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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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장편전기 설한 (13) 댓글:  조회:3220  추천:2  2014-03-11
  13.   좌진이 다시금 놓여나왔을 때는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 발랄할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구라파나라들에 대한 수출무역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아 재정위기가 더욱 심화된 일제는 그 위기에서 벗어나보자고 조선인민들을 가혹하게 압박착취하기 시작했다. 한편 1914년 5월중순까지만도 서흥군 제비여울수비대를 기습하여 일본침략자에게 타격을 주었던 평산의병대가 일본침략군 대병력에 포위되여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침으로 해서 조선본토에서의 의병투쟁은 막을 내리였던 것이다. 허나 조선인민들의 반일투쟁은 계속되였는바 그것은 점차적으로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군운동으로 전개되였다. 1915년 4월, 김좌진은 중국에 가있는 로백린을 비롯한 기명섭, 신대현, 윤흥준 등과 함께 채기두가 조직한 풍기의 대한광복단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 비밀단체는 그네들이 가입하면서부터 이름을 광복회로 개칭했다. 이 단체의 종지는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였다. 이때 중국혁명의 상황을 직접알아보기위해 중국에 건너갔던 박상진도 돌아오자 무력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조직에 부심하고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제가 1915년 원세개정부에 제기한 21개조 비밀조항으로 하여 중국인민들 사이에 대일전(對日戰)의 기운이 고조되고 조선독립운동단체들이 이에 가담하자 함으로써 실제화되기에 이른것이다. 즉 만주에 있는 동포들은 형편이 어려우므로 국내의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마련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일제의 간섭이 심하지 않은 만주지역에서 조속히 군대를 양성하여 빠른 시일내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려했다. 김좌진은 그의 주장을 적극 찬성하면서 로백린, 채기두 등과 더불어 인원이 보다많고 조직이 강대한 비밀단체를 묶어세울것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풍기광복단(1913년)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1915년)을 통합하여 1915년 8월 25일 대구달성공원(達成公園)에서 200여명이 집회를 갖고 항일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새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 강령은 아래와 같았다.   1. 무력준비: 일반부호의 의연과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차(此)로써 무장을 준비함. 2. 무관양성: 남, 북만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교양하여 사관으로 채용함. 3. 군인양성: 我大韓의 由來義兵, 해산군인 급(及) 남, 북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채용함. 4. 무기구입: 중국과 로국에서 의뢰구입함.  5. 기관설치: 대한, 만주, 북경, 상해 등 요처(要處)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에 尙德泰라는 상회의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 급(及) 려관 또는 鑛業所를 두어서 차(此)로써 본광복회 군사행동의 집회, 왕래 등 일체 련락기관으로 함. 6. 행형부(行刑部): 우리 광복회는 행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 고등관과 우리 韓人의 반역분자는 수시수처(隨時隨處) 총살을 행함. 7. 무력전: 무력이 완비되는대로 일본인섬녈전을 단행하여 최후목적완성을 期함.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조달이 시급한 문제로 나섯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는 일반부호의 의연(義捐)에 의존하는 한편 일본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기로했다. 대한광복회 회원들은 무기를 준비하여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중석광과 직산(稷山)금광을 습격하려다가 그만두고 1915년 11월 17일에 광주 광명리에서 마차로 운송하던 경주, 영일, 녕덕 등 3군의 세금 8,700원을 탈취하였다.   그전해인 1915년 7월에 서울에 있던 서대문이 총독의 명령에 의하여 헐리웠다. 그것을 보고 적개심이 불탔던 좌진은 고관(高官)암살을 시도했었는바 그것은 마침내 대한광복회의 행동으로 규정되였다. 그리하여 사령 박상진이 직접 나서서 먼저 신채호(申采浩)와 구체적으로 조선총독암살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또한 대한광복회의 황해도회원인 성락규(成樂圭), 조성환(曹成煥), 리관구(李觀求) 등에게 맡겨졌는바 그들은 안중근의 례를 모방하여 임무를 수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1916년 7월, 그들은 박상진이 제공한 권총을 갖고 1차로 안동현(安東縣)에서, 2차로 장춘에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하였으나 그만 중도에서 실패하고말았다.   대한광복회는 운동자금모집에 호응하지 않는 영남일대의 유명한 부호 서우순(徐佑淳)을 협박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좇아서 1916년 음력 8월초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에서 활동했던 리시영, 정순영, 홍주일, 정운역, 김재렬 등과 대구의 유지인 최병구, 최준명, 김진만, 김진우 등에게 명령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바치도록했다. 그런데 그 계획도 뜻대로되지 않았다. 대한광복회 회원들가운데도 손꼽히는 부호가 여럿이 있었다. 우선 박상진부터 10대만석을 자랑하는 대지주였다. 그는 자기를 따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로 사업하며 4촌처남되는 최준(崔浚)에게 독립자금으로 맡긴것만도 900두락이며 그 가격이 6~7만원에 달했다. 그는 일찍이 1910년에 자기 집안의 소유의 부동산을 일본 삼정특산회사(三井特産會社)에 10년 년부(年賦)로 저당잡히고 여기서 얻은 현금 10만원을 출자하여 도합 24만원의 자금으로 평양의 김기덕(金德基), 전주의 오혁태(吳赫泰) 등과 함께 대구에 상회를 설립하여 거기서 얻어지는 리윤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했다. 그 3명의 출자가의 이름을 딴것이 곧바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였던 것이다. 그러한즉 국권회복을 위해서라면 그는 실로 개인의 득실은 전혀 념두에 두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교통부장으로 활약했던 리시영(李始榮)은 대구에서 전당업을 하던 부호였고 정운역(鄭雲驛)역시 대구에서 전당업을 하고있던 부호였으며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유설부장(游設部長)으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봉천(심양) 삼달양행(三達洋行) 정미소를 운영하고있는 정순영(鄭舜泳)은 본래 경상도 성주의 부호였고 10대진사 최준은 10대만석을 자랑하는 경상도지역의 대지주였다. 이네들은 모두 자기의 재산을 털어내여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바치였다. 헌데 다른 부호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왜 그리도 혹심한 구두쇠노릇을 하고있는가?   대한광복회의 중진이였던 김좌진은 100만원의연금을 속히 모아 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했지만 계획이 부진상태에 있게되니 조급해지는 한편 나라운명이야 어떻게 되었던 자기 일신의 안녕과 가정만을 생각하면서 재산을 부덕부덕 끌어안고도는 부호들의 행실에 화가 몹시 동했다. 좌진은 경상도로, 평안도로, 함경도로, 전라도로 흩어져있는 동지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면서 그들을 통해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으려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적잖은 부호들이 국가의 존망같은건 근본 생각지도않고 오로지 자기의 목숨과 안일만을 바라고 외세에 아부하는 친일파로 전락되고말았음을 보아냈다. (그런자들을 다스리는 어떤 방법이 생겨야지.) 1916년 그해의 가을 어느날, 경주에 가서 박상진을 만나본 좌진은 자기 식솔을 동생한테 떠맡기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만 오면 몸을 두군하던 숙부 덕규(德圭)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놓던 좌진은 탑골공원뒤문 부근에 이르러 뜻밖의 일을 당했다. 난데없는 형사 7,8명이 그를 포위하면서 체포하려했던 것이다. 시간은 바야흐로 땅거미지고있는 때였다. 한쪽은 담장이 막고 있어서 형사들은 네놈이 이젠 어디로 뛰겠느냐며 그를 담장가로 몰았다. 한자는 쇠고랑을 꺼내여 들고 그의 손목을 채우려들었다. 바로 이때 좌진은 갑작스레 발길을 날려 그자의 턱주가리를 차 고꾸라뜨리고는 그바람으로 몸을 훌쩍 솟구쳐 아츠랗게 키넘는 담장을 제꺽 뛰여넘었다. 너무도 창졸간에 당하는 예상밖의 일이라 순경들은 어찌나 경황했던지 총 한방도 미처 갈기지 못했다. 세금마차가 강탈을 당한후부터 헌병들은 눈에 쌍불을 켜고있는 판이다. 어떻게 냄새를 알아낸 모양인데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며칠후였다. 작고한 부친과 한서당에서 공부했던 김기철(金基哲)이 연해주에 간지 여러해되는 정해식(鄭海植)어른을 데리고 문득 좌진의 앞에 나타났다. 정해식역시 부친의 친구였거니와 좌진이네와는 숙친한 사이인지라 이렇게 다시 만나고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정해식은 좀 오래있다가 돌아갈 예정이라면서 연해주로 망명간 의병장들의 근황에 대해서 두루 알려주었다. 그곳에 간 의병장들은 지금 여러가지의 조직을 세워 교육과 동포단합에 힘쓰는한편 적당한 시기에 조선에 다시금 출병할 준비도 하고있다고 한다. 좌진이 포수출신인 의병장 홍범도에 대해 물었더니 정씨의 말이 그는 지금 사냥을 하면서 동산재기(東山再起)의 꿈을 꾸고있는 모양이라는거다. 이름날리던 의병장 류린석은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간후 13도 의군도총재 (義軍都總裁)에 추대되여 두만강연안으로 쳐들어오려고 기도하다가 실패하고는 지난해에 세상뜨고말았다. 그이보다먼저 조선출병을 크게 꿈꾼 의병장은 류린석보다 18살적고 홍범도보다는 8살더많은 전주사람 리범윤(李範允)이였다. 그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내다가 일로전쟁에 일본이 이겨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로씨야로 망명하여 거기서 자결한 범진(範晉)의 아우로서 광무(光武)6년(1902년) 중국 청나라가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하자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부임되여 교도보호에 힘쓴 사람이다. 리범윤은 1907년 8월 23일 룡정에서 가 세워지자 연해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군자금 30만원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고 1,000여명의 의병을 무어 총대장이 된 후 함경도에 진출하려다가 실패한 원인을 볼것같으면 일본군병력의 증강과 방비에도 있지만 다른 한가지 주되는 원인은 의병이 굳게 단합못한데도 있었다. 그일을 상기하곤 이렇게 뇌이던 좌진이다. 그러면서도 좌진은 리범윤의 웅지만은 흠모하고있었다. 리범윤은 이때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參敎)로 반일문화계몽사업에 진력하고있었다. 김기철과 정해식도 역시 대종교도였다. 교주 라철(羅哲)의 교통을 이어받아 제2대교주가 된 사람은 김헌(金獻)이다.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서울에서 만주로 옮긴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이 교에 대해서 점점 감정이 깊어갔다. 대한광복회는 자기의 활동을 극비밀리에 전개했다. 우선 성원모두가 생사결전을 맹세하고 나섰으며 서로 굳게믿는 기초상에서 긴밀한 관계로 얽혀진 혈맹이였기에 그것은 굳세고 유력했다.   이 단체는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대오건설을 힘있게 추진하였는바 채기두, 김한종, 리병찬, 김선호, 최봉주, 조현균, 리해량, 김동호 등 수완가들에게 그 조직분포망의 지부장 직책을 맡기여 도사무(道事務)를 지배케하면서 처음의 경상도 한 개지역을 벗어나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각 도와 지어는 서간도, 북간도에까지 넓히였다. 국외로는 만주에 손일민과 봉천 정순영 등 요인이 주동기관을 운영하게 하고 만주사령관으로 김석대를 위임하였으며 박상진과 김좌진을 비롯한 몇몇 요인은 각지 기맥(氣脈)을 총관하였다. 본부는 서울에 두었다. 그런데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모집에서 제1차의 게획이 실패하고말았거니와 총사령인 박상진은 체포되여 1917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총포화약류단속령(銃砲火藥類團束令)과 동시행규칙 위반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이같은 조건하에서도 좌진은 중견동지들과 같이 제2차적으로 군자금모집을 계속 밀고나갔다. 그는 박상진과 이미 계획이있은바와 같이 각지 부호들의 명단을 조사장악함과 동시에 포고문을 내기로 맘먹었다.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산가들의 명단은 이미 박상진에 의하여 장악되였으나 다른 지방은 장악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방면의 일을 다그쳐했는데 충청남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김한종을 통해 가입한 장두환이 작성했고 강원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김동호가 작성했으며 전라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그곳의 사정을 잘아는 채기두가 작성했다. 대한광복회는 1917년 6월 9일에 요인몇이 모임을 갖고 이미 장악한 조선 각 도의 자산가에 대해 자산의 정도에 따라 본회가 지정한 금액을 기부하도록 요구하기로 하면서 대한광복회의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 발포함으로써 만약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예측키 어려운 위험이 있을것임을 예고키로했다.   포고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대한광복회는 이미 작성한 명단을 토대로 할당액과 포고문을 동봉, 동지들로 하여금 즉시 중국 또는 국내에서 이것을 우편으로 우송하게끔 했다. 채기두는 군자금모집을 위해 노력을 아까끼지 않았다. 목포부(木浦府) 남교동(南橋洞)의 현기남(玄基南)같은 사람들은 채기두로부터 의연금기부를 강요받았다. 황해도 지부장인 리관우 역시 군자금모집을 위해 진력했다. 허지만 이번역시 별다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지 김한종이 안동의 자산가 권집오에게서 130원, 림세규가 역시 안동의 류승호에게서 95원, 그리고 황해도광복회 회원들이 각지의 자산가를 협박하여 100원을 기부받은 외에 몇건 더 있을뿐이였다.  
310    장편전기 설한 (12) 댓글:  조회:3129  추천:1  2014-03-09
  12. 1913년 9월. 좌진은 마침내 형기를 끝마치고 출옥했다.           철대문밖에서 그의 출옥을 기다리고있는 가족과 동지들의 감회야 더 말해 무엇하랴. 동지들은 웬 일인지 고개만 처뜨릴뿐이였다.      길거리에는 일본계집과 사내들이 활개치며 다니었고 귀에 거슬리는 일본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전에는 드믈게 보이던 일본인 가계들이 군데군데 보이였다. 좌진은 개탄했다. 감옥에 들어가있은 그지간에 나라는 벌써 많이 변해가고있었던 것이다. 그의 집을 보아도 그러했다. 갈산(상촌)의 식솔들은 조석을 이어가기 어려울지경으로 가난했다. 오죽했으면 가회동에 있는 초가집까지 팔아버렸겠는가. 서울에는 이젠 마음놓고 들어가 앉을 방조차 하나 없었다. 그래서 좌진은 하는수없이 아우 동진이가 올라와 묵고있는 옛날의 호명학교학생 김재현의 리태원(梨泰院)에 있는 하숙집에서 며칠을 쉰 후 어머니뵈러 고향으로 갔다. 고향의 변화는 그의 가슴을 더 쓰라리게 만들었다. 호명학교로 쓰이던 옛집터에는 그사이 면소(面所)와 헌병분견소가 생기였다. 이것이 그래 갈산이고 내 고향 홍성땅이란말인가? 오로지 선불산과 월선지만은 옛모습을 잃지 않고 있어서 추억의 돛을 펴고 면면한 회포를 자아내게할 뿐. 저 옛날 홍주(洪州)시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정평이 있었던 홍성땅,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드센 풍운속에서 의병항쟁의 요람지였던 홍성땅이 이젠 어떤 모양이 되고있는가? 다행이 어머니께서는 건재하시였다. 이 아들때문에 그 얼마나 로심초사를 해오신 어머니였던가! 4살에 아버지를 여읜 좌진에게는 서당선생먼저 어머니가 바로 계몽스승이였다. 어머니는 이 아들에게 커서는 나라에 유용한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늘 당부했고 훈계도했더랬다. 그리하였길래 좌진이는 8살에 벌써 을 독파해서 홍성의 수재로까지 불리웠다. 유식했던 어머니는 가끔 아들을 불러앉혀놓고는 이름남긴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하는 말 끝에 하고 장담했던 좌진이다. 남달리 무사라면 흠모의 정을 갖고있은 좌진은 소시적에 벌써 고주몽으로부터 시작해 해명(解明), 밀우(密友), 유유(維由), 소문(蘇文), 계백(階伯), 비녕자(丕寧子)부자와 검군(劍君), 김유신(金庾信) 등 삼국시대의 많은 무사들에 대해서 알고있었을뿐만아니라 려조(麗朝)시대에 있었던 북계의 무사와 남계의 무사 양계의 무사들에 대해서도 그 업적과 함께 특출한 재능을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던 것이다. 좌진은 늘 이러면서 조선사람가운데 용감한 장군들이 많이 나와 조선사람은 남의 침략과 모욕만 받는 민족이 되지 말고 왜적을 압도하는 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했던 것이다. 그러던 좌진이가 2년반의 지긋지긋한 옥살이를 하고나왔다. 인생은 고적한 처지에 놓이면 역시 그에 따라 고적한 생각을 품게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좌진은 오늘이 있음을 알고있었기에 그 고적함을 이겨내고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라도 뛰여들 무서운 의지와 결단성을 지닌 사나이로되여 나온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단 하나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하여 준비된것이다.   그래도 인정만은 변하지 않아서 고향사람들은 좌진의 귀향을 무척 반가와했다. 그럼에도 그가 고향에 다시나타남을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에 갈산의 동장(洞長)질 해먹던 박정수(朴正洙) 따위의 인간이였다. 친일파로 전락된 그가 지금은 면장이 되었다. 좌진은 오자마자 석범이한테서 이자가 지금은 첩을 셋이나 두고있으면서 늘 왜놈의 헌병들과만 섭쓸려다닌다는 말을 듣고 쓰거워했다. 그런자가 지금 사회를 운전해가고있단말인가? 민족의 량심이란 꼬물만치도없이 남의 개가 된 그런자가. 그가 지금은 마을의 로인들앞에서 반말을 척척 쓰거니와 언젠가는 어머니 보고도 서슴없이 그러더라니 좌진은 분노할 일이였다. 더구나 그자가 언젠가는 왜놈 헌병과 같이 지나가다가 안해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씨근덕거리기까지 했다는 말을 들은후로는 참고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차 어느날, 온지 며칠안되여 좌진은 호출이 내려서 헌병분견소에 갔다. 다른일이 아니였다. 좌진이더러 살인미수죄로 결과가 있는 사람이니 이제부터는 어디를 가든 사전에 반드시 헌병대에 알려야한다는 당부였다. 거기 그따위 당부를 받고 막 나오던 좌진은 공교롭게도 박정수와 딱 마주쳤다. 흠칠놀란 박정수는 떨떠름하게 대구했다. 박정수는 아닌보살을 하곤 그만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운데 자기 집에 술마시러 가자고 맘에 없는 말을 했다. 좌진이는 가뜩이나 기회를 노리던차라 쾌히 나서면서 속으로 네놈이 노는 꼴을 어디 보자고 했다. 박정수는 자기 집 문앞에 이르자 바쁘게 안에다대고 야단떨었다. 남편의 호령 한마디에 녀인들은 찍소리없이 돌아쳤다. 그러더니 얼마지나지 않아서 아닌게아니라 노루포까찌 올려놓은 자그마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좌진이 볼라니 그 주안상을 들고들어온것은 박정수의 본댁이 아니였다. 잘익은 밤알같이 살이 토실토실 찌고 나이 30쯤돼보이는 꽤나 해사하게 생긴 다른 녀인이였다. 첩이 셋이나된다니 그중 어느 하나일것이다. 박정수는 무슨 속셈이였던지 술상을 갖다놓고 인츰 물러가려는 그녀를 잡아 앉히였다. 첩년은 남편의 권에 못이겨 엎드리여 좌진에게 큰절을 하곤 술을 부었다. 두사람은 련거퍼 녀인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됐다. 이때 뜯밖에 박정수가 무슨 용기 생겼던지 좌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자기는 때가 된것만큼 별수 없어서 면장질을 하게 됐노라면서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변명비슷한 입정을 놀리였다. 좌진은 기다렸던 참이라 반문을 들이대곤 되지 못하게 자기 손을 잡고있는 그의 손을 되잡아서 으스러지게 죄이였다. 박정수는 중얼거렸으나 깨여질듯 하는 아픔을 참지 못해 이마에서는 비지땀이 죽죽 흘러내렸고 아가리는 저절로 벌러졌다. 그래도 좌진은 좀처럼 놓아줄념을 하지 않고 노루포를 달라해서 그의 첩년이 노루포를 가지러 간짬에 기겁하는 그자를 족치였다. 좌진은 그의 손을 더 으스러지게 쥐면서 윽박질렀다. 박정수는 죽는소리치면서 그러마고 응낙했다. 좌진은 그제야 쥐였던 손을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이때에 그의 첩년은 노루포를 먹음직하게 구워 접시에 그득담아들고 들어왔다. 박정수는 첩더러 좌진에게 술을 부어드리라 해놓고는 하는수없이 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피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하여 좌진은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녀인을 술붇게하곤 마루건너 안방까지 들리도록 말했다. 박정수의 첩은 그제야 그 말뜻이 무엇임을 알고 온 낯이 홍당무우같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방바닥에 닿도록 숙이였다. 좌진이 물어보니 녀인은 대답은 고사하고 방바닥에 아주 엎드려서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울뿐이였다. 박정수는 혈안이 되어 부들부들 떨며 달려들어왔다. 그리곤 방바닥에 퍽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는 골을 보고 좌진은 바깥으로 훌 나와버렸다. 그후 박정수는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이일이 있은지 며칠안되여 채기두가 웬 초면의 젊은이 하나를 데리고 문득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서로만나는지라 반갑고 기쁘기가 이를데없었다. 채기두는 이러면서 자기는 사실 할 일이 너무도많아 해내지 못하다보니 제때에 와보지 못했노라 사과하고는 데리고 온 젊은이를 좌진에게 인사시켰다.     좌진은 이젠 동지간에 류행되는 식으로 악수하면서 면전에 나타난 이 언어례절이 신식으로 갖춰진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를 뜯어보았다. 어느모로보나 시골티라곤 나는데가 없었다. 그래 물었더니 김상옥(金相玉)이가 자기는 집이 서울에 잇다는것이였다. 김상옥은 갑자기 쾌활해지면서 굽석 인사했고 미처 대답못한 좌진은 껄껄 웃었다. 이렇게 되어 좌진은 서울청년 김상옥을 혁명동지로 사귀게됐고 훗날 과연 친형제같이 가깝게 지냈다. 이날 좌진이가 고향에 돌아오자 세도가 바뀔때마다 놀아대면서 권세에 아첨하는 외에는 의리고 인륜도 렴치도 없는 밗강수를 혼내운 일을 말햇더니 채기두와 김상옥은 듣고서 참 시원한노릇했다면서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웃었다. 그런데 좌진은 이때가 바로 할 일없어 제일 암담한 때였다. 1911년 1월부터 시작해 일본경찰이 본격적으로 데라우찌총독암살에 련루되는 자들을 잡아낸다면서 벌리였던 일대 수사소동은 좌진이 한창 옥고를 치루고있던 1912년 6월 윤치호이하 신민회 회원 105명이 암살사건혐의로 정식 기소됨으로 하여 일단 가라앉아버렸다. 그 사건으로 하여 좌진은 청년학우회의 많은 동지들을 잃고말았다. 회원들이 많이 투옥되고 망명하는 바람에 그 조직은 자연 해산되였다. 이럴 때 대한협회가 나서서 맥을 써야겠건만 그러지 못하고 뒷걸음을 치는 판이였다. 전에 있었던 좌진의 친구 몇몇도 자기 조직을 잃은 후로는 유야뮤야하는 상태에서 하루하루 허송하고있었다. 좌진은 그네들과 다름없이 백수건달이나닯지 않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고는 한탄하면서 채기두보고 그래 그지간 어떻게 지내는판이냐고 물어보았다. 채기두는 이러면서 좌진의 마음을 격동케하는 하나의 새소식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즉 채기두가 주장이 되어 풍기(豊基)에서 유창순(庾昌淳), 류장렬(柳璋烈), 정만교(鄭萬敎), 김상옥(金相玉) 등이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 비밀단체의 주장은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것이였다. 채기두는 이러면서 좌진이가 대호지(大湖池)에서부터 자기를 깨우쳐주고 이끌어준걸 따져보면 천량값도 더 난다고했다. 그러고나서 덧붙이여 자기가 단체조직은 해놨지만 손에 무기가 없어 어려운사정이라했다. 오로지 복수일념에 불타고있었던 좌진은 조국의 주권을 당장 회복할 수 없는 정황하에서는 총독부건 총독이건 도청이건 도지사건 우선 눈에 보이는대로 들부시고 죽여버리고싶었다. 그러자면 돈을 벌어 무기를 사와야했다. 이듬해, 즉 1914년 봄이 되자 좌진은 돈벌러 공주(公州)로 중석광(重石鑛)하려 간다면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홍주에 이르러서 그만 헌병대놈의 손에 잡히였다. 의심하고 뒤따른것이 분명했다. 일이 안되자면 마디에 옹이라더니 이건 너무나 공교로왔다. 좌진은 리유도없이 험악한 류치장에 갇혀 10개월이나 고생하다나왔다.         
