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http://www.zoglo.net/blog/jinsongzhu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631 ]

231    에세이 치욕(恥辱)스런 문혁묘비(文革墓碑) 댓글:  조회:7488  추천:6  2013-02-18
  에세이 치욕(恥辱)스런 문혁묘비(文革墓碑)   산의 도시로 불리우는 중경(重慶)에 가면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혁공동묘지"가 하나있다. 중경에는 본래 "문화혁명"때 벌어졌던 패거리싸움ㅡ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되었는데 국세(國勢)가 차츰 변함에 따라서 그것들을 옮기거나 파버리거나 아니면 굴토기로 밀어버리다보니 거진없어졌지만 그중 하나만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지속되였던 시비끝에 겨우남아서 오늘에 이른건데 그 본체의 모양을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다. 바로 중경시 사평공원(沙坪公園)내의 서남각에 있는, 콩크리트담을 높다랗게 빙둘러 쌓은 홍위병릉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갖고도 무던히 오랜 세월을 끌었다. 중경시에서는 2009년 12월 15일에야 비로서 그것을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니 문화혁명이 이미끝났어도 33년만이다.    내가 손중산선생이 모셔진 중산릉원을 보러 남경에 갔다가 장개석이 국무(國務)를 보았다는 미령궁과 손중산선생이 생전에 국무(國務)를 보았던 총통부까지 들려보고나니 머리가 돌아 아예 중경의 그곳까지 발길이 미친 것이니 이제는 20년이 넘는다.   중경의 그 홍위병릉원의 총면적은 대략 3000여 평방메터였는데 서남쪽으로 점점 높아진 지세다. 새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릉원안은 소름끼칠지경 정막했다.  높이가 두세키씩 되는 거머칙칙한 비석들이 무질서한 사이에 온통 도깨비바늘쑥과 잡풀들이 가득자라났는데 그런 사이로 오솔길 하나가 안쪽으로 깊숙히 올리뻗어 있었다. 거기에 있는 비석들은 첨단에다 오각별을 붙인것도있고  다른모양을 낸것도 있었다. 그리고 비석마다에 거의다 비문이 있었다. "头可断, 血可流, 毛泽东思想不能丢", "可挨打, 可挨斗, 誓死不低革命头"  “心向红太阳” 이러루한 혁명적인 구호로 꾸며진 비문이 많았는데 오랜세월 비바람에 지워지고 갈리여 알아보기 힘든것도 적지 않았다.  어떤 비석에다는 간단히 "紅衛兵烈士"라 새긴것도 있었다.    중경시 사평공원관리처(沙坪公園管理處)에 따르면 홍위병릉원내에 세워진 묘비(墓碑)는 모두 113개인데 531구의 시체를 파묻었다고 한다. 그중 404구의 시체가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이고 그 외는 厂矿企事业계통의 우도우(武斗)때 총에 맞아 죽거나 매를 맞아 죽은 공인쪼판파(工人造反派) 사람들이라했다.  사망자를 보면 60살되는것이 있지만 거의가 2,3십살나이의 젊은이들, 지어 는 11살짜리도 있다고 한다.  정지승(鄭志勝)이라는 사람은 중경의 우도우(武斗)사건 때  중경대학의 전기계졸업 본과생으로서 사업분배를 기다리는 중이였다. 그런데 상급으로부터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의 시체를 처리하라는 "혁명적과업"을 맡게되여 시장(尸長)이 된건데 그의 손으로 운반되여 매장된 시체만도 300여구, 이 사평공원(沙坪公園)의 "홍위병릉원"에다 매장한것만도 200여구나 된다면서 거의가 합장모(合葬暮)라 알려주었다. 어떤 합장모에는 37구나 되는 시체가 매장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 때 중경의 우도우(武斗)는 처참하고도 격렬했다. 관방의 기재에 보면 1967년도 여름부터 이듬해인 1968년도 여름까지의 사이였다. 두패의 싸움이 붙은것이 31차였는데 총, 포를 쏘았거니와 땅크가 나오고 지어는 포를 건 배까지 출동할 지경이여서 645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경의 우도우(武斗)가 제일심한건 아니였다.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곳곳에 패가 갈리여 "혁명대상"을 서로 제가  가져다 투쟁하겠다면서 빼앗기싸움을 하거나 아니면 내가 모주석의 혁명로선에 견정히 선 진짜혁명파고 너는 보황파라느니, 아니다 네가 보황파고 내가 진정한 혁명파라느니 해서 서로 맛붙어 죽일내기를 하면서까지 싸운건데 무한(武漢), 정주(鄭州)같은데서는 몇만명이 서로 죽일내기를 해서 장강물에 떠다니는 시체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南方周末)  요즘 나는 인터넷에서 머리가 백발이 된 홀로사는 녀인이 기자의 취재를 받을 때 죽은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면서 "이 엄마가 아무 때건 너의 복수를 하고말리라" 하고는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우는것을 보았다. 중경의 어느 중학교 교장은 폭파물을 만들어 홍위병모를 폭파해버렸다. 학자 왕강(王康)은 그것이 바로 "복수"라했다.          모택동은 당시 우도우(武斗)를 벌린 그들 량파를 모두 지지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그러니 결국보면 제편끼리 목숨을 내걸고 싸운것이다. 이건 중국에서나 생길 수 있었던 싸움이였으니 개를 웃길 수치인 것이다! 크게 혼란해야 크게 다스린다면서 문화혁명을 발동해놓고서는 뒷수습도 못한채 안식처를 찾아간 위대하고 영명하다는 그사람, "억만인민 맘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라하여 하늘높이 떠받들렸던 모택동이 세상을 떠난지 27일만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를 놀래우는 "중국의 시월혁명"이 일어나 모택동의 “유망인"은 체포되였고 그럼으로 하여 중국력사의 발걸음은 변화를 가져오게되였던 것이다. 그러한즉 1976년 9월 9일은 모택동시대에다 종지부를 찍은것이요 “사인방”이 타도된 1976년 10월 6일은 중국현대사를 개변시킨 리정비(里程碑)라 하겠다.      중국의 방방곳곳에 찾아볼 수 있는것이 렬사릉원이다. 그러나 중경(重慶)의 그 홍위병릉원만은 그같이 기념을 하자고 남기건 아니다. 기념할 가치라곤 전혀없는 것이다. 그 누구나 한번 가보면 알게된다. 가슴이 답답하게 무거워지면서 깨닫게되는바가 있는것이다. 무엇인가? 참관자는 지나간 세월을 다시금 돌이켜보노라면 자연히 사색이 깊어지는 것이다. 과연 왜 그런 비극이 생겼던가?.... 결코 가볍게 스쳐버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남긴 목적은 그 시대를 지내본 사람들에게는 한번다시 자아를 깊이 반성해보게 하고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아 력사에 깜깜한 후대들에게는 그같이 값없고 무모한 죽음이 생기게 된 원인과 그런 비극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시대의 로망자(老妄者) 봉건군주의 공과 죄를 가려보라는 것일거요, 그같이 가릴줄을 알게 되면 혐오감이 생겨 맹목적인 숭배를 더는 하지 않고 종당에는 각오함으로써 그따위 력사비극이 이 땅에서는 다시재현되지 않게끔 노력하게 하자는것이 목적일 것이다. 나의 생각인데 아무튼 모든 국민에게는 교육이 되리라는 전망이다. 자기가 치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민족은 영원히 야만으로 되고 말 것이다. 아래에 문혁묘비예술사진 몇장과 기념사진을 올린다.                               
230    에세이 막을 수 없는 도망길 댓글:  조회:4544  추천:0  2013-02-12
  에세이 막을 수 없는 도망길   일전에 중국에서 꾸리는 어느 인터넷에서 이제는 북조선에서 중국으로 비법도주 해 들어오는 사람을 이전처럼 심하게 붙잡지 않는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과연 정말 그런지?... 주체사상이란것이 대체뭔가? 그것이 아무리좋단들 제나라 백성의 인심에 진정으로 먹혀들어갈가?  살기좋은 곳이면 외국으로 도망치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안그런가?  다른 말은 더 하지 않겠다. 멀리 말고 여기 내가 살고있는 중국에서 한때 홍콩으로 도망가는 열조가 일면서 숱한 목숨이 황천으로 가고말았던 일이 다시금상기되여 이 글을 쓰게 된다.   언젠가 에 영문자단어 "to vote withone's feet"라는 것이 났길래 알아보니 "발로 투표하기"라는 뜻이라는가. 한데 그 단어를 발명한것이 습중훈(習仲勛)이라니 도대체 웬 일인가고  흥미가 동해서 문장을 마감까지 읽어보았던 것이다.   1978년, 습중훈이 마카오(오문)의 시정(市政)을 연구하게 되였을 때의 일이다. 그가 그곳의  문제해결에서 첫번째의 골칫거리인즉은 군인들이 그렇게 엄하게 경비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거쳐 홍콩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련속 줄을 이어 막아내기 퍼그나 어렵다는 그것이였다.   "천만마디 선전이 다 무슨소용있는가, 생활수평을 높혀주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지를 않는다면 백성들은 발로 투표를 할 것이다." 그때 습중훈이 한 말이다.   중국에서 마카오를 거쳐 홍콩(향항)으로 탈출하는 현상은 썩 전부터 이미있은 것이다. "문혁"때 진독수(陳獨秀)의 딸이 목숨을 내걸고 건너갔거니와 마사총(馬思聰)도 건너갓다. 지금 홍콩에서 손을 꼽는 몇몇 정치경제계인물과 부자는 다가 그렇게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그때는 이쪽에서 도망쳐 건너가는 사람을 향해서는 사정을 보지 않고 총을 갈겼거니와 지어는 대포를 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걸고 도망가는 이가 끊지를 않았던 것이다. 하여 한때 심수(深圳)일대에는 시체를 나르는 직업이 생겨나기까지 했거니와 그같이 죽이고 죽여도 막아내지 못하게되자 도망을 방지하는 "홍기촌(紅旗村)"을 세우고는 "훙해양(紅海洋)"을 한다면서 집들을 온통 붉게만들었고 집안에다는 모택동의 초상을 걸고 모택동의 어록을 써 붙이였던 것이다. 그러고는 마을사람들을 조직하여 , 등의 붉은노래를 매일불렀다. 하지만 그 모양으로는 도망치는것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더더욱 희한해진건 그 마을에서 전문으로 도망쳐 건너가는것을 막는 책임을 짊어졌던 민병련장을 비롯해서 마을의 과반수가 넘는 사람이 결국은 그쪽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성시주민, 학생, 지식청년, 공인, 지어는 사상이 견정하다는 공산당원, 군인 간부까지 도망쳐 홍콩으로 건너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도주자가 제일적었던 1978년 그 한해만도 183명이나 되었는데 그중 시직속기관 부과급이상되는 사람만도 40명이나되였다. 아이로니한 것은 넘어가는 사람들이 경계선을 넘으면서 "下定决心, 不怕牺牲, 排除万难, 去争取胜利"하고 모택동의 어록을 뇌이는 것으로 용기를 돋군 그것이였다.   홍콩정부에서 처음은 이쪽에서 건너간 사람을 붙잡아 가두었다가  되돌려보냈지만 그런다면 인간성이 전혀없다는 시민들의 세찬 항의에 의하여 그만둔것이다. 그곳의 백성들은 붙잡은 인원을 되돌리는 버스를 앞길에 누워 막앗거니와 "너희들도 사람인가?"하면서 몸싸움을 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붙잡으면 즉시돌려보낸다"는 홍콩의 정책은 취소되였거니와 인성(人性)대로 자비(慈悲)해져서 건너온 사람은 먹고 살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하였기에 도주민의 신세는 차츰 좋아졋던바 마치도 지금 중국에서 우리 동포들이 한국에 건너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돈을 벌듯이 살아가는 모양이 된 것이다.    누군가 홍콩의 부호(富豪) 100여명을 추려냈는데 그중 40명이 바로 그때 이쪽에서  탈주를 했던 비법인이라고 한다. 그들 다가 지금은 홍콩의 떳떳한 주민이 되어 나보라며 잘살고있다고 한다. 아무튼 잘된 일이다.  기시와 천대가 왜 없었으련만 내가 이를 사려물고 살자꾸나 분투하면 그같이 살길은 나지는 것이다. 길은 자기가 개척하기에 달린 것이다!    
229    에세이 치떨리는 현대문자옥(現代文字獄) 댓글:  조회:5154  추천:5  2013-02-05
   에세이 치떨리는 현대문자옥(現代文字獄)   나는 지금도 강생(康生)말이 나오기만 하면 겯들어 두사람을 생각하게되는데 하나는 구쏘련 쓰딸린시절의 박해광이였던 베리야고 다른 하나는 중국 당조(唐朝) 무측천(武则天)때의 박해광 래준신(來俊臣)이다. 그 둘은 다가 없는 죄를 날조하여 정직하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데 이골이 너무터서 세상에다 마귀회자수(魔鬼劊子手)라는 더러운 악명(惡名)남긴 것이다.   그 어느나라면 력사에 그런 악한이 없었으랴만 내가 보게는 특히 중국이 더 심한것 같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력대의 통치자들을 보면 다가 제가 잡은 "신성한 정권"을 튼튼히 한다는 미명하에 눈에 거슬리는 자면 그가 누구건간에 가리지 않고 밉게보고 죄를 만들어 집어씌움으로써 머리를 못들게 꽉 눌러놓거나 아니면 잡아 가두거나 죽여버리는 등의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지독하게 탄압하면서 제거해왔는데 그에 선봉이 되어서 나선 앞잡이의 전형이 바로 래준신(來俊臣), 베리야, 강생(康生)과 같은 충신(忠臣)ㅡ 악한이였던 것이다!   나는 강생(康生)이 생전에 저지른 죄악중 다른건 다 제쳐놓고 오늘은 그의 손에 의하여 꾸며진 현대문자옥(現代文字獄) 하나만을 말하련다.   강생(1898年-1975年), 원명은 장종가(張宗可)로서 자(字)는 소료(少聊). 그 외에도 조용(趙溶), 장용(張溶)이라는 이름을 쓰기도했는데 산동동교현 사람이다. 그는 생전에 중공중앙부주석, 중앙정치국상위 등을 지내면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함에 일역을 담당했다가  1975년 12월 16일에 병으로 죽었다. 중공은 당시 부고(訃告)에 이르기를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라했지만 문화혁명이 끝나서는 그 명명을 거두었거니와 골회마저 팔보산에서 쫓아낸 것이다.           나이가 강생보다 5살이나 어리렸던 류지단(劉志丹)은 직업군인으로서 중국공농홍군의 고급장령이였다. 공산주의에 충성한 그는 무산계급혁명가였고 걸출한 군사가였던 것이다.     그가 희생되어 13년만인 1962년에 섬북고원으로부터 북경에 들어온 그의 전우가 그를 기리여 그의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 을 쓴건데 그것이 생각밖에 강생에 의해 반당소설로 몰리고 말았다. 죄명인즉 "모택동사상을 표절했다"는 것이였다. 당시 서북근거지가 중공중앙과 련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류지단은 무장투쟁으로서 홍군과 농촌근거지를 세우고 한갈래의 정강산과 마찬가지인 길을 걸은것이다. 이른바 "모택동사상을 표절했다"는 죄증인즉은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였는데 더 풀이하면 이러했다.   _소설에 섬감쏘베트구를 쓴것은 중앙쏘베트와 갈라져 대항한 것. _소설의 어떤 인물은 습중훈(習仲勛)으로서 나젊은 그는 당과 국가를 찬탈하기 위한 정치자본을 마련했다.   허무하기 그지없는 억측이였다. 그같이 도출해낸 죄상이였으니 이런 죄는 오로지 악성이 기발한 강생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이다!   1956년전에 공인출판사에서는 류지단에 관한 소설을 선제계획에다 넣고는 류지단동생의 처 리건동(李建彤)을 찾아 그더러 류지단의 광휘로운 영웅일생을 쓰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리건동(李建彤)은 대량을 자료들을 뒤지는 한편 당시의 살아있는 많은 견증인들을 찾아다니며 방문을 해서 자료들을 수집한 후 그 소설창작에 착수를 한 것이다. 옹근 6년간이 걸렷다. 그는 그사이 6섯번의 수개를 걸쳐 1962년에 완성했는데 와 , 등에 련재를 했었다.   강생(康生)은 책이 나온것을 다 보지도 않고 "이소설은 완전히 고강을 위해서 번안한 것이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중선부(中宣部)는 여러 신문, 간행물에서 련재하는것을 즉각 중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또 공인출판사는 중앙회의에서 심사하게끔 책을 600부찍어 보내라했다. 그러면서 한편 아직 책이 채 인쇄되기도전에 "모주석어록"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것인즉은 바로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의 큰 발명이다"는 것이였다. 후에 모택동이 거기에다 "소설을 리용하여 당을 반대한다는건 강생이 발명한 것이다"고 한구절 더 보탠것이다.   그해의 여름에 중공은 8계10중전회를 열었는데 강생이 중국에는 지금 "습(習仲勛). 가(賈拓夫), 류(劉景範) 반당집단"이 있다고 선포했다. 강생이 그렇게 선포한 근거란 다른것이 아니였다. 습중훈(習仲勛)은 일찍이 섬감쏘베트정부주석을 하면서 류지단(劉志丹)과는 친밀한 전우관계였거니와 후에는 서북국서기가 됏다는 것이다. 가척부(賈拓夫)는 14살에 혁명에 참가했는데 유일하게 섬북에서 중앙쏘베트에 와서 사업을 했고 도택동을 연안에 가게끔 길을 인도한 사람이다. 그는 1949년에 맨첫번째로 서안의 시장이 되였다. 그역시 류지단(劉志丹)의 친밀한 전우였고 류경범(劉景範)은 류지단의 친동생이니 더말할것 없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였다.   1962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사이에 서북5개구의 간부가 많이 북경에 와 "학습"과 심사를 받기시작했는데 강생은 그들을 내놓고 반당집단의 사람이라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섬북의 지단현에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류지단(劉志丹)과 류경범(劉景範)을 "변절자"라 모욕하면서 일찍이 한번 국민당손에 회손된적이 있었던 보안(류지단)기념당은 홍위병들의 손에 한번다시 짓부셔지고 만 것이다. 무지막지한 그들은 지어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이 쓴 제사를 비롯한 돌기념비마저 파손하고는 류지단의 가족들은 농촌으로 내쫓은 것이다. 가척부(賈拓夫)는 1967년에 교외에서 괴로움에 시달리다못해 죽고말았다. 그래서 "습,가,류반당집단"에서 두사람만 남게되니 집단이라는 루명은 자연히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8년 1월에 이르러 류경범(劉景範)과  일찍이 리건동의 취재를 받은적이 있었던 마문서(馬文瑞)가 체포되니 이번에는 다시금 "습,마,류반당집단"이 생기고 만 것이다. 마문서는 5년 갇혀있었고 습중훈은 8년, 류경범은 강생의 믿그루를 들췄다하여 현행반혁명분자로 체포되여 10년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한편 소설을 쓴 작자 리건동(李建彤)은 처음에는 지하실에 갇혀있다가 철당을 맞고 로동개조를 한 것이다.   희한한것은 안건도 승급을 해서 그것이 이제는 "팽(彭德懷), 고(高崗), 습(習仲勛)반당집단"으로 되었다가 다시 바뀌여 "서북반당집단"으로 변해서 서북 대부분의 사(司)와 국(局)장이상의 간부는 거의 다가 말려들고 만 그것인데 걸린 간부가 수백명이 되는 것이다. 서북의 간부만이 아니였다. 2만5천리장정을 했던 남방의 간부와 1962년도에 이 안건을 조사했던 간부마저도 불우를 면치못한 것이다. 섬감녕(陝甘寧) 로혁명구의 기층간부와 군중, 우로는 근 만여명에 달하는 사람을 "팽,고,습반당집단"의 검은 손발이라 몰았웠거니와 지어는 리건동(李建彤)이 취재를 할 때에 도와준 사람마저 죄인으로 몰아 여럿이나 때려죽인 것이다....  소설에 련류된 사람이 너무도 많고 그에 대한 투쟁이 너무나도 지독해서 지어는  고대문자옥이 왓다가 입을 벌리고 돌아설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바로 위대하다는 그  독재자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목이 터지게 만세를 불러왔던 중국에서만이 창조할 할 수있었던 "현대의 문자옥"인 것이다! 저승에 간 류지단이 이 일을 안다면 과연 어쩔가? 황천을 향해 그는 가슴을 치며 웨칠것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중국혁명의 길은 그래 모택동만이 찾을 수 있었던가? 다른사람이 찾으면 죄가 되는건가, 그래?"    1979년에 소설은 공인출판사에 의해 세상을 보게되였다. 류지단(劉志丹)이 희생되여 63년만인 것이다. 그따위 치떨리는 우매무지한 폭행이 다시는 생기지 말아야 한다! 영원히 생기지 말아야 한다!
