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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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1.
2011년 10월 12일 16시 32분  조회:5146  추천:1  작성자: 김송죽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1.

   서일은 내내 외지를 돌면서 포교를 하다보니 오래간만에 왕청의 덕원리로 돌아오게되였다. 말그대로 동분서주하는 몸이였다. 무릇 그의 발길이 가  닿는 곳이면 그곳의 동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의 시교를 듣기위해서였다. 

   大倧敎가 중광하여 몇해안되는 사이 중국의 만주와 로씨야, 조선의 북부지방의 80%에 달하는 동포 30여만이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여기에는 서일의 공로가 적지 않은 것이다. 동도교구(東道敎區)의 책임자인 그는 자기의 직책을 그야말로 착실히 해낸 것이다.

   한데 한가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에서 그믈그믈 피여나기 시작했다.

 
《우리 대교의 확대가 이같이 폭발적인데 왜놈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있을가, 그자들이 민족성이 고양됨을 그저 지켜보고만있자할가? 우리의 이 민족종교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을리 없다.  정녕 위협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어쩔건가?... 이 교가 자유롭게 발전하라고 내쳐두지는 않을 것이다. 일제는 이제 조선의 명맥을 끊으려할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단이든 다 쓰며 달려들 것이다. 》

   서일은 속으로 이어 부르짖었다.

  《왜놈이 탄압해도 대교는 지켜내야한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추수가 끝난 논판에서 농부들이 실걷이가 한창이였다.

  가을바람에 실려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우리 천조단군(天祖檀君)께서
   백두산에 강림하사 나라집을 창립하여
 
  
우리 자손에게 주시였네.

   거룩하고 거룩하다. 대황조의 높은 은덕 거룩하다.

  모든 고난 무릅쓰고 황무지 개척하사 良田美宅 터를 닦아 

   우리 자손들을 살리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높은 은덕 잊지 마세.

   모든 위험 무릅쓰고 악한 중생몰아내사 害와 毒을 멀리하여

   우리 자손들을 살리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크신 은공 잊지 마세.

   착한 도를 세우시고 어진 政事 行하시와 大東山河 빛내시고

   억조자손(億兆子孫)에게 복주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넓은 신화(神化)잊지 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대황조의 자손된 자

   우리 형제자매들아

   변치마세 변치마세 백년만겁이나 지내어도 변치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겨례 모든 인중(人衆) 우리 형제자매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으로

   빛내보세 빛내보세 대황조의 베픈 신교(神敎) 빛내보세. 

   

   마을안에 들어서니 족답기(足踏機)소리 우릉우릉 나고있었다.

  《 탈곡이 벌썬가보지! 모두들 솜씨 과연잽싼걸!》

   서일은 탈곡을 먼저 시작한 농가(農家)쪽으로 발길을 놓았다.

   그곳에 당도하자 족답기도 멈추었다. 마침 점심때였다. 

  《오, 시교사님께서 오셨네요!》

   모두들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 잘오셨습니다. 우리 함께 탁주나 나눕시다요.》

   집주인은 점심식사를 자기들과 같이 하자면서 서일을 기어히 잡아 끌었다. 하여 서일은 이날 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이웃끼리 호조조(互助組)를 내왔다. 농사일이 힘겨운 철이면 이같이 서로지간에 품갚음으로 해나가는 것이 어느덧 이 마을의 미풍인양 꽃피고 있었다. 

  《보시다싶히 올해도 우리는 대풍을 걷우었수다! 이게 모두 한배검께서 베푸신 덕이지요.》

   농부 하나는 이러면서 서로 손맞추어 일을 하니 힘드는줄도 모르겠다면서 대풍수를 맞이한 희열(喜悅)을 표달하고나서 계속말했다.

  《난 고향이 평안도 양덕이지유. 거겐 아직 내 형네허구 사촌들이  살고있수다. 이제 탈곡이 끝나는대로 편지해서  다들 건너오두룩해야겠습니다. 모여 살아야죠.>>

   주인역시 맞장구를 쳤다.

  《강원도에 내 처가편이 있구 경상도에 내 사촌형제들이 사는데 나도 이제 알려서 다들 이리로 이사를 오도룩 해야겠수다.》

   이런 말들을 듣고 서일이 물었다.

