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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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 1장(1) 댓글:  조회:2774  추천:1  2014-08-22
                        제  1  장                                  1      한밤중에 요란한 폭음이 온 시가를 들었다놓았다. 그러더니 시가남쪽 정거장모퉁이에서 려명전의 암흑을 불태워버리듯 뻘건 불길이 활활 솟구쳐올랐다. 부두에서 울려오는 경황한 배고동소리와 함께 온 시가는 날밝기전부터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포장도로로 공포에 전율하는 일본헌병대의 오토바이들이 미친듯이 달려가고 병사들을 가득박아실은 트럭들이 시내밖으로 창황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 실로 한없는 기쁨과 극도의 절망이 엄연한 대조를 이룬 순식간의 변화였다. 여지껏 통치자이며 주인이노라 행세해왔고 만주의 영원한 평안과 치안을 유지하노라 떠들어대던 일본인관리배들과 그를 붙좇아오던 온갖어중이떠중이들이 혹은 군복을 벗어 동댕이치고 혹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맨발바람으로 아우성치며 허겁지겁 달아나고있다. 략탈자의 본색을 오히려 세상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며 뽐내던 그들은 바로 여기 북만의 한 도시의 거리바닥에다 한때 오만스레 끌고 다니던 게다짝도 건사못하고 온갖 추태를 드러내면서 패전의 줄행랑을 놓고있었다.    여기 북만의 도시―수천년간 모래톱을 핥고 자갈을 씻고 진흙에 미끌면서 허허한 벌판과 산곡을 굽이쳐나와 다시금 수백리 평원을 지나 흑룡강과 합친후 나중에는 바다로 도도히 흘러들어가고있는 송화강남안에 자리잡은 아르금시(阿爾金―쟈므스의 옛이름)는 드디여 기나긴 고달픈 잠에서 깨여나 기쁨의 새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쿵! 쿵! 대포소리는 점점 더 요란한 폭음으로 도시를 진동했다. 가까운 시교에 있는 일본군의 최후방선을 격파한 쏘련붉은군대는 최후발악을 기도하는 자들에게 훼멸적인 타격을 안기면서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 항일련군이 그들과 배합작전을 했다.    우릉우릉!... 기체에다 오각별을 새긴 비행기가 도시 상공을 낮추 선회하면서 무수히 삐라를 뿌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그 누구도 더는 방공호속에 숨어있을념을 하지 않고 달려나와 삐라들을 주어들었다.            이 기쁨 이 들끓음속에서 헌병대감옥의 육중한 철대문이 활짝 열려졌다. 숱한사람들이 그속에서 쏟아져나왔다.        해방받은 뭇사람들속에서 지금 바야흐로 제 친구의 어깨를 마구 뚜드려대며 손을 추켜들고 기뻐 웨쳐대는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곧 김려홍이라고 하는 청년이였다. 콩크리트바닥에서, 사람의 뼈를 악착스레 갉아먹고있던 수백개의 쇠사슬이 귀청을 째며 다투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려홍이는 한감방에서 환난을 함께 겪어온 한족청년이며 털보인 왕복룡이와 함께 쇠사슬을 끌고나왔다. 얼굴은 전혀 피기라고 없어보였으나 두드러진 코날은 어딘가 강경한 인상을 안겨주는데다 우묵한 검은 눈은 형형 광채를 내뿜고있었다.        불시로 우렁우렁한 웨침소리가 환희로 들끓는 들의 귀전을 때리며 울려퍼졌다. 그러자 들끓던 소음들이 일시에 뚝 멎었다. 눈썹이 짙고 체구가 웅장한 사나이가 망치와 정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다시금 웨쳤다.        기쁨의 환성이 다시금 와 ― 터졌다.    려옹이는 복룡이와 하께 그의 앞에 달려가 발목을 들이밀었다. 묵직한 쇠망치가 정을 겨누고 몇 번 힘껏 내리쳐졌다. 그러자 족쇄는 애처로운 소리를 내면서 뚝 끊어져버렸다. 려홍이는 마치 천근짜리 종낭을 발목에서 떼여버린것 같은 쾌감을 느끼며 금시 하늘에라도 날아오를것만 같았다. 려홍이는 흥분을 눅잦힐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족쇄를 끊어준 그 사람의 손을 덥석 잡아쥐였다. 그랬더니 그 사나이도 벌씬 웃으면서 어깨를 툭 쳤다.            려홍이는 감격된 심정을 이루다 표현 못한채 엄벙덤벙 다그쳐물었다.                                    그가 무엇을 더 물으려는데 이때 허리에 탄때를 두르고 장총을 든 한 유격대원이 달려와 손을 올려 경례를 붙이였다.        려홍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그 말을 되씹었다.(지휘원동지라! ...도대체 어떤분일가?)    려홍이가 보건대도 그가 보통사람인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점은 유격대원에게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려홍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한결 다정하고 활달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려홍이는 머리를 힘있게 끄덕이고나서 멀어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세상에 참 고마운분도 있구나!... 지휘원동지! 지휘원동지!)    려홍의 가슴속에는 무어라 형용할수 없는 뜨거운 정념이 북바쳐올랐다.    뭇사람들의 웅성거림속에서 발목에 채워졌던 쇠사슬이 부서지는 소리가 련달아 일어나는데 머리우에서는 8월의 뜨거운 태양이 그 어떠한 힘으로써도 막아낼수 없는 찬란한 빛과 열을 들끓고있는 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우에다 한껏 뿌려주고있었다.                려홍이는 복룡이의 손을 꽉 움켜쥐고 붐비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를 헤가르며 급히 걸어나오다가 그만 멈칫 서버리고말았다. 저기 사람들이 몰켜선 이쪽에 젊은 녀인 하나가 방금 감옥문을 나온, 보아하니 필시 남편인듯한 젊은 사내의 품에 안겨 목메여우는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복룡이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얼핏 그쪽을 보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능청스레 두눈을 슴벅했다.                                        려홍이는 제쪽에서 푸푸거리는 그의 넓적한 뒤잔등을 대 철썩 갈기며 팔을 잡아끌었다.        큰길로 통한 대문가에는 허리에다 권총을 차고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이 트럭우에 두다리를 턱 버티고선채 팔을 저어가면서 한창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뒤잔등은 튼튼한 매돌짝같이 움직였고 격앙된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욱 몰려드는통에 려홍이는 하마터면 넘어질번했다.            복룡이도 따라서 눈을 부라리며 명토없이 한마디 욕지걸이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려홍이의 팔을 잡아채면서 툴툴거렸다.            려홍이는 아닌게아니라 그 연설을 좀더 듣고싶었다. 하지만 왕털보가 고집스레 팔을 잡아 끄는통에 그 자리를 뜨는수밖에 없었다.    육중한 땅크의 무궤도가 굴러가는 소리, 포를 끄는 견인차의 엔진소리, 번뜩이는 철갑모를 쓰고 따발총을 멘 코 큰 사람들의 발구름소리... 소음에 잠긴 거리는 땀과 화약내 풍기는 행렬을 어디론가 급히 흘러보내고있었다. 장사진을 이룬 행군대렬을 가로건널수 없은 그들은 헌병대감옥아래쪽 관저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거리에 들어섰다. 큰거리에서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역시 분잡했다. 한참동안 걸어가느라니 층집벽가에 사람들이 가듣모여서고있었다. 다가가보니 커다란 종이에 쓴 글이 나붙었는데 그것은 파쑈일제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을 맞이하면서 중공중앙에서 전국동포들에게 고하는 호소문이였다.            려홍이는 복룡이가 팔을 잡아 끌었어도 끝내 다 읽어보고야 자리를 떴다.            려홍이는 비록 이렇게 말은 했으나 그 역시 기진맥진했음을 어쩌는수 없었다. 이런 동란시기에 그라고 출출한 배를 요기할 재간은 없었으니말이였다. 그들은 널판자로 문을 닫아버린 어느 한 잡화점앞에서 다리를 퍼더버리고 앉았다. 날씨는 찌는듯이 무더웠다.    려홍이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고나서 발목을 문질렀다.        가슴터지는 울분이 또다시 솟구쳐올랐다. 옆에 앉은 봉룡이도 공연히 행인들을 흘겨보며 푸푸거렸다.        바로이때였다. 마치 그의 결심을 떠보기라도 하듯이 변두리가 다 해여진 색난 캡을 눌러쓰고 기름때 얼룩진 작업복을 걸친 청년이 먼눈을 팔면서 급히 지나다가 그의 다리에 걸채여 비틀거렸다.        성질이 우락부락한 복룡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눈알을 부라리며 주먹부터 내들었다. 그통에 저쪽은 흠칫 뒷걸음쳤다.            돌연적인 사태에 일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청년이 정신을 가다듬고 대들었다. 키는 자그마하나 당차고 야무지게 생긴품이 호락호락한 축은 아닌상싶어보였다. 복룡이는 두팔로 자기 옆구리를 짚고 턱 버티여섰다. 흡사 곰같은것이 과연 한번 해볼 태세였고 싸움은 조만간에 붙을것만 같았다.        려홍이가 제꺽 중간에 끼여들며 우선 복룡이부터 나무랐다.            복룡이는 어느새 분이 삭았는지 눈섶을 실룩거리더니 악의없이 웃음을 터쳤다.        그제야 그 청년도 캡을 벗어 부채질하면서 어이없다는 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보매 담소자약한 청년이였다.        려홍은 이렇게 기쁜 소리를 쳤다.        그역시 반가와 어쩔줄을 몰라했다. 려홍이는 이 낮선 거리에서 동족의 사람을 만나니 혈친을 난난것처럼 반가왔다.            둘은 함께 어깨를 들석이며 웃었다. 려홍이가 먼저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어디에서 뭘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은        하고 숫기좋게 대답했다. 마치 자기는 의협심있고 순후한 성품을 가진 사람과는 무관하게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듯이 그는 털보인 복룡이를 건너다보더니 불쑥 한마디 건늬였다.        그의 능란한 북방토배기의 중국말솜씨는 실로 감탄할 지경이였다.        왕복룡이는 한족이나 다름없는 말재주에 슬그머니 탐복하며 롱담을 쾌히 받았다.            복룡이는 헝클어진 턱수염을 치켜들고 온 골목이 들썽하게 웃어댔다.            캡쓴 청년은 이렇게 털보를 씨까슬러주고나서 기분좋게 한바탕 웃어대더니 손을 턱 내밀었다.            복룡이가 손을 내밀며 되잡아 구걸하는통에 청년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리고는 이제야 집요한 눈길로 두사람이 입고있는 옷주제부터 더부룩한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깐깐히 훑어보는 것이였다.        려홍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뒤말을 이었다.        청년의 기색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침통한 기색을 짓더니 머리를 끄덕이였다.            려홍이는 격분한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벌컥일어났다.        려홍이의 숨결은 거칠었다. 마치 고요했던 수면이 일점광풍을 만난듯 잠시나마 환락속에 잠겼던 가슴속에 울분이 사품쳐오르기 시작했다.        려홍의 거친 음성은 분노로 하여 떨었다.        조선말에 서툰 복룡이마저 격분해서 턱수염을 떨었다.    려홍이는 바지가랭이를 불쑥 걷어올리였다. 그러자 족쇄에 피인 험상한 숭터가 드러났다.        청년은 숭터를 보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캡을 눌러쓴 청년은 려홍이의 심정을 리해하고 눈시울을 붉히였다.        려홍이는 격분된 심정을 진정하고 잡혀간 사연을 물었다. 그랬더니 박원섭이란 청년은 회사당국에서 이라는 명목으로 로동자들의 로임을 형편없이 잘라내기에 이에 항거해나섰다가 으로 지목되여 잡혀갔다는 것이였다. 이 말을 듣자 려홍이는 자기가 2년전에 경찰놈들한테 억울하게 잡혀가던 일이 회상되여 다시금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그 사람, 당치도 않은 을 들쓰고 이루 말못할 경난을 겪었을 그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이 울컥 치솟아올랐다. 그리고 십상팔구는 벌서 이 세상에 살아있지도 않을 그 사람도 오늘 자기들처럼 감옥문을 나와 친구를 만날수만 있다면 여북 좋으랴 하는 심정이 간절하였다.    이때 량어깨가 햇볕에 그을러 거멓게 된 다른 한 조선청년이 런닝샤쯔의 아래섶을 배꼽까지 말아올린채 씨근거리며 지나다가 저의 동료를 알아보고 소리쳐불렀다.        캡을 쓴 청년은 몸을 홱 돌리더니 그리로 뛰여갔다. 그리고는 그 청년과 뭐라 수군거리더니 그의 바지호주머니를 들춰 담배 한갑과 성냥을 꺼내갖고 되돌아뛰여오는것이였다.        그는 들고 온 궐련과 성냥을 려홍의 손에 쥐여주더니 헐헐 숨찬 소리를 이었다.        소박하나마 그사이에 사귄 친구의 자별한 정분이라 생각하니 려홍이는 가슴이 뜨거웠다. 려홍이는 복룡에게 담배를 넘겨주며 사연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속에 사라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복룡이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    이틑날 정오무렵에 그들 둘은 철길을 따라 걷고있었다. 긴 레루장은 꼭마치 불비에 데여 늘어진 구렁이들처럼 번들거렸고 철길에 깐 자갈들은 햇볕에 가열되여 흡사 가마안에서 방금 구워낸 벽돌처럼 뜨거웠다.    각기 자기네마을을 찾아가고있는 그들은 밤낮사을을 걸려서야 당도하게 된 한 자그마한 시골 정거장에서 서로 갈라져야 했다. 려홍이는 거기서 서쪽으로 70여리밖에 있는 손가장(孫家庄)으로 가고 복룡이는 동쪽으로 산길을 걸어 닷새후에야 당도할수있는 그성(金城)으로 가야했다.    두청년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면서도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려홍이는 철길에서 멀리 떨어진 연연히 푸른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느라니 새삼스레 지난날이 회상되였다, ...    려홍이는 이른봄 논갈이가 갓 시작되였을 때 연기에 그슬린 야장간곁채의 단간방에서 태여났다.        덕성스러운 이웃집로파가 수선떨면서 알려줬을 때 일밭에서 방금돌아온 김덕구는 마당한켠에 있는 섬돌에 걸터앉으며 되려 한숨만 내쉬였던 것이다.        차례로 세워보니 다섯째인데 태를 자르고 열흘만에 죽은 첫딸과 다섯 살까지도 채 자래우지 못하고 병마에 전부 잃어버리고 만 세아들의 기구한 운명과 탐탁한 자기 집 신세를 생각하고 김덕구는 그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몰아쉬였다. 헌데 대가 끊어지지 않으려고 그랬던지 려홍이는 태여나서 무병하게 자랐고 일곱  살을 먹어서부터는 들에 나가 소를 먹이면서 소잔등에서 을 읽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평온한건 아니였다. 그가 열한살나던해에 난데없는 손가네가 오는통에 본토배기지주ㅡ─당가중은 어디론가 쫓겨나버렸고 그의 땅을 부쳐먹던 김덕구는 마을의 여느집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작농으로 되어버렸기에 아들인 려홍이도 따라서 손지주의 소작농의 아들로 신분이 바뀌여버렸던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에 벌써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본래 어려서부터 풀무앞에서 잔뼈기 굵어진 재간있는 야장이였다. 무거운 메와 쇠집게 몇 개만이 유일한 가산이였던 그는 조선을 강점한 왜적을 물리치고저 일떠선 의병들의 칼을 벼려주었다가 그 일이 탄로나는통에 어느날 밤중에 식솔을 거느리고 솔가도주하여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왔다. 처음 몇해동안은 간도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거기서 다시 자리를 떠 여기 이 북만으로 깊숙이 들어왔는데 달리는 살길이 없어서 또다시 야장간을 차렸다. 그랬다가 쉰살도 못넘기고 자기 후대에서나 한번 제 땅을 갖고 살면서 신세고쳐보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런데 그의 유언과는 달리 제 땅은 고사하고 살림은 날로 더 피페하여만가서 집은 거의 파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이 타고난 팔자인지?... 설혹 그것이 숙명적인것이라해도 그에 순복하며 살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극진했던 김덕구는 대를 이어갈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농군으로 만들지 말고 출세시켜보려고 학교에 넣었댔으나 려홍이는 얼마를 다니지 못하고 를 배워주는 선생한테 호된 매를 맞고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려홍이는 생기와 정열과 희망으로 충만되였어야 할 청년시절을 억압과 고통속에서 모대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일련의 고압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른바 을 실시하기 위한 신만주국건설계획방안에는 라는 기편적인 조목까지 있어서 해마다 18~22세의 적령청년들을 뽑아다가 혹사했던 것이다. 려홍이는 열여덟살을 먹던 해(그 전해에 어머니가 세상떴다)에 에 끌려나가 죽을고생을 치렀다.    일제는 을 내걸고 이른바 으로 백성들로하여금 저들의 침략정책을 지지하게끔 강박했으며 해마다 돌아오는 이면 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군하였다. 지어는 조선사람도 에 가까운 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그 기원절을 쇠야한다고 강박했으니 그것은 뭇사람들의 불만을 야기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려홍이는 이렇게 만나는사람들에게마다 격분해서 이야기했다. 그후 얼마안가서 어느놈의 고발로 경찰에 잡혀갔다가 제국을 반대하고 천황의 뜻을 거역한 위험분자로 지목되여 헌병대감옥에 이송되여 정치범으로 갖은 고생을 겪었다.    려홍이는 미결수감방에서부터 복룡이를 알게되였다. 복룡이는 보국대에 끌려나왔다가 기한이 만기되였건만 여전히 돌려보내지 않고 강박로동만시키니 이에 불만을 품고 남까지 충동하여 태공을 하게했던 죄로 감금되엿던 것이다. ...    려홍이는 벗과의 리별을 앞에 두고 응당 약속해두어야 할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생각했다. ...둘은 마침내 지정된 목적지에 이르렀다. 그들은 인적기마저없는 한적하고 초라한 정거장앞에서 마지막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게되였다. 지칠줄모르고 울어대는 숲속의 베짱이들만이 리별을 앞두고 나누는 그들의 오랜 담화내용을 되풀이해주는 듯하였다.        복룡이가 먼저 그 큰 손으로 려홍이의 손을 덥석 잡는데 그의 커다란 두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그들먹히 흘러나왔다. 려홍이는 붉어진 눈시울로 털보의 얼굴을 넋없이 쳐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복룡이는 목구멍에 치미는 뜨거운것을 꿀꺽 삼키며 감격에 떠는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려홍이는 다시한번 복룡이의 손을 힘있게 잡아흔들며 간곡히 말했다.      
