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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8.
대종교가 중광단을 창립한 후 소식이 널리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늘 끊지 않았다. 찾아온다해서 다 받아주는 건 아니였다. 전에 군인질도 하지 않고 의병대에도 다니지 않은 사람은 집에 가서 안착하고 농사나 지으라고 권고해서 되돌려보냈다. 일을 하기 싫어서 찾아오는 자도 없는건 아니였던 것이다.
어느날 현천묵이와 한고향인 함북도 경성태생이고 서일과도 면목이 오랜 최익항이 문득 왕청에 나타났다. 그도 합병이 되고 왜놈의 통치를 받기 싫어서 만주로 건너온것인데 나이가 27살되는 팔팔한 청년 하나를 데리고 찾아왔다.
초면의 청년이 자기는 지난해 가을에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성명이 김영숙(金永肅)이고 태여나기는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홍성군이지만 원적은 논산군 양촌면 림화리라 했다.
서일은 그가 고향이 어디고 어디서 태여났건간에 그보다는 7살때부터 15년동안이나 漢學을 수업했다니, 서울에서 중앙학교 사범과를 다녔다니, 졸업하고는 국내 소학교에서 1년간, 만주에 건너와갖고도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근무했다니 맘에 더 들었다. 그는 그가 경험도 있으리라 생각돼서 그보고 자기가 전해에 화룡현에다 대종교명의로 靑一學校를 하나 세웠는데 지금 거기에 박기호 부부가 가서 교편을 잡고있을 뿐 다른 사람은 더 없다, 그들 부부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우니 그쪽으로 가서 함께 근무해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김영숙은 시키는대로 하리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하여 서일은 최익항은 명동학교에 남겨 계화를 돕게 하고 김영숙은 화룡으로 보냈다.
서일은 후에도 지식인이 찾아 오면 거의 모두를 남겨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학교에 보내여 교편을 잡게했다.
현천묵이 심권과 박승익이와 함께 김영숙을 데리고 화룡으로 갔다. 김영숙을 청일학교까지 데려다주고는 셋이서 서만, 남만, 북만일대를 한바퀴 돌고 올 계획이였다. 서일이 전해에 계화와 함께 이미 근처의 여러 학교들과 관계를 맺아 놓아 상호 교류를 하고는있지만 그보다는 동포사회전반을 료해할 필요성을 각별히 느끼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럼으로써 대종교를 알리고 중광단을 널리 선전할 수도 있는 것이였다.
이동호군수가 환갑이 되어 대종교 교도들이 동원하여 쇠여줬다. 그러다보니 마을잔치가 되여서 온 덕원리는 명절기분에 잠기였다. 이동호군수말고도 중광단에는 년세많은 독신이 여럿있지 않은가. 이덕수, 김기석 두 양반과 이달문, 장사학, 장기덕이도. 그들의 환갑도 이제는 모두 교도들이 차례차례 차려주리라했다. 고마운 일이다.
이동호는 군수였지만 안일한 벼슬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나라를 구하려고 의병항쟁에 나선것이요 그 정신이 보귀하다하여 뭇사람의 존경과 애대를 받는것이다. 모두들 큰절을 올리여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날 큰 돼지를 잡고 소도 한마리를 잡아 차린 음식이 푸짐했기에 온 마을 주민과 500여명 중광단원이 다가 배껏 먹고 함께 즐기였다.
이달문이 탈을 만들어 쓰고 나와 곱새춤을 추었는데 젊은이들이 겯달아 단군조(檀君調)에다 “어하어하”를 덧붙이여 노래를 만드니 춤판은 한결 흥을 돋구었다.
백두산 돌아드니 (어하어하!)
단군유업 이아닌가 (어하어하!)
잃은 강토 찾아내고 (어하어하!)
죽은 인민 살리랴면 (어하어하!)
아마도 단군후예 (어하어하!)
일체 단단이로세 (어하어하!)
그들은 “해명가”도 불렀다. 그리고는 각가지의 아리랑이며 타령을 불렀다. 어떤이는 풍자와 해학적인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 부르기도 해서 춤판의 흥을 한층 돋구기도했다.