  《딱 그래야합니까?》

  《그래야지요. 모두 함께 모여 살아얍지요. 왜놈의 행세가 점점더 극심해 가는 판인데 그놈들의 치정하에 머리숙이고 고생스레 살게 뭡니까. 안그렇습니까? 그렇게 사느니보다 멀찍암치 피해서 눈꼴안뵈는데 모여사는게 퍽났지요.》

  《하긴 여기가 퍽 자유롭기는 합니다만은 사람 사람 다가 제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옮겨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 땅은 그래 누가 지미고?... 왜놈들이 최종바라는 바가 바로 우리들 선조의 땅을 완전히 저희들의것으로 만들자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자들이 밉다고 사람 사람 다가 제 고향을 버린다면야 그건 제 땅을 스스로 그자들의 손에 넘겨주고마는걸루 되지 않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모두다 건너오지를 말고 조국에 남아 고향땅을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합니다.》  

  《허허허. 듣고 보니 과연 그렇기도하구만!  거 ! 옳은 말씀이우다!》

   다들 도리있는 말이라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한가슴에 망국의 설음 가득하면서도 구국에 나설 맘은 없고 이국땅에서 안신처만 찾으면 그것을 고작인걸로 여기는 무각성자가 어찌 이들만이랴. 선전과 교육을 많이해야 할 일이였다.

   이날 저녁켠에 서일은 뜻밖에 초면의 손님 하나를 맞이했다. 윤기도는 치머리에 기름한 얼굴, 코등에 검은테 안경을 건 30세 지식인타입의 그 사나이는 자기를 안희제(安熙濟)라 소개하면서 3년전 불라디보스톡에 가서 약 반년가량 체류하는기간 마침 그때 그곳에 가있은 신채호를 알게 되어 그와 동지로 사귀게 된것이고 따라서 그때 신채호로부터 그와 서일의 교분을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노라했다.

   안희제는 1885년(乙酉) 8월 5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여났다. 그는 15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1903년(19세) 7월부터 3개월간 여러곳의 선비 30여명과 함께 명승고적들을 답사했고, 1905년(21세) 을사조약이 늑결(勒結)되여 조국의 명맥이 끊어진거나 다름없이 되어 갈 무렵 그는 비장한 심경(心境)으로 조부앞에 아뢰였던것이다.

   《국가가 망했는데 선비는 어디다 쓰일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인의를 실행치 못하면 도리여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것이니 래일 당장 서울로 가서 시대에 순응한 지식을 구하여 국민된 본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선현(先賢)의 도(道)라 할 수 있을진대 어찌 산간에 파뭇혀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있겠습니까?》

   그는 려장을 갖추고 상경(上京)하여 보성학교(普成學校)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재학중 1907년(23세) 국가와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을 교육함이 급선무라는 것을 느끼고 이해부터 구국교육운동에 앞장서게되였다. 먼저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하고 그 임원(任員)이 되어 학우회를 규합해나갔다. 일변 빈궁한 학생들의 학비를 보태주고 방학때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구국강연(救國講演)으로 민중계몽과 애국사상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지방유지들과 손을 잡고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명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 자신의 고향 입산리(立山里)에다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설립하였다. 1911년(27세) 이때 조국의 현실은 더욱 절망적이였는바 그는 이런 속에서 남몰래 두만강을 건너 불라디보스톡으로 가서 근 반년가량있으면서 속속 모여오는 망명지사들을 사귀였고 그들로부터 시사(示唆)를 받은 것이다.       

   그가 아직 신채호를 만나보지 않았다니 서일은 그한테 신채호의 근황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병과 가난으로 사경(死境)에서 헤매이는 그를 신규식(申圭植)이 상해로 데려갔던 일, 올해는 윤세복선생의 초청을 받고 봉청성 회인현으로 가서 그곳 동창학교의 교재로 쓰일 국사저술과 학교 경영에 참여하고있다는 등등.

