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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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 제3부 . 6
2011년 10월 23일 22시 50분  조회:4808  추천:0  작성자: 김송죽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6.

   생활이 검소한 라철은 사치를 멀리 하고 사는 사람이였다.

   그의 집에 들어서면 가장 유표하게 안겨드는 것이 방안의 정면벽에다 손수 활달한 필치로 써서 붙인 대문자 각사였다.   

 

   神靈在上 天視天廳 生我活我 萬萬世降衷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라철은 저 총독부의 왜놈들이 냄새를 어떻게 맡아내고 우리 대교에 통제령을 내렸을가, 아직은 만주땅에서 생겨난 중광단을 대종교의 무장단으로 지목할만한 그어떤 똑똑한 근거도 바로 쥐지는 못했을건데...        

 

    <<대종교는 그 제창된 것이  오래전일이요  그  나라에 있어서는 오래된 고교(古敎)라 하겠고 또 그  신도가  많다고하나 수중(手中)에 촌철이 없으니 설사 불궤한 행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것이 아니요...>>

   

   몇해전 일본의 <<太陽>>잡지가 발표한 론설내용을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라철은 생각을 굴리였다. 두려워할것이 아니라해놓고 이제와서는 종교에 간섭한다는 원망과 비방을 들어가며 강제로 해산시키려 드니 대체 무슨놈의 수작인가, 발전속도가 빠른 대종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 위험하다고 느껴져서 그러는게 분명하다. 이 라철이 이제는 능력을 다한거요 세궁력진했으니 자리를 내고 물러나는건 그야말로 명지한 처사로되는거다. 라철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속으로 뇌였다. 개가 무서워서 갈길을 가지 않을소냐.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대종교는 맥을 끊지 않고 이어나가야 한다.

    어느날 라철은 세 아들을 앉혀놓고 당부했다.  

   《구월산에 가봐야한다. 너희들은 잊지말고 그곳을 찾아가 해해년년  천조에 제를 지내거라. 천조를 잊음은 제가 배달민족임을 망각함이요 그를  스스로 떠남과 뭐가 다르겠느냐.》     

     정세는 몹시불리했다. 시대의 운이 너무도 좋지 않음에 비감이 생겨 통탄하던 라철은 마침내 자신이 적과 대결 할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구상도 못하는 비장한 결심이였다. 라철은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느날 돌연스레 남도본사 교우들에게 자기는 구월산 삼성사봉심을 떠나야겠다면서 려장준비를 시켰다.

   그날은 음력 8월 초4일이였다. 라철은 상교 김두봉, 지교 엄주천, 참교 안영중, 김서종과 사촌아우 참교 나주영 그리고 조카인 참교 나정수 등 6명의 시봉자(侍奉者)를 데리고 서울역을 출발했다. 서울시내에 있는 수백명 교우들이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봉심하러 떠나는 그들을 환송했던 것이다.  

   기차로 사리원(沙里院)에 도착한 그들 일행은 이틑날 아침 역전근처에 있는 대기사진관(大崎寫眞舘)에서 함께 구월산 봉심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라철이 앉고 그 왼쪽에 김두봉, 오른쪽에 엄주천... 모두가 흰옷을 입고 떠난 맵시대로였다.      

   사리원에는 경암정(景岩亭), 고당성지(古唐城址) 같은 고적들이 있어서 한번 돌아보고 싶었지만 려관집 주인으로부터 채굴이 시작된지 6년되는 부근의 사리원탄전에서 나는 질좋은 갈탄이 일본으로 많이 실려가고있다는 소리를 듣고보니 감정이 상하는지라 더 머물러 있고싶지 않았다.

   《더러운 놈들, 뻔뻔스세 갈퀴질이구나! 오늘은 석탄이네만 래일은 흙마저 실어가려구들테지.》

   라철이 일제의 략탈이 너무도 한심스러워 내뿜는 원성이였다. 나라 재부는 그같이 털리우고 권리잃고 무기력해진 백성들은 부역에 끌려나가 혹사를 당하고...갈수록 수미산이라더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저 암담하기만했다. 허나 그렇다고 옆사람들께 비감만을 던져주는건 일이 아니라 생각되여 그는 가슴저미는 고통을 그 이상 표면에 들어내지 않고 속으로 쓸어 내리였다.

