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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3.
토요일오후라 교정은 조용했다. 월요일이 돌아와야 다시 들끓는 것이다. 함경도(咸鏡道)에서 맨 북쪽에 위치한 여기 경원(慶源). 교원수만도 30명이 넘는 경원학교(慶源學校)역시 유지의숙(有志義塾)모양으로 이날은 반공일로 정해놓아 오후에는 교학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완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일은 지금 근대적교육을 수용(受容)하여 개혁의 진두에서 달려가고있는 이운협선생을 본받고 있었던 것이다. 공맹(孔孟)의 도(道)와 성리학(性理學)만 숭상하던 때는 이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우고있었다.
어둠이 지나면 새날이 밝아오기마련인 것이다.
이동호군수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경성(鏡城)에 가 공부하고 돌아와 고향의 교육건설중임을 량어깨에 떠멘 서일은 자기에게 차례지는 그 하루반의 휴식일을 절대 헛 보내려하지 않았다. 안해를 대동하여 거리에 나가 상점들을 들려보는가 아니면 교외로 놀이를 가는가 아니면 집에서 낮잠을 자는가.... 다 아니였다. 시간만있으면 신문을 뒤지고 사회의 실태를 연구하는 것이 이제는 굳어진 그의 습관으로되여버린 것이다. 구학문(舊學問)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고 신학문을 연구하는데로 방향을 돌린 후로 부패한 관계(官界)와 봉건적인 인습타파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자기 삶의 가치는 기우려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것이다. 그러다보니 소시적에 품엇던 그 현실적이 못되는 벼슬꿈따위는 구중천외로 집어던진지 오래다.
신문원고 한편을 쓰자고 보니 글감으로 잡아둔 신문을 교장실 자기의 서랍안에 넣어두고 가져오지 않아 그는 그것을 가지러 학교로 갔다.
신문을 찾아 들고 교문을 나서려던 그는 공교롭게도 늦게 퇴근하는 박기호와 맞띄였다. 유지의숙을 졸업하고는 서일과 함께 고향의 군소재지 경원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으면서 중견이 된 그였다..
《비과를 하다보니 늦었다. 거기는?》
기호가 건늬는 말이였다.
《난 신문가지러 왔다가는 길이다.》
이 말에 기호는 머리를 기웃하더니 다시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신문인데?....》
《3월 23일자 <황성신문>이다. 이 신문에 사장 장지연이 순검청에서 문초를 당하고, 같은날 <제국신문>이 일어지(日語紙) <한성신보>의 기사를 번역해서 전재한 사건으로 사장 이종일을 비롯한 그 몇사람이 경무청에 구속했다고 보도했네라.》
《그걸 다시보자고? 그 보도는 나도언젠가 본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서?...》
《언론인들이 무리하게 탄압받았으니 이거어디 참아낼 재간있어야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일개 애독자로서 정부의 부당함을 힐문하고 통박해놓고푼 생각이 무럭무럭 나는구나. 그래서...》
《존경하는 서교장선생!....》
박기호는 소시적부터 허물없이 지내온 친구간인지라 유모아적인 음조로 불러놓고는 집요하게 보기만 할 뿐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박선생, 왜그래?》
《생각은 옳네만 그런 문장을 신문이 선듯이 실어줄가? 고려나해본건가?.... 마땅히 먼저 그것부터생각해야지. 안그래? 그리구 그 보도가 지상에 발표된지가 언젠데? 지금은 고문정치를 하면서 일체 반정부 언론은 허용하지 않는다는걸 알겠지? 그러니 내 생각에는.... 》
들어보니 과연 주춤하게 된다. 그런 글을 어느 신문이 감히 실어주겠는지 서일은 곰곰히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순간적인 격정에 들떳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몇년전에 벌써 경부서리 조병식(趙秉式)이 황성신문 전사장이였던 남궁억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경부(警部)에 출두케 하여서는 자기 신문에다 일본과 로씨야가 한국을 분할(分割)하련다는 번역기사를 실었다하여 트집잡고는 구류하고 수도간(囚徒間)에 입감시켰다가 나중에는 평리원(平理院)으로 이송하여 재판놀음까지 한 일이 있은 것이다.