350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댓글:  조회:2636  추천:5  2014-08-18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1. 한심한 짓거리   화천현 성화공사교육계의“문화혁명”은 자기들이 아니고는 해낼 사람이 없다면서 맨먼저 고개를 쳐들고 무리를 만든것이 바로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이였는데 이른바“무산계급혁명자”로 자칭하고 나선 그들이 머리악을 써서 고안해낸 제일 첫 번째의 수작ㅡ 짓거리인즉은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나 이 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북방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라는 그곳에서는 한차례 유사이래 전대미문의 희한한 이 벌어지게 된건데 그것인즉은 바로 나의 아버지 김병념(金丙念)이가 혁명렬사자격이 되냐 안되냐를 판명하는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진노하고 개가 웃을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것은 결코 작난이 아니였다. 마음먹고 생사람잡이를 하자고 든 그몇이 굳게 다짐한 끝에 짜고서 벌린 놀음이였기에 계획이 주도면밀했거니와 따라서 살기(殺氣)가 충만해 너울쳤던 것이다. 환경이 그같이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하려고 발벗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공사기무대(公社機務隊)에서 한뉘  뜨락또르를 몰아온 리종철(李鐘哲)이였다. 군대츨신인 그는 공인대표신분으로 그번의 변론에 출면한것인데 너희들은 우선 하는 작법부터 틀려먹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리종철이 말했다. 어느 누가 렬사로 되느냐 안되느냐는 국가정부가 판정하는것이고 이미 그렇다고 판정이 됐길래“렬사증”까지 발급한 것인데 너희들이 대체 뭐가돼서 그것을 맘대도 빼앗아가고 주제넘게 이렇쿵저렇쿵인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하면서 우선 나의 아버지 김병념의 렬사자격문제를 놓고 변론하는것부터가 대단히 미런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의 이름을 하나하나 찍어가면서 작태가 너무나도 방자하니 그렇게 놀지 말라고 충고를 했던것이다. 그러면서 리종철은 성화공사교육계에서는 생사람잡이를 당장 거두는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무지와 폭력이 한창 맹렬히 팽창돼서 기를 펴고 살판치는 세월이라 그 한사람의 건의와 지탄이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것이라해도 그것을 옳다고 나서서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저쪽은 기세가 점점 더올라 압도적이요 이쪽은 자연히 눌리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흑백이 전도되는 한심한 란장판이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분석해보면 그럴법도했다. 모인사람이란 리종철 하나를 내놓고는 다가 성화공사 6개마을의 소학교와 중학교의 선생들이라 그들다가 간이 콩알만해서 불이 제발등에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벌벌떠는 소지식분자들이였던 것이다. 명철보신을 상패로 삼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내본신과 내역성을 들어주는 리종철은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패배당하는 형국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하니까 앞에 놓인건 오로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감내해야 할 준엄한 시련뿐이였다. 나는 그 시련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시기시기 응변의 자세를 취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회의에 참가하라고 부르기에 중학교에 가니 집이 성화대대에 있는 조정희(趙正熙)란 노인이 와있었다.  나는 그것이 혁명자들이 알심들여 꾸며낸 연극의 한 장면임을 어려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를 로 모셔다놓음으로써 내한테 저들의 위세를 보이는 판이였다. 그 조정희(趙正熙)노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거느리는 정찰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인 것이다. 1946년 11월중순, 아버지는 상한에 걸려 거의 죽게된 그를 친히 업어다 벌리(勃利) 남문에 있는 그의 집 식솔과 친척들에게다 맡겨놓고는 벌리의 집에 들려서 하루밤을 지내고 돌아가 그 이흣날 새벽전투를 치르다 참모장 김해정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가 거느린 반의 전원과 함께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때의 일을 잊을수 없다. 내가 내눈으로 직접봤길래 잘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갖고 온 것이 세모꼴꺾이창이 달린 쏘련제 베르단이였는데 나는 그 총을 갖고놀았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와서 나는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유개차에 앉아 벌리(勃利)에서 북쪽으로 첫정거장인 멍쟈강(孟家崗)에 가 역전마당에다 차례로 줄을 지어놓은 여러개의 관중에서 련장이 하나 관 뚜껑을 열어주기에 보니 그안에 전날 병에 걸린 조정희(趙正熙)를 호송하고나서 집에 들렸던 아버지가 시체로 되여 누워있었는데 웬영문인지 상반신은 적삼도 입지 않은 맨몸이였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적탄을 두곳이나 맞았는데 한방은 복부고 다른 한방은 심장이 있는 오른쪽가슴웃쪽이였다. 련장이 하는 말이 시체를 무우굴속에서 찾아냈는데 아버지는 두손에 총창을 꽉 틀어쥐고있더라면서 시체가 불에 타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라했다.   문화혁명직전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뒤늦게야 우리 아버지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조정희(趙正熙)라는 노인이 성화마을에 살고있다는것을 알게되여서 어느날 술근을 받아갖고 만나보러갖던 것이다. 식솔 넷에 단간방이였는데 구들에 편 까래가 매우 헐망했다. 일견하여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인정이 깊어져야 할 사연이 있는지라 반갑기가 이루말할수없었던 것이다.  하면서 조정희(趙正熙)로인은 나를 만나자 손을 잡고 락루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맞이는 성명이 조이권이고 둘째는 조남권이다. 맏이는 그때 생산대서 일을 했고 둘째는 중학을 다녔던 것이다.   한데 그 생존자 조정희(趙正熙)한테 무슨 갑작운이 붙었길래 빈하중농대표신분으로 중학교에 들어가 문화혁명을 이끄는 지도급인물로 되였을가?. 그가 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둔갑을 해도 한심하게 해서 나는 보고도 할말이 없었고 있다해도 목구멍이 메이서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그는 빈농이니 성분이 좋고 출신이 좋을뿐 판무식쟁이나답지 않은 사람이였다. 그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고 증명을 어떻게 서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부터 나의 아버지를 나쁜사람으로 몰아붙이고 그렇게 만들려고 든 그 몇몇 어리석은 자들의 작간에 끌리여서 충분히 리용된되고있은것만은 틀림없었다. 이거였다. 그렇다해서 고개숙일 내가 아니녔다. 나는 그 몇몇 혁명자들의 얄팍한 수작질이 하도 어처구니없고 쓰거워서 속으로 웃고말았던 것이다. 내앞에서 이제 당장 꼭괭이를 들고 벌리17명렬사릉원에 가서 언녕 다 썩어 진토(塵土)가 되였을지도 모를 무덤을 파버리고 뼉다구마저 없새리라면서 길길이 날뛰던 그 몇몇 무지막지한 깍다귀들의 추태를 내가 지금도 눈앞에 보는것만같다. 과연 제바지에 똥싸고 핥아먹기나 할 견강한 무산계급전사들이였다!     조령감의 둘째아들이요 중학생홍위병들중에서도 한창 맹장으로 부상되여 머리를 저어댄 조남권이가 그래도 사람이라서 량심상 뭐가 가책되는것이 있었던지 그날 우리 집에는 까딱 얼른거리지 않고 제또래 몇을 휘동하여 대신 이모네 집에 달려들어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고 한다. 집을 수색하느라 발칵뒤졌거니와 뻔뻔스레도 이모부의 양복바지마저 입고 달아났다는가?... 그날에 벌어진 그 모든 작태가 정장송과 장동화, 심군일 그 셋에 의하여  꾸며진 파렴치한 략탈행위였다는것은 훗날 리지가 회복되여 정신이 자연히 맑아진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한 것이다.   2. 해명안되는 일   세상에 원인없고 리유없는 사건이란 있을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까지도 동창생 심군일이가 지난날 나를 해치느라 놀아댄 그 가지가지의 극적인 극악한 행위들만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서 종시 속에 내려가지 않는다. 내려갈수 없다. 그러면서 머리를 아무리 써가며 연구를 해봐야 지금까지도 그 원인을 딱히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에라 다 지난건데 그만 잊고말자해도 전혀 잊혀지지 않는것이 상처깊은 그 단락의 력사인 것이다. 사람은 인내성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참는것도 용서하는것도 한정이 있는 것이다. 다른 생면부지의 그 누구였으면 몰라도 이건 잘아는 동창으로서 인피를 쓰고 어쩌면 그토록 사람같지 않은 야만의 짓을했느냐말이다?! 인피를 썻으니 인간인가하지 그게어디 사람인가고 내 노친은 살았을적에 여러번이나말했다. 맘속에 오죽내려가지 않았으면 그랬으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내가 한번다시 반목하게 되는 그들 세인물중 장본인이요 첫손을 꼽았던 그사람, 환갑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정장송은 그나마 보복할만한 리유라도 어느정도있어서 문화혁명이 오니 얼싸좋다고 손을 폈다만 장동화와 심군일은 도대체 왜서, 어쨌다구서 사람으로서 그같이 짐승같은 행실을 했냐 그거다. 정장송은 1964년 사청운동 때 같은 연변내기 선생 한분 김용천선생을 잡으려다가 내한테 비난받고 제지당하니 그 분풀이오 나를 기껏 때린다는게 고 망언을 했던 것이다. 그래 내한테서 는 비난의 소리를 들은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소리를 공공장소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진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 본인한테는 대단한 모욕이고 치욕으로 느껴져서 이를 앙가물고 있다가 기회가 되니 보복을 한거지만 장동화나 심군일은 도대체 왜? 왜서 나와 명분이 없는 보복을 하느냐그거다. 정장송은 문화혁명이 끝나서 그래도 두 번이나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자기 때문에 입당할것도 못했으니 소개인이 되어 나를 입당시키겠노라했다. 그가 그러는것을 보면 어느정도 사람이 되어간다는 감촉이 들었다. 그런데 장동화는? 심군일이는? 여지껏 표현이 그득잖다. 장동화는 뻔뻔스레도 였다. 그래서 내한테 한매 단단히 얻어맞았고 시궁창에 바라다니는부덕쥐로 취급받게 된것이다. 한데 심군일이는 대체 어떤가?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그래 장동화모양으로 할건가?  대체 어떤 심통인지 그것을 내가 알고싶다.   나의 노친이 생전에 몇 번 나와함께 심군일이가 우리 집을 그토록 해친 원인이 대체 무엇이였던지 그것을 알아내려했지만 끝내 알아내지를 못했다. 나는 두가지 일이 심군일이가 나와 척을 짖게 된 원인이 아니였는가한다. 하나는, 약혼을 한 심군일이가 잔치날을 받아놓고 당장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한학교의 젊은교원 김덕춘이가 쟈므스에 가서 이제 심군일에게 줄 결혼례물이라면서 사온것이 탁상에나 올려놓을 접시만한 동그란 체경 하나였다. 그것도 그 혼자면 몰라도 장가가는 당자를 내놓고 홍광학교선생 다섯의 명의로 주는 선물이였던 것이다. 내가 결혼했을 때와 비하면 그건 너무도초라했다.  나의 결혼식때는 생산대에서 의 커다란 유리풍경화에다 자모회에서 탁상시계까지 하나 례물로 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님동생하는 옛고향친구 김호일이가 호랑이를 그린 커다란 유리판유화를 선사하고. 그당시 형편에서 그만하면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였다. 나는 대대와 자모회의 책임자를 찾아가 심선생이 이제 곧 결혼하게되리라는것을 알리어 내가 받은것만큼은 몰라도 대대와 자모회서 알고 성의껏 례물을 준비하게 할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덕춘이가 나와는 아무말도 없이 그같이 하니 내가 그보고 그런일을 왜서 토론이 없이 혼자서 결정하느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대방은 아마 내가 돈을 내기아까와서 그러는줄로 알았던지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었던지“씨베! 씨베!”하면서 사온 체경을 내앞에다 둘러메쳐 박살을 내는것이였다. 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저돌적인 행위에 놀라고 기막혀 한참이나 쏘아보다가“젊은놈이 돼먹지 못하게 왜 그모양이냐?”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시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후 김덕춘이도 약혼을 한건데 그는 약혼녀가 달라는 몸을 주지 않는다하여 대들보에다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와의 모순은 풀지 못하고만건데 그처럼 심군일이도 뭔가 잘못오해하고 나에게 적의를 품은게나 아닌가한다. 김덕춘이나 심군일이나 보면 속이 졻아도 형편없이 졻고 다혈질인지 조폭하다. 본성이 그러하다는것을 알았으면 내가 주동이 돼서 허심탄회를 해야 옳았을텐데 여지껏 그러지를 않았으니 내탓도 있겠다. 하지만 아래의 일들은 그렇지 않다. 심군일이가 우리 홍광마을 소학교에 교장으로 부임되였어도 내집에 와서 숟가락 한번 든적없고 술한잔 같이 나눈적도 없은 그것이다. 서로간 처지가 그렇게 되였음에는 심군일가 우선 책임져야 할 곡절이 있는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성명이 강명숙(姜明淑)이였는데 홍광마을에서는 내내 산파(産婆)로 존경을 받아온 강혜선의 조카벌이 되거니와 같은 강씨라 하여 우리 집 사람을 면목을 알자마자 “언니, 어니”하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우리 집에 놀러를 자주다녔다. 어느날 우리 내외는 토론한대로 점심저녁 두끼음식을 잘 준비해놓고는 심군일내외를 청하기로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량주를 모시러간건데 문을 떼고 들어서니 심군일이가 제 처의 머리카락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구들바닥을 돌면서 질질 끌고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아프다고 아부재기를 치고 심군일이는“이 쌍년아! 이 쌍년아!”하면서 죽은 개를 끌듯 그냥끌면서 태를 쳤던 것이다. 그래 둘째젖먹이 애를  업고갔던 우리집 사람은 너무도 놀라고 억이 막혀 하면서 부부간에 화목하게 살아야지 남을 웃기며 이래서야 되느냐며 말렸더니 심군일이가 했던 것이다. 싸움을 말렸다가 되려 욕을 얻어먹은 나의 처는 분해서 돌아선 후로는 그만 발길을 끊고 만 것이다. 심군일의 처 강명숙은 그때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낮에 남편이 달라는 몸을 주지 않았다가 그같이 모진 형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불쌍한 그녀는 그후 딸을 하나 낳아주고 몇해지나 젊은 나이에 그만 죽고말았다.    우리집 사람은 그때의 그 일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면서 여러번이나 도리를 떨었다.     3. 모욕적인 날조   우리 집 노친의 눈에 심군일이는 일찍부터 악인으로 각인되여 있은 것이다. 때 심군일이가 그를 멸시한 것을 보면 상상키 어려울지경 이여서 언어도단이다.     매양 우리 집이 거덜이 나던 그날이였다. 이때는 쇠줄에 발이 찔려 기혼한 어머니가 문짝에 들리여 집으로 옮겨진후였는데 심군일이가 이제 태여난지 반년밖에 안되는 둘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있는 우리 처를 길복판에다 세워놓고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이같이 제마음대로 날조한 억측으로 무턱대고 따지고들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꼭마치 히스테리발작이 멎지 않은 미친개같았다. 나의 처도 만만치 않게 태도가 견정했다. 그러니 심군일이가 손가락을 거의 코밑까지 드리대고 바들바들 떨면서 욕지걸이를 퍼부었던 것이다.   심군일이는 제뒤에다 세워놓은 나를 피끗 돌아보고나서 얼굴을 다시돌리더니 어성을 한층높혀 제멋대로 거짓말을 해댔다. 나는 하도어이없어서 콧방구를 뀌였다. 나의 처의 이런 단호한 대답질에 심군일은 그냥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어가면서 요 개쌍년이 거짓말하는것 좀 봐라. 집에다 라지오를 놔두고도 그걸 듣지 않았다는게 어디 말이 되느냐고 소리를 뽑았던 것이다. 우리 노친은 저세상으로 가기 며칠전까지도 그때의 그 억울하던 장면을 회상하고는 고했던 것이다. 과연 사람이 어떻게 돼먹었으면 그렇게까지 지독한 악물로 보였을가? 나는 요즘와서야 심군일이가 전에 그같이 동창과 이를 악문 리유를 다른 한 방면에서 찾아보게 되였다. 그러나 그역시 가설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로나  될  뿐이다.. 이제는 몇십년이 지난 먼 1964년 4청때의 일이다. 그때 을 잘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계급교육을 첫 자이에다 놓고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리하여 한때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중시하여 열조를 일으키기에 이른것인데 이쿠쓰탠(忆苦思甜)하면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글쓰기를 무척좋아한 나는 한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수집을 다녔다. 듣자니 벌리(勃利)일대에도 우리 조선족동포가 집거해 사는 부락이 여럿되거니와 이야거리도 있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게된건데 거기 후춘툰(厚春屯)에서 산적이 있는 한 중년의 녀인이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해서 소문을 낸다는 것이였다. 그래 내가 그게 대체 누군가 알아보니 녀인은 성명이 심계화(沈桂華)라했다. 하여 한걸음 더 그의 가정리력을 알아보게된건데 그는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였다. 후춘툰(厚春屯)하면 전에 동창생 심군일이네가 살았던 마을이 아닌가? 심봉사라면 그는 심군일의 아버지일것이다. 내가 심군일의 아버지는 눈이 멀었다는 소리를 중학을 다닐때 들어서 아는것이다.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한다는 심계화(沈桂華)인즉 바로 동창생인 심군일의 누나였던 것이다. 심군일한테는 우로 그 누이말고도 형이 둘있는데 맏형은 팔부를 겨우면할정도에 일이나 꾸벅꾸벅 잘하고 둘째형은 마음좋고 어진데 그만 아랫것을 잘못썼다가 몇해 감옥밥을 먹은적이 있는 사람이였던 것이다. 집안형편이 대략 그러하니 힐끔하게 자랑할것이 없었다. 한데 무슨눔의 이쿠쓰탠(忆苦思甜)이란말인가? 내가 보건대는 우선 이쿠쓰탠(忆苦思甜)을 다닐 조건과 자격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봉사니 한뉘 일을 못했을거요 자연히 가난했을것이다. 그러니 자식들을 섧고 고생스레 자래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계급압박이나 계급투쟁에다 련계시키는건 개잇발을 상아로 팔아먹는 격의 억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취재한 그것을 쓰지 않고 내가 살고있는 한 공사내 성화마을에 사는 함명옥(咸明玉)녀인의 가정사를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로 만들어 신문에다  냈던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자 즉시 효력을 냈는바 반영이 좋았다. 우리 성화공사의 당위서기로 오래있다가 후에는 화천현현장으로 발탁한 선우승이라는 분이 그당시 합강지구내 여러 조선족공사들의 사청교육을 맡아서 지도했는데 내가 쓴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가 적시에 나와 좋은 효력을 냈노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심군일이 그일을 알면 혹시 불만이 생겨 분노했을수있겠다. 왜서 동창의 가정사는 몰라봐주는가고. 차라리 그일을 그가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정장송이처럼 내한테 보복할만하 리유가 생기겠으니말이다. 그러면 피장파장이 될게 아닌가! 심군일이는 하여간 대단히 약은사람이다. 사람을 때이고 뚜드려마스고 빼앗는것을 따쟈챵(打砸强)이라는데 그 최선봉이였던 심군일이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거니와 되려 중학교장으로까지 급을 춰서 해먹다 오솝서리 퇴직한것을 보면 처세술(處世術)이 대단하다. 아니면 그놈의 정책락실기관이 눈이 멀었던지. 문화대혁명때 겪은 일을 하나 더 말해야겠다. 그는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제 심리상의 쾌락과 야릇한 만족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악성을 갖고있는 철면피한 인간인 것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심군일은 애들을 시켜 나를 교무실에 불러다 꼭괭이로 학교서쪽켠에 있는 몇군데 남아있는 낡은나무뿌리를 꼭 파버려야한다고 명령하고나서 집으로 가면서 일이 끝나면 자기한테와서 꼭 보고하라는 것이였다. 하여 비를 후즐근히 맞아가면서 나무뿌리를 다뽑고나서 그의 집으로 가게된건데 가보니 희한했다. 벽과 천정을 빈자리없이 몽땅 도배를 했는데 책장과 화보장들은 몽땅 나의 소설책과 화보를 파한 것이였다. 그가 흐믓해서 나를 향해 거즈너기 웃는 꼴이 어떠냐, 봤지, 가슴아플거다 하고있었다. 바로 그것이였다, 나에게 자극해서 심리상 고통을 주자는 그것!... 나는 파렴치한 그 낯짝을 정말 올리차놓고 싶었지만 그냥 참는수밖에 없었다.    4. 고인의 안식을 빌어          노친은 생전에 남과도 이런 소리를 한것이다. 둘째란 나의 둘째아들 성천(星泉)이를 가리키는데 내가 판결에 넘겨져 미결수감방에서 지내는 그 45일사이만도 새끼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처의 처지는 말이아니였다. 남편이 이제 20년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무기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아예 총살을 당하고말리라느지 갖가지 요언이 무성해 심리고통이 심한데다 농촌이니 먹을건 그런대로 있었으나 병이 나니 돈이 한푼도 없어서 그게 문제였다. 월급을 끊고 주지 않은지가 4년철,  손에 푼전한잎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혈을 몹시했다. 의사를 보이고 치료를 받으려해도 할수가  없었다. 이런때에 쟈므스탕창(사탕공장)에 있는 한 무자식부부가 어떻게 알고 기저귀와 싸개를 해서 갖고와서 젖먹이 둘째를 저들이 기르겠으니 달라했던 것이다.  그들은 달라면 인차주리라 여기고왔던 것이다. 나의 처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키워야지 하고 굳게 결심하니 그들은 다시두말없이 오섭서리 되돌아가고말았다. 그후 나의 처는 하혈이 점점 더 심해 부득불 시집올때의 천날옷을 비롯해 좋다는 견지들은 다 팔아 돈을 만들어 병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사나이뒤에는 그를 받들어 성장시킨 위대한 녀인이 있었다. 올해의 6월30일 오전여덟시반경, 52년간을 고락을 같이해온 내 노친이 불치의 심장병을 앓다가 73세를 일기로 끝내 내곁을 떠나고말았다. 그러니 그가 세상을 하직한지가 어느덧 두달이 되여온다. 하건만 나는 한시도 끊지 않고 내내 회억속에 묻혀지낸다. 이역시 내 인생궤적의 프로그램이 아닌가한다. 7월 2일, 내노친의 장례를 치른 그날의 정경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각인되여 영원히 잊혀지지않고 생생히 남을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생각밖이였다. 우선 수도빈의관의 그 고급스럽고도 문명한 현대식의 시설과 정경에 나는 감동하면서 모든 근심을 풀어놓아 마음이 편해지게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인터넷 자은천하(慈恩天下)를 찾아 거의 매일이다싶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있으니 그 효성이 과연 지극하다. 내가 만약 지난날 그 무리에 목숨을 잃었더라면, 그자들의 야심대로 처와 자식들이 멸살을 당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였겠는가? 이 세상에 나와 내 식솔을 추억해주는 망령(亡靈)이라도있을가? 그날 노친의 유상을 중간에 놓고 13개의 커다란 화환으로 장식된 장엄한 장례식장에세 묵도를 올린이가 40명을 넘었으니 그들 거의가 나의 두자식의 동창아니면 극진한 친구들이였다. 사업이 바쁘건만 원지에서 온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72세나는 다다히로 타무라선생의 래림에 나는 정말 고마와 감탄했다. 그는 한해전 노친이 병원에 입원했을때도 고맙게도 일부러 찾아와 기도를 올리기도했던 것이다. 우리 큰애 친구의 벗이란다. 나는 효성을 다하는 아들들이 있음으로 하여 여지껏 시름놓고 내쓸 글이나 쓰면서 자유로이 편안히 살아온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나와 내 집을 멸망시키려고 기껏 발악했던 그 동창을 생각하면 오직 멸시와 비웃음만 나온다. 포부가 바다같이 넓지 못해서 숨기지 못하는 내 감정으로 치부하면 되겠다.   심군일이는 아들이 없다. 있다면 개아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비가 사람이아니기에. 딸이 커서 남편을 얻었는데 그 사위라는것이 심군일이가 지금 데리고 사는 후처가 낳은 아들이다. 그러한즉 군일이는 지금의 노친을 뭐라 불러야 옳은가? 처라불러야옳은가 아니면 사돈이라불러야 옳은가?  사전에 거기에 대서는 해석이 없다. 그따위 란혼은 짐승이나할것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다 코를 쥐고 웃으면서 이런일은 머리에 털나서 처음본다고 말한다. 남을 욕하기 좋아하는 심군일이가 허세를 부리느라 제꺽하면 서슴없이 내치는 소린데 이런 쌍욕을 진짜먹어야 할건누군가? 내가 보건대 이 쌍욕을 얻어먹어야 할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심군일이밖에 없는것 같다!        