228    에세이 도대체 누가 애국(愛國)인가? 댓글:  조회:4766  추천:6  2013-01-30
   에세이 도대체 누가 애국(愛國)인가?   인간은 창작본능을 갖고있다. 하기에 끊임없이 창조작용을 발휘하는 것이요 문화는 발전하게되는 것이다. 이 발전은 인간의 필요에서 나오거니와 인간본능에서 나오는 숙명이기도하다. 한데 이런 민족문화와 발달의 원동력인 민족사상이 고갈돼서 작용을 못하고 그것이 한갓 옛것에 매달린다면 그 민족의 문화는 결정코 퇴보하거니와 따라서 민족은 결국 멸망하게되고마는 것이다. 한편 또 그렇다고 민족의 관습을 떠나 그 어떤 공상적인 문화를 내온다면 그때는 또한 두말할것 없이 발전은 고사하고 민족은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뚜렸한 그 견본을 우리는 바로 지나간 60~70년대 중국에서 들끓었던 "문화대혁명"에서 찾아볼수 있는 것이다.   현금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경제모식을 본딴 중국식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본래인식되였던 사회주의리념은 부결되고 새롭게 모색되여 찾게 된 것시 결국은 유교인 것이다. 8년전인 2005년도 9월초에 200명이 넘는 중국의 지도자와 화교학자들이 한지리에 모여 유학연구대토론회(儒學硏究大討論會)를 연바있다. 그때 그 모임에서 도출된 한결같은 주장인즉 바로 "유학에서 사회충돌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 2005년 9월 27일자)   이로부터 중국의 국학도 의연히 전통종교인 유교의 토대우에서 지속하게되였던 것이다. 과연 잘된일이다. 독자는 다들 한때 천안문광장에 높다란 공자동상이 버젓이 일어섯다는 소식을 들은일이 기억날 것이다. 틀림없다. 과연그랬다. 한데 그것이 지금은 력사기념관에 들어가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아마 아직은 천안문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초상과 그냥 마주하기가 불편해서 그리로 옮겨진것 같다. (백성들에게 인식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을 발동하면서 맨먼저 부르짖은것이 퍼쓰쥬(破四舊)였다. 퍼쓰쥬(破四舊)란 낡은사상, 낡은문화, 낡은풍속, 낡은습관을 가리킨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는 는 사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제기된 "몇천년래 일체착취계급이 만들어서 인민을 해쳐왔던 낡은사상, 낡은문화, 낡은풍속, 낡은습관"이라는 구호가 결국은 문혁(文革)의 로 고착되면서 퍼쓰쥬,리쓰신(破四舊,立四新) 즉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고 네가지 새로운것을 세우자는 것이 문화혁명의 목표로 되었던 것이다. 한데 네가지낡은것을 어떻게 타파할것인가에 대해서 중앙은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그 시대를 겪어본 사람이면 다가 알다싶이 문혁(文革)이란건 그를 발기한 자가 불민함으로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것이 중화의 문명에 해를 끼친것을 보면 너무나도 한심하고 혹심해서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그때 공자(孔子)를 비롯한 허다한 선인(先人)의 능묘(陵墓)들이 정도부동하게 털리우고 파궤되였거니와 문물은 대량으로 훼손되였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중국은 제민족의 고유한 경천법조(敬天法祖)의 문화전통을 제절로 부정하고 제손으로 구중천에 내던져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한심한 바보짓이였다!   문화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검열과 지지를 받은 북경의 홍위병들은 샤딩줴신(下定決心)을 부르짖으면서 기차로 산동에 가 공자묘부터 뢰관(雷管)으로 부셔버렸다.   산동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삼공(三孔)"이라 부르는데 공묘(孔廟)는 제를 지내는 곳이고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의 가족묘지가 있는 곳이고 공부(孔府)는 세습적인 연성공(衍聖公) 즉 서한(西漢)때로부터 공자의 처가편의 후예가 거주하는 곳인바 중국에서는 명나라때와 청나라때에 황궁못지 않게 대량의 력사당안과 문물이 보존돼있었다. 그런것이 퍼쓰쥬(破四舊)바람에 맨먼저 파괴되고 도적을 맞아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1966년 8월 23일, 곡부현정부는 외지의 홍위병들이 곧 들이닥치리라는 소식을  접하게되였다. 그러자 곡부제1중학교에서는 "시급히 동원하여 일체 계급적들의 파괴활동을 방지하자!"는 프랑카트를 만들어 교문에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농민들도 신속히 모여와 공부의 문을 지켰다. 미처 붉은완장을 만들어 팔에 낄 새도 없었던 그들은 그저 붉은 천오리에 "빈하중농"이라는 네글자를 써서 앞가슴에 달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분노했다. 홍위병들이 이제 삼공(三孔)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집집의 나무상자들을 거두어 그것으로 삼공(三孔)입구에 있는 돌사자를 가리웠다. 그래놓고는 모택동의 상을 들어다 그앞에 놓고서는 표어를 내걸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그같은 노력은 공자를 반격하는 노조(怒潮)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무기력했던 것이다.   1966년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이였던 진백달(陳伯達)은 북경에서 전보로 "공묘, 공부, 공림을 태우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했던 것이다. 같은날, 중앙문혁소조성원이였던 척본우(戚本禹)는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는 "명대이전의 석패들은 남기고 청대의 석패들은 부수어도 된다.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상방보검(上方寶劍)이라 그같이 상급에서 특허한 권력이 있는지라 북경에서 간 홍위병들은 담이 커질대로 커졌다. 11월 13일에 그들은 공부(孔府)의 대문을 활 열어 제끼였다. 그러고나서 하루지나 15일날에는 대문앞에서 "공가점을 철저히 짓부셔버리는 선서대회"를 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패를 나누어 공묘(孔廟), 공림(孔林), 주공묘(周公廟)에 뛰여들어 비(碑)를 마구까부시고 편액들을 뜯어내리고 조각상들을 뚜드려마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세 흉흉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신주를 모신 감실에 뛰여든 홍위병들은 땅에 떨어진 성현의 머리를 뽈차듯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면서 좋다고 웃으면 서 고와댔다. 이와 동시에 홍위병이 당지의 농민들가운데서 뽑아낸, 손에다 곡괭이와 삽을 든 자들로 무어진 한무리의 "쪼판패"는  공자(孔子), 공리(孔鯉), 공급(孔伋) 조손삼대의 모를 파헤치는 작업을 동시에 벌렸던 것이다.   11월19일, 거대하고 무거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비(碑)를 끌어 엎어뜨리고는 그것을 두동강으로 만들어버렸다. 혁명적인 꼬마맹장들은 그래놓고나서 뢰관(雷管)과 작약으로 공자의 모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막지 포악한 행위였다. 홍위병들은 그렇게 한 후 공림에서 다섯구의 시체를 끄집어냈으니 그것은 75대 적손(嫡孫) 공상가(孔祥珂)와 그의 부인, 76대 적손(嫡孫) 공령이(孔令貽)와 그의 처 외 하나였다. 시체를 꺼내보니 그때까지도 별 손상없이 거의 완정하게 보존돼있은 것이였다. 그런것을 홍위병들은 쇠꽉지로 찍어서 모양없이 만들었거니와 파낸 시체를 그 자리에다 대엿새를 내쳐두었다가 그냥보기사 싫었던지 공림의 동남쪽에 있는 흙구덩이에 가져다 처넣고는 불에 태워버린것이다.   홍위병들이 그같이 모를 파헤친 후 혁명적인 촌민들은 발광적으로 모안에 있은 순장품들을 도둑질해갔다. 그때 밤에 뜨락또르로 모들을 밀어버렸는데 그번 도둑질에 부자가 된 자가 적지 않다는 설이 지금도 나돌고있다. 2천년넘도록 보존되여 내려오던 근 3,000여무에 달하는 공씨가족의 모들은 이렇게 거덜이나고 만 것이다. 말대 연성공(衍聖公)인 공덕성(孔德成)은 공령이(孔令貽)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면서 거의 강박하다싶히 데리고갔다. 그는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륙을 그렇게 떠나간 그가 생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한번도 조상께 제를 지내지 못했거니와 대륙에서는 조상의 모와 시체들이 다 그모양으로 형편없이 만들어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랬은즉 숨이 지는 시각까지 그는 그 모욕과 치욕을 어떻게 참고 받아냈을가?    당년에 혁명자가 퍼쓰쥬(破四舊)를 하고 리쓰신(立四新)을 해야한다면서 철없는 홍위병들을 추기여 저지른 천추에 용남못할 그 죄악들이 이제는 력사에 꼭 기재될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같은 사실들이 많고많지만 나는 다른건 더 말하지 않겠다. (독자는 내가 재작년에 이미 써 올린 "후례자식의 혁명"을 비롯하여 "음지에 묻힌 비밀"에서 유관자료들을 더 찾아 한번 읽어보기바란다.)        "대륙에서 줄기차게 문화대혁명을 하느라 할 때에 대만성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중화문화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1966년 11월에 손중산(孫中山)의 아들 손과(孫科)와 공자의 적손(嫡孫)  공덕성(孔德成) 등이 련명으로 발기한 것이였는데 포괄된 내용은 "대량의 고적(古籍)들을 정리하고, 중국력대의 충효인물(忠孝人物)과 문선들을 편찬인쇄하며, 중국과학기술사총서를 편역하며, 중국인문(中國人文) 및 사회과학총서를 편찬한다" 는 것이였다.     (에서)   그리고 장개석은 생전에 미국이 세 번이나 대륙에다 원자탄을 던지자는것을 그러면 절대안된다고 막았다. 그런다면 자기는 민족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였다. "文革"기간에도 그는 쏘련에서 같이 손잡고 대륙을 치자는 제의역시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일축해버렸던 것이다.  (文革時將開石拒絶蘇聯帮助反共大陸을 보라)   도대체 누가 애국(愛國)인가?  이역시 다시금 숙고해봐야 할 일이겠다!  
227    에세이 이에낭아 사부로ㅡ그는 댓글:  조회:5162  추천:3  2013-01-28
     에세이 이에낭아 사부로ㅡ그는   ☹ 성명: "지난 력사를 몰라도 산다"는 무지한은 보지 않아도 됨.   언젠가 나는 인터넷에서 청람색나는 학생복을 정갈하게 입은 16~18살나이의 근 20여명에 달하는 녀자애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웃으면서 지하철까지 와서는 차가 오니 구령을 부르면서 함께 투신자살하는 끔찍스런 장면을 보고는 적이 놀랬거니와 일본사람의 성격은 변태적라고 한 불란서의 어느 사상가의 지적은 과연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되였다. 그 불란서 사상가는 구라파사람들의 눈에 일본사람은 종자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피비린내를 즐겨 남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악한민족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사람들은 거개가 고집불통이여 제멋대로 하니 몹시 우매하거니와 무지하기 또한 그지없다면서 상급앞에서는 비굴하게 "하이! 하이!" 하면서 허리를 꿈실거리지만 하급을 대함에는 그지없이 조폭하고 혹독하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더 보탰는데 그것인즉 일본사람은 쩍하면 남을 죽이거니와 자기가 남한테 모욕을 받은 것 같으면 밸을 못이겨 자살을 한다면서 제 목숨도 그렇게 귀하게 여길줄모르는 인간한테 무슨 자비심인들 있겠느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은 그야말로 보복과 살기가 너울치는 혼란스런 나라라는 것이였다. 그의 그러한 평가가 과연 옳은지는 몰라도 듣고보니 망탕소리는 아니였다. 하기에 일본에는 지어 "할복자살문화"까지 생겨나 그것을 선전하고 배워주기까지하는게 아닐까?!   불란서대통령이였던 드골역시 생전에 말하기를 "일본이란 이 음험하고도 교활하고 잔인한 민족은 피비린내를 즐긴다. 하기에 네가 만약 그들에게 약하게 뵈여  없신여김을 당하기 시작하면 중세기 때 구라파에서 흡혈귀로 소문났던 더쿠라모양으로 조금도 사정없이 너의 목주래를 물어뜯어 끈어놓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지어 어떤 사람은 일본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폄하를 한다.   첫째는 인간다운 말을 하지 않고, 둘째는 옳은소리를 할줄을 고르며, 셋째는 횡포하고 무지막지하여 헛소리를 잘치고, 넷째는 미국사람의 바줄에 억내여 지악스러운 개가 되었고, 다섯째는 싸우다가 질것같으면 독가스를 뿌리린다. 이러면서 일본에서는 아직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또오 히로부미나 도죠 히데끼같은 군국주의자들의 유렁이 살아서 너울치길래 국민은 모두가 년년이 넋을 기리고다는 것이다. 과연 심각히 사색하게 되는 일이다.   그나마 아직은 70~80대의 늙은이들이 살아있어서 우리 민족이 지난날 일제식민지하에 36년간 노예로 살아왔던 그 눈물겨운 수난의 근대사를 회고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아직은 고대사라부르기에는 이르는 4백여년전에 우리 민족이 입은 한차례의 심하고도 뼈아픈 참화에 대해서는 자라는 세대들이 전혀 깜깜인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의 어느 무지한 대항자(혹은 추종자일수도있고)가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나보고 또 "시궁창에 썩고 잇을지 모르는 오물"을 끄집어낸다고 비난하겠지만 여러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아마도 우리와 우리의 후대가 잊어서는 아니 될 한단락의 력사를 말해야겠다.   일본에는 지금도 세상에 유일무이의 커다란 코무덤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전라도 남원성 전투와 충청도 지역 전투에서 조선사람들의 코베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산 자든 죽은 자든, 병사든 일반인이든, 그런것을 모두 가리지 않고 녀성, 아이, 로인까지 마구닥치는 대로 코를 베여 수집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그먼저의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거점이였던 "전라도를 전멸시키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모든 다이묘가 자신의 전공의 증거로서 가신들에게 무차별 코베기를 명령한것이 원인이였던 것이다. 일본병사는 1인당 3개의 코를 할당받았다. 그들은 잘라낸 코를 소금, 식초, 석회 등으로 방부처리한 뒤 1,000여개씩 나무통에 넣어 군 감찰관에게 가져갔다. 군감찰관은 병사들이 잘라온 코의 수를 증명하기 위해 코령수증을 발행하였다. 현재남아있는 코령수증 수를 기준으로 해서 추측하면 10여만개이상이 될 것이다. 왜란당시 재상이였던 유성룡이 남긴 "정비록"에는 "적병은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을 붙잡기만하면 코를 베여 위세를 보였다"고 기록되였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 교넨(慶念)의 "조선일일기"에도 "력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것은 없다. 병사들이 가는곳마다 살육을 일삼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사람의 머리와 코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고 기록되여있다. 일본병사들은 이를 모아 오사카로 보냈고, 오사카에서는 큰 통에 코를 넣어 도요토미에게 보냈다. 이것은 교토지역의 주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기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로 응용되였다. 그뒤 도요토미는 모인 코를 묻어서 분묘를 만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하도록하였다. 이후 에도시대의 새로운 통치자인 도쿠카와 에이야스를 섬긴 유학자 하야시 라잔(羅山)이 코무덤(鼻塚)의 잔인한 인상에 고민하다가 코무덤이라 새겨진 비석을 없애고 귀무덤(耳塚)이라 불러 그 명칭이 전해지고있는 것이다.   나는 이같은 력사를 "한일공통력사인식의 견고한 초석이 되길바라서" 일본과 한국의 량심있는 교육자들이 손잡고 각고의 노력끝에 편찬해 낸 "조선통신사"를 읽고서야 알게되였던 것이다. 대단히 고마운일이다.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에 감사를 드린다.   한데 유감스러운 것은 일본이 너무나 허심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남경대도살"을 포함한 중국침략전반에 이르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승인하지 않거니와 반성을 하려하지 않고있다는 그것이다.  과연 너절하고 괘씸한 일이다. 13년전인 2,000년에 주용기(朱鎔基)가 일본에 갔다가 한차례 일본민중과 중요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당시  51세에 나는  히로시마(广岛)의 한 관중이 한 말인즉은 자기는 일본군이 전쟁때 행한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 몹시 가책을 느끼노라해놓고는 그런데 중국에서는 시종 우리보고 잘못을 빌라고 하는데 대체 어느때까지 빌라고 할건가고 질문했다. 그러자 주용기총리는 "내가 일깨워주지, 소유의 문건을 보면 일본이 중국인민앞에 제잘못을 승인하고 빈적은 하나도 없다. 1995년에 일본수상이 그저 롱통하게 아세아주인민들에게 잘못을 표시한다고 한마디했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때까지 빌어야할지는 일본이 알아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빌건 빌지 않건 그건 당신들이 할탓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이 일에 대해 심각히 교려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일본이 제잘못을 충분히 빌었냐 빌지 않았냐는 하는건 여론조사에서 다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전체국민의 20%가 잘못을 승인하고있다. 중국측은 어떤가? 겨우 2%정도의 국민이 일본은 빈걸로 알고있는 것이다. 대련(大連)에서 태여나 할빈(哈爾濱)에서 자라나서 오사까에 온 한 중년사나이가 지금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남경대도살"이란 근본 없는일이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고 주용기총리에게 물었다. 이에 주용기총리는 간단히 말했던 것이다. "남경대도살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증거를 충분히 장악하고있다." 이에 당년 79세에 나는 일본의 요코야마( 橫山)교수(敎授)가 "주총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일본은 한번도 잘뭇을 빈적이 없습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대단한 용기였다고 하겠다.   일본은 지금도 거의 우파세력이 판을 치고있길래 솔직한 반성이 있기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이런 형세, 이런 환경속에서 일본사람으로서  과감히 국가에 도전하여 40여년간이나 맛서서 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인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그를 "제사(帝師)로부터 변절자(變節者)로 된 사람"이라 욕하고있다. 다시말해 "임금의 스승으로부터 변절자"로 되었길래 너는 이제는 임금의 스승도 아니고 일본사람도 아니라는 비난이다. 하지만 이에낭아 사부로는 굽어들지 않고  "매개 일본사람 다 죄가 있다"고 떳떳이 선포하고는 국가와 견결히 맛섯던 것이다.    근대건 현대건 중일(中日)량국은 력사가 긴밀히 련계되고 얽히였는바 서로의 모순이 맛물림으로하여 각기 력사관도 다르게 된 것이다. 허심하지 못해 본성을 개변할 수 없는 극우세력은 일본이 지난날에 저지른 천추에 용납못할 죄과들을 죽어도 승인하하려하지 않거니와 지어는 그것을 당연하고 옳은 것으로 미화하기까지 하고있는 것이다. 야마도민족이 세상사람들에게 의연히 악질로 락인되고있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여지껏 임금의 스승노릇을 해왔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의 반역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세끼에 투하된 원자탄과도 같이 온 일본을 진동시킨 것이다. "일본사람이 잘못된건 바로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한 것이다.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1913.9.3ㅡ2002.11.29)는 일본의 력사학가며 교육가였다. 그는 1937년에 도오꾜제국대학 문학부국사학과를 졸업하고는 도오꾜대학의 전신인 도오꾜고등사범학교에서 일본사상사를 교수했다. 그러다 그는 1948년에 와 을 써냄으로 하여 최고권위인 일본학사원(日本學士院)의 "은사상(恩賜賞)"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학술연구에 종사하는 이라면, 특히는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일본사람이면 누구나 다가 꿈에서마저 바라는 최고의 영예상인 것이다. (일본학사원은 일본의 최고학술기구로서 중국과학원과 같음)   전쟁이 끝난지 얼마안되여 그는 거대한 정력을 몰부어서 을 써냈는데 그것은 동류의 많은 책가운데서는 영향력이 가장 컷다. 하기에 경상적으로 연구자들에게 인용되고있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3성당(三省堂)의 고중용 편찬사업을 맡아했었다. 관례대로 하면 교과서를 편찬하려면, 더욱히 력사교과서라면 다가 연구령역에서 부동한 전문가가 모이여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편찬하기로 돼있었지만 3성당(三省堂)만은 규례를 벗어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  그  한사람에게 도맡곁으니 이는 그가 온 일본치고 그 누구보다모 학술수평이 높았음을 의미하는게 아니겠는가! 일생을 저술사없에 헌신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력사교과서가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은것을 발견하기만하면 가차없이 지적했다. 1952년에 그는 일본고급력사교재인 를 편찬하면서 객관적인 각도에서 공정하게 일본력사를 기술하여 그를 광범하게  사용하게끔게했던 것이다. 그런데 1962년에 이르러서는 일본문부성(日本文部省)이 교재를 검열하는 과정에 "남경대도살"내용을 비롯한 오키나와전쟁(冲繩戰爭)의 기원에 들어가서 서술이 맞지 않는다면서 부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전쟁을 너무 암흑하게 여기고 국민이 죽을힘을 다해서 전쟁을 지지한 광휘로운 형상은 쓰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文部省은 그가 "민족애가 부족하다"면서 "애국주의를 주선률"로 해야하는게 아니냐, 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거니와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가 교과서를 리용하여 학생들에게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주입하려한다면서 공격했던 것이다.   文部省이 그가 편찬한 력사교과서를 부결했지만 그는 완전히 상반대로 력사교과서는 사실이 되어야지 외곡되여서는 절대안된다고 자기의 주장을 지켰다. 그러니 文部省은 그와 좋게 타협하려했다. 허지만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력사를 고치면 외곡이 되길래  절대 그럴 수 없노라고 제 주장을 그냥 내 뻣히였던 것이다. 그러자 文部省은 그의 교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지었다. 하여 1965년 6월에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文部省의 교재검정은 위헌이며 학술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국가기구를 법에 기소했던 것이다. 결과 그는 패소했다. 하지만 그는 1970년에 다시걸었고 그것이 패소하자 그는 1984년도에 또다시 세 번째로 文部省을 법에 기소했던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가로서 국가에서  천황의 관리와 학자를 배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운 도오꾜교육대학(现筑波大学)의 교수를 지냈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3만명에 이르는 "교과서소송 전국련락회"의 성원을 발전시켜놓고 2002년 11월 29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그가 사망한 이틑날 집식구와 친척들과 그의 생전지기 몇몇만 모이여 소리없이 간단히 치르었다. 력사진실을 주장하여 40여년간을 국가와 맛서 완강히 싸운 그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영광스럽거니와 그 정신은 그야말로 보귀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은 희망이 있을것이고 그러지를 않는다면 일본은 영원히 쑈를번꾸이즈(小日本鬼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벗어메치지 못한채 세인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나는 구천에 간 정직하고 솔직하고 용감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의 명복을 빌면서 일본은 속히 개변이 있기를 바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226    에세이 얼꾸이즈(二愧子)되지말자! 댓글:  조회:6573  추천:4  2013-01-25
