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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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 6 댓글:  조회:4806  추천:0  2011-10-23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6.    생활이 검소한 라철은 사치를 멀리 하고 사는 사람이였다.    그의 집에 들어서면 가장 유표하게 안겨드는 것이 방안의 정면벽에다 손수 활달한 필치로 써서 붙인 대문자 각사였다.         神靈在上 天視天廳 生我活我 萬萬世降衷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라철은 저 총독부의 왜놈들이 냄새를 어떻게 맡아내고 우리 대교에 통제령을 내렸을가, 아직은 만주땅에서 생겨난 중광단을 대종교의 무장단으로 지목할만한 그어떤 똑똑한 근거도 바로 쥐지는 못했을건데...                      몇해전 일본의 잡지가 발표한 론설내용을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라철은 생각을 굴리였다. 두려워할것이 아니라해놓고 이제와서는 종교에 간섭한다는 원망과 비방을 들어가며 강제로 해산시키려 드니 대체 무슨놈의 수작인가, 발전속도가 빠른 대종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 위험하다고 느껴져서 그러는게 분명하다. 이 라철이 이제는 능력을 다한거요 세궁력진했으니 자리를 내고 물러나는건 그야말로 명지한 처사로되는거다. 라철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속으로 뇌였다. 개가 무서워서 갈길을 가지 않을소냐.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대종교는 맥을 끊지 않고 이어나가야 한다.     어느날 라철은 세 아들을 앉혀놓고 당부했다.      《구월산에 가봐야한다. 너희들은 잊지말고 그곳을 찾아가 해해년년  천조에 제를 지내거라. 천조를 잊음은 제가 배달민족임을 망각함이요 그를  스스로 떠남과 뭐가 다르겠느냐.》           정세는 몹시불리했다. 시대의 운이 너무도 좋지 않음에 비감이 생겨 통탄하던 라철은 마침내 자신이 적과 대결 할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구상도 못하는 비장한 결심이였다. 라철은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느날 돌연스레 남도본사 교우들에게 자기는 구월산 삼성사봉심을 떠나야겠다면서 려장준비를 시켰다.    그날은 음력 8월 초4일이였다. 라철은 상교 김두봉, 지교 엄주천, 참교 안영중, 김서종과 사촌아우 참교 나주영 그리고 조카인 참교 나정수 등 6명의 시봉자(侍奉者)를 데리고 서울역을 출발했다. 서울시내에 있는 수백명 교우들이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봉심하러 떠나는 그들을 환송했던 것이다.      기차로 사리원(沙里院)에 도착한 그들 일행은 이틑날 아침 역전근처에 있는 대기사진관(大崎寫眞舘)에서 함께 구월산 봉심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라철이 앉고 그 왼쪽에 김두봉, 오른쪽에 엄주천... 모두가 흰옷을 입고 떠난 맵시대로였다.          사리원에는 경암정(景岩亭), 고당성지(古唐城址) 같은 고적들이 있어서 한번 돌아보고 싶었지만 려관집 주인으로부터 채굴이 시작된지 6년되는 부근의 사리원탄전에서 나는 질좋은 갈탄이 일본으로 많이 실려가고있다는 소리를 듣고보니 감정이 상하는지라 더 머물러 있고싶지 않았다.    《더러운 놈들, 뻔뻔스세 갈퀴질이구나! 오늘은 석탄이네만 래일은 흙마저 실어가려구들테지.》    라철이 일제의 략탈이 너무도 한심스러워 내뿜는 원성이였다. 나라 재부는 그같이 털리우고 권리잃고 무기력해진 백성들은 부역에 끌려나가 혹사를 당하고...갈수록 수미산이라더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저 암담하기만했다. 허나 그렇다고 옆사람들께 비감만을 던져주는건 일이 아니라 생각되여 그는 가슴저미는 고통을 그 이상 표면에 들어내지 않고 속으로 쓸어 내리였다.    신천읍(信川邑)에 이르었다. 일행은 잠간 쉬면서 말 한필을 구했다. 아직도 수십리길이 남았는데 년세있는 조교를 그냥 지겹게 걷어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라철은 권념에 못이겨 여기서부터 말을 탔고 시자(侍者)들은 의연히 도보로 서북쪽 저 멀리의 구월산을 바라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날따라 날씨는 과연 괴벽스레 짖궂었다. 일행은 가다가 폭우를 만났다. 인가를 만나지 못해 비를 끊을 수도 없는 처지여서 그들은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50여리길을 그 냥달리여 마침내 류천장(柳川場)에 당도했다.    그러나 짙은 먹장구름은 하늘을 그냥 가리웠고 소나기는 더욱 세차게 쏟아 부어 지척을 가리기 어려울 지경이 되였다. 그렇다고 전진을 멈추고 싶지 않은데 이 어찌된 일인가! 자연의 변화랄가 아니면 조화랄가 무쌍한 천신의 은총이랄가?... 그들이 흑암속에서 가도 오도 못할 궁지에 들었을 지음에 기적이 나타났다. 구월산쪽으로부터 한줄기의 광선이 뻗혀와 앞길을 훤하게 비춰주었던 것이다. 이에 일행은 반가와 걸음을 재촉하여 그날 밤이 깊기 전에 삼성사(三聖祠)밑 전동마을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던 것이다. 삼성사(三聖祠)는 한배검이 어천(御天)했다고 하는 구월산 소증봉(小甑峯)밑에 있는데 그것이 어느때에 세워졌는지는 알수 없으나 북쪽벽에는 단인천제(檀因天帝), 동쪽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서쪽벽에는 단군부왕(檀君父王) 이렇게 3신을 모시고 오래동안 봉사(奉祀)하였던 것이다.    춘판통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동에 도착한 라철일행 7명은 비에 젖은 몸으로 삼성사를 향하여 머리숙여 묵례를 하고나서 봉심사유(奉審事由)를 말하고는 그 마을에서 피곤한 몸을 쉬우면서 그날밤을 지냈다.       이틑날 아침일찍이 사당으로 향한 라철은 그곳에 이르러 모양이 형편없이 돼버린 사당을 보는 순간 가슴이 억장같이 무너져내렸다.   《오 어쩌면?!...》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무거운 자책감만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오랜세월 찾아오는 이 하나없이 내내버려진채 돌보지 않은 삼성사는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기여 벽과 기와가 파손되였고 집담은 무너진채 그대로였고 향축각(香祝閣)은 지어 네기둥만 남았고 재실(齋室)은 헐어 근본 거처할수 없었다. 일행 모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뜨거웠고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 철은 죄많은 불초자입니다.>>     라철은 머리를 깊숙히 숙였다.    시자 모두가 그같이 하면서 속죄를 빌었다.    한편 그들은 사당이 그같이 불성모양이 되어갔건만 새나 짐승들이 침범하여 유린한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음을 과연 신기하게 생각했다.   《미물도 여기가 성전임을 아는도다!》    감개가 심금을 울리느지라 라철은 다시 한번 탄사를 발하면서 즉시 사당수건을 서둘렀다.    라철은 우선 남도본사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한통을 써서 김두봉에게 주면서 부탁의 말을 했다.   《나를 위하여 여러 누님에게 편안히 지냄을 이르라.》   《그리하겠습니다.》          김두봉은 조교의 지시대로 서울로 향하였으니 바로 이날 오후였다.    라철이 그한테 줘 보낸 수찰역문(手札譯文)을 보면 이러했다.              이틑날 라철은 시자들과 함께 삼성사 경내에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뽑는 작업부터 착수하여 당실을 수리하고 또한 동, 서 북 세벽에 따로 모셨던 삼신위패를 삼신일체의 뜻에서 북쪽벽 한가운데에 단인천제를 그 좌우에 단웅천왕과 단검부왕을 각각 모시였다.    (三神位가 처음에는 土像으로 모셔졌다가 그후에 木像으로 바뀌였고 조선태조때에 이르러서는 河崙의 건의에 따라 木像을 없새고 位牌를 모시게 되었던것이다. 뿐만아니라 九月山天王과 土地情神과 四直使者의 位版도 다시 써 祠堂뜰우에 봉안하였다.)    여럿은 이틀간 손을 합쳐 부지런히 서두르고 힘을 들인 끝에 마침내 사당수리를 끝냈다. 이날은 또한 일요일인지라 라철은 시봉자들을 거느리고 천수(天水)를 드리며 향을 피우고 경배례식을 거행하였다.    10일 즉 그 이틑날에는 제궁(祭宮) 쉬는 집의 수리도 끝냈다. 하여 한칸은 라철조교의 수도실로 정하고 다른 한칸은 시자들의 숙직소로 정했다. 수도실 북쪽벽에는 라철이 출입때면 잊지 않고 늘 받들고 다니는 작은 천진(天眞)을 모시였다. 그래놓고는 이틑날 라는 주련을 친히 써서 그것을 앞기둥에 붙이게 해놓고는 그날부터 곧 문을 닫고 수도(修道) 에 들어갔다.    문밖에서 들리는 건 오로지 종이펴는 소리와 먹가는 벼루소리였다.    12일 밤과 13일 오전에 경배식을 거행하였는데 새로 봉교한 마을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참례하였다. 라철조교의 지성스러운 고행에 몹시 감동한 그들이였다. 13일 경배식이 끝나서는 모두가 특히 가배절에 하게 될 제천의(祭天儀)를 익히였다. 이 모든 것이 라철의 면밀한 계획에 따른거였다.    14일 라철은 목욕하고 손톱을 깎은 후 새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나서 다음날 가배절에 쓰일 제물과 제천의(祭天儀)에 고유(告由)할 주유문(奏由文)과 악장(樂章) 등을 일일이 전성껏 준비하였던 것이다.    15일 가배절이 돌아왔다. 오밤중(子時)에 단의식(檀儀式ㅡ祭天式)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삼신(三神)을 합하여 제사를 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였거니와 진설한 제수(祭需)가 이전에 나라에서 하였던 제전(祭典)과는 같지 않았다. 이날 의식에는 전동마을에서 새로 봉교한 교도 31명 역시 함께 참가함으로써 제사분위기를 한결 돋구었다.    라철이 쓴 악장문(樂章文)은 이러했다.      巍巍天山 檀葉蒼蒼 (외외천산이여 단엽창창이로다)    帝出于震 合洽萬邦 (제출우전하사 합흡만방이삿다)    生我敎我 乃吉乃祥 (생아교아하시니 내길내상이로다)               巖巖白岳 瑞石有跡 (암암백악이여 서석유적이로다)    帝返于宮 實惟天國 (제반우궁하사 실유천국이삿다)        育我化我 萬歲流澤 (육아화아하시니 만세류택이로다)        主宰惟一 作用惟三 (주재유일이라 작용유삼이로다)    眞理微妙 萬有包圅 (진리미묘하여 만유포함이였다)    福我倧我 神化覃覃 (복아종아하시니 신화담담이로다)          이는 라철이 쓴 주유문(奏由文)에서 그가 바라는 것이 밝혀진 부분이다.    이틑날 즉 음력 8월 15일 새로 1시에 라철은 시자들을 데리고 함께 천제의(天祭儀)를 시작하여 2시에 끝마치였다. 이때의 그는 평온한 기분에 온화한 상태였다.    비구름이 말끔히 걷히여 유난히 맑은 날씨였다. 라철은 사당을 거닐다가 시자들을 불러놓고 정답게 말했다.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한울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사당을 세우고 신상을 모시어서 향화가 4천년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이 몇해동안에 제사를 페하고 수호조차 없이하여 사당과 재실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한 삼성사가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된 자 어찌 감히 안전하기를 바라리오?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소 이 땅에서 단의(襢儀)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을 마치였도다.》    그의 얼굴에는 화기가 가득했다.    그의 말을 듣고 시자모두가 자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없이 살아가야한다,이제부터는 그 어떠한 상황에 부대끼더라도 제사만은 끊지 말고 해해년년 지내면서 사당과 재실을 수호하리라는 결심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과연 오늘이야야말로 이로다!》    라철은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꿈에 “嘉慶” 두글자를 줏고 그것을 자기한테 선사했던 서일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비롯한 이역땅에서 포교를 하고있는 교우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렸다.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동삼, 이상설, 이시영, 이동녕, 홍범도, 조성환....저 세상에 간들 잊은손가. 그들은 다가 하나의 굳은 신념으로 하여 사실상 혈맹을 맺은바나답지 않은 형제요 친구들이였다.   《부디 건재하여 뜻을 이루기를!》    이시각 그의 바람은 너무나도 절절했다.    라철은 사당뜰악을 약 한시간가량 거닐고나서 수도실로 들어갔다.     그는 붓을 들어 흰종이 한폭에다 글 21자를 써서 문에 붙여놓았다.                (오늘 오전 3시부터 시작하여 3일간 절식수도할터이니 문을 열지말기를 바란다)            안으로 문을 잠그었다. 밖에서 들을 수 있는건 오로지 먹가는 소리였다.    라철조교가 전에도 자주 절식수도를 한적이 있는지라 이를 알고있는 시자들은 이날 별다른 생각이 없이 모두들 숲속 또는 개울가로 산책을 하였고 책을 보기도 했다. 그들 다섯사람은 저녁밥을 먹은 후에 모두 겯방에 모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10시경에 세사람이 잠을 자려고 수복방(守僕房)으로 향하였는데 라철조교가 들어있는 수도실에서는 종이펴는 소리와 먹가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들은 침식을 전페하는 라철조교의 건강을 그저 속으로만 걱정하면서 그곳을 지나갔다.    이날 당직은 엄주천과 안영중 두사람이였는데 몹시 곤했다.     이틑날 오전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여난 그들은 자기들이 늦잠잔 것을 걱정하면서 수도실로 가보았다. 한데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는지라 그들은 자연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두사람은 네 번이나 불렀다. 그래도 안에서는 의연히 아무 응답이 없었다. 불안한 예감에서 그들은 급히 문을 떼고 들어가보았다. 라철조교는 손발을 펴고 이불, 요우에 바로누워 눈을 감았는데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허나 숨을 거둔지가 이미 오랜 것이 분명했다.    책상우를 보니 여러개의 봉한 글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장이 있었다. 유서의 날자를 보니 모두 8월 15일 혹은 가배절로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조천(朝天)한 시간은 오후 11시경이였다....    모두 놀램과 비분에 잠기여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그러다 엄주천이 맨먼저 정신을 차리였다. 그는 서둘러 이 일을 유관부문에 알렸다.    안악(安岳)에 주재하고있는 일본 헌병대 대장이 의사를 데리고 검시(檢屍)하러 왔다. 한데 시신이 머리부터 발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지라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라철은 한얼이 되어야만이 쓸수 있다고 하는, 남은 알수 없는 페기법으로 스스로 사망에 이른것이다.    《그 목숨 끊음을 연구하건대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가 있은즉 죽은 원인이 없는 사망이라 가위 성인의 죽음이라 하겠고,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참으로 선냉님, 선생님이시다!》   검시를 끝마치면서 헌병대의사마저 공경, 감탄하여 내뿜는 탄식이였다.   이틑날인 8월 16일에 남도본사에서는 라철이 조천한 전보를 받았다. 모두 경황애통한 분위기 속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상교 오혁을 구월산에 파송하였고 라철의 부인 지교 기고와 큰아들 정경, 셋째아들 정채가 이어 분상(奔喪)하였고 둘째아들 정문은 공주에서 부음을 듣고 달려왔다.   시자 김서종이 전보를 치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칠색찬연한 무지개가 구월산 소증봉에서부터 다리를 놓은 것 같이 은황봉에 가로 걸려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보는 사람마다 다가 신기하게 여기였다.   전보를 받은 남도본사에서는 곧 계유(啓由)하고 제를 지낼 장의소를 개설하였으며 례원(禮員)을 정하여 치상엄무(治喪業務)를 분담하는 한편 라철조교가 조천한 사유를 아래와 같이 신문에 광고하였다.                                  안영중이 조천소로부터 오혁이 쓴 조사보고와 유서 그리고 인장 등을 남도본사에 전했다.     김헌앞으로 남긴 유서 과 가족에 남긴 유서외에 봉해놓은 글가운데는 여러 가지의 글이 많았는데 그 속에 일본총리와 데라우찌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도 각각 들어 있었다.              이상은 김헌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라철은 “殉名三條”에서 자기는 대종교를 위하여 죽고 한배검을 위하여 죽으며 천하를 위하여 죽는다고 밝히였는데 그 원인은 서일이 4월 남도본사에서 거행하는 천궁령선식에 참가하러 왔을 때 라철이 그와 이야기를 한  그 내용들이였다. 그리고 또한 밀론(密論)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그때 서일, 김헌과 최전앞에서 그가 한 말의 내용 그대로였다.    라철은 전체 교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교문을 맡은지 여덟해동안 큰도의 빛나는 빛을 널리 펴지 못했고 이 세상의 아득한 길을 크게 건너지 못하고 이렇듯 빠짐이 있으니 도리여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이제 온천하 형제자매들의 허물을 대신하고 한오리의 목숨을 끊어서 한배님께 사례한다고 했다. 어떤 구절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찢어 내렸다.      
150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5. 댓글:  조회:5298  추천:0  2011-10-1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제3부      5.         5월초의 어느날 조선에 나갔던 조성환이 만주로 돌아와 왕청에 다시나타났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천지간에 우레소리를 남기는 번개마냥 그의 행적은 신비로왔다. 그렇다고 굳이 알려고 캐물는 사람은 없었다. 독립운동에 몸바친 사람이니 의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고있으리라는 믿음만이 있었기에 그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구면의 사람들은 다가 그를 제집의 식솔로 여기고 유정스레 친근히 대했다.   《그지간 다들 무사히 지내셨습니까? 나 이 성환이는 조선가서 근 달포를 보내고 연해주로 해서 이제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조성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먼저 대종교의 늙은이들부터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리였다.   《이 사람아, 어느새 또 거긴 갔다왔나!》   《과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네 그려!》   《이 사람아, 사타구니에 휘파람소리 너무나다간 뭐가 떨어져.》    이달문도 이동호도 정해식도 김기석도...혀를 내둘렀고 무람없이 롱담을 내던져서 웃기도했다.     조성환은 과연 역말(驛馬)과도 같이 분주히 뛰여 다니는 몸이였다.    그는 이 내려 그것이 전반 종교계에 가해진 타격과 남도본사가 그에 대처하여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자기가 본 그대로 알려주었다. 듣는 이들은 모두 그가 종교일로 갔다온줄로 알았다.    사실은 그는 남이 알면 안될 극비의 중대한 일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나갔다가 서대문이 없어지고 뒷이어서 흥례문마저 헐리워 그 자리에 총독부가 일어서리라는 말을 듣자 조성환은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와글와글 끓어 오르는 분을 도저히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하여 그는 전부터 련계가 있었던 대한광복회의 박상진(朴尙鎭) 사령을 찾아가 그의 앞에서 울분을 토해놓았다. 박상진은 귀담아 듣더니 서대문이 없어진 것은 총독의 명령에 의한것이요 김좌진도 이 일을 알고 격분하여 이러다가는 나라의 고적이 결국 그자들의 손에 싹쓸이를 당하고말겠으니 속히 대책을 세워야할게 아니냐고 제의해왔다면서 어찌하면 좋을가 모색중이라했다.    《우리 손으로 고관녀석들을 없애치우기오. 안중근의 본을 받아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될것같애. 계획과 담략만 있다면.》    《좌진이도 조선생처럼 그리말합디다. 나역시도 그 생각이여서... 말이 난김에 설명해드리지요. 이번 제가 조선생님을 이리로 행차케 한 것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연구해보자 함이였습니다.》    박상진이 하는 말이였다.    이에 앞서 김좌진의 제의에 의하여 데라우찌 총독을 비롯한 고관(高官)암살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침내 대한광복회의 행동으로 규정되였던 것이다. 조직의 행동이 초보적으로 구상될 때  대한광복회 사령 박상진은 광복회(光復會) 만주지방기관(滿洲地方機關)의 설치를 책임진 우재용(禹在龍)과 광복회 부사령으로 지금 남만주 회인현에 가있는 이석대(李奭大)를 통하여 련락을 취한 후 신채호를 만나 그와 좀 더 구체적으로 조선총독암살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대한광복회의 황해도회원인 성락규(成樂圭)를 비롯하여 이관구(李觀求), 조성환 등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다.     몇해전에 일본수상 가쯔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거제도에 1년간 갇혀 지냈던 조성환이 이번에는 무단정치를 실시하여 2천만 조선사람을 지옥과도 같은 질곡속에 몰아넣은 흉적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이때 서일은 왕청에 있지 않았기에 조성환은 덕원리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그 이틑날 곧추 화룡으로 향했다. 계화가 함께 동무해주리라며 나서자 나도 가겠다면서 자진해 나서는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조성환에게는 초면인 그는 라중소(羅中昭)였다. 경기(京畿)태생으로서 지식인인 라중소 역시  경술국치후에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다.    서일이 마침 청호에 있었다. 요즘 그는 어디든 가지 않고 총본사 古經閣에서 삼일신고의 진리훈을 강해하려고 금방 연구에 착수한 상태였다.   《아니 이거, 조선생님이시구만요! 어떻게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서일은 조성환을 여러달만에 만나는지라 무척 반가와했다.   《난 서선생을 만려구왔지. 경전을 연구하시오?》   《예. 진리훈강해를 집필해볼까구요.》    조성환은 그것참 좋은 일을 하고있다면서 펼쳐놓은 글을 내리읽었다.   《중(衆)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을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墮生長宵)(思邀切) 병몰(病歿)의 고(苦)하 철(喆)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면하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야 반망즉진(返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시(是)니라》        라중소는 한학을 공부하기는했지만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있는지 듣고서는 오리무중이라 눈을 꺼무럭거리다가 목을 빼들고 탁상우에 있는 경전을 다시들여다본다.    조성환이 서일과 물었다.    《서선생은 이 문장에 대해서 풀이를 어떻게 하는게 옳을 것 같소?》    서일은 이렇게 한다면 일반인이 다 알아들을수 있겠는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를 했다.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렵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아, 자라, 늙어,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부디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 가달을 도리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맞춤이 이것이니라.》    《오ㅡ참말로 그럴 듯 하네그려! 풀이가 적중한 것 같네!》    조성환은 서일의 글재주에 감탄을 금치못한다.     《참말이지, 우리 서선생은 경전을 만들어내야 할 분이라니까!》    계화역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그루박아 말한다.    라중소는 군사학만 연구하는줄로 알아왔던 서일단장이 경전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거니와 박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성환은 서일과 자기는 환국하여 도사교 라철을 만나보았노라 말하고나서 그의 부탁을 전한다면서 닥쳐오는 음력4월중순에 남도본사에서 천궁령선식을 갖게 되니 그 전에 환국하도록 서두르라했다.    서일은 이 내린 상황에서 열리는 천궁령선식의 중요함을 스스로 깨닫고 어떻게 하나 제 기한내에 환국할 생각이긴하나 비자를 내자면 시간상 어려운 상황인데 조선생은 어떻게 갔다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성환은 내가 언제 비자를 내갖고 차타고 다녔던가 뭐 하면서 알려주었다.    《나무꾼은 나무꾼의 길이 있고 밀수꾼은 밀수길이 따로있지. 안그렇소? 나는 연해방면으로 해서 길을 열어놓은거요. 니콜리스크를 경유하거나 아니면 하수빠수카야 유정구역방면으로부터 육로국경역으로 되는 포구라니수야부근으로 나와서 국경을 넘는거요. 넘어와서는 어디로 갈가? 둔전영통로를 경유해도 되고 아니면 삼차구를 경유해서 대조사구길로 나와서 수분하를 거슬러오르면 바로 왕청오지 라자구지방에 들어서게 되는거요. 모색하면야 길은 여러갈래가 될수 있지. 》    《아, 그렇습니까. 그럼 나도 그 길을 택해야겠군요.》    《건 념려마오. 내가 국경까지 바래다줄테요.》    조성환이 이같이 자진해 나서는 것을 보고 계화도 라중소도 함께 바래다주리라했다.    그러나 서일이 정작 떠나게 되자 그를 바래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그들 세사람만이 아니였다. 토비가 욱실거리는 때라 아무런 방비순단도 없이 몇사람만 달랑 떠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니 중광단의 무장대 10여명이 함께 호송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결정이 되였다.    길은 조성환이 걸어본 그 길이였다.    서일이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음력 4월 10일, 양력으로는 5월 11일 일요일이였다. 서일은 기독교신자들이 례배당에서 조심스레 일요일례배를 올리고있는 것을 보았다.     조성환의 말과 같이 전해에는 서대문이 헐리웠다더니 올해는 흥례문(興禮門)이 헐리웠다. 그 자리에다 과연 총독부를 지으려는 모양이다. 한데 저건 또 어쩌려는걸가?  여러 인부들이 추춧돌같아보이는 것을  목도하여 어디론가 옮기고있는데 그를 지휘하는 자가 머리에 캡을 눌러쓰고 손톱만큼한 콧수염을 괘씸하게 자래운 왜놈이였다.    《개자식들! 저 추춧돌까지두 략탈하는거냐.》     서일은 욕지기나서 한마디 던져놓고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놨다.    《어이구, 오셨네요!》    라철부인 기고(奇姑)가 서일을 자기 집에 반갑게 맞아들여놓고는 제 아들에게 빨리 아버지를 찾아 기다리고있던 귀한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려 집으로 오도록하라고 시켰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사이 라철부인은 지금 만주에서 살고있는 교도들의 형편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묻고는 총독부의 통제에 들어있는 남도본사의 근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때는 대종교의 핵심간부들인 김 헌(金獻ㅡ金敎獻), 오기호(吳基鎬ㅡ吳赫), 류 근((柳瑾) 등이 라철조교와 함께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장차 구국항일운동을 전개할 지역은 만주지역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많은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게끔 동원시키고있는 상황이였다.    조성환이 말하던바와 기본상 같았는데 이 내린 후로 교도들의 반발은 더 커가면서 여러 가지의 종교활동들이 은밀히 계속 진행되고있다는 것이 서일이한테는 귀맛좋게 들리였다.    《암 그래야지요! 머리숙이면 결국 지고마는겁니다. 종교통제안을 내놓긴했어도 일제는 결코 배달의 얼을 멸살하지 못할겁니다!》    서일은 부르짖었다.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조국땅에서 활약하고있는 교도들의 완강한 반항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직접 감지한 것이다.     좀있으려니 라철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와줘서 고맙소.》    《의레 취해야 하는 거동인데 고맙다는게 웬 말씀입니까.》    《나는 아우가 제때에 당도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했었네.》    《조선생께서 수고하신 덕분에 저의 이번 환국은 순리로왔습니다.》    서일은 겸하여 그지간 만주에서는 별 사고없이 대종교의 사업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여 간다고 알리고나서 갑작스레 천궁령선식을 하게 되는 리유가 뭔가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이에 라철은 서일을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고 總本司 典講으로 전임시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典講이면 교리를 연구하는 직책인것으로서 이는 사실상 서일본인도 마음속 바라는것이였다. 라철은 이같이 알려주는 한편 제2의 도통(都統)을 승계(承繼)할만한 적임자문제를 놓고 그의 의견을 청취하려했다.     서일은 량미간을 그러모았다가 입을 열었다.    《도교사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개운치가 않구만요. 왜서 갑작스레 승계문제를 내놓으십니까? 그리해야만 하는 리유가 대체 무엇인데요?》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례의 망케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여 오늘의 업수임을 받고있는거네.》    《그것이 어찌 도사교님 한분의 책임이라 하오리까? 그리 생각지를 마십시오.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봅니다.》    《아닐세.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여덟해에 빌고 원하는대로 한얼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번 입어서 장차 뭇사람을 구할 듯 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갸륵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했네.》    《은혜를 갚지 못한것이 어디 도사교님 한분뿐인가요.》    《온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길에서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것 같네.》    《그리 생각지 마십시오. 사실말해 죄를 받아야 할 사람은 도사교님도 저도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한 사람 바로 우리의 이 대교를 나락에 떨구려드는 적 총독부의 총독 데라우찌 그자인겁니다. 그자의 통제령을 도까비의 호곡성으로 치부합시다. 그러면 단걸요》    《과연 그럴가.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 한데 그놈의 호곡성이 숨통을 죄이니 문제가 된단말이요. 안그런가?.... 그래서 나는 교를 계속 이끌어갈만한 적임자가 있어야겠다고 새로이 생각하게 된거네. 아우를 놓고 보면 모든 면이...》     언중유언(言中有言)이라 라철이 하는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가 자기는 장차 자리를 내야 할 테인즉 도통까지 승계(承繼)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고 속심을 내비치는 것이여서 서일은 단호한 투로 사절했다.   《도사교님의 의사를 충분히 리해할만합니다. 저를 그같이 신임하고 믿어주시니 고마움 이루말할수 없습니다. 한데 저로서는 놓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중광단의 사업 그것말입니다. 저는 맘먹은대로 그것을 완전 무장단으로 만들어내고말겁니다.》    이러자 라철은 량미간을 찌프리며선 안색이 흐려지는것이였다.   《무장단으로 만들어서는?... 환경과 시기에 위배되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 화를 자초할 수 있네. 그래서 나는...》    서일은 저으기 놀래는 눈길로 그를 다시보았다. 전날까지도 중광단이 무장단체로 발전하기를 바라던 사람이 오늘 왜 태도가 급전한걸가?...그가 너무조심하는 것 같으면서 종잡기 어려운 의문이 갈마들기 시작했다.    《한얼님은 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르기를 하셨으니 그건 정성의 근원이 아니겠소.》    부딛침을 금하라! 라철은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륵한다는건 승산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일로 느껴져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대종교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이 점점 더 가혹해질것이 예상되니 어쩌면 앞이 암담하게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서일은 한번 먹은 마음을 돌릴고싶지 않았다.   《중광단은 민중의 반일단체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무장단체로 태여나야 합니다. 광복은 어느때 가서든 무장투쟁으로만이 이루어질것입니다.》    서일은 속을 박아 말해놓고 도사교께서도 알고계시다싶히 만주에서 구하기 쉬운건 총보다 말이 아닌가 말은 벌써 적잖게 사들이여 그 수가 벌써 거의 500필에 이르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니 그많은 것을 무슨 수로?... 군자금이라도 거두어 들인건가?》    《군자금이라며 거두지는 않았습니다만 대종교인의 자원적인 모금에 의하여 말을 그만큼 사들일수 있었던겁니다.》    《오, 그래? 그런걸 난 모르고있었군!》     라철은 눈확이 점점 붉어났다.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발동되였음에 감격하고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다른말은 더 하지 않았다. 폭력적수단으로 5적암살을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뼈저린 교훈을 갖고있는 그는 내가 못해냈다고 다른 사람도 못해내랴 하는 것 같기도했다.     두 사람은 화제를 종교사업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밤가는줄 모르게 지속된 허심탄회 끝에 대통을 극구 넘길시에는 지금 남도본사에서 도강사(都講師) 직무를 맡고있는 김 헌(金獻)선생에게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으로 의견을 맞추었다. 서일은 그의 위인됨을 알고있다.    김 헌(金獻)은 1868년 7월 5일생으로서 초명은 교헌(敎獻)이고 본관이 경주인바 名門巨族이였으며, 일찍이 18세때에 庭試文科 內科에 급제하였고, 그후 권지부정학(權支副政學), 예조참의(禮曹參議), 예문관검렬(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수찬(修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을 지내다가 36세에 나던 1903년에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을 지냈고 42세때인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奎章閣副提學)으로서 國朝寶鑑印委員 등을 력임하였으며 嘉善大夫까지 승진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倧理와 倧史를 연구하였다.    1912년에 倧經會에서 , , , , , 등 간행을 주관하였고 1914년에는 , , 등을 저술했거니와  종래의 사대주의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여 대종교리와 종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연박(淵博)한 학문으로 고거(考據)에도 권위가 있는 그는 韓國史에도 손꼽는 대가였다.        1914년에 尙敎로 陞秩하여 남도본사전리를 1년간 맡았던 김 헌은 지난해에 都講師로 된 것이다.      서일은 라철을 내놓고는 상교 김헌이야말로 도사교에 오를만한 적임자라 여기였기에 이번 天宮靈選式에 그가 뽑히기를 기대했다. 자신이 항일독립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 군사학연구에 몰두하고있거니와 교리에 대해서도 또한 남보다 연박한 지식을 갖고있음을 스스로 자인하면서도 종교직에 높이 오를 것을 바라는 서일이 아니였다. 누가 무엇을 맡던 그것이 잘되여가기만하면 대사필이라 여기였다.       사흘만인 음력 4월 13일에 남도본사에서는 天宮靈選式을 거행하였다.      라철주교를 따라서 이날의 행사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김헌과 최전 그리고 서일해서 모두 네사람이였다. 이 의식에서 大司敎 第二世의 大倧統을 김헌에게 전수함과 동시에 서일은 經閣의 特選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최전은 司敎로 초승(超陞)된 것이다.     라철 조교의 말대로면 이것은 신명(神命)을 묵승(黙承)하는것이였다.     《내 몇가지 간곡한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오. 우리 종문(倧門)의 뒤를 이을 이들은 항상 공경하여 한얼을 받들며 반드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이 교를 널리펴서 한님의 공덕을 빛내주시오.》    《어련히 그래야지요.》     김헌의 응대였다.    《그 업을 좇아서 사람의 벼리를 떨칠것이요 마음을 놓아서 아무나 속이지 말며 기운에 불려서 함부로 떠들지 말아야할것이요.》    《옳은 말씀입니다.》     최전역시 머리를 다소곳이 숙임으로써 귀담아 들음을 표시했다.    《나쁜 생각으로 정치에 덤비지 말며 못된 버릇으로 법률에 범하지 말아야하오.》    《그도 옳은 말씀인가봅니다만 문제는 정치나 법률이라는 것이 누구의 손에 장악되는가 하는겁니다.》     서일은 자기의 견해를 내비치였다. 계급사회라면 정치라는건 자연히 생기게 되는것이고 법률또한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인데 통치수단으로서의 그것은 사실 누구의 손에 장악되는가에 따라서 그 역할도 가치도 달라지는 것이다. “권력은 법률이 아니다”는 독일속담이 있는가 하면 “권력이 있는 곳에 법률이 있다”는 로씨야속담도 있다. 대포앞에서야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절박할 때면 법률도 신앙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서일은 잠간 숨을 드리긋고나서 자기생각을 피력했다.     《일본 죠슈군벌출신의 총독이였던 데라우찌를 보십시오. 그자는 “조선사람은 법을 지키던지 아니면 죽어야한다”면서 혹독한 무단정치를 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자의 폭언을 따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대로 따를 수야 없네만 내 말인즉은 못된 버릇으로 법률에 범해 스스로를 망쳐서는 아니된다 그 소리네. 교인들에게 가르쳐주게. 늘 잊지 않게끔 잘 가르쳐주게.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과 미혹에 가까이말고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즐지 말며 교도들을 믿고서 공론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구차한 것을 없수이 말라고말이네.》    《그리해야지. 명심해 그리해야지.》    《교육은 항상 필요한거요.》     김헌과 최전이 수긍하여 각각 태도를 표명했다.    《사람마다 안정으로써 몸을 닦으며 청직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로써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늘이고 자식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돈독하게 도와주고 안으로는 인지를 닦으며 밖으로는 신의로 사귀여야하는거네.》     라철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계속하여 진실한 정성은 일찍 팔관(八關)의 재계가 있으며 두터운 풍속은 또한 구서(九誓)의 예식을 전하였고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물결(慾浪)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覺門)이 열림을 얻게 하라면서 이와같이 한다면 한울에서 복이 내릴것이요 만일 이를 어긴다면 되려 한얼께서 벌을 내릴것이니 조심하고 힘써야한다고했다.  보귀한 타이름이였다.      서일은 초면인 최전(崔顓)을 존경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형께서는 고향이 려주라지요. 약관시 순천 송광사에서 삭발하고 수도를 하셨다는 얘기를 제가 들은적있습니다.》    《그렇소. 나야 한때 중노릇을 했었지. 금암선사 나천여 문하의 고납(高衲)이 되어 경월당덕민(擎月堂德旻)이라는 호명을 받은거요.》    《어제 도사교님께서도 그러시고 저 손암대형(巽庵大兄)께서도 그리하시는 말씀이 을사년간에 도형께서도 그분들과 함께 유신회에 가담하셔 구국운동을 하셨답디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 시절 몸을 고향에 두고 그저 일개 훈장으로 애들에게 글이나 가르치는 정도였습니다. 선배님들의 업적을 따르려면 멀었지요.》    《거 웬 말을 그리하시오. 업적을 따르려면 멀었다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자체가 계몽이였으니 그게 바로 업적이 아닌가. 아우가 이미해온 일과 지금에 하고있는 사업들을 보오만 그 실적이야 누가 따르리오. 나이를 따지면야 글쎄 내가 선배라겠지만 아니되지.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잖소. 아우가 중광단을 세운 그 하나만 놓고 봅세. 그것은 우리 대교의 자랑이자 영광이 아니겠소. 우리한테는 자신의 부대가 있게 되었네. 력사에 이름을 남길 대종교부대가. 그것이 현실로 되어가거늘 대종교에 몸을 담근이 치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으며 자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그래 어디있겠소. 안그런가? 하하하!...》     최전은 스스로 흡족해하면서 파안대소를 하기까지 한다.    《중광단을 그같이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우가 하는 일이면 어쩐지 믿음이 생겨서 해보는 소리네. 우리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대담히 해내게.》    《격려의 말씀으로 줘서 고맙습니다. 의례 그래야지요.》    서일은 기분좋게 응대했다. 그러면서 대종교도들 앞에, 자기를 믿어주는 모든 동포들앞에서 낙언을 지켜내야 할 자신의 책임이 그 누구보다 무거움을 그는 다시한번 절실히 느끼였다.    서일은 天宮靈選式이 끝났어도 남도본사에서 대종교 지도급인물들과 하루를 더 함께 보내면서 장차 해나갈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연구했다. 라철은 안색이 퍽 밝아졌는데 보아하니 행사가 뜻대로 되어 마음이 놓이도록 흡족한 모양이다.    사흩날에 서일은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함흥에 있는 장인과 장모님을 보고 고향에도 들려야했다. 생부생모는 서일이 큰조부님을 모시고 만주로 가자 함흥에서 돌아와 제 땅을 지켜 거기에 남으신 작은할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다시금 시작한 것이다. 가담가담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여러해나 가보지 않아 자식된 직분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 또한 그지없었다. 왔던김에 꼭 들려봐야 했다.    라철은 장남 정경(正經)과 차남 정문(正紋)더러 서선생을 함흥까지 잘 모셔다드리거라고 시켰다. 라철의 셋째아들 역시 대종교인이였는데 이름이 정채(正綵)고 두형과 마찬가지로 參敎였다. 그는 아버지의 신변을 지키느라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곧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게 될 류근(柳瑾) 대형이 자기도 서일을 원산까지 바래다주리라면서 자진 따라나섰다. 서일은 자기보다 썩 년장자인 계세(季世)의 지사(志士)의 바램을 받으니 어쩐지 마치도 태풍에 큰산을 등진 것 같이 속이 든든해지는것이였다. 류근은 龍仁사람으로서 통재(通才)의 석학(碩學)이요 일찍 서일이 그처럼 애독했었던 “皇城新聞”의 主筆 또는 社長을 하다가 中央學校 校長을 지내기도 한 분이다. 그역시 庚戌國恥를 당하자 모든 직을 버리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교의 規制起草委員으로부터 本司典務와 檀祖事考 編纂委員으로 여직 사업을 계속해온 것이다.    《아우는 독립혁명은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 어떠한 청원이나 의회의 투쟁으로는 절대안될것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 육탄혈전만이 가능한것입니다.》         류근은 서일의 결기있는 대답을 듣고 보니 속이 개운한지라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는 어깨를 다독이며 련신말했다.   《옳은말일세! 옳은말이여! 》  