349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1) 댓글:  조회:2727  추천:7  2014-08-13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1)     이 글은 가슴에  맺힌 원한을 생전에 풀지 못한채 그대로 저세상까지 가지고 간 나의 두 친인ㅡ 존경하는 어머님과 사랑하는 처의 유언에 좇아서 쓰게됨을 말하면서 독자는 내심하게 한번 읽어보고 사색해보기 바란다. 그런다면 과연 고맙겠다. 이라 하면 한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거나 함께 졸업한 관계여서  상식적으로도 사이가 좋아서 자연히 가깝고 친하게 지내기 마련이건만 내가 초중다닐 때 벌리중학을 같이 다니고 같이 졸업했던 심군일(沈君日)이만은 왜 그렇지 않은지 지금까지도 그 영문을 모르니 답답하고 리해가 안된다. 그러니 아직도 적원(積怨)만이 쌓이여 하는 생각뿐이다. 가슴에 여적지 서려든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더욱 가슴아프다. 고 과연 속담그른데 없나보다. 짐승도 유정(有情)해서 아는 사이면 꼬리를 젖는데 사람으로서, 더구나 동창으로서 아무렴 어쩌면 그렇게까지야 지독하고 악독하게 놀아댄단말인가?...과연 귀신이 들어도 피똥쌀 일이다.... 딱친구는 못될지언정 그래도 우리는 동창생이 아닌가? 하건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같이 서로간 원쑤로되고 말았던가? 아무리 따져봐야 학교같이 다닐때는 물론 그후 사회에 나와 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선생질을 하면서도 우리는 낯한번 붉힌적이 없는 사이가 아니였던가. 한데 왜서? 왜서 우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이런사이로 돼버렸냐말이다?    아래것은 이 끝나가면서 나를 평판하는 성화공사혁명위원회에다 내가 피해받은 상황을 간단히 써서 올려바치면서 보태진 원본을 종근으로 남겼던것인데 오늘 그것을 그대로 베껴 대중앞에 내놓는다.      격강이 천리라지만 결국은 모두가 내탓이였다. >때 자기혼자면 몰라도 죄없는 어머님마저 그같이 련루시켜 이루형언키어려운 곡경을 치르게 만들었던 이 불효자는 멀리떨어져있음을 빙자하여 이붓자식의 손에서 병을 앓고있은 어머니를 제때에 자주가보지 않았거니와 시간이 긴박한 사정이라지만 아무튼 돌아가신 어머님의 장례에마저 불참했으니 낯이 뜨겁기만하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서 세상뜨기 한해전 내가 문안을 갔을 때 어머니께서 내한테 토로한 원한에다 나의 처ㅡ노친의 유언까지 있었기에 나는 부득불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하면서 어머니는 같은날 8촌짜리 사진을 찢어버린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심군일이였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앞에 무릎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 그저 이 아들이 너무나도 무능하고 못나서 무고한 어머니를 련루시켜 욕을 보게했거니와 국가에다 목숨바친 아버지마저 받아야 할 대접을 못맞게 만들었으니 그저 죽을 죄를 졌다고 했다. 그러고나서는 나는 어머니와 심군일 걔가 나하고 어느때 무슨일로  원쑤지간이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노라했다. 사실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사실 나도 동창생인 그가 왜서 그같이 미친개같이 포악스레 행패부렸는지 그게 전혀 생각밖인 것이다. 그렇다는것을 솔직히 말하고나서 나는 어머니와 그 원인을 이제 아무 때든 살아서 꼭 밝혀내리라했던 것이다.             내가 복수심을 품었고 복수를 하면 무자비하게 하리라는것을 잘알고있었던 어머니는 집요한 눈길로 쏘아보면서 절대그러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했던 것이다. 내가 세운 손날로 붉은벽돌 한장을 단번에 두동강내는것을 친히 본  어머니였다. 벌리중학에 붙기직전이니 그때 내나이 14살이였다.         하면서 어머니는 여지껏 용케 참고지냈을라니 이제와서 더 못참겠느냐 하면서 제발 미런한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어머님의 그 당부는 옳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그런식의 복수는 현명하지 못한것 같다.    하여 나는 여지껏 어머님의 권유에 따른것이다.        심군일은 그날 나의 어머니와 이렇게 따지고나서는 제 호주머니에 넣고있었던 “렬사증”을 꺼내여 흔들어 보이더란다.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니 심군일이는 그 렬사증을 갈기갈기 찟어버리고는 어머니의 얼굴에다 침을 뱉았다고 한다.          그 소리에 격분하여 어머니는 그를 쏘아보면서 맞받아 네놈이 지금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치는거냐했던 것이다.    나의 부친은 성명이 김병념(金丙念)인데 위만때 징병에 뽑혀 석두하자(石斗河子)에 가 훈련을 받은 후 돌아와 쟈므스철로경호대에 배치되여 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은건데 광복직후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 조선독립영이 생기자 거기에 가입해 교련이 되어 의란(依蘭)에서 부대의 정편훈련을 맡아 지도했고 그것이 끝나자 이어 토비숙청에 나선건데 참모장 김해정과 함께 자기의 정찰반을 거느리고 화남현경내에 있는 영평강금광을 보위하러 갔다가 1946년 11월 17일, 전투에서 희생되였던 것이다. (관련글: , )       나의 아버지 김병념(金丙念)이 렬사가 옳으냐 아니냐는 국가정부가 판정하고 을 내준건데 일개 소학훈장질이나해먹은 보잘것 없는 녀석이  제밸대로 그것을  찢어버렸으니 뭐라했으면 좋을가? 제가 대체 뭔데? 이래서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고 내가 늘 말하는것이다.   1964년도여름,“4청”때의 일이다. 화천현성화공사교육계의 공청단선전위원에다 소선대총보도원이였던 내가 당시 공청단중앙서기 호요방의 문건을 절달할 때였다. 그 문건에 호요방이 고 한 구절이 있어서 그것을 내가 그대로 읽어내려간건데 심군일이가 문화혁명이 오니 나보고 걸고들면서 나의 불통을 차놓았던 것이다. 이건 악한이 아니고는 하지 못하는 짓이다. 홍광대대위원회 판공실은 모두 세칸이였는데 맨서쪽칸에서 내가 xxx에게 얼굴을 맞아대고 맨 동쪽칸에서 어머니가 심군일에게 구타를 당했던 것이다. xxx는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그냥 때렸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붓고 얼굴이 퉁퉁부어 호박같이 된건데 나중에는 눈을 뜰수없어서 앞을 제대로 보기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지경이 되면서도 나를 때리는자의 그 요구를 절대들어줄수는 없었다. 나도 공산당에 가입하려 애썻을 뿐 반당심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서 기어코 반대한다고 대답하라는건가? 나는 그가 내 입에서 한사코 그 한가지 대답을 받아내려드는것을 보고 명백히 깨달은것이다. 매를 못이겨 그렇다고 말만하면 그건 승인하는 것이니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는것이요 자기에 대해서 자진 사형선고를 내리는 꼴이 되고마는 것을!....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이들 셋은 짜고서 나와 내집식솔들을 한꺼번에 멸살하려들었던 것이다. 이 일은 훗날 인간성이 부활해서 스스로“我看错人了"하면서 내앞에서 머리숙여 자기를 뉘우친 그 사람이 토로한 것이다. 하는 심군일의 질문에 나의 어머님은  했더니 심군일이가 하면서 귀뺨을 때리더란다. 그래 어머니가 격분해서 고 힐란했더니 그가 하면서 두 주먹으로 량볼을 마구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통에 머리가 헝클어져 내렸다. 그것이 손에 감겨드니 심군일은 싸그쟁이같은 그 중학생계집애를 시켜 가위를 가져오게해서는 그것으로 어머니의 머리를 반남아 마구깎아버렸다. 그리고는 계속 때렸던 것이다. 이러는 판에 중학교의 김용일과 오상국교장 등 몇이 거기에 나타났던 것이다. 년세많은 오교장은 젊은놈이 제에미벌되는 사람에게 마구행패질이니 보기가 너무안돼서 라 지시했는데 너무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심군일이가 그를 향해 고 눈을 부라렸다고한다. 중학교의 그 싸그쟁이 홍위병계집애가 우리집 탁상뻬랍에서 들춰낸 8촌짜리 커다란사진ㅡ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17명렬사추도식장을 찍은 사진을 가져다 바쳤다. 심군일은 받아 보고는 이를 앙물더니 그것마저 갈기갈기 찢어서 어머니의 낯에다 뿌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격노하여 그를 욕했다. 그랬다고 심군일이는 중학생홍위병총지휘였던 김용일이가 손에 들고 꺼들거리는 굵은쇠줄꼬쟁이를 채듯이 가져다가 그것으로 어머니의 왼쪽발등을 찔렀는데 기술을 어떻게 부렸는지 꿰구멍이 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다..... 여기까지는 어머님이 나에게 들려준 사실 진술이다.   바로 이때 서쪽방에서 머리에 혹이 나도록 되게 얻어맞은 나는 하라는대로 목에다 란 패쪽을 건채 밖에나와 서쪽의 대대혁명위원회판공실과  우리 집 사이의 큰길복판에 사원들이 실컷 구경하게 서있었기에 어머니가 문짝에 들리여 집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목격한건데 검정고무신에 차고 넘치는 피가 길에 점점이 줄을 그으면서 떨어졌다. 오상국교장이 따라가면서 혀를 찼다. 나는 격분이 끓어 부르짖었다. 어머니는 내목소리를 잡아듣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를 덤비지 말고 꾹 참으라는 당부였다. 나는 구곡간장이 끊어지는것만 같았으나 별수없었다. 네녀석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부모를 우롱하고 손을 댄단말인? 달려가 심군일이를 당장 각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없어서 원통했다. 나는 눈에서 불이 일었다. 벌레나답잖은 하찮은 놈이 눈깜짝새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로 둔갑한것에 나는 적이 놀랐거니와 가슴에 증오와 저주가 부글부글 괴여올라 속으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님 역시 일개농촌부녀였다. 하지만 그이와 같은 농촌부녀는 아마 썩 드믈것이다. 어머님의 생평을 보면 결코 보통이 아니였다. 나의 어머니 최정순(崔正順)은 시집오기전 어릴때 의란, 화남일대에서 발생한 토룡산폭동(土龍山暴動)을 겪었거니와 폭동 후 항일련군 8군의 항일때도, 동북민주련군의 토비숙청때도 자기가 갖고있는 손재간ㅡ 재봉기술로 헌신했거니와 토지개혁시기에 들어와서는 주둔부대재봉소의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마을 빈농회의 부녀주임을 겸하여 지내기도했던것이다. 그같은 나의 어머님은 정직하고 대바르고 의지굳은 것으로 하여 이 아들의 거울이 되고 귀감이 된 것이다. 내가 문학의 길에서 이만큼이라도 성공을 보게되였음에는 어머님의 공이 큰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여러번이나 일깨워준 말씀이다. 인생이 한번뿐인데 사람은 리상이 있어야한다면서 무엇에든 성공하자면 노력을 끊지도 잃지도 않는 견강한 투지가 있어야 한다면서 나를 격려했고 분발하게끔 이끌어주었던 어머니인 것이다. 하기에 나는 마음속에 어머님 하나만을 우상으로 모시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348    에세이 무지한 자들의 각성 댓글:  조회:3373  추천:9  2014-07-26
  에세이 무지한 자들의 각성     마음선량한 사람들은 아마 거의가 지금도“무산계급혁명”하면 무조건 신성하게 여기는데 습관돼서 그것을“위대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혹자는 나를 인식이 틀렸다할것이요, 혹자는 립장이 틀렸다 할것이요  혹자는 지어 나를 반동이라고까지 말하겠지만 방법없다. 나는 살아서 제 속심말을 해야겠다. 이건 내가 보고 겪은일이였으니 절대거짓말이 아니요 지어서 보태는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네가 성분이 빈농이면 깨끗하다는 그게 아니다. 그따위 계급각성을 갖고 무슨눔의“무산계급혁명”을 한다고 떠다고은단말인가? 따라서 한가지 단언하게되는건 네가 출신이 아무리좋고 성분이 아무리 깨끗하다해도 무지하면 야만이 되고 악한이 되고만다는 그거다. 그래서“유일성분론을 부르짖지 말라”는 주장이다. 지난일, 겪은 일들을 보면 그저 한심한 것들이라 죽어도 눈을 감을것 같지 않아서 말을 하게 되는데 혹자는 우선 나의 글 제목부터 신통치않게 여길것이요 이게 어느땐가 몇십년전의 일을 아직도 끄집어내서 곱씹느냐면서 나를 속이 좁아도 한심하게 좁아 피지 못한 사람이라할것이요 사사의 감정에 잡혀 개인보복이나한다고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겪은 아래의 몇가지만은 세상이 알게 공개해야겠다. 그래야만이 내 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풀리고 체증도 다소해소될것같다. 어떤이는 저세상으로 이미 가버렸으니 불귀객이 된거고 어떤이는 아직도 눈이 멀뚱멀뚱 살아있는걸로 알고있다. 이 글을 그의 자식들이 본면 아마 다가 저으기 놀라면서 의문을 사고 불만을 품기마련이지만 달리는 방법없다. 미런스레 악한 짓을 하고서도  한마디 반성도 없는자를 나는 인간으로 치지 않으니 그 장본인의 이름들을 그대로 밝혀 놓으련다. 과연 고맙게도 성화의 백성들은 나를 혹독하게 굴지 않았다. 그런데 그몇은....    (1)   화천현 성화향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6개촌락으로 무어진건데 거기 동북켠 맨 안쪽에 있는 마을ㅡ 홍광촌에는 리원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이가 나와 비슷한데 “문화혁명”직전에 외지 어디에선가 이사를 왔길래 숙친한 사이가 아니였다. 그는 대대정미기를 다루었다. 어느해 겨울인가는 홍광대대혁명위원회에서 “관제대상"인 나를 그의 조수로 일을 하게끔 배치했던 것이다. 헌데 재수없을라니 어느날 밤참을 먹고나서였다. 집에 와보니 장갑을 식당에 두고왔길래 나는 그것을 가져오려고 대대식당을 다시찾아갔던 것이다. 이틑날 아침에 일하러 가야하는데 추운 겨울이라 장갑을 꼭 껴야했다. 그래 별생각없이 문을 뚝 떼고 들어갔더니 그사이 그 리원식이라는 이 "빈농혁명자"가 아래도리를 내놓은 채 식모하고 들어붙어 씩씩 방아를 찧으면서 그짓을 하고있는 것이였다. 우연이지만 나는 보지말아야할것을 보았길래 스스로 앙화를 빚은 것이다.   이틑날, 낮에 이어서 밤에도 계속 정미소일을 해야하는데 누구의 발상이였던지 그 리원식이가 식모의 남편과 정미소안에 있는 자그마한 휴식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였다. 정미기는 그냥돌아가고 나는 마대에다 나오는 싸래기를 받아 정리했다. 그러고있는데 아느새지나서 술에 취한 리원식이가 씽 나오더니 너 이놈아 싸래기에 왜 굵은 쌀알이 섞이는거냐 하면서 그 우악진 주먹으로 내 머리를 힘껏 답새기는 것이였다. 은연중 심한 타격을 받고보니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틑날 아침에는 구토를 심하게 했다. 그래서 부득불 공사병원에 가 의사를 보이게 된건데 그한테 맞은게 “뇌진탕”이라고 진단이 나왔던 것이다. 싸래기레 굵은 쌀알이 섞이는가 안섞이는가는 그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부릴탓에 달린건데 나를 왜 때리는가? 그리고 기실은 그날 싸래기에 굵은 쌀알이 섞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리원식은 남의 녀편네와 불륜의 그짓을 하다가 들키우고서는 내 입을 막아놓느라고 기껏 머리를 쓴다는게 그꼴이였던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내가 앓아서 일을 못하게 되니 리원식은 도루 투쟁대에 올라 망신을 하고말았다. 그것이 그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망신이 아니고 뭔가?  미런한자의 총명함!  忍忍忍 !... 忍忍忍.!... 나는 내 가슴속에다 눈물을 떨구면서 참는수밖에 없얶다. 소시적에 부대에서 자라면서 안충모아저씨한테서 배운재간 하나만은 당당했다. 엄지손가락 한번 면바로면 그자의 명줄을 얼마든 당장 끊어버릴수 있는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않았다. 그럴수 없었다. 가뜩이나 반혁명분자의 집이라면서 용맹무쌍한“혁명자”들이 온 가족을 멸살하겠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날뛰는 때가 아닌가. 내 하나의 목숨을 그자와 막바꾸면 몰라도 나는 자식 둘과 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갈리는 이를 앙물기만했다. 증오의 피눈물을 그저 가슴속에다 뚝 뚝 떨구기만했던 것이다. 忍忍忍 !....忍忍忍 !....   (2) 내가 반혁명분자”란 커다란 패쪽을 목에다 걸고 이웃마을 료신촌에 가 투쟁받을 때의 일이다. 그 마을의 군인출신이며 일잘하고 부지런한 장말생의 처 리옥선녀인이 씽 달려나오더니 나에게 따지고 드는것이였다. “이놈아, 네 애비 어떻게 죽었니?” “토비를 숙청하다가 죽었습니다.” “네 애비 잘 썩어졌다, 잘 썩어졌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손에 쥐고 나온 꼬챙이로 내 입을 쑤셔놓았다. 토비를 잡느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렇게 치떨린단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쌍년아!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개보다못한 년!... 숨이 넘어갈 듯 아파난 나는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뱉으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너무너무 통탄해 속으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피를 헛흘렸습니다! 헛흘렸습니다! 정말 헛흘렸습니다!”   (3) 공사내 여섯개마을“혁명자”들이  중성촌 구락부에 모여 나를 투쟁할 때였다. 집이 료원촌에 있는, 위만때부터 한마을에서 살았길래 우리 부모님들과는 잘아는 사이였던 강봉학이라는 안로인이(남편은 성명이 김홍주고 아들은 명철, 그는 소시적부터 내동무였다)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더니 남들은 전혀모르는 일 한가지를 적발하는것이였다. “내가 모르는줄아니, 너의 할애비는 이름이 김석길이구 독립군이였다, 독립군이였어. 그래가지구두 무슨... 내가 모르는줄아니, 너의 할아버지 독립군이맞아! 맞단말이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에구!!”했다. 대단한 놀램이였는데 그들 다가 독립군이라는것이 무엇인지도 분명 모르고들있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그 어떤 다른 무슨 나쁜것으로 인식하고들있는것 같았다. 투쟁대회가 끝나 문으로 나올 때 젊은 놈 하나가 지키고있다가 발로 코를 올리차서 나는 그날 숱한 피를 흘렸다.               더구나 제가 글을 배워줫던 제자한테 그같이 당하고보니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4) 판결에 넘겨졌던 내가 무죄석방이 되어 이웃마을 료신소학교에 가 다시금 교편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이제 출근한지 사흘째되는데 그날은 공사방영대가 와서 영화를 돌리기에 학교는 교학을 중지했다. 료신마을에서 뒷줄 도랑 가까이에 있는, 촌위생소가 붙어있는 서켠의 빈집에서 낮에 영화를 돌렸는데 중간에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불시로 와야와야 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나는 영화에 정신이 팔리다보니 맨마지막에야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보니 마을사람들이 한군데모여“이걸 어쩌오! 이걸 어쩌오!”하면서 복대기치고 안달을 떼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급히 헤집고 들어가보게된건데 댓살난 어린 계집애가 사선에 들어 생명이 오락가락했다. 제 할머니를 찾아 오다가 물이 고여있는 종자굴에 미끌어떨어진것을 건져다나. 계집애가 생명이 그같이 경각에 이른판에 누가 내놓은 구급법이였는지 비누물을 먹인다면서 야단법석을 치는것이였다. 내가 보니 애는 입을 꼭 다물었는데 입술은 진한 푸른잉크빛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 질식상태였다. “나좀 봅시다!” 나는 무작정헤집고 들어가 애의 입을 벌리고는 오른쪽 식지를 넣어 목구멍을 막고있는 혀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그랬더니 아이는 나의 손가락을 깨물었다가 “휴ㅡ”하고 숨을 톱아내는 것이였다. 죽어가는 애의 생명을 내가 그렇게 구해낸 것이다. 모두들 귀인이 면바로 나졌다고 감탄에다 칭찬이 대단했다.  “지식분자가 다르긴다르구나! 사람이 살자면 지식이 있어야겠다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보니 그는 키가 꺼두룩한 신창섭이라는 어른이였다. 언젠가 혁명자들이 내가 쓴 장편소설원고며 편지며 사진들로 선전판을 만들어 그것들을 나의 등에 지워가지고 각 촌을 조리돌림하면서 투쟁할 때였다. “네가 무슨눔의 개발을 그렇게 잔뜩그렸느냐?”며 투쟁하던 분이였는데 아들셋에 딸이 있지만 그는 어느 하나도 공부를 제대로시키지 않았다. 하니 그런 집안에서 지식인이 생기긴 천부당만부당한 일. 그런분이 이제라도 지식의 중요성과 귀중함을 그같이 깨달으니 아무튼 대단히 반갑고 고마운일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그를 만나면 꼭꼭 인사를 먼저하군했다. 나도모르겠다, 그의 무엇이 좋은지? 아마 이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는 모양이다.    (5)   하나더있다. 문화혁명 때 나의 일기책들을 거둬가면서 다 보고는 꼭 돌려주리라 명백히 말해놓고 결국 한나도 돌려주지 않고 말끔히 없애치운 더러운 자ㅡ 내가 어느글에선가 사람이 아니라 시궁창에 바라다는 부덕쥐라고 묘사했던 장동화는 아직도 살아있는걸로 알고있다. 딸농사만 착실하게 지었다고 조물주가 불쌍히여겨서 그런지 그가 오래사는게 과연 희한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나보다. 나의 장편소설원고를 빼앗아다 말끔히 없애치웠거니와 장동화와 짜고 근본 있지도 않은 “죄”10여가지나 만들어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요 지어는“후환이 없게 하자면 그늠의 새끼들까지 싹 다 없애치워야한다”면서 한때 구체적인“전략”까지 비밀리에 내왔다는 정장송은 공사무장부장이 되어 권총차고 꺼들거리면서 나를 포승지워 감옥에다 처넣더니 결국 무슨꼴이 됐는가? 그는 제가 뿌린 작탄에 한쪽눈알이 빠졌거니와 장암에 걸려 환갑도 못쇠고 그만 죽고말았다. 죄를 만난것이다. 그의 큰딸은 어디로 가느라 차타러 나갔다가 날아오는 차바퀴에 가슴을 맞아 즉살하고. 그 장면을 내가 직접목격했다. 횡래지액(橫來之厄)이란 곧바로 이런것을 놓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는 중학다닐 때 내한테서 배운 제자였다. 한창나이에 애비먼저 죽었으니 과연 불쌍하다. 한데 따져놓고보면 그건 다 그의 前代가 지은 죄악탓이아니겠는가십다. 자작지얼(自作之孽)이란 바로 이런걸 보고 하는 말이다. 헌데 정장송 그자와 같이 처음부터 짜고 꼴보기싫게 교활하고도 극악스레 놀아댔던 장동화는 어떤가, 그가 천벌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니 과연 별일이다. 하나님이 눈이 멀었는지?...   량심을 떼여 개를 먹였는지 “무죄석방”이 된 내가 이웃마을에 전근하여 소학생을 가르치면서 빼앗겨 잃어진 첫장편소설을 비밀리에 다시썼더니 그걸 어떻게 냄새맡고는 또 잡자고들었던 자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와서는 우리 집에 잘다닌 할빈하향지식청년 장재윤이더러 나의 반동적인 언행을 적발하라 꼬드겼거니와 “송죽이! 왜 또 글을 쓰는가? 전공사 군중이 몇해간이나 동원되여 사람이 되라고 도와줬건만 지금까지도 글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니 과연 정말 너무 악질적이다.”고 하였던 그였다. 과연 그야말로 희한한 계급각성이다! 소설을 계속쓰면 그게 악질적인가? 작가로 되면 그게 사람이 못되는건가? 문화혁명이 끝나가고 내가 죄없는 사람이라는것이 판정됐건만도 눈이 빨개서 그냥 생사람잡이를 그같이했으니 그놈의 불굴의 혁명정신에 과연 탄복이간다. 무지하지 않고서야 사람이면야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할수가 있으랴!? 장동화한테  묻고싶은건 한가지ㅡ 도대체 과연 누가 악질인가? 내가 악질적인가, 아니면 네가 악질적인가? 허심하지 못하면 무지해지고 무지해지면 그렇게 죽을때까지 자기를 뉘우칠줄을 모르는 것이다. 장동화는 지금와서까지도 그냥 "쏸장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 할건가? 내가 어느글에선가 시궁창에 바라다니는 부덕쥐라고 묘사한바있는데 이제 아무때건 다시만날이 있을것이다. 말한마디 천량빛감는다했다. 장동화는 한매 더 맞지 않겠거든 늦지만 지금이라도 지난날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게 마땅할 것이다. 권고한다. (관련글 에쎄이 "사람과 짐승의 차이" )  