언론인을 부당하게 탄압한 필화(筆禍)가 이정도였다.
7월 24일(1904)에 정부는 경찰훈령(警察訓令)까지 발표했다.
(1) 치안을 방해하는 문서를 기초하거나 또는 이를 명령한 자에 대해서는 그 문서를 압수하고 관계자를 처벌한다.
(2)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한다.
(3) 총포, 탄약, 병기, 화구, 기타의 위험한 물품을 사유(私有)한 자에 대해서는 이를 검사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압수하고 그 소유자를 처벌한다.
(4) 우편, 전보를 검열하고 의심나는 통행인은 검색한다.
신문, 언론계가 이제 어떻게 될가? 독자가 이에 관여한다해서 해결이 날 문제가 아니였다. 훈령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나서서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달걀로 백운대를 치는 격이 되고말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는 방법이 없을가?
학교정원을 금방 나오니 뒤에서 부르는 소리 났다. 돌아다 보니 정민호어린이였다. 요즘 고향갔던 안해가 갓난 둘째딸 죽청(竹靑)이를 둘쳐업고 돌아오게 되니 제 아버지와 함께 교구 어디에 세집을 맡고 살아가고있었다.
《너로구나! 아버지는?》
《신문팔죠.》
기호는 보동(報童)의 머리를 뚱겨주면서 시문을 팔아도 공부는 잊지 말라고 했다.
《그러겠어요.》
아이는 일면 응대하면서 눈치를 살피더니 접은 종이를 서일의 손에 제꺽 쥐여주고 가버렸다.
얘가 뭘 이러느냐며 주고 간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일본의 고문정치를 규탄하는 격문(檄文)이였다.
<<현재의 불행한 형편으로 말하면 일본이 말로는 고문의 명색을 가지고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다. 소위 10부의 대신이라는 것은 벌써 일본정부로 화하여버렸다. 군대를 개혁하는 일같은 것을 제마음대로 하니 일찍이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다.>>
《나라정부는 부패하고 백성은 자각이 없지, 군대는 보잘 것 없는 약체이니 강폭하고 잔인한 왜놈의 횡포를 감당할 수 없게 됐구나!》
기호는 그 격문(檄文)을 보고나서 얼굴빛이 심각해지면서 탄식했다.
서일은 과연 그렇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과 일본, 중국과 일본, 로씨야와 일본을 비기노라니 자연히 일본이란 이 나라는 그 본신이 별다른것이 있기에 감수가 새로워지는 것이였다.
일본은 개국(開國)이래 구미(歐美)와 래왕한 것이 이제겨우 20~30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후진국이 선진국의 새문화를 흡취하는건 이를데 없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진 이 조선이 걸어온 걸음을 랭정히 되새겨보면 깨닫게되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자국(自國)을 스스로 <<선비의 나라>>로 여겨왔다. 그러면서 제민족의 인품을 자랑했다. 한가지 례만들어도 알수있는 것이다. 임진왜란때의 일이다. 일본에 사야가라는 무사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무사수업과 더불어 글도 열심히 읽어서 문무를 겸비한 무사로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사야가는 가토 기야마사(加騰淸正)의 좌선봉장이 되어서 조선에 상륙했다. 그런데 진격하는 도중 한가지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게되였다. 그것은 어떤 농부의 일가족이 피난을 하는 장면이였다.
수천명의 왜군이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데도 농부는 늙은 어머니를 업고, 농부의 아내는 보따리를 이고 아이의 손목을 잡은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산길을 올라가고있었다.
그 장면은 사야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저렇게 어질고 착한 백성을 해치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야가는 며칠밤을 고민한 끝에 자신을 따르는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해 온 것이다. 사야가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해외파병에 의문을 품고 적극적으로 조선측에 투항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역사이래 타국민(他國民)을 해치지 않는 것은 조선사람의 성품(性品)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자랑으로여길만하다. 풍속습관도 그렇고 문화예술도 그렇고 자비할것은 없는 것이다. 하건만은 왜서 오늘에 이르러 또다시 <<왜>>의 유린을 받는가? 원인은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왜>>라는 말은 조선과 중국이 고대로부터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일본측이 자신을 <<일본>>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7세기초부터였다.