149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4. 댓글:  조회:4583  추천:1  2011-10-1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4.    단기 4373년. 서기로는 1916년.    이해는 조교 라철이 54세요 서일은 36살을 먹는 해였다.    한국의 國祖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인 檀君. 일종의 開國神으로서 기원전 24세기경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그가 실재한 인물인지 아니면 그 시기의 특정된 하나의 통치집단을 의미하는것인지 딱히는 알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이 한국민족의 조상으로 신봉되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檀君을 태초임금으로 믿고 숭경하게 만들어진것이 곧 대종교가 아닌가.    경전의 하나인 에다는 단군을 신격화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神者는 桓因과 桓雄과 桓儉也              (신자) (한인) (한웅) (한검야)       풀이를 이렇게 했다.      환(桓)의 본음은 이오 인(因)의 본음은 이다.    에  한울(天)을 가론 (桓)이니    곧 (大一)의 뜻(義)이라. 합하여 말하면    한인(桓因)은 이오,    한웅(桓雄)은 이오,    한검(桓儉)은 이니라.      서일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신교는 조선사람 고유의 민족교다. 라철조교가 왜서 7백여년간이나 닫혔던 교문을 다시열고 지어 교명을 바꾸면서 까지 이 교를  살려냈는가? 목적은 민족혼을 환기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기 위함이 아닌가. 이 교를 믿으면 일정(日政)에 반발할것이며 대일적개심(對日敵愾心)을 환발할 것이다. 교도는 다가 뭉치여 국권회복에 선봉이 되어 싸울것이다.    일제는 아무때든 이를 눈치챌것이다. 한 민족을 동화시키려면 그 민족의 정신을 압살해야 하고 그러자면 오직 그 나라의 력사를 없애고 그 민족의 민족성을 끊으며 나아가서는 언어, 례절, 문물, 풍속... 각 방면에 걸쳐 그 독립성과 고유성을 뿌리뽑아야 된다는 것을 그자들은 깨달을 것이다. 한데 독립성과 고유성이 집중된 것이 바로 민족의 종교가 아닌가. 그러하니 우리의 이 대교가 장차 어떤 운명에 놓일가?...》    계속 더 생각하자니 불길한 예감만 뇌리에 고패칠 뿐이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추위가 터지려는 모양이다. 드팀없이 찾아드는 계절이야 무슨 방법으로 막는단말인가.    11월중순의 어느날, 라철 조교는 돌연히 불행한 통보를 받게되였다. 조선에 있는 남도본사로부터 이라는 것을 전해온 것이다. 이른바 朝鮮總督府令 第83號로 내린것인데 찍혀진 날자를 보니 1915년 11월 9일(음력 10월 1일)이다.    그것을 갖고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남도본사에서는 총독부의 이 종교통제령을 받자 당황한 나머지 어쩔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처리방안을 품의(稟議)하기 위하여 급급히 사람을 띠워 만주 청호의 총본사에 와있는 라철에게 알리는 판이라 한다.    《그렇겠지! 엄한이 끝내 덥치는구나!》     서일은 예감이 있던차라 이 일을 알자 탄식했다.     총본사에 있는 교도는 모두가 얼굴에 어두운 구름장이 덮이였다.     《예측했던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지성해결함이 가하다.》     라철은 가라앉듯 침중한 어조로 한마디 부탁하고는 總本司 總典理 강우와 함께 남도본사에서 온 사람을 돌려세워 급히 환국하였다.       일제의 수법은 지독했다. 大倧敎가 국내에서부터 그 근거를 만주로 옮긴 후 만주를 비롯한 중국본토와 로씨야에 이르기까지 널다란 령역에서 포교를 하여 짧은 시일내에 교도 수십만을 획득하였을뿐만아니라 독립운동을 하고있으니 이에 대경실색하여 이 교를 대처할 정책에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는 페교처분할 것을 결정하고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 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철은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에 이르자 그곳 여러 교우들로부터 그지간 정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 그들역시 포교를 열심히 하였기에 남도본사는 교도수가 썩 늘어났고 각종 활동도 빈번했다고 한다.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이 뒤를 이어서 타교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현재 조선에는 수자적으로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일제는 그들에 대하여 배일파라 억설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목사의 전도기관을 신설했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건바로 한국인 교도들을 저들에게 동화시켜보자는 수작이지요.》    지교(知敎) 엄주천이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한국인 교도로 하여금 서양선교사와 리탈하게 한 다음 저들 일본측으로 돌아서게 리간책을 쓰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고있겠습니까. 가면적인 허위책이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음모가 드러나 신도들을 반감만 사게 만들었지요.》    사실 그러했다. 목적한 것이 빗나가게 되자 일제는 박멸을 기도하여 소위 데라우찌총독 암살의옥(暗殺疑獄)을 일으켜 수백명의 중진급 교도들을 불법체포하여다가 고문할뿐만 아니라 악형을 가했고 지어는 사형 또는 불구페인이 되게 백계를 다하여 탄압에 광분하고있는 것이다.    라철의 사촌아우이자 참교(參敎)인 나주영(羅宙永)이 고발쪼로 말했다.    《교회당이며 설교소며 강의관같은 것을 허가없이는 일체 설립하지 못한다구했답합니다. 신교는 믿어도 된다해놓고서 아무럼 이정도로 까지 억압하는게 어디있습니까. 어떤데서는 일년이 지났는데도 건설허가를 받지 못하고있답니다.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가면서 고의로 시일을 지연하는게 빤하지요.》    《못난것들!》     라철은 일제의 무도(無道)한 만행에 격분했다.    《어디 그러고만있는다구요. 그자들은 전도회, 복흥회, 기도회의 례배시면 밀정을 밀파하여 감시를 하군한답니다. 혹 설교때 라는 언사가 나오기만 하면 련행하여 고문을 함은 물론 명망있는 교역자에게는 항시 형사나 밀정이 뒷따르면서 감시를 한답니다.》      이번에는 안영중(安英中)이 알려주는 말이였다. 그역시 참교(參敎)였다.     라철은 불교의 사정은 어떠한가고 물었다.    《불교라해서 편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찰의 토지가 그자들 손에 넘어가나답지 않거니와 사사건건에 일본고문이 나서고있답니다.》    참교(參敎) 김서종(金書鐘)이 이같이 운을 떼고나서 그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불교는 조선에 들어온 이래 1500여년간에 교세의 흥체(興替)도 빈번하였지만 高僧道師가 속출하고 법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사찰소유의 림야(林野)와 토지가 거대한 부력을 형성하였었다.    일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우선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여 그 재산을 반관적(半官的)인 소유로 만들어 어용화하고 승려교육기관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하여 재산을 관리하고 감독하게했거니와 지어 주지(主持)를 선출하는데도 무단적인 간섭을 했던 것이다. 중론(衆論)에 의하여 선출한 주지(主持)라하더라도 일제당국의 허가를 얻어 담임케하고 일반 主持就任認可申請이 제출되면 사찰담당관서에 그의 신변조사를 하게했는바 항일기미가 조금치라도 있기만 하면 취임을 불허했거니와 설사 취임이 허가된 자라할지라도 그 인가를 취소하고 오직 부일맹종도배(附日盲從徒輩)만을 그 직을 맏도록했던 것이다.   《왜정은 우리의 대교에 대해서만은 지어 페교처분까지 내리는 상태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상교 강우가 우울한 심정에서 내놓는 말이였다.    《왜정이 페교처분을 내렸다하여 곰상히 받고있을 일이 아니지 않는가. 능력이 미치는한 구원책을 써봐야 할것이오. 안그렇소?》    라철은 이렇게 태도표시를 해놓고나서 여러모로 생각을 굴린 끝에 마침내 12월 21일자로 총독부에다 신교포교규칙(神敎布敎規則)에 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물론 그것은 대종교가 神敎인데 왜서 무단적으로 금지시키느냐 하는 항거의 표현이기도했다.    신청서를 받은 총독부측은 종전의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일반적인 종교단체로 보아온 자그마한 신앙단체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였으나 오직 大倧敎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종교는 神敎가 아니라는 리유를 만들어 고의적으로 신청서류를 각하(却下)하는것이였다.    《“대종교는 종교유사단체”라구요? 그래서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구요? 원, 어쩜 그리두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답니까?》    김두봉은 신청이 각하된 리유를 듣고 몹시 억울해하였다.    다른이들도 다가 그러했다.    총독부는 집회나 시교당설치를 허락치 않는건 물론이요 “대종교인은 자유가 없다”고 까지 했다.    《세상에 이런 억압이 어디있는가?》    라철의 조카 라정수(羅正綬)를 비롯한 나어린 신도들은 억울함이 극에 이르는지라 주먹을 어스러지게 부르쥐면서 총독을 찾아가 질문을 해보자고까지 했다. 되지도 않을 일이였다. 찾아간들 총독부에 한발짝 들여나놓을가. 일제는 대종교도들은 교내에서나 교밖에서까지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어는 조교의 수도(修道)행사까지 저애하는 한편 구속하겠다고 위협을 해오기까지했던 것이다.        《꼬리가 생겨 거치장스럽구나.》    라철은 헌병과 경찰이 자기를 미행감시하고있음을 발견고는 대단히 언잖아했다. 일제가 그럴수록 반발심만 일었다. 라철은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 네놈들이 아무리 어째도 나는 내할일을 하리라했다.    그것은 또한 대종교를 이끌고있는 지도층 모두의 배짱이기도했다. 몽골침략자에 의하여 神敎가 수백년간이나 빛을 잃은것만도 통분한 일인데 야만스러운 네놈들이 이제 우리 이 배달미족의 종교를 압살하려든단말이냐, 네놈들이 대체 뭔데 하면서 그 어떠한 방법으로든 교를 살려내야 한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들은 비밀적으로라도 포교를 계속할것이요 종교활동을 이어나아갈것이라했다.           서울에서 활기가 흐르고있는 곳은 이방인의 땅으로 알려진 이태원(利泰院)였다. 자국민이 아닌 그네들이 되려 활개를 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갔던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밑이 다가오니 서울시내 다른구석들도 전만은 좀 명랑한 기분이 감드는 것 같았다. 고달픈 역경속에서도 한해에 한번맞이하는 설명절만은 즐겁게 쇠보내보곱푼 가냘픈 소망이 백성들의 맘속에 있었기 때문이였으리라.    라철은 호석 강우(湖石 姜 虞), 손암 오 혁(巽庵 吳赫) 등과 토론하여 정월초하루날 남도본사에서 三神殿에서 天祭儀를 특행하기로했다. 오혁인즉 초휘(初諱)는 기호(基鎬)이니 라철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진력하다가 병오년에 乙巳五賊을 동시에 주살(誅殺)하려했고 그것이  실패하니 라철과 함께 형을 선고받아 진도로 정배(定配)하였다가 5개월만에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여 돌아온 그 사람이다. 대종교 중광이래 독신(篤信)하여 시교(施敎)에 전무(專務)해온 그는 1914년에 尙敎로 승질(陞秩)된것이다.    준비가 다 되자 라 철, 강 우, 오 혁을 비롯한 일행 여럿이 강화도를 향해 출발했다.      강화도! 경기도 서해안 강화만에 있어 강화군을 이루는 섬. 고려가 전재(戰災)에 빠져있었던 13세기, 한때 몽골의 침략에 못견디여 수도가 이리로 옮겨옴으로 하여 번화해지기는했지만도 늘 공포속에서 전전긍긍하였던 곳. 자랑보다는 비운의 력사를 더 지니고있는 이 강화도는 동서너비가 16㎞, 남북의 길이가 28㎞이며 그 둘레가 99㎞나 되는 큰 섬이다.    강화도에는 마니산(468m)을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여 혈구산, 별립산, 진강산 등 험한 산들이 솟아있음으로 이곳은 천연의 요새지였다. 강화도는 또한 김포반도와 200m~1㎞를 사이에 두고있으나 바다로 막히여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수 없는 곳이였다.    섬의 중심지는 강화읍이다. 이 강화도는 유적도(遺蹟島)로서 마니산(摩尼山) 산정에는 단군성지가 있는 것이다. 참성대(塹星臺ㅡ祭天壇), 전등사(傳燈寺), 연미정(燕尾亭), 충열사(忠烈祠), 표충단(表忠壇), 고려산(高麗山)...   《오, 강화도야. 네 몰골이 왜 이다지도 초라해진거냐? 력사가 창상(創傷)을 남겨서였더냐?... 몰락한 최가여! 무너진 무신이여!》   라철은 강화땅을 밟고보니 가슴이 답답해나면서 각가지 착잡한 생각이 타래쳤다. 몽골침략자에 의한 수도이전(首都移轉), 60여년간이나 고려의 정권을 쥐고 흔든 최가정권의 몰락과 100여년간 존속했던 무신정권의 붕괴를 생각하면서 멀리 흘러가버린 력사를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렸다.   《애환이 얼룩진 력사를 남기고 사라진 고려! 어쩌면... 아, 그렇지! 그럼에도 공전절후의 대무장가가 났었지. 그것이 다시는 없을 옛말로만 영원히 되고말건가.? 오늘 무장(武將)이 새삼스레 그리워짐은 왜서일까?》   강우가 말을 하자 오혁이 그에게 물음으로 동을 단다.   《고려라? 자네는 고려때 무장 최충헌을 놓고 하는 소리아닌가?... 하긴  옛이야기로만 되고있으니 그리워질수도 있는거야. 공과 죄로 얼룩져 시시비비도 많은 무장이지만 현세에는 그런 무장마저도 전혀 나타나지을 않았으니.》    최충헌(崔忠獻)은 관연 력사상 공전절후의 대무장가였다. 고려 19대왕 명종(明宗)때로부터 고종(高宗) 6년까지 5왕을 지나면서 무려 24년간 정권을 독장(獨掌)한, 그가 장군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그의 권세를 대신 틀어쥐고는 영종, 희종(熙宗) 그 두 왕을 페하고 대살육과 대발호(大跋扈)를 행하였던 세월은 국사가 전혀 살풍경으로 화한 동시에 조정은 최씨의 왕국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후세사람 安自山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148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제3부 3. 댓글:  조회:5323  추천:2  2011-10-1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3.    우뚝솟은 백두! 웅위로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장백산맥은 마치 꿈틀거리는 거룡인양 줄기줄기 기복을 이루면서 저 멀리 아득히 뻗었는데 산을 덮고있는 망망한 림해는 꿈을 꾸는 듯. 하지만 그 누가 알랴, 열혈이 끓는 단군의 자손들이 지금 망국의 원혼(冤魂)을 풀기 위해 천고의 잠을 깨우면서 여기서 웅지를 키우고있음을!        아직 30대에도 채 이르지 않은 두 젊은이가 장백산맥의 저쪽 서북간도를 동분서주하고있다. 하나는 대한제국의 시위대부교(侍衛隊副校)로서 한때 의병장이 되어 피를 흘리며 싸워 온 올해 27세의 김규식, 다른 한 젊은이는 참교(參校) 김찬수다.       《연기우, 강기동, 김민수, 조인환, 왕회종...내가 저 세상에 가신이들의 안식을 빈들 명복을 빈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뒤를 꼬지 못해 왜놈한테 나라를 끝내 빼앗기고 말았는데. 가신이들이 구천에서 무능한 이 인간을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구나.》    희생된 동지들을 다시생각할 때마다 김규식은 자책에 잠기군한다. 그래서 한숨 쉬군한다. 적의 손에 먼저희생된 그들은 모두가 생전에 그와 혈맹을 맺앚던 경기의병(京畿義兵)의 거장들이였다. 의병항쟁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김규식은 손잡고 싸우던 그들이 속속 적의 마수에 걸려 순국하니 본국내에서는 그 이상 별 도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재기(再起)를 속다짐하여 다른 수 많은 의병장들의 뒤를 따라서 여기 만주땅을 향해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한데 뜻과 같이 재기(再起)가 하루속히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보여지지를 않았다.    《여기서만 맴돌지를 말고 우리 한번 동간도쪽으로 가봄이 어떠할까?》    김찬수가 내놓는 의견이였다.    동간도(東間島)란 용정과 연길, 왕청일대를 가리키는것인데 김규식은 그러나 여직 그 어디에든 광복을 위해 싸울수 있는 무장단이 조직되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지라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만다.    《거기간들 앞이 보일까, 그 꼴이 그 꼴이겠지.》    김규식은 기분없이 토해놓고나서 한마디 더 보태는것이였다.     《빈 손으루 어떻게 싸운단말인가. 우선 무기를 구할 길도 없고. 그래 내가 거긴들 뾰죽한 수가 있겠는가 하는 그 소리야.》        《그럼 어찌할까. 그냥 이멋으로 류리표박 문전걸식 할 수야 없잖아.》    두 젊은이가 이러면서 이젠 어쩌면 좋을지 유예미결(猶豫未決)하고있을 때였다. 나이가 10여살 위인 초면의 장년 하나가 지나다가 무심결에 그들이 주고 받는 소리를 잡아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책없는 참견입네만 젊은이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나?》    《객은 누구신데?...》    김규식은 콧등에 검은테안경을 건 그를 눈여겨보면서 되물었다.    《나 서울서 왔는데 성은 홍(洪)가고 이름은 충희라 하오. 충성 충자에 기뻐할 희자.》    대방이야 경계하건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장년은 자기의 성명을 고스란히 알려준 후 입을 다시열어 부접좋게 말을 계속잇는것이였다.    《보아하니 우국단심에 월경한 젊은몸에 거취를 정하지도 못한것 같은데... 혹시 의병으루 싸우지들 않았소?》    《예. 싸웠지요. 건데 어른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이번에는 김찬수가 의아쩍어하는 빛으로 되잡아 물는다.    《제 신분을 이마빡에 찍었으니 아는게지. 생각해보게. 이 만주에 의병을 지내다가 온게 어디 자네들뿐인가.》    홍충희의 말이였다.    8년전이였던 1907년도는 일제의 가 조선인민을 극도로  격분시켜 반일의병투쟁을 야기시킨 한해였다. 일제침략자들을 격멸소탕하자는 구호를 들고 무장투쟁을 먼저시작한 것은 중부조선일대였다. 그해의 8월 1일에 거세찬 군인폭동이 일어난 뒤를 이어 3일에는 충청북도 청풍에서, 4일에는 경기도 양근지방에서, 5일에는 경기도 지평에서... 이리하여 제천, 충주, 죽산, 장호원, 려주, 강릉, 앙양, 고성, 통천, 섭곡 등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 정형에 대해서 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였다.             홍충희는 그때 여러 의병진을 돌아다니면서 과 을 써주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널리 살포하고 선전하여 백성과 유생들을 반일의병항쟁에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구국항쟁에 목숨바쳐 싸우리라 맘먹은 피끓는 사나이였다.       지식인인 홍충희는 “한일합방”이 되자 왜정(倭政)에 불만을 품고 구국의 길을 모색하려고 만주로 건너왔다. 이 계단에는 많은 애국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김삿갓모양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객이였다. 처지가 같은지라 동정심이 생긴 그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충고했다.    《세월이 이런데 타발한들 무슨소용있겠소. 안그런가? 그렇다구 비관은 말게. 그런다면 앞이 점점 더 막막해질 뿐이네.》    《글쎄요. 누구를 타박하겠소만은 건너오고보니 여기서도 재기를 할만한 기운은 그리 보이지를 않아서 죄쳐보는 소리였습니다.》    《그 기운이라는게 어느건지 모르겠소만 그걸 누가 만들어주겠나. 행운은 바랄것이 못되니 차라리 분투를 합세. 그런다면 앞이 트일거야.》    《홍선생님의 그 말씀 과연 옳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분투하면 앞이 트이겠지요. 비관은 절대안가질텝니다.》    세 사람은 몇마디 주고 받는 사이 의기상투(意氣相鬪)함을 느껴져 마침내 고락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극친한 동지로 사귀게 되었다.    한편 지난해에 왕청을 떠난   성묵이와 이홍래는 각 독립운동진영의 사정을 료해하는라 고행(苦行)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주각지를 돌아다니노라니 지금도 가끔 괴나리보짐을 한손에 달랑 든 행객이나 정처를 잡지 못해 남부녀대로 류랑하는 동포난민을 어렵잖게 만날수 있었다. 비감과 우수만을 던져주는 그러한 광경이 지속되고있는데는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정책실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총독부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전면개시했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수탈정책을 재편성하는 과정이였는바 결과적으로 농민층이 몰락하게 되었고 그러한 몰락은 불가피적으로 더 심한 외국이동을 유발시킨 것이다.    두사람역시 여러곳을 돌면서 보았지만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기분을 아직은 크게 맡아내기 어려웠다. 각지에 학교가 일어서서 민중계몽에 치중하는것이 보편현상이였다. 물론 무관학교로 명명된 것이 몇군데있기는하나 무기의 불비로 화성대 몇자루와 목총을 들고 하는 훈련이니 어설펐다.        집안과 류하현을 걸쳐서 관전 방취구에도 탐방의 발길을 돌려보았다. 거기서 그들은 들끓던 열망이 가라앉음을 보았을 뿐이다. 일사보국(一死報國)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조국땅에서 의병항쟁을 오래동안 해오다가 남북만주로 진을 옮겨온, 력사가 가장 오랜 구국지사들과 연원이 깊은 유교학자(儒敎學者),사망한 유인석을 봐도 그렇다.  유린석  그가 이끌었던 일파는 재차의 대규모적인 의거를 기도하여 갖은 노력과 정열을 다해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나 물질문제(物質問題)는 인위적으로 기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더구나 이역에서 류랑하는 망명지사의 처지였으니 그네들의 포부는 사실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의 공상이요 덧없는 이국의 광음은 날이 갈수로 장사(壯士)의 빈발(鬢髮)을 쇠퇴하게 할 뿐이였다. 그러한즉 죽기를 한(限)하고 결심한 조국광복의 뜻과 왜적섬멸의 계책은 뜬 구름같고 흐르는 물과 같이 총총히 전환할 뿐이였다.    조맹선(趙孟善), 이진용(李鎭龍) 일파역시 사정은 같았다.      성묵이와 이홍래는 어느날 봉천(奉天)역에서 천도교(天道敎) 동포피난민을 만난적이 있다. 세 세대의 식솔이라는데 늙은이와 아이들까지 해서 무려 20여명가량 잘되였다.    《우리는 해주서 살다가 건너왔수다. 여지껏 경작해 온 토지문제같아나 소송을 걸었다가 그만 패소를 하고만겁지요.》     농부차림의 장정 하나가 자기들이 이주하게 된 리유를 직설했다.    《아니, 여지껏 경작해 온 토지문제라니?... 어떻게 돼서 소송은 하게 된거요?... 대체 누구하구서?...》    이홍래가 두서가 잡히지 않는 말에 리해를 못하겠노라했다.    《그건 조상전래의 우리 땅이우다. 건데두 거기다가 공장을 짓겠다느니 이제는 국유로 만든다느니.... 하긴 땅값이라구 주네만 그게 뭐요, 눈꼽재기만하게. 그저 막 강탈이지유. 억울해서... 그래 소송을 걸었더니만. 후!...》    그 농민은 낫날쥔 놈 낫자루쥔 놈을 당하는 수 있으랴하면서 같은 제동포끼리라 해도 어떠한 소송이 생길라치면 이쪽은 천도교도교인이라는데서 백안시하고 패소판결을 하기가 첩경이라했다.    《세상에 그런놈의 법이 어디메 있는가!》    《정녕 그러하다면야 이건 교도를 배척하고 타격하는게지 뭐야.》     성묵이도 이홍래도 적은 지금 법을 내놓아 그것으로 종교를 탄압하기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묵이 자기는 중국본토의 상황을 깊이 알아보리라면서 관내로 갔다.    그와 갈라져 왕청으로 돌아오던 이홍래는 길림에서 김규식, 김찬수, 홍충희와 만났다. 그것은 그 도시의 번화거리에 있는, 동족의 한 교포가 경영하고있는 음식집에서 초면에 우연한 만남이였다. 정오때라 저쪽 세사람이 상을 금방 받고 술을 마시려 할 때에 이홍래가 나타났던것이다.    《보아하니 저치도 우기같은 날객인 것 같구나!》    김규식이 무심코 제 짐작으로 내뱉었다.    《거 무슨소릴 그렇게 해쌌는거야. 누구가 날객이란말이여, 내가?》    이홍래는 그 소리를 잡아듣고 보니 감정이 탈렸다.    《보아하니 손님도 우리와 신세같아 뵈여 해보는 소리였을 뿐 악의는 아니였으니 노여워마시오. 그래 저의 점괘가 틀리는가요?》    《틀리잖구. 버릇없이 아무소리나 죄치지 말어. 속상해. 나 이 홍래는 젊은이 처럼 헤매치는 빈털털이 날객은 아닐세. 》    이홍래는 여전히 성난투로 저쪽의 변명을 일축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홍충희가 오해를 풀게하느라 웃는 얼굴로 이쪽을 술상으로 끌었다. 김규식은 잘못을 빌었다. 오해가 풀리자 이홍래는 사람들이 보통 동간도라 부르는 왕청, 용정, 연길, 석현 일대의 상황을 그들한테 알려주었다. 그곳에도 동포마을이 생긴지  몇해된다는 것, 마을마다 학교가 새로일어서서 어린이는 물론 성인문맹자까지 눈을 뜨게끔 계몽하고있다는 것, 특히는 대종교인의 활동이 그 어디보다도 활발히 전개되고있다는 것, 그 일례로써 중광단이 조직되여 해산된 의병들을 규합하고있다는 것 등등.    《의병들을 끌어모은다? 그래서는 뭘합니까? 》    김규식이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물어보는 말이였다.    《지금은 주로 학습을 하고있지. 일을 하면서.》    《우리 거기루 가볼까?》    이쪽이 말끝을 맺자 김찬수가 이러는데 김규식은 손사래를 친다.    《그런소린 하지두말어. 일하며 공부할거면 고향가서 하지 거게 가서 할건뭔가. 글이나 읽자고 모여드는건 득책이 아닌거야. 내 말이 틀리지 않아. 틀리지 않다니까. 그런데서는 자칫 쓸데없는 공담이나 판을 치기 십상이야. 원쑤놈하고 싸움은 못해내면서.... 허니까 가겠거든 어디 거기서나 가라구. 난 안갈테야.》    《아니 젊은이가?... 우리 하는 일 어떻게 보고?... 나 이 홍래가 월경의병장으루 조선일판에 만주일판을 다 다녔어두 자네같은 의병은 처음봐.》    이홍래가 다시노하자 홍충희가 좋은 말로 감정을 눅잦히란다.    《저 부위가 실은 정작 이역땅을 밟고 봐도 맘과같이 돼주지를 않으니 기분잡쳐 그러는겁니다. 리해를 해주시오.》    김규식은 의병으로 많이 싸우긴했어도 지금와서는 빈털털이로 된 신세요 이 멋으로 찾아가는건 거렁뱅이모양이라 남의 빈축이나 살 일이라며 조선으로 되돌아가리라했다. 김찬수는 그를 좇았다.    어떻다고 말을 할가. 떠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구름속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바람에 껌벅거리는 등잔불처럼 것잡기 어려워 보일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안정을 바라는 사람은 마치 불이 꺼져버린 잿더미같고 말라버린 고목같아 생기를 잃은 것 처럼 돼보일 것이다. 한데 만물을 그렇게만 보는건 잘못이며 적합치않은것이다. 멎어있것같은 구름속에 날개를 펼친 소리개가 떠있고 흐르지 않는 물속에 뛰노는 고기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大倧敎가 기껏 무엇을 해내겠는가?》    종교의 실력을 모르는 김규식이 가볍게 내친 말이였다.    대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내고있는가? 총본사가 청호로 옮겨온 후 대종교는 특히 전 만주지역에서 목적한바의 항일황동을 활발히 펼쳐가고 있었다. 김규식이와 김찬수가 돌아다닌 동간도저쪽만봐도 그렇다.    거기에서는 윤세복(尹世復)이 한창 포교를 널리하고있었다.    안희제, 김동삼, 이원식 등과 더불어 대동청년당의 핵심인물인 윤세복은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일운동단체를 모색하던 중 종교적인 단체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고유의 민족종교로 간판을 내건 대종교에 입교해야만이 항일투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1910년 12월에 敎祖 라철을 만나 입교하였던 것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항일독립운동의 화신이 되려는 결심을 품고 형 윤세즙(尹世葺)과 상의하여 부유했던 모든 가산을 총정리하여 1911년 2월에 함께 월경하여 만주의  환인현(桓仁縣)으로 정치망명을 단행한것이다.    윤세복은 1913년에 知敎로 임명되였다가 다시 尙敎로 승진했다. 그는 제1단계로서 그곳에다 東昌學校를 설립하고는 자신이 직접 교사가 되어서 혁명동지들을 모아 계몽교육에 착수했다. 다시말해 만주에 와있는 동포 제2세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지식수준을 높이는데 그 목적을 둔 것이다.    이같이 서간도  류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桓仁縣의 東昌學校는 다가 항일독립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대종교의 성향을 띤 혁명학교였다.        김규식도 김찬수도 고생스레 만주에 까지 오기는했어도 만주의 실태를 깊이 파악하지는 못한채 결국 환국(還國)하고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大同靑年黨과 光復團이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며 활약하고 있었다. 大同靑年黨은 1909년에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로서 당원수는 안희제, 이원식, 남 형, 김사용, 윤병호, 김기수, 김동삼, 윤세복 등 80여명이 되였다. 다른 한 비밀조직 光復團은 1913년에 채기중, 유창순, 류장렬, 한 훈 등 몇사람이 豊基에서 秘密結社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치력하던 중 대구에서 박상진, 량제안, 우재룡, 권녕만 등 일파와 합류하여 光復會라 개칭한 것이다.    김규식과 김찬수는 물론 이러한 비밀단체가 있다는것도 몰라서 접근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조선에 되돌아가 자체로 방법을 모색하여 광복운동을 해나갈 생각을 했던것이다.     그러나 홍충희는 생각이 좀 달랐다. 그는 대종교가 그저 일반적인 神敎는 아닐것이요 더구나 대종교인이 중축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은 기필코 그 사명이 계몽으로만 그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홍래와  성묵을 따라서 왕청으로 향했다. 우선 료해를 더 깊이 해본 후에 조선으로 건너가도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동도본사 도교사로서 책임이 있는 서일은 자기 관할내에 있는 여러 시교당건설을 지도하느라 돌아다니다가 왕청 덕원리에 있는 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 먼저 로인회에 가 거기 년세많은 독신의병들을 일일이 문안하고는 발길을 重光團室로 돌리였다. 거기서는 계화가 량현, 심권 그리고 박승익 등 여러교우들과 을 펼쳐놓고 한창 자유토론을 하고있는 중이였다.    그 책은 尙敎에 올라 지금 남도본사전리로 있는 김헌(金獻)이 지난해에 지은것인데 서일도 읽어보았다. 책은 神敎의 연원(淵源)을 력사적으로 밝혀 낸 값진 經典이였다.    서일도 몇마디 참견했다.    자유토론이 방금끝나자 이홍래가 들어섰다. 초면의 홍충희를 데리고.    《이렇게 찾아주시여 반갑습니다.》    서일은 홍충희를 동지로 여기면서 반갑게 대해주었다.     이홍래는  성묵이와 갈라지게 된 연유를 말하고나서 길림에서 구군대 육군부위 김규식과 참교 김찬수도 만나보았노라고 한마디 보태였다.    서일이 귀를 세우고 듣더니 몹시 서운함을 드러냈다.   《육군부위 김규식이라! 키큰 젊은이말이지요?... 옳군! 건데 왜서 그는 데리구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내가 여기에 있는걸 알면 꼭 올겁니다. 절대 그멋으로 돌아갈 사람은 아닙니다.》    이러자 이홍래는 자신이 미런했다면서 대단히 죄송스러워했다. 대종교와 중광단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도 단장인 서일에 대해서는 그만 까먹고 그들앞에 일언반구도 언급하지를 않다니 원... 자신이 민망할 뿐이다.   《나와 친분도 친분이려니와 우리 중광단은 장차 그런 자격자가 수요되는것입니다. 그는 군사지식을 갖고있거든요. 실전경험도 있을거구.》    서일이 그를 그리는 리유를 이같이 말하자 이홍래가 우쭐 일어섰다.    《내 당장 가서 데려올까.》    《이런 참! 그러지는 마시오. 때되면 다시봅시다.》    서일은 성격이 워낙 불같고 무겁한 그를 눌러놓았다...   서일이 모시고있는 큰할아버지 서장록(徐長錄)이  1835년에 출생했으니 이해 나이 팔순에 이르었다.  참으로  보기드믄 장수(長壽)요 잘 경축해야한다면서  마을의  시교회(施敎會)에서 주동적으로 그의 생일 잔치를 크게 차려주었다. 서일이 교인들에게 부담을 지우는것같아 자체로 차릴테니 그러지 말라고했건만 막무가내였다. 년년이 독신로인의 생일도 차려주지를 않는가, 장수하기만 하면 누구를 물론하고 잔치를 크게 차려주리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이날은 온 덕원리마을이 또한번 명절기분이였다.                  손자와 손부의 절을 받은건 물론이거니와 증손자와 증손녀의 절까지 받고보니 자기가 이같이 고령으로 살고있는 것이 행복하고 기적인것만같아서 서장록로인은 기쁘기가 한량없었다.   《여보게 아우. 자네 이제라도 집간을 일구게. 로댁이 있어 사는거허구 없이 사는게 천양지차일세.》    그가 이달문보고 하는 소리였다. 마을의 로인회에 의병독신이나 유생의 양반독신이 여럿되지만 어쩐지 그래도 친분이 더 두터운건 그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달문은 그 충고를 시종 들어주려하지 않는다.    《내 꼴을 좀 보시오. 이 외눈통배기 홀애비한테 어느 과부가 몸을 주자구할까. 이대로 늙어 살다가 껍벅 죽어버리는게 내 팔자외다.》    과연 고집불통이란 소리를 들을만한 그였다.    홍충희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자기는 아무때건 다시오리라면서.           한편 홍암대종사 라철께서는 년초에 還國하여 남도본사를 비롯한 조선국내의 포교정황을 다 알아보고나서 만주 청호 총본사로 되돌아온 후 모든 정력을 의연히 포교에만 몰붓고있었다. 가정을 멀리두고 있는 이같은 헌신적인 분투정신은 실로 모든 교직자의 구감(龜鑑)으로 될것이다.    음력 8월15일, 해마다 맞이하는  가경절(嘉慶節)이 돌아왔다.    서일은 이 명절을 전해와 마찬가지로 총본사에서 그와 함께쇠였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매양 그러하듯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각사(覺辭)를 뇌이고 잠자리에 든 서일은 그날밤 꿈에 삼도구 안산에 올라 황홀한 자연경치를 보았다.    《아, 嘉慶이로구나!》    저도모르게 감탄사가 목구멍밖으로 튀여나갔다.    그런데 깨고 보니 꿈이였다.    《嘉慶이였지! 왜 이런 꿈은 왔을까?... 오호라! 라철도교사께서 못줏고계시는 두글자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서일의 머리속에 온통 이 생각만 갈마들어 다시 잠을 이를수 없었다.    여러 도형들과 같이 아침식사를 할 때였다. 서일은 간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꿈에 주은 그 두글자를 라철께 드리였다.    《“玉殿金花嘉慶日”이라! 옳아, 과연 그렇군!》     라철은 서일로부터 “嘉慶” 두글자를 받고 무등 기뻐했다.     이날은 그가 하루종일 낯이 밝아지냈다.      總本司 天殿.     그 안에는 天祖影幀(天眞)이 奉安되여있다. 천진(天眞)이 본래는 총본사가 서울에 있었을 때인 1910년 9월 24일(음력 8월21일)에 처음으로 그곳 천전에다 봉안하고 祭禮를 지낸것이다. 그것은 당시 궁중화가였던 김씨가 모사(暮寫)한 것으로서 史的으로는 신라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솔거가 그린 것을 考證으로 삼고있는 것이다. 솔거는 그림에 각별한 소질과 취미가있었다. 그러나 농가에서 태여난 몸이라 가세가 빈한한탓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한배검께 지성으로 신원(新願)한 결과 感天의 靈驗으로 神筆을 얻어 꿈에 나타난 몰골을 그린 것이 그대로 내려온다고 전한다.           서일은 天祖影幀정이 모셔진 天殿을 향해 숙연히 머리숙여 願禱를 하고나서 대교의 현황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라철은 도교사로서 실로 많은 일을 해놓았다. 神恩의 大命을 받들어 1년간 성심원도한 끝에 대교를 중광한것이요 교를 관리하여 8여년간 그는 갖은 파란속에서 30여만의 교도를 얻은 것이다. 참으로 자랑할만한 성적이다. 그러나 교무행정면을 보면 교무의 크고 작은 것을 神政으로 처판(處辦)하였기에 아직 의회제도는 마련되지 않았거니와 홍범(弘範)과 규제가 현실에 맞지 않는것도 있는것이다. 이를 건의하여 장차 개정하도록해야지 하고 서일은 맘먹었다.       한편 그는 또 여러지역의 상황을 료해하고 돌아온 이홍래가 봉천역에서 법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를 당한 천도교피난민을 만나본 일을 말한 후로 그것이 가끔 상기되면서 속이 개운치 않았다.    《천도교인에 대해 그리도 심한 차별을 한다니 어찌되는 판이냐?... 이건 종교계에 엄한이 덥치고있다는걸 의미하는게 아닐가.》    불길한 추측이 다시한번 신경을 긁어내린다.    종교계의 형세는 과연 락관적이 못되였다.     天道敎는 조선에서 생긴 새교다. 갑오년(1894년)에 東學黨이 혁명의 선풍을 일으켰다가 외적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패하였고 主敎 孫秉熙는 망명생활 13년만인 1906년에 도오꾜오로부터 귀국하여 이전의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히였다. 천도교는 서울에 중앙총부를 두고 각지방에 敎區를 두었으며 自由平等을 敎理로 삼고 그를 주장하여 나섰다. 하기에 그것은 당연히 혁명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였다. 天道敎는 교육에 주력하였는바 각지에다 중학교와 강습소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교리를 선전했다. 그리하였기에 신도는 날로 증가하여 그의 총수는 어느덧 3백여만에 이르었으니 古今으로 종교계의 이채를 띄게됐다.    天道敎가 이같이 교도가 급속스레 늘고 발전하게 되자 왜적은 조선사람이 단결되는것이 두려웠다. 더구나 天道敎는 東學黨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그 기치아래 집결되는것을 일본은 원치않았던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왜적은 부디 해산만은 시키지 않았다. 그런다면 그 교도들이 예수교로 전교될것이 우려되였던것이다.    왜적은 天道敎를 미워했거니와 지어는 그를 사이비 종교단체라면서 종교로 인정조차하지 않았다. 그자들은 항상 경관을 파견하여 天道敎 中央總部와 각지의 교구를 감시하였고 달마다 재산상황을 보고하게 하는 등 날로 구속과 제압을 혹심히 했다. 지어는 사소한 일에도 징역을 가하고 중요한 간부에 대해서는 그의 일거일동을 정찰하면서 자유를 속박하였던 것이다.    그것뿐아니였다. 교인들은 심지어 일상적인 출입에도 속박을 받았으니 그 대우가 실로 노예나 가축과도 같았다. 교인에 대한 불공평은 더 말할것없었다. 례를 들어 교인과 비교인사이 소송이 생기게 되면 사안의 곡직이야 어떻든 불문하고 천도교인은 패소케하였고 일요일 집회강연 등에는 헌병순사를 파견하여 그 강연내용이 정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에도 트집잡아 가두심문을 하는 등 자유를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三敎主의 受道紀念日인 天日, 地日, 人日의 기념식이면 경계와 감시를 특히 더 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敎書出版과 月報發行을 정지시켰으며 강습소를 페쇠하였다. 지어는 宗理會가 조직되여 매주토요일에 교리를 연구하는것조차 명령을 내려 해산시켰던 것이다.    天道敎를 대함이 이러하거니 배달민족의 얼을 부활시키고자 중광한 大倧敎에 대해서야...  