347    에쎄이 노친과 함께 불상을 우러르던 날 댓글:  조회:3082  추천:5  2014-07-14
   에쎄이 노친과 함께 불상을 우러르던 날   나한테는 남들이 알면 이상해하리만큼 고집스러운 버릇이 하나 있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아는 중요일이나 행사같은것은 종이장에다 담은 얼마간이라도 기록해놓아야 속이 편해지는 그것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먼 훗날 아무 때건 자기가 살아온 인생궤적을 얼마간이라도 돌이켜볼수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래회를 넘기니 이제는 전만 기력이 퍽 못해지는게 알린다. 없던 건망증까지 겹치니 어떻게 한다?...  하길래 더구나 부득불 그렇게할수밖에.   나는 본래 소학 5학년을 다닐때부터 일기(日記)쓰는 습관을 길러 그후 거의 하루도 빼놓지를 않았다. 그래서 중학을 다닐때는 물론 졸업하고 농촌에 와 3년간 농사일을 할 때에도,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고 선생으로 사업을 하면서도 내내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은것이다. 그래서 여러권의 책이 된건데 생각지도 않은 “문화대혁명”이 오는 바람에 그것들은 나의 "죄증"을 만들려고 접어든 고약한 보복자의 작간에 의해 전부잃어지고말았다. 가져다 보고돌려준다했지만 하나도 돌려주지 않아 전부없어지고만 것이다. 아무렴 목숨같이 귀중히 여기는 개인이 귀중한 보물을 가져다 그같이 깨끗이 혁명해치우다니 원, 뻔뻔스럽고도 야만스런 개같은 인간들이지!. 지금도 그일만 생각하면 복통이 터지면서 이가 부득부득 갈리지만 별수없다. 누가 이런 미개한 나라에서 태여나라던가?....   내가 지금은 전처럼 일기를 쓰지 않고 그저 “비망록”이나 만들어놓고는 가담가담 몇글자 적어놓군한다. 이제 또 어느때  빼앗길까봐 겁나 그러는게 아니다. 사람이 나이를 주어먹어 늙어가니 점점 게을러져 자연히 그렇게 하게된다. 그러면서도 옛습관을 영 버리지 않은것은 한가지 명확한 깨달음ㅡ 이제는 중국도 깻으니 다시는 지난때처럼 그렇게 야만적인 혁명은 하지 않을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망록”을 보니 우리가 할빈을 떠나 북경에 이주한 날이 2004년 8월 27일. 그러니까 이제 두달이면 북경시민으로 되어 산지도 어언 만 10년이 되여오는 것이다. 광음이 여루라더니 아닌게아니라 빠른게 세월이다. 북경은 생각한것과 같이 력사유구한 고성(古城)이라서 도처에 볼거리들이 많고도 많다. 그런데도 그지간 나는 글만쓰느라 노친을 데리고 잘나다니지를 않았으니 지금은 후회된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날에 北京龍行天年商貿有限公司에서 저들의 상품을 팔아먹기위해 그것을 선전하느라고 원명원(圓明園)유람을 조직하길래 노친을 데리고 한사람이 45원씩 팔면서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적어놓은것이 있고 또 하나의 비망록은  “2008년 10월 21일오후 지하철편으로 가까이에 있는 韓美林藝術館을 찾아 그의 탁월한 예술작품들을 관람하고 돌아옴.” 이라고 되여있다.  나는 그날의 행차가 어제일같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앞의 果園站에서 동쪽으로 달리는 지하철에 올라 세정거장만인 림허리(臨河里)역에 내리면 곧바로 “한미림예술관”이니 전체로정을 다해봤자 거퍼 5~6분도 채 안걸리는 거리다. 문건에 기재된것을 보면 여기 북경에는 1999년에 한미림예술진렬실(韓美林藝術陳列室)이 락성되였고 2008년 6월 25일에는 바로 내가 있는 통주에서 한미림예술관(韓美林藝術館)락성식을 올리고 문을 연 것이다. 이 예술관을 내놓고도 수도에는 그 한해전이였던 2007년에 개관한 “北京韓美林藝術館”이 있어서 6차례 전람을 시킨건데 내놓은 예술품이 무려 5000여점이 된다고 한다. 그 개인의 이름을 띈 이같은 예술관(藝術館)은 항주에도 하나있다. 뿐만아니라 거기는 그것말고도 “천서루(天書樓)”라 이름을 지은것도 하나 더있다. 사실이 그러한즉 그가  창작해 이 세상에다 내놓은 예술작품이 대체 얼마나될까!? 그 수자는 딱히 통계를 내기도 어려울지경이라니 입이 딱 벌어진다! 관람자는 그 누구나 그의 예술작품들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뿜지 않은이가 없다고한다. 그러한즉 한미림이야말로 명실공히 세계급의 일류의 예술대사(藝術大師)인 것이다. 벌써 1980년6월25일에 한선생은 미국의 뉴욕, 보스턴 등 21개의 도시에서 개인 그림전람을 꾸렸던바 그로인하여 뉴욕과 샌디애고에서는 그에게 그 도시의 영예시민열쇄까지 내주었던 것이다. 너는 아무 때건 마음대로 와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아닌가! 그리고 뉴욕, 보스턴에서는 지어 1980년 10월 1일을 “한미림의 날”로 명명할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우리 중국사람 중 그 누가 또 그같은 영예을 받아봤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품전람은 무려 20여개 국가에서 열렸으니 그는 그야말로 과시 세계적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한데 그의 성장을 보면 생각밖으로 과연 눈물겨워 다시금 사색하게된다.   한미림선생은 산동제남의 사람인데 음력으로 1936년도에 태여났으니 나보다 세 살우인것이다. 그렇지만 초기의 공부는 내보다도 썩 더 못했다. 두살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제남1중을 겨우 3개월다니고는 군대에 나갔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12살이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문화대혁명”때 혁명파들의 작간에 걸려들어 감옥밥을 먹은게 1,900여일이였다니 제천이 흐려 피똥싸고 통곡할 일이 아니였는가! 하지만 그런속에서도 그는 예술가로 성장할수 있음에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그는 줄곧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수감생활을 하는 기간 그는 작디작은 미세한 개미로부터 먹거리를 훔쳐내는 쥐새끼에 이르기까지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에 대해서 비교연구를 깊이깊이 한 것이다.  감옥에서 종이를 구할수 있는가, 어디 있기나한가, 그에게는 부러뜨린 젓가락이 화필이였고 옷자락이 화판이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바지에다 그림을 그렸다. 그게 모자라니 옥졸친구들의 해여진 옷자락마저 달라해서 화판으로 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고 덧붙인것이 4백여쪽. 그림공부를 그렇게 한 한미림이였다.   “한미림예술관”을 들어가 보는데는 돈주고 표를 살 필요없다. 신분증만 내놓으면 그가 누구건간에 가리지 않고 다 들어가 구경할 수 있게끔 되여진 곳이다. 지금 그렇고 앞으로도 내내 그럴것이다. 이건 예술가 韓美林선생의 후더운 인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가! 한미림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자연히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지어 쾌락해질때도 있다. 그가 그리거나 조각한 것들은 거의가 동물들의 각이한 형상들이다. 창작시 작자의 심정과 관찰력이 환히 알린다. 어느 한 전람실에는 각가지 개들의 형상을 조각한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여보, 이 사람이 아마 개를 무척 사랑하는모양이요!” 내가 노친과 이런 말을 하면서 안색을 살피는데 느닷없이 내옆에 한사람이 나타나 끼여드는 것이였다. “그말씀 맞습니다. 그 사람은 개를 무척좋아하지요. 건 왜서일까요? 감옥에서 나오니 모두들 슬슬 피하는데 개만은 반갑다고 꼬리를 저었던겁니다.” 훗날 나는 사진을 보고 그가 바로 그 기념관의 주인이요 우리  중국은 물론 세계적인 탁월한 예술가로 첫손을 꼽는 한미림예술대사인것을 알았다....    그날 나와 노친은 벽한켠을 다 차게 만들어 고정시켜놓은, 한백옥으로 제작된 굉장히 큰 불상 반신상앞에 이르러 발목이 잡혀서 오래도록 서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정교한 조각품도 다 있을가!” 나도 노친도 생전처음보는지라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그것이 나와 노친의 속심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성품을 나타내는 불상의 그 그지없이 인자해보이는 모습은 우리들 가슴속에 그토록 영원히 지울수 없는 표상으로 남은것이다! 불상의 도가 펼쳐지는 세상은 그 얼마나 평화로울가!... 악이 없고 자유로운 그 세상은!!..... . 韩美林     5165 刘大为 已售           이 불상은 한미림의 다른예술관에 있는 것임. 全
346    (시) 그이 다시는 못오시련만 댓글:  조회:4041  추천:2  2014-05-04
    그이 다시는 못오시련만   경애하는 류주석께서 기차타시고 수천리 북방변강 찾아오시던 그때는 공장마다 농촌마다 증산절약 불꽃튀여 희망도 기쁨도 아지랑인 듯 피여나   그이의 거룩한 모습 우러러 받들며 사람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진 맹세 (황금의 이삭으로 조국땅 휘감으리 강철의 날개로 비약의 속도 재우치리)   잊지 못할 그 일도 기억에 새로운데 어이해 그이는 우리를 떠나셨는가! 미처 고별의 인사 나누지도 못하고 미처 불같은 사랑 다 쏟아붓지도 못하고.   아, 돌아가신 이야 다시는 못오시련만 사람마다 애타게, 애타게 그리는 마음 (그이께선 오늘도 살아계신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장정의 진두에....)          1980.8 “흑룡강일보”진달래 文革老照片.国家领导人惨遭无法无天的红卫兵猖狂揪...            류소기의 죽음 (합비)                  彭德怀元帅被批斗            陈毅元帅被批斗              彭真惨遭批斗              薄一波惨遭批斗   国家领导人集体遭批斗   王光美惨遭污辱批斗   陆定一惨遭批斗     习仲勋遭批斗   万里遭批斗   范瑾被批斗   任仲夷被批斗 宋任穷被批斗              
345    • 수필 • 기리기리 모시고싶소. 댓글:  조회:3682  추천:3  2014-04-30
  • 수필 •           길이길이 모시고싶소   할빈에 이사를 와서야 나는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쏴눕힌 자리를 가보게되였다. 할빈에는 선각자 유지인사 여러분이 계셔서 해마다 잊지 않고 안중근의 령혼과 그의 업적을 기리고있다. 뿐만아니라 일부 민족심있는 기업인들도 해마다 기념활동을 하기로 작정하고 준비사업들을 하고있다고 들었다. 할빈시 상지화하민속문화쎈터의 조선민속기념관에서는 지어 경치좋은 모아산과 잇닿은 원보산릉원(元寶山陵園)의 공공집탑기념관(公共集塔紀念館)에다 상징적으로 안중근의 령혼을 첫 자리에 모시기까지 했다. 이곳은 국가의 자연보호구로서 장차 유람지로서 전도유망한 곳이다. 노력이 얼마나 주도한가!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은 아직도 다가 민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있는 행사였지 국가정부측에서 돌보아 장악하고있는건 아니다. 허지만 이쯤으로라도 그이를 잊지 않고 기념한다는것만도 아주 당연하고도 좋은일, 잘되는일이라는 생각이다.  올 3월 26일이면 안중근의사가 순국한지 91주년이 되는 제삿날이다. 이날을 맞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면면히 서려온 회포를 얼마나마 풀어보고자 필을 든다.   내가 안중근이 어떤분이라는것을 알게된것은 건국이 되기 한해전인 1948년도라생각된다. 그때 내 나이 8살이였는데 나는 동북에서 국민당의 중앙선견군토비숙청이 거진끝나갈무렵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부친님께서 생전에 소속했던 부대에 얹혀자랐다. 그 부대가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 조선독립영이였는데 항간에서는 라 불렀다. 그 부대의 한개련이 지금도 화남현경내에 있는 빠후리(八虎力)의 돌배골에 주둔하고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의 금광을 보위하는 한편 당지의 인민정부를 도와 토지개혁과 계급대오정리를 시작하고있었던거다. 그때 부대는 군중을 계몽시키느라 여러방면으로 선전활동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그해 여름의 어느날이였다. 문화간사가 다른애들과 한창 놀음에 정신팔려있는 나를 자기곁으로 부르더니 부대에서 연극 을 연출하려는데 나더러 안중근의 아들 준생(俊生)의 역을 맡아 하라면서 대사를 외우게 하고는 몇가지 동작을 가르쳤던 것이다. 극중에 나는 세 번인가 등장하는데 한 번은 안중근이 거사를 이루기 위해 집식솔들과 리별할 때의 장면이고 한 번은 안중근이 거사를 이루고나서 로씨야헌병손에 잡혀 려순감옥에 갇힌다음 집을 수색당하고 엄마와 함께 경찰의 조사를 닫을 때의 장면이며 마지막의 한번은 안중근이 일제의 재판에 의하여 사형당한 후 그의 시체에 엎어져 하고 부르면서 우는 장면이였다. 극본이 그렇게 되어있은것이다. 극장은 마을복판에 있는 석마간ㅡ 풀무와 잡동사니들을 밖에다 드러내고 거기다 판자로 림시무대를 만들었는데 헐망하긴해도 꽤나 널직한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놀 장소였던 것이다. 련습첫날이였다. 무대에 나타나게 될 할빈역전ㅡ 악곡이 그치지 않는데 기차에서 내린 이또 히로부미는 로씨야대신과 악수하고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각국 령사들이 서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이때다.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들어가 로씨야군의 대렬뒤에서 기회를 노리고있던 안중근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권총을 뽑아 그자를 향해 련거퍼 세방 갈긴다. 칼찬 헌병과 장교들은 모두 놀라면서 일순간 멍해진다. 안중근은 권총쥔 손을 머리우에 올리면서 를 세 번 높이 웨친다. 그제야 경찰들이 덮치여 그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고 포박한다. 안중근은 순순히 체포되거니와 외려 비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나는 그때 이 장면이 잘 리해되지 않아 옆에있는 군인아저씨와 캐물었던것이다. 그랬더니 그 군인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뚱기면서 웃었다. 놀림절반 힐난절반이였다. 그랬다. 내가 안중근의 아들역을 하면서 울기는했어도 그의 정신과 의협심과 의기를 어찌 제대로 알기나했으랴.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 구국제민의 뜻을 품고 이국으로 류랑하며 풍상을 겪은 안중근, 그는 의사이기에 앞서 참다운 지사였다. 안중근이야말로 우리 조선민족정기의 본보기로서 장렬한 그의 죽음은 천추에 이름을 기리날릴것이다. 그의 의거는 온 세계를 진감했거니와 직접적으로는 평화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동양 여러 약소국가의 인민들을 굴함없이 일떠나 싸우도록 고무했던 것이다.                         男兒有志出洋關, 生不成功死不还                       埋骨岂肯先墓下, 人間到處盡靑山                         사나이 큰뜻품고 타국으로 떠나가니                       살아서 성공못하면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                       유골을 구태여 선조의 무덤옆에 묻으랴                       세상엔 가는 곳마다 청산이 무진하데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맹세가 바로 이러했다.   안중근의 의거당시 중국에서 발간한 민우일보(民旴日報)는 여러차례나 론설을 써서 이라고 그의 의거를 높이찬양했거니와 라고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격살한것을 정당한 행위라 변호했다. 그러면서 고 이또 히로부미의 죽음을 조소했던것이다. 91년이다! 이제 9년만 더 지나면 안중근의사가 순국한지 한세기된다. 종자없이 생겨나는 생명이 없거늘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뀐다고 어찌 자기 민족의 얼과 정기마저 세탁해버릴건가? 가슴에 손을 언고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 참으로 어떻게 살아남았던가?.... 나는 안중근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의 남아ㅡ 독립투사들의 불멸의 업적과 그들의 보귀한 령혼으로부터 내가 살아가야 할 리치를 차츰 깨닫게 되였고 오로지 굴할줄 모르는 분발만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준다는것을 절실히 터득하게되였던 것이다. 인간일진대 무지각에서 깨여남ㅡ 그것이야말로 가장 다행스러운일이 아닐가! 중국의 저명한 작가 양호 전황(錢皇)이 안중근의사를 추모하여 지은 옛시 한구절을 빌어 이 글을 끝마친다.                    황금으로 그대모습만들어                  내 엎드려 큰절 올리고                  기리기리 모시고싶소.                                                  2001. 1. 13.  할빈에서.   
344    단잠자는 아이 (외1수) 댓글:  조회:2966  추천:1  2014-04-29
    단잠자는 아이 (외1수)   단잠자는 아이   폭신한 이불속에 파묻혀   아이는 자고 있다     머리맡에 책가방놓고       단잠에 흠뻑 젖어서   부드러운 입술 장미꽃 핀 듯   두뺨은 능금알 같은데     땀에 젖은 깜장머리에도        달콤한 꿈은 깃들었구나   웬 꿈을 꾸고있느냐?    실같은 눈썹 찌푸리더니      얼굴에 웃음꽃 피우면서        “선생님, 젯!”하는 잠꼬대   애는 웃는구나 꿈속에서    숙제를 다하고 자더니       아마도 백점을 맞은 모양          어머니도 기뻐 잠자는 애             입마춰주네.       (1978. 12. 9. “흑룡강일보” 진달래)         애기손    발그레한 손  애기손  조막손   “아유, 요손 좀 보지!”  어른들 애기손보고  깜찍하다 웃네    오늘은 작아도  래일은 커질 손이니  웃지들마소    그 손에 재간이 쥐여있소  그 손에 힘이 쥐여있소  그 손에 미래가 쥐여있소    발그레한 손  애기손  조막손.           (1982년. 자치주성립30돐기념 “서정시집”)
343    잃어가는 터전 스러져가는 정 댓글:  조회:2841  추천:0  2014-04-28
   잃어가는 터전 스러져가는 정   나는 선조의 뼈가 묻힌 곳이 어디라는것을 알고는있지만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국경이 장벽같이 앞을 막아서다. 하기에 비록 선조가 물려준 땅이 아니지만 내가 소시적에 즐겁게 뛰놀며 자라난 곳─ 정이 묻힌 빠후리(八虎力)의 돌배나무골을 나는 고향으로 여겨온거다. 여기서 300여리 떨어진 그곳은 기차타고 두시간이면 능히 갈수있는 거리다. 이같이 지척에다 두고서도 한번 다녀오기는 왜 그리도 힘들었던지? 지금 내가 살고있는 향(鄕)에 나와같이 그곳에서 동년을 보낸 동무도 있고 비록 한마을은 아니라지만 장대 하나를 사이두고 가까이에 산 소학시절의 동창도 있는데 동년의 꿈을 키운 곳이라서 그런지 그들도 마음의 고향은 나와 꼭 같았던 것이다. 하여 우리는 모여앉기만 하면 흘러간 동년을 그리면서 거기가 지금은 어떤지 하고 뇌이군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애틋한 그리움만 절절해지는건 어째서일가? 고향정이란건 워낙 이런가보다. 아무튼 시원히 풀지 않고서는 못견딜 그리움이였다. 그래서 재작년그러께의  여름, 우리는 끝내 여섯이서 런닝그에다 이란 글자까지 새겨입고 어느날 함께 고향방문길에 올랐던 것이다.   내가 소년시절을 보낸 돌배나무골은  빠후리역(八虎力驛)에서 동으로 약 15여리가량 떨어져있는데 생겨난지 꾀 오랜 금광마을이다. 나는 광복이듬해의 겨울부터 새중국이 건립되던 해까지 만3년을 그 마을에서 보냈다. 한 것은 토비숙청에 나선 나의 부친이 생전에 소속했던 부대가 바로 그곳에 주둔했기 때문이였다. 동북자치군 합강군구의 1퇀 2영이였던 그 부대를 항간에서는 혹은 라 불렀는데 600여명의 전사들은 잔악무도하고 혈채많은 사문동, 리화당, 손영구 토비무리를 숙청하는 전투마다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쳣거니와 세운 공도 많아 이름이 날렸다. 그때 남편을 잃고 청춘과부되여 의지가지할데라곤 없었던 나의 어머님은 군대재봉소에서 재봉침으로 군인들의 옷을 짓는 일을 했다. 하여 나역시 군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그들로부터 전투얘기를 듣고 노래를 배웠으며 글도 배우고 말도 먹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내 평생에는 잊지 못할 감미로운 추억을 심어준 즐겁고도 뜻깊은 나날이였다. 더구나 그 돌배나무골에서 서쪽으로 높은 산 몇 개만 넘으면 다른 한 금광마을ㅡ 나의 부친과 함께 순난한 17용사가 더운 피 뿌린 최후의 혈전장인 영평강(永平崗)이 있는거다. 연고없이야 어떻게 정이 생기랴? 아마 그래서 그 고장은 내 가슴속에다 더 애틋이 자리잡았으리라.!   군인들은 나를 친혈육같이 여겨 지극히 아끼면서 사랑해주었고 정감이 있는 인간으로 되게끔 길러주었다. 부대는 거기서 토지개혁과 정비훈련을 끝마치고는 더 머물러있지 않고 남부전선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침 정처없이 떠돌이를 하던 할아버지가 찾아오시여 우리는 그 자리에 남아 그 돌배나무골에서 남쪽으로 약 7여리 막바지에 조선동네가 따로 생기니 그리로 이사했다. 그때 새로 생겨난 그 마을의 이름이 작은 돌배나무골 즉 쑈리수고우(小梨树沟)였다.   만40년만이다. 내 기억속의 고향은 어디로갔느냐? 떠날 때 28호가 오붓하게 살던 동네가 이제는 200호도 넘는 알쭌한 한족마을로 변해버리고말았다. 돌배나무골에 이젠 돌배나무가 없어졌다. 책가방메고 달랑달랑 넘던 그 개암나무장대가 지금은 중의 까까머리모양으로 말끔히 깝지가 뒤번저져 곡식밭이 되고말았다. 그리고 저 앞내의 무성하던 물개암나무며 아가위나무들을 이제는 한그루도 찾아볼수 없고 수정같이 맑디맑던 청계수는 탁류로 되어 사품치고있었다. 이것이 그래 노루, 사슴이 뛰놀고 꿩이 무리지어 내리던 내고향이란말인가? 인간에 의하여 험하게 파괴되고 변모한 자연! 무지가 세상을 오염하면서 이같이 생태균형을 잃고있으니 이제 차례지는 건 참으로 무엇일가?....   나는 내가 살던 옛집터를 찾아냈다. 그 자리는 지금 관내에서 이사온 성이 리씨인 한족이 근년에 새로 벽돌집을 지어놓고 살고있엇다. 우리는 기념품으로 준비해갖고 간 런닝그를 그와 촌장, 지부서기, 소학교장에게 주었다. 그네들은 그리움을 못이겨 찾아간 우리들을 마치도 개국공신인양 여기면서 그야말로 열성을 다해 접대했다. 마을사람 다가 그러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건만 서글퍼지는 내 마음 달랠길 없는건 또 왜서일가? 서쪽 장대너머에는 고향방문을 간 우리 모두가 소시적에 소학을 다닌 학교마을이 있었다. 헌데 지금은 거기가 만경창파로 변해버렸다. 인민공사화때 저수지가 되는통에 살기좋던 향양촌(向陽村)도 중심촌(中心村)도 다가 물밑에 매몰됐고 거기서 살던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말았다. 과연 가슴만 쓰라려나는 과거요 스산하기 짝이 없는 살풍경이였다! 하다면 우리 동포들의 거주지를 현재가 만들고있는 풍경은 어떠할가? 지난해 가을. 나는 를 나선 연변의 소설가 류연산과 한국 서울신문사의 김명환기자를 배동하게 되었다. 우리가 해림의 산시(山市)에 가서 김좌진장군의 구광과 그곳 독립군과 주민들이 사용했던, 내가 장군의 딸 강석누님과 함께 앞내가와 오랜 잿더미속에서 찾아낸 커다란 석마판과 대종교표식인 방원각을 새긴 석마돌을 사진찍고 쟈므스(佳木斯)로 돌아올 때였다. 그날은 장날이라 그곳의 철북거리가 복잡해서 경적을 아무리 울려도 차가 빠져나가기 과연 힘들었다. 애가 나선지 연변서부터 택시를 몰고 온 아가씨가 하고 도달댔다. 나는 확끈해나는 낯을 돌려 차창밖으로 아무리 찾았으나 동포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가려볼줄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이젠 쌀에 뉘만해지는 우리 동포가 아예 외형마저 동화를 해버려서인지?....   벌리(勃利)까지 득달하고 보니 밤이였다. 우리는 식사부터하고봐야 했다. 이런차 마침 이라 쓴 간판이 눈에 띄이는지라 거기다 차를 세웠다. 한데 김기자가 먼저들어가더니 하면서 기분상해서 나와버렸다. 우리는 이런 모양으로 네 번이나 련속 속히우면서도 제 동포가 꾸리는 판점은 끝내찾지 못했다. 화남교외(樺南郊外)에 있는 조선마을에 들렸을 때도 그 모양 그 꼴이였다. 이거야 꼭 우리동포가 꾸리는 판점이겠지 하고 들어갔더니 맞아주는 이는 역시 한족이였다. 알고보니 워낙은 그 마을의 아무개가 시작한건데 전해에 넘겨주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한다. 남은 앉은자리에서도 잘만 버는데 우리는 왜 가야만하는가? 주인없이 헐망해지는 집들, 황페해지는 논판.... 어떤데서는 이젠 아예 온마을이 통째로 한족에세 먹혀버린것도 한둘이 아닌 현실! 점치기 어려운 운명앞에는 락관이란 허세(虛勢)가 아닐가. 어쩌면 내 동포들이 피와 땀으로 일쿤 땅, 두손으로 일떠세운 삶의 터전 하나하나가 지금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저수지의 혼탁한 물에 매몰되고마는듯한 느낌이여서 내 가슴속에서는 물이 아닌 뻘건것이 뚝 뚝 떨어진다.                                                  1997. 2. 26 