309    장편전기 설한 (11) 댓글:  조회:2947  추천:1  2014-03-08
  11.   1911년 1월말. 시국이 좀 온정되자 집이 경주(慶州)에 있는 박상진이 다시 서울에 나타났다. 좌진이보다 나니 5섯살더많은 박상진은 대대로 문한(文翰)이 있고 덕망높은 량반가문의 출신이며 경상도치고는 손꼽는 대지주집의 자제이다.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그가 이번에도 생부모위안하러 온다고 길을 떠났지만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라 생사를 함께나누고있는 동지들 처지가 근심되여 알아보기위한 걸음이였다. 좌진은 방문열고 들어서자마자 동지들의 안부부터 물어보는 그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박상진은 이젠 거기로는 청명절에나 가볼 작정이라면서 그보다 동지들의 형편이 어떤지 몰라 상경하자 곧바로 여기부터 달려왔노라했다. 고마운 일이였다. 좌진이 념두에 두고 말하는 박상진의 스승이란 바로 령남유생으로서 1908년 10월 22일에 서울에서 사형당한 의병장 허위(許爲)를 놓고 말하는것이였다. 허위는 일제가 1895년 10월 민비를 시해하고 뒤이어 갑오갱장(甲午更張)내각이 2월 을 공포하자 량세안 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일본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사람이다. 허위는 그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립장에 서있었다. 그런데 1899년 고종의 명(命)으로 원구단참봉(圓丘壇參奉)에 임명되여 서울에 온 이후에는 태도가 변하였다. 즉 장지연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게되여 마침내 애국계몽사상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그는 1907년 9월, 과 군대해산 등을 게기로 경기도 여천 등지에서 다시 무력을 동원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박상진은 16살때까지 경주 록동(鹿洞)에서 한학을 수업하고는 상경하여 문한이있던 유학출신인 허위의 문하(門下)에 다년간 공부하면서 그한테 영향받아 자신의 항일민족의식을 굳건히 키웠다. 허위가 처형되자 일제가 회장(會葬)하는것을 엄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屍身)을 산골짜기에 가져다 모시고 4일간이나 제를 지내였던 박상진이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다시한번 애석해하면서 한때는 그같이 열화세찼던 반일의병투쟁이 거진다 꺼지고있음에 대하여 가슴아파했다. 일본침략자들은 파렴치하게도 의병들에게 , , , 라는 부당한 딱지를 붙여 그들을 학살하였는바 그자들이 기록해놓은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에 11,562명. 1909년에 2,374명. 1910년에 125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일문,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판 통계자료)   좌진은 자기역시 같은 심정이라 하고는 의병투쟁이 비록 실패로 끝나가고있지만 여기서 교훈이야 남지 않느냐 하면서 전날 채기두와 함께 의병들을 규합시켜보려고 사타구니에 바람이 일지경으로 동분서주했건만 헛수고만했던 일을 상기하면서 한탄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했다. 전국각지에서 그많은 의병장이 나타났지만 그네들은 다가 지방범위의 의병장으로 될수는 있었지만 전국의 의병을 통일적으로 지휘할만한 의병장으로는 하나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반일의병대들은 모드가 다 협애한 지방주의에 기초하여 투쟁을 벌리였다. 즉 자기 고향과 마을을 지키기위한 투쟁으로 국한시킨것이다. 홍범도의 경우만봐도 그러했다. 삼수, 갑산, 풍산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던 그는 일제로하여금 는 구호를 들고 싸웠길래 가까운 고원지방에서 활동하는 윤동섭의 의병대와는 외면하고 련계도짓지 않았다. 한즉 서로 도우면서 싸우지 않은건 사실이다. 이는 협애한 지방주의관념에서 투쟁했음을 말한다.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조직되여 활동하였으나 거의다 그러했다. 류린석은 평산반일의병대를 조직할 때 자기 제자들만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을 조직했다. 이는 지방주의와 함께 문벌주의도있었다는것을 말하지 않는가. 다른 한사람, 강제해산당한 군인들의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여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지방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한 민긍호는 군인출신의 세력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반일의병대를 조직했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는 수많은 반일의병대들이 조직되여 활동하고있었다. 그런 조건하에서 민긍호는 다른 의병대들과 련합하여 싸웠더면 훨씬 더 좋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고 군인출신세력중심으로만 투쟁을 벌리였다. 자기 세력집단으로만 투쟁하려는 이런 파벌주의적경향이 결국은 모든 의병대들에 있었고 또 그로인하여 자체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지난 한때 전인흥, 김중환, 홍유철, 리순하 등을 비롯한 친일매국노들이 로 되어 각 도에 내려가 반일의병대를 와해시킨 일을 박상진이 말하자 좌진은 의병들, 특히는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충군충의사상이 전반의병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것을 상기하면서 의병장들의 우유부단한 행위에 대해 비난했다. 박상진은 이러면서 연해주의 1,000명결사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 의병을 200명 단위의 부대로 나누어 북한지방으로 국내진군작전을 벌려 총병력 1만명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리라던 리범윤의 계획은 어떻게 된판이냐고 했다. 좌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상진은 자기도 동감이라는데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많은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고 두만강을 건너갔다. 이들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위한 힘을 기르자는 의병장도 있었지만 외세의존사상을 품고 강을 건너간 사람이 대부분이였다. 한편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본국에 남아서 피어린 항전을 견지하는 의병들도 있었다. 바로 서북부에서 채응언이 지휘하는 곡산ㅡ성천반일의병대와 김정환이 지휘하는 평산반일의병대가 그러했다. 그네들은 극심한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넓은 지대에서 이동하면서 일제강점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있었다. 그들은 소분대를 만들어 유격전을 벌리고있는데 그 전술이 좋거니와 아주 신출귀몰해서 이미 조선땅에 밀려든 16만명의 일본침략군이 마음을 놓을수 없게 하고있었다. 두 젊은이는 아무튼 이국에 간 이들이나 지금도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이들이나 무사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그러면서 의병으로는 되지 않은 이들은 자기들이 비밀리에 싸워나갈 길을 계속 더듬었다. 의 사건은 이젠 계몽운동으로가 아니라 다른식의 출로를 찾게끔 깨우쳐주고있는 것이다. 이러구러 박상진이 만나볼 동지들을 다 만나보고 경주로 돌아간지 한주일이 채 안되여 이국에 가있는 로백린으로부터 밀사를 보내여 거기서는 벌써 무관학교를 세울 준비가 있다면서 이제 거기에 사용할 경비와 무기구입에 쓸 돈 10만원은 있어야할테니 어떻게 해서라도 인츰 만들어 보내달라고 했다. 좌진은 기쁘기는한데 돈을 보내라는 지령은 예상보다 빠른것이여서 바빠났다. 이때가 오리라는것을 예상해서 그동안 돈이 생기는 족족 모아두었지만 그것은 다해봤자 3만원푼했다. (돈은 심지어 먹는 쌀까지 절약해가면서 모이다싶이하는건데 갑자기 어떻게한다? 게다가 물감가게도 경기가 그닥잖아 유야무야한판인데....) 좌진은 생각을 굴리다못해 우선 고향에 가보기로했다. 갈산 그의 집에는 아직 백여두락의 전답이 있는것이다. 그것들을 다 팔아봤자 만원돈이 못되지만 하는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간도에서 온 밀사를 가회동 자기 집에 눌러앉혀놓고 즉시 갈산으로 향했다. 어머니 리씨는 처음 아들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랬다. 좌진은 이러고는 어머니를 설복해 전답을 거의다 팔아버리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좀 여유있다고 생각되는 친구들의 현금이란 현금은 모조리 털어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합해봤자 5만원밖에 안되였다. 5만원은 어디서 구한단말인가? 밀사는 초조해하는 낯빛이였다. 좌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뾰쪽한 수가 나서지 않아 먼저 5만원이라도 쥐여보낼가 궁리했다. 그랬다가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 말았다.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10만원이 수요되니 10만원을 보내라하는 것이니 이제 어떻게 해서든 내가 그 돈마저 만들어 보내야 한다.) 무관학교창립을 위하여, 무기구입을 위하여, 그것은 바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바칠 돈이라 생각하니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든 꼭 해결해보내야겠다고 다시금 도슬려 마음먹었다. 윗목 앉음뱅이책상에 기대여 앉아서 끙끙 거리던 좌진이 무릎을 툭 치곤 자리를 차며 일어나더니 서둘러 나들이차림새를 하고 집을 나갔다. 때는 2월 5일, 류달리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간 사람이 웬 일인지 그날 밤에도 이틑날에도 돌아오지 않더니 7일날 에 이라는 대서특필의 표제하에 대략 다음과 같은 보도 한편이 실리였다.   신문의 이러한 보도를 보고 들은 그의 친지와 가족들의 놀람과 당황과 의혹은 너무나도커서 이루 형언키어려웠다. 사리사욕이란 추호도없이 의롭고 인자하기가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인 그런 사람이 신문에 씌여진 모양으로 그래 가산이 탕진된 궁여지책으로 그런짓을 하러 나섯느냐하는 것이 그를 좀이라도 알고있는 일반 사람들의 의혹이였다. 한편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나서 다가 욕질했다. 말할수 없이 놀란것은 좌진의 처 오씨와 북간도에서 온 밀사였다. 오씨는 이틑날 남편의 행방을 알수 없어 20년맞잡이로 지루하게 보내면서 내내 초조와 불안에 잠겨있다보니 속은 타서 재가루가 되었고 밀사역시 입술까지 초들초들 말라들면서 불안에 잠겨있었다. 그들이 그러고있는 중에 박성태가 한장을 얻어갖고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오씨녀인은 치미는 울음을 억제못했다. 밀사역시 주인이 당한 불행에 의분이 끓어오르면서 가슴이 죄여들었다. 로백린이 보내달라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좌진이가 아니였던가, 보내야 할 10만원중 5만원이나 모자라니 그것을 어떻게 하면 구할것인가고 골머리를 앓던 좌진이, 그것을 기어히 마저구해서 보내리라던 그는 생각다못해 그런짓에 나선것이라는것을 오씨녀인은 물론 밀사나 성태도 잘 알고있었다. 오씨녀인은 3년전 갈산을 떠나올 때 남편의 눈에서 불덩이 이글거리던일을 상기하면서 신문을 쥐여 거기에 씌여진 라는 구절과 를 받고있다는 글구를 다시 읽어보았다. 남편 좌진은 홍성에서는 커다란 황소도 어렵잖게 메쳐놓군하던 힘장사였다. 그리고도 그는 무술 역시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이 경찰과 일장의 격투를 했다면 그 장면이야 어떠했겠는가? 인정이란 꼬물만치도없는 살인백정들의 손에 엄중한 취조를 당한다면 또 무슨 모양이 되겠는가... 오씨녀인은 가슴이 터지는 듯 했다. 그렇다해서 그러고만있을 때가 아니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정신차리였다. 3년전 남편이 자기보고 무슨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라 부탁하던 일이 상기된 것이다. (나는 이럴때 참고견딜뿐만아니라 남편이 하기 어려운 일을 내 기능껏 도와서 해야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녀는 남편이 있어도 이때는 이렇게 하리라면서 감추어둔 돈 5만원을 보자기에 싸서 밀사앞에 내놓았다. 녀인의 이런 처사에 밀사가 감격한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그는 자기도 김좌진이 당한 불행에 가슴아프다는 것, 이 일을 그대로 이국에 있는 로백린에게 전하겠다는 약속을 남겨놓고 표연히 사라졌다. (돈을 채우기에 오죽골몰했으면 그 구두쇠를 다 찾아갔던것인가? 그리고 그 구두쇠는 인정도 의리도 없이 남편을 왜놈에게 밀고하였단말이지!) 오씨는 이런 생각이 드니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길 없었다. 그래서 이틑날아침 일찍이 그녀는 신문에 난 주소를 물어가며 돈의동에 있는 김종근의 집을 찾아갔다. 남편에게 강도의 루명을 씌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고 될수만있으면 경찰에 나가서 사과하라고 권하고도싶어서. 그런데 김종근네는 그녀를 대문안에다 들여놓지도않았다. 그래서 오씨녀인은 되돌아오고말았다. 좌진은 본래 조카벌되는 그자가 린색한줄을 알면서도 찾아가 좋게 말하여 돈 5만원을 꾸자고 했다. 그런데 김종근은 그보고 미치지 않았느냐, 무슨까닭으로 나한테 그 큰돈을 청구하느냐, 돈 5만원이 누구네 집 아이 이름같은줄 아는가, 생전 낮바닥 한번 뵈이지 않다가 홍두깨처럼 나타나 조르다니 원 재수가 없을라니 별꼴을 다본다면서 손을 들어 얼굴에다 삿대질하며 큰소리했던것이다. 좌진은 그래도 끓어오르는 분을 억제하면서 내 그예 갚겟다는데 자네같은 사람이 그만한 돈 못 마련하겠느냐며 사정했다. 그러다가 김종근이 네가 누구를 협박하려드느냐, 낯짝도 좋다고하는 소리에 그만 터져나오는 분노를 더는 참을길 없어 그렇다 너를 협박한다, 구데기같은 놈아, 나는 강도질하러 왔다고 소리치면서 우악스런 두손으로 기겁한 김종근의 머리통을 방바닥에다 대고 눌렀던 것이다. 돈을 내놓으라고, 안내놓으면 오늘밤 너를 아예 죽여버릴테다고 하면서.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좌진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포승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가소롭게 보이여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가 소리와 함께 기운을 써 포승을 썩은 새끼같이 끊어버렸다. 경찰들은 하는수 없이 그를 묶는걸 단념하고 그대로 데리고갔다. 신문에 묘사된 란 바로 이것이였다. 좌진은 강도미수죄로 기소되여 2년반의 유기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였다. 오씨는 4월초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와 짐을 꿍쳐갖고 갈산으로 돌아갔다.            
308    장편전기 설한 (10) 댓글:  조회:2753  추천:2  2014-03-07
  10。 조선의 백성들은 지쳐버렸다.일본침략자의 피비린 탄압과 무서운 질병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그들은 오로지 편견모르는 자연의 너그러운 자비나 받아보려고 했다. 하건만 이해의 마지막달 12월의 날씨는 너무나 음산하고도 차거웠다. 이런 때에 와 대립면에 서서 줄곧 반대곡조만 불러오던 의 기염은 극도로 창궐했다. 1904년에 이 벌어지자 친일파 송병준(宋秉俊)이 윤시병을 추겨서 라는것을 조직하게 하여 일본군에 협력하고 그 당시 동학(東學)간부였던 리용구(李容九)를 꾀여 이와 합류케하였은즉 그 조직이 바로 였다. 1909년 그해의 일진회 회장은 리용구였다. 일찍이 때로부터 일본을 도와나서면서 에 맞서서 까지 만들어낸바가있는 이 친일주구가 인제는 정부에 향하여 로골적으로 한일합방을 건의해나섯다. 그래서 여지껏 어두운밤 작경을 놀아대던 도깨비가 번개불에 흉측스러운 제 몰골을 드러내듯이 그지는 더러운 매국노의 흉악상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야말았다. 이 일을 알게된 와 를 비롯한 애국단체들은 한결같이 를 성토해나섰다. 분노한 좌진은 일진회분자들과 더 날카롭게 맛서싸웠다. 바로 이럴때에 의 괴수로서 만민의 지탄을 받고있던 리완용이 병동성당에 가 벨기황제 데오폴드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다가 습격받아 하마터면 개목숨을 잃을번했다. 이것이 뉴스거리되여 온 서울시내판을 한번다시 웅성거리게 만들어놓았다. 선교사를 따라 미국류학을 하고나서 울라디보스또크에 가 있다가 귀국한지 며칠 안되는 20살의 리재명이란 청년이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칼로 찔렀는데 아쉽게도 죽이지 못했다. 두해전에는 대종교의 홍암대종사(弘岩大宗師) 라철 등이 을 암살하려다가 역시 실패하지 않았던가. 오씨는 아주 맹랑해하였다. 그러는 안해를 보면서 좌진은 의연히 침묵을 지키면서 맘속으로 거사를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된 열혈청년을 몹시 아까와했다. 1910년이 돌아왔다. 이해는 조선이 생겨서 가장 큰 불운이 덮치는 한해였다. 1월에 김윤식(金允植)과 송병준이 일진회회장 리용구를 처형할것을 건의해나섰다. 이 일은 진상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동사자를 잡아먹다니? 당년 75살나는 학자 김윤식로인의 립장으로 놓고보면 온건개화파에 속하는 그가 대한협회 회장을 지내고있는 김가진(金嘉鎭)과 가깝게지내는 사이니 반일감정이 생겨 그러겠지만 송병준이야 리용구와 어울려붙은지 오랜 동당으로 알려져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리해관계에서일가? 하는것이였다.   안중근의사가 3월 26일에 려순감옥에서 순국했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좌진은 동지들과 함께 구천에 간 의사의 안식을 빌어 기도했다. 이달에 조선의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다시금 발랄해졌다. 형세가 이러했건만 그 정황을 좌진이나 동지들은 제때에 알기어려웠다. 원인은 일본이 조선국내외에서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발간하는 신문을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대량적으로 압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론사의 채기두의 활동량이 이전만 썩 많게되였다. 그는 좌진의 지시를 받고 의병들의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일판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런때에 교주 라철을 비롯하여 박찬익(朴贊翊), 윤세복(尹世復), 백순(白純), 리;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도들이 북간도와 서간도, 연해주와 상해 등지에서 선교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종교적방식으로 항일투쟁을 추진하고있었는데 이는 특히 괄목할만한 일이였다. 그리고 우국우민의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여든 로씨야 연해주의 신한촌(新韓村)에서는 의병들이 단결하여 항전을 견지할 목적으로 5월에 들어와 이 편성되여 단일군단이 이루졌다. 13도군은 류린석을 도총재(都總裁)로 받들고 리범윤을 장의총재(獐義總裁)로, 함경북도의병장이였던 리남기를 장의총재(壯義總裁)로 하고 황해도의병장이였던 리진용을 동의원(同義員)으로 하여 씨비리에 있는 의병들을 통솔케하였다. 조국본토를 떠나간이들이 동산재기를 노리고 해외에서 이같이 행동하고있음은 좌진이처럼 국내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는 혁명자들에게 용기와 시심을 한결 북돋우어주고있었다. 좌진은 국내외의 항일이 호흡이 맞고 보조가 맞기를 바랐다.   5월하순에 경상북도에 갔던 채기두는 거기서 의병대가 희생이 참중한 정황하에서도 굴함없이 항쟁을 계속하고있다면서 의병대가 영양군 복초면과 방곡면의 면장들에게 보낸 와 각동리에 보낸 의 내용을 베껴가지고왔다. 에서는 국왕을 퇴위시킨 일본이 중요한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마을을 들이치며 민재를 략탈하고 인민의 껍질을 벗기고있다면서 의병들이 해를 거듭하여 싸우는데도 인명만잃고 아지 공을 이루지 못하고있음은 다만 인심이 돌아서지 않은데잇기때문이라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민은 다같이 본심을 지켜야한다, 2천만동포가 어찌 가만히 보고만있겠는가,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뭉치여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왜놈의 본거지를 들이치고 종묘사직을 보존한 뒤에 다같이 살자고했다. 이 의 마지막에는 애국적인민들에게 의병들의 전투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다. 좌진은 우선 을 읽고 그 격정에 감동되면서 풍찬로숙하며 간고하게 싸움을 견지하는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와못주는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동지들과 같이 의연금을 모으고 총을 구하고 약을 구하여 보내려했지만 이전만 퍽 어려웠다. 적들의 감시와 통제가 우심했던것이다. 일본은 5월 30일에 소네를 내려놓고 그대신에 일본 조슈군벌출신인 륙군대신 데라우찌를 조선통감으로 임명했다. 그자들은 안중근이 이또를 처단한것을 의 구실로 리용하려고 하면서 데라우찌에게 조선강점의 임무를 맡기였다.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올라앉기 두주일전인 5월중순부터 일본군은 조선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경찰을 보충한다는 구실로 들어온 헌병만도 1,000여명이였다. 조선땅에 왜의 군화소리 높아갔다. 6월 16일에는 조선경찰권이 완전히 일본사람손에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조선일판은 일본군대와 일본경찰의 활무대로 변해버리였다.   서울은 갑자기 경게가 심해졌다. 데라우찌는 일본장교들에게 두가지 밀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8월 15일까지 극비밀리에 경비배치를 끝내도록했다. 적잖은 서울시민들은 오밤중이건만 일본군은 야음을 타서 도적놈같이 살금살금 시내로 기여들었다. 흑운이 꽉 내리덮인듯 숨가쁜가운데서 서울시민들은 그저 답답해나는 가슴을 안타깝게 쥐여뜯기만했다. 각 성문, 왕궁, 통감부, 조선주차사령부와 정부, 대신들의 집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한 경찰과 수비대들이 지키고있었다. 좌진이도 동지들도 마음대로 자유롭게 나다닐수가 없었다. 서울시내는 8월 15일부터 계엄상태에 처했던 것이다. 일본침략군에 완전히 포위된 서울시내의 거리에는 30메터의 간격으로 일본헌병대와 수비대가 줄지어 늘어서있었다. 그자들은 길가는 사람들이 잠깐동안 이야기만 해도 붙잡아 엄중히 심문했다. 8월 16일 오전 9시. 데라우찌는 리완용을 자기집에 불러다놓고 과 함께 국왕, 대신들과 관리들에 대한 차후처리문제를 알려주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한 후 국왕에 대한 대우와 보상문제, 친일대신들에 대한 명예와 생활보상문제, 구한국관리처리에 관한 문제 등이였다. 하루지나 그 다음날인 8월 18일 리완용은 내각회의를 열고 합병에 대한 문제를 상정시켜 토의하였다. 데라우찌는 일이 마음과같이 되어감을 보자 리완용과 이미 계획이 잇은대로 8월 22일 오후 5시에 창덕궁에서 조선완전강점을 위한 을 극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을 체결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가한 자들로는 총리 리완용,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황족대표 중추위원 김윤식, 시종무관 리병무 등이였다. 학부대신 리용익은 을 반대했으므로 알리지도않았다. 그자들은 그가 22일 오전을 자기 집에서 보내도록하기 위하여 인본통역관 가와가미를 그의 집에 보내여 잡담을 늘여놓게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의 체결내용을 신문기자들이 모르게하기 위하여 경무총감 아까이시의 집에 술좌석을 차려놓고 기자들로 하여금 여기에 모여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게하였던 것이다. (일문 하) 일본침략자가 강요한 망국조약의 서문은 아래와같이 되었다.     일본침략자들은 8월 22일에 을 강제체결해놓고는 이를 극비밀리에 붙였다가 한주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비로소 공포하였다. 근조(近朝)가 519년, 27대만에 나라는 이렇게 망하고말았다. 이날은 하늘이 류달리 맑게 개인 좋은 날시였다. 하건만 가 발표된 뒤의 서울장안은 하나의 커다란 상가집모양이 되고말았다. 시민들은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서 울었다. 길거리에는 무장사, 배추장사 하나도 나다니지 않고 헌병대의 말발굽소리만 요란할 뿐이였다. 그 시끄러운 말발굽소리에도 집집에서 울려나오는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밀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통곡소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그 통곡소리는 온 삼천리강산을 덮고말았다.   일제는 조선을 완전강점해놓고는 곧 헌병경찰제도를 통해 철저한 무단통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하얀도포자락과 맑은 마음만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왔던 이 나라의 선비들은 쇠약하여 쓰러져가는 나라를 어쩌지 못했다. 어떤사람은 나라가 망해버리자 왜놈의 노에가되여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것이 나으리라면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버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방법이 아니였다. 그래도 배짱있는 사람들은 살아야한다. 살아서 잃어버린 내 나라를 되찾아와야한다면서 가족과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선 이국땅 멀리로 떠나기도했다.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가운데 로백린도 들어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완전히 먹히운지 여칠안되는 어느날 가회동막바지에 있는 좌진의 집 건너방에는 집주인 좌진이가 차려놓은 자그마한 술상을 한가운데놓고 도지 여럿이 둘러앉았으니 거기에 모인이들로는 로백린을 위시해서 윤치성(尹致誠), 권태진(權泰鎭), 신현대(申鉉大), 신두현(申斗鉉), 림병한(林炳漢), 박상진(朴尙鎭), 김한종(金漢鐘), 최한영(崔漢榮) 등외에도 봄에 갈산에서 서울로 영올라온 호명학교의 교원 박성태역시 한자리 끼여있었다. 이같이 모이게되였음은 래일 곧 중국으로 떠나게되여있는 로백린의 출발을 앞두고 금후에 취하게 될 행동방략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지중에 서상경(徐相京) 하나가 동석못해 유감이였다. 그는 합방이틑날밤 배를 가르고 자결했던 것이다. 로백린을 위한 간소한 송별연은 조용하고도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조심스레 열리였다. 모인 사람들은 이 세상을 너무 조급히 하직한 동지를 생각하고 한숨지었고 앞날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선배의 앞길을 축원했다. 좌진은 자기는 백번죽더라도 광복의 그날을 위해 싸우리라했다. 이에 로백린은 그와같은 동지를 두고가니 마음 놓인다면서 남아있는 동지들이 일심으로 뭉치여 잘 싸워주기를 희망했다. 이쪽에서는 모두들 로백린이 망명한 후 그곳에다 정부를 세워줄것과 무기들을 있는힘껏 구해서 보내줄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술잔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헤여졌다. 잊을수없는 뜻깊은 밤이였다. 이틑날 로백린은 동지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의주행렬차에 몸을 실어 몰락한 고국을 떠나갔다. 그가 간후 좌진은 매일 관철동에 있는 물감가게에서 해를 보내였다. 박성태가 그를 돕고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느덧 더 활발스럽게 동지들의 비밀련락소로 되고있었다. 박성태는 로백린이 월경했다는 편지를 하고는 왜 오래도록 소식없을가고 근심했다. 이에 좌진이 한마디했다. 11월에 이르러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사람 저작의 교과서를 전부몰수했다. 대신 일본글을 배우라는거다. 이 일은 조선사람의 거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허지만 일본의 총칼아래에서 어쩌는 재간이 없었다. 12월경에 안중근의 사촌아우 안명근이가 만주에다 사관학교세울 돈을 마련하러 뛰여다니더니 그 일은 집어치웠는지 데라우찌총독을 암살하려다가 그만 실패했다. 이일로해서 일본경찰은 를 체포한다면서 총출동했다. 그리하여 600여명의 민족운동자를 체포, 투옥하는 소위 의 이 벌어진 것이다.              