147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2. 댓글:  조회:5528  추천:0  2011-10-1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2.     왕청 덕원리마을. 자그마한 벌판을 가로지나고 있는 류수하의 물은 예나 다름없이 맑게 흐르고 있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마반산 저쪽의 동포들은 어떻게들 살고있을가. “뻑발골”이라 불리워진 이 고장이 지금은 옛날처럼 가난하지 않았다. 신근과 꾸준함으로 주민거의가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이 어찌 만풍수를 안는 이 고장 농부들에게만 있으랴.    개천 4371년(1914) 음력 10월3일ㅡ이해의 양력 11월 19일은 개천절이였다. 전 민족의 명절로도 되는 대종교의 특대명절인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풍수해에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가, 하늘이 열린 영광의 날을 앞에 두고 대종교도 모두의 가슴속에서는 희열이 물결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한해는 대종교사상(大倧敎史上) 대서특필을 해야 할 한해이기도했다. 5월 13일 총본사를 청호(靑湖)에 권설했거니와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교구(四道敎區)와 외도교계(外道敎界)를 정했고 고경각(古經閣)도 권설한것이다.    대종교는 바야흐로 발전의 일로를 걷고 있는것이다.     10월초를 잡아들면서 3일과 5일에는 총본사에서 제천의(祭天儀), 제산의(祭山儀)와 고령사제향(古靈祠祭享)을 각각 하게되여있다.    그 행사를 치르고자 계화와 더불어 마을의 시교회책임자 셋을 데리고 화룡의 청호로 향하고있는 서일의 가슴은 뿌듯했다.    돌이켜 보면 1905년도가 막가던 12월 30일 羅喆조교가 백전(佰佺)으로부터 신고(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밀수(密受)하고 봉교(奉敎)해서부터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시교당과 대종교도수는 계속늘고있는 추세였다.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정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대종교의 종지가 아닌가. 重光團을 창립하면서 입교를 한 서일은 오로지 4도교구에 있는 시교당 전체를 항일단체로 만들고 30만 교도 모두를 투사로 만들고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날 뿐이였다. 그는 책임자들이 발벗고 나서면 시교당이 모두 대종교도가 모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있다. 서일은 동포들을 모여놓고 수차나 부르짖었던 것이다.      《지금은 존귀비천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배달민족 전체가 깨여나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할 길은 있는것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한얼의 교화를 받고 조국의 처지를 자기 운명으로 생각해야하는것입니다. 선조가 물려준 삼천리 강토를 빼앗은 자가 누구였는가? 현해탄너머 저 섬나라 왜놈이 아닙니까. 그자들이 우리에 대해서는 여지껏 해만 끼쳐왔지 좋은일은   한번이라도  해본적이 있었던가? 일본열도의 그 족속에게는 유전된 하나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니 그것은 성정이 조급하고 협애하며 허심성이 결여하여 비렬한 짓을 거침없이 하는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는 반민족주의자들, 대외팽창주의를 고창하면서 침략을 도락으로삼는 전쟁미치광들은 본심이 잔인무도한 악당인것입니다. 그자들이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쑵니다. 그래 그러한 원쑤를 친구나 벗으로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런자에 빌붙는 친일분자와 한간역시 천추에 용납못할 역도인것만큼 우리는 타도를 해야합니다. 원쑤를 모르면 제 생명을 그한테 저당잡히는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뼈속에 증오가 배이는 그때에 가면 나역시 참인간이 되고 애국자로 될것입니다. 오늘도 래일도 먼 장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일이라 하여 력사로만 취급하고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민족의 수치스러웠던 력사를 자자손손 가슴속에 새겨두고 기억하게 합시다. 오늘에 이르러 너마저 그것을 잊는다면 너는 너무도 무책임한 존재요 그래서 종묘사직마저 잊고마는 불초자임을 알아야할것입니다.   우리는 왜 고향을 버리고 만주땅에 왔습니까? 와야만 했던 리유가 무엇이였습니까?...여러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구국항일이며 독립투쟁인것을!》     이 시각에도 서일은 말했다.    《저는말입니다. 우리 大倧敎는 民族宗敎이기에 육탄혈전으로만이 승리가 가능한 救國對日抗爭을 해내리라 굳게 믿고 자부합니다.》    계화가 동을 단다.   《나역시 그러하오. 우리는 결심대로 대교신봉자 모두를 결전판에 몸을 내놓게 이끌어야하오.》   동행인중 다른 셋도 동감임을 표현했다.   《그렇지요! 그렇구말구!》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지난일들을 즐겁게 상기했다. 밀산의 송지주가 소작료를 감히 배로 받아내지 못하는데 대하여, 이동춘선생이 동포를 위해 큰공을 거듭세운데 대하여 고마움에 찬탄하였다. 이동춘선생이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는 제1회 대한국민총회를 개최한 결과 동지와 일반교민의 생계유지책을 결의하기로 되어 연길도윤공서외교부에 종사하게 된 사람으로서 자기의 직책을 다하고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법령을 내려 한교(韓僑)가 소유하고있는 토지를 전부 몰수하려들자 북경에 있는 총통 원세개를 다시찾아가 억울함을 신소하여 그 법령을 물시(勿施)케 했거니와 한교(韓僑)를 간민(墾民)이라 칭하고 토지를 소유하게끔 만들어놓은 것이다.    《듣자니 이선생은 용정에 그냥 계시면서 아예 제 가옥까지 간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내놓으셨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아니구. 그분이야말로 사심없는 지성인이지!》    《그분은 교육을 권장하여 지금도 계속 북만 각처에다 학교를 세우고있다니 과시 선구자답습니다!》   《그렇구말구. 그같이 헌신하는 선각자가 있길래 우리는 용기가 더 생기게 되고 희망이 보이는겁니다.》   일행 다섯은 한편 원세개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가 옛교분을 잊지 않고 망국민으로 돼버린 조선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주니 참으로 고맙다. 하지만 전해에 민주주의혁명가인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한건 대단히 잘못된 비렬한 행위였다고 비난하기도했다. 송교인은 두해전에 남경림시정부 법제원 총재로 되었고 그해의 5월에 북경에 가서 농림총장으로 되었으며 8월에는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재조직하고 리사장대리로 된 사람이다. 그는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다수석위를 차지하게 되자 정당내각을 조직하여 원세개를 제약하려했던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앙심을 품고 작년 3월에 자객을 상해에 보내여 그를 암살하게 한것이다. 그것은 정권욕이 팽창할대로 팽창한 자가 제 야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보인 전형이였다.     《원세개는 을 얻고나서 내전을 일으킨게 아닙니까. 내전 때문에 중국은 형세가 어떻게 변해갈지?... 북경뒤에 위치해 있는 여기 동북은 장차 어떤모양이 될지?...》    서일은 장래를 걱정했다. 안그럴리있는가. 여기 이 동북땅ㅡ만주는 일본이 언녕부터 호시탐탐 노려온 대륙인데.     일행 다섯이 화룡의 청호에 도착한 것은 이틑날 오전. 라철조교는 서일이 오기를 기다리고있던차라 일행을 반가히 맞아주었다. 그도역시 내내 포교를 열심스레 해온 것이다. 그간 그혼자 있은것이 아니였다. 남도본사의 책임을 맡고 경성(京城)에 가있던 53세의 강우도형(姜虞道兄)이 5월에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한 후 총본사전리(總本司典理)에 피임된 관계로 청호에 와  있었고  전해에 지교(知敎)로 승질한, 올해 51세의 백순도형(白純道兄)역시 와있었다. 그들은 청호로 오는 敎友들을 누구라 없이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하여 대종교의 이 신성한 성지는 시종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 푹 잠기였다.        兄弟들아 姉妹들아 倍達겨례 모든 人衆 우리 兄弟姉妹들아 함께至誠으로 一心하여 빛내보세 빛내보세 大皇祖의 베푼 神敎 빛내보세         나철교조가 만든 단군가 중에 끝절의 내용을 대문자로 쓴 프랑카트가 총본사 처마밑에 가로 쭉 걸려 있었다.    단군가는 구절마다 단군대황조의 은덕을 찬양하고 있는바 특히 이 종절에서는 배달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서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족적인 항일투쟁을 하자는 뜻이 력력히 내비치고 있었다.              지난해의 10월에 령계(靈戒)와 참교(參敎)로 被選되여 시교사(施敎師)를 잉임(仍任)한 서일이 올 5월에 東道敎區의 책임자로 되어서는 더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고있는 것 처럼 이때는 총본사는 물론 백두산을 중심으로 설치한 4敎區의 책임자 모두가 줄기차게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祭天日ㅡ開天日, 御天日, 重光日) 총본사에서의 祭天儀가 오전 8시에 교도들이 운집한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였다. 머리에 대례관을 쓰고 대례복을 입은  봉식의원(奉式儀員)이  천단(天壇)아래에 경숙히 서서 미리 암기해둔바나 답지 않는 홀기(笏記)를 높은 목청으로 읽었다.   《홀기를 읽으니 다들 들으시오.     이제 우리 인생들이 이 죄악을 쌓아 이 비참을 당하고도 이 잔명을 보전함은 참 거룩하신 황천은택(皇天恩澤) 상제은택(上帝恩澤)이시오 또 하물며 한울에 절하고 신을 섬김은 우리 대종문(大倧門)의 근본이 아닌가. 오늘에는 우리들이 일제히 근본에 돌아와 죄인짐을 벗고 은혜를 갚기 맹세하여 다 한마음 한정성으로 제천합시다.》     제천의식을 끝마치자 라철조교가 각 교구의 산하 시교당운영상황과 포교상황을 일일이 보고받았다.      동만일대와 연해주지방까지 포함한 東道敎區의 서일은 근일 왕청일대를 東一道本司로 녕안일대를 東二道本司로 정하고 자신이 직접 이 두곳의 도교사를 겸해 담임하였다는것, 고려령일대(지금의 신흥, 석현)와 삼차구일대(지금의 천교령)는 사교(司敎) 김준섭과 참교(參敎) 채규오에게 각각 맏기여 시교를 해나고있다는 것을 아뢰였다.    라철은 보고를 받고 그의 포교사업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이틀후인 5일(양력 11월 19일)에 고령사제향(古靈祠祭享)을 받들고 준봉(遵奉)케 했다.    점심식사가 방금 끝나서였다. 백순지교(知敎)가 얼굴을 라철쪽에다 돌리고  문득 물는것이였다.    《재작년 도형께서 꿈을 꾸시고 착수한 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상이 고갈됐나보지. 부끄러운 소립니다만 아직까지도 글귀를 줏지 못해 내버려둔채 그대로있네.》    서일은 어인영문인지 몰라 두분의 얘기를 묵묵히 듣기만했다.    두해전인 1912년의 음력 8월 15일(추석날) 호석 강우(湖石 姜虞), 은계 백순(隱溪 白純)과 함께 삼도구 안산(案山)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면서  산자운(山字韻)으로 漢詩를 지었던 라철조교는 두달후인 10월 8일밤 꿈에 안산에 다시올라보니 경치가 전날의 가배절(嘉俳節)과 꼭같은지라 전에 사용했던 운자를 따서 절구3수를 지은 것이다. 그는 꿈을 깨자 꿈속에서 지은 그 漢詩를 종이에 적었다. 그런데 마지막행 日字위의 두글자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다.    서일이 요청하여 라철은 즉시 그  몽작시(夢作時)를 읊었다.                     秋風吹我上檀山  檀山逈出雲霧間                   何處天然神靈跡  笻屐翩翩却忘還                  檀山高處拜崇山  崇山獨立天地間                   長白四千三百年  神租洋洋如復還                  南宗北族祖玆山  萬姓洞開兩白間                   玉殿金花○○日  一符三印再回還                  《시구가 과연 절묘합니다!》    《반성반숙일세, 두글자를 아칙도 채 줏지 못했으니 .》    라철조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것이였다.    서일역시 漢詩에 흥취가 있는지라 야릇한 시흥에 빠져들면서 그가 스스로 반생반숙(半生半熟)으로 인정하는 그것을 속으로 음미해보았다. 그가 아직도 줏지 못하고 있는 두글자가 대체 무엇일가?.....    總本司에서 祭天儀를 치르고나서 며칠안되여 서일은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로인을 방문하러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 동행인은 지금 重光團사업을 열성스레하고있는 채오(蔡五)와 량현(梁玄) 외 다른 한사람 김성(金星)이였다. 을미년(乙未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랑인의 손에 시해됨으로 하여 의거할 마음을 굳혀 의병진의 총수(總帥)가 되어서 항쟁을 시작하였던 유인석, 국내에서 어려움을 느껴 의병진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청나라장군 왕모염(王模閻)의 손에 전원 무장해제를 당하여 통탄해하였던 유인석,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국하였으나 항쟁은 하지 못하고있다가 1908년 마지막으로 고국을 등에 지고 로씨야로 건너갔던 유인석은 거기서 여러 지사들의 간청으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道總裁)로 추대되여 일거에 조국탈환을 도모했으나 일제의 짖꿎은 음모로 하여 실현못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로씨야를 떠나온것이다.     3월에 월경한 그는 처음 남만(南滿) 서풍현(西豊縣)에 도착했고 5월에는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8월에는 마침내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 정착한 것이다.    《로인 모색이 어떤분인지 한번 꼭 보고싶습니다.》    김성은 이러면서 따라나선 것이다. 모자도 안쓰고 빡빡 깎아버린 중머리바람으로 로씨야땅을 밟았다가 하마터면 목숨잃을번했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는 그였다. 김성은 철딱서니없이 나덤빈 자신을 탓하기는하지만 무지할 지경 과격했던 그때의 의병에 대해서는 전혀 호감을 가지지 않는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유인석은 전기의병의 상징적 존재로 그 위상이 떠올랐거니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펴서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적 구실을 해왔다는데서 맘속으로 높이 경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은 또한 그곳으로 가는 길도 알고있었다. 그는 동만의 왕청에 오기전에 남만일대를 싸지르고 다니면서 면목을 두루익히고 사귀여 둔 친구도 몇이 되는데 그들을 한번 만나보기싶기도하다고 했다.    방취구(芳翠溝).    73세의 고령인 유인석은 정주칸과 웃방이 따로인는 제 민족식의 초가집에 들어있었는데 신병으로 앓고 있었다.    《오, 자네로군! 만주에 건너왔다는 소리를 내가 뉘게선가 듣었네.》    서일이 무릅꿇고 절을 올리니 로인은 알아보고 반기는 기색이였다.    유인석은 로씨야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그대로 유림의 의관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그가 말했듯이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까지 이역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구제(舊制)를 지키다 죽어서 귀국 할 모양이다.                           保華於國,  守華於身, 以身殉於華.      서일은 비록 그의 문인(門人)은 아니였지만 국가가 멸망하게 되니 그가 자기의 문인들에게 제시했었던 이 세가지의 처신방법을 속으로 다시금 뇌여보았다. 국가가 일제에 강점됨으로 모든 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수절해야한다고 주장하였던 그 자신역시 이제는 만주로 왔다. 보아하니 자칫 여기서 생을 마칠것만같았다.     그가 서일을 향해 물어보는 말이였다.   《중국은 전만 크게 변해버렸네. 안그런가. 황제는 없고 대통령이 있는 나라로 바뀌여버렸네. 젊은의 생각에는 공화제가 어떤가?》   《저는 아직 그에 대해서 깊은 연구가 없었습니다. 공화제라면 선거에 의해 산생되는것일텐데 아마 그 나름의 도리가 있겠지요.》    서일은 말해놓고 보니 대답이 완정치못하고 애매하게 되버린지라 스스로 낯을 붉히였다.    유인석은 그를 한번다시 눈여겨보고나서 입을 열어 주장을 피력했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군주제를 그냥 하기만같잖네.... 군주제가 페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세가 내정을 간섭는건 허용치를 않는거네. 공화라 해서 선거제를 하면 외세의 내정간섭을 초래할것이고 그러게 되면 국가는 지키기 어렵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되는걸세.》   그는 숨을 돌리느라 잠시 쉬였다기 입을 다시열었다.   《젊은이도 보고있다싶이 서구열강은 침략만을 일삼는거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이 상실되는 비운을 모면하자면 다른 방법이 없는거네. 첫째는 정치가 안정해야 하고 다음은 군사적자립이 필요한것일세. 서양은 병기가 발달했으니 우리도 이제는 그네들의 병기들을 도입하기에 노력해야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함이 마땅한줄로 아네.》    조선이 언녕부터 그리했으면 되었을건데 하면서 그는 공화제를 비난했고 따라서 전제군주제로서의 복국(復國)을 주장하고 있었다.    서일은 령감이 복벽적 민족주의사상이 전보다 더 철저하거니와 짖꿋도록 완강함에 놀랬다. 유린석도 민족대교가 이미 중광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에 대해 다른 견해나 태도표시는 없다가 대종교의 명의하에 비밀적인 민중항일단체인 重光團이 이미 조직되였거니와 그 인원수가 점점 많아져 오라잖아 천에 이를것이요 그 지부가 각지방에 분포되여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거기에 무장까지 되는 날이면 아마 불비함이 없겠네!》    《장차는 꼭 그리될겝니다. 저는 결심하고있습니다.》    《듣자니 거기 동만 어디에 무관학교가 섰다는게 정말인가?》     왕청에서 멀지 않은 라자구 태평구에 리동휘(李東輝)의 무관학교가 생겨났는데 유인석은 그에 대해서 묻고있는 것 같았다. 서일은 알려줬다.    《그렇습니다. 라자구 태평구에 무관학교가 생겨났습니다. 학생수가 현재 삼백명정도되지요. 본래는 삼도하자에 태흥서숙이 있었는데 올봄에 교학내용이 불순하다고 페교령이 내렸던것을... 연길도대부에 상소를 제기한 결과 학교운영이 다시금 허락이 된것입니다. 이동휘가 김립과 함께 태흥서숙의 학생들을 위주로 태평구에다 다시금 그같이 아예 무관학교를 세운걸로 알고있습니다.》    유인석은 그런가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동휘는 20세때 조선에서 무관학교를 졸업하여 국군에서 참령(參領)벼슬을 하였고 일제에 의하여 조선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할 때에는 강화도 진위대의 대대장이 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루한 낡은 사상과 관념이 서방의 진보적인 신문화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은 국민의식이 락후해졌고 종당에는 욕심사나운 열강들의 침탈대상이 되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때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일으켜세워보려고 교육구국론자의 행렬에 들어서서 헌신하기도했다. 안창호, 이동녕 등 인사들과 손잡고 “신민회”, “서북학회”를 꾸리여 활발히 활동하기도했던 그는 지어 일경에 체포되여 룡산헌병대 류치장에 갇힌일까지 있다.    이동휘는 1912년에 석방되자 만주로 건너와 훈춘, 연길, 왕청 등지를 돌면서 동지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반일민족계몽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장래의 항일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군사지식부터 전수해야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는 무관학교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삼도하자의 태흥서숙은 본래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인 이권용, 김관은, 렴재군이 세운 것이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반일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런다하여 불순하다는 딱지가 붙어 학교는 페교령을 받은것이고 이 내막을 알아낸 이동휘는 그들과 손을 잡고 상소를 올려 학교를 다시금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 무관학교는 한말의 군무대신을 지낸바있는 이용익과 전 로씨야주재공사 이권익 등이 사심없이 의연한 수만원의 금액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교운영이 순풍에 돗단 듯이 쉬운것은 아니였다. 학생들이 산에 가 목재를 하여다 교사를 새로 지었고 숙사가 없어서 외양간을 수리하여 들어야했다. 그런속에서 사생모두 열의만은 끓었던것이다.    무관학교에서는 군사훈련과 반일민족독립사상교양을 기본으로 하는 군사정치학교였다. 한데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였지만 무기가 없었다. 한즉 군사훈련이란 목총을 만들어 그것을 갖고 도수조련을 하는데 불과했다. 중광단과 꼭 같은 실정이였다.    학교의 지도자로는 교장 이동휘이와 김립, 오광선, 김관응, 장기영, 김영학 등이였다.            서일과 김성 등 일행은 왕청으로 돌아오면서 태평구 무관학교의 장래발전이 어떠할까고 각자 점도 쳐보면서 제나름대로 운운했다.    《중광단이야 민중계몽단체라 소문을 내었지만 이건 그러지를 않고 외부에 무관학교라 버젓이 소문을 내고있으니 장차 무사할 수 있을까?...》    서일의 머리속에 이런 의문이  다시금 갈마들었다.    《로인이 구사상에 물젖어 복고를 고집하니 참으로 우직할 지경 완고합니다. 이제는 시대를 따를줄을 알아야지.》    김성이 유인석을 만나본 감상을 이렇게 토로했다.    채오나 량현도 마찬가지였다.    서일은 유인석에 대한 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했다. 그 본인이 아직은 공화제와 군주제의 우열등을 내심판정못하고있는 상태였으니 주의주견이 설수 없었다.    불행은   언제나 말없이 갑자기닥치는 것이다.    11월달에 대종교는 한차례 타격을 받게되였다. 일본총령사의 교섭으로말미암아 간도일대의 신설교당 10처가 일시에 봉페하게 된 것이다. 예견못한 것은 아니였지만 일제의 수단은 과연 악랄했다. 대교의 발전이 승승장구하는것을 보고 그자들이 그래 가만있을리있을가?    중국에는 는 속담이 있는데 어쩌면 일제를 놓고 비유하는 말같기도하다.      어찌 운명을 믿으랴, 구원은 자신의 투쟁에 있을 뿐. 일제가 탄압한다고 숙어들 일이 아니였다.    용정(龍井)에 살고있는 박찬익이 라철조교의 명을 받고 나섰다. 그는 먼저 동변도대(東邊道臺) 도빈(陶彬)을 찾아가 신소를 올리였고 이어서 길림성장 진소상(陳昭常)과 동삼성주병사 장병린(張秉隣)과 교섭하였다. 그리한 결과 봉페되였던 교당문은 다시열게되였다.      1915년 새해(乙酉)를 잡자 년초에 뜻밖에 부고가 날아왔다. 유인석이 타계를 한 것이다. 중광단은 추모식을 갖고 비통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의암 유인석선생.    1894년 갑오경장이후 친일파 김홍집내각에 반항하여 거병. 거병후 제천, 단양, 원주, 안동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했고 1909년에는  러씨아에 건너가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 의군도총재에 추대. 1914년 3월 도만(度滿), 관전 방취구에 정착. 1915년 정월 29일 74세의 일기로 서거.     중광단이 등사프린트를 한 전단(傳單)이 동포들이 주거하고있는 만주각지에 널리 배포되였다. 좀 늦기는 하지만 전기의병항쟁의 상징적인 수령이였던 그를 동포 모두가 알고 깊이 추모하게끔하기 위함이였다. 이 일은 서일이 생각하고 지시하여 행하여진 사업이였다.    전단에는 또한 의암 유인석이 생전에 지은 “우국(憂國)”이란 漢詩도 한수 실었다.                  우국복우국(憂國復憂國)                천애노백두(天涯老白頭)                추풍당차력(秋風戃借力)                취살제산우(吹橵際山憂)                  나라일 걱정하고 근심에 쌓여                어느덧 늙어서 흰머리 되었네                봄바람의 거센 힘                산같은 근심을 불어 흩어버릴까.                             2월 27일(음력정월 14일)에 라철조교 가 국내의 교회와 포교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남도본사를 향해 만주를 떠나갔다. 서일과 청호에 있는 총본사의 교우 몇이 그를 안동역(安東驛)까지 전송하였다.    《어려움에 봉착할 시 기지있게 침착히 풀어나가기를 바라오.》     갈라지면서 그가 부탁한 말이다.  
146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1. 댓글:  조회:5144  추천:1  2011-10-1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1.    서일은 내내 외지를 돌면서 포교를 하다보니 오래간만에 왕청의 덕원리로 돌아오게되였다. 말그대로 동분서주하는 몸이였다. 무릇 그의 발길이 가  닿는 곳이면 그곳의 동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의 시교를 듣기위해서였다.     大倧敎가 중광하여 몇해안되는 사이 중국의 만주와 로씨야, 조선의 북부지방의 80%에 달하는 동포 30여만이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여기에는 서일의 공로가 적지 않은 것이다. 동도교구(東道敎區)의 책임자인 그는 자기의 직책을 그야말로 착실히 해낸 것이다.    한데 한가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에서 그믈그믈 피여나기 시작했다.  《우리 대교의 확대가 이같이 폭발적인데 왜놈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있을가, 그자들이 민족성이 고양됨을 그저 지켜보고만있자할가? 우리의 이 민족종교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을리 없다.  정녕 위협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어쩔건가?... 이 교가 자유롭게 발전하라고 내쳐두지는 않을 것이다. 일제는 이제 조선의 명맥을 끊으려할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단이든 다 쓰며 달려들 것이다. 》    서일은 속으로 이어 부르짖었다.   《왜놈이 탄압해도 대교는 지켜내야한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추수가 끝난 논판에서 농부들이 실걷이가 한창이였다.   가을바람에 실려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우리 천조단군(天祖檀君)께서    백두산에 강림하사 나라집을 창립하여      우리 자손에게 주시였네.    거룩하고 거룩하다. 대황조의 높은 은덕 거룩하다.   모든 고난 무릅쓰고 황무지 개척하사 良田美宅 터를 닦아     우리 자손들을 살리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높은 은덕 잊지 마세.    모든 위험 무릅쓰고 악한 중생몰아내사 害와 毒을 멀리하여    우리 자손들을 살리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크신 은공 잊지 마세.    착한 도를 세우시고 어진 政事 行하시와 大東山河 빛내시고    억조자손(億兆子孫)에게 복주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넓은 신화(神化)잊지 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대황조의 자손된 자    우리 형제자매들아    변치마세 변치마세 백년만겁이나 지내어도 변치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겨례 모든 인중(人衆) 우리 형제자매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으로    빛내보세 빛내보세 대황조의 베픈 신교(神敎) 빛내보세.         마을안에 들어서니 족답기(足踏機)소리 우릉우릉 나고있었다.   《 탈곡이 벌썬가보지! 모두들 솜씨 과연잽싼걸!》    서일은 탈곡을 먼저 시작한 농가(農家)쪽으로 발길을 놓았다.    그곳에 당도하자 족답기도 멈추었다. 마침 점심때였다.    《오, 시교사님께서 오셨네요!》    모두들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 잘오셨습니다. 우리 함께 탁주나 나눕시다요.》    집주인은 점심식사를 자기들과 같이 하자면서 서일을 기어히 잡아 끌었다. 하여 서일은 이날 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이웃끼리 호조조(互助組)를 내왔다. 농사일이 힘겨운 철이면 이같이 서로지간에 품갚음으로 해나가는 것이 어느덧 이 마을의 미풍인양 꽃피고 있었다.    《보시다싶히 올해도 우리는 대풍을 걷우었수다! 이게 모두 한배검께서 베푸신 덕이지요.》    농부 하나는 이러면서 서로 손맞추어 일을 하니 힘드는줄도 모르겠다면서 대풍수를 맞이한 희열(喜悅)을 표달하고나서 계속말했다.   《난 고향이 평안도 양덕이지유. 거겐 아직 내 형네허구 사촌들이  살고있수다. 이제 탈곡이 끝나는대로 편지해서  다들 건너오두룩해야겠습니다. 모여 살아야죠.>>    주인역시 맞장구를 쳤다.   《강원도에 내 처가편이 있구 경상도에 내 사촌형제들이 사는데 나도 이제 알려서 다들 이리로 이사를 오도룩 해야겠수다.》    이런 말들을 듣고 서일이 물었다.   《딱 그래야합니까?》   《그래야지요. 모두 함께 모여 살아얍지요. 왜놈의 행세가 점점더 극심해 가는 판인데 그놈들의 치정하에 머리숙이고 고생스레 살게 뭡니까. 안그렇습니까? 그렇게 사느니보다 멀찍암치 피해서 눈꼴안뵈는데 모여사는게 퍽났지요.》   《하긴 여기가 퍽 자유롭기는 합니다만은 사람 사람 다가 제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옮겨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 땅은 그래 누가 지미고?... 왜놈들이 최종바라는 바가 바로 우리들 선조의 땅을 완전히 저희들의것으로 만들자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자들이 밉다고 사람 사람 다가 제 고향을 버린다면야 그건 제 땅을 스스로 그자들의 손에 넘겨주고마는걸루 되지 않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모두다 건너오지를 말고 조국에 남아 고향땅을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합니다.》     《허허허. 듣고 보니 과연 그렇기도하구만!  거 ! 옳은 말씀이우다!》    다들 도리있는 말이라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한가슴에 망국의 설음 가득하면서도 구국에 나설 맘은 없고 이국땅에서 안신처만 찾으면 그것을 고작인걸로 여기는 무각성자가 어찌 이들만이랴. 선전과 교육을 많이해야 할 일이였다.    이날 저녁켠에 서일은 뜻밖에 초면의 손님 하나를 맞이했다. 윤기도는 치머리에 기름한 얼굴, 코등에 검은테 안경을 건 30세 지식인타입의 그 사나이는 자기를 안희제(安熙濟)라 소개하면서 3년전 불라디보스톡에 가서 약 반년가량 체류하는기간 마침 그때 그곳에 가있은 신채호를 알게 되어 그와 동지로 사귀게 된것이고 따라서 그때 신채호로부터 그와 서일의 교분을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노라했다.    안희제는 1885년(乙酉) 8월 5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여났다. 그는 15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1903년(19세) 7월부터 3개월간 여러곳의 선비 30여명과 함께 명승고적들을 답사했고, 1905년(21세) 을사조약이 늑결(勒結)되여 조국의 명맥이 끊어진거나 다름없이 되어 갈 무렵 그는 비장한 심경(心境)으로 조부앞에 아뢰였던것이다.    《국가가 망했는데 선비는 어디다 쓰일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인의를 실행치 못하면 도리여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것이니 래일 당장 서울로 가서 시대에 순응한 지식을 구하여 국민된 본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선현(先賢)의 도(道)라 할 수 있을진대 어찌 산간에 파뭇혀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있겠습니까?》    그는 려장을 갖추고 상경(上京)하여 보성학교(普成學校)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재학중 1907년(23세) 국가와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을 교육함이 급선무라는 것을 느끼고 이해부터 구국교육운동에 앞장서게되였다. 먼저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하고 그 임원(任員)이 되어 학우회를 규합해나갔다. 일변 빈궁한 학생들의 학비를 보태주고 방학때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구국강연(救國講演)으로 민중계몽과 애국사상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지방유지들과 손을 잡고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명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 자신의 고향 입산리(立山里)에다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설립하였다. 1911년(27세) 이때 조국의 현실은 더욱 절망적이였는바 그는 이런 속에서 남몰래 두만강을 건너 불라디보스톡으로 가서 근 반년가량있으면서 속속 모여오는 망명지사들을 사귀였고 그들로부터 시사(示唆)를 받은 것이다.           그가 아직 신채호를 만나보지 않았다니 서일은 그한테 신채호의 근황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병과 가난으로 사경(死境)에서 헤매이는 그를 신규식(申圭植)이 상해로 데려갔던 일, 올해는 윤세복선생의 초청을 받고 봉청성 회인현으로 가서 그곳 동창학교의 교재로 쓰일 국사저술과 학교 경영에 참여하고있다는 등등.     안희재는 아 그런가 그렇다면 쉽게 만나볼 수 있겠구만요 하면서 이곳에 와서 풍요로운 벌판과 동포들이 웃으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마음이 개운해진다면서 자기가 여기로 오면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냐고 물어왔다. 이에 서일은 할 일이야 많지 하고나서 안쪽에는 넓고 기름진 땅이 많으니 앞으로 동포이주민을 그곳으로 보내여 안주시키면서 개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달민족의 뿌리가 박혔던 발해고도(渤海古都)에다 대종교의 천진전(天眞殿)을 세우고 널리 포교를 함으로써 동포들에게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앙양시키고싶지만 당장 그렇게 할 실제적인 재력이 없으니 그저 맘속으로 그려 볼 뿐이라했다.         안희제가 이번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온 목적이 독립운동가들을 한번 만나 구국방략(救國方略)을 의논해보자는것이였다. 그는 왕청에서 서일을 만나 속심을 나누고 그가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을 보니 구국의 길은 오로지 독립투쟁으로만이 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니와 한편 또 그것을 현실화하자면 실제적으로  수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해야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모으리라 결심했다.    안희제는 서일과 훗날을 기약하고나서 신채호를 만나봐야겠다면서 이틑날 봉천쪽을 향해 떠나갔다.    사흘후 서일이 나도 이젠 떠나야지 하면서 화룡 동도본사로 가려고 서두르는데 마을의 장정 몇이 느닷없이 그를 찾아왔다.   《서단장!  이거 큰일났수다!》   《도교사님!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요?》   《대체 무슨일게?... 차견히 말하시오.》   《밀산서 온 자가 올부터는 소작료를 곱으로 내랍니다.》   《아니, 무슨소린지...그거야 이미 계약이 돼있는게 아닙니까?》    뜻밖이의 일이라 서일은 저으기 놀래면서 낯빛을 흐리였다.   《어디있습니까? 가봅시다. 이 일을 계화분은 아십니까?》   《알릴러 갔을겝니다.》    서일은 신을 얼른 신고 나가보았다.    마을복판에 여럿이 모여 옥신각신 떠들고 있었다. 살펴보니 계화가 벌써 와 있는데 밀산에서 왔다는 다섯은 마을 사람의 포위에 들어 눈을 지릅뜨고 있었다. 두 녀석은 손에다 대공계(大公鷄)라 부르는 자루가 반달모양으로 휘여진 구식권총을 빼들기까지 했다. 적대적인 팽팽한 대치라 무시무시한 긴박감속에 분위기는 자못 험악했다.    마을의 어른 둘이 서일을 보자 겨끔내기로 공소해왔다.    《아니 저놈들이 글쎄 올부터는 소작료를 배로 내랍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있는가유. 땅을 개간해놓고 빼앗기운것만도 가슴아픈데 거기다 소작료를 배로 내라니 원. 이런 부도의한 놈 세상에 어디있는가유.》   《쉰해도 넘습네다. 이 땅을 우리네 손으로 개간한지가. 원칙대루면 땅을 의례 되돌려야 할 놈이 오늘와서 그따위 소릴 죄치니.  귀신이 들어도 피똥 쌀 일 아니우. 미치고 창빠진 놈들이지. 어디서 저따위것들이......》    나이 쉰이 다 된 허우대 큰 자가 당나귀모양으로 귀바퀴를 세우고있다가 낯짝을 서일쪽으로 돌린다. 오냐 네가 이 마을의 실권자냐 속판단을 했는지 조금은 례모를 차리느라 얼굴에 피웠던 살기띤 적의를 거두고 점잔을 빼면서 입을 여는것이였다.    《나는 밀산지주 송나으리 집의 청지기외다. 》   《진작알고있습니다. 명함이 왕섭개이지요?》   《오 그래 내가 언젠가 한번 와봤었지.》    청지기는 대방의 이름은 서일이라는것까지 챙겨듣고 고개를 까댁였다.    밀산의 송지주는 왕청에 대리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소작료를 교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년년이 그하고만 관계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송지주는 얼굴짝 한번도 내밀지 않거니와 올해는 대리인마저도 보내지 않고 갑작스레 청지기를 출면시키니 일이 범상치 않은것이다.    《올부터는 아마도 소작료를 곱으루 받아야겠어. 들었겠지? 소작료를 말이네. 그래서...》   《이미 바쳐온것두 과분한데 그 이상 더 거둬들이면 우린 그래 뭘먹구 살란말인가?》   《욕심도 무극하구나!》   《아시당초 되지도 않을 소리!》.........    마을 사람들은 청지기의 말이 떨어지자 격분하여 왁작했다.   다시금 공격에 든 청지기는 입을 열어 볼 짬도 없었다.   서일은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키고나서 청지기를 향해 입을 다시열었다.   《한마디 물읍시다. 기유의 협약을 고치는 리유가 대체뭡니까?》   《그거야 사정이 달라져서지.》   《사정이 달라졌다? 거 참 듣고도 모를 소리구만요.》   《국정이 상전벽해인데 협약이 고정불일수야 없잖은가.》   《뭐라? 국정이 변한다해서 협약을 고친다?  거 과연 그럴사한 리유군요. 개간자의 피땀을 혹독하게 빨아내는건 천도에 어긋나는 짓이란걸 모릅니까? 》   《천도가 누구한테 통할가. 이게 송나으리의 땅인거야 명백하잖은가.》    청지기는 태도가 여전했다.    서일은 계화와 잠간동안 귓속말을 주고받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소작료를 더 올려서는 절대 아니됩니다. 그건 무리한것길래 우리는 절 때 바치지 않을것입니다. 원협약대로 해야합니다.》   《그냥 그리하면 주인측은 리득이 별반없는데...》   《착취를 더 못해서 손해란말인가?》    계화가 참을수 없어서 한마디 까주었다.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우린 송지주의 무리에 응할 수 없습니다. 소작료를 올려받는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니까.》    서일은 동을 달아 태도를 굳세게 보였다.   《내 말을 무시하는건가. 이러면 재미없을 걸. 권하는 술을 안마시면 벌주를 마시는거야.》    청지기는 침침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의 이런한 부르짖음속에는 위협적인 뉴앙스가 다분했다.    그렇다해서 굽어들 서일이 아니였다.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억울함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구질구질 괴여올랐다. 조선사람은 남한테 제 국토를 잃은 민족이라해서, 이 세상에서 그 누구의 보호도 받을길이 없는 민족이라 해서, 무기력한 존재라해서 송지주는 깔보고 제멋대로 행패부리는것이다. 그따위 흡혈귀가  동포들의 피땀을 무한정빨아내게 할 수는 없다. 절대. 담판을 해야지.   《이렇게 합시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의 생사에 중대하게 관계되니만큼 일언지하에 복종키는 어려운거니 송나으리와 만나서 얘기해 봅시다.》    서일은 합리적인 건의를 하고나서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밀산 송지주집 청지기는 내가 와서 알려줬으면 다지 무슨말이 이리두 많으냐며 오만해진 얼굴에 쓰거운 표정이더니 콧방구를 힝힝 뀌였다.  그자는 순순히 들어주지 않으면 후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위협섞인 말을 한번 더 곱씹고나서 졸개들을 데리고 그만 가바렸다.    서일은 화룡으로 갈 수 없었다. 그는 가지 않고 마을의 중견들과 함께 연구를 한 끝에 이틑날 계화와 더불어 끌끌한 중광단원 몇을 데리고 곧 밀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먼저 송지주와 단판을 해보자. 그래도 안되면 관부에 신소를 하자. 한데 관부가 옳게 도와줄가?... 맥을 쓰기나할가?...    이때의 만주행정기구(滿洲行政機構)를 볼 것 같으면, 광서(光緖) 33년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이 길림성(吉林省)으로 바뀌고 선통(宣統) 3년 즉 1911년에는 그 아래에다 서남, 서북, 동남, 동북 등 4道를 두어 11府, 1州, 5廳, 18縣을 관할케했는데 밀산은 본래 녕고탑부도통(寧古塔付都統)에 예속되여 있다가 광서(光緖) 33년(1907년)에 갈라져 나와 밀산부(密山府)를 설립한 것이다. 한데 신해혁명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되었다가 대총통의 직위를 절취한 원세개(袁世凱)가 북경에다 지주매판련합독재의 북양군벌정권을 세운후 내전을 일으키면서 약법을 뜯어고치고 독재전제를 실시하고자 국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이해(1914) 5월 1일에는 (“民三約法” 또는 “新約法”이라고도 함)을  공포했다. 이 약법은 법률상 총통의 극대(極大)의 권리를 보장하는거다. 원세개가 처음부터 꾸어 온 황위(皇位)의 꿈을 실현키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는 성(省)을 다시금 장군부(將軍府)로 고쳐버렸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제를 이같이 자꾸 개변하는지라 바람부는데 따라 낯짝이 변해가는 구관료들의 손에 조종되고있는 아래의 기관들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불온한 세상이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착스런 흡혈귀로 변해버린 밀산의 송지주는 이런 기회에 터무니없이 소작농의 피를 더 짜내려고 드는게 분명했다.              서일 일행은 밀산에 가자 먼저 그곳 시교회의 사업을 자임하여 로고를 아끼지 않고있는 한기욱선생부터 찾았다.   《송지주 그 녀석 욕심이 꿰져두 한심하게 꿰지네그려! 계약을 전혀 무시하고 제멋대로 소작료를 곱올려 받자들다니 원!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고 과연 속담그른데 없구만!》    한기욱은 사연을 듣더니 한심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섰다.    그는 지방의 관부같은건 찾아가봤자 헛짓이다 차라리 본인을 마주대해놓고 담판함만같지 않다면서 그들을 데리고 송지주를 찾아갔다. 한데 전날 왕청에 갔던 청지기가 한번 낯짝을 피끗 내보일 뿐 장원의 소슬대문은 꾹 닫힌채 다시열리지를 않았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도록 송지주는 물론 청지기마저도 얼굴짝을 내밀지 않았다. 담장안에서 사나운 개가 당장 달려나와 손님들을 요정낼 양 악패듯 짖어댈뿐이다. 아무렴 이렇게 까지 무례할수야. 무지막지한 랭대라 가슴속에서는 분노만 부질부질 괴여올랐다. 허지만 별수가 있는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는 수 밖에.    《꼴을 보니 담판을 피하자는게 분명합니다. 다른수를 써야지요.》    서일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한기욱은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시면서 지주장원을 가리켰다.    《보시오. 장원이 대단하지요. 곰보딱지 송지주네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보니 권속이 아마 백여명정도는 잘 될겁니다, 여기서 행세를 하며 살아가자면... 항간에는 이러한 노래가 나돌고있습니다. 어떤가, 그럴싸하지요?... 내가 여게오자 들은 소린데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이 만주땅에서 버젓이 살아가자면 부모가 자식을 최소한 다섯형제정도는 출산해야한답디다. 왜 그럴가?  하나는 군인, 하나는 마적, 하나는 관리, 하나는 상업, 하나는 집에서 살림을 맡는다그거지. 이렇게 형제가 군인, 마적, 관리, 상업, 집주인으로 되어 엉켜 붙으면 불의의 사고가 생겨도 그렇구 이외의 변고가 생겨도 그렇구 상호 련계가 되어 맺히는 고리를 풀지요.》    이것이 그래 동북에서 사는 한족(漢族)의 생존방법이란말인가!... 한심하지만 그럴 법도 한 일이라 모두들 그저 웃고말았다.    인간세상이 대체 얼마나 넓고 생사변역(生死變易)하는 존재 또한 얼마나 될가? 옛기재에 보면 360항업(恒業)이라 했지만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어느때부턴지는 알수는 없지만 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는 비적(匪賊)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이 생겨난것이다. 이를 어떤 지방에서는 호자(胡子)라 했고 어떤 지방에서는 향마(響馬) 또는 봉자수(棒子手), 마적(馬賊), 강도(强盜)라 불렀다. 해를 거듭하고 대를 내려오면서 그 한무리도 점차 자라고 성숙해져 자체의 조직기구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의 두목을 내오는 방식이 있게 되었으며 종교와 신앙이 있어서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만의 언어와 규률과 풍속이 따로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 뚜렸이 자리잡은 것이다.     밀산(密山) 송곰보의 가원은 웬간한 황궁못지 않게 으리으리했다. 송곰보는 밀산(密山) 본토배가 아니였다. 10살나던해에 산동(山東)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자식인 것이다. 조상의 뫼(墓)를 잘써서인지 아니면 부지(敷地)가 좋았던지 어른이 되여서는 숱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된 것이다.  그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 보니 권속이 근 백여명에 이르었다.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령황지주(領荒地主), 점황지주(占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 등 세가지 부류였다. 먼저 임의로 한뙈기의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領荒土”를 비준받고는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많은 땅을 차지한 후 토지대장(土地臺帳)까지 가진 자를 령황지주라 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그의 친척들로서 땅을 많이 가진 자를 점황지주라했으며 권세로써 령세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 때 뢰물을 먹이고 면적을 적게 매기여 많은 땅을 차지한 자를 권세렴토지주라 했다.    밀산의 송곰보는 첫째부류인 령황지주인데다 권세렴토지주의 성질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가 관리도 아닌데 무슨 권세가 있었겠는가?  물론 관리는 아니였지만 처남 둘중 큰처남이 현장의 부원이고 작은처남은 인원이 근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였던 것이다. 그자가 성명이 진사해(陳四海)였는데 그가 은근한 뒤심이 되었던 것이다.  토비인 제 처남 진사해를 밑고 행세를 부려온 것이다.   그리고 송곰보의  여러아들중  하나가  방량(方亮)무리의 새자(崽子)였던 것이다. 급이 없는 하졸토비를 가리킨다. 방량패는 인원이 30명도안되는 토비였다.      밀산과 멀지 않은 장광재령의 염왕산(해발1,291m의 대도정)에 위삼포토비가 있었다. 그 토비가 언녕부터 그의 재산을 노려왔지만 저들과 세력을 비기는  완달령(完達嶺)의 청보산(靑寶山)패가 감싸는지라 쉽게 손쓰지 못하고있었다. 피비린 마찰이 빚어내는 후과를 예측키 어려운것이다. 오늘 어우렁더우렁 지내다가도 밤자고나면 심기일전하여(心機一轉) 서로 살육한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하는 것이 곧바로 도비들의 사회였던것이다.       서일은 밀산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의 이동춘선생께 이 일을 알리여 함께 대책을 찾아보자는데서였다.    이동춘선생은 사연을 듣고 몹시놀랬다. 그는 이 만주에서 漢人의 지주는 성질이 서로 같지 않다면서 그 상황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서일은 작인들에게서 소작료를 이전의 배로 올려 받으려 드는 송지주가 정당한 면회요청마저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리면서 오만스레 뻗치니 이쪽에서는 그것을 눌러벌만한 막강한 권력이나 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였다.    《지방정부나 세력은 다가 그런자를 감싸고 돌테니 전혀 믿을바가 못되오. 우리로서는 큰산을 등대는 수밖에 없다고 보오.》    《도리있는 말씀입니다.》    서일은 이동춘선생의 말에 동감하면서 한말(韓末)에 중국사신(中國使臣)으로 경성에 와있은 원세개를 다시금 생각했다. 원세개가 지금 대총통이 되어 행세하고있다. 이동춘선생은 그가 젊었을적 京城(서울)에 와 있을적에 그의 통역관으로 일을 보아주었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보다도 교분이 두터울테니 이럴 때 도움을 청하도록 내세움이 좋겠다 생각하고 찾아온 것이다.    이동춘선생은 기꺼이 나섰다.   《내가 원세개총통을 찾아가 보지. 아니, 우리 함께 가봅세. 서선생도 계화선생도. 미우나 고우나 그한테 구원을 청하는 수밖에 없네.》    이틀날 셋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써갖고 함께 북경에 갔다.    비대한 몸집을 화려한 총통복으로 가리운 원세개는 그들이 써올린 상소문을 보면서 숫많은 팔자수염을 몇번 실룩거리더니 종이에 몇글자적어 봉투에 넣어 합봉한 후 그것을 호명신(胡明臣)비서에게 주면서 동반하여 봉천의 군무독리(軍務督理)이자 길림, 흑룡강 두 군무독리를 겸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장석란(張錫鑾)에게 갔다주어 그가 처리하게끔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밀산의 송지주는 찍소리못했고 왕청 덕원리 마을은  이전 원모양대로 다시금 평온해졌다.                             
