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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9.
1914년도는 서일이 시교사(施敎師)의 의무를 리행하느라 바삐보내는 한해였고 따라서 그만큼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도해서 즐거움이 부푸는 한해이기도했다.
산간에 진달래꽃이 곱게 피고 뻑꾹새가 봄을 알릴 때 조성환이 선문도 없이 왕청에 나타났다. 가쯔라 다로오를 없애버리지도 못하고 거제도에 류배를 가서 1년간 갇혀 고생하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였다.
서일은 생사를 같이하는 지우의 만남을 무등 기뻐하면서 축간 몰골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파나기도했다.
《그지간 고생많으셨겠습니다. 저는 썩 늦어서야 선생님이 그같이 되신걸 알았습니다.》
《괜히 옆사람까지 시름겹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서일의 인사에 조성환이 되려 사과를 했다.
이홍래가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조선생, 언제 또 거제도에 가시렵니까?》
악의없는 놀림이 반갑다는 인사였다.
《내가 이제 가면 대마도엘 갈거우. 그래두 올건가?... 사람이 못나게. 그러다가 잡히면 어쩔라구. 난 진짜 거렁뱅인줄 알았지.》
조성환이 위험불구하고 자기를 보러갔던 이홍래를 담통이 불어난 미친사람이라 해서 모두들 웃었다.
《개는 무서워하는 사람을 무는거우다.》
이홍래는 언제나와 같이 배포유한 대꾸질이였다.
신팔균은 이름만 들어왔지 조성환을 처음만난다.
《내가 중광단원이 오백이 넘는다는 소릴 들었소. 군대식 훈련도 한다더구만. 그래 재미는 어떻소?》
《재미를 묻습니까, 닭걀삶은 물같습니다.》
《그리두 싱겁단말이오?》
《실탄련습 한번 못해보는 훈련인걸요.》
신팔균의 맥빠진 대답이였다.
《무장이 얼마나 되오?》
《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보시다싶이 신교련이 차고있는 저 닭다리(권총)까지 해서 모두 여섯자루밖에 안됩니다. 장총이 다섯자루지요. 그나마 말짱 퉈퉁(土銃)입니다. 중국사람들한테서 샀습니다. 삼팔식이니 벼르단이니 하는건 말만 들었지 난 아직 구경도 못했습니다.》
서일은 조성환에게 무기의 불비로 중광단은 지금 교육과 계몽에 중점을 두면서 도수훈련을 결부하는 수 밖에 없음을 말했다. 물론 무기는 구입할 수 있는것만큼 구하기에 노력하리라면서 지금갖고있는 5자루로는 경비를 서고있다고 했다.
조성환은 경비대를 조직할수있게 된것만도 대단한 일이라 치하를 했다.
서일은 중광단은 어쨌든 발전할것이라 신심있게 말해놓고나서 만주에서는 총보다 구하기 쉬운 것이 말인데 자기는 장차 기병대를 만들 계획이라는 것 까지 알려주었다.
《되겠지, 되구말구!》
조성환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서일이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옹골찬 사람이라는걸 그는 잘알고있는 것이다.
《김동삼이 나보고 서선생을 만나거던 안부를 전하라구 하더구만. 이젠 련계도 가지자면서. 거긴 모두들 잘있소.》
조성환은 통화현(通化縣)에 들려 지금 그곳에 있는 김동삼을 만나 며칠간 지내고 곧추 왕청으로 향했노라면서 귀바퀴를 세우고 들어둘 새로운 소식도 한가지 갖고왔다.
