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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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2011년 08월 26일 11시 27분  조회:5314  추천:3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김송죽



                                                               (1)    

 

미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각을  놀려가며 몸을  움직이는  춤은  노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면서  또한 일종의  운동으로도  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동물이 공유하고있는 생리상의 욕구(慾求)라 하겠다. 그러한즉 두말할것 없이 그 어떠한 제한도 구애도 받을 필요가 없고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어느  정당이  그것마저  유해(有害)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다  그  어떤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붙여  제압하고 금지시킨다면 뭐가 되겠는가?  구실이야  어떻던지간에  그것은  인간최저의 생존방식마저  모르는  답답하고도  저주로운  무지(無知)에다  폭정(暴政)을  가했을  뿐이지  다른  어떤  좋은것으로는  절대  해명도  평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나면서부터  누구나  다  제  공간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날에  위대하다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살아온  우리들ㅡ 전체국민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가져나봤던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이켜보고  한번다시  랭정히  사고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바  “무산계급혁명”이라는  미명(美名)하에  발동했던  그 세계력사에서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운동”은  근본  위대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이름을  붙일  자격을 못가진 일대  아이들의  작난이였다.  그것은  그 결책자가  지망한것과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무지(無知)의 10년동란(動亂)”,  “폭정의 10년내란(內亂)”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무수한 원안(怨案)이  호곡(號哭)하는  그  혹심한  재난을  어디에다  비기며  언제 다 말하고  청산하랴!  당시 집계된  전국인구를 보면  8억이였는데 력사가  유구한  이 세계의  인구대국은  그  지루하고도  무지한  광열적인  운동으로  하여  만신창이  되어버렸건만도  충성심에만  길들여진 순진한  국민들은  아직도 채 깨여나지를  못해  그것을  감각조차하지 못하고있었으니  엉망이  되어버린  뒷수습은  그  후임자들이 감당해야만했다.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  책임은  응당  누가져야했던가?   

                                     (관련글: <<음지에 묻힌 비밀>>65)

 

                                                               (2)

 

이건  목격자가  나에게  한  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보니  단조로운  만세소리와  충성무(忠誠舞)에  시달림을  받아온  북경의  몇몇  젊은이들은  머리가  남먼저  틔여  보다 자유로운  제 목소리를 낼수있는  문화생활을  대담하게  추구하기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사교무(交谊舞)를  우리도  춰보자는 발상(發想)에서 대담히  행동을  했으니  그날은  정확히 1980년도  청명절.  장소는  원명원(圓明園)이였다.  청년예술가이자 시인이였던 북도(北島),  다른 한 시인 망극(芒克),  그리고  젊은 연출가  하군(何群)이였다.  그들  셋은 그곳에 가  놀면서 한담을  하다가  시를  읖고는 그 격정에 사교춤을  췃다.  매일 그모양 그멋으로  놀았는데  뜻밖에 그에  흡인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것이다.

노래소리를  토해내고있는것은  그때값으로는  260원되는 <<삼양패>>록음기였다.

구경군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그곳은  어느덧  로천무도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곳은  고정적인  남녀청년들의  모임장소로, 밀회장소로, 사상교류장소로 되였던것이다.  그같이 모이다보니  신분이  각각이요  그속에는  별사람  다  있었다.  모여온 사람들이 입은 옷맵시도 전과는 점점  달라갔다.  세월이  변했길래  새  시대멋을 냈던것이다.  북경에 온 외국손님은 중국에는 여지것 보지 못햇던 이런 경상을 희구하게  여기는지  그것을  갖고온  카메라의  렌즈에 담았다.

그리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북경의 다른 한  곳  앵도구(櫻桃溝)에서도  사교무를 추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거기는 거개가 처녀나 젊은각시들이였다. 그들은  모이면  사교무를 췄고 옷색갈을  뭐로  바꿰입으면  좋을가고 의논도 했다.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새  경상이였다.

이와함께  북경에는 가정무용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그해  즉  1980년 6월달에  와서는  갑작스레 사라지고말았다.

공안부와  문화부가  련합으로  <<영업성무도회와 공공장소의 자발성적무도회를 취체할데 관한 통지>>를  내렸던것이다.

   

당시  공안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큰도시들에서는  공원,  광장,  려관,  가두  등  공공장소에서  남녀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사교무를  추는  현상이  나타났는바  어떤데는  지어 구경군만도 근 만여명에  이르길래  사회치안에   골칫거리라는 것이였다.

그  <<통지>>를  보면  사교무는  저속한  것이여서  사회풍기를  흐리운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취체할것을  견렬히  희망해  영업성적인 무도회를  열었던  주모자는  <<치안관리처벌조례>>에  따라  그 엄중성을 가려  “사회질서관리방해죄”로  형사책임을 추궁해야한다“고  했다.

