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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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비밀복무팀>> 댓글:  조회:4511  추천:3  2013-12-05
    도대체 얼마나되는 이 모택동을 위해서 복무했던가?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택동은 생전에 줄곧 특권을 반대했었다. 지난세기 60년대국가가 제일 어려웠던 그 시기에 그의 딸 리민(李敏), 리눌(李訥)마저도 전국인민과 마찬가지로 배를 불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생활질량을 보장하느라 여러면으로 돌본 것이다. 신체조건으로 하여 “특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시 국가에서 여러 가지 복무팀을 내와 그를 돌봐준것은 적시적으로 필요하고도 잘된일이였다.   의료팀   모택동을 위한 의료팀의 인원이 수리로 바뀌였던바 팀이 바뀐것은 두 번이다. 첫 번은 1971년~1972년사이, 말하자면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던 그 한해사이고 두 번째는 1974년부터 모택동이 세상을 떠날때 까지의 사이다. 그 의료조 조장은 리지수(李志绥), 부조장은  서도(徐涛), 변지강(卞志强)、호욱동(胡旭东)이였고 조원으로는 오길(吴洁)、주광유(周光裕)、오계평(吴阶平) 등이였다. 제2차 의료소조가 성립된 구체적인 시간은 1974년 6월중순이였는데 모택동이 사망해서야 그것이 해산되였다.          "큰 활자"그룹   이른바의 “큰 활자그룹”이라는 것은 늘 책을 봐야하는 모택동이 특히는 주석(注释)을 달고나면 글씨가 작기에 큰글자로 바꿔야했던 것이다. 그 “큰 활자그룹”은 1972년가을에 성립되였는데 맨먼저 만들어낸 고적으로는 중의 , , , 이였다. 그 임무를 맡은것은 복단대학과 상해과학원력사연구소의 교수 전문가들이였다. 그같이 주석(注释)이 딸린 책을 출판해내는 "큰 활자"그룹에서는 번마다 15권을 인쇄해냈는데 후에 모택동이 그것을 다른사람도 읽게했다. 그러다가 5책씩 만들게 했는데 그것은 오직 그만이 보는 책이였던 것이다. 모택동이 백내장을 앓으니 "큰 활자"를 “36파운드 왕”으로 잡아 인쇄를 했던 것이다. 당시 그런 활자체가 없었길래 상해오문로(上海澳门路)에 있는 중화인쇄공장에서 모택동을 위해 특별히 복제를 해냈던 것이다.     혼성 그룹(吟唱小组)   "큰 활자"그룹과 마찬가지로 생겨난것이 혼성그룹(吟唱小组)이였는데 그것은 고대의 시를 읇는 소조였던것이였다. 시를 읊고는 번마다 그것들을 "비밀"기록을 해두었다. 문화부부장이였던 우회영(于会泳)이 그 책임을 직접졌던 것이다. 중공당사출판사에서 펴낸 에 기재된것을 보면  “북경서원려사에 녹음실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오는 혼성그룹(吟唱小组)의 성원들을 보면 다가 예술계의 가장유명 인사들이였는바 례를 들면 악미제(岳美缇), 채요선(蔡瑶先), 요병숙(姚炳淑) 등과 같은 사람들이였다. 함께 모이군하는 음악 플레이어들을 보면 이름이 더욱 뜨르르한 이들이였다.  비파연원 류덕해(刘德海), 이호(二胡)기자 민혜분(闵惠芬), 플루트 배우 장효휘(张晓辉) 등. 록음을 모두 얼마나했는가? 소산의 갤러리(陈列馆)에 있는 고대시 테이프만도 59상자된다. 혼성그룹(吟唱小组)에 참가한 사업인원은 많았다. 예술가의 의미와 시의 분위기를 보다 높이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북경대학에서 고전문학교수 4명을 청해다 전문 곡조에 대한 강의를 하게했던 것이다. 유명한 것은 1975년에 모택동이 백내장수술을 받으면서 듣게 한 제작이였다. 그것은 상해 곤극원(昆剧院)의 악미제(岳美缇)를 청해서 록제한 것이다.   드라마 그룹(戏曲小组)   전문 모택동을 위해서 방송하는 TV 트럭이 따로 있었다.  1974년, 모택동이 장사(长沙)에 가 휴양하는 기간에 고든극장(湘剧院), 드럼극장(花鼓戏剧院)의 어떤 연원들은 불리워가서 옛날연극 공연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 따위들이였다. 배우들은 문화혁명기간인데도 썩은냄새 나는 옛극을 놀게하는 리유를 몰라 첨에는 검나하다가 화국봉이 말해서야 하는수없이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때 호남(湖南)에는 방송장비가 되지 않았기에 중앙에서 모택동이 듣도록 고유한 디바이스로 전송하였던 것이다. 한데 생각밖에 강서(江西) 등 린근의 분계에 있는 어떤 로간부들은 신호에 덥쳐든 라이브 물건을 보고는 한때 성위에다 호남에서는 복벽을 한다고 분분히 고발서를 올리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시가특별팀(雪茄特制小组)   모택동은 본래 “中华”패담배를 즐겨피우다가 시가(雪茄)로 바꾼건데 화룡(贺龙)의 얘기부터 해야겠다. 1956년 어느날 오후, 화룡이 모택동과 채팅(聊天) 할적에 제손에 있는 시가(雪茄)담배가 여차여차 좋다고 자랑했다. 그는 그 담배가 맛이 좋거니와 솔루션 중독도 없다고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호기심이 동해 한 대피워봤는데 과연 감각이 좋았다. 하여 그는 그 시가(雪茄)담배가 사천의 십방담배공장(什邡烟厂)에서 생산한다는 것 까지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모택동의 신변에 있는 사람은 달마다 성도군구(成都军区)에 가서 시가담배를 가져오면서도 십방담배공장(什邡烟厂)을 놀래우지는 않았다. 한데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하여 차라리 그 공장의 기술골간들로 “시가특별제조팀(雪茄特制小组)”을 따로내오기에 이른것이니 때는 1972년 3월이였다. 시가(雪茄)담배가 채용한 리우 담배 연기와 울로 전문 모택동에게 공급하는 담배만 만들었던 것이다. 1976년9월9일,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니 그 모든 구룹과 팀들도 따라서 전부 해산을 선포했다.    
290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5ㅡ8) 댓글:  조회:3450  추천:3  2013-11-22
                               5     어찌 턱없는 루명을 쓰랴! 탈세를 했다니, 송편으로 목딸 일이였다. 종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골통을 잡고 훑고 뒤집어봐야 자기는 위법행위를 하지 않았다.   종구가 구류소에 갇혀 3일만에야 공식적인 심문이 있었다. 하진개라는 그 반탐국장에다 젊은 검찰관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온 장은생검찰장까지 개입해서 모두 셋이였다. 그들은 걸상에 의젓이 자리를 틀고 앉아 판을 차리고 합세하여 단번에 기를 꺾어놓아 종구를 무릎꿇게 하자고 드는것 같았다.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봤다니?!...   커다란 충격이였다. 눈갓이 푸들푸들 떨리면서 심장에 마비가 오는것 같았다. 종구는 마음을 진정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탈세를 했단말인가, 장부를 검사해서 과연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형벌을 받겠노라했다. 그랬더니 검찰측에서는 네가 이러면 성실한 태도가 못되거니와 완고하다는 리유만으로도 얼마든 오래 가둬둘수 있다면서 네가 수감생활이 싫거든 어서 30만원을 내라고 했다. 종구는 이 순간 귀신의 호곡성을 듣기라도한것 처럼 몸을 흠칠 떨면서 그들을 치떠봤다. 나보고 30만원 내고 나가라구? 총들고 빼앗지 못해 하는 수작이구나!      종구는 맘을 단단히 옹쳐먹고 배짱을 내밀었다.   이리하여 종구는 다시금 어느때야 나갈지 모를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지지리 고달픈 수감생활이였다. 기껏해야 8평방미터나 될가말가하는 방에다 사람 다섯이나 처넣었다. 침대가 아니였다. 한쪽벽에 붙여서 판자를 무어만든 길다란 장판이 통째로 하나있고 철판으로 만든 낮다란 출입문과 마주하고있는 창가곁에 악취를 풍기는 검스레한 양철통이 놓여있었다. 다른 감방들도 이모양일 것이다. 똥통과 함께있는 수인(囚人)들!   창문과 가까운 한쪽 벽구석에 어느땐가 천장을 뚫고 흘러내린 빗물이 패이고 얼룩져 마치도 도료가 게발린 조색판 같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거기는 그늘까지 져 어둡다. 저기에 뭣이 숨어있을가?...   종구는 고개를 꺾고 앉아 오래도록 침묵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구 이런 졸경을 치러야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터진다.   그의 옆에는 연초회사(煙草會社)의 30살 먹은 젊은 경리가 이 감방에 들어와 있었다. 원인인즉은 10년전에 한번 저질담배를 되넘겨 팔아 리득을 본적이 있는데 그걸 꼬리잡고 벌금을 안기니 그에 불복했다가 이같이 된거다.      젊은 경리는 억울하다면서 검찰원에서 백성과 너무한다고 하였다.   종구옆의 다른 한 사람은 거의 환갑줄에 든 상고머리를 한 사나이였다. 그는 제혁공장 공장장이다. 그 역시 벌금을 안기니 태도가 나빠서 들어온건데 벌금을 안기는 리유라는 것이 보통사람으로는 리해가 안될지경 해괴한 것이였다.         종구가 물었다.            그한테 무례한 언사를 던진것은 아들나이나 되는 나젊은 검찰관이란다. 상고머리는 지금도 자기가 받은 모욕과 수치에 가슴떨려 말을 더하지 않고 삼키면서 구슬피 눈을 내리깔았다.   여름계절이 짙어가는지라 사람을 죽여주는 무더위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약보름가량 지나서 제혁공장의 상고머리 공장장이 끝내 벌금을 하고 놓여나갔다. 그새 치질이 도져 심해지는통에 아픔을 이겨낼수없었던 것이다. 그는 검찰원에서 하라는대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반성서까지 써바쳐야 했던것이다.   열흘이 가고 스므날이 가고 한달이 가도 종구를 다시 불러내가지 않았다. 아무렴 자루 쥔 놈 이기지 날 쥔 놈 이기랴, 두고보자 하는게 분명했다. 무죄한 사람을 무작정 가둬놓고 이렇게 시달려죽이는 법도 있느냐, 이 빌어먹을 것들아! 아아, 정도는 어디로 갔느냐? 갇힌 몸이라 이것은 하늘도 들어주지 않는 공소요 피타는 절규였다!   열려진 창문으로 파리 한 놈 날아들어와 앵ㅡ 앵ㅡ 고놈은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좋아 빙빙 돈다. 널판장에 앉아 앞발을 싹싹 비비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나가버리고 나갔다가는 또다시 날아들어오고... 지금 내 신세가 저 파리보다 나은게 뭐냐? 억탈당한 자유! 종구는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가 갑갑함을 못이겨 하픔을 크게 하고나서 입을 열어 침묵속에 깊이 빠져있는 종구를 건드렸다.            젊은이는 무색한 웃음을 웃고나서 다시 덤덤해진다. 피기를 잃어가고있어서 지금은 처음 들어왔을 때의 혈기방장한 젊은이 같잖았다. 안해가 4만원이 아니라 40만원을 벌금하더라도 남편을 빼내오겠다는것을 왜 벌금을 한단 말이야 하면서 이러고있는데 대체 어느때까지 뻗쳐낼지?... 젊은것이 너무 고생하는것 같아 보기가 안되였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거기서는 나가도록 궁리를 돌려보라고 충고를 하려다가 종구는 그만뒀다.   또 한달이 지나갔다.   구류소감방은 그사이 역전의 싸구려 려관마냥 자리가 빌새라 여러 사람을 받고 내보냈다. 집체기업책임자도 있고 개인기업주도있고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는 엉터리경리도 있고 허가없이 침통 들고 다니다가 걸려든 돌팔이의사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검찰들 손에 잡혀들어온건데 원인인즉 다가 그놈의 벌금때문이였다.   개중에 탈세를 엄청 하고서도 교활하게 여우를 떠는 사람이 없는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나라법과 체면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어떤 건으로 벌금을 안길 때 너무 과중하다 그래서 불만스러움을 나타내면 벌금액은 대바람 배로 올라가고만다. 그래서 안내면 가둔다. 까딱하면 끄떡하는판이니 아닌게 아니라 신경이 곤두서게 하는 무서운 벌금대전이 아니고 뭔가고 억울함을 토해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신과(控申科) 검찰손에 잡혔다는 사람, 정공과(政工科) 검찰손에 잡혓다는 사람, 감소과(監所科) 검찰손에 잡혔다는 사람... 그들의 눈에 현검찰원은 땀구멍을 다 열어놓고 피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혈귀로 돼보일뿐 다른 무엇으로는 돼보이지 않았다.                                6     종구가 여기에 감금죈지 어언 다섯달! 무더위가 숙지더니 그뒤를 쫓아서 언제 더워봤더냐싶게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꼬박 사흘째다. 연초회사의 나젊은 경리가 기침을 자주하며 가쁜숨을 들까불더니 간밤에는 열이 오르면서 허드레잡소리를 쳐댔다. 된 감기에 걸린것 같은데 어쩌면 좋다? 저러다가 페염으로나 번지면 큰일인데. 종구는 거의 장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다싶히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밝자마자 수용소책임자를 불러 당신들은 사람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가 안여기는가 질문을 들이대고는 병이 난 젊은이를 책임지라 했다. 했더니 저쪽의 응대란 고작 감기약을 몇알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를 취급해온 검찰관이 종구보고 하는 말이였다. 자식이, 날보고 투항을 설교하라는거냐. 종구는 주먹으로 한 대 후려주고싶은걸 겨우참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가? 그는 돌아와서 다시 생각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젊은이보고 고깟 돈이야 얼마든 벌게 아니냐. 바치고 나가라. 벌금하고 여기를 나간다 해서 그게 백기를 드는 것일가. 달리는 그자들과 맛설 방법이 없겠는가.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 사람은 몸이 중천금(重千金)이니 살고봐야 한다 권고하기도 하고 나도 이제는 대항방법을 고쳐보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는 마침내 달통되였는지 말을 들었다. 그는 이틑날 벌금액 4만원을 현금으로 내고 풀려 집으로 돌아갔다.   운명의 작간인지 희롱질인지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가 나가기 바쁘게 들어와서 그 빈자리를 메운 사람은 공교롭게도 종구앞에서 불쾌한 회억으로나 남을 광대극을 놀아댄적이 있는 새우장사군이였다. 령감쟁이는 이쪽이 누군지를 모르고있지만 종구는 첫눈에 추접스레 생겨먹은 그를 알아보았다.      령감쟁이는 들어오자마자. 삼거풀이 돼가지고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누군가 묻자         종구가 몰박아 입을 다물게했다.   현소재지인 이 자그마한 도시는 갑작스레 길가 난전마저 정돈되면서 질서가 잡혀가는것만 같았다. 허가없이 장사해먹고 사는 사람이 새우장사꾼 하나뿐 아니였다. 요즘 더러는 벌금을 피하느라 장사고 뭐고 집어던지고 소리없이 몸을 빼는 사람도 있었다. 붙잡히우면 자기한테 과한 벌금이 안겨질가봐 겁을 집어먹고, 한편 또 어벌쩡하게 능청떠는 것으로 경찰의 마음을 사려는 꾀얕은 인간도 없지 않았다. 허나 일단 잡히는 날이면 짜드락나는 판이라 그 어떠한 수단이든 무색해서 거의 맥을 잃고있었다.]   바로 이것이였다! 현검찰원의 새로부임한 검찰장 장은생은 수하 검찰관들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수탉만난 오공 도망칠수 있을가,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아나는거야, 좀이라도 걸려드는 놈은 고개를 숙이게 만들라! 사정보지 말고 꼭대기를 쳐, 꼭대기를!   황소를 잡고나서 돼지를 잡고, 돼지를 잡고나서 개를 잡고, 개를 잡고나서 닭을 잡고, 닭을 잡고나서 더 잡을것이 없으면 쥐라도 잡자고 드는 걸신들린 도까비가 청천백일하에 작경을 놀고있었다. 제 나라의 법정기관이니 의례 옳으려니만 믿어주는 순진한 백성들, 훌륭한 제도의 나라에서 살면서 지금의 이 좋은 개혁개방의 황금세월에 욕을 보고 우롱당할줄이야 그네들이 어찌 알았으랴!   수인이 되어 하루가 여삼추같이 지리한 부자유의 나날, 구류소의 음침한 랭기는 종구의 신체를 점점 심하게 해쳐가고있었다. 입맛이 떨어지면서 오른쪽 윗배가 아파나더니 소화장애증상이 반복적으로 생겼다. 간경변증에 걸린것이다. 종구는 차돌같이 굳고 단단하던 몸이 그만 병채로 변해가고있었다.    종구는 말이 적어졌다. 해도 날이 서지 않는 말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말해도 소용없었다. 도리가 무시되고 인권이 짓밟히고있는 여기서는, 그러니 화산같이 터져오르는 분노도 그저 침묵으로 지그시 누르는수밖에.         여기로 갓 들어온 날 벌써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워낙 말이 수다스런 새비장사군은 입이 가려운지 쑤셔나는지 멋모르고 다시 놀렷다가 하마터면 종구의 주먹에 맞아 뼈도 추리지 못할번했다.   구류소감방에서 다른 사람들은 진종일 입에 자물쇠를 놓고있는 종구가 걸핏하면 사납게 성깔을 부리는지라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퍼그나 조심들을 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지리한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바깥 주민구역 어디선가 폭죽텃치는 소리 들려왔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새해의 설명절이건만 종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감방에서 보내야했다.      종구는 처음과 꼭같은 말로 내내 뻗치는 판이다.   벽난로에다 석탄도 제대로 넣어주지 않아 썰렁한 감방, 종구의 시선이 다시금 창가 구석진데로 옮겨져 고착되였다. 예민해진 시력의 도가 점점 높아져서인지 어둡던 구석이 그의 눈에 차츰 밝아졌다. 그러자 여지껏 흘러내린 빗물에 패이고 갈라진 벽의 그 틈서리에다 몸을 감추고있었던 한 마리의 거미가 마침내 발견되였다. 종구는 그놈을 중시했다. 오래도록 관찰했다. 그러노라니 마침내 고놈의 발고리같은 발이 움직이는걸 발견하게되였다. 아니 저 놈이 이 추운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단말이냐?!... 음험한 놈! 숨이 질겨도 이만저만이 아닌걸! 의문이 짙어가면서 기적이라는 경탄이 아니라 그 놈의 완악한 생명이 한없이 미워났다.   그놈은 끝내 몸 전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지껏 숨어있은 틈서리에서 나오느라고. 저 놈이 왜서 나올가?... 거미는 천장을 기여서 거의 중간쯤에 이르러 정형을 파악하느라 그러는지 멈춘다. 바로 종구의 머리꼭대기쪽이다. 그 놈은 한창 꼼짝 않고있더니만 마침내 육안으로는 거의 보아내기 어려운 가느다란 실을 밑구녕으로 뽑으면서 아래로 곧추 떨어졌다. 그래서 바로 종구의 발끝 장판에 내려앉는다. 종구는 발가락으로 고 놈을 꼭 눌렀다. 톡 하고 가벼운 소리난다. 분명 배터지는 소리다. 어 속이 시원하구나! 이렇게 후련할 변이라구야!    난 살아서 여기를 나가고봐야한다. 만 6개월만이다. 이틑날 종구는 검찰측의 요구대로 싼타나를 거기다 저당잡히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7     종구가 집으로 돌아오니 안해의 얼굴을 덮고있던 구름장이 걷히고 아이들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났다.   헌데 생각밖에 일수가 검찰원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해의 말이였다.   종구는 인츰 일수네 집쪽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수정같이 맑은 사람으로 믿어왔는데 경제문제가 있다니 웬 말인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일수의 각시가 억이 막혀 피력하는데 들어보니 과연 한심했다.   일수는 요즘 일거리가 없어서 차를 놀리고있었다. 개체운수업이란건 본래 그런게 아닌가. 새 일거리를 찾아야했다. 어제저녁켠이였다. 찜찜한 일거리라도 쥐여보려고 진종일 거리에 나가 시간을 보낸 일수가 일감도 없고 시장기도 들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디서 지키고있었는지 생면부지의 검찰관 둘이 귀신같이 나타나 따라들어오는 것이였다.      나이가 일수와 비슷한 중년사나이가 을 내보였다.      일수는 속으로 나는 이 사람한테 굽잡힐 일을 하잖았는데 하면서 물었다.      일수의 귀에 그 말이 어쩐지 별쭝나게 들렸다. 중년의 검찰관은 말을 더하지 않고 일수의 안색을 살핀다.      일수는 악연히 놀랐다. 란장을 맞을 무슨 개소리를 이렇게 치는거냐. 내가 공금을 점했다니, 탈세를 했다구?... 기(氣)구멍이 꽉 막히는 소리였다. 일순간 이름못할 아픔이 일수의 온몸을 줄달음쳤다.   검찰관은 낯색을 엄연히 굳힌채 대방의 내심변화를 진단하는지 눈 한번 가딱하지 않는다. 허나 그따위 서슬에 주눅들고 오가리 들 일수가 아니였다.         검찰관은 눈알을 굴려가면서 딱장을 받자고들었다.      검찰관은 갑자기 벙어리로 됐는지 말을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 노려보기만한다. 그러다가 하고 코방구를 뀌는데 그놈의 소리가 일수의 귀에 미련한 송아지 백정모르는구나 하는 위협같이 들렸다.      일수는 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뇌까렸다.      