342    힘들게 내린 뿌리 흔들리게 하지 말자 댓글:  조회:3308  추천:4  2014-04-24
            힘들게 내린 뿌리 흔들리게 하지 말자   마침 잘벌린 토론이다. 개혁개방이래 국문이 열려 한국나들이가 시작되면서부터 적잖은 우리 동포가 고국과 조국, 리향민과 국민 등 의식면에서 심한 착란과 곤혹을 겪고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필자는 그 원인이 사상이나 립장에서 기인된다기보다 지금 주요하게는 상기의 단어들에 대한 인식부족에 있지 않느냐 생각하면서 그것만 깨우친다면 착란과 곤혹쯤은 해소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긴다. 통털어 7천만으로 집계되는 우리 겨레를 놓고 조선에서는 조선땅을 떠나 사는 사람을 라 명명하면서 그 수를 500여만으로 추산하고있는데 그중 현재 중국에 살고있는 동포수가 1,927,278명으로서 전 해외동포수의 39%를 차지한다.(1994년통계) 보다싶히 이같이 적잖은 수의 우리 조선족은 다가 제 조상을 조선땅에 묻어두고 살길을 찾아 월경한 이주민의 후손들인 것이다. 바로 이같은 처지로 하여 우리는 지금 조선땅에서 살고있는 동포와는 색다른 이중성분의 사람으로 되어버린것이다. 왜? 그것은 바로 우리가 도 있고 도 갖고있는 사람이기에. 산설고 물선 이국타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어떻게 생소한 지리와 풍토환경에 적응하며 어떻게 그 땅에다 자리잡고 자기의 지위를 세우면서 살아가는가하는 것이 물론 주요하게 그 나라의 국책여하에 달려있지만 자신의 태도와 노력여하에도 많이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바뀜으로하여 이민자의 사회적위치 사회적지위도 변화되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력사만 간단히 회고해봐도 이 점은 자연히 증명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연변의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흑룡강으로는 일찍이 17세기중반기부터 동포가 들어와 살았다. 그중 집중이민시기가 천총(天聰)년간(1627~1635)이였는데 그때 만주씨족에 가입한 조선사람이 42개 성(姓)이였다고 에 기재되여 있다. 이민수가 점차늘어나 1757년에 이르러서는 흑룡강성의 녕안현만해도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주위에 조선족주민이 대략 4,000여명되였다 한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의 10년간에 조선땅의 북부에서 력사에 보기드믄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살길을 찾아 분분히 솔가도주, 비법월경하여 흑룡강까지 깊숙이 들어왔던 것이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의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 무가내니 언어붙롱인 그네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는 류리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서 조선의 리조정부에 넘겨준바있다. 그러했은즉 당시 몸하나 둘곳 없어 남부녀대로 떠돌아야했던 우리 선인들의 머릿속에 , 는 굳어진 쓰라린 슬픔밖에 무슨 반가운 느낌이 있었겠는가!   청조(淸朝)가 봉금정책의 페기를 선포한 1883년이후, 특히는 본세기초 조선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이 됨으로 하여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떼를 지어 들어왔는바 그 수가 무려 1백여만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적인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다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힘차게 추진시켰던 것이다. ( 박영석)   한편 독립운동단체들은 지주와 소작인사이 차지(借地)와 소작료문제, 조선사람의 법적인 귀화권문제, 조선사람을 위한 경찰권과 교육문제, 중국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횡포 그리고 마적들의 횡포로 인한 조선사람들의 피해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뿐만아니라 독립운동자들은 만주에 있는 50여개의 독립단체들을 무어 준국가식의 정부인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議府), 신민부(新民府)를 세워 만주땅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의 자치를 실현하고저 진력했던 것이다. 한데 그 최고목표를 보면 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였으니 민족주의선양이 고양(高揚)된것만은 사실이다. 하여 당시 망국의 설음에 젖어 있은 모든 동포들의 머릿속에 깊이 심어진것은 오로지 는 사상과 주장, 갈망 그것뿐이였던 것이다. 그 실례를 하나만들어보자. 당시 리상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봉밀산(蜂蜜山) 밑에다 동포마을을 일떠세워놓고는 그것의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 지었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니 그 하나의 집념이 얼마나 주체화되였는가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한즉 설령 귀화권문제가 해결됐다해도 리향민의 심리는 그냥 갖고있었을 것이니 중국이 이제는 내 나라와 마찬가지라는 생각과는 너무나 소원(疏遠)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일본침략자가 9.18사변을 일으키자 북만에서는 한국독립당의 당군이며 그 전해에 신민부의 후신이였던 한족총련합회(본부는 해림의 산시에 있었음)의 무력을 모체로 하여 창립되였던 한국독립군이 구국군과 합법적인 관계로 손잡고 출병하여 피어린 항전을 벌리였던 것이다.  2,500여명에 달하는 한국독립군인들은 여러차례의 싸움에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했고 전과역시 혁혁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충용무쌍하게 만들었던가? 그것은 바로 중국군과의 련합을 이룩하여 대일전에 참가했으니 이제 전쟁이 승리할 경우 강화회의를 통하여 조선이 독립할수 있으리라는 확신(確信) 그것이였던 것이다. 한데 동북의 군벌이였던 장학량이 항전을 견지할 념은 하지 않고 관내로 내빼는통에 시종 동북군과의 합작에 이뢰했던 독립군은 물자공급이 끊어짐으로 하여 더는 싸울수없어서 해산되고 만 것이다. 때는 1933년도 10월이였다.   그때로부터 동북항일전의 간거한 임무는 주로 중국공산당이 받아 메였던 것이다. 그리고 항일호소에 향응하여 수많은 지성인ㅡ 조선족 열혈남아들이 용약 떨쳐나 앞장서서 생사판가름의 혈전을 이어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그들은 단지 조선의 독립 그것만을 위하여 싸운것이 아니라 참혹한 재난에 빠진 전 동북의 3천만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광명한 새동북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싸운것이다. 우리 동포로 놓고보면 그것은 각오였고 그것은 의식의 전환이였으며 그것은 광의적인 일보의 전진이였다고볼수 있다. 허형식, 황옥청, 리학복, 리일평, 리성림, 김근, 김정국.... 흑룡강에서만도 동북의 광복을 맞아오기 위해서 이같이 우수한 항일장령과 많은 동포젊은이들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였던 것이다. 전국을 해방하는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흑안령기슭으로부터 해남도까지, 료동반도로부터 신강끝까지.... 광활한 중국대지 그 어디엔들 우리 동포 열혈남아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데가 있으며 넋을 파묻지 않은 곳이 있는가! 동포수가 43만인 이 흑룡강에만도 동포렬사가 2,675명.(1982년통계. 독립군희생은 들지 않았음) 우리가 흘린 피 그래 적었단말인가? 조상이 어디에 묻혔는가만을 굳이 따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 자격이 당당하거니와 응당 그렇게 되어야한다.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곳도 고향이요 내가 태여난곳도 고향이다. 하지만 조국은 하나뿐, 국적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렇지 않는가? 힘들게 내린 뿌리 흔들리게 하지 말자  !                                        1995. 4. 11. 흑룡강신문.                                                                               현상문화토론                                    정정: 아래의 글은 장편전기 40. 댓글에 답을 한 나의 글인데  잘못올리였음. 응당 그쪽으로 옮겨가야할것이다.
341    창작자에게 참고될만한 일화 (2) 댓글:  조회:2432  추천:2  2014-04-23
    * 작가의 체험 *   우리의 선배들은 “작가의 학교는 생활이다”라고 했다. 과연 훌륭한 말이다. 글을 바르고 잘 쓰기 위해서는 매개 작가들마다 생활속에 들어가야 함은 더 말할것도 없다. 생활속에 들어가는 것은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한데 체험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이다. 한가지 례를 들기로 하자. 한번은 발자크의 친구가 그를 찾아갔다가 발자크가 안락의자에 자빠져 숨을 톱는것을 보고 깜짝 놀래여 “빨리 의사를 부르시오. 발자크씨가 죽습니다.”하고 소리쳤다. 그 웨침에 제정신이 돌아온 발자크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구려, 하마터면 고리오령감이 죽을번했다오. ”했다. 발자크는 소설 “고리오령감”을 쓰면서 자신이 친히 고리오령감의 림종시각이 어떠했겠는가를 가상하고 그를 겪어 본  것이다. 이역시 작가의 체험이라하겠다.   * 작가의 이야기 *   ◎19세기 영국의 녀류작가 에밀리 브론트는 젊었을 때 집안의 온갖 번중한 일을 도맡아하면서도 소설을 계속썼다. 그는 지어 밥지을 때에도 늘 종이와 연필을 갖추어 놓고 떠오르는 생각만있으면 적어놓으면서 계속 밥을 짓군했다. ◎ 저명한 독일시인 하이네는 중병에 걸려 생명이 경각에 직면했건만 모든 권유를 물리치고 병마와 싸우면서 회상기를 계속썼거니와 림종시에는 “나에게 종이와 연필을!”하고 뇌였다고 한다.   * 작가의 허구 *   세인이 알다싶이 작가 디켄즈는 낚시질을 아주즐기였다. 그는 늪가에 앉아 물속에 던진 낚시의 동향을 점치고 살피는것을 한갓 즐거운 휴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번은 디켄즈가 한창 낚시질에 정신팔고있는데 웬 낮선사람이 다가와서 그한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여기서 감히 고기를 잡는단말이요?” “그렇소.” 디켄즈는 천연스레 응대하고나서 보탰다. “오늘은 반나절되도록 고기 한 마리도 보지 못했는걸. 건데 어젠말이요, 바로 여기서 여섯 마리나 낚았거든!” “정말이요?” 그 낯선 사람은 낯색을 굳히면서 다시입을 열었다. “헌데 당신은 내가 누군줄을 알기나하오? 나는 이 늪을 지키는 사람이요. 여기서 고기잡는건 엄금이란말이요. 저....”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령수증을 끄집어내는 것이였다. 보아하니 벌금을 시키자는 잡도리였다. 그 모양을 보자 디켄즈는 되잡아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오?” 그 낯선사람이 의아쩍어하자 디켄즈는 실속대로 알려주었다. “난 디켄즈라는 작가요. 당신은 나에게 벌금시킬수 없소. 왜냐하면 이야기를 꾸며내는건 바로 작가가 하는 일이니까”        저쪽은 대방의 멋스런 림기응변에 그만 입을 다물고말았다.
340    창작자에게 참고될만한 일화 (1) 댓글:  조회:2634  추천:1  2014-04-22
    *작가이야기*   뚜르게예브의 일기   로씨야의 저명한 작가 뚜르게예브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2년간이나 소설의 주인공 바자로브를 대신해서 일기를 썼다고 한다. 그는 오스뜨롭쓰기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바자로브란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르겠소. 내가 밥을 먹자고 앉기만 하면 그도 자주나타나 식탁에 마주앉거던. 나는 다른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생각하군합니다. 나의 바자로브가 이 자리에 있다면 뭐라고 말할가 하고말입니다. 하니까 나의 커다란 필기장에 적혀있는건 바로 나의 생각이자 바자로브의 말입니다.                             (발표원지  “흑룡강일보” 진달래. 1979년 9월 15일.)   *창작의 벗*   보귀한 인내성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인내성은 정말 보귀하다. 창작의 본래 의미가 새로운것을 만들어내는것이니 식은죽먹듯 할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소설가 푸로펠은 이 면에서 구감이 된다. 그는 작품의 수개와 난산을 천재의 표식으로 삼았다. 어떤 때에는 한주일에 2페지를 썼고 어떤 때에는 여섯주일에 25페지를 썼으며 어떤 때에는 두달에 27페지를 썼다. 한번은 그가 네주일에 15페지를 썼고 또 한번은 5개월동안에 단막극 한편을 겨우써냈던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창작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인류)에게 책임지는 참다운 창작태도가 있었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니 우리 매개의  창작자 특히는 초학자는 마땅히 본보기로 삼아야할게 아닐가, 바로 창작에서의 신중성 그것을!                             (발표원지  “흑룡강일보” 진달래. 1980년 2월 2일.)
339    부록: 백야 김좌진장군 일대기 댓글:  조회:3383  추천:1  2014-04-14
  부록: 백야 김좌진장군 일대기   1889년(己丑): 병자호란당시 척화진으로 강화성에서 순국한 안동김씨 선원   김상용의 10대손 김형규(일명 형균)의 차남으로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원 고도면 상촌리)에서 출생.       名  佐鎭. 字  明汝. 號  白冶. 靜遠.       부친 26세. 모친 27세.       형제로 누님(9살), 형(5살)       김옥균은 11촌숙부됨. 1892년(4살): 남동생 동진이 태여남.       3개월만에 부친이 사망.       한산 리윤식의 딸인 어머니 리씨의 슬하에서 자라남. 1893년(5살): 서당에서 한문수업시작. 1896년(8살): 첫권을 독파. 공부보다 무협소설을 탐독하여 이라는 깃발을 세워놓고 전쟁놀이에 더 열중했음.   1901년(13살): 2살우인 오씨와 결혼. 8월에 형(경진)이 일가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가계를 떠맡음.   1905년(17살): 대한제국무관학교졸업. 귀향한 후 가정에서 대연을 베풀어 50여호에 달하는 가노를 전부 해방하고 2,000여석을 추수하던 전답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조선근대화의 선구자가 됨.   1907년(19살): 다시 서울로 올라가 로백린 등과 하몌 조직적으로 구국운동  을 전개하고 홍성에 대한협회지부, 기호흥학회 등을 조직 운영하면서  갈산면 상촌리 325번지에 김병학의 후원을 얻어 낡은 주택 80여간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어 신학문을 권장.   1908년(20살): 대한협회에 가입. 안창호, 리갑과 더불어 서북학회발족. 산  하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오성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함. 론산의 채기두에게 밀령을 보내 각지 의병규합을  지시. 리사로 됨. 로백린과 손잡고 한성신문간부 리춘수가 경영하는 경성고아원의 총무직을 맡음.   1909년(21살):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야창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  하여 국내외련락기관으로 활용하면서 동지규합에 진력함.   1910년(22살): 8월 29일 로백린, 윤치성, 신대현, 신두현, 박상진 등과 회  동. 광복운동을 위한 동지규합,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염출을 론하고 전국을 누빔.   1911년(23살): 2월 5일 독립운동자금 10만원중 부족분 5만원을 마련코저 문  중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체포되여 강도미수죄로 2년 5개월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13년(25살):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마치고 출감.   1914년(26살): 중석광으로 무기구입할 생각을 품고 공주로 떠났다가 일본경  찰에 체포되여 리유없이 10개월간이나 류치장에 수감.   1915년(27살):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새로발족. 그 중진이 되어 무력에 의한 적극항일을 결의.   1917년(29살): 8월하순에 각 도의 광복단핵심을 규합. 반역자, 악질친일관  리들을 응징하면서 독립운동자금조달을 결의. 9월 10일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던중 계동의 기생 김계월의 집에 뛰여 들어 은신하면서 그녀와 동거. 후에 남아 두한이 출생. 10월 그믐께 채기두, 강필순, 임세규, 이리견 등이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사살하고 일본경찰에게 체포됨. 이로하여 광복단조직이 위태롭게 되자 만주총사령으로 임명받은바있는 백야는 전라도 모처의 부자집에 뛰여들어 돈 3,000원을 협탈해가지고 급급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함. 대종교 제2대교주 김헌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함.   1918년(30살): 간도를 경유하여 길림에 도착. 길림성을 근거로 한 군정사에  참가. 김헌, 서 일, 김동삼, 조소앙, 김약연, 박은식 등 재만독립운동자 39인의 이름으로 을 국내외에 선포함. 무오독랍군단을 군정부로 개편. 서일의 초빙을 받아 군정부로 감. 12월 군정부를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총사령관에 취임. 왕청현 십리리평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양성에 전력함.   1920년(32살): 7월 대한군정서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사령관을 겸  임. 일본군의 독립군협공기밀을 탐지하고 근거지를 옮기려고 왕청현을 출발하여 행군. 10월 16일 화룡현 삼도구에 도착. 수천명의 일본군을 청산리의 백운평과 천수평으로 유인하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대소 10여차의 격전에서 홍범도부대와 함께 적 1,254명을 격살해 독립군전사상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 되었음. 11월백야는 총재 서일과 더불어 홍범도와 협상해 각지에 산재해있는 독립군병사들의 회군과 여러 반일무장단체의 회합을 호소하는 를 각지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에게 전함. 12월중순 북로군정서는 밀산에 도착.   1921년(33살):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간도대한국민회(예수교파), 대한신  민회(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광복군단 등 10개 반일무장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편성, 서일을 총재로 하고 백야는 부총재에 취임됩과 동시에 참모부장이 됨. 1월 김좌진,홍범도, 최진동, 안무, 김규식, 리청천 등 지도자들이 거느린 독립군단부대는 선후하여 호림현경내의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대안의 로씨야 변경도시인 이만으로 전이함. 4월 12일 대소 36개의 반일무장단체 수뇌자들이 모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백야는 사령관 겸 참모부장이 됨. 6월 28일 이 일어났음.   1922년(34살): 8월 4일 만주로 되돌아옴.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고 총사령이 됨. 1925년(37살): 3월 15일 녕고탑(녕안)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에 취임. 둔전양병하는 한편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군양성에 전력. 림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 군무위원에 임명되였으나 모두 사절하고 독립군양성에만 전력.   1927년(39살): 신민부의 대표로 재만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 정의부와 3부통합을 기도했으나 실패. 5월 4일(음력) 독립군원로와 림정특파원 김대지의 보증을 얻어 본이 김해인 김영숙녀인과 재혼함.   1928년(40살): 6월말 딸 강석이 출생함과 동시에 처 영숙이는 정체모를 자객의 손에 피살됨. 교포자치운동에 전력함. 참의부, 정의부의 대표와 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김동삼, 김승학, 김소하, 리청천, 김원식, 김상덕 등과 중심이 되어 한국유일당재만촉진회를 조직, 정치부 책임위원에 취임.   1929년(41살): 8월 무정부주의리론을 수용하여 신민부를 해산하고 한족총련  합회를 설립해 교포의 자치운동에 전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세력과 련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일작전을 준비.   1930년(42살): 1월 24일 중동로 산시역 마을의 자신이 경영하던 정미소앞마당에서 일찍이 왜놈의 휼계에 넘어가 변절한 고려공산청년회원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암살됨.   1934년: 들은 상의한 끝에 사람을 조선에 보내여 잔군의 본부인 오숙근을 데려온 후 5월 21일 새벽 장기덕이란 가명으로 잔군의 유해를  비밀리에 조선에 운구하였음.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오훈장 중장 수여.  관련글 :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라니?  이럴수 없다.(김송죽)    
338    장편전기 설한 (40) 댓글:  조회:3361  추천:5  2014-04-11