145    나의 요람 댓글:  조회:5027  추천:1  2011-09-26
   수필                                                      나의  요람                                                                          김송죽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창조하는 것이지 결코 순순히 맞이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끈질긴 분투가 제 운명을 창조함에 첫째로 중요하겠지만 객관의 방조를 받는것 역시 자못 중요한거다. 나는 내가 흑룡강신문사와의 접촉에서 이 점을 심심히  느낀것이다. 사의 직원도 아닌 나를 작가로 키워준 요람이 바로 흑룡강신문이였다. 이제는 오랜일이다. 1962년 7월, 의 진달래부간에 나의 처녀작 시 가 실리였다. 그때 신문지면 가운데 곱게 선을 그어 실어준 시작(詩作)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문화대혁명 때 원본을 빼앗겨 잃어졌는데 고맙게도 박철준시인이 전에 스크랩프하여 두었던 것을 주어 나는 그것을 외워두게 됐다. ) 그때 문예편집으로 계섰던 리병철선생이 고맙게도 축하편지까지 보내와 나를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후 편집선생은  , ,   등 나의  다른시들도 흑룡강신문에서 실어 세상에 얼굴을 보이게 하였다. 그같이 내가 문단에 오르느라 첫발을 붙인 곳이 바로 흑룡강신문이였던 것이다. 속담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글도 변변히 읽지 못한 내가 글을 쓴다고 너덜대는게 눈꼴사나왔던지 아니면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가 아파하는 병이 도져 그랬던지 나를 보고 투기적으로 돈벌이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뒷소리를 하더니만 이 오자 기회를 빌어 벼르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는 신문사에 가있는 나의 원고들을 전부 압수하려고들었다. 어떻게 하나 끈을 달아서 나를 패보려는 고약한 심사였다.  그때 신문사의 윤응순사장과 리병철편집선생은 편지답변에(종근이 당안으로 남아있음) 투고자의 원고심사권은 신문사에 있으니 념려하지 않아도된다고 어리석은 그자를 준절히 타이르면서 나를 보호해주었다. 과연 고마운 일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들어닥치자 나는 액운을 면치 못했다.  내가 전혀 있지도 않은 필화(筆禍)를 입고있다는 것을 안리병철선생은 그기간 세 번 내있는 고장 一  성화공사(星火公社)를 찾아왔었는데 첫 번은 상봉할 기회를 가졌으나 그 다음의 두 번은 만나지도 못하게   해서 그이는 내 일을 근심하며 되돌아갔다.   1972년 봄, 신문사에서는 >가 있으니 용약투고하라는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때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온지 3일밖에 안되였다. 그 편지가 나에게는 더없는 믿음과 힘을 주엇다. 나는 소설을 쓰고야말리라 강심먹고 다시 필을 들었다.  당날로 나는 길건너 서켠 맞은켠 코앞에 합작사(合作社)가 있고 종이를 팔았지만 안해를 비밀리에 8리 거리가 되는 뒷족 한족마을에 가 종이를 한아름 사오게 했다. 그리고는 꼬박 한달밤을 패가며 악전고투하여 마침내 근 50여만자에 달하는 을 써냈다. 그때 문예편집을 담당했던 홍만호선생은 직접 나의 그 장편소설원고를 안고 연변에 나가 에다  심열을 위탁했다.  그것이 후에 모진 진통 끝에 탈태환골을 하여 끝내 연변출판사에 의하여 출판이 된 나의 첫 장편소설 이다. 이 일을 알고있는 연변분들은 나를 만나면 이런 말로 신문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1978년도에야 을 받았다. 그때 문에편집이였던 김순호선생은 나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회포를 풀었고 여러면으로 위안을 주면서  앞을 내다보고 용기를 내라고 면려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신문의 톱에다 내가 치룬 경난과 현황을 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잊을수 없는 고마움이였다.   나는 이듬해 할빈에 갓다. 신문사가 첫걸음이였다. 글에서 이름만 익혔을 뿐 초면인 그들이 그렇게 뜨거운 분들일줄이야!...  나는 나를 알아봐주는 친구와 벗들이 이렇게도 많았구나 생각하니 용기가 한결 북돋아졌다. 지금은 나의 큰아들 성해가 신문사미술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만나면 이 부탁밖에 없다. 내가 입은 은혜 내 힘으로는 못다갚겠으니 대신 보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무엇보다 외성으로 출장갔다가 흑룡강신문을 알아주는 말들을 들을 때면 나는 마치 내 일이 잘되여 칭찬받는 것 처럼 흐믓하다.  , ...  과연 정답게 부르고만 싶은 이다! 나는 우리의 이 신문이 독자들의 기대와 축복속에서 날로 잘 꾸려지기를 두손모아 빈다.  (작자는 작가. 화천현문화관 창작실에서 문학창작에 종사하고 있음)     1991. 9. 4.                                                     관련글: 나의 처녀작 詩     
144    수필 노란울금향 댓글:  조회:5166  추천:1  2011-09-20
  수필                                                        노란울금향                                             김송죽      그날도 나는  강변공원의 벤취에 홀로앉아있었다. 그것은 한백옥으로 만든 석상가까이에 있는 철제의 흰색나는 벤취였다. 아침단련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역의 조련장에서 로인디스꼬를 추고는 그것이 끝나는 길로 장거리보행을 하여 이곳까지 와서는 담은 몇분이라도 앉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이젠 나의 습관된 소일이며 일과였다. 도도히 흐르는 송화강의 철석이는 소리를 듣노라면 왜선지 잡념과 번뇌가 가셔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나는 좋았던거다. 젖빛안개에 쌓여있는 아침의 강변은 조용했다. 내가 한창 저 아래로부터 웅글진 고동소리를 틀어올리면서 올라오고있는 륜선에 눈을 팔고 있는데 은연중 웬 녀인이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 것이였다. 고개돌려 보니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부녀였다. 여기서 문득 제 동포를 만나고 보니 미상불 반가운 일이라 나는 그렇다고 알려주고는 례모를 차리느라 일어나 그녀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남성의 고유한 호기심을 갖고 슬적 눈빛질해보았다. 미모의 바탕이여서 아직은 그리 역겨울정도아니지만 환갑줄을 넘긴 녀인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초면이지만 별로 거북스러워 함이 없이 벤취에 나란히 앉았다. 대개 이런 경우면 대화가 자연스레 이뤄지는 법이다. 그는 성이 선우씨요 올해 나이 62세, 자기도 한때 아침단련을 했건만 고혈압병이 심해져 지금 치료중이라 자아소개를 했다.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자아소개를 했다. 헌데 내가 내 성명과 나이를 대고나서 내내 촌에서 살다가 아들따라 몇백만 시민이 붐비는 이 대도시로 온지 인제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고했더니 그녀는 웬 일인지 아, 그런가요! 하고 적이 놀래면서 낯빛이 굳어진채 나를 이윽토록 눈밖아보다가 그만 아무말도 없이 일어나 훌쩍 가버리는 것이였다. 아니 왜 저러는거냐? 내가 실례한게 뭐길래?... 나는 그녀의 저돌적인 행동을 도무지 리해할 수 없었다.   이틑날도 나는 로인디스꼬가 끝나자바람 여전히 강변공원으로 가서 그 철제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어제의 그 녀인이 혹시 다시나타나지나않을가 사위를 은근히 살폈다. 어제 그녀가 왜 그같이 리해하지 못할 거동을 피우고 사라져버렸는지 그걸 몹시 알고팠던거다. 헌데 내앞에 다시나타난건 어제의 그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녀인인것이 아니라 미끈한 몸매에 청춘의 생기가 흐르고 있는 30대의 매력있는 아가씨였다. 저쪽에서 먼저 물어보는 말이였다. 내앞에 나타난 아가씨의 모색이 어제의 녀인을 닮은데가 있는것 같아 나는 속으로 넌  아마  그녀의 딸이겠구나 짚으면서 머리를 갸웃했다. 과연 아가씨가 자기는 내가 어제 여기서 만났던 그 녀인의 딸인데 리향숙이라 부르고 나이는 32살이며 어느 한 보험회사에 출근한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생명부지의 이 젊은아가씨가 나를 알고있는게 이상한지라 다시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경아해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인은 그래서 어제 놀램이 가득한 낯색으로  나를 그토록 눈여겨본거로구나! 그런데 나를 잘 안다면 왜서 한마디 말도 더 없이 그모양으로 훌쩍 가버린단말인가? 대체 누군데 왜서?... 어쩌면 내가 그녀를 어디서 딱 본것같기도하고.  그러나 언제 어디서 봤던지 도무지 생각나지를 않았다. 풀기어려운 의문만 착잡하게 갈마들어 나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이럴 때 향숙이가 입을 다시열어 무지하게 깜깜해진 나의 머리를 틔워주었다. 나는 아까보다 더 놀랬다. 선우! 미영!... 두자성, 두자이름ㅡ 그것이 거대한 굴착기모양으로 우르릉거리면서 내 가슴깊이에 묻어둔지 너무도 오래고 오래서 이제는 퇴색해버린 추억을 다시금 뚜져냈다.   내가 중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8년도 여름이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연변에서 북대황건설을 지원한다면서 달려온 한패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중에 뽈을 괜찮게 찬다는 성이 리씨인 청년 E가 있었다. 그와 나는 잘아는 사이가 아니였다. 한데 어느날 반양머리에 준수하게 생긴 그가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자기는 연변 도문에 사는 고모댁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사범학교를 다니는 녀학생 하나를 보고 그만 반해버리고말았는데 나더러 자기를 대신해 련애편지를 써달라는 것이였다. 이런 제길할! 제앞코도 못닦는  주제에 싱겁게 그따위짓을 해?  나는 첫마디에 거절해버렸다. 그랬더니 E가 이틑날도 사흗날도 나를 찾아와 애를 먹였다. 그래도 안될것 같으니 나중에는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사정하는 것이였다. 그녀자를 얻지 못하면 자기는 정말 죽고말리라면서. 상사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사람이였다. 말이 아니게 축가는 꼴을 보니 정말 죽을것만 같아 나는 그만 그럼 써주마고 대답하고말았다.   내입에서 련애편지를 써주리란 대답을 받아내고야 만 그는 녀사범생의 사진을 내놨다. 문학초학자였던 나는 그때 쏘련작가 아델 구뚜이의 를 읽어본지라 거기것을 인용해가면서 련애편지를 멋들어지게 썼다. 저쪽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나는 다음의 편지를 련속날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그만 사진에 박힌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리고말았다. 그러니 이름이 E것이였지 기실은 내가 그 여자와 련애를 해버린 셈이였다. 열 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고 E는 끝내 목적을 이루어 이듬해봄에 북방을 떠나 연변의 그 처녀한테 장가를 갔다. 먹기는 발장이 먹고 뛰기는 말더러 뛰란다더니 내가 무슨꼴이 됐겠는가. 우리는 10년만에 다시만났다. 그때는 문화혁명이 한창 열기를 뿜어대던 시기였는데 E는 공가(公暇)에 우리 마을에 들렸다가 로 끌려나와 조리돌림당하면서 공공변소를 치고있는 나를 보더니 난 네덕에 장가를 잘갔건만 넌 신세가 이렇게 됐구나 탄식하고는 내가 몹시 궁금해하던 제 집의 형편을 알려주었다. 내가 쓴 련애편지의 작간으로 약혼이 되자 E는 약삭바르게도 금과(禁果)부터 따먹었다. 그래서 배가 불러진 녀인은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도이페지 하고 서둘러 그렇게 잔치를 했던거다. 한데 지내고 보니 남편이란것이 허울만좋았지 원체가 판무식쟁이요 자기는 속히워도 대단히 속히운지라 그만 절망하고말았던거다. 선우미영은 타락하여 5년간이나 집도 전혀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어찌하여 아직 장래가 먼 내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각오를 해서 내가 남편의 눈을 티워줘야지 결심하고는 깔고들어앉아 글을 배워주었다. 그래서 남편은 마침내 무식을 면하게 됐고 입당까지 하여 거기 마을서 지부서기로 사업하고있었던 것이다. E는 그때 자기처는 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라도봤으면 한다고 했다. 사실말해 그녀의 전도를 망쳐먹은건 E인것이 아니라 나였다. 하기에 나는 그녀를 만날가봐 무서워했다. 한데 그녀가 인생의 석양을 안고 내앞에 돌연히 나타났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  향숙이는 자기 아버지는 간암으로 10년전에 작고한 것이고 그가 저세상사람이 되자 딸인 자기가 지금 어머니를 모시는중이라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제 여기서 전혀 생각밖에 나를 문뜩 만나고보니  감회(感懷)가 너무도 사무쳐 그만 드러눕고말았노라 알려주는 것이였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생각이 미처 돌지 않았다. 나는 떨떠름하여 말을 더 잊지 못했다. 꽃말에 붉은 울금향은 바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아닌가!  헌데 얘가 왜서 제 어머니한테 그 꽃을 꼭 가져가라는건가? 내가 우유부단하니 향숙이가 하는 말이였다. 이거야말로 딸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과부어머니를 짝맞춰주자고하는게 아니고 뭔가.  참 지금의 젊은이들은!... 나는 로친이 있는 사람이다.  과부집문턱이 말이 많다고 소문이나 나면 내가 무슨꼴이 되겠는가. 로맨스 그레이를 하고싶지 않은 나였다. 하여 나는 붉은 울금향은 커녕 감히 찾아가보지도 못했다, 군자의 도덕을 지키느라고.   이러구러 3일이 지나 아침에 강변공원에서 향숙이를 다시만나게됐는데 그 애가 울어서 눈이 부어 있었다. 얘가 왜 울었을가?...  의문이 머리를 때리는데 향숙이가 나보고 하는 말이 자기 어머니는 간밤에 뇌익혈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몹시 악연했던 나는 노란 울금향을 사들고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그지없이 골풀이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서 그녀의 생전에 붉은 울금향을 들고 가지를 않았던가?  도덕, 도덕, 무슨놈의 개떡같은 도덕이란말인가?...  나는 그녀앞에 다시한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만 것이다.                                                                                            2000. 1. 28                    튤립ㅡ 울금향        꽃말ㅡ 붉은울금향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란울금향 (끊어진 사랑)                                       
143    나와 편집선생 댓글:  조회:5826  추천:1  2011-09-04
                                        나와 편집선생                                              김송죽      독자들은 흔히 책 한권이 출판되면 그 책과 저자의 이름은 알아두어도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끔 애써온 편집에 대해서는 잘모르고있다. 하긴 그럴범도하다. 저자의 이름은 책가위의 뚜렸한 위치에다 박아놓으나 편집의 이름은 뒤켠 한쪽귀퉁이아니면 안쪽의 별지에다 자그마하게 써놓으니.    누군가는 문학창작이라는 이 고되고도 가치있는 사업을 하나의 거창한 군사행동으로 가정할 때 작가를 제1선에 나선 경기병이라 한다면 편집은 부대에서 후근과 같다고 말한바있고, 어떤 사람은 작가를 천리마라 할 때 편집은 그 천리마를 발견한 백락과 같다고 비유한바 있다. 과연 그러하다. 나는 내가 겪어온 사실로부터 그러한 비유들이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아직은 “문화대혁명”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74년 5월에 나는 나의 첫 장편소설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다 투고했다. 이제 말하겠지만 나의 그 소설은 내가 목숨을 내걸고 땀이 아니라 피로써 쓴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데 그러한 원고가 한 어리석은 자의 작간으로(자기가 검열하겠노라고) 본인도 모르게 중도에서 여러날을  깔린통에 늦어서야 출판사에 들어갔던것이다.    내가 그런줄은 모르고 원고를 받았다는 소식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못해 편지했더니 출판사에서는 마침 방금 받았노라 알리면서 “정성껏 편집하여 보낸” 나의 그 소설원고를 “이제 시간을 짜내여 정독할 것이며 그런 후에는 륜독을 조직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사람이 아마 편집일거라고 속짐작하면서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가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넉달이 지난후에 편지와 함께 한아름되는 나의 원고가 되돌아왔다. 편지를 보니 작품을 기본상 긍정하면서 수개하라는 편집부의 의견이였다. 수개의견은 넉장에 상세하게 밝히였는데 묵지를 대고 쓴것을 보아 한부는 편집부에 남긴게 분명했다. 쓰지 않을 소설이면 이렇게 하겠는가? 희망이 보였다. 그러면서 단번에 성공할리는 없다는걸 미리 각오하고있은 나는 편집부의 의견에 쫓아 인츰 작품수개에 달라붙었다.    반년간 긴장한 수개작업이 있은 후 원고는 이듬해 3월에 다시 연변인민출판사로 날아갔다. 이때는 꼬박 4년간 투쟁맞고 이리저리 몰리던 내가 사업이 회복되여 이웃동네의 소학교로 전근되여 온지 3년철이 되였는데 그토록 조심스레 비밀리에 해치운다는 수개가 그만 탄로되여 하마터면 또 졸경을 치를번했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포위공격을 해왔던것이다. 그때 우리 집으로 잘다닌, 할빈에서 하향을 온 청년교원 하나가 있었는데 그보고선 나의 물을 절대 먹지 말라면서 “반동적인걸 적발하라”고 꼬드겼고 나보고선 “왜서 아직도 고집이 그렇게 센가? 소설을 다시쓰는건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항이다.”고 경고했던것이다. 나는 하도쓰거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여름방학이 되자 인츰 연변으로 나갔다.      쟈므스(佳木斯)에서 동으로 60여리에 있는 편벽한 농촌, 북만에서 태여나 줄곧 북만에서만 살아온 내가 연변에 나가 출판사를 찾은것이 그번이 난생 처음이였다.    하남다리를 건너니 출판사는 찾기도 쉬웠다. 한데 내가 출판사간판이 걸린 대문가에 이르러 뜨락을 들여다보니 모두들 밖에 나와 화단을 정리한다, 풀을 뽑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벅작이고있었다. 대청결을 하는구나, 하필이면 요럴때 올건 뭐람?... 나는 잠시 망설이면서 걷잡지 못할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나타난 이 불청객을 어떻게 대해줄지?... 하지만 천리길 넘어 여기까지 찾아온 걸음이라 일이 끝나기를 기다릴수는 없어서 나는 화단에서 풀을 뽑고있는 한 강마른 분(허해룡선생)곁에 다가가서 초인사를 하고는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주 반색하면서 나를 웃층으로 안내했다.    거기 한 칸에서 안경낀 50대의 근엄하게 생긴 분이 걸레로 테이블을 닦고있었는데 나를 안내한 분이    “여보, 북만에서 작자가 찾아왔소.”하고 알리자 그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다보면서    “동무는 북만  어디서 왔소?”하고 묻는것이였다.    내가 쟈므스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는 의아쩍게 보면서 다시물었다.    “쟈무스에서 왔다? 동무가 무슨 소설을 우리한테 보냈단말이요?”    “장편소설입니다. 입니다.”    “아니 뭐라오? 동무가 그래 의 작자란말이요?”    그는 뜻밖에도 아주 놀라면서 반신반의 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아차, 내가 속히웠군!” 하고 혼자소리로 부루짖는것이였다.    나는 그가 왜서 속히웠다고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동무가 바로 김송죽이겠구만!”    그는 한바탕 소리내여 웃고는 나를 걸상에 눌러앉히는것이였다.    이분이 바로 내가 늘 속으로 점쳐오던 나의 소설의 책임편집인 강정일선생이였는데 그의 말인즉 나의 소설원고를 보고 자기는 작자가 토비숙청경력이 있고 나이가 적어도 52살은 넘었을 사람이라 짐작했다는 것이다. 한데 그해 내나이는 37살이였던 것이다.    “지금 나이 서른일곱이라, 그럼 동문 사변나던 해에 기껏해야 일곱 살밖에 안되였겠는데 토비숙청력사는 어떻게 알고 그렇게 썼소?”    강정일선생은 손가락을 꼽고나서 의문되여 물었다. 하여 나는 내가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때까지 겪어온 경난을 쭉  말했다. (략)                               관련글: 내 사유와 잊을 수 없는 일      소설을 쓰자! 살이있는 내가 적들과 영용히 싸운 군인들과 렬사들의 업적을 쓰자! 이것이 나의 결심이였고 스스로 걸머진 종생의 의무라고 여겼다. 하기에 문학창작은 곧 나의 생명과도 같이 귀중했던 것이다. 그렇다. 아마 그래서 끄. 빠우스또브쓰끼가 “작가는 내부충동에 따라 글을 쓰며 또 쓰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아직 작가는 아니되였지만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1957년, 벌리에서 근근히 초중을 졸업하고 촌에 돌아와 3년간 농사질하다가 마을 소학교의 교편을 잡은 나는 자신의 문화기초가 너무나 낮음을 통감했기에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을 사는데 밀어 넣고 열심히 탐독하면서 끊임없이 창작지식을 련마했던것이다.    “이도 안난녀석이 뼈다귀추렴하련다.”느니 “올라못갈 나무는 쳐다보지도말라.”느니 하고 비웃고 “권념”하는 동창이 있었지만 나는 그따위소리는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리고 결심만 굳히였다.    나는 단편소설 한편 써보지도 않고 시쪼박만 쓰다가 어벌통크게 달려들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해에 40여만자에 달하는 장편을 써냈다. 한데 그것이 화근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나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작은 등척”으로 , “교원대오내에 숨어있는 주양의 졸개”로 잡혀나왔는데 촌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고 문학리론을 학습하고 조선작가 리기영선생과 서신거래가 있은것 모두가 “가만놔둘수 없는 죽을 죄”로 되어 투쟁받았다.   무슨놈의 “죄”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못했던 일이였다.   公社敎員造反團을 조직한 심보고약한 한 야심가의 조종과 추김을 받은  중학교의 철없는 “맹장”들은 얼싸좋다고 사정없이 달려들어 내가 그처럼 애써 모은 1천2백여권에 달하는 책중 문턱밑에 파묻은 세계명작 16권을  내놓고는 다 빼앗아갔거니와 철저히 혁명을 해치운다면서 마구뜯고(천장),  마스고(책장),  허물고(부뚜막), 뒤집고(구들장, 새낫가리) 하여 하루낮새에 집이라는 것이 거덜이나고말았다. 나는 더 말할것 없고 겯따라 어머니와 안해와 자식들이 받은 고통과 릉욕과 멸시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치 않겠다. 그때 팔을 걷고 나섯던 맹장ㅡ 현대토비중에 아직까지도 그 죄를 느끼지 못하고 뻔뻔스레 노는  자가 있는데 너도 개나 돼지아니면 느낄날이 있겠지 하고 내쳐둔다. 하여간 지랄발광네굽질이였다. 나에게 책과 대자보(大字報)를 한짐한짐 가득지우고(마을의 혁명자 둘도 한짐씩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공사내 6개마을을 돌면서 1관, 2관, 3관, 4관 전람관을 차려가며 투쟁했거니와 전 화천현(樺川縣)의 만명투쟁대회에 내세우기까지 했으니 독자는 그 정도가 어떻했으리라 가히 짐작하리라.     이미 써놓은 원고가 잃어지고 여러해동안 수집해놓았던 자료들도 찾을길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다시금 구상해두었다가 출옥하자마자 인츰 또 새로썼던것이다....      강정일선생은  나의 이 평탄찮은 경과사를 곰곰이 듣더니 자못 침중한 기색을 지은채 말했다.    “송죽동무, 과연 고생했소! 그러니 소설도 력사가 있구만! 지금보건대 주제도 좋고 내용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기요!”    그때 편집선생의 그 한마디가 의지가지 할곳 없었던 나에게는 과연 크낙한 고무였다.                          이틑날 강정일선생은 나를 데리고 인쇄공장을 참관시켰다.    “동무의 소설도 다 되면 장차 여기서 저렇게 찍어 책으로 되어 세상에 태여날것이요.”    참관을 다하고나서 강선생이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였다. 그때 얼마나 기쁘던지! 희망은 나의 창작의욕을 더더욱 불태웠다.    사흗날 강정일선생은 그때 문예편집실책임으로 계셨던 허해룡선생과 함께 나를 앉혀놓고 편집부에서 나의 장편소설을 읽어본 정황과 이미 토론되였던 구체적인 수개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떠나는 날 강선생은 나를 보고 지금의 처지에서 무엇보다 공사당위의 지지를 받는것이 중요하니 돌아가거든 출판사에서 나의 소설을 장차 출판할 예정으로 아주 중시하고있다는 걸 알려주라했다. 하여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길로 공사에 들려 그때 갖부임되여 온 초면의 서기앞에서 그 말을 전달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지지해달라고했던 것이다. 당위서기는 그러마고 쾌히 응낙했다. 그레서 숨이 좀 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번째수개에 접어들었다. 안해가 이전처럼 제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애발대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4인무리”가 의연히 살판치던 때라 편견에 물젖은 사람들의 경계하는 눈이 번득였기에 잔약하고 고생많이 한 나의 안해는 의연히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작품수개가 거진되여 갈 때 나는 출판사에 편지하여 이번에는 작품합평회를 조직해줄것을 건의했다. 그랬더니 편집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사전에 사람 몇을 정해놓고 륜독하게끔하라했고 그것이 끝나 소식알리면 친히 한번 왔다가겠노라했다. 하여 1976년도 2월달에 강선생이 우리집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선생은 그때 북만이 첫걸음이라했다.    내가 쟈므스로 마중을 갔었는데 화창하던 날씨가 그날따라 별스레 눈보라를 일쿠어 새벽차에 내린 강선생을 적이 놀라게 만들었다.    “허, 대단한데! 북만이 춥다니 웬 소린가했더니만!... ”    “연변손님오신다고 본때를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말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튼 먼길도 마다하고 오시니 나는 몹시 반가왔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7리가량되는 마을로 걸어갈 때는 눈보라가 멎었다. 강선생은 가다가 걸음을 멈추곤 무연한 벌을 둘러보더니    “오ㅡ 광활한 북대황이여, 네가 넓으니 포부있는 작가도 태여나는구나!”하고 즉흥시를 읊듯했다.    나의 용기를 북돋우어주느라 그러는것이였다.      그날저녁 잠을 잘 때였다. 웬 일인지 강선생은 자리에 누워서도 모자벗을 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의아쩍어했더니 강선생은 아Q가 숭터를 감추지 못했던 얘기를 하곤    “웃어도 방법없수다. 난 이렇게 번들골이요.”하면서 모자를 벗었다.    강선생은 원체 머리카락 몇오리 찾아보기 힘든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줄을 몰랐던 나의 안해는 손으로 입을 막느라했지만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한바탕 웃음을 텃치고말았다.    강선생은 합평회의를 열고 수개의견을 내놓느라 우리 집에서 10여일가량 묵고 돌아갔다. 그리곤 그후부터 우리 집 살림이 구차한것을 헤아려 출판사원고지를 보내여 그것을 쓰게했고 오두막같은 우리 집이 꿈에도 생각키운다면서    “수개진전이 어떠한지요. 적잖게 애로들이 많으리라 믿습니다만 동무의 굳은 의지가 능히 모든 난관을 정복해나가리라 확신합니다.”하고 편지했던것이다.    내가 장편소설을 세 번째로 수개할 때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력사에 류례가 없다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나는 겨울방학때 원고를 가지고 연변에 나갔고 이듬해여름에는 강선생께서 허해룡선생과 함께 우리 집에 두 번째 오시였다. 여지껏 작품에 3돌출을 하느라했는데 이젠 변화된 형세에서 다시한번 수개해보라고 원고를 내놓는 것이였다. 50만자도 넘는 소설이여서 한번 옮겨쓰자해도 3, 4개월이 잘걸린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건 더 말할것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기꺼이 수개에 달라붙었다. 여지껏 편집부의 의사대로 3돌출에 맞추느라 쓴 소설이다보니 대수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알고 나는 이 네 번째수개는 시간을 썩 늘게 잡았다.    강선생은 수시로 편지하여 나의 작품수개정황을 료해하였다. 편집부의 사상이 해방되는걸 보노라니 작자인 나는 더없이 기뻣다.    1976년 가을에 쓴 편지에다는 류원무의 중편소설 “숲속의 우등불”을 편집하고있는 중이라면서 최택청의 장편원고 “도강전야”의 심열정황도 알려주었고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고 정신쇠사슬이 없어지니 좋은 작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화원을 활짝 꽃피우고있소. 참 얼마나 즐거운 세상이요!” 하고 자기의 기꺼운 감정을 구김없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침내 4번째수개도 끝났다. 한데 또한번 다시수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보고 사상을 더 해방하여 마음껏 고쳐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군소리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젠 기진맥진한것만은 사실이였다. 이때는 내가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와 단통 고중의 조선어문과교수를 맡아 하고있었는데 교재를 연구할라니 작품을 수개할라니 실로 힘에 붙이였다. 하여 나의 이러한 사정을 편집선생에게 반영했더니 편집부에서는 학교당국과 교섭하여 나에게 반년간의 창작휴가를 주도록하였다. 하여 나는 집에 들어앉아 낮에 밤을 이어 맘놓고 수개할 수 있게되였던 것이다.  그때 중학교의 교장은 오상국(吳相國)선생이였는데    “문학도 역시 중요한 교육이요. 동무의 소설이 잘 수개되여 하루속히 세상을 보기 바라오.” 하면서 면려했다.    얼마나고맙던지!    편집은 어느한번 편지에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였으면 얼마나좋겠소.”라고 했다.    편집선생도 얼마나 기진맥진했으면 이렇게 당부할가. 내가 들어앉으니 내가 맡은 고중반 학생들은 조선어문과를 배우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내 가슴을 메웠다. 나는 미안한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서 더 참답고 이악스레 그 마지막번의 수개를 기한전에 끝마쳤다.      1982년 5월말, 강정일편집께선 집에 있으면 이러저런 일로 찾아오는 이가 하도 많아 원고를 시름놓고 볼수 없길래 약 50여일간 북만에 들어와 편집을 하기로 나와 약속이 있었다. 하여 나는 세 번째걸음인 그를 마중하러 쟈므스로 갔다.    연변에서 오는 객들은 새벽차에 쟈므스에 내리므로 나는 시간이 되자 개찰구로 나오는 객들을 하나하나 눈주어 살펴보았다.    이윽고 회색여름옷 입고 차에서 내린 강정일선생이 먼저 나를 부르면서 손짓했다. 나는 그만 첫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버렸던것이다, 강선생은 원래 대머리가 아닌가. 한데 어느새 머리가 저렇게 낫을가? 알고보니 가발을 해쓰고 오시였다.    “그러니 아주 변모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웬 젊은인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젊어보인단말이지. 하하하....”    우리는 다시한번 상봉의 기쁨을 나누면서 해뜨기를 기다렸다.    강선생은 오신 그날만 휴식하곤 이틑날부터 나의 장편소설편집에 긴장히 보내기 시작했다. 그해따라 유달리 가물어 선생이 와있은 50일동안 비한꼬치 내리지 않고 무덥기만했다. 내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그때 우리는 이미 향소재지에 이주하여 와 향에서 처음일떠세운 교원사택ㅡ널찍한 벽돌집에 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늘 맨 런닝그바람에 창턱가에 놓인 원탁에서 원고를 보군했다. 이럴때 선풍기하도 한 대 있으면 오죽좋으랴... 나의 저작을 내주자고 무더위속에서 그렇게 땀흘려가면서 신고하시는걸 볼때면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한데 작가나 편집이나 제 주장을 고집하는건 꼭 같은가보다. 강선생이 나의 소설에서 두 개절이나 빼던지려 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것 같다는 것이였다. 없어도 될것이면 내가 만들었겠는가? 이것이 나의 주장이였다. 하여 우리 둘은 쟁론이 벌어졌는데 나의 안해는 싸우는줄로 알고 놀라기까지 했다. 옹근 하루시간의 격렬한 쟁론을 거쳐 나중에는 한 개절만 빼버리고 다른 한 개 절은 수개하여 그냥넣도록 “담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나하고만있은게 아니다. 나의 소설편집이 다 되자 마침 리근전선생이 우리 집에 오시였는데 닫새를 묵는 기간 그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 제2부의 원고를 놓고서도 작자와 편집지간에는 그같이 쟁론이 심했다. 이럴때 객관이 되어 옆에서 구경하니 그게 참 재미있기도했다.        나의 소설이 출판사에 투고되여 세상을 보기까지 만 8년간! 그사이 나의 소설은 “3돌출”을 하느라 세 번, 사상을 해방하느라 두 번수개하다보니 도합 다섯 번이나 탈태환골을 한 셈이다. 그사이 편집선생이 내한테 편지한것만도 50여통 잘된다. 나도 아마 그만큼은 했으리라. 편집선생이 우리 집에 세 번오시였고 내가 연변으로 세 번나갔더랬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다가 지구적인 “교착전”에서 피로할대로 피로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간에 리해를 기리했고 우의로써 새힘을 길러낸것이다. 나는 앞으로는 더 어려운 시련도 겪어내면서 글을 그냥 써갈것 같다. 강선생은 이젠 환갑이 다 되신다. 이제 곧 리직하면 편집사업을 그만둘 것이다. 하지만 그이께서도 운명하실 그 시각까지도 문학을 영 던지지는 않을것 같다. 이건 아마 내나 편집선생의 천직인것 같다.                                                  1988.12                                                   ※  원문장에 몇글자 보충                                                   관련글: 處女作 時 외 1수.                                                  관련글: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142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댓글:  조회:6264  추천:1  2011-09-01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김송죽     세상에 생명가진 동물이란 동물은 다 자기가 갖고있는 눈, 코, 귀, 혀, 살갓따위로 아품이며 차가움이며 닿음같은 것을 알아낼줄을 안다. 말하자면 감각기능을 갖고있다는거다. 동물만이 그러한게 아니다. 원산이 남미주이고 콩과에 속하는 함수초는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지만 분명 감각기능을 갖고있다. 감응초 혹은 미모사라 부르기도 하는 그 식물은 잎을 좀만 건드려도 곧 아래로 늘어지고 소엽도 꼭 닫아버려 마치 부끄러움을 타는것 같아보인다. 그런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거다. 이런 종류의 식물을 감각식물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이를테면 산, 바위, 집같은 부동의 물체마저 감각이 있는게 아니냐면서 거기에다 생명의식을 부여한다. 나역시 감성론자이긴 하지만 무생물의 감각유무(感覺有無)까지 놓고 구태여 옴니암니캐면서 론하고싶지는 않다. 그건 생물학자들이나 연구할 일이니까. 내가 오늘 똑똑히 밝혀두고싶은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 역시 움직이고 말하는 동물ㅡ 사람인것만큼 감각기능을 갖고있는거고 감각기능이 있으니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으니 사유가 있다는 그거다. 사유를 불교에서는 대상을 분별하는 일로 해석하고있다. 즉 성질을 인지하고 판단한다는 말이 되겠다. 사람마다 자기의 감각과 사유가 있고 그것은 또한 분량이 있다. 하다면 나의 감각과 감정, 사유는 도대체 어떠하고 어느정도일가? 그것을 천평우에 올려놓고 달아보긴 어려운일이지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록화를 풀어보면 대략 알수있다.   나는 쟈므스(佳木斯)에서 “광복”을 맞았다. 제정때 징병에 뽑혀나갔던 나의 부친님이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훈련을 끝내고 쟈므스철로경호대에 배치되여 근무하다보니 우리는 바로 거기서 살게되였던것이다. 그때 내나이 7살이였다. 한쪽으로 쏘련군이 쳐들어오고 일본군은 도망을 치고 도시는 불바다가 되고... 그야말로 혼란하기 짝이 없는 란장판이였다. 그때 쟈므스철로경호대에는 꼭같은 신세의 동포가 다섯있었다. 그들은 하는수 없이 할빈쪽으로 내빼는 일본군을 따라 차에 올랐다. 그랬다가 그들은 그자들을 그냥 따라가면 끝장이 좋지 못할게 뻔한지라 눈짓으로 서로 약속하고는 차가 도시구역을 채 벗어나기전에 그만 모두 뛰여내렸던것이다. 쏘련군은 차에서 뛰여내린 후 아직 미처 군복도 벗어던지지 못한 나의 부친을 체포했다. 그리고는 총살해버리려고 송화강변으로 끌고갔다. 그런데 말을 시켜보니 조선사람인지라 죽이지 않고 나주었다. 부친은 이렇게 목숨을   건진것이다.   일본이 망하고 만주국이 붕괴되니 토비가 끓기 시작해서 시국은 더구나 어수선산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토비들은 조선사람은 “작은일본놈”이라면서 북만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로라령을 넘기지 않고 모조리죽여버리리라 했다. 그래서 인심은 더구나 황황 불안해났던 것이다. 이같은 형편에서 그해의 9월을 잡자 내 이모부의 형님이자 항일간부였던 김동철(金東哲)이 역시 자기와 같이 항일을 했던 다른 한 사람 숙친한 김해정(金海靜)과 함께 동포들을 재난의 와중에서 건져내고 보호할 목적으로 손잡고 쟈므스와 벌리, 화남, 의란, 보청 등지에서 600여명의 끌끌한 조선청년들을 모집 동원하여 동북인민자치군 합강군구 1퇀 2영을 창건한 후 토비숙청에 나섰는데 전사들은 싸움마다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쳐 소문이 멀리났거니와 군중의 애대를 몹시 받았다. 항간에서는 이 부대를 습관상 “조선독립영”혹은 “동철부대”라 했다.   당시 중공중앙에서 파견되여 온 장문천(張問天)동지가 녕안에 있으면서 합강, 목단강 두 성의 토비숙청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광복”나던 그해의 8월부터 12월까지는 북만토비숙청의 첫단계로서 전략은 자체의 실력을 확충하면서 토비의 반란을 공제하는 것이고, 둘째단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7월까지 력량을 집중하고 련합하여 토비를 강력히 소멸해버리는것이였다. 합강군구는 방강사령원(方强司令員)의 지휘하에 의란(依蘭)에서 정편(正編)과 훈련을 다그쳐 끝내고 1월 12일부터 토비숙청에 나섰다. 나의 부친은 일본군에서 정기적인 훈련을 받았고 사격술이 좋았기에  교련(敎鍊)이 되어 자기가 소속해있는 독립영의 훈련을 맡아서 지도했고 그것이 끝나자 정찰반장이 되어 부대와 함께 토비숙청에 나섰다. 그때 공산당은 립장이 돌아선 그의 과거를 더 캐지 않고 믿어주면서 이같이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었던것이다.   아군은 토비숙청을 벌린 두 번째 단계내에 “중앙군(中央軍)”이요 “선견군(先遣軍)”이요 “정진군(挺進軍)”이요 하는 딱지를 붙인 토비 근 2만여명을 섬멸해버림으로써 한시기 북만을 독천장으로 삼고 살판치던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거니와 계획대로 주력을 기본상 숙청했다. 악명높던 41개의 크고 작은 도당들은 모두 붕괴되였고 그자들의 “4개큰깃발”이라 자랑하던 사문동, 리화당, 송영구, 장우신은 목숨을 살려보려고 잔당을 끌고 산속에 깊이 숨어버렸다. 이해의 8월부터 년말까지 세 번째단계였는데  아군은 구역을 나누고 떼여맡는 방법으로 숨어버린 잔여를 계속 추격, 사출, 소탕하는것이였다. “동철부대”는 상급지시에 쫓아 화남현에 주둔하면서 금광과 화력발전창을 보위하였다. 11월 16일, 나의 부친은 참모장 김해정의 인솔하에 다른 한 형제반과 함께 적정을 저찰하러 자기 반을 거느리고 영평강(永平崗)에 갔다. 영평강은 완달산중에 있는 자그마한 금광촌이였다. 엄한이 스며드는 그날밤 전사들은 마을과 2리가량 떨어진, 지주가 버리고 달아난 빈집에 들었다. 헌데 리화당(李華堂)비도가 그 마을 고지주의 밀고를 받고는 이틑날 새벽에 잔존기병 100여명을 끌고 와 달려들었다. 이쪽은 포위에 들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허지만 과불적중(寡不敵衆)이요 적은 워낙 수자가 몇배나 많으니 력량이 근본 대비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사결전을 벌린 전사들은 영용히 반격하면서 3시간남짓이 견지했다. 적은 나중에 집에다 불을 질렀다. 이쪽은 사망자가 많은데다 탄알마저 떨어졌다. 하여 17명은 모두 불타는 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원쑤들은 그야말로 단말마적인 발악으로 최후의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후 림구쪽으로 달아난 리화당(李華堂)은 한달도 못되여 12월 12일에 산속에서 아군에게 체포되여 나오다가 말을 놀래여 마차를 뒤번짐으로써 밑에 깔려 자살했고 사문동(謝文東)은 그보다 먼저 붇잡혀 3일에 벌리(渤利)에서 처형되였으며 장우신(張雨新)은 15일날 조령에서 총살당했고 손영구(孫永久)는 명이 좀 더 길어 이듬해의 4월 1일에 벌리에서 처단되였다. 