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좌진이 다시금 놓여나왔을 때는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 발랄할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구라파나라들에 대한 수출무역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아 재정위기가 더욱 심화된 일제는 그 위기에서 벗어나보자고 조선인민들을 가혹하게 압박착취하기 시작했다. 한편 1914년 5월중순까지만도 서흥군 제비여울수비대를 기습하여 일본침략자에게 타격을 주었던 평산의병대가 일본침략군 대병력에 포위되여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침으로 해서 조선본토에서의 의병투쟁은 막을 내리였던 것이다.
허나 조선인민들의 반일투쟁은 계속되였는바 그것은 점차적으로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군운동으로 전개되였다.
1915년 4월, 김좌진은 중국에 가있는 로백린을 비롯한 기명섭, 신대현, 윤흥준 등과 함께 채기두가 조직한 풍기의 대한광복단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 비밀단체는 그네들이 가입하면서부터 이름을 광복회로 개칭했다. 이 단체의 종지는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였다.
이때 중국혁명의 상황을 직접알아보기위해 중국에 건너갔던 박상진도 돌아오자 무력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조직에 부심하고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제가 1915년 원세개정부에 제기한 21개조 비밀조항으로 하여 중국인민들 사이에 대일전(對日戰)의 기운이 고조되고 조선독립운동단체들이 이에 가담하자 함으로써 실제화되기에 이른것이다. 즉 만주에 있는 동포들은 형편이 어려우므로 국내의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마련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일제의 간섭이 심하지 않은 만주지역에서 조속히 군대를 양성하여 빠른 시일내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려했다.
김좌진은 그의 주장을 적극 찬성하면서 로백린, 채기두 등과 더불어 인원이 보다많고 조직이 강대한 비밀단체를 묶어세울것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풍기광복단(1913년)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1915년)을 통합하여 1915년 8월 25일 대구달성공원(達成公園)에서 200여명이 집회를 갖고 항일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새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
강령은 아래와 같았다.
1. 무력준비: 일반부호의 의연과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차(此)로써 무장을 준비함.
2. 무관양성: 남, 북만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교양하여 사관으로 채용함.
3. 군인양성: 我大韓의 由來義兵, 해산군인 급(及) 남, 북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채용함.
4. 무기구입: 중국과 로국에서 의뢰구입함.
5. 기관설치: 대한, 만주, 북경, 상해 등 요처(要處)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에 尙德泰라는 상회의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 급(及) 려관 또는 鑛業所를 두어서 차(此)로써 본광복회 군사행동의 집회, 왕래 등 일체 련락기관으로 함.
6. 행형부(行刑部): 우리 광복회는 행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 고등관과 우리 韓人의 반역분자는 수시수처(隨時隨處) 총살을 행함.
7. 무력전: 무력이 완비되는대로 일본인섬녈전을 단행하여 최후목적완성을 期함.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조달이 시급한 문제로 나섯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는 일반부호의 의연(義捐)에 의존하는 한편 일본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기로했다.
대한광복회 회원들은 무기를 준비하여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중석광과 직산(稷山)금광을 습격하려다가 그만두고 1915년 11월 17일에 광주 광명리에서 마차로 운송하던 경주, 영일, 녕덕 등 3군의 세금 8,700원을 탈취하였다.
그전해인 1915년 7월에 서울에 있던 서대문이 총독의 명령에 의하여 헐리웠다. 그것을 보고 적개심이 불탔던 좌진은 고관(高官)암살을 시도했었는바 그것은 마침내 대한광복회의 행동으로 규정되였다. 그리하여 사령 박상진이 직접 나서서 먼저 신채호(申采浩)와 구체적으로 조선총독암살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또한 대한광복회의 황해도회원인 성락규(成樂圭), 조성환(曹成煥), 리관구(李觀求) 등에게 맡겨졌는바 그들은 안중근의 례를 모방하여 임무를 수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1916년 7월, 그들은 박상진이 제공한 권총을 갖고 1차로 안동현(安東縣)에서, 2차로 장춘에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하였으나 그만 중도에서 실패하고말았다.
대한광복회는 운동자금모집에 호응하지 않는 영남일대의 유명한 부호 서우순(徐佑淳)을 협박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좇아서 1916년 음력 8월초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에서 활동했던 리시영, 정순영, 홍주일, 정운역, 김재렬 등과 대구의 유지인 최병구, 최준명, 김진만, 김진우 등에게 명령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바치도록했다. 그런데 그 계획도 뜻대로되지 않았다.