저쪽은 도끼눈을 해가지고 이쪽을 찍어본다.         이렇게 되어 일수는 잡혀간 것이다. 체포쯩도 없이.   일수가 집을 나간것이 어제라니 나하고 자리바꿈을 한게로구나. 그 사람 고생을 할텐데 어떻게 한다?... 종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지 얼마안되여 일수의 처가 달려왔다.               종구는 자기가 당할 때 처럼 그저 허구푼 웃음만 나갔다. 전갈의 배속에 독만 들어있는거야. 본인도 모르는것이면야 이것 역시 분명 검찰원에서 조작해낸 죄명 아닌가? 그자들이 이 종구한테서 돈을 우려내자고 들듯 일수한테서도 우려내자고 드는거야. 인간성을 잃어버린 그자들의 손에 또 하나의 무고한 백성ㅡ내 친구가 억울하게 당해 고생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절대 강건너 불보듯할수 없었다.            이틑날 종구는 일수의 처와 함께 현검찰원 법기과를 찾아가 미친개한테 물리지 않으려고 떡 줘 얼리는 격으로 거기서 내라는 액수의 돈을 군말없이 내놓고 일수를 꺼내왔다.   한편 일수는 이틀밤을 감방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고보니 마치도 천길심연에 떨어졌다가 부활한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그간 남편 때문에 간에 불아 달려 진정 못한 안해도 안해려니와 발벗고 나서서 자기를 구해준 종구내외의 처사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러면서 아무런 죄도없이, 본인도 전혀 깜깜인 12만 3천원이라는 거액을 눈깜짝새에 허망 떼웠구나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났다.         종구는 그네들이 아무렴 당중앙까지 끼고 그따위 험악한 막짓을 할가, 먼저 성규률검사위원회에다 적발신을 써 올리자, 그래서도 안되면 중앙에까지 써올리자, 아무 때건 이자들을 심판대에 끌어올려 법적제재를 받게 하자,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나뿐아니라 무고한 다른 사람들이 억울함을 더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여 결판이 날 때 까지 끝까지 해보자 했다. 참아내는것도 정도가 있는거야. 사람들이 그저 그냥 권력이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지 않을것이다. 우리가 나서는걸 보면 금속창문공장의 곽공장장이 나설거고 제혁공장의 공장장도 나설거며 연초회사의 젊은 경리도 나설것이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면 아마 모두가 호응해 나서려 할것이다. 반부패의 력량은 묶어지게 될 것이다. 도랑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일수가 곰곰이 듣고나서 맹세했다.                                   8     눈앞에 까마반드르르하던 싼타나가 만신창이 되어가지고 나타났다가 안개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어느날 종구는 한밤중에 이런 꿈을 꾸다 깨고보니 잠을 도무지 다시이를수 없었다... 왜서 이런 꿈이 올가? 내 차가 어떻게 되었길래? 십중팔구는 잘못된것 같았다.   이틑날 종구는 아침숟가락을 놓자마자 집을 나와 현검찰원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검찰원에 이르러 보니 과연 있어야 할 싼타나가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숙직을 섯다는 사람과 물어보니 머리를 가로젖는다. 자기는 모른다는거다. 이것들이 내 차를 대체 어디다 어쨌을가?... 반탐국에 갔다. 판공실문이 꼭 닫겨있지 않았다. 문에 노크를 해놓고는 들어오라는 말이 있건없건 발을 들여놓았다. 안면있는 젊은 검찰관이 테불서랍을 열고 뭔가를 찾고있다가 고개들어 이켠을 본다.         젊은 검찰관은 나무방망이에 뒤통수를 한 대 맞았을 때처럼 얼떨떨해서 눈을 꺼무럭거릴뿐이다. 이때 하진개가 들어왔다.      방안의 평화롭지 못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그는 목청을 돋궈 물었다.         젊은 검찰관이 하려는 말을 종구의 거칠어진 음성이 깔아버렸다.      하진개는 멍하니 쳐다볼뿐 이쪽에서 물어보는 말에 얼른 대꾸 못한다. 낯이 어두워지고있다. 대답거리없어 난처해하는게 분명하다. 복잡해지는 기색이다.      재삼 따져물었다.   하진개는 그제야 마지못해 입을 여는데, 종구의 그 차는 검찰장의 지시에 의해서 이미 처리해버렸다는거다. 차를 값을 쳐 검찰원의 빚을 갚았다나.   세상에! 이럴수가?... 주인의 동의도 없이 남의 물건으로 제 빚을 갚다니! 법을 알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청산인가, 략탈인가? 고금동서에서 이런 뻔뻔스런짓을 하는 검찰관도 그래 있단 말인가? 보다보다 별꼴을 다 본다! 종구는 너무도 격분하여 전신이 벌벌 떨리였다.      복장이 터지는 일이라 종구는 주먹으로 탁상을 탕탕 치면서 목갈린 소리를 내질렀다.            저켠의 대답은 떳떳치 못했다.         하진개는 변명하기 적합한 말이 없는지라 얼떨떨하게 얼버무려 넘기려했다.      종구는 대방을 향해 적의 찬 눈총을 놓았다.      하진개는 눈을 부라렸다.         하진개가 발칵 성을 냈다. 하급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 위신이 여지없이 추락되는것 같았던 모양이다.      종구도 좀처럼 굽어들려하지 않았다.      하진개가 위엄을 뺐다. 허지만 그건 속이 비여진 허통이였다.      종구는 참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놓았다.   사회주의국가의 검찰관을 토비라하다니! 나라의 당당한 집법인원을 모독하다니! 종구는 이런 욕을 함부로 뱉어낸것이 화가 되어 구류소에 다시갇혔다.   그러나 종구는 인젠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회심의 미소까지 떠오르고있었다. 그건 그자들의 휭포와 불의가 조만간에 끝장나리라는 확신이 깊은 내부로부터 꿈틀거리고있었기때문이였다.                          2001. 11                                                 망매(魍魅)=도깨비               
289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1ㅡ4) 댓글:  조회:3478  추천:2  2013-11-22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국제펜클럽 우수상작품)                                1      종구는 시내에 들어서자 차를 천천히 몰았다. 오가는 차량들이 많은데 보배같이 여기는 싼타나가 어데 잘못 부디쳐 외각이 긁히거나 찌그러지면 어쩌는가.... 그런데 이놈의 차를 몰고 유람을 하면 몰라도 이건 불청객마냥 환영받지 못하는 빚받이를 해야하니...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은 기분이다. 린근의 한족향에 꿔준지 10년이 넘는 돈 30만원중 그런대로 절반가량 받아냈으니.   싼타나의 후시경에 뒤를 따르는 트럭 하나가 불쑥 뛰여들었다. 색깔이 연푸른 동풍표트럭이다. 앞창웃귀퉁이에 붙어있는 종이장을 보고 종구는 그것이 일수의 차라는 걸 알아보았다. 일수는 한국 가 벌오온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사서 벌써 다섯해째 운수업을 하고있는데 벌이가 괜찮다.   나도 종구형처럼 꾸준히 벌어 살아가렵니다 하는 일수가 종구는 좋았다. 그가 올해에 43살, 종구보다 네 살 어린편이니 그를 형님이라 부르는건 당연하겠다. 그들은 서로 남남사이지만 한시내에 사는 동포요 종종 만나는터라 퍼그나 가깝게 지내고있다.    종구는 차를 급정거시켰다. 웬 녀석이 자전거를 끌고 앞을 막 꿰지르고있었던거다.      종구는 내려진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꽥 소리쳤다.   그러자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눈앞에서 과연 그가 제일 싫어하는 장면이 벌어지고말았다. 그자는 아예 손에 잡고 있었던 자전거를 활 놓고 길바닥에 쓰러졌던 것이다. 자전거짐받이에 고정해놓은 각목의 량 끝에 걸려있던 커다란 싸리광주리 두 개가 길에 나딍굴었다.      교통경찰이 달려왔다. 그는 책망어린 예리한 눈길을 싼타나에다 꽂았다. 사고의 장본인은 분명 네로구나 하는 기색이였다.   이때까지도 종구는 제 차에 앉은채 까딱하지 않았다. 내릴필요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통경찰이 바투 다가와 차창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경찰은 그런가 하면서 넘어진 사나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사나이는 전혀 운신하지 못할양 앓음소리만 뽑으면서 엄부럭을 떨었다.      경찰은 눈살을 세우면서 뒤덜미를 잡았다.   그제야 사나이는 마지못해 일어나는데 환갑을 넘긴 추접스레 생긴 령감쟁이다. 령감은 새우가 길바닥에 수태 널린걸 보더니만 그만 우거지상이 되어갖고 동구의 싼타나에 매달리며 야료를 부리기 시작했다.      일수가 참다못해 트럭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욕사발을 퍼붓고나서 다시 뛰여올라가 차를 몰고왔다. 과연 당장 깔아버릴듯이.   에크! 혼비백산한 령감쟁이는 번져진 자전거와 길바닥에 나딍구는 싸리광주리들을 황급히 수습해갖고 물러났다. 그러는 꼴이 우수워 한바탕 터지는 웃음소리...      종구는 세웠던 싼타나를 다시 몰며 두덜거렸다.   80년대 나라에서 개혁개방정책을 펼치자 종구는 현소재지와 붙어있는 교구의 어느 한족마을의 우사간을 헐값으로 사 거기다 합성유지공장을 꾸리고는 그걸 만들어 팔아서 돈을 남먼저 괜찮게 벌었다. 그의 사적은 심심찮게 신문에 나고 텔레비에도 옳랐다. 그러다보니 성소재지와는 거리가 먼 이 구석진 지방에서 한때는 개혁의 선줄군으로 인정되여 인기가 있었던 그였다.   종구는 급유소와 금속창문공장이 있는 구역을 지나고 상점거리를 지나 서북쪽에 있는 새 주택구역에 꺾어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소학교 다니는 아들애와 딸애가 제 애비의 팔에 매달려 겨끔내기로 졸랐다.      애비의 입에서 이런 대답을 받아내고는 너무너무 기뻐서 퐁퐁 뛰는 애들. 그러는걸 보고 행복에 도취되여 방실방실 웃는 안해의 밝고 환한 얼굴.   아담진 2층양옥이 반갑게 맞아준다.                                2.     이틑날 종구는 공장에 가서 외현 어느 건축공사장에서 당장 요구한다는 합성유지를 일수의 트럭에다 가득 실어보내고나서 시내로 되들어와 금속창문공장을 찾아갔다. 트럭이 고장나서 이제 합성유지생산에 쓸 원료들을 사오자면 또 거기의 차를 빌려써야 했던것이다.   금속창문공장의 곽성옥공장장은 한족인데 종구가 차를 오후만 빌려쓰자니 그래라고 얼른 대답했다. 그보다 나이가 5살 손우인 이 한족사나이는 촌에서 올라와 6년째 금속창문을 만들어 팔고있는데 마음이 너그럽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다.   5월의 태양은 광활한 대지에다 눈부신 밝은 빛을 한껏 뿌리고 있었다.   종구는 날씨가 따스하고 좋은데 술이나 한잔 같이 나누자며 곽성옥을 끌었다.   곽성옥은 아닌게아니라 자기도 술생각이 난다면서 흔쾌히 나섰다.   종구는 금속창문공장구역을 나오자 곧추 현소재지중심에 있는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해에 구정물을 밖에다 버렸다가 검찰의 눈에 잘못 걸려 을 크게 당하는통에 한때 명성이 나빠졌지만 손님에게 해바치는 개장만은 의연히 맛이 좋아서 이 자그마한 도시의 거리판에서는 내내 손님을 끌고있는 집이였다.   주인(老板) 박씨아낙네는 오늘도 종구앞에서 검찰원에서는 너무한다고 푸닥거리 같은 공소를 했다. 얼마나 속에 내려가지 않으면 지금도 저럴가?   종구네가 개장에 술을 다하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방금왔는지 빨간 샤리승용차 한 대가 그의 싼타나를 피해 머리를 저켠으로 돌리고 있었다. 뒤꼬리에 단 패쪽을 보니 현검찰원의 차다.   (저놈의 차는 왜 왔을가?)   싸리의 뒤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두사람이 내렸다. 한사람이 면목이 있는데 그는 현검찰원의 판공실 주임 주은지였다. 한데 저쪽은 누굴가? 초면이다. 그 사람은 두눈을 간잔지런히 쪼프리고 싼타나를 보다가 낯을 돌려 시선을 이쪽 두사람의 몸에다 떨군다. 보아하니 주은지가 그를 모시고 여기로 먹으러 온것 같다.      곽성옥이 먼저 웃는 얼굴로 주은지를 향해 인사말을 건늬였다.      종구는 혼자소리로 중얼대면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체 누가 조작해낸 법인지 종구가 지금 살고있는 이 놈의 현은 과연 이상했다. 공안도 법원도 아닌 검찰원에서 제 기한에 돌아오면 돌려주고 돌아오지 않으면 몰수한다면서 외국에 벌이를 나가는 사람들한테서 인당 3천원씩 이라는 것을 받아냈다. 토끼꼬리만한 기한내에 어떻게 제꺽 벌어갖고 돌아온단 말인가? 그래서 외국에 가는 사람은 가면 불법체류를 하리라 맘먹고 떠나는거다. 그러니 이란 실상은 억울해도 눈물을 삼키고 빨리우는 피요, 아파도 소리치지 못하고 떼우는 살점이나 다를바 없었다.   종구는 곽성옥공장장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싼타나에 태웠다.   주은지가 모시고 온 간부어른은 그 자리에 못박힌듯 종구의 싼타나가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그냥 지켜보는데 낯에 구름장이 끼여 있었다. 건장하게 생긴 이 중년의 사나이가 바로 이 현의 검찰원에 검찰장으로 방금 부임한 장은생이다. 한데 오늘 개고기를 먹으러 왔다가 백성이 검찰장인 자기보다 더 멋스러운 차를 타고 다니는걸 보니 걸신들린 개가 뼈다귀를 핧는 고양이를 보았을 때처럼 지악스런 욕기가 생기면서 기분잡쳤던거다.   주은지가 자 어서들어갑시다 모시자 장은생은 잠간만 하고 그를 잡아세우고나서 입을 열었다.                                                            두은지는 방금 부임한 이 검찰장이 왜 갑자기 고양이 락태상이  돼가지고 이러는지를 알아맞혔다.      주은지는 손바닥을 마주비비면서 황송해하였다. 눅거리 샤리차에다 제 상급을 태우고 나다니는게 마치도 자기의 불찰이나 죄로 되기나하듯이. 그러나 그래놓고는 부아가 동해 속으로 욕했다. 이 자식아, 현재정이 곤난해서 지금 직원들의 로임도 제때에 내주지 못하는 주젠데 네가 고급차를 타고싶어, 어디 그래만보지. 네 놈들은 현을 이 꼬라지로 만들어놓구서두 향수는 무슨 놈의 향수냐며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는거야.   장은생은 두눈을 감짝거리며 이쪽을 여겨봤다. 주은지의 속대사를 촉기빠르게 읽어낸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이 지도자는 말을 고무줄같이 늘였다 줄였다하는데 담력있고 주대도 있는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람의 눈에 나지 말아야지 하고 주은지는 극력 감정을 발라맞췃다.         장은생은 두눈을 간잔지런히 쪼프리며 다시본다.      장은생은 허허 웃었다. 직원들의 로임도 제때에 못내주는 이따위 따라지현에다 내가 뿌리박아?... 내가 왜왔어, 나도 거렁뱅이 벼슬아치로 되자고 온건가 뭐. 이니야, 아니, 난 단련을 하자고 온거야.   장은생은 개장국집을 나오자 그길로 곧추 현위서기를 찾아갔다.      장은생이 이렇게 말하자 현위서기는 그렇게 하면야 두말할것 없이 좋지만 현재정이 말라있는 형편인데 집지을 자금을 내놓겠는가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머리는 뭘 하자구  달고 다니는거야, 제길할! 장은생은 돌아오면서 혼자소리로 쭝얼거렸다.    그는 검찰원에 발을 들여놓자 주은지부터 찾았다. 점심에 술을 취하도록 마신 주은지는 제 판공실의 테블에 엎드려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장은생은 그만 자고 정신 좀 추라고 흔들었다.      잠을 채 깨지 않은 주은지는 무거운 머리를 겨우들었다.      귀구멍으로 송충이가 기여드는것 같아 주은지는 개가 앞발짓하듯 손으로 제 귀를 털고나서 서랍을 열더니 그속에서 크고 동그란 도장 하나를 꺼내놓았다.   장은생이 집어들고 보니 이란 글자 10개가 또렷이 새겨져있었다. 부정축재를 벌금하고 몰수하는데 시용해온 도장이였다. 이 뜻밖의 발견에 장은생의 두눈은 전구알같이 동그래졌다.            장은생은 돌같이 굳고 억세게 생긴 턱을 치켜올리면서 갑작스레 앙천대소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모양이야?... 잠을 말끔히 깬 주은지는 량미간을 구겨박은채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다시열었다.                  기실 검찰원에서 그 도장을 만들어 출국자의 돈만 우려낸게 아니였다. 같이 구정물을 밖에다 던진것도 눈에 띄기만 하면 가차없이 벌금을 안겼던거다. 헌데 그렇게 하니 위생관리부문에서 들고일어났다. 도리상 자기들이 벌급을 받아낼 일인데 검찰원이 왜서 직권범위를 벗어나 행세를하느냐였다.   새로 부임한 이 검찰장님은 제 손에 쥐인 도장을 보고 또 보는데 마치도 먹이를 발견한 하이네마냥 두눈을 빛내기까지 한다. 그의 그러한 표정이 하고 웨치고있었다.   저녁에 장은생은 현위서기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검찰원에서 경제문제가 있는 사람을 사출해서 벌금을 안길테다, 그래서 그 돈으로 검찰원청사를 하나 새로 짓고 곁들어 공무원들의 사택도 지을 생각인데 그래서 되겠는가 물었다. 현위서기는 곰곰이 듣고나서 머리를 끄덕이면서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발한 착상이니 자신있거든 어디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대답이였다. 이틑날 현장을 찾아가 말해보니 그도 현위서기와 마찬가지의 태도였거니와 새 검찰원청사가 되면 지금의 낡은것은 현정부에서 쓰게 돌려달라는 부대조건까지 곁들어 내놓는 것이였다. 웃어른들께서 그쯤 승낙을 받아내자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했어. 장은생은 서둘러 검찰원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제가 쓰고 살 새집을 짓는다는데야 누가 반대할소냐, 검찰장이 계획을 내놓으니 모두가 열광적인 찬동이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숙망이 이루어지게 되였으니!   그런데 문제는 집을 짓자면 돈, 돈이 있어야 한다. 안그런가? 돈, 돈, 돈!... 적어도 7백만원은 있어야 해!...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그 많은 자금을 마련할가?... 방법은 오직 한가지, 벌금! 이것이 결책이란 말이야... 우리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호흡을 같이해야겠다. 우리의 이 결책을 타인이 알고 말성을 일으킬 때 입을 놀린 사람이 그 후과를 전적으로 책임질 것... 내 말뜻을 알겠지 하고 장은생은 력점을 찍어가면서 뒤를 단단히 눌러놓았다. 그리고는 각자 몸을 내맏기고 사업해야한다면서 구체적인 조치로 세가지를 타파한다고 선포했다.   첫째, 과와 실의 계선을 없애고 경쟁을 한다.   둘째, 8시간제를 없앤다.   셋째, 쌍휴일을 없앤다.   그리고 잇따라서 이해의 하반년내에 200만원의 자금을 꼭 모아야 한다는 분투목표를 세워놓고 각 부문에다 구체적인 지표를 떨구었다.                기소과(起訴科): 21만원                비포과(批浦科): 9만원                감소과(監所科): 3만원                판공실(辦公室): 21만원                정공과(政工科): 6만원                반탐국(反貪局): 80만원                법기과(法紀科): 29만원                공신과(控申科): 9만원                기술과(技術科): 9만원     그 어떠한 방법으로든 임무를 꼭 완수할것. 임무를 완수하면 나눠가질것도 있을거요 장려와 처벌이 있음을 알라.   죽은 사람이 들어도 관을 차고 일어날 전대미문의 벌금대전이 K현에서 이렇게 막을 올렸다.                               3     어느날 오후 주은지가 자기 수하인원 하나를 거느리고 합성유지공장을 찾아왔다. 아니 저 자식은 왜 왔나?... 선문도 없이 불쑥 나타난 불청객이라 종구는 의아쩍어했다. 벽에 걸려있는 부엉이괘종마저 반갑지 않은지 동그란 눈을 데룩거렸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니 가부간 맞아놓고보는게 도리에 맞을것같았다.         주인이 권하는 쏘파에 엉덩짝을 붙인 주은지는 돈을 벌었다는 사람치고는 어울리지 않을 지경 간소하게 꾸려놓은 사무실안을 일별하고나서 이같이 운을 떼더니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로동자가 얼마나 되느냐 물어왔다.   종구는 미간을 모으면서 그를 다시쳐다봤다. 보도기관의 기자면 몰라도 검찰관인 네가 왜 찾아와 이런건 묻는거냐? 의문이 갈마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어쩔가 주저하다가 알려주었다.                                    종구는 낯이 돌같이 굳어지고말았다. 이 자식이 개코도모르면서 무슨 망탕소리는 씨벌이는거냐. 실컷 부려먹었다니... 심사가 단통 타래떡같이 탈렸다.         종구가 대노하는것을 보자 주은지는 자기가 불민해서 그만 실수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사과했다. 허나 이미 엎질러놓은 물이였다. 사과한다고 받아줄 종구가 아니였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주은지는 웬 일인지 입을 더 열지 않고 목마른 염소 우물안을 들여다보듯이 종구만 덤덤히 마주보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그만 돌아가버렸다.   