   신천읍(信川邑)에 이르었다. 일행은 잠간 쉬면서 말 한필을 구했다. 아직도 수십리길이 남았는데 년세있는 조교를 그냥 지겹게 걷어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라철은 권념에 못이겨 여기서부터 말을 탔고 시자(侍者)들은 의연히 도보로 서북쪽 저 멀리의 구월산을 바라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날따라 날씨는 과연 괴벽스레 짖궂었다. 일행은 가다가 폭우를 만났다. 인가를 만나지 못해 비를 끊을 수도 없는 처지여서 그들은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50여리길을 그 달리여 마침내 류천장(柳川場)에 당도했다.

   그러나 짙은 먹장구름은 하늘을 그냥 가리웠고 소나기는 더욱 세차게 쏟아 부어 지척을 가리기 어려울 지경이 되였다. 그렇다고 전진을 멈추고 싶지 않은데 이 어찌된 일인가! 자연의 변화랄가 아니면 조화랄가 무쌍한 천신의 은총이랄가?... 그들이 흑암속에서 가도 오도 못할 궁지에 들었을 지음에 기적이 나타났다. 구월산쪽으로부터 한줄기의 광선이 뻗혀와 앞길을 훤하게 비춰주었던 것이다. 이에 일행은 반가와 걸음을 재촉하여 그날 밤이 깊기 전에 삼성사(三聖祠)밑 전동마을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던 것이다. 삼성사(三聖祠)는 한배검이 어천(御天)했다고 하는 구월산 소증봉(小甑峯)밑에 있는데 그것이 어느때에 세워졌는지는 알수 없으나 북쪽벽에는 단인천제(檀因天帝), 동쪽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서쪽벽에는 단군부왕(檀君父王) 이렇게 3신을 모시고 오래동안 봉사(奉祀)하였던 것이다.

   춘판통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 단종 임신에 경창부윤 이광재의 소에 가로대 신이 사기를 닦다가 무신에 이르매 우의정 류관이 올린 글이 있으니 일렀으되 “문화고을은 신의 본시골인데 구월산이 이 고을의 주산이라 단군때에는 아사달(阿斯達) 모로 이름하였으며 산의 동쪽 고개가 높고 크게 구비치었고 산의 허리에 사당이 있으니 어느때에 세운것인지 모른다.
 
  북쪽벽에 단인천제를 모시고 동벽에 단웅천왕을 모시고 서쪽벽에 단군부왕을 모시였으니 고을사람이 삼신당이라  일컬으니 그 산아래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부른다. 
   단군께서 아사달메에 들어가시여 한얼이 되시고 그 산밑에 삼신당이 지금 있으니 그 자국을 가히 볼것이오 고을 동쪽에 땅이 있어서 그 이름은 당장경(唐藏京)이라 부로(父老)들이  단군께서 도읍하시던 터라고 전한다....>>     

   전동에 도착한 라철일행 7명은 비에 젖은 몸으로 삼성사를 향하여 머리숙여 묵례를 하고나서 봉심사유(奉審事由)를 말하고는 그 마을에서 피곤한 몸을 쉬우면서 그날밤을 지냈다.   

   이틑날 아침일찍이 사당으로 향한 라철은 그곳에 이르러 모양이 형편없이 돼버린 사당을 보는 순간 가슴이 억장같이 무너져내렸다.

  《오 어쩌면?!...》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무거운 자책감만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오랜세월 찾아오는 이 하나없이 내내버려진채 돌보지 않은 삼성사는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기여 벽과 기와가 파손되였고 집담은 무너진채 그대로였고 향축각(香祝閣)은 지어 네기둥만 남았고 재실(齋室)은 헐어 근본 거처할수 없었다. 일행 모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뜨거웠고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 철은 죄많은 불초자입니다.>> 
   라철은 머리를 깊숙히 숙였다.

   시자 모두가 그같이 하면서 속죄를 빌었다.
 
 한편 그들은 사당이 그같이 불성모양이 되어갔건만 새나 짐승들이 침범하여 유린한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음을 과연 신기하게 생각했다.

  《미물도 여기가 성전임을 아는도다!》

   감개가 심금을 울리느지라 라철은 다시 한번 탄사를 발하면서 즉시 사당수건을 서둘렀다.
  
라철은 우선 남도본사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한통을 써서 김두봉에게 주면서 부탁의 말을 했다.

  《나를 위하여 여러 누님에게 편안히 지냄을 이르라.》

  《그리하겠습니다.》      

   김두봉은 조교의 지시대로 서울로 향하였으니 바로 이날 오후였다.