지난겨울(1913) 김동삼을 중심으로한 동지들의 발의로 독립투사를 길러내는 기관 하나가 새로 창립되였는 것이다. 그들은 인적이 뜸한 통화현경내의 소북차(小北岔)라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망망한 밀림의 심산절역(深山絶域)에다 백서농장(白西農場)이라 부르는 기관을 설치하고 지금 수십명의 청년건아들을 모집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속에 둔전제(屯田制)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주경야독, 둔전제ㅡ 들어보니 이쪽이나 그쪽이나 량쪽 다 형편은 똑 같았다. 중광단이나 백서농장이나 무장준비는 못되여서 실탄련습같은건 꿈도 못꾸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적으로 독립군의 력량을 배태하고있음을 의미하거니 얼마나 보귀한 존재인가! 인원수를 보면 왕청쪽이 훨씬 더많다. 서일은 무기만 갖출수 있다면 대오를 500명아니라 1000명, 2000명으로 늘이고푼 생각이 무럭무럭 났다. 든든한 후원이 있는것이다. 그건 바로 대종의 교도들이였다!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조성환은 우리의 광복운동은 만주와 씨베리아를 책원지로 해야한다면서 자기도 둔전제(屯田制)를 할 자리를 잡아야겠노라했다. 그가 안중에 둔 곳은 멀리 안쪽에 있는 오운현(烏雲縣)이였다.
《그곳으로 가시렵니까. 그렇다면 저하고 같이 떠납시다. 해림까지 동무해드릴수 있습니다. 저는 그쪽을 한바퀴 돌면서 시교를 해야겠습니다.》
서일은 해림, 녕안, 신안진, 동경성 등지에는 아직 포교가 되지 않아 대종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황임을 알려주면서 동포들의 잠자는 의식을 하루속히 불러일으켜야 하겠다고 했다.
이틀후 두사람은 행장을 차리고 북쪽을 향해 먼길을 떠났다.
해림에 이르러 조성환은 기차에 올라 할빈쪽으로 향하고 서일은 남아서 그곳부터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해림에는 소학교가 있었다. 서일은 학생들에게 나는 조선에서 건너 온 아무갠데 너의 부모님들이 꼭 들어둘 재미나는 얘기를 하러 왔네라 가서 알려 속히 학교로 모이도록 하거라 시켰다. 한편 선생들도 동원해서 회의를 소집케했다.
흰 베옷을 입고 목에 단주(檀珠)를 건 사람이 이 고장에 나타나긴 처음이라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서도 모일것이라 생각하면서 서일은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모든 인간이 다 깨닫거늘 오직 이 무리가 아득하고 온 누리가 다 즐기거늘 오직 이 겨레가 괴롭사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세검한님(三神上帝)”이신 우리 “한배(天祖)”시여! 거룩하게 다다르사 큰 복을 거듭주시오며 밝으시게 비취사 큰 도를 다시 베푸옵소서.》
이같이 빌기를 마치고 “三一神誥”를 번지는데 사람들이 정해진 교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학교선생 하나가 다가와 어느덧 반수이상이 모여 기다리고있으니 강연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했다.
모인사람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서일의 차림새를 보고 벌써 신기한 무엇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내는 조용했다. 옷을 정갈하게 입고 행동이 단정해보이는 젊은이 하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두손모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나서 입을 여는것이였다.
《선생님, 저는 전에 서당을 좀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서, 삼경을 읽어봤고 유문(儒門)에 놀라 점차 백가(百家), 구류(九流)의 글들을 읽어봤습니다만 아직도 깨치지 못한 것이 많고 갈래를 잡기도 힘듭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보니 진종대교를 크게 닦으시는 분같고 그래서 중생, 후학을 넓게 건지시라 믿어 반가운 뜻에서 설교를 들으렵니다.》
서일은 그가 말하는 품이 유식하고 진정스러워 친절스레 대했다.
《고맙소. 건데 별호는 어떻게 부르오?》
《저의 별호는 삼사생이라 부릅니다.》
《三思生이라 세 번을 생각한다?》
모인 사람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일은 젊은이의 공손한 대답을 듣고 목청을 다듬어 얘기를 했다.