이상의 네 토비두목을 보면 사문동과 리화당은 워낙 항일을 하다가 왜놈앞에 무릎꿇었던 변절한이고 장우신은 한간이며 손영구는 상습비도였다.   부친이 희생된 후 우리는 영평강과 장대를 몇 개 사이한 리수거우(돌배나무골)로 갔다. 거기에 부친이 소속했던 한 부대가 주둔하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군인들의 옷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옹근 3년간 그들과 함께 지냈다. 말하자면 부대가 나를 아들같이 자래운것이다. 나는 군인들한테서 글을 배우고 노래를 배웠는데 그들의 전투얘기를 더 듣기 좋아했다. 그때 부대에는 군마가 여러필있었다. 그게 아마 1948년도 봄이라 생각된다. 어느날 앞골이 푸르러지자 사양원아저씨가 털빛이 붉은 절따말 한필을 나한테 주면서 끌고나가 방목하라고 했다. 나는 좋와하면서 말을 끌고 앞골로 갔다. 그리고는 진종일 말잔등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켠이 되어 돌아오니 엉덩이껍질이 다 벗겨져 아파죽을지경이였다. “야 이놈아, 그 말은 앓아서 등때기가 칼등된건데 네가 그걸 타고 진종일 놀았으니 그놈의 엉치가 무사할리 있겠냐, 이놈!” 군인아저씨들은 내 꼴을 보고 혀를 차면서 웃고 놀려주었다. 그래도 나는 이젠 말을 안먹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원아저씨는 이틑날부터 아예 안장까지 지워주면서 나더러 타고다니며 풀을 뜯기라했다. 나에게는 길이가 한발이나 되는 번쩍거리는 칼 한자루있었다. 그것은 군도가 아니고 자루에 사쿠라꽃을 새긴 일본제의 격검용 장검이였는데 나의 부친이 어느 한 전투때 토비손에서 로획한 것이였다. 그런것을 내가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부고를 받고 부친의 시신을 보러 멍쟈강(孟家崗)에 갔을적에 부대에서 유물이니 두고 기념하라면서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1953년도, 타요자금광국에서 연극을 논다며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죄꼬만 녀석이 제키만큼한 칼을 옆꾸리에 척 차고는 말까지 타고 꺼들거리니 보는 사람마다 “허, 그놈!”하고 탄사를 냈다. 나는 그럴때마다 으쓱했고 그러는 멋에 말타기를 더 좋아했다. 했지만 나는 마을을 나와서는 곧 말에서 내리군했다. 병든 말이 불쌍해서였다. 그 절따말은 총상을 세 번이나 입었는데 엉덩이에 박힌 탄알은 그때까지도 빼내지 못했다고한다. 모두들 하는 말이 그 말은 병들기 전에 아주 용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더 측은했고 어느덧 정이 깊어갔다. 나는 말이 병이 났기를 빌었거니와 신선한 풀을 많이 뜯어먹고 어서 풀살이 오르기를 바랐다. 어느날인가는 내가 먹자고 싸간 반합의 샛노란 강냉이밥을 먹이기까지 했다. 헌데도 웬일인지 말은 종시 푸들념을  하지 않고 점점 더 앙상하게 여위워만갔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의 어느날 그 절따말은 끝내 죽고말았다. 저절로 죽은것이 아니라 사람이 총으로 쏴서 죽인 것이다. 누가 그랬는가? 낯에 마마자국이 덮힌 패장아저씨가 그랬던거다. 그 아저씨는 별명이 “꽃쟁반”이였다. 토비들이 곰보를 “꽃쟁반”이라했다. 편지를 “해엽자”, 양말을 “동동자”, 술을 “반강자”라 하는 것 처럼 그것도  토비들사이 사용하는 은어(黑話)였다. “빌어먹을 꽃쟁반! 어디보자!” 불쌍한 애마가 그렇게 죽어 속이 끓어올랐던 나는 혼자 울며 음질을 쓰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먹둥구미에다 썬 여물을 담아갔고 가서 낮잠자고있는 그의 머리에다 콱 부었다..... 그것은 감미로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나의 소년시절이였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내 인생에 고초를 안겨주면서 속절없이 흘러갔다. 세인이 다 알고있는 10년동란시기를 나는 그야말로 악몽속에서 흘러보내면서 목숨을 간신히 건지였다. 력사에 류례없다는 그번 “혁명”을 발동한 위대한 분이 눈을 감은 이듬해에야 나는 동란에 곡경을 치르고 제 마을에서는 그냥 살기 어려워 치타이허(七臺河)에 이사간 어머님을 보러 갈 수 있었다. 헌데 그번걸음에 내가 꽃쟁반아저씨를 다시만날줄이야! 그때 그분은 이미 70고령이 다 된 늙은이였는데 우리는 꼭마치 생리사별(生離死別)을 당했던 부자간모양으로 부등켜안으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이게 몇해냐, 30년!... 너를 보니 내가 병념이를 다시만나는 것만 같구나!” 나의 부친의 명함이 병념(丙念)이다. 면면한 회포가 가슴을 채웠다. 그날밤 우리는 한이불속에서 자면서 밤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내한테 여물벼락을 맞던 일과 상급의 비준도 없이 자기가 병든 말을 고칠수 없으니 아예 죽여버려 후에 처벌받은 일도 빼놓지 않고 회억했다. 그 일을 어찌 잊으랴. 아저씨가 말했다. “듣자니 넌 네 아버지의 력사문제 때문에 더 고생했다더구나.” “예, 그랬습니다. 계급이색분자라구요. 렬사증까지 빼앗기구...” “미친 녀석들이지!” 아저씨는 몹시 격분하시였다. 그때 혁명열의가 충천했던 “반란자”들은 렬사증만 빼앗은게 아니라 꼭괭이를 들고가 벌리렬사릉원에 있는 나의 부친의 묘를 당장 파던지겠노라 왁작 떠따고우더니 웬 일인지 가지 않고 제풀에 물러앉고말았다. 아마 감히 그럴 담량은 없었던모양이다. “문화혁명”후에 벌리현에서는 시내안에 있던 17명렬사릉을 다른렬사릉과 합치느라 서산에 옮기면서 나의 부친의 묘에다 높이가 한키나되는 비석(碑石)까지 세워놓았다. 그리고 해마다 청명절이 돌아오면 학생들은 잊지 않고 찬배를 가고있다.   나는 내가 “반혁명분자”란 커다란 패쪽을 목에다 걸고 이웃마을에 가 투쟁받던 일을 죽어도 잊을수 없다. 아낙네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이놈아, 네 애비 어떻게 죽었니?” “토비를 숙청하다가 죽었습니다.” “네 애비 잘 썩어졌다, 잘 썩어졌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손에 쥐고 나온 꼬챙이로 내 입을 쑤셔놓았다. 지독한 악녀였다. 토비를 잡느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렇게 치떨린단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쌍년아!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개보다못한 년!... 숨이 넘어갈 듯 아파난 나는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뱉으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개는 그래도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 3년전 여름. 전국소수민족작가회의가 있어서 북경에 갔던 나는 회의기간 새로사귄 작가친구들과 함께 개공원을 가보고 놀랬다. 처음이다. 거기에는 내가 평생구경못한 수백종의 개가 있었던것이다. 우리 여기 중국종의 발바리로부터 프랑스 알사스가 원산인 세퍼트, 영국이 원산인 바스티브, 불독, 콜리... 하여간 없는것이 없었다. 털빛이 하얀 세인트버너드란 개는 검고 커다란 귀가 아래로 축 쳐졌는데 다른 개보다 트대가 유별나게 굉장히 컷다. 내가 지금 이런 개를 자래워서는 뭣에 써먹겠느냐했더니 집이 신강 우르무치에 있는 위글족 녀류작가 비리커무 싸디크가 거기 패쪽에다 써놓은 설명문을 먼저보고나서 왜 써먹을수 없다구요, 이 개는 생긴것과 같이 힘이 센데다 후각이 특별히 발달하고 인내력이 있어서 훈련만 잘 시키면 구명견(救命犬)으로 훌륭히 쓴다는군요 하고 알려주었다. 개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함에 제 생명을 바칠줄을 아니 어찌 미물이라하랴! 우리 마을에는 동란이 일어나기 두해전에 쟈므스시내에서 이사를 온 집이 하나 있었는데 잔밥이 많은데다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오자부터 쌀과 남새를 대주었다. 나는 그네들을 가엽이 여기고 무척 동정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가까운 사이로 되었다. 그런데 지내보니 그 호주가 워낙 유별나게 손꿉놀리기 싫어하는 건달이였다. 바탕이 그런 사람이 “문화혁명”이 일어나니 어찌하여 마을에서 “반란파”, “지도급인물”에 들어 머리를 내젓기 시작했다. 과연 소웃다 꾸레미터질 일이였다! 그는 나에게 나를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며 빼앗기운 원고며 일기책이며 소설책들을 한짐 가득 지우고는 온 공사 6개의 마을을 조리돌림하면서 투쟁했다. 지난날의 정을 봐서라도 어쩌면 그렇게까지야?....제법 말할줄을 알고 시집장가를 갈줄도 아는 사람의 새끼를 만들어낸걸 보면 그가 결코 미물같지는 않았다. 헌데도 어쩐지 나는 개만 보면 오래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를 다시다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사람의 깝지를 쓰고 어쩌면 그렇게까지야?....(리성도란 자도 있다. 그역시 외지ㅡ 송화강건너 어느마을에서 이사를 왔으니 초면이였다.)   말대갈상의 계집년하나는 이웃에 살면서 아들의 “소설자료수집노트”를 감춰준 나의 어머니를 보황파라 고자질하여 이루형언키 어려운  릉욕, 곤욕 을 당하게 하고는 그게 너무도 깨고소해서 깔깔거리며 춤까지 추었다. 한쪼각의 인성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추태를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했다. 남의 불행을 자기의 락으로 삼고 거기서 행복을 줏자고 드는 그런 악인에게 무슨 락이 있으며  행복이 있겠는가? 방치돌을 달아매도 늘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통히 현실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는것 같기도하다.   나는 학교를 초중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문학을 시작한 나는 마을의 초학자들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해서 주일날이 돌아오면 꾸준히 리론을 학습했고() 겨울이면 연출대를 무어 연극을 놀았다.(, , 등) 그러다가 내 생각에 기초가 일정하게 닦아졌다고 여겨지자 1965년도에 내 평생숙원인 토비숙청을 제재로 한 첫장편을 집필하기 시작했던것이다. 헌데 그것이 남을 그토록 격분시키고 지어는 반당, 반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죄악”으로 되어 투쟁대에 오를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무지의 락원에서 나는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모란 수모는 다 받아보았다. 나도 감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사유가 있는 사람이다. “야 이놈아, 거꾸로 들고 쪽 훑어봐야 똥밖에 나올게 없는 주제에 네가 소설을 써? 야, 야, 메스껍다!” 마을에서 “참모”노릇을 하는 유식하다는 사람이 이러면서 나를 투쟁했다. 사람의 배속에서 똥이 나오지 않고 그래 꿀이 나오겠는가? 인간에 대한 학대가운데서 가장 나쁜것이 남의 인격을 헐뜯는 것이다. 속담에 “관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했다. 원쑤진 일도 없건만 산사람을 세워놓고 어쩌면 그렇게까지 막말을 한단말인가?... 능구렁이같은 그 령감쟁이는 아직 살수있는 나이건만 내 가슴에 박아놓은 못을 빼지도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물론 죽음이 모든걸 속죄는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란다. 잊다니? 당신이면 그래 잊을수있단말인가? 부처님이나 그걸 잊겠는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부처님으로 태여나지 못했다. 지난날 나를 못살게 군 사람을 다소 용서할수는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한 마음의 상처니 잊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본능을 떠난다면 그건 다 가짜가 되고만다. 그렇지 않은가? 뒤늦게라도 내한테 잘못을 사죄하는 사람이면 그래도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있어서 고마운거고... 더 쓸라치면 장편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둔다.                                            1996년        보충글: 광복직후 정치토비들은 북만 각 현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열의가 높아 혁명대오에 용약참가하니  아니꼽게보고  잔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5월 14일 밤중에 왕소정(王小丁)비도 200여명은 목단강시 북쪽에 있는 팔달구촌(八達溝村)에 달려들어 그 마을의 촌장 장정국(張正國)을 비롯한 농회위원 김남수(金南洙) 등 4명을 살해하고 군중 10명에게 중상을 입히면서 현금 7백만원과 옷 1천여견지를 략탈했거니와 촌자위대의 무장을 전부 거두어갔고 달아났다.   1946년 5월 26일, 곽흥전(郭興典)토비 700여명이 東安市(지금의 密山市)에 달려들어 하루새에 무고한 조선족주민수백명과 한족간부를 학살했다. 내가 조사해봤는데 이웃의 마음좋은 한족이 마른 우물과 천정에 숨겨주고 제 자식인양 옷을 갈아입히고는  낯에 검댕이를 발라 위장해서 겨우살려낸 그 몇몇  어린아이와 어른을 내놓고는 몸을 빼지 못한 동포 300여명이나 생명을 잃은것이다. 곽흥전(곽털보)비도는 그들을 학교에다 몰아넣고는 기관총을 갈겨 무더기로 죽이였는데 붉은피가 도랑물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를 혹은 이라고도 한다. 그것뿐아니다. 1946년 6월 16일밤에  곽(郭), 랑(郞) 두 비도무리는 결탁하여 팔면통(八面通)에 달려들었는데 그곳 보안대(保安隊)를 격파하고는 또 다시 동안에서의 모양대로 무고한 조선족을 여럿이나 살해한 것이다. 이같이 참사가 련이어 발생하자  황황불안해난 북만의 우리 동포들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땅과 여지껏 살아온 집을 버리고 쟈므스, 무단쟝, 하얼빈, 치치하얼 등 도시로, 아니면 연변으로 고난의  피난을 시작했던 것이다.      보충글:  김동철, 김해정과 나의 부모님들은 숙친한 사이였다. 그 두분은 다 동립운동가들로서 항일때 동북항일련군 제8군 군장 사문동을 알고 마희산도 알게되었던 것이다. 김해정은 독립운동을 해온 나의 할아버지와는 결의형제를 맺은분으로서 의형제 다섯중 할아버지가 첫째, 그는 망내였다. 나의 이름은 그가 松竹이라 지어준 것이다.  나는 사문동을 본것이 모두 세 번. 두 번은 무리를 끌고 우리 마을 복가툰(福家屯)에 들어왔을 때고 마지막은 붙잡아 벌리에서 처단 할 때였다. 마희산은 그가 죽어서야 보았다. 그의 머리를 떼여  손영구, 정운봉, 손팡유, 곽흥전, 장락산(독수리)의 머리와 함께 벌리시장에 달아놓았던 것이다. 사문동의 머리는 기차에 달고 다녔다. 한때 살벌한 재난을 몰로고와서 동북인민을 공포속에서 떨게했던 천죄만악의 토비가 이제는 다 숙청되였으니 안심을 하라고 알리는 이쪽ㅡ 공산당의 공시였던 것이였다.        (관련글)   合江軍區一團二營 : 1945年 9月, 在共産黨的領導下, 由金東哲, 金海靜等人動員佳木斯市和渤利, 樺南, 依蘭, 寶淸等縣600名朝鮮族靑年參軍, 創建了東北人民自治軍, 合江軍區一團二營. 營長柳坤(從延安來的漢族), 敎導員金東哲, 參謀長金海靜. 人們稱這支隊伍爲 “朝鮮獨立營” 或 “東哲部隊”. 他們在消滅謝文東, 李華堂的剿匪鬪爭中, 不怕犧牲, 英勇戰鬪, 屢建戰功, 多次受到表揚.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87頁)      永平崗戰鬪 : 1946年秋, 合江軍區一團二營進駐樺南縣, 保衛金鑛和火力發電廠. 11月16日, 營參謀長金海靜率2个班的戰士去永平崗偵察敵情. 傍晩, 寒風凜冽, 戰士們住進離屯2里外的逃亡地主的空房子里. 爲警戒敵人, 一夜沒合眼. 17日拂曉, 匪首李華堂得知我方是一支小部隊, 便派100多名騎兵迂廻包圍(延邊軍分區安玉均回憶彔). 戰鬪打響后, 我戰士在金海靜的指揮下英勇抵抗, 堅持了3个多小時, 但因敵衆我寡而失利. 房子被燒, 子彈斷絶, 多人犧牲, 最后剩下的7个人也殘遭殺害. 爲悼念17名勇士, 在渤利縣城建立了 “參謀長金海靜以下16位烈士紀念碑”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97頁)
141    로 당 익 장 댓글:  조회:5009  추천:0  2011-08-30
                        로 당 익 장   사전에는 로당익장이란 어휘를 낡투라했지만 나는 아직 얼마든 쓸만하다고 생각된다. 어떤때는 그걸 내놓고는 합당한 어휘를 찾기 어려우니까. 재작년그러께다. 내가 큰아들을 그림공부나 시켜볼가해서 연길로 데리고 갔다. 그전에 여러번 간적은 있었으나 번마다 소설원고때문에 안달아하다보니 번번히 만나봐야 할 분들을 만나못보고 돌아오군했었다. 한데 그번만은 경우가 달라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이름있는 여러 선배작가들을 만나볼수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이틑날 나는 출판사의 강정일편집을 따라 로작가 정길운선생님이 계시는 아빠트로 갔다. 후리후리한 키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우리를 반겨맞았다. 혈색좋고 근력도 있어보이는 정로인의 목소리는 자못 걸걸하였다. 이분이 바로 , , 등 여러권의 민간이야기집을 세상에 내놓은 분이로구나 생각하니 나는 인차 정감이 들었다. 정로인은 내일같아나 우리와 함께 시내를 한바퀴돌고나서 기여히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하여 나는 강선생과 함께 그의 집에다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거리에 나가 몇잔씩 걸친데다 또 맥주를 둬병씩 마시고보니 놀기가 안성마춤이였다. 그래서 자연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정로인은 손자를 얼싸안고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귀염둥이 내 손자야    내사랑 귀염둥아    요것보지 내 손자놈    할배 입맞추잔다    어화둥둥 내 손자야    귀염둥이 내 손자야   즉흥적으로 지어 넘기는 그의 타령가락이 자연스럽거니와 멋들어져서 우리는 웃었다. 정로인은 춤을 다 추고나서 나더러 타령을 해보라했다. 이런! 타령이라구야 알아야 하든지 넘기든지 하지. 나는 난생 처음 진땀을 뺐다. 정로인은 허허 웃더니 책장에서 방금 출판한 한권을 뽑아 저자싸인을 해서 나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내가 도리여 송구스러워했더니 정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이는 실로 소탈한분이였다. 솔직한 뉘우침, 가식없는 맹세ㅡ 여기에 바로 작가적인 고귀한 풍도가 있으리라.   멀리 흑룡강에 있는 나는 오늘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군한다. 나이를 따져봐도 상거 20년! 기껏해야 아들벌밖에 안되는 젊은이와 대담히 도전을 걸고 나서는 백발성성한 로인을 다시금 상기하노라면 저도모르게 정신차리게 될 때가 많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있는가? 성공에 자만하는건 아닌가? 늙은이가 도전했다. 당해낼만한가? 하고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창작에서 가끔 해이해지려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사정없이 채찍을 안기면서 마력을 뽑군한다. 아, 얼마나 좋은 편달이고 고무인가. 몸은 비록 늙었어도 정열만은 식지 않아 젊은이와 내기를 걸고있는 정로인이 지켜보고있길래 나는 좋다. 우리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선배작가들 모두가 정로인처럼 후배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었으면 얼마나좋으랴.                              1984년?   해란강(제376기)   
140    나의 處女作 “북대황 송가” 댓글:  조회:4778  추천:1  2011-08-30
    處女作 “북대황 송가” 외1수   예로부터 사람들은   북대황은 쓸쓸하다     살기를 꺼렸건만       내고향 북대황은          정녕 그런곳은  아니라네   넓고넓은 흥안령은   망망한 림해요     고대광실 기둥감 베내는        벌목공의 노래는           듣기좋아 주옥이라네   학강의 석탄은 기름탄이요   쌍압산의 석탄은     빛좋아 흑금이라        천년을 캐낸들          이 보배 다 캐랴   모래금, 덩이금   흑하, 애훈의 황금은     예로부터 그 명성 높았거늘       북경성의 찬란한 오각별도         이 금으로 만든거라네   하늘 끝에 닿는 땅이 있으니   봄이면 푸른 비단이요     가을이면 황금물결이라        만년을 풍년든다고             북대황은 곡창이라네   하늘에 은하수 흐르고   내고장에는 송화강이     굽이쳐 몇천리        기쁨한짐 그득 싣고          고기배, 짐배 달리네   구만리장천에 태양이 떳고   이 땅에 당이 있어     수천년 고된잠에서 깬 내고향은       기계의 소란한 음향속에         철갑을 떨쳐입었네   오, 장하도다, 네 모습!   내 너의 품속에서     네 운명과 더부러 고이자라거니       이름없는 이 어린 시인도         내 고향을 소리높이 노래하노라!         (1962. 7. 21 “흑룡강일보” 진달래)                  내 앞에서 별이 빛나   나는 반생을 달려왔다 인생종점은 어디? 꼬부라진 의문부호 앞에 던지고 나는 다시 신들메조인다   내 심장에서 설설 끓는 피 동토대의 천년설도 녹이려니 천산만악이 그냥 앞을 막아도 나는 가리라, 내가 갈길을   얼음같이 차가운 랭소 엄한보다 혹독한 인정 무슨 맛이면 보지 않았더냐 담즙같이 쓰거운 나의 생로   하지만 내 앞에서 별이 빛나 마음은 하냥 희망속에서 웃어 용기는 장엄한 맹세 이루더라 용사답게 살다 죽으리라는   오, 그때가 되면 내 한몸 한줌의 재로 되어도 내 이름도 류성으로 남을가 태공을 가르는 빛이 되어.   (1988.1.16. “흑룡강신문” 진달래)             
139    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댓글:  조회:5313  추천:3  2011-08-26
                                     에세이                               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김송죽                                                                (1)       미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각을  놀려가며 몸을  움직이는  춤은  노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면서  또한 일종의  운동으로도  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동물이 공유하고있는 생리상의 욕구(慾求)라 하겠다. 그러한즉 두말할것 없이 그 어떠한 제한도 구애도 받을 필요가 없고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어느  정당이  그것마저  유해(有害)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다  그  어떤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붙여  제압하고 금지시킨다면 뭐가 되겠는가?  구실이야  어떻던지간에  그것은  인간최저의 생존방식마저  모르는  답답하고도  저주로운  무지(無知)에다  폭정(暴政)을  가했을  뿐이지  다른  어떤  좋은것으로는  절대  해명도  평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나면서부터  누구나  다  제  공간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날에  위대하다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살아온  우리들ㅡ 전체국민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가져나봤던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이켜보고  한번다시  랭정히  사고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바  “무산계급혁명”이라는  미명(美名)하에  발동했던  그 세계력사에서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운동”은  근본  위대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이름을  붙일  자격을 못가진 일대  아이들의  작난이였다.  그것은  그 결책자가  지망한것과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무지(無知)의 10년동란(動亂)”,  “폭정의 10년내란(內亂)”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무수한 원안(怨案)이  호곡(號哭)하는  그  혹심한  재난을  어디에다  비기며  언제 다 말하고  청산하랴!  당시 집계된  전국인구를 보면  8억이였는데 력사가  유구한  이 세계의  인구대국은  그  지루하고도  무지한  광열적인  운동으로  하여  만신창이  되어버렸건만도  충성심에만  길들여진 순진한  국민들은  아직도 채 깨여나지를  못해  그것을  감각조차하지 못하고있었으니  엉망이  되어버린  뒷수습은  그  후임자들이 감당해야만했다.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  책임은  응당  누가져야했던가?                                         (관련글: 65)                                                                  (2)   이건  목격자가  나에게  한  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보니  단조로운  만세소리와  충성무(忠誠舞)에  시달림을  받아온  북경의  몇몇  젊은이들은  머리가  남먼저  틔여  보다 자유로운  제 목소리를 낼수있는  문화생활을  대담하게  추구하기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사교무(交谊舞)를  우리도  춰보자는 발상(發想)에서 대담히  행동을  했으니  그날은  정확히 1980년도  청명절.  장소는  원명원(圓明園)이였다.  청년예술가이자 시인이였던 북도(北島),  다른 한 시인 망극(芒克),  그리고  젊은 연출가  하군(何群)이였다.  그들  셋은 그곳에 가  놀면서 한담을  하다가  시를  읖고는 그 격정에 사교춤을  췃다.  매일 그모양 그멋으로  놀았는데  뜻밖에 그에  흡인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것이다. 노래소리를  토해내고있는것은  그때값으로는  260원되는 록음기였다. 구경군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그곳은  어느덧  로천무도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곳은  고정적인  남녀청년들의  모임장소로, 밀회장소로, 사상교류장소로 되였던것이다.  그같이 모이다보니  신분이  각각이요  그속에는  별사람  다  있었다.  모여온 사람들이 입은 옷맵시도 전과는 점점  달라갔다.  세월이  변했길래  새  시대멋을 냈던것이다.  북경에 온 외국손님은 중국에는 여지것 보지 못햇던 이런 경상을 희구하게  여기는지  그것을  갖고온  카메라의  렌즈에 담았다. 그리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북경의 다른 한  곳  앵도구(櫻桃溝)에서도  사교무를 추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거기는 거개가 처녀나 젊은각시들이였다. 그들은  모이면  사교무를 췄고 옷색갈을  뭐로  바꿰입으면  좋을가고 의논도 했다.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새  경상이였다. 이와함께  북경에는 가정무용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그해  즉  1980년 6월달에  와서는  갑작스레 사라지고말았다. 공안부와  문화부가  련합으로  를  내렸던것이다.     당시  공안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큰도시들에서는  공원,  광장,  려관,  가두  등  공공장소에서  남녀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사교무를  추는  현상이  나타났는바  어떤데는  지어 구경군만도 근 만여명에  이르길래  사회치안에   골칫거리라는 것이였다. 그  를  보면  사교무는  저속한  것이여서  사회풍기를  흐리운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취체할것을  견렬히  희망해  영업성적인 무도회를  열었던  주모자는  에  따라  그 엄중성을 가려  “사회질서관리방해죄”로  형사책임을 추궁해야한다“고  했다.                                                                 (3)   80년대초, “가정무도회“는  따져보면  그  래원이  북경의  고급관리자녀군체가  발기한것으로서  짧은시일내에  전국범위에  만연되었던것이다. 1982년에  공안부와  문화부는  이라는  문건에서  가정무도회도 취체해야하거니와 각급령도간부는  이신작칙하여  제  자녀들이  가정무도회를  열지  못하게끔  교육해야한다고  했다.   그때  서안(西安)에  마연진(馬燕秦)이라는  녀인이  있었는데  춤추기를 좋아했다.  당지의  파출소에서는  그녀를  불러다가  춤추는  정황에 대해서  따져물었다.  마연진은  별로  개의치않고  춤을  같이  춘  남녀 100여명의  이름을  쭉  댔다.  그중  어떤  남자는  그녀와  관계가  더  밀접했다.  원래  파출소에서는  너무  제멋대로놀지  말라고  경고를  하자고한건데  마연진은  코방구를  뀌면서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처벌할  조건이  안되거니와  다른  리유를  붙일  방법도 없는지라  그만  돌려보내고  만  것이다.   그런데  1983년에  들어서  “얜다(嚴打)”가  시작되였다.  마연주는  중점타격대상이 되었다.  하여  그녀는  감옥에  들어갔거니와  잇따라서 그녀와 같이  춤을  춘  사람  300여명이나  줄줄이  잡혀나와  그것이 온  섬서(陝西)를  들성케  한  특대안건으로  되었던것이다.  는  여러차나  첫면에다  이 안건의  상황을  보도했다.  그  안건은  끌려든  사람이  많거니와  련루면이  넓어  심사하는데 하도  어려움이  많길래  “얜다(嚴打)”고봉기를  지나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낼수 있었다.  내막을  잘아는  사람이  말한것인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그나마  고봉기를  념겻으니말이지  그러지를  못했다면 적어도  열몇은  사형이  되였으리라는것이였다.  해도 고봉기를  그같이 넘겼음에도  마연주를  비롯하여  사교무를  적극적으로  춘 사람 3명이 총살당하고  3명은 사형유예집행,  2명은 무기도형에 떨어졌다. 무죄는 적고  도형에  떨어진  사람이  너무나도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남(濟南)의 일이다. 산동경극원의  연원인  장우태(張于太)역시  가정무도회에 가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늘  산동성군구사령원의 아들  경애평(耿愛平ㅡ별명 “耿三”),  산동성부성장의 아들  무위첨(武衛尖ㅡ별명“武二毛”),  산동여극극단회계의 아들 박국영(博國營),  제남 어느 한 병원의 의사 서춘생(徐春生) 그리고  시민 차립군(車立君)등을 데리고 다녔다.  그랬더니  1983년 얜다(嚴打)기간에  갱삼,  무이모,  박국영,  서춘생,  차립군  등  10여명은  “건달무리” 주요성원이라  몰아  총살해버렸다.  남을 추기고 끌어  함께 춤판에  들러서게한것  밖에  다른  큰죄는  없었다. 장우태도  역시  체포되였는데  그의체포는  아주  희극적이였다.  그때는  산동경극단에서  바로  하북의  한  현에  가서  연출을  하고있었는데  그  극의  중간에  이르러서는  그의  연기가  끝나는지라  그는  화장을  지우고는  극조의  다른  연원들과  함께  술마시러 갔던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다가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술좌석에서  돌연스레  제 가 끼고있던  손목시계를  벗겨  자기보다  나이어리고  같은  극조에서 자라난  녀배우에게  주면서  “이 오빠는  어느때  일이  날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이걸  기념으로  주니 넌 받거라.”  했다. 대방이  어찌  닁큼  가지랴.  이쪽이  재삼말해서야  그녀는  마지못해 받고는  웃으며  말했던것이다. “좋아요.  그럼  내가  건사하는  셈  치고  받겠어요.” 이때는  밤  12시좌우였다. 제남에서  온  경찰차가  그를  잡아갔다. 진짜희극은  아래에  있다. 1995년에  장우태는  형기가  만기되여  출옥했는데  바로 그가 출옥한  그  한해에만도  중국은  영업이  허가되여  등기된  가무청(歌舞廳)이  20,662개였고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224,938명이나되였다.  그가  갇겨서  옥살이를  해온  12년사이에  중국은  변화가 많았다. 많아도 너무나많았다.                                                         2011.8.26                                                       (관련글: )                                                 
138    무도장에서 댓글:  조회:4338  추천:2  2011-08-24
               무도장에서                         김송죽   얼음 도시ㅡ 할빈! 엄한에 얼어붙은 송화강을 잠재우는 여기, 북켠에 송화강을 끼고 일어선 우의궁전은 꼬박 닷새동안 환락의 도가니에 잠겼다. 전성 제2차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 그것도 제1차대표대회가 있었던 그때로부터 상거(相距) 26년만에야 열리는 회의였으니 안그럴리 있는가! 낮이면 새파란 유리기와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우의궁전이 밤이면 현란한 전등불빛속에 웅장한 그 자태를 우렷이 드러내는데 가슴을 사뭇 들먹이게 하는 흥겨운 멜로디가 밤정적을 깨뜨린다. 여기 우의궁전에서는 밤마다 무도회를 열고있었던 것이다. (대표증만 있으면 자유통과라는데 저기나가볼가.) 춤이란곤 출줄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되어 이렇게 마음이 동했는지 모르겠다.   관악석에서 악대가 연주하고있는데 온 무도청을 빙 돌아가면서 붉운색, 푸른색의 벽등들은 관악의 진동에 따라 무시로 명멸하여 들끓는 무도장을 현란케 한다. 그런속에서 수백쌍의 젊은이들이 사교무를 추고있지 않는가. 친절과 사랑속에 활기롭고 자유롭게!  나는 부러웠다. 그러면서 한편 자격지심이 생기였다. (춤출줄도 모르는 주제에 여기룬 왜 들어왔나. 에익, 못난 바보다.)   이젠 중년을 훨씬 넘어 장년줄에 오르고있는 내가 아닌가. 저렇게 춤한번 춰보지도 못하고 멋없이 지내보낸 젊은시절을 생각하니 아깝기 그지없고 후회역시 없지 않았다. 허지만 이젠 되찾을수도 없는 인생이 아닌가. 나는 그만 돌아서 나와버리려 했다. 그런데 저이는 누군가? 몸집이 실팍한 대머리의 늙은이가 사교춤을 추고있길래 다시보니 성정협에 계셨던 왕일륜주석이였다. (저렇게 년로한 분도 여생을 즐거히 보내는데 내라고 왜?...) 다시금 마음이 동한 나는 그길로 성조선족가무단의 리단장을 찾아가 얘기했다.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이라 함께 출판사의 허총편을 찾아 끌어내여 우리 셋은 무도회의 단골손님으로 되었다.   두 청춘남녀가 추고있는 디스꼬가 무도장의 활기를 버쩍 돈우어주었다. 나의 말에 리단장도 허총편도 동감이였다.   내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젊은 한족녀인은 잡지의 편집이며 지난해에 장편소설 을 세상에 내놓은 리한평이였다. 그녀는 여직 사업과 창작만을 생각하다보니 춤한가지 출줄 모르는 병신으로 되고말았노라면서 후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춤을 춘다고 쓸 글을 못쓸것도 아니니 앞으로는 조건을 마련하여 춤을 꼭 배우겠다는것이였다. 나의 청에 그녀는 선듯 손을 잡았다. 우리 작가들도 생활을 즐길줄을 알아야 한다. 번중한 사업, 긴장한 창작에서 생기는 고뇌와 피로를 오락으로 풀줄을 아는것ㅡ 이역시 생활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무시로 명멸하는 현란한 불빛, 흥겨운 반주, 명쾌한 녀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군들 속에서 무도장을 돌고있는 나는 여느때없이 즐거웠다.                               1985. 1. 26                 
137    반도의 혈 ㅡ제2부 30. 댓글:  조회:5097  추천:0  2011-08-2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30.    산야에 록음이 우거지고 훈풍이 향기를 실러오는 가절이다. 덕원리는 생기발랄한 청년들로 이루어진 중광단이 있어서 올해의 단오를 례년보다 더 즐겁게 보냈다. 남쪽에서는 이때 한창 가을보리를 베고 그 땅을 갈아번지며 벼모를 십느라 땀을 흘리려만 여기는 달랐다. 함북도와 거의 비슷할가, 동만에서도 봄파종을 끝마친 농한기라 허리를 편 농군들은 마음을 푹 놓고 이 천중가절(天中佳節)을 중광단원들과 함께 즐겁게 쇠였다.    운동대회를 열었다. 단거리달리기, 바동받고 달리기, 물동이이고 달리기. 널뛰기, 그네, 씨름... 무려 20여가지의 종목이나되였다.     소를 잡아 화식을 집체로 했고 밤에는 우등불을 피워놓고 오래도록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였다.    희연이가 마을의 부녀들 중에서는 그네를 제일 높이 잘 뛰여 1등을 했다.    머리얹고 시집 온지 어언 14년, 희연이는 그지간 시부모아닌 년로하신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를 모시면서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살림을 착실히 잘해왔거니와 웃분을 본받아 작식솜씨역시 자랑할만큼 뛰여났다. 그가 갖고 온 두권의 책 “규합총서(閨閤叢書)”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덕원리 본토배기 최농부가 갖고있는 이지함(李之菡)의 “토정비결(土亭秘訣)”모양로 온 마을 사람들이 즐겨보고 아끼주는 보배였다. 희연이는 자기가 고향서부터 갖고 온 그 두권의 내용을 거의 암송한거나답지않은지라 왕청에 와서도 여기 덕원리는 물론 다른 마을에 까지 떠받들려 다니면서 강연을 하여 동포가정들의 어려움을 많이 풀어주었다.    이해에 딸 죽청이는 10살이고 아들 윤제는 6살이였는데 그들 오누이는 마을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가탈없이 잘자랏고 서일의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 두분 다 80고령을 넘겼지만 아직 큰병없이 건재했다...    단오가 지나 사흘만에 화룡 북지사에서 젊은 사람 둘이 편지 한통을 가지고 왕청으로 서일을 찾아왔다. 편지는 강우가 쓴 것인데 내용인즉은 예정대로 음력 5월 13일에 청호에다 대종교총본사를 권설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니 왕청일대 교인책임자들이 대례에 참석하는 일은 관게치말고 본인만은 상론할 일이 있으니 대례전 며칠 미리와달라는것이였다.    이것은 대종교인 모두가 가장 륭중히 기념해야 할 희사였다.    홍암대종사가 무엇 때문에 대종교총본사를 본국에 두지 않고 만주의 화룡현 삼도구 청호에다 권설하는가? 라철이 말해서 서일은 그 원인을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첫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독립운동의 책원지가 만주, 중국본토와 로씨아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포교상 리로운 점이 있기 때문이였다.    국조 단군이 백두산에서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종교의 총본사를 백두산에 두는 것이 민족종교로서 정당하거니와 배달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다면 조선이란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널리 포교를 함에도 유리할것이였다.    서일은  성묵, 계화, 최익항, 채오, 량현 등과 함께 말을 타고 떠나 대례 3일전에 화룡현 청호에 도착했다.    아직도 흰눈을 떠인 백두산의 장엄한 설경이 바라보인다.    하지만 산아래의 여기는 여름철이 다가오는지라 훈훈한 날씨였다.    소식이 새여나갔는지 흰옷을 차려입은 원근의 교도들이 미리부터 하나 둘,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여 조용하던 청호는 벌써부터 흥성흥성 명절기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늘이 알아주는지 명랑청쾌한 날씨였다. 홍암대종사 라철도 날씨처럼 밝은 얼굴로 그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교우들이 모두 반겨주었다. 남만, 서만, 북만은 물론이고 북경, 남경, 상해를 비롯한 중국내지와 로씨아와 조선...방방곡곡에서 대종교의 주요인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중광단 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문안인사가 끝나자 라철이 서일을 조용히 따로 불러서 물어보는 말이였다.    《무기가 불비한 정황이다보니 지금은 그저 교육에 주력하고있을뿐입니다. 하지만 장차는 힘이 닿는대로 무기구입에 력점을 둘 예산입니다.》         《기본단원이 군인하고 의병입니다. 원래 처음부터 모집대상을 그들로 하고 착수한거니 거의가 그렇게 된게지요.》       서일의 말 끝에 계화가 동을 달았다.    《나도 근건 알고있소.》    《대종사님, 생각같아서는 전민을 무장시키고싶습니다만은....》    서일의 이 말에 홍암대종사는 눈을 치켜들고 여겨본다. 그 표정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란 말이냐 하고 묻고 있었다.    《저의 생각은 우리 대교의 교도들만으로도 지금의 의식으로는 부르면 모두가 두말없이 향응할 것 같아서 해보는 소립니다.》    《어디 계속말해보게.》    《 부여전에 부여사람들은 고 했습니다. 고구려족은 부여족과 같은 종족으로서 언어도 법제도 풍속도 같았다는 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사람들도 집집마다 무기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근거가 되는군. 그래서?》    《이는 고구려사람들은 군사에 복무할 준비를 항시적으로 하고있었음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집집마다 무기를 갖추고있었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수 있겠끔 일상적인 훈련을 했을거고 그래서 일단 전쟁이 생기면 나가서 용감히 싸울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를 하였다 그겁니다.》    《서단장의 주의주장인즉은 우리 교도들만으로도 상무의 기풍을 수립하자 그겁니다.》    계화가 서일의 말에 해석을 가했다.    《그렇습니다. 힘없는 민족은 강자에게 먹히우기 마련이고 또 이런 처지가 된다면 주위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는 것이 랭혹한 국제정치인것입니다.》    서일은 자기의 인식을 기탄없이 피력했다.    《어 그래, 허허허...》    홍암대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련신웃었다. 이미 망국노가 된 민족일진대 오로지 육탄혈전만이 구국과 독립을 쟁취하는 길임을 진리로 받아들인 서일의 그 깨달음과 굳은 의지를 보고 그는 기뻐했다. 리론이 아무리 좋은들 구국항쟁을 입으로만 부르짖어서야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까?... 단지 교육과 종교만으로는 독립운동을 완수할 수도 없음을 깨닫고있는 그였다.    강우상교(尙敎)가 다가와 먼데서 온 분들이 대종사를 뵈옵자고 기다리고있다고 알리였다. 머리가 반백이 된 강우는 이제 곧 총본사전리(總本司 總典理)에 오를 사람이였다.    홍암대종사는 서일과 “오대종지강연”을 써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가 가자 강우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성묵이와 박찬익은 왜서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서일은 그들은 상해에서 오신분들을 만나야겠다면서 어디론가 가더라고 알려주었다.    