   라철이 그한테 줘 보낸 수찰역문(手札譯文)을 보면 이러했다.

     <<엎드려 생각컨대 요사이에 도를 위하신 몸이 만번 왕성하십니까. 지극한 정성으로 빕니다. 철은 삼성사에 나아가서 삼신께 뵈옵고 원도를 드리니 사정의 기쁨은 가히 이름지어 말할수 없으되 다만 사당안에 보이는 것을 차마 이르지 못하겠노라. 
 
 우리들이 이러한 죄악을 쌓아두고 어찌 감히 복락을 바라리오. 천하에 이러한 리치가 없을것이니 두려운 생각을 이기지 못하 나 이다. 탁자, 돗자리, 바라지, 기둥들이 부셔진 것을 수리하지 않을 수없고 뜰에 가득찬 풀, 나무를 뽑지 않을 수 없으되 이미 예산이 없는지라 어찌 능히 갖추겠는가? 오직 여러분 형제의 두터운 생각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가배절(추석)에 특별히 제천의를 행하고 이어 정성으로 원도를 드릴것이니 백연(白淵ㅡ김두봉의 호)에게 물으면 자세히 알것이오 머물러 갖추지 못합니다. 帝降 4373年 丙辰 8月 7日 喆 兄>>    

   이틑날 라철은 시자들과 함께 삼성사 경내에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뽑는 작업부터 착수하여 당실을 수리하고 또한 동, 서 북 세벽에 따로 모셨던 삼신위패를 삼신일체의 뜻에서 북쪽벽 한가운데에 단인천제를 그 좌우에 단웅천왕과 단검부왕을 각각 모시였다. 
  (三神位가 처음에는 土像으로 모셔졌다가 그후에 木像으로 바뀌였고 조선태조때에 이르러서는 河崙의 건의에 따라 木像을 없새고 位牌를 모시게 되었던것이다. 뿐만아니라 九月山天王과 土地情神과 四直使者의 位版도 다시 써 祠堂뜰우에 봉안하였다.)

   여럿은 이틀간 손을 합쳐 부지런히 서두르고 힘을 들인 끝에 마침내 사당수리를 끝냈다. 이날은 또한 일요일인지라 라철은 시봉자들을 거느리고 천수(天水)를 드리며 향을 피우고 경배례식을 거행하였다. 
  10일 즉 그 이틑날에는 제궁(祭宮) 쉬는 집의 수리도 끝냈다. 하여 한칸은 라철조교의 수도실로 정하고 다른 한칸은 시자들의 숙직소로 정했다. 수도실 북쪽벽에는 라철이 출입때면 잊지 않고 늘 받들고 다니는 작은 천진(天眞)을 모시였다. 그래놓고는 이틑날 <<專修硏三眞理 普救離五苦界>>라는 주련을 친히 써서 그것을 앞기둥에 붙이게 해놓고는 그날부터 곧 문을 닫고 수도(修道) 
들어갔다.

   문밖에서 들리는 건 오로지 종이펴는 소리와 먹가는 벼루소리였다.

   12일 밤과 13일 오전에 경배식을 거행하였는데 새로 봉교한 마을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참례하였다. 라철조교의 지성스러운 고행에 몹시 감동한 그들이였다. 13일 경배식이 끝나서는 모두가 특히 가배절에 하게 될 제천의(祭天儀)를 익히였다. 이 모든 것이 라철의 면밀한 계획에 따른거였다.

   14일 라철은 목욕하고 손톱을 깎은 후 새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나서 다음날 가배절에 쓰일 제물과 제천의(祭天儀)에 고유(告由)할 주유문(奏由文)과 악장(樂章) 등을 일일이 전성껏 준비하였던 것이다.

   15일 가배절이 돌아왔다. 오밤중(子時)에 단의식(檀儀式ㅡ祭天式)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삼신(三神)을 합하여 제사를 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였거니와 진설한 제수(祭需)가 이전에 나라에서 하였던 제전(祭典)과는 같지 않았다. 이날 의식에는 전동마을에서 새로 봉교한 교도 31명 역시 함께 참가함으로써 제사분위기를 한결 돋구었다.

   라철이 쓴 악장문(樂章文)은 이러했다.