《옛적 지나, 로나라에 계문자란 이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세 번씩 생각한 뒤에 행하더니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하기를 “두번생각함이 옳다” 하셨지요. 이것은 생각을 여러번 하면 유예미결하는 버릇이 생김을 경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용진성을 기르게 하심이어늘 이제 그대가 오래 유문에 있어서 성훈(聖訓)을 받들지 아니하고 이같이 별호를 지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젊은이는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름이 그 실상을 지나거나 실상이 그 신분에 넘치면 그것은 곧 참람(僭濫)이라 저는 본래 어리석은 머리로서 비록 옅고 낮은 이치라도 잘 모르거니와 더욱히 종교철학같은 것은 그 뜻이 너무나 아득하여 한울처럼 높은 지라 섬돌로써 오를 수 없으매 바다같이 깊은지라 말(斗)로써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데 이 교 저 교가 저가끔 횡설수설이 제가끔 “내가 옳다”하니 이는 까마귀의 암수(雌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믿는이들도 다 저의 교문만을 알고 감히 그 테를 벗지 못하니 이는 이른바 앵무새의 입내라 저는 그 뉘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뜻이 또한 한결같지 않으므로 무슨 리치를 생각하든지 처음에는 의심이 아니나는 것이 없고 다음은 믿음과 서로 다투다가 세 번쯤 생각한 뒤에야 겨우 믿음을 얻으니 이것은 저의 천성이라 다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계문자의 일을 본받아서 유문에 죄를 얻었거니와 요사이 미련한 무리들이 아무일에나 조심하지 않고 스스로 용감성이나 많은체하야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득 버리고 문득 취하면서 한마디로 결단함을 사나이의 능한 일로 알다가 만일 좋지 못한 결과를 얻으면 마치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물어 떼듯 하는 이도 많으니 저는 이것을 매우 미워합니다.》
서일은 웃었다.
《그대의 뜻인즉 매우 착하거니와 그대의 생각은 너무 고집스러우니 나는 그대의 앞길을 위하여 아까와하노라.》
《어찌 이르심이니꼬?》
《세번 생각하는 것이 어찌 천성이리오. 한얼(天神)께서 사람을 내리실 때에 누구는 두텁께 누구는 엷게 하는것이 아니라 성품과 목숨과 정기 이 세가지는 참되고 가달이 없으며 어짐과 지혜와 용맹 이 세가자가 온전해야 치우침이 없으며 오직 그 받은바 품질이 한결같지 못함으로 세상 물욕에 끄을리면 “뭇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아야만 “밝은이”가 될지라 그런즉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다 별사람이 아니요 오직 그 마음을 괴롭게 하야 자기의 본 성품을 닦아서 우선먼저 깨달았을 뿐이니 우리도 마음만 두고 보면 반드시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가 될것이로되 우리가 먼저 구하지 않으면 또 뒷세상에 나고 알음이 넓지 못한 까닭에 옛날 성철(聖哲)을 스승할 따름이다. 그러면 나의 아는 바가 공자, 로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들만 못한 까닭에 그들의 도덕, 지식을 본받아서 스승으로 섬기려니와 만일 그네들과 비슷하다면 그 도덕, 지식을 비교하야 벗을 함도 옳고 또 그들에게 지낸다면 그 도덕, 지식을 더욱 넓히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니 이것은 한얼께서 밝게 정하신 진리요 한울나라(天國)에서 길이 쓰이는 공법(公法)이라 이 진리, 공법에는 한얼과 사람이 한가지요 너와 내가 다름없거늘 이제 그대가 이름을 판박아 두고 아교기둥에 비파를 타듯이 생각을 고치지 않다가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야 하루아침 거울속에 흰 털이 비취는 때이면 공연히 한가지 재주로써 나무털기(株)를 지킨 탄식이 저절로 나갈것이니 어찌 여러번 생각하면서 헤매든 까닭이 아닐가! 이것이 나의 아까워하는 바이로다.》
삼생은 감사하다면서 말했다.