까마귀란 놈은 검기를 잘 검으니
구들장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까치란 놈은 맵시를 잘 피우니
기생년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제비란 놈은 날기를 잘하니
우편배달부로 돌리고 흥흥 좋다
빈대란 놈은 빨기를 잘하니
아편쟁이로 돌리고 흥흥 좋다
벼루기란 놈은 쏘기를 잘 쏘니
포수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황둥개란 놈은 문역을 잘 지키니
보초군으로 돌리고 흥흥 좋다.
대종교에서는 개천절(開天節), 어천절(御天節), 중광절(重光節)을 굉장히 쇠였다. (후날 弘範 및 規制가 나와서 명절이 개정, 가첨되기도 했다)
오락이 거진 끝나갈 무렵에 나이가 쉰을 넘어 지숙한 로씨아손님 한분이 덕원리에 나타났다. 방금 연해주에서 건너왔다는데 계화를 찾고 있었다. 성명이 정해식(鄭海植)이였는데 이달문과도 구면이였다. 계화도 이달문도 만나자 무척 반가와하는 걸 보니 면식이 오래거니와 친분도 두터운 사이같았다. 정해식이 옴으로 하여 중광단 “로인회”에는 성원 하나가 더 불어나게 되였다.
《나를 받아주소. 나도 한배검의 자식이외다. 로씨아서 우리 대교에 중광단이 일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우. 축하를 합니다.》
정해식은 이러면서 멀리서부터 등에 지고 무겁게 갖고 온 재봉침 한틀을 중광단에 기증했다.
《두고 보오만 이제 집체복장을 만들자면 손이 많이 딸릴텐데 이놈을 부리면 일을 많이 해낼겁니다.》
재봉침을 처음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해식은 녀인들 앞에서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계화는 이 재봉침 한틀을 기초로 하여 중광단에 복장대(服裝隊)를 세웠고 그 책임을 량현에게 맡기였다.
서일은 계화와 토론하여 돈이 만들어지는 대로 부림소와 말을 대량사들이기로 계획하고는 그 관리는 장기덕과 장사학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두들 스스로 “로인회”라 지어 부르고들 있는 년세많은 분들의 숙사에 매일 김지 이지 모여서는 초신도 삼고 메투리도 삼으면서 마음속을 터놓고 하고푼 이야기를 했다.
정해식이 여기에 가담하여서 화기를 한층 돋구었다. 그는 漢文은 물론이요 거기에다 일어, 로어까지 능란해서 웬간한 젊은이도 따라못갈 얻기 드문 수재였다. 하여 서일은 그를 존경하면서 아끼였다. 정해식이 어느날 그가있는데서 자기가 소시적부터 친분이 자별했던 사람은 김형구였는데 그는 작고한지 여러해되고 이제는 그의 남은 아들 둘중 큰것이 이름이 김좌진(金佐鎭)이요 그가 불행을 당하는 통에 자기 역시 곁불에 속을 태웠노라했다.
《걔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갖구는 2년 5개월이나 옥생활을 하구 올 9월달에야 풀려나왔수다. 만기가 돼서 석방을 했다길래 내가 가 보구서는 로씨아에 갔다가 이리루 곧추온건데 사람의 일이란건... 이제 또 어떻게 될지....》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졌길래 옥살이는?...》
이달문이 묻는 말에 정해식은 화를 내듯이 어성을 높이였다.
《죄는 무슨놈의 죄여, 돈을 꾸러 갔다가 안주니까 급하기는 하지 완력을 좀 부렸던가봐, 그랬다구해서 그놈들이 강도미수로 판결을 했지 뭐요.》
《오, 그렇구만!》
서일이 두만강을 건너 솔가도주를 하기 전날 “매일신보”에서 <<양반강도의 출현>>이란 보도를 본 기억이 나는지라 김좌진이 혹시 그때 신문에 났던 그 인물이 아닌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해식이 무릎을 치며 왜 아니겠소 바로 그이지 하면서 김좌진은 올해 나이가 25살이니 1889년(己丑)생이요 고향이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원 고도면 상촌리)라 했다.