과연 멋쩍은 행차였다.   별 싱거운자식 다 보겠다! 종구는 그의 뒤통수에다 눈총을 놓고나서 속으로 그저일아니야, 내가 멍청히 있다가는 당하구말겠어 하면서 서둘렀다.   몇분지나서 그도 시내로 들어왔다. 자기가 내보낸 일군 9명중 집이 외지에 있어서 돌아가버린 2명을 제외하고는 빼놓지 않고 만나보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일자리를 떼웠다 해서 불만을 품은적이라곤 없었거니와 그 무슨 퇴직금이니 양로금이니 하는것도 근본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의 말마따나 그럴 리유나 조건이라곤 도무지 없었으니까. 헌데 그 주은지는 검찰관이랍시고 왜 그 일을 들먹이는 걸가?... 승냥이가 좋은 맘 갖고 문 긁을리야 없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름못할 한기가 온몸에 싸늘하게 퍼졌다.   주은지의 래방이 불상지조(不詳之兆)라 여겨지더니 아니나다를가 불같은 화덩이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주은지가 아니고 초면의 다른 한 중년의 검찰관이 나젊은 수하인원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내집이 여기에있는건 어떻게 알았을가? 제복까지 버젓이 입고 나타난 그들의 행차가 자못의심스러웠다.      종구의 안해 역시 자기 집에 나타난 그네들을 보고 마치 제 치마에 달라붙은 송충이를 보듯 낯을 찡그리며 불쾌해하였다.      종구는 주의주고나서 손님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비루먹은 개같아 가까이하고싶지 않았지만 검찰관복을 입고왔으니 감히 랭대할수 없었다.      중년의 사나이가 손바닥크기만한 증명을 꺼내놓길래 받아보니 파란 비닐뚜껑에 이란 금박글자가 박혀있었다. 발급단위가 중앙도 아니고 성도 아니였다... 왜 이런건 만들어가지고 다니며 성화냐. 종구는 속으로 주절대며 되돌려주었다.      이쪽에서 불공불손(不恭不遜)하다고 여겨졌던지 하진개는 낮색이 굳어지면서 위엄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것들이 과연 나를 잡자고드는구나!... 반탐국의 래의가 불보듯 빤한지라 종구는 가슴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검찰원에서 장부를 검사하겠다니 고스란히 내놓아야지 안그러면 감히 반항한다고 죄를 씌울것이다.      젊은 검찰관이 장부책들을 가방에 다 챙겨넣자 하진개가 입을 열어 종구더러 자기들을 싼타나에 좀 실어다줄수 없겟는가했다.   종구는 그러마 대답했다.      안해가 떨려나는 가슴을 손으로 짚으면서 안절부절이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안해가 말했다. 어쩌면 남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홀림에 묶이여 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것만 같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저기압이 흘러 가슴만 답답해나는 이날은 갈기갈기 찢어진 걸레짝 같은 구름이 모여 해를 가리워 음산했다.      종구는 찌뿌둥한 하늘을 흘겨보곤 고개를 떨구면서 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씨부렁거렸다.   하진개가 이마살을 구겨박으면서 이쪽을 흘겨봤다.      종구가 다시 한번 뇌까리자 하진개의 낯이 그만 언감자 모양으로 푸르뎅뎅해진다.               하진개는 할 말이 없는지라 그만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종구는 쟘바호주머니에서 차열쇠를 손에 쥐고 차고쪽을 향해 걸음을 놓으면서 다시한번 그 자식 별스레 까다롭게 구는구나 하고 알아듣지 못할 제 조선말로 뇌까렸다.   시내안은 여전히 복잡했다. 옛날도로를 진작 넓혀놨어야 했다. 왕조가 여러번이나 바뀌고 세월이 오래흐르지 않았는가. 변강의 이 자그마한 도시에 고적으로 남겨둘만한것으로는 광서(光緖)년간에 만들어져 중들이 불공했다고 전해지는 자그마한 절간 하나외에는 별반 없었다. 헌데도 여직까지 낡은 건물들이 시내복판을 그대로 점한채 근대의 건물은 너무나도 적어 고태의연했다.   내가 공연히 감정을 낸것 같구나. 종구는 방금 하진개와 마찰이 있은걸 생각하고 자신을 뉘우쳤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차를 몰았다. 언젠가 그의 차에 치인것처럼 꾸몄다가 그놈의 잔꾀가 실패하니 네가 내 새우를 쏟았다 새우값을 내라고 야기요단을 하면서 생떼질을 써 사람을 웃긴 령감쟁이가 길가난전에서 새우를 팔고있었다. 오늘은 야질을 들이댈데가 없는 모양이다. 한데 검찰원에서는 어쨌다구 나를 잡고 늘어지는지 참 모르겠구나. 종구의 머리는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내중심에서 곧추 북으로 들어가 큰강에 거진 이르는 곳에 길을 경계로해서 동쪽에 대약진때 지은 커다란 단층벽돌집이 한 채 있다. 지금은 색을 다시 입혀놓아 대체로 누래보이기는 하나 벽에 아직도 광란의 년대에 홍색해양(紅色海洋)을 하느라 올린 본바탕이 희미하게 드러나고있는 이 집이 바로 현검찰원인 것이다. 본래는 공안국에서 쓰던건데 공안국이 근년에 시중심구역에다 새 청사를 짓고 거기로 옮겨지면서 내놓으니 지금은 검찰원에서 받아 청사로 쓰고있는거다. 그리고 길서쪽  입구형자 네모꼴 모양의 단층벽돌집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벽돌담장을 높다랗게 쌓고 그우에다 철망을 친것이 구류소였다. 그것역시 전에 간수소(看守所)로 쓰던것이다.   구류소가 눈에 안겨들자 종구는 심정이 불쾌해났다. 한것은 모두들 여기를 쓰레기통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무릇 거기만 들어가면 사회의 찌꺼기로 취급되기 마련이였다.      현검찰원에 이르러 하진개가 삐뚤어진 말본새로 차를 돌리려는 종구를 내리라했다. 뭐라구?... 종구는 가슴벽이 쿵 하고 울리였다. 금시 무너질것만 같았다. 날 왜서 내리라는건가? 예감이 좋잖더니... 이 종구가 과연 걸려드는거나 아니냐?... 정녕 그렇다면야 근거가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왜서 나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자할가, 내가 잘못한게 대체 뭔데? 헛, 허허허... 허구푼 웃음만 나갔다.   집안 북쪽벽을 따라 동서로 길게 트인 복도가 있었다. 종구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얼마안가서 파란판에 빨간글씨로 이란 세글자를 또렷이 박아쓴 패쪽이 걸려있는것이 보였다. 셋은 그 방으로 들어갔다. 습기를 먹음은 고리탑직한 공기가 페부를 찔렀다. 창문을 걷어닫고 열지 않아서였다.      반탐국장 하진개가 창문을 열고나서 몸을 돌려 종구를 보며 하는 말이였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탈세를 했는가 안했는가는 종구 자신이 잘 아는거다. 네가 생사람잡이를 하는구나! 종구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려나는 두주먹을 어스러지게 부르쥔채 날카롭게 마주 쏘아보면서 한참 무언으로 팽팽히 맞섰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느냐, 어쩌면 이럴수가! 내가 탈세를 했단 말이냐, 그래? 장부를 검사해봐라, 난 여직 돈벌어두 속검게 놀아먹진 않았다. 죄를 만들어 씌워두 분수있지, 난 승인안한다, 승인안해! 너희들 검찰원에서 고작 한다는게 이따위짓이냐? 거둬라, 거둬! 하고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황황 불타고있는 그의 눈이 반탐국장을 향해 이렇게 질호하고잇었다.   워낙은 주은지가 돈을 우려내자고 든건데 급급히 서두르기만 했을 뿐 계획이 주밀하지 못하다보니 실패한거였다. 이렇게 되자 검찰장인 장은생이 직접 나서서 이 일을 틀어쥐엿다. 그는 여러모로 머리를 짠 끝에 마침내 판공실과 반탐국간에 협력하기에 이른것이다. 이제부터는 종구를 하진개가 맡는다. 그 어떤 방법과 수단을 써서든 30만원을 짜낸다. 그래서는 그것을 판공실과 반탐국의 임무에 때려넣는다...   종구는 말없이 머리를 힘있게 가로저어 탈세를 승인하지 않았다.   승인하지 않았단 말이지. 좋아, 어디 맛을 좀 봐야 할가부다. 그들은 종구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구류소에 처넣었다.                               4     종구의 안해는 남편이 다른 어떤 문제나 죄가 있어서 갇힌게 아니고 탈세를 해서 갇혔다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 자기 위안을 할수 있었다. 탈세를 했다면야 두말말고 탈세액과 벌금액을 합쳐서 고스란히 바치면 그만일게 아닌가, 황차 집에 돈이 있겠다 크게 두려울건 없었다. 헌데 남편이 탈세를 했다는 죄명자체가 전혀 맘에 받아지지를 않았다. 검찰원의 전달을 전혀 믿을수 없는 그녀였다. 과연 그럴수가 있는가? 이 일은 남편보다 외려 그녀가 더 잘 알고있었다. 합성유지공장의 장부는 여지껏 그녀가 손수 해온 것이니까.   이틑날, 금속창문공장의 곽공장장이 선문도 없이 종구네 집에 문득 나타났다.      곽성옥은 주인이야 집에 잇건 없건 우선 발부터 들여놓았다. 급한 노루 장대를 뛰여넘는다. 사정이 막부득하니 체면을 잃고 여기를 찾아온 그다. 방금 현검찰원 기소과 과장이라는 검찰이 문득 찾아와 그의 눈앞에다 을 꺼내보이면서 한가지 알아볼 문제가 있다고했던 것이다.         곽성옥은 제 맘 잡고 물었는데 저쪽에서 꺼내는 말이 생각과는 판달랐다.      검찰관은 이제 겨우 30줄에나 오른 아들또래의 나이였지만 신분이 자기와는 같지 않으니 곽성옥은 웃어른을 대하듯 존대했다. 그런데 대방은 그의 이런 순후한 감정을 몰라주는것 같았다.         곽성옥은 사실대로 말했다.                  곽성옥은 몇해간 금속창문을 만들어 팔아 리윤이 나는 족족 묵은빚을 갚고 새 설비도 갖추다보니 대부금을 미처 갚지 못했노라 솔직히 말했다.      나젊은 검찰관은 은근한 위협쪼로 대부금을 당장 물라, 그리고 대부금만큼 벌금 4만원을 바치라 했다. 도합 8만원이다. 이만한 돈을 당장 어디서 구해 바친단 말인가. 똥줄이 당기는 일이라 곽성옥은 종구의 방조를 받자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종구의 안해는 그간 자기네 집에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공소했다.         곽성옥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아까 그는 대부금 4만원을 어김없이 가갚겟노라 했다. 헌데 네가 대상이 안되는 대부금을 돌려썼으니 벌금이라면서 4만원이나 안기니 이건 돌덩이를 등에 지워 물에 처넣는게 아닌가.   누가 말씨를 뿌렸는지 시내에서 경제건이 좀이라도 있는 사람은 변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한다. 곽성옥은 탐오도 아닌 그 돈을 갚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형세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있다.      곽성옥이 입을 다시열었다. 검찰이 여차여차 나쁘다고 불만을 토하려다가 뒤가 겁나 그만 사려버렸다.      종구의 안해가 그가 하지 못한 말을 토했다.      곽성옥은 걱정스러운 소리 한마디를 하고 그만 돌아가버렸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도 그처럼 되지 않을가 하는 위구심이 그를 진정못하게 하고있었던 것이다.   곽성옥은 그 길로 일수를 찾아갔다.   마침 일수는 남의 급유소건축자재구입을 끝마치고 집에서 쉬면서 피로를 풀고있었다.      곽성옥이 일수를 만나서 억이 막혀 내치는 소리였다.      일수는 그를 진정시켰다. 종구와 가깝게 지내다보니 그의 이 한족친구도 사귀게 된건데 제 민족 제 형제 아니지만 감정이 맞아 우의를 돈독히 키워가고있는 처지였다. 곽성옥은 그한테 현검찰이 자기의 꼬리를 들춘다면서 여차여차해 종구집에 돈꾸러갔다가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되돌아선 일을 말했다.      말해놓고 일수는 생각했다. 종구형님이 있다면 두말없이 제 돈주머니를 풀었을 것이다. 막부득해서 찾아온 사람인데 외면할 수야 없잖은가, 도와줘야지, 이럴 때 도와주지 않으면야 의리가 없는거지. 그는 급한 불부터 끄고보는게 옳으리라 생각하고 제 저금통장을 털었다. 6만원이다. 운수업해서 벌어 모은 돈이였다.      곽성옥은 감지덕지해서 이제 벌면 어김없이 먼저 갚아주겠노라했다.   
288    에세이 가장증오받은 이름ㅡ흐루쇼브 댓글:  조회:7139  추천:4  2013-11-17
  에세이 가장증오받은 이름ㅡ흐루쇼브   모택동이 생전에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한 원쑤는 누구였는가? 두말할것없이 그는 흐루쇼브였다. 1956년, 쏘공20차대회는 세계를 진감했다. 그번 회의가 쓰딸린의 위망을 들부셔놓았기 때문이다. 쓰딸린은 1924년에 레닌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1953년에 죽었으니 근 30여년간이나 쏘련에서는 둘도없는 권위자로 군림한 것이다. 쓰딸린이 쏘련의 공업을 발전시키고 독일파시스의 진공을 물리치고 전승한 것은 그야말로 존경해야 할 공적이였다. 하지만 그가 당내에서 잔혹한 투쟁을 벌려 육체를 훼멸하고 개인숭배를 고창하느라 민주를 탄압한 행위는 그야말로 용서못할 극악한 죄악이였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당내에다 원한을 많이 만들어 쌓았지만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떠받들면서 구역질날지경으로 양심에 없는 찬양만해야했던 것이다. 한데 결국은 어떠했는가? 그가 일단 죽어버리니 완전히 변해버리고말았다. 더는 그럴필요가 없게되였던 것이다. 쓰딸린이 죽어서 3년만에 쏘련공산당은 20차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했거니와 그가 조작한 많고많은 숱한 억울한 안건들을 시정하기시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쏘공은 1961년도 제22차대회때에는 쓰딸린시기의 잔혹한 당내투쟁을 극도로 혐오하기에 이르었던 것이다. 그때 쏘련공산당의 지도자였던 흐루쇼브는 쓰딸린을 집중해서 비판했거니와 온 세계, 특히는 사회주의진영의 눈길을 한데끌어모으는 놀라운 결의를 내리기까지 한 것이다.   “대회는 레닌의 묘에 이·쓰딸린의 수정관이 들어있는것은 합당치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쓰딸린이 레닌의 가르침을 엄중히 위반했거니와 권리를 람용하여 정직한 쏘련사람들을 대규묘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가 개인숭배기간에 저지른 행위들을 봐서 그의 령구를 브·이·레닌의 묘에 함께둘 수 없다.” 쏘련에서는 쓰딸린의 유체를 레닌묘에서 끄집어내여 태워버렸다. 사실보면 스딸린의 유체를 태워버린건 쏘공의 결의였지 흐루쇼브 그 한 개인만의 뜻이 아니였다. 그리고 실상 쓰딸린은 살았을적에 제절로 자기의 시체를 그꼴이되게 스스로 만든것이다.   쏘공의 그 거동이 모택동으로하여금 지대한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하여 모택동의 눈에 흐루쇼브는 가장나쁜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20대후부터 벌써 중쏘관계는 내리막길을 걷기시작했는데 쏘련에서 시행한, 지어  중국에 와있었던 전문가들을 전부 철수하는 식의 극좌로선은 중국의 경제형편에다 설상가상으로 곤난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하여 쏘공과 중공은 점점 더 척을 짖고 적대가 된 것이다. 22대후부터 중쏘량당간에는 전면론전을 시작했는데 중공중앙에서 발표한 은 바로 모택동이 친히 지휘하여 만들어진것이였다. 은 흐루쇼브의 믿그루를 뚜지였다. 흐르쇼브는 쓰딸린이 살았을적에 붉은광장에서 “쓰딸린은 우리를 낳은 아버지”라고 노래불렀던것이 그가 죽어 세상에 없으니 이제와서는 시체에다 채찍질을 안긴다고 하면서 너 흐루쇼브가 쓰딸린의 유체를 태워버릴 수는 있어도 쓰딸린을 쏘련인민의 맘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는 못할것이라고 화나서 질책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흐루쇼브를 향해 그같이 포를 쏜건 쓰딸린이 감사해서가 아니였다.  모택동은 일찍부터 쓰딸린의 쇼비니즘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해왔던 것이다. 중공이 간고한 투쟁을 겪고있는것을 보면서도 쓰딸린은 전력으로 지지해주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해방군은 장강까지만 나가고 더 나가지 말라, 장강을 남북의 분계선으로 만들라고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쓰딸린은 중국이 통일되여 강대해지는것을 무서워한다고여겼기에 쓰딸린의 그런말을 아예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중국을 해방하고 몇 달지나서 모택동이 쏘련을 방문간건데 생각밖에도 쓰딸린은 정거장으로 마중도나오지 않고 오만을 부렸거니와 진지한 담화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하여 모쓰크바에서 멋없이 적적하게 보내다가 돌아온 모택동은 그에 대해서 불만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흐르쇼부가 쓰딸린의 유체를 레닌묘에서 끄집어내여 태워버리니 모택동은 시각을 바꿔서 쓰딸린을 다시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쓰딸린은 30여년간이나 쏘련을 다스린 사람이 아닌가, 살았을적에 그같이 애대하면서 찬미하던 인간이 그가 죽으니 이제는 채찍질하면서 시체를 태워버리다니? 모택동의 눈에 흐루쇼브는 지독한 량면파, 야심가로 돼보였기에 반드시 경각성을  높혀야겠다고 생각하게되였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모택동은 자기처지를 생각해서 “중국에는 그같은 흐루쇼브가 없겠는가?”하면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가 문화혁명을 발동한 목적이 바로 자기 곁에서 잠자는 흐루쇼브를 찾아 잡아냄으로써 미루시 우환을 없애자는 것이였다. 모택동이 친히 제정한 계승자의 5항표준을 보면 그의 의향이 아주뚜렷한 것이다. “계승자”는 “대다수사람과 단결하여 함께 사업할줄을 아는 무산계급정치가여야하며” 동시에 “특히는 흐루쇼브와 같은 그런 야심가와 음모가에 대해서는 경각성을 각별히 높혀야하며, 그따위 나쁜자가 당과 국가의 각급령도권을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거니와 계승자는 “반드시 당의 민주집중제를 집행함에 모범적인 집행자여야지 흐루쇼브처럼 그렇게 당의 민주집중제를 파괴하고 전제적인, 동지를 돌연습격하고, 도리도 없이, 개인독재를 부리는 자여서는 않된다.”         그때로부터 흐루쇼브는 “수정주의”와 동의어로 되였거니와 중국에서 외국사람을 꾸지람하는 어구로도 되여버렸던 것이다. 모택동은 흐루쇼브식인물이 당내에 숨어있는것을 찾아내여 빼버리느라 “문화혁명”을 발동하고서는 중국의 흐루쇼브를 찾느라 우아래를 근 10년간이나 올리훓고 내리훓은 것이다.   한때 요문원(姚文元)이나 척본우(戚本禹)가 요란스레 떠들어대서 나도《청궁밀사(清宫秘史)》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중국의 흐루쇼브”니 “중국의 흐루쇼브 류소기를 타도하자”느니 “우리곁에서 잠자는 흐루쇼브를 잡아내자”느니.... 그래서 그 세월에는 흐르쇼브가 우리 나라에서는 주파수가 제일높은 이름으로되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쨌다고 그랬는가?..... 지금생각하면 그저 허구푼웃음만나온다. 문화혁명ㅡ 따지고 보면 그건 순전히 모택동이 사후 자기도 쓰딸린모양으로 수정관에서 들려나갈것을 우려해서 피운 짓거리가 아니고 뭔가?.... 한심하다!                   관련글 (51)    
287    에세이 돌이켜 생각해볼 타살폭행 댓글:  조회:4409  추천:0  2013-11-15