 

   巍巍天山 檀葉蒼蒼 (외외천산이여 단엽창창이로다)

   帝出于震 合洽萬邦 (제출우전하사 합흡만방이삿다)

   生我敎我 乃吉乃祥 (생아교아하시니 내길내상이로다)

          

   巖巖白岳 瑞石有跡 (암암백악이여 서석유적이로다)

   帝返于宮 實惟天國 (제반우궁하사 실유천국이삿다)    

   育我化我 萬歲流澤 (육아화아하시니 만세류택이로다)

   

   主宰惟一 作用惟三 (주재유일이라 작용유삼이로다)

   眞理微妙 萬有包圅 (진리미묘하여 만유포함이였다)

   福我倧我 神化覃覃 (복아종아하시니 신화담담이로다)

     <<....철이 이제 우리 교도 김두봉, 엄주천, 안영중, 김서종, 나주영, 나정수들을 거느리고 와서 마음을 재계하며 몸은 목욕하고 사당을 쓸며 위판을 고쳐서 개천한지 일흔 두돌인 병진해 8월 보름날에 삼사히 맑은물 정한메를 갖추어 제사를 받들고 한얼께 아뢰옵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밝으시게 적은 정성을 살피시와 널리 억만 백성으로 하여금 한가지로 복리를 입고 다 대종교문에 돌아와서 백대가 되도록 이울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철의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는 라철이 쓴 주유문(奏由文)에서 그가 바라는 것이 밝혀진 부분이다.

   이틑날 즉 음력 8월 15일 새로 1시에 라철은 시자들을 데리고 함께 천제의(天祭儀)를 시작하여 2시에 끝마치였다. 이때의 그는 평온한 기분에 온화한 상태였다.

   비구름이 말끔히 걷히여 유난히 맑은 날씨였다. 라철은 사당을 거닐다가 시자들을 불러놓고 정답게 말했다.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한울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사당을 세우고 신상을 모시어서 향화가 4천년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이 몇해동안에 제사를 페하고 수호조차 없이하여 사당과 재실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한 삼성사가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된 자 어찌 감히 안전하기를 바라리오?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소 이 땅에서 단의(襢儀)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을 마치였도다.》

   그의 얼굴에는 화기가 가득했다.

   그의 말을 듣고 시자모두가 자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없이 살아가야한다,이제부터는 그 어떠한 상황에 부대끼더라도 제사만은 끊지 말고 해해년년 지내면서 사당과 재실을 수호하리라는 결심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과연 오늘이야야말로 <옥전금화가경일(玉殿金花嘉慶日)>이로다!》

   라철은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꿈에 “嘉慶” 두글자를 줏고 그것을 자기한테 선사했던 서일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비롯한 이역땅에서 포교를 하고있는 교우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렸다.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동삼, 이상설, 이시영, 이동녕, 홍범도, 조성환....저 세상에 간들 잊은손가. 그들은 다가 하나의 굳은 신념으로 하여 사실상 혈맹을 맺은바나답지 않은 형제요 친구들이였다.

  《부디 건재하여 뜻을 이루기를!》

   이시각 그의 바람은 너무나도 절절했다.

   라철은 사당뜰악을 약 한시간가량 거닐고나서 수도실로 들어갔다. 

   그는 붓을 들어 흰종이 한폭에다 글 21자를 써서 문에 붙여놓았다.

   

   <<自今日上午三時爲始 三日間絶食修道 切勿開此門>>    

   (오늘 오전 3시부터 시작하여 3일간 절식수도할터이니 문을 열지말기를 바란다)      

 

   안으로 문을 잠그었다. 밖에서 들을 수 있는건 오로지 먹가는 소리였다.

   라철조교가 전에도 자주 절식수도를 한적이 있는지라 이를 알고있는 시자들은 이날 별다른 생각이 없이 모두들 숲속 또는 개울가로 산책을 하였고 책을 보기도 했다. 그들 다섯사람은 저녁밥을 먹은 후에 모두 겯방에 모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10시경에 세사람이 잠을 자려고 수복방(守僕房)으로 향하였는데 라철조교가 들어있는 수도실에서는 종이펴는 소리와 먹가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들은 침식을 전페하는 라철조교의 건강을 그저 속으로만 걱정하면서 그곳을 지나갔다.

   이날 당직은 엄주천과 안영중 두사람이였는데 몹시 곤했다. 