 

                                                              (3)

 

80년대초, “가정무도회“는  따져보면  그  래원이  북경의  고급관리자녀군체가  발기한것으로서  짧은시일내에  전국범위에  만연되었던것이다.

1982년에  공안부와  문화부는  <<영업성무도회취체와 가정무도회를 제지할데 관한 정신>>이라는  문건에서  가정무도회도 취체해야하거니와 각급령도간부는  이신작칙하여  제  자녀들이  가정무도회를  열지  못하게끔  교육해야한다고  했다.

 

그때  서안(西安)에  마연진(馬燕秦)이라는  녀인이  있었는데  춤추기를 좋아했다.  당지의  파출소에서는  그녀를  불러다가  춤추는  정황에 대해서  따져물었다.  마연진은  별로  개의치않고  춤을  같이  춘  남녀 100여명의  이름을  쭉  댔다.  그중  어떤  남자는  그녀와  관계가  더  밀접했다.  원래  파출소에서는  너무  제멋대로놀지  말라고  경고를  하자고한건데  마연진은  코방구를  뀌면서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처벌할  조건이  안되거니와  다른  리유를  붙일  방법도 없는지라  그만  돌려보내고  만  것이다.

 

그런데  1983년에  들어서  “얜다(嚴打)”가  시작되였다.  마연주는  중점타격대상이 되었다.  하여  그녀는  감옥에  들어갔거니와  잇따라서 그녀와 같이  춤을  춘  사람  300여명이나  줄줄이  잡혀나와  그것이 온  섬서(陝西)를  들성케  한  특대안건으로  되었던것이다. 

<<섬서일보>>는  여러차나  첫면에다  이 안건의  상황을  보도했다.  그  안건은  끌려든  사람이  많거니와  련루면이  넓어  심사하는데 하도  어려움이  많길래  “얜다(嚴打)”고봉기를  지나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낼수 있었다.  내막을  잘아는  사람이  말한것인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그나마  고봉기를  념겻으니말이지  그러지를  못했다면 적어도  열몇은  사형이  되였으리라는것이였다.  해도 고봉기를  그같이 넘겼음에도  마연주를  비롯하여  사교무를  적극적으로  춘 사람 3명이 총살당하고  3명은 사형유예집행,  2명은 무기도형에 떨어졌다. 무죄는 적고  도형에  떨어진  사람이  너무나도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남(濟南)의 일이다.

산동경극원의  연원인  장우태(張于太)역시  가정무도회에 가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늘  산동성군구사령원의 아들  경애평(耿愛平ㅡ별명 “耿三”),  산동성부성장의 아들  무위첨(武衛尖ㅡ별명“武二毛”),  산동여극극단회계의 아들 박국영(博國營),  제남 어느 한 병원의 의사 서춘생(徐春生) 그리고  시민 차립군(車立君)등을 데리고 다녔다.  그랬더니  1983년 얜다(嚴打)기간에  갱삼,  무이모,  박국영,  서춘생,  차립군  등  10여명은  “건달무리” 주요성원이라  몰아  총살해버렸다.  남을 추기고 끌어  함께 춤판에  들러서게한것  밖에  다른  큰죄는  없었다.

장우태도  역시  체포되였는데  그의체포는  아주  희극적이였다.  그때는  산동경극단에서  바로  하북의  한  현에  가서  연출을  하고있었는데  그  극의  중간에  이르러서는  그의  연기가  끝나는지라  그는  화장을  지우고는  극조의  다른  연원들과  함께  술마시러 갔던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다가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술좌석에서  돌연스레  제 가 끼고있던  손목시계를  벗겨  자기보다  나이어리고  같은  극조에서 자라난  녀배우에게  주면서  “이 오빠는  어느때  일이  날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이걸  기념으로  주니 넌 받거라.”  했다.

대방이  어찌  닁큼  가지랴.  이쪽이  재삼말해서야  그녀는  마지못해 받고는  웃으며  말했던것이다.

“좋아요.  그럼  내가  건사하는  셈  치고  받겠어요.”

이때는  밤  12시좌우였다.

제남에서  온  경찰차가  그를  잡아갔다.

진짜희극은  아래에  있다.

1995년에  장우태는  형기가  만기되여  출옥했는데  바로 그가 출옥한  그  한해에만도  중국은  영업이  허가되여  등기된  가무청(歌舞廳)이  20,662개였고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224,938명이나되였다.

 그가  갇겨서  옥살이를  해온  12년사이에  중국은  변화가 많았다. 많아도 너무나많았다.

 

                                                      2011.8.26      

 

                                              (관련글: <<무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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