    안희재는 아 그런가 그렇다면 쉽게 만나볼 수 있겠구만요 하면서 이곳에 와서 풍요로운 벌판과 동포들이 웃으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마음이 개운해진다면서 자기가 여기로 오면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냐고 물어왔다. 이에 서일은 할 일이야 많지 하고나서 안쪽에는 넓고 기름진 땅이 많으니 앞으로 동포이주민을 그곳으로 보내여 안주시키면서 개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달민족의 뿌리가 박혔던 발해고도(渤海古都)에다 대종교의 천진전(天眞殿)을 세우고 널리 포교를 함으로써 동포들에게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앙양시키고싶지만 당장 그렇게 할 실제적인 재력이 없으니 그저 맘속으로 그려 볼 뿐이라했다.     

   안희제가 이번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온 목적이 독립운동가들을 한번 만나 구국방략(救國方略)을 의논해보자는것이였다. 그는 왕청에서 서일을 만나 속심을 나누고 그가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을 보니 구국의 길은 오로지 독립투쟁으로만이 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니와 한편 또 그것을 현실화하자면 실제적으로  수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해야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모으리라 결심했다.

   안희제는 서일과 훗날을 기약하고나서 신채호를 만나봐야겠다면서 이틑날 봉천쪽을 향해 떠나갔다.

   사흘후 서일이 나도 이젠 떠나야지 하면서 화룡 동도본사로 가려고 서두르는데 마을의 장정 몇이 느닷없이 그를 찾아왔다.

  《서단장!  이거 큰일났수다!》

  《도교사님!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요?》

  《대체 무슨일게?... 차견히 말하시오.》

  《밀산서 온 자가 올부터는 소작료를 곱으로 내랍니다.》

  《아니, 무슨소린지...그거야 이미 계약이 돼있는게 아닙니까?》

   뜻밖이의 일이라 서일은 저으기 놀래면서 낯빛을 흐리였다.

  《어디있습니까? 가봅시다. 이 일을 계화분은 아십니까?》

  《알릴러 갔을겝니다.》

   서일은 신을 얼른 신고 나가보았다.

   마을복판에 여럿이 모여 옥신각신 떠들고 있었다. 살펴보니 계화가 벌써 와 있는데 밀산에서 왔다는 다섯은 마을 사람의 포위에 들어 눈을 지릅뜨고 있었다. 두 녀석은 손에다 대공계(大公鷄)라 부르는 자루가 반달모양으로 휘여진 구식권총을 빼들기까지 했다. 적대적인 팽팽한 대치라 무시무시한 긴박감속에 분위기는 자못 험악했다.

   마을의 어른 둘이 서일을 보자 겨끔내기로 공소해왔다. 

  《아니 저놈들이 글쎄 올부터는 소작료를 배로 내랍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있는가유. 땅을 개간해놓고 빼앗기운것만도 가슴아픈데 거기다 소작료를 배로 내라니 원. 이런 부도의한 놈 세상에 어디있는가유.》

  《쉰해도 넘습네다. 이 땅을 우리네 손으로 개간한지가. 원칙대루면 땅을 의례 되돌려야 할 놈이 오늘와서 그따위 소릴 죄치니.  귀신이 들어도 피똥 쌀 일 아니우. 미치고 창빠진 놈들이지. 어디서 저따위것들이......》

   나이 쉰이 다 된 허우대 큰 자가 당나귀모양으로 귀바퀴를 세우고있다가 낯짝을 서일쪽으로 돌린다. 오냐 네가 이 마을의 실권자냐 속판단을 했는지 조금은 례모를 차리느라 얼굴에 피웠던 살기띤 적의를 거두고 점잔을 빼면서 입을 여는것이였다. 

  《나는 밀산지주 송나으리 집의 청지기외다. 》

  《진작알고있습니다. 명함이 왕섭개이지요?》

  《오 그래 내가 언젠가 한번 와봤었지.》

   청지기는 대방의 이름은 서일이라는것까지 챙겨듣고 고개를 까댁였다.

   밀산의 송지주는 왕청에 대리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소작료를 교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년년이 그하고만 관계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송지주는 얼굴짝 한번도 내밀지 않거니와 올해는 대리인마저도 보내지 않고 갑작스레 청지기를 출면시키니 일이 범상치 않은것이다. 

  《올부터는 아마도 소작료를 곱으루 받아야겠어. 들었겠지? 소작료를 말이네. 그래서...》

  《이미 바쳐온것두 과분한데 그 이상 더 거둬들이면 우린 그래 뭘먹구 살란말인가?》

  《욕심도 무극하구나!》

  《아시당초 되지도 않을 소리!》......... 