   40.   연수(延壽)의 가신구는 해림쪽에 비하면 한심한 오지였다. 그래서 여기가 조용하고 안전하리라 생각했는데 되려 보슬비를 피하려다 우박맞는 격이 되고말았다. 여기서도 토지개혁이 한창이였다. 해림처럼 큰바람(刮大风) 군중투쟁으로 반간청산(反奸淸算)을 했고 뒤이어서 성분획분, 그러면서 도끼로 찍고 파내는(砍挖) 투쟁을 했다. 이것은 지주를 투쟁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여지껏 기생충생활을 해온 자들의 경제기초를 끊어버림으로써 다시는 농민을 압박착취를 못하게하자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대중적인 운동이다보니 인식부족으로 한심하게 잘못 나간곳이 있었다. 강석이네 집은 우선 성분부터 잘못 획분받았다. 부농이라는 것이다. 제 땅도 없고 농군도 두지 않았고 남을 착취한적도 없는데 부농이라니 웬 말인가? 그래도 그곳 빈농회의 운동자가 성분을 그렇게 매기니 방법없었다. 호주였던 김기철이 사망했어도 조선에 있을적에 잘살았을게 아니냐 그래서 대학공부까지 한게 아니겠느냐 하는것이 리유였다. 그래서 강석이 역시 지주와 같이 청산대상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연수골은 북만치고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 빈궁하기 짝이 없는 곳이였다. 그런 곳에 성분이 빈한 인간들의 계급각오란건 외려 말할수없이 더 높은것만 같았다. 1947년 늦은봄의 어느날, 이 마을 투쟁대상 다섯호는 온 식솔들이 말끔히 끌려나와 투쟁대에 올랐다. 강석이와 양모도 그 장면을 면치 못했다. (내가 어쩜 인민의 원쑤되나? 내가 대체 무슨죄있다구?) 강석이는 아무리생각해봐야 억울하기만 할 뿐 일호반접도 접수되지 않았다. 무엇이 계급이고 무엇이 압박이고 무엇이 착취라는건 지금 적극분자라며 나서서 우쭐대는 사람보다도 썩 일찍부터 알게되였던 강석이다. 위만때 벌써 를 부르면서 압박이 없고 착취가 없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야하는 사회를 동경해온 강석이가 아니였던가. 그러던것이 이렇게 졸지에 인민의 원쑤로 몰려 투쟁대에 오를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과연 알고도 모를게 인간세상이였다. 감독대상에 대해서는 요 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근본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강석이는 히스테리모양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광기를 부렸다. 감독하고있던 사나이가 울라초방치로 그녀의 머리를 까놓았다. 강석이는 정신이 아찔했다. 꼭뒤가 터져 단통 피가 흘러내렸다. 그를 때린 사나이는 쓰러진 그를 내쳐두고 가버렸다. 이틑날 원렬이가 누나보러왔다가 누나의 터진 머리를 보고 눈물이 그렁했다. 강석이는 자기가 잘못넘어져서 머리를 상했노라 오랍동생을 속히였다. 그리곤 그가 아침도 못먹고 굶었다길래 누룽지를 훔쳐서 쥐여보냈다. 며칠후 공작대가 오자 사정을 말해 강석이는 빈농회에 빼앗겼던 옷을 되찾고 강제로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워낙 그는 그러한 벌을 당할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강석이는 살림살이 잘할줄아는 근면한 처녀로 자라났다. 겨울에 신을 양말, 버선이 없으니 삼실을 내여 손수 집사람들이 신을 양말을 뜨고 삼베길쌈도했다. 그리고 베개수놓이를 해서 딸시집보내는 집에 주고는 그대신 땔나무 한발구씩 받았다. 이렇게 하자 마을에는 그의 본을 받아서 근면해지는 녀인들이 있게 되었다. 강석이는 무정하고 랭혹한 정치대우로 하여 가해지고있는 타격과 그때문에  한겹두겹 쌓여지는 고뇌에서 해탈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서로가 척진일 없거니와 원한품을 하등의 리유도 없으면서 경계하고 소원하는 사람들과 되도록 가까이하면서 그들에게 자기가 그처럼 잘알고있었던 혁명노래를 배워주어 부르게 했다. 그래서 차츰 친구가 있게되였고 마침내는 군중의 와 를 받아 선전대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선전대에서 사실은  골간의 역할을 한 그녀는 수차의 공연대회에서 환영과 절찬을 받았다. 그런데 양모 김분희는 투쟁받을 때 놀래여 심장병이 나 드러눕고는 일어도 못나고 원하품은채 저세상으로 가고말았다.   1948년, 그해의 11월에 전 동북이 완전히 해방됨과 함께 동북각지에서 특히는 조선인마을들에서 전선을 지원하여 전국을 해방하자는 힘찬 구호밑에 집집마다 앞다투어 참군하는 경상이 나타났다. 이때 원렬이도 열조에 잠겨 용약 탄원해나섰는데 아버지를 닮아 사나이답게 의젓해서 15살의 소년이였지만 뽑혀나갔다. 언니 영조는 언녕 시집간 때였다. 원렬이마거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해 전선으로 나가고보니 외롭게 남은 강석이도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했다. 하여 이듬해 20살나이를 먹자 강석이는 들어오는 청혼을 받았다. 당자는 위정구(魏正久)라는 지식있는 청년이였다. 그의 외삼촌이 사망한 강석의 양부와 숙친한 사이였고 그 역시 독립군이였는데 둘을 맛세웠던 것이다. 강석이는 위정구와 결혼하고 인차 연수를 떠나 북조선으로 가  함흥근처의 어느 한 마을에 자리잡았으니 때는 바로 1950년 2월경이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냥 살자니 배고프고 쪼들려 살멋이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돌아오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석이는 어느날 계책을 써 남편몰래 홀몸으로 먼저 두만강을 헤염쳐 건너오고말았다. 그러고는 편지로 알리여 남편도 어서 건너오라했다. 그런데 남편은 건너오지도 못하고 조선전쟁이 일어나니 총동원령에 의하여 총을 메고 전선으로 나갔다. 이것이 영결이 될줄이야! 위정구는 조선전쟁이 끝났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간염으로 앓다가 1954년에 그만 거기서 사망하고말았던 것이다.   강석이는 중국으로 되돌아온 그해의 12월 24일에 귀동녀를 낳았고 그 딸을 애지중지 기르면서 여지껏 함께 살아왔다. 딸은 그의 기둥이자 희망이였다. 한데 딸을 기르면서, 그녀가 살아오면서 치른 경난역시 눈물겨웠다. 어디에 갈가? 한마디로 말해 연수는 원한만이 있을 뿐 정은 꼬물만큼도 없는 곳이였다. 그래도 정든 곳은 해림이였다. 두문이오빠가 횡사를 당했어도 두생이오빠가 미쳐죽었어도 양부가 횡래지액으로 타계의 사람이 되었어도 그리고 지금도 의연히 암해분자의 마수가 뻗치고있다해도 그는 그곳이 좋았다. 그곳은 강석이가 태여난 곳이거니와 독립군의 발자국이 수없이 찍힌 곳이였고 산하에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노래소리 슴배인 곳이였다. 더구나 그곳에는 날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그리워지게 되는 생부 김장군의 구광(舊壙)이 있는 곳이였다. 제정의 삼엄한 경계속에서도 살아있는 독립군들이 년년이 참배를 끊지 않아 적성(赤誠)이 쌓이고 구슬픈 회억이 묻혀진 곳이거늘 강석이가 거기를 버리고 그래 어디에 가 몸과 마음의 안녕을 찾는단말인가? 해림의 산시에는 김좌진장군 생전의 호위병이였고 강석이 출생때 안아왔던 강익선일가가 아직 그대로 눌러있을 뿐 그 외로는 독립군가정이란 더 찾아볼수 없었다. 그리고 칠가툰에는 김장군이 생전에 양아들로 삼은 중국사람 손진청(孫振靑)이 아직도 살고있었다. 여러해만에 다시나타난 강석이는 그들을 찾아 만나보았고 함께 구광에 가 제도 지냈다. 그러면서 강석의 정체를 어디까지나 숨겨주고 서로간에 인신을 보호해주자는 밀약도 단단히 있었다.   최후로 남아있던 비밀결사의 독립군들은 싹 흩어졌다. 조선이 광복되여 남북으로 갈라진 이때에 중국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싸운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자들을 타국인으로 인정하게 되었기에 항일공훈자로 취급받지 못할뿐만아니라 오히려 력사적원인으로 하여 반공분자, 변절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게되였다. 이런 환경에서 여생이나 무난히 지내다가 인세(人世)를 하직하고자 은신처를 찾아서 어떤이는 심양으로, 어떤이는 관내로, 어떤이는 연변으로, 어떤이는 내몽골로 제 가고푼데로 가버렸다.   강석이는 1953년도에 호구(호적부)를 연수에서 산시가 가까운 목단강으로 옮겨왔다. 인해속에 묻혀 살면 인신이 퍽 안전하리라는 생각에서 움직인 명지한 처사였다. 그런데 아이달린 녀성의 몸에 의식주해결이 난제였다. 어떤때는 정식공모집이 있었지만 성분과 력사를 캐니 기회를 잃고말았다. 장기계약공질도 몇해간밖에 못했다. 그녀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능력과 힘이 당하는 일이라면 가릴것없이 닥치는대로 해야만했다. 남새장사, 과일장사, 파지줏기, 길닦기, 벽돌운반... 무슨일이면 안했으랴. 어떤 때는 양부가 생전에 좀 배워준 믿천으로 한족마을을 돌면서 수의질도 해보았다. 그랬어도 빈궁은 종시 떠날줄을 모르고 그녀를 지꿎게 괴롭히였다. 어떤때는 아이가 앓아도 약 한봉지 사먹일 푼전마저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통사정해서 의사의 동정을 받기도했다. 그랬은즉 그녀에겐 생이란 그야말로 지겨운 박투였던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대상자를 구해줄터이니 과부로 늙지 말고 재가하라고 권도했다. 아주 영 맘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내내 숨어 살아야만했던 그녀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할수도 없어서 아예 영 단념해버리고말았다. 남들과 같은 부부지락이란건 바라지도않았다. 환멸과 지리한 고독은 그녀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우렷해지는 추억속에 묻히여 눈물겨운 생을 영위하는 강의한 녀인으로 만들었다. 해방군에 나가있는 원렬이가 누님을 생각해서 몇푼안되는 생활금을 받아서는 아껴쓰며 모았다가 부쳐보내군 했다. 한번은 그한테서 제대하여 직장을 찾으려해도 성분 때문에 애먹으리라는 편지가 와서 강석이는 신바닥 닳도록 뛰여다닌 끝에 성분을 부농에서 중농으로 재평받았다. 그런데 제대하여 치치할(齊齊哈爾)강철공장에 배치받아 거기서 일을 하게되였던 원렬이는 1958년 여름에 강에서 목욕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불행히 죽고말았다. 양부의 대는 이렇게 끊어지고말았다. 정신적의탁이 부러진 강석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양모한테는 하나뿐이던 오랍동생은 어디로 갔을가? 풍문에 들으려니 1933년 북만에서 한국독립군이 해체될 그때도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이동하여 군관학교를 다녔고 이 나서는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6개전구 13개성을 돌아다니다가 1941년 봄에 북상항일을 하고저 태항산으로 갔다고한다. 그의 모색이 어떤지 강석이는 기억이 없다. 그래도 인연은 있었다. 60년대에 중국대지에서 흉년이 들어 가장 어려울 때 강석이는 몇축 생활에 보태쓰라면서 보내는 꽤 많은 액수의 돈을 받았다. 바로 그 사람_ 양모의 오랍동생이 보낸것이였다. 그걸 전해주는 사람은 이전에 독립군에 있었다는 50대의 사나이였는데 강석이한테 그저 그가 북경 어느 대학에서 사업하고있고 무사히지낸다는것만 알려줄 뿐 이름도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억울하게도 김좌진이 친일파라는 헙악하게 날조된 말이 나도는 세월이였기에 김강석이와 거래라도 있게되면 혹시 영향이 있을가봐 그러는 모양이였다. 강석이는 더욱 고독감을 느꼈다.   독립군출신의 사람들이 해림일대에서 마지막 흩어질 때 김좌진장군의 구광주위 네면을  관내, 연변, 북만, 내몰골 이렇게 네구역으로 정해놓고 살아있을 때까지 와서 제를 지내기로 약속한바있다. 그리고 이라 이름지은 유리병을 고정지점에다 파묻어 쪽지를 넣어두는 방법으로 서로간에 련락을 하기로했다. 그래서 유해도 없는 장군의 구광으로는 여전히 의로운이들의 발길이 닿고있었는데 제를 지내러 오는이마다 갖고 온 술잔, 술병과 접시같은 제구들은 구광주위의 분토에 묻어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오는이마다 그것을 파보고는 서로의 생사여부를 알군 했던거다. 리달문이 강석이가 목단강에 온것을 알게 된 후에 서로 련락이 생겨 그후부터는 오가는이마다 들리게 되었다. 만나서는 눈물짓지 않는이가 없었다. 강석이한테는 그들이 바로 육친으로 여겨졌다. 그한테는 양부께서 물려준 귀중한 유물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김장군이 1921년말에 상해림정으로 갔을적에 8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였다. 시국이 좀 안정되자 강석이는 어느해 화가에게 그 사진을 주어 작업비를 지불하고 생부의 초상만 한 장 크게 그리였다. 그는 그것을 액틀에 넣었다. 그러나 감히 벽에다 걸지는 못했다. 강석이가 목단강에 자리잡은 그해 리달문이 다른 로인 네분과 함께 왓을 때의 일이다. 그때 강석이는 꽃술잔을 갖고 산소로 갔다가 하마터면 경칠번했다. 리달문이 때리겠다고 주먹든것을 옆에서 말리였다. 너하고 말하는건 그눔아(장군)하고 말하는것 같구나 하던 로인, 83세의 허리꼬부라진 리달문할아버지는 그렇게 성질은 변함이 없었던거다. 그는 그번이 마지막걸음이였다. 한 독립군 늙은이는 왔다가 시내사람의 적바른 식량을 자기가 축내는게 미안해서 면서 장군딸이 가난에 쪼들리는것을 보고는 눈물지었다. 한번은 독립군 셋이 누룽지를 주머니에 넣어 자시면서 먼데서 찾아와 제를 지냈다. 그때 강석이는 벽돌공장에서 막일을 해서 돈푼이 있었다. 그래서 이밥에 된장국을 해서 대접했고 그네들이 돌아가며 자시게 될 누룽지를 잘 볶아드리였다. 심양에서 온 독립군 늙은이 한분은 본바탕이 알아보기 어려울지경으로 깁고 또 기운 옷을 입고서도 술 한병 사들고 제지내러 오시였다. 그 정상에 목이 메여 강석이는 울었다. 참말로 자기의 뼈라도 뽑아서 감사드리고싶었다. 내몽골에서 왔던 늙은이 한분은 장군묘를 참배하고나서 목단강에 들렸는데 려비가 없어 걸어서 가려했다. 그러는것을 눈치챈 강석이는 이웃 권동한씨 집에다 장독을 팔아 그 돈으로 려비를 마련해드리였다. 그리고도 밀가루를 볶아드려서 귀로에 잡수시게했다. 로인은 목메여 락루했다. 그 독립군로인 역시 그번이 마지막이였다. 어디에서 잠드셨는지? 오는이마다 태극기 감춘 베개와 장군의 초상화를 놓고 감구지회에 잠겨 회한의 눈물을 흘리였다.          잠을 자야 꿈을 꾸지      꿈을 꿔야      안중근과 김좌진을 만나보지      장군님이 말하시기를      너희들은 남북통일 통지서를 가지고      염라대왕을 거쳐 오라고 하셨지      이라이라 이 일을 어이할가      살자하니 년령이 제한있고      죽자하니 장군님의 대렬에      가서지를 못한다지      이라이라 이 일을 어히할가      천지아득 하늘땅이 캄캄하도다   이것은 내몽골에 가 눈을 감은 정해식로인이 1950년에 장군의 뫼자리에서 지은 노래인데 참배하러 오는 다른 늙은이들도 불었다. 독립군들은 년년이 참배하러오다가 1967년후로는 발길이 끊어졌다. 아마 모두 이젠 타계로 가버린 모양이다.                                            에   필   로   그   장군의 옛 구광은 아직도 모양 그대로 남아있다. 60년대초에 장군의 이 구광가까이에는 봉분도 없이 자그마한 콩크리트비석 하나가 일어섰다. 묘비는 간단했다. 별세한 날자는 1961년 10월인데 이듬해의 청명절에 그의 아들이 세운것이다. 따져보니 고인은 장군보다 한 살손우. 분명 장군의 수하에 있었던 독립군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으면야 왜 하필 남의 뫼자리곁에 와 묻히랴. 저승가서라도 장군을 만나뵈고푼 소원 이루고저 평토장을 해서라도 그렇게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게 아닌가. 한데 정녕 그러하다면 그 독립군의 아들은 아버지의 비석을 세울수 있건만 이 강석이는 왜 아버지의 비석 하나도 맘대로 세울수 없단말인가? 전에 참배하러 찾아오던 독립군들은 나무토막과 판자로 장군의 묘비를 만들어 참배때면 그것을 세워놓군 했었다. 강석이는 그 묘비를 비닐박막으로 정히 싸서 구광에 묻어 여지껏 건사해왔다. 그러면서 딸 련홍이가 8살되여서부터 손목이끌고 함께 다니였다. 그러기를 이제는 수십년, 허지만 여직 남한테 들킨적이라곤 한번도 없었다. 비석은 일어서지 못했어도 여기는 거룩한 넋이 남아서 침묵을 지키는 곳이다! 독립군들이 뫼자리앞을 닦고 떠다놓은 잔디풀과 그녀가 심어놓은 코스모스는 해해년년 묘소를 장식하고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냐, 고인된 장군은 구천에서 내려다보고 웃음짓는다.   오, 이젠 새날이 밝는다고 산새는 우짓는구나!                                                                      김송죽                                                                                    쟈므스에서                                                                                                    1993. 2.    관련글:  김좌진일대기 (韩春 评论)  
337    장편전기 설한 (39) 댓글:  조회:3163  추천:1  2014-04-10
  39. 광복이 됐으니 이젠 고향에 돌아가 살아야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대종교도들로 놓고보면 총본사의 환국이 제일의 관심사였다. 왜 그렇지 않으랴?... 만주로 들어온지 35년만인 1946년 1월에 대종교총본사는 윤세복 등 5명의 대종교골간들의 장악하에 할빈을 걸쳐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총본사의 환국을 계기로 하여 많은 교도들이 가정을 데리고 고향땅을 찾아 떠났다. 한편 강석이네처럼 당장 떠나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고 남은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중 많은이들이 도탄에 빠지고있는 동포들을 구원하고저 토비숙청에 탄원해 나섰다. 서일의 아들 윤제만보아도 출옥후 농사를 짓고있다가 녕안의 독립1퇀 12중대에 가입해 손에 총을 잡았고 서일의 사위 최관은 녕안현 고려인 민회회장이 되어 동포사업에 몸을 잠그었다. 이때의 북만주는 말그대로 살벌한 란장판이였다. 토비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날이 갈수록 우심해갔다. 1946년 1월, 산시에 있는 마룡강토비는 석하촌을 지날 때 쏘련홍군의 식량운반차를 습격하여 홍군 여럿을 살상하고는 식량을 구매할 돈 10만원을 략탈했거니와 길가던 조선농민 둘까지 죽이였다. 이러루한 일들은 비일비재였다. 어느날 목단강시 조선인민주동맹에서 발간하는 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도되였다.     이 보도가 신문에 실린지 열흘이 지난 1946년 5월 26일, 동안(밀산)에서 수백을 헤아리는 동포들이 무리죽음당하는 끔찍스러운 참극이 빚어졌다. 동안성보안대 총대장인 곽청전비도 700명이 안팍으로 짜고서 이날 갑자기 달려들어 은 싹 없새치워야한다면서 그곳에서 살고있던 조선사람만 닥치는대로 붙잡아 살해하였는데 이웃의 마음씨 좋은 한족이 자기집 천정우에거나 또는 마른 우물에 숨기거나 제집애의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에 검댕이를 묻혀 속여넘긴 그 몇사람만 내놓고는 몽땅 죽은 것이다. 이 한떼의 피에 굶주린 살인백정들은 그같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고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10일만에는 팔면통(八面通)에 달려들어 또 무고한 조선사람을 여럿이나 학살했다. 과연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살인마귀들이였다! 그자들은 북만에 사는 조선사람은 로일령을 넘기지 않고 다 죽이려한다는 기막히고 무시무시한 소문까지 펴놓았다. 그래서 북만에 살고있던 조선동포들은 공포에 떨고 불안에 속을 태워야 하는, 말그대로 아비규환의 질곡속에서 허덤비며 이를 갈았다. 김기철로인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 달이오른 동포젊은이들은 그 어떤 거조든 낼 잡도리였다. 보복심이 잘못되면 극단적인 민족반목으로 넘어가버릴 위험성이 잠복해 있었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사상교육을 가강히 했다. 토비들은 단지 조선사람한테 한해서만 만행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쏘련홍군이 귀국하고 국민당 이 금주, 심양, 사평을 공점하자 이른바 선견군이라는 토비들은 국민당의 지시에 쫓아 일제히 폭란을 일으켰다. 동녕 폭란, 수분하 , 수양 폭란, 목단강 폭란, 밀산 폭란은 모두가 토비들이 국민당의 공세에 배합하여 인민무장에 대항하며 지방에 수립된 인민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한 한차례의 조직적인 발악이였다. 그중 목단강폭란이 가장무서웠는데 이 폭란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조선인젊은이들이 가장 용감했고 공도 많이 세웠다. 15일 새벽 2시에 기차고동소리를 신호로 일어난 폭란은 아침 5시에 보안퇀과 민병, 자위대원들의 피어린 공동작전에 의하여 철저히 분쇄되고말았다. 5월 21일, 목단강역전광장에서 비도괴수 왕소정을 비롯한 5명의 혈채많은 비도들을 공판한 후 처단해버리였다. 같은날 녕안에서는 빈수도가경비사령(濱綏圖佳警備司令) 정운봉을 공판, 30일에 처단했다. 국민당지하조직과 비도들이 알림들여 획책했던 5월폭란은 이같이 전부 파탄되고말았다. 지나간 1945년도, 광복이 나서 3개월 반 그사이 형편은 말이아니였다. 목단강군구는 초기의 12개 퇀에서 14퇀(2영변절)과 새로조직한 목릉 15퇀을 내놓고는 10개 퇀이 변절했는데 그 인원이 1만 1천 6백명이였고 살해된 간부는 40여명이였다. 토비들은 기염이 충천하여 군수품을 빼앗고 철길을 끊고 도로를 파괴했다. 이때의 토비수자는 인민무장수자의 10배였다. 이켠은 인원이 그같이 적은데다 장비도 퍽 못했다. 그렇지만 대중의 민심을 얻고있었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인민무장력인 동북민주련군은 일취월장할 수 있어서 새해의 1월부터 7월까지 한계로 하는, 병력을 집중해 련합토벌하는 제2계단의 작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상은 1946년 7월 20일자 에 실린 기사였다. 고난속에 이어지는 생사판가름의 혈전으로 최후의 승이를 맞아오고 있었다. 군민일심이 되어 뭉쳐나서니 사면초가를 당한 북만주의 토비들은 이해의 8월부터 12월까지의 제3계단숙청에 이르러서는 거진전멸되여가고있었는바 그자들이 네 개의 이라 부르던 사문동, 장흑자, 리화당, 손방유 등 하나하나 그믈에 들고말았다. 이리하여 는 중공중앙의 지시대로 1946년, 이 한해동안에 초보적이고도 믿음성있는 창건사업을 완수할수있는 조건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발붙일수있게 되었다. 토비가 숙청되고 질서가 잡혀감에 따라 동북에서는 천지개벽의 토지개혁이 전면적으로 시작되였다. 목단강지구에서는 토지개혁을 1946년에 녕안, 목릉과 림구 등 몇곳에서 시범적으로 해본후 1947년부터 전면에 착수했다. 1946년 4월 3일자 ,>는 사론에서 다음과같이 기술했다.     어느날, 위만때 자경단 단장노릇을 해먹은 류창수를 붙잡아 투쟁대에 올렸다. 강석이는 두생의 처 정순이, 딸 선녀와 함께 달려나가 그자를 한바탕 패놓았다. 악행이 루루해 민분이 컸던 류창수는 그날 공판대회에서 마을사람들게 물매를 맞은 후 총살당했다. 해남촌의 토지개혁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토지개혁의 제1보가 반간청산(反奸淸算)부터 착수하는것이였는데 그 대상은 악패지주, 한간, 특무, 경찰, 반동회도문의 두목이였다. 정치상에서 그자들의 기염을 꺾어놓고 죄가 크면 지압이였다. 그러면서 감조감식하고 농민의 땅을 되돌리게 하며 농회를 조직하고 지방무장을 건립하는것 등이 그 중점이였다. 토개투쟁은 점점 긴장하고 격렬해갔다. 그런데 인식부족으로 적아를 가리지 못해 복수자가 극의 경향으로 나옴으로해서 한때 미런한 짓을 하기도했다. 해랑(海浪)에서는 아무런 혈채도 없는 지주를 둘이나 그저 지주라는 리유로 때려죽이였다. 그리고 남라고촌(南拉古村)의 조선사람들은 큰바람(刮大风) 대회를 열고 군중들이 죄없는 촌장을 때려죽였다. 이것이 실례다. 다행히 성위에서 이 일을 알고 3월에 손이근(孫以瑾)이란 녀공작원을 파견해 즉시 제지시켰기에 다시는 류사한 일이 공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보사나운 어떤자들은 암암리에 개인보복을 혹독하게 했다. 늦봄의 어느날, 목단강에서 조선족녀성 독창배우모집을 내려왔다. 강석이는 워낙 노래를 잘부르는지라 가볼가 응시했더니 경쟁자 여럿중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그래서 이젠 무대생활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는데 졸지에 입격이 취소될줄이야? 알아보니 어는 고약한 작자가 김강석이는 는 험구를 만들어 가지고 작간을 논 것이다. 그래서 강석이는 기분이 탁 상하면서 치떨리였다. 그따위로 날조무함하고있는게 대체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각을 찢어놓기싶었다. 녕안에서도 목단강에서도 간부훈련반을 꾸리여 강석이는 거기에 가고싶었지만 그것은 더구나 안될 일이였다. 양부는 진상을 모르는 미런한 자들이 원쑤가 되여 양녀가 김좌진의 딸인것을 알아냈으니 이제 어느때 기회를 노리여 독수를 뻗힐것만 같아 속을 조이였다. 양부께서 하는 말씀이였다. 강석이는 만일의 험악한 경우를 생각해 서둘러 독립군이 휘날렸던 큰폭의 태극기와 그보다 좀 작은 태극기 둘 해서 모두 세폭을 미농지에 싼 후 그것을 집에 보관해오던 옛 문건과 함께 산시로 갖고가 생부 김좌진의 구광이 있는 북쪽골 비밀지점의 단지속에 넣어 감추었다. 이러고나서 며칠안되는 어느 하루, 회의한다고 불리워갔던 양부가 매를 맞고 돌아왔다. 뜻밖이였다. 여지껏 동네서 존경받아오던 로인이 이같이 험한 수모를 받다니? 시국이 바뀌니 혁명자로 변신하고 나타난 예전의 엠엘파분자아니면 화요파분자들이 묵은 장부를 들추면서 보복을 하는 판이였다. 병석에 누운 김기철로인은 일어도못나고 그길로 그만 돌아가고말았으니 향년 78세, 일제의 철창생활 더섯번, 추궁과 박해를 못이겨 해림 한곳에서만도 이주 18번, 국치를 울음으로 삼키며 거치른 만주땅에서 광복의 이날을 맞아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바쳐왔던 이 한 독실한 대종교인 독립군의 마지막운명은 이러했다. 양모는 령감이 죽자 양녀의 목숨을 걱정했다. 어느날 강석이네는 남모르게 해남촌을 훌쩍 떠나고말았다. 그네들이 이사한 곳은 연수현 가신구 8퇀이였다. 이때로부터 강석이는 순옥으로 변성명하고 세상에 다시나타났다.  