307    장편전기 설한 (9)) 댓글:  조회:2936  추천:2  2014-03-06
  9.   참화를 입은 조선! 왜놈은 네땅으로 물러가고 내나라는 내놓으라는 절규와 혈안이 되어 날뛰는 귀신들의 수파람소리에 아름답던 삼천리강산은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는데 국왕 순종은 마치도 쇠사슬에 매인 개처럼 일본사람의 손에 끌려나왔다. 1909년도를 잡자 그는 1월 7일 서울을 떠나 대구, 부산, 마산 등 남부조선일대를 돌아다니였고 그후에도 계속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평양, 신의주, 개성등지를 돌아다니였다. 반일의병투쟁을 그만두라 권고하느라고. 일본은 반일의병들의 머릿속에는 본건적인 충의충군사상이 박혀있다는것을 알고 그같이 묘한 회유책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해의 7월에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이라는 새로운 결정을 채택한바있었다. 주되는 내용은 첫째로 조선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에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는것이였으며, 둘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왕태자 리척(李拓)을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자는것이였다. 그것은 그가 제애비고종보다 더 주대없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정신적불구자와 같아 앞잡이로 쉽게 리용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시급히 실현코저 1907년 7월 12일 통감 이또에게 을 곧 집행할것을 명령했다. 이또는 바로 그 명령에 좇아 7월 20일 고종을 왕의자리에서 정식 내쫓고 그의 아들인 리척을 왕의 자리에 앉히였다. (7월 18일에 고종퇴위를 결정하고 정식양위는 20일에 진행하였음) 이리하여 500년돈안 내려오던 리조왕조는 사실상 그 존재를 끝마치게 되엿고 고종의 퇴위를 계기로 리조봉건왕까지 완전히 저희들의 조선침략에 리용케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뒤이어 7월 24일 괴뢰정부에 조약을 강요하자 리완용을 비롯한 매국친일주구들은 이라고 하면서 동의했고 왕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였다. 그 조약이 1907년(정미)에 맺어지고 7개의 조항으로 되었기에 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은 그 조약에 의하여 통감으로하여금 조선의 립법권, 내정권, 관리임명 및 파면권, 일본인관리임명권, 외국인고용의 금지권 등 여러가지 권리를 틀어쥐게되였다. 그리고 일본관리들을 리조정부와 지방관청(도감영) 각 부의 차관으로 들어앉히는 도 조작감행하게되였던 것이다. (저 인제는 낯가죽가려운줄도 모르고 왜놈의 개가 돼서 괴뢰구실을 착실하게 하는 정부를 어떻게 내부로부터 고쳐놓지는 못할가.) 그 일이 막연하긴했지만 어찌보면 될듯싶기도 해서 좌진은 로백린과 짜고서 내각소장파(內閣小壯派)들을 선동해보았다. 그러나 일본인차관들이 이미 구석구석 들어가 박히여 실권을 잡았거니와 감시가 어찌나 심한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한 좌진은 이번에는 학생이 수백명되는 오성학교의 교감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전해에 안창호와 같이 조직했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책임까지 겸해 맡았다. 그것은 무실(務實), 력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 등 네가지를 정신으로 삼고 청년들의 인격수양과 단체생활의 련마,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으로써 직업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청년운동단체였다.     이무렵 반일의병대에서는 보부상들을 서울시내에 자주 들여보내여 적정을 정탐하게하는 한편 애국운동단체들과 련계지으면서 무기를 구입했다. 좌진은 자신의 직무상 편리를 리용하여 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서 비밀리에 내보내군했다. 는 1909년 3월 25일 지면에 의병장 김수민이 서울에 들어가 비밀리에 많은 무기와 기타 물품들을 구해가지고 장단지방으로 갔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일제의 조선병탄계획은 최후단계로 들어갔다. 리완용괴뢰정권의 존속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을 명색상 으로 부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려면 이 괴뢰정권마저 완전히 없애버려야 했다. 그래서 바로 이해의 3월달에 일본은 저희들의 외무성 정무국장인 소찌 네쯔기찌로하여금 을 만들게했고 4월 10일에는 가쯔라, 고무라, 이또 세 우두머리가 도꾜에 모여 를 열고 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기에 이르었다. 그러다가 두달지나 반일의병투쟁이 이젠 기본상 탄압되였다고 여겨지자 7월 6일 일본내각은 을 채택, 그것을 일본정부의 으로 확정하였다. 일본은 이 결정에서 라고 하였다. ((일본) 제42권) 바로 이달에 또한 조선의 사법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말았다, 좌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그의 눈에 조선은 마치도 잔명마저도 끊으려드는 맹수의 피묻은 발톱아래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떨고있는 한 마리의 가련한 토끼와도 같았다. 경주에서 왔던 박상진(朴相鎭)은 이날 좌진이와 함께 오래도록 울쩍한 기분속에서 나라운명을 걱정하다가 쓰라린 가슴을 안고 돌아갔다. 하나의 우국지심은 이들을 차츰 떨어지기 어려운 막역지우로되게 하였다. 그후 며칠안돼서 좌진은 또 로백린을 통해 의 리창봉을 면목알게되여 한동안 그와 거래하게 되었다. 리창봉이 간부를 지내고있는 는 처음 일본사람이 일문(日文)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보다 한해 앞서서 1895년1월 22일부터 조선말판을 발행하기 시작한 어용신문이였다. 일찍이 서울에 와있던 재일(在日)신문의 특파원들과 의 기자들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라는것을 조직한바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명색이 문필을 위하는 구락부였지 기실은 취재나 순순한 기자로서의 친목단체라기보다는 일본의 관리와 군인들이 모여들어 입방아를 찧는 정치적사교장소였던 것이다. 좌진은 무문곡필(舞文曲筆)하면서 비루해가는 이 언론기구를 한번 바로잡아보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아름다운 념원일뿐이였다. 이때의 통감부가 지악스러운 을 만들어내여 조선판도내에 있는 모든 신문을 비롯한 일체의 언론기구에 대한 감독과 통제가 아주 심했던것이다. 그러한즉 그 자신이 설사 리사(理事)나 신문장이 된다한들 무슨 뾰죽한 수가 있겠는가. 이란 1907년(광무11년) 7월 24일 법률제1호로 공포되였다가 1908년(륭희2년) 4월 20일에 개정공포된 이른바 을 말하는 것으로 21조에는 아래와같이 되어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금지는 페간, 정지는 정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 을 내오기전부터 벌써 배일적인 론조를 거리낌없이 퍼뜨려 저희들의 침략정책수행에 가장 큰 방해로 여겨왔던 의 기염을 꺾어버릴 복적으로 전에 을 탄압하기 위해 서재필을 추방했던 방법을 적용하여 영국인경영자 배설(T.E.Betbell)과 주필 량기탁에 대한 탄압을 계획적으로 획책했는바 법놀음 끝에 량기탁은 무죄로 풀리였으나 배설은 끝내 잘못되였던 것이다. 통감부의 고소로 하여 그는 지난해인 1908년 6월에 주한(駐韓)영국총령사관에서 내린 3주간의 금고형과 당국의 소환에 응한다는 보증금을 내고 유죄로 판결받아 상해로 송치되였다가 형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는데 일본의 끈질긴 탄압으로하여 치른 옥고가 풀리지 않아 약 2개월전이 되는 5월 1일에 37살의 젊은나이에 숨지고말았던 것이다. 리창봉은 가 당했던 필화(筆禍)를 구구히 말한 끝에 도 얼마전에 정간처분을 당했노라면서 자기는 속수무책임을 표명했다. 일본은 갑작스레 입만 벌리면 , 하기 위하여 통감정치를 실시한다고 떠벌리던 이또를 해임시켜 추밀원의장으로 임명하고 부통감으로 있었던 소네아라스께를 그의 자리에 올라앉히였다. 환갑이 다된 소네는 자국에서는 이름있는 관료파의 수령이였다. 좌진이는 개구리가 궁둥이를 땅에 붙일때는 뛰자는건데 이건 또 어쩌자는 수작일가고 일제의 변덕스러운 처사를 수상쩍게 여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거다.   란국(亂國)에 가환(加患)이라, 9월에는 콜레라가 발생해 온나라에 만연되는통에 더구나 주검을 쓸어낼 지경이 되었다. 어느날 좌진의 부인 오씨는 집에 붙어있을사이없이 나돌고있는 남편의 축간 몰골을 보고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건만 좌진은 너무나 무감각하게 웃어넘기는 것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것을 보고 총 한번 원쑤의 숨통을 못 겨누어보고 너절한 병 때문에 죽는다는것은 너무나도 원통한 일이였다. 겉으로는 꿈만해하는것 같아도 기실은 사정없는 이 무서운 전염병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있는 좌진이였다. 소름끼치는 9월이 지나가고 10월을 잡는 어느날 저녁켠에 채기두가 서울에 다시 나타나서 좌진이한테 한가지 일을 알려주었다. 좌진은 얼굴에 침통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두해전에 채기두를 통해서 담사리의병장 안계훈을 좀 면목알게 된거다. 전라도지방에서는 머슴군을 라했다. 그리하여 그들로 조직된 반일의병대를 담사리의병대라불렀다. 안계훈은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에서 살던 머슴군(담사리)이였데 다른 지방에서 반일의병투쟁이 일어난것과 때를 같이하여 보성지방의 농민 황두일과 남평군 농민 권녕희 등과 손잡고 머슴군의병대를 조직했었다. 그들은 적들의 탄압이 극심한 조건하에서도 광양군 백운산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본침략군과 민족반역자, 악질적인 지주들을 처단하였고 적이 설치한 기관들을 파괴해버렸다. 담사리의병대오에는 농민외에 어민들도 많았기에 륙지로부터 해상까지 활동범위가 넓었다. 지난 4월경에 는 담사리의병 40여명이 일본침략군 와다다로가 대마도에서 여러 가지 상품을 배에 싣고 경상도 통영으로 가는것을 습격소탕하고 상품을 모조리 빼앗은 일과 초도와 렬도에서 일본어선을 습격한 일들을 보도한바 있었다. 용감했던 담사리의병들이다. 좌진은 담사리의병들이 들에게 일본침략자 한놈 죽이면 과거의 죄과를 용서하고 두놈 죽이면 상금 1백원 주겠다고 통고했던 일을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그네들의 실패를 가슴아파했다. 반일의병대가 북부국경의 회령읍을 점령해보려고 들이쳤다가 도리여 대패하여 형체마저 없어지고말았다는 불쾌한 소문이 난지도 어언 4개월. 계절이 바뀌여 날씨가 차가와지고있는 10월말의 어느날, 대구에 갔다가 방금 돌아온 좌진은 그길로 동지들을 만날일이 있어서 태극서관(太極書館)으로 가다가 길에서 이또가 안중근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였다. 이또는 일본과 로씨야간의 관계를 조절하러갔다가 할빈역에서 목숨이 끝장난 것이다. 명치유신이래 헌법작성에 성공하고 또한 수상으로 되었던 그는 일본에서는 다시구하기 힘든 정치가였고 공신이였지만 2천만조선인민에게는 철천지원쑤였던 것이다. 좌진은 그의 죽음이 속시원했다. 그러면서 원쑤에게 응당한 징벌을 안긴 안중근이 고마웠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서 이 체결되자 일본의 처사에 격분하여 애국문화운동을 해오다가 조선군대강제해산책동을 계기로 서울에서 일어난 시민과 군인들의 반일폭동에 충격받아 1907년말부터 반일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산간지대인 강원도지방에 가 의병투쟁을 확대발전시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는 연해주로 건너가 거기서 1908년 리범윤, 최재형 등과 함께 300명가량되는 의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리남기가 있는 노랑포수대와 더불어 전전하다가 이듬해인 1909년 6월에 이르러 다시 두만강을 건너 경흥습격전을 단행, 적군 50여명을 섬멸해버리는 승전을 하고는 그 기세로 모험적인 회령공략전을 벌렸다가 예상밖으로 다른 의병대의 후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니 그만 대패하여 병사를 거의잃고 그자신은 몇 명안되는 부하와 함께 겨우살아남았던 것이다. 한가슴 가득 복수심이 불타고있었던 그는 동지 몇 명과 함께 공모하여 복수를 오래도록 기도하다가 10월 26일에야 비로서 절호의 기회를 만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를 할빈역에서 처단해버렸던 것이다. 조국은 지금 의사들의 성결한 죽음을 얼마나바라고있는가! 그의와 같은 열혈투사가 많아야 했다. 좌진의 가슴속에 안중근의 형상은 민족영웅으로 우렷이 부각되였다. 하여 그는 안해앞에서 자기도 어느때든 안중근이와 같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좌진이였다. 좌진은 채기두로부터 어떤 곳에서는 의병을 조직하려 해도 손에 잡을 무기가 없어 행동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이 있어야했다. 돈이 있어야 무기를 구입할수 있지 안은가. 돈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 좌진은 돈을 벌기 위해서 관철동 대관원자리에다 야창양행(冶昌洋行)이란 물감가계 하나와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꾸리였다. 그것은 실로 좌충우돌하는 박투의 생애였다. 좌진은 이 두곳을 련락점으로 삼고 동지규합에 힘쓰기 시작했다.
306    장편전기 설한 (8) 댓글:  조회:3399  추천:1  2014-03-05
  8.    반일의병운동은 어느덧 전국을 휩쓸었다.  시, 군의 소재지 등 도시들이 위치한 벌방지대에서는 물론 고산재대의 두메산골로부터 바다우의 작은 섬지대에 이르기까지도 의병들의 투쟁장소로 되었다. 의병총수는 7만여명! 일본측의 에 집계된 1908상반년도 각지 의병장수가 연해주와 간도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6명까지 포함해서 모두 442명! 농민출신, 시위대출신, 군인출신, 유생출신, 머슴출신, 포수출신의 의병장들이 이름을 들날렸다. 귀에 쟁쟁한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아주 많았다. 얼핏들어도 믿기 어렵겠지만 친일파인 일진회원이 의병장으로 된것이 있는가 하면 술장사,점쟁이가 의병장으로 된것도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애국심이란 그 하나의 공통한 마음이 있어서 그들은 생사판가리혈전의 한길에 떨쳐나선것이다. 력사가 시작된 이래 이때처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이 열렬하게 벌어진적은 없었다. 좌진은 들려오는 소식들을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시골에만 이대로 눌려있는건 무능한 존재로밖에 되지 않는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촉에 못이겨 서둘러 동생을 장가까지 보내고나니 한시름 놓이면서 그는 부쩍 마음뜨기 시작했다. 남편의 이러한 심기를 알아채고 지켜보던 안해는 남편이 어디로가면 자기도 따라가겠노라고 고집부리며 나섰다. 좌진이는 들어주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되 한가지 약속이 있었으니 무슨일  있든 참아야 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돌아와야한다는 것이였다. 좌진은 갈산을 떠나기로 결정지은 후 학교를 경영할 비용을 얼마가량 장만하여 김석범에게 주면서 그더러 학교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생 동진에게 맡기였다. 그런데 백설총이도 비룡도 다 죽고 지금 집에는 부림말밖에 없어서 좌진은 말 한필을 새로 사서 자기가 타고 안해는 가마에 태워 데리고 서울길에 올랐으니 때는 바로 1908년 4월이였다. 류달리 좋은 봄날씨였다. 이른아침에 가족과 학생들의 전송을 받은 그의 일행이 서산(瑞山)땅에 발을 들여놓으니 어느덧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좌진은 가다가 마침 길가에 술집이 있는지라 한잔 제꺽 할념으로 교군들더러 먼저가라해놓고 잠간 말에서 내렸다. 그가 술마시는 사이 가마는 그냥가서 어느덧 대호지(大湖池)라는 커다란 못가에 이르렀다. 룡봉산(龍鳳山)의 산맥사이에 놓여있는 이 못은 으슥히 외진곳이였다. 주막에서 나와 청처짐 뒤따르고있던 좌진은 문득 고개를 쳐들면서 앞에 가던 가마가 가지 못하고 웬 무장한 자들에게 포위된것을 발견했다. 가마가 불의 변고를 당하고있음을 깨달은 좌진은 말을 세차게 몰았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자기 처를 가마에서 뿌득뿌득 끌어내리우고있는 놈부터 잡아 머리우 공중에 번쩍 올렸다가 활 던져버렸다. 머리우에서 버둥질치던 그자는 저쯤 날아가 딴딴한 땅에 곤두박혔다. 순식간에 당하는 일이라 괴한들은 모두 어마지두에 악연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는 꼴을 보면서 좌진이는 대성질호했다. 괴한들은 찍소리 못하고 그냥 떨기만했다. 좌진의 음성은 조금 누그러졌다. 하고다니는것을 봐서는 당장 모두 때려죽이고싶다만 갈길이 바빠 그러지 못하니 썩 물러들가라했다. 그리곤 녀석 하나를 분김에 죽여버렸으니 유감이지만 어디 따뜻한 자리나 골라서 묻어주라면서 허리에 찬 전대를 끌어 은전 몇잎을 꺼내여 그자들에게 던져주었다. 좌진은 말을 마치고나서 가마를 메라고 교군들에게 이르곤 자기도 말잔등에 오르려 했다. 이때였다.  숲속으로부터 한자가 달려나오며 부르더니 앞에 와서 엎드리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20여명이 우르르 달려나와 역시 그본새로 땅에 엎드리였다. 먼저나온자가 머리들며 빌었다. 두령임에 분명한 그자는 이러면서 자기는 좌진이가 벌서 어린나일 때 수십명의 종들을 놓아주고 밭까지 나누어주었다는 소식을 판술이한테 들어서 알았노라고, 그때로부터 속으로 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했노라고 실토했다. 판술이란 좌진의 집에 있었던 어린 종이였는데 그한테는 외척의 아우라는거다. 판술이는 가노에서 해방받은 일을 늘 고마워하면서 주인이였던 좌진을 외우군하다가 지난해 봄에 죽었다 한다. 이러면서 그는 아까 물으니 교군이 학교 교장선생님댁이라 하기에 웬 칠일파량반녀석의 녀편네가 아닌가고 의심했노라했다. 아버지가 론산골 사또손에 억울하게 매맞아죽은 후 이길로 나선지도 어언 20년, 노리는건 언제나 썩은 량반이거나 못된 벼슬아치였지 백성은 아니였다면서 그는 자기가 오늘은 환장을 했던지 이 좌진의 앞에 큰죄를 지었으니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곰팡이 끼고 썩은 인간은 아니였다. 그래서 좌진이는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일으켰다. 그날 밤을 대호리(大湖里)에 묵은 김좌진은 객주집에서 그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밤깊도록 한담을 나누었다. 저쪽의 맹세였다. 좌진은 이렇게 되어 현실의 국난을 외면하고 떠돌아다니면서 로략질이나 해먹고있던 한 도적무리의 도장수(都將帥) 채기두(菜基斗ㅡ 채기중이라고도 함)를 알게 되었다. 이틑날 서울에 당도한 좌진은 가회동 일가친척집에서 멀지 않은 취운정(翠雲亭)밑의 솔밭에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 한 채를 얻어 들고는 곧 활동을 시작했다. 좌진이 다른데로 가지 않고 서울에 오게된것은 바로 자기가 해야할바의 일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보기드믄 장골인 그는 기마와 무예를 열심히 익힐 혈기방장한 젊은이가 아닌가. 그러한즉 의병대같은데 들면야 무엇이 모자라 남한테 뒤지랴. 허지만 그는 싸움판에 나가는것을 급해하지 않았다. 가정재산을 다 털어서 학교를 세웠고 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으로까지 된 그는 그만큼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격있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하기에 교육자로서의 자기는 이제라도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자각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있는 인재를 빨리 묶어세우고 훈련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통감부에 의하여 가 해산되자 한해전이던 1907년에 권동진(權東鎭), 남궁억(南宮檍 ), 장지연, 오세창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있었다. 이는 국력증강을 위한 교육, 산업의 발달을 내세우는 계몽단체였다. 그 중견을 보면 권동진은 정부의 륙군참령을 지낸후 1884년 갑신정변을 당하자 손병희, 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던 사람이고 남궁억은 1898년에 이 발간되자 사장에 취임했던 사람이며 장지연은 후에 그 신문의 사장을 지내다가 이 있게되니 유명한 론설 을 썻고 1906년 윤효정(尹孝定)과 를 조직, 씨베리아와 중국을 방황하다가 귀국한 사람이고 오세창은 고종 23년(1886년) 박문국주사(博文局主事)가 되어 기자를 겸하고 그뒤 농상공부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전국통신국장(郵電局通信局長)을 력임한 사람이다. 이같이 그들은 다가 위망과 선망이 있는 출중한 무관, 교육가, 언론가들이였다. 그들의 지도하에 움직이고있는 는 이때 의병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고무되여 의병들과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저지 파탄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며 친일주구단체인 를 분쇄할것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적으로 내세웠다. 좌진은 기껍게 이 조직에다 자기의 몸을 잠그었다. 는 그가 서울로 올라오기 한달전이던 3월에 함경북도 경성에다 지회를 내온바있다. 그 회원수는 200여명, 협회지회에서는 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함일학교 등을 세우고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때 애국적인 지식인 서울사람 리남기가 있었는데 그는 1905년 부령, 회령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두만강을 건너가 국내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의 한 지휘성원이였다. 그는 안중근한테서 국내의 반일의병투쟁정황을 들었고 겸해 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고있다는것을 들어 알고는 이를 반일의병투쟁준비에 리용할 마음을 먹었다. 좌진은 그를 적극 협력해주었다. 그들은 학생모집을 한다는 광고를 낸 후 운동회를 한다는 명목을 빌어 경성의 여러지방에서 온 애국청년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여놓고는 의병에 가입시켰으며 체육을 한다면서 그들에게 총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의병대에서는 또한 학교설비, 경비를 거둔다면서 1만 7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아 그것을 갖고 연해주에 가 무기와 기타의 군수품을 사왔다. 그리고 또 인민들에게 호소해 경성지방에 산재해있는 화승총들을 걷어들이기도했다. 한편는 자신의 조직을 급속히 확대하였는바 1908년 7월에는 자기 산하에 30여개의 지회와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애국단체로 성장했다. 좌진은 안창호(安昌浩), 리갑(李甲) 등 몇사람과 손잡고 본래있던 와 를 병합하여 를 설립했다. 는 애국계몽단체로서 자체로 월간을 간행하고 순회공연 등으로 매일 애국사상을 선전하였다. 이 기간 좌진은 의 창립자중 한사람이며 명망있는 로백린(盧伯麟)과의 우의도 깊어지면서 비록 나이차이는 14살이나되였어도 허심탄회할 수 있는 극친한 사이로까지 되었다. 그렇게 됨에는 로백린이 무관출신이라는데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독립사상이 투철하고 견정하며 따라서 재능이 있는 활동가로 좌진에게 안겨왔기 때문이다. 로백린은 일찍이 일본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서는 관립무관학교(官立武官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그러한 그는 나라의 국권수호는 군대가 하는 것인데 군대를 해산시켜버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느냐고 통탄해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자면 오직 무장투쟁만이 가능하다는것을 주장하고있었다. 이 점은 좌진의 생각과 꼭 같았다. 일제도 역시 이점을 알고있길래 조선의 무장력인 군대를 갑자기 해산시킨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자들은 조선의 군대를 가장 큰 위험물로 보았던 것이다. 박성환의 자결은 적개심에 끓고있던 군인들을 반일무장폭동에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8월 1일, 서울에 있던 조선군인 5,277명중 강제해산시키려는 인원이 3,640명이였는데 그들가운데 50%에 해당되는 1,838명이 군대강제해산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이 치렬한 반일폭동을 벌렸다가 결국은 탄알이 떨어지고 희생이 많게되니 퇴각하여 의병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싸우는지?) 여기 서울의 8.1폭동! 그것은 어느덧 군민일심이 되어 겪어야만했던 가렬처절한 싸움이였다. 서소문보루돌파에 성동했던 병사들, 남성문을 점령코저 적탄의 불비속을 헤치다 쓰러진 군인들, 치렬한 총격전 끝에 벌어진 육박전, 련지동 녀중학생들의 헌신적인 지원.... 폭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싸움의 영상이 눈앞에 겹치면서 조선인민이 나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류혈과 희생이 약속되는 이 길뿐이라고 좌진에게 가르쳐주고있었다. (동진이는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어머님은 무사한지? 참, 손녀를 보았다고 알리기도하고... ) 좌진이는 꽤 오래간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물론 어머니를 보려는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박성태가 서울로 돌아와서 그쪽 학교형편이 어떤지 근심되였기 때문이다. 시국이 자못 복잡한 때라서 학생들이 안착하고 공부할수 없었다. 그래서 좌진이는 석범의 의견대로 한동안 방학하기로했다. 좌진은 돌아올 때 대호리에서 뜻밖에 채기두를 만났다. 헌데 그의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였다. 두볼은 꺼지고 눈은 충혈되였으며 게다가 수염도 깎지 않아 험상해보였다. 채기두는 방가운 끝에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뽑았다. 얼마전 그는 일본 의 습격에 들어 부하들을 거의다잃고 겨우살아난 것이다. 좌진이한테 힐란을 들은 채기두는 인제와서야 단독으로 나다닌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하나뿐이 아니라 다른 의병대들도 그모양인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그러했다. 그 많은 의병대들이 한데 뭉치지 않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었다. 그러니 쓰거운 고배를 마실수밖에. 각지에서 진위대가 해산된 후 군인들이 자기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조성된 정세로 보아 반일투쟁을 벌리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선것이다. 이같이 어떤 군인들은 군대해산을 반대하면서도 폭동은 일으키지 못했으니 맹랑한 일이였다. 그런 때에 조직자가 있었다면 얼마나좋았겠는가. 북청진위대의 부교 조희명은 부대를 해산시키려하자 고 하면서 군대해산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 조희명 한사람의 마음이였으랴! 군대는 해산선고를 받았지만 애국심있는 군인들은 총부리를 침략자에게 돌려 군인된직책을 다하려하고있다. 경기도지평,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제천, 등 여러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해산당한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 권 12. 륭희 원년 8월 19일.) 이것은 조선중부일대에 가장 많이 모였던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넘어갔다는것을 보여준다. 헌데 그들마저도 통일적인 장악이 없이 지방별로 장수별로 제마끔 제멋대로 싸우고있었다. 좌진은 한동안 채기두와 함께 동분서주하면서 의병규합에 힘써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쉽게도 별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런일이 있은 후 그는 로백린과 손잡고 경성고아원을 도와나섯다. 라춘수(李春水)라는 사람   개인이 경영하는 이 고아원은 온 조선치고 하나뿐인 고아원이였는데 자금난과 기타일로 곤경에 처해있었다. 좌진은 자진하여 총무(總務)직을 맡고 경제해결을 위해 뛰였다. 그래서 경성고아원은 마침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때 모진 혼란에 빠졌던 서울은 차츰 안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울밖에서는 반일의병투쟁이 의연히 줄기차게 전개되고있었다. 에는 그해의 3월에 강원도지방의병들이 다진 의병결의와 어느 한 의병대가 통감부에 보낸 글 를 기록해놓았는데 4개조항으로 꾸면진 그 의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1. 고종을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치를 하게 하자. 2. 통감부를 없애치우자. 3. 일본관리를 전부 파면시키자. 4. 일본이 1905년에 빼앗은 외교권을 도로 찾아내자.   이것은 비단 의병들의 념원이였을뿐만아니라 전조선백성의 념원이기도했다. 그런데 이해의 9월부터는 일본 의 발광적인 탄압으로하여 의병투쟁은 더 어렵고도 참혹한 시련을 겪게되였다. 8월하순, 일본의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전라남북도에 림시의 를 무어보내는 한편 여기에 제6사단 공병소대, 헌병, 경찰관을 더 증가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경비부대와 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들을 지키게하였고는 포위선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야수적인 수사와 검거 및 학살만행을 감행하게하였다. 또한 전라남북의 연해에는 해군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하였다. 그자들은 9월 1일부터 작전에 착수하여 9월 20일경까지 20여일에 걸쳐 제1기 구역에 대한 을 끝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이 끝난지역에서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동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자 약이 오른 와다나베소장은 예전계획을 변경하여 제3기 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소수의 력량으로 지키게하고는 제1기, 제2기 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를 다시했다. 는 무리를 지어 매개마을의 주변을 포위하고 경계를 이중삼중으로 한 다음 수색에 달라붙었다. 수색은 먼저 동리의 동장을 불러내여 미리 만들게 한 남자명단과 자기들이 가지고다니는 민적등본을 대조한다음 남자들은 한사람 한사람 골라내여 취조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의병들은 물론 의병투쟁에 참가했을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 의병을 도와준 사람들, 의병참가자 또는 의병참가혐의자들의 부락민들을 남며로소 할것없이 마구끌어내여 총살, 교살, 타살, 생매장, 사지찢기, 가슴도려내기, 눈도려내기 등 가지가지의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으며 니 니 하면서 의병장들의 시체나 의병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니 그야말로 귀축같은 만행이였다! 이리하여 온 강토는 일본침략자의 야주적살인만행이 감행되는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피바다로 변하게되였다. 영국기자 맥컨지는 조선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침략군이 도시와 마을을 소각파괴한 정경을 목격하고 고 하면서 충청북도의 고 하였다.