《원체 믿그루부터가 다른거야. 그러니께 남만 못할거 하나두 없지. 저 병자호란때 태자를 모시고 강화성에 피난을 갔다가말이여 거기루가서 청군의 손에 점령이 되니 담배불로 화약고에 불을 달아 제 손자허구 같이 순국을 한 안동김씨 김상용이란 사람있잖아, 사책에 다 이름이 오른 김상용이 말이여. 좌진의 부친인즉은 그 사람의 10대손이 되는거요. 그리구 개화당사람 김옥균인즉은 좌진의 십일촌숙부가 되는거고. 이젠 다 찌그러진 가문이요만은... 팔간집 찌그러진대두 십년이라 그런 속에서 장사가 났거든. 위인이 비범해서 아무튼 큰일을 할 사람같으오.》
이 말에 서일은 생각이 돌아 혼자말처럼 뇌엿다.
《큰일을 할 사람이면 세상을 달관하겠지.》
정해식은 머리를 숙인채 이윽고 궁리하더니 김좌진의 신원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좌진이는 字가 명여(明汝)고 號는 백야(白冶)인데 4살적에 부친을 잃고 5살때부터 서당공부를 시작했던거요. 그러다 13살나던 해에 저보다 2살이 우인 오씨와 결혼을 한거고 제형 경진이가 일가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되니 가계를 떠맡은 거요. 걔가 생기기를 원체 장골이라 초립동일때는 군대놀음에만 정신팔더니만 대한무관학교엘 들어가 공부를 하고는 17살먹어 졸업을 한거요. 그 전에 나이 더 어렸을적에 벌서 가정에서 대연을 베풀어 부려먹던 가노를 전부 풀어줘서 아량을 보였단말이요. 유별이지, 2천석이 어디요. 그 많이 추수하던 전답을 골고루 다 나눠줘버렸단말이요. 온 조선땅치고 또 누가 그리했을가? 두해지나 19살나던 해였 으니 그게 아마두 1907년도였지. 다시 서울로 올라가 로백린(盧白麟)하고 손을 잡앗다나 함께 구국운동을 해보느라고.>>
거짓말이 아니였다. 김좌진은 홍성에 대한협회지부 기호흥학회를 조직운영하는 한편 김병학의 후원을 얻어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의 낡은 주택 80여칸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고는 친히 교장이 되어 신문화를 권장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그러다가 20살에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안창호, 이갑과 더불어 서북학회를 발족한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오성학교에 들어가서는 교감직을 맡았거니와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론산의 채기두에게 밀령을 내려 각지 의병규합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漢城申報”의 리사로 되였고 로백린과 손잡고 한성신문간부인 이춘수가 경영하는 경성고아원의 총무직을 맡아 사업하기도 했던것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실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고있는 사람이였다.
김좌진은 21살나던 해에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야창양행을, 신의주에 염색회사를 설립하여 국내외련락기관으로 삼고 활용하면서 동지규합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22살을 먹던 1910년 8월 29일, 국치를 당해서부터는 로백린, 윤치성, 신대현, 신두현, 박상진 등과 회동하여 광복운동을 위한 동지규합과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염줄을 론하고 전국을 누비였던 것이다.
이듬해인 1911년 2월 5일, 중국의 상해에 가 있는 로백린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10만원을 얻어 보내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김좌진은 부족금 5만원을 마련코저 먼 친척이 되는 부자(富者) 문중 김종근을 찾아가 사정했다. 그러나 그가 돈을 빌려주지 않으니 그만 완력으로 협박을 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강도미수죄로 판결이 내려 2년 5개월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것이다.
서일은 이제야 신문이 소문을 냈던 그 인물의 신분을 딱히 알게되였고 그런 사람과 손잡으면 광복운동을 잘해나갈 것 같아 기회가 있으면 아무때건 한번 만나보리라고 맘을 먹었다.
어느덧 1914년이 돌아왔다. 하건만 외지로 동포사회조사를 나간 현천묵일행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명동학교의 어떤 과목은 부득불 다른사람이 그냥 임시로 맡아 교수를 해야했다. 서일은 중국말훈련을 하느라 학생거의가 중광단원들로 구성된 중학반의 한어과(漢語課)를 자진맡은 한편 짬짬이 교리(敎理)연구에다 각고의 심혈을 기울이였다.
분공이 잘되였건만 중광단사업에다 학교사업, 계다가 대종교의 일까지 돌봐야 하니 서일을 그야말로 일심양역(一心兩役)으로 돌아쳐야했다.