  에세이 돌이켜 생각해볼 타살폭행   조련장(早練場)에서 있은 일이다. 로류(老劉)가 오늘 아침에는 로양(老梁)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로양(老梁)역시 내가 면목아는 한족인데 성격이 내향적인 그는 내내 공안계통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 그가 손에 들고 온 신문을 내한테 주면서 “김선생 좀 읽어봐요!”하는 것이였다. 받아서 펼쳐보니 갖지난 전번달 말일의 《快乐老人报(쾌락로인보)》제16면이였다. 거기에《1982년 천안문광장 가차충당사건(驾车冲撞事件)》이라는 글과 이라는 두 문장이 함께 실려있었다. 로양(老梁)이 이 신문에다 다시낸 그 두사건에 대해서는 원북경사람이면 거의가 잘아는 일이라해놓고는 적이 흥분된 목소리로 ”여기에 살인광이라구 한 이 사람잊잖은가유, 이 전명건인즉은 바로 나의 동무였습니다.“하고 내한테 알려주는 것이였다. “오, 그래?!” 나는 적이놀래여 로양을 다시보고나서 눈길을 신문에다 옮겼다. 북경에서 사회를 상대하여 일어났던 끔찍스런 그 두 보복사건이 발생된 시간을 보면 하나는 1982년1월이고 다른하나는 1994년9월이니 보다싶히 상거 12이년이라는 기간을 두고있다. 하지만 그 두사건이 발생된 연유를 보면 다가 상급에 대한 불만이 결국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보복행위로 번져버렸다는 그 점이다. 정녕 그러하니 오늘에 이르러 그 두 사건을 함께 신문에다시 올릴 때는 그때의 그 사건으로서 사람들에게 주의를 다시금 환기시키자는것이 목적일것이다.   1982년1월,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했던 자동차충돌사건에 사람이 죽은것이 5명이고 부상당한것이 19명이였는데 광장에다 남긴 피자국이 100여메터나 줄을 그엇다고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 광장에는 수도북경을 찾아와 천안문과 인민대회당이나 인민영웅기념비아니면 국기계양대를 배경으로 해서 기념사진을 찍는 외지인들이 많았다. 시간은 그날오전 11시경이였다. 북경시택시회사 동물원차대의 23살난 녀운전사 요금운(姚锦云)이 바르샤바 패쪽을 단 택시를 몰고 천안문광장에 갑작스레 침입했던 것이다. 그는 택시를 몰고 광장을 한바퀴 돈 후 홀연 조절판을 눌러 속도를 빼여서는 깃대서쪽켠의 사진을 찍느라 모여선 사람들을 짓깔아놓고는 금수교(金水桥)다리로 돌진했던 것이다. 삽시간에 터진 비명과 아우성속에 자동차는 백옥교의 란간을 들이박았다. 하여 인민영웅기념비와 금수교사이 100m길이에 사람의 피가 발리였다.   로양(老梁)이 하는 말인즉은 썩 지나서 2003년도에 에 실린 회억문장을 보면 그당시 천안문을 지키던 경찰 둘이 날파람나게 달려가봣는데 택시를 몬 그 여자는 머리를 핸들너머의 앞차창유리를 들이박아 깨고는 정신을 잃은상태였다면서 경찰들은 낯이 볼모양없이 상한 요금운(姚锦云)을 병원에 가져갓다는거다. 그날 그녀가 몬 차에 깔리고 치여서 그같이 무고한 사람 다섯이나 처참하게 생명을 잃었거니와 19명이나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기자들은 그 사건이 생긴 원인을 인차공포했는데 외국소식통들이 추측한것 같이 그렇게 몹시복잡한건아니였다고한다. 처음에는 “반혁명”사건이라했다가 훗날에는 “반혁명”이란 세글자를 빼버렸다고한다. 그 사건이 생긴 원인을 보면 아주 간단했다. 요금운(姚锦云)은 4일전에 차대의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30.6원을 벌금당한 것이다. 그때의 생활수평에서 그것은 그의 한달생활비용에 해당하는 금액이였던 것이다. 일을 친 원인이라면 다른게아니였다. 요금운(姚锦云)은 그렇게 천안문자살로서 사회에 영향을 크게 일으키자는게 목적이였다고 한다.    신문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1981년12월에 요금운(姚锦云)이 임무를 완수한것이 근근히 15차, 회사가 결정한 52차에 비하면 너무나도 형편없기에 차대의 령도에서는 그보고 임무를 완성못했길래 벌금을 안긴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보태기를 요금운이 다음달에 능히 임무를 완수하면 벌금을 안기지 않겠노라했다. 한데도 그는 불만을 품고 대들었던 것이다. “벌금규정이야 1월에 내온게아닌가, 한데 왜서 전번달월급에서 벌금을 떼내는가? 이건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게아니고 뭔가?” 1월8일날 아침에 대장 근경의(靳景义), 부대장 손당(孙堂)이 그를 찾아 담화해봤지만 그가 격노하기만하니 허사였다. 하여 그들은 즉석에서 그보고 잠시 차를 몰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사후에 요금운(姚锦云)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나는 다음달부터는 잘해서 월급을 떼우지 않으리라 맘먹었는데 령도가 너는 차를 몰지 말라하니 밸이 났다”는 것이다. 10일날에 요금운(姚锦云)은 부대장을 만나서 그보고 차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손당(孙堂)은 그보고 다음과같이 말했던 것이다. “대장이 온다음에 보자꾸나, 네가 지금은 정서가 나쁜데 차를 몰면 위험한거야.”   한데 10시가 넘어서 거리에 나갓던 바르샤바 패쪽을 단 택시한대가  돌아온거고 그 운전사는 차열쇄를 무심히 판공실탁상우에 놓고 다른데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런것을 요금운(姚锦云)은 제손에 저꺽넣어서는 차를 몰고 천안문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어데가서 말할데도 없었어요,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낫지. 천안문광장 금수교에 부닥쳐 자살할려구했어요. 그래도안되면 금수하에 빠벼죽던지. 영향이미치면 령도가 중시하겠죠. 차대의 령도들도 추궁받을거구. 내가 죽어버리면 그네들도 편안치는않을거라 생각했어요.” 그가 옥중에서 한 말이였다.     1982년1월30일,북경시중급인민법원은 1심에서 요금운(姚锦云)을 고의살인죄로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는 2월1일에는 사형이 집행되였던 것이다. 안건이 생겨서 만 40일만이다. 이제 3일만 더 살았더면 생일을 쇠고 24살의 나이를 먹었을 그였다. 요금운은 1958년에 한 교사가정에서 태여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전에 풍옥상(冯玉祥)의 비서를 지낸바있고 후에는 북경철로2중에서 교편을 잡은것이다. 어머니역시 서직문 제1소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문혁”이 오니 그의 집은 재난이 덮치였다. “문혁”기간에 그의 집은 “홍위병”들의 손에 여러번이나 털리웠거니와 요금운(姚锦云)의 아버지와 이모(异母), 언니와 형수는 다가 고통을 받아내기 어려워서 자살하고 만 것이다.  요금운이 11살나던 해에 집은 몰수되였다. 하여 그와 오빠는 정처없이 나돌다가 하향을 했고 그러다 몇해후에는 도시로 되돌아온건데 겨우 8평방미터밖에 안되는 협착한 집에서 그들은 고생스레살았다. “그때까지도 ‘문혁’때 빼앗긴 집도 못찾았다니 원, 말이안되지!” 로류(老劉)가 하는 말이였다.   전명건:풍광창살32인(田明建:疯狂枪杀32人)   이 사건이 생긴것은 1994년 9월이였다. 전명건(田明建)은 지금 내가있는 여기 통현(지금은 通州區)의 북경위수구삼사십이단 중위부련장(北京卫戍区三师十二团 中尉副连长)이였는데 전부터 사업상의 모순으로 인하여 상급에 불만이 생긴건데 그것이 국경45주년경축을 맞으면서 전우들을 도살하는 광란을 부린 것이다. 그날아침 6시40분, 부대가 아침훈련을 하는 기회를 타서 그는 81식돌격총으로 단정위를 비롯한 관병 23명을 쏴죽이고서는 천안문으로 향했다. 한데 그는 천안문에 이르지 못한채 시중심인 건국문(建国门)의 립체교로부터 아보로(雅宝路)에 이르는 사이에서 경찰들의 저격을 받게되니 지나가는 행인을 또 9명이나 쏴죽였던 것이다.   신문은 결말에 쓰기를 전명건(田明建)이 본래목적한 곳은 천안문광장이였지만 경찰들이 한사코 막으니 더못들어가고 아보로(雅宝路)의 객들을 그렇게 죽이고는 자신도 총에맞아 죽고말았다면서 “전명건사건”후 북경위수구사령원(겸북경군구부사령원) 하도천(何道泉中将)이 강직처리되고 북경위수구정위 장보강소장(张宝康少将)이 철직처분을 받았거니와 부사령원 둘이나 면직되였던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왜 이럴가? 돌이켜 한번다시 생각해봐야 할 타살폭행이다! “이런 사건들로부터 볼수있는건.... 내 생각은말이여, 관리수단이 아직도 매우락후해서 사달이지. 인간다운 인도적인 면이 부족하고... 보면 아주간단한 일인걸갖고서도 크게 만들어 지어는 국가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치게한단말이요. 요금운(姚锦云)의 일을 좀 보지, ‘문혁’이 끝난게 어느땐데 그때까지도 빼앗아간 집을 돌려주지 않았다면야 정책락실이 제때에 되지 않은게지 뭐요? 그래 그 애가 사회에 불만이 없을리 있는가? 그 본인이 사업상 문제가 있기는했겠지만 령도가 좀만 더 후더움을 보여줫어도 그애가 그토록 적의를 품고 극단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을거요.” 로류(老劉)가 하는 말이였다. 그렇다하여 과격한 행동으로 개인문제를 처리하려는건 어느모로보나 맞지 않지만 그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어떤 문제에대해서는 관리하는 사람도 메이크업도 없으니 개선해야 할 일이아니겠는가?   로양(老梁)이 보탰다. “당년에 광주 배에서 발생한 사건도 보면 평상시 잔잔한 모순을 잘처리하지 않았길래 생긴게지요, 폭약을 텃쳐 제사람을 죽인일말입니다.”   범죄분자는 물론 심각하게 처벌해야하지만 더욱히는 우리들 자체가 관리수단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뉘우쳐야한다. 시대가 진보하고 사회는 발전하는데도 그냥 낡아버린 행정명령에다 엄밀한 표시나 실제에 맞지 않는 명령으로 사회를 내처관리하려들면야 그래 리바운드를 일으키지 않을리있겠는가? 사달이 생기지 않을리있겠는가? 아직도 어떤 지방관리들은 의연히 행정명령을 미신하면서 백성들을 이런전런 방법으로 강박하고있다니 말이아니란다. 어떤데서는 농촌시범을 꾸린다는 것이 이러저런 지표를 높혀갖고 너무나 달구치길래  간부를 사람새끼아니라고 욕한다니 웃을일이다.   “근14억에 이르는 사람의 욕구를 다 들어주기는 천부당만부당한 일, 누구면 키를 바로잡겠는지?!”  로류(老劉)의 의미심장한 말이였다.              
286    에세이 흠정원쑤 넷중에 둘은 일본사람 댓글:  조회:4242  추천:0  2013-11-05
에세이 흠정원쑤 넷중에 둘은 일본사람    모택동이 생전에 흠정한 원쑤가 넷이였는데 그중에서 둘은 일본사람이였다. 1966년7월, 모택동은 한차례의 담화에서 자기가 밉게보는 원쑤 넷을 말했는데 첫째원쑤는 현대수정주의 쏘련이고 둘째원쑤는 제국주의며 셋째와 넷째원쑤는 일본공산당 켄지 미야모토 수정주의집단과 에이 사쿠사토 반동내각이라하였다.     1972년2월, 미국총통 닉슨이 중국에 방문을 와갖고는 모택동을 만나 악수하면서 웃으니 증오가 풀리여 원래 원쑤가 넷이던것이 하나 적어진것이다. 1972년6월17일에  일본에서는 에이 사쿠사토 내각이 물러나고 7월7일에 다나카내각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해의 8월에 다나카내각이 중국을 방문하여 두 나라는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였다. 그리고 1975년6월3일에 일본반동내각의 두목이였던 에이 사쿠사토는 병으로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랬으니 네원쑤중에 또 하나가 저절로 줄어든 것이다. 하여 네원쑤중에서 이제남은건 쏘련수정주의와 일본공산당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저 빌어먹을 녀석들을!   에이 사쿠사토는 생전에 미국을 따라 중국을 반대했거니와 대만의 장개석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원쑤였다. 한데  켄지 미야모토는 공산당사람인데 왜서 원쑤가 되였던가? 그 원인을 캐보면 간단했다. 1966년3월에 일본공산당의장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왓던 그 켄지 미야모토의장님은 상해에서 일본공산당은 중쏘량당지간의 론전에서 중국켠에 서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해달라고 부탁한 모택동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거니와 돌아가서는 아예 거래마저 끊어버렸기 때문이였던 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켄지 미야모토는 중국의 계급투쟁을 되게 비난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라하여 그래 아무런 법도 없이 나라건설마저도 하지 않고 내쳐서야 어디되느냐하면서 모택동의 작법을 비웃고 질타했던 것이다. 2007년7월18일에 켄지 미야모토는 98세 나이에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그저 신화사가 그의 리력을 간단히 보도하는데 그쳤을 뿐 오랜 공산당원이였던 그의 공적에 대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것이다. 켄지 미야모토를 보면 근 반세기나 일본공산당을 령도했는데 그 기간에 그는 공산당의 폭력혁명을 줄곧 반대했거니와 무산계급전정을 취소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그 리론을 발벗고 나서서 먼저집행했으니 실천자이기도했던 것이다. 하기에 그는 지난세기  6, 70년대에 줄곧 중공의 비판대상으로되였던 것이다.  와 잡지 들에서는 일본의 켄지 미야모토수정주의집단은 정력을 다해 폭력혁명을 반대하고 무산계급전정을 반대하면서 의회주의길을 철저히 걸어야한다고 고취하였다면서 그들은 폭력이라는 단어를 조폭하다느니 무법이라느니 해석하면서 일본인민들이 일떠나 혁명하자는것을 막고있으니 수정주의가아니고뭔가 하면서 그것이 어느정도에 이르었는가를 좀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쓰기를 어떤사람은 무산계급전정을 “불안‘한 것으로 보고있는데 그래서는 절대안된다고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켄지 미야모토그룹은 제국주의와 일본군국주의의 폭력을 감싸주었다고했던 것이다.    중공과 일본공산당간의 관계가 그같이 긴장해져서 얼마지나지 않아 일본공산당에서는 좌파세력의 인물인 후쿠다가 주석이 되었다. 후쿠다는 당주석이 되자 “문혁”직후에 뻔질나게 중국을 방문했다. 그러던 그는 나이 90살을 먹던해인  2001년에 심장병으로 죽고말았는데 그는 죽기전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반성해보고는 자기와 교분이 두터웠던 한 친구와 “내가 형님한테 미안한 짓을한거야.”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형님”이란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모택동이 생전에 죽도록 미워했던 수정주의자 켄지 미야모토였던 것이다. 과연 음미해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285    에세이 8: 800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6066  추천:1  2013-11-03
  에세이 8: 800에 대한 단상   팔녀투강(八女投江)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없을 것이다. 항일전쟁시기였던 1938년9월하순에 동북항일련군부녀단(东北抗日联军妇女团)의 지도원 랭운(冷云)과 반장 호수지(胡秀芝)를 비롯한 양귀진(杨贵珍), 곽계금(郭桂琴), 황계청(黄桂清), 왕혜민(王惠民), 리봉선(李凤善)과 피복창의 창장이였던 안복순(安顺福) 등 8명의 녀전사가 부대이동중 일본군의 포위에 들어 완강히 저항하다가 탄알이 떨어지고 포위를 뚫고나가지 못하게 되니 죽더라도 포로는 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서는 총가목을 부스고는 목단강지류인 우스휜허(乌斯浑河)에 빠져 순국한 것이다. 그 8명의 순국자 중 리봉선과 안복순은 조선녀성이고 지도원 랭운은 내가 반생을 살아왔던 열래진(悅來鎭ㅡ지금의 화천)의 사람이였다. (그의 남편은 위만경찰이였다.)   1986년9월7일에 목단강시에서는 팔녀투강기념비(八女投江纪念碑)를 세우고 전기전례(奠基典礼)를 했다. 그때 전국정협부주석이자 전국부련회의 주석이였던 강극청(康克清)이 참가하여 “팔녀영령,영수불후(八女英灵,永垂不朽)!”라는 제사를 쓴 것이다. 국가는 그후 2009년9월14일에 희생된 그들에게 새중국을 성립함에 돌출한 공헌을 한 “100위영웅모범중 하나”로 명명했다. 나는 훗날가보고 그들을 추모하고는 비석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던것이다.   한데 몇해전에 나는 “팔녀투강(八女投江)” 말고 "팔백랭왜도황하(八百'冷娃'跳黄河)"라는 다른 하나의 그보다 백배더한 사적이 있었음을 알고는 충격을 크게받은것이다.   같은 항일시기였던 1938년7월부터 1940년10월사이 3만명의 국군 제4집단군은 중조산(中条山)을 빼앗으려 든 일본군의 11차나 되는 진공을 막다보니 2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을 냈던것이다.  이 단락의 사료를 보면 이러하다ㅡ 1938년8월후, 손울여(孙蔚如)는 명령에 좇아 원래 양호성(杨虎城)이 거느렸던 17군을 개편한 제31군을 이끌고 중조산(中条山)서부의 평륙(平陆), 예성지구(芮城地区)를 방어하게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국군의 제4집단군의 병력이란 그저 수자나채운데불과한 것으로 여기고는 얕잡아보면서 없애치우려고 작정한 것이다. 1939년 그때 즉 “329”대소탕후인 6월상순에 일본군은 재차 “66전역”을 발동했던 것이다. 그 11번째되는 반소탕전에 바로 국군 제177사가 나선건데 거기 학병대(學兵隊)였던 신병단(新兵團)은 이제 참군한지 불과 석달밖에 안되는 800여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던 것이다. 한데 그들은 탄알이 떨어지고 먹을 량식마저 없게된데다 적의 포위에 빠지고 보니 뚫고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여 모두가 죽더라도 포로는 되지말자고 맹세하고는 다가 물결흉흉한 황하에 뛰여들어 순국한 것이다. 다가 17~18세의 나이의 팔팔한 젊은애들이였다. 그들은 방금 훈련을 끝내고온데다 무기운수마저 미처따라가지 못해 어떤애들은 손에 총도 쥐지 않았던 것이다. 그같은 처지에서 부득히 택한 그네들의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고 비장했던 것이다! 얼마전에 기자가 중조산(中条山)보위전에 참가했던 로병이자 생존자인 93세나는 손문인(孫文印)로인을 방문하여 얻게 된 대화실록을 들어봤는데 그것은 과연 눈물겨운것이였다. 손문인(孫文印)로인은 당시 자기는 나이가 23살이였는데 177사의 통신원이였다고 한다. 그는 통나무를 끓어안고 황하에 뛰여들었길래 요행살았노라했다. 그의 아들은 그가 쓰던 총창을 기념으로 그냥 감춰두고있었노라고 알려주었다. 다른 한 생존자 장항(張恒)은 말하기를 당시 그 신병단(新兵團) 학병대의 전사들은 빈손에 포로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엄마!”를 목놓아부르고는 사품치는 황하에 뛰여든거라면서 거의다가 헤염칠줄을 몰랐다고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구사일생(九死一生)의 요행을 바란거라 말했다. 그러면서 보태는 것이 추격해 온 일본군은 강에 뛰여든 병사들에게 밀집사격을 했고 머리우에서는 비행기가 폭격했다는거다. 17군의 로병 서계무(胥继武)는 희생된 전사들의 유체를 건지는 일을 했는데 시체가 예성(芮城), 평륙(平陆)의 황하물우에 여러날을 떠돌다가 나중에는 삼문협(三門峽)의 소용돌이에 모인것이 800여구였다면서 황하에 익사한 실제수는 800을 넘을거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100여명이 유체건지기를 나선건데 건져낸 시체들은 삼문협(三門峽)북쪽산골에다 파묻었다면서 그 어떠한 표식도 해놓지를 않았다고 말했다. 희생된 자의 이름을 전혀 알수없었던것이란다. (기자채방 록음기록)  장개석은 생전에 피어린 항일의 나날들을 회억하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중조산전역(中条山戰役)은 항전사상 가장 큰 치욕이였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 전역에 참가했던 사람은 물론 항일에 몸을 바쳤던 국군로병은 거의가 여지껏 국가의 그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한채 일생을 보낸 것이다. 사회의 박대를 받지 않았으면 다행스러운 일일것이다! 세계사회가 변하니 중국도 이제는 공군이였건 국군이였건 무릇 조국과 인민을 위해 생명을 바친 충성스러운 고인들의 원혼을 위안하여 기리고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일인가싶다.    3년전인 2010년9월에 미적화인(美籍华人)인 애국인사 호여금(胡余锦)녀사가 기부한 66만원으로 운성시예성현맥남진(运城市芮城县陌南镇)의 골천호반(圣天湖畔)에다 부지가 200여무에 이르는 중조산항일영웅도황하순국기념관(中条山抗日英雄跳黄河殉国纪念馆)을 세운 것이다. 그 기념관에는 기념비가 있고  첨영태(瞻英台), 군조(群雕), 사념당(思念堂) 등 건축으로 이루어졌다.   기념원의 책임자 초영평(肖永平)은 항일영렬을 기념함과 동시에 후대들에게 애국주의교육기지가 되게끔하려는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올해 나이가 90고령인 항일로영웅 고봉오(高凤梧)도 기념비를 세운 목적이 항일영웅들의 영령을 위안하자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무명영웅들은 다가 항전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후대가 깨닫게 하자는 것이라고 종지를 말했다. 형세는 날로좋아지고있다.      照片 026
284    에세이 김일성의 당내숙청 댓글:  조회:7490  추천:2  2013-11-01