   이틑날 오전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여난 그들은 자기들이 늦잠잔 것을 걱정하면서 수도실로 가보았다. 한데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는지라 그들은 자연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두사람은 네 번이나 불렀다. 그래도 안에서는 의연히 아무 응답이 없었다. 불안한 예감에서 그들은 급히 문을 떼고 들어가보았다. 라철조교는 손발을 펴고 이불, 요우에 바로누워 눈을 감았는데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허나 숨을 거둔지가 이미 오랜 것이 분명했다.

   책상우를 보니 여러개의 봉한 글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장이 있었다. 유서의 날자를 보니 모두 8월 15일 혹은 가배절로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조천(朝天)한 시간은 오후 11시경이였다....

   모두 놀램과 비분에 잠기여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그러다 엄주천이 맨먼저 정신을 차리였다. 그는 서둘러 이 일을 유관부문에 알렸다.

   안악(安岳)에 주재하고있는 일본 헌병대 대장이 의사를 데리고 검시(檢屍)하러 왔다. 한데 시신이 머리부터 발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지라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라철은 한얼이 되어야만이 쓸수 있다고 하는, 남은 알수 없는 페기법으로 스스로 사망에 이른것이다. 

  《그 목숨 끊음을 연구하건대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가 있은즉 죽은 원인이 없는 사망이라 가위 성인의 죽음이라 하겠고,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참으로 선냉님, 선생님이시다!》

  검시를 끝마치면서 헌병대의사마저 공경, 감탄하여 내뿜는 탄식이였다.

  이틑날인 8월 16일에 남도본사에서는 라철이 조천한 전보를 받았다. 모두 경황애통한 분위기 속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상교 오혁을 구월산에 파송하였고 라철의 부인 지교 기고와 큰아들 정경, 셋째아들 정채가 이어 분상(奔喪)하였고 둘째아들 정문은 공주에서 부음을 듣고 달려왔다.

  시자 김서종이 전보를 치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칠색찬연한 무지개가 구월산 소증봉에서부터 다리를 놓은 것 같이 은황봉에 가로 걸려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보는 사람마다 다가 신기하게 여기였다.

  전보를 받은 남도본사에서는 곧 계유(啓由)하고 제를 지낼 장의소를 개설하였으며 례원(禮員)을 정하여 치상엄무(治喪業務)를 분담하는 한편 라철조교가 조천한 사유를 아래와 같이 신문에 광고하였다.

      

           <<大倧敎都司敎羅先生喆氏 陰曆8月15日下午11時

           於九月山三聖祠修道室 殉名朝天.

                             大倧敎南道本司 典理 崔顓>>

          

   안영중이 조천소로부터 오혁이 쓴 조사보고와 유서 그리고 인장 등을 남도본사에 전했다. 

   김헌앞으로 남긴 유서 <<傳受道統文>>과 가족에 남긴 유서외에 봉해놓은 글가운데는 여러 가지의 글이 많았는데 그 속에 일본총리와 데라우찌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도 각각 들어 있었다.

   

   <<보황당보시오. 아사달메 한배님 오르신 곳에 들어와서 이     세상을 위하여 이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기를 판단하니 죽음은     진실로 영광이로되 다만 다시만나서 즐겨함을 얻지 못하고 천고의 리별을 지으니 보통인정으로써 헤아리면 혹시 섭섭할 듯 하나 죽음에 다달아서 한번 생각하건대 선생이 지신 짐이 매우 무겁고 크오니 오직 힘써 밥을 더 하시와 이 세상에 복이 되어 백성이 다행하게 하소서. 몇가지 서류는 아래 적은대로 거두시오. 큰길의 편하게 닦음을 길게 기리오며 널리 베프시고 크게 건지심을 정성껏 비나이다.>>

  

  이상은 김헌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라철은 “殉名三條”에서 자기는 대종교를 위하여 죽고 한배검을 위하여 죽으며 천하를 위하여 죽는다고 밝히였는데 그 원인은 서일이 4월 남도본사에서 거행하는 천궁령선식에 참가하러 왔을 때 라철이 그와 이야기를 한  그 내용들이였다. 그리고 또한 밀론(密論)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그때 서일, 김헌과 최전앞에서 그가 한 말의 내용 그대로였다.

   라철은 전체 교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교문을 맡은지 여덟해동안 큰도의 빛나는 빛을 널리 펴지 못했고 이 세상의 아득한 길을 크게 건너지 못하고 이렇듯 빠짐이 있으니 도리여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이제 온천하 형제자매들의 허물을 대신하고 한오리의 목숨을 끊어서 한배님께 사례한다고 했다. 어떤 구절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찢어 내렸다. 