  마을 사람들은 청지기의 말이 떨어지자 격분하여 왁작했다.

  다시금 공격에 든 청지기는 입을 열어 볼 짬도 없었다.

  서일은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키고나서 청지기를 향해 입을 다시열었다.

  《한마디 물읍시다. 기유의 협약을 고치는 리유가 대체뭡니까?》

  《그거야 사정이 달라져서지.》

  《사정이 달라졌다? 거 참 듣고도 모를 소리구만요.》

  《국정이 상전벽해인데 협약이 고정불일수야 없잖은가.》

  《뭐라? 국정이 변한다해서 협약을 고친다?  거 과연 그럴사한 리유군요. 개간자의 피땀을 혹독하게 빨아내는건 천도에 어긋나는 짓이란걸 모릅니까? 》

  《천도가 누구한테 통할가. 이게 송나으리의 땅인거야 명백하잖은가.》

   청지기는 태도가 여전했다.

   서일은 계화와 잠간동안 귓속말을 주고받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소작료를 더 올려서는 절대 아니됩니다. 그건 무리한것길래 우리는 절 때 바치지 않을것입니다. 원협약대로 해야합니다.》

  《그냥 그리하면 주인측은 리득이 별반없는데...》

  《착취를 더 못해서 손해란말인가?》

   계화가 참을수 없어서 한마디 까주었다.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우린 송지주의 무리에 응할 수 없습니다. 소작료를 올려받는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니까.》

   서일은 동을 달아 태도를 굳세게 보였다.

  《내 말을 무시하는건가. 이러면 재미없을 걸. 권하는 술을 안마시면 벌주를 마시는거야.》

   청지기는 침침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의 이런한 부르짖음속에는 위협적인 뉴앙스가 다분했다.

   그렇다해서 굽어들 서일이 아니였다.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억울함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구질구질 괴여올랐다. 조선사람은 남한테 제 국토를 잃은 민족이라해서, 이 세상에서 그 누구의 보호도 받을길이 없는 민족이라 해서, 무기력한 존재라해서 송지주는 깔보고 제멋대로 행패부리는것이다. 그따위 흡혈귀가  동포들의 피땀을 무한정빨아내게 할 수는 없다. 절대. 담판을 해야지.

  《이렇게 합시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의 생사에 중대하게 관계되니만큼 일언지하에 복종키는 어려운거니 송나으리와 만나서 얘기해 봅시다.》

   서일은 합리적인 건의를 하고나서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밀산 송지주집 청지기는 내가 와서 알려줬으면 다지 무슨말이 이리두 많으냐며 오만해진 얼굴에 쓰거운 표정이더니 콧방구를 힝힝 뀌였다.  그자는 순순히 들어주지 않으면 후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위협섞인 말을 한번 더 곱씹고나서 졸개들을 데리고 그만 가바렸다.

   서일은 화룡으로 갈 수 없었다. 그는 가지 않고 마을의 중견들과 함께 연구를 한 끝에 이틑날 계화와 더불어 끌끌한 중광단원 몇을 데리고 곧 밀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먼저 송지주와 단판을 해보자. 그래도 안되면 관부에 신소를 하자. 한데 관부가 옳게 도와줄가?... 맥을 쓰기나할가?...

   이때의 만주행정기구(滿洲行政機構)를 볼 것 같으면, 광서(光緖) 33년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이 길림성(吉林省)으로 바뀌고 선통(宣統) 3년 즉 1911년에는 그 아래에다 서남, 서북, 동남, 동북 등 4道를 두어 11府, 1州, 5廳, 18縣을 관할케했는데 밀산은 본래 녕고탑부도통(寧古塔付都統)에 예속되여 있다가 광서(光緖) 33년(1907년)에 갈라져 나와 밀산부(密山府)를 설립한 것이다. 한데 신해혁명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되었다가 대총통의 직위를 절취한 원세개(袁世凱)가 북경에다 지주매판련합독재의 북양군벌정권을 세운후 내전을 일으키면서 약법을 뜯어고치고 독재전제를 실시하고자 국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이해(1914) 5월 1일에는 <<中華民國約法>>(“民三約法” 또는 “新約法”이라고도 함)을  공포했다. 이 약법은 법률상 총통의 극대(極大)의 권리를 보장하는거다. 원세개가 처음부터 꾸어 온 황위(皇位)의 꿈을 실현키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는 성(省)을 다시금 장군부(將軍府)로 고쳐버렸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제를 이같이 자꾸 개변하는지라 바람부는데 따라 낯짝이 변해가는 구관료들의 손에 조종되고있는 아래의 기관들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불온한 세상이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착스런 흡혈귀로 변해버린 밀산의 송지주는 이런 기회에 터무니없이 소작농의 피를 더 짜내려고 드는게 분명했다.          