  에세이 김일성의 당내숙청   1950년6월25일부터 1953년7월27일까지 진행되였던 조선전쟁은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상에서는 너무나도 크나큰 비극이였다. 그 전쟁은 구가할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전쟁을 해서 남북은 통일을 가져오지 못했거니와 오히려 불필요한 죽음만을 내면서 하나의 나라가 의연히 두동강이 된채 제민족ㅡ남북동포들에게 깊은 원한과 고통만을 더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당시 조선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은 자기의 신변에 있는 원로급인물들에 대해서 타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56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정식으로 당내의 “친중파(연안파)”와 “친쏘파”에대한 대숙청을 시작하엿던바 그것이 1958년도에 이르어서야 이른바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 일이 이미오래전에 공개되기는했지만 시간이 오래니 잊어지고있다. 나이많은 이들도 그 내막을 잘모르거니와 더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거의가 “당내숙청”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것 같아 오늘 그에 대해서 언급하련다.    박헌영(朴憲永)집단숙청   박헌영(1900년ㅡ 1955년)은 위망이 높았던 정치가였다. 그는 19살때에 “3.1운동” 에 참가한 일로하여 일본경찰들이 붙잡으려하니 중국의 상해로 망명을 한 것이다. 1945년에 조선이 독립을 하게되자 그는 조선공산당령도자의 신분으로 당활동을 활발히 했다. 같은해에 김일성도 쏘련에서 조선으로 건너가 서울에 있는 박헌영의 령도를 접수하는 한편 따로 조선공산당북방국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준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세운것이여서 서울중앙의 비평을 받은것이다. 북방 함경도당조직에서는 지어 한때 북방국의 령도는 받지도 않겠다고하면서 맛서기까지 했다.   1947년도에 이르러 남조선공산당은 미국이 진압하기에 당중앙이 하는수없이 서울을 떠나 북으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되자 남북쌍방은 일치한 의사에 따라서 련합회의를 열고 조선로동당을 세우게된것인데 당수는 김일성이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위원장이고 박헌영이 부위원장이였다.      조선전쟁이 일어난 후 박헌영이 남방의 당조직을 책임지고 기의를 일으키기로한건데 전쟁에서 실패하는바람에 남방당의 실력은 크게 감소되고말았던 것이다. 조선로동당내에서는 남방의 로동당은 해방전쟁에서 인민기의를 발동하여 인민군과 배합작전을 하지 못했으니 계획이 파탄된것이라면서 그 책임을 남방로동당의 당수였던 박헌영에게 들씌웠던 것이다. 1953년 3월, 사법부장이였던 리승엽(李承燁), 중국주재대사 전오직(全五稷), 제1계최고인민의원 김오성(金午星), 남조선해방유격제10지대장 맹종호(孟種鎬), 로동당련락부장 박승원(朴勝源), 부부장 배철(裵哲), 로동당사회부장 강문석(姜文錫), 내무성간부 백형복(白亨福) 등 10명을 사형하고 다른 두사람은 각기 15년, 12년의 유기도형에 떨구었던 것이다.   당시 로동당의 두 번째인물이였던 박헌영(朴憲永)마저도 불행을 면치못하고 1955년 12월 15일에 처결되였다. 상술한 사람들은 다가 “미제국주의고용간첩”이라는 근본 있지도않는 날조된 죄명으로 기소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이 많은 코치는 감히 다치지 못했다.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김일성의 륙군주력은 38선을 돌파하고 남쪽으로 나갓는데 그 인민군의 주력은 중국에서 건너간,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두 개의 조선족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각 야전군에서 복역중이였던 조선족관병과 쏘련에서 귀국한 쏘련려에 있었던 교민들이였던 것이다.     소련려에 있었던 대부분의 교민들은 땅크병이였다. 그러하였기에 김일성의 륙군주력과 그 장갑부대는 아주용맹했던것이다. 한즉 그가 거느리고 건너갓던 유격대의 능력같은건 근본 운운할 처지도못되였다. 한편 남북통일에 조급해난 김일성은 쏘련에다 보고하기를 미국은 출병하여 간섭하지 않을것이라고했던 것이다. 하여 쓰딸린은 김일성의 군사행동에 대해 묵허(黙許)를 한 것이다. 한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김일성의 서투른 지휘로인히여 부산까지 밀고나갔던 인민군주력은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이 인천에 등륙함으로 하여 퇴로가 막혀 기본상 전멸되다싶히 한 것이다. 근 11만에 달하는 인민군이 포로되고말았다. 그런 상황속에서그래도 부통수였던 최용건(崔庸健)이 형세를 파악하고 신속히 소부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필사적으로 싸웟길래 김일성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를 않았더라면 김일성도 아마 포로가 되어 미군의 포로영에 갇혀 거기서 빵이나 씹는 신세가 되었을지 모른다.    최용건(崔庸健)은 정직한 장령이였다. 그는 항일전쟁 때 동북에서 일제와 싸워 탁월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쏘련에 가 있었던 김일성이 거기서 조선으로 건너갈 때 최용건은 가지 않고 동북에서 그기간 자기가 한 사업을 회보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내부파렬로 기능을 잃음으로하여 유명무실하게되자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해산되자 곧바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김일성이 조선으로 먼저건너갓다. 그때 만약 최용건도 너갓다하더라도 친쏘파가 아니니 쏘련군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을건 물론 최용건자신도 쏘련에 빌붙고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야심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의 고귀한 인품과 숭고한 위망으로 하여, 더구나 목숨걸고 자기를 구해준 은공이 있음으로하여 김일성은 시종 그를 감히 어쩌지 못한것이다.      연안파와 친소파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   조선전쟁이 결속되였지만 중국군대는 인차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내부의 지도급인물을 볼것같으면 두 개의 파로 나뉘여있었는데 하나는 친쏘파고 다른하나는 중국파 즉 중공이 연안에다 설치한 간부훈련반을 나온 사람들이였던 것이다.       1956년2월에 쏘련의 지도자인 흐루쇼브가 쏘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쓰달린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 기회를 빌어 조선은 지금 김일성에 대해서 개인숭배를 대단히하고있다고 질책했던 것이다. 4개월후에 김일성이 쏘련을 방문했는데 흐루쇼브는 김일성더러 개인숭배를 거두라고 충고했다. 당시 조쏘량당의 담화를 기록한 내부문건을 보면  “쏘공은 조선동지에게 조선로동당은 엄중한 착오를 범하고있다고 충고했다. 그것은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하는네 대해서였다. 김일성은 쏘공의 제의를 접수했는바 조치를 대여 결점을 고치겠다고 했다.”고 썻다.   쏘련의 그러한 태도에 고무를 받은 “연안파”는 암암리에 김일성을 비판할 계획을 짯던것이다. 사실 아무모로보나 김일성은 연안파의 박일우와 비하고 무정과 비하고 방호산과  비해봐도 조선의 최고수령으로되기에는 자격미달이였던 것이다. 1956년8월29일, 조선로동당에서는 쏘련과 동구라파에 갓다온이들의 귀국보고회를 가지게되였는데 친쏘파의 박창옥(朴昌玉)과 연안파의 최창익(崔昌益)등은 김일성을 향해서 공개적으로 도전을 했던 것이다. 1960년대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조선의 전부총리였던 오기완(吳基完)이 증실한것인데 연안패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경과를 보면 이러했다ㅡ 한 연안파성원이 중앙회의에서 발언하자 당장 김일성의 유격대파에서 왁작떠들면서 욕지걸이를 하는바람에 회의장은 그만 란장판이 되고만 것이다. 하여 연안파사람들은 더는 발언할 기회가 없은 것이다. 기실 김일성이 비밀리에 배치해놓은 이들이 연안파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잽싸게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걸려든 연안파성원들을 모두 출당시켰다. 연안파인 상업부장 윤금흠(尹金欽)과 직업동맹위원회 위원장 술휘(戌輝)는 당장 그날밤으로 중국으로 도망쳐왔고 최창익(崔昌益)과 박창옥(朴昌玉)은 체포되여 8월에 중앙전회때 이름이 당에서 긁히우고만것이다.   얼마안되여서 쏘련의 제1부총리인 미꼬양, 중국 국방부부장 팽덕회가 선후로  조선을 방문했는데 두사람 다 친쏘파와 연안파사람에 대한 처분을 철회할것을 제의했던것이다. 그리하여 9월의 중앙전회에서 최창익과 박창옥은 중앙위원의 신분을 회복하게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일성의 숙청이 끝난건아니였다. 1956년말에 이르러 조선로동당에서는 새로운 당증을 내준것이다. 그것이 실제는 청당운동(淸黨運動)이였던 것이다. 1957년도에 김일성은 이 기회에 연안파, 친쏘파와 남조선로동당계통의 잔여들을 일망타진을 한 것이다. 연안파의 끝장이 불명확했고 친쏘파는 쏘련국적을 그냥 보류하고있었길래 모두 쏘련으로 되건너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같이 들끓는 숙청운동이 끝나 1958년3월에 이르러 조선로동당은 제1차대표대회를 연건데 김일성은 그 이벤트의 시리즈를 “대승리”라고 형용했다. 그때로부터 김일성의 유격대파가 조선에서의 령도권을 독점하게되였던 것이다. 통계를 보면 1961년9월에 열리였던 4차대표회의에서 선출된 85명의 중앙위원중 원래 3차대대회때에 선거되였던 중앙위원이 71명이던것이 남은건 28명뿐이였다. 43명의 연안파와 친쏘파는 숙청되고만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고도 사상숙청을 했다. 쏘련의 비밀적인 내부문건에다 김일성의 숙청과정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한달내에 2천명넘어 숙청했는데 그중의 4백명넘는 사람을 조선의 정치체제를 반대했다는 죄를 씌워 공개총살을 한 것이다.   련결: 북조선혁명원로의 끝말        金日成(自然死)     崔庸健(自然死)     洪命熹(自然死)     白南云(自然死)     朴宪永(死刑)     李承烨(死刑)     张时雨(死刑)     朱宁河(死刑)     许成泽(死刑)     李炳南(死刑)     李 镛(死刑)     朴文圭(不详)     金 策(疑问死)     许 宪(事故死)     金元凤(临政系,死刑)     朴一禹(延安派,死刑)     金武亭(延安派,自然死)     金枓奉(延安派,死刑)     金 雄(延安派,死刑)     崔昌益(延安派,死刑)     朴勋一(延安派,死刑)     方虎山(延安派,生死)     张平山(延安派,死刑)     朴孝三(延安派,死刑)     金汉中(延安派,死刑)     李益成(延安派,死刑)     李芳南(延安派,不详)     许贞淑(延安派,自然死)     许嘉谊(苏联派,自死)      나에게 60년대초에  북조선에서 숙청자료를 공개한 자료를 한데묶은 책이 있었다. 박헌영, 리승엽 등 여럿은 사진과 함께 판결된 죄상들이 있었는데 "문혁"때 이건 왜 보관하느냐면서, 나를 반동이라면서 사진들을 뜯어 전람을 시키면서 나를 온 공사내 돌림투쟁을  했던 것이다. 그 자료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것은 조금있다. 거기에다 인터넷에 난 자료들을 더해서 이 글을 쓴다.  쓰는 목적은 지난날 가혹했던 권력과 정치투쟁의 모습을 다소나마 보이기위해서다 (武亭将军) (“朝鲜甘地”曹晚植) (金日成与战友金策).    (左起:金雄大将、朴一禹、金日成,彭德怀、陈赓、甘泗淇)               金日成与朴宪永(中戴眼镜者)                 金日成与朴宪永(右二)           ) (左起:朴昌玉、李济深、金科奉、朱德、金日成、阿里斯托夫(苏联政府代表)、朴正爱、崔庸健。)                                                    (延安派崔昌益)               (金枓奉(左二)、朱德、金日成、滕代远)                       (朴金喆与周恩来)                       幸运的崔光上将(1995年晋升元帅)   (正中为南日大将,右二为“八月宗派”事件中留苏联政治避难的延安派李相朝)                  (金日成的弟弟金英柱) 叔侄争位:金正日成功当上继承人金日成亲弟金英柱遭清洗 (金正日成功接班金日成)                                     
283    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댓글:  조회:5612  추천:3  2013-10-29
  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나는 전에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면서부터 한가지 의문이 종시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였는가? 그것은 항일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하지 않고 공산당이 했다는 주장 그것이였다. 과연그럴수가 있는가?..... 1962년 7월 민족출판사에서 제1판으로 출판한 양장본 제4권에 있는 첫문장 “항일전쟁승리후의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라는 글을 보면 “일본투항의 결정적인소는 쏘련의 참전이다..... 항일전쟁은 한 개 력사계단으로 말하면 이미지나갔다.”고 하면서 “우리 해방구의 인민과 군대는 8년래 외부원조가 조금도 없는 정황하에서 완전히 자기의 노력으로 광대한 국토를 해방하였으며 대부분의 침화 일본군과 거의 전부의 위군을 항격하였다.”고 했다. (1733페지) 정녕 그러하다면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를 던지게 된다. 장개석이 지휘한   국군(國軍)은 그지간에 무엇을 했단말인가? 아미산에 올라가있으면서 공산당토벌만을 꿈꾸면서 항전이 끝나면 항전승리의 과실을 제가 딸 궁리만을 했단말인가?    80년대 초중교과서에도 쓰기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후항일에서 80%이상의 일본군을 항격하였는바 항일전쟁에서 튼튼한 기둥이였노라고했다. 그러면서 이같이 기술한 것이다. “.......8년항전에서 중국국민은 일본군을 150만을 섬멸하고 118만의 위군을 섬멸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멸망하려던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린  것이다. ......” 공산군이 기둥이되여서? 국군의 항전은 언급하지 않은것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세계의 반파시스전쟁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중국 전장은 세계반파시스의 동방전장으로서 일본륙군총병력의 3분의 2이상을 항격하고 견제했던 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쏘련, 미국 등 동맹국의 밀접한 배합으로하여 일본군국주의의 지배적야심을 철저히 분쇄했으니 그것은 세계반파시스전쟁승리에서 결코 마멸할 수 없는 공헌으로 되는 것이다. 중국항일전쟁승리는 또한  여러반파시스맹국의 강력한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      여기서도 국군의 항일에 대해서는 일자반급도 언급하지 않았다. “......팔로군, 신사군과 항일무장력량은 점차 전국항일주력이 되어 170만이 넘는 일위군을 섬멸한 것이다. 8년항전을 거치면서 19개성이 해방구로 되었는바 그 면적은 100만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억이 넘으며 인민의 군대는 130넘어발전했고 민병도 260만에 이른것이다. .....” 교과서를 만든 학자가 불어도 체면없이 불어댔다.     8년항전에 일본군을 도대체 얼마나섬멸했는가? 도대체 누가 주력이고 기둥이였던가? 국군인가? 아니면 공산당군대인가? 량당은 제가끔 표현이 다르나. 1984년도에 商务印书馆에 의하여 출판된 일본의 조시로 핫토리의 제4권 1799페지에 밝혀놓은것을 보면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일본군이 전사한 정확한 수자는 1858811명이다. 일본에서 2001년에 출판한 력사교재에다는 “2차대전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약 186만이고 평민은 66만이다.”라고했다. 조시로 핫토리가 쓴것과 맞아떨어진다. 사망된 그 일본군인중 125만명은 미국군에 의하여 격사된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공산군은 싸움을 얼마하고 일본침략군을 대체 얼마나 섬멸했는가?  똑똑한 수자가 없다. 에 보면 이러하다. 대회전(大會戰) 23차. 중요전역(重要戰役) 1117차.                               1115차는 국군(國軍).                               2차가 공군(共軍). 즉 “백퇀대전”과 “평형관대전”이다. 중요전투 40000여차였는데  그중 200여차가 공군. 8년항전에서 국군이 사망된 인수 321만 1419명. 장군사망 203명. 중장이상 34명. 공군에서는 좌권부참모장  1명. 무엇을 보여주는가? 8년항전에서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는가? 전쟁사를 연구해 보면 그어떤 전쟁에서든 적후항전이 결정적인 작용을 노는건 아니였다. 나는 좁쌀에 보총으로 비행기, 대포를 격패했다는 따위의 소리는 믿지 않는다. 맛서봤자 폭격에 고기덩이로나 되고말게 뻔한데..... 코빠는 애들이나 곧이듣겠는지. 공산군 유격대가 항일전쟁에서 주력이고 기둥이 되였다는건 천방야담으로밖에되지 않는다! 실속없는 거짓말은 듣는이를 해칠뿐이다. 국가는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력사교육을 제대로 옳바르게해야 희망이 있다. 보충글:  모택동의 비밀지령 1937년에 항전이 폭발했는데 8월에 모택동은 섬북락천(陝北洛川)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랭정해야한다. 전선에 나가 항일영웅으로되려니말아야 한다.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일본군후방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방법을 다해 팔로군을 확충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며 천방백계를 다해서 당의 무장력량을 저축하고 장대시켜야 한다. 정부측에서 전선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여 밀어버려야 한다. 일본군이 국군을 많이 많이 살상한 후에야만이 우리는 비로소 모든 항일과실을 얻고 국민당의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응당 항일을 많이해야 애국이라하는데 그 사랑은 장개석나라사랑이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조국은 전세계공산당사람공동의 조국 즉 쏘베트(쏘련)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방침은 일본군대가 땅을 많이 차지하게함으로서 장(蔣), 일(日), 우리(我) 삼국지(三國志)를 형성케하는 것이다. 그같이 해야 우리한테는 유리한 것이다.”    “우리당의 무장력량을 발전장대시키고 전쟁후에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기위해서인것이다. 우리당이 반드시 엄격히 준수해야하는 총방침은 1푼항일,  2푼응부,  7푼자기발전이다”. 그어떤 사람, 그어떤 조직도 이 총방침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모택동이 1937년 9월에 산서(山西)에서 싸우고있었던 팔로군제11사독립단단장 양성무(楊成武)에게 지시한것을 봐도 “중일간의 전쟁은 본당이 발전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결정한 정책은 백분의 70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백분의 20은 타협하는 것이며 백분의 10은 대일작전인 것이다”라고 했다. .........   鐵血軍事> 鐵血歷史論壇> 中國歷史>  “紀念8.15- 谁是抗战中流砥柱?" 를 보라. 
282    에세이 그렇게 고쳐서야?... 댓글:  조회:4842  추천:2  2013-10-25
  그렇게 고쳐서야 안되지!   재작년 7월의 일이다. 어느날 내 한족친구 로류(老劉)가 나보고 "문사출판사"에 다니는 아들이 오래간만에 확건된 국가박물관이 문을 열렀다고 알려주는데 자기와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했다. 국가박물관은 인민대회당과 마주하여 천안문광장동쪽에 있다.   그것이 해방후에 나진게 아니다. 1782년에 이미생겼으니 력사가 있는것이다. 동남아의 여러나라치고는 규모가 제일커서 참관객의 발길이 늘 끊지를 않는다. 나는 1992년도여름 소수민족작가필회때 가보고는 다시가지 않았다. 그사이 확건을 했다니 대체 어떤모양인가 보고도싶었다. 하여 이틑날 나는 로류(老劉)와 같이 천안문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던 것이다.   국가에서 그지간에 국가박물관을 과연 잘 확건했다. 그날 우리와 함께 참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속에는 외국인도 끼여 있었다. 한데 나는 그날 그 국가박물관을 가보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박물관 중앙대청에 걸어놓은 커다란 유화 두폭을 보고서였다.  그것은이였다. 그것은 1952년도에 37살의 나이였던 젊은화가 동희문(董希文)이 그린 유화의 복제품이였는데 피끗보아 같은것 같지만 자세히 비해보니 달랐다.     모택동의 뒤 첫줄을 보면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장란, 고강이다.   그런데 고쳐그린 이 유화에는 고강이 빠지고 없다. 치렬한 정치투쟁냄새가 풍긴다. 문화혁명기간에는 류소기마저 지워버렸다고한다. 그랬다가 다시그려넣고. 왜 이러는가?   은 1949년10월1일의 그날을 고정시켯을뿐만아니라 기록해놓았으니 중국사람은 그 력사를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53년9월27일, 는 첫면에다 유화 을 냇거니와 그 그림은 또 많이 인쇠되여 이미 년화로 팔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중소학교과서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됐는가?   거폭의 그 이 중국혁명박물관에 진렬해서 겨우 3년을 보내고 “고요사건(고강,요수석)”이 생겼던 것이다. 국가부주석이자 정치국위원이였던 고강은 1954년에 직무를 철소당하자 8월에 자살하고말았던 것이다. 그는  죽은 후인 1955년 3월에 이르어 당적마저 긁히우고말았다. 그렇다하여 때  몸이 있고 얼굴이 있은것마저 없애버리면 대체 뭐로되는가?    그 유화를 보고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정치는 정치고 력사는 력사인 것이다.  자라는 후대들에게 거짓말을 해서야 어디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같이한건 유치하거니와 대단히 비렬한 짓임이 분명하다. 박물관측도 아마 그 두폭을 비해보면서 누구나 깨닫고 각성하라 내놓은것 같았다.  
