏴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2살밖에되지 않았다. 성도의 지식계에 있는 한 로인은 장헌충이 도살을 감행한 후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도는 장헌충의 손에 철저히 회멸되고말았다. 청조관원이 성도에 와 접관하려했지만 성내에서 관청이라고는 찾을수 없었기에 四川省府는 부득불 保寧府(오늘의 랑중현ㅡ閬中縣)을 새로 개설했다가 順治16年(1659) 즉 장헌충이 죽은어 14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서 四川省府를 成都에다 되앉힌것이다. 그당시 四川의 인구는 다해봤자 약 10만여명박에 되지 않았기에 10리가도 인연(人煙)을 볼 수 없었다. 성도전성의 거민을 다해봤자 10호밖에 안되였으니까.(흩어진 인구는 수자에 넣지 않았음)  거리를 가려낼수 없었다. 도처에 잡풀이 무성한데 토끼뛰고 꿩이 날았다. 어떤 사람이 남문성벽에 올라가 하루종일 살피였는데 보이는 것이란 錦江대안에서 호랑이 13마리가 뛰노는것 뿐이였다.\" 사천은 본시 인구가 많은 성이였건만 장헌충의 롱락과 도살과 폭위(暴威)로 인하여 황페한 거친 벌로 되고말았던것이다. 서양의 성직자 安使擇(안사택)은 회억록에 이렇게 썼다. \"연꽃수놓은 비단같던 성이 황야로 되어버려 사람이 살지 않아 쓸쓸할 뿐이니 어찌 필과 혀로써 이루형용하랴.... 마을과 진과 성의 가옥들은 불을 질러 전부 태워서 없애버렸기에 사방을 둘러봐야 황야뿐 인적이 없었다. 동, 서, 남 세방면이 해를 더 심하게 입고 유독 북쪽만 남아서 그리로 사천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것이다.\" 바로 이같이 그 어디다도 비할데없이 잔인하고 악독하고 제멋대로 날쳐댄 야만적인 장헌충을 우리는 교과서에다 \"농민혁명령수\"라하니 과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3. 李自成(리자성)이 \"밭을 고루나누고 조세를 면제한다\"하고 洪秀全(홍수전)이 \"조화를 이루지 않느곳이 없을거요, 그 어디서나 따뜻고 배부르게 먹으리라\"한것은 다가 가짜구호였다.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그래도 계몽사상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중국의 농민기의자를 놓고 보면 그 어느하나 기편적인수단으로 출세하지 않은게 없다. 례를 더 들면 陳勝吳廣(진승,오광)의 구호는 \"진승왕은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이고 張角(장각)의 구호는 \"늙은 하늘은 꼭 죽을거요 어린태양은 꼭 일어서리라\"는 것이였으며 宋江(송강) 등의 구호는 \"천제를 대신해서 덕행을 베푸리라\"는 것이였다. .....이러한 구호들은 아닌게아니라 호소력이 아주강하고 미혹성이 있어서 농민기의가 한동안은 기세를  벅작올리군한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봉기를 일으킨 후에는, 더욱히는 천하를 얻고나서는 하나하나 다가 장헌충모양으로 권력이 무한이 팽창됨으로 해서 방향을 을 잃고 자기를 잃으며 히스테리적인 변태광이 되어서는  생명마저도 풀같이 여기고는 무고한 사람을 제멋대로 죽이는 것으로 욕구를 풀었던것이다. 이는 중국농민기의의 비극이거니와 더욱히는 중국문화의 비극인 것이다. 한낫 전제정치를 체계로 한 집단이라면, 한낫 소농경제가 요해인 군체라면, 한낫 유가문화를 신령으로 삼는 민족이라면, 그는 천하를 얻고나서는 중국을 더욱더 유린하게 되는바 인민을 노예로 자기의 정권을 강화하려하는 것이다. 중국의 력사는 바로 이렇게 내려왔길래 개변이 없는 건 더 말할것 없다. 이럴때 농민에 의거하여 기의한 힘으로써는 중국의 문제를 근본 해결할 수 없길래 외래의 문화충격에 의거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결국 중국의 력사상황을 철저히 개변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몇천년간이나 문을 닫아걸고는 주제넘게도 자기만이 제일높이 여기면서 세계문명의 선봉이라했다. 하여 웃대의 어른들은 늘 외국을 오랑캐라 경멸했던것이다. 그러나 이외로 이른바 기의라는 것과 혁명이란 것은 다가 번마다 경제를 어렵게 하고 국력을 쇠퇴시키면서 인구를 대량으로 감소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이같은 정황에서 장헌충같은 자들의 폭압으로 수많은 사람의 머리가 날아나고 땅에 떨어지는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중국의 력사는 이같이 무수한 사람피로 진붉게 물들었은 즉 중국의 문명은 그같이 무수한 백골이 부추기고 벗텨준것이다.啓良(계량)선생은 <<中國文明史>>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력사를 평가하는 각도에서 만약 농민기의가 중국의 력사발전에 미친 의의를 그냥 그저 편면에다만 올려놓는다면 그것의 진면모는 가리우게 되는것이다. 실은 그것이 사회를 앞으로 이끌지 못했거니와 력사를 그저 동란에 맴돌이치게만했기 때문이다. 지어는 중국문명이라는 모식(模式)안에서의 농민투쟁은 본체가 바로 전제주의를 감싸주는 일종의 수단이였다고 가히 말할수 있는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중국대지에서는 번번히 피고기뿌리는 대도살이 생기군했던 것이다. 하여 로신은 말했던 것이다. \"나는 혁명전에는 내가 노예였다고 생각했으나 혁명이 끝나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내가 노예에게 속히여 그의 노예로 변해버리고말았다는 감각이 든다.\" 사람들로하여금 마음을 좀 놓이게 하면서 기쁘게 하는건 장헌충이 죽은지 근 300년이지나니 이제는 서양계몽가들의 평등, 자유와 민주사상이 끝끝내 중국에 들어와 수천년이나 깊은 잠을 자고있은 중국사람을 깨여나게 만들고있는   그것이다.                           作者 汪建中 2004年 10月 12日 于弄月齋       
103    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1) 댓글:  조회:4998  추천:27  2011-04-15
                       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1)                                               차마돌이켜 볼 수 없는 일ㅡ                      중국력사상 14차 인구대멸살          付祿(1)  中國歷史上 규모가 큰 人口滅殺事件은 다 전쟁이 조성한 것이다. 古代에 전쟁이 특별히 빈번했는바 상조(商朝)의 <<卜辭>>에 기재된것을 보면 각종전쟁이 61차. <<春秋>>기재에는 春秋時期 242년간에 각종전쟁이 448次에 달했다. 戰國時期에 이르러 또 대규모의 전쟁이 222차.  戰國時期에 秦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좋아했다. 그들은 왼손에 사람의 머리를 들고 오른겨드랑이에는 포로를 끼고 자기의 적수를 죽이자고 똘구었다. 司馬遷이 기재한것을 보면 秦나라가 魏나라를 공격할적에 8만명을 죽였고 戰五國聯軍이 8.2만명을 죽였으며 韓을 토벌할적에는 6만명, 楚를 討伐할적에는 2만명, 韓과 魏를 토벌할적에는 24만명, 魏를 공격할적에는 4만명, 魏를 격패시켰을 때는 10만명, 또 韓을 공격할적에는 4만명을 죽이였다. 前 262년, 趙를 격패하면서 白起가 42만명을 죽이도 韓을 또 공격하면서 4만명을 죽이고 또 趙를 공격하면서 9만명을 죽이였다. 이상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殺人이 이미 130만을 넘는다. 그 외에 秦사람이 죽은것은 수자에 들지 않은것이다. 戰國末에 중국의 인구는 2000만이였다. 그러나 군대가 歐羅巴를 훨씬초과했던것이다. 秦始皇은 守五嶺用兵 50만, 匈奴를 방지하는 軍이 30만, 長城을 쌓는데 50만, 아방궁진시황릉을 짓는데 120만(그중 宮刑을 받은자 70만이 넘는다) “丁男被甲,丁女轉輸,苫不聊生,自經于道樹,死者相望”(<<漢書嚴安傳>>) 秦始皇36年(前211年)에 流星하나가 떨어졌는데 어떤사람이 그 隕石에 “秦始皇死,上地分”이라 새기였다. 대노한 秦始皇은 隕石이 떨어진 주위의 사람들을 말끔히 살해했다.  秦始皇의 後宮喜妻로서 아들을 못낳으면 전부 殉葬했다. 墓地를 수조하는 工匠20여만을 장례가 끝나자 전부 묘안에 넣어 죽이였다. 그후부터 무릇 皇陵을 짓는 民工은 다가 그같이 비참한 끝장을 보았던것이다. 아래는 歷史에 記載되여있는 14次 비교적 규모가 큰 人口滅殺事件을 알린다.  1) 秦末農民戰爭  公元前 205년부터 公元前195年 西漢建國初까지 모두 10년이였다. 秦朝末全國에 人口가 모두해서 2000만이 넘었는데 漢初에 이르러 원래의 萬戶大邑都가 2.3千戶밖에 남지 않았으니 원래인구의 70%가 없어진것이다. 다시말하면 大城市의 인구가 百分의 2,30십%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自天子不能具鈞駟,而將相或乘牛車,濟民無藏盖”의 現象이 나타났다. (<<史記.平準書>>)  2) 漢武帝가 匈奴를 討伐 漢武帝는 在位한지 50년이 넘는다.(前140年ㅡ前87年), 匈奴를 몇 번 討伐했는데 온 天下에다 人口를 헛되이 잃었으니 50%가 사망한것이다.  3) 西漢末의 混戰  公元 2년, 전국인구가 5959만이였다. 그런데 西漢末年의 混戰을 겪고 東漢初인 公元 57年에 이르고보니 人口가 2100만밖에 남지 않았다. 손실이 65%에 달하는것이다. 20年間에 西漢의 人口는 68만에서 28만으로 감소되였고 大荔(대려)는 91만이던것이 14만으로 감소되였으며 興平縣은 83만에서 9만으로 감소되였으며 綏遠縣은 69만에서 2만명으로 감소되였다.  4)三國鏖戰(삼국오전)  公元156年, 人口가 5007만명이였다. 黃布起義와 三國混戰을 겪고나서 公元208年 赤壁大戰后의 全國人口가 140만으로 줄었고 公元 221年에는 90만으로 내려가 손실이 98.3%였다. 공원 208년에 적벽싸움이 있었다. 한말삼국의 대동란이 있은 후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원래인구의 1%! 공원 265년에 이르러 세나라의 인구를 다해봣자 767만밖에 되지 않았다.  5) 서진팔왕지란(西晉八王之亂)  공원 291년부터 시작하여 선후하여 汝南王亮, 楚王瑋, 趙王倫, 齊王, 長沙王, 河間王, 東海王, 成都王 여덟왕이 왕위를 쟁탈하느라 락양에서 서로공격하면서 죽이였다. 전란을 16년끌어 사망인수가 10만에 달했는데 허다한 진이 회멸되였다. 이를 “팔왕지란”이라 한다. “팔왕지란”은 워낙 발전하지 못한 서진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엄중히 파괴하였다. 그와동시에 관동지구에 보기드믄 황재(누리재해)와 온역이 발생했는데 혹심하기 그지없었다.  6) 공원 311년에 남북조가 혼전  劉曜가 長安을 공격하였는데 결과 관중지구의 인구가 1%ㅡ2%밖에 남지 않았다. 后趙는 지반이 매우작았지만 황제는 황후가 다섯에 姬妾궁녀가 1만이 넘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이 황후 다섯과 淫樂 岳父손에 죽었다. 악부는 황족을 없애버리였다.  황제 石虎는 한번에 미녀를 3만명 뽑아들이였다. 공원 345년 한해에 미녀로 뽑히우지 않으려는 여자를 3000명이나 살해했다. 미녀들을 용납하느라 鄴城(업성ㅡ당시의 서울), 장안, 락양에다 궁전을 지었는데 40만의 인력을 동원시켰던것이다. 조정의 가렴잡세가 너무도많아 살아갈 길이 막힌 백성들이 제자식을 팔았다. 그래도 되지 않으니 온 가족이 죽고마일는 일이 비일비재여서 길가나 나뭇가지에 목매여 드리운 시체가 많았다. 前燕이 서울 업성을 포위했는데 후에 趙의 궁녀들은 굶어죽거나 아니면 거의다가 병사들에게 먹히우고말았다.  石虎의 큰아들 石宣(석선)은 동생 石韜(석도)가 자기자리를 빼앗을까봐 검나 먼저 사람을 보내여 그를 죽이고는 밀모하여 아버지를 일찍이죽이고 왕위를 계승해보려했다. 아들의 그따위 밀모를 알아낸 석호는 석선을 묶어 아래에 꿇엎디게하고는 먼저 혀를 뽑아버렸고 다음에는 손목과 발목을 잘라버렸으며 그런 후에는 눈알을 빼여 불에 던졌거니와 아예 그마저 불더미에 넣어 태워죽이였다. 그러고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석호는 석선의 처럽과 아들딸들을 전부 목을 잘라 죽여버렸다. 석선의 막내아들은 그때 나이가 5살밖에 안되였는데 그는 제 할아버지의 옷섭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랬어도 석호는 의연히 그마저 죽여버렸다. 그뿐이 아니였다. 석호는 태자궁의 관리와 差役1000여명을 전부 車裂했다.(차렬ㅡ수레를 리용하여 각을 찢어죽이는 것)  석호가 죽자 왕위에 오른 아들은 겨우 33일을 호강가고는 다른 아들에게 살해되였다. 183일이 지나서는 왕위를 빼앗아 올라앉은 그 아들이 또 다른 한 아들에게 살해되고말았다. 그마저 살해된지 103일이 지나서는 한 漢族將軍 閔이 황실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는 령을 내렸다.   \"무릇 胡人 하나를 죽이면 官升3급을 준다.\" 순식간에 서울업성에서는 胡人 20만명을 죽이였는데 북주(北周)에이르러 죽인것이나 900만이 되었다. 南朝의 劉宋은 496만을 관할했는데 南陳이 멸망할 때는 200만밖에 남지 않았으니 손실된것이 60%에 이르는 것이다.  7). 隋朝役民 (수조역민) 隋文帝仁壽 4년(604년), 문제 양징의 차자 양광발(楊廣發)이 궁정정변을 일으켰는데 아버지를 살해하고 형 양용을 살해하였거니와 아버지가 총애하였던 진부인을 제가 차지했다. 그는 락양의 황궁을 확건하느라 매월 役丁200만을 동원시켰다. 운하를 수건하면서 수양제는 천하의 장정을 뽑았는데 남자 15세이상, 50세이하였다. 만약 명령을 어기면 3족을 멸살했는데 역부가 543여만에 달했다. 밤낮을 이어 굴을 팟는데 남역이 부족하니 여자로 수자를 채웠다. 그 과반수가 고역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렸다. 그같이 방대한 공정을 벌린것은 수양제가 사치하고 음란하고 부패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세 번 高麗를 진공했는데 사망이 무수했다.  수나라말기부터 당나라 초기에 이르는 사이 즉 611년ㅡ628년사이 18년간에 兵變, 民變과 궁정정변이 136차나 일어났는데 황제, 왕자로 자칭한자가 50명이 넘었다. 그들 다 각기 15만이상의 병력을 갖고 할거하면서 혼전을 했다. 그때 전국에 호수가 무려 890여만호던것이 290만으로 줄어들었다. 인구는 공원 606년에 4,602만이던것이 공원 639년에 이르러는 1,235만으로 감소되였다. 그러니 손실이 73%에 달하는것이다.  8). 安史之亂  공원 755년부터 공원 763년사이 안사란이 폭발했는데 그것이 8년이나 지속되였다. 唐朝皇帝는 강산을 빼앗으려고 匈奴와 겨루면서 回紇(회흘ㅡ위그르족)이 도와서 락양을 수복하게끔했는데 3일간 마음대로 략탈하게 허락해서 온 락양시내가 페허로되고말았다. 8년간의 참살을 거쳐 황하류역에 인연이 단절되였기에 처량하기 짝이없었다. 獸游鬼曲(수유귀곡)이라 그야말로 짐승이 쏘다니고 귀신이 수파람했다. 중국은 그때 호수가 900만호였는데 200만호로 감소되였다. 3⁄4의 인구가 변란에 죽고 잔존한 자는 종이로 옷을 지어입을 지경에 이르었다. 공원 755년에 전국인구가 5292만이였는데 760년에 이르러 전국에 남은 인구가 1699만뿐이였다. 손실률이 68%에 달하는 것이다.  9). 黃巢起義 그리고 唐末의 亂  당시에 이런 말이 떠돌았다. \"황소가 8백만을 살해했다ㅡ재난이야 말할게 있는가\" 력사에 기재한 것을 보면 황소가 장안을 점령할적에 \"거리에 시체가 널리였건만 살인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관군이 장안을 다시탈환하니 성내의 백성들이 그에 호응했다. 황소는 대노하여 병사를 풀어 무차별적인 도살을 감행했는데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었다.\" \"피로써 도시를 씻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황소가 지나는 곳에는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아 천리대지가 발가벗은 것 같았다. <<구당서(舊唐書)>>에 기재된 것을 보면 황소가 전군을 인솔하여 진주(陳州)를 근 1년간포위했는데 무릇 살아있는 촌사람이건 포로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군량으로 잡아먹었다. 역조역대(歷朝歷代)로 소유의 사람고기먹는 짓이 다가 황소에 비기지 못했다. 황소는 그야말로 고금중외의 천자제1호에 가는 식인마왕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걸(傑)이 발명한 \"도마채(搗磨砦)\"를 \"춘마채(春磨砦)\"로 개조했는데 효력이 썩 높았다. 그것은 사람을 가는 기계였다. 당말(唐末)부터 5대 10국에 이르는 사이 전후 80년의 력사에서 중국내외는 온통 혼전(混戰)에 말려들었기에 억만생령이 도탄에 빠졌다. 전후 황제가 58명나 되였었는데 42명이 비명에 죽어버렸다.  당무종(唐武宗:841년ㅡ846년 재위)때 중국은 496만호가 있었는데 후에 주세종(周世宗:955년ㅡ960년 재위)에 들어와서는 120만호밖에 남지 않앗다. 송초(宋初)에 이르러 200만호였다. 손실률(損失率)이 76%였다.  10), 금(金), 원(元)이 양송(兩宋)을 멸할 때  몽고사람이 화자자모(花刺子摸)를 멸할 때 철마이한성(撤馬爾罕城)의 백성 약 100만명을 도살했다. 서하(西夏)를 멸할때는 80만을 도살했다. 몽고인은 여러번이나 서정(西征)을 했는데 무릇 반항하기만하면 城을 도륙냈는데 그렇게 한것이 수백개에 달했다. 바그다드의 수십만인구를 도살한것을 포함하여 온 중앙아시아가 페허로되여버렸던것이다. 중국사람을 빼놓을리없었다. 살해한것이 1800만, 북방인구의 90%로가 목숨을 잃은것이다. 그러했으니 한인(漢人)은 자칫 씨종자마저 없어질번했던것이다. 사천은 몽고군이 도살하기전에 1300만ㅡ2000여만이였건만 대도살을 겪고나니 남은것이 80여만뿐, 거의 무인지경이되였던 것이다. 몽고군의 살육과 통치하에 중국은 7000만 인구를 잃은것이다. 몽고가 중국경내에서 종족회멸을 기도한것이 과연 세계기록을 낸것이다. (<기네스세계기록대전>>1985년판) 몽고인 통치하의 한인(漢人), 남인(南人)은 천민이였다. 만약 몽고사람을 죽이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했다. 그러나 몽고사람이 한인을 죽이면 당나귀한마리값만 벌금하면무사했다. 한인이 각시를 얻으면 첫날밤은 몽고보장이 데리고 잣다. 무기를 다루어서는 되지 않았다. 몇집이 식칼하나를 같이쓰게했던것이다. 11). 元末의 混戰  원나라사람 陶宗儀가 쓴 <<南村綴耕彔>>(남촌철경록)에 보면 \"천하의 兵甲 方殷(방은)의 淮右之軍은 사람의 고기를 먹기좋아했다. 어린애들을....고으고 불에 굽고... 남자는 먼저 다리를 자르고 여자는 유방을 도려내며... 지독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그들은 사람의 고기를 \'상육(相肉)이라했다.\" 그랬으니 \"회우지군\" 즉  사람의 고기를 먹는데 인이 박힌 이 朱元璋의 군대가 어찌 백성을 생각이나했으랴! 明朝의 開國者출신이 보잘나위없거니와 성질이 잔폭했다. 그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에 郭子興이 받아주고 썻는데 세력을 얻은 다음에는 그 은혜를 잊어버렸다. 주원장의 친구가 都원수를 살해했다. 1366년, 주원장은 재난당한 황제를 구원한다면서 龍舟(배)에 태워 가다가 황제를 강에 던지고는 明朝를 세운것이다. 그는 이렇게 죽이고 저렇게 죽이고하여 먼저 중국사람을 정복하고는 이미 힘이 적어진 몽고사람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천하를 얻은 후 주원장은 가까웠던 사람도 외면하면서 모르는척했다. 獨角樓를 불태웠고 功臣과 朝臣들을 대량학살했다. 력사에 기재된것을 보면 호유용(胡惟庸), 리선장(李善長), 람옥란(藍玉蘭) 등 살해한것이 모두 10명이 넘는다. 주원장은 在位 30년간에 사람을 20여만 죽이였는데 제가 부력먹던 장군은 기본상 다 죽인것이다. 지어는 아무런 다른마음을 품지 않앗건만도 소시적에 소를 같이 먹인적이 있은 여자마저 죽이였으니 그 잔인함은 극에 이르었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주원장은 상우춘(常遇春)에게 고운 첩을 하나 얻어주었다. 그랬더니 상우춘의 본처가 첩의 손목을 잘라놓았다. 주원장은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본처를 잡아다 죽이고는 사등뼈를 잘게 끊어 물에 끓인 후 상우춘과 대신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게했던것이다. 명나라의 유명한 고형은 두말할것 없이 \"剝皮楦草(박피훤초)\"일것이다. 박피훤초란 산사람의 껍질을 발라 그것으로 신꼴을 만드는 일이다. 토비들이나 할수있을 지독한 짓을 나라황제가 도락으로 삼았던것이다. 明朝에는  이런 規定이 있었다. \"有卽斃者, 行刑之人坐死\" 라 했으니 깝지를 바를 때 발리우는 자가 깝지를 채 바르기전에 죽어버리면 형을 집행하는 자 즉 깝지를 바르던자 역시 그 자리에서 죽어야한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각 州縣에다 \"剝皮亭\"까지  만들어놓고는 어느 관원이 탐오를 했다는 고발만 받으면 더말할것 없이 깝지를 바르는 심판을 해서 경계했던것이다. 그가 관료를 다스리면소 만든 \"여공인안(如空印案)\", \"곽환안(郭桓案)\" 같은건 수많은 사람이 련루되여 시달림받다가 죽어버렸다. 형이 그렇게 엄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오죄로 걸리는 자가 매년 수만에 달했으니 명나라는 끝내 부패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만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이 죽자 그가 생전에 데리고살았던 46명 비(妃)와 첩(妾)들을 저부순장했다. 그후에도 70여년간이나 황제와 제왕들은 이런 야만적인 제도를 버리지 않고 그냥써먹은것이다. 朱棣(주체)역시 제 애비에 짝지지 않았다. 1402년에 그는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는데 그번의 전쟁에서 몇십만이 생명을 이른것이다. 그는 건문제(建文帝)궁에 있던 궁인, 녀관, 태감들을 죽이였다. 그 한번에 죽인것이 1만4천명이나 되었다. 그는 방효유(方孝儒) 등 건문제에게 충성했던 구신(舊臣)을 전부죽이였는데 그의 일가족은 물론 지어는 십족을 살해했으니 그 수자만도 873명되였다! 주체는 방효유의 처를 군영에 들여보내여 병사들이 륜간을 하게 만들었는데 그녀는 하루밤에 20여명 남자의 릉욕을 받은것이다. 그래서 죽으니 시체를 개가 뜯어먹게 버리였다. 永樂末年에 그가 또 신관, 궁녀를 죽이였는데 이 참안에 살해된 궁녀만도 3000명넘는다. 1424년에 명성조(明成祖)가 사망한 그날에는 궁녀 30명을 한줄로 걸상에 올라서게 한 후 대들보에 맨 오라에 목을 걸게하고는 통곡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울음소리가 고조에 올랐을 때 걸상을 차버려 모두 죽게했다. 그같이하여 순장하는게 심리상 더 통쾌하다는 것이였다. 12). 明末混戰  李自成起義로부터 吳三桂(오삼계)멸망까지, 明末,淸初에 국내혼전이 54년간계속되였다. 明末에 전국인구가 1억이였는데 淸世祖때는 남은 인구가 1400만 뿐이였다.그러니 80%가 감소되여 잃은것이 8,000만이 넘는것이다. 1628년(崇禎元年), 섬서에 대기황이 들었는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였다. 이같은 대재난이 명왕조가 멸망 할 서막을 열어놓은것이다. 李自成의 大順軍戰馬들은 포로의 피를 먹었다. 전마가 그같이 피를 먹다나니 물은 먹기싫어했다. 전쟁판에서 피냄새를 맡은 전마들은 눈에 달이 올라 들뛰였는데 마치 성난 사자와도같았다. 大順軍이 안휘의 桐城을 빼앗을적에 백성들은 음식을 해가지고 그들을 맞이했다. 한 농민이 성문에서 몇십명의 大順軍을 영접하면서 그들의 고생스러움을 물어보았다. 작은 두목 하나가 \"어이구, 그렇게 고생할거면 세상에 살아서는 뭐해?\"하고는 그를 죽여버리였다.崇禎17년(1644) 8월 9일, 張獻忠(장헌충)이 성도를 공략하면서....(이 문장은 따로 취급하련다.)  13). 淸代 白蓮敎起義  乾隆(건륭)51년(1786), 전국의 인구가 3억9천 110만이였는데 기의실패후 인구가 2억7천 566만명으로 되었으니 서로 도살한데서 1억1천만이나 손실본것이다. 백련교기의군은 9년넘는 전투에서 점령하거나 공격한 현이 204개에 달했다. 청정부를 항격하느라 16개성에서 대량의 군대를 모집하여 청군을 대량으로 섬멸했다. 격살한것이 副將이하 장령 400여명, 等1,2品이 20여명된다. 한편 淸軍은 군비 2억량을 소모하였는데 그것은 4년간의 재정수입과 같았다. 그번의 기의에 청왕조는 기세가 대단히 떨어졌는바 그후부터는 점점 쇠락(衰落)해지기 시작한것이다.  14). 太平天國起義  洪秀全이 령도한 태평청국기의군은 기의후 6년간에 4000여명밖에 죽지 않았다. 그러나 1856년에 홍수전은 위장휘를 리용하여 양수청(楊秀淸)의 친신 6000여명을 살해했다.천경(天京)에서 대량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2개월사이에 문무관원만도 2만명이나 살해한것이다. 그는 후에 또 위장휘를 릉지처참하고는 그의 시체를 여러토막내여 각처 잘보이는데다 달아매놓고는 \"北奸肉,隻准看不准取(북간육,척준간불준취)\"란 글을 써 보이였으니 과연 지독했다. 그번의 \"홍수전란\"에 결국 죽은것이 10만에 달했다.  同治3년(1864년), 증국번(曾國藩)이 령솔하는 상군(相軍)이 天京을 공략한 후 수십만을 살해했다. 천경에 남은 3만여명 태평천국장사가 한명도 투항한 자가 없이 전부전사하거나 아예 자살해버렸다. 태평천국이 강성할 때는 남경에 100여만의 인구가 있었는데 光緖(광서)가 등단할적에는 남아있는것이 50만밖에 되지 않았다. 태평천국기의가 폭발하기 전야(1851년) 중국인구는 4억3천만이였지만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인 1863년에 중국인구는 2억3천만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한차례의 농민전쟁에 중국은 2억이나 잃은것이다. 그 가운데서 4천만이 직접 전쟁에서 죽었으니 얼마나 참혹했는가! 그후 줄곧 1911년에 이르러서야 중국은 인구가 3억4천만으로 회복 된 것이다.  