  에세이 얼꾸이즈(二愧子)되지말자!   한달을 못넘기고 련속 이어지는것이 문단소식이다! 나는 오늘도 연변에서는 시인, 촬영가, 미술가가 모여 무슨 책의 출판을 기념하는 회의를 열었다는 소식을 이 조글로를 통해 알게되였다. 응당 기뻐하고 경축하고 해야 옳을 일이지만 그렇지 앓다. 나는 지속되는 불안과 조급이 널을 뛰듯이 뜀질을 해서 이 글을 쓰게되는 것이다. 사진을 보니 면목있는 얼굴도 있고 기억되는 이름도 몇이 되는데  다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주력이요 그래서 지도급인물이요 지성인들인데 앞가슴에 꽃을 단 분들로부터 상우에 명함을 올려놓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바쁘겠지만 단 몇분간의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나의 이 글을 한번 읽어들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비록 날릴만한 이름도 없는 보잘것 없는 이 소인이 쓴 글이다만은 주책없이 내지르는 헛소리는 아니니 다들 나의 이 글을 쓸데없는 넋두리로 취급말고 참답게 읽어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다시다시 내가 이 글을 쓰게되는 동기가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중히 여겨주면 고맙겠다.    사진을 보니 최룡관이도 있는데 특히 그부터 내가 이번에 올리는 글 제목을 똑똑히 보고 그 내용을 명기하기 바란다. "연변동북아연구원"이 하는 행사들은 좋은것이 아니다. 그러니 즉각 중지하기를 나는 권고한다. 그 리유는 한마디로 찍어 말해 "연변동북아연구원"의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기념행사들은 제 민족의 감정에 로골적으로 역행하는 철두철미한 반민족적 친일행위기 때문이다! 내가 이같이 찍어말하면 최룡관은 의례 대노하는 상을 찌프리면서 청마 유치환이 어쩌면 한간문인이 되느냐, 한국에서는 딱히 규명하지 않았는데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히 뛸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자기가 평한 "首"를 그냥 "秀作"이라 우길것이다. 그런다면 그건 자신이 잘 알듯이 낯을 가리고 아옹하듯 염치없는 짓이 되고만다. 그래도 옳다고 그냥 우기겠거든 어디 새로 발견된 청마의 그  친일산문ㅡ 1942년 2월6일자 "滿鮮日報"에 발표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마저 "秀作"이라 글재간을 부려 평하면서 떳떳이 나와보라. 너의 그 문인이기 전에 시정배의 작태가 어떤가를 볼테다.   내가 전날 "를번꾸이즈(日本鬼子)"와 "이러면 절대안되는데!" 하는 두 문장을 여기에 올렸으니 최룡관은 미처보지 않았다면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내가 오늘은 "얼꾸이즈(二鬼子) 되지말자"를 올린다. 해방전에 중국사람들은 우리 조선사람을 얼꾸이즈(二鬼子)라면서 사무치게 증오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8.15광복이 되니 일본놈의 앞잡이는 다 잡아치워야한다면서 피비린 복수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 실례로: 1946년 5월 14일, 한밤중에 왕소정(王小丁)비도 200여명은 목단강시 북쪽 팔달구촌(八達溝村)을 습격하여 그 촌의 촌장 장정국(張正國)을 비롯한 농회위원 김남수(金南洙) 등 넷을 살해하였거니와 몇십명을 때려서 부상입히고는 현금 7만원과 옷 몇천벌과 촌자위대의 무장을 전부 거둬갔던 것이다. 1946년 5월 26일, 곽흥전(郭興典ㅡ곽털보)이 저의무리 700여명을 휘동하여 동안시(지금의 密山)에 달려들어 조선사람 300여명을 붙잡아  학교에 가둬넣고는 작탄과 기관총으로 전부살해하였는데 피가 밖으로 도랑물같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런속에서 이웃에 마음좋은 한족이 있었기에 조선아이 몇은 낯에 검댕이를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그 집의 애로 가장됐기에 살았고  어른 몇은 천정과 마른 움에 숨어  요행 살아아났던 것이다. 그러한 비극은 팔면통(八面通)에서도 발생했더랬다. 일일이 례를 더 들지 않겠다.   하다면 이런 끔찍스런 비극들은 왜서 벌어졌던가? 인식이 모한 어떤 중국사람들의 눈에는 조선사람들이 일본사람의 앞잡이로 두번째 일본놈 즉 얼꾸이즈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사람이 다아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함으로하여 일어난 항일전쟁초기였던 1936년 12월 13일, 를번꾸이즈(日本鬼子)가 남경(南京)을 점령해서부터 6개월간에 감행한  "남경대도살" 하나만 보기로 하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서 원동국제법정과 남경군사법정이 통계를 한데 의하면 남경대도살에 목숨잃은 백성과 포로되여 죽은 중국군이 20~30만이였는데 그중 약 2만에 달하는 부녀는 살해되기전에 침략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가옥은 3분의 1 이나  불타버린 것이다. 1973년 일본방위청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250만의 일본군인가운데서 한국적(韓國籍)을 가진 얼꾸이즈(二鬼子)병사가 160만이였는데 그중 위만주국에서 간 얼꾸이즈(二鬼子)병사가 38만이였다. 한데 전쟁이 끝나 전범(戰犯)으로 심판받은자 148명중 사형이 된건 불과 23명밖에 안되였다. 살아난자들은  후에 월남전쟁에도 참여했는데 몹시 악독했다고 한다.   를번꾸이즈(日本鬼子)가 흉악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흉악한 것이 한국국적을 가진 일본병 얼꾸이즈(二鬼子)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있었는가? (此记载于日本1972年出版的《三光作战》为日本老兵从中国归还者协会老兵集体写作) 나도 전혀 빋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많은 사실이다. 무엇인가?  조선사람은 그 어디에 가 있건간에 그때는 다가 일본식민지하에 목숨이 매여진 신세였기에 장개석은 8.15광복전에는 줄곧 중국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을 끝까지 조선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그것이다.   지금 어떤 중국사람은 생각밖에도 남경대도살 때 군령(軍令)을 위반하고 중국부녀들을 강간하기 시작한건 일본군인인 것이 아니라 한국국적을 가진 얼꾸이즈(二鬼子)였다고 말한다. 송정석근(松井石根) 15사단에 배속돼 있었던 한국련대(퇀급)였다는거다. 과연 그랬을가? 남경을 점령했을 때 인원을 보면 일본군대내에서 얼꾸이즈(二鬼子)가 차지하는 비례가 그리낮지는 않았다. 고급군관이 전체고급군관의  40%를 차지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에 적잖은 일본군관이 회억록을 썻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적의 군인들은 일본천황에 적극충성했다고 했다. (그러한 충성이 중국사람의 눈에는 오로지 잔인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남경대도살" 때 전문 시체나르는 일을 했기에  목숨을  살려낼 수 있었던 행운의 생존자ㅡ 남경자동차집단의 퇴직공인(기자가 방문했던 해에 81세) 왕극검(王克儉) 로인의 회억을 들어봤는데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 한국내에서는 말을 못하게 하겠지만 철갑모를 쓰지 않고 쎈또보시를 쓴 한국병 얼꾸이즈(二鬼子)들은 부녀를 간간하고나서는 자궁에 칼을 박아 죽이거나  산채로 배를 가르고는 밸을 끄집어내여서는 녀인의 머리에  감기까지 했으니 그 잔인함이 를번꾸이즈(日本鬼子)만 더하면더했지 짝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까지 했단말인가? 그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중국의 어떤 네지튼은 이렇게 공공연히 부르짖고있는 것이다. "이름을 또 지을건 뭐야, 어디서왔으면 어디로 가버려. 妈了个B的, 记住这帮杂种."   (資料參考: )   일제가 중국을 침략했을 당시 위관급(尉官級)이였던 백선엽(白善燁)은 후에 남조선군의 총참모장을 지냈는데 사성상장이였다. 위만때로부터 그의 두 손에는 무고한 중국백성들의 피가 랑자하게 묻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식민지하에 징병된 자라하여 목숨을 살려낸 그는 여지껏 90살이 넘도록 살았다. 추종자들은 그의 동상을 해세웠고 KBS는 전해에 그에대한 다큐까지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지성인들의 반발을 일으켯거니와  그 일을 중국에서도 알고는 네지튼들이 아직도 비난을 퍼붓고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 말은 하는가? 이제는 9년철이 된다. 2004년 5월중순에 한국 EBS에서 취재를 왔기에 나는 몇가지 력사문제와 중국에서는 광복이 되자마자  친일파 한간을 숙청하는 작업부터했기에 우환이 없는건데 한국은 그러지를 않아 친일파 한간의 자식이 잃은 땅을 되돌려달라고 법에 소송을 거느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생겼다니 웃기는 일이 아닌가,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 일을 중시하는게 좋겠다고 촉구하면서 나의 이 말을 로무현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한바가 있다. 후에 나는 친일분자를 규명했다는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철저히 되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환이 생기고있는 것 같아서 신경이 일어서는 것이다.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은 지금 도대체 무슨짓을 하고있는가? 만주국협화회의 주요성원이였던 청마 유치환의 문학은 친일파한간문학이였음이 분명하거니와 그 본인의 신분역시 그러함에도 (렴치짝을 잃어가면서) 공공연히 친일세력을 부추켜세우고있는게 아닌가? 력사를 잃는것은 곧 배반이다. 극히 개별적이긴 하지만 인터넷에서 한족네지튼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 목소리를 한번 똑똑히 들어봐라. 우리들 조선족까지 싸잡아 얼꾸이즈(二鬼子)라고 부르고있것이다. 아무리 민족단결이요 뭐요해도 여론이 험악해져 잘못번져지면 그때가서는 우리들의 처지가 달라지고 말 것이다. 물론 공산당의 옳바른 시책에 마음이 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 나는  곽청전비도가 얼꾸이즈(二鬼子)는 다 없샌다면서  일으켰던  광복때의 "동안사변"이 되생각나 심히 불쾌하다. 양호우환(養虎憂患)이라했다.  최룡관은 임시닥드린 제 코앞의 리익에만 눈이 멀어 맹동을 하지 말라! 우리가 그래 한족들한테서 또다시금 얼꾸이즈(二鬼子)다는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들을건가? 그들에게 절대 나쁜인상을 심어주지 말아야한다! 안그런가? 지성인모두가 잠을 깨고 각성하길 두손모아 빈다!             朝鲜籍鬼子 ▲将军级 金应善 鱼  潭  王瑜植  李熙斗  洪思翊     ▲佐官级  姜锡佑 康弼佑  高良弼  高永均  权承禄  金基元  金锡源  金亨燮  南宇铉 朴斗荣  朴范集  朴胜薰  朴在兴 白洪锡 申应均 申泰英  安秉范 元容德  柳冀圣 刘升烈 柳元孝 尹相弼 李大永 李秉规  李龙文  李应九 李应俊  李锺赞  李学来  李炯锡  李浩鎭 林  业  林在德  张然昌  全永宪  郑观秀  郑斗源 郑 炫   蔡秉德      ▲尉官级   姜琪泰 姜东烈 姜在浩 桂炳辂 高起范 高俊峰 高俊烈 具东旭  权宁汉 权泰翰 金东元 金东河 金明德 金白一 金思锡 金锡岚  金锡范 金声云 金成勋  金纯善 金信道 金跃先 金 瑛 金永珏  金永禄 金泳秀 金永新 金玉琪 金龙纪 金龙虎 金润根 金应祚  金仁旭 金一焕 金贞烈 金正晧 金贞熙 金锺硕 金锺植 金周赞  金埈元 金重圭 金振吉 金振武 金昌圭 金昌宇 金铁男 金忠男  金忠助 金镐梁 金洪俊 都一平 明勇银 文履祯 文容彩 闵德镐  朴东均 朴东俊 朴奉祚 朴元锡 朴林恒 朴正熙 朴昌夏 朴泰熙   方圆哲 方泰旭 白庆春 白善烨 白仁俊  徐英哲 徐日宝 徐廷弼  石主岩 石希峰 孙炳日 宋锡夏 申尚澈 申鹤鎭 申铉俊 安光铢  安永吉 安永耻 安益祚 安洪涛 杨国鎭 杨大鎭 杨振东 严柱明  廉昌燮 呉俊杰 呉璡泳 禹锺铉 元容国 柳宽熙 刘光烈 兪原植  刘载兴 柳喜章 尹悳炳  尹士新 尹春根 李 珏 李绛宇 李圭一   李根默 李奇建 李德振 李东岩 李东俊 李东勋 李丙胄 李逢春   李尚振  李成林  李升宁 李英杰  李永山 李英春  李  龙 李龙星   李元衡  李宜丰 李济祯  李锺馨  李周一 李春城  李翰林  李亨根   李兴权  李喜谦 林秉圭  张光烈  张箕春  张玑衡  张锡伦 张星熄   张星焕  张永锡 张裕根  全南奎 田源上 丁来赫 郑祥秀 郑云鸿    郑殷熔  丁一权  郑一平  郑  勋  赵大镐  赵秉权 赵性根 池麟泰 池章华  池振国  池治龙  车万载  车  荣  崔庆万 崔鸣夏 崔福洙   崔鹏俊 崔世昌 崔承业 崔贞根 崔周锺 崔昌植  崔昌彦 崔学珍  韩镛显  洪 涛  洪文杰 
225    에세이 이러면 절대안되지!! 댓글:  조회:5196  추천:10  2013-01-22
   에세이 이러면 절대안되지!!    방금 "연변동북아연구원"에서 새해들어 "새해, 영광이 있으라"는 주제의 모임을 가졌다는 보도를 보았다. 보도는 "이 문화연구원의 최룡관원장에 따르면 2012년 한해만도 연구원에서는 '연변청마문학제' 및 '청마백일장'을 주최하고 대량의 촬영, 음악,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하면서 "문학부에서는 최룡관시인이 평론 '수'는 수작으로 한국에서 제5회 청마연구상을 수상했다고 알렸다. 나는 조글로에 오른 이런 글과 사진만을 보았을 뿐 연변에 있지 않으니 "연변동북아연구원"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것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국가의 인준을 받은 떳떳한 연구원인지 아니면 국가에서 설치하지 않고 몇몇이 모여 꾸리는 민간활동조직인지?...자못 혼란스럽다. 개혁개방이 되어서부터 국내질서가 문란한 틈을 타 딴심보를 품은 어떤 얼치기 문인들은 제가 지성인인양 양대가리를 내걸고 버젓이 개고기를 팔듯이 얼림수작으로 못된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나는 "연변동북아연구원"에서 새해에도 문화원의 주최로 제3회 '청마문학제'를 개최하게되리라니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나서 나서는 거다.   관동군사령 우에다 켄찌가 소화 11년 9월 18일에 내린 "만주제국협화회의 근본정신" 즉 1936년 그때  만주국전역에 내린 통고(通告)로부터 시작해서 "군사토벌과 치안숙정지일"이며 "관동군 853호명령"인 (关叁一发第 739号文件)으로부터 련달아 "관동군사령부 소화11년도 제2기 관동군치안숙정요강에 관하여" 를 비롯한 여러 명령들인 (关作命第119号), (关作命第853号),   (关作命第965号), (关作命第995号), (关作命第995号附件), (关作命第1063号),   (关作命第1063号附件)에는 다가 항일련군, 항일광복군을 비적(匪賊)이라했거니와 관동헌병사령관 후지 히토시 소장이 내린 "관동군헌병대명령"을 비롯한 여러 지시와 "강덕6년도 통화성 추동기숙정토벌계획"에도 마찬가지로 항일련국과 순조선사람으로 조직된 부대였던 항일광복군을 비적(匪賊)이라 그냥 규정면서 만주국의 "협화회원"으로 조직된 선무반(宣撫班)은 다가 토벌대에 배속되여 항일련군과 항일광복군의 귀순(歸順)을 담담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배치까지 있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표시하는가? 당시 만주협화 회원중 주로 지식분자로 조직되였던 선무반(宣撫班)의 사람들은 일제토벌대의 앞잡이가 되어 항일대오를 와해시키는 일역을 적극적으로 담당했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마 유치환이 선무반(宣撫班) 사람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가 협화회원(協和會員)이였음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협화회원은 무엇을 했는가?  "协和会主要从事 '策反' '招降', 搜集情报及其他反动活动"                        (黑龙江沿革史讲稿 452页. 黑龙江省档案馆)   보다싶히 위만주국 때 협화회원이였던 청마 유치환은 환영받지 못할 신분의 지식분자였음은 틀림없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1939년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북만에 들어가 살다가 1945년 6월에 귀향했다. 그는 귀향전 북만주의 빈강성(賓江省ㅡ지금은 흑룡강성내) 연수현(延壽縣) 신구 (新區)에다 "가신흥농회"라는 자연이민촌농장을 경영하면서 1943년에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한 것이다. 그에 썩 앞어 1932년7월에 일본청년 셋이 조직한 협화당이 협화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중앙에 회장을 설립하고 중앙사무국을 두었는바 6개지방에다 사무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바로 그 사무국에 들어가 사업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흑룡강성 경내에  있는 사무국이  본래는 하얼빈(哈爾濱)과 치치할(齊齊哈) 두곳뿐이였는데 후에 의란(依蘭)에다 사무국을 하나 더 세웠다. 그러면서 지방의 사무국아래에다는 판사처(辦事處)를 두었는데 하얼빈(哈爾濱) 지방사무국아래에다 할얼빈(哈爾濱),  일면파(一面坡), 녕안(寧安), 목릉(穆稜), 연수(延壽)  등 5개판사처(辦事處)를 세웠던 것이다. (흑룡강성당안관자료 455페지)   한즉 연수에 있었던 청마 유치환이 광복이 나기직전인 1943년에 하얼빈 협화회에 전근했다는건 그가 지방판사처에 있으면서 협화회의 일을 잘해서 중용되였다는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고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높이 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두눈은 먼 寒千(한천)에 모호의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 너의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였으리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熱(험열)함과 그 決意(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無賴(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不毛(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思慧(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연변의 최룡관이 궂이 수작(秀作)이라는 이 "수(首)"는 1942년 3월에 을 통해 발표했는데 보다싶히 분명 얼굴이 말라든 항일군의 머리를 조소하면서 보아라, 너희들도 시세(時勢)에 거역하면 저런꼴이될것이니 차라리 투항하고 "귀순"을 하라고 설교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런 시를 궂이 수작(秀作)이라는 자의 본의가 무엇인지야 불보듯 빤하지 않는가!.   아래에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에다 발표한 유치환의 다른 하나의 네단락으로 이루어진 짧은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보기로 하자. "오늘 大東亞戰(대동아전)의 의의와 帝國(제국)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황국신민)된 우리는(중략).... 오늘 赫 赫(혁혁)한 일본의 指導的 地盤(지도적지반) 우에다 바빌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선일보는 1937년부터 만주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발행된 조.석간 일간신문으로서 1945년 광복이 날때까지 친일성경향이 강했다. 뚜렸한바 유치환은 일본이 발동한 침략전쟁을 이같이 공공연히 찬양하면서 춰올렸으니 본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낸게 아닌가? 그의 문학은 그의 신분과 같이 철두철미한 한간문학이였던 것이다!                   그런 시인, 그런 인물을, 내놓고 떳떳이 기념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싶다. 기념 할 가치나있으면몰라도? 한국에서는 여러 지성인들의 심한 반발로 감히 행하지 못하는 행사를 왜서 연변에서는 받아들여 버젓이 벌리고있는가? 너무도 방자하게 논다. 연변은 대체 왜 이모양인가?  이 일을 연변자치주당위에서 알고있는지? 주정부는 이 일을 알고있는지?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다음글을 또 보라. 协和会是在东北的一些日本法西斯分子组织的伪国家团体,隶属于关东军。组织会员多是日伪军政要员及地方豪绅。该组织配合日伪政权镇压共产党和抗日武装力量。组织“排共特别委员会”,把“排共运动”做为“国民运动”。组织“青训指导委员会”,用各种形式向青年灌输反共思想。配合日伪政权抓国兵,把不合格者称为“国兵漏子”编入“勤劳奉仕队”,送到煤矿做苦役,很多人被折磨致死。1945年东北光复后此组织消亡。   사진을 보니 모인 사람이 꽤 되는데 나는 그들 다가 청마 유치환에 대해서 잘알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의 이 글을 보고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고 반발을 하겠거든 충분한 근거를 갖고 나오기를 바란다. 아마 시비를 가르는 철저한 대결이 있어야할 것 같다.