왜구는 14세기초부터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역을 습격하여 식량을 략탈하고 주민을 랍치하는 등 해적행위를 일삼던 집단이였다. 그들은 주로 일본의 북규슈(특히 쓰시마, 이키, 사가현 북부)와 세토나이해의 어민과 호족이 무장한 선단(船團)이였다. 14세기후반기부터 왜구의 활동은 더욱더 격심해졌는바 그로인해서 조선(高麗)과 중국(明)은 받은 피해가 컷던것이다. 하여 피해를 입은 두 나라는 그 진압에 고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차례 아시카가 막부에 단속을 요구하였지만 막부는 효과적인 정책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전기 왜구)
15세기가 되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남북조를 통일시키고 조선, 명나라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는 등 일본의 국내의 사정이 안정됨에 따라 왜구의 활동이 감소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명나라가 바다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여 일본과의 무역관계가 끊어지자 중국해안지역을 습격하는 왜구의 활동이 다시활발해진 것이다.(후기왜구)
대개보면 사회와 사물을 대함이 타인 것을 맹목모방하기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장점과 특색을 발휘하는것이 더 나음직하다....모방이 지나치면 결과적으로 삼류의 구미국가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민족은 한무리의 삼류 구미인으로 돼버려 열종(劣種)의 서양인을 더 보태줄 뿐이다.
서일은 조선을 훨씬 앞서서 발전하고있는 일본의 통치체계에 대해서 한번 연구해보았다.
구라파도 그렇고 중국도 그러했다. 국내에서 일단 혁명이 일어나면 황제국왕은 머리가 날아나고 조대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은것이다. 대화개신(大化改新)도 명치유신(明治維新)도 다가 천황의 권위를 빌어 발생한 일장의 사회변혁으로서 결과적으로 황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한즉 따져보면 일본인은 만셰일계(萬歲一系)의 국체(國體)를 유지해 오면서 시대가 진보함에 따라서 한걸음 발전해 온 것이다. 일본사람 처럼 황실을 대하는 국민은 아마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서일은 이점을 깨달았다.
군사고문 노쯔는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재정고문 메가다와 짜고 재정을 절약하기 위하여서는 군대를 축소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의 군대를 대폭줄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1만 6,000여명밖에 안되던 조선군대가 그 절반인 8,000명으로 줄었다.
서일과 기호는 격문의 아래를 계속해서 읽어보았다.
<<새로 정한 약조가 160조나 된다고 하니 무슨 음모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으나 이것을 차례차례 실시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말 것이다. 왜놈의 침략수법의 간교성은 끝이 없으며 조선의 백성은 놈들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시기의 형편이야말로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서 나를 죽이게 하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땅파고 막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한 대렬에 충당하기를 원하고 절름발이와 벙어리, 귀머거리도 역시 백배나 기운을 내고 있다. 오랑캐로 변하면 사는 것이 죽음만 못할 것이다. 의리(義理)를 바로하면 승리(勝利)가 그안에 있다. 원쑤 오랑캐를 섬멸하여 없애고 풍성한 공업(功業)을 이룩하자!>>
거리 사람들이 갑작스레 와야와야 술렁거려서 웬 일인가고 보니 털빛이 누런 싸리개 한 마리가 이쪽으로 마주 달려와 옆을 잽싸게 지나더니 방향을 꺾어 다른 골목으로 냅다달아나고 그 뒤를 한 사나이가 쫓고 있었다.