102    음지에 묻힌 비밀(65) 댓글:  조회:5728  추천:20  2011-04-05
                    음지에 묻힌 비밀(65)             1980年四千老干部大讨论如何评议毛泽东功过                 2010年04月26日 09:07 炎黄春秋 本文摘自《炎黄春秋》杂志,2010年第4期,作者:郭道晖, 原题:《四千老干部对党史的一次民主评议——<党的若干历史问题决议(草案)>大讨论记略》(원문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올립니다) 《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的起草工作1980年3月开始,在中共中央政治局、中央书记处领导下,由邓小平、胡耀邦同志主持,有以胡乔木为首的20多位同志参与起草,写出“草案”后,于1980年10月先在党内四千高级干部中对决议草案进行了为期一个月的大讨论,又经40多位同志再审议,反复修改后,才于1981年6月中共十一届六中全会通过。 在四千人讨论时,我作为全国人大小组的秘书,负责整理本组讨论简报和其他有关工作,有机会旁听本组的讨论和阅读外组的简报,得悉讨论的一些情况,特别是党内高层老干部敞开思想、自由发言,对党史和毛泽东的功过的评论,给我留下了深刻印象。 所谓四千人大讨论,据我纪录的1980年10月13日中央秘书局在怀仁堂召开的干部会(担任这次讨论会的各组秘书参加)报告,中央机关约1000人,地方、省军级干部3000人。中央机关又分成三大块:中共中央直属机关;国家机关(包括全国人大、高检、高法和国务院);军队(总政)。其中中直机关有256人,国家机关有446人,军队有373人,共分成35个组。其中,国家机关分了16个组。(据事后有关文章报道,实际参加的人数大约有5600多人,其中还有当时在中央党校学习的1548名学员。) 我所在的国家机关第一组(即人大与政法口)有30人:有全国人大常委会的一些中共党员副委员长如谭震林、李井泉、许德珩、肖劲光以及阿沛·阿旺晋美,还有正副秘书长武新宇、郑季翘、邢亦民、张加洛、云北峰、赵伯平;法制委员会的委员有杨秀峰、高克林、刘复之、王汉斌、邹瑜、项淳一;高法的正副院长江华、王维纲、何兰阶、郑绍文、黄波、杨化南;高检的正副检察长黄火青、张苏、王甫、李士英、陈养山、关山复。小组召集人是武新宇、王维纲、张苏。此外,李洪林也参加了我们这个组,他不是作为秘书,而是作为参加起草小组的成员下到各组听意见。 一、对文革前17年的评价 这是有争议的第一个问题。原稿提出,在17年中,多数情况我们党的路线是正确的,取得了伟大的成绩。大家对这个结论不完全同意。因为建国后虽然在某些方面的基本建设取得可观的成就,但政治方面不断地搞运动,出了很大偏差,整了几百上千万人。1957年,反右一下子整了55万,实际上远不止此数;1958年,搞“大跃进”,实际上是大饥荒,死了几千万人。原稿还回避了建国以来出现的路线错误。大家问:文革前17年有没有路线错误?有,那么主要是毛泽东的错误,还是草稿所笼统说的是“党的错误”?这个有争议。当时大家强调存在一条“左”倾路线,毛泽东就是“左”倾路线的总代表,不能回避,对此要有一个正确的评价。 多数人认为,草稿中许多评价是为毛泽东的错误辩护的,很多提法都是说“党”在这个问题上怎么错了。大家反问:怎么都是我们全党犯错误啊?主要还是毛泽东犯错误嘛!这是有区别的。我的印象中,会上强调毛泽东有错误的人多;也有的同志反思自己过去对毛主席有迷信,“总以为毛主席是对的,我自己跟不上而已,‘只憾驽顽跟不上,前途遥见太阳红’,对毛主席有一种宗教感情。”(张执一发言,见中直机关第2组第1期简报,简写“中直2—1”,下仿此)也有稳健持重的少数同志提出要从政治上、从全局上考虑,十七年和毛泽东思想不能一概否定,担心这对国际共产主义运动、对第三世界有不利影响。 后来经修改通过的正式决议并未完全遵循大多数与会者的意见,而主要决定于当时主持起草的胡乔木和中央领导人的意见。邓小平在决议起草过程中一连有九次讲话(见《邓小平文选》第二卷第291—310页),一再指示:历史决议要“确立毛泽东同志的历史地位,坚持和发展毛泽东思想,这是最核心的一条。”“不写或不坚持毛泽东思想,我们要犯历史性的大错误。”“对于毛泽东同志的错误不能写过头。写过头,给毛泽东同志抹黑,也就是给我们党、我们国家抹黑。”(见《邓小平文选》第二卷第291、298、299、301页) 二、对“毛泽东思想”的评价 对毛泽东思想的评价是争论中第二大问题。其中特别是毛泽东思想是否包括毛泽东的晚年错误思想?要不要以毛泽东思想为指导?争论也很大。因为党的八大已经不提毛泽东思想为指导了。后来搞个人崇拜,重提毛泽东思想为党的指导思想。但晚年的毛泽东犯了大错误,那么“毛泽东思想”是不是也应当包括毛泽东的错误思想?以毛泽东思想为指导,是不是要排除他的错误思想?哪些是错误思想,怎么看?按原稿的意思,毛泽东思想只包括正确思想,错误思想不属于毛泽东思想,这在逻辑上是不通的,很多人反对。 大家也不赞成把毛泽东的错误归结为全党的错误。因为起草人要为尊者讳,所以一到某个具体问题,原稿往往说“党”没有认识到。甚至还说,当时受国际修正主义的压力,害怕中国变修,所以毛泽东才搞文革。这是把自身的错误归咎于国外原因。 高法副院长王维纲同志认为,毛主席对民族资产阶级的消极作用估计过高,怕他们造反,这是一大病根。他在建国初期讲“人民民主专政”,还不一定是对民族资产阶级专政;而后来讲“无产阶级专政”就把矛头对着资产阶级,把知识分子也都归入资产阶级,甚至说党内也有资产阶级、走资派等等。其实,建国以来资产阶级代表人物参加政权只有名义,一直没有真正掌权,绝大多数人也并没有反对我们。他对资产阶级和阶级斗争估计过高,把革命的对象完全搞错了。才产生1957年的反右和十年文革。(见国家机关第一组第一号简报,简写为“国1—1”,下同) 团中央胡克实同志在发言中指出,决议草稿第60页13行说“毛泽东同志没有全面发展马克思主义,决不能夸大说是马列主义新阶段”,这与草稿另一处说“毛泽东思想已形成科学的体系”是矛盾的。马列主义尚且没有讲什么“体系”,而毛泽东没有“全面发展”马列主义倒成了“体系”?如果有,也是不科学、甚至是反科学的体系,如“继续革命论”、“党内资产阶级论”等等。 张香山同志说,我们也可以写出一个《论毛泽东同志的左倾修正主义》小册子。这方面的材料要比列宁批伯恩斯坦的右倾修正主义的文章中的材料不知多多少倍。马列主义体系中的错误只是局部的,个别的,暂时的,或只是过时的,不是系统的,路线性的;是白玉瑕疵。而毛主席的错误太大、太多。很难把毛的错误思想排除在毛泽东思想之外。(国13—13) 李维汉同志在发言中列举了毛主席的片面性错误的十大方面: 1.熟悉新民主主义,不熟悉科学社会主义; 2.熟悉农民和地主,不熟悉产业工人和资本家; 3.熟悉农业,不熟悉工业; 4.不懂政治经济学,很晚才读经济学教科书,才研究斯大林的《社会主义经济问题》; 5.不研究经济规律,主要是从政治看经济问题; 6.对知识分子按世界观划阶级,主张“外行领导内行”,批“臭老九”; 7.搞农民平均主义,1958年搞“大跃进”是小资产阶级狂热性; 8.在需要“外为中用”时,大批国际修正主义,把“自力更生”变成“闭关自守”; 9.1964年提出四个现代化,1966年又开始搞四个大破坏; 10.钻进线装书,搞他的“古为今用”。 他还指出,历史上毛未犯过右倾错误,主要是左倾片面性。如《湖南农民运动考察报告》,强调“矫枉必须过正”,“有土皆豪,无绅不劣”,把赤贫分子(流氓无产阶级、“痞子”)和贫农一起当革命先锋。到八七会议后搞农民起义,普遍发生这种“左”倾。在哲学思想上强调斗争的绝对性,否定合二而一,攻其一点,不计其余;“左”比右好,长期反右不反“左”。(反右扩大化不是他一人负责,我也是有责任的。反右斗争是个很复杂的过程。我向部里建议把这件事从头到尾做个总结。)他把文革与打倒蒋介石并列起来,值得深思。(中直5—30) 中调部副部长刘志汉说,我们跟着老人家奋斗28年,打倒了国民党,创立了中华人民共和国;又跟着他干了27年社会主义革命,我们差一点让同一个敌人——国民党(指四人帮)给灭了。 会下,政法界一位老同志让我从哲学思想方法上论述一下“毛泽东思想”和“毛泽东的错误思想”问题,写个材料。我根据我个人的理解,并参考讨论中一些发言的观点,草写了一篇《对“毛泽东思想‘不包括毛泽东的错误思想’”的质疑》,论据大致有以下几点: 1.在思维方法上违反真理的相对性原理,把“毛泽东思想”变成了超越历史局限性和个人认识的局限性的绝对真理。 2.不符合历史事实。毛泽东思想是客观存在的历史现象,不能只是正确思想,而不包括他的错误思想。何况文革中“无产阶级专政下的继续革命论”曾号称是毛泽东思想的顶峰、马列主义的新里程碑,是绝对正确的,而现今实践已证明它是极其错误和有害的。 3.不符合实践是检验真理的标准的原则,宣称毛泽东思想不包括其错误思想,就不可能用实践去不断检验其真理性;更妨碍人们辨别是非,导致迷信,将其错误当真理。而且可能引出新的“凡是”论:凡是某个领导人或党中央认定是毛泽东思想的,就都是正确的;或凡是我们现在认定是正确的,就都归入毛泽东思想。 4.说毛泽东思想不只是毛泽东个人的思想,而是“集体智慧的结晶”,因而就不包括毛的错误思想,那也意味着否认真理的实践标准,因为集体的思想也有历史局限性或认识的偏差,也可能集体犯错误。 5.把党的其他领导人或全党的实践和智慧成果,都归到毛泽东个人思想名下,也不合情理,这等于说:毛泽东的错误思想不属于毛泽东思想(我的错误不是我的);别人的正确思想都归入毛泽东思想(你的正确倒是属于我的)! 6.为了剔除毛的错误思想,而将“毛泽东思想”与“毛泽东的思想”加以区别,也难自圆其说。文革中毛每讲一句话都是“最高指示”,如何区分哪是毛泽东思想,哪句只是“毛泽东的思想”?! 三、对毛泽东个人功过的评议 关于对毛泽东个人的评价,也是这次会议的热点。据本组和其他组的简报所载发言,虽然大都对毛泽东在民主革命中的巨大功绩无大分歧,但对他在建国后掌权以来的历史实践,则殊多非议,有的还十分尖锐。 讨论中涉及建国以来的许多事件,都与毛个人的决策及其为人、行事的思想作风相关。 李颉伯同志说,毛主席发动文革的动机不是为了反修防修,而是以整人开始,以整人告终,排斥他所不放心的人。这场浩劫实际上在1956年11月一次中央会议上就种下了根。这次会上,周总理讲话,肯定近年工作冒了;陈云、富春、先念都讲了类似的话。在这之前少奇还组织人写了《要反对保守主义,也要反对急躁情绪》的人民日报社论。会上毛主席没有吭声。后来乘反右斗争胜利和自莫斯科参加第一次会议归来,他很得意,1958年1月,他召开了南宁会议,在会上就发作了,说你们1956年反冒进,就是反对我。你周恩来同志说了什么,陈云、富春、先念同志说了什么,少奇写了社论,你们把自己抛到了右派的边缘。谁晓得我身边有没有睡着赫鲁晓夫?将来有一天他作秘密报告……会议的气氛十分紧张。有些人就把矛头指向这些同志。黄敬同志在散会后就得了精神病,后来得脑血栓去世了。 房维中同志在一次插话中提到,1958年富春主持计委工作,经过算账,认为达不到预定钢铁翻番的指标,报告中说了些含糊话。毛很不满,批评富春是“灵台如花岗之岩,笔下若悬冰之冻。”(国4—18)薄一波同志发言中也谈到这个会上毛主席批评刘、周等人说:“你们反冒进,我要反反冒进!”会议气氛非常紧张。毛主席拿出柯庆施写的一篇《乘风破浪,力争上游》的文章,问周总理:“总理,你看过没有?你能写出来吗?”总理说:“看过了,我写不出来。”(国8—27) 李颉伯说,1959年上海会议,毛主席又批评刘、周、朱、彭(德怀),说我是主席,是统帅;副统帅就是总书记——实际上包含了要把刘少奇同志作为接班人撤下来的意思。1959年的反右倾以后的历次党内斗争,就都是通向文革了。(国5—21) 团中央书记胡克实同志谈到文革前他两次亲耳听到毛主席讲话,一次说要“钓鱼”,即搞“阳谋”;一次说要搞“剥笋政策”,在党内一层层剥掉(异己分子)。他说:“当时我听了很吃惊。无产阶级领袖怎么用这种语言呢!主席后来的思想走上唯意志论,认为个人意志可以创造一切,可改变客观经济规律,改变党和国家的根本大法,甚至改变历史发展的趋势,走上追求绝对权势和个人意志的王国、唯我主义的道路。毛主席实际上是犯了“左”倾机会主义错误(决议草稿上没有“机会主义”四字)。……一个伟大的马克思主义者为什么变成机会主义者、专制主义者,必然性是什么?只有触及本质问题,才能解释。不能用(草稿中的)骄傲情绪、主观上要反修防修来概括,否则群众不满意,我们这些正统派也不诚服。” 胡克实还说,毛主席出尔反尔的事情很多。如1953年团中央起草团章,上面有“用毛泽东思想教育青年”一语,毛亲笔勾掉,还嘱咐我们不要再这样写;可是在文革中却把这事说成是反毛泽东思想的罪行。我们挨斗,过不了关,他却不出来吭声。又如1959年庐山会议,本来要批左,却变成批右。1962年七千人大会,他大讲民主;没几个月,在十中全会上大批翻案风。三年困难时期,中央决定下马,主席并未反对;但情况刚好转,他又大批下马风。文革派工作组是主席批准的,后来却说是刘少奇的资产阶级路线。1972年刚批林,又批“右倾回潮”。他批别人(对他)搞突然袭击,他自己就搞。刚批了几天四人帮,转过来马上批邓。……他这一张一弛,把全党搞得不知所措了。 夏衍发言中对毛主席在民主革命中是否“有功无过”提出质疑。他主要根据自己的亲身见闻,说毛主席有时判断和决策失误,却常诿过予人。譬如1945年8月13—16日,毛主席本是向蒋介石连续发出三封措词强硬的电报和文章,但斯大林派特使来延安发指示后,毛主席立即改变态度,于8月25日以中共中央名义发表宣言,提出“和平、民主、团结”的三大口号,即“和平民主新阶段”。重庆谈判签订双十协定时,他当众高呼“蒋介石万岁!”使在场的民主党派的头头们大吃一惊。章士钊才忙向毛主席递交了那张“三十六计走为上计”的纸条。——在对敌斗争中兵不厌诈,用权术麻痹一下敌人未尝不可;但后来毛主席却把搞“和平民主新阶段”、“想到国民政府去当大官”等等罪名推到刘少奇身上,未免太不光明正大了。又如在党的七大报告中讲中国资本主义不是太多,而是太少。1949年我(夏衍)和许涤新等从香港到北京,为接管上海,向毛主席请示,毛又一再讲要让上海的资本主义有一段发展的时期,还讲一定要把荣毅仁、刘鸿生留下来,因为他们比我们懂得管工厂。少奇同志也讲了同样的话,声明是中央的决策。可是到1951年,毛主席就讲过渡时期要消灭资产阶级,让资本主义断子绝孙。这也就是“兴无灭资”的祖本。后来还批判刘少奇讲“剥削有功”和“巩固新民主主义秩序”。(国12—14)(关于毛主席在民主革命中的功过,谭震林同志很激动地谈到在苏区搞“富田事变”反AB团杀了部队里许多革命同志的教训,详见郭道晖:《毛泽东发动整风反右的初衷》,载《炎黄春秋》2009年第2期,此处不赘) 王光美同志发言中说,四清时我写的“桃园经验”,主席看过,很欣赏,还推荐给江青和身边工作人员看。他在少奇当选国家主席那天,召开中央扩大会议,批少奇把四清搞“左”了,几天后他提出更“左”的口号。这次会前,小平同志出于好意说,你身体不好,可不必参加。但主席参加了。另一次会上他讲四清是“两个阶级两条路线斗争”时,少奇插话说,是各种矛盾交叉一起,很复杂,还是有什么矛盾解决什么矛盾为好。第二天,毛主席大发脾气,说“一个不叫我开会,一个不叫我说话!”谈到高饶事件,王说,事前毛主席约少奇谈话,要求反周。少奇不同意,说反周对党不利,周有很大功绩,在国内外有很大威望,绝不能反;并自己承担责任。后来高岗就反周、刘,毛默许。有的同志还以为毛主席支持高岗,他们才跟高岗。 夏衍概括毛主席的错误,是16个字:“拒谏爱谄,多疑善变,言而无信,绵里藏针。”他说1957年反右时,就有人指出,毛主席怕的不是章罗联盟,而是怕党内出赫鲁晓夫。1958年毛主席才65岁,就有“老年性多疑症”。(国12—14) 李锐同志在会上着重回忆了1959年庐山会议的全过程(从略),其中谈到,1959年的庐山会议期间,毛主席的秘书田家英同他私下议论毛,谈得最多的是主席任性,有些想法变化太快,易生反复,今天(你)跟上去了,明天就挨批。还喜欢别人写检讨,有时为达到某一目的,甚至不择手段。反右前,为鼓励鸣放,当时批评了来自党内的阻力。在批发一文件(或同民主人士谈话)时举了中央政策研究室副主任田家英的例子。田(对李锐)说:“没有这回事,我根本没有反对过鸣放。这是不顾事实,借题发挥。这种例子不是个别的。”李锐还说,在庐山,毛泽东7月11日找他和周小舟、周惠三人谈话,还较融洽,承认1958年有些事他有责任,如提倡敢想敢干,也有的是胡思乱想,引起唯心主义,因此不能全怪下面和各部门;否则人们会像蒋干抱怨“曹营之事,难办得很!”……谈到他“自己常是自己的对立面,上半夜和下半夜互相打架”。似乎有自省之意。可没过几天他就大反彭德怀的“右倾机会主义”。(国10—14)1957年由鼓励鸣放突然转到反右,何尝是早有“引蛇出洞”的预计和谋划,不也正是这种翻云覆雨、任性生变的“权变”谋略吗? 农机部的宋敏之同志说,毛主席是伟大的革命家,但不是伟大的、彻底的无产阶级革命家、马克思主义者。他是“封建主义打底,马列主义罩面”。张爱萍同志说,王明是言必称希腊;毛主席是言必称秦始皇。孙冶方同志说,毛主席熟读的不是马列著作,而是二十四史。线装书看得太多,把封建社会帝王将相的权谋用到党内斗争上来了。(国14—3)朱德同志的秘书陈友群同志长篇发言中谈了毛早年的思想作风问题,主要是他同朱总司令不和的过程,“起初在士兵中朱比毛的威望高,毛有嫉妒心,是二人不和原因之一。”陈友群还谈及,1950年中宣部起初拟订的五一口号中,最后两条原是“中华人民共和国万岁!中国共产党万岁!”毛泽东在后面亲自加上“毛主席万岁!”1956年我曾听到田家英讲,主席有一次说“现在喊万岁,谁知百年后如何?”1959年庐山会议,起初朱老总认为彭德怀意见是善意,还为此做了一首诗:“此地召开团结会,交心献胆实空前。”并对公社食堂问题提了不少意见。后来毛批彭总时,政治局会上不等朱老总讲完,就批评朱是“隔靴抓痒”,批不到要害。回北京后又组织高干批朱总,迫他写检讨,一直发到县团级。从此以后,实际上剥夺了朱总的工作权利。(中直2—15) 副委员长许德珩同志说,梁启超早年是维新派,后来成了保皇派,晚年又反袁世凯称帝,写了篇《异哉帝制》,声称“不惜以今日之我,向昨日之我宣战”,即否定其当保皇派的过去。毛主席晚年也是“以今日之我同昨日之我宣战!”可是他却是以今日之错误否定昨日之正确.(国1—1) 铁道部的慕纯农同志说,毛主席发动文革不是为了反修防修,而是有预谋有意识整人,以整人开始,以整人告终。周总理是累死的,气死的,整死的。过去有的封建帝王整人总还留下几个忠良。而跟随毛主席干革命的一批忠良都给整掉了,晚年他真正成了孤家寡人。一个伟大的革命家到临终的时候没有一个战友在面前,孤零零地死在深宫里,这是莫大的悲剧。他不需要任何人,任何人最后也认识到不需要他了。 方毅同志说,他兄弟毛泽覃(在苏区时)曾同他争论,他拿起鸡毛掸子要打他。毛泽覃反抗说,共产党又不是“毛家祠堂”!历史上最大的暴君要数他。连朱元璋也不如他。《明史》写朱元璋只是“圣德有亏”。 四、关于修改决议草稿的建议 最后,决议起草主持人要求各个组分头起草一个决议稿子,大家都不赞同,认为撇开那个草案,自己另写一个,我们既没有时间,也没有那个水平。我们第一小组建议就在草案上批注意见,或者原则性地提几个方面。决定由本小组推选的“决议草稿修改小组”归纳全组统一的意见,让我代整理了个“批注意见”草稿,由邹瑜同志审定后在小组会上汇报,大家认可。报告要点如下: 第一点,建议把解放以后的历史分成四个阶段:文革以前一段,文革中一段,华国锋时期一段,改革开放一段。这四个阶段都必须贯穿两条路线的斗争,要反映党内健康力量与正确路线对错误路线的抵制和斗争。批注意见稿对各时期错误路线的表现和实质,作了不同于决议草稿的评点。譬如,对草稿第15页的“批注”认为,对八大二次会议应作批判性的评价,正是在这次会上,毛泽东同志开始背离了八大第一次会议的路线,他在会上的五次讲话是左倾路线的突出表现。 又如原稿第20页,对反右斗争的恶果,过于轻描淡写。不能只说是“使民主化进程受到挫折”,而是压制人民民主,败坏党的作风,失信于民的开端(要批判“引蛇出洞”的极其错误做法),是党由正确路线引上错误路线、国家由兴旺发达转入多灾多难的转折点。 再如原稿对所谓“二月逆流”的意义评价不够(谭震林同志对此特别有意见),只是为之“平反”而已;应当强调路线斗争的意义。建议加上:“他们为维护中国革命的成果,捍卫党的事业挺身而出,体现了党内的正气,反映了全党和全国人民的意志,是文化大革命中党内健康力量反对以毛泽东同志为代表的左倾路线和林-江反革命集团的一次大搏斗。”(另一处原稿说毛对江青一伙过于“信任”,要求改为“重用与纵容”)。 第二点,总结31年,包括文革的经验教训,要澄清一些重大的理论是非:政治和经济的关系,阶级斗争为纲的问题,向社会主义、共产主义过渡的问题,这些基本理论问题上的大是大非,要加以澄清。 第三点,要写出人民群众的历史,而不是帝王将相的历史。历史的总结,不要只是围着毛泽东一个人转。 第四点,要解放思想,要摆脱一些人为的思想障碍。要明确毛泽东思想到底包不包括毛泽东的错误思想?或者把毛泽东的错误思想说成不属于毛泽东思想,这个对不对?再则决议草稿为把毛主席同林彪、四人帮区别开来,而说什么存在的路线一条是“极左”(林、四),一条只是“左倾”(毛)。这太勉强。再如把明明是毛泽东个人的错误写成是全党的错误等等。认为原稿讲第二阶段“我们党在大部分时间执行的路线基本是正确的”,这一估计本身是错误的。原稿以这种错误估计来写这段历史,不能不处处文过饰非,为毛主席的错误路线及其造成的灾难后果开脱。大家认为毛泽东这阶段的主要错误在:1.以阶级斗争为纲;2.左倾空想的社会主义。大家认为这段历史必须重写。 余论 我认为,应该把这次四千干部讨论党的若干历史决议草稿看做是文革后的第三次思想解放。第一次是三中全会和中央工作会议,第二次是理论务虚会,第三次就是这个讨论会。如果说理论务虚会是理论界的思想解放,那么,这次讨论会就可以说是党内高层干部的一次思想解放,也体现了党内初步摆脱毛泽东“一人说了算”的思想独断控制,享有了前所未有的一次党内民主与言论自由。过去老干部们许多话都是不敢说的,甚至是不敢听的,这次畅所欲言,想讲什么就讲什么,都说了出来。 据简报所载,参与这次会的老干部普遍反映,这是一次畅所欲言的、思想解放的民主讨论会。中直机关一位70岁的老同志陶白说:“我入党以来,真正解放思想,这还是第一次。会上我们敢于比较深刻地批评我们党的领袖,也就是说,敢于摸老虎屁股,这是前所未有的,至少像我这样的人是没有的。这次所以敢于比较深刻地批评已故的和还健在的党主席,不是过去没有觉悟,没有看法,而是不敢讲。这不是偶发的,是酝酿已久的思想大解放。”中央党校的宋振庭同志也说:“我1937年入党以来,只有这次享受了党内真正民主生活。思想解放了,直接批评了两个‘上帝’,把多年不敢讲的讲了,是一次最大的思想解放运动。” 应当说,时在1980年,由于老干部刚从文革的恶梦中苏醒过来,创伤未愈,记忆犹新,所谈的内容都很真切。他们都是亲历其境,亲受其害,建国以来各次运动对党和国家、人民以及对自己的损害,有切肤之痛。有的言辞虽不免尖锐,或带有情绪,但都是经过理性的思考的(事前大都亲自撰写了发言稿,前引所有简报上发表的发言也都是经过发言者本人修改审定的)。他们在文革时期关在牛棚或监狱中就进行过深沉的反思。如彭真同志就曾对我们说过,他坐过6年国民党的牢;没有想到解放后,文革中,他竟又坐了9年半的牢。一个坚贞的革命党人坐敌人的监牢不足为怪;为什么革命成功后反而坐自己党的牢了呢?这不能不引起他,以及许多被以“莫须有”的罪名关进监狱的老革命的沉痛反思。他说,他坐牢的时候就一直思考着这个“为什么”。终于恍然大悟:这是对过去党轻视民主、破坏法制的惩罚,否定民主和法制也就否定了自己! 但是,遗憾的是,这次讨论中多数人意见并没有被后来正式通过的决议所采纳。因为那时候对毛泽东的评价,还没有达到现在认识的高度,主要的考虑还是囿于传统的思维,为尊者讳,担心给党“抹黑”。这次大讨论虽然过程中发扬了民主(所谓“让人讲话”),在结果上却不是按民主原则“集中到多数人意见”,而是“集中正确意见”;而“正确”则只是根据领导和主持起草的少数人的判断作出决定。就参与讨论的大多数干部而言,他们的个人发言容或欠周全,却不能说是“唯心”的,而是尊重历史事实的唯物主义,总体上也是为党和国家深谋远虑的。但他们确是“违心”地接受了最后通过的正式决议。 (作者现任北京大学宪法行政法导师组成员,广州大学人权研究中心学术委员会主任,最高人民检察院专家咨询委员会委员等职) ◎ 这篇文章,细看一下就可以看出举出毛问题的人都是些文革中受到触动的人。我想讨论应该也有正面的,专拿出这一段不能说明问题的实质。另外是否真实还要化个?。所以还是应该客观的来审视他的错误结论。毛主席的实践论、矛盾论、等著作,从他的文章可以看出。绝不是象这些人说的哪样。所以时间才是验证他对错的试金石,他的好坏对错应该由老百姓来下结论。但从改革后这些年的中国发展的事实应该应验了他的担心。另外为什么近期总是刊登毛的历史信息,有什么目的。我们将试目以待。 ◎ 这是一篇历史记实文稿,公布出来很有意义,尤其是在“毛泽东历史错误”和“文革灾难”问题上将给后人及历史一个明鉴。也给一些至今思想还犯“混”的人一个有力驳击。请国人尊重我们曾经有过的真实历史,为的就是永远不重返这段沉重的“历史”。 ◎ 毛自己说过:要想变革梨子就要先尝尝梨子的滋味。经历过那个时代的人讲出的史实才应该是最可信的!相反,一味替毛粉饰的人大多没经历过那个年代,缺乏对那个年代真相的了解,不幸为谬误效力,令人遗憾。 ◎如果,这个文章是真实的,我们只能说:从1980年到2010年,30年过去了,我们的行政作风也没什么变化,现在谁敢去摸一下哪怕是自己单位一把手的“老虎屁股”么?敢摸,你要么下岗轮替、最少也靠边站;我们敢反对更大的一把手么?近来的茶杯门、针刺死、喝水死、跨省通缉、强送精神病院就是最好的注脚。这反过来又说明:这些传统,不是某一个人的错误,而是一个系统错误,不是某一个人犯过错误,而是整个系统的人曾经并且现在仍抱着错误的传统不放,所以这种文章,不能让我们增加了对毛主席本人的否定感,而是让我们对现在仍抱着错误不放的那些利益集团们更加失望并进而逐步愤怒。 ◎除了沙漠,凡是有人群的地方都有左中右,一万年以后还会是这样。人是有阶级的和有阶层划分的,人的所在位置不同认识的局限性都会观点立场不同。地主和资本家是不会给你幸福的生活的,同样贪官污吏是不会关心人民的根本利益的。官僚主义害死人,贪官污吏腐败祸国殃民,中国人民是最明白不过的了!                                                   련재끝
101    음지에 묻힌 비밀(64) 댓글:  조회:3813  추천:29  2011-04-04
                   음지에 묻힌 비밀(64)                         (1) 류소기의 정치사상과 개혁개방                               (2) “문혁”후 출국고찰 때 받은 심한 자극 30년전 엄혹한 국내의 곤경과 준엄한 외부의 압력은 중국으로하여금 더 고려할것도 없이 개혁개방의 길을 걷게했다. 그것은 핍박에 의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하고도 정확한 선택이였다. ◎ 등소평은 커다란 의문보호를 그리였다. 30년전, 바로 “문혁”이 결속될 때 중국은 만신창이 되었는바 온 국민경제가 거의 붕괴될 지경에 이르었던것이다. 이같이 준엄한 현실은 등소평으로하여금 “문혁”을 하는 이런 사회주의에 대하여, 이따위 “우월성”을 갖고있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무거운 의문부호를 그리였던것이다. 1977년 12월 26일, 오스트라리아공산당(마레)주석 시엘과 그의 부인을 접견했을 때 등소평은 날카롭게 제출했던것이다. “이렇게해야만 레닌이 말한 우월성이 체현되는가, 무엇이 우월성인가? 일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월성인가? 인민의 생활수평이 개선되는게 아니라 후퇴하는게 그래 우월성인가? 이것이 사회주의우월성이라한다면 우리는 이따위 사회주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1978년 3월 10일, 국무원제1차회의 때 그는 또 말했다.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보다 좋은게 어디에 있는가? 매인평균 6백몇근량식, 많은 사람이 배불리먹지도 못하고 28년을 그저 강철을 2300만톤내고도 사회주의우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1978년 9월, 동북3성을 시찰하는 기간에 그는 말했다. “외국사람들은 중국이 대체 얼마나 오래벗텨내는가보자고 의론하고있다. 우리는 이 말에 주의해야한다. 좀 생각해보라, 우리가 인민들에게 대체 무슨일들을 했는가?” “우리는 너무도 가난하다. 너무도 락후하다. 로실하게 말해 인민앞에 미안하다.” “사회주의가 제 우월성을 나타냈는데 어쩌면 이꼴인가, 20년을 한다고했지만 그냥 가난하기만하다. 그래도 사회주의를 요구해서는 뭘하는가?” 줄줄이 이어지는 이같은 “물음부호”, 그것이 실상은 “무엇이 사회주의고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하는 물음부호를 단 강유력한 신호였던 것이다. ◎거대한 격차로 인해 받은 진감 “문혁”이 결속된 후, 국내국세가 심각하게 변해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외부세계의 모양이 대체 어떤지 몹시알고싶어했다. 그리하여 1978년부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성세호대한 출국고찰열조를 일으키게되였던것이다. 국무원총리 곡목(谷牧)을 단강으로 한 구라파의 5개국(불란서, 스위스, 벨기, 덴마크, 서부독일) 고찰단이 주목을 끌었다. 방문기간, 구라파경제의 자동화, 현대화, 높은 효률은 고찰단에 심각한 인상을 남기였다. 그들은 서부독일에서 년간 5000만톤의 석탄을 채굴하는 로천탄광에 가보았는데 공인을 모두 2,000명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같은 수량의 석탄을 캐내는 로천탄광에 공인이 16만명이나되니 상차가 80배인것이다. 스위스의 벌리공사의 한 수력발전소를 참관했다. 그 발전소의 발전량이 2.5만왓트였는데 공인이 298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그만한 전기를 내는데 공인이 20배되게 써야한다. 불란서의 한 강철공장은 년간새산량이 350만톤인데 공인은 7,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은 그보다적게 230만톤을 생산하는데 공인이 67,000명이 수요되는것이다. 상차가 14.5배나되는것이다. 불란서 드골비행장은 1분에 비행기 한 대떳다. 그러니 한시간에 60대가 하늘로 오르는것이다. 그러나 북경수도국제비행장은 1시간에 겨우 2대뜨면서도 허둥지둥했다. 대표단중의 한 사람이며 그때 광동성정부성장이였던 왕전국은 20여년이 지낫어도 그번 방문길에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면서 말했다. “한달동안 고찰하면서 우리는 눈이 확 밝아졌던겁니다. 사상이라는것이 홀연 맑아지고요. 안그럴리있습니까, 눈에 띄이는것마다 마음을 진감했으니까말입니다. 우리는 자극을 너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쇄국정책을 쓰면서 늘 자기를 세계의 강국이라 자랑이나 하고 쩍하면 제3세계를 지원하고 자본주의는 부패해서 몰락한다느니... 그런데 가보니 사실은 절대 그런게 아니였습니다. 세계의 락후가 2/3는 중국이였습니다.!” 일본을 방문하고 온 사람이 아래와같이 소개했다. 일본은 보통공인가정이 일반적으로 주거면적이 40~50㎡였고  전국적으로 평균 2호에 차(車ㅡ자가용승용차)가 한 대였다. 95%이상의 가정에 텔레비, 랭장고, 세탁기 등 일용품을 갖추었고 복장양식이 다종다양했거니와 농민들이 모직품을 입었다. 일본 도꾜의 백화상점에 있는 물건은  품종이 50만에 달했다. 그러나 북경 왕부정백화상점에있는 상품은 기껏해야 2,2만여종에 불과했다. “우리는 너무나 초라해서 민망스러웠다.” 보고온 사람의 말이다. 이같은 현실적인 격차에서 가슴이 쓰라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너무도 락후합니다! 이 몇 년간 시간을 너무늦추었습니다! 우리 당이 다시는 투쟁놀음을 놀지 말고 개혁개방을 해야합니다. 과연 인민을 볼 면목이 없고, 국가를 볼 면목이 없고, 시대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 배워서 개혁개방을 확정했다 1978년 7월 6일부터 9월 9일까지, 국무원은 리론학습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두달하고도 3일간이나 길게했던것이다. 회의에서 제출된 새방법, 새형식을 집중해 보면 한가지ㅡ 개혁개방을 해야한다는 것이였다. 회의기간 원보화(袁寶華), 장경부(張勁夫), 호교목(胡喬木) 등 36명이 발언하고 리일민(李一泯), 곡목(谷牧)이 각각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와 서구라파 5개국을 고찰한 정황을 회보했다. 회의종결 때 리선념이 총결강화를 하면서 제출했다. “우리는 세계선진기술속도를 빨리 대대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외국의 선진기술과 설비를 들여와야한다. 이렇게 하면 문을 걷어닫고 머리를 싸매고 혼자엎디여 기며 헤매는것보다는 몇갑절 빠를것이다.” 이 기간에 등소평은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이나 개혁개방문제를 놓고 말했던것이다. 1978년 6월과 10월, 루마니야와 서부독일손님을 회견했을 때 말했다. “중국은 력사적으로 세계에 공헌을 한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머물러있었고 발전이 늦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게각국을 따라배워야 할 때입니다.” 공회 9차대표대회개막식에 드리는 글에서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제출했다. “경제발전속도를 높이기 위해 각개 경제전선은 기술상 중대한 개혁을 해야할뿐만아니라 제도상, 조직상의 중대한 개혁이 있어야한다.” 이때 전당의 중점공작을 경제건설상에서 오는 사상에다 돌리자는 것 역시 등소평이 먼저제출한것이다. 11기3중전회 그리고 그전의 중앙공작회의는 최종적으로 “개혁개방”의 기본국책을 확정했던것이다.           