224    에세이 과일 한바구니가 일으킨 열풍 댓글:  조회:5114  추천:1  2013-01-20
  에세이 과일 한바구니가 일으킨 열풍   채시장(菜市场)에 망과(芒果)가 있길래 한근값이 얼마냐 물어봤더니 7원이란다. 맛이 언떤가고 사서  먹어봤다. 들들했다. "그리  힐끔하지도 않은걸 갖구서 되게는 요란을 떨었댔구나!?" 그것이 맛이 굉장할줄로 알았던 나는 쓰게 웃고말았다.   사전을 뒤져보니 이러했다. "망과(芒果)는 옺나무과에 속하는 상륙교목으로서 높이 30메터 가량에 잎은 호생하며 피침형이고 혁질(革質)로 광택이 나는데, 길이 10ㅡ30센찌임. 2ㅡ3월에 적색을 띤 백색의 작은 사판화 혹은 오판화가 가지 끝에 원추화서로 핌. 과실은 길이 5ㅡ15센찌의 달걀꼴 또는 긴타원형이고, 황록색 내지 황색 또는 적색으로 익음. 과실 '망고'는 맛이 좋은 열대의 진과(珍果)임. 종자는 약용, 어린 싹은 식용함. 말레이반도, 미얀마, 인도북부의 원산으로 예로부터 과수(果樹)로 재배하여 왔으며 대만 등지에서 널리 재배함. 맹고. 암라(菴羅)." 이런 과실 한바구니를 외국사람이 모택동에게 보내온통에 한때 중국에서는 수억만의 백성이 망과를 영접하는 들끓는 운동을 벌리게되였던 것이다. 그 일을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몽매하고 유치하기가 그지없어서 그저 쓰거운 웃음만나간다. 세상을 웃기는 그런 운동이 생긴건 1968년도 여름이였다.   다들 알겠지만 1979년 9월 9일은 모택동이 이 세상을 하직한 날이다. 그러니까  "모택동시대"에 종지부를 찍은지도 어언 34년이 되는 것이다. 하건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일을 비롯해서 지나간 그 세월에 친히 겪었던 몇가지 일들은 찰거마리같이 그냥 지긋이 달라붙어 잊혀지지를 않으면서 가끔 뇌리를 아프게 긁으니  이 글을 쓰게되는 것이다.   1968년에 파키스탄대표가 모택동주석에게 망과(芒果)를 한바구니 증송했는데 모택동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라"면서 그것을 공인계급에 보낸것이다. 한데 훗날 몇 개 나라, 특히는 제3세계의 나라들에서 모택동이 망과(芒果)를 좋아하는줄로 여기고는 그 과일을 보냈던 것이다. 하여 항간에서는 망과(芒果)를 맨처음보낸것이 알바니아의 호쟈라느니 비률빈의 총통부인이라느니 같지 않은 설이 나돌아 서로 엇갈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자료들을 찾아보게된건데 2004년 8월 7일자 파키스탄련합통신사에서 낸 "파키스탄의 망과가 지금은 중국시장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고서야 제대로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통신에 "파키스탄은 1968년에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할 때 망과(芒果) 한바구니를 모택동주석에게 증송했다"고 하면서 "모택동주석은 그 과일을 로동계급에게 보냈다"고 밝히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니 1968년 8월 17일자 의 보도가 절대틀리지 않은 것이다. 그 신문은 첫면에다 "모주석께서는 외국벗이 보내온 진귀한 례물을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보냈다"고 했던 것이다.   1968년은 바로 대만을 내놓고는 온 중국대륙에서 "문화혁명"이 가장 열광적인 기세로 전개되던 때였는데 모택동은 외국사람이 자기에게 준 례물을 그같이 처리함으로써 수억만인민의 자기에 대한 애대와 숭배심을 한층 더 격발시켰거니와 그 흉흉한 기세가 지어는 하늘끝까지 치달아오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최대의 관심, 최대의 신임, 최대의 지지, 최대의 고무. 우리의 위대한 수령 모주석은 영원히 군중과 한마음, 모주석께서 외국벗이 보내온 진귀한 례물을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보내셨다.''그때 이런 소식보도가 신문에 났더랬는데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다 요즘은 그 시절을 회억하는 한족친구를 알고 사귀게되면서 지난일이 새삼스례 되살아나 다시금 여러 자료들을 뒤지게되였다. 세상을 마치 돗자리감듯이 세차게 불어쳤던 그때의 "개인숭배열풍"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어느정도였는지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거의가 모르거니와  알수없고 지어는 상상도 못할것 같아서 다시금뇌이게되는 것이다.   모택동은 그때 "인민일보"가 말한바와 같이 "진귀"한 례물인  "망과" 한바구니를 청화대학에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 학교의 지식분자들인 교직원들을 생각해 먹으라고 보낸건 아니였다. 그때 청화대학에는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가 들어가있었는데 그 골간들은 북경신화인쇄공장, 침직총창, 북경27기차차량창, 북경남구기차차량기계창, 북경화공3창, 북경북교목재창 등 여섯곳에서 온 공인들이였던 것이다. 당사자였던 요즘 새로사귄 한족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공선대(工宣隊)가 청화대학에 진주하여서 약 3일만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모주석이 파견한 비서가 망과 한바구니를 갖고와서는 이건 외국손님이 모주석께 드린건데 모주석께서는 자시지 않고 공인들이 골고루맛보라고 보낸거라면서 "청화공인선전대지휘부"에 들여놓더라는 것이다.   1968년 8월 7일자 보도에는 다음과 같은 세절이 있다. "5일오후, 모주석께서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망과를 증송했다는 특대소식이 청화원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즉시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서 보내주신 진귀한 례물의 주위에 모이여 열열히 환호하면서 노래를 불렀거니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충성심을 모아 우리의 가장 경애하는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빌고빌었다! 만수무강! 만수무강!"    한데 망과 한바구니라는 것이 다해봤자 열몇개였다. 당시 공선대의 령도는 해방군이였는데(기실은 중앙경위퇀의 사람) 그가 이것을 자산계급지식분자들이 모여있는 청화원(淸華圓)에다는 절대 둘수 없다면서 그것을 6섯몪으로 나누어 공인간부들에게 주면서 제 단위에 갖고가 여러 공인들이 골고루 향수하게끔하라고 했던것이다.   그래서 나눠주는대로 저마끔 두세개를 갖고 단위로 간건데 공인들이 모택동이 베푸는 지극한 은정에 몹시 격동한건 더 말할 것 없었다. 그런데 입은 많고 과일은 두세개뿐이니 그것을 누군 먹을 수 있고 누군 먹을 수 없단말인가? 계다가 그 "금망과(金芒果)"들이 이미 무르익은것이여서 먹지 않으면 곧 썩게 될 것이라 오래둘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쨋으면 좋을건가 말이 많았는데 어떤데서는 아예 가져온 망과 두개를 큰 가마에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끓이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공인들이 렬을 지어 돌아가면서 그것을 한숫갈씩 떠먹었다. 한데 망과가 이미 썩은것이라 욕심을 부려 몇숫갈 더 먹은 사람은 그만 중독되여 배탈을 만낫던 것이다.   이러자 공선대(工宣隊)의 지도자는 머리를 앓게 된건데 그는 끝내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각 단위마다 망과걷면에다 파라핀(밀랍)을 발라 될수록 과일의 수명이 길게하면서 모두가 우러러보게끔 하는 것이고 둘째, 지금 당장 북경경공업계통의 기술자에게 맏겨 비닐로 모방한 가짜망과를 많이 만들어 전국각지에 보냄으로서 그 누가 공인이면 다가 골골루 눈으로 보게함으로써 영예와 복됨을 누리게하는 것이였다.   이리하여 얼마지나지 않아서 과연 누런 금빛나는 비닐모방품 망과가 숱해제조되여 전국에 퍼졌는데 그것들은 다가 잘 밀페된 원형의 유리통에 든 "보배"였다. 유리통에다는 慶祝偉大領袖毛主席萬壽無疆ㅡ紀念偉大的領袖毛主席向首都工農毛澤東思想宣傳隊增送的珍貴禮物ㅡ芒果, 一九六八年八月五日(複製品)이라 써놓은 것도 있고 "颗颗芒果恩情深"이라 쓴것도 있으며 그저 "芒果"라 쓴것도 있었다.  그밖에도 망과는 초상휘장, 선전화제재로도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쨌든 사람이 식용하는 과실에 불과한 망과였건만 그것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진품(珍品) 으로 떠받들리면서 심한  "망과숭배열"을 일으켯으니 과연 세상이 놀랄일이였다!   대만을 제외한 전국 각 성, 시, 자치구는 다가 수십만씩 집회하여 모택동이 망과를 보낸데 대하여 감지덕지 고마움에 겨워서 그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다른소리를 죄쳐서 욕을 본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다.  한가지만 례로: 흑룡강건설병퇀 제2사 13퇀에는 북경에서 온 녀지식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공선대원(工宣隊員)이였다. 그리하여 그 녀지식청년은 아버지를 통해서 남먼저 망과비닐방제품을 하나 사올 수 있은건데 부련장이 망과를 첨앙(瞻仰)하러 온 사람과  말하기를 나는 운남에서 병사질을 했는데 거기에 망과나무가 있어서 망과를 먹어봤다, 그게 생각같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더라 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렇게 좋은게아니면 외국에서 모택동에게 보냈겠는가? 넌 그게 무슨뜻인가 하면서 그를 되게 비평했거니와 부련장직에서 나떨구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그가 위대한 수령을 모욕했다면서 아예 반혁명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지금도 이러루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때 전국인민이 휘말려든 "망과열"에 대해서 쓴 글이 한두편이 아닌 것이다.   1968년 9월 16일, 복건성 복주시군민은 5.1로광장에서 "수도공인 모택동사상선전대가 보낸 진귀한 례물ㅡ망과복제품을 열렬히 영접하는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북경기차수리공사전체직공과 제1경공업계통 무산계급혁명파가 망과를 전선군민에게 보낸다는 편지와 망과헌사를 증송했다" 1968년 9월 17일, 제남시의 공인들은 "8.1"례당에서 집회를 열고 수도공인이 모택동주석에게서 받은 례물을 산동공인들에게 보낸것을 열렬히 경축하는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1968년 10월 14일, 장춘시 15만군민은 인민광장에서 집회를 가지고 수도 북경에 가서 국경관례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대표단을 열열히 환영하면서 수도공인들이 보내는 망과를 뜨거운 마음으로 영접했다고 했다. ...... 하다면 북경의 공장에 남았던 망과들이 후에는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문혁에 관한 한 회억록에서 넉넉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왕동흥(王東興)이 망과를 북경침직총창대표에게 주었을  때 그곳에서도 망과를 환영하는 의식을 륭중히 했다. 그러면서 망과를 밀랍으로 봉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그들은 망과를 대청중간에다 모시고는 공인들이 길게 대렬을 지어서는 그 앞을 지나면서 국궁재배를 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독하지 않았기에 빨리썩는다는 것 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하여 그것이 얼마안거서 인차 썩게되였고 그렇게 되니 혁명위원회에서는 밀납을 벗기고 큰가마에 넣은 후  물을 가득부어 오래끓이여서는 대렬을 지어 허리를 꿉썩 꿉썩 국궁재배를 해가면서 그것을 한숱갈씩 떠먹은 것이다.   .....    "망과숭배열"이 그같이 한참 열기가 오르면서 전국에 만년될 때 나도 그 행사에 적극참가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있은 흑룡강성의 합강지구 쟈므스의 동쪽 화천현에서도 망과를 첨앙(瞻仰)하는 행사를 굉장히 벌렸던 것이다. 온 성화공사 5,000명이 넘는 조판패(造反派)를 위시하여 6개마을의 사원전체가 총동원해서 화천현소재지 열래와 쟈므스구간의 큰길에 나가 지루한  몇시간을 기다려 "망과행렬"을 영접했던 것이다. 두사람이 각각 망과가 든 유리통을 두손에 바쳐 가슴에 안았는데 손에 장총을 잡은 행방군 넷이 그 운송행렬의 량켠에서 그것을 보위를 했다. 그날 첨앙(瞻仰)을 나간 "혁명적군중"들은 모주석이 보냈다고 하는 그 비닐로 모방한 망과를 제 눈으로 봄으로하여 마치 덕분에 이제는 장수하게 되기라도한것 같이 기뻐하면서 목이 터져라고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빌고 빌었던 것이다. 그 뒤에 련이어진건 "3경3축"이라는 것이였다. 나도 안해와 아직은 철모르는 두자식을 거느리고 그 행사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했지만 나는 그런날이 얼마안가서 꿈밖에도 갑작스레 덥치는 중학교 "홍위병"들에게 집이 털리우는 봉병은 당했고, 일기에다 "범은 죽어 껍지를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글을 써놓은 것과  장차 작가로 되려고 촌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여 문학공부를 하면서 소설을 쓴 것이 화근이 되여 "자본주의출세욕, 무산계급적대분자, 용서못할 반혁명"으로 몰려 옹근 4년간 "호래나발똥"을 갈긴것이다.   모택동이 남이 준 과일 한바구로 그같이 수억만의 제 국민들을 그리도 쉽게 감동시켜 눈문을 흘리게했거니와 들끓는 경애심과 불타는 숭배심을 갖추게끔 만들어놨으니 과연 기지활달하고 영명한 전략가라 하기에 손색이 없겠다. 그 수완에 진정으로 탄복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시대에 남한테 사람축에도 못가게 받은 멸시와 버림을 생각하면 가슴에 불이 일면서 무지하여 충성을 다지면서  만세를 불렀던 자신이 병신같아 낯이 뜨겁다.