305    장편전기 설한 (7) 댓글:  조회:2731  추천:1  2014-03-04
  7.    며칠후 좌진은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동생동진이를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그는 권리앞에서는 언제나 비굴하게 굽실거릴줄밖에 모르면서 먹고 사는것으로만 능사로 삼고 제집과 제가족의 영화라면 하늘이라도 팔아먹자고 드는 벼슬아치들은 구데기같다면서 그런자들을 믿고있다가는 큰일나겠다고했다. 그리곤 지금은 정말로 제 나라를 받들줄알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줄을 아는 참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을 키울 학교를 세울 생각이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여겨보았다. 어머니는 어느덧 아들의 격앙된 목소리에 정신이 빨려들어갔다. 좌진이는 이때를 놓지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나중에는 내가 아느냐 네가 료량해서 하려므나 하고 응낙을 표시했다. 좌진은 기뻐했다. 마음을 맞춰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그는 어머님은 물론 안해도 알라면서 학교운영에 드는 비용은 금년에 우선 자기네 몫으로 추수한 낟알 100석에서 얼마가량 팔아 쓰리라는것과 모자라는 부분은 석범이도 담당하게 되리란걸 말했다. 물론 선생질도 먼저 석범이와 자기가 하기로 했다.   1907년 3월. 따스한 햇볕아래 해토되여 동한(冬寒)에 묻혀 잠자던 모든 생명들이 꿈을 깨고 재생하는 고마운 때에 검은 먹글씨로 활달하게 라고 쓴 간판을 내건 갈산 325번지 좌진의 집에서는 학생들이 글읽는 랑랑한 목소리가 담장너머에까지 울려퍼졌다. 김병학(金炳學)의 후원을 얻어 석범이와 함께 손잡고 낡은집을 개조하여 학교로 하고는 학생을 모아 개학한지 어느새 두달이 된것이다. 학생수는 이제 42명. 그나마 반수이상이 좌진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집의 자녀들과 석범이네 친척아이들이였다. 어머니는 15살먹은 동생 동진이를 장가보내려했지만 좌진은 그게 뭐 그리 급한가, 먼저 눈부터 틔여놓고봐야지 하면서 동생을 자기가 꾸리는 학교에 넣어 공부시켰다. 그리고 석범의 아들 영호와 전날 스승 김광호역시 막내아들을 일부러 광천에서 데려다 좌진의 집에 류숙시키면서 이 학교에서 신식공부를 하게했다. 비록 학생수는 적지만 개화(開化)를 목적해 꾸려진 신형의 학교였던만큼 여느 서당도 비할수없이 그 전망이 환히 내다보이면서 자못 생기가 끓어나고 있었다. 좌진은 자기 머리를 진작 석범이모양으로 고쳐버렸다. 좌진은 가위를 들고 먼저 이전의 머슴아이들의 머리부터 잘라버리였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있는 학부형들은 이러면서 호명학교의 취지를 의심했다. 그래서 학생수는 단번에 반수나 훌쩍 줄어들었다. 좌진은 속이 꼴리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리해는 될 일이였다. 수천년 내려온 봉건적 낡은 습관이 일조에 고쳐지긴 어려운것이다. 좌진은 하는수없이 석범이와 같이 집집을 방문하여 머리깎는 일은 학부형들 자신에게 맡길테니 자식들의 공부는 그냥 시키는게 옳지 않겠느냐 동원해서 다시모인것이 지금의 학생수다. 그래서 학생들중 태반이 아직도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늘인 아이거나 상투를 동그랗게 올린 청년들이였다.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애로가 있는건 사실이였다. 좌진은 학부형과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 한문과(漢文課)도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호명학교의 학과목은 한문, 언문, 산술, 력사, 지리, 체조 6가지로 설정되였다. 자기 나라의 력사도 모르고야 제 선조를 어떻게 알며 제 선조도 모르고야 어떻게 민족심이 생기며 조국애가 생기랴. 좌진은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조선력사를 잘 배울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일과 반봉건적인 새 도덕과 수양을 각별히 중시했는데 이에 대한 교육은 수신과(修身課)에 배치했다. (이것은 확과목으로는 밝혀놓지 않았다.) 구체적인 학과분담을 보면 력사와 지리와 언문과 한문은 석범이, 수신과와 산술과 체조는 좌진이 맡았다. 석범이는 대단한 열성가였다. 그런데 학교일에 전력하다보니 약국일은 부업같이 돼버렸다. 그통에 가정살림이 지장을 받아 어렵게 되어갔다. 이런 사정을 알고 좌진은 처음은 쌀섬이나 장작을 보내여 도와주다가 그것으로 부족함을 느낀 후로는 아예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다싶히 했다. 그랫지만 석범이네는 내놓고는 마을에 약방도 의원도 없으니 석범이는 교사노릇하면서 의연히 약방의생노릇도해야했다. 이같이 일신량역을 하다보니 석범이는 견디기어려운때가 많았다. 했지만 그는 좌진이가 자기집재산을 싹 털어내여 후대양성에 바치는 거룩한 행위에 감복되여 어렵다는 말을 입밖에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기력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다. 석범이가 축가는 것을 보아낸 좌진은 학교용품도 살겸 서울로 올라가 선생 한분을 더 구했다. 배재학당출신으로서 석범보다 몇해 후배인 박성태(朴性泰)라는 청년이였다. 좌진이 서울로 선생을 구하허 갔을 때 대종교(大倧敎)창시자 라철(羅哲ㅡ라인영)이 몇사람과 공모하여 을사5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금시 서울판에 쫙 퍼지고 있었다. 때는 1907년 3월이다. 좌진은 은연중 그만 감정을 발로해서 당석에 있던 사람들을 아연케했다. 넌 도대체 어디서 난 괴짠데 겁도 없이 이러느냐 하는 눈치였다. 콩밥먹을까봐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고가 고맙긴해도 뒤공론이나하면서 숨도 크게 못쉬는 사람들이 가증스럽고 민망해서 좌진은 허구푸게 웃고는 그만 돌아섯다. 그날 좌진은 서울서 내려오면서 감나무묘목 300여주를 사서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부쳤다. 삼불산밑의 황무지를 개간해 학교실습지로 만들어 거기다 심을 계획이였다. 그는 학생들이 일하며 배우는 근공검학의 길을 모색했는데 그때의 형편에 이런것은 실로 새로운 창조였다. 좌진이 꾸리는 이 신형의 호명학교가 지난날의 서당과는 판다르게 생기였고 운영도 잘되여가는것을 보자 학생수가 날로 늘어나 그 전망은 락관적이였다. 호명학교는 홍성땅을 벗어나 차츰 널리 이름내게되였다. 이와 더불어 교장인 좌진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洪城支部長)의 직책까지 맡게되였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6월의 어느 하루 광천에서 이제는 칠순이 넘는 김광호로인이 갈산으로 찾아왔다. 좌진은 정깊은 옛스승을 반겨맞았다. 광호로인은 류학하는 막내아들을 보러 왔노라면서 호명학교가 잘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하니 자기도 기쁘다면서 좌진이를 비롯한 세 선생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건 기실은 현대의식으로 개명했다고 인정되는 이네들과 한번 속심을 나누어 자기의 울적한 기분이나 풀어보자는데서였다. 석범이가 로인의 말을 받았다. 성태도 한마디했다. 좌진은 이러면서 2천만백의동포앞에서 바닷물을 다 쓴다해도 씻지 못할 대죄를 지은 을사5적무리 의 주모자 리완용은 점점 철저히 왜놈의 상등개로 되어가노라했다. 광호로인은 가슴꺼지도록 한숨을 쉬곤 배일거두 최익현의 죽음을 애탄했다. 최익현은 본래 서울에 올라가 궁궐앞에서 상소투쟁을 벌리려고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되지 않자 전해의 2월달에 전라북도 태인지방에 가 자기 제자인 림병찬과 함께 반일의병투쟁을 벌리였다. 이 반일의병대는 일본침략자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도시점령을 위한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사이 의병수도 급격히 늘어나 900여명에 달했다. 일본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은 이 의병대를 속한 시일내에 없애려고 무력적인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국왕의 이름을 빌어 회유문을 보내는 기만적인 수단을 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동요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 할 기세로 나왔다. 반일의병대의 공격에 의하여 일시 수세에 빠졌던 일본침략군은 태인, 순창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다시강점하려고 남원과 전주, 광주 등지에 있던 와 친일주구들이 거느리는 진위대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공격하였다. 6월 11일 치렬한 접전 끝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의병대는 전패, 의병장 최익현은 부하 림병찬과 함께 체포되였다. 6월 18일 서울에 압송, 온갖 회유책으로 굴복시키려다가 성공못하니 적들은 그를 재판에 넘겼다. 그리하여 최익현은 감금 3년, 림병찬에게는 감금 2년형이 내려 대마도로 류배갔다. 1906년 12월 31일, 71살인 최익현은 단식사(斷食死)를 하면서 이런 시구를 세상에 남기였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 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탐할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좌진이는 이 시를 무척 마음들어했다. 그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애탄을 표시하면서 책가울이 보풀이 인 병서(兵書)밑에서 접혀있는 신문 한 장 끄집어내여 보라고 건늬였다. 그것은 이해의 정월에 나온 였다. 거기에는 고종황제가 새해잡아 지 기자 더클러스 스토리를 통하여 미국, 로씨야, 독일, 프랑스 4개국 수반들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친서에서 박제순이 조인한 은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은 가짜문서일뿐만아니라 일본이 그것을 제멋대로 공포하는것도 반대하였다는것을 밝히고 자기는 독립국황제권을 타국에 추호도 양보한 일이 없고 외국인이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한 일도 없으며 애당초 통감이 조선에 오는것조차 불허하였다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광호로인은 뒤말을 채 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좌진의 말에 광호로인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날 그는 젊은이들과 해지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서도 더 지내고싶어 좌진의 집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갔다.   삼불산밑 황무지에 마련된 10여두락의 학교밭에서는 감나무와 곡식들이 푸르싱싱 잘 자랐다. 호명학교는 실력과 평판이 상당해진터로 린근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와서 공부하는 학생수는 어느덧 몇백을 훨씬 넘겼다. 그래서 좌진은 학급증설을 위해 상촌(上村)에다 초가집을 한 채 짓고는 식솔들을 그리로 이사시켰다. 그런데 호명학교의 발전과는 반대로 국가의 운명은 나날이 더 험악해져 인제는 거의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에 빠지고있었다. 리완용의 승진이 말밥에 올라 씹히더니 7월잡아서는 월초부터 밤자고나면 범상찮은 사건들이 련달아꼬리물어서 온 나라가 비감과 분노와 절망과 흥분이 한데반죽되여 끓어번지는 소란스런 도가니로 되어갔다.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다.    일본대신 하야시가왔다.    황태자대리의 조서가 내렸다.    시위대군이 일본군과 충돌이 생겼다.    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였다.    리완용의 집에 불이 났다.    전 황제에게 태황제의 칭호를 줬다.    그러더니 24일에는 도 무슨 이라는것이 체결되였다. 그래서 며칠안되여 서울시민들은 반일폭동을 일으켰고 그뒤를 이어서 서울과 강화에서 군인폭동이 일어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강원도 원주에서도 군인들이 치렬한 반일투쟁이 벌어졌다. 중부조선일대는 어느덧 인민들의 반일투쟁기세가 고도로 앙양되였다.    그 다음달도 국론(國論)은 비등(沸騰)했다.    조선의 군대가 해산됐고    참령(參領) 막성환이 자결했고    시위련대와 일본군대가 충돌했고    영친왕 은이 황태자에 책복봉됐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304    장편전기 설한 (6) 댓글:  조회:3041  추천:1  2014-03-03
   6.         이틑날 한낮때. 이 집에 매여 지내오던 50여명의 남녀가노와 그의 권속들은 창문을 활 열어젓힌 바깥사랑방에 모여 무릅꿇고 앉았다. 모든 시선이 한사람ㅡ 문서더미앞에 묵묵히 앉아있는, 오늘따라 더 유표하게 새로 다린 도포에 통영갓을 말쑥이 갖춰 쓴 젊은 주인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 량반이 오늘따라 거인가와보이면서 또한 생소할 지경으로 괴이해보이기도했다. 노예를 해방시켜주다니! 세상에 그렇게 고마운 사람도있단말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과연 있는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주인 김좌진이 아닌가! 이같이 운을 뗀 좌진은 자기가 가노를 해방시키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리고는 그네들에게 지금은 나라가 풍전등화같이 위태로우니 각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배움에 힘써서 눈을 뜨고 나라일을 관심하는 국민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종들은 모두 젊은 주인의 장부다운 기개에 감동하면서 고마움이 무극했다. 좌진은 이러면서 여러대 묵어온 종문서를 나눠줄테니 받아서 불을 사르든지 아니면 찢어없애든지 마음대로 하라했다. 그리곤 팔만이, 춘봉이, 삼월이....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불러 옛문서와 함께 그들 매개의 가정에 나눠주는 새논문서를 주니 그걸 받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라곤 없었다. 이날따라 국화냄새 풍기는 마가을의 날씨는 류달리 청쾌했다. 좌진은 허리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날 밤 춘봉이네 늙은 할미는 랭수를 떠놓고 젊은 주인 좌진의 장수와 오복을 오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이틑날 광천에 간 좌진은 며칠후 비룡(飛龍)이라 이름지은 호마(胡馬)한필을 사갖고 돌아왔다. 옛병서만 읽어왔던 그는 현대적인 군사기술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거다. 하여 그는 집에 며칠 있지 않고 어머님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좌진은 련건동(蓮建洞) 278번지에 있는 친척집에 류숙을 정하고 매일 말을 타고 통학하면서 열심히 현대군사기술을 배웠다. 워낙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없고 무예도 익힌지라 좌진은 출중한 학생으로 인정받아 17살을 잡는해에 졸업했다. 그런데 1905년 그해는 조선에 비운이 내리는 해였던 것이다. 1월에 경성(京城)의 경찰치안군을 일본헌병대에서 장악했고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은 고종에게 일본침략의 위험성을 상소했다. 허지만 랭혹이 덮치는 이 위험을 무엇으로 어떻게 막아낸단말인가? 2월에는 일본인 마루야마가 경복궁고문에 임명되였다. 그리고 4월에는 나라의 신경계통을 장악하고있던 통신원(通信院)마저 일본의 손에 들어가버렸다. 8월부터 연해와 하천에 일본상선들이 제멋대로 싸다니였다. 항행무역권도 그자들에게 허용되였던 거다. 백성들의 원성은 높이 터졌다. 그렇다, 틀리지 않았다. 9월 5일, 로씨야전권대표 윗떼와 일본 전권대표 고무라 류다로는 미국 포스마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전쟁에 패한 로씨야로부터 려순과 대련을 포함한 료동반도에 대한 조차권, 관성자ㅡ려순간의 철도(소위 남만철도)와 북위 50도이남의 싸할린(화태), 오호쯔끄해와 베링그해에서의 어업권 등을 양도받앗을뿐만아니라 조선에 대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권을 승인받았다. 하여 일본은 이 조약에서 사실상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전환시켯던 것이다. 11월,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다시나타났다. 로일전쟁대 왔다간적이 있는 그를 사람들은 자기의 음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무수한 재난을 들씌운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알고있듯이 그를 기억하고있었다. 좌진이는 말했다. 아니나다를가 일이 났다. 바로 그달의 보름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볼일있어 홍성에 갔던 좌진은 려관에 들렸다가 거기서 서울서왔다는 웬 이목구비 번듯한 사나이가 일본과 조선사이에 이 체결되였고 민영환(閔泳煥 )이 자결했다는 말을 하는걸 들었다. 향년 44세인 민영환은 일찍이 좌진이 9살나던 해의 3월에 로시야 황제의 대관식에 특파된적이 있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오스트랄리아의 특명공사(特命公使)를 력임했던 나라의 문신이다. 그는 이 체결될 때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해주관찰사 홍만식(洪萬植) 등 13유생과 더불어 조약페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주민과 각국공사에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던거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리 없는 좌진이는 그 말한 사나이를 되꾸짖었다.  서울사나이는 호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뵈였다. 신문에는 분명 큰 활자로 이라 또렷이 찍혀져있는지라 좌진은 맏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수 없었다. 좌진은 송에 들고보던 신문지장을 발기발기 찢어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와 말을 풀어타곤 힘것 배를 걷어찼다. 초풍할지경 화닥닥놀랜 말은 앙칼진 소리를 내지르곤 냅다뛰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울분이 활화산같이 터진 좌진은 어디다 당장 분풀이할데도 없어서 그저 말만 미친듯 몰아댔다. 말은 어느새 갈산이 보이는 수리재골을 내려가고있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거기 오른족 골짜기에 선친의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달려가던 말이 무덤에 채 이르지 못하고 마치 무엇에 걸채이기라도 한것처럼 폭 고구라졌다. 좐진은 동작이 하도 잽싸 상한데 없는데 말은 고꾸라진채 다시일어나지 못했다. 말은 코투레질 뿐 네발로 하늘을 향하고 버둥거렸다. 그러는 말을 좌진이는 일어나라고 주먹으로 대갈통을 몇 대 갈겼다. 말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커다란 눈알을 까뒤집었다. 좌진은 죽어가는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살려낸단말인가. 좌진은 말을 팽가치고 달려가 선친의 무덤앞에 턱 무릎꿇곤 머리를 당에다 깊숙이 박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온 나라가 울적한 기분에 잠겨버렸다. 5개조항으로 된 에서 일본은 도꾜에 있는 저들의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조선에 대한 외교관계 및 사무를 관계하며 조선은 일본의 중게가 없이는 국제적성격을 띈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할수 없으며 일본은 조선에 을 두어 외교사무를 관리케하는 외에 다로 각 지방에 리사관을 배치하고 이 이를 지휘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은 문제있었다. 11월 20일자 은 11월 15일 일본천황의 특사 이또와 면담시 고종의 언론을 공개했다.     한즉 을사년의 이 이란 황제 고종의 수표와 국새날인을 받지 못한것만은 사실, 비법무효의 위조문서였던 것이다. 하건만 일본천황은 뻔뻔스레도 을 공포한 닷새후인 11월 22일에 이른바 을 만들어 반포했다. 분노할 일이였다! 고종은 11월 26일 미국인 헐버트와 프랑스주재 공사 민영찬에게 비밀전보를 보내여 자기의 태도를 아래와같이 똑똑히 표명했다.   의 주필 장지연(張志淵)이 이라는 논설을 써서 자기 신문에 발표했다. 