100    흠지에 묻힌 비밀(63) 댓글:  조회:3872  추천:26  2011-04-04
                     음지에 묻힌 비밀(63) <<당내에 진짜말을 제창하고 당사는 진짜를 써야한다>>                                                             소극(蕭克) 2008년 10월 24일, 개국상장 소극장군이 별세했다. 소극장군은 우리 나라 당대의 저명한 군사가, 군사교육가였다. 장군의 탁월한 공적은 영원히 전해질것이다. 장군이 남긴 정신재부는 후대를 격려할 것이다. ☆ 소극장군은 우리 군의 력사상 가장어린 고급지휘원의 한사람이였다. 55명 개국상장에서 그가 제일앞자리를 차지했었다. 소극장군은 원명이 무의(武毅), 자는 경(敬), 호남성 가화(嘉禾)사람. 1926년 1월에 그는 대양7원을 빌려갖고 혼자 집을 떠나 광주에 가 혁명운동에 참가한 후 선후하여 국민정부중앙군사정치학교헌병교련소, 국민혁명군보충제5퇀, 엽정(葉挺)부(部)의 주임련정치지도원으로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국민당의 백색공포를 맛대여 그는 자기의 출신을 불구하고 밥을 빌어먹으면서 당조직과 혁명대오를 다시찾아 계속전투했던것이다. 소극장군은 우리 군의 력사상 가장어린 고급지휘원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는 25살 때 군장으로 임명되였는바 27살에 홍6군단군당장이 되어 선건서정을 지휘하여 만리장정의 서막을 열었다. 29살에 홍2방면군부총지휘로 정식임명되여 홍군에서 나이가 제일어린 방면군지휘원이 되었던것이다. 30살에 팔로군120사부사장이 되어 부대를 거느리고 북평을 포위하여 적후항일근거지를 건립했는데 1급장령중에 나이가 제일어렸다. 40살 때 4야전군이 중남으로 진군하니 참가하여 전국해방전쟁을 했던것이다. 신중국성립후에 중앙군위군훈련부부장, 해방군군정대학교장, 국방부부부장 겸 군사학원원장과 제1정위 등 직을 맡았었다.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군함제도를 실시했다. 그는 상장군함을 받았던것이다. 당시 상장군함을 받은 사람이 모두 55명이였는데 그가 첫 자리였다. 소극장군은 당내에 진짜말을 제창하고 당사는 진짜진짜를 써야한다고 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군사학, 당사, 군사, 전사를 연구하고 <<남창기의>>, <<추수기의>>, <<주모홍군측기>>와 백권에 달하는 <<중화문화통지>>를 편집하고 <<소극어록>>, <<소극시고>>를 출판했으며 여러편의 문장을 발표했다. 그는 당사교학에서 력사유물주의를 견지하면서 력사사실은 가장높은 권위를 갖고있다고했다. 1981년, 건당 60주년 당사연구학술회에서 발언고를 토론할적에 그는 당사연구중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제출했다. 인민이 숭배하는 영향을 받아서 림표와 “4인방”은 당사와 모택동사상해석권을 롱단하여 모택동을 신화(神化)했으며 그로인하여 당사연구령역에서는 허다한 불량한 경향이 존재하게되였다면서 당사는 그저 모택동 한사람만 선전하고 기타지도자들은 형상이 외곡되고 더럽게 되어 영향이 나쁘다고했다. “唯上”,“唯權”, “唯定”론 등 당사연구에서 허다한 금구를 설치했고 어떤력사문제는 어느 권위인사만이 강의하면서 결정지을것이 있어도 다시연구하지 못하게했던것이다. 이같이 하면 력사정황에 근거한 정확한 결론을 내릴수 없었다. 하기에 그는 정확한 태도로 당사를 연구해야한다고 적극주장한것이다. \"천마디 만마디 개괄하면 한마디, 그것은 바로 력사유물주의를 견지하고 실사구시해야하며 진짜를 남겨야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력사자료가 충분해야하거니와 참답게 분석연구해야한다. 둘째는 붓을 들고 사실대로 쓰는 정신을 갖고 용기를 내며 “유상”을 말고 “유서”를 말고 오직 유심“해야한다. 력사사실른 가장 큰 권위가 있는것이다. 당내에 진짜말을 제창하고 당사는 진짜를 써야한다.” 소극장군의 추동하에 당사연구에서 력사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어떤 문제들은 규정될 수 있는것이다. 례를 들면 1973년에 림표반당집단을 비판할 때 중앙에서 비준하여 발부한 자료중에 어떤 사람은 림표가 아직은 견습패장이였다고했다. 소극은 이렇게 말하면 력사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했다. 1927년 5월, 국민혁명군 제2차북벌시 장성운동지가 희생되자 간부조정을 할적에 림표는 련장으로 승급한것이다. 떠 례를 들면 지난때 중앙쏘베트구역 5차의 반“토벌”력사를 말할 때 제1,2,3차 반“토벌”은 모택동의 지휘로 승리를 취득했다고말하고 제5체 반“토벌”은 공산국제로부터 온 리덕이 지휘하여 엄중한 실패를 했다면서 제4차 반“토벌”은 누가 지휘했다는 말이없이 그저 모택동의 정확한 군사사상의 영향으로 승리를 취득한것이라했다. 당시를 이렇게 말하는것은 맞지 않다. 제4차 반“토벌”은 1932년말부터 1933년기간이였는데 그때 모택동은 이미 쏘베트구역중앙국령도회의에서 틀리게 홍1방면군총정위의 직무를 철소하였기에 홍군을 떠나 지방사업을 한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모택동이 지휘했다고 말하지 말아야한다. 제4차 반“토벌”에 대해서 소극장군은 명확하게 말했던것이다. “제4차 반‘토벌’은 주은래, 주덕이 지휘하여 맣은 승리를 취득한 것이다. 이는 진실한 력사인것이다. 솔직히 말해 력사의 진면모를 회복시켜야 한다.” 당력사에서 착오를 범했던 동지들에 대한 소극장군의 주장은 실사구시적으로 내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례를 들면 그가 여러차 말한 하희(夏曦)에 대해 그는 정확히 평해야 한다면서 그가 상악서근거지숙반에서 엄중한 착오를 범하였다하여 전부를 부정하는것은 옳지않다고했다. 하희는 신민학회회원으로서 일찍이 모택동과 같이 사업한것이다. 87회의후, 리유한이 중앙에 조동되여 사업하게 되니 하희가 호남성위서기를 맡고 곽량(郭亮), 류직순(柳直荀) 등과 함께 지하투쟁을 견지했던것이다. 공헌이 있는것이다. 그는 장정도중에 희생되였다. 그러한 그를 부정하는것은 하나도 옳은곳이 없다면서 력사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소극장군은 말했다. 총적으로 소극장군은 “당내에 진짜말을 제창하고 당사는 진짜당사를 말해야한다.”는 주장이였다. 이 원칙은 당사인물, 당의 력사를 정확히 인식하고 평가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킨것이다. ☆ 우리군 수많은 “儒將”의 한사람. 소극장군은 우리군의 수많은 “유장”들, 이를테면 스노가 쓴 <<중국로일대혁명가사전>>에서 평가한 주은래, 서향전, 모택동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군사학자”라고 부른것이다. 소극장군은 서법애호가였고 문학창작에도 흥취를 갖고있었다. 일찍이 혁명에 투신하여 당조직을 찾았고 남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글공부를 했던것이다.... 저명한 작가 하연이 읽어보고 “중국당대군사문학사 중 한부의 기서(奇書)”라 평가한 <욕혈라소(浴血羅宵)>는 1988년 건군절전야에 출판되였는데 쓰기시작하여 반세기만에 빛을 본것이다. 전혀 생각밖인것은 원고가 건국후에 두 번이나 액을 당한것이였다. 한차례는 1958년에 이른바 “반교조주의”운동기간에 장군이 착오적인 비판과 조직처리를 받으면서 원고는 “대독초”로 몰리면서 활자로 찍혀 “비판용”으로 돌려진것이고 다른한번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비판이 승급함에 따라서 장군은 “공포주의를 선양했다”느니 “로공인민을 모욕했다”느니 하면서 심지어는 “소설을 리용하여 반동활동을 했다”느니하면서 “죄”를 씌운것이다. 후에 장군은 유모아적으로 “비판용으로 공급되였던 이 책은 벌써 두 번이나 인쇄되여 독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1991년 3월, <<욕혈라소>>는 제3기 모순문학상영예상을 받았다. 이는 이 작품에 대한 긍정이거니와 기특한 이 소설에 대한 선전이기도했다, 호요방은 생전에 읽어보고 7률시를 지어 작자에게 준일이 있다.
99    음지에 묻힌 비밀(62) 댓글:  조회:5566  추천:27  2011-04-04
                     음지에 묻힌 비밀(62)                       (1) 송경령이 여러차 중공중앙에 보낸 편지                       (2) 백화가 쓴 \"나와 \'모택동\'의 정결\"   송경령이 여러차 중공중앙에 보낸 편지 1994년 11월, 중앙서기처는 당사편위회(黨史編委會)에서 송경령(宋慶齡)이 건국후 32년간의 자료를 정리해낸것을 심사통과했다. 등소평의 비준지시: 진짜를 남기도 사실에 맞지 않는것은 대담히 고쳐야한다. 진운의 비준지시: 송경령은 고귀한 품질을 갖추었는바 신앙이 시종여일했다. 나라를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평화를 사랑한것이다. 량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고 량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 점을 존중해야한다. 내용제요: 송경령은 1950년 3월에 당중앙에 편지로 입당을 요구했고 1952년에 재차 모택동에게 편지로 요구를 제출한것이다. 모택동은 송경령과 말했다. \"그대는 정치상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지. 이미 혁명전쟁세월에 당의 우수한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어떤일은 우리가 해내기 어려우니 그대가 하는게 적합합니다. 나는 말했던겁니다. 당의 고급간부들은 혁명에 견정한 그대를 따라배우라고말입니다. 신중국혁명에 공헌한것을 보면 그대의 작용이 리제심(李濟深)보다도 크고 심로(沈老ㅡ심균유)보다도 큰것입니다. 그런것만큼 그래도 당외에 그냥 남아있는게 좋겠습니다.\" 1955년 11월, 송경령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썼다. \"공상업에 대한 개조를 제출하니 나는 정말 리해되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일찍이 공상계는 장기적으로 공존할것이며 공상업자의 리익은 보호해준다고 낙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는 이렇게 한다면 식언이 되지 않는가? 자본가는 벌써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두려움을 갖고있으며 적잖은 이들이 후회와 원망을 품고있습니다.\" 이에 모택동은 서면표시를 했다. \"송부위원장은 의견을 갖고있는데 자본가를 대표해서 말을한다.\" 1957년에 송경령은 또한번 당중앙에 편지를 썼다. \"당중앙에서 대병대방을 호소해놓고는 왜 또 걷어들이는가? 공산당은 국민당의 8백만대군이 무섭지 않고 미제국주의가 무섭지 않다고해놓고서는 왜서 인민이 당이 령도하는 인민정부를 뒤엎을가봐 겁나하는가? 공산당은 각계인사의 비평을 과감히 접수한다고하지 않았는가. 비평하는 인사는 대부분이 나라를 사랑하고 당을 사랑하는것이다. 어떤 민주인사들은 새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가정을 바치고 개인의 명리를 희생시킨것이다. 이제 2, 30살이 되는 지식분자가 어쩌면 하루새에 반당반사회주의 지식분자로 변해버리고만단말인가? 나는 이 운동을 도무지 리해할 수 없다. 두달너머 생각했지만 아직도 달통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당내외의 순순한 사람들이 공산당과 인민의 대립면에 섯다고 하다니? 그들이 그래 공산당을 뒤엎자고한단말인가?\" 1958년부터 송경령은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인대상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중앙에서 류소기, 주은래, 동필무를 보내여 권고해서야 송경령은 할수없이 계속참가했다. 1959년 4월, 송경령은 인대의 추천을 받아 국가부주석으로 되었다. 송경령은 두 번이나 사퇴하려고했다. \"나는 락오한 사람이길래 사상이 따라못가 이름을 걸어놓고 빛만보이는건 국가에 불리하다고봅니다.\" 하면서 그는 리부춘(李富春)이나 우란부(烏蘭夫)가 맡는것이 좋겠다고제의했다. 송경령을 국가부주석으로 임명하는게 좋겠다고 제의한 사람은 류소기, 동필무, 림백거, 리부춘이였는데 21명 정치위원이 토론할적에 18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했던것이다. 그 세사람은 모택동, 림표, 강생이였다. 그때 모택동은 이렇게 발언했다. \"송경령이 우리의 민주혁명시기에는 한길을 걸었지만 사회주의혁명시기에 와서는 그와 우리는 함께 갈 수 없게되였다. 우리의 방침로선을 찬성하지 않던데로부터 우리의 방침로선을 반대하는것이다. 그는 우리와 다른 계급이다.\" \"문혁\"시기에 송경령은 \"문혁\"에 대해 도무지 리해할 수 없어 반감이 생겼거니와 공산당에 대해서 실망하였기에 모택동과 당중앙에다 선후 편지를 7통이나 썼던것이다. 1967년 8월, 1969년 11월, 1976년 6월, 송경령은 세 번이나 염세(厭世)사상이 생겼는바 편지에서나 자기를 보러 온 령도와 나눈 담화에서나 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원망하면서 말못할 고민에 쌓여있음을 드러낸것이다. 그는 7통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문화를 모른다. 소설믈 모두 정치라하면서 다가 독초라니 나는 어리뻥뻥해난다. 하루밤사이에 나와 함께 사업해온 사람들이 다 주자파, 반당집단, 야심가, 요물잡귀로 변해버렸다. 중앙에서는 나보고학습하고 류소기를 적발비판하라는데 나는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 류소기주석은 당중앙에서 3,40년간이나 사업해왔는데 오늘 반역자, 내부간첩이라니! 나는 믿지 않는다. 반역자고 내부간첩인 사람이면 어떻게 7년간이나 나라주석질을 했겠는가. 지금 그래 헌법이 효력이 있는가? 왜서 사람을 제마음대로 붙잡고 제마음대로 투쟁하여 죽게까지 만드는가? 당중앙에서 나와 말해보라. 이같이 무법천지로 제사람이 제 동지를 해치고 인민을 해치게 만드는건 죄행이다. 국민당과 싸워 살아난 우리의 우수한 간부들이 왜서 제 대오에 죽어야한단말인가?\" 1970년 3월, 모택동은 주은래와 말했다. \"그가 오늘의 변화를 보기싫어하는 것 같으니 가히 해협건너로 갈 수 있소. 향항에 가던지 외국으로 가던지 내가 만류하지 않겠으니까.\" 뿐만아니라 주은래, 리선념을 시켜 이 말을 송경령에게 전달하게했다. 그 두 사람은 이렇게 전달했다. \"주석께서 그대를 매우 관심합니다. 심정이 좋지 않음을 알고 밖에 나가 기분을 바꾸면서 휴식을 하랍니다.\" 이에 송경령은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게 싫어서 그러는건 아니겠지? 내 일생은 그래도 이 땅에서 마지막 몇걸음을 보낼거얘요.\" 그는 병을 칭탈하고 일체 명절활동과 초대모임에 참가하지 않기로 맘먹으면서 말했던것이다. \"회의에 가봤자 마음만상하니 차라리 가지않는게 낫지. 참가하기만하면 돌아와서는 병원에 가야하니. 그리고 나역시 정치상 돋보이게하곤싶지 않은거얘요.\" 1980년 11월, 송경령은 당중아에다 일생 마지막되는 편지를 보냈다. \"1, 국가는 진흥하고 원기를 회복해야합니다. 지금이 좋은 기회인겁니다. 2, 건국이래 정치운동이 국가와 인민에게 준 상처를 잘 총결지어야합니다. 3, 나와 국보(國父)를 한데다놓지 말것을 바랍니다. 나는 자격이 모자라니까요.\" 1981년 5월, 호요방과 리선념은 병원에 가서 송경령에게 정치국에서 그를 정식당원으로 받아주었음을 알리였다. 송경령은 듣고 미소지었다. \"억지는 아니겠지! 서른한해였어요. 내 가슴은 얼었어요. 이젠 인생길을 다 걸었어요.\" 호요방과 리선념이 그보고 또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물으니 송경령은 두가지를 말했다. \"내가 죽으면 상해에 돌아가 안식하게 해줘요. 그리고 저축을 좀 해놓은것이 있는데 그것을 복리기금으로 해줘요.\" ◎ 송경령은 말을 아주잘했다. 만약 모택동이 살아서 허심하여 그같은 바른 말을 귀담아들어줄줄을 알았다면 새중국의 려정에 암흑한 시대는 생겨나지도않았을 것이다.  ◎림표의 가장 큰 죄악은 한때 개인숭배를 고취하여 중국의 수억만 백성들을 우롱하고 우매하게 만든 그것이다.                 백화가 쓴 <<나와 모택동의 정결>>     래일 9월 9일이니 모택동이 서거한지 32주년이 된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동호인들이 모택동에 대한 문장을 써내고있다. 나도 뭐든 좀 서야할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그래도 이미 썻던것이 좋을것 같아서 다시내놓아 벗들과 교류를 하고자 하니 천박한 점은 고쳐주기바란다.                                                               ㅡ백화 인터넷을 보면 많은 젊은이들이 모택동을 그리워하고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편면적인 것 같다. 모택동을 죽어라고 욕하는것도 있는데 기분이 언잖다. 나는 그네들과 속심을 나누고싶다. 글을 배우면서부터 나는 “모주석”이란 세글자를 익히였다. 노래도 “동방홍”을 불렀다. 셈이 들면서부터 모택동이 바로 “중국의 대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점점 “제고”되였다. 모택동사상은 사해를 뒤덮는 진리며 중국혁명사업에 유일정확한 지도사상이라 알았다. 이러한 신념은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고도”에로 올랐다. 나는 일찍이 모든 “홍위병”들과 마찬가지로 량보일간(兩報一刊)에서 질책하는 반동적이고 부패하고 몰락한, 봉건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권위와 리론을 극도로 미워하면서 그것들을 반드시 타도해야한다고 여겼고 그러면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하였기에 나는 종래로 내가 극도로 미워하는 권위와 리론의 원본과 원문을 아예 보지도않았던것이다! 그런 “독초”는 볼수도없었다. 당과 국가에서는 “독초”로 나와 나의 동포들을 물들게하는것을 용허하지 않았던것이다. 볼수있다는것이 오직 “량보인간”의 비판문장에 응용된 “장”이나 “절”의 구절들이였는데 그러한 “악독한” 글만으로도 사람들은 일체 “반동파”를 뼈에 사무치게 무서워할 수 있었다. 하기에 “량보일간”에 실리는 문장들이 정치학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레주의서적과 <<모택동선집>>을 내놓고는 거의 유일한 교재나답지 않았던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모택동을 숭배하는 것이 신앙에까지 이르어서 “모택동사상은 당대의 가장위대한 맑스레닌주의”라면서 사해를 뒤덮으니 의심할바없다고했다. 그때는 개인숭배가 미칠지경에 이르럿다고 하면 지금의 지금의 젊은이들은 리해ㅘ지 못하는것이다. 나는 한때 나를 무척 의혹스럽게 만들었던 (번개같은 순간적이긴하지만) 한가지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것은 “문혁”때였는데 모택동이 책상앞에 앉아 글을 쓰고있는 매우 권위적인 사진이였다. 그의 오른손켠에 책이 무져있는데 사진이 작아 책이름이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후에 큰사진을 보고 발견했다. 무져있는 책들은 <<자치통감>>이였다! 나는 은연중 깜짝놀라고말았다. 아니, 왜 마레주의저작이 아닌가? 이러고나서 나는 스스로 수긍했다. 수령이 아닌가, 아무렴 우리하고야 같을수가있는가? 의례 고전들을 섭렵해야지! 지금 생각나는데 나는 그당시 모택동에 대한 숭배와 믿음이 그가 없으면 하늘이 당장 무너질것만 같이 여길지경 그한테 미련을 가졌던것이다. 나는 걱정했던것이다. 모주석이 별세하면 중국은 끝장나지 않을가! 당연한 일이다. 모택동역시 사람이니 “만세”할수 없어서 1976년에 죽고만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끝장난게 아니고 지구는 그냥돌아갔다. 해도 동쪽에서 뜨고있다. 한데 중국은 그가 죽으니 많이 변해졌다. 오늘 곰곰이 생각해보면 개혁 30년간에 가장 큰 개변이 “문혁”때비해 매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때는 제 속심의 맘대로 털어보였다가는 끝장보기가 일쑤였다. 그때는 공산당과 모주석의 령도에 조금이라도 의문갖거나 “반대”뜻을 가지면 <<공안8조>>규정에 의해 판결받았다. 그런“죄”로 걸려 판결받는것을 내가 친히 본것만도 얼만지 모른다. 그때는 외국의 방송을 들어도 검거되여 “적의 방송을 들었다”고 처리했던것이다. 하향한 두 친구는 그렇게 되어 8년간이나 옥살이를했던것이다. 오늘와서는 그때 하지 못하게 했던 말을 해도 되는것이다. 확실히 이전만은 많이 “자유”로와진것이다. 이러한 “자유”가있길래 나는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책을 보고 바깥소식도 알게되며 그 년대에는 상상할래야 상상할수도 없었었던 “토론”도 하는것이다. 바로이러하길래 당년에 “로홍위병”이였던 나는 비로서 감히 “모택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나는 말하고싶다, 이것이 개혁개방의 가장 큰 “성적”이라고.) 모택동의 시사를 보면 심금을 울린다. 모택동의 서법은 룡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하니 드밖에 따를자가 더 있는것같지 않다. 더욱히는 모택동의 군사지휘예술은 “절세”라하겠다. 3년해방전쟁에 후방에서 전략전술을 세우고 일사천리로 내달려 승리를 걷우었으니 20세기에 그와 어깨를 겨룰만한 군사가가 어디에 더 있으랴싶다! 이같은것을 보면 대단히 감복되여 지고무상의 숭배가 생기게되는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택동이 걸은 길을 한줄에 꿰여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실상은 손중산이나 미국의 워싱톤과 같은 자산계급민주혁명가보가 높지 못하다는것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그가 앞사람을 초월한것으로만 여긴것은 그의 리론이 맑스레닌주의를 발전시킨데서 온 것이라는 것, 따라서 “주의”역시 세상에서 가장 유일정확한 방법론이고 세게관이라고 여기기만했기 때문이다. 기타의 “학설”, “리론”은 전부가 비뚤고 틀린것인줄로 알았던 것이다! “신해혁명”후 손중산은 “림시총통”으로 추천받았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원세깨(袁世凱)가 야심이 있는데다 손중산은 무장을 갖추지 않았거니와 원세개가 “공화”를 추진하겠다고 승낙하니 그것을 믿었기에 “림시총통”자리를 내놨던것이다. 여기서 알수있는바, 손중산은 권력을 탐내지 않았던것이다. 워싱톤은 전쟁이 결속되자 모든 사람들이 집정하여 국가를 다스리라했지만 그를 완곡히 사절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며 권리를 인민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국공량당의 22년간 싸움 끝에 모택동은? 1956년, 모택동이 제기한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발단이였다. 허다한 지식분자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구시대에서 넘어온 지식분자였다) 고맙게 여기고 공산당이 국가를 온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마음에 배합하느라 호소에 향응하여 “명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명대방”때 곧이곧대로 당내에 존재하는 “관료주의”, “맹탕지휘”등을 비평했고 어떤 사람은 “전민의 민주선거”를 하여 누가 선거되면 누가 국가를 장악하게하자고 했다. 그것이 바로 후에는 당문건에까지 올라 가장 엄한 질책을 받은 “번갈아앉기론”인것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난 후에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 결의>>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던것이다. “정풍중에 극소수의 자산계급우파분자들은 ”대명대방“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당의 신생하는 사회주의제도를 비웃으면서 진공을 발동했고 공산당의 령도를 없애려고 꿈꾸었다. 그랬으니 이런 진공을 견결히 반격하는것은 완전히 정확하고 필요한것이다.” 기실 당의 “정풍”을 방조하라고 호소한것은 공산당이였다. 사람들이 의겨늘 제기하게했는데 어떤것은 첨예할수도있는것이다. 례를 들면 돌아가며해보자는고 “고취”한것 역시 사상상의 언론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들은 폭람을 일으키자는 조직이 없는것이고 “방송국을 공점”하자는 생각도 없었던것이다. 한데 왜 대적이나만난것 처럼 그런사람들을 죽을지경에 까지 몰아넣어야 속시원해하였는가? 텔레비극 <<량검(亮劍)>>에 나오는 주인공 리운룡이 대표성적인 진속말을 한것이다. “젠장 공산당이 천하를 얻으니 네녀석들이 올라앉자구? 뒤집어버린다!” 공산당이 올라앉아야한다. 모택동이 수령이니 그가 와 앉아야한다. 그 누구든 올라앉으려니 생각말아야한다. 그런다면 “인민이 주인이 된 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되고마니 절대가만둘 수 없다. 이로보아 왜서 국가주석마저도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모택동이 처음에는 “충고”를 받아줄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권을 잡는 과정일때였다. 정권을 잡고나서부터는 점점 자기와 같지 않은 의견은 받아주려하지 않았고 “개인독재작풍과 개인숭배현상이 점점 발전”했던것이다. 기실 그것은 모택동개인문제로만 볼것이 아니다. “왕위”에 올라앉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당종송조(唐宗宋祖)와는 본질상 다른것이다. 내가 단언하고싶은것은 만약 다른 그 누가 그 자리에 올라앉아도 그모양을 면치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자치통감>>의 정수가 바로 수천년간 중국의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운용에 정화한것이다. 모택동은 백성을 민생고에서 구제하려했다. 그역시 민생이 어려움을 겪고있음에 가슴을 앓은것이다. 하길래 국민은 그를 감사하게 여기는것이다. 모택동역시 검약했다. 그가 림종할 때 입은 잠옷은 기운것이였다. 묻노니, 지금 이런 수령이 어디에 있는가. 모택동은 제 혈육을 여섯이나 전쟁판에서 잃었다. 그는 그야말로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재질이 넘치고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다고말할 수 있는것이다. 의심할것 없다.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구하기위해 제한몸을 바치 호매로운 장사가 력사에 많은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3천년간이나 봉건전제에 침습되고 물들어서 대중이거나 수령본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다가 “반란파”에서 “성공파”로 그 다음에는 “군림천하(君臨天下)”로 가는 력사숙명은 면치못하는것이다. 감정상에 말하면 인터넷에서 모택동을 욕하는것을 볼때면 나는 가슴아프고 견디기 어려우면서도 “반격”할 도리는 찾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집정해서부터 확실히 많은 착오와 곤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그가 바란것처럼 잘된것을 찾기는 어렵다. 이는 “력사의 국한성”이였다. 나는 “회충”같이 그의 내심세계를 파고들수는 없지만 알수있는것이다.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확실히 중국에서는 오로지 자기만이 능히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수있다고 여긴것이고 중국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사람들이 수천년간의 봉건전제사상과 문화에 물젖고 침습되였기에, “명구, 청관(明君, 淸官)”사상이 머릿속에 뿌리박아 동요없이 그를 받든것이다. 이런바탕에 모택동은 제 전우들과 더불어 “인민이 주인”이 된다는 아주 새로운 명의로 권좌에 오른것인데 그것이 실제상에는 도처에 봉건락인이 찍힌 “사회주의공화국”이였던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모택동은 그때 정말 부패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때의 관리들이 비교적 청렴한것많은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억만인민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귀한 천자인 모택동마저 홍소육(紅燒肉)을 먹는건 사치라면서 절제했다니 백성이 경앙하지 않아서야되겠는가. 아랫사람이 감히 떠벌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주은래 하면 그가 인민대회당시설공지에 갔다가 식사할 때 만투쪼각으로 접시에 붙은 채까지 모아 말끔히 먹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감동을 금치못했다고한다. 그래 공동의 것을 제것으로 만들고 돈과 재산을 수탈해야만 부패한 것으로 되는가? “대약진”을 해서 밀이 무당에 1만근산량을 낸다고 떠벌렸지만 아래에서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한데도 “인민공사는 좋다”고 가송하게했다. 사상으로부터 능히 “반혁명”을 파내여 청결할 수 있다면서 심지어는 “최후해결”이라했다! 이것이 그래 무엇보다 크고 더 무섭고 후과도 더 엄중한 “부패”가 아니고 뭔가? 경제전선에서 모택동과 그의 전우들은 건국하여 49년에는 “대생산”, 53년에는 “사회주의공업화”, 62년에는 “공업화개조” 등을 전개하여 하나하나 거대한 성적을 이룩하여 중국의 경제발전을 앞으로 떠밀었던것이다. 유감스러운것은 매차마다 성공한 뒤에는 하나하나 무서운 착오가 바싹따른 그것이였다! 합작호, 반우파, 팽덕회를 비판하고는 뒤를 이어 재난을 극에 이르게 한 “문화대혁명”. 모택동은 미런한가? 아니다. 모택동은 더없이 총명하다. 지어 전무후무(前無後無)라 사람이 있을지경이다. .... 그의 몸에서 생긴 착오는 시대의 착오였다! 한 개 세계가 완전히 변하는 시대에서 인구가 대단히 많은 나라에서, 국토가 상대적으로 극빈하고 문화보급이 불평형을 이루고 락후한 나라에서 “공화(共和)”의 대도리를 떠나서 “명군(明君)”, “청관(淸官)”의 통치를 세우고 태평성대하여 만민이 봉락을 누리는 “대중화(大中華)를 세우려한 것이다! 이를 건설하는 과정에 모택동은 그 지고지상(至高至上)의 묘당에 앉아서 처음에는 남의 권고와 비판을 잘 접수했으나 점차 충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불통의 ”영명한 군주“로 되고만것이다....