223    에세이 두 백치의 입방아 댓글:  조회:4701  추천:12  2013-01-14
                 에세이 두 백치의 입방아      방금 "모이자" 인터넷에서 벌린 토론방에 들렸다가 익명 "천안문의 별"과 "흑룡하" 두 사람이 찧고 까부린 언론을 보고 나는 적이 놀랬다. 어쩌면 제민족의 력사에 이리도 무지한 자들이 학자연하여 인터넷에서 공공연히 입방아를 찌어대고있는가? 과연 한심한 일이라 그냥 넘길수는 없어서 한마디 충고한다!   우선 두사람이 인터넷에서 찧고 까불고 한 아래의 언론들을 보기로하자.        "천안문의 별"  (175.30.♡.197) - 2013/01/10 15:49:12 한국인들이 모르는 김좌진에 대해 재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시참변이후 할빈일대로 되돌아온 김좌진은 빨갱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갈게 됩니다. 그로부터 몇년후부턴 만주땅에서 조선공산당세력이 늘어나게 되는데...이때 김좌진은 공산당계열의 조선청년들이랑 잡아서는 몽둥이찜질로 때려죽이던가 마을에서 쫓아내던가...이런짓거리를 합니다. 그보다 더 험한 일은, 할빈일본영사관의 경찰들에게 조선공산당 비밀조직원들을 밀고하고는 돈을 타먹는 짓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완전히 민족의 대의에 어긋나는 짓이였기에 조선공산당측이 끝내는 김좌진에 대해 처벌을 가하게 된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선족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돼있습니다. 흑룡하 (60.5.♡.145) - 2013/01/10 15:49:16 좀 일리가 있는 말인것 같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위 전인류의 해방을 위한 것이 목적이였으니 조선의 독립은 거기에 부속된 것입니다. 광복군은 대일작전에서 총한방도 쏘지 않았으니 공로 따위는 따질처지도 못되고.   우선 "천안문의 별"에게 묻는다. "자유시참변후 할빈일대로 되돌아온 김좌진은 빨갱이라면 이를 쁘득쁘득 갈게됩니다"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어느 력사자료에 그렇게 밝혀있는가? 자유시사변은 흑룡주의 볼세위키자 오하묵과 싸할린의용대(니항군) 박그리고리와의 지간 군권쟁탈로 인한 참안이였지 공산당 전반의 작간으로 인한건 분명 아니였음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당시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빨갱이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건가? 빨갱이란 8.15해방직후부터 공산당측을 적대시하면서 지어낸 "악명"인데 이 토론마당에서 그따위 "악명"을 공공연히 들고나오는 저의가 대체 무엇인가?       "그가 자유시사참변후에 할빈으로 되돌아왔다"고 하는데 력사를 알기나 하고 그런소리를 줴치는가? 그는 할빈에 간적이라곤 근본 없다. 당시 김좌진은, 패거리싸움을 혁명으로 여기고 지독스레 서로 물고뜯고 한, 이미  공산국제로부터 해산명령이 내렸음에도 혜여지지 않고 준동(蠢動)을 했던 조공만주총국의 화요파잔얼의 손에 암살 된 것이다. 그는 암살되기 직전까지 계속 쉼없이  독립운동진영의 "대동단결"을 주장했고 그를 실현하고자 각고의 노력과 분투를 경주한 불굴의 투사고 지도자였던 것이다. 사실이  분명 그러한데 "천안문의 별"은 대체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보고, 무슨 피맽인 원한이 있길래 그따위 험구를 줴치는건가? 대체 력사를 알기나하고 그러는건가?  미친놈! "김좌진은 공산당계열의 조선청년들이랑 잡아서는 몽둥이찜질로 때려죽이던가 마을에서 쫓아내던가... 이런짓걸이를 합니다." 하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는 하는가? 근거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놓으라. "천안문의 별"은 당시 친일파주구들과 공산혁명에 유치했던 조공만주총국 화요파잔얼이 만주의 독립군진영을 와해하느라 헐뜯으면서 지어낸 악의적인 요언들을 그대로 받아서 지금 꺼리낌없이 공공연히 지껄있다. 묻노니,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인가?   "그보다 더 험한 일은 할빈일본령사관의 경찰들에게 조선공산당 비밀조직인원들을 밀고하고 돈을 타먹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는데 근거가 있는가? 그것은 당시 일제가 독립혁명진영을 분렬와해시키기 위해서 날조한 요언이였다. 하기에 당시 상해림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에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 것이다.  묻노니,"천안문의 별"은 대체 누구의 충견이 되었길래  지금에 이르러까지도 독립군의 견강한 수령을 그같이 모독하면서 물고늘어지는가? "조선족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돼있다는데 력사학회가 그 내막을 제대로알기나하고그랬던가? 해방후까지 살아있은 화요파 한 잔얼의 말만 옳은줄로 알고 믿은것이다. 그것이 맞는가? 그래 그따위 외곡된 정설도 그냥 믿고있는단말인가? 조선족력사학회의 그 자료는 엄연히 틀리고 잘못된 것이다. 하기에 그것이 근본 정설로 되여서는 안되는거다. 력사학계가 저지른 그 오판과 실수는 수치스러운 것이니 아므때든 반드시 걷어들여 정정을 해야 한다. 번연한 사실임에도 그를 승인하지 않고 고집한다면 그건 조선족력사학가, 연구가들의 무지함을 표명 할 뿐이다. 김좌진에 대해 연구하고 그의 일대기를 쓴 나로서는 책임지는 각도에서 이미 나의 태도를 분명히 표명한바있다. 아무리 공산당이 한 일이라해도 틀렸으면 군말말고 고쳐야한다. 번연히 의문되고 틀린것이 알림에도 병신같이 그것을 그냥밑는건 또 어떤 인간들인가?  하루를 살더라고 제정신을 갖고 살아라!  머리를 제대로 달고있는 사람이면 그같이 미런한 신뢰감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김좌진의 문제는 전해에 이미 "조글로"에서 론쟁이 있은바다.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몰랐다면 리해되여 용서할 수 있지만 번연히 알면서도 이같이 굳이 나온다면  결코 좋은 심보일 수는 없는 비렬한 행위로 치부되니 타매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음 흑룡하의 문장을 보기로 하자. "광복군은 일대작전에서 총한방도 쏘지 않았으니 공로 따위는 따질처지도 못되고"하는데 그대는 대체 무슨근거로 그같이 떠벌리는가? 대체 력사를 어느만큼이나알고 그따위 허튼소리는 줴치는가말이다? 대체 무슨 목적에서?... 아무리 자유적인 토론방이라해도 정신병자가 아닌이상 책임지지 못할 그따위 글은 올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텐데 왜 그러는가?  특히 엄연한 력사문제를 놓고서?  일대작전에서 총한방쏘지 않았다니 그건 험한 날조다. 왜서? 그것은 력사 사실은  그것과 완전히  상반이기 때문이다. 광복군은 대일작전에 적극나섯거니와 잘싸워서 세운 공도 마멸할 수 없이 혁혁했다.  1932년 8월중순 지청천사령거느렸던  2,500명 독립군이 동북항일련군의 시세영(柴世榮)부대와 손잡고 싸운  쌍성보공략과 수분대전자대첩만봐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독립군이 총한방도 쏘지 않았다니? 어느 구데기에서 생겨난 똥파리가 주제넘게 앵앵 거리는건가?       나는 여기서 더 구구히 시간을 끌지 않겠다. 내가 전해에 강경애문제같아나 이미 몇사람과 상대하여 격렬히 론쟁을 벌린바 있었으니 더  반복하고싶지 않다. 천안문의 별과 흑룡하는 "조글로" 나의 미니홈에서 내가 1999년, 중한수교7주년기념세미나를 맞으면서 8월 28일자 "흑룡강신문"에  낸  글 이란 글과  , 등을 비롯한 여러편의 문장가운데서 맘대로 골라 한번 참답게 읽어보기바란다. 그랬어도  접수되지 않고 달통되지 않아 반감이 생긴다면 비겁스례 닉명을 그냥쓰지 말고 사나이답게 본명을 밝히면서 떳떳이 나와서 한바탕 통쾌히 겨뤄보기바란다. 환영한다. 물론 그 후과는 자신이 책임지기로 하고!   나는 당신들 둘이 력사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면서 아는양 진상을 모르는 독자들의 의목을 흐리우면서 제멋대로 떠벌리니 보기가 꼴사나와 어리석은 백치로 몰아붙이는 거다.   아마 적합할 것이다.  (모이자회원이 아니기에 이 글을 그냥 조글로에 올린다.)  
222    검은 장막을 활 거두라 댓글:  조회:5383  추천:14  2013-01-11
     검은 장막을 활 거두라           김  척    왜 우수선정가요가 뒤골목에서 서성거려야 하는가                 ( 하얼빈)  금자 자치주성립 60돐을 맞으면서 연길시선전부에서는 건국이래 가장 큰 가요창작응모 활동을 벌렸다. 무려 1300여수의 응모가요중60수를 우수작품으로 선정하여 세상에 출생시켰다. 필자는 텔레비방송에서 피뜩 소개하는 우수작품들을 말타고 꽃구경하듯 한번 본후로는 지면을 통해서 소개되는 우수작품들은 보지 못했다. 우수작품이 선정된후 작곡가들과 작사자들이 뒤에서 이렇쿵 저렇쿵하는 불만의 소리들을 들으면서 나는 지면에 소개되는 우수작품들을 한번 자세히 보고 싶었다.     우수작품으로 출생한 “신생아’들의 키며 몸둘레며 눈사이의 거리까지 자대로 재여 그애들이 과연 미남,미녀로 될수있는지 나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생태문화협회연길시분회의 잡지 “모아산” 5기에서 자치주성 립60주년가요응모에서 3등상을 수여받았다는 가요를 볼수있게 되였다. 이 가요는 “모아산”잡지에서 방송국의 매주일가를 게재하게 되면서 우연히 내 눈에 띄이게 되였던것이다 제목은 “9.3명절 옹헤야”였다. 우선 가사를 보자. 1절: 옹헤야 산마다단풍나무불타 옹해야      들판에 황금물결익어 옹헤야 옹헤야      모아산에 흰구름이 걸려 옹헤야      진달래광장에 웃음 옹헤야 2절: 옹헤야 미인송 푸른 소매저어 옹헤야      천지에 폭포수가 내려 옹헤야 옹헤야      개척자들 구술땀이 꽃펴 옹헤야      개혁개방고동소리 높아 옹헤야 후렴: 에헤 옹헤야옹헤야      9.3명절 옹헤야 상모춤에 퉁소가락 헤헤 옹헤야      자치기발옹헤야 날닌다 옹헤야      형제민족 옹헤야 나래친다 옹헤야 좋다 이 노래에서 조흥구로 사용되고 있는 “옹헤야” 는 “좋구좋다”라는 어휘적색채도 가지고 있는바 전통적민요 “옹헤야”의 흥겨운 로동가요의 특점을 구비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옹해야”의 가사를 피뜩 보아도 알수있는것이 결합된 단어묶음들을 라렬했을뿐 단어묶음들의 내재적인 내용의 련계가 전혀 안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흥구’옹헤야”를 빼버리고 어휘적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묶음들을 련결하면 다음과 같다. 산마다 단풍나무 불타 들판에 황금물결익어 모아산에 흰구름이 걸려 진달래광장에 웃음. 이렇게 놓고 보면 이 가사는 내용이 전혀 련게되지 않는다는것을 아주 쉽게 보아낼수 있다. 다음 문법적으로 이 가사의 결구를 따져보아도 합리하다고 말할수없다. 첫행 에서 는 혹은 의 간략으로 보아야 할것인지 아니면 병렬의 접속토를 덧붙혀 놓고 봐야 하겠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 단어묶음들을 라렬했다고 밖에 볼수없다. 다음 또 한가지 지적할것은 병구(病句)문제다. 례를들어 보자. 이 구절에서 격토,가 잘못 씌여졌다. 의 문법적의미는 장소나 대상을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장소를 나타내고 있다. 즉 폭포수가 내리는 장소가 천지임을 나타내고있다. 론리적으로 이것은 틀린 말이다. 마땅히 속격토를 써서 천지의 폭포가 흘러내린다고 해야 론리적으로 뜻이 통한다. 가사 2절과 후렴도 우에서 서술한 동등한 부족점을 가지고 있기에 더 이상의 분석을 기피한다. 아래에 북조선의 ‘옹헤야” 가사를 보기로 하자 리해의 편리를 위해 조흥구를 빼버린다. 1절:     금년낟알 알알이도 잘익었다     들을봐도 산을 봐도 황금물결 파도친다 2절:     이 풍년이 절로 왔나 말해보세     기계농사 과학농사 주체농법 꽃피웠네 3절:     수령님의 농촌테제 꽃펴간다     우리 농촌 도시를 닮아간다 공산주의 한가정이 붉게 핀다 이 가사를 보면 매절마다 내용이 유기적으로 잘 련계되여 있다. 게다가 조흥구”옹 헤야’가 얼마나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 주는지 들으면 자연히 어깨가 으쓱거리게 된다 내용을 보라 1절은 풍년이 든 전경을, 2절은 풍년을 거둔 원인을, 3절은 조선농경의 랑만적미래를 얼마나 간략하면서도 실감있게 썼는가! 그런데 ”9.3옹헤야” 를 쓴 작사자는 ‘9.3”의 어제와 오늘,그리고 미래를 넓은 폭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상고춤이나 추면서 ‘9.3’이 좋다는데만 필끝을 날렸을뿐이다 즉 높은 차원에서 가사의 내용을 구성하지 못했기에 높은 예술적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것이다. 다음 곡을 놓고 한번 말해보자. 필자가 보기에 이 곡은 깨끗한 창작품이라고 보지 않는다. “옹헤야’의 절주와 선률을 모방하여 쓴 개작 혹은 모방작에 가까운 작품이라 고 본다. 우에서 서술한 몇가지 리유를 가지고 필자는 이 작품이 잘된 창작품으로 우수상을 받았다는데 대하여 동의할수 없으며 따라서 수없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 필자의 의문들을 라렬한다 첫째: 이번 자치주성립60주년 가요응모작품평의위원들의 구성에 대한 문제이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평의위원으로 구성되였기에 가사 혹은 곡에 얼굴의 곰보자국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흠집마저 보아내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둘째: 이번에 우수작품으로 뽑힌 가요들이 미남 미녀들이라면 꽃단장시켜 넓고 환한 광장에서 대중에게 선을 보여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왜 뒤골목에서 서성거리기 만 하는가? 밝은 광장에서 선보이면 해빛이 속내장까지 환히 조명될가봐인가! 세째: 이번 가요응모는 건국이래 자치주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가요창작활동이다 이렇게 방대한 활동인데 지면을 통해서 평의되는 문장이나 혹은 언론들은 볼수없다. 이런 방대한 활동뒤끝에는 마땅히 앞으로 우리 가요의 방향과 활동에 귀감이 될수있 는 총결과 방향성적인 제시가 따라가야 하는데 너무나 미미한 느낌이다. 음악가협회 를 비롯한 무슨 연구회요 연출단위들도 수두룩한데 달다 쓰다란 말한마디를 담은 평론문장 한편 볼수없다.  60만원을 내건 그 돈의 가치가 가벼워서인가. 아니면 우리 가요를 통치하고 있는 권력자들의 지배가 전제여서 그런가. 뒤에서는 자치주성립60돌을 맞으면서 벌린 가요응모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지어 상욕마저 퍼부으면서 떠드는데 왜서 꼭 총결지어 내놓아야 할 유관부문에서는 침묵만 지키고 있는가! 이 외에도 할말은 더 있으나 필자가 이번 응모에서 선발된 우수가요들을 전면적으 로 보고 연구할수 없기에 개별적으로 본 “9.3옹헤야”에만 관하여 소견을 내놓는 바이다. 그러면서 필자의 이 소견은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소견이지 작사자 작곡자에 대한 소견이 아님을 알리는 바이다. 작사자 작곡자 선생들께서 예술가의 드넓은 도량으로 이를 받아주시기를 바란다.   金刺              2012,  12 ,28 오전 10시52분   보는 이에게: 부동한 관점을 가지고 한 작품에 대한 평의를 진행하는것은 어데까지나 학술적인 문제로서 이건 지상에서 자유롭게 쟁론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9.3옹헤야”에 대한 이런 평론문장은 편집들이 상전의 노여움을 자아낼가봐 감히 지상에 게재할수 없다는것이다. 물론 이건 필자가 개별적인 편집들과의 대화에서 느낀것으로서 전반 편집들을 다 그렇다고 할수는 없다. 확실히 “9.3옹헤야”는 金刺가 평의한것처럼 가사의 질이 너무 낮고 곡 또한 순결한 창작품이라고 말할수 없다. 이 노래에 대하여 이런 견해가 있는 이상 평의를 진행한 평심위원들은 이 노래가 우수작품으로 선정된 근거를 밝혀서 이 노래의 우수를 부정하는 견해를 반박해야 할것이 아닌가. 과연 상전이 두려워 감히 지상에 이런 문장들을 싫을수 없다면 편집이여, 상전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괴뢰의 삶을 비참히 여기라! 편집의 상전 또한 이런 편집들에게 문화전제를 실시하는 괴수임을 스스로 승인해야 하리!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비리속에서 우수상을 수여받은 작사자,작곡가들도 오줌요강으로 물을 떠마신 기분이겠는데 필자는 이것 역시 자격있는 작사자,작곡자들 에게는 억울한 불공평이라고 본다 총적으로 이번 응모활동에서 60만원 거금을 탕진했다고 본다면 검찰기관에서 마땅히 책임을 추구하고 이번 응모활동에서 활개를 친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여 처리 해야한다고 본다. 이것만이 민족의 문화발전에 유익한 귀감을 펼치는 일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후의 모든 작품응모활동에서 잡귀신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살판칠것이다.
221    에세이 를번꾸이즈(日本鬼子) 댓글:  조회:4127  추천:3  2013-01-10
       에세이 를번꾸이즈(日本鬼子)   를번꾸이즈(日本鬼子)란 중국사람들이 항일전쟁시기 일본침략자를 가리켜 부른것이였는데 전쟁이 결속된 후에도 그것은 중국사람이 일본사람을 멸시하여 부르는 별명으로 고정되여버리고말았다. 를번꾸이즈(日本鬼子)를 간단히 꾸이즈(鬼子)라고도 한다. 례를 들면 영화 "꾸이즈라이라(鬼子来了)"와 노래 "따도샹 꾸이즈먼더 토우상취(大刀向鬼子们的头上去)"에서 꾸이즈(鬼子)는 곧바로 일본침략자를 가르키는 것이였다. 귀신이라는 그 별명이 지어는 2001년에 일본연출가에 의하여 제작된 "日本鬼子: 日中15年战争 ․ 原皇军士兵的告白"이라는 영화제목에 응용되기도했다.    한데 보면 를번꾸이즈(日本鬼子)란 좋지 않은 일본사람의 그 별명이 기실은 9.18사변이 일어나기 썩 전에 벌써 생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청나라 말기 갑오해전(甲午海戰)이 끝나서 생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전쟁이 방금끝나서였다. 청나라조정에서 파견한 대신이 대양건너의 일본에 가 담판을 하게된건데 쌍방은 담판이 끝나자 함께 각국기자들의 련합취재를 받게되였던 것이다.  그 장소에서 일본사람은 오만스례 저희들은 무력이 강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한편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발전한 중국의 문화마처 모욕하려들었던 것이다. 일본대표는 여러나라 기자들의 앞에서 돌연스례 우리 일본사람은 글귀맞추는 놀이를 즐긴다, 내가 글귀를 내놓을테니 한자를 발명한 중국에서 어디 한번 맞춰보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이같이 그번의 담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엉뚱한 문제를 내놓았던 것이다.   기기마 장장궁 ( 骑奇马 张长弓 ) 금슬비파 팔대왕 (琴瑟琵琶 八大王) 병견거두상  단과독전 (幷肩居頭上 單戈独战) ! 뜻인즉은 너희들이 그래 살같이 내달리는 천리마를 타고 용감히 싸우는 우리 대일본의 병사들을 감히 없신여길수 있는가, 8대장군은 모두가 문무를 겸비한 웅재여서 단창필마로 싸워도 너따위 중국을 능히 정복하리라는 것이였다. 중국대신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저켠에서 먹을 갈아놓기바쁘게 붓을 날려 답글을 제꺽지어냈던 것이다.   왜위인 습룡의 (倭委人 襲龍衣) 리매망량 사소귀 (魑魅魍魉 四小鬼) 굴슬궤신방 합수금나 (屈膝跪身旁 合手擒拿) !   왜(倭)라는건 바로 왜구(倭寇)를 가리키는 것인데 청나라의 룡포를 도적질하려고 온갖의 못쓸짓이란 못쓸짓은 다하는 쓰소꾸이(四小鬼)가 내몸가까이 무릅꿇고 있도다 했다. 기자들은 읽어본즉 구절마다 함의가 깊거니와 비유가 아주멋들어진라 감탄을 금치못했다. 팔대왕(八大王)이 변하여 쓰소꾸이(四小鬼) 로 되었으니 더 간략해서 그저 꾸이즈(鬼子)라 부르면 더좋겠다고들 했던것이다. 그때로부터 일본사람을 꾸이즈(鬼子)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항일전쟁시기간만도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에 쳐들어와 온갖의 악한짓이란 악한짓은 다했다. 세상에 이미 공개된 자료들만 보아도 일본사람 즉 를번꾸이즈(日本鬼子)는 두말할 것 없는 악한이요 그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살인마귀였음을 세상사람들 앞에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50년대에 여러집으로 출판된 라는 회억록의 어느 한권에다는 화북의 어느 한 마을에 달려든 일본군인들이 그 마을의 부녀들을 강간하였을뿐만아니라 온 마을의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한곳에 모이게해서는 발가벗겨 양걸이를 추게했거니와 나중에는 전부 총상살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녀성들의 생식기에다는 칼을 박았고 다리장단지의 살은 베여서 죠즈(饺子)를 해먹은 것이다. 요즘 한 인터넷의 죠댄방탄(焦点访谈)에서 본건데 한 젊은 일본병사는 자기의 군도(軍刀)의 날이 잘섯는가를 알아보느라 그것으로 산사람의 배를 갈라 실험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휴대한 손닥만한 일기책에다 번마다 그 쾌감들은 자랑으로 여겨 일일이 기록까지 해놓은 것이다. 일본군에서 병사가 산 중국사람의 간을 빼먹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상급은 제가 거느리는 하급병사들의 담을 키우느라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일제가 동북을 침략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할빈에 있을적에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유적지를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그때까도 숱한 쥐를 자래웠던 콩크리트움들이 그대로있었다. 문자로 기록된 자료들을 보았는데 그당시 를번꾸이즈(日本鬼子)가 3,000여명의 항일분자들을 가둬놓고 감행했던 비인간적인 각가지의 살인실험은 그 수법이 다양했거니와 지독하기가 그지없었으니 그야말로 일구난설(一口難)이다.   타나카 군기찌, 무까이 토시아끼, 노다 이와  이 셋은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했을 때 누가 칼로 먼저 300명의 목을 자르는가 비겨보자면서 시합을 했던 살인마귀다. 시합이 끝나서는 그자들은 그 짓을 기념하느라 군도(軍刀)를 집고 서서 사진까지 찍었던 것이다.   그 썩 전이였던 1920년대에 일제가 독립군을 섬멸하려고 접어들었다가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하고는 그 보복으로 무고한 백성을 향해 살인만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때의 정경을 서양사람 스탠리 마아틴(stannlymartin)이 수기로 남겼고 사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朴殷植)역시 “朝鮮獨立運動之血史”에 기록해놓았다. (그 두 사람의 글은 내가 써서 이 인터넷에 올린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제3부 25절에도 응용되였으니 보기바란다)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이나 그 어찌 를번꾸이즈(日本鬼子)를 잊으랴? 일제는 일찍 조선을 병탄했거니와 그를 발판으로 하여 중국의 동북과 대륙을 침략하여 천만에 달하는 무고한 백성늘을 도살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건만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엄연한 그 력사를 승인하지 않거니와 지어는 자기들이 지은 천인공노할 죄를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있는 것이다. 하기에  를번꾸이즈(日本鬼子)는 날이갈수록 피해입은 국가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인귀로 깊이 각인되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력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력사를 잃는건 곧 배반이다. 력사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있다. 그러나 기억은 의연히 우리들에게 비분을 환기시키면서 각성시키고 있다. 평화시기라 하여 앞길이 평탄한건 아니니 그저 너좋고 나좋고 다 좋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요즘 인테넷을 보면 친일파아니면 그 변종인 얼꾸이즈(二鬼子)가 수치도 모르고 공공연이 몰골을 드러내고 독소를 뿜어 력사의 진상을 잘 모르는 사람의 안목을 흐리우고 있으니 정신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락후하면 남에게 매맞고 놀림당하기 마련이니 사람마다 시비를 정확히 가르고 분발해야 한다!