대한광복회 회원들가운데도 손꼽히는 부호가 여럿이 있었다. 우선 박상진부터 10대만석을 자랑하는 대지주였다. 그는 자기를 따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로 사업하며 4촌처남되는 최준(崔浚)에게 독립자금으로 맡긴것만도 900두락이며 그 가격이 6~7만원에 달했다. 그는 일찍이 1910년에 자기 집안의 소유의 부동산을 일본 삼정특산회사(三井特産會社)에 10년 년부(年賦)로 저당잡히고 여기서 얻은 현금 10만원을 출자하여 도합 24만원의 자금으로 평양의 김기덕(金德基), 전주의 오혁태(吳赫泰) 등과 함께 대구에 상회를 설립하여 거기서 얻어지는 리윤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했다. 그 3명의 출자가의 이름을 딴것이 곧바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였던 것이다. 그러한즉 국권회복을 위해서라면 그는 실로 개인의 득실은 전혀 념두에 두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교통부장으로 활약했던 리시영(李始榮)은 대구에서 전당업을 하던 부호였고 정운역(鄭雲驛)역시 대구에서 전당업을 하고있던 부호였으며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유설부장(游設部長)으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봉천(심양) 삼달양행(三達洋行) 정미소를 운영하고있는 정순영(鄭舜泳)은 본래 경상도 성주의 부호였고 10대진사 최준은 10대만석을 자랑하는 경상도지역의 대지주였다.
이네들은 모두 자기의 재산을 털어내여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바치였다. 헌데 다른 부호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왜 그리도 혹심한 구두쇠노릇을 하고있는가?
대한광복회의 중진이였던 김좌진은 100만원의연금을 속히 모아 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했지만 계획이 부진상태에 있게되니 조급해지는 한편 나라운명이야 어떻게 되었던 자기 일신의 안녕과 가정만을 생각하면서 재산을 부덕부덕 끌어안고도는 부호들의 행실에 화가 몹시 동했다.
좌진은 경상도로, 평안도로, 함경도로, 전라도로 흩어져있는 동지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면서 그들을 통해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으려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적잖은 부호들이 국가의 존망같은건 근본 생각지도않고 오로지 자기의 목숨과 안일만을 바라고 외세에 아부하는 친일파로 전락되고말았음을 보아냈다.
(그런자들을 다스리는 어떤 방법이 생겨야지.)
1916년 그해의 가을 어느날, 경주에 가서 박상진을 만나본 좌진은 자기 식솔을 동생한테 떠맡기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만 오면 몸을 두군하던 숙부 덕규(德圭)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놓던 좌진은 탑골공원뒤문 부근에 이르러 뜻밖의 일을 당했다. 난데없는 형사 7,8명이 그를 포위하면서 체포하려했던 것이다.
시간은 바야흐로 땅거미지고있는 때였다. 한쪽은 담장이 막고 있어서 형사들은 네놈이 이젠 어디로 뛰겠느냐며 그를 담장가로 몰았다. 한자는 쇠고랑을 꺼내여 들고 그의 손목을 채우려들었다. 바로 이때 좌진은 갑작스레 발길을 날려 그자의 턱주가리를 차 고꾸라뜨리고는 그바람으로 몸을 훌쩍 솟구쳐 아츠랗게 키넘는 담장을 제꺽 뛰여넘었다. 너무도 창졸간에 당하는 예상밖의 일이라 순경들은 어찌나 경황했던지 총 한방도 미처 갈기지 못했다.
세금마차가 강탈을 당한후부터 헌병들은 눈에 쌍불을 켜고있는 판이다. 어떻게 냄새를 알아낸 모양인데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며칠후였다. 작고한 부친과 한서당에서 공부했던 김기철(金基哲)이 연해주에 간지 여러해되는 정해식(鄭海植)어른을 데리고 문득 좌진의 앞에 나타났다. 정해식역시 부친의 친구였거니와 좌진이네와는 숙친한 사이인지라 이렇게 다시 만나고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정해식은 좀 오래있다가 돌아갈 예정이라면서 연해주로 망명간 의병장들의 근황에 대해서 두루 알려주었다. 그곳에 간 의병장들은 지금 여러가지의 조직을 세워 교육과 동포단합에 힘쓰는한편 적당한 시기에 조선에 다시금 출병할 준비도 하고있다고 한다. 좌진이 포수출신인 의병장 홍범도에 대해 물었더니 정씨의 말이 그는 지금 사냥을 하면서 동산재기(東山再起)의 꿈을 꾸고있는 모양이라는거다.