98    음지에 묻힌 비밀(61) 댓글:  조회:4400  추천:24  2011-04-03
                   음지에 묻힌 비밀(61)                     (1)요문원의 <<회고와 반성>>                                (2)뜻깊은 말과 천고의 비밀                      요문원의 <<회고와 반성>> 신화사는 2006년 2월 6일에 아래와 같은 소식을 짤막히 실었다.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 요문원은 당뇨병을 앓다가 2005년 12월에 죽었다. 요문원, 남 74세, 1976년에 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에서 유기도형 20년, 정치권리박탈 5년으로 판결. 1996년 10월에 만기석방되였다.\" 그먼저 강청은 1991년 5월 4일에 감옥에서 자살했고 왕홍문은 1992년 8월 3일에 병으로 죽었으며 장춘교는 2005년 4월 21일에 병으로 죽은것이다. 거기다 제일마지막에 죽은 요문원까지 합치면 한때 기고만장하여 날뛰였던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요원전부가 죽어버린것이다. 요문원이 쓴 42만자에 달하는 회억록은 당국에서 출판을 하지못하게 하니 세상을 보지 못한채 불더미에 들어가 재로되고말았다. 후에 요문원은 다시 필을 들어 5만여자에 달하는 <<회억과 반성>>을 써 중공모택동왕조의 최후의 력사진면모를 세상에 폭로했다. (1) 요문원의 훌옥후 두가지 원망   요문원은 중공의 6.70년대에 빨개진 문인이였다. 그때는 그를 \"무산계급리론가\"라했다. \"문혁\"때인 10년동란시기에 모택동은 여러번이나 요문원을 춰올려 \"南姚(요문원) 北戚(척본우)\"이라했다. \"문혁\"기간에 그는 줄곧 중앙의 \"선전\"을 맡았던것이다. 1996년, 요문원은 석방되자 선후하여 상해시의 천사, 청포에 은거하면서 중국력사, 중공당사를 연구하고 그림도 그리였다. 1998년 6월 요문원은 살아있는 사이 두가지 원망이 잇있다고 유관부문에 제출했다. 하나는 회억록을 내는것이고 다른하나는 다시 입당하자는것이였다. 2001년 9월에 유관부문에서는 요문원이 회억록을 출판하는것을 허락하면서 두가지 요구를 알리였다. 첫째는 중앙선전부의 심사를 거쳐야하고 둘째는 해외에서 출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다. 요문원은 회억록을 4번쓰고 수개했는데 글자수가 무려 42만자에 달했다. 1956년부터 1976년 체포될때까지 격은 일이였다. (2) 회억록판권 500만원에 락착 요문원이 회억록을 썻다는 소식이 나가자 국내의 20여개 출판사에서 눈독을 들이였다. 향항의 몇 개 출판사도 나서니 판권값이 높아졌는데 결국은 국내에 있는 반관방출판세 세집에서 500만원에 판권을 삿다. 그의 회억록이 다 씌여지자 유관부문에 넘겼는데 줄곧 소식이 없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강택민의 지시가 있었다는것이다. 출판하지 못한다. 생활에 곤난이 있다면 보조를 해주라는 것이였다. 그때로부터 요문원은 매달 인민페 4,000원을 양로금으로 받았거니와 경위 겸 종업원을 한명 두기까지 했다. (3) 당국에서 내놓은 \"다섯가지\" 2002년에 이르러 유관부문에서는 요문원의 회억록출판에 관해 다섯가지를 내놓았던것이다. 1, 해석하지 않은 당, 정, 국가의 기밀을 내서는 안된다.2, 이미 작고한 당과 국가수령의 사인문제를 공개해서는 안된다. 3, 사회에 쟁의를 일을킬 수 있는, 국제반화세력에 리용될 수있는, 국가 의 명성에 해로운 자료를 내놓아서는 안된다. 4. 진가를 핵실할 방법이 없는 문제를 공개해서는 안된다. 5. 공개발행하지 못한다. 요문원은 실제상 회억록출판이 금지되니 다시한번 유관부문에다 요구를 제출했다. 자기가 친히 겪은, 직접참가하고 친히 본 력사사실들을 회고하여 서술하는 식으로 간단히 써내겠다고한 것이다. 그의 이요구는 비준받았거니와 조리원 한 사람까지 주어 그가 글쓰는것을 돕게했다. 요문원은 근 8개월의 시간을 들이여 5만자넘는 <<회고와 반성>>을 써서 약간의 력사사건의 진짜와 가짜(眞僞)를 밝히였다. 실제상 이는 회억록의 간본(簡本)인것이다.               아랫것은 <<회고와 반성>>의 부분적인 내용이다.    (1) 림표도망사건에 대한 모택동의 반응 모택동은 림표가 비행기를 타고 쏘련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완전히 믿지 않으면서 총리(주은래)를 불러 정황을 좀 더 알아보라했다. 림표가 비행기를 타고 도망친지 4시간이 넘엇었다. 경위부대가 림표를 찾을 수 없게되여 총리가 세 번째로 보고했을 때에도 모택동은 의연히 반신반의하면서 그 장소에 있는 정치국위원들과 말했다. \"그는(림표) 내가 자기를 받아줄것 같지 않아 무서워 찾아간거다.\" 모택동은 장탄식을 뽑고나서 또 말했다. \"고, 고상하다! 나는 그한테 속히웟다. 22년이나 속히웟다. 너희들 다가 속히웟다! 일을 친 다음에야 제갈량이 되지 말라!\" 그는 주은래를 질책하고 강청을 욕했다. \"하나는 총리, 하나는 녀편네. 모두가 부주석을 하늘같이 춰올리더니. 나도 너희들한테 속히웟다!\" 림표사건이 생긴 후에 모택동은 한동안 정신이 흐리멍텅하여 물건을 쥐여뿌리고 사람을 욕하고 신변의 공작인원들을 쫓아버렸다. 어떤때는 주은래가 리민, 리눌, 장옥봉을 시켜 안위하게해서야 모택동은 겨우겨우 정서를 온정시킬 수 있었다. (2) 등소평을 처리결정 할 때        중앙정치국에서 등소평의 당내외의 일체직무를 철소할 일을 놓고 토론을 하자고 하니 엽검영은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고 주덕은 회장을 떠나갔다. 등소평의 당적취소문제를 놓고 토론할 때 엽검영이 몸을 일으켰다. \"긁어버린다구! 어디 나까지 함께 긁어버려봐!\" 그는 이렇게 말을 던지고는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리선념은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화국봉, 진석련, 오덕, 기등규는 모주석에게 청시하자고 제출했다. (3) 총리인선에 관하여 중앙정치국에서 총리인선을 토론할 때 세사람을 제기했는데 화국봉, 리선념, 장춘교였다. 그리고 강청을 중공중앙부주석으로 제출했는데 왕동흥이 제일먼저그랬다. 그것을 모주석에게 보냈다. 모택동은 화국봉을 총리로한다는데다 동그라미를 치고는 \"제1부주석\"이라 써서가첨했다. 리선념, 장춘교, 강청이름에다도 각각 동그라미를 치고는 (□)를 보탰다. 모택동은 왕동흥, 강청,장춘교, 왕홍문과 요문원을 불러 만나서 말했다. \"누가 강청을 당의 부주석으로 하자고 제출했는가? 내보기에는 진실한것 같지 않다. 왕이 그랬는가 아니면 장이 그랬는가? 누가 제기했으면 누가 그를 해치고 나를 죽으라 핍박하는거다. 너희들이 강(강청)을 쓰겠거든 내가 죽은 다음에.\" (4) 황, 오, 구, 리를 처리할데 관하여 림표의 \"9.13사건\"후에 중앙정치국에서는 황영승, 오법헌, 구희작, 리작붕 네사람과 기타의 수종인원들을 처리할 문제를 놓고 토론했지만 누구도 속내를 말하지 않아서 주석에게 청시하기로했다. 모택동이 말했다. \"주자파, 반역자, 내부간첩, 공인역적, 현행반혁명을 모두 처리하고 해결할라니 군사정변집단인데도 북쪽의 적켠에 넘어가려는 무리인데도 처리못하고 해결못한단말인가, 그래? 군사법정을 까버려. 왜 군사법정에 넘겨 판결하지 않는가?\" 모(毛)는 그리고나서 지시를 내렸던것이다. \"황, 오, 구, 리를 사형해도 과분하지 않다.\" 모택동은 또한 로통수들과 물어보았다. 오랜 로통수들은 림표에 대해 호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형으로 판결하자는데는 찬동하지 않았다. 후에 40명 넘어되는 장군들의 의견을 들어봤는데 기본상같았다. 원인은 그 4명은 \"죽을 죄가 아니다\"는것이였다. 지어 어떤 장군들은 \"먹여살려야하다\"면서 그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모택동을 모해하려했다는것은 증거부족인것만큼 조사핵실하는게 좋겠다는 요구까지 제출했던것이다. (5) 모택동이 화국봉에게 \"你辦事 我放心\"이라 썻다는것은 알짜거짓말 요문원은 \"9.13\"림표사건에 중공중앙에서 공포한 자료에 많은 가짜가 들어있다면서 어떤것은 당시의 정치형세의 수요에 따라서 꾸며만든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때 이런 결의가 있었던것이다. ㅡ일체는 모주석의 형상을 보호하고 절대권위를 수립하며, 모택동사상을 보호하고 문화대혁명을 보호하며, 무산계급혁명로선의 몇가지 원칙을 보호하는데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등등. 요문원은 모택동이 화국봉에게 \"你辦事我放心\"이라 썻다는건 허구해낸 알짜 거짓말이라했다. (6) 모택동은 뒷일을 몹시 우려했다. 요문원은 회억록에다 모택동은 림표사건이 생겨서부터 림종때까지 그냥  자기가 죽은 후에는 로통수(老師)들이 자기를 반란할까봐 우려했고 중국군대내에서 \"흐루쇼브가 나지면 어쩌는가?\" 했다고 썻다. 그러면서 그는 아래와 같이 폭로했다. \"모택동은 령도그룹(班子)명단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당주석(黨主席)ㅡ 강 청(江 靑) 총 리(總 理)ㅡ 화국봉(華國鋒) 인대위원장ㅡ 왕홍문(王洪文)                                 모원신(毛遠新) 군위주석ㅡ 진석련(陳錫聯) 모택동은 이 명단을 들고다니며 정치국위원들과 의견을 물어보았던것이다.                                 뜻깊은 말과 천고의 비밀 密檔: 王洪文집에서 들춰낸 組閣名單 1976년 10월 6일, \"四人幇\"이 체포되였는데 외교부에서 교관화(喬冠華)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차 대자보를 내다붙이였다. 교관화는 \"四人幇\"의 뜻을 받들었거니와 그자들의 취지에 따라 당권을 찬탈할 여론을 일으켰다는것이다. \"四人幇\"을 체포하면서 왕홍문의 집을 수색했는데 내각을 구성한 명단이 발견되였다. 강청, 장춘교, 요문원이 추측, 단정하고는 그우에다 왕홍문이 批改를 한 필적이 있는것이였는데 아래와 같다. 一 . 黨中央 主席ㅡ 江靑      副主席ㅡ 張春橋, 王洪文, 姚文元, 孫玉國, 毛遠新.      政治局常委ㅡ 江靑, 張春橋, 王洪文, 姚文元, 孫玉國,                   毛遠新, 謝靜宜, 張秋橋, 王秀珍. 政治局委員ㅡ 江靑, 張春橋, 王洪文, 姚文元,                    孫玉國, 毛遠新, 謝靜宜,王秀珍,                    遲 群, 劉湘屛, 陳阿人,庄則棟                     喬冠華, 黃金海, 于會泳, 浩亮.      共靑團中央書記ㅡ 黃師 二 . 全國人大                   委員長ㅡ 王洪文,                   副委員長ㅡ 馬天水, 殷承宗, 楊春霞, 劉長瑜.                         심판대에 오른 강청의 자변(自辯) 강청은 끝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이는 그녀의 마지막강연이였다. \"기소서라는게 온통 허트소리뿐이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나는 아래와 같이 성명한다. 너희들은 국가명의를 빌어 특별법정이라는것을 하나 긁어 만들어갖고는 나를 모해하느라 죄를 한무더기 만들어냈는데 그따위 죄명은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지난날 내가 한것은 모두 중앙의 지시를 따른것으로서 사업중에 착오나 부족점은 있었겠지만 그것이 절대 죄로는 될 수 없는것이다..... 지금 너희들은 나를 체포하고 나를 심판하는데 이것은 모택동주석을 추악하게 하는 것이고 문화대혁명을 해온 홍위병과 홍소병들을 머리들지 못하게 하고 류소기를 번안하자는 것이다. 나는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보위한다. ....너희들이 지금 류소기안건을 뒤집어엎고 팽진안건을 뒤집어엎자고드는데 그래 9차대회와 10차대회의 로선을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이건 모두 주총리를 반대하고 강로(강생)를 반대하는것이며 모주석을 반대하고 문화대혁명을 반대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행동을 그래 전국인민이 용서할것같은가?...\" 강청은 섬북에서 전전(轉戰)했던 일을 들고 법정을 향해 질문했다. \"전쟁 할 때 모주석을 따라 전방에 나간 녀동지는 내하나밖에 없었다. 그때 너희들은 다 어디에 가 숨어있었더냐?\" 정숙하던 법정에 갑자기 웃음소리터졌다. 실랄한 조소였다. 강청은 그래도 써갖고 온 자변서(自辯書)를 계속내리읽었다. \"지금 내한테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모주석께 책임을 지는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혼쌀먹이는건 모주석이다. 우리 고향에는 \'개를 때리려거든 주인의 면목을 보고 때리라\'는 말이 있다. 지금 바로 주인을 때리는것이다. 나는 모주석의 개다. 모주석을 위해서라면 나는 너희들이 때리는게 무섭지 않다. 모주석이 펼친 바둑판에서 나는 일개 소졸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미 강을 건넌 소졸인것이다. 나는 \'반란에는 도리가 있고 혁명은 죄가 없다\'고 본다. 지난때 나는 늘 말했다, 혁명을 하려면 다섯가지를 무서워하지 말아야한다고. 첫째는 목이 날아나는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하고, 둘째는 감옥에 들어가는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는 당내외의 일체직무를 철소당하는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하고, 넷째는 당적을 긁어버리는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하며, 다섯 번째는 처와 리혼하는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한다. 이 다섯가지 중 둘째, 셋째, 넷째는 이미해낸지 삼년되고 첫째 목이 날아나는것만 기다린다... \" 자기를 진짜 무산계급혁명자로 표방한 강청은 판결받기전만해도 굽어들려하지 않고 기고만장하여 반혁명수정주의를 타도하나는 등의 구호를 웨쳐대면서 갖은 행악질을 다했다. 진짜 배우답게 연기를 한것이다. 림표반혁명집단과 \"4인방\"안건의 변호사팀 팀장이였던 장사지(張思之)의 회억을 들어보면 \"림표의 죽음은 천고의 비밀인즉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1971년 9월 13일 밤 10시좌우에 림표의 딸 림두두(林豆豆)와 주은래가 전화로 통화했는데 대체 무슨말을 했을가? 당사자가 다 없어졌으니 영원히 알아낼 재간이 없는것이다. 그 전날인 9월 12일(음력7월23일) 리작붕은 주은래의 지시를 받고 산해관비행장에 있는 256전용비행기는 주은래,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네사람의 동의를 거쳐야만 리륙할 수 있다는 전화통지를 발송했건만 력서장기록에는 분명 고쳐졌다. 그 일을 리작붕은 절대모른다면서 500년후에 다시보자고했다. \"571공정\"과 모택동을 살해하려 음모를 꾸민 일도 자기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림표가 중앙을 다시세우려했다는데 정녕 세운다면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구희작 넷중 그 누구도 그쪽으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것이라고 단언했다. 왜야하면 그곳은 그들은 다가 모택동을 제일로 보고 그 누구보다도 숭배해왔기 때문이라는거다. \"팽덕회는 사람이지 귀신이 아니다. 강생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모택동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이것은 1978년에 진운(陳云)이 화국봉이 극력제지했음에도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한 명언이다. 그는 또 말했던것이다.\"모택동의 몸에는 봉건잔여가 있다. 어떤때는 제가 말해놓고도 부인한다. 그는 경제사업에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하나가 둘로 나뉘는 방법으로 그의 착오를 봐야한다.\"
97    음지에 묻힌 비밀(60) 댓글:  조회:4180  추천:20  2011-04-02
                   음지에 묻힌 비밀(60)                          장국도가 모택동과 \"문혁\"을 말하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죽으면 후계자로 선정된 림표가 순리롭게 권력을 계승하나 정치재능이 부족하기에 인차 주은래와 손잡게될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전문지식을 갖추고 잇는 주은래의 지지가 없이는 안되니까. 장국도는 주은래의 지도하에 일부 실력가들이 륙속 권력을 회복하여 국가를 챂으로 전진하게끔 떠밀것이라했다.    <<歷史開卷有疑>>1968년 10월 21일, 한번은 향항에 있는 보통민가에서 비밀방문이 진행되였다. 향항에 주재하고있는 미국령사관의 대륙사무책임자가 강직하게 생긴 로인과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있었는데 관원 둘과 한 정치분석가가 열심히 기록했다. 가끔가다 로인의 말을 끊고 몇마디 묻군하는데 록음기테프는 계속감기였다. 그 장면은 신비감을 던져주기도하는데 이 로인은 대체 누구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일가? 미국사람이 이같이 중히 여기는 이 로인은 복잡하고도 독특한 인생경력을 갖고있는데 지금사람들에게는 익숙할 수도 면목이 설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홍4방면군 악예환쏘베트구역의 최고수령이였거니와 또한 중공력사상 유명한 반역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한테는 한때 몸을 혁명에 바친 영웅적인 인생이 잇는가 하면 또한 모든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반역적인 인생도 있는것이다. 늘그막의 처지가 하도 처량하게 되었기에 사람들을 탄식하게 하는 그가 바로 장국도(張國燾)였던것이다.  장국도는 어떻게 되어 향항에 있게되였는가? 또 어찌하여 미국측과 관계를 갖게되였는가? 그가 이번에 취재를 받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가? 1938년, 섬감녕변구의 부주석이였던 장국도는 황제릉을 찾아가 제를 지내는 기회에 서안으로 도망쳤고 그걸음에 무한에 가서 국민당에 빌붙었던것이다. 그때로부터 혁명을 배반한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리용가치가 그닥없었기에 군통은 그를 집어던져버렸다. 하여 장국도는 국민당관리사회에 떠돌면서 한때 이름뿐인 \"설계원\" 따위의 보잘나위없는 직무ㅡ를 지내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종시 우울함을 면할 수 없었다. 새중국이 성립되자 장국도는 대만에 갓다. 하지만 후에는 떨돌이하기가 지겨우니 향항에 가 자리잡은것이다. 향항에서 장국도는 고맹여(顧孟余), 리미진(李微塵)이 꾸리는 <<중국의 소리>>에 들어갓다가 얼머있지도 못하고 경제불경기로 인하여 나오고야말았던것이다. 그후 장국도는 황금장사를 해보았지만 그것도 되지 않아 미찌기만했다. 게다가 처가 허리뼈가 부러지는 화까지 당하고 보니 곤난이 극에 달했던것이다. 장국도가 이같이 생황의 질곡에 빠져 헤매치고있을 때 미국의 인구기구에서 그를 찾아간것이다. 장국도가 장기간 중국공산당에서 주요한 책임을 맡고있었으니 그가 자신이 격고 지내온 그 단락의 력사를 회고하여 총결한다면 상당한 연구가치가 잇을것 같이 여겼던것이다. 하여 1961년에 미국 칸사스대학명인연구쎈터에서 한 연구원이 장국도를 찾아와 그보고 원고료로 명인쎈터에서 매월 향항돈 200원씩 지불할테니 회억록을 써내라고 약속한것이다. 1966년에 향항의 <<明報月刊>>은 그가 쓴 회억록의 판권을 사들이였다. 하여 그 글은 <<나의 회억>>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련재되였고 후에는 한데묶어서 출판했다. 명인쎈터의 위탁을 받고 회억록을 쓰면서부터 장국도는 미국정부의 주의를 일으켰다. 미국정부로 놓고 보면 장국도가 일찍이 정치중심을 떠났고 지어는 정치를 탈리했다고 볼수 있지만 그는 신분이 특수하길래 중국공산당조기의 력사에 대한 료해가 매우깊거니와 중국조기의 정책이 집행된 정황에 대해서 아주 익숙할것이다. 뿐만아니라 그가 장기간 중공의 지도자들과 교제하였기에 그들의 성격을 잘알고있을것이였다. 하기에 장국도가 그것을 제공해준다면 미국이 중국대륙의 정치국세를 료해함에 참고할 가치가 있는것이다. 하여 미국은 20세기 60년대부터 장국도를 찾아 중국대륙의 시사정치를 분석했던것이다. 1966년에 \"문혁\"이 폭발했다. 그후부터 10년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령사관의 외교인원은 장국도를 방문하기시작했다. 그러다 장국도가 향항에 있지 못하고 곧 떠나게 되니 미국방면의 상관인원들은 그를 다시금 방문하여 그가 \"문혁\"에 대해서 분석판단하게했던것이다. 미국정부비밀문건(1968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령사관이 대만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과 도꾜에 주재하는 미국대사관에 넘겨 정부밀금문건으로 된 항공문건, 항건호 A―819. 편호 POL 1―3 HK/IVR S/S-053-. \"解密檔案參考系統\")에 보면 채방때 장국도는 자기의 견해를 털어놓았는데 정황을 잊은 부분도 잇고 모욕적인 언사를 쓴데도있지만 어떤 추정은 매우 선견지명이있는것이다. 특히 미국측에서 박절히 알려고하는 모택동이 \"문혁\"을 발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와 그것이 일후에 어떻게 번지게 될 것인가 하는 예측에 대해서 장국도는 자기분석을 한 것이다. 그는 모택동이 \"문혁\"을 발동하게 된 것은 두가지고려가 잇었기 때문이라면서 하나는 철학면의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권력면의 사고였는데 주요하게는 전자라했다. 모택동을 대함에 있어서 장국도는 복잡한 심정이였다. 두 사람은 일찍이 5.4운동시기부터 서로알게되여 함게 중공1차대회에 참가한것이고 그 후에는 장기간 쏘베트구역의 중임을 떼여맡고 사업한것이다. 두사람은 몇십년전 장정의 간고한 시련도 겪었다. 어젯날의 동지였던 모택동에 대해서 장국도는 그가 초인간적인 매력과 정치능력을 갖고있지만 농민식의 사회주의자라했다. 농민식의 사회주의자이기에 모택동은 평등에 대한 일조의 갈망이 크고 자기가 세우는 정권에 그것이 이루어지지않고 심지어 그반면의 추세로 돌아질 때에는 시간이 갈수록 박절감을 더 느끼고 비상적인 격렬한 행동으로서 그 목적을 이루려한다면서 모택동이 바로 \"문혁\"을 일으킨 원인이 \"수정주의를 방지\"방지하기 위해서라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문혁\"을 일으켜 비록 류소기, 등소평을 내리떨구기는 했지만 방식을 좀 다르게 할 뿐 투재은 의연히 존재할것이라했다. 모택동은 \"문혁\"을 통해 최고권력을 보유했지만 주요목적을 이루지 못한것이라했다. 장국도는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모택동은 \"문혁\"의 우수한 책략대사이긴해도 전략가는 아닌것이다. 그는 초월성적인 주제를 구비하여 그것을 수립할 수 없거니와 끝까지 관철할 수도 없는것이다. \"문혁\"당중에 모택동은 늘 정책과 책략사이에 왓다갓다 흔들리는데 그는 늘 하나의 계획으로 목표를 이루려고 시도하면서 동시에 늘 어떤 정서의 영향을 받아 모험적이고도 희극적인 행동을 채취하는 것이다. 장국도는 미국사람에게 알려주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의연히 최고권력을 잡기는하지만 그가 전면적으로 틀어쥐겠는지는 의심이 간다면서 혹은 림표는 아니더라도 다른사람이 그를 기만하는 일이 있으리라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계속 \"혁명\"의 길을 걸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효과를 잃을것이고 처은에 설계햇던 목표를 이루지도 못할것이라했다. 미국사람들이 몹시 료해하고싶어하는 모택동의 후계자 림표에 대해서 장국도는 수완이 있고 야심이 발발한 그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으며 함께 사업하기 어려울것이라했다. 림표가 후계자로 뽑히게 된 것이 주요하게는 그가 모택동의 오랜부하로서 오래동안 그한테 충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림표는 모ㅓ택동과 같은 매력과 정치상 천부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것이다. 림표가 만일 등극하게 되면 수선먼저 군사방면과 군대의 리익부터 돌보자고 할 것이라고 장극도는 추측하면서 소화, 양성무, 라서경을 보호하지 못한 사실을 말했다. 림표는 정치세력이 든든치못하고 군대의 힘이 쇠약했길래 그런 사람들이 \"문화대혁명\"이 발동되자 분분히 타도되엿다는 것이다. 장국도의 눈에는 그들 다가 림표를 지지하는 자로 보였던것이다. 장국도는 림표의 권력이 좀 약하기는 했지만 \"문혁\"이 발동된 첫 두해사이 군대의 작용을 보면 모택동이 국면을 온정시켜보자던 처음의 의도를 춸씬 초과한것이라했다. 군대의 지지로 하여 모택동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타도하기 매우 어렵게되엿던것이다. 그렇다고 모택동이 군대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어 예기했던 이르자는것은 그야말로 이루기 어려운 일이라고 장국도는 말했다. 그런것들을 내놓고 미국사람들은 또한 \"문혁\"시기 중국대륙의 내정외교가 어느쪽으로 갈 것인가, 특히는 문혁위원회와 같은 그런 새형의 조직에 대해서 매우흥미를 가졌던것이다. 장국도는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혁명위원회는 우점을 더 갖고있다면서 그것은 바로 단일한 실체인 혁명위원회를 통해 당과 정부가 갈라지는 현상을 피면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모종의 정도에서 혁명위원회가 그러한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장국도는 이 조직이 장기적으로 가동되여 효력을 낼지는 모르겠다면서 의심했다. 그것은 당조직을 다시금 건설해서 혁명위원회에 하나의 핵심을 제공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당조직을 다시금 건설하자면 더욱히는 이전에 당무를 주관해 온 사람에게 이뢰해야 하는데 이를 테면 진운(陳云)과 같은 사람이라했다. 허나 장국도는 이같이 새로 건설한다는것은 매우 성공하기 어려운일이라는거다.그것은 모택동이 \"문혁\"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가봐 근심하기때문이였다. 따라서 그가 찾아낸 그 \"문혁\"이후에 일어난 \"신선한 혈액\"은 당이 수요하는 은정과 지도자를 제공하기 힘든것이다. 사실이 이러했기에 장국도는 \"문혁\"기간에는 당조직이 의연히 혼란한 상태에 빠져서 이전처럼 규률성과 권위성을 갖추기는 상당히 어려울것이라 추측했다. \"문혁\"시기 중국대륙의 외교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해서 장국도는 홍색중국이 확장을 기도하리라고 너무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했다. 그것은 \"문혁\"이래 모택동의 외교책략은 줄곧 계속되고있는바 그 례를 들면 쏘련에서 체코스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 중국은 쏘련이 사회주의국의 명성을 대단히 나쁘게 만들었다고 견책한것 같은 것이다. 목전 국내의 인소가 국외의 인소보다 현저히 크기는 하지만 모택동이나 기타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제관계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있는 것이다. 지금은 외교사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것이다. 지어 중쏘모순과 월남눈제마저 옆에다 밀어놓는것이다. 때문에 장국도는 기타의 국가, 더욱히는 서방국가와 거래할 시에는 모택동이 채취하는 것이 일종의 실용주의방법이라면서 례를들것 같으면 독일련방공화국에 관신을 돌리는 것 같은것이라했다. 그것은 그 나라가 쏘련을 반대할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수요하는 자원을 갖고있으며 또한 물자를 겅급해주기도하기 때문인 것이다. 독일련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영국, 불란서같은 나라들도 중국과 우호적인 무역관계를 맺으려하는 것이다. 중국이 다시는 정치기후같은건 고려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사람이 관심하는 \"문혁\"의 추세, 특히는 모택동이 일단 죽게되면 중국의 정치국세는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장국도가 굳게믿고잇었다. 즉 모택동이 죽으면 림표가 순리롭게 권력을 이어받으리라는 것, 하지만 림표는 전치재능이 모자라기에 주은래와 좋게 손잡게 되리라는 것, 그렇게 하여야만 그의 손을 빌어 나라를 다스릴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장국도는 중국에서는 주은래가 매우좋은 관리자라면서 그는 리부춘, 리선념 등과 함께 국가사무를 잘 관리해낼것이라면서 주은래가 끄당기는대로 실력자들이 륙속 권력을 잡고는 국가를 발전시킬것이라고 단언했다. 장국도는 그와 동시에 이때에 이르러서는 \"문혁\"단체란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며 \"문혁\"에서 바라ㅗㄹ라가 지위가 높아진 \"계승자\"와 반란재간을 부렸던 조직자들은 실제상 사업능력이 퍽 모자라기에 되려 부담거리로 되어버릴것이라 했다. 장국도는 더욱 대담스레 예측했는데 그것은 모택동이 살았을적에 그의 신변에서 감싸고 돌던 격진파들인 모택동의 처 강청과 진백달, 강생 등은 재빨리 지위를 잃음과 함께 정치영향을 잃고말것이라 했다. 장국도의 눈에 강생은 범속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책과 경제를 통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장국도는 그같은 격진적인 현임지도자들이 세력을 잃은 후이며 중국정치국세에는 가능하게 \"林 ←→ 周\"합작형식이 나타나 국가의 평온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면서 실력가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시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국도는 말했다. 타도되였던 일부 사람에 대해서도 례를 들면 류소기, 등소평 등등도 기회를 타 다시금 오를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자면 그들처럼 경험이 있고 조직능력이 있는 사람이 잇어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국도의 분석을 다 들은 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총령사관의 관원은 흡족해하면서 돌라갓다. 며칠 후, 이번의 방문담화기록을 정리하여 대만에 주재하는 미국의 대북 \"대사관\"과 동경에 주재하는 대사관에 보내였으며 그런후에는 미국국내의 유관부문에도 보냈다. 방문전에 장국도부부는 이미 향항을 떠나기로 작정했던것이다. 1968년은 시끄러운 일이 빈번한 해였다. 그해의 5월에 불란서에서 \"5월폭풍\"이 폭발했고 금방지내보낸 1967년의 \"67폭픙\"에 향항은 의연히 인심이 황황하면서 세상물정이 흉흉했던것이다. 중국공산당의 반역자몸이였던 장국도는 의심스러운 폭풍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멀리 카나다에 이민으로 간 큰아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카나다의 토론토에서 큰아들과 함께 얼마간을 지낸 장국도는 아들이 경제상 부모를 부양하기 어려워함을 알고는 카나다의 무료료양원에 들어갔다.1976년도의 어느하루 79세에 이른 장국도는 돌연스레 중풍에 걸려 그만 반신불수로 되고말았다. 하여 그는 토론토교외에 있는 로인병원으로 들어간것인데 병원은 환경이 매우좋지 않았다. 의사와 호사가 적어서 병자가 즉시 간호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7,8평방밖에 안되는 협착한 병실에 장국도혼자면 몰라도 다른 한 외국로인과 같이 들어 아주 탐탐했다. 겨울이 돌아왔다. 토론토의 밤에 찬바람이 매짜게 몰아쳤다. 병원은 난방시스템이 제대로되지 않아서 말이 아니였다. 장국도는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구토를 하면서도 자기가 갖고간 탄자로 얼어드는 몸을 감는수밖에 없었다. 1979년 12월 12월 2일, 82세고령에 이른 장국도는 얼어드는 몸에 겨우겨우 초인종을 눌렀다. 하건만 호사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이틑날 새벽 5시에 장국도는 갑작스레 두시간이나 심한 구토를 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인사불성이 되고말았다. 기다리던 호사와 의사가 왓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랬다. 그가 종말을 예측하기 어려워했던 중국대륙의 \"문화대혁명\"은 3년전에 이미 끝났던것이다.                   