《저는 공부없는 사람이라 소견이 적고 생각이 아득하야 못된 버릇을 일삼다가 오늘에야 선생님의 밝으신 말씀을 들으니 어두운 거리에 초불을 만난 듯이 방향을 대강 짐작할만하거니와 저같은 사람은 본래 배워도 곤난한 뒤에야 겨우아는 무리라 어찌 나서 아는 성철을 바래오리까?》
《나서 아는것도 그 깨닫는 재주가 뭇사람보다 좀 다를뿐이요 사물에 대하야는 반드시 배운 뒤에야 아는것이라 그러므로 공자같은 대성으로도 례락(禮樂)을 남에게 물으셨으며 또 늙어서 주역(周易)을 읽는데 가죽책심이 세 번 끊어졌다하고 로자같은 상진(上眞)으로도 주나라에 주하사(柱下史)가 되야 지식을 넓히셨고 석가같은 대각(大覺)으로도 설산에서 6년동안 또 가야산(伽倻山)에서 3년동안 도를 닦으셨고 예수의 청고하심으로도 사막에서 40일의 금식기도를 하셨고 마호메트의 활달하심으로도 산굴에서 10년동안 잠심(潛心) 수도를 하셨으니 이른바 성철(聖哲)이란 이들도 힘써 닦은 뒤에야 크게 깨달은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항상 말씀하기를 성철도 별사람이 아니라 하노니 그대로 잘 닦으면 곧 성철이요 성철도 아니닦으면 또한 뭇사람일 것이다.》
삼생은 명심해 듣고나서 꿇어 앉아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참 어리석은 병을 다스리는 정문침이요 아득한 길에서 인도하는 지남차라 저같은 불초로도 또한 깨닫는 길을 찾게 되오니 천만번 감사하옵거니와 다시 묻잡노니 대교에서는 진리를 풀어 놓은 경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삼일신고로 진리를 강구하노라.》
《삼일신고의 내용은 어떠합니까?》
이에 서일은 쭉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은 모두가 마음이 동하여 혹은 흥분하고 혹은 격동하기도했다.
이날의 시교도 잘되여 소문이 퍼져 여러 마을이 다투어 그를 모시였다.
서일은 삼사생이라는 젊은이와의 대담을 서언으로 작성하여 훗날 유명한 <<三問一答>> 경전을 저술하게 되었다.
서일은 신안진에서 방금 포교를 끝마치자 뜻밖에 로씨아에서 건너와 지금 밀산에 자리잡은 한고향 사람 한기욱을 만났다. 그도 포교를 하러 녕안에 왔다가 서일이 이 지방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어른님께서 마침 잘오셨습니다. 저하고 같이 발해국유적지를 보러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때의 5경 15부, 62주를 다 돌수는 없어도 상경룡천부야 지척에 있으니 왔던 걸음에 들려 구경을 하고감이 마땅하지 않을가요.》
《거 참 좋은 생각이군! 그렇게 하지.》
이리하여 두 사람은 곧 녕안의 동경성으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발해국의 수도 상경룡천부터인 것이다.
성은 둘레가 수백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가운데 자리잡았다. 성의 남쪽에는 아름다운 경박호가 있으며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목단강은 성의 남쪽과 동쪽 및 북쪽으로 감돌아흐른다.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관개에 편리할뿐만 아니라 주위가 산으로 둘러막혀서 자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자연의 경치가 뛰여나게 아름다운 이곳에 수도를 정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력사기재에 보면 성은 굉장히 크게 쌓았는데 외성, 궁성, 황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길이가 40리가 좀 넘는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거기에 흙을 씌웠는데 지금 남아있는 부분을 보니 그 높이가 3m나 되었다. 외성 성밖에는 성벽에 잇대여 해자를 둘러팠다. 외성에는 동, 서 두 벽에 각각 2개씩 남, 북 두 벽에 각각 3개씩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대칭되는 성문을 련결하는 큰 길과 그것과 평행하는 길들을 내서 성안을 바둑판모양으로 정연하게 갈라놓았다.