좌진은 그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고 주먹이 떨리였다. 그랬다.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고 주먹을 떨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11월 20일신문의 그 글은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고 영달과 리익에 눈이 어두워 일본의 위협에 그저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된 저 개 돼지만도 못한 대신(大臣)이라는 자들은 이제 무슨 면목으로 황제와 국민들을 대할것이냐고 크게 꾸짖었다. 이 론설과 함께 은 또한 이라는 제목으로 이 조약이 강제적으로 맺어지기까지의 경위를 폭로했다. 장지연이 이 사실과 기사를 실은 신문을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고 배포한 것으로 하여 은 무기정간처분을 당하고 사장인 그와 공무원을 포함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였다. 일제의 이같은 무자비한 탄압에 그래 조선의 신문들은 한마디의 말도 못한단말인가? 그런것이 아니였다. 영욱인 배설(T.E.BCTHELL)이 경영하는 ,>는 11월 21일지에 장지연의 구속과 이 정간되였음을 제꺽보도하고 23일에는 도 경무청의 일본인 경찰고문이 장지연에게 고 묻자 장지연이 도리를 따지면서 반문하고 항변하여 일본인 고문으로 하여금 대답못하게 만들어놓은 사실을 보도했다. 글을 좀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모두 신문을 보았고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즉 혹은 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대미문의 엉터리조약으로 일어난 파문이 쉽게 가라앉기는 만무한 일이였다. 민영환의 뒤를 이어 며칠사이에 조병세와 홍만식도 자결하고말았다. 비보가 전해지더니 해가 바뀌여 1906년의 벽두에는 리용익이 로씨야에서 암살되였다는 소식이 건너왔다. 그는 본래 륙군부장(陸軍部長)이 되어서 일본세력의 구축을 위해서 프랑스, 로씨야 세력과의 제휴룰 꾀하라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려다가 풍랑으로 좌절되곤 로씨야에 망명했던 사람이다. 이해의 2월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였고 림시통감대리에 하세가와가 취임했다. 에 빙자하여 설치된 통감부는 닐본이 조선에 군림한 통치기관이였으며 그 우두머리인 통감은 조선의 외교권과 내정 등 모든 실권을 장악한 실제적인 식민지총독이였다. 통감부(統監府)의 설치로 리조봉건정부는 아무런 실권도 가지지 못한 친일매국노의 허수아비기관으로 전락되였다.     이것은 3월 9일, 가 조선이 당하고있는 현실의 처지를 개탄해서 실은 글이였다. 이달에 민종식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초대통감에 이또 히로부미가 부임되였다. 이또가 통감에 부임되면서 조선에서는 그 전해의 말에 각국주재공사를 소환했던 탓으로 조선에 주재했던 각국 공사관들도 재빨리 철수되였다. 5월에 전참찬 최익현이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해의 11월에 고종은 그에게 비밀지령을 보내여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7개도에서 반일의병투쟁을 벌리도록 한바가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행동에 옮겨진것이다. 온 삼천리강토에서 반일정서가 점점 고조되고있었다. 그러더니 10월에 잡아서는 마침내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일제는 서울에다 통감부까지 설치하고나서 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및 대구 등 20개소에 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침략군을 끌어들이기시작했다. 1906년 3월에 들어온 군인수가 61,900여명이던것이 반년이 지나 9월에는 80,700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은 각지방의 주요도시를 강점한다음 와 경찰대를 배치하고 경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온갖난관을 무릅쓰면서 용감한 투쟁을 벌리였다. 이 투쟁의 앞장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지방의 의병들이 서있었다. 의병대조직자들가운데는 최익현, 민종식과 같이 이름난 유생들과 퇴직관리들이 있는 반면에 이미 오래전부터 농민폭동에 참가한 신돌석과 같은 폭동지휘자들도 있었다. 그네들은 구국항쟁을 벌릴데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글이 여러사람이 돌려보는 이였다. 반일의병투쟁을 세차게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13도유생을 대표하여 26명이 련명으로 낸 의병통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였다.     에는 또한 비록 요긴하게 소용되더라도 일본물건은 사지 말고 기차와 기선을 타지 말고 전신과 우편은 이미 빼앗겼으니 절대 리용하지 말라고 했다. 외에 과 기타의 글도 많이 나왔다. 어떤 은 백성들이 옷을 찢어 기발을 만들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서며 특히 땅파고 막일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설것을 강조했다. 좌진은 물론 도 보고 도 보았다. (어떻게 할가?.... ) 그는 속이 움찔거렸다. 가슴속에서 피가 설설 끓어번지였다. 허나 그는 감정에 충동되지 않고 랭정히 사고하면서 지그시 참았다. 가노를 해방시킨 후 한가지 거룩한 구상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303    장편전기 설한 (5) 댓글:  조회:3249  추천:1  2014-03-02
  5. 좌진이 9살나던 해인 1897년도는 나라가 천재에 신음하면서도 탈태환골을 해보려고 개명을 한 난망의 한해였다. 하늘마저 어쩌면 그리도 불공평하고 무정할가, 량반관리들의 탐학과 련속부절히 일어나는 란에 민심은 전혀 안정할새 없이 황황한데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해의 6월에 이르러서는 전국 각지에 우박이 퍼부어 농장물과 가축들이 형편없이 해를 입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빈궁에 빠져 헤매고있던 수천만의 백성들은 전보다 더 혹독한 아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기의 팔자를 한탄하기도 하고 천지신명을 우러러 구원을 절절히 빌기도 했다. 한데도 애원성을 들어주는 구세주는 세상에 없었다. 7월에 나라정부를 전복하려고 꾀했던 종진영과 홍현철을 비롯한 몇사람이 잡혀서 처형되였다. 그리고 10월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황제등극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쳐버렸다. 온나라적으로 입은 박재에 좌진이네라고 무사할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이네 집 쌀창고에는 먹을 쌀이 있었다. 예비없이야 그많은 입이 어떻게 살아간단말인가. 이해 겨울의 어느날이였다. 계집아이종이 비럭질을 온 거지할머니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곱게 보지 않았다. 거지할머니는 쌀 한되박 받아 자루에 넣으면서 두덜댔다. 달라는 쌀을 줬으면 감사히 받고 물러가련만 웬 불만인가? 필유곡절이라 좌진의 어머니는 리씨가 이상쩍어 알아보니 쌀에 돌이 섞였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좌진의 어머니는 종년이 모르고 한짓일테니 노여워말라고 사과의 말을 하곤 손수 쌀 한되박 더 주었다. 리씨는 아들에게 짜증섞인 말로 곡진히 부탁했다.   이때에 한마을에서 사는 석범이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약방을 맡아보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갔다가 개화되여 돌아온 이 청년은 자기보다 나이 열 살이나 손아래인 좌진이와 어느덧 극친한 사이로 되었다. 안그럴수있는가. 좌진이야말로 그의 구명은인인데야. 그로놓고보면 백골난망이요 결초보은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한편 또 좌진이는 좌진이대로 그한테 감사한일이 있었다. 시골뜨기인 자기가 깜깜 모르는것을 그는 알고있어서 상종이 잦을수록  귀동냥이라도 할 멋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의 8월, 홍성대원군의 장례가 지난지 석달만에 일본의 전임총리대신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방문왔다. 그러더니 조선정부는 마치 어린아이가 마술사의 홀림에 들기라도한것 처럼 경부선철도의 부설권을 일본에 특허했다. (여우는 잠자면서도 닭잡아먹을 꿈을 꾼다더라. 왜놈이 어쨌다구 제 땅 아닌 남의 나라에 철길을 놓을가?) 일본을 곱게보지 않은 좌진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의문이 컷다. 일찌기 고종17년(1880년) 11월 16일에 조선주재 일본 초대공사로서 하나부사란자가 부임되여 온적이 있다. 해군의장대에 호위되여 위엄스레 돈화문에 들어선 그는 창덕궁 중의당에서 임금을 배견하고 신임장을 봉정하였는데 고종왕이 근대적례식으로 외국사신을 접견한것은 그것이 처음이였다. 그때로부터 일본공사관으로 정해진 서울 천연정 청수관에는 일본국기가 게양되였으니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쇄국양이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는 상징이기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침략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좌진이 10살나던 1898년의 마가을 어느날, 석범이는 서울 가서 여러날 지내다 돌아오더니 서재필이 고문이 되어 움직이고있는 독립협회가 주체로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노라고 기분좋게 알려주곤 자기 생각하건대는 장차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나라의 개혁이 실시될듯하다고 했다. 좌진이는 그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기쁨이나 석범의 기쁨이나 다 가랑잎이 바람에 날리듯 인차 날아가버렸다. 10월에 관민합동의 개혁안 6조를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정부는 그를 선선히 받아들이지 않은건 물론 김옥균을 살해하여 그 으로 교리(校理)까지 된 홍종우가 리기동 등과 함께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것을 따로조직해 맛서면서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자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해산을 지시했던 것이다. 홍종우가 좌진이네 가문에서는 철천지원쑤로 되고있다는건 세상이 다아는 일이다. 어머니는 서울소식을 아들 좌진이한테서 들어 알게되자 원쑤를 저주하면서 보부상까지 싸잡아 망종이라 욕했다. 이런일에 보부상들이 다 나서서 갈개군질한다는건 아닌게 아니라 우수운 일이였다.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겨룸이 치렬하게 계속되였어도 국외로는 열강들사이 조선에 대한 쟁탈전이 기복을 이루면서 고조되여가고 있었다. 김좌진은 소년시절을 이같이 피할래야 피할수 없고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국보간난(國步艱難)의 와중에서 보내야했다. 그는 비록 시골훈장이긴 했지만 다문박식한 광호선생한테서 한문(漢文)을 착실하게 배웠다. 그것은 그를 정립시킴에 재산이였다. 한해 두해 나이들수록 키골이 유별나게 장대해진 그는 기호 역시 남과 판판 달랐다. 8살때에 첫권을 독파한 후로부터 나 같은 무협소설을 읽기좋아했고 은 물론 과 와 과 같은 병서들을 구해서는 그것을 독파하기에 노력하면서 검술(劍術)도 애써 련마했다. 그런데 좌진이는 그냥 아이로서 갈산을 독천장으로 삼고 뛰놀기만할수는 없었다. 그한테는 그가 7살 때에 벌써 부모들끼리 짝을 정해준 미혼처 오씨가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좌진이보다 두 살 더 많고 이름은 숙근(오숙은이라도 함)이고 역시 꼭같은 량반집의 딸이였다. 남자나이 7, 8살만되여도 족두리쓰고 장가갈 수 있었던 그때 세월에 여자몸으로 나이 15살먹도록 두문불출하고 규방에 갇혀있었으니 무던히도 오래 참아온 셈이다. 좌진은 봉건유제의 속박에서 벗어 못나고 수절하면서 오로지 자기만을 믿고 살아가시는 어머님의 심려와 친척들의 권념에 못이겨 나이 13살나던 1901년 봄에 례를 올리고 오씨를 안해로 맞아왔다. 헌데 그는 결혼한 그해의 8월에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그한테는 형 경진이가 있었지만 그는 어머니곁을 떠나 서울에 있는 일가집에 양자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해 형 경진의 나이 18살이였는데 이듬해는 아버지모양으로 근조말기(近朝末期)의 참봉으로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같은 벼슬을 겨우 한해밖에 못하고 20살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 일찍이 타계의 사람이 되고말았다. 이 안동김씨네 집에 이같이 또 한번 슬픔을 던져준 1904년! 바로 저주로운 그해의 2월 8일에 병든 조선을 삼키려고 오래전부터 혈안이 되었던 두렬강ㅡ 일본과 로씨야간에 끝내 전쟁이 일어나고말았다.   조선정부는 급급히 국외에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일본은 자기들의 륙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겁을 집어먹은 조선정부는 일본과 이라는것을 체결하고 경의철도를 일본에 빌려주었고 로씨야와의 조약을 페기해버렸다. 일본의 요구는 점점 사나와갔다. 충청, 황해, 평안도의 어로권을 가졌거니와 황무지개간까지 요구해나섰다. 그러다가 8월에 이 성립되고 10월에는 일본인 메까다가 탁지부(度支部)고문에 임명됨과 동시에 일본사령관 하세가와가 입경하기에 이르렀다. 중립을 선포하면 안전하리라여겼던 어리석은 조선, 자주적인 독립을 갈망해온 조선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여 내각의 중요한 자리마다에 왜놈의 고문이 지키고 섰다. 아아, 이것이 그래 통탄할 일 아니고 뭔가? 바로 이러한 시국이였건만도 좌진은 남들이 보면 거기서 밥나오냐 떡나오냐고 웃을 지경 오기(吳起)의 병서에만 파묻혀있었다. 어느핸가 마을에 의병대가 왔을 때 그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가 너털웃음 끝에 던지던 말이 늘 잊혀지지를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좌진이는 찌들어가는 나라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의병으로라도 나가고싶은 생각이 치밀때가 많았다. 허지만 그는 그 검정풍안경낀 사람처럼 독립협회가 뭔지도 모를 지경 무식하면서 열혈이 식으면 로략질이나해먹는 악한이나 무뢰한으로 되고싶진 않았다. 좌진의 집에는 팔만이라 부르는 30대의 젊은 남자종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무척셋다. 어느하루 좌진은 그가 장작무지를 옮기는 것을 보고 그리로 갔다. 팔만이는 작대기로 받쳐놓은 커다란 지게에다 지게뿔이 넘어날지경 장작토막을 실었다. 좌진은 그를 도와줄 겸 힘도 겨뤄보려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팔만이는 절대 그러게 못하게했다. 좌진은 팥죽땀을 흘려가면서도 자기를 량반이고 주인이라 시키지 않고 그 일을 혼자해내는 그가 측은했거니와 이전부터 생겼던 의문이 짙어가면서 반성이 생기게 되었다. (명분! 명분! 썩어빠진 명분! 그놈의 명분이 대체 뭐냐? 저인간은 무슨 죄졌다고 땀흘리고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 난 또 뭐가 잘나서 놀고먹는단말이냐? 저 사람은 상놈이고 난 량반이란 그 하나의 리유때문에? 량반과 상놈이란 대체 어쩌자는 차별이냐? 행실로 보나 재주로 보나 량반보다 나은 상놈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고루하고 완고한 유자(儒者)나 말공부질이나하면서 당쟁에만 눈이 빨개진 벼슬아치들과 비하면야 그네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가. 그런데도 량반이라해서 그네들의 머리우에 올라앉고 종으로 만들어 천대하고 착취하는건 얼마나 뻔뻔스럽고 죄악적인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이젠 이니 이니 하는 소리까지도 듣기 거북해난다. 사람지간에 응당 평등해야 한다. 이놈의 비틀어진 량반의 집에서부터 그렇게 혁명을 해버릴수는 없을가?) 좌진은 속으로 이러면서 아직 살아있는 종할미의 처지를 생각했다. 선량한 종할미! 남의 집 종살이가 고달퍼 자기네도 논마지기만 있었으면 신세고치련만 하고 한탄했던 종할미! 좌진이는 업어자래우는 보상으로 크거들랑 논 백석지기 주마고해서 그를 무척 기쁘게해주지 않았던가. 비록 철부지아이때의 일이긴해도 지금 일가주장이 되고보니 새삼스러워지는 추억이였다. (이제는 다 컷다. 내가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오늘은 지켜줄수 없을가? 그네들을 진정 기쁘게 해줄수는 없을가?) 좌진이는 사람이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불평등한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자기의 그 생각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하나의 주장이 뚜렸해지면서 결심은 점점 굳어갔다. 가노를 해방하자! 헌데 자신은 결심을 아무리 내렸어도 혼자의 의사대로 제꺽해치울일은 아니였다. 제아무리 일가주장이긴해도 집안대사를 어머니를 기이고야 어이 되랴. 좌진은 어느날 밤 조용한 틈을 타서 어머니에게 자기의 뜻을 내비치였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두말없이 반대하였다. 종을 놓아주다니 그게 무슨말이냐고, 나라에서도 아직 아무말이 없는 일을 네가 하자니 방자한 짓이라고. 더구나 집안어른들이 아직도 살아계시는데 네 맘대로 그게 어디 될 법이냐고 딱 잡아뗐다. 그래서 좌진은 여러밤이나 잠못이루면서 날을 밝히였고 석범을 찾아가 함께 대책을 상의하기도했다. 좌진이 이번에는 오촌숙부와 의논해보려고 찾아갔다. 오촌숙부 창규와 숙모가 마침 집에 있었다. 좌진은 오랜주저 끝에 무겁게 입을 열어 우선 사회라는건 앞으로 발전하고있으니 이에 발맟추어 우리 자신들도 의식을 고쳐야할게 아니냐고 운을 떼놓고는 지금 가뜩이나 적은 민족을 상놈과 량반으로 갈라놓아서는 안될때이고 또한 인성(人性)은 똑같은데 그네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것은 죄라고 했다. 그제야 조카의 의도를 명백히 알게 된 오촌숙부는 정신차리였다. 좌진이는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어 량반들이 종이다 상놈이다 하면서 그네들을 짓밟아 산송장처럼 만들고 있지만 기실은 량반들이 다 썩고있다는 것, 종도 상놈도 다 놓아주어 그네들도 힘을 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는 이제 상놈과 량반이 합친다해도 까딱하면 나라운명을 건지기 어렵게 되리라고 부언했다. 잠자코있던 오촌숙부는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화강암같이 굳은 태도였다. 그의 론리인즉 종들은 무식해서 국사에 참견할 자격이 근본 없거니와 만약 너의 말대로 풀어놓는다면 되려 버릇만 잘못 궂힐수 있으니까 가노해방을 궁리하는것부터가 얼빠진짓이라는 것이였다. 좌진이는 오촌숙부가 아무리 격노하여 삿대질해도 지그시참았다가 그가 제풀에 지친 다음에야 입을 다시열어 자기가 찾아온것은 한번 상의해보자함이요 숙부댁에서까지 그리 하라는건 아니니 너무 노여워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기 집 일은 이미 작정한바여서 그대로 집행하겠으니 그리 알라 했다. 조카의 이같이 단호한 태도를 본 오촌숙부는 하면서 의연히 분기충천하여 다시는 자기 눈앞에 얼씬거리지도말라했다. 좌진은 태연히 참고있다가 두 량주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왔다. 오촌숙부의 집에서 나온 좌진이는 그길로 석범이네집에 들렸다. 그는 거기서 그들 내외간을 독촉해 찰밥을 큰 밥통에다 하나 그득해선 그것을 창호지에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그것을 자기 혼자있을 방에다 감추었다. 좌진이 석범이네 집에 들린사이 오촌숙부가 왔다가서 어머니는 벌써 그곳에 가 되어진 일을 다 알고게셨다. 어머니는 어른들이 안된다고 말하면 그런줄알고 들을것이지 너는 대체 무슨 고집이 그리도 세냐면서 여러대를 내려오며 무사했던 종들을 이제 놓아준다해서 그네들이 더 호강살이 할것 같으냐며 이 일만은 절대안된다고 한번다시 엄포를 놓았다. 자기방에 들어간 좌진은 문을 꼭 닫아걸고 혹간 랭수나 한사발청해서 마실뿐 때가 되어도 나와 식솔들과 함께 밥먹을 념은 않으면서 벽을 마주하고 앉아 기도드리는지 요지부동이였다. 이러기를 여러날, 어머니는 드디여 아들이 단식하고 죽을것만같아 겁나서 그만 울음을 내고야말았다. 그제야 좌진이는 달려나와 우시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였다.