《그 개를 이리루 몰아줍소!》
과연 누렁개는 마주오던 행인에게 쫓겨 다시금 뒤돌아서는데 자기를 바투 쫓아온 사람을 보자 허연 이발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쫓는 사람은 손에다 자루긴 쇠집게를 들었다. 그것으로 개의 목을 집어 끌수있게 만들어진 물건이였다. 전문 개장사군이 아니면 개백장이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개는 절망에 빠져 꼬리를 사타구니에 사르면서 구원을 바라듯 낑낑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금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대기도하면서 비장한 결사를 벼르기도 한다. 허지만 구경에는 사람이 이기게 마련이라 쇠집게를 쥔 사나이는 그것으로 개의 대갈통을 갈겨 어리치게 해놓고는 목을 제꺽 집는 것이였다.
《에그 불쌍해라, 네놈은 잡혔으니 끝내 죽게됐구나!》
숱한 행인이 끌려가는 개를 보면서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해서 개의 이야기 한 켤레를 엮어냈다.
《짐승가운데 개만큼 인정있는게 어디메있겠소.》
《그렇구말구. 들불을 꺼서 주인을 구해냈다는 얘기를 못들었소.》
《어디 그뿐인가 뭐. 호랑이같은 맹수까지두 물리치구 주인을 구했다누만.》
《은공을 아는 개면야 그렇지. 둔갑을 해서 주인을 해치려는 동물이나 아니면 귀신을 물리쳐 주인을 구한다는 얘기두 있잖어.》
《어디 그뿐이요. 개가 주인의 억울한 죽음을 관청에다 알려서 범인과 시체를 찾아내서 주인의 원쑤를 갚아준 일도 있다오.》
《글이나 옷자락을 물고와 주인의 죽었음을 알리기도하구 주인이 위험에 빠진걸 개가 지키고 사람에게 알려서 살아날 수 있게 한 일도 있다는구만.》
《자기를 길러준 주인이 죽으니까 따라서 죽는 개까지도 있다니 정이 어느만큼들었으면 그 지경이 될가.》
《인정을 아는 개야 세상에 쌔쿠버렸어. 거 못들었는가, 주인없는 사이 어미개가 주인 아이기 제젖을 먹여 살려냈다는 얘기를.》
《영민한 개는 문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기도 한다오.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찾아가게 하기도 하고... 눈먼 주인의 길을 인도하기도 하고...》
《옛말인지 아니믄 지어낸 얘긴지는 모르겠소만 개가 밭을 갈아주고 죽었는데 개무덤에 나무가 자라나 주인이 보화를 얻었다누만.》
《과연 좋은 개를 길렀지. 그게 글쎄 얼마나 큰 득이요. 개가 그런다구서 죽으면 발복할 명당을 찾아준다는구만.》
《건데 지금 왜놈의 충견이 돼서 알찐거리는 놈들은 어째야 할고?》
《워낙 그따위 개를 싹 다 잡아 튀를 해치워야하는건데.》
순사 둘이 웬 사고가 난줄로 알고 달려왔다.
모였던 사람들은 잡담을 거두고 그만 흩어져버린다.
시중심에 이르러 두사람은 갈라졌다. 집이 있는 동북쪽을 향하여 걸음을 놓고있던 서일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정민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신문 잘 팔립니까?》
서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밤자고나면 새소식이 나오는 덕분에 잘팔리우다.》
《또 무슨소식있래?...어디봅시다.》
서일은 그가 주는 신문을 받다 펼쳐보았다. 9월 19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였는데 그 신문에서 나라와 겨레의 위험한 처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있었다.
<<마치 끓는 물속에 있는 고기와 같으며 불타는 대들보에 앉아있는 새와 같은 처지에 있다.>>
과연 지당한 묘사였다. 당전 조선의 형세는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건데 민호 걔가... 격문은 어디서 난겁니까?》
서일은 그의 아들이 방금전에 격문을 제꺽주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일이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서선생 그걸 다 봤습니까? 봤으면 다른사람도 읽어보게 넘겨주시오. 그 글은 내가 얻은겁니다. 서선생보시게 갖다주라구 시켰지요.》
《그러다가 애가 순경에 잡히기나 하면 어쩔라구 그럽니까?》
《내가 걔보구 다른사람알면 재미없으니 눈치봐가며 조심해 넘기구 오라고 시켰지.》
《그래두 그렇지. 자칫 경칠라구...》
《다른 사람하구는 접촉안합니다. 개는 서선생한테만 갔다줄겁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서일은 이제 앞으로도 자기는 격문들을 직접 받아볼수 있고 신문파는 이 사나인즉은 바로 격문송달자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제 속으로만 이같이 짐작했을 뿐 더 캐묻지 않았다. 남의 신원까지 구태여 알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서일은 그가 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읽어보느라니 지난날 자기가 여러 신문에 실린 소식보도들을 보고 알았거나 귀동냥을 해서 알고 리해하게 되연던 가지가지 형세들이 새삼스레 상기되였다. 하여 그는 걸음을 다시놓으면서 몇가지 머리속에 떠올렸다.