이런 때에 생각밖에 기분잡치는 한가지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덕원리마을에 사는 한 대종교도가 라자구 태평구에 갔다가 그 마을 공교회(孔敎會)의 사람한테 모욕에 가까운 랭대를 받은것이다.
사유의 경과는 이러했다.
최근무라는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제는 성가할 나이가 되였다. 그래서 내외가 은근히 속을 끓이던 중 태평구에 혼처감이 있는지라 거기에 사는 고향친구의 아낙네를 중매군으로 내세우기로 하고 최근무가 제 아들을 데리고 선보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혼사말이 뒤틀어지고말았다. 상대측은 사위감이 끌끌해 맘에 드나 대종교도이니 섭섭하다면서 공교회와 사돈간을 맺으려니 궁리말라고 괴괴떼였던거다.
<<아니 이건 웬 소린가? 대종교도면 어떻고 공교회사람이면 어떻단말인가? 맘만 맞으면야 짝을 무어 살기마련인데. 전에는 우리가 이러지를 않았잖아. 척진일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거요?>>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신경이 일어설 일이였다.
이쪽은 혼사말을 왔다가 그만 코를 떼워서 멋없이 꼴불견의 랑패상이 되고만건데 언젠가 덕원리에 이사를 왔다가 대종교를 비난한 일로 교도들에게 쫓겨간 성이 박씨란 자가 돌아오는 이켠을 향해 속으로 잘코사니를 부르면서 가시돗힌 말을 내던지는 것이였다.
<<덕원리사람이 여기룬 왜 와? 거겐 새기감하나없는모양이지, 흥! 렴치좋네. 꿈은 무지개 같이 곱게 꾼다만 알아둬. 여긴 공교회동네라는 것을!>>
분명히 앙갚음이였다.
한편 덕원리에서는 이 일을 알자 격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젊은이 몇은 그자를 당장 때려죽이겠다면 몽둥이를 찾아 들고 덤벼쳤다. 사태는 험하게 번질것 같았다.
김기철로인이 엄하게 일깨워주었다.
《왜들 이러는거냐? 당장 걷어, 걷어치우란말이야! 우리가 왜서 고향버리고 이 만주까지 와서 고생하는건가? 동포끼리 물고 뜯고 싸우자고?... 이래서는 안된다! 절대안돼! 이건 심보고약한 그 녀석의 수작질인게 분명하지만 죽여버린다고 문제가 해결이 날건가? 이럴수록 정신차려야 해, 정신을! 알았어? 절대 맹동을 말고!》
조짐이 좋지 않았다. 대종교와 공교회지간에 반목이 생기고있었다. 금이 실리는건 무용하고도 안타가운일이라 이쪽에서 사람을 내놓아 조사해보니 그건 공교회의 문제도 대종교의 문제도 아니였다. 이사를 오려다 쫓겨간 그 박가의 소행이였다. 종교(宗敎)라 하면 그것이 성질이야 어떻던간에 밀잡아 락후한걸로 나쁘게 보고 공산혁명을 해야 진보한다느니 어쩐다는지, 앞길이 나진다느니 어쩐다는지 선전을 하고 다니는 그 얼간망둥이무신론자의 작간과 관련되였던 것이다.
서일은 이 일을 알자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해버리고 즉각 대회를 열고 지금의 형편에 주의주장이 맍지 않아 대결한다면 그것은 분렬을 의미함이니 분렬은 민족의 자멸을 자초할 뿐이다. 그러니까 덕원리에 사는 대종교도들은 절대 감정에 들떠 소홀히 행동하지 말고 각성을 높혀 제 진지를 지키라고 호소했다.
그렇다. 근본 목적은 조국의 원쑤 일제를 상대하여 싸우는것인데 그러지는 않고 이제 이 교파와 저 교파, 이 구역과 저 구역, 이 단체와 저 단체, 나아가서는 주의나 주장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기시하는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빌어먹을 당파심! 그것은 고약한것이다!
서일은 마을주민과 중광단원들에게 불순한 자들의 리간질과 분렬책동을 발견하면 기탄없이 적발하라, 그러되 개인감정으로는 대하지 말라, 자기부터 단속하여 불쾌한 충돌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라고 강조했다.