302    장편전기 설한 (4) 댓글:  조회:2681  추천:1  2014-03-01
   4.    지난 을미년에 있은 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립시켯으며 조선을 남만주침략을 위한 경제적 군사적 근거지로 되게 하였다. 비록 그후 로씨야, 프랑스, 독일 3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료동반도가 다시 중국에 반환은 되었으나 대련과 려순항구는 결국 일본의 소유로 되었으니 이것은 일본이 앞으로 만주와 몽골을 침략하기 위한 문호를 열어준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대만과 팽호렬도의 강점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 남방에서 근거지를 건립할수 있게 하였다. 약소국가는 렬강들의 앞에 놓인 하나의 먹음직한 고기덩이였다. 원동문제에서는 영국은 많은 리익을 이미 얻었으나 로씨야와 독일은 중국에서 방금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중이였고 프랑스도 이미 자기가 얻은 리익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 조인되자 제정로씨야는 매우 놀랐다. 그리하여 로씨야는 프랑스, 독일과 련합해서 일본정부에 대하여 동시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즉 일본은 료동반도를 즉시 반환할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로씨야, 프랑스, 독일이 무력으로 이에 간섭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당황하여 이미 20여년의 개화로 실력을 뽐내면서 입에 거의 삼켰던 료동반도를 게워놓았다. 이같이 싸움에서 진 청나라는 말할것도 없으려니와 제법 쎈줄알았던 일본이 싸움에는 이기고도 3국의 간섭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민씨일파와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로씨야의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전승국의 야심이 있은 일본은 아직도 조선같은건 주무를수 있어서 저 미우라(三甫)란자가 재류일본인과 더불어 대원군을 받들고 경복궁에 들어가 민비를 살해하고는 개화를 한답시고 을 내렸던 것이다. 너무나도 무능한 정부를 반대하여, 왜적을 반대하여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자 무능한 정부는 다시 일본의 병력과 함께 참혹한 도살로써 의병을 탄압했다. 허나 일본은 3국간섭에는 어쩌지 못하고 잠시 물러갔다. 그다음은 로씨야의 천지였다. 내각은 순식간에 친로세력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은 물론, 심지어는 정부에서 돈쓰는 일까지 로씨야가 참견하게 되었다. 고종은 자기 집에서 살 권리도 없이 로씨야의 공관에서 셋방살이를 해야했고 내렸던 단발령도 취소하였다. 그리고 인제는 그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린 의병의 어떤 찌꺼기들은 산골로 돌아다니면서 로략질이나 해먹었다. 바로 민비가 죽은 이듬해의 이러한 세월에 좌진이는 삼불산에서 벌떼에 쏘이였던 것이다. 이해, 건양(建陽)원년 동지달 그믐께. 좌진의 딱친구 갑룡이가 한권을 마치였다. 갑룡의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아들의 책갈이턱을 내려했다. 그런데 술은 있어도 안주감이 문제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좌진이는 제또래의 애들을 데리고 새를 잡았다. 서당집주인 선달이네는 애들이 잡아온 새고기로 맛나는 술안주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훈장 김광호와 갑룡의 아버지 그리고 주인 김선달령감은 즐거운 술상을 방금 벌려놓았는데 여러해나 서울에 가있던 갈산의 청년 김석범(金錫範)이 머리를 깎고 문득 나타났다. 석범은 광호선생의 외척생질로서 개성이 시골의 여느 청년들과는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약국을 차려놓고있으면서 아들이 그것을 이어받아 경영하기를 바랐다. 허지만 석범이는 그런일에는 맘이 없었던지 4년전에 표연히 집을 나가 별로 하는일없이 서울일판을 방황하다가 돌아온 것이다. 왼쪽으로부터 가리마를 곱게 갈라붙인 하이칼라머리, 짙은 콧수염.... 이 세상의 사람같지 않게 변모한 그의 출현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경아와 호기심을 자아냈다. 좌진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기이한 사나이를 향해 눈총을 놓는 사람도 있었다. 허지만 이 신식의 청년은 그쯤한건 벌써 각오했던바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오자바람으로 광호로인앞에 엎드려 인사부터 올리였다. 석범청년은 지난해의 11월에 을 내리니 깎았노라했다. 이에 늙은 시골훈장은 생질 보고 남이 하지 않는 짓을 구태여 너만할건뭐냐, 량친과 선조신령들 앞에는 무슨 낯으로 대하겠느냐며 조카를 나무랐다. 석범이는 머리태를 없애버린게 무슨 죄될일인가, 다른사람이야 리해하건말건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왜놈들의 참견으로 깎다만것이 비록 창피스럽긴하지만 조선사람도 오래잖아 머리를 다 깎게 되리라 했다. 그제야 광호선생은 더 나무리는 말이 없이 서울의 근황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석범이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새로 독립협회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독립협회의 발기로 영은문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웠다는 것을 말하면서 일본에도 로씨야에도 청나라에도 그 어느 나라에도 기탁하지 말고 내 힘으로 내 나라의 독립과 개화를 해보자는 것이 그분들의 생각인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광호선생은 생질의 말을 곰곰이 듣고나서 의례그래야지 하면서도 신심은 나지 않아서 뇌이였다. 이러면서 석범이는 게속해 지금 조선땅에 와서 행세군으로 나선 로씨야가 해군기지로 쓸 항구를 얻으려고 별의별수단을 다 쓰고있는 중이라 하곤 픽 웃더니 독립협회가 존재해있는 날까지는 로씨야가 그 어떤 묘한 수단을 쓴다해도 그대로놔두진 않을거라했다. 김선달로인이 짚이는데가 있는지 그더러 네가 바로 독립협회의 사람이여서 선동하러 온게 아니냐 했다. 석범이는 묵묵부답이더니 서울사람들은 벌써 개화가 되어가고있노라고 화제를 돌리였다. 김선달로인이 다시 입을 열고 아까말한 서재필이라면 갑신년에 김옥균과 같이 개화정변을 일으켰다가 해외로 망명간 사람이 아닌가고 물었다. 석범이는 바로 그렇다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황후를 잃은 상감께서 내 궁전은 버젓이 두고서도 남의 공관에 가서 셋방살이하면서 지금 매일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있노라했다. 그리곤 정신차려야지 넋없이 앉아있다간 반드시 남한테 집어삼키우고말리라고, 그러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목숨바쳐 싸워야한다고 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런데 김선달이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더러 말을 좀 삼가하라고 타일렀다, 젊은놈이 세월이 어지러운 때 까딱잘못했다가는 무슨액을 당할지 모른다면서. 석범이는 입가에 랭소를 머금은채 더 말이 없다가 늙은이 두분한테 인사말을 하곤 서당을 나갔다.   좌진이는 뭐든 좀 더 알고팟다. 그래서 이 자리로 그를 훌쩍보내는게 아쉬워 슬며시 따라나섰다. 쌀쌀한 밤추위도 잊고 따라가다가 그가 돌다리를 건너 모습이 언덕에 가리워질때까지 눈으로 바래였다. 물론 석범이는 자기를 이같이 바래주고있는 고마운 아이가 곧바로 몇해전에 작고한 참봉 김형규의 둘째아들이란것을 알고는 몰라보게 자란데에 깜짝 놀랐다. 갈산마을에 개화청년 석범이가 돌아와서 며칠후, 광호선생이 일이 있어 서당을 잠시 비우게되였다. 그가 집에 간 며칠간 좌진은 날마다 30여명의 제또래의 아이들을 적군과 아군으로 갈라 마을밖에 있는 솔밭이며 병풍바위를 돌아다니면서 진치기와 접전놀음으로 날을 보내였다. 아군은 10명으로 한국군(韓國軍)이라 이름달아 좌진이 자기가 거느리고 나머지의 20여명은 각각 청군(靑軍), 일본군(日本軍), 아라사군(로씨야군)이라 이름달아 꺽지손이 센 다른 아이들이 선발되여 거느리였다. 그네들은 각기 자그마한 헝겊쪼각으로 자기편을 나타내는 깃발을 만들어들었다. 일본군은 빨간기, 청나라군은 노란기, 아라사군은 새파란기, 조선군만은 그네들것보다 조금 큰 새하얀기였는데 거기에다는 한자(漢字)로 이라 써놓았다. 그리고 이라 쓴 기발이 하나 더 있었다. 겨울날치고는 유달리 따스한 어느날, 아이들이 열이 올라 한창 떠들썩하게 전쟁놀음을 하고있는 판인데 그네들의 앞에 장총, 단총, 활과 검으로 무장된 수십명의 의병대오가 불쑥 나타났다. 커다란 통영갓쓰고 두건치고 도포입고 행전치고 미투리를 신은 행색이 각각인 사람들, 선문도 없이 귀신같이 묵묵히 나타난 그네들은 짜장 오합지졸이라는 감을 주거니와 굶주림에 찌든 몰골들이 사나와보이였다. 그중에 그래도 검정풍안경쓰고 의포단장이 사치스러운 사나이가 풍채좋은 말을 타고있었는데 그가 필시 두령이였다. 아이들은 놀던 놀음을 그만두고 호기심이 끓는 눈으로 그네들을 바라보았다. 좌진이는 풍채좋은 말에 눈길이 갔다. 검정풍안경을 쓴 사나이는 가까이로 오더니 말을 잠깐 멈춰세우고 아이들손에 쥐여있는 놀음흉기를 보면서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전쟁놀음을 했노라고 벌떼같이 왕왕거렸다. 검정풍안경낀 사나이는 피식웃고나서 그렇다면 너희들의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알려주면서 뒤에 못박힌듯 서서 좀처럼 나서지 않고 있는 덩치큰 좌진이를 가리켰다. 사나이는 활을 멘 좌진이를 한참이나 쏘아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식 웃었다. 좌진은 말없이 손에 쥐고있던 기폭을 펼쳐보이였다. 사나이는 앙천대소하더니 좌진이보고 그래 그 글은 제절로 쓴거냐고 물었다. 좌진은 그를 노려볼뿐 대답이 없다가 기폭을 꾸겨서 주머니조끼에 넣어버렸다.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는 다시 말을 몰았다. 아이들도 그네들의 꽁무니에 묻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들어간 의병들이 객주집을 찾고있을 때 공교롭게도 석범청년이 그네들과 딱 마주쳤다. 이 호령소리에 놀란건 좌진이였다. 왜놈과 단발령을 반대해 일어난 의병일것이니 석범이가 머리깍은 까닥같은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죽여버릴 것이다. 그래서 좌진은 급히 달려가 그를 에워싸는 의병들의 앞을 막으며 웼쳤다.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는 두사람을 번갈아보더니만 독립협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형이라니 살려준다고했다. 이날밤 좌진이는 어머니한테 졸라댔다.      큰아들 경진이는 종래로 이러지 않았다. 덩치는 커도 나이는 어린놈인데 말을 타겠다니 원. 하지만 요구가 하도 곡진하니 어머니는 이윽토록 미간을 모으고있다가 입을 열었다. 타협이였다. 좌진이는 어머니한테 이제 좀 더 크거들랑 멋들어진 가라말이나 부루말을 사기로 약속받고 우선 집에 있는 말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이틑날. 구유에 여물을 담고있던 마구종 세채가 의아쩍어했다. 좌진은 지금 막 빈 구유에다 코를 비벼대고있는, 주둥이만 검고 온 몸뚱이는 새하얀 백설총이를 가르켰다. 좌진이가 말을 풀어 내가자 세채는 여물주던 삼태기를 놓고 달려나왔다. 고집세고 철닥서니없는 이 어린 도련님이 생마한테 채우기라도할까봐 걱정됐던거다. 담장밖까지 끌려나간 백설총이는 좌진의 손이 제 잔등이에 닿이자 대바람 요동쳤다. 좌진이는 들었는 둥 말았는 둥 고삐잡힌채 빙빙 돌아치면서 몸을 주지 않는 말을 욕도하고 살살 달래기도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잔등에 올라탔다. 백설총이는 기겁초풍하듯 놀래면서 앙칼지게 소리를 내지르기도하고 뒷발로 하늘을 차기도했다. 좌진이는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그렇지만 그놈이 하도 지랄스레 궁둥이뜀질을 해대는통에 끝내 허궁나가 떨어지고말았다. 그러면서도 고삐만은 단단히 잡은채 놓지 않았다. 세채는 황겁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좌진이는 온 얼굴이 땀벌창이 되어 씨근거리면서도 고삐를 놓지 않고 말과 싸웠다. 마구종 세채는 말릴방법이 없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301    장편전기 설한 (3) 댓글:  조회:3153  추천:1  2014-02-27
  3.  갈산마을의 서당을 맡을만한 선생이 아직 나서지를 않아서 좌진이는 마을애들의 대장이 되어 한동안 마음것 놀 수 있었다. 어느날, 놀음놀다 점심때 되어 집에 돌아온 좌진이는 문득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면 한동안 멍해졌다. 이따위말에 어머니는 펄쩍 놀라면서 낯색까지 변했다. 어머니는 말을 더 못하게 어성을 높이였다. 좌진이는 입을 다물고 벌씬 웃었다. 속으로 아무튼 친일주구와 악질관리놈을 잡아치우고 하니 의병은 나쁘지 않고 좋은거라고 되뇌이면서 초립동이 대장이 아니라 어느덧 다커서 수천의 의병대군을 거느리는 장수로 된 자신을 눈앞에 감미롭게 그리는 모양이다. 그이틑날. 늘 같이노는 서당학도 복돌이와 갑룡이가 먼저 데려와서 따라나섯던 좌진이는 자기네 집 담장대문가에서 서성거리고있는 웬 초면의 아이와 마주쳤다. 람루한 옷차림, 초췌한 몰골.... 첫눈에도 거지아이임이 분명했다. 거지아이는 옷잘입은 좌진이를 보자 그만 고개를 떨구면서 외면했다. (비라리를 온것 같은데....) 늘 맞다들이는 일인지라 좌진이는 얼핏 짐작하면서도 자기또래의 나이일텐데 신세 비참하게 된 그 아이가 각별히 측은하게 보여져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두말없이 좌진이는 그의 손을 글어 자기 방에다 넣고는 젊은녀종 삼월이를 불러 밥을 가져오게 했다. 거지아이는 도대체 며칠이나 굶어다녔는지 밥 한그릇과 농어지지미 한접시를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거지아이는 이름이 춘선인데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대답대신 울음을 터치였다. 춘선의 집은 본래 고부(古阜)에 있었다. 전라도 고부군은 동학당폭동이 발기된 곳이다. 춘선의 아버지역시 동학도였는데 손에 병기들고 폭동대오에 들어 전봉준을 따라다니다가 지난해의 5월에 전주에서 청나라의 군함과 운수선을 빌어 군대를 싣고 인천에서 장산포를 거쳐 쳐들어오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勛)의 손에 죽고말았다. 그래서 이제 9살밖에 안되는 춘선이는 과부로 된 어머니와 그냥 함게 있었는데 그 어머니마저 올여름부랑자의 손에 걸려들어 갑작스레 잃어졌다가 3일만에 시체로 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고아로 돼버린 춘선이는 지금의 이런 꼴로 변해버렸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의 외삼촌이 여기 충청도 어디에 잇다고 한다. 그런데 성명도 주소도 딱히 모르니 그가 이제 곧 외가를 찾아내리라는것도 막연했다. (정처없이 류리걸식하는 이 불쌍한 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가?.... ) 좌진이는 잠깐동안 생각을 굴려보고나서 우선 그를 자기 집에다 눌러놓고보기로 작심했다. 그새서 아사지경에 이르러 헤매이던 이 사고무친한 거지아이는 꿈에도 생각못했던 생면부지의 부자집에서 먹고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날이 며칠 못갔다. 좌진이 낮이면 그를 데리고 나가 함게 전쟁놀음을 놀다가 밤이 되면 남몰래 자기 방에다 재우군했는데 닷새가 지나서는 그만 어머니한테 발각되였던거다. 어머니는 이렇게 꾸짖었다. 그랫지만 어머니는 본래 성품이 순후한분인지라 거지아이의 가긍한 정상을 알고는 아들의 처사를 그르다고 더 나무리지 않았다. 좌진이는 어머니와 사정해 자기가 서당갈 때까지 거지아이를 집에 두고 동무할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그사이 거지아이 춘선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좌진이가 꾸지람듣는것 같아 그만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갈산마을 서당에 새 선생이 왔다. 이름이 김광호(金光浩)였는데 광천이였고 나이는 이미 환갑이 지난 늙은이였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거니와 학식도 퍼그나있었는데 특히는 력사를 잘알고있는 사람이였다. 어머니는 좌진이더러 새로오신 선생한테서 한문(漢文)을 잘배워 소양을 닦으라했다. 좌진은 어머니앞에서 꼭 그러리라 대답하고는 새로 온 광호선생을 찾아가 인사드리였다. 광호선생은 곱게드리는 좌진의 인사를 받고나서 김옥균이 너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좌진이는 그한테 김옥균은 바로 자기의 십일촌숙부로 된다고 대답을 올리였다. 광호선생은 침통한 기색을 지으면서 갑오년의 일을 회상하고는 고루한 수구파의 죄악을 저주했다. 어머니와 오촌숙부한테서 많이 들어서 김옥균이 어떠한 사람이란것을 너무나도 잘알고있었던 좌진은 이전의 선생 송로암과는 판판다르게 인식이 바르고 도량도 넓은 광호선생을 맘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우러르면서 이번에는 절대로 애를 먹이지 않고 착실히 배우리라했다. 이같이 맘먹으니 공부는 자연히 더 잘되여 이해의 겨울 석달동안 초권을 배워냈다. 광호선생은 송로암처럼 조폭하게 회초리로 학동을 길들이면서 우격다짐으로 암기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광호선생은 학동들보고 지금은 비록 나이 어리지만 장래는 나라의 동량지재로 될 사람들이니 엎드려 책만 읽지 말고 국가의 대사도 제대로 알아두라했다. 좌진이는 그래서 좋았다. 이전에야 어디. 광호선생은 갈산시골의 서당들에게 민비(閔妃)가 살해되였다면서 방금발생한 은 오래전부터 침략야심을 품어온 일본이 한짓이라 알려주었다. 민비는 원래 일본에 투항하여 1876년부터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후에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도록 매국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근 20년동안이나 일본에 아부굴종하여오던 민비는 1894년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침공으로 자기의 지배권이 실제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번에는 로씨야를 등에 업었다. 이로하여 일본은 그를 없새버릴 마음을 먹었다. 일본은 1895년, 이해의 여름에 저들의 주구 박영효를 시켜 민비를 살해하도록하였다. 그런데 박영효의 모략은 7월 6일에 그만 탄로되여 그자신이 체포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모략사건이 드러나면 불리하길래 그를 감쪽같이 일본에 빼돌렸다. 그리곤 자기들이 직접 손쓰기로 작정했다.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4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밑에 일본불량배 60여명, 일본군대 50여명, 일본경찰대 30여명,훈련대 1000여명으로 무어진 강도단이 왕궁을 습격, 민비는 일본살인악당의 칼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들은 그의 시체마저 없애치울목적으로 왕궁부근의 수림속에 날라다가 장작더미우에 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 아예 재가루로 만들어버리였다. 민비를 학살한 후 미우라는 공포속에 떨고있는 국왕앞에 나타나 리조봉건정부의 내각에서 친로파를 축출하고 일본이 제기하는 친일파들을 관리로 임명하며 또한 각국공사가 면담을 요구하더라도 그에 절대 응하지 말아야한다고 국왕을 강박하였다. 그 목적은 내외의 여론을 봉쇄하고 조선에 대한 저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키위한 것이였다. 허지만 죄행은 백일하에 드러나 조선인민들의 강렬한 항의와 국제여론의 규탄을 야기시켰다. 이에 일본은 하는수 없이 11월 15일(음력 9월 29일), 민비학살에 돌격대로 나선 미우라를 공사직에서 해임시킴과 동시에 그 관계자들을 한다는 명의로 일본에 소환, 히로시마감옥에 하는 연극을 꾸미곤 민비학살시 현장에 있었던 군부협판 리주희와 일본공사관에 있으면서 흉게를 알고있던 박선 등에 애매한 죄를 뒤집어씌워 12월 28일에 학살했다. 좌진이와 그의 학동들이 선생께 들은 의 진짜내막은 이러했다. 이듬해의 1월에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래서 민심이란 조금도 가라앉을 사이없이 그냥 황황했다. 허지만 갈산마을 서당의 학동들은 광호선생의 유도하에 들뜨지 않고 자기가 할 공부를 착실하게 해나갔다. 봄이 돌아왔다. 갈산마을뒤 삼불산에는 아름다운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해토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있는 어느날 광호선생은 낯수업을 끝내면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에 대답하는 학동이라곤 없었다. 선생은 알려주었다. 다른아이들은 속으로만 그저 반가와할 뿐 감히 응대를 못하는데 좌진이가 이렇게 우쭐 나섰다. 늙은 훈장은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좌진이가 어디한번 앞장서보라했다. 그리고는 가는 날자와 갖고갈 음식준비 등에 대해서 말했다. 좌진은 선생님이 잡수실 술은 자기가 준비하겠노라 자진해서 선생님의 귀여움을 다시한번 받았다. 약속한 삼월 보름날이돌아왔다. 서당학도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즐거웁게 산록이 한창 물들고있는 삼불산을 올랐다. 서당집주인 김선달이도 선생을 동반해 삼불산의 경치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운운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정오가 가까웠고 일행은 소요암이라는 암자에 이르렀다. 경치좋은 곳이였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서 그네들은 주지화상의 안내로 먼저 법당과 칠성각을 구경하고나서 절뒤에 있는 펑퍼짐한 바위우에다 정심상을 차리였다. 여기가 삼불산 여러봉우리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멀리 아물거리는 서해바다를 능히 볼수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나서 활동이 시작되였다. 선생은 이상 배우는 상급생들과 몽학짜리의 하급생 이렇게 두패로 나누어 첫패 상급생들에게는 전춘시의 운자를 내주어 각기 시 한수씩 지어바치게 하고 둘째패하급생들은 근처로 돌아다니면서 놀다오라했다. 아직 《사서》를 배우지 않은 좌진이는 갑룡이와 영철이를 불러서 데리고 슬그머니 법당뒤의 칠성각으로 향했다. 거기에 아까부터 속이 쑤셔나도록 다시보고싶던 500라한이 있었다. 그래서 칠성각에 오른 그는 파랗게 칠한 쌍창문을 와락열어 젖히고 성큼 뒤여들었다. 라한들은 참으로 우습고도 재미있는 모양들이였다. 몸뚱이 새노란 부처님이 점잖게 앉아있는 옆에 머리를 빡빡 깎은 조그마한 놈들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어떤 놈은 상을 찡그리기도하고 어떤 놈은 히죽이죽 웃기도하고 어떤놈은 옆의놈을 손가락질하며 너털웃음을 웃기도하고 어떤놈은 또 무엇엔가 성내기도하고.... 오도방정을 떨고있는 그 꼴들이야말로 각각이였다.  이쪽 두 아이는 찔끔 놀라면서 그러다가 중이 알면 어쩌겠느냐했다. 했건만 좌진이는 알게뭐냐, 보고서 도로 갖다놓으면 그만인걸 하면서 엉금엉금 기어가 그 라한을 닁큼쥐여 두루마기밑에 숨겨가지고 나와버렸다. 그들은 절의 왼편에 있는 우물가로 갔다. 좌진은 중얼거리면서 라한의 따귀를 갈겼다. 따귀를 맞은 라한님은 그만 깨여지고말았다. 그것은 속이 텅빈 석고상이였다. 좌진은 네놈이 이렇게 속없는 놈이니까 그모양이지 하며 한매 더 갈기였다. 그 서슬에 이미 깨여진 라한님은 쪼각이 더났다. 갑룡이와 영철이는 일을 저질렀다고, 이제 중한테 붇들리면 혼구멍나리라고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달아나버렸다. 혼자남은 좌진이는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깨여진 쪼각들을 주어서 슬그머니 우물에 처넣어버렸다. 그리고나서 보니 우물가에 활짝 핀 영산홍에 커다란 호랑나비가 있는게 눈에 띄였다. 좌진이는 그놈을 잡으려다가 그만 꽃에 앉아 굴을 빨고있던 벌을 건드려놓아서 단단히 쏘이고말았다. 쏘인자리는 몹시 동통이 나면서 단통 부어나기시작했다. 분통이 터진 좌진이는 그놈을 잡아치우려했다. 그런데 벌은 잡히우지 않고 붕붕 다른데로 날아갔다. 그놈을 뒤쫓던 좌진이는 절가까이 낭떠러지에 흙둥구미같은 벌통 하나가 붙어있는것을 발견했다. 좌진은 다시 이를 악물고 벌통을 떠받아 깨뜨려버리면서 마구문질러놓았다. 졸지에 험한 재앙을 당한 벌들은 혼비백산하여 좌충우돌했다. 그럴수록 좌진이는 결사적으로 해내서 끝내 수백마리의 벌들을 죽여치웠다. 그러노라니 머리에는 온통 죽어 뭉개진 벌이 게발리였고 몸도 기진맥진했다.   한편 이켠에서는 놀이가 끝나 이젠 산을 내려갈 때가 되었건만 좌진이가 그냥 보이지 않는지라 마침내는 이거 일나지 않았나고 찾기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드디여 벼랑밑에서 낯이 온통 부어서 불성모양이 된채 쓰러져있는 좌진이를 찾아냈다. 과연 넋담덜어질 일이였다. 혹시 죽지나 않았나고 보니 숨은 붙어있었고 맥도 여전했다. 광호선생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나서 중더러 랭수를 가져오라해서 얼굴에 쳐놓았다. 좌진은 그제야 정신차리며 눈을 떳다. 선생은 소생한 제자를 보자 기뻐했고 중은 울상이 돼갖고 라한님 하나를 어쨌느냐했다. 좌진이는 태연해져 그놈이 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히죽거리는게 꼴보기싫어 부셔버렸노라고, 값을 드릴테니 그걸 받으러 오라고 했다. 중은 이 기이한 소년에 대한 까닭모를 무서움이 솟구치면서 노여움이 사라져 훗날 네가 잘되거든 라한님을 한분 만들어달라 하곤 나무아미타불을 뇌이였다. 이날 광호선생이 업어주마하는것도 마다하고 집에 돌아온 좌진이는 꼬박 열흘간이나 누워 끙끙 앓았다.