강우가 다시입을 열었다.   《서선생은 하냥 웃는 낯이구려! 대종사의 얼굴도 몹시 밝아진걸 보니 여기서 무슨 좋은 얘기라도 있었던모양이지?》   《중광단의 사정을 물으십디다. 그래서 제가 소개를 해드렸지요... 무장항일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우리 대종교의 교도들만이라도 상무의 기풍을 세워야겠다는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오, 그랬소! 그래야지! 한얼께서는 우리보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들이밀라고 안했소. 미친개와 승냥이한테는 몽둥이나 렵총이 제격이지.》    귀맛당기는 말이였다.    강우역시 무장항일만이 독립운동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이라면서 중광단이 장차 완정한 무장단체로 성장하고 따라서 대종교는 그의 든든한 후원이 되어야 하거니와 교도전체가 항일구국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철옹성같이 뭉쳐 일어나야 할 것이라했다.    서일은 자기뜻과 같아 그 지지에 감사함을 표시했다.    청파호에 교도들의 집자(集資)로 總本司와 古經閣이 일어섰다. 비록 그리 장엄하게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모양만은 갖추느라 한 건물이였다.    음력 5월 13일(서력 6월 6일), 숙연한 기분속에서 총본사와 고경각권설의식이 거행되였다. 그러면서 따라서 청파호에 동도본사(東道本司)를 설치하는 한편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교구와 외도교계를 설정반포하기도하였다.        동도교구ㅡ 동만일대와 로씨아 연해주지방까지.                    책임자: 서   일.    서도교구ㅡ 남만으로부터 중국 산해관까지.                    책임자: 신규식, 이동녕.    남도교구ㅡ 한국전역.                    책임자: 강   우.    북도교구ㅡ 북만일대.                    책임자: 이상설.    외도교구ㅡ 중국, 일본 및 구미지방.                    (책이자 미정)    이때의 대종교 간부들은 전부가 독립혁명운동의 수령급 지도자로서 중견인물이였고 또한 기둥이였다. 그들은 누구나 다 구국항쟁을 위한 준비를 활발히 하고 있었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1912년 54세에 북경, 천진, 상해, 남경과 광동 등지를 순력하여 망명지사와 중국인지사들을 만나 조국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숙의(熟議)하였거니와 북경에 있는 조성환의 집에 머므르다가 일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으나 인차 풀려나와 그해의 7월에 신규식 등과 함께 동주공제(同舟共濟)한다는 뜻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였다. 그 이듬해는 신건식(申健植), 김용호(金瑢浩), 임상순(任相淳) 등과 함께 상해로 가서 프랑스조계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우고 청년지사양성에 정력을 몰부었다. 그러다가 이해(1914)의 5월에는 홍콩에 가서 한문잡지(漢文雜誌) “香江”의 편집책임을 지고 원세개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다가 취조를 당하기도하였다.     대원군집정 시대에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인물인 원세개는 신해혁명후 중화민국의 대통령까지 되자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송교인(宋敎仁) 등 지사 여럿을 비겁한 방법으로 암살하고는 한창 일본의 간계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씨아에 건너갔던 이상설은 지난해에 어느 한 사이비 동립운동자의 모략과 방해로 말미암아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바롭스크로 가면서 구슬픈 시를 남기였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둘 곳 조차 없어 몸을 우노라.                                         올해 그는 보스타빈(BOSTABIN)의 량해를 얻어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의병모집, 사관학교 건립 등을 추진하려고 망국후 최초의 망명정부의 이름을 전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자신은 정통령(正統領)으로 추대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만주로 들어와 북도교구를 책임지고 사업해야 할 것이다.                  신채호와 조완구(趙琬九)를 만났다. 신채호는 전번에 서일을 보러 일부러 왕청까지 왔다간 일을 상기하면서 대종교의 민중항일단체로서 중광단이 발족한 것은 배달민족의 력사에 찬란히 기재될 일대희사라 하면서 앞으로 강대한 무장력으로 키울 것을 기대했다. 그도 조선의 동립운동은 오로지 육탄혈전으로만이 이룩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신채호는 병에 시달림받다가 지난해 신규식의 초청을 받고 상해에 가 동제사조직에 참가하는 한편 박은식, 문일평, 조소앙과 같이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윤세복선생의 초청을 받고 봉천  회인현에 가 거기에 있는 동창학교에서 교수를 하고있는데 이제 력사저적들을 하나하나 집필할 계획이라 했다.   《나는 만주로 오면서 독립군양성기지도 찾을 겸 백두산을 올라보고 이어서 광개토왕릉을 가보았는데 저 야만스럽고 무지한 토인들 손에 허다한 사적들이 무수히 형편없이 파괴되고있더란말이요. 원 치가 떨려서...》    그는 몹시 격분하면서 장차 발해국의 사적지도 답사하고 그에 대한 책을 쓰리라 했다.    서울태생인 조완구는 출생일이 서일보다 며칠이 늦은 동갑이였다. 하지만 서일보다 한해먼저 입교했거니와 총명과 재질이 있어서 그사이 참교, 지교를 걸쳐 올해는 상교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규칙초안위원(規則草案委員)이 되어 그사이 교의 중대한 사업들을 많이한 것이다.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옮겨간 신흥무관학교는 그 발전이 매우 빠른바 각처에서 애국청장년들이 많이 모여들어 합니하에서는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어 유하현 제3구 고산자 대두자촌 넓은 곳을 선정하고 교사를 크게 신축하여 초등과 중등으로 나누어 합니하에서는 초등군사반 3개월간 일반훈련과 6개월간 후보훈련을 하였고 고산자 대두자촌에서는 고등군사반으로 2년제 고급간부를 양성하고 있었다.    김동삼도 통화현내 심산절역에서 계속 독립투사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홍범도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백(長白), 무송(撫松) 두현의 삼림지대를 근거로 전에 했던 산포수생활을 다시 영위하면서 포수단을 조직하여 이진룡(李鎭龍), 조맹선(趙孟善) 등 의병장과 윤세복선생 등 망명지사들과 제휴하여 재류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국내와 연락하여 애국청년소집과 독립군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일은 이번 기회에도 홍범도를 보지 못했다. 련락이 미치지 못해서 오지 못한것이라 한다.      서일은 계화와 함께 자기가 세운 청일학교를 가보았다. 김영숙과 박기호 부부는 고맙게도 학교를 잘 꾸려가고 있었다.    청파호에 총본사와 고경각을 권설하면서 이날 동도본사도 같이 세우게 되니 동도교구의 책임자인 서일이 이제는 부득불 이곳으로 옮겨와서 사업해야 할 것이다.    서일은 사흘만에 청파호를 떠나 왕청으로 향했다. 매양 올때의 그 사람 게화,  성묵, 최익항, 채오, 량현 등 여섯이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왔으니 갈때도 말을 타고가야했다. 아직은 기차도 자동차도 없는 고장이라 제일 편한 것이 그래도 말을 타는것이였다.     계화가 서일을 향해 물었다.     《서선생이 이제는 동도교구 책임자로 부임됐으니 어찌하려오? 가족이 다 그리로 이사를 가야하는거요? 아니면...》    《이사를 다니느라할거 뭡니까. 그런 고생이야 안해도 되지. 생각해보시오 집이 덕원리에 있어도 이젠 내가 전문 포교를 나다녀야 하는거고 청파호에 간다해도 의연히 포교를 나다닐게 아닙니까. 그러니 집이 어디에 있건 그게 나하고 무슨 큰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둘러치나 메치나, 엎어치나 대배치나 매한가지지요. 안그렇습니까?》    《그래 맞았어.》     성묵이도 최익항이도 그 말이 맞다면서 웃었다.    서일은 실은 잠만 제 집에서 잘 뿐이였지 집일은 전혀 무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 그는 그럴 정력도 없었던것이다. 그러니 년로하신 큰할아버지께서 가정을 떠맡고는 손부를 데리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힘들고 무거운 일들은 “로인회”의 분들이 많이 도와주군했다.    《서단장! 서선생님! 집일은 우리가 도울테니 제발 대교와 중관단일만 잘해주시오. 부탁이우다.》    모두들 이랬다. 한데 이제는 중광단일에는 정력이 덜가게 되였다. 자기가 맡은 교구를 책임져야하니까. 이제는 시교당을 세우기 위해서도 교포가 사는 곳을 찾아내여 전보다 더 수없이 많이 다녀야한다. 교도를 발전시키고 마을과 구역에 교조직을 내오고 때로는 지어 교도들의 이난문제를 관여하고 그를 풀어주기도 해야하고... 허다한 이들이 그가 와서 하기를 기다리고있는것이다.       연길에 들려 점심을 먹고 다시떠난 일행은 얼마가지 않아 마반산에서 공교롭게도 한떼의 토비무리와 마주쳤다. 30여명 잘되는 마적이였다.    개개비새가 개개개 시끄럽게 울다가 뚝 그치고 풀숲에 숨었던 메추리라기들이 놀래여 요란스레 울며 날아났다. 고종명(考終命)은 하지 않더라도 값없이 이따위 놈들 손에는 죽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피뜩들었거니와 정작 이런 곤색을 당하고 보니 서일도 일시 방도가 나지를 않았다.      앞장선 자가 길을 막고 물었다.    《선마만?》    토비들의 말인데 너희들은 누구냐의 뜻이였다.    《빌어먹을 오소리 잡놈들!》     성묵이 그자를 마주보며 쑹얼쑹얼 뇌까리는 것을 서일이 마침 곁에서 제발 참으라고 귀띔했다. 담이 커서 배짱부린들 무슨 소용있는가.    《쌰마!》    토비괴수가 나서면서 호통쳤다.    (저자식이 면목있구나!)    서일은 그자의 감사나운 몰골과 앞배에 찌른 두자루의 모제르권총을 보고 석현 장지주집의 머슴질했던 자임을 제꺽알아보았다. 그자는 아직 서일을 발견못한 꼴이다. 형세는 자못 위태로왔다.    다른 녀석들은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당장 쏠 태세를 취했다.    《말을 빼앗자는 수작이구만. 내리라는데 내려야지.》    서일이 먼저내리자 잇따라 모두들 말잔등에서 내리는데 채오만은 왜선지 얼른 내릴 념을 하지 않고  꾸물댔다. 그러자 먼저 누구냐고 묻던 자가 말을 달려 지나가면서 그를 탁 낚아채여 땅바닥에 메치였다.    다른 한 녀석은 서일이 어깨에 가로멘 가죽가방을 보더니 그 속에 돈이  들어있는줄로 알았던지 빼앗았다.    《덩덩!... 게이 니먼 장꾸이!》(잠간만...너들의 주인께 주거라)    서일이 매양짓는 웃음을 얼굴에 피우더니 가방속에서 목책을 꺼내여 연필을 끄적이여 넙적글 석자를 얼른 쓴 다음 쭉 찢어 그 녀석을 주었다.    두목녀석은 이제야 한쪽눈알이 유별나게 큰 서일을 알아보고는 코를 벌름거렸다. 그자는 종이장을 받기는했어도 글을 모르는 판무식쟁인지라 거이게 오려진 것을 다른 녀석에게 물어서 알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두눈을 씀벅거리였다. 그러다가 그는 졸개들을 향해 총을 거두라 명령하고는 더 건드리지 않고 그만 가버렸다.        몸에 지닌 피천 한잎도 빼앗아내지 않았다.    이쪽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마상에 올랐다.    《아니 서단장! 거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길래 저놈들이 행패질을 그만뒀습니니까?》    최익항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던지 경아한 낯색을 지으며 물었다.    《가만있자, 저놈들이 우리가 석현서 만났던 그 마적이 아닐가?》    계화는 이제야 머리가 도는 모양이다.    《옳습니다. 바로 그놈들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눈갖구두 잘봐뒀네! 그래서 웃엇구만? 건데 종이에 써준건 뭐요?》    《張松麟입니다.》    《오, 그렇지! 그놈은 제 주인이 우릴 좋은 친구라며 두둔했던 일을  생각하고 행패질을 그만둔게로구만! 하하하...》    게화가 웃음을 텃쳤다.    다른이들도 이제야 어떻게 된 요술인걸 알고는 강골있는 서일의 기발한 림기응변술에 탄복했다. 이일은 훗날 보태고 다듬고해서 한 켤레의 재미있는 야화로  돼버렸다....    성묵이가 자기는 아직은 군사지식은 물론 지식이 다방면 부족함을 절감한다면서 한동안 왕청을 떠나 단련도 할겸 배우고 오겠노라 제의했다. 서일은 이 문제를 놓고 생각했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것도 나쁠건 없을것같았다. 말과 같이 나가 돌며 고생도 해보고 배우며 단련해서 돌아와 중광단을 책임지면... 서일은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이홍래가 작반하리라며 따라나섰다. 이 “월경의병장”은 또 궁둥이에 좀이 쑤셔나서 못견디겠는모양이다. 차라리 동무가 되게 그리하라했다. 하여 어느날 그 두사람은 왕청을 훌쩍 떠나가버렸다. 어느때에야 돌아올지는 그들도 모르는 일이다.    서일이 단장직위를 벗은건 아니였다. 단장의 실무를 한동안 계화가 책임지기로 하고 기타의 일들은 채오, 량현, 김성과 최익항이 고루맡기로 한 것이다. 신팔균이 중책을 맡았으면 좋으련만 그는 초빙을 받아 군사간부배양이 더 실제적인 신흥무관학교에 조동된 것이다.    요즘 이 정(李 楨), 이운강(李雲岡), 정면수(鄭冕洙)가 새로 중광단에 가입했다. 정면수는 구군대출신이였고 이정과 이운강은 군인출신도 의병출신도 아니였다. 그 둘은 대종교도였거니와 애국심이 강한 지식인이였다.    음력6월을 잡자 서일은 다시 화룡으로 갔다.             청파호에 이르니 교도들이 해명신가(解明神歌)를 읊고 있었다.        어아어아 우리 대황조 높은 은덕      배달국의 우리들이 백천만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선심은 활이 되고 악심은 관혁이라      우리 백천만인 활줄같이 바른 선심 곧은 살같이 일심일세        어아어아 우리 백천만인 한활장에 무수 관관혁      천파하니 열탕같은 선심중에 일점설이 악심이라        어아어아 우리 천백만인 활같이 굳센 마음 배달국의 광채로다      천백만년 높은 은덕 우리 대황조 우리 대황조.               한편 음력 6월 9일, 홍암대종사 라철은 총전리 강우를 대신 백두산에 보내여 제를 지내게 했다. 동행인은 여럿이였다.    서일은 강우일행을 멀리까지 전송해주고는 지난해에 지교(知敎)로 승질(陞秩)한 백순도형과 함께 돌아오면서 그와 처음으로 속심말을 나누었다.    백순도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설흔한살때에 동학란을 당했소. 세월이 그러하니 마음이 유쾌할 리는 없었소마는 대신에 내 일생을 새로이 닦게 되었던거요. 한창 진취심이 오르던 때라 나는 “일본유신사”와 “서양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거기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곁들어 지리학과 정치학도 보고 경제학도 전수를 하게 된 거요. 시대가 인간을 조각한다는 말이 맞는것 같으오. 내가 대교를 믿게 된것도 마찬가지요.. 대교가 중광되지 않았다면 오늘 많은 형제들과 같이 한자리에 모일수 있었을가. 안그렇소?》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들 백의동포 다가 한배검님의 두리에  모여서 굳게 뭉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다면 암흑을 몰아내고 광명을 찾아 올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 화와 불행을 자초한 것이 우리 민족자체가 아니였겠습니까. 력사를 보십시오. 그 어느때면 파쟁이 없고 당쟁이 없었습니까. 공연히 미워하고 배척하고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을 능사로 삼으면야 결국 자신을 해치고 민족을 해치고 나라까지 해친다는걸 왜서 몰랐던지 참!》     백순은 동생의 말이 맞다면서 따라서 한숨지었다.     서일은 얼마전 덕원리의 교도가 라자구에 갔다가 그곳 공교회사람들께 멸시받은 일을 말했다.    《자칫하면 교파지간에 앙숙이 될것이니 주의해야하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경시할 소사가 결코 아니지요. 온 교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야했습니다.  가깝던 사이가 왜 그렇게 됐던지... 》     한편 강호일행은 백두산기슭에 이르서 잠간 쉬고나서 다시 용기를 내여 등산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성산! 해발 2744m에 달하는 장백산맥의 주봉 백두산은 그 웅위함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백두산꼭대기의 기후는 변화무쌍하여 초가을이 되면 산아래에는 온통 빨갛게 단풍이 들고 무르익은 산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지만 산우에는 벌써 흰눈이 흩날리고 찬바람이 불어친다. 봄이 오면 어떤가, 산아래에는 새싹이 움트고 들꽃이 만발하지만 산우에는 여전히 백설이 덮혀있는 것이다.    백두산우에 오르니 16개의 높낮은 봉우리들이 병풍마냥 천지의 맑은 수면에 거꾸로 비껴 그야말로 황홀했다. 강우일행은 여기서 제를 지냈다.              백두산제천문(白頭山祭天文)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維 天祖檀帝降世四千三百七一年甲寅六月初九日戊午에 不肖子孫羅喆은 玆敢代送總典理姜虞等하야 奉行檀禮하고 建天旗하고 燒檀香하고..                                                                     (제2부 련재끝)  
136    반도의 혈 ㅡ제2부 29. 댓글:  조회:4506  추천:0  2011-08-2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9.    1914년도는 서일이 시교사(施敎師)의 의무를 리행하느라 바삐보내는 한해였고 따라서 그만큼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도해서 즐거움이 부푸는 한해이기도했다.     산간에 진달래꽃이 곱게 피고 뻑꾹새가 봄을 알릴 때 조성환이 선문도 없이 왕청에 나타났다. 가쯔라 다로오를 없애버리지도 못하고 거제도에 류배를 가서 1년간 갇혀 고생하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였다.    서일은 생사를 같이하는 지우의 만남을 무등 기뻐하면서 축간 몰골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파나기도했다.    《그지간 고생많으셨겠습니다. 저는 썩 늦어서야 선생님이 그같이 되신걸 알았습니다.》    《괜히 옆사람까지 시름겹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서일의 인사에 조성환이 되려 사과를 했다.    이홍래가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조선생, 언제 또 거제도에 가시렵니까?》    악의없는 놀림이 반갑다는 인사였다.    《내가 이제 가면 대마도엘 갈거우. 그래두 올건가?... 사람이 못나게. 그러다가 잡히면 어쩔라구. 난 진짜 거렁뱅인줄 알았지.》     조성환이 위험불구하고 자기를 보러갔던 이홍래를 담통이 불어난 미친사람이라 해서 모두들 웃었다.      《개는 무서워하는 사람을 무는거우다.》    이홍래는 언제나와 같이 배포유한 대꾸질이였다.    신팔균은 이름만 들어왔지 조성환을 처음만난다.       《내가 중광단원이 오백이 넘는다는 소릴 들었소. 군대식 훈련도 한다더구만. 그래 재미는 어떻소?》    《재미를 묻습니까, 닭걀삶은 물같습니다.》    《그리두 싱겁단말이오?》    《실탄련습 한번 못해보는 훈련인걸요.》    신팔균의 맥빠진 대답이였다.    《무장이 얼마나 되오?》    《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보시다싶이 신교련이 차고있는 저 닭다리(권총)까지 해서 모두 여섯자루밖에 안됩니다. 장총이 다섯자루지요. 그나마 말짱 퉈퉁(土銃)입니다. 중국사람들한테서 샀습니다. 삼팔식이니 벼르단이니 하는건 말만 들었지 난 아직 구경도 못했습니다.》    서일은 조성환에게 무기의 불비로 중광단은 지금 교육과 계몽에 중점을 두면서 도수훈련을 결부하는 수 밖에 없음을 말했다. 물론 무기는 구입할 수 있는것만큼 구하기에 노력하리라면서 지금갖고있는 5자루로는 경비를 서고있다고 했다.    조성환은 경비대를 조직할수있게 된것만도 대단한 일이라 치하를 했다.    서일은 중광단은 어쨌든 발전할것이라 신심있게 말해놓고나서 만주에서는 총보다 구하기 쉬운 것이 말인데 자기는 장차 기병대를 만들 계획이라는 것 까지 알려주었다.    《되겠지, 되구말구!》     조성환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서일이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옹골찬 사람이라는걸  그는 잘알고있는 것이다.    《김동삼이 나보고 서선생을 만나거던 안부를 전하라구 하더구만. 이젠  련계도 가지자면서. 거긴 모두들 잘있소.》    조성환은 통화현(通化縣)에 들려 지금 그곳에 있는 김동삼을 만나 며칠간 지내고 곧추 왕청으로 향했노라면서 귀바퀴를 세우고 들어둘 새로운 소식도 한가지 갖고왔다.    지난겨울(1913) 김동삼을 중심으로한 동지들의 발의로 독립투사를 길러내는 기관 하나가 새로 창립되였는 것이다. 그들은 인적이 뜸한 통화현경내의 소북차(小北岔)라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망망한 밀림의 심산절역(深山絶域)에다 백서농장(白西農場)이라 부르는 기관을 설치하고 지금 수십명의 청년건아들을 모집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속에 둔전제(屯田制)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주경야독, 둔전제ㅡ 들어보니 이쪽이나 그쪽이나 량쪽 다 형편은 똑 같았다. 중광단이나 백서농장이나 무장준비는 못되여서 실탄련습같은건 꿈도 못꾸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적으로 독립군의 력량을 배태하고있음을 의미하거니 얼마나 보귀한 존재인가! 인원수를 보면 왕청쪽이 훨씬 더많다. 서일은 무기만 갖출수 있다면 대오를 500명아니라 1000명, 2000명으로 늘이고푼 생각이 무럭무럭 났다. 든든한 후원이 있는것이다. 그건 바로 대종의 교도들이였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조성환은 우리의 광복운동은 만주와 씨베리아를 책원지로 해야한다면서 자기도 둔전제(屯田制)를 할 자리를 잡아야겠노라했다. 그가 안중에 둔 곳은 멀리 안쪽에 있는 오운현(烏雲縣)이였다.     《그곳으로 가시렵니까. 그렇다면 저하고 같이 떠납시다. 해림까지 동무해드릴수 있습니다. 저는 그쪽을 한바퀴 돌면서 시교를 해야겠습니다.》    서일은 해림, 녕안, 신안진, 동경성 등지에는 아직 포교가 되지 않아 대종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황임을 알려주면서 동포들의 잠자는 의식을 하루속히 불러일으켜야 하겠다고 했다.    이틀후 두사람은 행장을 차리고 북쪽을 향해 먼길을 떠났다.    해림에 이르러 조성환은 기차에 올라 할빈쪽으로 향하고 서일은 남아서 그곳부터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해림에는 소학교가 있었다. 서일은 학생들에게 나는 조선에서 건너 온 아무갠데 너의 부모님들이 꼭 들어둘 재미나는 얘기를 하러 왔네라 가서 알려 속히 학교로 모이도록 하거라 시켰다. 한편 선생들도 동원해서 회의를 소집케했다.      흰 베옷을 입고 목에 단주(檀珠)를 건 사람이 이 고장에 나타나긴 처음이라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서도 모일것이라 생각하면서 서일은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모든 인간이 다 깨닫거늘 오직 이 무리가 아득하고 온 누리가 다 즐기거늘 오직 이 겨레가 괴롭사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세검한님(三神上帝)”이신 우리 “한배(天祖)”시여! 거룩하게 다다르사 큰 복을 거듭주시오며 밝으시게 비취사 큰 도를 다시 베푸옵소서.》       이같이 빌기를 마치고 “三一神誥”를 번지는데 사람들이 정해진 교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학교선생 하나가 다가와 어느덧 반수이상이 모여 기다리고있으니 강연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했다.    모인사람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서일의 차림새를 보고 벌써 신기한 무엇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내는 조용했다. 옷을 정갈하게 입고 행동이 단정해보이는 젊은이 하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두손모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나서 입을 여는것이였다.        《선생님, 저는 전에 서당을 좀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서, 삼경을 읽어봤고 유문(儒門)에 놀라 점차 백가(百家), 구류(九流)의 글들을 읽어봤습니다만 아직도 깨치지 못한 것이 많고 갈래를 잡기도 힘듭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보니 진종대교를 크게 닦으시는 분같고 그래서 중생, 후학을 넓게 건지시라 믿어 반가운 뜻에서 설교를 들으렵니다.》    서일은 그가 말하는 품이 유식하고 진정스러워 친절스레 대했다.    《고맙소. 건데 별호는 어떻게 부르오?》    《저의 별호는 삼사생이라 부릅니다.》    《三思生이라 세 번을 생각한다?》     모인 사람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일은 젊은이의 공손한 대답을 듣고 목청을 다듬어 얘기를 했다.    《옛적 지나, 로나라에 계문자란 이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세 번씩 생각한 뒤에 행하더니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하기를 “두번생각함이 옳다” 하셨지요. 이것은 생각을 여러번 하면 유예미결하는 버릇이 생김을 경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용진성을 기르게 하심이어늘 이제 그대가 오래 유문에 있어서 성훈(聖訓)을 받들지 아니하고 이같이 별호를 지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젊은이는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름이 그 실상을 지나거나 실상이 그 신분에 넘치면 그것은 곧 참람(僭濫)이라 저는 본래 어리석은 머리로서 비록 옅고 낮은 이치라도 잘 모르거니와 더욱히 종교철학같은 것은 그 뜻이 너무나 아득하여 한울처럼 높은 지라 섬돌로써 오를 수 없으매 바다같이 깊은지라 말(斗)로써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데 이 교 저 교가 저가끔 횡설수설이 제가끔 “내가 옳다”하니 이는 까마귀의 암수(雌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믿는이들도 다 저의 교문만을 알고 감히 그 테를 벗지 못하니 이는 이른바 앵무새의 입내라 저는 그 뉘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뜻이 또한 한결같지 않으므로 무슨 리치를 생각하든지 처음에는 의심이 아니나는 것이 없고 다음은 믿음과 서로 다투다가 세 번쯤 생각한 뒤에야 겨우 믿음을 얻으니 이것은 저의 천성이라 다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계문자의 일을 본받아서 유문에 죄를 얻었거니와 요사이 미련한 무리들이 아무일에나 조심하지 않고 스스로 용감성이나 많은체하야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득 버리고 문득 취하면서 한마디로 결단함을 사나이의 능한 일로 알다가 만일 좋지 못한 결과를 얻으면 마치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물어 떼듯 하는 이도 많으니 저는 이것을 매우 미워합니다.》    서일은 웃었다.   《그대의 뜻인즉 매우 착하거니와 그대의 생각은 너무 고집스러우니 나는 그대의 앞길을 위하여 아까와하노라.》   《어찌 이르심이니꼬?》   《세번 생각하는 것이 어찌 천성이리오. 한얼(天神)께서 사람을 내리실 때에 누구는 두텁께 누구는 엷게 하는것이 아니라 성품과 목숨과 정기 이 세가지는 참되고 가달이 없으며 어짐과 지혜와 용맹 이 세가자가 온전해야 치우침이 없으며 오직 그 받은바 품질이 한결같지 못함으로 세상 물욕에 끄을리면 “뭇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아야만 “밝은이”가 될지라 그런즉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다 별사람이 아니요 오직 그 마음을 괴롭게 하야 자기의 본 성품을 닦아서 우선먼저 깨달았을 뿐이니 우리도 마음만 두고 보면 반드시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될것이로되 우리가 먼저 구하지 않으면 또 뒷세상에 나고 알음이 넓지 못한 까닭에 옛날 성철(聖哲)을 스승할 따름이다. 그러면 나의 아는 바가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들만 못한 까닭에 그들의 도덕, 지식을 본받아서 스승으로 섬기려니와 만일 그네들과 비슷하다면 그 도덕, 지식을 비교하야 벗을 함도 옳고 또 그들에게 지낸다면 그 도덕, 지식을 더욱 넓히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니 이것은 한얼께서 밝게 정하신 진리요 한울나라(天國)에서 길이 쓰이는 공법(公法)이라 이 진리, 공법에는 한얼과 사람이 한가지요 너와 내가 다름없거늘 이제 그대가 이름을 판박아 두고 아교기둥에 비파를 타듯이 생각을 고치지 않다가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야 하루아침 거울속에 흰 털이 비취는 때이면 공연히 한가지 재주로써 나무털기(株)를 지킨 탄식이 저절로 나갈것이니 어찌 여러번 생각하면서 헤매든 까닭이 아닐가! 이것이 나의 아까워하는 바이로다.》    삼생은 감사하다면서 말했다.   《저는 공부없는 사람이라 소견이 적고 생각이 아득하야 못된 버릇을 일삼다가 오늘에야 선생님의 밝으신 말씀을 들으니 어두운 거리에 초불을 만난 듯이 방향을 대강 짐작할만하거니와 저같은 사람은 본래 배워도 곤난한 뒤에야 겨우아는 무리라 어찌 나서 아는 성철을 바래오리까?》   《나서 아는것도 그 깨닫는 재주가 뭇사람보다 좀 다를뿐이요 사물에 대하야는 반드시 배운 뒤에야 아는것이라 그러므로 공자같은 대성으로도 례락(禮樂)을 남에게 물으셨으며 또 늙어서 주역(周易)을 읽는데 가죽책심이 세 번 끊어졌다하고 로자같은 상진(上眞)으로도 주나라에 주하사(柱下史)가 되야 지식을 넓히셨고 석가같은 대각(大覺)으로도 설산에서 6년동안 또 가야산(伽倻山)에서 3년동안 도를 닦으셨고 예수의 청고하심으로도 사막에서 40일의 금식기도를 하셨고 마호메트의 활달하심으로도 산굴에서 10년동안 잠심(潛心) 수도를 하셨으니 이른바 성철(聖哲)이란 이들도 힘써 닦은 뒤에야 크게 깨달은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항상 말씀하기를 성철도 별사람이 아니라 하노니 그대로 잘 닦으면 곧 성철이요 성철도 아니닦으면 또한 뭇사람일 것이다.》    삼생은 명심해 듣고나서 꿇어 앉아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참 어리석은 병을 다스리는 정문침이요 아득한 길에서 인도하는 지남차라 저같은 불초로도 또한 깨닫는 길을 찾게 되오니 천만번 감사하옵거니와 다시 묻잡노니 대교에서는 진리를 풀어 놓은 경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삼일신고로 진리를 강구하노라.》   《삼일신고의 내용은 어떠합니까?》    이에 서일은 쭉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은 모두가 마음이 동하여 혹은 흥분하고 혹은 격동하기도했다.    이날의 시교도 잘되여 소문이 퍼져 여러 마을이 다투어 그를 모시였다.    서일은 삼사생이라는 젊은이와의 대담을 서언으로 작성하여 훗날 유명한 경전을 저술하게 되었다.    서일은 신안진에서 방금 포교를 끝마치자 뜻밖에 로씨아에서 건너와 지금 밀산에 자리잡은 한고향 사람 한기욱을 만났다. 그도 포교를 하러 녕안에 왔다가 서일이 이 지방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어른님께서 마침 잘오셨습니다. 저하고 같이 발해국유적지를 보러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때의 5경 15부, 62주를 다 돌수는 없어도 상경룡천부야 지척에 있으니 왔던 걸음에 들려 구경을 하고감이 마땅하지 않을가요.》   《거 참 좋은 생각이군! 그렇게 하지.》    이리하여 두 사람은 곧 녕안의 동경성으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발해국의 수도 상경룡천부터인 것이다.    성은 둘레가 수백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가운데 자리잡았다. 성의 남쪽에는 아름다운 경박호가 있으며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목단강은 성의 남쪽과 동쪽 및 북쪽으로 감돌아흐른다.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관개에 편리할뿐만 아니라 주위가 산으로 둘러막혀서 자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자연의 경치가 뛰여나게 아름다운 이곳에 수도를 정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력사기재에 보면 성은 굉장히 크게 쌓았는데 외성, 궁성, 황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길이가 40리가 좀 넘는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거기에 흙을 씌웠는데 지금 남아있는 부분을 보니 그 높이가 3m나 되었다. 외성 성밖에는 성벽에 잇대여 해자를 둘러팠다. 외성에는 동, 서 두 벽에 각각 2개씩 남, 북 두 벽에 각각 3개씩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대칭되는 성문을 련결하는 큰 길과 그것과 평행하는 길들을 내서 성안을 바둑판모양으로 정연하게 갈라놓았다.    발해는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하여 성을 많이 쌓았다. 돈하에서 녕안에 이르는 목단강류역에 특히 많이 집중되여있거니와 그 밖의 지역에도 많으며 발해의 령역으로서 변방에 속하는 고장에도 있는 것이다. 서일은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는 청해토성역시 발해국이 쌓은걸로 알고 있다.    상경룡천부의 옛 유적을 보노라니 두 사람 다 감회가 새로워진다.   《이웃나라들로부터 으로 불리우면서 228년간 존재하였던 선조의 나라,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사라져 버린 발해국의 력사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군요. 한때 그처럼 강성했던 국가를 쇠퇴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였겠습니까, 중요한 요인은 바로 내부모순이였지요. 그것이 격화되니 나중에 거란에게... 본래는 고구려, 신라, 백제 그 세 나라가 통일되였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중도반단으로 끝난 것은 전적으로 외세의존에 매여달린 신라통치배들의 사대주의 정책의 죄악적후과가 아닙니까. 제민족내의 분렬과 배신이 아니였다면 고구려는 망하지도 않고 고독한 발해국이 생기지도 않았을겁니다.》   《서선생은 발해력사를 잘 아시네!》   《일본학자가 쓴 글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외려 발해국의 력사에 대해서 더 관심하고 흥취를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서일은 많은 사람이 삼국력사에 대해서는 좀 관심하나 발해의 력사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거니와 지어는 잊고있음에 유감스러웠다.    력사를 잃으면 민족을 잃고 민족을 잃으면 나라를 잃고마는 것이다.    발해는 지난날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하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봉건국가로서 698년에 건국한 이래 228년동안 존재하면서 옛고구려에 대등한 넓은 령토와 강력한 국력을 가진 강대한 나라로서 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력을 떨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료동지방 고구려류민들의 줄기찬 투쟁이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인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전의 고구려국가의 귀족이며 유능한 군사지휘관이였던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였다. 이들은 력사적친선관계에 기초하여 말갈인의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 거란인부대와 련합하여 당나라군대와 맛서 싸웠다.    투쟁이 승리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돌궐족이 당나라를 도와 쳐옴으로 시국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거란군의 두목은 당나라군에 투항하여 부대가 붕괴되였고 말갈인부대도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붕괴되고말았다.    이때 고구려군 총지휘자였던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패전으로 분산된 말갈군을 다시 수습하고 집결시켜 력략을 정비 보강한 다음 당나라군을 유인하여 천문령에서 거의 섬멸하여버렸다.    698년초에 있은 천문령전투는 고구려사람들의 국가재건ㅡ발해국창건과 직접 관계된 의의깊은 전투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한 고구려사람들은 원래의 지향대로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료하를 건느고 다시 송화강상류 휘발하를 건너 부이령산줄기의 동쪽기슭 동모산에서 일단 자리를 잡고 정착하였다.(오늘의 돈화현 오동성자리가 있는 곳. 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수도를 옮긴거다.)    대조영은 이해에 의 창건을 선포했다. 이란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떨치는 큰 나라라는 뜻인데 713년에 나라이름을 으로 고치였다. 발해란 이전의 고구려때와 같이 멀리 서남쪽 발해연안까지도 그 국력이 미칠 것을 희망하여 붙인 이름이다. 진국ㅡ발해국의 제1대왕으로 된 대조영은 지난날 력사에서 이라 불리여왔다.    고구려사람들이 새로 세운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진국이라했다가 발해라 고쳤지만 국내외적으로 보통 또는 라는 옛이름을 그냥 관습적으로 쓰는 일도 많았다.    발해국이 창건됨으로써 고구려사람들은 다시 옛땅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더는 이웃 고구려류민들과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            발해국의 종족구성은 주로 고구려사람과 말갈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말갈인이 수자적으로 많기는 하였지만 발해국안에서 고구려사람들의 한갖 동맹자였을 뿐이다. 지위와 역할에서의 차이는 벌써 발해국창건을 위한 투쟁초기부터 조건지어져있었던 것이다.    발해사람들 자신은 언제나 자기들을 고구려사람이라고 하였지 그 이외의것이라고 한 일은 없다. 727년 발해 제2대 무왕 인안 8년에 왕은 바다건너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국의 창건을 알리고 그와 국가관계를 시작하는 첫 국서에 명확히 밝히였다.       “속본일기” 10.         일본왕도 이를 승인하고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냈다.      “속본일기” 10.      다음해인 758년, 발해 제3대 문왕 대흥 21년에 왕은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자기를 직접 “고려국왕 대흠무”(흠무는 왕의 이름)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일본왕의 답서도 “고구려국왕”에게 보내는 답서로 되었다. 이는 발해나 고구려나 완전히 뜻이 같은 말로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771년 대흥 34년에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곧 즉 이라 선언했다. 이 사실은 자신을 고구려왕실과 같은 혈통으로 간주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말기의 학자이며 관리였던 최치원은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편지와 다른 관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해국에 대해서 말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말갈발해)      발해는 침략전쟁으로 령토를 확장하려 든 거란에 의하여 멸망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배달민족의 국가였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중국력사책들에서도 발해멸망후 20년내(945년)에 발해력사를 처음으로 전반적으로 쓴 발해전의 정확한 력사기록들을 토대로 하고 다시 그것들을 똑똑히 따져서 발해를 옛고구려의 계승자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어리석은 통치자들이 딴심보를 품고 력사를 뜯어고치는 고약스러운 버릇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리찬 가을밤에                        은하수 유난히 빛나고                        나그네 고향생각나                        시름 더욱 깊어가네                          생각은 그지없이                        옛고향 달리건만                        다시 듣는 다듬이소리                        매여둘곳 전혀없네                          차라리 잠이 들어                        꿈이나 볼가 하되                        하그리 긴 수심에                        잠인들 차마 오리.               발해국의 시인 양태사의 이 시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듬이소리를 듣고 고국이 그리워 지은 것이다.    서일은 언젠가 당나라말기의 시인 온정균이 자기 나라에 왔다간 발해사람의 시작품을 두고 “그대가 남긴 시구들은 오래도록 중국땅에 전하여지리라” 라고 한것과 언젠가 일문잡지에 일본의 스가와라 미찌자네가 배정이 일곱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시재라 하여 라 높이 평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발해시기 유명한 시인들이 많았건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전해지는 것은 양태사, 왕호렴. 배정 등 그 몇사람의 시뿐이다.      서일이 녕안과 해림일대에서 포교를 끝마치고 왕청에 돌아오니 그사이 신채호가 왔다갔다고 현천묵이도 계화도 알려주는것이였다. 서일은 그를 보지 못한게 대단히 섭섭했다. 신채호는 윤세복의 초청을 받아 봉천성 환인현으로 와서 그곳 동창학교의 교재로 쓸 국사저술에 착수하리라 한다.