220    에세이 미친놈의 허튼소리 댓글:  조회:4387  추천:2  2013-01-08
  에세이 미친놈의 허튼소리   나는 오래간만에 "모이자" 인터넷을 열어본건데 거기서 벌린 토론방에 들렸다가 라는 제목의 글을 읽게되였다. 그 글이 나온 날자는 새해 2013년 1월 1일, 등재한 이는 흑룡하 라는 가명을 쓴 친일파 같아보이는 자였다. 본인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는 진짜 변종의 미친놈일 것이다. 왜서인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면 그따위 허튼소리를 죄칠리없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의 친일문제가 이 사이트에서 많이 거론된다. 사실 불필요하다"면서 "한국인이나 조선족들이 모두 인식상에서 통일점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통일점이란 대체 무엇인지 보기로 하자. "첫째, 조선정부 창건시 상층의 주요 구성부분은 중국에서 항일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은 미국의 대쏘 반공의 목적하에 일제시기 친일파가 주도로 구성된 정부라는 점. 둘째, 6.25시기 남북 량군의 고위장령들을 보며는 군복을 바꿔입고 군기를 바꾼 항일군과 일본군토벌군간의 전쟁이였다는 점. 빨갱이는 계속 빨갱이였고 일본군대에 참가하여 빨갱이토벌을 하던 사람들은 미국의 지원아래 다시 빨갱이 소탕전에 나선것이였다는 점."이였다는 것이다. 이는 력사에 깜깜인 무지한 미친자만이 줴칠 수 있는 허튼소리다. 제딴에는 아는냥 떠버리지만 수평이 그정도니 과연 소웃다 구럭터질일이다.   그 근거는 첫째, "조선정부 창건시 상층의 주요 구성 부분은 중국에서 항일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란건 옳으나 "한국은 미국의 대쏘 반공의 목적하에 일제시기 친일파가 주도로 구성된 정부"라는건 틀린다. 력사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한국역시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창건시 상층의 주요 구성부분은 파가 다를뿐 거의가 항일을 하던 사람이였다. 상해림시정부의 요원들이 광복이 되자 건너가 한국을 세우고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그들은 다가 항일을 한 열열한 애국자ㅡ 독립운동가들이였던 것이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은 상해림시정부 때에 국무총리를 지낸 리승만이다. 상해림시정부가 곧바로 독립항일을 총지휘한 기관이였던 것이다. 흑룡하가 한국사람이 옳거든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를 한번 보라. 그 력사책에는 1884년 갑신개혁운동으로부터 1948년 정부수립까지 약 60년간의 한국독립력사가 기록된 것이다.   둘째, "6.25시기 남북 량군의 고위장령들을 보면 군복을 바꿔입고 군기를 바꾼 항일군과 일본군토벌군 간의 전쟁"이였다는데  사실은 저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뭇노니, 흑룡하는 대체 무슨근거로 군복을 바꿔입고 군기를 바꾸었다는건가? 대체 누가?   빼앗긴 강토를 되찾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중국대륙에서 왜적과 맛서서 조직결성되였던ㅡ 김원봉, 박일우, 김무정, 김두봉, 김웅, 최창익, 방호산 등이 령도하는 조선의용대가 팔로군, 신사군, 제4야전군에 편입되여 피흘리며 영용히 싸워오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니 김일성의 요구에 의해 그해의 10월부터 1950년사이 북조선으로 건너간건데 병력은 모두해서 무려 5만명에 달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북조선에 가자 김일성이 대동한 200여명의 항련일군과 합쳐 조선인민군의 핵심력량이 된 것이다.   이때 한국은 형편이 어떠했는가? 동북과 중국본토에서 일제와 싸워왔던 독립군인들은 거의가 개별적으로 건너간것이다. 상해림시정부가 조직하고 령도한 한국광복군은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의 유일한 무장단체로서 독립운동의 중추력이요 또한 선봉이였다."  (한국독립사 313쪽)   1920년,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 총사령 김좌진과 함께 일제침략자를 대패시킨 청산리전투에서 마멸할 수 없는 혁혁한 공을 세웠던 나젊은 장령 리범석은 후에 광복이 나자 조국땅에 건너가 한국군을 건립하고 그에 첫통수로 된 것이다. 다른 한사람 서로군정서의 리청천역시 리범석과 마찬가지로 한국군에서는 최고지휘자였던것이다. 묻노니, 그들이 그래 제옷은 벗어 팽가치고 항련일군을 토벌하느라 혈안이 되어 날뛰였던  일본군의 옷을 바꿔입었단말인가? 그러면서 기빨을 바꿔들었단말인가? 어느 력사책에 그렇게 씌여있는지 어디 대중앞에 내놓으라. 날조해도 분수있지.           빨갱이란 악질적인 친일분자들이 일본을 대항해 싸워온 모든 항일투사들을 밀잡아 공산계로 몰아붙임으로써 력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뼈에 사무치는 증오심을 갖게하느라 만들어 낸 지독한 악명이지 별게아니다. 6.25전쟁은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가 다름으로 하여 생겨난 동족상잔의 잔혹한 싸움이였지 일본군토벌대와 빨갱이가 대결한 지속적인 싸움은 분명 아니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위관급(尉官级)장교로서 항일군토벌에 나섯던 사람이였으니 군국주의자 일황(日皇)에 충성을 맹세한것만은 사실이다. 그리했기에 친일분자였다고 하는게 뭐가 잘못되고 틀리는가? 그 본인을 놓고보면 분명 광채롭지 못한 오점임에 틀림이 없는건데 거기에 변명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어둡던 광채롭던 있는 력사는 력사 그대로 있는것이니 지울필요도 감출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 본인이  자기를 어떻게 반성하고 앞을 어떻게 내다보면서 처사를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를 편찬하여 책으로 묶을 때 박정희가 "民族正氣"라는 제사를 쓴것을 보고 그의 속심을 족히 알아낸 것이다. 그것이 제민족의 정기였지 야마도민족의 정기는 결코아니였을 것이다. 왜서? 그것은 그가 대통령을 지내는 기간 해놓은 업적을 보면 알고도 남음이 있기때문이다. 내가 알건대는 그가 "새마을운동"을 일으킴으로 하여 한국은 락후를 벗어메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굴지로 줄기차게 내달리게끔 창을 열어놓은게아니냐 하는 그것이다. 잘못을 느끼고 속죄를 했으면 그만이지 낡은 장부(帳簿)나 그냥 뒤지면서 옴니암니하는건 무익한 일이다.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비난을 두려워말고  의기용감했던 아버지를 본받아 "民族正氣"를 한껏 빛내주기를 바란다.                                    
219    에세이 지하철에서 받은 교육 댓글:  조회:4037  추천:1  2013-01-04
  에세이  지하철에서 받은 교육   천안문근처 왕푸징서점에서 집까지 오자면 지하철을 타도 근 한시간이 걸린다. 언제나 만원이다. 그렇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버스를 타자니 큰길이 메이여 가는 시간이 더 오래걸릴 것 같아 이날도 지하철을 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승객은 여전히 만원이였다. 반수이상 젊은이들이였는데 그들은 저마끔 손에다 핸드폰아니면 간단히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있었다. "보시오, 멍하니 그저가는 젊은이라곤 안보이죠?... 무슨 새로운소식이 있는가구 찾구들습니다." 나와 함께 방금오른 사나이가 하는 소리였다. 아닌게아니라 핸드폰도 신문도 잡지도 보지 않고 멍하니 그저가는 사람은 늙은이 아니면 부녀들뿐이였다. "지금도 소설이나 산문, 시같은걸 읽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적지요. 언제 한가하게 그런것을 볼짬이나 있어야지. 두고보시오만 중국의 작가들은 이제 자칫하다간 밥을 굶게 될 겁니다." 나에게 이같이 말을 다시걸어오는 그 사람은 중년을 넘긴 한족이였는데 자기는 여러해째 장사를 다니다보니 자주리용하게 되는 이 지하철에서만도 얼마든 시대의 변화를 보아낼 수 있다는 것이였다   난는 생각했다. 그의 말과 같이 시대가 변하는건 사실인데 그런다해서 중국의 작가들은 밥을 굶게되리란건 웬 소린가?... 어쩌면 아주 생면인 그가 서점에 들려 소설책을 한권 사갖고 오는 나의 신원을 어떻게 알아맞히고 비웃는것만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여 나는 그를 향해 도대체 무슨근거로 그런소리는 하는냐고 따지듯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힛쭉웃고나서 내 겨드랑이에 끼여있는 소설책에 눈길를 박으면서 "오늘산겁니까? 누가 쓴건데요?" 하고는 "로인님은 아마 소설을 보기좋아하는 모양이군요." 했다. 나는 솔직히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는 "로인님이야 물론 한가하니까."하고는 나더러 나를 내놓고 이 전차안에서 소설책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찾아내라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다시금 살펴보게된건데 과연 손에 소설책을 펼쳐들고 셈평좋게 보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눈에 띄이지 않았다. 나는 혼자소리로 뇌였다. "전에는 혹간 보였는데...?!" "그렇지요. 전에야 보였지만 지금이야 어디 보입니까. 그래서 내가하는 소립니다, 중국의 작가는 자칫하다간 밥을 굶게되리라구요." 나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가는지라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다. 독자가 있느냐 없느냐는 작가의 존재 작가의 생계와 직결되는 것이다. 하건만도 나는 여지껏 그것조차 생각안하고 살아온 것이다. 독자가 없는 책을 써서는 뭘하는가? 내가 그것도 몰랏으니 과연 너무나도 우직했다. 이같이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속으로 자조(自嘲)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원망할것 없습니다. 이건 작가가 자신을 나무려야 할 일이지요." 그는 마치 나의 마음을 짚어보기나한것 처럼 이렇게 말해놓고 입을 다시여는것이였다. "나는 상인의 각도에서 작가들에게 권고하고푼것이 있습니다. 뭐겠습까, 작가들은 너무나 오만하다 그겁니다. 모두 게을러서 시대를 따라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선도작용을 한다'는 소리를 탕탕 내치고있지요. 그게 글쎄 우습지 않습니까? 공업시대에 써먹던것을 정보시대에 와서도 그냥 써먹자고드니 어디 되기나 할 일입니까? 나같은 장사꾼들을 보시오. 소비형식에 따라 연구를 하고 시대발전에 맞추느라 애쓰고있는겁니다. 그런데 작가들은요? 시대발전에 따라가기나합니까? 내가 보게는 중국의 작가들은 거의가 옛모양으로 제자리에서 답보를 하고있습니다. 안그렇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다고 접수안되겠지만 저는 정말 한마디 권고하고싶습니다. 중국의 작가들은 자기를 허심히 반성하고 결심을 내려 상품이 대를 바꾸듯이 문학도 시대에 맞게 모양을 바꾸라구요." 들어보니 귀구멍이 열리는지라 나는 그보고 계속 말해보라했다. 그랬더니 그는 과연 그러지요 하면서 입을 다시여는것이였다. "중국은 작가대오를 정리하든지 아니면 아예 따로 새것을 내오든지 해야합니다. 생각해보시오, 시대발전에 맞추려면 문학도 개혁을 해야할건데 어디그럽니까? 대체 어떤꼴인가를 보시오. 아직도 옛틀을 벗어메치지 못한 평론가가 의연히 그전의 멋으로 이러니 저러니 훈시하고있으니 전도가 암담하고 묘연할 뿐입니다. 그래갖고서야 어찌 발전을 운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생각에는 문학계는 우선 그런 어른들부터 나무려 비평해야한다 그겁니다. 문제는 바로 창작대오를 제대로 이끌지도 못하면서도 대단한것 처럼 교오하는 그런어른들에게 있지요."   그는 말을 잠간끊었다가 다시이었다. "언제나 보면 많지 않은 작가들이 구룹빠를 만들어서는 저들이 영원한 주류이기나 한것처럼 행세합니다. 물론 그럴수도있는데 문제는 여물지 못한 어떤 사람은 권세에 따르는 사유관성(思維慣性)에 의하여 남을 숭배하다보면 자기를 잊어 개성이 없어진다 그겁니다." "오ㅡ 그래!?" 나는 그를 다시보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 말이 옳은것이다. 문학이란 본시 별개의 존재로서 제 특장과 성능을 갖고있는건데 여지껏 중국의 문학을 보면 어떠했는가? 작가들이란 다년간 강압적인 정치에 매이여 찬가(讚歌)나 부르다보니 몰골이 제가끔이여도 목소리는 같은 일종의 변태물로 돼고만 것이다. 작가들은 우선 그것을 깨닫고 각성해야 할 것이다.   그 한족사나이가 말했다. "통속문학이요 엄숙문학이요 순문학이요 하는데 나는 그 계선을 딱히 가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도대체 어디에 속하느냐고 자문하게됩니다. 과연 애매한 일이지요."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말을 들어보니 그가 분명 문학에 문외한은 아닌지라 나는 집요한투로 임자는 대체 뭘하는 사람인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장사를 한다하잖았느냐 해놓고는 자기는 성정이 청년시절부터 업여(業余)로 글쓰기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였다. "오, 그렇겠지! 허니까 자넨 작가로군!" 내가 알아맞혔더니 그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런말 마셔요, 그런말 마셔요, 그들이 들으면 웃겠어!." 그가 말하는 "그들"이란 "전업적"이고 "주류적"인 "순작가"를 가리키는 것이였다. "웃다니, 누가 웃어?" 나는 도리질하고나서 나도 그와 꼭같은 신세임을 솔직히 알려주었다. 그랫더니 그는 아 그런가요  반가와요 하면서 자기는 본명이 왕해도(王海圖)라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가까와지게된건데 그는 나보고 그냥 작가로 지낼려면 외려 '전업'보다 '업여'가 더 자유스럽고 나은것같다고 했다. 동감이였다.  그는 나의 손을 잡은채 다른때는 감히 말못한것이였노라면서 한결 심중을 털어놓는 것이였다. "문학이 따로존재할 리유가 있습니까? 있다면 왜서? 나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존재하는한 자연히 서로 교류가 있게되지요. 속을 털어놓게 되고, 귀를 기울이게 되고, 서로 위안하게되고, 어떤일은 루설하게 되고, 즐기기위해서 오락을 하게 되는건데.... 그 모든것에 대한 선택은 저마다 자유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열독시대는 이미 지난겁니다." "그 말이 맞아, 열독시대는 이미 지나간거야!" 나는 심중을 들때리는 그의 론단에 수긍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봤다. 라디오를 듣던것이 옛날이고 지금은 컴프터, 영화, 텔레비가 제일 큰 매개물이 되어 판을 치고있는 세월이다. 이런때에 도서(圖書)의 위치는 과연 어떠한가? 여적지 그런것도 연구하지 않고 골통을 동이고 들어앉아 내내 글을 써온 내가 너무나 바보스럽지 않았는가? 그것이 짧은 글이면몰라도 누가 반가와하지도않을 대론의 장편을 내내 써놨으니 너무나 미런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같이 모순되는 내심을 보아내기나한것 같이 그가 말했다. "특히 중국에서말입니다. 작가는 불행하게도 컴프터, 텔레비가 패권주의자로 된 시대에 살고있지요. 안그렇습니까?... 컴프터, 텔레비가 무수한 인간들의 흠상능력과 습관을 훈련하고 개변시킨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자층을 거의다 잃고만겁니다. 않그렇습니까? 보시오. 생활절주가 점점 더 빨라가면서 무수한 인간들이 시간이 모자라 초조해 하고 볶아대고 들뜨고 몰리우고 게을러지는판인데 그들이 언제 들어앉아 장편대론을 보자할가요? 그건 그렇고 누가 또 봐도 알둥말둥한 시를 리해할려고 머리악을 쓸가요? 그 누가 질질늘여놓는 산문에 매이여 시간을 보내자할가요? 산문이라는게 도대체 뭔가요? 어떤 글은 가치가 너무나도 없어서 읽고난 후에는 마음이 개운해지기는 새려 시간을 헛떼운것 같아서 분하다고들합니다. 안그럴가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얄지 미처 궁리나지 않았다.   단조로운 생활에다 신앙이 단일하고 소식이 막혀 소통이 안되였던 지나간 세월에는 자기의 들끓는 사상에 용기가 북돋아 자질이 총혜하고 학식이 연박한 재사들이 작가로 등장하여 자유롭게 제 재질을 발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때인가? 정보가 폭발적이고 생활은 절주가 점점  빨라가면서 생존경쟁이 치렬해지고있는 다원화시대(多元化时代)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 작가란 명예는 언녕 빛을 잃은 것이다. 작가라면 그 누구나 이를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속이 상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현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고관이나 돈많은 부자, 연원, 가수, 춤잘추는 무녀의 이름은 알아도 작가의 이름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들은 알려고하지도 않는다. 지어는 알필요도 없다고 여기는것이다. 그런다고 작가가 없어질건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두말할것 없이 문학은 사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 할 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급속도로 변화발전하고있는 시대의 도전을 받아 변모를 해야하는 것이다. 하기에 지금늬 작가들에게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새 사명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옛틀을 짓부시고 변화되는 현시대에 걸맞게 대중이 즐기고 사랑하고  환영하는 새형의 문학을 창출하는 그것이다. 이는 소인인 나의 견해다.                         