336    장편전기 설한 (38) 댓글:  조회:3426  추천:1  2014-04-09
  38.  어느날 양부는 집안사람들만 있는데서 꼴을 보니 일본은 망할날이 오라잖을것 같다고 했다. 제아무리 소식을 봉쇄해가면서 백성들을 기편해도 촉각이 좀만 예민한 사람이면 단말마의 발악을 하고있는 일제의 운명을 얼마든 보아낼수 있었다. 그처럼 승승장구하던 동맹국인 독일군이 1943년 2월에 쓰딸린그라드전선에서 패했고 4월에는 일본 야마모도 련합함대 사령관이 전사했다. 7월에 무쏠리니가 실각하더니 9월에는 이딸리아가 련합군에 항복하고말았다. 1944년 7월 일본군이 사이판섬에서 전멸함과 함께 도죠내각은 총사직을 했고 대신 고이소내각이 성립되였다. 11월에 미국의 B29비행기가 북규슈와 도꾜를 폭격했다. 한편 서방에서는 1월에 쏘련군이 핀란드에 진입했고 6월에는 련합군이 북불(北佛)에 상륙했으며 8월에 빠리의 독일군이 항복했다. 1945년도는 전쟁형세의 전환이 더 빨라갔다. 2월에 미군이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 그곳에 있던 일본수비군은 전멸되였고 4월에 쏘련은 일쏘(日蘇)중립조약의 불연장을 일본에 통고해옴과 동시에 미군은 오끼나와에 상륙, 그곳에 있던 일본군 20만명을 전멸하기 시작했다. 5월에 도꾜와 요꼬하마 등 도시들은 미군의 대 폭격을 받았다. 그리고 8월을 잡아서는 미군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히로시마와 나까사끼 두 도시를 훼멸하고말았다. 한편 1940년 9월에 창립을 보인 광복군은 총사령 리청천의 지휘하에서 대오가 점점 강성해져 1943년 8월 인도, 미얀마전구의 영국군당국과 협의하여 별동대 1지대를 보내여 참전하기에 이르렀고 1945년 2월에는 림시정부가 일본 및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것이다. 형세가 이러했건만 만주국의 협화회는 의연히 선봉이 되어서 일본군은 필승불패하리라느니 대동아의 질서가 유지되리라느니 하고 선전을 해댔다. 그러면서 도시는 물론 농촌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한다면서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게하고 방공훈련을 시키였다. 하지만 그따위 조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쏘련외장 몰로또브는 1945년 8월 9일 0시에 일본에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쏘련원동군 100만대군이 5,000여 킬로메터의 전선에서 14년동안이나 동북에 반거해있은 일본관동군에 향해 전면적인 대진공을 개시했던것이다. 와씰리예브스끼 원수가 총지휘하고있는 이 원동군은 세갈래로 나뉘여 동북에 진입했는데 해림쪽으로 오고있는 부대는 바로 제1방면군의 홍기 제1집단군으로서 보병2개 군과 약간의 직속부대를 합쳐 총병력이 69,000여명이였다. 이 부대는 우뢰울고 번개치면서 억수로 퍼붓는 밤비를 무릅쓰고 동쪽으로부터 우쑤리강을 건너 이요 라며 자랑하던 관동군의 견고한 보루들을 하나하나 까부시고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11일 목릉을 공점하고 12일 아침에는 밀산을, 14일에  목단강을 공점했다. 격파된 일본군은 마치 터진 개미둥지같았다. 해림역에는 기차타고 도주하려고 모여든 일본병사들이 단가마우의 개미같이 바글거렸다. 5,6,7명씩 무리지어 도주하거나 혹은 단신으로 군복을 벗어 던지고 백성으로 가장해서 헤매다가 배고파 인가에 기여드는 자도 있었다. 해림일대에서는 벌써 쏘련군이 이곳까지 밀고오기전부터 사호남구(沙虎南溝), 사호남구전자(沙虎南溝甸子), 전사호(前沙虎), 후사호(后沙虎).... 등 9개마을에서도 한족(漢族)들이 떨쳐나서서 도주하는 일본군들을 잡아치웠다. 그런데 조선마을들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장장 36년간 적잖은 사람들이 반동화상태에 처해있었기에 이젠 나라빼앗긴 설음도 원한도 잊어가고있었기 때문이였다. 김기철로인은 패주하는 원쑤들을 눈을 펀히 뜨고서도 놓쳐버리는것이 더없이 맹랑하고 분했다. 강석이 역시 어른들과 꼭같은 심정이였다. 비밀결사는 독립혁명을 생각한다면서도 태극기만 건사하고 무기는 갖추지를 못했으니 안타까왔다. 여지껏 류무허즈(柳木河子)의 산속에 숨어서 숯구이로 살아온 그 7명의 독립군역시 감춰둔 총은 있었건만 탄알이 없어서 안달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 손쓸 기회와 함께 조건을 찾게 되었다. 그네들이 복수를 갈구하던 차 소련군 척후병 한패가 그곳을 지나다가 산속에 숨어든 일본패잔병들의 매복저격에 들어 전몰했다. 이를 직접목격한 독립군들은 저마끔 희생된 쏘련군의 따발총 한자루씩 나무단속에 넣어 쪽지게에 지고는 모여앉은 일본군들 가까이로 접근했다가 불시에 한배짐씩 풀어 그 27명을 몽땅 섬멸해치웠던 것이다. 과연 통쾌하고 속시원했다. 한편 쏘련홍군은 17일목단강으로부터 중동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해림과 횡도하자를 해방했다. 무수한 비행기들이 우릉거리면서 머리우를 날아 서쪽으로 가고있었다. 강석이는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어서빨리 날아가 차타고 도망가는 일본군들의 머리우에다 폭탄을 던지라고 소리쳤다. 해림에 갔다온 사람은 저마다 이러면서 흥분에 잠겨 자기가 본걸 자랑했다. 해남에서도 신안진에서도 대종교도들은 깊숙이 간직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여직껏 오매에도 그려오던 광복의 날을 문득 맞고보니 오래동안 억압속에 다져진 분노가 환열로 터져올랐던 것이다. 쏘련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뒤를 이어 8월 10일에는 몽골정부가 일본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쏘련홍군은 해, 륙 두방면으로부터 중국의 동북과 조선에 진입했고 일본관동군은 신속히 격파되였던 것이다. 관동군은 일본륙군의 가장 정예한 주력이며 일본의 전략 총예비대였다. 일본은 이 군대에 의지하고 중국 동북 및 조선의 유리한 전략적지위에 의지하여 장기적인 전쟁을 진행하려고 망상하였던 것이다. 쏘련의 참전이 일제의 이 계획을 철저히 파탄시켜서야 일본정부는 부득불 8월 15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투항했다. 이로써 태평양전쟁은 물론 중국의 8년항전도 끝나고 제2차대전도 끝난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이렇게도 빨리 손을 들고 투항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8월 18일부터 쏘련홍군 제26군은 횡도하자에서 일본관동군 제5군단의 대량적인 투항을 접수했다. 14일에 이미 천황이 를 내렸건만 그런줄도 모르고 결사적인 대항을 하던 일부의 고립된 부대들은 얼마못가서 전부가 소멸되고말았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과 사무라이정신은 우수운 비극을 만들었다. 계서(鷄西)남쪽 20여리에 있는 철길어구에서 일본녀인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가득 감겨진 트럭 두 대가 발견되였다. 무릎꿇고 앉거나 낯을 하늘로 향하고 죽었는데 한본새로 머리에다 희천오리를 감은것을 보면 그어떤 종교의식을 한것임이 분명했다. 적도(適道)역에서도 시체 200여구나 발견되였는데 모두 배를 가르고 죽었다. 포로한 일본군 참모장을 불러다 심문하니 그의 공술인즉 그것은 그들 자신의 동의하에 병사와 군관들이 살해한것이라 실토했다. 실로 극도의 절망과 한없는 기쁨이 엄연한 대조를 이루고있는 순식간의 변화였다. 일제의 통치하에 14년간 세월! 온 동북인민이 해방받아 기뻐하는 이때 대종교도들은 한가지 따로 더 기뻐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기형을 언도받고나서 액하감옥에서 고역에 시달리던 제3세교주 윤세복이 8월 12일에 최관 등 5명의 교도와 함께 쏘련홍군에 의하여 해방받아 나옴으로써 일제의 탄압속에서 그지간 문이 닫겼던 대종교본사가 다시 부활된것이였다. 김기철은 그네들이 해남에 와 최창진댁에서 2일간 몸을 쉬우는 기간 정성껏 위로하면서 금후의 교회활동에 대해서 토의했다. 8월 22일 총본사직원들은 동경성에 귀환하여 총본사간판을 다시걸었다. 한편 이런때에 마을에서는 나 이나 감옥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왔다. 는 였다. 어떤 사람은 동안성 소왕참툰에 가서 를 닦다가 왔는데 목숨이 붙어있을 뿐 거의 페인이나답지 않았다. 가자마자 들판에 잠자리를 정하고 먹이는것도 말할수 없이 험한데다 매일 12시간이상의 중로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들 수천명이 매일 먹는것이란 도토리떡이거나 혼합가루음식이였는데 그나마 많이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강박에 못이겨 과 의 은사에 감사하다고 먹기전에 줄지어 서서 3분간씩 묵도를 했던것이다. 한심한것은 옷도 못입게 발가벗기고 일을 시킨 그것이다. 일하다가 도망칠까봐 한 수작이다. 이들보다 더 참혹한 대우를 받은것은 이니 니 해서 에 끌려들어간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아무러한 보호대책도 없이 위험한 학강(鶴崗)의 탄광에 가 일을 해야했는데 매맞고 굶주리고 혹사당해서 태반이 비참하게 죽어 에 묻히고말았다. 1944년의 한해 흑안령, 왕양묘, 군사시설을 위해 각 현에서 징용한 15,000여명의 로무자중 죽은 사람이 6,000여명, 목릉하 개수공사에서 죽은 사람만도 1,700여명이였다. 이러한즉 붙잡혀간이를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있는 집들에서는 다가 울음과 한숨이 바다를 이루었다. 이같이 환희와 비애가 반죽된 이때에 북만주에서는 토비가 갑작스레 생겨나면서 끓기시작했다. 그자들속에는 위만찌꺼기들이 적잖게 있었다. 일본이 망했으니 이젠 위만때 해먹던 인간들이 고개 숙어지리라 했는데 더 사나와지면서 기를 펴니 과연 별일이였다. 국민당은 화북을 통제하고 선손써서 동북을 먼저 차지할 목적으로 대량의 군대를 동북으로 이동하면서 먼저 특무들을 파견하여 이같이 위만때의 벼슬아치나 사회의 찌꺼기나 악당들에게 위임장을 주고는 그자들의 무장을 규합하여 그 무슨 선견군(先遣軍)이요 정진군(挺進軍)이요 광복군(光復軍)이요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이요 보안대(保安隊)요하는것으로 개편했던 것이다. 그 총병력은 21,730여명에 이르었다. 한편 쏘련에 건너가 정돈훈련을 하고있었던 항일련군장병들은 쏘련홍군이 대일작전을 하자 이에 배합하였는바 일부가 북조선으로 가고 대부분이 8월 17일부터 기를 나누어 동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몇 개의 지구위원회와 수십개의 사업지점을 건설했다. 항일련군책임자들은 사업의 편리를 위해 쏘련홍군내에서 각기 사령부의 부사령원과 기타 군관으로 있었다. 어떤이들은 공개적으로 출면하여 을 조직했고 어떤이는 암암리에 지하당원들을 찾고 군중을 발동하여 인민무장을 건립해서 팔로군과 신사군을 영접 할 준비를 했다. 9월 2일, 목단강시에서는 민족주의자, 독립운동자와 공산주의자들로 조직된 조선인 각 단체 련석회를 열고 고려인민협회(高麗人民協會)를 설립하였고 11월 10일에는 이 협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으로 발전시켰는바 맹원수는 어느덧 1,000명이 넘었다. 이때는 쏘련이 국민당정부와 우호조약을 맺은 관계로 국민당이 목단강에서 합법적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당은 이미 시정부, 시당부(市黨部), 성당전(省黨專)을 성립했을뿐만아니라 를 꾸리여 당세의 위력을 선전했고 300여명의 무장경찰대까지 두고있으면서 시기를 기다리고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인 10월 13일에 중공중앙동북국에서 파견한, 한때 기발을 들고 용감무쌍하게 일본침략군을 족쳐 이름떨쳤던 항일장령 리형박이 곡환귀로 변성하고 나타났다. 그 앞서 목단강에 와 쏘련홍군사령부의 부사령원으로 있는 조선사람 김광협(金光俠)과 함께 쏘련군과 교섭한 후 묘계로 국민당주구세력을 구축하고 시정부를 접관한 뒤 시장이 되었으며 조선사람 김동렬(金東烈)이 부시장으로 되었다. 목단강시정부는 조선동포들에 대한 사업을 가강하기 위해 정부에 선정과(鮮政科)를 설립하고 안시웅(安時雄)에게 과장직을 맡겼다. 이듬해의 정월에는 조선족이 비교적 많은 동녕현정부에도 민족과(후에 선정과로 고침)를 두었고 9월에 해림에 신해현(新海縣)이 나오면서도 역시 민족과를 두어 전 현의 조선족사무를 따로 장악케 했다. 이에 앞서서 리형박은 시장이 되면서 동북국민군 목단강지구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직을 맡고 민주동맹에서 모집한 끌끌한 조선남아들을 골간으로 하는 300여명의 무장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시외에 분산되여있는 18,000여명의 무장을 받아들이여 12개 퇀으로 편성했던 것이다. 1945년하순, 이같이 확군과 재편성으로 군사실력이 장대해지고있을 때 팔로군 제359려의 한 퇀이 급행군하여 목단강에 도착해 14퇀으로 되었는바 근 반수이상이 조선사람이였다. 이 부대는 시급히 장대해져서 목단강지구의 토비숙청에서 골간부대로 되었다. 이에 앞서 쏘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총격전을 발동한 이틀후인 8월 11일 12시 주덕총사령은 쏘련홍군이 중국 및 조선경내에 진입하여 작전하는데 배합하라고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던 조선의용군 무정(武亭)사령, 박일우(朴一禹)부사령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과 원 동북군부대와 같이 동북에 진출하여 일본군과 그의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실현함에 리롭게 할것을 명령한바 있다. 이 명령을 접한 조선의용군들은 무한히 격동되여 를 웨치기도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하였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랴, 이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피흘리며 싸워온 그들인데야!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성의용군부대들은 모두 봉천(심양) 서탑구에 모이여 그곳에서 전군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소수의 로혁명가만 조선에 돌아가고 그 외는 잡시 동북각지에서 재중조선동포들을 발동조직하여 자체의 력량을 확대함으로써 변화화는 장래의 형세에 대응케했다. 이에 전군은 3개지대로 나누어 제1지대는 남만으로, 제3지대는 북만으로 제5지대는 동만으로 분산하여 활동하되 제1지대는 제2지대를, 제3지대는 제4지대를, 제5지대는 제6지대를 확대조직하기로했던것이다. 한편 광복이 나면서 할빈에서는 조선독립동맹북만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여 동포난민들의 귀국과 생활을 돌보앗거니와 동포가 비교적 많은 현들에 독립동맹위원회를 설립하고 산하에 건국청년회와 흥농회(興農會)를 조직하였으며 청년들을 참군시켜 신속히 무장대오를 묶어세웠다. 독립동맹책임자 김택명(金澤明)은 9월초에 항일련군장령 리조린(李兆麟)이 할빈으로 오자 즉시 그의 령도를 접수했다. 그런데 할빈의 조선인정황은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의 지지를 받고있는 고려인회(高麗人會), 고려청년단(후에 한국민회, 한국청년단으로 고침), 대동민주당과 무장대인 한국수련대(韓國修鍊隊)가 조선독립동맹과 맛섰던 것이다. 두 대립진영은 8월말부터 시작해서 1개월이 넘도록 하는 문제를 놓고 군중성적인 대변론이 벌어졌는데 결과 고려청년단이 대다수군중의 념원을 리탈함으로해서 종말짓고말았다. 8월 25일 조선독립동맹은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했는데 11월에 이르러 병력이 1,000여명되였다. 이로써 관내에서 나온 19명의 의용군골간이 제3지대를 건설함에 기초를 닦은것이다. 11월말, 할빈시가 국민당 에게 점령되자 제3지대는 빈현으로 이동했고 할빈에 남았던 국민당계렬의 조선민족무장중대는 독립동맹 지하공작원들의 반복적인 사상공작끝에 팔로군이 할빈을 공략하기 착 전날이던 1946년 4월 27일 무장을 전부 갖고 제3지대 주둔지인 할빈시교 사만툰(沙曼屯)으로 넘어와버렸다. 이럼으로해서 북만토비숙청을 위한 다른 한갈래의 튼튼한 골간무장이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각지에 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직된 인민무장들이 여럿 건립되였는데 합강군구 1퇀 2영, 흑룡강군구 경위퇀1영, 목릉현조선족독립영, 동북민주련군 호로군1퇀 등은 모두 조선민족 열혈남아들로 주직된 튼튼한 무장대오였다. 이때는 조선의 형세역시 복잡했다. 1945년 8월 22일 쏘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에 진주했고 28일에는 북위 38°선이 설정되여 조선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하아지중장휘하 미군선발대가 9월 8일 인천에상륙하여 38°선이남을 차지하더니 11일에 군정계획발표, 12월 28일에는 3상회의가 개최되여 남조선에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림정은 물론 광복군도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해산되고 개인신분으로 입국했던 림정요인들의 활동으로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여 12월 31일 서울시민의 반탁시위행진이 일어났던 것이다.