135    반도의 혈 ㅡ제2부 28. 댓글:  조회:4318  추천:0  2011-08-23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8.                                 대종교가 중광단을 창립한 후 소식이 널리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늘 끊지 않았다. 찾아온다해서 다 받아주는 건 아니였다. 전에 군인질도 하지 않고 의병대에도 다니지 않은 사람은 집에 가서 안착하고 농사나 지으라고 권고해서 되돌려보냈다. 일을 하기 싫어서 찾아오는 자도 없는건 아니였던 것이다.     어느날 현천묵이와 한고향인 함북도 경성태생이고 서일과도 면목이 오랜 최익항이 문득 왕청에 나타났다. 그도 합병이 되고 왜놈의 통치를 받기 싫어서 만주로 건너온것인데 나이가 27살되는 팔팔한 청년 하나를 데리고 찾아왔다.    초면의 청년이 자기는 지난해 가을에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성명이 김영숙(金永肅)이고 태여나기는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홍성군이지만   원적은 논산군 양촌면 림화리라 했다.     서일은 그가 고향이 어디고 어디서 태여났건간에 그보다는 7살때부터 15년동안이나 漢學을 수업했다니, 서울에서 중앙학교 사범과를 다녔다니, 졸업하고는 국내 소학교에서 1년간, 만주에 건너와갖고도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근무했다니 맘에 더 들었다. 그는 그가 경험도 있으리라 생각돼서 그보고 자기가 전해에 화룡현에다 대종교명의로 靑一學校를 하나 세웠는데 지금 거기에 박기호 부부가 가서 교편을 잡고있을 뿐 다른 사람은 더 없다, 그들 부부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우니 그쪽으로  가서 함께 근무해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김영숙은 시키는대로 하리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하여 서일은 최익항은 명동학교에 남겨 계화를 돕게 하고 김영숙은 화룡으로 보냈다.    서일은 후에도 지식인이 찾아 오면 거의 모두를 남겨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학교에 보내여 교편을 잡게했다.    현천묵이 심권과 박승익이와 함께 김영숙을 데리고 화룡으로 갔다. 김영숙을 청일학교까지 데려다주고는 셋이서 서만, 남만, 북만일대를 한바퀴 돌고 올 계획이였다.  서일이 전해에 계화와 함께 이미 근처의 여러 학교들과 관계를 맺아 놓아 상호 교류를 하고는있지만 그보다는 동포사회전반을 료해할 필요성을 각별히 느끼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럼으로써 대종교를 알리고 중광단을 널리 선전할 수도 있는 것이였다.    이동호군수가 환갑이 되어 대종교 교도들이 동원하여 쇠여줬다. 그러다보니 마을잔치가 되여서 온 덕원리는 명절기분에 잠기였다. 이동호군수말고도 중광단에는 년세많은 독신이 여럿있지 않은가. 이덕수, 김기석 두 양반과 이달문, 장사학, 장기덕이도. 그들의 환갑도 이제는 모두 교도들이 차례차례 차려주리라했다. 고마운 일이다.    이동호는 군수였지만 안일한 벼슬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나라를 구하려고 의병항쟁에 나선것이요 그 정신이 보귀하다하여 뭇사람의 존경과 애대를  받는것이다. 모두들 큰절을 올리여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날 큰 돼지를 잡고 소도 한마리를 잡아 차린 음식이 푸짐했기에 온 마을 주민과 500여명 중광단원이 다가 배껏 먹고 함께 즐기였다.    이달문이 탈을 만들어 쓰고 나와 곱새춤을 추었는데 젊은이들이 겯달아 단군조(檀君調)에다 “어하어하”를 덧붙이여 노래를 만드니 춤판은 한결 흥을 돋구었다.                     백두산 돌아드니    (어하어하!)                   단군유업 이아닌가  (어하어하!)                   잃은 강토 찾아내고 (어하어하!)                   죽은 인민 살리랴면 (어하어하!)                   아마도 단군후예    (어하어하!)                   일체 단단이로세    (어하어하!)     그들은 “해명가”도 불렀다. 그리고는 각가지의 아리랑이며 타령을 불렀다. 어떤이는 풍자와 해학적인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 부르기도 해서 춤판의 흥을 한층 돋구기도했다.                      까마귀란 놈은 검기를 잘 검으니                  구들장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까치란 놈은 맵시를 잘 피우니                  기생년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제비란 놈은 날기를 잘하니                  우편배달부로 돌리고 흥흥 좋다                    빈대란 놈은 빨기를 잘하니                  아편쟁이로 돌리고 흥흥 좋다                    벼루기란 놈은 쏘기를 잘 쏘니                  포수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황둥개란 놈은 문역을 잘 지키니                  보초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대종교에서는 개천절(開天節), 어천절(御天節), 중광절(重光節)을 굉장히 쇠였다. (후날 弘範 및 規制가 나와서 명절이 개정, 가첨되기도 했다)    오락이 거진 끝나갈 무렵에 나이가 쉰을 넘어 지숙한 로씨아손님 한분이 덕원리에 나타났다. 방금 연해주에서 건너왔다는데 계화를 찾고 있었다. 성명이 정해식(鄭海植)이였는데 이달문과도 구면이였다. 계화도 이달문도 만나자 무척 반가와하는 걸 보니 면식이 오래거니와 친분도 두터운 사이같았다. 정해식이 옴으로 하여 중광단 “로인회”에는 성원 하나가 더 불어나게 되였다.    《나를 받아주소. 나도 한배검의 자식이외다. 로씨아서 우리 대교에 중광단이 일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우. 축하를 합니다.》    정해식은 이러면서 멀리서부터 등에 지고 무겁게 갖고 온 재봉침 한틀을 중광단에 기증했다.    《두고 보오만 이제 집체복장을 만들자면 손이 많이 딸릴텐데 이놈을 부리면 일을 많이 해낼겁니다.》    재봉침을 처음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해식은 녀인들 앞에서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계화는 이 재봉침 한틀을 기초로 하여 중광단에 복장대(服裝隊)를 세웠고 그 책임을 량현에게 맡기였다.    서일은 계화와 토론하여 돈이 만들어지는 대로 부림소와 말을 대량사들이기로 계획하고는 그 관리는 장기덕과 장사학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두들 스스로 “로인회”라 지어 부르고들 있는 년세많은 분들의 숙사에 매일 김지 이지 모여서는 초신도 삼고 메투리도 삼으면서 마음속을 터놓고 하고푼 이야기를 했다.      정해식이 여기에 가담하여서 화기를 한층 돋구었다. 그는 漢文은 물론이요 거기에다 일어, 로어까지 능란해서 웬간한 젊은이도 따라못갈 얻기 드문 수재였다. 하여 서일은 그를 존경하면서 아끼였다. 정해식이 어느날 그가있는데서 자기가 소시적부터 친분이 자별했던 사람은 김형구였는데 그는 작고한지 여러해되고 이제는 그의  남은 아들 둘중 큰것이 이름이 김좌진(金佐鎭)이요 그가 불행을 당하는 통에 자기 역시 곁불에 속을 태웠노라했다.    《걔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갖구는 2년 5개월이나 옥생활을 하구 올 9월달에야 풀려나왔수다. 만기가 돼서  석방을 했다길래 내가 가 보구서는 로씨아에 갔다가 이리루 곧추온건데 사람의 일이란건... 이제 또 어떻게 될지....》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졌길래 옥살이는?...》    이달문이 묻는 말에 정해식은 화를 내듯이 어성을 높이였다.    《죄는 무슨놈의 죄여, 돈을 꾸러 갔다가 안주니까 급하기는 하지 완력을 좀 부렸던가봐, 그랬다구해서 그놈들이 강도미수로 판결을 했지 뭐요.》    《오, 그렇구만!》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 솔가도주를 하기 전날 “매일신보”에서 이란 보도를 본 기억이 나는지라 김좌진이 혹시 그때 신문에 났던 그 인물이 아닌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해식이 무릎을 치며 왜 아니겠소 바로 그이지 하면서 김좌진은 올해 나이가 25살이니 1889년(己丑)생이요 고향이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원 고도면 상촌리)라 했다.    《원체 믿그루부터가 다른거야. 그러니께 남만 못할거 하나두 없지. 저 병자호란때 태자를 모시고 강화성에 피난을 갔다가말이여 거기루가서 청군의 손에 점령이 되니 담배불로 화약고에 불을 달아 제 손자허구 같이 순국을 한 안동김씨 김상용이란 사람있잖아, 사책에 다 이름이 오른 김상용이 말이여. 좌진의 부친인즉은 그 사람의 10대손이 되는거요. 그리구 개화당사람 김옥균인즉은 좌진의 십일촌숙부가 되는거고. 이젠 다 찌그러진 가문이요만은... 팔간집 찌그러진대두 십년이라 그런 속에서 장사가 났거든. 위인이 비범해서 아무튼 큰일을 할 사람같으오.》    이 말에 서일은 생각이 돌아 혼자말처럼 뇌엿다.    《큰일을 할 사람이면 세상을 달관하겠지.》    정해식은 머리를 숙인채 이윽고 궁리하더니 김좌진의 신원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거짓말이 아니였다. 김좌진은 홍성에 대한협회지부 기호흥학회를 조직운영하는 한편 김병학의 후원을 얻어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의 낡은 주택 80여칸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고는 친히 교장이 되어 신문화를 권장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그러다가 20살에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안창호, 이갑과 더불어 서북학회를 발족한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오성학교에 들어가서는 교감직을 맡았거니와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론산의 채기두에게 밀령을 내려 각지 의병규합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漢城申報”의 리사로 되였고 로백린과 손잡고 한성신문간부인 이춘수가 경영하는 경성고아원의 총무직을 맡아 사업하기도 했던것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실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고있는 사람이였다.       김좌진은 21살나던 해에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야창양행을, 신의주에 염색회사를 설립하여 국내외련락기관으로 삼고 활용하면서 동지규합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22살을 먹던 1910년 8월 29일, 국치를 당해서부터는 로백린, 윤치성, 신대현, 신두현, 박상진 등과 회동하여 광복운동을 위한 동지규합과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염줄을 론하고 전국을 누비였던 것이다.    이듬해인 1911년 2월 5일, 중국의 상해에 가 있는 로백린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10만원을 얻어 보내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김좌진은 부족금 5만원을 마련코저 먼 친척이 되는 부자(富者) 문중 김종근을 찾아가 사정했다. 그러나 그가 돈을 빌려주지 않으니 그만 완력으로 협박을 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강도미수죄로 판결이 내려 2년 5개월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것이다.      서일은 이제야 신문이 소문을 냈던 그 인물의 신분을 딱히 알게되였고 그런 사람과 손잡으면 광복운동을 잘해나갈 것 같아 기회가 있으면 아무때건 한번 만나보리라고 맘을 먹었다.      어느덧 1914년이 돌아왔다. 하건만  외지로 동포사회조사를 나간 현천묵일행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명동학교의 어떤 과목은 부득불 다른사람이 그냥 임시로 맡아 교수를 해야했다. 서일은 중국말훈련을 하느라 학생거의가 중광단원들로 구성된 중학반의 한어과(漢語課)를 자진맡은 한편 짬짬이 교리(敎理)연구에다 각고의 심혈을 기울이였다.    분공이 잘되였건만 중광단사업에다 학교사업, 계다가 대종교의 일까지 돌봐야 하니 서일을 그야말로 일심양역(一心兩役)으로 돌아쳐야했다.    이런 때에 생각밖에 기분잡치는 한가지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덕원리마을에 사는 한 대종교도가 라자구 태평구에 갔다가 그 마을 공교회(孔敎會)의 사람한테 모욕에 가까운 랭대를 받은것이다.      사유의 경과는 이러했다.    최근무라는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제는 성가할 나이가 되였다. 그래서 내외가 은근히 속을 끓이던 중 태평구에 혼처감이 있는지라 거기에 사는 고향친구의 아낙네를 중매군으로 내세우기로 하고 최근무가 제 아들을 데리고 선보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혼사말이 뒤틀어지고말았다. 상대측은 사위감이 끌끌해 맘에 드나 대종교도이니 섭섭하다면서 공교회와 사돈간을 맺으려니 궁리말라고 괴괴떼였던거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신경이 일어설 일이였다.     이쪽은 혼사말을 왔다가 그만 코를 떼워서 멋없이 꼴불견의 랑패상이 되고만건데 언젠가 덕원리에 이사를 왔다가 대종교를 비난한 일로 교도들에게 쫓겨간 성이 박씨란 자가 돌아오는 이켠을 향해 속으로 잘코사니를 부르면서 가시돗힌 말을 내던지는 것이였다.           분명히 앙갚음이였다.    한편 덕원리에서는 이 일을 알자 격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젊은이 몇은 그자를 당장 때려죽이겠다면 몽둥이를 찾아 들고 덤벼쳤다. 사태는 험하게 번질것 같았다.     김기철로인이 엄하게 일깨워주었다.    《왜들 이러는거냐? 당장 걷어, 걷어치우란말이야! 우리가 왜서 고향버리고 이 만주까지 와서 고생하는건가? 동포끼리 물고 뜯고 싸우자고?... 이래서는 안된다! 절대안돼! 이건 심보고약한 그 녀석의 수작질인게 분명하지만 죽여버린다고 문제가 해결이 날건가? 이럴수록 정신차려야 해, 정신을! 알았어? 절대 맹동을 말고!》    조짐이 좋지 않았다. 대종교와 공교회지간에 반목이 생기고있었다. 금이 실리는건 무용하고도 안타가운일이라 이쪽에서 사람을 내놓아 조사해보니 그건 공교회의 문제도 대종교의 문제도 아니였다. 이사를 오려다 쫓겨간 그 박가의 소행이였다. 종교(宗敎)라 하면 그것이 성질이야 어떻던간에 밀잡아 락후한걸로 나쁘게 보고 공산혁명을 해야 진보한다느니 어쩐다는지, 앞길이 나진다느니 어쩐다는지 선전을 하고 다니는 그 얼간망둥이무신론자의 작간과 관련되였던 것이다.    서일은 이 일을 알자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해버리고 즉각 대회를 열고 지금의 형편에 주의주장이 맍지 않아 대결한다면 그것은 분렬을 의미함이니 분렬은 민족의 자멸을 자초할 뿐이다. 그러니까 덕원리에 사는 대종교도들은 절대 감정에 들떠 소홀히 행동하지 말고 각성을 높혀 제 진지를 지키라고 호소했다.    그렇다. 근본 목적은 조국의 원쑤 일제를 상대하여 싸우는것인데 그러지는 않고 이제 이 교파와 저 교파, 이 구역과 저 구역, 이 단체와 저 단체, 나아가서는 주의나 주장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기시하는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빌어먹을 당파심!  그것은 고약한것이다!    서일은 마을주민과 중광단원들에게 불순한 자들의 리간질과 분렬책동을 발견하면 기탄없이 적발하라, 그러되 개인감정으로는 대하지 말라, 자기부터 단속하여 불쾌한 충돌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라고 강조했다.     현천묵일행이 음력설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근 3개월간이나 밖에서 나돈 것이다. 그사이 고생을 한만큼 사회조사를 잘해왔다.    《우리는 남만과 서만을 피끗돌고는 북만 저기 흑룡강가에 까지 가보았소. 흑하에서 썰매타고 라북을 거쳐서 동강, 무원까지 가보고 부금을 거치고 가목사에 이르러 남으로 곧게 나와 해림, 녕안과 동경성에서 근 보름을 보내다가 온거요. 거기는 우리 동포들이 적잖게 모여서 살더구만.》    현천묵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형세도 보고했다.    그곳은 1912년도에 이미 된서리가 일찍내려 페농을 한데다 지난해에 또 된서리를 맞아 벼는 낟알을 한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련거퍼 재황이 든데다 경학사마저 해산되여버려 조치를 구해주는 데가 없으니 굶어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무마할 수 없는 비극이였다.    다시돌아가   《흑하에도 여름계절이 있을까, 너무추워 혼빵났소.》    현천묵일행이 흑하에 가서 받은 인상이란 추위가 혹독하다는 것 외에 별로 큰 인상이 없었다. 그곳에 가서는 동포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그대신 일본 사람은 적잖게 보았노라했다.    《그놈들은 어느새 기여들었는지 언녕 자리를 잡았습디다.》    심권이 하는 말이였다.    이 말 끝에 박승익이 동을 달았다.    《흑하진에는 왜놈의 약포, 리발소, 복장점도 있고 려관도 있습디다.》    《어디 그뿐인가, 기생집은 또 얼만데.》    《그래, 그래, 박선생은 숫자가 많은걸 빠쳤군. 그놈의 흑하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생집만도 저그만치 서른하나라나.》    현천묵이 이렇게 알려주고나서 일본놈은 좃밖에 모르는 종족이야 해서 모두 를 되게 웃기였다.     흑하진(黑河鎭)은  커다란 흑룡강을 사이두고 북쪽에 있는, 중국사람들은 해란포(海蘭泡)라 부르는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와 마주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아편장사와 록용, 산양각같은 약재장사꾼을 비롯한 각종 장사꾼과 금점꾼들이 모여들어 꽤나 번창했다. 동포가 그곳까지 들어가긴했지만 아직 정착해서 사는 이가 없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결과였다.    현천묵일행은 인심좋은 허저족 우씨(尤氏)를 만나 개썰매를 타고 흑룡강을 내려가 라북진(羅北鎭)에 들렸거니와 아래로 썩 더 내려가 동강진(同江鎭)에 까지 들릴수 있었다. 그 두곳은 다 동포가 몇호씩 살고있었다.    《안쪽에서 우리네 동포가 제일 많이 사는 곳은 해림의 신안진이더구만. 녕안에도 갔더랬소. 건데 거긴 2대 3대를 한족들 속에서 살아오다보니 풍속을 잃고 지어 이제는 제 언어마저 잃어가고있는 형편이니 말이 아니요.》    현천묵이 송화강이남으로 오다가 발해국(渤海國)유적지를 볼려고 녕안에 들리니 동포가 있으나 먹고 마시며 세월을 보낼 뿐 독립운동이라니 웬 소리냐며 개념조차 모를 지경 무감각하거니와 감정이 메말라있으니 과연 분통이 터질일이라했다.    그곳은 벌써 몇백년전부터 우리 동포가 살아온 고장이였다.                      에 記載된 것을 보면:    “考淸室受命之初朝鮮人來歸化列入滿洲籍者如朴氏金氏王氏李氏皆著在氏族通譜”.“漢人之編入族籍者有張,李,高,雷160余姓. 高麗人編入族籍者有 金, 韓, 李, 朴等 43姓”        청정부는 1644년도에 조선사람은 벌써 17세기중엽에 녕고탑(寧古塔)일대에 와 살면서 만족에 귀화했다고 밝힌바 있다.                 에 기재된 것을 보면 청나라초기에 만주씨족에 가입한 조선사람이 金, 韓, 李, 朴, 張, 傳, 柏, 洪, 崔, 劉, 黃, 罓, 楊, 陳, 文, 孫, 丁, 任, 尹, 宋, 徐, 車, 万, 江, 邊, 何, 閔, 林, 佟, 亙, 耿, 馬, 鄭, 曹, 郭, 沈, 方, 秦, 孟, 田, 幸氏 등 41성이였는데 그 중에는 벼슬을 한 사람도 있다고 밝히였다.        “韓氏: 韓云, 正紅旗人. 國初, 同弟韓尼來歸, 授二等輕車都尉. ...韓尼第四子那秦, 任黑龍江副都統”                  1682년(강희21년), 에는 또한 이런 기재도 있다.     “寧古塔副都統章京明阿納的父親幼時被朝鮮人虜去,聚妻生渠. 太宗時得父子還鄕, 而母未同歸, 今五十年父母俱已七旬, 原得團聚, 母子情難分, 要求朝鮮的慶興府將明阿納之母愛香交与其子”                     이로부터 알수있는바 조선과 녕고탑지간에 일찍 래왕이 있었던 것이다.    1757년도에 이르러 녕안현의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는 조선족거주민이 약 4,000여명가량되였던 것이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의 10년간에 조선의 북부에서 력사에 보기드문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가혹한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분분히 월강하여 살길을 찾아 북만 깊숙이 들어왔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가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무가내니 언어불통인 그네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 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 조선의 이조정부에 넘기기까지 했다는 기록을 세상에 남기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도 실상은 헛짓이였다.     1626년의 이래 조선인민들은 장애가 있다하더라도 갖은 방법을 다해 료녕, 길림이나 혹은 연해주를 거쳐 북만으로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았던 것이다.    거듭드는 자연재해를 이겨낼 수 없어서, 거기다가 봉건통치배들의 폭정과 탐학을 받아낼 수 없어서 부븍불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등진채 멀리 멀리 이국땅에서 류리표박을 하는 사람, 살길을 찾아 헤매여야만 하는 이들의 슬픔인들 어떠하며 고통인들 또한 어떠했으랴!    현천묵이 조사기록을 내놓았다.    서일이 받아 보니 북만일대 동포이민상황이 일목료연하게 안겨왔다.        1867년, 한패의 조선 농민들은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해란포)에서 동북의 제일북쪽끝머리인 애훈의 바벨라하(法別拉河)와 대공하(大公河)류역에 까지 피해 가 살았다.    1882년, 함북도 경원군 송하면의 이창호일가가 훈춘을 걸쳐서 동녕 삼차구에 뿌리박았았다.    1886년, 세사람이 약재를 채집하느라 간도를 떠나 길림, 밀산 등지를 걸쳐 북만의 동쪽 우쓰리강연안 의순호(義順號ㅡ대화진)에 이르러 30여호를 데려다 함께 살았다.    1888년, 동녕현 고안촌에서 동포 20여호가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92년, 한패의 동포가 할빈에 자리잡았다.    1898년, 횡도하자와 고령자일대에 조선족이 사방 10리 땅을 차지하고 집거했다.    1898년, 연해주에서 건너온 한패가 우쑤리강연안과 목릉현일대의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봄에 와 가을이 끝나면 돌아가군하다가 마침내 신한촌(新韓村)에 정착했다.           《현유 북만인구는 총 1백 5십만정도. 그중 동포인구는 산재해 있는 상황이라 정확히 통계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1만 2천여명에 3천호가량 되는걸로 알고있소. 해림에 1,ㅇ32호 제일많고 그 다음은 녕고탑에 576호 되더구만. 로씨야에서 1900년 중동철도를 부설할 때 국내에서 모집되여 온 인부들이 3년간 일을 하고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수분하 등지에 남아 자리잡은거고 농사일을 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소. 두루 몇사람 만나도봤는데 이럭저럭 먹고는 사는데 동포가 그리워 죽겠다구하더구만.》   《제 동포끼리 즐기지도 못하고 살아가자니 그 얼마나 외롭고 적적할가. 되도록 한데 모여살게 해야겠는데... 포교를 널리하기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한배검님의 후더운 은총이 내리게 하기오.》    서일이 보고를 다 듣고나서 심정이 무거워 하는 말이였다. 
134    반도의 혈 ㅡ제2부 27. 댓글:  조회:4334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7.    비록 초가집이기는 하지만 도합 22칸으로 신축된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4채의 숙사겸용의 명동학교는 산골치고는 보기드믈게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앉은 큰 건축물군체였다. 그 중 한채에는 작은 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작은 칸을 교무실이자 중광단실로 리용하고 있었다.    중광단원이 아니고 외지에서 와 공부하는 학생들은 숙사를 따로 지을 때 까지 우선 개인하숙을 해야했다. 그들뿐 아니였다. 이미 지은 집을 갖고서는 중광단원들도 다 용납할수 없어서 남의 집을 빌리는 형편이였다.    동만의 겨울추위는 함경도보다 더 독했다. 북위 43°이북이였으니 그럴수밖에.    하지만 중광단실은 벽날로가 열을 내뿜어서 훈훈했다. 도람통과 연통을 구하기 어려운 때라 로씨아인의 뻬치까를 본따서 만든것이였는데 그것이 제법 구실을 했다. 물론 숙사겸용으로 사용하고있는 교실들은 뻬찌까가 아니고 돌구들이였지만 늘 청결이 잘되고 정연했거니와 방한도 잘되였다.    서일은 어린 소학반의 일체 교학과 사무를 심권과 박승익에게 맡기고 자기는 현천묵, 계화, 채오, 량현 등과 정력을 중광단사업에 몰부으면서 짬짬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했다.    《선생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배우자니 전혀 깜깜모르겠습니다.》    마을의 농민 하나가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있는 진리훈(眞理訓)을 한단락 베껴 들고 어두운 낯색으로 서일을 찾아왔다.               人物同受三眞曰, 性命精人全之物偏之眞性無善惡         上喆通眞命無淸濁中喆知眞精武厚薄下喆保返眞一神.        《인물이 동구삼진하니 왈, 성과 명과 정이라 인은 전지하고 물은 편지니라 진성은 무선악하니 상철이 통하고 진명은 무청탁하니 중철이 지하고 진정은 무후박하니 하철이 보하나니 반전하야 일신이니라.》    농민은 알듯 말듯 한지 눈을 꺼무럭거리더니 결국은 머리를 가로털어버렸다. 의연히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거다.    그래서 서일은 그것을 한층 더 쉬운말로 풀이했다.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셋 참함을 받나니. 가로대 성품과 목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으니, 이보전하나니. 참함을 도리키면 한얼이 될지니라.》        《아 그런 소리구만유. 이제는 좀 알만합네다.》     농민은 밝은 낯빛이 되어갖고 돌아갔다.     교도들 가운데 그같이 깜깜인 사람이 어찌 하나뿐이랴. 서일은 무릇 모든 경전을 쉬운말로 풀이하고 강해를 해야 신도들에게 그것이 접수될수 있고 따라서 신앙심도 높아질수 있다는것을 절실히 느끼고 지식인 교도들은 누구나 모두가 이 방면의 일을 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전(經典)은 민족의 력사와더불어 모든 중광단원들이 첫 자리에 놓고 배우는 중점과목이 되였다. 서일은 그들에게 원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교리를 제대로 풀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여 그는 덕원리의 시교회를 책임진 이들보고 자기처럼 해주라면서 시교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서일은 모든 순교원(巡敎員)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경전은 구구절절 그 뜻이 심오하니 풀이를 잘해야 깨침이 제대로 될것이다. 해석이 모호하면 아니가르침만 못하다. 따라서 순교원은 첫째로 구국항일사상을 가진 애국자여야한다. 더 론할 여지가 없이 반드시 꼭!》    그는 입교하는 그날부터 주장이 명백하고 견결한 사람이였다.        문밖에서 갑작스레 떠들썩했다.    몇사람이 웬 일인가며 밖으로 나가자고 일어섰다.    서일도 보던 책을 탁상에 내려놓는데 문이 활짝 열리더니 중광단원 여럿이 웬 키큰 사나이를 데리고 우루루 들어왔다. 그 속에 경비를 책임진 허활(許活)도 끼여있었다. 웬 일인지를 몰라 이켠에서 물으려는데 낯모를 그 사나이가 서일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곧바로 다가오더니 차렷을 하고 손을 올려 경례를 붙이는것이였다.    《서일단장님! 저는 시위연대 정위 동천 신팔균이 옳시다. 저는 단장님을 만나뵙고자 불원철리하고 찾아왔습니다.》    《오 그렇소. 손을 내리고 거게 앉소. 무슨일에 나를?...》     서일은 신팔균과 악수하고나서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초면의 사람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단장의 부드러움과 신팔균의 군인다운 깍듯한 례모에 모두들 일시 멍해질뿐이였다.     서일은 불원철리하고 자기를 찾아왔다는 초면의 군인장교를 자리에 앉혀놓고나서 다시보았다. 관골이 불거지고 두눈이 형형 불타는데 나이가 기껏해야 자기같이 이제 30대중줄에 올랐을 기강이 씩씩한 젊은이였다.    《동천 신팔균이라지, 만주로는 언제 건너왔소?》    《재작년입니다. 국치를 당하고 보니 있을 멋이 없었습니다. 황실근위 보병대에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유명무실했고, 그래서 나는 군적을 집어던지고 나와 고향으로 가고말았던겁니다.》    《고향이 어딘데?》    《충북 진천입니다. 학교를 세워봤지요. 보명학교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구국청년을 양성해볼까구. 그리구는 대동청년당을 내왔던겁니다. 윤세복이 하고 김동삼이 하고, 박중화, 안희재. 서상일. 박중화...》    《오 그랬소! 국권회복을 위해서 진력했구만!》    《하긴 진력하노라했지만 그게 어디됩니까. 나라는 그예 이꼴로 되고말았지요... 생각하면 분해서 견딜수가 있어야지. 그래 나는 좌고우면할 겨를이 없이 그만 훌쩍 떠나 만주로 들어오고말았지요.》     서일보다 한 살지하인 동천 신팔균(東天 申八均)은 1882년 5월 19일 서우 정동(貞洞)에서 평산신씨(平山申氏) 석희(奭熙) 공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부친은 철종(1850ㅡ1863)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고, 고조부 홍주(鴻周)는 순조(1801ㅡ1834)때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조부 헌(櫶) 공은 형, 공, 병조(刑,工,兵曹) 판서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는데 특히 일제와 담판했던 저 유명한 강화조약(江華條約)때 나라를 대표해 명성을 떨친 외교관이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여난 신팔균이였기에 가문의 전통에 따라서 18살 때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했고, 군사교육을 받고나서는 21살 때에 보병참위(步兵參尉)로 입관되여 시위연대(侍衛聯隊) 부위(副尉)로, 황실근위(皇室近衛) 정위(正尉)로까지 승진했다가 그만둔 것이다.        신팔균은 조상의 땅을 등에 지고 남의 땅에 몸을 맞겨야 하는 신세가 됐으니 통분하기 그지없다면서 중광단을 대종교에서 세웠다니 자기도 가입할 맘을 먹었노라했다.    《참 잘왔소. 반가운일이요. 그러잖아 우린 사람이 모자라는 판인데... 바로 당신과 같은 군사인재가말이요.》    《중광단은 지금 인원이 얼마나됩니까? 그리구 어떻게 하고있습니까? 간판을 보니 명동학교라 했구만요.》    《그렇소. 명동학교지. 그리고 지금은 이것이 곧바로 중광단이기도한거요. 인원수는 외지에 분산되여있는 사람까지 다해서 천여명. 왜 분산되였겠소, 그건 아직도 몽땅 집결할만한 조건이 구비되지 못해서요. 래년에 집을 더 지을 타산이오. 지금은 그저 지식을 배우는걸 우선으로 하고. 머리가 비지 않게끔. 운영방침은 자급자족(自給自足), 근공검학(勤工儉學)이요.》    서일은 새해부터는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리라는걸 알려주었다.    신팔균은 듣고나서 군사훈련은 안하는가고 물른것이였다.    서일은 군사훈련도 해야겠건만 아직은 그를 책임질 사람이 없거니와 군사기술서적마저도 없다고 했다. 신팔균은 이 말을 듣더니 자기가 훈련교원을 맡겠다고 흔연히 자진하면서 꾸러미속에서 군사교본 두권을 내놓는것이였다. 한권은 보병들의 내무, 규률, 전술 등 규범집인 이고 다른 한권은 였다. 시위대에서 사용하던것이였다.    이리하여 중광단은 군사훈련과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신팔균이 이러는 것을 지켜보고있던 허활은 그제야 다가와서 자기가 사람을 알아볼줄을 몰라서 너무 과분했으니 량해하라면서 단장을 만나게 하기는 커녕 의심만 품고 피스톨마저 빼앗은 일을 사과했다.        신팔균은 아니요 사과할 것 없소 경비를 잘 서려면 의례 그래야지, 그대의 높은 경각심과 책임성에 외려 내가 감탄하오, 무기를 내놓으라니 안된다며 대항하고 억지를 부린 내가 잘못이였지 안그렇소 하면서 그가 돌려주는 피스톨을 받아서 건사했다.       이틑날 중광단의 중진들이 학과목설치에 따른 교학과 훈련시간 배비문제를 놓고 한창 토론하고있는데 이동호, 이달문, 이덕수, 김기석, 장기덕, 장사학 등 여섯사람이 소수레에다 훈련용의 목총을 한가득 실어왔다. 중광단은 비록 무기가 없는 정황이지만 군사훈련은 해야 할 것이고 군사훈련을 할 시 빈손으로 하면 멋없고 잘할수도 없는데 그저 보고만있을건가, 그래서야 안되지 하면서 그들은 자진나서서 여러날 품을 들여 소문없이 훈련용목총 1백여자루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년세많은 그네들의 합숙이 어느덧 어지러운 목기공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고마운일이였다.    서일은 자신이 중광단원이면서 이 조직의 어려운 짐은 스스로 자진하여 맡아 해내고있는 그들을 각별히 존중하여 우리 중광단의 보배이자 원로분들이요 하면서 한 분 한 분 소개해주었다.    《군수, 양반, 유생, 담사리, 동학당 의병이 뭉쳐서 이룩된 중광단...오, 우리 한배검께서 지켜주고 보우하사 앞날은 꼭 창창할것입니다!》    신팔균은 가슴이 울렁이도록 감격되여 이같이 부르짖었다. 여지껏 이곳 저곳 떠돌며 귀속을 못찾은 그라 중광단을 집이라고 생각하니 기쁨이 솟아 내가 이제는 부모없고 집없는 고아는 아니구나해서 모두를 크게웃었다.    이때의 중광단은 실로 귀속을 잡지 못해 광활한 동북만주를 헤매이는  광복투사들이 절실이 바라고 찾는 훌륭한 집으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1913년이 돌아왔다.    이해의 봄은 국치를 당하여 세 번째로 맞이하는 봄이였다.                 봄이 왔네 봄이 왔네  겨울가고 봄이 왔네             천지간에 화기돈다  집집마다 기쁘구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크다.               겨울철에 얼어 붙은  샘물들이 다 녹았네             이골저골 졸졸줄줄  사방으로 흐르누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 크다.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산과 들에 꽃이 피네             벌의 노래 나비춤에  옷갖것이 웃는구나             바위밑에 눌린 풀도  싹이 터서 올라오네             한얼님이 주신 생명  대자연의 힘이로다         “봄노래”가 산간을 들깨워 덕원리는 생기로 넘치였다.     수난자의 감슴속에 응어리로 맺힌 원한을 풀어주려는 듯이 따스한 이 계절은 추위를 몰아내고 드팀없이 찾아왔다.     중광단은 총동원하여 수10헥타르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진펄을 갈아번지고 물도랑을 빼고 강물을 끌어들이여 천수답을 만들어 벼씨를 뿌렸고 산기슭 공지를 밭으로 만들어 강냉이, 수수, 조, 감자를 심었다.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겨례 모든 인중(人衆)                       우리 형제자매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하여                       빛내보세 빛내보세                       대황조의 베푼 신교 빛내보세            농망기가 지나자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휴식을 하는 한편 모두 교리를 참답게 배우는것을 의무이자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들은 홍암대종사 라철이 손수지은 “단군가”를 불렀고 그 노래의 뜻을 따라 대황조의 베푼 신교를 빛내보려고 노력했다.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으로부터 무속신앙(巫俗信仰ㅡ쌀만교. 사마니즘)의 변천과정을 걸친 자기 민족의 유일한 이 새교의 사상이 점차 대중속에 뿌리밖혀져서 새 교문의 문호(門戶)가 천산남북에 널리 열리고 삼신숭배(三神崇拜)의 고유한 정신과 배천사신(拜天事神)의 미속과 미풍이 세상에 널리 퍼져 그 명맥을 후세가 이어가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다가 대종교를 굳게 지켜가고 있었다.     봄일이 다 끝나니 농한기여서 모두가  휴식하며 배우고 있을 때 철도 모르고 떠돌이를 하던 성이 박씨인 한 집이 덕원리가 좋다는 소식을 어디서 주어듣고는 살아보려고 식솔을 일곱이나 끌고 찾아왔다. 그들의 가긍한 정상을 보고 덕원리에서는 받아주었거니와 마을 사람들은 그 가정의 어려움을  헤아려 생활일절을 돌봐주려고까지했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마음착한 교도들은 그 집을 위하여 두손모아 기도했다.    그런데 새로 이사를 온 박씨네는 대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몰리해를 하는 무신론자였다.    《한배검이 누긴데 이래? 신을 믿는다구 밥이 나오나?》     일가주장인 박씨도 그렇고 그의 마누라도 그렇고 주는 대접이나 받으면서 곱다랗게 지내기나 할 것이지 교도들이 두손모아 념송(念誦)하는것을 보더니만 그게 우습다며 이따위 소리를 실없이 죄친 것이다. 그통에 그들 일가는 이사를 왔다가 그 자리로 그만 쫓겨나고말았다.     자기가 마음없어 믿지 않으면 그만일것이련만 철딱서니 없이 그같이 미현하게 노는 사람도 있었으니 자작지얼(自作之蘖)이란 아마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이겠다.      대종교를 신봉하지 않으면야 몰리해를 할 수 있으니 가르쳐줘야지만 그 행동거지나 너무도 눈에 나니 가르쳐주려는 사람마저없었던것이다.    한울이란 곧 하늘(天)을 가리킴이요 이는 예로부터 써온 말이다. 한얼은 신(神)을 말함이고 한검은 신인(神人)을 말함이며 한배검은 천조신(天祖神)을 가리키는 것이다.    배달민족은 원래 지역적으로 아세아의 동쪽에서 백두산령의 광명한 정기를 타고난바 원시시대로부터 밝은 태양을 숭배하였고 신도의 교문이 열린 그때부터는 천신숭앙(天神崇仰)의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 온 것이다.    한배검 신앙의 유래를 간추려 보면 이러하다.    한개검은 세상에 살아있은 기간 진종(眞倧)의 대도(大道)로 교화(敎化)를 펴고 홍제(弘濟)의 이념(理念)으로 치화(治化)를 펴 신교(神敎)의 진리로 만백성을 깨침으로써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도문화(神道文化)를 성역(聖域)에 크게 빛나게 한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독특한 풍속이 생기였는바 집집마다 어린 아기를 낳으면 3일만에 3신께 공봉(供奉)하고 검줄(祭索)을 대문에 매여 붉은 실이나 헝겁으로 머리 끝에 매여 명복(命福)을 빌고 그 이름을 댕기(檀祈)라 하며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저고리에 흰 헝겁으로 동정을 달아 백두산을 기념하였다. 평안도, 함경도의 10월사상제와 만주의 3월 太白祭(백두산을 태백산이라 이르기도 함)는 모두 보본(報本)의 특전(特典)으로서 고개위의 성황당(城隍堂ㅡ國師堂․仙王堂)과 전간의 고시례(高矢禮ㅡ농부들이 들에서 밥을 먹을 때 첫술밥을 내던지며 “고시례”하는 것은 농관 고시례를 추모하는 례임)는 저 세상으로 먼저가신 이를 기리는 아름다운 풍속인것이다.    부여의 옛풍속에 구서(九誓)라 하여 아홉가지의 맹세가 있었고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는 계률이 엄하여 계명을 어기면 오륜을 벗어난 자라 하여 그 지방에서 쫓아냈다. 통용된 5계를 볼 것 같으면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하며 부모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며 벗을 사귀되 신의로써 하며 싸움에서는 후퇴하지 말며 살생을 함에는 반드시 가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불계(佛戒)의 부합(不合)한 것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소총(疏忽)함이 없이 行하라.》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도 귀산(貴山)과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하늘제를 지낼 때는 팔관회(八關會)라 하여 여덟가지의 죄를  짓지 않게끔하였으니 곧 살생을 하지 말며, 도적질을 하지 말며, 제일(濟泆)을 하지 말며, 망언을 하지 말며, 음주를 하지 말며, 高大床에 앉지 말며, 향화(香華)를 입지 말며, 관청(觀廳)을 자악(自 樂)치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교의 명칭도 력대로 비슷하였다.    부여는 대천교, 신라는 숭천교, 고구려는 경천교, 발해는 진종교, 고려는 왕검교, 만주는 주신교.    기타 여러 나라들에서는 천신교라 불렀던것이다.    홍암대종사 라철이 1909년도에 대종교리념의 실천강령으로 되는 “오대종지”를 발포하였는데 서일은 이를 연구하고 “오대종지강연”을 저술했다.           1. 敬奉天神  (인물의 本源을 아는 것)         2. 誠修靈誠  (인생의 良能을 아는 것)         3. 愛合種族  (인세의 平和를 얻을 것)         4. 靜求和福  (인간의 自由를 누릴 것)         5. 勤務産業  (인류의 文明을 늘일 것)      종지강연은 이같이 인생의 본능, 자유, 행복 등을 현대철학에 비추어 현실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해의 음력 10월에 서일은 령계를 받고 참교로 피선되여 시교사를 잉임(仍任)하였다. 령계는 교인의 자격을 작성하는 의전으로서 교리를 독신하며 의무를 각수(恪守)하는 이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신부(神府)에 입적하였다 하여 명부에 등록하였다. 그 명부를 천록(天籙)이라 한다.    서일은 주야로 수도에 정진했다. 그리하여 차츰 성통(性通), 도통(道通)하게 되었고 견(見), 문(聞), 지(智), 행(行)의 사대신기(四大神機)를 마음대로 구사할 지경에 오르고 있었다. 이는 실로 놀라운 터득이였다!    서일은 가는곳마다 덕행을 베풀면서 진리를 규명하였다. 하여 그가 이르는 곳이면 신도가 운집하였고 입교하려는 자가 수백, 수천, 수만명에 달했다.     《동포여러분,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들! 여러분은 백두산 이북으로 펼쳐진 저 일망무제한 광야를 보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한배검님께서 끼치신 만리성역이거니 우리가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광활한 이 대지를 잊지 마시오. 유유히 흐르고 있는 송화강을 가운데 놓고 동서로 펼쳐진 땅, 저기  완달산부터 흥안령기슭까지 그 어디면 신족(神族) 우리 동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으며 우리 형제자매들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남북이 평연한 이 성역에서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력사를 지녀왔음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 금수강산에서 선조의 생애를 이어나가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의 연설은 가끔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로 중단되였다 이어지군했다.    《동포 여러분! 나의 형제자매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리념으로 일관계승해온 석일(昔日)의 국세는 얼마나 훌륭했던가, 우리에게도 한때는 과연 자랑찬 력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보시오, 누가 이같이 큰 소리를 쳐던가요?... 이 글은 바로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병졸을 시켜 보낸 최후의 통첩이였습니다.    동포여러분! 여러분은 이 소리를 듣고서 감상이 어떠합니까?... 이로 보아도 당시 우리들의 선조는 한족(漢族)을 얼마나 어리게 보았던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했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과거에는 이같이 위엄을 떨치면서까지 떳떳이 세상을 살았던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해보시오. 대체 누구의 대에 이르러 그 명맥이 다 끊어졌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대에 이르러 다 끊어지고 만게 아닙니까. 생각들해보시오. 왜 이토록 처참하게 되였는가? 이것이 누구의 탓인가? 우리에게는 그래 책임이 없단말인가?... 죄가 없단말인가?... 하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대답은 간단한겁니다. 분발해야 합니다. 분발하여 통분함을 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잃어버린 국권을 우리의 손으로 되찾아와야합니다. 후세에 치욕을 남기지 않으려거든.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발휘했던 그 위엄을 다시갖출 그날을 맞아오기 위해서 우리는 단합해야합니다. 정신차리고 혈전분투할 준비를 해야하는것입니다!》    력사를 잃어가는 사람, 민족의 자부심을 잃어가는 사람, 그리하여 자비감속에서 골기없고 자곡지심(自曲至心)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정신차리라 깨우쳐주느라고 서일은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열변이였다.    그것은 피타는 절절한 호소이기도 했다...    어느날 고향에 간다면서 훌쩍떠났던 이홍래가 갑작스레 왕청에 다시나타났다. 그가 돌아와서 반가운데 생각밖의 일을 말해 모두를 놀래웠다.    《내가 어디루 갔다왔는지 아오. 거제도엘 갔다왔단말이요.》    《아니 거기는 왜서요?!》     현천묵이 눈이 둥그래지면서 물었다.    《조성환을 만날려구서. 건데 왜놈들이 경계가 어찌두 심한지... 눈을 발라메고있더란말이요. 그래 내가 어찌했겠소. 헐수 할수 없이 말뚝에 매인  양새끼모양으루 그저 먼 발치에서 보다가 왔네그려.》    《그리구는요?》    《그리구는 꼬리를 뺐지, 잡히면 날이면 볼장은 다 보니까.》    《하하하하...》     이홍래의 저돌적인 행동에 모두들 혀를 내두르면서 웃고말있다.     계화는 그토록 싸다녀도 붙잡히지를 않는 일이 과연 별일이라 했다. 그래서 모두들 또 웃기는데 명실공히 “월경의병장”이 돼서 내내 동분서주하는 이 열혈의 남아는 아닌게아니라  무겁한 사나이였다. 꼭 마치 사선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불사조(不死鳥)같았다.    암살을 계획했던 조성환은 섬에 같혀있었고 그 대적수(大敵手)는 눈이 펀들펀들 살아서 돌아다녔다. 지난해의 7월, 가쯔라 다로오는 로씨아를 방문하고 제2차의 일로밀약(日露密約)을 맺았는바 장춘이남 즉 남만주와 내몽골(동몽골)을 일본의 소유로 하고 장춘이북 즉 북만주와 기타의 몽골지역을 로씨아의 소유로 정하였다.    한심하게도 남의 땅을 갖고 제멋대로 놀아대는 판이였다.    그러나 그러했음에도 운명이란 본래 타고난것이라 가쯔라 다로오는 이 세상을 오래살지를 못했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을 병탄함에 급선봉이 되었던 이 군벌출신의 대륙확장주의자는 자기의 정권이 무너질까봐 국내의 사회주의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던 것이다.  지난해의 12월에 메이지천황이 죽어 세 번다시 수상자리에 올라앉은 가쯔라 다로오가 새 내각을 구성하자 호헌운동이 일어나 전국을 석권했다. 올 2월달에 들어서자 가쯔라 다로오는 강박적으로 제3차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군중들은 국회대청을 포위 습격하였을뿐만아니라 가쯔라 다로오의 어용신문이였던 “국민신문사”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가쯔라 다로오는 핍박에 못이겨 사직하고는 10월달에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배달민족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원쑤는 이같이 사라졌건만 야심많은 일본은 아마데라스오오미까미(天照大神)를 지상으로 하는 “황실중심주의”에 의하여 세계의 제패를 꿈꾸면서 군국주의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여 만주땅에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비록 강보에 싸인 유년기이기는 하지만 희망을 품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이 운동의 기운을 대종교가 크게 심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대종교에서 첫 항일구국단체로 발족한 重光團은 장차 만주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할 군사력으로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33    반도의 혈 ㅡ제2부 26. 댓글:  조회:4276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6.        7월 21일에 대종교총본사가 있는 청파호에 갔다가 거기서 마침 왕청으로 오려고 작정한 홍암대종사를 만나본 서일은 왕청 제집으로 오자 곧 붓을 들어 칠언률시 한수를 제꺽지어 자기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달했다.    