96    음지에 묻힌 비밀(59) 댓글:  조회:4169  추천:19  2011-04-02
                   음지에 묻힌 비밀(59)                        서향전을 용장이라 무함한 \"2월역류\"의내막      1967년 2월 8일부터 시작하여 주은래는 회인당(懷仁堂)에서 중앙정치국의 만나는 회의를 열었는데 유관책임자들을 참가시켰다.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로는 주은래, 리부춘, 진의, 엽검영, 서향전, 섭영전, 담진림, 리선념, 여추리, 곡목, 진백달, 강생, 장춘교, 요문원, 왕력, 관봉 등이였다. 주요하게는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할 문제를 연구하자는 것이였다. 회의는 \"문화대혁명\"을 당이 령도해야하는가, 로간부들을 모조리 타도해야하는가 타도하지 말아야하는가, 하는 등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로일대의 무산계급혁명가와 진백달, 강생무리가 날카롭게 맛서서 투쟁이 격렬했다. 9일날 회의에 진백달은 철직당한 전군문혁조장(全軍文革組長) 류지견(劉志堅)은 반역자라고 무함했다. 류지견의 정황에 대해서는 서향전이 잘알고있는 것이다. 그는 소치는 목동출신인바 어려서 홍군에 참가한것이다. 홍군이 장정을 하면서 천서(川西)에서 1방면군과 4방면군이 회사할적에 서향전은 그를 알게되엿던것이다. 그는 함께 항일전쟁을 했다. 기남(冀南)에서 있은 한차례의 전투에서 류지견은 부상당해 그만 적에게 포로되였다. 그런것을 지하당에서 알려주어 기남부대책임자는 정보를 받자 즉시 부대를 조직하여 매복하였다가 압송해가는 그를 중간에서 빼앗아낸것이다. 서향전은 그당시의 정황이 이러했다는것을 알려주고나서 긍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나는 병사를 거느리고 싸운 사람이요. 그의 일을 내가 왜 모를가? 그는 변절자가 아니요!\" 진백달은 무지막지하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류지견이 변절한 안건은 이미 결정했으니 고칠수 없소.\" 서향전은 격분하여 질문했다. \"당신은 왜 그모양이요, 증거도 없어갖고 결정하다니!\" 서향전과 진백달사이에 쟁론이 붙었다. 두 번째였다. 1월중순의 어느날, 총후근부의 부분적군중이 문밖을 세볍으로 둘러싸고는 벗티였다. 서향전을 투쟁하겠으니 나오라는 것이였다. 후에 진백달이 와서야 그들은 물러갔다. 진백달은 서향전을 나무렸다. 서향전은 분이 치밀어 내쏘았다. \"아니, 왜 돌려보냈는가? 그 전투조직의 사람들은 제 몸이 어는걸 두려워하지 않는것 같은데 그냥 벗텨보게 놔둘게지 왜서?\" 이에 진백달이 대꾸했다. \"난 자네를 보호하자는거요.\" 서향전은 쓰거워했다. \"당신이 날 보호하지 않아도 돼.\" 그날 그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다가 갈라졌다. 2월 11일 오후회의때였다. 엽검영이 강생, 진백달, 장추교패거리를 향해 질문했다. \"당신들은 당을 혼란하게 만들고 정부를 혼란하게 만들고 공장과 농촌을 혼란하게 만들고서도 모자라 이제는 그래 꼭 군대까지 혼란하게 만들어볼 참인가?\" 서향전은 격분하여 상을 쳤다. \"군대는 혁명의 기둥이요. 당신들은 그래 군대를 요구하는가 하지 않는가? 요구하지 않는다면 난 안할테다!\" 두 오랜원수는 도리여 함치여 저쪽과 끝까지 론쟁했는데 그들의 강개한 부르짖음에 다른 동지들은 무언의 지지를 표시했다. 2월 16일에 계속하여 만나는 회의를 열었는데 내놓은문제 역시 어떻게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겠는가 하는 것이였다. 한데 의정과는 다르게 이 회의는 전보다 투쟁이 더 격렬했다. 처음에는 담진림이 장춘교보고 진부현(陳不顯)을 보호하라했다. 이에 장춘교는 돌아가 군중과 얘기해봐야겠다면서 밀었다. 담진림은 노하여 큰소리로 질문했다. \"말끝마다 군중, 군중.....당의 령도가 있지 않는가! 당신들은 당의 령도를 바라지 않는구만. 하루종을 그저 군중이자신이 자신을 해방한다느니 자신이 자신을 교육한다느니 자신이 혁명을 한다는데 대체 무슨놈의 물건짝이요? 그게 바로 형이상학이 아닌가!\" \"당신들의 목적은 로간부들을 혼내우자는거고 하나한 없새자는 거고.... 마지막에는 다 없애자는게 아닌가. 로간부들을 하나하나 혼쌀내우니 40년을 혁명해서 집과 가족을 잃고 처자가 흩어지고마는구만.\" \" \'검은 5류\'라니, 고관의 자제들을 왜 말을 못하게 하는가? 쩍하면 고관의 자제들을 붙잡아내니 이게 그래 반동적인 혈통론이 아니고 뭔가? 이게 그래 형이상학이 아니고 뭔가말이요?\" 의분이 끓어오른 담진림은 점점 더 격해가는 목소리로 만화식의 <<군추도(群醜圖>>를 그려내여 국가와 군대와 지방정부의 100명지도자들을 추악하게 만들어놓고는 기고만장하여 한창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날뛰는 청화대학의 싸움대장 괴대부(蒯大富)를 욕했다. \"괴대부, 그놈은 무슨 물건짝인가? 반혁명이야! <백추도>를 만들어냈지. 그자식은 로간부들을 모조리 때려엎자고든단말이요.\" 그는 또 말했다. \"이번은 당력사상 제일 잔혹하구만. 그 어느거든 초과한단말이요.\" \"강청은 나를 반혁명이라면서 혼쌀내우자고 들지, 앞에다 세워놓고 직접!... 난 그녀가 보호하지 않아도 돼! 나는 당을 위해 사업하는게지 그녀를 위해 사업하는건아니야.\" 담진림은 말할수록 분이 더 끓어 퇴장하려고 문건과 옷을 쥐면서 내뱉었다. \"당신들이나 하오. 난 안할테요!\" \"어디 머리를 떼보라지. 감옥에다 집어넣겠으면 넣으라지, 당적을 긁는대도 끝까지 해볼테다!\" 주은래가 그를 돌아서라했다. 진의도 입을 열었다. \"가지마오, 여기서 투쟁해야지!\" 하고는 다음말을 이었다. \"이자식들이 올라와서 수정주의를 하는거야.\"하고나서 그는 연안정풍때 자기와 주은래가 혼쌀먹은 일을 회상했다. 여추리도 주먹으로 상을 치며 말했다. \"로간부들을 이렇게 대하는 법이 어디있는가! 계위(計委)에서 잘못을 빌지 않으면 난 검토를 하지 않을테다!\" 사부치가 변명쪼로 중앙문혁은 담진림을 보호한다고했다. 리선념이 입을 열었다. \"당신, 얼버무리지 말라구!\"해놓고는 말했다. \"지금 전국적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판이요. 반동조직이라는게 뭐요. 이제 17살먹은 애마저 반혁명이 되는가 그래?\" \"<붉은기>13기사론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요란스레 대규모적인 군중이 두갈래로선투쟁을 하고 또 그 무슨놈의 \'련계\'를 한다면서 로간부는 다 내리떨구는 판이 아닌가말이요.\" \"내가 보건대는 10월 5일 긴급지시가 소극적인 면이 많은것 같소.\" 회의에 참석한 장춘교, 요문원, 왕력 등은 마치 피고석에 앉기라도한것 같이 한마디 대꾸도 더 못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바삐 조어대(釣魚臺)로 달려가 강청에게 회의정황을 회보했다. 강청은 그들이 서술하기도 하고 논의를 하기도 하는 보고를 듣고나서 펄펄 뛰였다. \"이건 새로운 한막의 로선투쟁이야. 진의, 담진림, 서향전은 착오로선의 대표고 엽검영, 리선념, 여추리는 착오로선을 부추기고있는거야.\" 하고나서 그녀는 친히 모택동판공실에다 전화를 걸어 장춘교와 요문원이 보고하러 가니 모주석께서는 밤중이라도 접견하기 바란다고했다. 장춘교와 요문원이 찾아가 보고를 하니 모택동은 만면에 웃음을 바를 뿐이였다. 두 사람은 머리악을 써봤자 모택동의 심리를 알아맞힐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장춘교가 회의중에 진의가 연안정풍때의 문제를 말했다고 하니 모택동은 돌연히 낯색을 고치고 말했다. \"뭐라, 그래 연안정풍이 틀렸단말인가? 또 왕명을 불러올 참인가?\" 장춘교는 그제야 김장이 풀리였다. 2월 18일 오전, 강청은 왕력을 데리고 림표를 찾아가 그한테 회인당에서 회의한 정황과 모택동의 태도를 말했다. 림표가 말했다. \"서향전은 해방군을 대표하지 못한다니까.\" 2월 18일밤부터 이틑날 새벽까지 모택동은 회의를 소집하고는 울화통이 터져 노발대발했다. \"문화대혁명을 부인하자구, 그렇게는 못해! 회인당에서 떠든건 바로 자본주의를 복벽하는것이다. 류(류소기), 등(등소평)을 올라오게해봐, 나는 림표와 같이 남하하여 전강산에서 유격전을 할테다. 진백달, 강청을 총살해버려! 강생이 군대를 맡고! 중앙문혁소조를 개조해 진의가 조장을 맞고 여추리가 조원이 돼보지. 그래서 모자라면 왕명, 장국도를 불러와봐. 그래도 힘이 모자라면 미국 쏘련을 함께 청해와 봐\" 회의는 진의, 담진림, 서향전에게 \"청가를 주어검토\"하게했거니와 장차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그들 셋을 비평하기로했다. 2월 25일부터 3월 18일가지 사이에 회인당서 계속하여 여러차의 회의를 열었는데 명칭은 \"정치국생활회의\"였지만 기실은 진의, 담진림, 서향전과 여러사람들을 비판하는 회의였다. 림표, 강청무리는 로일대의 혁명가들이 그릇된 일을 발견하고 애써 바로잡으려 한 그 일을 \"2월역류\"라 모독하면서 서향전을 그 역류의 용장이라 중상했다 이른바 \"2월역류\"란 말이 되지도않는 역류였는바 그것이 실은 \"문화대혁명\"이 점점 더 심하게 란장판이 돼가는 꼴을 보고 몇몇 혁명가들이 표연히 일어나 바로잡으려했으니 의로운 행동이였던것이다. 하건만 모택동이 노발대발하고 림표가 손벽을 맞춰주니 형세는 역전되였던것이다. 서향전을 비롯한 그 몇사람은 진백달, 강생, 강청무리의 비판을 받았다. 진백달이 말했다. \"서향전은 첫포를 쏜게지.\" 진백달, 그들은 절취한 권리와 권력으로 모택동의 의지대로 전국에다 \"일체를 타도\"하고 \"전면내전\"을 선동하는 한편 다른한면으로는 로간부가 부동한 의견을 감히 발표하는것을 죄로 치면서 \"2월역류\"는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반대한 것\"이라느니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반대하는 것\"이라느니 \"모주석을 반대한것\"라느니 햇거니와 \"한줌도 못되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반역자, 특무를 보호한다\"느니 어쩐다느니했다. 공산당의 민주원칙은 여지없이 짓밟히여 일장의 위기가 닥쳣던것이다. 1967년 3월 29일 밤, 중앙문혁의 한차례의 회의에서 서향전이 다시는 전군문혁의 사업을 관계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선군문혁의 사업은 소화(蕭華)가 장악하게되였다. 4월 6일날 밤, 주은래는 인민대회당에서 몇몇 오랜원수들을 만나 \"삼지량군(三支兩軍)\"이 갑작스레 제기되니 사상준비가 없고 경험도 없길래 착오를 면하기 어렵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군위확대회의를 한번 열어 주요하게는 전한단락의 \"3지량군\"사업의 경험교훈을 찾자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의 책임을 추궁하지 말고 오랜원수와 여러분이 함께 회의를 열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회의를 림표, 강청, 진백달, 강생의 무리가 조절하길래 몇몇의 오랜원수들은 회의절차는 물론 지어는 회의일자마저도 몰랐다. 4월 7일 오후, 서향전은 돌연스레 통지를 받았는데 그더러 4월 8일오후 대회에 나서서 사업한것을 검사하라는것이였다. 강생 등은 직접나서서 각소조에다 서향전을 비판하라고 불을 질렀던 것이다. 서향전은 준비를 하다보니 검사가 11일로 늦어졌다. 그는 그날오후에 검사를 했다. 저녁때가 되니 그를 비판하는 방송차가 소란스레 큰길에서 활개쳤고 삐라와 만화들이 벽에 숱해나붙기 시작했다. 1967년 4월 16일, 17일. 측회학원(測繪學院)의 \"반란파\"가 두 번이나 서향전의 집을 들추었다. 그들은 담장을 뛰여넘기도하고 문을 마스기도하면서 집에 뒤여들어서는 제멋대로 수색했다. 서향전원수가 평상시에 읽어보던 서적과 문건과 몇십년간을 보존해온 자료와 편지 그리고 작전일지들을 모두 걷어갔다. 다행스레도 엽검영원수가 한 반란파가 서향전의 집을 수색하리라 죄치는 소리를 잡아듣고는 바로 한시간전에 회의를 하니 속히오라고 불럿기에 서향전은 그 횡포한 자들의 손에 잡히지 않았던것이다. 잔혹한 박해, 무정한 타격은 온 중국땅에서 계속되면서 점점 더 심하게 번지고있었다. 1967년 7월 20일에 무한에서 \"720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반란파\"가 무한사건의 \"검은 배후조종자\"는 서향전이고 서향전은 또한 진재도(陳再道)의 \"검은배후조종자\"이기도하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북경은 물론 전국각지 스피카에서 \"진재도, 종한화를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높이 울려퍼졌고 거폭의 표어들이 나붙은것이다. 이른바 수도 三 軍의 \"무산계급혁명파\"는 진재도(陳再道), 종한화(鐘漢華), 우회룡(牛懷龍), 채병신(蔡炳臣), 파방정(巴方挺)을 타도하는 동시에 서향전도 꼭 타도해야한다고 했다. 림표의 처 엽군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三軍의 \"무산계급혁명파\"책임자들을 보고 \"서향전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7월 29일밤에 청화대학의 싸움대장 괴대부패 수십명이 서향전의 집에 세 번째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문건이 들어있는 철궤와 편지, 사진같은것을 걷어갔고 가면서 벽, 길, 집안바닥이며 지어는 차그릇과 력서장에마저 \"서향전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란잡하게 써놓았다. 서향전의 비서는 이 일을 신속히 전화로 총리숙직실에 알리였다. 주은래는 이 일을 알자 인차 지시를 내렸다. (1) 들어온 인원은 모두 즉시 물러갈 것. (2) 서향전가속의 자녀와 사업인원의 안전을 보증할 것. (3) 물건을 일률로 되돌릴것. 빼앗아 간 문건괴와 자료는 위수구(衛戍區)가 책임지고 청화대학에 가 전부 찾아올 것. 주총리의 그 세가지 지시가 있었기에 서향전의 가속과 사업일군들은 위험에서 벗어났고 빼앗기운 문건과 편지와 사진같은 것들을 모두 잃지 않고 되찾을 수 잇었던것이다. 하지만 피면할 수 없이 강박되는 자아검사와 투쟁에 서향전의 몸은 점점 쇠약해졋다. 무슨 고생인들 하지 않았으랴, 초지를 세 번이나 넘나들며 사웠던 그는 그야말로 굴할줄을 모르는 용장이였다. 거치고 사나운 력사의 파도를 헤쳐온 그는 곤난앞에 머리숙여본적이라곤 없었다. 그는 강직한 성격 그대로 자녀와 신변의 사업일군을 교육했다. \"너희들은 무서워말라. 큰일은 없을것이다. 먹을건 먹고 잠은 자야한다. 내가 보건대 하늘이 무너질것 같지는 않다!\" 하면서도 안타까운것은 아무리 검사를 해봐야 자기는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리해할 수 없는 그것이였다. 전군문혁조장직을 맡으면서 방향이니 로선이니하면서 \"착오\"를 졋다는데 도무지 접수되지 않았다. 아예 접수할수도 없었다. 하여 그는 심한 고뇌에 빠지군했다. 1067년 \"8.1\"은 중국인민해방군 40주년 건군절이였다. 인민해방군의 원수로서 이날이 다가올수록 자연히 마음의 평형을 잡기 어려웠다. 풍랑을 함께 헤쳐온 전우들을 몹시 만나고싶었다. 한데 \"로선착오를 범했다\"느니 \"2월역류의 맹장\"이라느니 하니... 이쪽에서 본인이 생각한것과 마찬가지로 건군절이 돌아오자 그가 초대회에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주은래는 림표, 강청무리와 겨룸을 한것이다. 림표, 강청이 서향전을 초대하는것을 극력 동의하지 않자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청시했다. 7월 31일 오후 5시좌우에 엽검영이 서향전의 집을 찾아와 서향전보고 함께 초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라했다. 그러면서 주은래가 하는 말이 대회에 참가하는 명단을 놓고 옹근 반나절이나 반대측과 싱갱이질을 한거라고 알려주었다. 서향전은 주은래의 처사가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마웠다. 엽검영은 오면서 리발사까지 하나 데리고왔다. 서향전이 방금 리발을 다하자 아니나다를가, 주은래한테서 전화통지가 왔다.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이번연회에는 주덕, 서향전, 한선초 역시 출석한다고 알리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외의 일이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주은래가 친히 유관부문에 지시를 내려 서향전이 서산서부터 인민댛뢰당에 이르는 구간의 로선경비를 엄하게 하겠노라 알리였다. 과연 고마웠다! 인민대회당초대에 모이는 그날 주은래는 서향전이 집을 나와 오는 사이 전화로 그의 처와 출발했는가고 물었거니와 대회당문앞에 나와 친히 영접하기도했다. 서향전이 초대회에 출석한것은 모택동의 \"보호\"를 받는다는것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2월역류\"성원이 된것이고 의연히 비판을 받고있는 것이다. 사부치가 \"반란파\"보고 말했던것이다. \"우에서 보호는 하지만 너희들은 너희들대로 하라.\" 서향전앞으로 오던 중요한 문건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거니와 회의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정식으로 철직을 당하지 않았을 뿐 \"문혁조장\"이란건 이름뿐 실권이 없는 직위였다. 9월 12일, 서향전은 엽검영, 섭영진 등과 상의하여 모택동에게 면직시켜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비준하지 않았다. 그러니 서향전은 이름을 그냥 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으로 \"2월역류\"를 비판하는 형세를 일으켰다. 1968년 3월 24일, 림표와 강청은 사람을 깜짝놀라게 만드는 \"양,여사건\"을 조작해냈다. 이날밤, 인민대회당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림표가 출면하여 강화했다. 그는 양성무(楊成武), 여립금(余立金), 박숭벽(博崇碧)을 공개비판했다. 이번대회는 그가 알심들여 짠 것이였다. 중앙의 만나는 회의사람들은 주석대에 앉고 이른바 \"2월역류\"에 든 사람들은 무대아래석에 앉아서 비판을 듣게한 것이다. 림표는 강화에서 \"2월역류\"를 빗대고 욕했다. 강생은 강화에서 \"양,여, 박의 뒷심은 \'2월역류\'라했다. 진백달은 \"2월역류\"는 \"문화대혁명\"이 두계급, 두갈래로선투쟁의 다섯 번째 회합이라했다. 그들은 양성무를 붙잡느라고 옆집의 전화선마저 끊엇을뿐만아니라 보초병마저 바꾸었던것이다.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중공8기12중회의에서 본래는 \"9차대회\"에 당장을 수개할 일을 놓고 토론하려했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여 3일만에 림표의 패거리가 돌연스레 회의의 방향을 오랜통수들을 비판하는 쪽으로 확 돌려버렸다. 그들은 \"2월역류\"에 관계되였던 오랜 통수들을 각소조에 나누어놓아 각각 공격, 투쟁받게 하면서 억압적으로 증거를 받아내려했다. 서향전은 제5조에 갔는데 거기 \"西北組\"의 황영승(黃永勝), 구회작(邱會作) 등이 앞장서서 서향전을 공격했던것이다. 어떤사람은 괴상야릇한 태도였고 어떤 사람은 대성질문했다. \"너 서향전이 솔직하지 않았다가는 홍위병을 불러온다는걸 알라!\" 하면서 그가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대채에 보내여 빈하중농앞에서 제대로 말하게 만들테다.\" 어떤 사람은 또 \"小紅書\"를 내들고 서향전앞에서 어록을 읽기도했다. 회의분위기는 위협과 공갈로 가득찻다. 서향전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한마디 대구했다. \"착오가 있다면 대중의 비평을 받아야하는데 실사구시해야하는게 아닌가!\"   그가 더더욱 생각지 않은것은 8계12중전회가 잇은지 9일만에 돌연스레 보내온 회의\"간보\"소식이였다. 그것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없이 죄를 날조하여 남에게 씌운 그것이였다. 서향전의 부인 황걸(黃杰)을 반역자라 무함하고 섭영진의 부인 장서화(張瑞華)도 역시 반역자라고 한 것이다. 하여 서향전은 이번의 이 투쟁은 상상하기 어려울지경 엄혹하다는것을 한번 더 심심히 느꼈다. 그는 지난때의 일인 악예완(鄂豫완)투쟁년대를 상기했다. 장국도(張國燾)가 숙반을 확대하면서 무함랗 자료를 찾아내느라 \"개조파\"라는 죄명을 씌워 그의 애인 정훈선(程訓宣)을 체포하여서는 때리면서 강제승인을 받으려다가 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그를 살해하고만것이다., 35년후에 그같은 극이 재연되고있으니 서향전은 가슴이 터질지경 미여졌다. 아 어쩌면 이럴수가있는가, 어쩌면?... 그는 황걸을 료해하고 황걸을 믿고있었다. 그녀는 1928년에 입당하여 간고한 투쟁속에서 고험을 이겨낸 공산당원이였다. 50여년간의 공산당사업을 위하여 성심을 다했건만 이제와서는 있지도않는 죄명을 뒤집어 씌우니 그래 이것이 혁명을 해온 우리들의 운명이란말인가? 이같은 돌연적인 타격에 가슴이 몹시 아파난 서향전과 황걸은 한결 랭정해졌다. 그야말로 한심한 세상이였다. 이 억울함을 어디다 하소연한단말인가? 두 로혁명가는 문을 걷어닫고 탄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향전은 격노하여 황걸과 말했다. \"우리 결혼한지 오래되여 서로 잘알고있는건데 그들이 당신을 \'반역자\'라하니 이게 대체 어찌된일인가말이요?\" 황걸은 속으로 야심을 품은 그자들이 서향전을 타도하기 위한 조건을 만드느라 꾸며댄 무함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맞히였다. 그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않히고나서 입을 열었다. \"난 절대 반역자가 아니니 조직에서 심사를 하라지. 그렇지 않으면 리혼을 하든지. 아무튼 밝히기 어려운 일에 당신을 련루시킬수야 없잖어..\" 종래로 한숨과 눈물을 모르던 서향전이였건만 처가 내던지는 이 말에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야말았다. 그야말로 목이 메이는 일이였다. 황걸 한사람만이 아니였다. 많고많은 공산당원들이 그 무슨 \"내부간첩\"이요 \"61반혁명집단\"이요 하는 근본 있지도않은 죄를 뒤집어쓴것이다. 일생동안 실사구시를 강조해온 서향전은 거짓말하는것을 제일미워하면서 그 누구든 자기앞에서는 함부로 허튼소리를 치지 못하게 한것이다. 황당무계한 론리는 진리로 될수 없다는것을 확신하고잇엇던 그는 붉은것이 검어질수는 없다면서 묵묵히 사태의 발전을 지켜보리라했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8계12중전회공보에 \"2월역류\"를 엄하게 질책하면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반대하는 것은 \"착오\"라고했다. 황영승은 총참모부에서 친히 몇몇 로통수들에 대한 비판을 조직하면서 로통수판공실의 사업인원들이 일떠나 일떠나 적발하고 계선을 가르라고 추기였다. 하여 서향전반공실의 당지부는 서향전부부를 비판하게 허락해달라는 보고서를 우에다 써올렸다. 주은래는 보고서를 받아보고나서 \"너무긴장하게 만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즉시 모택동에게 넘겼다. 1969년 1월 3일, 모택동이 마침내 지시를 내렸다. \"소유의 \'2월역류\'에 유관되는 동지와 가속을 비판하지 못하며 그들과 관계를 잘할 것\" 림표역시 모택동의 지시곁에다 자기의 지시를 내렸다. \"주석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함. 서향전동지의 신체건강을 희망하며 새로운 장애를 제조하지 말것.\" 림표의 마지막말에 서향전은 명백히 깨달았다. 고스란히 물러서서 다시는 반상적인 의견을 내놓지 말라 이제다시그런다면 \"새로운 장애를 제조\"하여 죄를 씌우리라는 으름장이였다. 한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서향전은 진리는 영원히 넘어가지 않는다고 확신하고있었던것이다.
95    음지에 묻힌 비밀(58) 댓글:  조회:4171  추천:21  2011-04-01
          음지에 묻힌 비밀(58)                               (1)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시말                               (2) 류소기의 죽음과 주은래의 작용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시말    7천명대회는 건국이래 12년간, 특히는 1958년이래 4년간의 성적과 경험교훈을 총결지었는데 그것은 전당이 충분히 토론한 기초상에서 인식을 같게 한 것이였다. 하지만 그 회의는 모택동과 류소기사이에 분기를 남긴 것이다.    민주개혁시기에 모택동과 류소기 한 사람은 근거지에서 한 사람은 백색구역에서 10여년을 고생스레 싸우면서 각기 효과적인 혁명리론과 경험을 찾아냄으로 하여 혁명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두 령역의 대표인물로 된 그 두 사람은 마침내 진주가 한데 꿰이고 옥이 한데 모이듯 합치여 서로 흠상하면서 손잡게 되었던 것이다.    새중국이 성립된 후, 사회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제기되였는데 모택동이나 류소기나를 물론하고 그것은 전당을 놓고 보면 다가 생생한 것이였다. 하기는 쏘련의 경험이나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혁명시기의 경험을 봐서도 그대로 따라한다는것은 절대되지 않는 것이였다. 그러니 자기나라의 실정에 맞는 길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매우 간고한 임무였다.    경험을 놓고 담화하다보면 자연히 타국의 경험을 거들게 되는데 실현키 어려운 탐구과정에 두 사람은 자연히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군 했다. 그것은 불과피면적이고 실상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맨먼저는 산서농업합작화문제였고 그 다음에는 신민주주의질서문제였으며 거기에 이어서는 사회주의사회의 주요모순 등등이였는데 여기서 일일이 진술하지 않겠다. 상술한 부동한 의견들을 보면 다가 사업이 순리로울 때 생긴 것이였기에 그것이 개인의 책임에 걸려드는건 아니였거니와 그어떤 다른 기분도 아니였다. 모두가 다 새중국의 번영과 발전과 부강을 위해서였으니 의견이 맞지 않기는 해도 그것이 원한으로까지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그들 사이 서로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신임과 우의를 계속유지했던 것이다.1956년, 중공8대에서 모택동은 류소기를 제1선의 지도자로 올리밀었다. 그리고는 1959년도에 이르러서는 모택동이 주동적으로 국가주석자리를 내놓아 류소기가 이어받게 하였다. 당과 국가의 사업은 부서에 따라 서 진행되였던것이다. 한데 7천명대회에서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을 총결지으면서 정황은 달라진것이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원래의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거니와 그와는 반대로 원래부터 취약하던 국민경제가 커다란 좌절을 당해 전국의 경제가 온통 생기를 잃어 쓸쓸하게 되었거니와 수천만이나 굶어죽은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총결지어야 하는가? 전당, 나아가서 전국인민에게 어떻게 교대해야 하는가? 이는 중앙의 지도자, 더욱히는 모택동과 류소기 두 사람앞에 놓인 큰 난제였던 것이다.    “대약진”을 창시한 사람은 모택동으로서 그는 “반모진(反冒進)”을 반대하는 기초에서 그런것을 생각해 내여 발동한 것이였다. 초기에 주은래, 진운이 모험적인 전진을 반대(反冒進)했다가 모택동한테 엄한 비평을 받았다. 류소기는 모택동에게 이름이 찍히지 않았지만 역시 그의 눈에는 말하지 못하는 “허물”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한것은 그가 일찍이 “반모진”결책을 내리는 회의를 열고 장악했기 때문이다. 본래 비교적 랭정적이던 류소기였건만 “대약진”기간에 들끓는 기분에 감염되여 처음은 머리가 달아올랐던 것이다. 1958년 9월, 류소기는 강소 상숙(常熟)에 시찰을 갔다가 한 공사당위서기가 무당에 1만근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고하니 그 말을 곧이듣고 좀 더 높일 수는 없는가고 물었던 것이다. 인민“공사”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좋다고 절찬하면서 주은래, 륙정일, 등력군 등과 함께 남행하는 렬차안에서 한바탕 불어대다가 정주에 이르러는 하남성위제1서기 오지포(吳芝圃)에게 그것을 추천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루한 사례가 많다. 더만할 것 없이 류소기도 처음에는 “대약진”을 촉진시킨 작용을 논 것이다.    당연히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착오를 일찍이 규정한 것은 모택동이였다. 1958년말부터 시작해서 “좌”를 규정하면서 모택동과 류소기는  높은 지표, 높은 증구, 공급제실행, 공공식당, 공산풍, 맹탕지휘, 종합평형에 주의하지 않고 조급히 해내려는 등등의 착오를 범했다는 것을 승인했다. 구체적인 조정방법으로써 정치상에 다가 실사구시적인 경제계획을 내올것을 주장했고 성진인구(城鎭人口)를 대량적으로 정간하고 “농업60조”를 제정하며 “공업70조”와 각행각업이 자기의 조례를 제정하는 등 그리고 또한 농촌에서 적당히 집시무역을 개방하고 사원에게 적당한 자류지를 주며 사원이 가정부업을 하는 것을 허락하고 정치상 반우경착오를 범했다고 한 동지들을 평판하며 착오적인 구호들을 깨끗이 정리하면서 중앙에서 인민앞에 자아비평을 하는 등등이였다.    그러나 “좌”를 규정함에 있어서 측면으로부터 심입하여 범한 착오가 경제에 엄중한 곤난을 가져온 원인을 깊이 파고들면서 지난때의 모든 사업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금후의 방향을 조정하게 되었을 때 그들사이에는 차츰 분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례를 들면 착오원인을 규명할 때 류소기는 “인화(人禍)”라 했다. 1961년5월 30일, 류소기는 중앙공작회의에서 말했던 것이다.    “지난 몇해동안에 발생한 문제들이 도대체 천재(天災)였는가 아니면 우리들의 사업에 결점과 착오가 있어서인가? 호남농민들이 말했는데 그들은 ‘3이 천재고 7이 인화(人禍)’ 라 했다. 나는 몇 개성의 간부들과도 물어보았다. 내가 도로가(陶魯茄)동지와 물어봤더니 그가 하는 말이 사업중의 결점과 착오가 목전의 곤난을 조성한 주요원인이라 했다. 하북, 산동, 하남의 동지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다른 성들은 물어보지 않았다.    모두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전국을 놓고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지방은 천재가 중요한 원인이 되지만 그것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아닌 것이다. 대다수지방이 우리가 결함과 착오를 범한데 주요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총로선을 집행하면서, 인민공사를 조직하면서, 대약진을 조직하면서 사업상 허다한 결점과 착오를 범한 것이다. 심지어는 아주 엄중한 것이다. 최근에는 농업이 감산했을 뿐만아니라 공업생산도 떨어진 것이다. 만약 문제가 엄중하지 않다면야 어찌 이같이 감산하겠는가? 왜서 후퇴하겠는가? 그래 이런것도 하나님탓이란말인가?    우리가 지금와서 경험을 총결짖고있는데 좋은 것은 지금이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고 경험을 총결할 수 있는 것이며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로선착오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돌아서지 않고 그냥 고집부린다면 그때는 로선착오가 아니던 것이 아예 진짜로선착오로 되고마는 것이다.” 미묘한 건 이 회의에서도 모택동이 범한 착오의 원인을 말한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반하면(경제규률) 꼭 징벌을 받을것이며 우리는 그 벌을 입는 것이다. 최근 3년간 큰 징벌을 당했다. ‘사회주의는 누구든 해보지 않아서..... 