이름날리던 의병장 류린석은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간후 13도 의군도총재 (義軍都總裁)에 추대되여 두만강연안으로 쳐들어오려고 기도하다가 실패하고는 지난해에 세상뜨고말았다. 그이보다먼저 조선출병을 크게 꿈꾼 의병장은 류린석보다 18살적고 홍범도보다는 8살더많은 전주사람 리범윤(李範允)이였다. 그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내다가 일로전쟁에 일본이 이겨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로씨야로 망명하여 거기서 자결한 범진(範晉)의 아우로서 광무(光武)6년(1902년) 중국 청나라가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하자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부임되여 교도보호에 힘쓴 사람이다. 리범윤은 1907년 8월 23일 룡정에서 가 세워지자 연해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군자금 30만원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고 1,000여명의 의병을 무어 총대장이 된 후 함경도에 진출하려다가 실패한 원인을 볼것같으면 일본군병력의 증강과 방비에도 있지만 다른 한가지 주되는 원인은 의병이 굳게 단합못한데도 있었다.
그일을 상기하곤 이렇게 뇌이던 좌진이다. 그러면서도 좌진은 리범윤의 웅지만은 흠모하고있었다.
리범윤은 이때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參敎)로 반일문화계몽사업에 진력하고있었다.
김기철과 정해식도 역시 대종교도였다. 교주 라철(羅哲)의 교통을 이어받아 제2대교주가 된 사람은 김헌(金獻)이다.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서울에서 만주로 옮긴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이 교에 대해서 점점 감정이 깊어갔다.
대한광복회는 자기의 활동을 극비밀리에 전개했다. 우선 성원모두가 생사결전을 맹세하고 나섰으며 서로 굳게믿는 기초상에서 긴밀한 관계로 얽혀진 혈맹이였기에 그것은 굳세고 유력했다.
이 단체는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대오건설을 힘있게 추진하였는바 채기두, 김한종, 리병찬, 김선호, 최봉주, 조현균, 리해량, 김동호 등 수완가들에게 그 조직분포망의 지부장 직책을 맡기여 도사무(道事務)를 지배케하면서 처음의 경상도 한 개지역을 벗어나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각 도와 지어는 서간도, 북간도에까지 넓히였다. 국외로는 만주에 손일민과 봉천 정순영 등 요인이 주동기관을 운영하게 하고 만주사령관으로 김석대를 위임하였으며 박상진과 김좌진을 비롯한 몇몇 요인은 각지 기맥(氣脈)을 총관하였다. 본부는 서울에 두었다.
그런데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모집에서 제1차의 게획이 실패하고말았거니와 총사령인 박상진은 체포되여 1917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총포화약류단속령(銃砲火藥類團束令)과 동시행규칙 위반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이같은 조건하에서도 좌진은 중견동지들과 같이 제2차적으로 군자금모집을 계속 밀고나갔다. 그는 박상진과 이미 계획이있은바와 같이 각지 부호들의 명단을 조사장악함과 동시에 포고문을 내기로 맘먹었다.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산가들의 명단은 이미 박상진에 의하여 장악되였으나 다른 지방은 장악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방면의 일을 다그쳐했는데 충청남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김한종을 통해 가입한 장두환이 작성했고 강원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김동호가 작성했으며 전라도자산가들의 명단은 그곳의 사정을 잘아는 채기두가 작성했다.
대한광복회는 1917년 6월 9일에 요인몇이 모임을 갖고 이미 장악한 조선 각 도의 자산가에 대해 자산의 정도에 따라 본회가 지정한 금액을 기부하도록 요구하기로 하면서 대한광복회의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 발포함으로써 만약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예측키 어려운 위험이 있을것임을 예고키로했다.
포고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대한광복회는 이미 작성한 명단을 토대로 할당액과 포고문을 동봉, 동지들로 하여금 즉시 중국 또는 국내에서 이것을 우편으로 우송하게끔 했다.
채기두는 군자금모집을 위해 노력을 아까끼지 않았다. 목포부(木浦府) 남교동(南橋洞)의 현기남(玄基南)같은 사람들은 채기두로부터 의연금기부를 강요받았다.
황해도 지부장인 리관우 역시 군자금모집을 위해 진력했다. 허지만 이번역시 별다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지 김한종이 안동의 자산가 권집오에게서 130원, 림세규가 역시 안동의 류승호에게서 95원, 그리고 황해도광복회 회원들이 각지의 자산가를 협박하여 100원을 기부받은 외에 몇건 더 있을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