335    장편전기 설한 (37) 댓글:  조회:2693  추천:1  2014-04-08
    37。 준엄한 세월이였다.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발동하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대쏘작전을 준비하는 한편 20개 사단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겹겹이 늘이여 항일무장들을 최후로 섬멸해버리려고 시도했다. 여지껏 유격전쟁을 계속해오던 항일부대들은 심산의 근거지가 적에게 발각되면서 습격을 받고 소각되였다. 험악항 상황이였다. 식량과 의복을 더는 공급받을수 없는 고립무원한 처지에서 싸움을 견지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특히 겨울에는 엄한과 기한에 쓰러지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다. 항일련군은 전성기에는 병력이 45,000여명에 이르기까지 했건만 후에는 불과 1,0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이 대오는 하는수없이 유생력량을 보존코저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려하지 않고 자기의 용기만믿고 싸웠던 자발성적인 항일무장들은 유생력량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채 모조리 붕괴되고말았다. 산시와 해림에서 생겨났던 가 바로 그러했다. 의 수령 장기산은 부하 안비(雁飛)형제가 일본군에 팔마먹는바람에 잡혀서 철령하감옥에 갇혀 거기서 세균주사를 맞고는 온 몸이 썩어나서 시달림을 받다가 죽었고 로옥중은 1941년 가을에 자칭 고천대(辜天隊)두령이라는 류아무개가 해림에 와서 함께 교하(蛟河) 일본군을 들이치자고하니 그것이 계책인줄은 모르고 감언리설에 속아넘어가 경솔히 믿고는 400여명이나 되는 자기의 부대를 맏겼다가 몽땅잃고말았다. 류아무개는 본래 길림에서 파견한 특무였는데 를 자기가 거느리고가서 고스란히 관동군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투항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전부 무참히 살해되고말았다. 한편 대종교도들은 눈물겨운 을 겪게되였다. 대종교 3세교주 윤세복은 을 세우고 교사(敎師) 5명으로 학원 60명을 가르치면서 각종 교서들을 찍어냈다. 그러면서 그는 천전을 지으려고 목단강성공서의 허가를 얻었다. 그래서 천전건축을 서두르게 됐는데 일찍부터 대종교의 내막을 알고있었던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에 돌연히 숱한 군경을 풀어놓아 일조에 북만주의 녕안, 신안진, 할빈과 목릉, 밀산 등지를 비롯해서 북간도와 조선 여러곳에 있던 대종교골간 25명을 체포해버렸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써 교도들을 교양하고 독립운동자를 길러내던 이 종교단체는 회멸의 경지에 이르렀다. 비참한 일이였다! 이 있은 직후 강석이네는 대종교도들이 좀 더 집중해서 사는 해남촌으로 이주했다. 류류상종이라 그래도 교도들사이에 오가는 정은 가식없고 투터운것이였다. 이국땅 타향에 와 살면서 환난상구(患難相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처지인 그들이였다. 강석이는 언니못지 않게 옥살이를 하고있는 양부를 뇌이군했었다. 그것은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진 안타까운 기다림이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리한 2년 8개월의 세월이 흘러가서 마침내 1943년 6월하순이 되자 양부 김기철은 만기석방되여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두부룩한 수염, 메마르고 피기없는 얼굴... 혹형을 받아야만했던 모진 고생속에서 그지간 몰라보게 축했다. 허지만 늙은 몸에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생지옥에서 이같이 목숨붙어온것만도 기적같아 온 가정이 기뻐한건 더 말할것 없었다. 양부는 그사이 강석이가 어린 나이에 비밀결사에 들어 활동하고있는 사실을 알고는 과연 장하다면서 대견해하시였다. 강석이는 그 말을고맙게 들었다. 양부는 그지간 항일세력이 위축된 정황이며 을 겪고나서 교인들의 정상활동이 어렵게 되고 불안속에서 정서가 생긴것들을 알고는 몹시 상심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리도 맥없이 망하고마는거냐고 여러날을 우울히 보냈다. 이러던차 어느날 외지에 나돌던 리달문이 찾아왔다. 사교(死交)의 상봉이라 반가울건 더 말할것 없는데 옷주제가 너무나 람루해서 옆사람보기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김기철은 그가 오자마자 제 안해와 상의했다. 이 일을 리달문이 알고 무람없이 내던지였다. 그리곤 의례 강석이를 찾았다. 리달문은 그지간 오래동안 련계가 끊어진 안진태패의 독립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답답해서 나돌다가 여러날만에 겨우 그리 멀지 않은 류모하자(柳毛河子)골안에서 한해남짓이 숨어서 숯구이를 하는 입곱명만 찾아내고 돌아왔던 것이다. 조사가 심한때라서 궈총은 있어도 깊이 감춰놓고 빈몸에 나돈 그였다. 위경무국(僞警務局)에서는 특무고(特務股)를 설치했다. 특무들은 무릇 총가진 사람만 보면 이요 로 잡아다가 항일련군과 내통하지 않았느냐고 혹독한 고문을 들이대는 판이였다. 만주땅에서 특무는 1939년부터 부쩍 많아졌는데 특무고의 외근인원들은 이라는 이름으로 각 경찰서 특무계에 내려가  특무고장과 직접적련계를 달고 활동했다. 그자들은 전 현의 향진(鄕鎭)과 식당, 려관, 극장, 정거장등에다 특무거점을 정해놓고 무릇 사람들이 경상적으로 집합하고 활동하는 곳에다는 에누리없이 사복특무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가는곳마다 경찰세상이 된 만주국은 또한 특무세상이기도 했다. 이런속에서 비밀결사의 활동이 그만큼이라도 견지되였다는건 과연 기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개전후 얼마간은 남방지방에서  승전을 거듭했지만 1942년 후반기부터는 반공(反共)태세를 갖춘 련합군의 점차적인 공세에 부딧쳐 미드웨이해전, 구아들카낼작전에서 대패한것을 고비로 1943년부터는 전면적패퇴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패배로부터 자신을 만회하고자 이해의 가을부터 철저한 동원령을 실시했는데 그네들의 만주에서의 행동은 그 잔인성이 점점 발광적인 정도에 이르고있었다.   탈곡이 끝나기 바쁘게 검사대가 내려왔는데 그자들은 절후창(絶后槍)이라는, 끝머리에다 색대 즉 탐자(探子)를 꽂은 긴 참대꼬챙이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감춰둔 량식을 찾아내느라 짚무지며 구들고래며 지붕이며 지어는 변소까지 찔러보았다. 농민들은 피땀흘려 지은 곡식을 이렇게 다 빼앗기고는 그대신 뜬 좁쌀을 으로 타먹고 대식품을 먹어야했다. 낟알익는걸 보고 굶어죽을수야 없잖은가. 공손히 말들으면 제배만 곯는다. 어진 백성이라고 나라님이 그래 어느때는 떡한쪼각 더 준다더냐 하면서 이듬해는 가을에 집집마다 낱알이 있는 족족 가만가만 좀씩 추수해다가 발방아로 찧어먹었다. 그런데 마을의 자경단에서 이 일을 알고 금지시켰다. 자경단장 류창수는 어느날 단원몇을 데리고 집집이 다니면서 방아채를 몽땅 걷어갔다. 양모는 방아찧다 들켜 방아채를 빼앗기고는 분해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강석이는 느즉막해서 자경단에 가보았다. 마당에 걷어들인 방아채들이 가득했다. 그는 제집의것을 알아보았다. 자경단실 구들에서 방아채걷으러 다녓던 자경단원들이 술먹고 취해서 자는데 단장 류창수는 자지 않고 밥짓는 녀인더러 국수를 눌러달라고 혀꼬부랑소리를 하고있었다. 강석이는 속으로 욕지걸이하면서 방아채를 슬그머니 메왔다. 양부는 찬탄했다. 온 해남촌을 치고 오로지 강석이네만은 방아채를 숨겨놓고 도적방아를 찧어먹었다. 일제가 만주에서의 경제수탈은 여러가지였다. 직후에는 지방세금이 13종이던것이 1944년에 이르러서는 34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라는 명목으로 파렴치하게 돈과 철, 연, 동, 아연, 석, 안티몬 등 금속들을 수탈해갔다. 철붙이만 보면 다 걷어갔는데 지어는 대물림이던 놋그릇과 놋숟갈마저도 수탈의 대상으로 되고 있었다. 강석이는 비록 계집애였지반 사내애들만 못지 않게 배짱이 셌다. 이해 즉, 1944년 정월초에 37살의 서일의 아들 윤제를 비롯해서 김진호, 김두찬, 리성빈 등 때 잡혀갔던 이들이 취조를 받가다 교무무책이라하여 풀려나왔다. 그러나 서일의 사위인 최관은 놓여나오지 못하고 류치장에 그냥 갇혀있다가 5월 7일에 8년도형을 받았다. 그는 6년전에 대종교서적간행을 위해 출자금을 많이 납부했으니 공헌이 있는 교도였던 것이다. 강석의 양부 김기철로인은 서일의 아들 윤제와 그 몇몇 골간이라도 풀려나왔으니 다행이라 기뻐하면서 찾아가 위안했다. 그런데 이때에 그의 집에는 전혀 예상치않던 화가 또 떨어졌다. 지식있는 큰아들 두생이가 논을 재이는 일에 나섯다가 세 자경단사람과 언쟁이 생겼는데 단장이노라 세도쓰는 류창수가 시비에 지게되자 돌로 그의 머리를 까놓은통에 당장에서 까무라쳤던 것이다. 이로하여 두생이는 히스테리로 되어 한동안 마을이 소란하게 광기를 부리다가 얼마안가서 그만 약먹고 자살해버렸다. 억울해도 어데가 송사할 곳도 없었다. 점찍어놓은 의 가정이였으니 위만정부가 알아줄리 만무였다. 양부는 늙고 허약해졌다. 일가주장이던 역군이 그렇게 되고보니 집살림은 점점 더 쪼들려갔다. 그래서 강석이는 공부를 그만두고 자기라도 벌어서 식솔들을 먹여살리려고 맘먹었다. 양부는 이러면서 그가 학업을 중도이페지하는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강석이는 학교를 더 다니기싶어도 못가게되였다. 일은 이러했다. 삼복철 어느날 학교에서 원족을 가게됐는데 선생들이 사전에 단속이 없어서 점심때 녀학생 셋이 목욕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강석이와 정 동갑의 친구들인 도순옥, 김금녀, 김금순이였다. 허나 강석이만은 양부한테서 배운 헤염재간덕에 요행무사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에게 규률은 강조하지 않고 제맘대로 목욕을 한 강석이를 규률을 모르는 이라면서 출학시키였다. 양부모른 학교의 처사에 불만해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며 다행인듯이 강석이를 위안했다. 그러니 강석이는 이렇게 된바하고는 녀공모집이 있다는데 차라리 거기나 등록해서 돈벌이나갈 궁리를 했다. 그랫다가 그는 양부한테 호된 꾸지람이나 들었다. 강석이는 다시는 돈벌이같은 소리를 감히 입밖에 내지도못했다. 양부모의 말을 절대들어야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세태에 눈이 밝았으니까. 강석이가 출학당한지 며칠안되여 마침 리덕수로인이 조선에 간지 여러달만에 돌아와 지금 그곳에는 이 내려 숱한 녀성들이 끌러가는 판이라고 알려주었다. 태평양전쟁 개전이후 전쟁수요에 필요한 병원(兵員)과 보조인력의 동원을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조선 청장년을 동원해 가고있던 일제는 이젠 조선녀성들마저 대량으로 강제동원하기 위해 1944년 8월부터 그같은 법령을 시행하고있었던 것이다. 에 근거한 이 법령은 12살이상 40살(처음은 32살)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녀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령장(令狀)을 발부해 동원했다. 령장 즉 를 받은자가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별도로 발부하는 에 의해 특정한 직업에 강제로 취업되였고 그것마저 불응할시에는 에 의해 1,000원이하의 벌금 또는 1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되여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이 기만적이고도 강제적인 방법으로 동원되여 군수(軍需)공장과 전방작업에 투입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녀성들중 상당한 수를 차지하는 녀성들이 일제군대의 로 되어 육체를 참혹하게 유린당하는 처지로 변해간 것이다. 양부모는 강석이가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까봐 몹시 근심하면서 경각성을 각별히 높이였다.
334    장편전기 설한 (36) 댓글:  조회:2824  추천:1  2014-04-08
    36. 1941년 12월 8일에 태평양전쟁이 폭발했다. 일제가 발동한 태평양전쟁이 폭발하자 제2차세계대전이 확대되였다. 이로하여 온 만주가 전쟁기분에 푹 잠기였다. 일제의 괴뢰 강덕황제는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인차 를 내렸다.     각덕황제는 자기는 일본 천황페하와 정신이 동일체라느니 만백성도 그 신민과 더불어 일심동체라느니 공동방위의 대의에 기초하여 생사존망을 분리하지 말라느니 전체 국민이 봉공의 지성을 다해야 한다느니 뭐니 했다. 만주의 백성들은 누구나 조서의 내용을 명심해듣고 기억해야하했고 학교에서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내용이 긴 원문을 그대로 암송하라고 강요했다. 강석이는 이러면서 자기는 머리가 아둔하게 생겨먹어서 기억못하는양 매를 맞는한이 있더라도 조서를 외우지 않으리라 맘먹었다. 그런데 허수아비인 강덕황제가 일본과 생사존망을 같이하고 대동아성전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전체 국력을 기울이라고 맹세하면서 일제에 아부하고 굴종하는통에 일본조상의 신을 믿고 천황을 숭배하며 일본을 떠받드는 활동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강행되였다. 마을마다 마을밖의 산기슭이나 언덕우에 공중의 경배를 위한 신사(神社)가 세워졌다. 자기의 조상이나 고유의 신앙을 제쳐놓고 일본인의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 마음에 접수되지 않고 감정에 뒤틀리는 일이지만 경찰과 치안유지회와 협화회의 독촉과 감독이 심하니 별수 없었다. 도시는 물론 지어는 편벽한 농촌구석에까지 아침, 점심 두 번은 꼭 밥먹기전에 행사를 치르어야 했다. 그리고나서야 밥을 먹었다. 강석이는 물론 독립군가정들에서는 다가 검사를 올것같으면 눈가림으로 하는척했다. 단군의 후손으로 태여나 남의 조상을 믿는다는건 도저히 될수도없는 반역행위로 간주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종교도가 아닌 사람중에는 민족혼을 너무나 쉽게 잃고이 빨리되자고 제 조상도 팔아먹으면서 친일주구로 돼버리는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자들은 대개가 중처럼 민둥머리를 하고는 협화복을 입었다. 위만(僞滿)초기에 일본침략자들은 두가지 문제를 깨달았는데 그하나는 30여만명이 넘는 반만항일무장이 각지에 널려있어서 동북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하자면 치안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였고 다음의 하나는 동북인민의 반만항일사상이 날따라높아가고있는 정황하에서 무력에만 의거할것이 아니라 강력한 도 해야한다는 그것이였다. 그래서 벌써 1932년 4월 1일, 관동군참모장 하시모도 도라노스께의 지지하에 만주청년련맹의 두 두 일본인간부가 선두나서서 협화당(協和黨)이라는 것을 조직했던것이다. 그들은 주요하게 선전선무공작(宣傳宣撫工作)을 책임졌는데 성원은 항일진영에 파견되여 반란을 책동하고 투항과 귀순선전을 한것이다. 부의가 당시 협화당을 하나의 당(黨)으로 치부하는데 대해서 겁을 집어먹으면서 반대의견이 있었길래 관동군에서는 그것을 협화회로 고치였다. 하여 1932년 7월 15일에 만주협화회(滿洲協和會)가 정식성립되였다. 그 협화회의 종지는 는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333    장편전기 설한 (35) 댓글:  조회:3209  추천:1  2014-04-06
  35.  일제는 만주에서 파쑈적인 고압통치를 실현코저 마치 짐승을 기르듯이 방대한 경찰대로를 건립하여 틈서리만 있으면 거기에다 그 경찰기구를 박아넣었다. 이러한 경찰조직들은 일제가 만주통치를 강화함에 따라서 부단히 개조, 강화되였는바 그것은 일제가 만주국을 공제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일제는 일찍이 1932년 3월부터 시작하여 경찰기구를 건립하였는데 위민정부(僞民政府)에 경무사(警務司)를 설치, 위만경찰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게끔했다. 경무사나 중앙경찰기구를 장악하고 관리하는것은 다가 일본인관리였고 성경찰청의 청장 역시 일본인이 담임했다. 위만경찰의 주요임무는 치안유지 즉 다시말해서 과 국경보호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행정경찰이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경호, 형사, 종교, 사상, 풍기, 위생, 보안, 산업, 교통, 영업, 건축, 공장 등에 관여하고 또한 염업, 림업, 연무(아편)들을 관리했다. 위만정부는 1937년에 이르러 국경경찰대를 새로 증설했거니와 1938년에는 로동경찰까지 내와서 백성들의 로동을 통제했다. 그리고 경찰들은 또한 방첩(防諜), 첩보(諜報), 경방(警防), 경제보안(經濟保安)과 량곡출하(糧谷出荷)독촉 등도 책임지였다. 그러한즉 만주국의 정치생활에 있어서는 그 어느 하나가 경찰과 관련되지 않은것이라곤 없었다. 온 만주땅이 경찰천하 그대로 경찰국으로 되어버렸다. 이러하니 인민들이 받은 재난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이 외에도 위만정부는 또 중앙청향위원회(中央淸鄕委員會)라는것을 설치함과 동시에 각 성(省)과 현(縣)에도 성향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위원장은 성장, 현장이 직접맡고 위원은 당지의 일,만군경(日,滿軍警)과 행정기관의 두목들이 맡았다. 193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건립되였던 청향위원회를 치안유지회(治安維持會)로 고쳤다가 그것을 1938년에 이르러 페지, 중앙과 성과 현들에는 치안정보련락회(治安情報連絡會)가 성립되여 일,만군경과 관게있는 기관들의 련락과 조절을 책임지었던 것이다. 위만당국은 1935년에 삼림경찰대를 내와 현장이 직접 그를 지도케 했다. 그러면서 1940년말에 이르러서는 11개성에 삼림경찰대가 설립되였는데 북만에는 빈강(濱江), 삼강(三江), 북안(北安), 흑하(黑河), 목단강 등에 한 개씩 있었다. 삼림경찰대의 주요임무는 과 삼림채벌을 경비하는 것이였다. 이 삼림경찰대가 항일련군의 활동을 파괴하는 급선봉으로 나섰던것이다. 1939년 겨울, 동녕 대함창에서 조선으로부터 이사를 방금 온 농민 7명이 땔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그중 하나가 붙잡히우지 않고 6명이 삼림경찰대의 손에 붙잡히였는데 중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그들은 그만 항일련군과 련락하러 간 반일회의 사람으로 잘못몰리여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것이다. 사람사는 마을로는 들어올 수 없는 독립군 몇이 륙봉산(六峰山)에 들어가 숨어있으면서 원시적으로 연명하고있었는데 1940년도 봄에 그중 한사람이 삼림경찰대의 포위에 들어 항격하다가 붙잡히우고말았다. 경찰 열댓이 잘라낸 그의 목을 길다란 나무작대기 끝에 매여 달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거리바닥을 회술례했다. 꽹가리소리를 듣고 나왔던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고는 그만
332    장편전기 설한 (34) 댓글:  조회:3172  추천:1  2014-04-05
    34. 1938년도 여름에 김좌진의 딸 강석이는 일본에서 치료받고 나아서 돌아왔다. 비록 어린 나이긴 했지만 강석이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한편 어린 그로서도 그지간 변화가 많음을 보아냈다. 특히 구면의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눈에 많이 보이지를 않은 그것이였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리덕수로인이 양부한테 그사이 한 마리 죽었노라고 알려주었다. 그가 말한 란 의 두목 김동한이였다. 혈채많은 그자는 전해의 여름에 화남(樺南)의 반재하(半載河)에서 초기 녕안북만로농의용군 건립에 참여하여 그 대장이 되였고 밀산유격대참모장, 항일련군 제4군참모처 처장을 지내다가 항일련군 제8군을 개조코저 파견되였던 항일간부인  김근(金根)을 귀순시키려다가 장계취계에 들어 도루 제 생명을 잃고만것이다. 헌데 그해 년말에 이르러 박봉도, 리○○ 두 반역자가 일제측에서 내건 상금 천원에 눈이 어두워 김근을 살해하였다. 모두들 반역자를 저주했다. 강석이는 어려서부터 양부와 들에게서 인간이면 절개가 굳어야하고 적아를 가릴줄을 알아야 하고 애증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과 자기 조국과 민족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강석이는 나이 10살이니 이쯤하면 리지적인 감정을 키울만도했다. 이때까지도 는 용케도 흩어지지 않았고 그럼으로해서 늘 모일수 있었고 모여서는 국세를 론하고 자기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이야기도 했다. 강석이는 그네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었고 들은것은 다른사람한테 번지지 않았다. 그는 양부모가 시키는 말은 명심해듣는 소녀로 자난거다.   중국내지를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온 아세아를 독점하려는 야심이였던 일제는 조선에서처럼 만주의 경제를 략탈할 목적으로 을 세우고는 그 일환으로 목단강개발을 다그쳤다. 그들은 1935년도에 벌써 와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목단강을 로 만들리라고까지 떠벌이였던 것이다. 그통에 목단강은 물론 근처에 있는 해림일대의 농촌주민들까지 들볶이우면서 과중한 부담과 고역에 시달려야했다. 한창 이런때이던 1939년 9월 14일에 강석이네 집에는 갑자기 기막히는 액운이 떨어졌다. 이제 나이 24살인 둘째오빠 두문이가 달구지에 벼를 싣고 목단강에 갔다오다가 길가 논판에서 죽은것이다. 생사람이 죽다니? 강석이는 정깊은 오빠가 급사하자 기막히게 울었다. 둘째아들 두문이가 죽은것에 대해 김기철은 여러모로 분석해보고 이것은 분명 전에 독립군과 척진 자의 짓이라 짚었다. 그러니 신경이 곤두서면서 경각성을 더 높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일신보다 양녀가 피해입을가봐 더 근심이였다. 묘하게도 강석이 역시 손톱에 칠색의 무지개발이 일었다. 김좌진의 손톱이 그러했던것이다. 양부는 이러면서 식솔을 데리고 그곳을 훌쩍 떠났다. 이때는 강석이가 김좌진이 생부임을 알고있었다. 이번에 자리잡은 곳은 조선호가 하나도 없는 어느 한 중국마을이였다. 여기면 좀 났겠지 하는 생각도 났지만 강석의 양모는 남편신변이 걱정되여서 아예 멀리로 가버리자고 했다. 이에 양부는 왜놈의 천하인데 어디가면 경찰이 없으랴. 아들을 앞세우고 늙은것이 목숨을 아까와해선 뭘하겠느냐했다. 아무때건 자기는 경찰에 잡혀갈 몸인데 에라 될대로되라지 하고 운명을 팔자에 맡기면서 꿈만해하기 시작했다. 하노라니 그날은 끝내 오고야말았다. 양부가 간밤에 꿈자리 사납다더니만 아니나다를가 한낮에 경찰이 문득 찾아온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이번에 온 경찰은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거니와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간 일본에 가서 잘 지냈느냐고 제법 인사치례까지 하고는 양부더러 자기와같이 가자는 것이였다. 이때는 큰오빠 두생이만 없고 양부모와 언니 영조 그리고 이제 4살인 오랍동생 원렬(元烈)이, 두생의 처 정숙이와 딸 선녀하고 강석이 이렇게 식솔 일곱이 집에 있었다. 너무도 조련받아서인지 이젠 담이 어지간히 커진 양모가 그 만주경찰을 붇들고 자기도 남편따라가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양부께서 발끈했다. 그래도 이렇게 붙잡혀가면 끝장일것만같아서 모두들 울었다. 강석이도 엉엉 울면서 양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어 기도했다. 그런데 언니 영조는 울면서 강석이한테 분풀이했다. 그 욕설이 어찌나 지독하고 무섭고 가슴맞히는지 강석이는 그만 참지 못하고 와ㅡ 울음보를 텃치였다. 이럴 때 마침 밖에 나갔던 큰오빠가 돌아왔다. 그도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가는것을 보고서 들어오는 참이였다. 그는 강석이가 하도 서럽게 우니 이상스러웼던지 웬 일이냐고 물었다. 강석이는 그한테 방금 당한 일을 말했다. 그러자 두생오빠는 하면서 영조를 한바탕 되게 꾸짖어놓았다. 울음을 그친 강석이는 다시한번 속으로 양부가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빌었다. 과연 강석이가 빌고 한얼님이 보우해서인지 며칠만에 양부가 풀려나왔다. 집식솔은 모두 기뻐했다. 그렇다고 마음놓을 일이 아니였다. 양부는 두생이를 시켜 전에 다니던 젋은 독립군들은 래왕을 금하게끔 했다. 적들은 아닌게아니라 은근히 감시했고 양부를 가끔 불러갔다. 한번 불리워가면 여러날을 철창에 갇히였는데 어떤 때는 한달이 넘을때도있었다. 이러는 사이 강석이네는 또 이사짐을 꿍치였다. 이번에 이사한 곳은 해림.  아닌게아니라 장돌뱅이식의 살림이였으니 때는 바로 1940년도 늦가을이였다. 강석이네가 해림에 이사와도 들은 여전히 모이군했다. 고맙게도 경찰의 감시가 그네들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음이 분명했다. 들은 모이기만하면 수구회의였다. 어느랄 아침, 순경이 시내가의 숲에 던져진 시체 하나를 발견했다. 40여살의 거쿨진 사나이였는데 사자는 조선사람이고 해림과 목단강을 자주오가던 전의 인원이라는 것이 인차밝혀졌다. 가해자가 누구일가고 추측이 많았다. 강석이는 입을 까딱 열지 않았다. 깊게 생각할 필요없었다. 그건 가 아니면 숨어지내고있는 독립군들이 한 일이라고 그는 짚었다. 변절자, 특무는 마땅히 그렇게 징벌해야 한다. 이것이 어린 소녀의 맘이였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지 얼마안돼서 강석이네 집은 또 봉변당했다. 이번에는 일본경찰이 만주경찰 여럿이나 데리고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그자들이 이번에는 제 솜씨를 나타냈다. 일본경찰 하나는 총탁으로 간장독을 쳐 박살냈고 장독도 그모양으로 깨버렸다. 어떤자는 총창으로 베개까지 찔러 터치고 쌀을 못먹게 하느라 석유등잔을 쌀마대에 던지기도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임신한 양모의 배를 발로 차놓기까지 한 것이다. 그바람에 배를 부등켜안은 양모는 모진 고통에 떨면서 류산을 하고말았다. 이 한무리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집법자들은 이렇게 무방비의 집을 살풍경을 만들어놓고서야 직성이 플리는지 돌아가버렸다. 양부는 이날 다시체포된 거이다. 경찰들의 행패질이 예전만 심한것을 봐서 이번에는 그저일같지 않았다. 그래서 강석이네 집은 그대로 초상난 집모양이 돼버렸던 것이다. 강석이는 언니 영조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런데 영조는 겁나서 경찰서에 접근못하고 강석이만 가까이가서 마침 변을 보러가는 족쇄찬 양부를 보았다. 그는 언니 영조를 겁쟁이라 되게 놀려줬다. 얼마후 양부는 2년 8개월의 도형을 받고 형을 집행코저 장춘에 압송되였다. 죄목은 늙은것이 반일감정을 갖고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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