쏘련의 경험은 쏘련의 경험이고 그들이 못에 채운건 그네이 못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절로 또 맛다들 것이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바 류소기의 강화와 비해 모택동은 결함과 착오를 경험이 모자라기때문이라고 미는 것이다. 사회주의건설규률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지간의 차이가 너무도 커  실로 사람을 놀리는 것이다.      7천명대회전에는 사업을 집중적이고 계통적으로 총결하지 않았기에 모택동과 류소기지간의 분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7천명 대회때는 전혀 달랐다. 중앙에서 이같이 전국 각 현위서기이상의 간부가 다 모인데서 계통적인 총결을 지어야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꼭 경제곤난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하여 착오를 범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지나간 몇 년의 사업계획 즉 형세판단을 포함하여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평가 등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느정도로 해석해야 하는가를 놓고 7천명대회에서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가 자연히 돌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감촉하지 못했다.    5년후인 1967년 2월, 모택동은 알바니아대표단 단장 아루쿠와 한토막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는데 사람들의 눈길은 곧바로 7천명대회에 돌리게 된다. 모택동이 그하고 말한 것이다.    “나는 7천명대회때 벌써 문제를 봐냈는데 수정주의가 우리를 뒤짚자고 하는 것이다.”    뚜렸한바, 그가 말한 소위 수정주의라 하는건 류소기를 가리킨 것이다.    한데 필자는 모택동의 이 말은 간단하게 가공해 낸 것임을 발견했다. 하다면 그가 대체 무엇이라 말했는가? 모택동이 아루쿠투와 담화한 기록고를 보면 이러하다.    “‘1962년 1월, 우리는 7천명 현위이상간부가 참가한 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그때 강화 한편을 했다. 내가 말했다. 수정주의가 우리를 뒤집자고 한다. 만약시 우리가 지금 중의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적어서 몇 년 몇 십년, 많아서 몇십년 중국사회는 파시쓰전정으로 변할 것이다.’ 이 강화는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내부에서 발표했다. ....문제를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모택동의 이 바람은 리유없이 생긴걸가? 그럴 수는 없다! .....모택동은 왜서 7천명대회를 돌이켜 사색했을가? 1967년 4월 12일, 강청이 부지불식간에 내던진 말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로되는 것이다. 강청이 말했던 것이다.    “모주석은 7천명대회때 분을 겨우참았다.” 이것은 류소기가 7천명대회때 확실히 모태동을 기쁘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다면 모택동의 그 “분(憤) ”이란건 어떤것이였겠는가? 7천명대회 전후의 정황을 분석해 보면 아래의 몇가지 문제를 도출해내게 되는 것이다.    우선 류소기가 장악하여 작성된 초고를 보면 여기에는 모택동과 류소기사이 교류가 잘 되지 않았음이 알리는 것이다. 당시의 형세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다. 모택동은 이에 대해서 특별히 중시한 것이다. 1961년 9월, 모택동은 로산회의때 형세가 이미 믿바닥까지 내려갔댔지만 지금은 날마다 올라간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류소기는 형세를 보는 견해가 달랐기에 모택동의 이 취지를 자기 연설의 초고에 넣지도 안았다. 하여 모택동은 그에게 불만을 품은 것이다.    류소기의 보고초고에 보면 성적과 착오를 말할 때 “대약진”이래의 성적에 대해서는 돌출하게 단독적으로 말하지 않았거니와 상반대로 결점과 착오는 모두가 “대약진”에서 온 것이라 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그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초고를 가져다 “대약진”의 성적을 12가지로 만들고 결점은 4가지로 만들었다.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모택동의 생각대로 해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류소기의 장악하에 작성되는 보고에서 “대약진”을 충분히 긍정할 것을 바랐다. 물론 류소기도 긍정은 하지만 모택동이 보기에는 긍정이 불충분하거니와 기세가 높지 않아 지어는 온통 새까만 감정을 안겨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대약진”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이 같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택동은 류소기가 쓴 초고에 의견이 많던 차 1월 27일 대회에서 구두보고를 할 때는 류소기가 모택동의 마음을 더 불쾌하게 하는 말을 한 것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감산한 주요원인이 천재가 들었기 때문이지만 어떤 지방은 천재가 아니라 사업중에 결점과 착오가 있기 때문이였다. 지난때 우리는 늘 결점, 착오와 성적을 말할 때면 손가락 한 개와 9개관계로 비유했는데 지금은 아마 그따위의 비유를 쓸것 같지 않다. .....아마 3개손가락에 7개 손가락비유가 합당할 것이다. 결함과 성적비교가 아니다. 내가 호남에 가보았는데 농민들이 말하기를 ‘3푼천재, 7푼인화’라면서 네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불복할 것이라 했다.”    “대약진”의 실패가 전국성적인 착오임에 분명한데 “세폭의 붉은기”는 왜 그냥 추켜든단말인가? 뭘 하느라고? 이 문제는 복잡한 것이였다. 전당의 인식문제로서 역시 모택동의 문제였다.      가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택동은 7천명대회기간에 확실히 류소기에 대해서 불만이 생긴것이다. 이 불만은 주요하게 류소기가 결점과 착오를 “크게”말하고 “인화”를 말하면서 지난 몇해동안의 성적은 말하지 않고 사업한 것이 온통 검게 먹칠했으며 “세폭의 붉은기”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였다. 바꾸어 말할 것 같으면 류소기는 모택동의 지도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지 않거니와 지어는 “압력”을 가하는 듯한 느낌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택동과 류소기지간의 분기가 7천명대회때 공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자극은 심각했다. 모택동이 이 기간에 분이 생기면서도 참아야 했던 원인은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실패한 원인이 확실히 자기에게 있거니와 책임을 넘길수도 회피 할 수도 없는 일이였으니 묵묵히 참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국민경제가 그야말로 암흑할 지경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어떤 문제는 실천으로 검험하는 것이니 모택동은 분이 끓어올랐지만 겉에 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소기는 어떻했는가, 대회민주기분에 고무되여 일종의 강렬한 사명감을 갖고 제가 맡은 사업을 더 대담히 억척스레 해나갔던것이다. 그의 사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개방적이 되여갔고 강화들은 점점 더 힘있고 첨예해쟀던 것이다.    7천명대회페막후 류소기가 자기의 구두회보를 정리할 적에 격동된 정서로 말했던 것이다.    “대약진의 착오는 매우 엄중하다. 이번에 경험교을 훈총결하는 건 첫 번째의 것이다. 일후에는 해마다 한번씩 돌이켜보고 총결짓군해야 겠다. 한번 총결짓고 한번 수개하고 해서 10년에 실제와 결합해서 총결해 진짜 교훈을 섭취해서 다시는 ‘대약진’과 같은 착오를 범하지 않게 해야한다.\"    그는 또 말했다.   \"력사를 보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게 되면 \'죄\'가 구성되기에 형을 받는 것이다. 내가 주석이 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   류소기가 이같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웨쳐 듣는 사람은 모두 놀랬다.     【가 첨 글】 (1)  류소기의 배짱    1966년 8월 13일, 류소기는 한차례의 회의에서 모택동과 맞다들어 해냈다. 내리떨군대도 두렵지 않다, 철직시킨대도 두렵지 않다, 감옥에 집어넣는대도 두렵지 않다, 리혼해도 두렵지 않다, 머리가 날아나도 두렵지 않다.     이에 모택동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8월 15일에 열린 8기 11중전회에서는 중앙상위에 두 번째 자리에 있었던 류소기는 8번째 자리로 내려가고 말았다. 실제상 그는 모든 직을 다 떼우고 만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비판과 투쟁이였고 발길과 주먹질이였다. 그는 1969년년에 개봉에서 참혹하게 죽고말았다.    류소기와 림표는 다가 모택동을 없애치우려했다. 류소기가 쓰려한 것은 당내의 민주주의 방법이였다. 이 방법이 시작때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은 “대약진”에 3천만이 굶어죽은게 사실이다. 이러한 력사적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더 말할 것 없이 모택동이 져야 한다. 그것은 모택동이 책임자였으니까. 로산회의에서 모택동이 비록 팽덕회를 이기기는 했지만 력사에서 그의 위신은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문화대혁명”과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였다. 그가 이때는 추앙은 받아도 속으로는 배척되여 이미 실권을 잃은 처지였다. 어떤 사람이 류소의 짝패인 등소평과 어떤 일을 모택동에게 회보해야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등소평은 내쳐두고 관계치말라했다. 이 말이 후에는 등소평의 죄상으로 되었다.    모택동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시세를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되앗아내겠는가를 궁리하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총명한 사람이여서 “대약진”의 책임으로 하여 위신이 떨어진 자기가 이제 더는 로간부들 중에는 제 시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난 십몇년간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선전매체들이 불어댄 통에 위대한 형상으로 부각되였기에 의연히 숭배하니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을 속이기는 좋은 것이였다. 그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큰 우세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하여 그는 자기의 기초를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잡고는 그들을 추겨 반란을 일으키게한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전부의 원인이 바로 이런것이다.    모택동은 이 운동을 리용하여 류소기와 그의 수많은 지지자들을 전부꺾구러뜨리고 마침내 권력을 되잡았다. 그 수단은 무자비하고 잔혹했다.    림표는 이번의 권력투쟁을 친히 잘 목격했다. 그는 이른바 당내민주란 근본 소용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드러워서는 되지 않았다. 오로지 단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헌법에 근거하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아직은 류소기의 직무를 철소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체포하고 투쟁하여 죽게했으니 그것은 철두철미한 위법이고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2).  민주제와 군주제의 구별   “손가락 9개와 1개의 문제로 사고한다”거나 “주류와 지류를 가른다”거나 “3,7로 나눈다”는 등의 론단은 모두가 주역에서 온 것이다. 력사는 파도식이다..... 중국의 성어(成語)가운데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라거나 “칠상팔하(七上八下)”라거나 “피장이 셋이 모이면 제갈량을 당한다”는 것은 다가 중국사람들이 즐기는 수자비김사유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한 개민족의 사유형식인데 3천만에 달하는 국민이 굶어죽었는데도 그 무슨 형세는 대단히 좋고 문제가 적지 않다느니 성적이 9개손가락이고 착오가 1개손가락이니 하고 허튼소리를 쳤다. 3천만의 생명이 잃어진것도 그래 손가락 하나문제란 말인가?....    미국에서 평생 병든 집승을 치료해오다가 늘그막에 귀국한 맹수의(孟獸醫)가 중국은 “대약진”때 3천만이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짐승이 굶어 그같이 떼죽음을 당했다면 리유가 서겠지만 “사람의 인소가 제일”이라면서 생명을 중히 여긴다는 국가가 아무렴 사람을 그같이 많이 굶어죽일 수가 있는가 하면서 롱담절반 진담절반 이야기를 했다.    “미국은 29년간의 경제위가 영향이 40년을 미쳐서 사람이 근 1천만이나 굶어죽었던 거요. ”    “금원제국”이라 자랑해온 미국에도 아사(餓死)가 있은건 분명하다. 그러나 들어보니 그 리유와 환경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하여 나는 다시금 사색을 모으게 된다.    (一) . 서양의 경제위기가 생기게 된 원인은 산품과잉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자본가들은 높은 리윤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롱단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많은 우유와 량식을 바다에 처넣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대약진”때 산품이 결핍하였고 량식이 긴장했다!    (二) . 미국은 당시 이주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시대는 어떠했는가? 출국이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사를 떠나 방원몇십리를 가자해도 공사무장부의 증건과 량표가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촌보난행(寸步難行)이였다! 모택동시대의 호적제도와 인구류동공제는 유사이래 가장 가혹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인구증감통계만은 상대적으로 준확했던 것이다!    (三) . 미국은 그때 몇천만이 굶어죽기는 고사하고 한해에 1만명만 굶어죽어도 총통은 탄핵을 받아 나떨어지거니와 “반인류죄”로 기소되여 옥살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 허튼소리로 맹탕지휘한건 잠시 말하지 말고 59년도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팽덕회가 충언으로 상서를 올렸음에도 트집잡아 파면시키고 투쟁한 것이다. 일발의 재해를 제때에 수습하지 않아 3년사이에 3천만이나 굶어죽었다. 하건만 형세는 대단히 좋다고 허튼 소리를 치면서 문제가 적지 않다, 아홉손가락 성적에 한손가락 착오라고 했다. 생생하던 3천만의 생명이 잃어진것도 손가락 하나문제였단말인가! 그는 그것을 죄로 느끼지 않았기에 7천명대회에서 하는 수 없이 중앙에서 착오를 범한데는 나의책임도 있다고 한마디 승인하고는 다였다! 이것이 바로 민주제와 군주제의 구별인 것이다!     (四) . 미국은 언론자유와 신문자유가 있다. 만먁 미국에서 1천만이 굶어죽거나 1만이 굶어죽는다면 아마 3일내에 전 세계가 다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시대에는? 외국의 방송을 가만히 들어도 적의 방송을 들은 죄로 판결했다. 모택동이 그같이 사상령역에 전정을 실시했으니 사람이 굶어죽는 일을 어찌 감히 입밖에 번지고 전달한단말인가? 매체들은 오로지 만세만 불러야 하고 “대약진”의 공을 말해야 했다!                 그것이 도리였던가?                      류소기는 회의에서 내놓고 “대약진”에 출현된 문제들을 밝히였다. “대약진”이 몰아온 재난에 대해서 비교적 절실하게 예측하고 총결지었던 것이다. 원 수전부부부장(水電部副部長)이였던 류란파(劉瀾波)가 모택동을 겨누고 그의 “자아비평”에 대해서 자기의 견해를 말한적이 있다.    “모택동동지는 자아비평정신이 부족하다. 모택동동지는 경상적으로 자아비평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택동이 자아비평을 하는 것을 매우적게 보았거니와 자기를 비평하는 사람은 극력 압제하고 타격보복을 하는것이다. 7천명대회때 한편으로 민주집중제를 크게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전국에 인구가 몇억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한가지씩 의견을 말해서야 어디되겠는가?’했다.”    허심한 군주라면 이렇게는  말하지 많았을 것이다.   (3). 연구과제       “문혁”중에 빚어진 원안과 가짜안건과 틀린 안건을 연구하는 것은 문혁의 력사를 연구함에 한낮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 특정을 3가지 류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력사문제. 즉, “반역자”, “특무”, “내부간첩”, “력사반혁명” 문제다. 전형적인 례로는 “61명 반역집단안건”, 내몽고의 “신내인당안건” 등. 둘째는 정치견해분기. 즉, “모주석을 반대”하여 “당권을 찬탈하려 한 문제”로서 이른바 “팽진, 라서경, 륙정일, 양상곤안건”, “류소기안건” 등이다. 셋째는 “문혁”의 충돌. 즉 “문혁”운동에 대한 정치태도문제와 “무산계급사령부”의 의견이 맞지 않는 문제였다. 그 전형적인 안건으로는 “도주타도안건”, “양상곤, 여추리, 박일파사건” 등이다.      첫종류는 낡은 력사장부를 뒤지는 것인데 성질이 엄중한바 적아모순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종류는 결국 당내로선투쟁성질을 띈 것이다. 셋째종류는 군중이 자신을 교육하는 사상인식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류소기죽음과 주은래의 작용 1922년 9월, 류소기는 공산당 상담구위와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안원탄광공인들을 혁명에로 이끄는 길에 올랐다. 1931년 1월, 중앙정치국후보위원으로 되었다. 류소기는 서금(瑞金)에 있을 때부터 모택동의 관점과 접근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 전에 그의 공산당중앙직공부부장직무를 철소한 것은 잘못된 것이였다. 하여 그는 모쓰크바의 어떤 관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1934년 4월, 그는 복건성위서기로 조동되였다. 그사이 그는 모택동의 주장이 중국공산당의 실제와 맞는다고 느낀 것이다.    중앙홍군이 근거지를 옮길 당시에 주은래는 실제상 당정군의 첫책임자였지만 전략전인 전이과정에 모택동이 점차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과 장국도의 회억을 보면 다가 중앙홍군과 4방면군의 장정때를 인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로 인정하고 있다. 이로 보아서 모택동과 장국도의 모순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하여  중앙홍군과 당중앙이 연안에 도착 한 후에 모택동 등 당정군령도는 장국도에 대한 포위공격을 발동한 것인데 류소기가 제일먼저 장국도는 “당을 분렬했다”고 지적한것이다. 그런데 력사는 류소기역시 홍4방면군을 거의 소멸될 지경에 몰아넣었거니와 장국도를 도망치게끔 핍박한 공신이였다고 말하고있다. 주은래도 당연히 그렇게 했던 것이다. 당중앙의 허다한 사람이 그에 참여했다. 그리하였기에 장국도와 홍사방면군은 과연 하마터면 영 소멸될번 한 것이다.   1937년 5월 17일에 열린 쏘베트구역당대표대회에서 류소기는 <<백구의 당군공작에 관하여>>보고를 했다. 이는 류소기가 이미 백구에서의 중앙중앙의 합법적인 정확한 대표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였다. 백구의 다른 한 수령은 주은래였다. 항전초기에 쏘련은 왕명을 중앙령도로 파겼하였다. 한데 왕명과 모택동사이에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주은래는 쏘련과 왕명켠에 서서 모택동을 지지하는 류소기파의 계통과 견결히 맛섯던 것이다. 그야말로 수화상극이였다. 하였기에 력사를 보면 쏘련은 주은래를 흠상한 것이다. 결국 모택동이 왕명을 이겼다. 1943년 3월 16일~3월 20일, 왕명과 장국도는 다가 모택동에게 당권을 빼앗긴 중요한 날이였다!    류소기는 모택동의 제의에 의하여 두 번째 자리인 군위부주석이 되었다. 모택동은 중공당내에서 명실상부하는 1호인물이 된 것이다.    그런 후 연안정풍을 시작했는데 이 기회에 왕명로선의 사람들을 정리하면서 류소기파계의 사람들은 주은래에 대해 잔혹한 투쟁을 한 것이다. 팽진은 지어 주은래의 당적을 취소하자고까지 건의했던 것이다.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검토를 했건만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7대선거에서 주은래의 득표률은 22번째였으니 정치국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모택동이 그를 정치국에 끌어 넣었다. 본래 백구에서의 공헌을 따지면 주은래가 류소기를 훨씬 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류소기가 백구의 유일정확한 로선의 대표로 되었고 주은래는 착오로선의 대표로 되었던 것이다. 이 단락의 력사를 주은래는 뼈속에 새기고 잊지 않는 것이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하기 전에 항영(項英)이 와서 남방 8개성의 유격전쟁을 지휘하기로 했다. 하기에 항전시기 모택동을 위수로 한 당중앙은 신사군을 철저히 장악할 수 없었거니와 도리여 남방공산당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택동 등 중앙령도는 신사군에 대한 정돈개선을 했다.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모두가 자기 시람을 신사군에 들여보내여 황영과 정치투쟁을 벌리였는데 서로간에 모순이 생기였던 것이다. 례를 들면 주은래의 친신인 진의가 모택동과 류소기의 친신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한 그것이였다. 력사는 군대를 누가 장악하는 가에 따라서, 군대에서의 영향이 어느만큼 큰가에 따라서 당정(黨政)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라 알려주고있다. 하기에 투쟁은 잔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1년 1월, 환남사변(皖南事變)이 발생하여 항영은 목숨을 잃었다. 신사군은 모택동에게 장악되었다. 1월 20일, 류소기는 신사군정위, 군위신사군분회서기, 중앙화중국(합병후의 중원국, 동남국)서기로 임명되여 남중국에서의 모택동의 유일한 대표인물로 되었고 지위도 처음으로 일찍 6기1중전회이전에 지도층에 오른 주은래를 초과한 것이다. 이때 주은래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1945년 4월 20일, 중앙은 <<약간의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함으로써 모택동과 그의 친밀한 전우 류소기의 공적을 긍정했다. 따라서 4월 23일에 열린 7대에서 류소기는 <<당장수개에 관한 보고>>를 하였는데 모택동사상을 당장에 넣었다. 당내에서 모택동사상을 제일먼저 제기한 사람은 등척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리론적으로 계통화하여 선전한 것은 류소기였던 것이다. 하길래 모택동은 그의 공적을 긍정하는 것이다.    건국후에 모택동과 류소기는 첫고험을 격게 되였다. 고강과 요수석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본래는 주은래를 대체하여 고강을 총리로 시키자는 것이였는데 모택동과 고강은 투쟁을 확대화하였길래 창끝이 직접 류소기한테로 돌아졌던 것이다. 그통에 결국 모택동의 계획은 실패했고 고강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이 력사 이 사실로부터 중공지도자들에게 도처에서 남의 미움을 살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 결과 류소기와 주은래는 꼭같은 압력을 받은 것이고 다같이 단결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깨달은 것이다. 류소기와 주은래의 권력은 더 커갔고 세력도 커갔으며 영향도 커갔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류소기와 주은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주은래는 국무원을 통해 각부위와 중앙직속사업계통을 건립했는가 하면 류소기는 당계통조직의 령도를 통하여 지방령도권을 공제하였다. 두 개계통은 기본상에 교차되고 중첩되는 것이였다. 하길래 권력모순은 불가피면적으로 정치투쟁을 야기시키켰던 것이다.    모택동과 류소기사이에 정치투쟁이 생기였을 때인데 한번은 회의에서 류소기와 등효병(鄧曉甁)이 모택동의 친신인 림표에게 엄격한 비평을 제출했는데 주은래역시 끼여들어 림표를 비판했다. 림표는 하는 수 없이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사람이 보기에는 주은래가 류소기의 편에 선것만 같았다. 공개된 사료를 보면 “문혁”을 발동하기 전에 모택동은 적수동(滴水洞)뒤에 은거해 있으면서 주은래가 매일 보내는 바깥의 정보들을 보았다. 그러니 모택동은 바깥일을 손금보듯한 것이다. 모택동은 먼저 라서경을 내리떨구고는 팽덕회를 3선에다 파견하여 류소기가 군대와 련계할 수 있는 길을 끊어버린 것이다. 한편 주은래는 북경대학에 가 연설하면서 류소기의 군심(軍心)을 동요시켰다. 류소기가 공작조를 파견하여 그것이 치명적인 허점으로 되었을 때 모택동은 주은래의 건의에 따라 “나의 한 장의 대자보”로 류소기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하여 모택동은 주동권을 쥐었으니 주은래의 공을 몰라볼 수는 없는 것이였다.    력사자료에 기재된 것을 보면 군중들이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할적에 주은래는 공개적으로 류소기부부를 보호해준 것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류소기는 참혹하게 죽었고 왕광미는 시달림을 몹시 받은것이다. “문혁”때 주은래는 몇몇 총리와 연구한 끝에 국무원 각부부장들을 엇바꾸어가면서 얼마간씩 중남해에 들어와 있게 함으로써 숨을 돌리면서 군중투쟁을 모면케 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호해준 간부명단에 보면 당내 류소기, 팽진, 박일파 등 북방국계통의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계통의 사람들은 동산재기하자 주은래에 대한 노기가 대단하여 시종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들이 혼쌀먹은데는 주은래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력사는 독자들에게 류소기전안조의 조장은 주은래였고 그가 류소기가 체포된 후에 반변한 증거를 찾았다고 알려주고있다. 공개된 사료에 기재된 것을 보면 주은래가 류소기를 총살하자고 요구했으나 모택동이 동의하지 않고 당적만 취소하자고 했다. 1967년에 주은래가 류소기의 자료를 올려보내자 모택동은 아래와 같이 친필지시를 내린것이다.    “병이 있으면 치료하여 9대때의 산과녁으로 만들라”    림표의 지시는 이러했다.    “류소기는 죄악이 큰것이다. 혁명을 배반하고 당을 배반했으니 죽이지 않고는 민분을 풀지 못한다.”    주은래도 지시를 내렸다.    “견결히 주석과 림부주석의 지시대로해야 한다. 혁명군중이 비판투쟁하게 함으로써 교육과녁이 되게해야 한다.”  1969년 11월 12일 류소기가 병으로 죽자 모택동은 구두지시를 했다.    “자작지얼이니 살 수 없다”    림표의 지시는 이러했다.    “극악한자는 사후에도 그 오명이 지워지지 않는다. 태워버리라.”    주은래의 지시는    “림부주석의 지시래로 불에 태워버릴 것”.    그러나 지금의 중공당사와 중국력사기재에 보면 국가주석 류소기는 림표, 사인방의 박해를 받아서 죽었다고 쓰고있다. 그러나 림표반당집단과 사인방반당집단을 공개심판 할 때는 림표의 아랫사람들은 누구하나도 그에 유관되는 확실한 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사인방을 심사할 때 강청이 그것은 당중앙의 결의였다고 말할 뿐    첫째, 모택동이 한 일이라고 승인하지 않았고    둘째, 주은래가 작용한 것이라 하지 않았고    셋째, 류소기를 죽도록 몰아댄 기타령도의 이름을 찍지 않았다.    강청은 역은 녀인이였다. 일단 위대한 령수 모주석과 전국인민이 애대하는 주총리를 말했다가는 곧 자기의 반당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류소기를 박해한 중앙령도가 누구였다는 것을 말하면 지금도 의연히 올라앉아 권리를 잡고있는 사람한테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례를 들면 엽검영은 등효병(鄧曉甁)이 류소기를 평판하자고하니 반대하면서 평판대회에 참가하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한즉 류소기를 박해하여 죽게했다는 질책에 그녀는 그저 창백한 대답만을 할 뿐이였다.    “내가 아니다.”    청화대학에서 왕광미를 “지혜로 나포”한 연극이 벌어졌을 때 주은래는 소식을 듣자 그밤으로 비서를 보내여 교섭해서 왕광미를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는 밤중에 친히 왕광미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광미야, 고험을 이겨내야 한다.”    왕광미는 간단히 한마디했다. “총리는 참 좋아요.”    하지만 20세기 80년대에 왕광미가 정치국에 적발편지 한 장을 써 바치였는데 그 내용인즉 모택동이 처음에는 류소기와 련합해서 주은래를 투쟁하자고 했다가 류소기한테 거절당하니 결과 모택동은 주은래와 련합해서 류소기를 타도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공개된 사건을 보면 주은래가 죽은 후 그를 기념하는 장소에 왕광미도 갔다가 그를 구가한 글을 보고는 발연대로하여 돌아서고 말았다. 다른 한 글을 보면 그렇지 않다. 왕광미는 몸이 좋지 않아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왕광미는 그저 주은래를 의심만하였을 뿐 아무런 증거는 쥐지 못한 것이다.....           쏘련이 당장 쳐들어오리라는 공포속에 고급지도자들은 쏘련의 번개식 진공을 피하느라 급히 수산한 것이다. 투쟁을 받고있던 류소기도 그래서 북경을 떠난건데 개봉에서 처참히 죽어 천고의 수수께기를 남긴 것이다.