현천묵일행이 음력설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근 3개월간이나 밖에서 나돈 것이다. 그사이 고생을 한만큼 사회조사를 잘해왔다.
《우리는 남만과 서만을 피끗돌고는 북만 저기 흑룡강가에 까지 가보았소. 흑하에서 썰매타고 라북을 거쳐서 동강, 무원까지 가보고 부금을 거치고 가목사에 이르러 남으로 곧게 나와 해림, 녕안과 동경성에서 근 보름을 보내다가 온거요. 거기는 우리 동포들이 적잖게 모여서 살더구만.》
현천묵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형세도 보고했다.
그곳은 1912년도에 이미 된서리가 일찍내려 페농을 한데다 지난해에 또 된서리를 맞아 벼는 낟알을 한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련거퍼 재황이 든데다 경학사마저 해산되여버려 조치를 구해주는 데가 없으니 굶어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무마할 수 없는 비극이였다.
다시돌아가
《흑하에도 여름계절이 있을까, 너무추워 혼빵났소.》
현천묵일행이 흑하에 가서 받은 인상이란 추위가 혹독하다는 것 외에 별로 큰 인상이 없었다. 그곳에 가서는 동포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그대신 일본 사람은 적잖게 보았노라했다.
《그놈들은 어느새 기여들었는지 언녕 자리를 잡았습디다.》
심권이 하는 말이였다.
이 말 끝에 박승익이 동을 달았다.
《흑하진에는 왜놈의 약포, 리발소, 복장점도 있고 려관도 있습디다.》
《어디 그뿐인가, 기생집은 또 얼만데.》
《그래, 그래, 박선생은 숫자가 많은걸 빠쳤군. 그놈의 흑하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생집만도 저그만치 서른하나라나.》
현천묵이 이렇게 알려주고나서 일본놈은 좃밖에 모르는 종족이야 해서 모두 를 되게 웃기였다.
흑하진(黑河鎭)은 커다란 흑룡강을 사이두고 북쪽에 있는, 중국사람들은 해란포(海蘭泡)라 부르는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와 마주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아편장사와 록용, 산양각같은 약재장사꾼을 비롯한 각종 장사꾼과 금점꾼들이 모여들어 꽤나 번창했다. 동포가 그곳까지 들어가긴했지만 아직 정착해서 사는 이가 없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결과였다.
현천묵일행은 인심좋은 허저족 우씨(尤氏)를 만나 개썰매를 타고 흑룡강을 내려가 라북진(羅北鎭)에 들렸거니와 아래로 썩 더 내려가 동강진(同江鎭)에 까지 들릴수 있었다. 그 두곳은 다 동포가 몇호씩 살고있었다.
《안쪽에서 우리네 동포가 제일 많이 사는 곳은 해림의 신안진이더구만. 녕안에도 갔더랬소. 건데 거긴 2대 3대를 한족들 속에서 살아오다보니 풍속을 잃고 지어 이제는 제 언어마저 잃어가고있는 형편이니 말이 아니요.》
현천묵이 송화강이남으로 오다가 발해국(渤海國)유적지를 볼려고 녕안에 들리니 동포가 있으나 먹고 마시며 세월을 보낼 뿐 독립운동이라니 웬 소리냐며 개념조차 모를 지경 무감각하거니와 감정이 메말라있으니 과연 분통이 터질일이라했다.
그곳은 벌써 몇백년전부터 우리 동포가 살아온 고장이였다.
<<寧安縣志>>에 記載된 것을 보면:
“考淸室受命之初朝鮮人來歸化列入滿洲籍者如朴氏金氏王氏李氏皆著在氏族通譜”.“漢人之編入族籍者有張,李,高,雷160余姓. 高麗人編入族籍者有 金, 韓, 李, 朴等 43姓”
청정부는 1644년도에 조선사람은 벌써 17세기중엽에 녕고탑(寧古塔)일대에 와 살면서 만족에 귀화했다고 밝힌바 있다.