발해는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하여 성을 많이 쌓았다. 돈하에서 녕안에 이르는 목단강류역에 특히 많이 집중되여있거니와 그 밖의 지역에도 많으며 발해의 령역으로서 변방에 속하는 고장에도 있는 것이다. 서일은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는 청해토성역시 발해국이 쌓은걸로 알고 있다.
상경룡천부의 옛 유적을 보노라니 두 사람 다 감회가 새로워진다.
《이웃나라들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우면서 228년간 존재하였던 선조의 나라,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사라져 버린 발해국의 력사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군요. 한때 그처럼 강성했던 국가를 쇠퇴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였겠습니까, 중요한 요인은 바로 내부모순이였지요. 그것이 격화되니 나중에 거란에게... 본래는 고구려, 신라, 백제 그 세 나라가 통일되였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중도반단으로 끝난 것은 전적으로 외세의존에 매여달린 신라통치배들의 사대주의 정책의 죄악적후과가 아닙니까. 제민족내의 분렬과 배신이 아니였다면 고구려는 망하지도 않고 고독한 발해국이 생기지도 않았을겁니다.》
《서선생은 발해력사를 잘 아시네!》
《일본학자가 쓴 글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외려 발해국의 력사에 대해서 더 관심하고 흥취를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서일은 많은 사람이 삼국력사에 대해서는 좀 관심하나 발해의 력사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거니와 지어는 잊고있음에 유감스러웠다.
력사를 잃으면 민족을 잃고 민족을 잃으면 나라를 잃고마는 것이다.
발해는 지난날 배달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하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봉건국가로서 698년에 건국한 이래 228년동안 존재하면서 옛고구려에 대등한 넓은 령토와 강력한 국력을 가진 강대한 나라로서 <<해동성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력을 떨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료동지방 고구려류민들의 줄기찬 투쟁이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인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전의 고구려국가의 귀족이며 유능한 군사지휘관이였던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였다. 이들은 력사적친선관계에 기초하여 말갈인의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 거란인부대와 련합하여 당나라군대와 맛서 싸웠다.
투쟁이 승리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돌궐족이 당나라를 도와 쳐옴으로 시국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거란군의 두목은 당나라군에 투항하여 부대가 붕괴되였고 말갈인부대도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붕괴되고말았다.
이때 고구려군 총지휘자였던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패전으로 분산된 말갈군을 다시 수습하고 집결시켜 력략을 정비 보강한 다음 당나라군을 유인하여 천문령에서 거의 섬멸하여버렸다.
698년초에 있은 천문령전투는 고구려사람들의 국가재건ㅡ발해국창건과 직접 관계된 의의깊은 전투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한 고구려사람들은 원래의 지향대로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료하를 건느고 다시 송화강상류 휘발하를 건너 부이령산줄기의 동쪽기슭 동모산에서 일단 자리를 잡고 정착하였다.(오늘의 돈화현 오동성자리가 있는 곳. 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수도를 옮긴거다.)
대조영은 이해에 <<진국(振國)>>의 창건을 선포했다. <<振國>>이란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떨치는 큰 나라라는 뜻인데 713년에 나라이름을 <<渤海國>>으로 고치였다. 발해란 이전의 고구려때와 같이 멀리 서남쪽 발해연안까지도 그 국력이 미칠 것을 희망하여 붙인 이름이다. 진국ㅡ발해국의 제1대왕으로 된 대조영은 지난날 력사에서 <<高王>>이라 불리여왔다.
고구려사람들이 새로 세운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진국이라했다가 발해라 고쳤지만 국내외적으로 보통 <<고구려>> 또는 <<고려>>라는 옛이름을 그냥 관습적으로 쓰는 일도 많았다.