300    장편전기 설한 (2) 댓글:  조회:3003  추천:1  2014-02-26
  2. 조선은 거듭되는 외교적실패와 내정의 부패로 말미암아 재난이 그칠새없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좌진이 태여나던 그해만도 전주란에 뒤이어 정선군민이 란을 일으켰고 이듬해는 함창에서도 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 이듬해에는 제주도에서와 고성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평안도지방에서는 10여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굶주림을 못이겨 만주로 도망가버렸으며 평산민들은 향리(鄕吏)의 포학을 진정(陳情)했다. 한즉 안토중천(安土重遷)이니 안거락업(安居樂業)이니 하는 미사(美辭)는 아득한 옛말에서나 바랄수 있는 꿈처럼 되어버렸는데 불난집에 도적이라 게다가 청나라의 도적들마저 국경을 넘어와 함경도 갑산, 단천 등지에서 로략질을 거듭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러고도 국내에서의 란은 그냥 꼬리를 물어 함흥, 덕원에서도 란이요 황간, 청풍, 개성, 중화에서도 란이였는데 인천부(仁川府)의 아전과 백성 수백명은 작당하여 관청을 들입다치기까지 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조선땅이 그야말로 란장판이 되어가고있었다. 이러한 때이던 1893년 봄, 이제 겨우 5살밖에 안되는 좌진이는 글을 배우려고 서당에 입학하였다. 아직 학교가 서지 못한 개화전의 시골서당은 꼴불견이였다. 뉘집의 사랑채를 빌려서 뿌관이나 탕건을 쓴 선생이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으면 아이들은 그앞에 무릎꿇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것이 고작이였다. 갈산의 서당은 마을에서 감나무집이라 불리워지는 김선달이네 커다란 두칸의 사랑방이였는데 좌진이는 바로 그 서당에 공부하러 다녔다. 그 서당의 선생은 이름이 송로암(宋老岩)이요 아직은 나이 50전의 사나이였다. 하건만 이상스레도 자기 호를 그렇게 지어 부르면서 자기를 송시렬(宋時烈)의 자손이라 했다. 송시렬인즉 자가 영보(英甫)고 호는 우암(尤庵)인데 서인(西人)의 거두로 남인(南人)과 론쟁하고 후에는 로논(老論)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숙종 15년에 세자 책봉(冊封)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賜死)된 조선왕조때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다. 200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인걸의 넋은 살아있어서 우암 송시렬이라하면 지금도 모르는이가 별반없지만 자기를 그의 후손이라 스스로 자랑하고 뽐내는 서당선생은 명인의 후손답지 못하게 너무나 견식이 좁고 고루한 선비였다. 어느날 좌진이는 술마시고 거나히 취해 학생들앞에서 혀꼬부랑소리 하는 선생을 아니꼽게 보고와서 불만스러워했다. 다심한 어머니는 아들의 고발을 듣고나서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쉬였다. 이제 배움의 길에 들어선지 한해되는 자식이 선생과 쉬틀려 맘을 달리먹고 학업을 중도이페(中途而廢)할가봐서였다. 더구나 좌진이네 집안에는 어쩌지 못할 비운까지 덮치였다. 이해의 2월에 일본에 망명했던 그의 십일촌숙부 김옥균이 상해로 갔다가 거기서 자객의 손에 살해되였다. 3월에는 그의 시체마저 양화진(楊花津)에 갖다가 걸어놓았다. 육시처참까지 당하다니 실로 구곡간장이 끊어질 절통한 일이였다. 지금 살아있는 그의 일가친척은 모두 비분에 잠겨 하수인과 흉모를 획책한 폭군을 그지없이 증오하고 저주하고있었다. 6살밖에 안되는 좌진이 역시. 오촌숙부는 엄한 눈길로 그를 단속했다. 나어린 좌진이까지 벼르는,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洪鍾宇)는 수구파(守舊派)의 앞잡이로서 프랑스류학을 하고 돌아와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거기서 그런 잔인한 짓을 했던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겨우 6살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좌진이가 덩치는 벌서 그 나이를 곱먹은 아이들만큼 크거니와 용력역시 남달리 비범해가고있음에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또 그가 일시적인 감정충동을 못이겨 어른 몰래 어떤 우둔한짓을 할지도몰라 마음조이기도했다. 이때는 참으로 아이들의 마음까지도 황황케하는 소란스런 세월이였다. 이해의 2월 15일, 동학당접주(接主)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貪虐)에 항거하여 란을 일으키니 그 진동이 여느때보다 퍽 컷다. (동학당은 동학도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861년에 생겨난 조선의 고유한 종교로서 통치계급을 반대하고 유교를 반대하며 외래의 침략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비밀결사였다.) 폭동군은 전주감영에서와 리조정부에서 보낸 관군을 련속격파하고 백성들을 압박착취하던 통치기관인 관청들을 모조리 파괴소각하였고 악질관리와 량반들을 처단하였으며 감옥을 마스고 죄없이 감금당했던 백성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면서 백성탄압과 억압에 써먹었던 문건들을 불태워버리였고 전라도의 전부지역과 도소재지인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압박받고 천대받던 굶주린 백성들은 동학란에 갈채를 보내면서 지지해나섰다. 3월에는 좌진의 고향이 있는 충청도에서도 백성들이 전라도에서처럼 이 동학당의 폭동에 호응하여 는 구호를 웨치면서 떨쳐나섰다. 폭동군의 기세가 높아지니 대대로 내려온 량반집이요 문벌이 높았던 좌진이네가 자연히 겁을 집어먹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폭동군은 의 기치를 든 것이고 겸해 노린것은 탐학을 일삼아온 악질관리와 그따위량반이였지 좌진이네 같은 집은 아니였다. 정부군에 의해 눌리운것 같으던 동학당란이 4월에 이르러 재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안핵사 리용태의 포학에 항거한것이였다. 그런데 무능한 조정의 비겁불의한 처사로 인하여 그것이 마침내는 중, 일량국간의 전쟁을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교활한 일본은 기회만 엿보아오던 참이라 조선에 출병할 음모를 가지고 불량패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소위 이란것을 조직해 동학당을 협력하면서 공공연히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개입했다. 동학당의 진공에 의해 서울이 위급하게 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증원병을 청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군이 조선에 출병했는데 에 의하면 중, 일 량국이 만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에는 사전에 반드시 상대방에 조회하기로 되었다. 하니까 일본은 구실이 좋아 더 많은 군대를 증파했던 것이다. 좌진이는 서당에만 가면 책속에 파묻혀 세상이 돌아가는걸 알수없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소식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종들까지 수근대를 소리를 늘 듣군했다. 그것은 청나라군대가 아산에 왔다느니 일본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느니 동학당란이 평정됐다느니 청나라해군과 일본해군이 아산항부근에서 싸웠다느니 대동구바다에서 싸웠다느니 륙군들이 환성에서  맞붙어 싸웠다느니 평양에서 맞붙어 싸웠다느니 하는 등등이였다.   6월에 일본공사 오도리 게이스께(大烏圭介)는 군대를 인솔하고 조선왕궁에 돌입하여 근위병의 무기를 해제한 후 조선왕 리희(李熙)를 체포하고 대원군(大院君)으로 하여금 잠시 국정을 맡아 보게 하고는 집정 민영준(閔泳駿)을 임자도(荏子島)에 추방하고 중국에 접근하여 일본을 반대했던 관리들을 학살했다. 그뒤를 이어 일본군대는 풍도(豊島)에서 중국군함을 격침시켰다. 이로인하여 중일전쟁은 드디여 터졌다. 좌진은 이러한 정황을 후에 오촌숙부한테서 들어 알게 되었다. 오촌숙부 창규는 캐묻기를 좋아하는 조카를 앞에 놓고 이렇게 일, 청 두나라를 몰잡아 증오하기도하고 저주하기도 했다. 그는 또 어린 조카보고 가슴깊이 새겨두라면서 선조 25년의 임진란때 일본이 조선반도를 유린하여 이루 혜아릴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일과 이번에 를 왔다는 청나라군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산에서의 전투가 일어나기 며칠전에 청나라의 리홍장은 광서황제의 지시를 받고 위여귀(衛汝貴), 마옥권(馬玉昆), 좌보귀(左寶貴), 풍승아(豊升阿) 이 네사람에게 명령하여 각각 자기 부대를 인솔하여 조선의 옛서울인 평양성에 주둔하게하였다. 이때 조선인민들은 대다수가 청나라에 호감을 가지고 일본을 배척하는 때이라 대부대의 중국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주식(酒食)을 준비하여 그들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민들은 만청정부의 군대가 규률이 문란하리라고는 생각지도못했다. 청나라군대는 국경을 넘어서자 백성의 가구(家具)를 파괴하고 주택에 불을 지르며 재산을 략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며 인민을 학살하고 장정(壯丁)을 강제로 랍치하는 등 온갖만행을 다 하였으므로 조선인민들은 매우 실망하였다. 그 정황을 리홍장은 에 아래와같이 밝히였다.     집에 돌아온 좌진이 어머니앞에서 주먹을 쥐고 오촌숙부한테서 들은 소리를 외웠더니 어머니 역시 몹시 격분해하면서 한숨짓는것이였다. 이에 좌진은 발끈 어성을 높혔다. 어찌 6살먹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 하겠는가. 어머니는 자못 경탄의 눈으로 아들을 다시보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해의 가을, 조선 각지에서 동학도들이 다시 봉기를 했다. 그러나 얼마못가서 관군에 의해 탄압되고 두령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였다가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판결받아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리고 1월에 이르러서는 청일전쟁도 끝났으며 이 체결되고 청나라가 일본에 굴복하고말았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그로하여 큰 장애란없이 좌진이는 좌진이대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는 놀음에 팔려 가끔 무단결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유언과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당공부를 견지해서 놀랄만치 첫 두해동안에 벌써 와 을 배웠다. 그래서 남한테 형 경진이보다 더 총명하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그런데 바로 1895년 이해의 가을에 7살나는 좌진이는 끝내 서당선생을 닦엽혀서 갈산마을은 물론 온 홍성고을까지 들성케하는 야단이 한바탕 일어나고말았다. 갈산마을의 윤생원로인이 초상난 날이다. 본래 술망태나답지 않은 송로암선생은 술썰썰이나던차 장사집에서 모시는지라 강의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리로 가면서 학동들보고 어데 가지 말고 복습을 잘하라고 단단히 을러놓았다. 그런데 선생의 회초리에 겁을 먹고 지내오던 아이들이 선생이 없어지자말자 풀어놓은 망아지같이 얼싸좋다고 란장판을 벌렸다. 그네들이 뜀뛰기도하고 씨름도하면서 한창 제멋대로 복새판을 피우는데 담장밖에서 상여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치던 장난을 뚝 그쳤다. 한애가 선줄을 끌었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따라서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다. 상여는 마을밖을 나갔고 마을밖을 나간 상여는 그냥 구슬픈 상여소리에 실리여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거기에 유혹되여 어린 학동들은 그만 시간가는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후, 아이들은 비로서 제정신이 들었다. 땋아늘인 머리채를 철렁거리며 달려와보니 그새 선생은 먼저돌아와 거기 얌전하게 남앗던 아이들을 시켜 물푸레나무회초리를 한다발이나해놓고는 낯에 독살을 피우면서 기다리고있는게 아닌가. 아뿔싸, 큰일났다! 규률위반자에겐 엄벌이 첩경인지라 매사태가 터져 애들은 종아리에 피멍이 드는 변을 당하고야말았다. 그러나 좌진이만은 그따위변을 면했다. 선생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슬그머니 뺑소니를 쳤던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길로 그냥 집으로 갈수는 없었던 좌진이는 매질이 끝나고 서당에서 글읽는 소리 한창 날 때에야 슬그머니 들어갔다.  선생은 도끼눈으로 찍어박듯 쏘아보면서 을러멧다. 좌진이는 입을 꾹 다문채 제자리에 앉아 책만 펼쳤다. 좌진의 숨소리도 낮지는 않았다. 선생이 회초리를 들면 그도 가만있지 않을 잡도리였다. 요전날 아침 숙제한 글을 읽어바치다 욕먹고 매맞은 분이 되다시 치달아올랐던거다. 그날 오래 꿇어앉아서 저려나는 발을 개였더니 선생은 이라면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한매 갈겼다. 제 부모한테서도 그렇게는 맞아못본 매였다. 선생은 분이 났지만 웬 일인지 성깔을 더 부리지 않고 래일 매맞을 준비나 단단히 하라 했다. (흥. 매를 맞아? 이제 또?) 좌진은 속으로 코방귀뀌였다. 송로암선생은 방안에다 초상집에서 얻어먹고 온 역한 술낸새를 물씬 풍기였다. 게트림한 끝에 선하품을 하더니 아랫목에 풍침을 베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는 인츰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하더니 잠에 골아떨어졌다. 한데도 회초리맛을 본 애들은 지독스런 선생이 혹시 능구렝이같이 딴청을 쓰지나 않나해서 감히 떠들지 못하고 글소리를 높이였다. 이틑날아침에 세수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머리에 탕건을 쓴 송로암선생은 늘 보던 을 읽자고 펼쳤다가 거기에 난데없는 이라 쓴 조그만 종이쪽지가 들어있는걸 발견했다. 기구멍이 딱 막힐 일이였다. 송로암선생은 자기눈을 의심하고 다시보았지만 그것은 분명 자기 송로암을 죽으라는 글이였다. 이제 일곱 살먹은 어린학동 김좌진의 필적임에도 틀림없고. 어찌된 연고인지를 명백히 깨달은 송로암은 자리에서 벌컥 일어났다가 털썩 주저앉고말았다. 학동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서당에 왔다. 그런데 기다리는 좌진이만은 오지 않고있었다. 느즈막해서 그의 집 종 춘봉의 막내아들이 전날 좌진이 선생한테서 빌려갔던 을 갖고 선생앞에 나타났다. 자기는 오지 않고 종아이에게 쥐여 돌려주는 판이였다. 헌데 그 책속에도 이라고 쓴 종이장이 끼여있을줄이야. 과연 울화통이 터질 일이였다. 얼굴이 단통 지지벌개진 송로암은 씩씩 황소숨을 톱다가 홰대에서 도포를 내려입으면서 호통뺏다. 그래서 학부형들이 서당방에 많이 모였는데 송로암은 이 일을 말하고는 위인이 불출이다보니 제자한테서 이따위 봉변을 당하는 모양이라느니 나이 50을 먹도록 훈장노릇해왔지만 이렇게 해괴한 일은 난생처음본다느니 하면서 자기는 있을멋이 더 없어서 당장 가겠노라했다. 사태가 이쯤되고보니 썩 미안하게 된것은 기별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한 좌진의 오촌숙부 창규였다. 그는 고약한 조카를 단단히 가르쳐 다시는 그따위짓을 못하게 할테니 노여움을 참아달라고 선생을 달래는 한편 큰조카 경진이를 시켜 냉큼 좌진이를 불러오라했다. 그런데 심부름을 갔던 경진이는 돌아와 좌진이는 집에 없다고, 자기보다 아침에 일찍이 나왔는데 어데 갔는지 모르겠노라 했다. 송로암은 이따위 가시돋힌 말을 내뱉어놓고 갈산의 서당을 떠나고말았다. 저기 동네앞 솔무더기가의 병풍바위에서 옥색저고리에 밤빛바지 입은 좌진이는 10여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군대놀음을 놀다가 왁짝떠들면서 노새타고 가는 선생을 싱긋이 눈바램했다. 저녁때 어머니가 집에 들어온 좌진이를 꾸짖으니 맞받아 뱉는 아들의 대답역시 당당했다.             
299    장편전기 설한(1) 댓글:  조회:2951  추천:2  2014-02-23
  1.    충청도 홍성땅. 북으로는 삼불산(三佛山), 남으로는 청계천 맑은 물을 끼고있는 마을ㅡ 갈산(葛山). 월선정(月仙亭)의 련못에 살얼음지던 동지달 스므나흔날, 태고연한 이 마을에서 고고성을 터뜨리면서 김좌진은 인간세상에 태여났다. 그때 김좌진의 아버지 형구씨는 나이 26살이였고 어머니 리씨는 27살이였으며 좌진의 손우로는 9살나는 누님 옥출(玉出)이와 5살된 형 경진(敬鎭)이가 있었다. 좌진의 아버지는 그때 고종조의 참봉으로 지내면서 80여칸의 널다란 기와집에 남녀종만도 50여명을 부리면서 살고있었으니 갈산뿐아니라 온 홍성고을안에서도 뜨르르한 세력가였다. 그의 가문을 보면 실로 오랜 량반가문이요 명문거족이였다. 저 멀리로는 조선왕조 인조(仁祖) 11년(1637년) 12월, 청나라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것을 요구함에 척화론(斥和論)의 주장에 따라 이를 배격하자 청태종(淸太宗)이 직접 20만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 해서 일어났던 때에 태자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가 그 섬이 적군에게 점령되니 담뱃불로 화약고에 불을 달아 어린 손자와 함께 폭사한 력사인물 선원 김상용(仙源金尙容)이 좌진의 11대조요, 가까이로는 5년전이던 고종 21년(1884년) 음력 10월에 개화당(開化黨)사람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과 손잡고 사대당(事大黨)인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정부를 세우고저 을 주모했던 김옥균(金玉均)이 바로 좌진의 십일촌숙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좌진이야말로 애국자의 피를 이어받고 태여난 그 김씨가문의 후예라 하겠다.   갓난애가 어찌나 컷던지 보는사람마다 놀래면서 이 집에서 장수가 났다고 축복했다. 그바람에 부모들은 퍽 기뻐했다. 비록 막연하긴 했지만도 그네들의 기대는 진실로 이러했다, 너무나도 약세하여 이제는 남의 침탈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라를 구원할만한 영웅이 자기 가문에서 꼭 나와줫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세월이야 어떻든 아이는 무사히 잘 자랐다. 좌진은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천성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4대째 내려오는 종이 있었는데 이름은 춘봉이라 불렀다. 춘봉이는 손재간있어 통이며 칼같은것을 잘 고쳤거니와 멍석도 잘 틀었다. 말하자면 이 집에서는 둘도없는 기술자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어머니를 김씨네는 종할미라했는데 맘씨 좋고 어리무던한 그녀가 좌진이를 끔찍이 귀여워하면서 거의 업어자래우다싶이 했다. 한데 유년의 좌진이는 곱게 업혀있을 념은 안하고 가끔 엉덩뜀질을 하면서 종할미더러 망아지 우는 소리를 내라고 닦달을 놓군 했다. 그러면 종할미는 과연 망아지우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뛰는 양 흉내라도 내군 했다. 좌진이가 하도그래 그의 아버지는 이 둘째아들이 말을 번지기 시작할 때 벌써 크거들랑 좋은 말을 사주마고 약속한바 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되였다. 이러구러 유년 김좌진이는 무병하게 잘 자라건만 아버지 김참봉은 시름시름 앓기시작한 것이 병이 고황에 들어 셋째아들 동진(東鎭)이까지 보고나서 자리에 누운후로는 다시 잃어나지를 못했던거다. 그때 좌진이는 4살이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그를 자기 머리맡에 불러 앉혀놓고 물었다. 이것이 본래 어린애였던 그한테는 어려운 질문이였다. 그런데 좌진이는 아버지의 충혈된 눈을 말끄러미 보다가 대답하는것이였다. 너무도 뜻밖인지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눈이 둥그래졌다. 이제 4살먹은 애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올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러나 좌진이가 아무렇게나 허튼소리를 줴친것 같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아버지가 어머니보고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더러운 민씨일족이 정승, 판서질을 도맡아하니 기막힐 일이라며 욕하는 소리를 그가 들은것이다. 그래서 정승, 판서가 어떤것인지는 몰라도 그걸 자기가 빼앗아 가지리라 맘을 먹은거고 그렇게 말하면 앓고계시는 아버지를 위로할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되려 낯색을 흐리우고 꼭마치 다 자라 의식이 튼 아이에게 하듯이 간곡히 부탁했다. 좌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다. 좌진이는 의연히 빙그레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이로부터 이틀후에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은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좌진에게 동생 동진이가 생겨 백날만에.  아버지는 돌아갔다. 그까짓 참봉벼슬쯤이 탐탁할리 없지만 임금이 하사한 은총이요 내 나라의 벼슬이니 굳이 사양하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살아오시던 아버지, 가끔 서울갔다가는 눈꼴사나운 민씨의 세도와 그자들의 타락함을 보고서는 이를 갈며 돌아오시군 하셨던 아버지, 버젓한 문벌에 떳떳한 혈통을 가졌건만 자신에게는 힘도 능력도 없어 속수무책이 되었던 아버지, 벼락출세하여 판을 치면서 선조가 물려준 내 나라를 말아먹는 망나니같은 녀석들을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과 억울함에 지쳐서 나중에는 병까지 얻었던 아버지는 망명간 옥균형을 그리다가 풀지 못한 한을 한가슴에 안은채 저 세상으로 가고말았다. 눈물겨울 지경으로 막연한 희망을 제 자식에게나마 걸어놓고 조용히 저승으로 가버렸다. 속담에 큰집은 기울어져도 삼년 간다 했다. 그래선지 50여명의 가노가 모여있는 좌진이네 집은 의연히 북적거렸고 마을안의 번성한 일가친척들도 변함이 없었다. 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현상이였지 주인을 잃은 집안은 허전하고 쓸쓸해짐을 어쩔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지겹게된것은 이제 30살인 미망인 리씨였다. 그녀도 량반집 딸이라 부모들께서 인생수양을 쌓았어도 너무나 일찍이 받아들인 불행이라 기구한 제 신세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북받치는 서러움을 누를수 없어 거의 매일이다싶히 혼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나어린 좌진이는 그러는 어머니가 민망스러웠던지 어머니가 젖먹이 동생을 안고 침묵에 잡겨 한숨짓거나 소리없이 눈물떨굴 때면 하고 묻거나 그저 기분없이 옆에서 우두커니 지켜보다가는 발길로 문을 걷어차고는 밖으로 뛰여나가군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지꿎게 캐물었다. 어머니는 이러곤 다시 흐르는 눈물을 훔치였다. 어린 좌진이로서는 종시 모를 일이라 눈만 더 크게 떠가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저승이라는것이 어디냐, 서울이 아니냐고. 서울도 아니고 이 땅도 아니면 그래 룡이 올라가려다가 못 올라가고 떨어졌다는 저 하늘이냐고. 자식이 너무나도 천진함에 어머니는 더 응대를 못하고 웃음만 지었다. 그랬더니 좌진이도 따라웃고는 애기의 이름을 복동이라지으면 어떨가, 아버지 안오셔도 엄마 있으니 우리 애긴 복동이로 되잖느냐고 얼뚱한 말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자기도 이름을 판서라 고치자했는데 아버지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 그만두련다 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이였다. 귀여운 이 아들을 어찌 불쌍하게 키우랴. 어머니 리씨녀인은 맘먹고 잘키우리라 했다. 저것이 사람이 되는것을 보기까지는 천지가 뒤집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그런데 웬 일일가. 이날 놀러나간 좌진이가 날이 저물었지만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잃어졌다고 온 집안이 찾으러 나섰더니 어린 좌진이는 월선지(月仙池)련못가 바위돌우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것이였다. 달밝은 밤 어린아이는 고요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다가는 고개를 꺾고 련못을 들여다보고 련못을 들여다보다가는 다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군 했다. 그러는 그를 삼월이라는 녀종이 둘쳐업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카가 잃어졌다는 소리에 놀래여 달려왔던 오촌숙부 창규는 그를 보자마자 너 이놈 어디가서 집안어른들을 걱정케 만드느뇨 하고 노해서 꾸짖었다. 했건만도 어린 좌진이는 입을 꼭 다문채 아무 대꾸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의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민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물어보았다. 아이는 마침내 입을 열곤 고개를 떨어뜨렸다. 젊은 과부 리씨는 그만 아이를 끌어안고 오렬을 터뜨리고말았다.   좌진이는 자라면서 점점 장난이 심해져 날만 밝으면 놀음이였다. 마을의 애들을 휘몰고다니면서 온 동네가 들썽하게 놀아댔다. 군대놀음, 씨름하기, 싸움질.... 돌팔매질해서 나무에 앉은 새를 잡았고, 그러다가 남의 집 장독을 깨기도하고. 제집의 종아이들과 말타기놀음도놀았고 방금해입은 하얀 옷을 흙투성이되게 하거나 찢을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종아리를 맞아가며 꾸중을 들었다. 그럴 때면 되려 어머니보고 때리면 누가 아파할줄 아는가 엄마 손바닥만아프지 하고 말했다. 자기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꼭 장수가되리라고 늘 외우군하는 좌진이였다.   월선지. 이 고요한 련못이 생겨서 허구한 세월. 흰옷입은 이곳 갈산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비껴담은건 얼마며 새겨담은 추억은 또한 그 얼마랴. 헌데 룡이 하늘로 오르다 못오르고 떨어졌다는 전설을 갖고있으니 섭섭한 일이였다. 좌진이는 가끔 이러군 해서 어른들의 찬탄을 받았다.                    