218    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大怨案) 댓글:  조회:4420  추천:15  2012-12-28
            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大怨案)     호풍문제(胡豊問題)는 지나간 몇십년간 중국지식분자들의 령혼에 영향이 크게 미쳣다. 그로 인하여 중국지식분자들에게 드리웠던 어두운 장막은 아직까지도 채 걷혀지지 않고있는 것이다. 가슴심처로부터 생겨난 불치의 그 진통이야말로 언제가면 다 멎을 수가 있을가?... 1955년~1956년사이 북경, 상해, 천진, 청도, 남경, 항주, 서안 등의 도시들에서는  근본 성립되지도 않는 호풍의 "죄"로 인하여 "호풍반혁명집단안"이라는 것이 생겨낫던 것이다.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전국적으로 2,100명이 넘는데 체포된 사람이 92명, 격리심사받은 사람이 62명, 직을 멈추고 반성한 사람이 73명이였다. 시인으로부터 소설가와 극작가, 중공중앙선전부의 일반간부로부터 지방선전부의 부장에 이르기까지, 호풍이 손수 부추겨준 학생으로부터 호풍과는 거래가 없었거니와 전혀 면목조차없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이르기까지 없는곳이 없었다. 그때 "문예론쟁이 정치심판"으로 확대됨으로 하여 이에 말려든 사람을 통털어 일률로 "호풍분자"라 했다.    듣기만해도 소름끼치는 끔찍스러운 사건이였다. 그것이 전국의 지식분자들에게는 경종이 되어 여지껏 몇십년간을 떨게 만들었으니 모택동이 바라는대로 그 작용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게 아니다.  력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 수도 없어서 지천이 들어도 낯을 붉히고 대노할 그 대원안(大怨案)은 아직까도 멋을 모르는 백성들이 위대하다고 떠받들고 열애하면서 숭배하는 모택동이 손수조작한 것이였던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의 말을 믿을건가 믿지 않을건가, 그에 대해서는 독자자신에게 맏기면서 아래에 그 실태를 밝힌다.     호풍은 1955년 5월 16일에 집에서 불려가서는 이틀만인 5월 18일 전국인대상위회(全國人大常委會) 제16차회의비준에 따라 "호풍반혁명집단"의 골간분자로 체포되여 심문에 넘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한때 일장의 전국적범위에서 호풍반혁명집단을 들춰내는 행동이 줄기차게 벌어지게되였던 것이다.   아래에 몇사람의 경우만 언급하련다. 1955년 5월, 남경의 발전창당위서기였던 구양장(毆陽庄)은 집을 떠나 북경에 가서 첵코전문가를 만나 그와 단위에 쓸 발전설비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그는 호풍을 알고 련계가 있다하여 체포된건데 10년을 옥살이하였다. 그리고도 그는 농촌에 하방하여 15년간 로동개조를 하였던 것이다. 구양장(毆陽庄)은 어떻게 되어 "호풍반혁명집단" 골간분자로 몰렸는가? 그는 북경에서 집에 돌아온 그날 회의를 한다하여 불려간건데 집을 나갈 때 예감이 좋지 않아 데릴러 온 사람과 혹시 호풍의 문제를 얘기하자고 하는건아닌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쪽은 자기는 모른다고했다. 구양장(毆陽庄)은 그래도 어쩐지 감각이 좋지 않은지라 호풍의 문제라면 당장 자료를 갖고갈테다, 그가 나한테 한 편지들이 다 있으니 갖고가겠노라했다. 저쪽은 필요없다고 했다. 구양장(毆陽庄)은 그때 문학을 애호하는 젊은이였는데 전에 이라는 간물을 편집한적이 있었다. 한번은 로령(路翎)의 극을 보고 호감이 생겨 그와 가깝게된건데 그를 통해서 "7월파"문학쌀롱에 가담했고 거기서 문학을 하는 익방(翼滂), 화철(化鐵), 방연(方然)등을 알게되여 친구로 사귀였고 1947년에는 호풍(胡風)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바로 호풍(胡風)이  "30만자언서"를 썻을 때였는데 구양장(毆陽庄)은 북경에 갓던 그 걸음에 그 "30만자언서"를 토론하는 모임에 참가했던 것이다. "죄증"이란 그것이였다.   리가릉(李嘉陵)은 중선부(中宣部)의 선전간사였는데 "호풍반혁명집단"의 일반분자가 되어 1년반의 감금생활을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는 무슨 일이 있다해서 얼리워간건데 공안국에서 요구하는 수속이라면서 서명을 하라기에 했더니 그것이 "체포장"이 돼버렸다는 거다. 그는 문학청년이 아니거니와  호풍과 거래한적도 없었다. 그의 남편 호전(芦甸)이 문학을 사랑했기에 일찍 중경에 있을적에 그 둘은 혁명구(革命區)에 가서 호풍의 집을 방문한적이 있은것이다. 그때 호풍은 그들보고 해방구가 간고하니까 고생을 이겨낼 사상적인 준비를 하라고 친절히 일깨워줫던 것이다. 해방후에 호전(芦甸)이 천진에 있으면서 호풍(胡風)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처 리가릉(李嘉陵)역시 걸려든 것이다. 호풍(胡風)을 도와 그의 "30만자언서"를 베껴줫고 중선부(中宣部)의 간사신분으로 호풍(胡風)과 연통했으니 죄라는 것이였다. 한데 리가릉(李嘉陵)본인의 말을 들어보면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그때 나는 중선부에 회의가 있으면 참가했을 뿐이지 중선부에 있지도 않았어요. 그당시 주양(周揚)이 '호풍은 마레주의옷을 입고 호주머니에는 자본주의를  넣고다닌다' 면서 '모자'를 씌우자고 들때였어요. 어느날 호전(芦甸)이 호풍이 쓴 글을 갖고와 나보고 호풍의 글을 늘 매지(梅志)가 베끼곤했는데 시간이 모자라  미처베끼지 못해서 갖고왔으니 대신 베껴주라면서 줫어요. 4천자가량되였는데 문예리론부분이였어요. 그때 나는 그것이 '30만자언'의 것이라는것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이랬어요."   천진의 림시(林希)는 그때 나이가 19살로서 제일어린 "호풍분자"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그는 고중3학년생으로서 대학갈 생각에 다른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원래의 성명은 후홍학(侯紅鶴)이다. 어느날 아는 사람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아유, 이 얼빠진 자식아. 너를 붙잡으라는 '통집령'까지 내렸는데도 넌 그걸 모르고있다니, 원!" 하고 놀란 소리를 해서 그는 스스로 공안국을 찾아가 자수를  한것이다. 그랬어도 감옥생활은 면하지 못하였다.    이런모양으로 걸려들고 서로 련루되다보니 2,100명이 넘어되는 무고한 지식인들이 운명이 기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다면 지천이 공노할 이 대원안(大怨案)이 생기게 된 그 비밀을 깨놓고 보면 어떠한가? 이 일은 당시 중선부간부처부처장(中宣部幹部處部處長)이였던 왕강(王康)에 의하여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난 것이다. 호풍안건이 발생한 후 그는 중앙숙반령도십인소조(中央肅反領導十人小組)로 파견되여 갓거와 판공실의 부주임으로까지 임명되여 직접 호풍안건을 심사하였던 것이다. 심사중에 그는 호풍은 해방전에는 국민당에서 엄밀히 감시했던 좌파인사였다는 것과 이른바 호풍집단의 중요골간인 아용(阿垄)은 주은래 등이 중공지하공작인원이였다고 증명하였던 것이다. 하여 왕강(王康)은 1956년봄에 있은 숙반령도소조 반공회의때 호풍집단중에는 반동력사가 있는 사람이란 없으니 반혁명분자로 정하지 말아야할게 아니냐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라서경(羅瑞卿)이 비평하는 것이였다. "왕강! 너의 그 의견은 나쁜의견이다." 몇 년지나 왕강은 그 일로하여 "우경기회주의분자"로 몰나웠다.   기실은 라서경(羅瑞卿)역시 왕강(王康)과 같은 견해를 갖고있은 것이다. 어느 한번은 공안부의 라서경(羅瑞卿)과 고등검찰부의 량국무(梁國娬), 고급법원의 극림(克林) 등이 "3장회의(三長會議)"를 열고 호풍반혁명집단을 심판할 준비사업을  토론했는데 그때 라서경(羅瑞卿)이 말하기를 "호풍집단을  미국,장개석과 밀접한 련계가 있는 반혁명집단이라 하는건 억지스럽지만 이건 모주석이 친히 결정한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가?" 했다. 저쪽 두 사람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라서경(羅瑞卿)은 "그래도 모주석의 의견대로 처리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후 주양(周揚)역시 라서경을 찾아 그와 이 문제는 십인소조전체회의를 열고 토론해야할게 아닌가고했더니  라서경이 "호풍반혁명집단"이라는건 모주석이 정해놓은 성질인데 어떻게 토론한단말인가?"했다. 그랬거니와 라서경이 그후에는 공안부에서 경중에 따라 "호풍분자"를 평판하는게 좋지 않으냐고 올려보낸 의견마저 육정일과 같이 깔아버린것이다. 그 리유인즉 올려보내봤자 모택동이 비준하지도 않을것이며 그런다면 되려 그가 작성한 전국(全局)적인 부서(部署)를 헝클어놓는 것으로  되니까 어렵다는 것이였다.               (왕강(王康)의 회억록 )             ( 2010年 第8期
217    에세이 미용수술과 명작의 탄생 댓글:  조회:3819  추천:2  2012-12-25
  에세이  미용수술과 명작의 탄생   지난날 중국문단에서는 "명작"이 어떻게 나왔던가? 그 과정을 한번다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의 수개란 곧바로 미용사의  미용작업과도 같어서 수술을 받지 않고 세상에 태여난 작품이란 아마 거의 없을것이다.   아래의 "명작"몇개만 례로 들어서 그 탄생과정을 살펴보자.   의 경우: 이 책은 라광빈(羅廣斌), 양익언(楊益言)의 공저로 된 장편소설인데 1961년에 출판되였다. "혁명적 교과서"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은 후에 영화 "열화속에서 영생하리"로까지 각색되여 전국의 관중으로 끌어모음으로 하여 이름이 더났다. "1948년부터 1949년사이 중경의 해방전야를 배경으로 하고 혁명가들이 감옥 '중미집중영'에서 박해를 반대하여 진행한 비장한 투쟁을 주선으로하여 강언니, 허운봉, 제효헌, 성강, 화자량 등 로동계급의 영웅적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였으며 혁명선렬들의 숭고한 품성과 영웅적기개를 열렬히 노래하였으며 앞사람이 넘어지면 뒤의 사람이 이어 전진하는 공산당원들의 자기희생정신과 과감히 투쟁하고 과감히 승리하는 철저한 혁명정신을 표현하였다." (238페지. 흑룡강민족출판사 1993년판)   한데 사실과는 어떠한가? 나는 언젠가 중앙텔레비 "죠댄방탄(焦点访谈)"에서 "붉은바위당안비밀해득"을 보고서는 뜻밖에도 책을 쓴 작자들이 한심하게도 력사를 갖고 우습게 놀았다는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는 실재한 "사재동"력사에 의거하여 쓴 장편소설이다. 한데 등장인물의 행위를 보면 한심하게도 사실과 맞지 않은것이다. 허운봉(許云峰), 강언니(姜姐) 등 공산당지하간부들을 팔아먹음으로 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힌것은 보지고(甫志高)가 아니라 생각밖에도 그당시 중경시위의 정서기, 부서기노릇을 했던 류국정(劉國定)과 주익지(冑益智)였다. 자료를 보면 주익지(冑益智)는 특무가 귀뺨을 둬개 때리니 그만 겁을 집어먹고 곧이곧대로 자기가 알고있는 62명동지의 이름을 주어대서 결국은 300여명에 이르는 공산당원이 잇따라서 감옥에 같이는 참화를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외려 급이 없었던 장장오(張長鰲), 상승문(尙承文)과 같은 일반당원이 반역자의 밀고로 잡혀들어가서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불요불굴의 투지로 고문을 들이대는 적과 용감히 맛서싸웠던 것이다. 그 둘은 전기곤봉에 맞아 의식을 잃었거니와 전신이 졸아들었지만 이연히 이를 악물면서 끝까지 대항한 것이다. 적들은 그 둘을 굴복시키지 못하겠으니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아매여 살해했다. 장열한 희생이였다! 력사사실은 이렇건만 소설은 선전목적에 의하여 인물부각이 완전히 다르게 된 것이다. 문학예술로서의 소설이 허구가 허용되지만 정치목적을 위해서 실재한 력사를 그같이 뜯어고쳤으니 엄중한 외곡이 아닐수 없다.  그런것이 그래 쓰레기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이같이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해방전 국민당통치구의 작가들이 쓴  우수한 작품은 어떻게 보겠는가고 질문을 할 것이다. 해방전 국민당통치구에서 창작된 작품중 좋은것들이 적지 않은것이다. 하지만 그것들마저 건국이 되여서는 시대정신에 잘 맞지 않는다는 리유로 거의가 수술을 받는 변을 당한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만 례로  들겠다.   의 경우: 이 장편소설은 로사(老舍)가 1936년말에 내놓은것인데 그의 생애에서의 새로운 성과를 과시한 대표작이라 한다.   작품은 군벌통치하의 북평(북경)을 배경으로 좀 "자유로운 인력거부"로나 되어보려고 무등 애를 쓰던 청년로동자 샹즈의 비극적운명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구사회를 공소, 단죄하였으며 그런 암흑한 사회제도하에서의 개인분투의 길에 대하여 철저히 부정하였다.  (265페지. 흑룡강민족출판사 1993년판)   는 한때 평이 대단히 좋았던 소설이다. 한데 한 평론가에 의하여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안되였던 것이다. 워낙 좋게 된  소설을 그같이 만든 사람은 허걸(許杰)이다. 때는 1948년 10월. 그는 >이라는 글에서 "전형적인환경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틀"을 갖춘 리론으로써 그 소설은 "자연주의"경향이 있다느니, 작품에서 개인주의자 샹즈의 출로가 전혀보이지 않으니 중국사회의 밝은길은 없는 것으로 되었다느니 하고 혹평을 한 것이다. 평론은 로사(老舍)가 소설의 주인공 샹즈의 운명에서 사회환경이 그의 개성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내지 못했다면서 "성생활작용"을 과분하게 묘사했다느니 샹즈를 타락하게 만든것은 호뉴, 하노친의 성유혹이라느니 했다. 뿐만아니라 더욱히는 "사회주의자"와 "혁명자"를 완미하게 그리지 않았기에 소설에 나오는 "사회주의자" 조선생은 조롱을 받은것이라고 첨예하게 비평한 것이다. 문학의 거장으로 일어설 젊은작가에게 이같이 혹독한 평론은 부추김인것이 아니라 타격이였던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그 소설이 빼버리거나 고친것이 145곳. 원래는 15.7만자던 소설이 수개를 하고하다보니 나중에는 9만자로 줄어버렸다. 제24장은 아예 몽땅 빼버리고말았다. 그래서 주인공 샹즈의 몸에 묻어있은 오점과 함께 "혁명자"의 더러운것을 찾아볼 수 없게되였다. 원명과 샹즈지간의 관계, 다시말해 "혁명자"와 군중간에 서로 리용하고 서로 팔아먹는 비렬한 행위들이 지워진 것이다. 로사는 압력에 못이겨 이렇게 제손으로 좋은 작품을 "요절(腰折)"시켰던 것이다. 원인은 "혁명자"를 완미한 인물로 만들어야했기 때문이다.   과 의 경우: 은 모순(茅盾)이 1932년 12월에 쓴 장편소설로서 그의 대표작인데 원작에서 빼버리거나 고친곳이 저그만치 620군데나되였고 엽성도의 대표작으로서 1928년에 완성한 장편소설 는 끝부분을 해방후에 대폭으로 수개했다. 왜서였던가? "혁명자"를 미화하기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인간사회의 론리를 흐리우는 미용수술이였다. 이러한 명작들을 그래 지금도 명작으로 칠수 있을가? 이제 다시는 고칠수도 없는 쓰레기로 돼버고만 것이다.   하다면 우리들 작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그닥 명랑하지는 않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야한다. 정녕 그러자면 길은 하나뿐ㅡ 막언을 본받아 자신을 대담히 어용문인에서 해탈하여 문학의 본연(本然)으로 돌아오는 그것이다.       
216    에세이 어용문인과 쓰레기문학 댓글:  조회:4749  추천:5  2012-12-22
         에세이  어용문인과 쓰레기문학    2006년도의 일이니 어언간  6년철이 된다. 나는 그해의 12월 11일자 에 실린 한편의 글을 보고 적이 놀래면서 지난날은 물론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작가와 문학의 실태를 놓고 다시한번 고민해보았다.   그 신문에 몇가지 소식외에 국제한학계(國際漢學界)에서는 이름이 있는 독일의 한학가(漢學家) 고빈(顧彬)이 독일에서는 지명도가 높아 권위적인 매개물로 되는 "독일의 소리"기자와의 인터뷰때 돌연스레 "중국의 문학작품은 다해봤자 볼만한것이 몇권안된다"면서 중국문학은 "쓰레기문학"이라고 기탄없이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것이다. "독일에는 작가가 도처에 있어서 그들이 독일을 대표하여 독일사람의 말을 하고있다. 그러니 독일은 자기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자기의 목소리가 있는가? 없다. 중국작가는 담이 특별히 작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근본 존재하지도않는다. 전에는 그래도 로신의목소리가 중국을 대표했지만 지금은 중국에 그같은 사람이 없다. 세상에 내놓을만한 작가가 있는가?  없다."       나는 그 글을 보고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하고 의문을 달았을 뿐이지 그의 예리한 지적을 부인할 수도 반박할수도 없었다. 왜서였는가? 그건 그의 그 말이 페단많은 중국문학의 정통을 면바로 찔럿기 때문이다. 지금 이 말을 새삼스레하면 많은이들이 "쳇, 봐라, 중국이라고 왜 내놓을만한 작가가 없단말인가? 막언이 세상에 내놓을만한 사람이 아니고 뭔가?" 할 것이다. 허나 우리는 알아야한다, 막언이 노벨문학상을 탓어도 그 한사람의 힘으로는 중국문학의 현실태를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중국에는 유일하게 정부에서 내주는 "모순문학상"말고도 "로신문학상", "로사문학상", "장중문문학상"이 있거니와 각 성마다 상을 성립했다. 우리들 조선족만 봐도 전국적인 "소수민족문학준마상"을 탈수 있거니와 "연변작가문학상", "두만강문학상상", "윤동주문학상"을 비롯하여 무려 12가지에 이르는 상이 있어서 작가와 문학애호가들의 창작열의를 북돋우고있는 것이다. 전국을 놓고 보면 해마다 출판되는 책이 산더미같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는 실정이다. 한데도 그리볼것이 없어 "쓰레기"라하다니?... 과연 듣기가 거북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게아니다" 하고 지금도 그 독일한학가의 말을 부인하고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말과 같이 중국에는 확실히 볼만한 책이 얼마안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서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수있는 내재적원인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작가들은 선천적인 병모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담이 특별히 작아 눈치를 보면서 할말이 있어도 감히 하지를 못는 것이다. (물론 차츰나아지고있기는 하지만.)   공산당은 건국초부터 작가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그들을 "공무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작가개인으로 놓고 보면 밥통을 찾았기에   집식솔들을 먹여살릴 수 있어서 큰 근심걱정을 덜었지만 자신은 창작자유를 잃고만 것이다. 공산당은 그같이 작가들을 자기의 정책과 로선을 선전하는 공구 즉 어용문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문학은 무산계급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구호는 건국전 해방구에서 이미 제창되여 류행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금을 그어놓은 안에서 당이 가르치는 로선에 따라 자기의 창작활동을 하면서 조심스레 움직어야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키는대로 주로 공적과 은덕만을 노래하다보니 문학이 갖추어야 할 주요한 비판공능을 잃고말앗던 것이다. 해방구의 작가들은 마치 지뢰를 밟을까봐 전전긍긍하듯이 자기가 착오를 지을가봐 마음을 죄였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대담히 나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왕실미(王實美)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연안에서 한차례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문장을 써서 관료주의를 비판하고 당풍을 규정할것을 제의했으며 과격한 공산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잡문 를 써서 1942년 3월 13일자 문예부간에 발표했다. 그 문장역시 해방구의 암흑면이 되는  등급제도를 폭로하고 비평한 것이였는데 모택동의 미움을 삿다. 하여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반혁명 뜨로쯔끼파간첩", "반당오인집단성원", "숨어있는 국민당특무"로 몰려 옥에 같혀있다가 강생(康生)과 리극농(李克農)의 손에 비밀리에 처결되고 만 것이다. ("문혁"후 그의 처가 신소하였기에 억울한 안건으로 평판받았다) 연변의 문학계에도 그같은 실례가 있다. 작가 김학철이 소설 를 써 모택동이 발동한 "대약진"의 페단을 사실그대로 폭로하고 비평했다가 “반당,반혁명”으로 몰려 투쟁받고는 억울하게도 10년간이나 옥고를 치룬게 아닌가. (그의 말과 같이 발표도 하지 않은채 뻬랍속에서 곱다랗게 자는것을 들춰갖고 야단을 떨면서) 지난날 중국의 정직개결한 중국작가들은 다가 운명이 이러했던 것이다. 모택동의 말같이 사람의 모가지는 염지처럼 잘라도 다시자라는게 아니다. 그런즉 바보가 아닌이상 그 누구면 제목숨을 내걸어가면서 모험을 하자할가? 그래서 중국의 작가들은 입이 있어도 감히 말은  못하고 시키는대로 곰상이 주선률에 맞추어 주로는 공적과 은덕을 노래하는데다 정력을 몰부엇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작가적인 량심은 스스로 버린것이요 그래서 남한테 지금은 중국의 목소리를 대표할만한 작가가 없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지겹도록 암흑해서 저주롭던 그 세월이 끝난지도 이젠 30년이 넘는다. 한데도 남한테 쓰레기문학을 한다는 소리를 그냥들을건가? 중국의 작가는 다가 한번다시 숙고해봐야 할 일이겠다.               