    <<...아! 슬프다! 우리 동포는.... 마치 촛불에 닿는 약한 나비와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와 같거든 하물며 또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까비 뛰노니 한울 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 가니 사람겨레의 피 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나라땅은 유리쪽으로 부셔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라철은 <<지금 조선땅에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으로써 깨끗이 할 것>>을 비롯한 장사를 지냄에 7가지를 조심하고 삼가(誡葬事七條)하라는것과 <<유해의 재는 반드시 한배뫼아래(총본사에 가까운 땅) 묻을것>>이라는 밀계1조(密誡1條)를 남기였다.

   대종교인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는 수 밖에 없었다.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지켜보는지라 이렇듯 소박하고 눈물겨우면서 장중한 장례로써 이 력사적인 위인을 영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종교탄압에 대하는 항거라 할가, 대종교도들의 절박한 소원에 따라 장례의 여러 식들은 절차에 따라서 빠짐없이 진행되였다.

   음력 8월 25일 오후 5시에 남도본사 천궁뜰에 많은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서 영결식을 하고 이어 령구를 받들어 서대문밖 봉광사화장소로 향하였는바 령구는 조천한 이의 유언 그대로 지계(支械) 두개로써 관밑 앞뒤에 달고 또 긴 장대로써 우물井자틀을 만들어서 령구와 지계사이에 메고 또 무명으로써 우물井자의 여덟다리에 매여서 교인들이 혹은 메고 혹은 붙들었다. 늙고 약한 이들은 모두 걸어서 따랐는데 어두운 밤인데다 비바람까지 불어치는 사나운 날씨였다. 다섯시간후에야 화장식을 가질 수 있었다.

   9월 1일에 남도본사 천궁에서 都司敎陞任式을 거행하고 이어 홍암 라철선생을 추송하여 大宗師神兄號를 올리였다.

   9월 17일에 지교 라정경이 라철조교의 유해를 갖고 백두천산에 봉장하려고 당일 정오에 三神殿에서 계유하고 배송레식(拜送禮式)을 한 후 많은 교도들의 전송속에서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25일에 만주 간도의 룡정촌에 이르럿다. 그곳 교도들이 곧 추모식을 가졌고 10월 6일에 유해는 목적지인 청호 총본사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에 앞서 3일전 개천절날 국내의 백천, 함안, 당진과 만주의 화룡, 왕청, 연길, 밀산 등 25개의 교당에서 추모식이 각각 열렸던 것이다. 

   10월 6일 유해를 봉영(奉迎)한 총본사에서는 전리 강우(姜虞)와 부전리 조완구(趙琬九), 남도본사에서 파견한 김서종, 동도본사에서 파견한 계활(桂活) 등이 모여 유해를 봉장할 일에 대해서 토론하였는바 본장소는 유언에 따라 청호의 안산으로 정하고 돌관과 돌비석은 용정에서 만들어 오기로 하며 봉장일은 11월 20일로 정하여 모든 교당에 공포하였다.        

   그날이 돌아왔다.

   11시에 봉장레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봉장례식에 참여하려고 먼곳에서 찾아 온 교도가 무려 390여명이였고 그 밖에 청일(靑一), 동일(東一) 두 학교의 학생 모두가 참가했다. 먼저 三神殿에 계유(啓由)하였고 돌관을 봉장지에 옮긴 후 봉장했다. 례원이 애사(哀辭)를 읽고 교인들은 재배했다.

   세워진 돌비석 앞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되여있다.

   <<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

   <<檀帝御天後四一百五十七年丙辰 十一月二十日>>       

   비석글씨는 참교 김진호(金眞浩)가 쓰고 자핵을 니금(泥金)으로 메웠다.

   서일은 동도본사를 대표하여 애도사를 올렷던 것이다.

  《<옥전금화가경일>일이라...참으로 묘하기도하구나!》

   서일은 언젠가 자기가 꿈에 주은 글자를 드린 일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옥전(玉殿)은 구월산 삼성전(三聖殿)이요 금화(金花)는 피꽃(血花)을 말함이 아니냐. 가경(嘉慶)은 가배절(嘉俳節)곧 대종사께서 조천하신 가경절(嘉慶節)을 이름이니 한배검께서 가르치신 몽계(夢契)의 후조(後兆)가 이러듯 령명(靈明)하고 오묘할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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