298    장편전기 설한(雪恨) 댓글:  조회:2371  추천:1  2014-02-23
  여지껏 순옥이라는 가명으로 불리워온 그녀의 본명은 김강석(金剛石), 애명은 산조(山鳥). 한얼님이 보살펴주는 명이였던지 여지껏 세파의 와중에 부대끼면서도 스러지지 않고 지겹게 살아왔다. 너무도 기구한 운명이다. 아직도 제 생일조차 모르는 그녀는 자기가 바로 김좌진의 딸이라는 것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60여성상이나 숨어살아왔으니 가슴에 맺힌 설음이 얼마며 말못할 한인들 또 얼마랴.   김좌진(金佐鎭)ㅡ 한때는 일본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광활한 만주땅을 종횡무진으로 줄음잡았던 그, 드높았던 성망과 더불어 떨친 위훈도 혁혁했건만 어이하여 세월이 바뀌더니 이 땅에서는 이름조차 망각되였더냐? 애석타, 거룩한 인걸의 넋이 침묵속에 묻혀있으니. 력사는 바르건만 그것이 불손한자의 손에 잡혀 롱락되면 귀신도 웃고 울리는 희비극이 생기거니 이제는 바로잡을 때가 된것 같다.   김좌진은 어떤 사람인가? 호는 백야(白冶), 본관은 안동(安東), 형규(衡奎)의 아들. 1889년에 홍성에서 태여난 그는 1930년 한때 부하였다가 후에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박상실(朴尙實)의 손에 암살당했다. 향년 42살.   명문가의 후예로 15살 때 벌써 50여명의 가노를 전부 해방시키고 2,000여석이나 추수하던 전답을 전부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해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섯던 선구자, 체결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코저 조선일판을 누비다가 왜놈경찰에게 체포되여 세 번이나 옥고를 치루어야만했던 우국우민의 애국자, 전해에 만주로 망명해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장령이 되었던 백야 김좌진장군은 조선이 낳은 희유의 장사였고 걸출한 독립운동가여으며 항일영웅이였다!                                                                                               저자   김송죽                                        
297    장편전기 설한 댓글:  조회:3131  추천:4  2014-02-19
     장편전기 설한(雪恨)        머리글   장군의 구광은 영령을 깊숙이 간직하고 타향천리 이름없는 산기슭에서 력사의 공정을 묵묵히 기다리면서 춘하추동 세월의 이끼를 덮으며 어언 60여년을 보냈다. 온 조선이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여 민족수난의 비운속에 질식하고 있을 때 나라를 구하고저 민족독립을 쟁취하고저 반일항쟁의 기치를 추켜들고 혈전의 길로 분연히 떨쳐나선 김좌진장군의 종횡무진의 자욱자욱은 만주의 넓은 광야에 혼불로 타면서 나라를 빼앗긴 백의동포들의 사위여가는 민족의식에 불씨를 더하였다. 하건만 그 처절한 나날에 섬섬하던 혼불은 오래동안의 력사의 침묵과 진실을 외면한 왈가왈부로 중국의 민족사에 인멸되다싶히되였고 후세들의 기억에선 창백한 갈피로 되고있었다. 력사는 필시 진실과 그 가치를 밝고 바르게 내세우기마련이지만 그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진통도 겪는다. 그 진통과 함께 하여 김좌진장군의 딸인 김강석녀사도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을 애오라지 마음속에만 기념비로 소중히 세워놓고 세월과 더불어 력사의 공정을 진작 바라며 60여성상을 보냈다. 장군의 피를 이어받아 그토록 자부와 긍지에 가슴이 부풀었어야 했을 장군의 딸이였건만 길고도 짧은 력사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본명을 숨기고 익명까지 하면서 아버지의 생애를 근끼있게 점철시키고 그 령혼을 지켜온 딸의 갸륵함은 더구나 눈물겨웁다. 장군의 딸의 견증으로써 력사는 오늘 마침내 우국우민의 애국자이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친 독립운동가, 반일의병장인 김좌진장군의 영상을 우리 민족사에 더 밝게 모신다. 중국의 우리 민족사에서 인멸되던 장군의 애국애족의 발자취를 근엄하고 진중하게 다듬기 위해 경제적인 후원을 보낸 중국조선민족사학회와 진심으로 성원을 보낸 해림시정부에 심심한 사의를 표시한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4년 8월     
296    인재사용과 인재류통 댓글:  조회:4607  추천:8  2013-12-29
          에세이  인재사용과 인재류통      1933년에 성립된 미국의 프린스톤연구소는 성립된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갖은 방법으로 국내외의 일류학자들을 흡인하여 들여 많은 새 발명과 연구성과를 내여놓음으로써 세계를 놀래우고있다.    1954년 공산주의동조혐의로 공직에서 물러난 유명한 물리학자 오페하이머가 일찍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었다. 그는 원자탄제조의 총지휘로 있으면서 과학자들의 창조력을 충분히 발휘시켜 세계의 첫 번째 원자탄을 만들어냈다.    특수상대론을 발표하여 광양자설을 주장하고 일반상대성리론을 완성하여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독일의 저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미국에 망명하여 종신토록 이 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프린스톤연구소의 다른 연구부문들에서도 많은 성과있는 외국인재들을 가지고있다. 미국은 어째서 많은 고급인재들을 제나라로 흡인해갈 수 있었는가? 미국은 독립전쟁이 갖 결속된 1790년만 해도 인구가 겨우 400만밖에 안되는 농업국이였지만 오늘은 이미 2억5천만의 인구를 가진 금원제국으로, 세계굴지의 강국으로 되었다. 여기엔 미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재를 아주 귀중한 재부로 여기고 아낄뿐만아니라 문을 활짝 열어 다른 나라의 인재를 받아들인 것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우리 나라는 고급인재가 원래 별로 없으면서도 그들을 개조대상으로 치부하여 써주지 않았고 지어는 멸시하고 타격하였으며 쇄국주의를 실시하여 스스로 제 목을 조였고 인재들이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였다. 그러다 지금와서야 이 점을 깨닫고 인재를 아끼며 개방정책을 실시하고있다.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관계부문에서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    국제소리진동과학회의 회원이며 원 중국례코트공사 상해분사 부경리 겸 총지휘인 고급공정사 리보선이 상급의 부정기풍을 적발하였다가 배척당하고 타격받다못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린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점을 똑똑히 보고도 남음이 있다. "가유명사에 30년부지"라는 속담이 있다. 그처럼 자기 단위에 인재를 놓아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써주지 않는다면 그게 없는것과 다를게 무엇인가? 내먹자니 싫고 남주자니 아까와 인재를 쓰지도 내놓지도 않고 붙잡아쥐고 있어서 인재류통이 되지 않고 있는데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근일 할빈에서 인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요구에 부합되는 자는 호구도 올려주고 집도 해결해준다고 하는데 아주 잘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언녕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아무튼 받는데가 있으면 가려는 사람이 있기마련이요, 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심술부리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찰이 생기고 분기가 생기는데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인재를 써주지 않으면서도 인재를 류통하지 못하게 하고 지어 인재를 타격하는 그런 실권자들부터 호되게 답새기고 그래서도 고치지 않으면 아예 권력의 보좌에서 끌어내려버리는게 바람직하겠다.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건 인재의 자유류통에 확고한 법적보장이 있어야겠다는 그것이다.                                                               발표:  1988. 5. 27  "흑룡강신문"        
295    에세이 피비린 숙청놀음 댓글:  조회:5354  추천:5  2013-12-14
  에세이 피비린 숙청놀음     1997년, 조선에서는 악명높은 “심화조사건(深化组事件)”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사건에 걸려든 고급간부가 25000명넘는데 수천명이 총살당하고 그 나머지는 철직되거나 아니면 수용소에 갇힌것이다. 고난의 길을 걸어온 김정일은 백성들의 불만이 많아지자 자기를 대신해줄 희생양이 있어야겠다는것을 느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조선로동당중앙농업비서이자 친척이 되는 서관희(徐宽熙)가 비료 30톤 값을 람용했다면서 그를 사회 안전성 제7교화소에 가두고는 조사를 받게했는데 밀령(密令)을 내리기를 “서관희를 남조선간첩으로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그때 조선로동당중앙조직부 행정부장이였던 장성택은 중앙조직부에서 사회안정성의 지도원으로 있은 리철(李哲), 사회안정성 정치국의 국장으로있은 채문덕(蔡文德) 등과 함께 그일을 맡아해냈다. 그들은 서관희(徐宽熙)에게 “미국과 남조선의 간첩으로서 계획있게  백성들을 박해하고 굶어죽게 만들었다.”는 죄를 들씌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관희(徐宽熙)와 황금숙(黄今淑)은 평양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되였다.      “서관희사건”을 빌어 김정일은 사회안전성 내부조직인 “심화조”를 동원시켜 김일성의 렘넌트를  진압하는 일장의 대규모적인 소름끼치는  피지린내나는 숙청을 한 것이다. “심화조”는 또 이른바 “룡성사건(龙城事件)”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1996~2000년지간에 “조선전쟁 때 기여든 내부간첩”을 잡아낸다는 구실을 내걸고 사회에 불만이 있어하는 국민백성에 대한 탄압이였던 것이다. 그 사건에 많은 간부와 가족들이 붙잡혔다. 심문 첫단계 때 매를 맞아죽은것이 3,000명 더되고 1만여 가속이 끌려가 집중영에 같히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두번째 단계때는 지어 로동당중앙책임서기 문성술(文成述), 전임 평양시책임서기 서윤석(徐润锡)마저도 체포되였거니와 내각상 4명을 포함한 2,000여명이나 처결되였던 것이다. 문성술(文成述)은 혹독한 고문을 이겨낼수 없으니 제 머리를 벽에 박아 아예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김정일은 생전에 제가 구상한 화폐 개혁이 실패하게 되니 백성들의 불만을 갈아앉히느라  신뢰할 수있는 보좌관이라했던 재정부장 박남기(朴南基)를 희생양으로삼아 총살해버렸다.  2004년 김정일은 로동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였던 장성택을 파워센터에서 쫓아냈고 2006년에는 부분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자는 총경리 박봉주 등의 직무를 철소시켰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피를 내는 정도의 숙청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뒤 2010년에 이르러 조선에서 화패개혁이 다시금실패하는 통에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김정일은 40여년간이나 자기를 따른 박기남 등을 총살하면서 무시무시한 대규모적인 숙청을 감행한 것이다. 박기남이 총살되기전 조선에서는 시장을 닫아버렸거니와 미국달러사용을 금지시키는 등의 수단으로써 화페개혁을 하다보니 국가기구를 비롯한 기업들이 문을 닫게 되어 되려 경제에 심각한 손상만 입고말았다. 조선의 현 실태가 바로 이러하다.                                                                                                                                                                                     (张成泽陪同金正日,在“深化组事件”中张成泽成为金正日的马前卒) (朴南基(红圈中者)与金正日)            1963年,金正日一家在住宅庭院中合影,从左至右为金正日、父亲金日成、妹妹金敬姬。    
294    (서적평) 파제예브의 장편소설 “괴멸” 댓글:  조회:3565  추천:2  2013-12-11
   파제예브의 장편소설 “괴멸”   파제예브의 장편소설 “괴멸”은 쏘련공민전쟁시기였던 1920년대의 력사사실을 예술화한 작품으로서 쏘베트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이 소설은 한 자그마한 유격대의 운명을 그리였다. 쏘련 연해주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레윈쏜부대는 일제와 백파도당의 추격을 받아 일시 곤난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160여명의 대원을 가지고있던 이 부대는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가렬한 전투 끝에 겨우 19명밖에 남지않게된다. 그러나 부대는 혁명투쟁의 필승의 신념을 안고 대오를 정비하고 투쟁의 길에 다시나선다.   이 소설의 사상은 저자가 말한바와 같이 “공민전쟁가운데서 인간들의 도태가 진행되는바 적대적인 모든 사람들은 혁명에 의하여 소탕되며 절박한 혁명투쟁에서 무력한 모든 사람들, 우연적으로 혁명에 들어온 사람들은 떨어져나가는가 하면 또 혁명의 진정한 밑뿌리로부터 올라온 모든 사람들은 이 투쟁에서 단련되고 장성되고 발전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작품에서 전형적인 형상들을 묘사하면서 압축된사회ㅡ 심리학적형상들이 표현되는 그런 형상들을 부각하기에 노력하였다. 주인공은 빨찌산부대장인 레윈쏜이다. 저자는 그를 통하여 당시 혁명의 조직자이며 지도자였던 볼쉐위크의 특징을 성과적으로 부각하였다. 이밖에 대조적인 인물 모로스까와 메치크를 잘 부각하였다. 탄부의 후손인 모로스까는 가혹한 혁명전 생활의 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그에게는 생활과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투쟁의 어렵고 결정적인 고비에 약점들을 극복하고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다. 허나 아주 “도덕적”이던 메치크는 리기적이고 개인명리주의적인 자기의 본성을 허위로 은페하여 오다가 어려운 고비에 무치하게 혁명을 배반한다. 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 작품의 예술적기교면에서 달성한 성과의 하나이다. 저자는 될수록 간결하게, 사상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기에 노력하였는데 이것이 이 소설에서 발휘된 독특한 필치이다. 파제예브는 이 장편을 두해동안썻는데 어떤 장은 20번이나 고쳐썻다고한다. 하기에 소설은 그만큼 성공적으로 되었다.   “괴멸”은 일찍 1931년에 로신선생에 의하여 한문으로 번역되였는데 우리 나라 인민들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0년대 쏘련문학의 지도자였고 사회주의사실주의 작가였던 파제예브는 중국인민의 벗이였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쏘련문화대표단을 인솔하여 우리 나라를 친선방문한적이 있다. 1956년 파제예브는 흐루쇼브가 쏘련의 령도권을 잡자 자살하였다.                   “흑룡강일보”진달래.   1979.8.11.
293    에세이 신화를 깬 림표의 죽음 댓글:  조회:6351  추천:7  2013-12-09
           에세이 신화를 깬 림표의 죽음    림표의 죽음은 모택동의 형상리론을 짓부셧거니와 체면을 완전히 긁어버렸다. 그로써 모택동의 신화는 철저히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군사가 림표와 정치가 림표를 갈라놓고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림표의 정치행위만 보고 그의 군사업적을 부정해서는 안되거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군사업적을 가지고 그의 후생을 다 긍정해도 안되는 것이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행위는 련속된것인데 어떻게 “군사림표”와 “정치림표”로 갈라놓을 수 있느냐고 할 것이다. 피끗들어 그말에 도리가 있는것같지만 들어맞는건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이란건 불변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주동이였건 피동이였건간에 주위상황에 따라서 성품이 좋았던 사람도 나쁘게 돌변할수있기때문이다.   림표가 세운 전공(戰功)을 놓고 이러니 저러니 흠을 잡자고 할 필요는 전혀없다. 왜냐하면 그가 세운 전공이 아주 탁월하여 혁혁다는것은 력사가 이미 긍정했기때문이다. 국가에서는 1955년도에 해방군전체 장령에게 군함(軍銜)을 주었는데 림표는 그때 원수(元帥)로 되였다. 그같은 원수가 모두해서 10명인데 그 10대원수의 차례를 놓고 보면 주덕, 팽덕회, 림표, 류백승, 화룡, 진의, 라승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순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림표는 보다싶히 전공이 혁혁한 류백승이나 속유보다도 더높이 올라 주덕, 팽덕회다음 세번째자리에 놓인 것이다. 한즉 그것은 사실상 그의 전공이 류백승이나 속유보다도 더 컷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군함을 정했어도 동급내에서 차례를 뽑자고 보니 수차나반복되면서 훨신 더 힘들었다고 한다. 림표의 원래의 자격을 놓고 따진다면 그가 그저 본래는 기껏해야 황포군관학교 4기졸업생이요 섭영진과 엽검영은 그의 선생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향전을 놓고 봐도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이였거니와 그의 학장(学长)이기도했다. 남창기의 때 림표가 패장이였지만 류백승과 화룡은 각각 참모장, 퇀장이여서 기의를 총휘한 것이다. 진의를 놓고봐도 그렇다.  그는 남창기의부대와 홍4군때 림표의 직접 상급이였던 것이다. 림표가 라영환보다는 자력(資歷)이 좀 나을뿐이였다. 그러나 그는 제 실력을 발휘함에서 우에 렬거한 교관과 상급들을 모두 릉가했다. 그 근거는 무엇이였는가? 림표는 그야말로 군사가다운 지혜와 담력으로 싸움마다 굳센것과 강경히 맛다들어 번번히 이겼다는 그것이였다.   원수들중에서 림표와 류백승 그 둘은 높은 군함을 받으면서도 태도가 그리 명랑하지 않았다고하니 여기에 바로 문장이 있는 것이다. 군사가였던 그 두사람은 다 머리가 아주맑았기에 정치의 험악함을 알고있은 것이다. 천하를 얻고나서 그냥 군사가로 지내려면 정치를 멀리하면서 아무거든 군사일이나 그냥보면 그로서 끝나는것이고, 그러지를 않고 만약 정치에  삐치고싶어서 개입하여 무대에 올라 표현하기시작한다면 그때는 이미 군인인것이 아니라 참정인원이 되어 정치가로 탈바꿈을 했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처지는 아주 영 달라지고만다. 림표나 류백승이나 그들은 그 도리를 그 누구보다도 깨닫고있었던 것이다.      거짓정보에 의해 싸움을 한면 실패해서 믿지기마련이다. 그러나 정치를 하자면 다르다. 림표가 생전에 제 부인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큰일을 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즉 지금보면 림표의 그 말이 과연 금언(金言)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림표의 전(傳)을 보면 1950년도에 림표는 서남을 평정하고나서 인차 남경군구에 가서 군사학원을 세웠던 것이다. 그때 림표는 몸이 좋지 않았거니와 정치에도 흥취가 없어서 간섭하지 않았다고했다. 그는 정치와는 되도록 멀리했던 것이다. 지어는 그가 먼 변강에 가서 성장노릇이나 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조선전쟁에 나가 지휘를 맡으라는것마저 핑계대고 회피한것이다. 팽덕회와 조선전쟁이라는 글에 보면 그갗이 밝혀져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말려든 고강사건에는 그가 참여했는가 안했는가? 그것이 의문이 되는데 그 의문만은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955년 9월 27일,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원수군함을 수여할 할 때 생긴일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수로 인정된 10명중 두사람이나 수여식에 불참한 그것이였다. 그 두사람은 림표와 류백승이였다. 그때 림표가 병을 칭탈했지만 진정한 원인을 보면 그것이 아니였다. 원수가 되어 좋기는 한데 자기가 여러상급들을 밀어놓고 앞자리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가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류백승은 그때 한창 말성거리에 들어있었다. 팽덕회가 모택동의 뜻에 따라서 류백승이 창설한 “교도주의대본영(모택동의 말)”인 남경군사학원에 대해서 비판했길래 그는 모택동과 팽덕회를 보기싫어했거니와 지어는 군함을 화룡앞에다 세우는것마저도 반갑지 않아했던것이다. 한편 다른 한 사람 화룡은 원수의 순서를 놓는데 불만스러워했다. 그 리유라면 당군(黨軍)은 본체가 8.1남창기의에서 온 것이요 자기는 그때 총지휘였다는 것. 주덕, 류백승, 엽정, 섭영진은 다가 자기의 수하가 아니였느냐, 그런데 왜서? 림표는 더구나안되는데도 왜서 그를 앞에다 세우고 자기는 다섯번째로 밀어놓느냐 그것이였다. 그야말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은 왜서 생기는가?..... 림표에게는 마침내 이것이 곧바로 군대내의 정치운동으로 감지되였던 것이다. 하여 그역시 그 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것이다.   그런데 1956년 8대이후 8기1중전회에서 중앙위원을 선거할적에 선거표가 모자라는 림표에게 모택동이 한표를 던져주었다. 하였길래 림표는 중앙정치국상위, 중앙부주석이 된 것이니 이는 모택동이 그더러 너는 이제부터는 정치가놀음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음이 명백하다.    한편 팽덕회는 림표처럼 되지 못했다. 팽덕회가 만약 정치가의 머리를 가졌더라면 대체 어떠했을가? 그가 정치가다운 예리한 촉각이 있었다면 의례 모택동의 암시와 경고를 알아차렸을것이다, 지금부터 군대의 첫인물은 림표이지 너 팽덕회가 아니다라는 것을! 중앙은 권력중심이라서 군권이 저쪽으로 넘어가게 되니 그때부터 팽덕회의 심기는 뒤틀어지기 시작했던것이다. 하여 1959년 로산회의에 이르러서는 그가 모택동과 공공연히 맏다드는 형국이 됐고 “만언의견서”요뭐요 써올렸지만 그건 다 허사로 되면서 점점 막다를 골목으로 몰려들기시작했던 것이다. 한즉 팽덕회쪽으로 놓고보면 과연 억울한 일이아닐 수 없다.                                             (자료래원 “華夏文摘增刊”)   철유형(铁流兄)이 1999년에 쓴 을 보면 다음과 같이 총괄했다. “그본신의 개성부터 봐도 정객이 아니였다. 그런 기질이면 아예 정객과 손발을 맞추려하지 말아야했다! 몸이 강호에 있어도 자기것이 아니다했거늘 정객도아닌 팽덕회가 정객노릇을 했으니 비극일수밖에!” 라고했다. 팽덕회의 비극은 바로 로산회의때부터 시작되였던 것이다. 한데 림표는 어떠했는가? 그는 정치란것은 등이 없고 날만있는 칼이라는것을 알았길래 모택동의 신호를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상 적극적이였던것도아니였다. 그는 중앙부주석이 되었어도 몸이 좋지 않다보니 료양이 위주였다. 중앙전회때도 정치국회의때도 그는 회의에 가지 않으려고 청가를 맡은 것이다. 그러나 1959년에 이르어 로산회의때는 료양할수 없었다. 모택동이 그를 꼭 참가하라고 급히불러다가는 군위제1부주석을 시켰거니와 국무원부총리겸 국방부장직무까지 주면서 그를 정치무대의 중심에다, 그것도 권력중심에다 정식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림표가 속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그런 권좌에 올라앉은건지 아니면 하는수없이 올라앉은건지는 그건 누구도 알아낼 방법이 없지만 한가지 긍정적인것은 군사가였던 림표가 그때로부터는 이미 “정치가 림표”로 변해버렸다는 그것이였다.   따지고 보면 림표의 비극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되였던 것이다.   림표의 행실을 보면 그닥아름답지 않았다. 그는 로산회의에 참가하여 팽덕회를 비판했고 참모장이였던 라서경을 끌어내리웠거니와 북경에 돌아와서는 모택동이 시키는대로 군위확대회의를 열고는 팽덕회를 투쟁했거니와 조직상으로도 사상상으로도 “팽덕회를 숙청”했는데 그의 그러한 행실이 정치적각도에서 보면 아무런 흠잡을데도 없었던 것이다. 정치투쟁이란 피를 보자는게 목적이니 우선 마음이 독해야하거니와 손이 매워야 했다. 때로는 선한모양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악하게 보이기도해야 했다. 이럴때는 도덕표준이란건 아예없어지고마는 것이다.    장국도(張國燾)의 에 보면 정곡을 찌른 묘한 말 한구절이 있다. “정치란건 죄악으로 충만된 것, 세상에 성결한 혁명이란 없다”   이제는 림표 그 한 “정치가”에 대해서 정리를 내려보기로 하자. 나는 림표를 가엽게 여기면서 그의 생전의 언행들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가 정치무대에 올랏다는건 몸이 강호에 있어도 이미 자기것이 아니여서 얼쩔수 없었다는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틀린 언행들을 용서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어떤 언행들을 보면 력사의 정면적인 긍정을 받을 수 없는것들이기때문이다.   모택동은 15년내에 영국을 초과하고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몽상에 잠겨 “대약진”을 설계하여 발동하고는 5억농민을 인민공사화하여 한데묶고 8천만인력을 강철생산에 내몰아 국민경제에 엄중한 실조를 빚어냈던 것이다. 그런데도 1957년 7월 로산(盧山)회의때 모택동은 국내형세를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가 적지 않으며 전도는 광명하다고 개괄했다. 그러나 팽덕회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아래에 내려가 조사해본 결과 량식이 밭에서 썩고 토법으로 제련해낸 강철은 근본 쓰지도못할 페물이였기에 가슴아파난 그는 군사가다운 배짱과 패기로 “만언의견서”를 써 올렸던 것이다. 모택동은 응당 그의 그 “만언의견서”를 참답게 받아들여야 옳았건만 그러지를 않고 그의 의견서를 반당집단선언서라 하였고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달한 총참모장 황극성대장, 중앙서기처서기 장문천, 중앙위원 주소주 등을 역시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으며 목적이 있는 반당구락부라고 몰았던 것이다. 팽덕회를 림표와 비교해보면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무엇인가? 바로 군인신분으로서 정치에 개입했으니 어설픈 그것이였다. 그는 정치가의 심기를 채 리해못한채 맞다들었던 것이다. 력사가 증명하다싶히 그가 그당시 중국의 진실한 정황에 대해서, 백성의 사정에 대해서, 당과 국가에 대해서, 군대에 대해서 반영한 것은 다가 옳았다. 그는 군인다운 옳곧고 강직한 직성으로 “만언의견서”를 써올렸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한다면 괴변많고 고집스러운 정치가의 심기를 맞춰주지 않아 되려 제가 불리하게된다는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림표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림표에 관해서 쓴 책들을 보면 그가 대약진이나 총로선에 대해서 이렇쿵저렇쿵 운운한게 거의없다. 로산회의 때 팽덕회, 류소기, 하경시, 라서경, 리청천 등이 이러니저러니 반영했어도 림표는 시종 입을 다물고 제속맘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팽덕회를 향해서 위대한 모택동을 공격하지 말라고 반격하면서도 그들의 반영이 틀린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양심에 없는 거짓말은 하지않는다는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점은 또한 그가 정치에 관한것이면 위험성이 크다는것을 명백히 깨닫고있었음을 보인것이기도했다. 림표는 민간의 진면모를 모택동에게 알려준적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군사면에 들어가서는 모택동앞에서 과감히 맛설것은 맛섯던 것이다. “그런게 아니지. 그대가 잘아는가, 아니면 내가 잘아는가? 그대는 들어서 알지만 나는 전선에서 집접겪어본거니야.” 하면서 그는 모택동의 의사에 따라 팽덕회를 미워하고 증오했으며 지어는 죽이기싶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같은 군인이였지만 허세우(许世友)같은 사람을 보면 어떠했는가? 그는 팽덕회가 세폭의 붉은기가 잘못된것이라고 하니 팽덕회더러 입을 다물라고 욕지걸이를 했다. 그는 그러는것으로 모택동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을 보여준것이다. 어쨌든 나야 배를 곯지 않으니 됐어, 백성이야 굶든 죽든 내알배가아니야식이였다. 그러나 림표는 그정도로 우매하게 노는 사람이 아니였던 것이다.  만약 림표가 진정으로 “정치가”였다면 팽덕회가 력사상에서 모택동을 반대한 가지가지를 내놓고 라렬하면서 그것을 악행이라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림표는 그번회의때 팽덕회를 반격했길래 모택동의 눈에 들어 환심을 산 것이다. 이로보아 정치가와 맛서서는 리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있은 림표의 처세술이 팽덕회를 초과했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는 모택동에게 잘못보였다가는 자기도 팽덕회모양이 된다는것을 잘알고있었다. 그래서 정치에서 발을 빼지 못한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진퇴량난이였을 수도있겠다. 림표의 정치행위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을 보면 학자마다 연구가마다 다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문화혁명기간에 전국인민이 모택동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하늘높이 떠받들게 만든것은 모택동이 지극히 바라는것이였길래 그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한 소행이였지 진심에서 우러난건 아니였다고 분석한다. “오칠일공정기요(五七一工程紀要)”는 모택동의 폭정(暴政)을 반대한, 문화대혁명의 반인류적인 반동성과 파궤성을 깨우쳐준 력사적인 문건이였다고 정리하면서 그것이 절대 림표의 죄로는 될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않다. 그 근거라면 지금까지도 림표가 모택동을 살해하려한 그 공정(工程)에 가담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모택동의 후계자라고 당장에까지 박아놓은 사람이 도망치다니?! 스스로 죽을 길을 걷다니?! 어떤 사람은 1971년9월13일새벽에 그의 식솔을 포함한 9명을 태운 트라이던트 항공기가 몽골의 Ondor칸에 떨어져 회멸된 이른바의 “반역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모택동이 림표를 때리자고 하니 몸을 피한것이지 조국을 배반하자고한건 아니라고 분석한다. 의례 비행기안에 있어야 할 블랙박스(黑匣子)가 없어졌다. 그것이 있으면 비행기안에서 발생되였던 수수께기를 다소라도 풀수도 있으련만.  쏘련에서 가져갔다 하기도 하고, 이미 중국에 돌려주었다고도하는데 그에 대해서 답복하는 사람은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아무튼 원자탄보다 더 큰 진동을 일으킨 림표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그 가치와 의의를 다시금 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은 곧 모택동에 대한 신화를 여지없이 깨놓았길래 우상화가 골수에 박힌 둔감한 무지한을 내놓고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깨우치게끔 만들었다는 그것이다. 그렇고보면 림표의 죽음은 력사적인 공적으로 되지 않겠는가?! 근년에 보면 학계가 림표에 대해서 다시금 평하는 추세다. 림표에게는  죄가 없다는 글들이 적지않게 나오고있는 것이다.   >" /> 批斗彭德怀                            
292    <<모택동유물 백과사전>> 댓글:  조회:5468  추천:1  2013-12-05
  소산 모택동기념관 시리즈 게시 된 항목 출판 : 베이징(北京) 게시자 이름 : 레드 플래그 출판사(红旗出版社) 출판 일 : 1996   1961년 4월 26일, 여러 직원이 요리사와 함께 서양 요리, 두 수프 조리법을 만들었는데 보존된 그 서양 조리법을 보면 그닥풍부한건 아니지만  모택동의 다이어트 환경에 아주세심했다는 것을 엿볼수있는것이다. 이 메뉴에는 일곱 서양 음식 시리즈를 포함하고있는데 그것인즉은 물고기와 새우, 닭, 오리, 돼지고기, 양고기, 소고기, 수프였다.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 남긴 유물을 보면 요리가 풍부하고 다양했지만 식기들은 온정히 갖추지를 못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물고기, 새우등을 특히 좋아했는데 요리가 다채롭거니와  독특한 맛을냈다.   1961년 4월에 만든, 서양식맛을 내는 물고기종류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 딩,  구이 만다린 생선 튀김 (튀김),  만다린,  부드러운 튀김,  만다린 생선,  생선 찜구이, 녹색,  모스크바 붉은 물고기,  커스터드 백 물고기,  구운 야채와 생선, 포 틀랜드 시금치 물고기, 구운 새우,  구운 새우 규,  새우 국수 상자,  튀김 새우,  요리감마 젤리 새우,  jugged 새우, 부드러운 튀김 새우,  새우,  양상추 등등.     =======================1961년이면  중국은 대약진때니  어떤형편이였던가?                                                             기황(饑荒)과 아사(餓死)가 전국대륙을 휩쓸 때였다 .  疯狂的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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