215    에세이 과학자의 죽음 댓글:  조회:3552  추천:2  2012-12-20
      에세이  과학자의 죽음     북경의 팔보산공묘(八寶山公墓)에 가보면 죽은이의 골회는 없고 빈골회함만 간직하고있는 특별한 묘가 하나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인조위성의 아버지"라 일컫는 조구장(趙九章)의 묘인것이다. 그는 력사에 류례가 없는 대규모적인 광란의 시기였던 1968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국민당원로 대계도(戴系陶)의 외조카로서 젊었을적에 그의 기요비서노릇을 한적이 있다. 하여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거기를  내려서는 청화대학의 물리계에 붙어 공부를 하다가 공비로 독일에 가서 기상학을 전공했는데 3년만에 박사학위를 얻은 것이다. 학업을 뜻대로 이룬 그는 외국에 그냥있었더라면 호화로운 주택에 고급하이야를 타고 다니면서 얼마든 복을 누렸으련만 그는 그러지를 않고 빈궁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데 그의 그러한 선택이 결국은 어떤 결말을 보았던가?   “문화혁명”이 오니 그는 력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제아무리 발버둥이치고 몸부림쳤어도 헤여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구장(趙九章)은 매일 짐승모양으로 끌려다녔다. 목에 검은글씨로 “반동학술권위 조구장”이라 쓴 커다란 패쪽을 걸었다. 그를 력사반혁명이라 몰았던  것이다. 무계가 10근 넘어되는 패쪽이였는데 그것을 달아맨 철사가 살을 파고들어 목이 끈어지는것 같이 아팠다. 그랬어도 “홍위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매일 거리로 끌고나가 조리돌림했다. 그러고나서는 다시금 과학원에 끌고와 투쟁했는데 번마다 머리를 숙이게했거니와  두팔을 뒤로 올려 허리는 90°되게 굽혀 “분기식(噴氣式)비행기”를 태웠던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담뱃불로 허리를 지지였다. 어떤때는 담배불이 다 꺼질때까지 지지였다. 그는 그때 이미 늙은데다 허리병까지 있는 몸이였다. 하건만도.....   1968년 6월, 북경교구의 홍위대대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었던 조구장(趙九章)은 로켓트금속재료연구전문가 요동무(姚桐娬)가 두패거리싸움을 제지시켜보려다가 그들의 손에 매맞아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였다.   조구장(趙九章)에게있어서 요동무(姚桐娬)의 죽음은 커다란 타격이였거니와 운명에 대한 미묘한 암시면서 신호이기도했다. 하여 그는 절망하고말았던 것이다. 어느날 그는 마지막 “검사서”를 써 상우에 놓고나서는 치솔질을 하고 세수하고 발까지 깨끗이 씻은 후 자리에 누웠다. 그는 평시에 모아두었던 몇십알되는 안면약(安眠藥)을 전부 입안에 넣었던 것이다.....   조구장(趙九章)이 그같이 자살하자 국방과학위원회의 부주임이였던 라순초장군(羅舜初將軍)이 주은래에게 전화를 쳐 알리였다. 전화를 받은 주은래는 낯색이 굳어지면서 어두운구름장이 덮혔다.   그야말로 비참한 운명이였다. 제 조국이라 하여 희망품고 찾아왔던 조구장(趙九章)이 대우는 못받을지언정 왜서 그같이 세상을 떠나야만했던가? 도대체 왜서?.... 1968년, 바로 조구장(趙九章)이 죽은 그해에 그 중국과학원에서 자살한 1급 과학자 연구원만도 20명!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의 정당, 어느 정권이 제 나라의 과학자들을 그같이 혹독하게 대주었던가? 과연 통탄할 일이다! 이 역시 한번다시 숙고해 봐야 할 일이아니겠는가?!      
214    (콩트) “삼보부장” 출생기 댓글:  조회:3676  추천:0  2012-12-17
     (콩트)   “삼보부장” 출생기      어스름이 내리는 저녘켠.   두 소학생애가 하학해서 놀다나니 늦어서야 집으로 가고있는데 저기 앞에 다들 “부장님”이라 존경해서 부르는 어른이 오늘은 웬일인지 매미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어디론가 총망히 가고 있었다.   애들이 그가 집에는 안가고 어디로 가는걸가 의아해 할 때 소매치기젊은놈이 홀연 나타나 그의 옆을 스쳐지나는 순간 귀신이 피똥쌀지경 잽싸게 지갑을 채갖고 내뺏다.     “저 도적놈잡아요!”   애들이 소리지르며 쫓아가니 소매치기는 저쯤가서 사람의 머리가 그려진 백원짜리만 꺼내갖고는 지갑은 훌 던져버렸다.   애들은 빈지갑이라도 임자한테 줘야지 주어들고 보니 “부장님”은 안보이고 경찰이 무슨일이냐며 달려왔다.   “이건 ‘부장님’의거얘요!”   애들은 그한테 주은것을 바치였다.    “오 그래? 참 용감한 애들이구나!”   한데 웃으며 지갑을 받던 경찰이 그것을 열어보고는 눈살을 찌프리면서  낮색을 굳히는 것이였다.  왜서 저럴가? 다른일이 아니다.   그 지갑속에 없어진 돈말고 들어있는건 "위거"와 “콤돈”이였던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이렇게  "삼보부장(三寶部長)"이 생기였다.
213    에쎄이 내가 알고있는 모택동시대 댓글:  조회:5708  추천:23  2012-12-15
   내가 알고있는 모택동시대   모택동시대 백성들의 생활을 보면 1950년부터 1957년까지, 1958년부터 1976년까지 두계단으로 나눌수 있는데 대체로 성시주민, 농민과 소수민족 이 3개의 군체로  나뉘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의례 나같이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이거나 그 시대를 격어본 부모들한테 들어야만 그 당시의 진실한 상황을 알수있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거니와  엄연한 력사인 것이다. 한데 딴심보를 품은 어떤 극단분자들은 개혁개방이래 국가가 급속도로  륭성발전하고있는 기꺼운 면모는 보지 않고 당정인원중 부패해진 일면만 꼬집으면서 지금의 세월은 모택동시대보다 못하다느니 어떻다느니 따위의 가당치 않은 역설로 력사의 진실을 모르는 젊은이들을 든장질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풍랑을 일으켜  온정되여가고있는 국가의 질서를 휘저어 교란하고 발전과 전진을 저애하려하니 경각성을 각별히 높혀야 할 일이다.   1.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이때는 전쟁직후였던 중국이 회복시기였다. 다년간 전란에 모대겼던 백성들이 평화를 갈망해서 "쏘련큰형님"의 방조를 받아가며 생산에 적극뛰여들었던 것이다. 그당시는 조선선쟁이 일어났기에 "항미원조"도  해야했지만 시장경제가 이끄는데 따라서(모종의 의의에서 보면) 나라의 경제는 쾌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생활은 비교적 빨리제고되였다. 토지개혁직후라 농민은 자기의 땅이 있음으로 하여 자연히 생산열정이 높아졋기에 량식은 기본상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집이 닭, 오리, 돼지와 소를 길렀다. 그러면서 자기 손으로 생산해낸것들을 시장에 갖고 가 팔수도 있어서 쓸돈을 마련했는데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이때는 공업역시 따라서 회복되고 발전하였는바 성시가 확건되면서 적잖은 농민이 도시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았다. 공인, 혹은 점원 등 각가지를 찾아 할수있었던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사회주의건설에서 들끓는 고조를 이룬것이다.  그 당시 물자가 그리 풍부한축은 아니였지만 상품구매표를 갖고 물자공급과 분배를 공제할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지금보다 더 개방적이였다고 할 수 있다.   2. 1958년부터 1976년까지: 아쉽게도 그같이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중국의 경제가 그같이 쾌속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자 머리가 뜨거워난 모택동은 사회주의진영에서 제가 큰형노릇을 해 볼 궁리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모택동사상으로 온 천하를 다스려보려는 꿈까지 꾸엇던 것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반제반슈(反帝反修)를 부르짖었고 대내적으로는 세폭의붉은기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회주의개조운동을 일으켰다. 전국적으로 발동한 합작화운동(초급농업합작사로부터 인민공사에 이르기까지)은 농민들의 땅과 농기구, 목축 등의 모든 생산자료들을 무단적으로 걷어들이였는데 그것은 이른바 인민공사화제도로 재빨리 공산주에 뛰여들 수 있다는 공상적인 아름다운 생각과 욕망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한것이여서 결국은 농민들의 적극성을 크게 상하게만드는  후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반우파운동"을 발동하여 거의 3백만에 이르는 지식분자들의 입을 틀어막아놓고는 양으로 음으로 개인숭배를 고창하여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세상이 움직이게끔 만들려 했다. 한심한 독단이였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초과한다"면서  황당하기짝이 없는 광열적인 대약진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말그대로 엉망진창이였다. 불어대는 바람이 온 대지를 휩쓸었지만 사람들은 탄압이 무서워서 할말이 있어도 감히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가짜와 허무가 란무하는 한심한 세월이였던 것이다. 그러하였기에 결과적으로는 1960년~1962년사이 광할한 중국대륙에 기황까지 겹치니  3,000만이 넘는 백성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류소기의 말과 같이 그것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 (人災)였다. 세계사상에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끔찍스러운 비극이 구사회가 아니고 위대한 사회주의라고 자랑하며 부르짖은 신중국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3.  지금도 어떤 사람은 모택동은 무엇이든 실제정황에 맞춰서 정책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렸으니 도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했던가? 도리가 있다면 해놓은 일이 좋았어야할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이야 어떻든간에  결과가 나쁘면 나쁜것이지 거기에 변명이 필요없는 것이다. 모택동은 생전에 크게 복잡해야  크게 다스릴수 있다면서 "문화혁명을 뒤엎어보자구? 안돼!"했다. ( 를 보라)   모택동 그가 발동한 "문화대혁명"이 어떠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세인이 이미 다 알고있는 일이기에 구구히 더 서술하지 않고 엽검영이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사업회의 때 선포한 것을 원문그대로 번역해 올리니 보면 좀 더  알게 될 것이다.   "중공중앙은 2년 7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문혁'에 유관한 수자를 핵실했다. 박해받은 사람 745만명, 갇히여 심사받은 사람 425만명, 자살한 사람 172만 8천명, 고급지식분자가 핍박에 못이겨 층집에서 투신하거나 목을 매거나 강에 몸을 던지거나 음독자살한것만도 20만명, 1970년 "一打三反"운동 때 “엄하고 빠르게” 사형판결을 내려서 죽인 “현행반혁명”만도 13만 5천여명, 무단적투쟁에 죽은것이 23만 7천 여명, 불구로 된자 703만명, 철저히 회멸된 가정이 7만 1천 2백여 호, 비정상적인 사망이 적어도 773만명에 이른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잔혹하게 박해받은 사람이 1억이니 전국인구를 9억으로 칠 때 그 비례는 9분의 1 이 되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자 2천만을 넘고 손실본 국민경제는 인민페로 8천억원에 달한다. (叶剑英1978年12月13日中央工作会议上讲话;骇人的数字)     "문화혁명"은 그 어떤 위대한 거동(擧動)인것이 아니라  "억만인민 마음속의 붉디붉은  태양"이 머리가 잘못돌아  홍색공포(紅色恐怖)를 일으킴으로 하여 하마터면 강산이 훼멸될번했던 전대미문의 대내란 대재난(大内亂 大災難)이였던 것이다.                
212    에세이 로상에서 느낌 댓글:  조회:4294  추천:1  2012-12-15
 에세이 로상에서 느낌   이젠 나이도 있거니와 어느때 갑자기 드러누울지도 모를일인지라 공비치료이전문제같아나 화천(樺川)에 갓다가 하루밤지내고는 어제 오전에 불낳게 돌아왔다. 그리한것도 걸린 일정이 4일간.  흑룡강의 성도(省都)ㅡ할빈에서 가목사까지 구간의 철도연선에 아직도 대약진때 생겻다는 낡은 흙집이 가담가담 눈에 띄여 가슴이 아렸으나 동방의 첫도시로 불리우는 가목사에 내리니 전에없던 고층건물들이 적잖게 일떠서서 시야를 막으니 그젯날의 도시가 아니였다. 내가 그곳을 떠난지 어언 20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했으니 그사이 두 번이나 변한셈이 되리라. 거기보다 더 몰라보게 변모를 한것은 동쪽 80여리지점에 있는 화천(樺川)현성 열래진(悅來鎭)이였다. 할지경 나는 깜짝 놀랬다. 남에서 북으로 쭉ㅡ 저기 송화강변에 이르기까지 몇리를 뻣은 큰길량켠은 갖가지의 상점과 려인숙과 오락장들로 번영한데 랭운대가(冷云大街) 서쪽구역의 얼마를 내놓고는 고층아빠트들이 땅을 차고 빼곡히 일어선것이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나는 혼자소리로 감탄했다. 현위생국의 당위서기와 공상국 국장은 다가 성이 왕가였다. 그리고 가목사역으로 마중나오고 떠나올 때도 나를 역전까지 바래다주면서 차에 태워놓고서야 시름을 놓은 그 중학교의 녀교사 역시. 그들은 우리집의  큰애와는 중학시절 동창이라는데 30년만에 만나는지라 서로 부등켜안으면서 기뻐야단이였거니와 접대역시 여간이 아니였다. 민족은 달라도 마음과 정은 끈끈이 이어진거다. 이는 왜서일가? 다른게아니다, 비록 조상이 다르고 민족은 다르지만 운명을 꼭같이 해야만 할 중화대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나는 새삼스레 지금 자라나고있는 일대는 결정코 거의가 모르고 지낼것 같은 력사의 한단락이 새삼스레 생각나면서 그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되여 이 문장을 쓰는것이다.   내가 근 50여년간을 줄창살아온 화천(樺川)은 합강지구(合江地區)에 속하는데 화남(樺南), 벌리(勃利)와 마찬가지로 위만때는 "일본개척단"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일본개척단”이란 대체 무엇일가? 그것의 정체를 알자면 부득블 흘러간 력사의 폐지를 번져야 할것이다.   1936년 5월, 일본관동군은 이른바 “만주농업이민 백만호 이주계획”이라는 것을 내와서 대량의 일본농업빈민을 중국의 동북땅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를 “일본개척단” 혹은 “만주개척단”이라 부르기도했다. “만주이주농업이민 백만호계획”을 보면 20년간에 100만호, 인구 500만명이 목표였는데 1937년부터 시작하여 동북에 들여오는것이 5년에 한번씩 첫 번에는 10만호, 둘째 번에는  20만호, 세째 번에는 30만호, 네 번째번에는 40만호였다. 흑룡강성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한 전문가에 의하면 “일본개척단”은 “시점이민”, “무장이민”, “국책이민” 등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민수는 점점 많아져 “9.18사변”때로부터 일본이 전패하여 투항할 때까지 농업이민외에도 “정치이민”, “공업이민”, “상업이민”, “문화이민”해서 개척단이 모두 860여개, 10여년간에 동북땅에 이미 들어온 이민 총인원수가 1백만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하다면 일본이 만주개척단을 보낸 목적과 그 실질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침략”이였다.  첫째는 국내에서 남아도는 인구를 전이시킴으로써 인구와 토지, 자원, 환경의 모순을 완화시키켜보려는것이고  둘째는 동북의 풍부한 자원을 략탈하여 국내인구를 먹여살리자는 것이며, 셋째는 조선을 삼켜버리듯이 동북도 삼키어 중국본토를 침략하는 발판으로 삼아 “대동아공영권”을 만듬으로써 “월등한 대화민족이 세계를 통치하자!”는 저들의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어보자는 것이였다.   "만주개척단아버지"는 힝아시미야 테쯔오우라는 광열적인 군국주의자였다.   일본정부는 그 먼저인 1928년에 벌써 조선사람중의 친일배들로 “만주개발대”라는것을 조직하여서는 매호마다에 총한자루씩 내주어 동북에 자리잡게했거니와 “개발대사무소”를 창설하여 동북의 토지를 헐갑으로 사들이게 했다. 그러면서 조선사람과 본토의 중국사람지간에 마찰이 생길시에는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무력적인 공격을 했는데 그들이 맨첫번째로 할빈에 보낸 조선인개발대 대장은 정립동(鄭立東)동이였다. (黑龍江督軍公署당안)   일본관동군은 항일련군을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비민구분(匪民區分)이라는 명목하에 산재호는 눈에 보이는 족족 말끔히 불을 질러 태워버렸거니와 12,000여개 넘는 집담부락을 만들어서는 중국사람의 농호와 조선농호들은 거기에다 몰아넣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토지를 빼앗다싶이 헐값으로 사들이였다가는 높은 세를 놓아 빌려주는 방법으로 강도식의 착취를 했던 것이다. 그통에 집도 땅도 다 잃어 류랑걸식을 하다가 굶어죽고 얼어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나면서 “일본개척단” 사람들은 저의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패전민의 귀향은 도주여서  그야말로 구사일생의 험난한 원정이였던 것이다.  얼마전 나는 90세를 훨씬넘긴, 벌리현 어느 집단부락에서 살았다는 한 생존 일본녀인의 눈물겨운 회고담을 들었는데 귀국중 그네들이 겪은 고초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였다. 저 남쪽에 있는 이도하자까지가는 도중 중국사람의 보복에 들가봐 온마을 수백명이 낮에는 숩속에 숨어지내다가 밤이 되면 어둠을 타서 모두 함께 밀행을 하는데 애기가 울음소리를 내면 들킨다고 입을 막아 죽여버리게했다고 한다. 중도에  굶고 지치고 병들어 죽은것이 수없이 많고.        저가끔 손에 총들고 와서는 남의 국토를 마구빼앗아 제것처럼 여기고 살았으니 침략자라 하겠지만 결국보면 그들 역시 전쟁에 혈안이 되어 날뛴 군국주의자들의 희생품이기도하니 가엽고 불쌍하기도했다. 바로 그러하다고 방정현(方正縣)에서는 전해에 50만원을 들여 “일본개척단민망자명록”과 “중국양부모서자명록”이라는 비석 두 개를 만들어세웠다. 뭐 중일량국의 우의를 돈독히  키우기 위해서라는가?  중국사람의 너그러움을 보여주자는거라는가? 외자를 유치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함이라는가?... 그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그것이 심한 여론을 일으켰다. “아무렴 침략자에게 기념비를 세워주다니, 이럴수 없다.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는 와중에 서로 면목모르는 다섯청년이 분기탱천하였거니와  조급증도 나고 참아견딜 수 없서서 서로 련락을 하고는 어느날 함께 모여 준비를 갖추고는 그곳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들 다섯은 우선 그곳 현정부를 찾아가 질문을 하고는 항의하여 기념비를 마수어 못쓰게만들고말았던 것이다.  이에 많은 네지튼들이 동감하여 갈채를 보내면서 방정현정부를 힐책했거니와  호된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나는 이번걸음에 그 일을 생각하니 내가 전해에 혼자나서서 이미 한차례 론쟁을 겪은적이 있는 그 일 를  다시금 되새기게된다. 연변에서는 왜 아직도 비암산에 세워놓은, 그 독립군의 북로군정서사령 김좌진을 살해한 공범녀인 강경애의 문학비를 철거하지 않고 그냥 버젓이 세워놓고있는건가? 대체 어느때까지 뻣혀볼텐가? 리유가 그리도 당당하단말인가? 다른 또 하나, 청마 유치환의 문학은 한간문학임이 분명하여 한국에서는 감히 행하지 못하는 기념활동을 왜서 연변에서는 떳떳이 받아들이여 벌리는가?  목적이 무엇인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과연 몰라서 그러런단말인가?...  그렇게하는것이 결코 문인의 너그러움으로는 될수없다는것쯤야 알게아닌가? 한데도 왜서 그러는가?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제 나라를 빼앗기여 학대받고 글과 이름마저 빼앗겨 서러웁게 지내온 그 기나긴 36년간노예의 신세를 한번다시 생각해보라. 민족적인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력사를 다시돌이켜보리라. 무엇이 굴욕이고 수치인지를 알아야 한다. 최저한도의 정중성이 있어도 그러지는 않을것이다. 나는  연변의 어떤 지성인들의 처사가 과연 리해되지 않는다.   
‹처음  이전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