281    수필 감미로운 추억 댓글:  조회:5376  추천:1  2013-10-24
  수필 감미로운 추억   올년초의 일이다. 흑룡강성 밀산시의 전임시장 맹고군((孟高君)씨가 손수 싸인까지 해서 두툼한 책 두권을 내한테 보내왔다. 와 였다. 전혀 면목도 모르는 분이 그같이 보낸게 뜻밖이거니와 고맙기가 그지없다. 그가 보낸 책 두권중 첫권 는 이제 아무때건 체계적으로 정비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총서가 다시금만들어질 때면 빼놓지 말고 꼭 올려야 할 귀중한 사료들이고 두 번째권인 는 밀산시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가진이들이 쓴 여러편의 글들을 한데묶은 문집이였다.  그 책의 수필편에서 맨우에 수록된 수필 “은사님(외3편)”과 시편 첫머리의  “목릉강반은 내고향(외3수)”을 쓴 리상각은 나의 스승인것이다.   나는 벌리조선중학(초중)을 나왔는데 내가 중학에 붙던 해인 1954년도여름에 리상각선생님도 18세살나이에 상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업배치를 받아 벌리중학교로 왔던것이다. 그해 그렇게 온 젊은선생이 여럿이다. 내가 1학년때 4반의 반주임이였던 안영곤과 다른 과목을 가르쳣던 최명숙선생이 그와 동창이고 내가 졸업때 반주임을 맡았던 황동철선생님과 물리교원 김천유선생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벌리학교로 분배되여 오신건데 그들다가 그때는 리상각선생처럼 생기있는 팔팔한 젊은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초중에 입학해서 졸업할때까지 옹근 3년간을 나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면서 친부모같이 지극히 보살펴준 홍기종교장선생님도 상지사범학교에서 교도주임을 지내다가 리상각선생과 같은시기에 벌리학교에 오셨던 것이다. 그는 내가 렬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어느날 교장실로 불러다놓고 국가는 혁명렬사의 후대들은 각별히 관심하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나라의 동량지재가 되라고 해놓고는 나더러 할빈에 있는 조일만학원과 평양에 있는 만경대학원은 전문 렬사자식들만 받아서 공부시키는 좋은 곳이니 생각해보고 가고싶으면 가라면서 추천은 교장인 자기가 한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생각을 더깊이 하지 않고 아무리좋아도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데는 가지 않겠노라고했던 것이다. 원인은 희생된 아버지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벌리를 보면 저 남쪽 두만강가의 도문으로부터 북쪽의 송화강남안의 가목사까지 일직선이 되게 곧게 뻗은 도가선(圖佳線)에 놓여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현정부소재지다. 역전동쪽에 위치한 단층집 조선중학교는 교실이 열몇칸에 이르었는데 널다란 운동장을 가운데다 놓고 ㄱ자모양으로 길다랗게 새로지은 흰벽돌집였다. 그리고 학교동쪽으로 1리도 못가서 남북으로 뻗은 널다란 연자하가 흐르고있는데 다리를 건너 더들어가면 인가가 모여 붐비고 복대기치는 번잡스러운 시가지였다. 연자하를 건너는 큰다리가까이 이쪽 큰길북켠에 바로 사문동토비를 숙청하다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한, 동철부대의 17명렬사의 시체가 묻힌 렬사릉원이 있었던 것이다. (“문혁”직후 서산으로 옮겨짐) 17렬사기념탑바로 뒤쪽 맨앞줄중간에 참모장 김해정묘와 나란히해서 나의 부친의 묘가있은 것이다. 합강성정부에서 수립한 그 비석에 참모장 김해정이하 16명렬사라 씌였는데 그 16명중에서 1명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전사가 아니라 마침 그때 병으로 사망한 녀병사였던 것이다. 영평강전투에서 전사한 그들은 동철부대의 두 개 정찰반이였는데 제1반의 반장이 바로 나의 부친이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데든 가지 않고 거기서 중학을 졸업하리라 맘먹었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나의 이름을 松竹이라 지은분이자 항일간부였던, 아버지와 함께 열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참모장 김해정의 딸 대분이도 벌리에 와서 학교를 같이다니게되였는데 청명절이 돌아오면 우리는 커다란 꽃다발을 받쳐들고 전교생대렬앞에서 렬사묘참배를 갓던 것이다.   나는 벌리중학에서 3년간 공부면서 조학금특급을 받았거니와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전체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그야말로 남달리 행복스레  자랏다. 부친의 생전소속부대에서 자란 3년과 초중을 3년간다닌 그때가 내 평생에 제일뜻깊고 행복한 시절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때는 내가 자기 종생의 리상이였던 문학의 싹을 키우고 그것을 보듬어 자래웟으니 비유하면 글농군의 시절이기도했던 것이다. 한반에서 공부하는 학생 박억만역시 나처럼 문학을 즐기였다. 그리고 내가 소학때의 친구였던 조용환이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는 가정형편이 여의치않아 중학을 다니지 못하고 훗날 조선으로 나가버렸는데 그가 조선으로 가기전, 내가 초중을 다니는 기간 함께 문학쿠르쇼크를 조직하고는 마치도 지하혁명자가 활동하듯이 “붉은띄”라이름지은 편지로 서로련계하면서 문학공부에 열중했던 것이다.   솔직히말해 나는 그 기간에 저지른 한가지ㅡ 남이 알면 불민스러운 일이라 할수도있는 한가지 일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르면서 추억을 뚜지기에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그건 내가 리상각선생한테서 책을 빌려다보고서는 그것을 돌려주지 않은 일이였다. 선생님은 아마 그일을 언녕 가맣게 잊었을수도있다. 내가 그한테서 빌린 책은 였다. 초중에 붙은지 얼마안되여 나는 교도처일을 보는 리상각선생님이 문학을 하거니와 학교도서실도 관리한다는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문학서적이라고는 한권도 없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도서실이 있는게 내같은 빈털터리 애숭이문학도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날 책빌러 도서실에 갓다. 마침 리상각선생이 거기서 책을 보고있었다. 대체 무슨책이길래 학생이 들어온것도 모르고 저리도 열심일가하면서 내가 눈주어 여겨보니 거울이 누름하고 얍다란 책이였는데 였다. “선생님 책빌러왔습니다.” 나는 그가 책을 다볼때까지 기다릴수는 없어서 온리유를 말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머리를 치키고 나를 보면서 동무는 무슨책을 보자하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서슴치않고 시들을 한데묶어놓은 시집을 빌리련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나보고 “동무도 시를 즐기오?”하고 묻는 것이였다. 나는 쑥스러워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나를 다시한번 눈주어 훝어보고는 자기손에 쥐여있는 그 책을 주면서 이건 마야꼽쓰끼의 시들을 묶은건데 시들이 박력이 강해서 독자에게 격동을 충분히 주니 좋다면서 보라고했던 것이다. 나는 얼른받아쥐고 기뻐하면서 거기를 나왔다. “다보고는 가져와야해.” 그가 당부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에 미처응답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보고서는 의례돌려줘야지했다.  그런데 숙사에 돌아와 다시보니 책표지에도 속지에도 그것이 누구해라는 것을 밝혀놓지 않은 책이였다. 도서실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학교것이 아닐거고  리상각이라는 이름도 도장도 찍지 않았으니 그의것도 아니라생각했다. 마치도 임자없는 사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같서 나는 짝짜꿍을 쳣던 것이다. “찾으면 돌려주고 안찾으면 내거다. 책도적은 도적이 아니라더라!” 이렇게 되여 책의 임자는 바뀌우고 만 것이다.    그 책을 편집은 延邊文聯籌委會가 하고 출판은 延邊人民出版社에서 한것인데 속지첫면에 라고 쓴 쓰딸린의 제사가 있고 후면에는 >라고 쓴 편자의 글이 있는데 그 책에는 마야꼽쓰끼의 “당은”, “소베트 공민증”을 비롯하여 7수의 장시가 수록된 것이다.    그 는 초중때는 물론 졸업해서 농촌에 돌아와서도 역시 내가 조직한 문학쿠르쇼크성원 셋이 다 즐겨보는 애독물(愛讀物)이였다. 나는 촌에서 소학훈장을 지내면서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사는데다 밀어넣으면서 독서를 걸탐스레했다. 그러느라니 도서가 근 1200여권에 이른건데 “문화혁명”이 오니 생전 낯도 코도도 모르는 중학교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나의 목에다 “반당분자”라 쓴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는 거침없이 우리집을 들이쳐 닥치는대로 들부시고 욕심나는 물건은 도둑질해갓던 것이다. 그날은 비가 약간내렸는데 그래도 사람이라 량심쪼박이 있었던지 그들은 까래를 펴놓고는 이불과 옷견지들을 창밖에 내던졌거니와 책들을 말끔히 내버리고는 책장을 뚜드려 마사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작란을 하고서도 그 애들은 재미가 모자랐던지 아니면 그놈의 대담무쌍한 본때를 보이느라그랬는지 천정을 말끔히 뜨어버리고 구들장을 뒤번지고 부뚜막을 마스고 물단지를 깨버리고 감자굴까지 헤쳐놓고는 나중에는 뒷출입문에다 판자로 x 표를 쳐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못까지 쳐놓고 가버렷던 것이다. 그런판에 그래도 조선에서 출판된 10권에 6권, 8권, 4권만은 재난을 용케면했다. 그전에 1964년도 “4청”때 나보고 “시를 써 발표하고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를 받아 학교에 들여놓지 않고 혼자쓰는건 자본주의사상행위다.”하면서 우습게 놀았다가 내한테서 “그렇게 공산을 부르짓겠거든 어디 네녀편네를 내놓아 공산으로 만들어보라”는 힐난을 들어 도루망신을 당했던자가 공사의 “교원쪼판퇀”을 조직하더니 다른 한 심보나쁜자와 같이 내가 써놓은 첫장편의 원고와 일기책들을 보고는 돌려주리라면서 걷어갔던 것이다. 꼴을 보니 나를 잡자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해 몇년간수집해둔 각가지 소설자료들은 길건너 이붓자식과 같이있는 어머니보고 건사해달라 맡기고는 10권은 바로 뒷출입문턱밑을 파고 거기다 파묻어 감추었다. 그 외의 다른책들은 어쩔 수 없어 그대로나둿던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이 거의 다 화형당하고 도적질해가서 잃어졌다. 그런판에 들은 발각되지 않은거고 6권은 너무두터우니 어쩔 수 없어서 내쳐버린것 같고 이나 들은 까딱잘못건드렸다나는 도루잘못될게 빤한지라 그들이 어쩌지 못하고 남긴것 같았다. 그런데 20권은 어느 개명치않은 빈하중농사원이 제집에 갖고가서 색솔대로 오래동안 뒤지로 잘 사용했다. 나는 그들의 너그럽고도 불필요한 감시하에 사상개조를 하느라 몇해간 마을의 뒷간을 돌아가며 치다보니 그일을 알게되였던 거다. 진짜무산계급혁명자가 알면 볼기짝을 맞을 짓이 아니겠는가! 나의 책들이 그같이 액운을 면하기어려었던 그 분주하고도 험악한 란시속에서도 리상각선생이 빌려준 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잘 건사해서가 아니였다. 문학쿠르쇼크의 한 성원인 김인세가 “쏘베트공민증”을 외우느라 내한테서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고있다가 “문혁”이 다 끝나서야 안심하고 내놓았던 것이다. 그 수호자에게 응당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어느핸가 리상각선생이 탕원에 회의를 같다가 지나는 길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허광일총편과 함께 우리집에 들리였다. 그때 나는 내가 초중때 빌려온 를 제때에 돌려드리지 못하게 된 연유를 말하고 아깝지만 고스란히 내놓려했다. 그런데 리상각선생이나 허총편이나 두분다가 나를 만나자 먼저 나보고 연변에 가지를 말거라 거기서는 가짜 김송죽이 나타나 제가 장편소설 을 쓴 작가라면서 후라이를 치면서 나돌아 민분을 일으키고있다는 얘기를 해서 듣고 웃다나니 내가 먹엇던 생각은 그만 가맣게 잊고말았던 것이다. 그날저녁 리상각선생님은 록음기를 틀어놓으라 해서는 춤곡이 나오니 우리집의 노랗고 반들서리는 기다란 캉들우에서 오가며 딴스를 쳤다. 참으로 즐거원던 밤이다. 우리집 사람은 요즘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선생님은 참으로 유쾌한 분이야!”  하고 뇌인다. 내가 김학철옹을 두 번째만나러갓을적이다. 선생님이 나보고 그래 아침식사는 어디서 치럿는가고 묻길래 내가 리상각선생댁에서 먹고 오는 길이라했더니 선생님은 “그랫어? 사람이야 맑고 바르지!”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세영이 거 과연 참한 여자야!”하고 리상각선생의 부인을 칭찬했던것이다. 김학철옹은 나와 자기가 알건대는 그 험악한 세월(문화혁명)에도 제민족의 복장차림으로 거리에 의젓이 나다닌 녀성은 온 연길시내바닥에 세영이밖에 없었을거라면서 그는 우리 조선민족녀성들은 다가 따라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리상각선생은 그러한 녀인이 타계하여 곁에 없은지 오래니 어찌 정막하지 않으랴. 나는 원지에서 전화로나 어쩌다 안부를 알뿐이다. 그저 동창더러 자주가보라한다. 내가 연길에 갈 기회가 생기겠는지?....이제만난다해도 책을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것을 기념으로 그냥갖고있으련다. 아마 그러는게 더 좋을것 같다.                           
280    에세이 어두운 편견의 장벽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3-10-23
  에세이 어두운 편견의 장벽       세상을 살아가노라니 별의별 눈꼴사나운 인간을 다 보게된다. 내가 교단을 떠나 퇴직한 이듬해의 여름, 송화강이북에 있는 신화(新華)에 갔다가 거기서 당한 일이다. 그곳 물비료공장의 권주임과 함께 거리에 나가 한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있는데 성이 장가인 30대반의 갱핏하게 생긴 웬 한족젊은이가 먹던 술과 두부볶음채접시를 들고 우리 상으로 건너와갖고는 나를 향해 아무리봐야 본지의 사람같지 않은데 어디서 왔느냐며 말을 거는것이였다.   권주임이 그에게 화천(華川)의 성화향이라는데서 왔는데 작가라 알려주었다. 장가는 아 그런가 헌데 성화향이란건 어떤 곳이냐고 묻기에 나는 성화향은 가목사에서 40여리가량 떨어진 시교에 있는 농촌이라 알려줫다. 그러니 장가는 집이 촌에 있다구? 하면서 고개를 찌붓하더니만 나를 다시금 여겨보면서 그럼 너에게 작가증이 있느냐고 캐묻는것이였다. 나는 “작가증”이라는건 없고 “회원증”이있다고했다. 그랬더니 그가 아 그런가, 그렇다면 그걸 좀 보여줄 수 없겠느냐, 여기는 전에 정령이 와서 로개를 하다가 돌아가고는 다른 작가가 와있다는 소리는 제가 못들었노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는 나이 설흔을 넘어먹도록 여직 “작가증”이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르는데 그걸 좀 보여줄 수 없겠는가고 했다.   나는 비싼물건도아닌진라 별다른 고려없이 보겠으면보라고 몸에 지니고있던 성작가협회의 회원증을 꺼내놓았다. 그랬더니 장가는 쥐여 여겨보고서는 돌려주지 않고 생각밖에 그것을 제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는것이였다. 나는 무례하기 짝이없는 그를 여겨보면서 아니 너가 왜 그러냐, 남의걸 해서는 뭘하는가 돌려달라했다. 그랬더니 장가는 지금은 돌려줄수없다면서 찾겠거든 자기와 함께 가자는것이였다. 내가 어디로 가자느냐 물으니 장가는 자기를 따라오면 이제 알게될거라면서 밖으로 먼저나가는 것이였다. 한쪽에서는 돌려달라느니 한쪽에서는 안주겠다느니.... 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자와 승갱이질하기싶지 않거니와 창피스러워 따라갔다. 이러는 장면을 지켜보고있었던 음식점주인은 그제야 쯔쯔 혀를 차면서 권주임한테 알려줫던 것이다.   “애먹게됐구만, 저자식은 감옥밥먹고 방금나온 망나니라니까.”   밤이 다 된지라 행길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드믈었다. 나는 그녀석을 따라 휑뎅그렁한 대통로를 걸었다. 좀 있으려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뒤쫓아왔다. 권주임이 나의 안전이 몹시 우려되여 급히 달려가 젊은공인 10여명을 제꺽동원시켰던 것이다.   성이 장가라는 그 녀석은 아느새 가더니 나를 길남의 불밝은 뜰악으로 데리고 들어가는것이였다. 벽에 붙은 패쪽을 보니 “신화진파출소”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그런데 이자식이 나를 여기로는 왜 끌고왔을고 하고 의문스러워했다. 우리가 가자 나이 지긋한 사람이 나타났다. 파출소 소장이였다. 그는 먼저 나보고 무슨일에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치가 나의 작가협회 회원증을 보여달라기에 보여줬더니 보고서는 제호주머니에다 집어넣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온거라 했다. 그랫더니 파출소소장은 장가쪽을 향해 네가 정말 이분의것을 가졌는가 묻고는 그걸 내놓으라했다.   장가는 오섭서리 내놓았다. 파출소소장은 펼쳐보고나서 그를 향해  헌데 네가 남의걸 봤으면 돌려줄게지 왜서 제호주머니에다는 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 장가가 하는 말인즉은 지금은 “문혁”때가 아니지 않는가, 녀작가 정령도 여기서 로개를 하다가 “문혁”이 끝나니 제가있었던 도시로 되돌아갔는데 작가가 옳다면 도시에 있지 않고 왜서 이런데는 와서 고생스레 공장일을 하겠는가 하면서 자기는 아무리봐야 이 사람은 작가같지 않다, 아무리봐야 허풍치고 다니는 사기꾼같아서 조사해보고 붙잡으라고 데려왔다는 것이였다.   보아하니 제딴에는 립공속죄를 한다는게 그꼴이였다. 《야 이 더러운자식아! 네가 대체 뭔데 그분의 신분증에다 함부로 손을 대는거냐?》 소장은 말을 더않고 노기서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다가 귓뺨을 한대갈겼다. 그러고나서 그는 나를향해 사과했던 것이다. 《과연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저자식을 제대로 관제못해서 공연히 불쾌하게 욕을 보는군요. 과연 미안하게 됐습니다. 사과합니다!》   돌아오면서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여다볼라니 파출소민경여럿이 그를 방바닥에 엎놓고 언말똥굴리듯 걷어차고있었다. 그자가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멀리오도록 들려왔다...... 그자가 매맞은게 속시원했지만 나는 일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왜 쓸데없이 여기와서 이같이 불쾌한 변은 당하게되는가?.... 그후로부터 나는 다시는 그따위 “신분증”은 갖고다니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앞에서 “나는 작가요” 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봤자 리익되는 일이란 하나도없었다.   북경에 이사와서도 마찬가지다. 여러해를 지나도록 남들은 내가 그저 중학교선생질을 하다가 퇴직한줄로만알고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내집에 놀러왔던 이들이 책장몇개에 책이 꽉 차있는것을 보고, 그속에 내가 쓴 책도 꽂혀있는 것을 보고서는 드디여 내가 글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우리 로인회의 70여명 회원들은 지난해겨울 내가 회장의 부탁에 의해 로인회회가의 가사를 쓰고 최의광선생이 곡을 지어 그것을 부르게되면서야 내가 작가라는 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연길법원계통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고  북경에 온, 악기를 잘다루는  구형서선생이 그 노래를 배워주면서 조글로에 오른 나의 글과 프로필을 보고는 공개를 해서 다가 내가 소설가인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문혁"때 부친의 “렬사증”과 함께 나의 “초중졸업증”마저 개같은 혁명자손에 빼앗겨 찟기우고말았다. 렬사증은 훗날 현민정에서 다시냈어도 졸업증은 다시내지도 못하는 형편이니 어디가서 내가 그만큼한 학력이라도 가졌다고 떳떳이 내놓고 말할수도 없는 신세다, 물론 쓸데는 없지만. 나는 내가 아는대로 글을 썻더니 "학자도 아닌 주제에 아는척한다"는 비웃음의 소리를 들은지 벌써다. 듣자니 지금은 돈을 써 원핑(文凭)을 밭는 일도있다는데 나는 엎디여 기는 신세가 됀대도 그러고는싶지 않았다.   국가와 사회가 내 노력을 승인하고 알아주고있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일이 없는가한다. 국가는 내가 자습인재라 하여 중히 봐주고있다. 아마도 이 일에 유관되는 일 한가지를  말해야겠다. 륙조의 고도 남경에 있는 "中山文學院"(영어이름:Zhongshan School of Arts)은 1999년초에 중국민주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의 손녀 손수방박사(孙穗芳博士)가 중화의 문화를 부흥시키고 사회문명을 촉진하며 문예창작을 번영시키자는 목적에서 성립한 것이다. 그 문학원은 해마다 기자와 문학인을 배양해내고있다. 학원에서는 내가 밑바탕이 초중졸업생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를 객원교수로 초빙했던 것이다. 놀랍고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한번 랭정히 나자신을 해부해보았던 것이다. 좌담회같은데는 얼마든 참가하고 조직도 할 수 있지만 나더러 교단에 올라 강의를 하라면 안된다. 우선 한어구술력이 모자라니 제로인 것이다. 하여 나는 학원측에서 보낸 "客座敎授登記表"를 받아놓기는 했어도 여지껏 답변을 하지 앟고있는거다. 주제넘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는 나다.   한데 수준이 나보다 별로높지도 않은 주제에 나를 제멋대로 경시하고 놀리는 것을 보면 좋지 않다. 썩 오래전에 알게된 한가지  일이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한국에 나가보지 못한 회원들을 한패한패씩 조직해서 견학을 보낸적이있는데 북방의 시인이자 연변작가협회의 리사였던 리삼월선생이 회의를 한다고 부르니 갓다는가, 그 회의에서 한국견학을 보낼 사람을 선정하길래 리삼월선생이 나 이 김송죽이를 보내는게 어떠냐고 제의를 했더니 당시 그를 주관했던 우아무개가 “화성이도 못가는데 뭐” 하더라는가. 그 소리를 리삼월선생이 돌아와 했다. 이전의 령도면 말을 그정도로는 하지 않았을 건데?..... 인맥이 없이는 일이 안된다는것을 알게 된 나는 그때부터 회비를 내지 않았거니와 아예 연변작가협회를 자퇴하고만 것이다.   中國作家協會創聯部에서 書記處의 결정이라면서 원회원증을 거두고 국제류형양식의 새 회원증으로 바꾸니 원회원증을 아무날까지 보내라는 것이였다. 나는 보낼 수 없었다. 회원이 아니여서 회원증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여러날지나 또 편지가 왔었다. 내가 작가협회에 가입했으면 필경 소개인이 있을텐데 나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내는 창작통신을 받아 보면서도 시종 회원수속은 밟지 않은거다. 중요치않다. 작가는 글을 쓰면 된다는 생각이였다.     내가 국가로부터 자습인재칭호를 받기에 이르기까지는 외려 여러 한족지성인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더 많았다. 나의 첫장편이 출판되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목사시방송국”의 오련상(吳蓮湘), “가목사신문사”기자 호회군(湖會軍)은 여러번이나 와서 채방하고는 나를 방송과 신문에 맨먼저소개했거니와 옹군한책의 편폭이 되는 장편방문기를 써 성작가협회의 “作家創作通信”에다 내기도 했다. 그리고 “三江晩報”기자 장지평(張志平)과 왕소선(王小蝉)은 지어 “乡野高人金松竹”라는 과분한 표제까지 달아 신문에 내여 나를 소개하기까지 한 것이다. 시작가협회와 문련에서는 "선진작가"칭호를 주면서 내앞가슴에 커다란 붉은꽃을 달아주었거니와 그것을 텔레비에 전집보도로 내기까지했던 것이다. 요란한 찬사에 얼굴이 뜨거울정도지만 아무튼 지극히 감사한 일이였다. 나는 그일로하여 해마다 시작가협회아니면 시문련에서 여는 회의아니면 성작가협회, 성문련에서 여는 좌담회거나 대표대회에 많이 참가하군했던 것이다. 지어는 현총공희의 추천과 성총공회의 심사와 추천을 거쳐 국가로부터 "우수자습인재"칭호를 받기에까지 이른것이다. 나는 내 노력이  헛되이되지 않았음에 자호감을 갖는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글을 많이 써도 빈축을 받아야하는가?   요즘 조글로에 보면 누군가는 네가 쓴 책을 누가 보기나 하느냐면서 나더러  호들갑을 피우지말라 훈계를 해가며 주제넘게 이래라저래라니 개가 달을 보고 짖는것 같아 과연꼴불견이다.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아파한다고 과연 속담그른데없나보다. 고리끼도 한때 “대학자님”들로부터 그러루한 비꼬움을 받은적이 있는 것이다. 인재명 호재피(人在名 虎在皮)라 그것을 귀감으로 삼앗다가 숱한 고애를 겪고 줄똥을 쌋지만 맘먹바를 이루고야말았으니 나는 유감이 없다. 아직 써야할 글이 많으니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그러니 읽어보고 관점이 다르면 어디 반론을 써 제 이름을 밝히면서 정정당당히 나오기를 바란다. 그어지를 않고 그냥 익명이나 바꿔가면서 나를 해치려들면 나는 그런 인간은 비렬한 졸부 암해군으로 치부할테다. 진정 사나이라면 정정당당하게 나오라. 나는 굴복을 모른다!  