   서일 일행은 밀산에 가자 먼저 그곳 시교회의 사업을 자임하여 로고를 아끼지 않고있는 한기욱선생부터 찾았다.

  《송지주 그 녀석 욕심이 꿰져두 한심하게 꿰지네그려! 계약을 전혀 무시하고 제멋대로 소작료를 곱올려 받자들다니 원!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고 과연 속담그른데 없구만!》

   한기욱은 사연을 듣더니 한심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섰다.

   그는 지방의 관부같은건 찾아가봤자 헛짓이다 차라리 본인을 마주대해놓고 담판함만같지 않다면서 그들을 데리고 송지주를 찾아갔다. 한데 전날 왕청에 갔던 청지기가 한번 낯짝을 피끗 내보일 뿐 장원의 소슬대문은 꾹 닫힌채 다시열리지를 않았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도록 송지주는 물론 청지기마저도 얼굴짝을 내밀지 않았다. 담장안에서 사나운 개가 당장 달려나와 손님들을 요정낼 양 악패듯 짖어댈뿐이다. 아무렴 이렇게 까지 무례할수야. 무지막지한 랭대라 가슴속에서는 분노만 부질부질 괴여올랐다. 허지만 별수가 있는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는 수 밖에.

   《꼴을 보니 담판을 피하자는게 분명합니다. 다른수를 써야지요.》

   서일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한기욱은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시면서 지주장원을 가리켰다.

   《보시오. 장원이 대단하지요. 곰보딱지 송지주네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보니 권속이 아마 백여명정도는 잘 될겁니다, 여기서 행세를 하며 살아가자면... 항간에는 이러한 노래가 나돌고있습니다. <토비와 군대는 한형제, 바지를 바꿔입으며 살아간다네> 어떤가, 그럴싸하지요?... 내가 여게오자 들은 소린데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이 만주땅에서 버젓이 살아가자면 부모가 자식을 최소한 다섯형제정도는 출산해야한답디다. 왜 그럴가?  하나는 군인, 하나는 마적, 하나는 관리, 하나는 상업, 하나는 집에서 살림을 맡는다그거지. 이렇게 형제가 군인, 마적, 관리, 상업, 집주인으로 되어 엉켜 붙으면 불의의 사고가 생겨도 그렇구 이외의 변고가 생겨도 그렇구 상호 련계가 되어 맺히는 고리를 풀지요.》

   이것이 그래 동북에서 사는 한족(漢族)의 생존방법이란말인가!... 한심하지만 그럴 법도 한 일이라 모두들 그저 웃고말았다.

   인간세상이 대체 얼마나 넓고 생사변역(生死變易)하는 존재 또한 얼마나 될가? 옛기재에 보면 360항업(恒業)이라 했지만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어느때부턴지는 알수는 없지만 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는 비적(匪賊)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이 생겨난것이다. 이를 어떤 지방에서는 호자(胡子)라 했고 어떤 지방에서는 향마(響馬) 또는 봉자수(棒子手), 마적(馬賊), 강도(强盜)라 불렀다. 해를 거듭하고 대를 내려오면서 그 한무리도 점차 자라고 성숙해져 자체의 조직기구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의 두목을 내오는 방식이 있게 되었으며 종교와 신앙이 있어서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만의 언어와 규률과 풍속이 따로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 뚜렸이 자리잡은 것이다. 