來賓有事主人知   번사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하네     道室從容日影遲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我本不迷惟一意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而初無間莫三思   자네 비로서 거리 허물고 세 뜻을 정했다 짚으니    理無后覺先天息   철리는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名不虛存實地宜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아    錯綜平生疑心半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孜孜說到夕陽時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이 시에서 서일은 라철스승을 만남으로 하여 인생의 철리를 깨달았음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해가 나있을  때는                 악마가 녀편네를 때리고있는 때이다”       이것은 불란서 속담인데 좋고 나쁨이 뒤섞여 원하지도 않은 화가 덥쳐듬을 말하는 것이다.    남만 유하현의 동포들은 올 7월 24일부터 련 3일간 된서리 일찍이 내린통에 일년 농사가 페농이 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경학사(耕學社)에서는 이에 대처해 총동원하여서 원근 각처에서 중국인이 여러해동안 쌓아 두고 팔지 못한 수수와 조를 사들여 매호에 분배하여 련명(連命)하고 있다는 소식이  동만의 먼 이곳 왕청까지 전해왔다.    (명년에 또 재해가 들면 어쩌는가? 耕學社는 그 부담을 이겨낼 재간이 있을가?...)    서일은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덕원리의 주민들은 모두가 그곳 동포들의 고충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한편 그런 재해를 나도 당했으면 어쩔번했을가 다른 재난은 막아낼수 있어도 자연재해만은 막아내지 못하는건데하면서 요행스러워했다.   (과연 그럴가? 인간이 자연재해를 왜 이겨내지 못한단말인가?...기후와 풍토에 맞는 종자를 개량해 내면 될건데 겁부터 집어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원.)    서일은 이로부터 한가지 진리를 도출해냈다. 인간이 어느 한 곳에서 명을 살려 가자면 강한 적응력을 키워야한는 그것이였다. 독립운동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높고 높다 저 여                    한울 복판에 우뚝 솟았네                    안개 구름 자욱함이여                    일만 산악의 조종이로다                        한배검 한울에서 내려오시니                    거룩할사 배달의 대궐이시오                    나라를 세우고 교화를 펴사                    온 누리를 싸고 덮었네....      이것은 “임금이 지은 삼일신고 예찬”이란 노래의 첫 두절이다.    이 노래는 덕원마을의 대종교도들이 늘 부르고 있었다.       한데 배달민족의 신성한 교인 대종교가 자기의 명을 어떻게 이어갈까?..           한일합방때부터 일제는 이같이 예측, 간파하고 페교할 것을 획책하였으나 굳이 해산만은 보류하였던 것이다.    단군교가 중광하자 이를 해체할 설이 비등할 때 일본의 “태양”잡지는 아래와 같은 론설을 실었다.            언젠가 서일은 이 글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대종교를 대하는  일제의 일단을 보아낼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왜놈이 우리 한국민을 완전히 동화시키려 들면서  그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국민성을 끊기 위해 한글교과서를 다 걷어들이였다. 이제 풍속습관마저 개변시키려들지 않겠는가? 배달민족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뿌리뽑으려 들지 않겠는가? 그자들은  배달민족의 교인 이 대종교를 감시만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서일은 일본의 야만스러운 잔인성을 간파했기에 이같이 생각했다.    이제는 이 대교를 다시 땅속에 묻히게 말아야 한다, 전 민족이 자기의 교를 믿고 사랑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깨달음이 먼저생긴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여 책임지고 널리 포교해야할 것이다...     지금 만주땅 그 어디건 동포사는 마을이면 학교가 일어서고 “권학가”의  노래소리며 “학도가”의 노래소리가 울리였다.                                    동방의 붉은 해빛 명랑한 곳에                  갱생의 큰소리 요란하지만                  눈멀고 귀먹으면 어찌 알리오                  눈뜨고 귀밝히자 청년학도야         서일은 오늘도 딸 죽청이를 데리고 등교하고 있었다.    죽청이는 어언 8살을 먹어 소학 2학년을 다니는데 공부를 잘한다. 하학해서 집에 돌아가서는 숙제를 얼른해놓고 자진 선생이 되여 제 동생 윤제에게 글을 배워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누나질을 착실히 하는  애였다.    이날 아직 퇴교시간전이라 교원들이 누구도 교무실을 떠나지 않았는데 본지사람이 아닌 초면의 두 젊은이가 학교로 와서 서일을 찾는것이였다.    《당신들은 대체 누군데 그를 찾는거요?》     현천묵이 캐물었다. 낯선 사람이면 우선 신원부터 밝혀진 후에야 교장을 대면할수 있다는 태도였다.    《난 김성이라구 하는데 그분을 면목아오. 우린 사년전에 연해주에서 만난적이 있소.》    《여기는?》    《난 이근호라 하는데 집은 평양에 있고 만주로 건너온지는 몇달밖에 안됩니다. 백일세날 이 친구를 면목알게 돼서 따라왔지요. 난 교장선생하구는 면목이 없습니다. 찾아온건 다름아니라...》    이근호(李根浩)가 해석을 하려는데 서일이 나타났다.    《아니이거 김성이 아닌가!》    서일의 얼굴에 저으기 놀램과 반가움이 너울쳤다. 계화하고도 물어봤다. 이달문하고도 물어봤다. 그들은 다 그가 로씨아에서 건너왔을 때 보고는 여직 한번도 다시만나본적이 없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했던 것이다.  서일은 이동호군수하고도 물어봤는데 그도 본적없고 모른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냐 잘못된거나 아닐가 걱정했는데 오늘 이렇게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중머리를 안했구만.》    서일은 그가 연해주에서 혼쌀먹던 일을 상기하고 놀림쪼로 웃었다.    《인제는 일진회놈으로까지는 의심받지 않습니다만...》    김성이 하던 말을 중둥무이하고 현천묵을 힐끗 쳐다봐서 모두웃었다.    김성은 만주일판을 한번 돌고 귀국하여 원산에서 교편을 다시잡고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니 계속있을 멋이 없어서 다시금 만주탈출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동창생을 찾아 순천에 갔다가 동창생은 찾지 못하고 가던 날이 장날이라 마침 올 2월 6일 순천장거리에 들어섰다가 거기서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을 목격하게 되였고 그 사건에 직접 말려든 이근호의 위급한 사정을 보고 그를 구해내느라 함께 월경하다보니 어느덧 금란지교(金蘭之交)로 된 것이다.    김성이 목격했다는 순천장거리 백일세사건(百日稅事件)이란 대체 어떤것인가? 선생들은 중국신문에 간단히 보도된 것을 보았을 뿐 상세하게는 모른다.    서일은 아예 이날밤 덕원리마을 주민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이근호가 그들앞에서 순천장거리 백일세진상을 낟낟이 말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이틑날에는 학교에서 집회를 열어 모든 사생이 그의 보고를 청취하게 함으로써 국내의 형편의 일단을 알겠끔했다.    일제는 상인을 착취하기 위하여 조선의 전국 각지에 소위 백일세라는 장날(市日)을 정해서 세금을 강제로 수금하고 있었다.    올 2월 6일(음력 1911년 12월 19일)이였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장날에 백일세를 받기 시작하여 물의가 비등하면서 민심이 말라들던 차에 모두들 하고 주고받았다. 민심이 이같이 들끓고있을 때 최봉환, 전응빈, 이학응 등 여러 사람의 주동으로 아침부터 전 시민이 철시를 단행하는 한편 정오때 장보러 온 수백명을 선동하였다. 흉맹한 군중이 노도와 같이 군청에 쓸어들자 군수는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의 앞에서 백일세의 징수를 규탄했다. 이럴 때 일본인 재무주임 야사와가 위협으로 해산시키려고 렵총으로 공포를 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저놈이 사람을 쏜다며 왁 달려들어 렵총을 빼았아 산산히 부수었거니와 그를 뒷뜰로 끌고가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같이 험하게 번지자 이를 목격한 일본거류민중의 목수와 상인 수십명이 각기 자기 짐에 있는 렵총을 들고 나와 발포했다. 이에 군중들은 더욱더 격노하여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일장의 격투를 벌리였는데 일본인이 사상자 16명을 내고 한인측도 15명을 낸 것이다.    《군청직원을 모조리 때려죽이자!》    용기충천한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군청에다 불을 질렀다.    군청직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는데 성이 남궁(南宮)인 직원은 미처 내빼지 못하고 붙들려 그만 매맞아 죽고말았다.    경찰에서는 주동분자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이근호는 붙잡힐 것 같아 내빼려던 차 마침 만주로 다시오는 김성을 만나 따라온 것이다.       김성과 이근호는 굴레벗은 말모양으로 속박없이 남만각지를 거진 다 돌다싶이했다. 그들은 윤세복(尹世復), 윤세즙(尹世葺) 형제와 이원식(東厦) 이 봉천성항인현(奉天省桓仁縣)의 현성내에다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교포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자제를 공부시킬 형편이 되지 않길래 부득불 학교당국에서 기숙비와 옷까지 해입히거니와 지어는 학생가족의 생계비까지 보조해 주면서 교육을 권장(勸獎)하고있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서일은 물론 명동학교의 선생모두를 감격하게 했다.    김성이 용정촌에 들려 보니 이명언(李明彦)이라는 분이 방금 건너와서 동명중학(東明中學)을 세웠더라면서 이름을 돌려놓은 명동학교(明東學校)는 왜 중학교라는 간판을 걸지 않느냐 이만하면 교사도 훌륭하겠다 학생수도 많은데 능히 될게 아니냐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은 여기도 중학반이 이미 설치됐고 간판은 모든 것이 구비되는 그때에 가서 달아도 될게 아니냐했다.      원산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쳤던 김성은 본래 력사를 잘알기에 력사교원으로 덕원리에 남고 이근호는 유하현으로 갔다.     유하현제2구3원보추가가(柳河縣第2區三源堡鄒家街)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지난해에 50여명의 첫기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국제적인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인적기 희소한 곳을 찾아 삼원보(三源堡)에서 동쪽으로 약 80여리 지점에 있는 통화현제6구합니하(通化縣第6區哈泥河)로 옮겨가 자리잡고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후에 중학반은 지방중학에 인계함)     이근호가 중광단(重光團)이 창립됐다길래 와보니 아무하는것도 없이 그저 명의뿐이니 자기는 차라리 전문군사를 공부할 생각이라며 그리로 간 것이다.    《지금 데라우찌총독은 국내의 학교들을 몽땅 학생군영으로 만들고있습니다. 교복이라 하여 학생들에게 단체복을 입게 하고 선생들께는 금테를 두른 모자에 경찰복같은 검정옷을 입히는데 아예 칼까지 차고 교단에 오르게 되리라는 소문이 나돌고있습니다. 어쩌자구 그 모양인지. 참!》    김성이 하는 말이였다.   《거야 빤하지. 관리도 아닌 교원에게 경찰복을 입힐 때야 위협적으로 학생을 다스리게 하자는 수작이지 뭐. 이런걸보고 군국주의라 하는거야.》   《채칙쥐고 짐승을 부리듯 칼을 차고 위압하면서 학생을 배우게하다니 원. 데라우찌는 지독스러운 개자식이구나!》    명동학교 선생치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데라우찌의 담화였다. 아주 명백한바 그는 조선민족에게 리성(理性)이 발달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주지 않으므로써 창조성을 싹트지 못하게 하려하고 있었다.   《잔인한 그 군벌은 “민심수습”이라는 명의하에 무단정치로써 우리 민족의 배일감정을 탄압하느라고 지금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는것이오. 언론, 집회, 결사 일체를 금지했고, 여러 선생님들도 들은바와 같이 이제는 관리가 아닌 교원에게 까지 경찰복을 입히고 칼을 채울때야 순진한 학생에게 파시스교육을 하는게지 뭐겠소. 그자의 교육방침이란건 일본신민화(日本臣民化)로서 우리 민족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이른바 반항을 모르는 선량한 노예로 만들어버리자는것이요. 그런즉 우리 민족가운데 고급지식인이 나오게 할까? 두고 보오만 절대 그러지 않을것이요.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우민화(愚民化) 하여 저들의 부림을 잘 받는 하급관리나 사무원이나 근로자로 양성하는데 국한시키고말것이요.》    서일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이어 데라우찌는 왜서 일본어와 일본력사를 배우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글과 역사를 잊게 하고 조상을 잊게 하여 저들 일본의 조상을 우리의 조상으로 만들자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것이다, 식민지 교육이란 바로 이런것이니 여러 선생님들은 잊지 말고 학생들에게 단군황조를 받들어 모시게끔 교육하야한다고 했다.      학교 교원들 중 방금온 김성을 내놓고는 모두가 대종교도였다.    그런즉 덕원리는 명실공히 대종교마을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날 사생 모두가 총동원하여 겨울철 화목(火木)준비를 했다. 말이 학생이지 반수이상이 끌끌한 청년이였다. 거의가 정처없어 이곳 저곳 유리표박(遊離漂迫)을 하다가 중광단(重光團)에 들겠다고 찾아온 의병이다. 한데 집단가입식이 따로있다니 그것을 기다리느라 어디든 가지 않았다. 자급자족(自給自足)이란 구호가 나붙었다. 여기에 있으려면 일을 해야함을 각오해야한다. 그들은 저마끔 도끼와 바오리를 갖고 삭정이주으러 산으로 갔고 어린 학생들은 반급선생의 지도하에 낫을 가지고 나무라러 갔다. 덕원리는 마을밖에 새와 쑥이 쌔쿠버려 자기만 부지런하면 화목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 이 세상에                        유식함이 힘이란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한자두자 배워가세                               젊은이들이 서일과 같이 산을 오르면서 노래불렀다. 수준정도가 부동했다. 이 학생들 가운데는 반무식자도 적지 않았던것이다.     강대를 한짐씩 걸머지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우리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어느 왕이 국토를 제일 많이 넓혔는가 하는 물음을 내놓아 모두들 제 나름대로 짚어갔다. 그러다가 누군가 광개토왕이라고  면바로 짚어냈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누군가며 눈을 꺼무럭거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제 민족의 력사마저도 깜깜이니 답답한 일이였다.    《광개토왕은 본명이 담덕이요.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승하하신 후에 시호를 그같이 지으신거요. 광개토(廣開土)란 땅을 넓힌다는 의미지. 그이는 재위 23년간에 남북으로 령토를 크게 넓히여 만주전역과 한강이북을 장악하고 신라를 도와 왜군을 궤주(潰走)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동방천하를 패도로써 제패하신 명실상부한 성왕이시오.》    서일이 알려주었다.    《패도로 제패했다?...그렇다면 그게 침략사상과 뭐가 다릅니까?》    학생 하나가 질문했다.    《패도를 쓴다해서 침략사상이라할 수는 없는겁니다. 광개토왕께서는 동맹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면 대왕자신이 친정을 하여 형제국을 원조하여 주는 정치를 시행하였던것입니다. 례를 들면 대왕께서는 신라의 나물니왕으로부터 연합군이 침략해온다는 말을 듣고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백제와 왜군을 격멸하여 위급한 신라를 구원했지요. 그러면서도 대왕께서는 백제와 왜국을 병합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던것입니다.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중국의 패도사상과는 든본적으로 달랐으니까요. 광개토왕께서는 부국강병의 고구려를 건설하여 열국이 모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데 패도의 목표가 있은겁니다.》    《아무튼 패도를 하자면 강병책을 써야겠지요?》    《강병책을 쓰는게 뭐가 나쁜가. 필요하다면 써야지. 속담에도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말의 어원을 볼 것 같으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찬양하는 음부경(音符經)에 부국강병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그걸 풀이하면 나라가 부유하고 그  병사까지 막강하면 능히 천하를 태평스레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인겁니다. 한즉 강병책이야말로 패도정치를 펼치는데 있어서 불가분의 철칙이 되지 않겠는가, 특히 지금의 세상에서.》    서일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곧 의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국은 우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소졸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강병책이 나라를 구원한다는것조차도 전혀 몰랐던가봐.》    《우습지. 더러운것들이 당나귀타고 추풍월색이나 읊을줄을 알았지 뭐야. 언제...》    《무력사용은 불상스러운 짓이라 하여 꺼렸으니 그랬겠지.》    《그러니 무지해두 한심하게 무지했지 뭐야.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력을 쓸데는 써야 옳을게 아닌가. 약육강삭(弱肉强食)의 세상에 추풍월색(秋風月色)이나 읇조리면 안녕(安寧)할까, 우리 나라는 그래서 남한테 먹히워 망하는거야. 허니까말이여 강병책은 나라를 영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거야. 안그래?》    《그렇잖구. 왕도의 사상이 뿌리박고 강병책을 썼더라면야 왜놈이 함부로 군사를 끌고 침입했을까. 국모를 죽이는 일도, 임금이 외국공관에 숨어 지내는 일도 없었을거다. 수치가 뭔걸 알았다면 남한테 나라가 다 먹혀 온 백성이 집잃은 개같이 나헤매지는 꼴이 되지는 않았을거다.》    《처참한 꼴이야, 처참한 꼴. 생각하면 분해서 원.》    그들은 이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면 오직 피흘리는 투쟁이 있을 뿐 다른길은 더 없다는 것으로 의논을 끝맺았다...              며칠안되는 사이에 학교 운동장 한쪽에 산같은 나무가리가 생겨났다.    널직한 운동장에서 솜과 넝마로 둥글둥글 하게 만든 커다란 뽈이 거센 발에 채이여 이쪽 저쪽 굴러다니고 있었다. 일을 그토록 하고서도 외려 기운이 나서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    서일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현척묵이와 말했다.   《이렇게 지내기만하다가는 무료끝에 따분함과 실증을 못이겨 나중에는 뺑소니를 칠 자도 생겨날거다. 》   《나도 그 생각이 들었어. 무기조법마저 다 잊고말거라니까.》   《숙사도 교실도 비슷하게 준비됐겠다, 식량도 화목도 별문제없는거니 확대모집을 시작해볼까, 여기가 려관구실을 하지 않게.》    당전에 중광단원수 크게 확대시키지 못하는 원인이라면 다른것이 아니였다. 인원수가 급속히 많아진 후에 봉착될 숙식(宿食)을 비롯한 일체의 공급준비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준비도 없이 서둘러 취하는 행동이 왕왕 자신을 곤궁에 처넣고마는 것이다. 허다한 의병대가 그래서 오래견지못하고 백성만 괴롭히다가 자멸된게 아닌가.    그러지를 말아야 했다.     학교 숙사생들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다하고나서였다. 전에 신돌석의병대에 있었던 한 젊은이가 그의 죽음이 한심하도록 처참했던 것을  말해서 여러사람을 비분에 잠기게 했다.    네해전인 1908년 11월 18일이였다. 적의 포위토벌이 심해감과 아울러 그자들의 온갖 회유책을 물리친 신돌석은 부하장병들의 정상과 시기가 불리함을 숙고한 뒤 다음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자기의 의병을 일시 해산시키고는 자신도 가족을 동반하고 산중에 은거한 다음 영덕의 눌곡(訥谷)으로 옛부하였던 김상열(金相烈)을 찾아갔던것이다. 김상열형제는 신돌석을 반가히 맞아 밤에 소를 잡고 술을 권하여 못다한 옛정을 되새기는체 하면서 언제 한번 편히 쉬지도 못하고 혈전에 시달린 그에게 독주를 먹이였다.    신돌석이 독주에 취하여 깊히 잡들었을 때 김가형제는 도끼로 그를 내리쳤다. 신돌석은 도끼를 맞고도 벽을 차고 밖으로 10여장 상공으로 세 번 뛰여 담장밖 10여보되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것을  김가형제는 달려가 도끼로 다시쳤다. 구국거성(救國巨星)은 이렇게 간악한 배신자의 손에 못다 한 한을 남기고 참담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소식이 항간에 퍼지자 량심있는 동포치고 슬픔에 이를 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즉 격전과 고초를 함께 겪어온 젊은 의병들의 심정이야 더 말할것있는가!    여기 모인이들 중 어떤 사람은 重光團가입식을 언제면 하는가, 왜 오는족족 받아주지는 않는가 하면서 무료함에 회의까지 품었다.    마침 계화가 그러는 것을 발견하고 서일을 찾아 말했다.    《글이나 읽으라며 오래기다리게하는건 득책이 아닌가 보오.》    서일은 그러잖아 만나려했다면서 현천묵이와 의논이 있은걸 말했다.    이때 이홍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손잡고 일을 할 수 없었다.    이틑날 현천묵이 채오, 량현과 함께 왕청현밖의 다른 지방을 맡고 서일과 계화는 현내를 맡아 일제히 모집사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전에 구군대에 있었던 망명군인들을 찾았다. 임무를 자진해 맡은 최오와 량현은 과연 적극적이였다. 제 사람을 다 찾을 궁리였다. 그들이 입버릇같이 말하는 제 사람이란 바로 자기들 처럼 총잡고 싸운 경력이 있는 자를 가리키는건데 그들은 마치 로련한 감정군이 알갱이로 부서진 유리쪼각속에서 다이아몬드를 골라내듯이 용케도 알아냈다.           이때의 동포사회는 과연 복잡했다. 맨먼저 월경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자리잡고 거주하는 극빈한 농가와 국법에 걸린 망명객들, 을사조약(乙巳條約), 칠협약(7協約), 합병(合倂)이후에 국권회복운동을 해보려고 온 애국투사들, 그외에 협잡배, 모리간상배, 건달과 왜놈의 첩자들... 이런 기회에 불순분자가 얼마든 대오내에 잠입할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면담해보고 의심스러우면 까근히 캐보고 받아야했다. 그리고 모집자측에서 내놓은 한가지 특별한 전제조건을 받아들이여야했으니 그것인즉은 무릇 어떤한 사람이건간에 중광단에 들겠거든 우선 대종교도가 돼야한다는 것이였다.    모집기간은 불과 20여일밖에 안되였다. 그럼에도 그사이 응하는 자가 많아 이미 가입한 인원까지 합치면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발족이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생명과 청춘을 바치리라, 가슴속에 열혈이 끓는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탄원해 나선것이다.    추석이 지나 한달만인 10월 25일, 이날은 공기도 맑고 해살도 밝은 유난히 좋은 날씨였다. 덕원리마을은 명절기분에 푹 잠기였다. 명동학교의 널다란 운동장은 아침부터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덕원리와 부근의 마을은 물론 멀리서까지 대종교도들이 모여든 것이다.     한데 섭섭하게도 조성환을 볼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의 7월, 일본총리대신 가쯔라 다로오가 만주시찰을 오는 기회에 암살하려 계획했다가 그만  미연에 발각돼 북경에서 체포되여 거제도로 1년간 류배를 간 것이다.     명동학교 널다란 운동장거의를 1,000여명의 단원들이 렬을 지어 차지했다. 그외의 자리는 립추의 여지가 없이 군중들이 빼곡히 메웠다.    일동이 숙연히 지켜보는 속에서 서일, 현천묵, 계화, 채오. 량현 등 다섯사람은 단군대황조의 신위를 모시고 백두산쪽을 향해 먼저 제를 지냈다.    그리고 나서 서일은 우렁찬 목소리로 重光團이 창립되여 1년 7개월만에 원래의 10명대오가 백배로 되어 거족적인 첫걸음을 떼였음을 선포했다.    와! 기뿜의 함성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團長에 서일, 그와더불어 묵, 계화, 최오, 량현이 중견인물이였다.
132    반도의 혈 ㅡ제2부 25. 댓글:  조회:3552  추천:0  2011-08-22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5.    무릇 낡고 진부하고 반동적인 것은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종당에는 뒤짚어지기마련이다. 서일은 이런 변증법에 의하여 중국의 자산계급혁명은 승리할것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은 실패하고말았다.      무창기의(武昌起義)가 일어나자 전국이 반응을 보였다. 국민이 뭉친것이다. 한데 혁명을 반대하던 자들마저 하루밤새에 혁명자로 낯색을 바꾸어 그 수가 본래의 진짜혁명당인보다 몇 배 몇 십배에 달했다. 혁명을 배반하였던 구관료가 혁명당에 참가함으로써 그자들은 혁명당을 내부로부터 파괴하였거니와 나아가서는 혁명사업을 엉망으로 그릇치고만것이다.    구관료가 권력을 다시잡은 후 수하 각 혁명단체들에 당장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엄하게 다스리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고를 내렸다.                   원세개가 총독(總督)을 도독(都督)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사람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있는게 아닌가. 하니까 본래의 낡아버린 똥통겉면에다 뼁끼칠을 새로했을 뿐 똥통자체는 바꾸지 않고 그냥 쓰는 격이였다.    망국민의 신세로 만주땅에 몰려와 발을 붙이려고 아득바득하는 신세가긍한 조선민족으로 놓고 보면 아무튼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어 권력행사를 하니 리로운점도 좀 있는것 같았다.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으로 이회영형제가 먼저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퍼져서 국치를 당하자 고향을 등지고 월경한 동포교민들이 그곳을 찾아  확 몰려들었다. 그러자 그곳의 토민들은 의혹을 품고 불안해하면서 토지와 가옥매매 일절을 거절하여 정착하여 살기 어렵게 되였다. 그리하여 대표가 북경에 있는 원세개를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원세개는 한국과 인연이 있는지라 이들의 고충을 헤아려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동반케 하여 동삼성도독(東三省都督) 조이손(趙爾巽)을 방문하게 하였다.    조이손은 원세개의 명령을 받들어 성내의 각 현장에게 명령하여 만주에 있는 모든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편의를 도모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리하였길래 이후부터는 토민의 배타적인 태도나 언동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가 원세개를 나쁘다하랴. 장송린지주가 말하듯이 검둥이가 올라앉건 백강아지가 올라앉건 나만 못살게 굴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1912년 봄철 씨붙임이 끝나자 명동학교는 새 교사를 지어 들면서 뜻대로 중학반까지 개설했다. 수백명을 용납할 계획으로 지은 교사니 대단히 컸다. 하지만 서일은 학교가 없는 곳에 새로 더 창설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명동학교는 학생이 많아져서 더욱 활기를 띠였다.    선생들은 교학에 열중하면서 여러종의 漢文으로 된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러면서 중국말을 되도록 빨리배우는것이 매개 선생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이곳의 토민들과 교제를 틔이어 그네들과는 되도록 우의적으로 지내면서 불화를 없애자는 의도에서였다. 억울하게 조선사람은 일본놈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토민들에게서 듣지 말아야 하고 그러자면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있어야한다. 서일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9월중순의 어느날 정오, 서일이 점심을 먹고나서 등교를 하니 선생들이 교무실에서 웬 중년의 손님을 둘러싸고 앉아 얘기판을 벌리고 있었다.    《아, 왔습니다. 저분이 우리 학교 교장입니다.》    채오가 서일을 먼저발견하고 이러자 현천묵이 일어나 그 손님을 소개하는것이였다.    《연해주에서 오신 한선생이네. 왕청에 오신 걸음에 모처럼 자네를 만나자구 학교에 들리신거네. 》    《자네 기학이 맞지?》    중년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누구신지?...》    손님이 애명까지 부르면서 웃는걸 보면 필시 아는 처지일텐데 누군지 머리에 인츰 떠오르지 않아 서일은 떨떠름했다.      《난 농포리서 살다가 연해주에 간 한기욱이요. 내가 낳기를 농포서 났지. 그러니 서교장하구야 내가 동고향사람되는게 아닌가. 왜 생각안나시오? 소년시절 한번은 밤에 참외훔치러 왔다가...》    《아 그렇지!》        서일은 그제야 머리에 떠올라 손벽을 탁 쳤다. 한기욱(韓基昱)을 오늘 이렇게 만날줄이야 어찌알았으랴! 그는 과연 서일이 태여난 금동(金熙洞) 바로 앞마을 농포(農圃)에서 태여났으니 한고향사람이 옳은거다. 서일은 아직 서당생이였던 소시적에 그의 외할아버지가 산자락을 뚜지고 심어놓은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막지키는 황둥개한테 쫓기고 물려 혼쌀먹던 일만은 잊혀지지 않고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사실은 그때 화를 당해야 할건 나였어. 내가 주모자였으니깐. 저 기학이하고 삼용이를 먼저 든장질해놓구는 기여이 잡아 끌었거든. 안가겠다는걸. 그래서 간건데 개가 불량한 침입자임을 알고서 달려들어... 그통에 결국 당하구만건 바로 이 서교장. 그놈의 개한테 다리각을 물리기까지 했다니까.》    《따져보면 진짜 잘못은 내한테있었소. 그놈의 개를 밤이라구 풀어놨으니까. 내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아무런 사고도 안났을데. 아 니그렇소, 론리대로 하면.》    현천묵의 말 끝에 한기욱이 자아반성을 해서 모두 하하 웃었다.    서일이 10살먹었을 때니 한기욱은 그때 24살의 한창 청년시절이였다. 한기욱은 16살에 연해주로 이사가 그때는 집이 거기 연추(煙秋)에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보곱파 떠난지 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 왔던거다.      이젠 20년이 넘는다. 그것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될줄이야!     한기욱이 39살나던 1906년도다. 이상설이 용정촌에다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신설하자 그는 거기서 숙감(塾監)으로 시무(視務)를 했고 그 이듬해는 연추에 돌아가 자체로 신흥의숙(新興義塾)을 세워 로씨아에 있는 동포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지금은 독실한 대종교신도가 되어 아예 교의 일만 보고있는것이다. 한기욱은 스스로 북만지역의 시교원(施敎員)을 자임하고 나서서 우쑤리강을 건너 의란도(依蘭道) 밀산(密山)으로 이주까지 했다. 그는 국내에서 건너와 환국(還國)하지 않고 그냥 포교에 전심하고 있는 홍암대종사를 만나보려고 화룡으로 가던 걸음에 왕청에 들린 것이다. 한데 오고 보니 교우들이 권유하는지라 며칠 묵을 생각이였다.    《시교를 다녀도 안쪽으로 너무들어가지 말아주시오. 거기는 삼년전 국내서 호열자가 돌던 그 모양이랍니다.》     서일이 한마디 충고했다.    《그렇게 심한가?》    《그보다도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재작년하구 작년 련거퍼 두해나 큰물이 져 피해가 막심한데다 로빈(만주리)에서는 쥐병까지 겹쳐 인명피해가 형편없는 바 죽은 자가 수만명에 이른답니다. 그리구 치치할에서는 온역이 돌아 지금도 매일 한명꼴로 죽어가고 어떤데서는 류행성 홍진이 도는데다 독성페염까지 겹쳐 한 마을 30여호가 전부 사망한 일도 발생했답니다.》         서일은 의사아니면 지금은 안쪽 멀리로 들어가지 말아달라고 재삼 당부하면서 그를 조용한 자기의 교장실로 모시였다. 로씨아의 형편과 거기에 있는 여러분의 소식을 몰라 답답하던차 잘만난 것이다.     《한선생은 연추서 살다오셨다니 최재형선생을 잘 아시겠는데 그 어른님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재하신지?》    《건재하지, 건재하구말구. 최선생은 지금 노우기에프스크 재류 한족회 회장으로 사업하고계시는데 교포치고 그분의 방조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없지. 공익사업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야한다면서 요즘은 유류제조소(油類製造所)를 세웠는데 인부가 백명도 넘고 그저 일만하는게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무장들고 나가 싸울수 있게끔 군사훈련도 시키고있는 판이지요.》    《잘 하시네! 둔전제와 같은 둔공제를 하는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듣자니 거기에 계시는 이상설선생분은 를 조직하고는 일본천황께 힐책하는 서한까지 보냈다더군요. 정말인지? 그분이 을사조약이 늑결되니 분해서 자결하자구해서 소동을 빚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선생도 그 얘기를 들었구만.》    《들은게 아닙니다. 서울에 갔다가 제눈으로 직접본겁니다.》    《오 그렇소! 성피지악 명아지원(聲彼之惡 鳴我之怨)이라, 그 첫두글자를 각각 따서 조직을 내오고는 왜황을 질책했거니와 9천 9인의 련명으로 세계만방에 왜적의 범죄적 행패를 규탄하는 성명서도 전달했던거요. 나도 그때 서명을 했더랬지.》          한기욱은 이러면서 이상설이 이동휘(李東輝)와 같이 본래있던 신한촌(新韓村)을 갑자기 떠나 그로데꼬브로 옮겨갔다고 하면서 지난해의 11월에 로씨아 극동총독(極東總督) 보스타빈(BOSTABIN)과 교섭하여 산업장려와 교육보급을 목적으로한다는 조건밑에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勸業新聞”까지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있노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보탰다.    《거기는 한인촌락이 39개나 되고 동포도 8,000여명이라니 군중의 지지만 받으면 뭐나 하기가 좋지. 그분은 지금 이종호와 이범진 두분의 의연금을 갖고 신한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해볼 타산까지 하는걸 보면 보스타빈과 관계가 매우 좋은 모양이더군.》    서일은 아 그런가 하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는 해아밀사건으로 정부가 일본의 사촉에 못배겨 어리석게도 그를 사형에 언도한 일을 상기하고 웃었다.     한기욱이 유인석은 크게 맥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910년 5월 15일에 이범윤, 이상설, 정재관 등 지사들의 간청으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裁)로 추대된  그였지만 일거에 조국탈환을 도모하였으나 여의치않다는것이였다.    유인석은 문인 백삼규(白三奎), 김기한(金起漢), 장덕중(張德中) 등 세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여 대총통이 된 원세개와 정부요인에게 서한을 보내 韓中共同抗日을 권고해봤다. 그러나 회답은 서운했다. 내용은 찬성하나 국력이 미약하니 시기상조라는 대답이였다.     《로인이 정세를 파악못하시는군.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언제...》    서일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채 말했다.    원세개는 내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도 모르고 아직도 사대주의사상을 버리지 못해 외국의 군사력을 빌려는 유인석의 어리석음에 그는 한숨이 나갔던 것이다.       마을밖 늪에서 오리들이 갈갈거리고 흰 갈목은 바람결에 한들한들거렸다. 만주에 와서 두 번째 맞는 가을이다.    (일본은 살아있는 천황을 신처럼 만들어 모시게 함으로써 야마도민족을 정신적으로 결집(結集)시키고있다. 우리는 왜 檀君皇祖를 우상으로 하여 배달민족을 묶어세우지 못하겠는가. 라철이 노린것은 이것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권의 “三一神誥”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 있어야할것이고 해석이 있어야 할것이고 또한 다른 교와 같지 않은것이 무엇임을 비교로써 밝혀내야 할 것이다. 교리가 명백히 안겨올 그때면 그것을 따르려는 자의 신앙심은 자연히 굳어지게 되고 여럿을 한 사람 한 마음같이 뭉치게 하는 응집력(凝集力)이 생기게 될 것이다.)    서일의 깨달음은 이러했다. 그는 나도 이제는 대종교를 신봉해야한다, 그리고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동포 전체를 이에 결집(結集)시고 그 기초상에서 대일무력항쟁을 조직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리라 도슬려 마음먹었다.     며칠후 서일은 박기호와 함께 홍암대종사를 만나러 화룡으로 가는 한기욱을 따라나섰다. 박기호도 여직 대종교를 신봉하지 않고있었는데 라철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만나보고 서일과 같이 입교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셋은 용정을 지나면서 박찬익한테 들리였다.    서일은 자기가 그지간 번역한것을 그한테 주면서 이것은 근근히 “三一神誥”의 “原序”와 “御贊”만 번역한것이요 그나마 초역이다 보통문장과는  달라 경전인것만큼 번역이 제대로 되자면 교리를 깊이 연구한 기초우에서만이 가능하니 그저 참고로나 하고 그대로는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박찬익은 그러리라 대답해놓고 자기도 홍암대종사를 보러 가겠다면서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가 공업학교의 학생전부를 이끌고 대종교를 신봉한것은 홍암대종사와 백순도형(白純道兄)의 지도하에 된것이라 알려주었다....    한편 백두산에 天祭를 지내고나서 和龍縣 三道構 靑湖에 교당을 신설하고 곧 이어서 산북지사(山北支司)를 두어 그곳 교인들을 거느리게 한 라철(羅喆)은 백순(白純), 강우(姜虞)와 함께 주위의 여러곳을 돌며 포교를 하고나서 다시 청파호에 돌아왔다.    때는 음력 8월 15일 곧 추석날이였다.    백순은 초휘(初諱)가 락현(樂賢)인데 1864년 4월 26일 忠淸南道 公州邑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크면 비상한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31세에 동학란을 당하여 대세를 달관(達觀)하고 일본유신력사와 서양력사, 지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구입하여 전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공주읍에다 농공은행과 보명학교를 설립했고 강경읍에 농공은행지점(支店)과 보화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니 호서일대(湖西一帶)의 교육과 경제발전에 바친 그의 기여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는 46세 나던 해인 1909년 4월 21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후에 참교(參敎)로 피선(被選)됐다.    다른 한사람 강우(姜虞)는 초휘(初諱)가 석화(錫華) 또는 석기(錫箕)인바 1862년 6월 27일 忠淸南道 夫餘郡 場岩面 長亭里에서 태여났다. 그는 7세때부터 본적지의 의숙(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업하였고 34세때부터 성진, 길주, 경원의 감리(監理)를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정월 15일에 대종교를 신봉하여 2년만인 신해년(辛亥年) 정월 15일에 지교(知敎)로 된 것이다.          라철, 강우, 배순 이 세 거물급 인물은 삼도구 안산에 오르고 있었다.    《강서리가 내려 유하현이 재해라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백순이 문득 남만 유하현의 교도와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근심했다.    《회영이도 있구 시영이도 있구 동삼이도 있잖은가. 경학사가 어련히 해결해나가잖을라구.》    강우가 그들을 믿어 하는 말이였다.    《동만 여기까지 재해면 어쩔번했을까. 이 류랑민족이 다가 곤경을 치르지 않게 된게 참 다행인가봅니다. 가마히 우에 계시나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라철은 檀君皇祖가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주송(呪誦)하고나서 강호와 물었다.    《왕청으로는 언제쯤 가면 좋을가? 요즘 그쪽의 시교정황을 몰라서 답답...》    《한승묵이랑있으니 제대로 되겠지. 한데 듣자니 그곳서 중광단을 세워 민심을 끌고있는 서일이가 아직 입교도 안한 사람이라누만. 그 사람이 우리 대교를 몰리해하고 그러는거아닌가?》    《인자 뭐랬소. 입교를 안했다니, 서일이가?》    《아마 그러는거같애. 대사는 그를 아시오?》    《보진 못했어두 안지야 몇해되지. 그럴 사연이 있어서.》    라철은 얼굴에 웃음을 그믈그믈 지으면서 이쯤 말해놓고 그가 왜 아직 입교도 안했을가 궁리하다가 래일 당장 왕청으로 떠나자했다.    그와 친밀한 교우인 강우와 백순은 대사가 왜서 서일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갖고있는지 그 원인을 미처몰랐다. 라철이 알려주지 않았던거다.    산상에 오르니 불어 오는 건들바람이 뺨을 스쳐 기분이 상쾌했다.    만주로 건너와 그 사이 포교를 열심히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만에 달하는지라 신심이 생겨 기쁘면서 심정이 한결 거뿐해진 세 사람은 각자 산자운(山字韻)으로 한시(漢詩)짓기를 비기면서 이날을 즐기였다....     한편 한기욱이 대동한 일행 4명이 삼도구에 도착하니 추석이 지난지 한주일만인 양력 10월초. 그들을 마침 만나게 되었다. 네 사람은 우러러 경모하고싶은 분들을 대하자 몸가짐을 바로하고 국궁재배(鞠躬再拜)했다.    그들을 면목아는 사람은 오직 박찬익뿐이였다. 하여 그가 동행한 세사람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자네가 서일이였구려!》    라철이 어깨를 다독이면서 반겨맞아주니 서일은 감개무량했다.    《소인은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서일의 말에 라철은 고개만 끄덕이였다. 그 끄덕임 그 표정이 그러면그렇겠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박찬익이 서일몰래 “三一神誥”의 부분적인 번역고를 갖고와서 홍암대종사에게 바치는것이였다.    (저치가 저건 왜 갖고와서 바쳐? 원, 사람이...)    서일은 민망스러워 그를 힐끗 가로봤다.          《서선생이 번역한거란말이요?... 본래 시교를 해야 할 사람이로군!》          라철이 번역문을 보고 칭찬하니 서일은 송구스럽고 거북했다.    《건데 왜 여직 입교를 안하오?》    《방금 말씀을 올리지 않습디까, 가르침받자구요. 받아만주시면야...》    《어련히 그러잖으리. 하하하...》    라철은 다시한번 어깨를 다독이면서 기뻐했다. 그리고는 서일이 “重光團”을 세운건 과연 잘한 일이라면서 대오를 크게 발전시킬 것을 희망했다.    서일과 박기호는 宗師와 大兄 세분의 비준과 많은 교인들의 환영속에서 마침내 입교했다.    미신적인 색채를 담습한 종교여서인지 입교절차며 순서가 번쇄하고 까다로우면서 또한 신기하기도했다. 그러나 그래도 입교자는 찍소리말고 쫓아야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본래 이모양으로 되어진 것이였다!    입교자는 입교의절(入敎儀節)이며 봉교과규(奉敎課規)를 비롯한 모든 것을 알고 그대로해야했다. 그래도 즐겨 신봉하려는 사람이 날따라 많아가고 있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지식인들은, 애국지사들은 700여년만에 다시금 중광한 대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의 바람이 무엇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고 찾아오고 있었다.     아홉글자가 씌여진 지패(紙牌)가 북쪽벽에 봉안(奉安)되였다.    서일과 박기호는 숭엄한 분위기속에서 서사(誓辭)를 했다.           維       開極立道 4369년 壬子 8月 24日 不肖子孫 徐 一, 朴基浩 謹誓告于.       大皇祖聖神 伏惟       聖靈在上 善惡禍福 儆示天解 終身服膺 望敢改易       有渝此心 甘受罪罰.      뜻인즉은 대황조성신앞에 엎드려 삼가 알리옵니다, 성스러운 신령님이 하늘에서 살피시거니 선악과 화복을 경계해야 함을 이 몸이 다하도록 받으리라면서 이를 감히 어기고 마음을 달리먹는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것이였다.    서일이나 박기호나 다가 대종교의 미신적인 색채가 없이 꾸며진 봉교과규(奉敎課規)가 맘에 들었다. 그것은 입교한 후 매개 교인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있었다.    그것을 조목별로 라렬한 것을 보면 이러했다.      1) 奉敎人은 서로 화목하며 우애하되 患難相救하고 哀慶相問하며 한집안의 형제자매같이 지낼것임.    2) 奉敎人이凡有婚喪에 必告神廟하고 만일 廟遠하면 自家에서 神位를 設行하여 附近敎友들이 會集協辦할것임.(酒食供饋로써 主家에 貽弊말며 贈品賻儀로 래빈에게 忮望치말고 煩禮를 取消하며 簡便을 爲主함)    3) 奉敎人이 生男生女하면 반드시 告廟命名할것임.    4) 奉敎人은 서로 鬨鬪爭訟치말며 만일 疑結不平之事있으면 敎兄에게 請하여 公平한 判決을 請하고 반드시 服從할것임.(만일 重要한 事案일  때는 多數敎兄의 處決에 服從할것임.)    5) 奉敎人은 無論男女하고 文字를 解得치 못하는 者는 마땅히 國文을 先習하되 만일 貧窮無暇者에게는 不得强行할것임.    6) 奉敎人은 서로 侵奪과 欺滿과 侮辱과 誣陷과 誹謗치 말것임.    7) 奉敎人은 荒飮, 賭博치말며 貪財, 好色치 말며 剽竊,竊盜치말것임.    8) 奉敎人은 流言飛語를 믿지 말며 恐怯怨尤를 품지 말며 남의 過惡을 드러내지 말며 瑕疵를 의논치 말고 遙邪左道와 符讖巫卜들의 方術을 가까이 말것임.    9) 奉敎人은 반드시 本分을 지키고 삼가 宮靈을 좇으며 賦稅와 徭役에 各蓋其務할것임.    10) 奉敎人은 家傳의 舊物과 國傳의 古蹟을 반드시 重視 하고 現行의 法制와 通俗의時宜에 또한拘滯치말것임   11) 奉敎人은 居內出外에 반드시 愼口寡言하며 高聲喧囔치말고 靜肅端嚴으로써 爲主할것임.   12) 奉敎人은 敎門]을 빙자하여 事端을 일으키지 말고 敎衆을 빙자하여 世論에 다투지 말것임.   13) 奉敎人은 비록 敎外人이나 域外인을 對하여도 溫恭謙和로써 相對하고 결코 輕侮와 岐視가 없을것임.   14) 奉敎人은 本國古來의 忠烈, 英豪의 神明을 모두 崇敬할 것이요 비록 他國의 賢聖 및 敎門들도 또한 敬待할 것임.   15) 만일 本敎를 독신하는 사람이 廣見益智를 爲하여 他敎에 入敎하여도 不禁할지오 또 他敎에 卽入한 자가 本敎에 願入하면 곧 許可할지니 대개 한배검의 寬弘하신 大道를 仰禮하여 異端을 不攻함. 비록 域外人라도 本敎에 願入하면 도한 許可하여 다 敎友로써 同視無間으로되 入敎한지 15年未滿이면 敎理를 宣傳하거나 敎務에 參與하는 權利가 없고 비록 만 15年뒤라도 國籍을 不移하면 本敎 職員의 選任은 不能함.(但 高句麗 및 渤海의 舊疆內人은 此規를 不準함.)   16) 만일 敎門을 凌辱하거나 한배검께 漫語를 用하는 者가 有하면 誓死必爭하고 或 因此로 廢命傷身하면 崇其節義하며 恤其妻子할것임.    17) 奉敎人은 敎規를 嚴守할것인바 如或犯戒면 當有罰則하니 一曰 勸告, 二曰 警誚, 三曰 停敎, 四曰 黙敎 (罰有細則).            18) 봉교인은 修道持戒를 爲重模範者는 當有賞法하니 一曰 敬待, 二曰 襃章, 三曰 特選, 四曰 古經閣參務.(賞有細則)   19) 追後의 諸般儀式 및 規程을 自古經閣으로 隨時增刪하고 卽宜 통지하여 一體 遵行케할것임.        《이건 학생수칙보다 더 세심하고 엄하게 째여졌는걸! 미처 생각지를 못했어. 술잘마시고 고성을 잘 지르던 천묵이 왜 그 버릇을 뚝 떼여버렸는가했더니!...》    박기호가 서일이와 입교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 느낌이긴 하네만 이곳까지 와서 입교하노라니 새로이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서 속으로 다짐하고 한배검님앞에 아뢰였지.》    《뭐라, 그게 뭣인데?》    《우리의 입교를 기념해 여기다 학교를 하나 창설하자고. 어떤가? 명동에 쓰려던 경비중 200원을 이리로 옮겨다 쓰면 우선 해결은 될거야. 이곳은 장차 총본사가 일어설 성지가 아닌가. 이미 북지사가 창설되여 이곳 교도들을 관리하니 학교를 세우면 장차 그들이 발벗고 도와나설거야.》    서일의 주장에 박기호는 두손들어 동의했다. 그러면서 학교를 자기가 맡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서일이 속심바라던바였다. 박기호는 진취심있고 분발하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다. 서일은 자기를 믿듯이 그를 믿는다.    이리하여 청호에 새 학교가 창설되였으니 교명을 “靑一學校”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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