279    에세이 일본의 후안무치한 짓거리 댓글:  조회:4003  추천:1  2013-10-20
  에세이  일본의 후안무치한 짓거리   일본은 1932년에 군심을 온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세상이 다 알고있는 “위안부”라는것을 만들어 “복무”를 제공한 것이다. 중국과 아세아의 기타 다른 여러나라들을 침략했던 일본은 1938年에 이르러서는 3개군에다 “위안부복무”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러자고 보니 위안부의 수자가 태부족이였던 것이다. 하여 일본은 얼리고 채가는 등의 방법으로 사처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통채로 일본에 삼키여 식민지로 되버렸길에 사냥물대상은 무고한 조선녀성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2차대전기간에 대략 8~20만이 끌려가 일본파시스의 성노리개가 되어 지옥살이나답지 않은 고통을 겪은것이다. 이는 엄연한 력사사실이다. 하건만 일본에서는 지금 아베를 대표하는 우익세들이 “전쟁때 매춘부들은 일본병사들로부터 고액의 돈을 받으면서 ‘복무’를 한것이다. 한국은 진상을 무시한다”고 했다. 진상을 무시하는게 과연 누군가?  일본인가 아니면 한국인가?     한국녀성가정부부장 조윤선은 근일 련합국 제3기위원회의때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제출했는데 그는 위안부는 인권을 엄중히 위반했다고 강조하면서 상관국가가 아직도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이같은 태도에 일본의 우익은 외려 불만스러워하고있다. 의 에스 zakzak인터넷의 10월 17일자 보도를 보면 한국대표가 련합국에서 한 발언은 “말도안되여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실로 똥뀐놈이 제사성내는 격이니 후안무치하기 짝이없는 일본이다! 조윤선은 일본에서 반인도적인 행위가 반복적으로 생기는데는 자기가 범한 착오를 허심히 반성할줄을 모르고 철저히 사죄할줄을 모르기때문이라면서 그 실례가 바로 위안부문제에 대한 처리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Zakzak인터넷은 되려 한국이 반성할줄을 모르는 나라라면서 일본을 비평할 자격조차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놓기를 지난 월남전쟁기간 한국군대가 월남녀성과 자서 아이를 낳고서는 제나라로 가버렸으리 어떻게 봐야하는가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대통령은 일본은 고의적으로 “한국군대의 명예를 모욕한다”고 통박했다.   내가 보건대도 일본은 과연 허심하지 못한 나라다. 어언간에 48년철이 흘러갔다. 나는 청년시절 마을에서 소학훈장노릇을 할 적에 일본군에 “위안부”라는것이 있었다는 알고는 그의 진상을 알아보려는데서 두 녀인을 찾아가 각기 만나본적이 있다. 그 두녀인이 위만때 끌려나가 위안부노릇을 했다는 것은 내가 남한테 들어서 알게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그들이 격은 고통이 과연 일구난설ㅡ 과연 말이 아니였다. 그 둘이 꼭같이 하는 말인즉은 “일본군대가 어디 사람인가 굶은 짐승이지”였다. 내가 그래 보수는 어느정도 받았느냐 물었더니 그들은 둘다 보수라니 웬소린가 하면서 먹는것만은 괜찮았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둘다 자기가 치룬 경난을 세상이 알면 망신이라면서 제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하여 나는 그러마고 응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두 녀인의 모색과 이름이 지금까지도 내기억에 또렷하다. 하지만 말할수는 없다, 내가 그들앞에서 죽을때까지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노라 대답했으니.              당시 위안부의 처경의  한장면    력사는 국가를 바로세우고 국민의 정신을 진작함에 있어서 지극히 필요한 거울이 되고 지침이 되는 것이다. 하기에 력사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그 어느나라나 다 마찬가지다. 후대를 옳바르게 이끌려면 더말없이 자국의 력사부터 제대로배워줘야 한다. 몇해전에 한일공통력사교재제작팀이 손잡고 를 만들었는데 그건 아주잘된일이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한국의 량심있는 교육자들은 우선 한일공통력사의 견고한 초석이 되기를 목적해 손잡고 일본의 현대사도 그것처럼 사실그대로 다시써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278    한 녀시인의 죽음으로부터 댓글:  조회:4446  추천:0  2013-10-19
  한 녀시인의 죽음으로부터   로시야의 녀시인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는 1892년에 태여나 1941년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50살도 채되지 않았다. 그러한 그를 기념해서 소연상(邵燕祥)은 그의 시들을 한데묵어 >이라 이름을 달아 광서사범대학출판사에 넘겨 세상을 보게한 것이다. 그런것을 가 또 이라는 주제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시번역자 소항(蘇杭)은 머리말을 써 메리마리 트세타예와가 외국에서 17년간이나 떠돌이를 하다가 1939년 6월 18일에 제 조국이라 그리워서 쏘련으로 되돌아오긴했지만 환경이 여의치않아 자살에 이른것이라면서 그 경위를 밝혀놓은것이다.   가족이 모두 한데모인지 겨우 두달되여 액운이 트세타예와의 머리에 떨어졌다. 8월 27일이였다. 그녀보다 두달먼저 고향에 돌아왔던 딸 아리아가 돌연스레 체포되였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보다 먼저온지 한달반도 안되였는데 병을 앓고있었던 그애의 남편마저도 잇따라체포되였다. 생각밖에 덮쳐드는 그같은 타격에 트세타예와는 고통스로운나머지 그만 절망하여 생의 의욕마저 잃고만 것이다. .....   트세타예와는 딸과 사위를 구해내려고 사처로 뛰여다녔고 한편으로는 또 당장굶어죽게 된 상황에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시가번역을 하여 겨우겨우 명을 잇구었던 것이다. 허나 그보다 더한건 지지리 참기어려운 고독이였다. 시를 쓰기는했지만 발표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번역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감이 떠오르면 그는 시를 썻다. 그래서 몇수는 세상을 본것이다. 그러한 상황이였다는건 소항(蘇杭)이 그의 시를 번역하다보니 발한견이 것이다. ..... 트세타예와는 조국으로 돌아온지 2년도안되는 사이 암담한 생활속에서 심리상 커다란 압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밚은 번역을 해놓았다. 소항(蘇杭)은 트세타예와가 자신이 번역한 시작자의 이름을 라렬해놓은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했다. “정신상에서나 체력상에서나 그렇게 무거운 압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낸것을 보면 과연놀랍다!” 이러면서 그는 이어서 녀시인의 조우(遭遇)에 대해 자신의 불평을 토로했다. 트세타예와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건 조국이라 돌아왔건만 일년이 되도록 몸을 둘데조차없은 그것이였다. 하여 그는 분한 것이다. 그는 작가협회책임자 파자예브를 찾아가 사정해봣지만 대답은 방 한평도 줄수 없다는 것이였다. 하여 트세타예브와는 아들과 함께 최하층의 나날을 지겹게 보내야했던 것이다. 그는 어느 한 편지에다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는 내 감정을 떨어버릴 권리가 없다. 우리는 모스크바에다 다 바쳤건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고있다  쫏아내고있다.(전에는 루맨챠푸거리 박물관에 우리집이 세채나 있었다. 할아버지의 것, 어머니의 것, 그리고 아버지의 것들)..... 전쟁이 일어났다. 모두 국난에 빠졌을 때 유독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만은 작가협회의 버림을 받았다. 이로하여 그의 명줄은 끊어진거나답잖게 되고만 것이다. 1941년8월8일, 그는 16살난 아들 무어를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8월18일에 딸따르로 갔다. 그러니 가족성원들은 저마끔 다 흩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뒤에 잇따른것은 일자리 하나 얻기어려운 고생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외국의 시를 번역하는 것 뿐이였다. 한데 그것도 아무런 쓸모없게되였다. 잡지사들마다 독자가 없다면서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하여 그는 8월26일에 모스크바작가협회의 소재지였던 제스토보에 가 자기를 여기로 이사시키고 작가협회기금회에서 꾸리고있는 식당에서 그릇씻는 일이라도 하게해달라고 사정해보았다. 하건만 작가협회는 그의 그 최저의 요구마저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그는 되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그의 정신은 그만 완전히 붕괴되고만 것이다......그녀는 절망 끝에 아들을 다른사람께 맏기고는 8월31일 집주인과 자기는 일요일에 외출할것이라하고는 자살하고만 것이다.   “나는전에 쏘련의 걸출한 소설가 플라토노프가 쏘베트전선의 현실생활을  반영하였다가 비판받고는 우울해져서 작가협회의 울안을 쓰는 청소공의 신세로 돼버린것을 보았다. 그는 얼마지나지 않아 처결되였다. 쏘려정부와 그가 관리하는 어용적인 작가협회는 정말 이같이 재질이 있는 문화인들을 못쓰게 만들거니와 모욕하다가 학살하고있다. 걸출한 시인 Tsvetaeva가 죽음을 당한것도 마찬가지다. 허다한 작가, 시인들이 ‘문자옥’에 살아나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왜서 이런가? 과연 혹독한 제도다!”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가 남긴 유서였다. 번역자 소항(蘇杭)은 같은 녀자로서 “문자옥”을 당한 가련한 불우의 녀시인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를 동정해 안식을 비는데서 이 글을 썻노라했다.                      
277    우숩고도 잔인한 시합 댓글:  조회:3053  추천:1  2013-10-19
  우숩고도 잔인한 시합     요즘 기와가마마스러나갓던  한패의 유자들이 돌아왔다. 그래서 백두옹 량태의 지휘하에 산채의 후근에서는 소 한마니와 돼지 두 마리를 잡았다. 환락에 잠긴 산채는 또다시 명절기분에 휩싸였다. 류자들이 자작한 노래가 온 산채에 높이울려퍼졌다.               류자되면 즐거웁네             말타고 가마 마스면               술도 계집도 생기네             선인악인 따로 있냐             희비애환 마찬가질세             말 가는데 소도 가듯             인생길은 다 한가질세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술상이 벌어졌다. 술이 좀 얼근해지자 벌서부터 여기저기서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권주령(勸酒令)을 불러댔다. 대방을 곤죽이 되게 만드는 것이 승리였고 즐거움이였다. 민호가 있는 동남쪽 산채도 못지않게 떠들썩했다. 류자노릇을 제대로하려면 첫째 배짱이 두둑해야하고 둘째 형제간에 좀스럽지 말아야 하고 셋째 마음이 독해야 하고 넷째 색에 미치지 말아야 하며 다섯째는 술을 마실줄 알아야 한다. 민호는 아직 마음이 독하지 못할뿐 그 외의 네가지 조건은 기본상 합격한셈이였다. 온 산채가 악마구리 끓듯했다. 민호가 자기는 음주왕이라고 허풍치는 왕견과 마주앉았다. 민호가 왕견과 한창 술 먹이기내기를 하고있는데 황보재가 느닷없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상판이 지지벌개진걸 보니 술이 웬간히 잘된꼴이였다. 그의 손가락에는 금가락지 하나가 더 끼여있었다. 바다는 메울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못메운다고 속담그른데 없다. 보재(寶財)는 이름 하나만 봐도 남과는 각별한데가 있었다. 적빈여세(赤貧如洗)할 사람은 아니였다. 어려서부터 부모한테서 장차 크거들랑 꼭 부자가 되라는 교육만을 받아온 보재로서는 욕심을 부릴만도 했다. 그러한 그가 이번출전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부호가택을 들이치고 수색했자만 손에 넣을만한것이 없어서 바로 자기가 나서서 직접 손을 폈다는 자랑했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집안을 수색해도 근사한 재물이 나타나지 않으니 주인의 애첩을 붙잡아 발가벗겨놓고서는 칼을 음도에 대고 찌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렇게 위협술을 써 애첩이 말해서야 그들은 집 뒤울안에 깊숙이 감춰둔 보물들을 찾아낼수 있었다. 황보재가 이번에 염왕산의 악사(惡事)를 또하나 만들어낸 것이다. 황보재의 독기어린 눈길과 마주치자 민호는 속이 섬찍해났다. 민호는 직감적으로 황보재가 자기를 걸고들려구 왔다는 것을 감지했다. 뒤에서 진사해놈이 추긴것이 틀림없었다. 황보재가 자기곁으로 다가오는 리유를 눈치채지 못할 민호가 아니였다. 민호는 보재가 아무리 트집을 부려도 꾹 참으리라 마음먹었다. “여보게 고려가람, 나두 한축 끼는게 어때?” 황보재는 처음부터 악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웃음까지 게바르면서 제법 소탈한양 먼저 말까지 걸어왔다. “난 자넬 ‘꼬리방즈’라구 한적이 없네. 그러니까 나까지 밉게 볼 필요야 없잖아. 그리구 사실 우린 다 한형제간이나 다름없는데 서로 의기상투해야지 안그래? 우리 같이 한번 놀아보자구. 오늘은 류달리 즐거운 날이니까. 다른뜻은 없네. 오늘 나하구 한번 통쾌하게 몽두춘을 해보자는것뿐이야.” 웃는 낯에 침을 뱉을수는 없었다. 민호는 그를 쫓아버릴수 없었다. “이보게! 민호동생, 이젠 몽두춘을 그만하지. 반강자만 해두 두사발도 더마신것 같은데..... 그리구 이사람, 보재! 자네두 그만마시는게 좋잖을가. 더 마시겠거든 다른 사람과 마시게나. 민호동생은 이미 너무 많이 마셨어.” 보재가 찾아온 뜻이 심상찮음을 눈치챘는지 왕견이 좋은 말로 권고했다. 보재는 왕견의 권고를 개방구로 여겼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순순히 돌아갈 보재가 아니였다. 그는 민호의 손을 꽉 잡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이깟 몽두춘을 더 마신다구 아산이 깨여지나 평택이 무너지나 백산이 무너지나 동해가 메여지나! 젠장 어디 한번 기껏 마셔보자구!” 취중무천자(醉中無天子)라 술기운에 담이 커질대로 커진 민호는 왕견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보재를 앉혔다. 황보재가 앉자마자 둘사이에 겨룸이 곧 시작됐다.   “당조일품경(当朝一品卿)” “량퇴대화료(兩腿大花蓼)” “삼성고조사계도오경(三星高照四季到五更)” “륙합륙동춘(六合六同春)” “칠교팔마구안도화료(七巧八馬眼盜花蓼) “십전복록증(十全福綠增)” “타개창호선(打開瘡戶扇)” “명월조당공(明月照當空)”   그들이 주고받는 주령소리가 점점 높아가자 구경군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기전에 이미 진사해의 고자질에 화가 날대로 난 보재였다. 민호가 자기의 색시감마저 넘보다니. 이자식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구나 하고 보재는 속으로 민호를 저주했다. 보재는 원래 술재간이 있고 벗바리가 좋은지라 술을 마실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둘은 몸을 솟구쳐 찍어박듯이 하면서 게목을 질러대는데 짜장 투계장에서 수탉이 결사전을 벌려놓고 피투성이로 싸우는 꼴을 련상시켰다. 겨룸은 갈수록 치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밖에 민호보다 보재가 지는 차수가 늘어나고있었다. 장난군 몇이 애워싸고 그를 부레끓게 만들었다. 보재는 점점 자제력을 읽기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벌주를 더 많이 마신 그가 먼저 고끄라지고말았다. 보재는 나중에 고주망태가 되어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들려갔다. 보재가 들려가기 바쁘게 민호도 제자리에 폴싹 꼬끄라지고말았다. 민호에게 진것이 분했던지 황보재는 이틑날 저녁켠에 술이 깨자바람으로 다시찾아왔다. 민호는 그때까지 술기운이 가셔지지 않아 정신이 흐릿한 상태였다. 그렇게 정신을 추지 못하는 민호앞에서 보재가 악의에 찬 목소리로 다시한번 도전했다. “우리 내기를 한번 더하자!!” 민호는 자기앞에 다시나타나 집적거리는 보재를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시합을말인가?” “그래. 시합을 또 하잔말이다. 이번에는 좀 무사답게.” “어떤 시합을?” “뽐창던지기를 해보자.” “뽐던지기를?” “드래. 듣자니 너두 그걸 잘 한다지? 어때? 거리는 십보. 모두 다섯개를 뿌리되 작대기처럼 한일자로 쭉 내긋잔말이야, 어때?” “정말 그렇게 하자는말이지?” “그래. 누구든 다 그렇게만 하면 피장파장이 되니 비긴 것으로 치구 내기를 그만두자구 어때?” “정말 그렇게 하자는 말이지?” “그렇다 시합을 해서 내가 지게되면 네가 내 귀를 하나 베여버려라. 날 병신으루 만들란말이다. 어때?” ‘내가 널 병신으루 만들라 그말이지?“ “그래 병신으루 만들란말이야. 그리구....” ‘그리구 내가 지면?“ “간단하지. 내가 너의 자지끝을 베버리겠어. 길게두 말구 말랑말랑한 끝머리만 살짝. 자지는 남의눈에 뜨이질 않으이 베버려도 괜찮지 않은가! 어때? 시합은 다음달 이날에 하는 것으로 정하는게 어때?” 보재의 말은 장난의 소리가 아니였다. 악의와 야심이 꽉 찬 그놈의 속창을 민호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랑아야심이 끝내 드러나고야만것이다. 자기가 그처럼 부러워하고 증오해오는 그것을 페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써 울분을 풀어보자는 황보재였다.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쁘드득 이를 갈았다. 그에게 있어서 뽐창은 결코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전에 의렬단에 있을 때 테러를 목적으로 권총사격과 비수다루기를 련습하고 뽐창뿌리기도 부지런해서 일정한 기교는 장악하고있는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뽐창뿌리기련습을 해보았다고 해도 서로 목숨을 내걸만큼 숙련된 솜쌰는 아닌게 뻔했다. 제길할 뽐창뿌릴줄을 안다고 큰소리칠건 뭐람?! 어쩐다? 나의 뽐창재간이 저자만 못한게 뻔한데.... 그렇다고 나 스스로 주눅이 들어 기권할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 겨뤄도 못보고 손부터 들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것은 죽는것만큼이나 자존심이 꺾이는 일이였다. “할테면 한번 해보자!”     “좋다!” 황보재는 벌씬 웃으면서 민호의 어깨를 툭 쳤다. “아니, 너 미치지 않았니!” “그자하구 뽐창시합을 하다니 원!” 왕견과 하진국이 보재가 가버리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펄펄 뛰였다. “할수 없지. 그자식의 보복이 무서워 물러설수야 없잖아.” 민호는 두친구에게 이일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한달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호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였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련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마침 반에 뽐창을 가지고있는 새자가 있어서 민호는 그들로부터 즉시 5개를 빌리수 있었다. 그는 빌린 뽐창을 가지고 언젠가 포두한테 사격검사를 받던 사격장으로 갔다. 거기에 오그라진 양푼을 걸어놓았던 나무를 과년으로 삼고 그는 부지런히 련습하기 시작했다. 뽐창던지기시합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목숨을 내건것이나 다름이 격투였다. 민호는 뽐창련습을 하느라 침식마저 잃어가고있었다. 밤에도 강심을 먹고 달려들어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를 향해 걸탐스레 뽐창을 뿌렸다. 보복의 칼날이 자신의 남근을 베여갈때까지 앉아서 기다릴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두 친구가 민호를 도와나섰다. 그러나 뽐창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도 민호보다 별로 뛰여나지 않아 련습은 지지부진이였다. 긴장은 민호의 신경을 오리오리 일으켜제웠다. 보재에 대한 공포심이 그의 등골을 싸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조급증은 민호의 간장을 바질바질 타들게했다. 바로 이런때에 향란이가 문득 나타났다. 그녀는 민호가 여러날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온것이다. “어머! 요즘 왜 안보이는가 했더니 여기서 뽐창련습을 하고있었네요!” 향란이는 창뿌리기에 여념이 없는 민호를 보고 몹시 놀라는 기색이였다. 정신이 뽐창에만 쏠린 민호는 향란이가 가까이 다가온것도 모르고있었다. 향란이가 화나서 목청을 돋구어 야멸차게 내뱉았다. “여봐요, 그놈의 뽐창에 정붙었나요?” “오ㅡ 아가씨구만! 여기로는 왜?” “내가 언제 온줄도 모르다니. 정말 열심하네요.” “하하하....” “웃으면 단가요. 날 좀 동무해줘요. 같이 서산골에 한번 가보자요.” “아가씨, 미안합니다. 나 지금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뭐라구요? 벌써 그렇게 식어버렸나요?” 향란이는 눈살이 곧게 일어섯다. 마침 이때 하진국이와 왕견이 와있었다. 그들은 향란이가 약이 올라 펄쩍뛰는 모양을 보고 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민호가 한달 뒤면 보재와 뽐창시합을 하게 된 사연을 알려주었다. 향란이는 그들의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보재를 저주했다. “비렬한자식!” 민호의 말 못할 사정을 알게되자 향란이는 자기가 뽐창뿌리는것을 도와주겠노라며 나섯다. 향란이는 쌍수도(双手刀)와 쇠채찍(鐵鞭)을 다루는외에 무림세가(武林世家)의 딸이였던 어머니한테서 전수받은 특기 하나를 더 갖고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뽐창다루는것이였다. 보재의 뽐창재간도 바로 그녀가 배워준것이다. 그런데 오늘 보재가 자기가 배워준 재간으로 이따위 앙갚음을 하다니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만 했다. 어느덧 민호와 보재간의 무서운 한판겨룸의 날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용히 비밀리에 하자던 겨룸이 보재가 들어있는 산채로부터 소문이 새여나오는바람에 위두령과 사량팔주를 제외한 염왕산의 류자 모두가 다 알게 되었다. 장소는 남산기슭이였다. 량쪽 다 감적관이 나왔는데 저쪽은 서은괴가 맡고 이쪽은 왕견이 맡았다. 그들외에도 수백쌍의 눈길이 감적(監的)하고있었다. 그들은 승패를 겨루는 당사자들의 감정도착(感情倒錯)을 저마끔 떠보면서 얼굴에 각양각색의 표정을 띠였다. 짝자꿍이가 벌어졌다. 속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 된 어떤 새자들은 누구의 귀가 떨어지고 누구의 자지가 떨어지나 잘 보자면서 왁작 고우기까지 했다. 신심이 고무풍선같이 부풀어오른 보재의 얼굴에서 적수를 얕잡아보고 멸시하는 거만스러운 빛이 력력히 내비쳤다. 흥분과 소란이 한데 엉겨붙고있는 피의 대결장이였다! 누가 먼저 뿌리고 누가 후에 뿌려야하는가? 둘은 선후를 정하기 위해 먼저 제비뽑기부터 했다. 결과 민호가 먼저 뿌리게됏다. 민호는 긴장 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이미 시합에 나섯으니 뒤로 물러설 자리마저 없었다. 민호는 마음을 도슬려먹으면서 주먹을 불끈쥐였다. “자, 시작해보지!” 적수의 감적관 서은괴가 소리쳤다. 그들은 벌써 면밀히 서로 짜고들어 민호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민호는 숨을 크게 들이그어 마음을 진정시킨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수백쌍의 눈길이 하나같이 민호의 한몸에 집중되고있었다. 민호는 침착하게 제가 서야 할 자리에 나섰다. 그리고는 뽐창 5개를 꺼내 손에 거머쥐였다. 이때 향란이가 여유작작하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여보이며 민호에게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민호를 바라보는 향란의 눈에는 “당신은 해낼수 있어요!” 하는 말이 담겨있었다. 민호는 잠간 목표를 노려보고있다가 순발적인 “앗!” 소리와 함께 과녁을 향해 힘껏 뿌렸다. 그의 손바닥을 벗어난 뽐창들은 날파람소리를 쌩ㅡ 내면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더니 일직선으로 나무에 쭉 내리박혔다. 뽐창과 뽐창사이의 간격도 하나같이 일정했다. “야!ㅡ” 류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다음은 보재차례였다. 그도 민호처럼 과녁을 한동안 겨누다가 “앗!” 소리를 내지르며 뽐창을 힘껏 뿌렸다. 그런데 그가 뿌린 뽐창 5개중 마지막 하나는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무에다 흔적만 약간 남기고는 아래로 잘랑 떨어지고말았다. “와!ㅡ” 맹랑과 기쁨이 반죽된 탄성에 새들이 놀라 날아났다. 거만하던 보재의 얼굴이 단통 흙빛이되고말았다.      ............................................................................................................................................. 2008년에 민족출판사에의하여 펴낸 나의 세 번째장편  제1부 12절의 한 대목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정민호는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라도 함)’ 때 흑룡강에 뛰여들어 다른 한 군인과 함께 생사를 헤매다가, 4일만에 한 허저인 어부의 손에 의하여 구원, 그곳에서 허저인 세습향장의 딸과 결혼, 임신한 몸으로 원쑤에게 랍치된 안해를 찾으러 떠났다가 그만 북만의 유명한 염왕산토비ㅡ위삼포손에..... 전기적색채를 띈 소설은 스토리가 매우 굴곡적이다. 허저인의 풍속과 토비들의 생활은 허구가 아닌 사실그대로다. 작품에 나오는 할빈, 가목사, 의란, 밀산, 당벽진, 가진구 등 북만지구의 지명들도 모두 그대로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세계를 독자들은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한국 ASIA출판사에서 곧 재판하고있다. 여기 조글로에 올린 나의 네 번째 장편이 되는 3부작 대하력사소설 은 출판을 기다리는 중.  