언젠가 영문자(英文字)신문의 글을 번역해 실은것인데 이러했다.
<<일본 사람은 한국에서 다대한 가치의 인삼을 몰래 캐여서 일본상인을 시키여 국외로 수출하며 조선 사람의 원통한 호소를 도리여 징벌하는 등 일본사람의 정책은 당초부터 정치적으로 조선사람을 압박하고 경제적으로 조선사람의 산업을 착취하려는 것이다. 항상 밝히던 한국독립은 일본 사람 자신이 침해하고 파괴한 것이다.>>
이뿐이 아니였다. 로일전쟁 이래로 많은 군대를 조선땅에 주둔시켰을 뿐만아니라 그 병력을 배경으로 조선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한편 가치많은 리권을 점점 잠식하고있었다. 전신(電信), 우체(郵遞)의 통신기관을 차지하고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삼림을 벌채(伐採)하여 포태를 건축하였으며 도수장(屠獸場)을 탈취하고 서북 각 군의 세금을 징수하며 한국관리를 구축(驅逐)하고 사인(私人)을 대체하였으며 헌병으로 조선의 경찰을 대신하였다. 그러면서 집회를 금지하고 철도용지, 군용지를 널리 차지하며 군수용과 역부(役夫)를 강징(强徵)하였다. 한국정부 각부에 일본고문을 배치하여 해관세와 탁지부(度支部)의 재정을 관할하고 조선사람의 군사비를 삭감하며 인민의 토지를 략탈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직접 목격한 사람이 경성에 나타나 사람들앞에서 일본군인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농민은 토지가 곧 생명이지유. 그것을 빼앗기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유. 그래서 안내놓겠다구 반항을 하면 그자들이 어떤짓을 하는지 아우? 당장 <넌 아라사놈의 간첩이다> 하면서 잡아가둔단말이우. 가두어서는 어떻게 하겠소. 고형을 하구 살육을 하는데 남자를 죽일적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그위에 머리를 달고 새끼로 발을 묶어 끌고 다니기도 하고 혹은 사지를 십자가에 얽어 매고 총으로 쏘는데 일부러 한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하여 죽이고 부녀를 죽일적에는 목을 매여 길옆에 달아놓아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게하는거요. 살인마가 뭐겠수. 그런 일본놈들이 바로 살인마지.》
그 말을 듣고 치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참으랴?
3천리강산에서 반일의병이 재다시일어나고 있었다.
올 4월과 5월사이에 서울부근에서 먼저였다. 그것은 서울이 일본의 무력이 집중되였고 중요한 군사활동지대라는 것과 관련되였다. 일본군은 주둔지역을 꾸린다면서 서울주변 특히 룡산일대 농민들의 토지를 마구 강탈하였고 농민들의 살림집들을 닥치는대로 허물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만행이 서울과 린접한 일대에 알려지게 되어 려주지방의 백성들도 손에 무장을 들고 일어나게되였다. 뒷이어 경기도 지평지방에서도 반일의병대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이 일대에 대한 경계와 경비를 강화하면서 사소한 반일적인 움직임에 대하여서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웠다. 4월 25일에 의병대는 충청도 경부철도회사 하리파출소를 습격하였고 27일에는 경의선 오류동부근에서 일본군인 몇을 처단하였으며 5월 10일에는 경인선의 소사에서 맞붙어 싸우기까지 했던것이다.