<<淸朝通志>>에 기재된 것을 보면 청나라초기에 만주씨족에 가입한 조선사람이 金, 韓, 李, 朴, 張, 傳, 柏, 洪, 崔, 劉, 黃, 罓, 楊, 陳, 文, 孫, 丁, 任, 尹, 宋, 徐, 車, 万, 江, 邊, 何, 閔, 林, 佟, 亙, 耿, 馬, 鄭, 曹, 郭, 沈, 方, 秦, 孟, 田, 幸氏 등 41성이였는데 그 중에는 벼슬을 한 사람도 있다고 밝히였다.
“韓氏: 韓云, 正紅旗人. 國初, 同弟韓尼來歸, 授二等輕車都尉. ...韓尼第四子那秦, 任黑龍江副都統”
1682년(강희21년), <<通文館志>>에는 또한 이런 기재도 있다.
“寧古塔副都統章京明阿納的父親幼時被朝鮮人虜去,聚妻生渠. 太宗時得父子還鄕, 而母未同歸, 今五十年父母俱已七旬, 原得團聚, 母子情難分, 要求朝鮮的慶興府將明阿納之母愛香交与其子”
이로부터 알수있는바 조선과 녕고탑지간에 일찍 래왕이 있었던 것이다.
1757년도에 이르러 녕안현의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는 조선족거주민이 약 4,000여명가량되였던 것이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의 10년간에 조선의 북부에서 력사에 보기드문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가혹한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분분히 월강하여 살길을 찾아 북만 깊숙이 들어왔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가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무가내니 언어불통인 그네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 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 조선의 이조정부에 넘기기까지 했다는 기록을 세상에 남기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도 실상은 헛짓이였다.
1626년의 <<강도회맹(江都會盟)>>이래 조선인민들은 장애가 있다하더라도 갖은 방법을 다해 료녕, 길림이나 혹은 연해주를 거쳐 북만으로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았던 것이다.
거듭드는 자연재해를 이겨낼 수 없어서, 거기다가 봉건통치배들의 폭정과 탐학을 받아낼 수 없어서 부븍불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등진채 멀리 멀리 이국땅에서 류리표박을 하는 사람, 살길을 찾아 헤매여야만 하는 이들의 슬픔인들 어떠하며 고통인들 또한 어떠했으랴!
현천묵이 조사기록을 내놓았다.
서일이 받아 보니 북만일대 동포이민상황이 일목료연하게 안겨왔다.
1867년, 한패의 조선 농민들은 로씨아의 블라고베쒠스크(해란포)에서 동북의 제일북쪽끝머리인 애훈의 바벨라하(法別拉河)와 대공하(大公河)류역에 까지 피해 가 살았다.
1882년, 함북도 경원군 송하면의 이창호일가가 훈춘을 걸쳐서 동녕 삼차구에 뿌리박았았다.
1886년, 세사람이 약재를 채집하느라 간도를 떠나 길림, 밀산 등지를 걸쳐 북만의 동쪽 우쓰리강연안 의순호(義順號ㅡ대화진)에 이르러 30여호를 데려다 함께 살았다.
1888년, 동녕현 고안촌에서 동포 20여호가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92년, 한패의 동포가 할빈에 자리잡았다.
1898년, 횡도하자와 고령자일대에 조선족이 사방 10리 땅을 차지하고 집거했다.
1898년, 연해주에서 건너온 한패가 우쑤리강연안과 목릉현일대의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봄에 와 가을이 끝나면 돌아가군하다가 마침내 신한촌(新韓村)에 정착했다.
《현유 북만인구는 총 1백 5십만정도. 그중 동포인구는 산재해 있는 상황이라 정확히 통계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1만 2천여명에 3천호가량 되는걸로 알고있소. 해림에 1,ㅇ32호 제일많고 그 다음은 녕고탑에 576호 되더구만. 로씨야에서 1900년 중동철도를 부설할 때 국내에서 모집되여 온 인부들이 3년간 일을 하고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수분하 등지에 남아 자리잡은거고 농사일을 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소. 두루 몇사람 만나도봤는데 이럭저럭 먹고는 사는데 동포가 그리워 죽겠다구하더구만.》
《제 동포끼리 즐기지도 못하고 살아가자니 그 얼마나 외롭고 적적할가. 되도록 한데 모여살게 해야겠는데... 포교를 널리하기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한배검님의 후더운 은총이 내리게 하기오.》
서일이 보고를 다 듣고나서 심정이 무거워 하는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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