   밀산(密山) 송곰보의 가원은 웬간한 황궁못지 않게 으리으리했다. 송곰보는 밀산(密山) 본토배가 아니였다. 10살나던해에 산동(山東)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자식인 것이다. 조상의 뫼(墓)를 잘써서인지 아니면 부지(敷地)가 좋았던지 어른이 되여서는 숱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된 것이다.  그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 보니 권속이 근 백여명에 이르었다.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령황지주(領荒地主), 점황지주(占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 등 세가지 부류였다. 먼저 임의로 한뙈기의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領荒土”를 비준받고는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많은 땅을 차지한 후 토지대장(土地臺帳)까지 가진 자를 령황지주라 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그의 친척들로서 땅을 많이 가진 자를 점황지주라했으며 권세로써 령세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 때 뢰물을 먹이고 면적을 적게 매기여 많은 땅을 차지한 자를 권세렴토지주라 했다.

   밀산의 송곰보는 첫째부류인 령황지주인데다 권세렴토지주의 성질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가 관리도 아닌데 무슨 권세가 있었겠는가?  물론 관리는 아니였지만 처남 둘중 큰처남이 현장의 부원이고 작은처남은 인원이 근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였던 것이다. 그자가 성명이 진사해(陳四海)였는데 그가 은근한 뒤심이 되었던 것이다.  토비인 제 처남 진사해를 밑고 행세를 부려온 것이다.   그리고 송곰보의  여러아들중  하나가  방량(方亮)무리의 새자(崽子)였던 것이다. 급이 없는 하졸토비를 가리킨다. 방량패는 인원이 30명도안되는 토비였다. 

    밀산과 멀지 않은 장광재령의 염왕산(해발1,291m의 대도정)에 위삼포토비가 있었다. 그 토비가 언녕부터 그의 재산을 노려왔지만 저들과 세력을 비기는  완달령(完達嶺)의 청보산(靑寶山)패가 감싸는지라 쉽게 손쓰지 못하고있었다. 피비린 마찰이 빚어내는 후과를 예측키 어려운것이다. 오늘 어우렁더우렁 지내다가도 밤자고나면 심기일전하여(心機一轉) 서로 살육한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하는 것이 곧바로 도비들의 사회였던것이다.

      서일은 밀산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의 이동춘선생께 이 일을 알리여 함께 대책을 찾아보자는데서였다.

   이동춘선생은 사연을 듣고 몹시놀랬다. 그는 이 만주에서 漢人의 지주는 성질이 서로 같지 않다면서 그 상황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서일은 작인들에게서 소작료를 이전의 배로 올려 받으려 드는 송지주가 정당한 면회요청마저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리면서 오만스레 뻗치니 이쪽에서는 그것을 눌러벌만한 막강한 권력이나 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였다.

   《지방정부나 세력은 다가 그런자를 감싸고 돌테니 전혀 믿을바가 못되오. 우리로서는 큰산을 등대는 수밖에 없다고 보오.》

   《도리있는 말씀입니다.》

   서일은 이동춘선생의 말에 동감하면서 한말(韓末)에 중국사신(中國使臣)으로 경성에 와있은 원세개를 다시금 생각했다. 원세개가 지금 대총통이 되어 행세하고있다. 이동춘선생은 그가 젊었을적 京城(서울)에 와 있을적에 그의 통역관으로 일을 보아주었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보다도 교분이 두터울테니 이럴 때 도움을 청하도록 내세움이 좋겠다 생각하고 찾아온 것이다.

   이동춘선생은 기꺼이 나섰다.

  《내가 원세개총통을 찾아가 보지. 아니, 우리 함께 가봅세. 서선생도 계화선생도. 미우나 고우나 그한테 구원을 청하는 수밖에 없네.》

   이틀날 셋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써갖고 함께 북경에 갔다.

   비대한 몸집을 화려한 총통복으로 가리운 원세개는 그들이 써올린 상소문을 보면서 숫많은 팔자수염을 몇번 실룩거리더니 종이에 몇글자적어 봉투에 넣어 합봉한 후 그것을 호명신(胡明臣)비서에게 주면서 동반하여 봉천의 군무독리(軍務督理)이자 길림, 흑룡강 두 군무독리를 겸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장석란(張錫鑾)에게 갔다주어 그가 처리하게끔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밀산의 송지주는 찍소리못했고 왕청 덕원리 마을은  이전 원모양대로 다시금 평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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