일본군의 조선진입은 철두철미한 침략이였다.
평안도 반일의병대의 투쟁은 유린석의 지휘밑에서 새로벌어지고있었다.
조국강토와 민족이 왜놈의 발에 다시금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만있을수 없었던 평안도지방 백성들은 일본군의 활동을 파탄시켜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해야 한다면서 반일투쟁을 다시벌리였다. 그들은 갑오농민군과 같이 보국안민(輔國安民), 창생구제(蒼生救濟)를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뜻에서 자신들을 자칭 동학도(東學徒) 또는 동도(東道)라고 하면서 도처에서 반침략반봉건투쟁에 나설 것을 맹세하는 회합을 가지였다....
전해에 이 기(李 沂), 김창강(金愴江) 등 선생의 서문(序文)이 실려있는 "학규신론(學規新論)"이 출간되여 서일은 그것을 읽으면서 연구했다. 저서는 교육사상(敎育思想)이라는 측면에서나 유교사상(儒敎思想)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되는것이였다.
무덥지 않은 가을철이여서 학생들이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였다. 어느날 한 총각선생이 제가보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들고와 보라고 주는것이였다.
《교장선생님, 이것 좀 보시오. 격문을 실었습니다.》
《어디보기오.》
서일이 받아보니 갖배달된 9월 22일자 신문이였는데 거기에 과연 홍천에서 홍가성을 가진 평민의병장이 발표한 격문이 실려있었다.
<<....근래 왜놈들이 우리 나라 깊이에까지 침입하여 먹을것과 입을 것을 략탈하고있으며....자유로운 생활을 할수 없게 하였다. 얼마간이라도 혈기와 의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이것을 앉아서 보고 죽음을 기다릴수 있겠는가. 요즘 서울, 려주, 지평 및 본군 여러곳의 의병들은 함께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해보려고 맹세하였으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본 의병장이 10년간 힘을 길러온 것은 실로 오늘과 같은 때를 위해서였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함께 홍천군 남면 신주막에 모여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란다.>>
《백성이 자각적으로 다시금 궐기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구나! 한데 이번에는 제발 실패하지 말고 마감까지 싸워 이겨줬으면 고맙겠구나!》
서일은 한마디 뇌면서 속으로 축복을 빌었다.
한데 평민백성도 자각하고 이같이 다시금 일어나건만 나라의 국록을 타먹고 사는 관리들은 제 량심을 팔며 지탄과 비난받을 노릇만 하고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희들의 리익이 없으면서 피흘리며 싸워줄가? 귀신이 들어도 하품할 일이지.》
《야심이다! 아라사를 몰아내고 저들이 이 땅을 갖자는 욕심밖에 뭣이 더 있는가.》
《우리 땅을 마구짓밟고 유린하는데 위문은 무슨놈의 위문이야. 그게 다 빌어먹다 뒤여질 놀음이지.》
경원학교의 교원모두가 정부의 처사에 분노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그럴수 있는가,황성신문(皇城新聞)이 밝히다싶이 일본군대가 침입하여 이 강토를 유린하고있기에 나라와 겨레의 위험함이 마치 끓는 물속에 있는 고기와 같고 불타는 대들보에 앉아있는 새와 같은 처지건만 정부의 관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는 않고 일본에 아부 굴종하면서 투항주의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는데야. 이지용, 심상훈, 리근택 등은 많은 쌀과 담배와 술에 돈까지 내주면서 일본군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어디 그러고마는건가. 나라정부는 각 지방의 친일관리들을 일본군진북군대응접관(日本軍進北軍隊應接官)으로 임명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각 고을에 진입하는 일본군을 맞아들이게하였던것이다.
《제 나라에 공공연히 기여든 승냥이를 공경해 위문하다니 원! 수치도 모르고 매국배족행위를 하고들 있지! 그게 어디 제정신인가?.... 쓸개빠진 인간들이야, 쓸개빠진 인간들!》
서일은 증오심이 끓어올라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황제의 무능함을 통탄했다.