94    음지에 묻힌 비밀(57) 댓글:  조회:4369  추천:21  2011-04-01
            음지에 묻힌 비밀(57)                   (1)류아루장군이 주석의 죽음을 말하다                        (2)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너와                       나의 이름을 적을것이다                                   류아루장군이 주석의 죽음을 말하다 (이미 작고한 류아루선생은 리선념의 좋은 사위로서 공군정치부선전부부부장이였다. 류아루장군을 방문하고 쓴 본문의 작자는 중앙판공청비서국에서 40여년간 사업한 사람이다)    우리가 이제 박해받아 사망한 당원을 놓고 새삼스례 말하는건 너그럽지 못한 짓인것 같지만 당원의 몸인 그는 확시실히 자기가 갈아놓은 칼에 죽고만 것이다. 그의 부인은 다시금 자유를 찾은 후 오조광(吳祖光)의 부인 신봉하(新鳳霞)와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모택동의 좋은 학생인거얘요”    신봉하녀사는 코를 비쭉거리면서 그녀가 아직도 칼을 잡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니 우리가 글쎄 그를 어떻게 동정해준단말인가? 했다. (“개방잡지”ㅡ 朱學淵)    력사가 끊어지는가 하면 끊어지지 않고 통사가 불통하는 것이다. 사학가란 태반이 제2류의 문학가고 제3류가 사상가인 것이다.    이같이 무서운 규률을 그네들이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중국의 관리사회를 놓고보면 “둘째책임자‘의 운명은 종래로 비참한 것이였다. 중국의 통사를 아무리 뒤져봐야 승상(丞相) 거의가 좋은 끝장이 없었던 것이다. 군주를 동반하는건 범을 동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피로 바꾸어 온 이 보귀한 경험은 많은 승상들이 목숨으로바꾸어 총결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는 그들의 피눈물의 공소인 것이다.         력사가 발전하여 20세기에 들어섯고 중국공산당의 손에서 이 규률은 더더욱 절대 뒤엎을 수도 없는 진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나는 오늘 다른사람을 말하려 하지 않고 류소기를 말하련다. 그는 “둘째책임자”의 좋은 본보기였다.    장국도가 혁명을 배반한 후 향항에 피해가 공산당의 수령들을 한바탕 욕지걸이했는데 류소기를 욕할 때는 그가 “류소기는 모택동의 공신개”라했다.    그가 말한게 틀리지 않는다. 모택동이 오늘까지 있게된데는 그의 공로가 제일 큰 것이다.    홍군이 장정하여 연안에 이른 후의 일이다. 한번은 극을 보게되였는데 당승이 경을 구하는 내용이였다. 모택동이 제 옆에 앉은 민주인사와 말을 건늬였던 것이다.    “당승이 서천에 가서 경을 구하는데 누가 제일 견정한 것 같소?”    “당승이지.”    “누가 제일 동요했소?”    “저팔개.”    모택동은 이어서 제 왼쪽켠에 동안뜨게 앉아있는 장국도를 가리켰다.    “장정길에서는 저 사람이 저팔개였소.”    장국도는 그 말을 듣자 대노하여 밝칵 일어나 극장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욕을 던졌던 것이다.    “무치하다.”    모택동은 씁쓸하여 낯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 벌컥 일어나는 소리나길래 내가 보니 키가 헌칠한 류소기였다. 그는 장국도를 향해 엄하게 내질렀다.    “입을 다물라!”   모택동이 칼을 뽑지 않았는데 그가 사뭇 강개해서 칼을 뽑는 격이였다. 그날저녁의 일이 내가 보건대는 류소기가 좀 과분한 것 같았다. 한긴 장국도가 욕한것많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모택동도 남을 욕했거니와 먼저욕한 것이다. 장국도의 입이 종이까풀같이얇지만 모택동의 입은 그보다 더 얇은건데 류소기가 중간에 뛰여들어 그의 편을 들건 뭔가? 류소기의 전적인지원에 큰 힘을 입은 모택동은 본때스레 장국도를 이겼던 것이다. 장국도는 형세가 좋지않은지라 그만 꼬리를 빼고말았다. 과연 총명했다. 하기는 80고령에 카나다의 토론토료양원에서 중병을 앓다가 죽기는 했지만 어쨌든 류소기보다는 멋좋게 죽은거요 인정스레 죽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류소기보다 10년을 더 살았고.    류소기의 가장 큰 공로는 한가지를 발명창조한 것인데 그것인즉은 “모택동사상”이라는 것이였다.    1945년에 당중앙은 연안에서 “7대”를 열었는데 류소기가 회의에서 모택동을 그야말로 확끈하게 과장했던 것이다. 그는 볓번이나 보고를 했는데 번마다 입에 꽃이라도 핀것 같았다. 어느 한차례의 보고에서 그는 모택동의 이름을 105차나 씹었다. 이건 내가 통계를 낸 것이다. 그때 나는 무대아래에 앉아있었는데 수령들의 얼굴색을 주의해서 살펴봤다. 그들은 거개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주은래, 임필시가 가볍게 끄덕였다. 령수로서 알맞은 거동이겠지만 림표는 충동이 격렬한지 마치 병아리가 모이를 쫏듯 부지런히 까댁였다. 내가 괴이하게 여긴것은 지어 모택동 자신마저 머리를 끄덕이는 그것이였다. 그는 만면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그믈그믈 피여올리기까지 했다. 그는 방임자류하면거 남이 자기를 노래부르는것을 들었던 것이다.    류소기가 당장수개보고를 했다.          모택동은 그가 처주는 말에 백번은 넘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거기다 모택동사상이라는 말을 가첨했다면 고개를 얼마나 더 끄덕였을지 그야말로 부지기일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보고를 떠나 어느 구절이 새로 첨가되였는가를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럴때마다 그의 음성은 8℃로 오르군했다. 높이 읽을 때면 말을 조금 더듬었지만 그래도 물흐르듯 거침없었다. 자못 격동 된 표정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후에는 수만차를 반복하였던 그 구절을 뇌일 때는 그의 음성마저 찢어지듯 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수령 모택동은 이미 자기의 사상으로 우리들 전민족의 사상을 전에는 없었던 높이에로 끌어 올리였다. 그것이 바로 모택동사상인 것이다!”    박수소리가 우레마냥 터졌는바 마치도 양가령의 례당을 뒤집어엎는 것만 같았다. “모택동사상”은 류소기라는 이 어머니가 낳은 것이다. 이 신생아이는 태여나자부터 만세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모택동이 말을 못하게 됐고 류소기도 말을 더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사상은 조금도 쉬지 않고 뇌여지고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남과 싸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것을 리용하여 우리를 투쟁하는 것이다. 그 누가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는 그것을 장악했다고 선포하고 누가 무대에서 나떨어지면 다른사람들은 그가 그것을 배반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마치도 차바퀴가 돌아가듯 빙글빙글 돌면서 홀로 드팀없이 우뚝 서있는것이다.    모택동은 응당 제일먼저 류소기에게 감가를 드려야 한다. 하긴 그렇게도했다. 그는 한두번만 말한게 아니다.    “나는 연안정풍을 걸치면서 몇몇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류소기, 진백달, 호교목, 고강, 륙정일, 팽진이다. 그리고 또 있는데 주양이다.”    류소기가 떳떳이 앞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류소기는 모택동을 위해서 대공을 세웠다. 모택동은 그가 세운 공에 상을 후하게 내렸다. 모택동은 이 국가를 그한테 넘겨주려했던 것이다. 언젠가 영국수상 멍거마리(蒙哥馬利)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누가 계승자인가고 물으니 모탣동이 말했던것이다.    “거야 류소기라는게 명백하지요. 그는 우리 당의 부주석이니 내가 죽으면 그가 될것입니다.”    류소기는 오라잖으면 국가를 갖게 될 것이니 자연히 득의만면했다. 무척기뻣다. 그는 공로가 있다고 자처했다. 공로를 자처하는 사람은 기염이 몹시 오르게 된다. 나는 여러 장소에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봤다.    “7대이전에는 모택동의 절대권위를 세우지 못했으니 필사적으로 세웠다. 그러나 7대후에는 제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수립하느라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런 신성한 사명이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수립하기싶으면 수립하고 수립하지 않으면 수립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공로를 자처하면야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세울려면 끝까지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막다른 골목에서 퇴로란 없는 것이다.    60년대후기에 류소기는 의기를 발양할수록 앙양되였다. 특히는 모택동이 대약진을 발동하였다가 실패하여 제2선으로 물러나 공화국주석자리를 넘겨받아서부터 그는 하나의 훈훈한 태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한것이다. 그가 주석으로 된 이틑날 나는 붉은글씨를 박은 <<인민일보>>를 보았다. 그와 모택동의 사진이 첫면에 가지런히 났던 것이다. 그는 지어 모택동과 꼭깥은 미소를 지었다. 제왕의 그것과도 같은 존귀한 뭇음이였다. 나는 저절로 탄식이 나갔다. 이런 시각에는 낯색을 굳히는 편이 더 낳았을 것이였다. 속에 노기가 있다해도 억지로라도 엄숙해야 겸허하고도 심중해 보일 것이다. 한데 어쩌면 그리도 빨리 군주식의 웃음을 짓는가?    그는 공로에 머리가 뜨거워져 머리가 혼미해 진 것이다. “공이 높으면 군주를 놀래운다.”는 격언을 그는 홀시한 것이다. 한편 모택동은 어찌하여 도처에서 자기를 못살게 하는 “둘째책임자”를 제 곁에서 잠자게 그냥 내처둘 수 있으랴.    그는 류소기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말았다. 1965년도 여름에 드골이 특사 마얼루를 파견하여 중국을 방문하게 하면소 모택동을 만나 후계자문제를 알아보게 했다. 모택동이 말했다.    “드골이나 나같은 사람은 계승자가 없다.”(海納百川)    회견할적에 그 장소에 내가 없었다. 하지만 담화기록을 먼저 비서국에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의 말을 보고 전투신호가 올랐음을 감촉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가, 몇 달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져 류소기를 죽음에로 몰아간 것이다. 그는 어쩌는 수 없이 넘어지고말았다. 모택동이 자기를 묘준하고있다는 것을 그는 감감 모르고있었던 것이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파견되여 류소기문제를 전문심사하는 특별소조에 가서 사업하게 되었는데 그가 죽어서야 원단위에 돌아갔다. 그랬으니 그의 심태에 대해서는 손금보듯이 환한 것이다.    맨첫나날들에는 류소기 혼자서 모택동저택근처를 왔다갔다 배회했다. 그가 모택동을 만나기싶어하는게 확연했다. 모택동은 일부러 피하고 만나주지 않은것이다. 모택동은 분명히 도리에 어긋나고 있었다. 안그러면 왜서 범을 피하듯 하겠는가? 나는 류소기가 모택동을 만나서는 무슨말을 할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후에 그는 과연 모택동을 한번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맨처음 내밷은 말이 “난 <<모택동선집편위주임직무를 잃었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머리를 수굿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틑날, 근 만여명에 달하는 꼬마맹장들이 살기등등하여 중남해를 들이치고는 류소기를 붙잡아내여 투쟁했다. 그들은 류소기를 때렸다. 투쟁이 거의결속되여 갈 때 억세게 생긴 사내애 몇이 강박적으로 류소기를 새까많게 모인 군중앞에다 꿇어앉히였다. 그는 맞아 땅에서 딩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자유를 잃고말았다. 그사이에 그는 한가지 일을 해야했는데 그것인즉은 <<모태동선집>을 학습하는 것이였다. 그는 밤났으로 그 책을 받들고 보는 것이였다. 그가 이전에는 이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흡족하게 내키여 읽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심정이였다. 밸이 꼬여 죽을것 같이 아팠고 마음을 평형잡지 못해 백발은 까마귀둥지모양으로 되어 버렸고 가습놀이 세차게 들뛰였다. 책장을 번질 때면 손이 심하게 떨리였다. 나는 그가 읽는 것을 여러번보았는데 그는 읽을때마다 두눈에 눈물이 그들먹히 고인군했다. 눈물은 코물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닦을 념을 하지 않았다. 눈물코물이 책장에 떨어져 책장을 어지렵혔다.    그후부터 비판은 승급했는데 그는 매를 맞아 온 몸이 성한데가없었다. 꼬마맹장들은 그를 밀고 닥치고 했는데 마치 죽은 개를 다루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머리는 숙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꿋꿋하게 벗티게 하는 그의 강잉한 기개를 알아보았다. 그가 어찌 굽어들 수 있단말인가? 그가 하늘같이 쌓은 공적이 이제와서는 하늘같은 죄악으로 되고말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천고의 억울한 일이 아니고 뭔가?    하지만 그는 끊내 그것을 참고 넘기였다. 1968년 10월 5일, 투쟁받고 돌아오던 그가 땅에 쓰러지고말았는데 숨이 간들간들했다. 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였다. 그가 내보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를 대신해 모주석께 좀 알려주오.... 나는 북경을 떠나 처와 애들을 데리고 연안에 가 농사질을 하겠다한다고, 고향에 돌아가도 되오.... 보통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거요..... ”    오, 당신은 과연 숨을 돌려쉬게 되었소. 사정하고 빌었지. 당신은 그야말로 오산해서 틀린것이였소. 당신은 끝내 투항하고 만 것이지. 이제와서는 목숨을 건지는 길밖에 뭐가 더 있겠는가.  불행은 그대를 유치하게 만든 것이였소. 당신이 어찌 알기나했겠소, 병을 얻어 일찌기 죽으리라고는. 치료도 해주지 않다가 8기 12중전화가 열리니 사람을 보내여 치료하여 인차죽지 않게 만들었지. “전회에서 그대를 산 목표”로 만드느라그런것이였지 뭔가? 당신이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12중전회가 이미 열려서 20일만에 당적을 긁어버린 것을. 그리고 지지 기다렸다가 일부러 11월 24일 당신이 70살 나는 생일날에 “휘황스러운 승리”로 그것을 세상에 공포할줄을 어찌 생각이나했으랴? 이 모든 것은 그대를 죽이자는 하나의 목적밖에 없은 것이다. 한데도 고향가 농사질을 하겠노라 애걸하였으니 어리석었지, 960만평방킬로메터의 널다란 조국 땅 그 어디면 당신을 받아주려할가?   아, 공신이여, 나는 속으로 탄사를 뿜어내고야말았다. 천고의 죄를 뒤집어 써야 하는 공신, 무의무탁하는 신세로 돼버린 공신, 고독하고 처량한 공신, 그대는 손빈(孫賓), 오자서(伍子胥)가 이미 놀았던 인생극비극을 논 것이다. 사람들은 다가 성공한 황제에 감동을 하고있다. 돌이 성공할 수는 있어도 사람은 안되는 것이다.   그는 일체를 박탈당했다. 죽어도 알몸으로 죽었다. 속옷 하나도 입지 못한채. 남이 아들로 가장해 화장터 령수증에다 이렇게 써놓았던 것이다.         姓名; 劉衛黃. 職業: 無. 死因: 病死.                    이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너와 나의 이름을 적을 것이다        류소기는 격동되 음성으로 모택동과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의 이름을 써넣을것이요. 사람이 서로 고기를 먹었다고 책에다 쓸 거요!”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엄중한 “좌”경착오에다 1959년부터 우리 나라에서 련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당과 인민은 건국이래 가장 엄중한 경제곤난에 처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풀것인가를 놓고 당중앙의 고위층에서는 의견분기가 생겼던 것이다.    1958년이래 3년간 “대약진”이 조성한 곤난과 경제형세에 대해 평가함에 당내에는 의견이 같지 않았다. 류소기, 주은래, 진운, 등소평 등을 대표로 하는 사람들은 줄곧 직접 국민경제 제1선을 대하고 있었기에 형세를 보는것이 진실에 가까웠던 것이다. 류소기가 제일 전형이였다. 류소기는 당내에서 곤난이 이루어진 엄중성에 대해서 그리고 곤난이 생기게 된 진정한 원인을 그 누구보다 잘알고있은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형세를 보는 것이 그 무슨 손가락 1나와 9개관계인것 아니고 손가락 3개와 7개의 관계로 따질것도 아니라면서 자연재해가 3이고 인재가 7이였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1962년의 재정예산에 적자가  30억원에 달한 것을 보고 그는 더욱 첨예하게 지적 한 것이다.    “중앙공작회의(즉 ‘7천명대회’)는 곤난한 정황에 대해 투철히 보지 못했거니와 흑칠을 할까봐 무서워 있는 문제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본래의 면모인데 왜서 무서워들 하는가? 온통 검게 만들면 사람들이 비관 할 수 있지만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난관을 물리칠 용기를 낼 수도 있게 하지 않는가!”    그는 잇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무서울게 뭔가? 오늘밝혀지지 않으면 내일밝혀질 것이고 네 자신이 밝히지 않으면 다른사람이 밝힐 것이다. 살았은 때 밝히지 않으면 죽은 다음 아래세대가 밝힐 것이다.” “세폭의 붉은기를 사람들이 몇 년두고 의심할 것이다.”    류소는 또 자기의 자식들과도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혁명하는 목적이 인민들이 먹는것, 입는 것과 집문제를 해결하자는 건데 이같이 고생스레 살아가니 근심하지 않을수있는가!”   류소기의 태도가 이같이 변하니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일으켰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형세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경제사업의 제1선에서 책임을 맡아 온 주은래가 가장 잘 알것이였다. 1960년 말 주은래는 농업방면에서 무당산량을 높이 매기는 문제를 놓고 말한바있다.    “이 반년사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국성적인 기황에 직면하자 주은래와 진운은 정치위험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량식을 들여와 국민을 살구려 했다. 1961년 5월에 중앙공작회의에서 주은래는 총결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때는 혁명을 한다면서 심사숙고도 하지 않고 랭정하지도 않았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것을 몰랐고 걸리면 되게 넘어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말에 류소기가 게끼였다.    “너무 급히 서둘렀기에 되게 넘어져 결국은 늦게 되었다. 사회주의를 하자면 도덕이 좋고 감정이 좋고 열의만 좋아서 되는게 아니라 객관규률에 적응되여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넘어졌는데 아프면 아플수록 좋은것이다. 아파보지 않고는 감수가 깊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넘어졌는데도 아프지 않다고하는 것이다.”    주은래가 말했다.    “나는 아픔을 느꼈소.”    그는 사업상 이같이 결점과 착오가 생긴데 대해서는 중앙이 응당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하기에 그는 영국의 륙군원수 멍거마리(蒙哥馬利)가 중국의 엄중한 곤난에 대해 말했을 때 개관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공정한 판단에 탄복합니다. 당신이 보아낸 것은 당연히 좋은 일면일 뿐 우리들의 사업에는 결점이 있습니다. 이 점을 당신은 말을 하지 않을 수도 혹은 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쏘공22차대회가 끝나 흐루쇼브와 갈라질 때 주은래가 그와 말했다.    “목전 우리 국내는 아직 매우 곤난합니다. 지난해에 그같이 큰 재황이 들었지, 이 일년간에 내 머리가 더 희여졌습니다. 난 빨리 돌아가봐야겠습니다.”    7천명대회기간에 주은래는 복건조의 토론에 참가했다. 허다한 지방간부들이 강박명령을 하고 불어대고 거짓말을 하며 당과 군중관계는 긴장하다고 반영했다. 주은래는 그들의 발언을 “모두 매우 건강한 것이다”라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모두 존중한다”고 했다. 그는 말했던 것이다.    “당신들은 많은것을 얘기했는데 주요하게는 성위에 대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이 중앙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잘 알고있습니다.”    그가 진짜말을 하면 힘을 낼 수 있고 사실대로 하면 실효를 낼 수 있다면서 시대적인 병페를 정확히 지적하였기에 모두 탄복했던 것이다. 서쪽동에서 회의할적에도 주은래는 형세에 대한 류소기의 견해와 분석을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목전 재정경제의 곤난이 상당히 엄중한 것이다. 하건만 어떤 것은 우리가 미처보아내지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또 진운의 의견에 대해서도 몹시찬성했다.    진운이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이 ‘좌’나 ‘우’로 될까봐 겁나말라. 만약 그누가 너를 ‘우’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테다. 너의 당적을 긁어버리겠다면 나를 찾으라”.    “이번 대회는 아주 큰 성적을 거두었다. 절대로 낮게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의 결점과 착오에 대해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중앙과 성위는 다가 각기 자기의 장부가 있지만 허다한 책임은 중앙에 있는 것이다.”     그는 담화에서 민주를 발양할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난 몇년간 우리 당내이 민주생활은 정상적이 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면 말은 조심스레하고 마음속을 보이지 말라’ 이런 현상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중앙정치국위원이며 중앙서기처서기며 국무원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주임인 리부춘은 하남, 호북 등지의 사업을 검사하면서 천리대지 중원은 재해가 엄중하다는것을 보아냈던것이다. 군중들은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배를 곯고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여지듯 무거워 그는 말했던 것이다.  “불어대기 바람이 인민에게 이같이 큰 재난을 들씌우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인민앞에 미안하다!”        모택동은 형세분석에 대한 제1선 지도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면서 맛섰다. 그는 한면으로 객관규률을 위반하였다고 하면서 “최근3년간 큰 벌을 받았다”, “골을 부닥쳐 피를 흘린 것이다”, “사회주의건설에 우리는 매우 큰 맹목성이 있은것이다. 우리로 놓고 보면 사회주의경제는 아직 많이 알아야 할 필연의 왕국인 것이다”고 하면서 자기의 착오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9년 로산회의때 모택동은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실패한게 있다. 손오공이 복숭아를 도적질하는게 이런 방법이였다, 로산회의같은것 말이다. 지난때는 경제관리가 복잡하다는 것을 모른것이다. 혁명은 소란스럽고 적은 틈탈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책임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책임이 리부춘에게 있고 책임이 왕학수에게도 있으며 기타 부장들도 다다소소 조금씩 있는것이다. 농업부에 책임이 있는데 담로반이 질 것이다. 주요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지난때는 남을 나무렸건만 지금와서는 남들이 나를 나무리는데 사실 많은 것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1960년 11월 25일, 감숙성위에서 중앙에 보고를 써올렸는데 “공산풍”이 다시일어난 근원을 검사하면서 의례 성위부터 사업을 지도하는 과정의 결점과 착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모택동은 그 보고들 두 번이보고서도 다시 더 보면서 경험교훈을 섭취해야 한다면서 검토를 했다.    “그것은 착오를 고치자고 하는 모든 동지들의 호흡이자 꼭 같은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가 착오를 범했다면 받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다.”    7천명대회에서 모택동은 또 말했던 것이다.    “무릇 중앙에서 범한 착오라면 책임이 내한테 돌아오기마련인데 나도 한몫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자는게 아니다. 기타의 다른 동지들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일먼저 책임져야 할 것은 내다.”    다른한편 모택동은 곤난이 그리크지 않고 형세는 의연히 좋다고 하면서 “세폭의 붉은기”를 꼭 견지해야한다고 부르짖었다. 로산회의에서 모택동은 말하기를    “총로선에 문제있고 대약진에 문제있고 인민공사에 문제있다고 비평을 제출했는데 내보기에는 그들이 제기하는 것이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문제들이다. 나는 말한다, 그네들은 들린다고.” “그렇게 대단할 건 없다. 문제를 찾아내자고 들면 몇천 몇백가지 라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총적인 추세를 보면 그래도 손가락 아홉 개에 한 개인 것이다.”    량식이 긴장하고 “비정상사망”이 온 국토를 휩쓸고있건만 모택동의 태도는 “지금의 형세는 대단히 좋은 것이다. 결점과 착오는 부분적이다”는 것이였다.    1961년 로산의 사업회의에서 주은래가 발언할 때 모택동이 중간에 께끼였다.    “착오라해봤자 그것뿐인데 그리 대단할 것 없다.”    하면서 그는 또다시 형상적인 말로 나날이 향상한다고 락관했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 지어는 당대시인 리백의 시를 뽄따서 시까지 한 수 지어 중앙상위의 각 동지들에게 증송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형세를 적극적인 면에서 보아야 한다. 곤난이 있으면 방법을 대여 그것을 전승해야한다. 결점이 아무리 많다해도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랬동안 누워있었으니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1961년에 이르러 마음이 좀 기뻐지게 되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60조>>를 관철하고 공업에서 <<70조>>를 관철했으며 “3급소유제”를 기초로 하는 구체적인 정책들이 효력을 냈기 때문이였다.    그러하니 모택동은 류소기 등이 형세를 평가함에 매우 불만스러워 한 것이다. 1962년 여름, 모택동은 중남해의 수영장에서 류소기를 앞에 놓고 비평했던 것이다.    “그리 급해할거 뭐여? 왜 막아내지 못했어? ” “서쪽동에서 온통 암흑이라 했다지, 급한게 뭐였나? ” “세폭의 붉은기를 부정하고 땅까지 나누는데도 막아내지 못해? 내가 죽은 다음에는 그래 어떻게 할건가!”    류소기는 격하여 내뱉앗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의 이름을 적을 거요.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고 책에다 쓸거요!”    뒷이어 열린 중앙공작회의와 8기 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1선령도들이 형세를 어둡게 보았으니 “흑암풍”이라면서 비평했다. 그는 지적했다.    “내가 전국을 한고패 돌아봤다. 중남해로부터 서남, 각 대구의 동지들을 찾아 담화해봤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다가 매개성이 다 지난해보다 낳아졌다고 한다. 금년이 작년에 비해 낫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그렇게 온통 검은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형세를 너무나 검게 보는것이다.” “이 두해동안 곤난을 암흑으로 말하는게 합법이고 광명으로 말하는건 불합법이라한다.” “농업이 회복되려면 5년 8년이 걸려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을 그렇게 늘게 잡는건 희망이 없는 것이다. ”    그는 또 리부춘과 국가계획위원회를 비평했던 것이다.    “우는 중앙과 련계하지 않고 아래는 군중과 련계하지 않았다. 사전에 청시하지 않고 사후에 보고하지 않으며 4시4절 강박서명하게 했다. 나는 1년 더 두고봐서 되지 않으면 바꾸리라했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기다릴게 뭔가고 권했다. 지금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가정단위 도급생산문제였다. 그것은 농업생산 청부제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권은 집단에 있고 경영권은 개인이 가지는 것이였는데 모택동은 그것이 결국은 어쨌든 자본주의길로서 자본주의농촌을 복벽하려고 기도하는 것이고 실제상 반당 반인민적인 자산계급사상이 당내에서의 반영이라했다.    3년간 엄중한 경제곤난을 겪으면서 안휘성위는 군중들이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자는 의견에다 변통을 가하여 “정액산량을 밭에 맡기고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책임제 즉 “책인전”을 실험하기로 하여 “가히 실험할 수 있다”는 모택동의 심중한 동의를 얻었다.  이와 동시에 중앙과 지방의 허다한 지도자들도 다가 산량을 호에 맡기는것을 지지했다. 당시 농촌사업을 책임졌던 등자회(鄧子恢)는 광범한 조사연구를 거쳐 안휘성위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그는 지적했다.    “어떤 지구 특별히는 재해를 입은 지구와 산구의 분산지구에서 만약 산량을 호에 맡기는 것이 적합하다면 농민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것이 좋다”.        1961년에 주덕은 절강을 시찰할적에 신변의 사업인원에게 그것이 좋다고 했고 진운(陳云)도 안휘의 책임전에 관한 자료를 보고 말했다.    “이는 비상시기의 비상적인 방법이다. 밭을 호에다 떼여 맡기건 산량을 호에 맡기건 다 좋다. 총적으로 국가가 그같이 커다란 천재와 인재를 받았을 때는 꼭 농민군중을 발동하여 <<국제가>>에 나오는 것 처럼 ‘우리자신에 의지하여’ 살길을 찾고 생산을 재빨리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6춸 하순부터 7월 초, 진운은 밭을 떼맡기는 방식으로 농민의 생산적극성을 불러 일으키면 농업산량을 회복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좋다는 자기의 의견을 북경에 있는 류소기, 주은래, 림표, 등소평에게 보냄으로서 그들의 견해역시 기본상 일치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 바로 중남국서기를 맡고있던 도주역시 여러번이나 “변원지구와 산구에서는 산량을 호에 맡기는 것이 좋다, 검은 고양이건 흰고양이건 쥐를 잡는 고양이면 좋은 고양아다” 라고했던 것이다.    1962년 4월, 그는 하남에 가서 사업을 검사하면서 땅을 농민에게 빌려주어 농민이 자기절로 다루게 하는게 좋겠다고 제출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자본주의로 되는게 아닌가고했다.    도주는 대답했다.    “이렇게 하는것이 자본주의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자본주의를 요구할테다, 굶어죽지 않게!”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은 본래 호도거리를 찬성하지 않았는데 호남의 농촌들을 시찰하면서 당전에는 호도거리가 우월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찰을 끝마친 그는 상해에 가 모택동에게 사실을 회보했는데 모택동은 랭담했을뿐만아니라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중의 길을 걸으려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군중의 말을 완전히 들을건 아니다. 말하자면 산량을 호에 맡기는 청부제 같은건 듣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진운은 “관점이 선명”하게 찬성했고 류소기도 좋다고 한 것이다. 양상곤도 북경에서 전가영에게 전화를 쳤던 것이다.    “총리가 당신에게 물어보라했소. 농촌의 사유부분을 완화시킬 수 없는가고?”    전가영은 북경에 돌아오자 곧 류소기를 찾아가 회보했다. 회보를 금방 시작하자 류소기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 어떤 정황이란건 명백해졌소.”    이어서 그는 농촌에서는 호도거리생산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데 류소기와는 달리 뜻밖에도 모택동은 산량을 호에다 맡기자는 도급제주장을 동의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전가영 등을 엄하게 비평했던 것이다.    “북경에 돌아와 <<농업60조>>나 수개할게지 호도거리가 다 뭐야, 밭을 나눠 개인으로 하자구.” 하면서 그는 전가영에게 캐물었다.    “너 개인의 의견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탠거냐?”    전가영은 중앙지도층에 분렬이 생길 것 같아서 자기 개인의견이라 대답했다. 진운이 회억하는 것을 들어보면 “담화후에 모택동은 몹시 성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택동은 류소기의 사업에 대해 불만을 품고 왜 호도거리를 막지 않는가고 질책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잇따라 열린 북대하회의에서 모택동이 비평적이 말을 했다.    “1960년이래 한쪼각의 광명도 말하지 않고 어두운 일면을 말하거나 아니면 온통 어두운 것 같이 말했다. 사상이 혼란해져서 임무가 제기된건데 혹자가 개인으로 하는 가 아니면 대부분이 개인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듣자니 그렇게 해야만 중산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농업은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40%에다 산량을 맡긴다하자 그러면 개인과 집체사이 경쟁이 생길게 아닌가. ....개인세력은 꼭 량극분화를 일으킬 것이니 2년이  아나라 1년도 못가서 분화가 생기고 말 것이다”,  “흐루쇼브도 아직 공개적으로 집체농장을 해체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동지들은 바람이 풀을 좀만 건드려도 동요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에 정신준비가 없는 것이고 혹자는 맑스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고서는 중앙이 농촌사업에 자본주의를 실시 한다고 비평하면서 등자회는 “자본주의농업전문가”라 했던 것이다.
93    음지에 묻힌 비밀(56) 댓글:  조회:3993  추천:26  2011-04-01
             음지에 묻힌 비밀(56)                  (1) 류소기의 딸 정정의 회억             (2) 기자: 류소기부인과 아들 류원방문기                                              류소기의 딸 정정의 회억   류소기의 딸 류정정이 쓴 회억록을 보면 류소기의 일가는 “문화혁명”에 4명이 죽고 6명이 감옥생활을 했다.    류정정은 왕광미가 낳은 딸인데 류소기의  여덟번째 자식이다. 제일 망내 류소소(劉瀟瀟)는 왕광미가 감옥가고 자식들이 다 흩어질 때 나이가 6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보모 조숙군(趙淑君)이 가져다 길렀다. 동년시절을 중남해에서 보내면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엄혹한 정치투쟁에서 부모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직접목격했던 류정정은 후에 미국 하브트대학 상학원을 졸업하여 상인으로 성공했다. 1989년에 어머니를 돌보느라 조국에 돌아와 창업했다. 2006년 왕광미는 임종할 즈음에 자기가 심혈을 쏟아부은 “행복공정”을 그한테 맏기였다.       1951년에 북경에서 태여난 류정정은 1954년에 부모와 함께 중남해에 들어왔다. 1967년 9월 13일 오전, 왕광미의 세자녀가 중남해에서 쫓껴가는 그날에 왕광미는 강청, 진백달 등이 꾸며 만든 “미국특무”라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진성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전에 왕광미는 압송되여 류소기의 사무실이 있는 후원에 감금되였다. 하루는 반란자들이 밤에 돌연히 나타나 류소기가 있는 집뜨락에다 담장을 높다랗게 쌓고는 류소기를 담가까이에 한발도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하여 그들 부부는 죽을 때 까지 서로 낯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나이 7순이 된 류소기는 워낙 당뇨병이 있는데다 모택동이 약을 더 쓰지 못하게 해서 병이 심해졌거니와 잔혹하게 매를 맞아 이발도 빠지고 빠지다보니 나중에 7대밖에 남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었다. 설사를 하더니 위병에 걸리였다. 전쟁 때 상을 입었던 손이 발작하여 떨리니 옷을 입기 어려웠거니와 숫갈을 제대로 들수도 없어서 음식이 온통 낯에 게발리였다. 병이 하도 위중하니 그제야 의사가 병을 봐 주는데 진찰할 때마다 투쟁하느라 우선 욕부터 했다.    “중국의 후르쇼브!”    주사를 놓을 때면 사정을 보지 않고 되는대로 침을 콱 찔러 박군했다. 그것은 과연 고형이나 답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류소기를 운동하지 못하게 하느라 두 다리마저 장기간 묶어놓았다. 하여 그의 두 다리는 구불어졌고 근육은 수축됐다. 팔은 주사침자리에 헐고 썩어났다.    “온몸에 온전한 혈관이 하나도 없다.”    이는 호사가 기록기록해놓은것이다.    류소기의 장자 류윤빈(劉允斌)은 내몽고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장녀 류애금(劉愛琴)은 “외양간”에서 매를 숱해맞았다. 차자 류윤약(劉允若)은 감옥에서 척추병에 걸려 죽다살아났으며 딸 류평평(劉平平)은 18살이였는데 체포되여 감옥에 같혔다가 후에 산동연해로 쫓겨가 목장에서 로동개조를 했다. 17살에 감옥에 들어갔던 아들 류원(劉源)은 감옥에서 나오자 하향했다. 류정정은 중학을 졸업하고 순의나일롱공장에 분배받았다가 후에는 북경의기의표공장의 보통공인으로 되었다.    중공“9대”가 끝나자 림표는 왕광미를 사형으로 판결하면서 “즉시집행”하라고 했다. 판결서가 모택동의 손으로 넘겨지자 모택동은 무엇을 고려했는지 “刀下留人”이란 네 글자를 썼다. 칼아래에 사람을 남겨두라는 거다. 하여 왕광미는 목숨을 구한것이다. 하지만 왕광미의 80된 어머니는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자살은 하지 않을테다, 나늘 총살하거나 투쟁하여 죽이면 몰라도.”    하면서 굳겅히 살아가려고 결심했던 류소기는 코구멍에 꽂은 고무관으로 음식을 넣어 고갈된 생명을 간신히 유지했다.    1969년 10월 17일, 그는 소산지(疏散地) 정주에서 개봉으로 옴겨졌다. 떠나기 전에 호사가 약물로 신문지에다 “中央決定把你轉移到另一个地方”이라 써서 뵈이니 그는 낯을 돌려버렸다. 신문을 다시 눈앞에 가져가니 그는 얼굴을 되돌렸다. 호사장이 귀에 대고 알려주니 그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말 한마디도 없었다. 밤에 발가벗겨 알몸이 된 그를 이불로 감아 담가에 올려놓은 후 비행기에 실어 개봉의 한 특별감옥으로 옮기였다. 추위에 페염이 발작하여 체온이 40도로 올라 구토했다. 하건만 중앙판공청은 치료를 하지 말라해서 11월 12일 아침 6시에 사망하고말았다. 옷한벌 입히지 않은 알몸에 더러운 냄새났고 코는 삐뚤어졌으며 백발머리는 한자남아 길었다. 시체를 화장할 때 전안조는 렬성전염병이라 허튼소리를 쳤다. 화장명세서에 “류위황(劉衛黃)”이라 쓰고 직업은 없다는 “無”를 써놓았다. 화장 후 골회는 나무로 만든 보통골회함에 담아 오래동안 골회진렬실 124호 더그매에 올려놓았다. 그 누구도 관심하지 않았다.    1971년 가을, 림표사건이 발생한 후, “문혁”에 맨먼저 뚜드려 맞았던 팽진이 처음으로 집식솔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일이 공장에서 일하던 류정정에게는 서광이였다. 그는 모택동에게 4년동안 보지 못한 부모를 보게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송경령이 전해주었다. 모택동은 “父親已死”란 네글자를 써서 주면서 어머니는 만날 수 있다고 허가했다.1972년 8월 18일, 류정정, 류소소, 류원은 함께 진성감옥에 가 4년만에야 제 어머니를 만나보았다.    진성감옥에서 왕광미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는 완전히 구부정했고 머리는 허옇게 세였다. 반응도 둔했다. 그가 갇혀있는 감방은 불과 6평밖에 안되였다. 그는 누구와 말할 자유조차 없었다. 하기에 그는 차라리 전안조가 찾아오기를 바랏다. 그들과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지지리 고통스럽고 오랜 세월이였건만 그는 자살하려고는 마음은 먹지 않았다. 류소기는 그보고 “절대 그네들이 결론내리게는 하지 말라”했던 그였다. 그러자면 살아야 했다. 원원이는 1977기대학생이였고 정정이는 1978년에 시험쳐 인민대학에 붙었다. 그해겨울 중공은 11기 3중전회를 열고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했다. 류소기를 평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속에 왕광미는 12년간이나 같혀있었던 감옥을 나와 인간세상으로 되돌아왔다. 1980년 5월 17일, 인민대회당에서 류소기의 추도식이 있은 후 그의 골회는 처와 자식들의 울음속에 조국의 바다에 뿌려졌다.              기자: 류소기부인과 아들 류원방문기 생사결별할 때 까지 고초를 함께 겪었다.  “문화대혁명”에 림표, “4인방” 두 반혁명집단은 증명을 위조하여 죄를 만들어 류소기동지를 잔혹하게 박해 했다. 1966년부터 류소기의 운명은 아래로 곧추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당의 8기 11중전회에서 국가의 두 번째 인물이던 그가 여덟번째로 내려간 것이다. 1968년 10월, 중공 8기 11중전회가 북경에서 거행되여 <<반역자, 내부간첩, 공인역적 류소기의 죄행심사보고에 관하여>>를 비준했다.