발해국이 창건됨으로써 고구려사람들은 다시 옛땅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더는 이웃 고구려류민들과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
발해국의 종족구성은 주로 고구려사람과 말갈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말갈인이 수자적으로 많기는 하였지만 발해국안에서 고구려사람들의 한갖 동맹자였을 뿐이다. 지위와 역할에서의 차이는 벌써 발해국창건을 위한 투쟁초기부터 조건지어져있었던 것이다.
발해사람들 자신은 언제나 자기들을 고구려사람이라고 하였지 그 이외의것이라고 한 일은 없다. 727년 발해 제2대 무왕 인안 8년에 왕은 바다건너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국의 창건을 알리고 그와 국가관계를 시작하는 첫 국서에 명확히 밝히였다.
<<발해국은 고려(고구려)의 옛령토를 회복하고 부여(옛부여국)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고있다.>> “속본일기” 10.
일본왕도 이를 승인하고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냈다.
<<귀국이 고구려의 옛령토를 회복하고 이전 고구려때와 같이 우리 나라(일본)와 국교를 가지게 된데 대하여 매우 축하하는 바이다.>> “속본일기” 10.
다음해인 758년, 발해 제3대 문왕 대흥 21년에 왕은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자기를 직접 “고려국왕 대흠무”(흠무는 왕의 이름)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일본왕의 답서도 “고구려국왕”에게 보내는 답서로 되었다. 이는 발해나 고구려나 완전히 뜻이 같은 말로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771년 대흥 34년에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곧 <<천손>> 즉 <<하느님의 자손>>이라 선언했다. 이 사실은 자신을 고구려왕실과 같은 혈통으로 간주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말기의 학자이며 관리였던 최치원은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편지와 다른 관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해국에 대해서 말했다.
<<고구려의 잔얼(남은 무리들)이 모여 태백산(백두산) 북방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옛날 당나라 태종황제(고종)가 고구려를 쳐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장수 조영의 성은 대씨인데 그는 고려(고구려)멸망후 패하고 남은 군대를 모아 태백산 남쪽(북쪽을 틀리게 썼음)에 나라를 세워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말갈발해)
발해는 침략전쟁으로 령토를 확장하려 든 거란에 의하여 멸망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배달민족의 국가였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중국력사책들에서도 발해멸망후 20년내(945년)에 발해력사를 처음으로 전반적으로 쓴 <<구당서>>발해전의 정확한 력사기록들을 토대로 하고 다시 그것들을 똑똑히 따져서 발해를 옛고구려의 계승자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어리석은 통치자들이 딴심보를 품고 력사를 뜯어고치는 고약스러운 버릇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리찬 가을밤에
은하수 유난히 빛나고
나그네 고향생각나
시름 더욱 깊어가네
생각은 그지없이
옛고향 달리건만
다시 듣는 다듬이소리
매여둘곳 전혀없네
차라리 잠이 들어
꿈이나 볼가 하되
하그리 긴 수심에
잠인들 차마 오리.
발해국의 시인 양태사의 이 시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듬이소리를 듣고 고국이 그리워 지은 것이다.
서일은 언젠가 당나라말기의 시인 온정균이 자기 나라에 왔다간 발해사람의 시작품을 두고 “그대가 남긴 시구들은 오래도록 중국땅에 전하여지리라” 라고 한것과 언젠가 일문잡지에 일본의 스가와라 미찌자네가 배정이 일곱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시재라 하여 <<칠보지자>>라 높이 평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발해시기 유명한 시인들이 많았건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전해지는 것은 양태사, 왕호렴. 배정 등 그 몇사람의 시뿐이다.
서일이 녕안과 해림일대에서 포교를 끝마치고 왕청에 돌아오니 그사이 신채호가 왔다갔다고 현천묵이도 계화도 알려주는것이였다. 서일은 그를 보지 못한게 대단히 섭섭했다. 신채호는 윤세복의 초청을 받아 봉천성 환인현으로 와서 그곳 동창학교의 교재로 쓸 국사저술에 착수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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