한데 이때의 고종은 그가 생각한 것 같이 아주 영 무능하기만한건 아니였다.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협약때부터 일본의 행위를 의심하여 온 그는 뒤늦게나마 각성하고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해 황성신문(皇城新聞)사장 장지연이 참장(參將) 현영운(玄映運)을 통해 그 신문의 군색한 재정에 보조금을 내려 달라고 주청(奏請)하자 고종은 내노금(內?金) 4천원을 황성신문사에 하사했고 그후 황성신문의 사옥이 너무 협소하고 불편한 사실을 전해 듣고는 수진갱(壽進坑)의 관리서(管理署) 자리를 하사한 것을 보아 알수있는 것이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붓대로 바로 세워 보려는 언론계에 대해 고종은 마침내 격려하면서 뒷받침하고있었던것이다.
고종이 각성해서 이제는 표리부동한 일본의 탐욕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대략이나마 알고있었다. 나젊은 하야시 곤스께가 일본공사로 와있으면서부터 조선의 리권(利權)을 침탈한 것을 보면 연해각지의 어업권, 포경권, 직산 수원의 금광 채굴권, 개성의 삼포,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월미도의 농장, 온양의 온천, 지도와 고하도의 상묘, 장고도의 파선배상(破船賠償), 경부선철도, 제1은행권의 통용, 군용지사용, 국내하천의 항해권 등등 침략은 일일이 렬거키어려울 지경 다종다양이였으며 또 로일전쟁을 기화(奇貨)로 일본 사람이 각지에 횡행하면서 민산(民産)을 략탈한 것 역시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다.
영국의 타임스지는 이렇게 론했다.
<<한국의 일본에 대한 관계는 애급의 영국에 대한 관계나 안남의 프랑스에 대한 관계와 흡사하다. 그 권능이 같고 그 효력이 같고 그 성질이 같으니 따져말하면 한국의 독립은 형식상의 독립이요 실제상의 독립은 아니며 일본의 소위 충고권이라는 것은 한 장의 엷은 종이로 덮어놓은 명령권이다.>>
아무리 무지각자라도 이런 보도를 보면 깨달음이 있으리라.
고종은 반일의병운동이 재개됨에 아직 공개적으로 태도표시를 하지 않고있었다. 그의 속심이 과연 어떠한지?....
이번의 반일의병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한 층은 두부류였다.
첫째부류는 오래전부터 내외원쑤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을 증오하여 오던 평민출신의 인물들이다.
둘째층의 부류는 1896년에 반일의병운동을 벌리다가 투쟁을 중도에서 그만둔 애국적 유생들이였다. 그 속에는 중국 동북지방으로 갔던 반일의병장도 있었다. 이들은 비록 그곳에서 반일의병력량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무력침공이 로골화되니 다시 국내로 돌아와 반일에 선두나선것이다.
이와 같이 두 부류에 속하는 반일의병운동자들에 의하여 각지에서 반일의병대가 조직되게 되었다.
이해의 말까지 조직된 의병대를 보면:
(1) 강원도 홍천의병대
(2) 경기도 려주의병대
(3) 경기도 지평의병대
(4) 전라도 장성의병대
(5) 평안도 의병대
<<평북 여러군들에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장 유인석이 각 읍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병신년간(1896)에 강을 건너갔다가 그후에 돌아와 지금 개천에 거주하고 있다. 이번의 의병도 역시 이 사람에 의하여 나온 것이다.>>
속음청사 11권 광무 8년 갑진 12월 29일.
유인석은 평안도의 30여개군에 "종유계"를 뭇고 인민들에 대한 애국적인 계몽사업을 하였다. 이때의 평안남도는 28개군이였고 평안북도는 21개군이였다. 30여개 군에 종유계를 조직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평안도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군의 인민들이 의병대에 망라된 것으로 인정되는것이다.
어떤 의병대의 조직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대부분이 평민출신이였던 사정과 관련된다. 의병운동은 이같이 허다한 무명의 애국자들의 희생으로 력사를 기록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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