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이래 가장 큰 억울한 안건을 빚어내게 된 것이다. 1969년 10월 17일, 중병을 앓고있었던 류소기는 비밀리에 개봉으로 옮겨져 그곳의 특별감옥에서 생명의 마지막 27일간을 보내고 11월 12일에 원한품은채 서거 한 것이다.   ㅡ기자.    과연 위대한 녀성입니다. 남편의 두 전처에서 난 자식들을 자기의  친자식같이 여기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으니 과연 용이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다 말합니다, 간단치 않은 어머니라구요. 그리고 류소기동지에 대해서는 시종 충성스러웠구요, 더욱히는 “문혁”기간에 말입니다. 류소기동지가 있지도 않은 죄를 쓰고 모진 릉욕과 타격을 받을 때 견정하게 그와 함께 벗티면서 함께 맛서서 해냈던 것입니다. 종래로 자기 남편을 배반한 적이 없고 자기의 감정을 배반한 적도 없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류소기를 타도하자’고 웨쳤건만 의연히 드팀없이 그를 사랑했지요. 모두들 말합니다, 과연 위대한 처라구요. 류소기동지와 20여년간 같이사는 사이 무한한 영광을 맛보기도 했고 12년간 지긋지긋 한 옥살이도 했습니다. 우리는 왕광미동지의 아픈 상처를 되도록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지난 세월에 겪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려고 합니다. 되겠는지요?  ㅡ왕광미.    “문혁”이 시작되여서입니다. 그이가 내보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가 말했지요. “내가 전에 늘 말하지 않았소, 한 사람을 놓고 말하면 가장 행복한 것이 인민의 신임을 받는 것이라고. 오늘 내 한마디 더 보태야겠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인민이 자기를 오해하면 그때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을.” 여기까지 말하는 그의 목청은 떨리였다.    1966년 8월 중공 8기 11중전회 후 류소기는 비판받고 다시는 중앙의 지도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10월에 전국적으로 “류,등 자산계급반동로선”을 비판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와 그후 한시기는 류소기의 문제를 그래도 당내의 문제 인민내부모순으로 취급하면서 완전히는 타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실제상 1967년 원단부터 중남해의 반란파는 쉬지 않고 우리를 둘러싸고는 공격했거니와 적발하고 투쟁하면서 악독하게 류소기를 습격했던겁니다. 그래도 그이는 아주 적게 말했습니다. 내 보기에도 류소기는 과연 정말 억울하게 당하는게 분명했습니다. 내가 그이를 접촉해서 느낀건 그이가 오직 당중앙만을 중히 여기고 속을 썩히는 그것이였습니다.  그가 쓴 보고들을 보십시오. ‘모주석과 당중앙’이라는 말이 어디  빠진적이 있습니까. 모주석틀 특별히 존중하고 모든 일은 그를 생각해서 한것인데 어쩌면 이제와서는 다 틀린다고 한단말인가?  그때 투쟁받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번은 나를 나와 투쟁받으라는 통지가 왔는데 류소기는 평생처음 나의 행장을 꾸려주었습니다. 옷을 잘 개여 넣었지요. 마지막 몇분동안 우리는 서로 마주앉아있었습니다. 다른 때는 잘 웃지 않던 그이가 ‘우리는 꼭마치 꽃가마를 탄 것 같구만.’해서 나를 웃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류소기와 제일 마지막으로 본건 1967년 8월의 어느 날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중남해의 앞뒤집에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그 뜨락에서 우리를 투쟁하면서 그것을 록음하고  사진찍고 영화로 만들어서 전국에 널어놓자는 목적이였던 것입니다.    뜨락에 가득 심어놓은 과수나무에 열린 과일을 보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류소기가 과일이 다 익으면 따서 유아원에 보내야겠다고 하던 말이 새삼르레 상기되였습니다.        투쟁을 잠시 중단한 사이, 말하자면 그네들이 ‘열의를 더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사이에 나와 류소기는 서재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류소기는 아무말 없이 나에게 물을 먹이였습니다. 투쟁을 다시시작할 때 누군가 류소기를 밀어놔서 혼란이 생겼습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4, 5메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점점 혼란해지는 판에 나는 사람들이 그이를 때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마구달려갓습니다, 그이는 올 수 없었으니까요.  일체를 불구하고 달려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이는 내 손을 어스러지게 잡아주었습니다. 말은 못하고 그저..... 이것이 마지막 결별의 시각인줄이야 어찌알았겠습니까!    ㅡ기자.    “문혁” 때, 류주석은 남편으로서 제 처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식들이 남에게 박해받는 것도 보았으며, 수령으로서 당이 큰 재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으며, 국가주석으로서 국민이 네가 나를 투쟁하고 내가 너를 투쟁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쩌지 못했으니 내심의 고통이 더 이를 데 없었을 것입니다. 그후 류소기동지 때문에 12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옥살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 나날들을 어떻게 견디여 냈는지 세상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생각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류소기동지는 기실 1969년 11월에 원한을 품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서거했다는 것은 어느때 알았는지?    ㅡ왕광미.    나는 옥에 갇혀서부터 그저 오전과 오후를 가릴줄을 알고 흐린날과 맑은 날을 가릴 줄만 알았지 어느날이 며칠인지는 전혀 가릴 줄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협착한 감방에 자그마한 뙤창 둘이 있어서 더운날이면 웃뙤창을 열고 아랫것은 열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식들이 몹시 걱정됐습니다. 애들이 살아있기나한지 하고. 후에 관리인원이 내한테 알려주는 것이 모주석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된것은 애들이 모주석께 엄마를 보게해달라고 편지를 썼기 때문이랍니다. 송경령이 그 편지를 전했는데 모주석은 “爸爸以死”라는 글을 써 주면서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나를 보러왔던 겁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서 류소기는 세상을 리별한지 이미 3년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때 그가 차라리 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받으면서 살아서는 뭘 하겠는가. 과연 리해되지 않는 세상이였습니다. 나는 그때 분이 끓어 올라 나를 관리하는 사람을 욕하고 나를 혼내운 자들을 풍자했습니다. 나는 류소기가 죽어 그자들을 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안그러면 그자들이 류소기에게 공통을 주자고 더 악을 쓰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어떤 일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날         “....나는 사람들이 이제 나이가 15살밖에 안되는 애가 그같은 장면에서 제 부모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 할 때의 심정을 상상하고 리해나 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30년이 지나갔습니다. 나로 놓고 보면 눈에 찍힌 그 한막이 마음에 깊이 간직되여 명심하게 됩니다. ”       “...... 그때 나는 몹시 긴장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였지요. 말만 하면..... 나는 아버지한테 알려드렸습니다. ‘그들이 날 말못하게 해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 거의 1분동안이나 까딱않고  서있었습니다. 그는 내한테 뭔가 더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긴장해서 낯이 빨개졌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고말았습니다. ”    ㅡ기자.    류소기의 안건은 건국이래 제일 큰 억울한 안건이였습니다. “문혁”이 시작된 후에  류소기는 알지 못할 억울함을 당하면서 줄곧 추격을 받았는데 온 가정식솔마저 재난에 부대껴야했습니다. 부모들은 감금되였고 지난날 사랑해 주던 사람들은 갑자기 가로보기 시작했습니다. 주위환경이 그같이 높던데로부터 아래로 뚝 떨어졌을 때 나이 어렸던 아이들에게 주는 타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일반사람들이 다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ㅡ류원.    나는 그때 15살이였습니다. 1967년 8월에 천안문광장에서 백만명대회를 하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그날 중남해에서도 류소기, 등소평, 도주를 나누어 투쟁했던 것입니다. 그때 몇백명이 류소기와 왕광미를 비판투쟁했습니다. 그 장면은 그야말로 강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비판투쟁이 당장 고조에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어린애의 울음소리터졌습니다. 모두 놀랬지요. 나는 우는 애가 바로 내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나이가 6살이였습니다. 문가에 서있었던 그는 아버지, 엄마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우고 매맞는 것을 보자 그만 겁을 집어먹고 그렇게 울음소리를 크게 텃쳤던 것입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붙잡으면서 뭘하자고 그러느냐 했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소소가 울고있잖아요?” 하고는 달려가 그를 내 품에다 꼭 끌어 안고 경위가 있는 초소로 가서 울지 말라고 달랬습니다.    그때는 회장이 이미 혼란해져 란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보무님들은 본래는 4, 5메터가량 사이거리였는데 혼란속에 매를 맞을수록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더니 갑작스레 그쪽으로 덥쳐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의 손을 어스러지게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지막만남이자 생리사별(生離死別)의 순간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손을 굳게 잡았다놓고.... 당시 누군가 그들을 갈라지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것만같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제 나이가 15살밖에 안되는 애가 그같은 장면에서 제 부모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 할 때의 심정을 상상하고 리해나 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30년이 지나갔습니다. 나로 놓고 보면 눈에 찍힌 그 한막이 마음에 깊이 간직되여 명심하게 됩니다. ”     그런 후 부모님들은 다시못만나고 영 갈라졌다  ㅡ기자.    듣는 말에 의하면 류소기주석이 격리된 후 집사람가운데서 거기만이 부친과 접근할 수 있었다더군요. 하면 그지간에 거기서는 어떻게 보냈는지? 부친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정형은 어떠했는지?    ㅡ류원.    부친께서 격리된 후에 확실히 내만이 그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어려서부터 면목알고  군대에 갔다가 돌아와서도 주위에 있는 초병이나 위사와 사이좋게 지냈기에 그들은 나에 대한 인상이 매우좋았던 겁니다. 그들은 나를 어려서부터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보았길래 부친께 밥을 나르고 수건을 씻고 약을 나르는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정황에서는 내가 주방에서 밥을 그릇에 떠 놓으면 부친께서 나오고 그러면 나는 물 한고뿌와 수건을 가져다 드립니다. 그러면 그는 식사를 하고 나는 앉아서 기다리지요. 부친께서 식사를 끝내면 나는 밥그릇과 채접시를 가시고 수건을 씻습니다. 그러고나서도 감히 더 가까이 못갑니다. 부축해드리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멀리서 보기만해야지 말을 해서도 안되였습니다. 정말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그저 그가 식사를 할 때만 그렇게 볼 수 있었지 다른 때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식사가 거의끝나는 것을 보고 나는 식당뒷켠에 있는 작은 못에 가 수건을 씻었지요. 한데 돌아오자 그가 갑작스레 묻는것이였습니다. ‘네 엄마는 어데 있느냐?’  나는 몹시 긴장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말만 하면..... 나는 ‘엄마는 뒤에 있어요, 바로 뒤에, 걱정말아요, 그는 좋아요.’ 하고나서  나는 아버지한테 알려드렸습니다. ‘그들이 날 말못하게 해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 거의 1분동안이나 까딱않고  서있었습니다. 그는 내한테 뭔가 더 물어보려 했습니다. 나는 긴장해서 낯이 빨개졌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고말았습니다.... ”          그것은 나와 부친이 맨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였습니다. 하기에 지금은 응당 말을 더 했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듭니다. 그때 나는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규률을 위반할가봐 조심했습니다. 자칫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도 없을까봐 겁니서. 어쨌든 그렇게  라도 볼 기회가 있었으니 다행이였습니다. 그때 내가 긴장한 건 무서워서가 아니였습니다. 무서울게 뭡니까, 목숨을 내바치는 판이였는데. 그러나 그렇게라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까봐 무서웠던 겁니다. 결국은..... 이틑날 그는 가버렸습니다.   ㅡ기자.    류소기동지는 줄곧 “인민이 력사를 쓰니 좋다”고 했는데  이 말이 지금와 보면 과연 맞는 것입니다. 류쥬석의 일생이 불우하기는 하지만 혁명신념을 굳게지킨 진실한 모양을 인민이 긍정하고 력사에 기록하게 되였으니까요.  그가 당시 이런 말을 할 때의 정형을 알려줄 수 있는지?    ㅡ류원.    부친이 저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문혁”때입니다. 1967년 초, 그이는 중병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내 혼자서 밥을 날라갔습니다. 그는 침실에서 움직이기조차 어려울정도로 병이 심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그가 간신히 일어나 침대에 앉으면서 나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인민이 나를 때리는건 인민이 나에게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인민은 나에게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나에 대한 의견을 너희들의 몸에 옮길 수도 있다. 너희들은 천만 인민과 대립하지 말하야 한다. 인민이 너에 대한 오해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너희들은 꼭 위축을 견뎌내야 한다. 장래에 네희들 역시 나를 떠날 수 있다. 나를 떠난 후에는 누가 너희들의 부모노릇을 하겠냐?  기억해두거라, 인민은 너희들의 부모라는 것을. 너희들은 앞으로 느끼게 될 것이고 깨닫게 될 것이다, 중국인민은 가장좋은 인민이라는 것을.” 나에기 가장 인상깊은 말입니다.         ㅡ기자  류소기주석의 원안을 평판하여 억울함을 풀어드린 후 당과 인민은 그에게 아주 높은 영예를 드렸기에 당신의 신분과 지위에도 모두 변화가 생겼다고 봅니다. “검은무리”자녀가 댓바람에 국가 2호인물의 자녀로 되었으니까요. 부친이 평판받은 후 당신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    ㅡ류원.    나는 우에서 아래로 떨어졌다가 또다시 아래에서 우로 솟올랐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아래에서 우로 솟아오르자니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그러한 고통이 일반사람은 리해하지 못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우에서 넘어져 내려오니 사람들은 리해하고 모두 동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래로부너 우로 올라가니 같지 않았습니다. 례를 들면 그때 나는 바로 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대학문을 들어 썰 때 저의 부친은 아직 평판하지 않았고 동학들은 모두 나에대해 아주 좋았고 대함이 평등했습니다. 우리는 7,8명이 한숙사에 있었고 80명이 한반이였습니다. 숙사에서 밤이면 어떤 애들은 트럼프를 놀고 어떤 애들을 책을 봅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자겠는데 떠들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어떤 때는 손에 만투를 들고 먹으면서 고개숙이고 교실로 가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입니다, 이럴 때는 내가 모르거나 혹은 주의하지 않아 응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리해하고 개의치않습니다. 이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까.그러나 대학을 다닌 지 1년만에 저의 부친이 평판을 받으니 정황은 변했습니다. 우리지간에는 아주 자연스레도 골짜기가 생겨버렸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잠자게 떠들 말라 하면 그들은 무슨눔의 큰 소리냐, 네가 다 뭔데 합니다..... 미움사는 것 같아 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ㅡ기자. 1982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는 응당 북경에 남아야 할것인데 왜 농촌으로 돌아갔는가? 하남 신향현7리영공사관리위원회에서 마지막 부주임으로 되었다지?        ㅡ류원.    농촌으로 돌안건 내가 전부터 바란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대학교희 동학들이 거의 북경에 남았는데 나도 학교에 남아 조교질을 하던지 아니면 령도의 비서사업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농촌이 나를 수요한ㅁ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농촌에 7년간있었습니다. 17살에 가서 24살에 떠났는데 소박하고 성실한 농민들은 내가 어렵고 가장 절망했을 적에  나를 도와줬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심리고 정상적인 사람의 일종 생존태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기에 늘 그들에게 말못할 어떤 빚이라도 진것 같이 드들 속으로 돌아가고푼 생각이였던 것입니다. 나는 1982년에 하남에 가 줄곧 1992년 까지 있었으니 만 10년입니다. 먼저는 신향현7리영공사에서 17번째간부로 되었는데 내 앞사람은 60여세되는 로간부였습니다. 중앙에서 간부혁명화를 급속히 내놓으면서 젊은이화, 지식화를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당시 공사에 대학생이라곤 나밖에 없었거니와 전 현적으로도 몇이 안되였습니다. 특히는 온정한 정패(正牌)대학졸업생은 없었기에 고르다나니 내가 부향장, 부현장, 현장으로 되었고 나중에는 부시장이 되어 정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ㅡ기자.    부성장으로 당선 될 때 처음에는 후선인에 들지 않았다며요, 듣자니 인대대표들이 련명으로 추천해서 올라간 것이라 하더군요. 이런일이 전국적으로 처음이였고 나이도 39살밖에 안되였으니 제일젊은 부성장였지요.    ㅡ류원.   그때 나는 정주시개발구건설을 맡으면서 천진과 대련개발구에 고찰을 갔습니다. 갑자기 부성장으로 추천되였으니 돌아오라는 통지를 받고 놀래랬습니다. ....듣자니 투표해서 올라왔다는 것이였습니다. 말 한마디에 당선되였다니 나는 몇 번 허리숩혀 인사했습니다. 아래 많은 대표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악수했습니다. 너의아버지가 개봉에 갔을적에는 얼마나 추웠는가 너의아버지가 하남성백성들이 너를 선거했다는 것을 알면 기뻐할 것이라했습니다.               당시 하남성텔레비기자가 나보고 감상을 말하라했습니다. 나는 몇마디했습니다. 저는 내가 선거 된 것은 바로 로일대의 감정을 옮겨 받은 것이라면서 있는 힘을 다해 사업을 잘하고 절대 사리를 도모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당시 나는 확실히 후선인이 아니였는데 대표들이 회의에서 주동적으로 련명으로 서명하였기에 당선된 것입니다. 후에 듣자니 이런 일은 전국에서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때 나는 몹시놀랬거니와 압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부친이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였을 때의 감정도 아마 이러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나의 몸에 큰 기대를 걸고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데 어떻게 로일대를 따라가겠습니까? 나는 올라와서 자칫 잘못하면 로일대의 명성을 깨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큰 압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높은 것 같아서. 그리하여 나는 말했던 겁니다. 오로지 온 힘을 다해 하는것 밖에 없다구요.   어머니는 내가 당선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기뻐하면서 잘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리라는 대답 외에는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로일대가 다하지 못한 일을 꼭 잘해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대중이 지지하니 힘이 생깁니다. 
92    음지에 묻힌 비밀(55) 댓글:  조회:3845  추천:16  2011-04-01
         음지에 묻힌 비밀(55)                   (1) 류소기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2) 모택동의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자”                (3) 세차게 일어난 “류소기타도”기세                                 (4) 류소기 최후의 세월 (1) 류소기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런 말이 있다. “왕자가 법을 위반해도 서민의 죄와 같이 취급한다”. 말하자면 법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지난날 중국에서, 특히 “문화대혁명”때는 소용없는 빈말이 되고 말았다. 왕자가 법을 무시하여 당당한 나라의 주석마저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게했으니 더 말할게 있는가?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이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력사에 가장 험한 원안(怨案)으로 기록 된 것이다.        개혁개방초기였던 1980년 5월에 북경에서 류소기의 추도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류소기가 원한을 품고 죽은지 12년만이다. 마침내 그의 골회는 북경으로 돌아왔고 그날 전국은 반기를 드리웠다.    추도회는 화국봉이 장악했고 등소평이 추도사를 올리였다. 류소기는 당당한 국가주석이였건만 그 어떤 합법적인 수속도 밟지 않은 정황에서 체포되나 다름없이 연금생활을 하면서 모욕적인 비판투쟁을 받다가 우선 1968년에 중공의 한차례회의에서 당적을 취소당하고는 주석의 직무를 잃었으며 나중에는 심한 타격에 병들어 군인들의 손에 비밀리에 개봉군인병원에 압송되였으며 거기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1969년 10월 12일, 그 어떤 친인도 모르게 처참히 죽은것이다. 당시 한 해방군전사가 시체를 가만히 카메라에 담았기에 다행히 사망때의 모습이 한 장 남았다. 알고 보니 그렇지 71살의 늙은이가 된데다 앓아서 피골이 상접한 그는 거의 제몰골이 아니다. 그젯날 그 풍도있는 흰 치머리에 름름했던 국가주석은 어디로 갔는가!? ....      1980년 5월, 중공중앙은 류소기를 평판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을뿐만아니라 미망인 왕광미가 손수 남편의 골회를 북경에 가져오게 하여 추도식을 성대히 거행고 추도식이 끝나서는 골회를 바다에 뿌렸다. 그것은 사자가 생전이였던 1956년에 자기가 죽으면 골회를 남기지 말고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서였다.    류소기는 박해를 받아 죽었다. 이는 “문혁”이 저지른 가장 큰 비극의 하나인 것이다. 나라주석마저도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었으니 보통관원이나 백성이야 더 말할게 있는가? 그의 죽음은 전적으로 모택동이 책임져야 한다. 류소기가 어떻게 투쟁 받았고 어떻게 개봉에 압송되였으며 어떻게 죽어간다는 것을 그래 모택동이 몰랐단말인가? 그를 죽음에로 몰아간 흉수는 대체 누구였는가?        모택동은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자작지얼(自作之孼)”이라 했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재앙을 입는다는 말이다. 과연 누가 재앙입을 짓을 한건가, 그래 류소기란말인가?                  (2) 모택동의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자”         7월 18일, 장강에서 헤염을 친 모택동은 마침내 무한으로부터 북경에 돌아왔다. 당날 강청 등으로부터 공작조에 관한 회보를 들었는데 일부학교에서 공작조를 반대한 자료도 있었다. 19일ㅡ 23일, “문혁”정황을 회보하는 회의에서 모택동은 공작조가 “학생운동을 진압했다”고 질책했다. 24일, 모택동은 중앙상위회의와 중앙문혁소조성원회의를 소집하여 류소기와 등소평을 비평하고는 공작조를 철소하기로 결정했다. 7월 28일, 북경시위는 <<각 대학교와 전업학교의 공작조를 철수할데 대한 결정에 관하여>>를 내놓았고 29일에는 인민대회당에서 전 시 대학과 중학의 “문화혁명”조직의 적극분자대회를 열고 그들에게 이 결정을 선포했다. 회의에서 류소기는 자기도 역시 “문화대혁명”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승인했고 등소평도 로혁명이 새 문제에 맞다들었다고 승인했다.    당날 한 홍위병이 모택동에게 편지를 했는데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동의했다.    8월 1일, 중국공산당은 제8기중앙위원회 제11차전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홍위병을 지지했고 중앙에서 공작조를 파견한 것을 재차 질책했다. “그것은 진압이고 공포였는데 그 공포는 중앙에서 온 것이다”고 하면서 그는 “명명백백 한 바 공작조는 자산계급켠에 서서 무산계급을 대하는 것이다”, “요물잡귀신은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회의는 원래 8월 5일에 결속짓기로 했지만 그날 모택동은 연필로 신문지여백에다 <<사령부를 포격하자ㅡ 나의 한 장의 대자보>>라고 써놓더니만 중앙에 다른 한 “자산계급사령부”가 있다면서 회의일정을 연장했고 내용도 재빨리 류소기와 등소평을 비판하는데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대자보”의 원고를 수정한 후에 표제를 달아주면서 당날로 찍어 회의에 널어놓게 했다. 그 대자보의 내용은 이러했다.   “50일동안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 까지 어떤 동지는 반동적인 립장에 서서 자산계급전정을 실시하면서 들끓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꺾어버리려 했다.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뒤섞었으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부동한 의견을 압제했으며 백색공포를 실시하고 득의연하여 자산계급위풍으로  무산계급을 멸하고자 자산계급기개를 떨치려 했으니 이 아니 독한가!”        비록 이름을 찍지는 않았어도 창끝이 50일동안 집정한 류소기를 향한것이 분명했다.    모택동은 한주일간 대련에 가 있으면서 회의에 빠진 림표를 북경에 불러다가 그가 8월 8일날 회의에서 류소기를 향해 어투가 과격한 비평을 하게했다. 그리고는 8월 18일 회의때는 팽진, 륙정일, 라서경, 양상곤  등의 “착오”적인 언론을 함께 찍어서 회의에 널어놓게 했다.   8월 8일, 중공중앙 8기 11중전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발표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번 운동의 목적은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꺾꾸러뜨리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고 교육을 개혁하며 문예를 개혁하고 사회주의경제기초에 맞지 않는 모든 상층건축을 개혁함으로써 사회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리롭게 하자는 것이다.”  회의는 따라서 과감히 하는 것을 앞세우고 손을 놓아 군중을 발동하며 군중이 운동중에서 자신이 자신을 교육하게 하며 말로 해야지 무단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규정도 내온 것이다.    8월 12일, 회의는 모택동, 림표, 주은래, 도주, 진백달, 등소평, 강생, 류소기, 주덕, 리부춘, 진운 등 11명을 정치국상위로 선거했다. 그중 새로 선거된 사람으로는 도주, 진백달, 강생, 리부춘이였다. 림표는 댓바람에 2호인물로 부각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는 유일한 중공중앙부주석의 신분으로 출현하여 형식상의 게승자로 나타났고 자력(資歷)이 훨씬 높은 주은래, 류소기, 주덕, 진운 등 부주석들은 올리추지 못했다. 회의는 정식으로 팽진, 륙정일, 라서경, 양상곤 등 네사람을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거니와 그들보다 급이 더 높은 류소기, 등소평 등은 지명비판하기로 했다.      3. 세차게 일어난 “류소기타도” 기세     1966년 12월 18일 오후, 장춘교는 중남해의 서문에서 중앙문혁소조 조장신분으로 청화대학의 반란파두목 괴대부를 불러서 만나 그한테 “류소기를 타도”할 행동을 말했다. 괴대부는 장춘교한테서 이미 류소기를 타도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12월 25일에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대규모적인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는 수천명을 이끌고 천안문광장에서 “선서대회”를 했다. 12월 27일, 북경의 고등학교반란파는 공인체육장에서 “류, 등의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비판하자”는 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온 사회에는 류소기를 타도하는 광란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와동시에 강청일당은 온갖방면에서 류소기를 타도해야 한다는 여론을 퍼뜨렸다. 12월 30일에 강청, 왕력, 관봉, 요문원은 청화대학에 가서 괴대부(蒯大富)에게 “견결히 지지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12월 31일, 강청은 단독으로 류소기의 딸을 만나 그를 일어나 아버지를 반란하라고 꼬드겼다. 1월 6일, 청화대학의 반란파는 왕광미를 “지혜로 나포”하여 청화대학에 묶어가고는 이 일을 자랑거리로 사회에 크게 선전했다. 1월 9일, 사부치는 북경에서 전국공검법계통(全國公檢法系統)의 대표들을 접견하고는 “전국정법전선은 즉시 일떠나 흐루쇼브식인물 류소기, 등소평을 향해 불을 지르라.”고 호소했다. 강청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1966년 말과 1967년초에 “타도”활동이 전국에 만연되여 갈수록 렬렬해지면서 “류소기를 타도”하는 여론환경을 형성한 것이다.       4. 류소기의 최후의 세월 劉少奇(1898ㅡ1969)는 중국의 무산계급혁명가며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1919년에 북경과 보정에서 “54운동”에 참가했고 1920년에 장사에서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참가했으며 1921년에 쏘련 모쓰크바동방대학에서 학습할적에 중국공산당에 들었다. 1949년 9월에   중화인민공화국정부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제2기(1959)와 제3기(1965).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주석 겸 국방위원회주석으로 당선되여 그는 죽을 때 까지 그 직무에 있은 것이다.    1967년 9월 13일, 류소기의 아들딸들이 핍박에 의하여 가정을 떠난 그날에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도 집사람모르게 “미국특무”라는 죄명으로 북경 진성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너무나 돌연적인 일이여서 류소기는 처음에는 이 일을 미처몰랐다. 그는 투쟁받을 때 다친 허리를 구부정하고 한쪽 다리를 끌면서 복도를 더듬어 창가에 이르러 밖을 내다보았다. 부모곁에 있지 못하고 갈라진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제 부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위를 둘러봐야 그 혼자뿐 정막은 숨막힐 듯 했다.    전사 몇이 명령을 받았는지 류소기의 방을 수색했고 류소기보고 허리띄를 풀라했다. 류소기는 갈린 목소리로 항의했가. 그러니 그자들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어 류소기를 주저앉히고는 강제로 허리띄를 풀어냈다. 류소기는 너무 격분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느새 일어나지도 못했다. 류소기는 완전한 수범같았다! 아니, 수범보다도 더 못했다.    며칠후에 지군(遲群)이 와서 “중앙”을 대표하여 말한다면서 류소기의 경위전사들을 향해 훈시했다.    “너희들 경위를 맡고있는 ×중대에는 검은무리가 많이 나왔다. 여기에 류소기가 있다. 너희들은 많이 중독되였으니 그 중독을 숙청해야 한다. 지금은 너희들의 임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위를 하는게 아니다. 류소기를 지키고 관리하는 하는 것이다.”    그는 사납게 한마디 더 보탰다.    “잘 지켜봐야 한다, 사정을 보지 말고.”    이때는 류소기신변에서 사업했던 사람들을 언녕부터 “철두철미한 보황파”라 욕하면서 총과 증건들을 걷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들은은 류소기와 계선을 가른다면서 “해위동혁명반동대”라는 것을 조직했다. 그야말로 온 사회가 미쳐나는 판이였다! 그러니 기실은 류소기를 “간수”하는 전사마저 이제는 층층이 감시하고 감시받으면서 그 누가 류소기를 전처럼 인정스레 대하기만 하면 즉시 끌어내다가 투쟁하고는 농촌의 집으로 쫓아버렸던 것이다. 류소기는 이같이 비참해진 환경속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다. 그는 어떻게 하나 살려고 애썼다, 승리하는 그날까지.....    하지만 자식들과 처 왕광미가 핍박에 의하여 한데있지 못하고 갈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류소기는 정신상에 큰 타격을 받아 정신은 붕괴 되기 시작한것이다. 계다가 모택동의 뜯에 따라 의사가 먹는데 습관되여 온 수면제마저 주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자니 그의 생활규률은 억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한쪽 팔은 전쟁 때 상한건데 지금 다시 발작해서 심하게 떨렸기에 옷을 입기조차 어려웠다. 침실에서 식당까기 불과 30m밖에 안되건만 밥먹으러 가자면 한시간 넘어걸려야했다. 지금은 직책이 “간수”로 변해진 경위원들은 안타깝게 보기만해야지 누구던 감히 그를 부축해 줄 수 없었다. 정 안되니 경위원이 아닌 사업인원이 식당에 가 밥과 채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는 것도 한두번 뿐, “보황파”라고 욕하니 감히 더 그러지 못했다. 류소기는 좋던 치야가 거진 다 빠지고 일곱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강냉이가루로 지은 굳은 워궈톨아니면 거치른 잡곡밥을 억지로 라도 먹어야 했으니 소화가 되지 않아 위병에 걸리고 말았다. 본래 탕뇨병이 있어서 약을 그냥 복용는데 이제부터는 수면제를 못먹게 된 것 처럼 의사가 약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손이 떨려 음식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니.... 이제는 완전히 잔페로 돼버린 몸이였다. 류소기의 몸은 날이 갈수록 급속히 허약해졌고 병이 심해졋다. 일단 생긴 병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심해가기만했다. 의사와 호사들은 그의 병을 잘 봐주지 않았다. 잘 봐 줄 수 없었다. 매번 병을 보기전에 먼저 그를 한바탕 투쟁했다. 의사는 병을 진찰하는 한편 욕지걸이를 했다.    “중국의 흐루쇼브!”    호사는 주사를 놓을적이면 주사침을 일부러 콱 들이밖았다.  그러니 류소기는 병을 보이는 것 마저도 형벌을 받는거나답지 않았다.        한번은 류매괴(劉梅魁)가 통지를 받고 옷과 일용품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만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비밀”로 했다. 또 하루는 류매괴가 쪽지와 서적이름을 적은종이장을 받았다. 그것은 팽덕회의 글씨였다. 그는 자기 애인과 같이 종이에 쓴 책들을 한묶음사서 반도체라지오와 함께 팽덕회에게 부쳐보냈다. 한데 생각밖에 접대실에서 받았다고 알리는 싸인을 받았다.  6월말에 반도체라지오가 되돌아왔는데 거기에  탱덕회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매괴야, 량표를 돌려보낸다. 반도체라지오도 역시 돌려보내니.... 앞으로는 아무것도 내한테 보내지 말거라.” 이런 돌연적인 변화를 보니 저쪽에서 팽덕회도 역시 처지가 매우 어려워진게 분명했다.    1967년 7월, 강청과 진백달 등은 군대내의 “한줌도 못되는 자”를 뽑아낸다고 기세를 부리였다. 강생, 진백달과 척본우는 북경항공학원의 한애정(韓愛晶)을 접견했을적에 팽덕회에게 있지도 않는 죄를 많이 들씌웠다. 한애정은 그때 “중앙문혁”의 대표신분으로 팽덕회를 찾아가 심문한바있다. 팽덕회는 그의 물음에 경멸적인 대답을 했다.    “나는 쓸것은 다 썼다.”    “뭘 다 썼다구, 수치심을 모르고 자기의 공로를 떠벌리는 사람! 일어서서 말해! 외국과 내통하고 반당매국을 한 죄를 교대하란말이다!”    팽덕회는 발연대로했다.    “너희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한테 그따위 죄를 씌우는 건 대채 무슨심뽀냐!”    “대표”는 그의 옷깃을 당겨 벽구석쪽으로 몰아넣고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하지만 팽덕회는 굴복하지 않았다.    척본우가 여러번이나 출면하여 “팽덕회련락참을 비판”하는 우두머리들을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였던것이다.    “팽덕회 이 거대한 물건은 꼬마맹장들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그래도 솔직하지 못하면 광대한 군중이 일떠나 다스려야 한다!” 면서 그는 “팽덕회는 꼬마맹장들이 비판교육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척본우는 친히 팽덕회를 비판투쟁 할 일을 포치했는데 그것을 “백퇀대전”이라 불렀다. 그 내용인즉 “중점보루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였는데 제 령혼을 팔아버린 “로간부”들을 훈련시켜 그들을 “강철채찍”으로 만들고 무지한 청년들을 리용하여 팽덕회에게 새롭게 더 심한 박해를 가하는 것이였다.....        한편 이쪽에서는 류소기가 투쟁받는 사이 자녀들도 따라 심한 박해를 받고있다. 장녀 류애금(劉愛琴)은 “소외양간”에 갇히여 매를 맞았고 둘째아들 류윤약(劉允若)은 감옥에서 척추결핵에 걸려 죽다살아났다. 19살이였던 류평평(劉平平)은 단독감방에 갇혀 있었다. 방금 감옥에서 풀려나온 17살 난 류원원(劉源源)은 안북(雁北)의 모래바람속에서 헤매였고 나이가 제일어린 류정정(劉亭亭)이 혼자서 크낙한 정치압력속에서 고생고생 살아가면서 남한테 고통스러운 기시와 모욕을 받고 있었다.     류소기의 “죄증자료”를 만들기 위해 전안조는 일체 대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드느라  64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는 강박하여 가짜공술을 하게했다. 장기간 집사람과 격리키면서 잠을 재우지 않고 심문하고 투쟁했다. 의지가 박약한 어떤 사람은 고압수단에 배겨내지 못해 투항하고 말았다. 전안조는 그들에게서 받아낸 공술로 가짜증건을 만들어 류소기에게 죄를 씌워 투쟁했다. 이같이 억울함을 당하는 당과 국가의 간부가 어찌 그 한 사람뿐이랴!    모택동은 왜서 제 녀편네를 내세워 강생, 사부치 등과 짜고서 자기와 오랫동안 함께 손잡고 혁명해왔던 로혁명가와 간부들을 전부 타도하게 하려는가? 이게 그래 쓰딸린과 뭐가 다른가? “문화대혁명” 이는 분명 자기의 신복을 기르고 조대를 바꾸는려고 일으킨 일장의 무자비한 권력쟁탈투쟁이였다! 이 허무하고 잔혹한 투쟁으로 하여 온 나라 온 국민이 혹심한 재난에 빠지고있는 것이였다. 이를 명백히 깨닫게 된 류소기는 자신의 무력함에 원통하여 10월 5일 하루에만도 두 번이나 통곡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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