276    에세이 죽음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 댓글:  조회:5027  추천:3  2013-10-17
     에세이 죽음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     1951년 1월 21일, 모택동은 상해시위에 보내는 전보에서 지시하기를 “상해같은 이런 크 도시에서는 금년내에 아마 2,000명은 처결해야 문제가 해결될것같다. 춘기에 300~500을 죽여 적의 기염을 꺾어놓고 민기(民氣)를 높혀야 한다. 3월 18일, 모택동이 천진에서의 반혁명진압에 관한 보충비준을 보면 ”반드시 참답게 연구하고 주밀하게 포치하여 몇번 많이죽여야 문제가 초보적으로 해결될것 같다 ....금년내에 1,500명을 죽여야하는데(이미죽인것 150명)  4월말전에 먼저 500명을 죽여 계획을 완수한다면 우리는 곧 주동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큰도시와 중등도시들에서도 따라서 모두 반혁명분자를 몇차례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이라고 “요구”했던것이다.    3월24일,모택동은 요수석(饶漱石)에게 전보로 “상해와같이 이렇게 큰 대도시에서는 몇 번 많이 붙잡고 많이 죽여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4월13에 남경시위에다 반혁명진압에 관해 비준한 것을 보면 “지난때 거기서는 손이 너무나작아 살인을 크게 과시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철저히 전변해서 아주좋다. 성적이 커 앞자리에 섯다.”고 칭찬했다. 모택동은 살인을 “과시”하지 않으면 “손이 작다”고 엄하게 비평하면서 여러번이나 손이 크게 많이죽여야한다고 독촉했던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그 후과가 어떠리라는건 모택동도 아는지라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일때는 잘못붙잡고 잘못죽이는 현상이 없게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3월30일,모택동은 산동분국에다 보내는 반혁명진압지시에 “반혁명을 일찌기죽이건 늦게죽이건 큰관계없다..... 하지만 무모하게 잘못죽인다면 영양이 매우좋지 않은것이다.”고 했다. 이런말을 후에 기등규(纪登奎)와도 하면서 “죽이지 않아도될건 되도록 죽이지 말아야한다”고 했던것이다. 자료출처   그러나 건국초 토지개혁때나 반혁명진압때를 보면 붙잡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붙잡아 잘못죽인것이 적지 않다. 례를 들면 문화명인 김용(金庸)의 아버지   사량용(査良鏞)의 부친 사추경(查枢卿), 량우생(본명은 陈文统)의 부친 진신옥(陈信玉), 주자청(朱自清)의 아들 주매선(朱迈先)같은이들은 인민을 위해 좋은일을 했다. 혁명에 자금을 조달하고 공산당간부를 엄호했던것이다. 그들중에서 주매선(朱迈先)은 고중을 다니던 1936년도에 비밀리에 공산당에 들었거니와 당을 위해 적잖은 일을 한것이다. 그럼에도 1951년 토개와 반혁명진압운동때 “불법지주”, “반혁명죄”를 날조하여 처결한 것이다.       김용(金庸),  량우생, 주자청(朱自清)은 다가 지명인사다. 모택동은 주자청(朱自清)을 높이평가했고 김용(金庸)과 량우생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등소평, 료승지 등 국가령도들이 청하여 접견을 받은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잘못된 그 억울한 안건에 대해서는 30여년이나 질질끌다가 사인방(四人幇)이 꺽꾸러져 80년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평판을 한 것이다. 백성들이 그래 사람을 그같이 되는대로 붙잡고 죽이면 억울하다는것을 모르는줄알았던가?   세상에서 제일귀한것이 사람이고 제일귀한 생면도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인생은 한번밖에 없다. 한데도 자기가 권리를 잡앗다해서 운동이라는 이름을 빌어 사람을 함부로 마구죽인다면 그것은 죄악으로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문제를 놓고 모택동은 벌써 섬북에 있을때부터 깊은조사연구도 없이 마구죽이면안된다면서 무고한 생명을 빼앗으면 그건 죄악이라했다. 그러면서 해결방안을 내오기도했던 것이다.     새정권을 세운 후에도 그는 여전히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이였는데 역시 마구붙잡고 마구죽이지 말아야한다는 따위의 말을했다. 그러면서 잘못죽이면 영향이 아주나쁘다고도 말했다. 허나 속은 달랐던 것이다. 하기에 그의 물음에 기등규(纪登奎)가 자기는 사람을 잘못죽였다했건만 그는 왜서 사람을 잘못죽였는가고 캐묻지 않았거니와 잘못죽인 사람에 대한 사후처리에 대해서도 한번도묻지 않았던것이다. 모택동이 그같이 따져묻지 않으니 기등규(纪登奎)도 역시 잘못죽인 사람에 대한 평판문제같은건 아예 생각조차하지 않았거니와 누가 물으면 그저 건성으로 “긴급한상황에서 사람을 죽인거야. 조사할새나있어야지.”했던 것이다. 그가 한마디 더할수 있는 댓변이였다면 “그랬어, 내사 사업을 잘하지 못했지.”였다. 그같은 태도는 제손에 죽은 자의 원한이 어떤지를 근본모르거니와 추호의 죄책감마저도 느끼지 않는, 인성을 떠난 랭혹이였다!                 우리 중국에서는 력차의 운동에서 억울하게 목숨잃은 원혼(冤魂)을 어느때야 제대로 다 안위(安慰)하고 달랠지?  생각하면 오로지 슬퍼지는 마음뿐이다. 날조된 죄명으로 직접 박해를 받은 사람, 다시말해 억울하게당한 사람의 고통이 진정 어떤지는 그 본인을 내놓고 다른사람은 잘 모른다. 나역시 칠성판에 올랐다내린 사람이여서 그 맛을 안다. 죽지 않은게 천만다행인가한다. 모택동이 섬북에 있을 때 처럼 문화혁명때도 그냥 “사람의 머리는 염지처럼 베여도 다시자라는게 아니다”고 가르쳤더라면 해방후 수차의 정치운동에서부터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그같이 수백만에 이르는 원혼(冤魂)이 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택동은 수정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 “문화혁명”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게 뭔가? “문화혁명”이 그래 백성에게 복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모주석을 의연히 신처럼믿고있다만 그를 어찌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하겠는가? 문제는 아무런 리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혁명은 해서는 뭘하냐 그거다. 그는 수정주를 막는다고했다. 그래 그것을 막아서는 뭘하는가? 좋은게 대체 뭐였는가?  모택동 그는 흐루쇼브를 때려죽일 놈 수정주의두목이라 미워하면서 중국의 백성은 모두가 자기를 따라 그를 철천지원쑤로 여기고 죽도록 미워하라고 이끌었다. 그래 그러지를 않았던가? 헌데어떤가? 오늘에 와 따져보면 쓰딸린의 독재를 폭로하고 비판한 흐루쇼브의 비밀보고는 절대 망언이 아니였다. 한데도 우리가 그를 수정주의자요 뭐요하면서 지어는 붉은 공산진영의 죄인으로 몰아버린것은 대단히 잘못된일이였다. 그것이 그래 어디 실제와 부합되는일이였던가? 쏘련공산당에서 바로 쓰딸린의 착오를 규정하려고 애쓰는 때에 우리는 그들을 방해한 것이다. 한편 중국은 되려 쓰딸린을 전반긍정하다보니 전에는 형제였던것이 등을 지고 갈라지고말았으며 두나라당간에는 론전을 크게 하게되였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됐는가? 중쏘지간의 대론전이 결국은 모택동이 쓰딸린의 독재기풍을 담습하게하여 마침내는 세계사에 전대미문의 대재난ㅡ문화대혁명을 끌어냈으니 중국으로놓고보면 그이상 더 큰 불행이 어디있는가?..... 없다! 침통한 교훈이다.   모택동이 발동한 문화혁명은 사람을 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때리는 것으로 끝나고말았다. 흐루쇼브는 모택동을 수탉처럼 싸우기를 좋아한다고 웃었는데 그 조롱하는 비유가 과연들어맞는다. 왕명(王明)이 좋은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나는 잘 모르는데 그도 모택동을 호투뻔즈(好鬪分子) 라 했다. 그는 그러면서 모택동을 “당대진시황”라 했다. 과연 내생각과 같은 말이였다. 모택동은 언젠가 스스로 제 호매로운 기개를 뽑낸바있다.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니 기쁘기 한량없다” 바로 싸우기를 좋와하는 그의 심태를 적라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진시황이 다 뭔가, 왔다가 울고갈지경이였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은 유사들이 옛것으로 오늘의 것을 반대하며 사학(私學)을 통하여 조정을 비방하니 금지시켜야한다는 승상 리사의 말을 듣고는 외의 다른나라의 력사책과 민간에서 사사로이 류행되고있는 , 등 책들은 전부몰수하여 소각하고 460여명의 방사와 유생을 생매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대체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였지 모택동이 지식분자를 죽인 수자는 그의 몇백배도 더되는 것이다. 국가간부로부터 일자반급도 없는 보통백성에 이르기까지..억울하게 목숨잃은것이 몇천만이니 지천이 놀랄일이 아니고뭔가?!   그는 공산국제의 령수로 돼볼려고 꿈꿧다. 주제넘게 남의나라일까지 간섭할건 뭔가? 제가 대체뭔데?..... 등소평이 생전에 중국은 이제부터는 “혁명”을 수출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모택동이 혁명을 수출해서 잘된게 뭔가? 캄보쟈에서에 일어선 “폴포트기념관”을 거기사람들은 “모택동죄행관”이라고도 한다. 왜서그렇게 되는가는 이제 다음글에서 차츰 밝히겠다.     우리는 한때 흐르쇼브를 히질기게 욕했다. 그런데 이제와 알고보니 그한테 죄없다. 우리는 어리석게 남을 타매했던 것이다. 왜서? 그것은 그가 내가봐도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와서 보면 그는 개혁파였다는 것이 알린다. 그는 서방의 자본주의국가에 비해 뒤떨어지는 쏘련의 경제를 일떠세우려고 개혁을 설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응당 흐루쇼브를 붉은공산진영의 개혁선줄군으로 봐야 옳았을 것이였다. 그때 중국의 9평은 쏘공의 “3화와 2전” 즉  “화평공처, 화평경쟁, 화평과도. 전민의 국가, 전민의 당”을 나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게 뭐가 잘못되였단말인가? 다른게아니다. 모택동은 국제공산운동의 령도권을 제손에넣으려고 극좌의 면모로 출현하여 쏘련공산당을 비판했던 것이다. 남을 그같이 비판하고 반대하다보니 결과 중국은 스스로 대재난으로 점철된 문화혁명의 길을 걷는 운명이 된게 아니였던가!?  과연슬픈일이다!       문화혁명은 너무나도 많은 비극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발광이 좀만적었어도, 인간의 존엄을 조금만 존중했어도, 인간의 생명이 아까움을 좀만알았어도 “황제의 발끝”에 있는 북경의 대흥현(大兴县)이나 호남도현(湖南道县)모양으로 그어떤 법적인 절차도 없이 많은 “오류분자”의 자손ㅡ이제 젓을 빠는 유아에 이르기까지 제맘대로 칼로 목을 자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노끈으로 목죄여죽이고, 생매장을 하는 야만적인 살인극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리성이 좀만있어도 젓먹는 애까지 두동강내는 참극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 중국에서도 그 재난의 기록이 될 “문화혁명기념관”이 일떠서고야 말 것이다. 움직임이 보인다. 그때면 그것이 또 누구의 무슨관이 되겠는가?........  모택동을 3ㅡ7로 보라는데 그건 공산당의 저울이다. 력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지 그 어느 당이 쓰는게 아니다.      
275    에세이 뼈에 사무치는원한의 구호 댓글:  조회:5742  추천:5  2013-10-12
   에세이 뼈에 사무치는원한의 구호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이것은 “문화혁명”초기 홍위병들이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면 몰밀어 자산계급분자라 여기여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그들을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꺽꾸러뜨려야한다고 주장하다보니 부르짖게되였던, 가장 반인륜적이고도 지독한 구호였던 것이다. 그당시 “홍위병”들은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라면 “사류분자”, “오류분자”나 별반다름없다고 여겨 몰풍스레 증오하고 적대시했는데 그들이그러는원인을 보면 다른게 아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발동하기 전에 진작 중국의 지식분자는 후대들에게 존경이 아니라 경시를 받겠끔 인도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11여년 전이였던 1957년에 모택동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지식분자가 대략 5백만되는데 그 중에서 2백만가량의 지식분자는 자산계급학교를 나왔으니 다가 자산계급지식분자인 것이다 라면서 우리는 그들을 단결, 개조, 리용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은 틀리지 않는 말이요 명랑한 태도라 말할 수 있다! 한데 그가 리치에 맞는 말은 그렇게 듣기좋게 해놓고나서 취한 행동을 보면 판판달랐던 것이다. 그가 요긴하고도 고귀한 의견을 들어보겠다해놓고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반우파”운동은 확대화되여도 형편없이 확대화되여 결국은 전국 5백만에달하는 지식분자의 가슴을 전부 얼음장같이 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응당 적진에나 던져야 할 살상력이 강한 수류탄을 자기의 진영에다, 말하자면 인민내부ㅡ자기를 믿고 따르는 순진한 사람에게다다 던졌던 것이다. 그랬으니 그게 잘된것이였던가? 꼴이 어떻게 되였는가? 그는 시종 그번의 “반우파투쟁”은 응당하고 잘된걸로 여겼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대로 지식분자들을 반항못하는 순복공구로 만들어놓앗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은 실제상 지식분자들에게서 언영 신용을 잃어버렸거니와 저주를 받는다는것은 죽을때까지 철저히 깨닫지는 못한것  같다.   그 무슨 고린내나는 첫째요 둘째요... 몇째요 했다. 보아하니 아마 “문화혁명”이 다 끝나서야 지식분자에 대한 그따위 반갑잖은 멸칭(蔑稱)이 없어진것 같다. 나는 당시 소학교선생이였다. 그런데도 “고린내나는 하홉째”라는지 “고린내나는 스믈한번째”라는지 듣기가 과연 역겹고도 저주로운 그놈의 별명을 하사받은 신세였던 것이다. 마치도 히틀러가 2차대전때 유태인의 앞가슴에다 허연표식을 달게했던것 처럼 그가 우리들한테 딱지를 붙여주니 기분이 대단히 잡치는 일이였다. 대체 왜서 그랬는가? 모택동을 보면 그 본인역시 지식분자였는데 그가 지식분자를 그토록 경멸하고 멸시한게 과연 리해되지 않았다. 왜서 자기를 믿고 애대하고 따르면서 성의를 다하는 지식인에게마저 굳이 그따위 듣기싫은 이름은 달아놓고 “사상개조”를 시켰지? 도대체 왜서 선생들을 제가 배워주는 학생들에게마저 존경보다 멸시를 더 받게했는지 그게 지금까지도 전혀 풀리지 않는 일이다.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문화혁명”이 오자 “홍위병”들은 증오가 하늘을 꿰찌를지경인 그따위 사나운 구호를 웨쳐대면서 우선먼저 자기에게 글을 배워주었던 선생부터 잡아내여 투쟁하는것으로서 동란의 서막을 열었다. 그때의 표현구로는 “계급투쟁뚜껑”을 열어제낀 것이다. 때는 바로 “문화혁명”초기ㅡ 모택동이 천안문에 올라 붉은완장을 낀 팔을 쳐들어 저으면서 련거퍼 10여차나 전국각지에서 북경에 쓸어들어드는, 자기의 용모를 한번만이라도 보자는 따촨랜대오를 접견함으로 하여 혁명기세가 충천할지경 들끓어번지기 시작했던 1966년 8월이였다. 관방의 통계자료를 보면 그 한달에만도 북경에서 중학생들이 자기를 배워준 선생을 끌어내다 투쟁하고는 무자비하게 때려죽인것이 1,772명에 이르는 것이다. 피비린내풍기는 살기찬 그 바람은 쉬사리 전국에 파급되였던 것이다. 위만시대에 태여난 내가 소시적 8.15해방을 맞앗던 북방의 도시ㅡ 송화강을 끼고있는 쟈므스(佳木斯)에서도 그러했다. 의과대학(?) 홍위병들은 두패싸움을 하면서 선생하나를 서로빼앗아다 투쟁하는 놀음을 했는데 나중에는 홍무니에 칼을 박아 그의 목숨을 앗아낸 것이다. 죽일때 발가벗긴 그대로였는데 당시 나도 그 정경을 “참관”하러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소름이 내돋는 끔찍한 참경이였다. 위대한 분이 손수 일으키고 지휘한 중국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ㅡ 그것은 형상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참혹한 대내란이였지 진정 다른 그 무슨 거룩한 행동은 절대아니였다. 홍색공포에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해버린 그런세월에다다 어찌 “혁명”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랴. 그것은 그야말로 비극을 자초하고 혼란을 자초한 세상웃기는 짓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혁명이 아니라 아이들의 작난이였다고 평가하고있다.  중국은 그 놀음을 며칠몇달을 하고 제꺽거둔것이 아니다. 장장 10여년간의 세월을 고통스런 광란에 모대기친 것이다. 잘된게 뭔가? 일호반점도 없다. 하마터면 나라가 없어질번한 끔찍스런 대재난이였을 뿐이다. 이래도 옛구성(救星)이 그리워 "동망홍"을 지금도 넋두리하듯 흥얼거리는 사람을 보면 다시보게된다. 어쩌면 그리도 무지할가?!    김학철선생이 말을 잘했다. 제가 힘들여 애써구축한 사회를 제손으로 훼멸하는 바보독재자는 중국의 모택동을 내놓고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택동이 혁명은 성공했어도 건설은 착오가 있고 문화혁명은 죄를 지엇다고 한거고 그런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보지 않는다고 한거다.   문화혁명과 같은 그런 대비극이 왜서 우리 중국에서, 모택동의 몸에서 발생했가는 앞으로계속 더  깊이 연구해야 할 바라고 본다.   문화혁명에 온 나라가 대체 무슨꼴이 되었는지를 한번디시 돌아보자.  억만인민이 다같이 부르는 이른바 영명한 수령이라 하여, 대구성이라 하여, 마음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라면서 그 하나만을 지고무상한 성인(聖人)으로 하늘높이 떠받들어 올리다보니 이 나라는 민주와 법제가 결국은 그한사람의 욕구에 따라서 짓밟혀 유린당하고말았던 것이다. 따져보면 중국공산당은 당내의 민주를 잃은데다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를 더 허용하다보니 큰 실수를 한것이요 민중은 다가 지나치게 들끓어오르는 열애심에 지배자를 성인(聖人)으로만 여기고 받들어 숭배하다보니 그 어른을 한심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잔폭한 군주(君主)로 만들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수천년간을 경천법조(敬天法條)로 삼아오던 모든 풍속과 질서가 여지없이 짓밟힌 것이다. 지어는 수천년간 대대손손 지켜 내려오던 부모자식간의 골육의 정마저도 헝크려졌거니와 개별적인 현상이라 하겠지만 지어는 가정에 대한 가치관념마저 전부 깨지고 으깨지고 부셔지고말았던 것이다. 그 반면에 머리를 치켜든것이란 영웅의 권능에 대한 지나친 기대였다. 그렇다보니 오직 모택동 그 한사람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발광적인 숭배열이 한심할지경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 숭배의 열을 맨먼저 일으킨 사람은 바로 당장에 마저 후계자라 명문으로 밝혀놓기까지 했던 림표였던 것이다. 1966년 8월 18일에 있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그가 한 강화가 새삼스레 상기된다.  불과 1000여자밖에 안되지만 그 내용이 과연 희한했다.      “위대한 령수”      “위대한 통수”      “위대한 창거”      “위대한 승리”      “가장가장 위대한”      “가장가장 강대한”      “가장가장 예리한” 불어도 분수있지 이것들은 피끗들어도 아첨하는 문구들이였다. 보면 그가 모택동사상을 가장정통했고 모택동혁명로선에 가장충성하며 모주석을 가장열애하는 것 같았다. 하긴 수를 잘썻다. 수억만이 그를 따라 그모양으로 모택동 그 한사람을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신처럼 높이높이 떠받들게 만들었으니! 사실그랬다. 억만백성이 림표를 따라서 그 모양으로 숭배했으니 세상에 그보다 더 놀랍게 무지한 짓이 어디있으랴!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 더 큰 실수를 한데는 각성못한 백성모두의 책임도 있는 골고루있는 것이다. 노예적인 아첨숭배는 언녕내동댕이쳐야한다. 하건만 아직도 상급만 만나면 허리도 못펴고 깝신거리는 사람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욕지기가 생긴다. 병신같은 짓은 그만하는게 좋다.   모택동이 맑스주의를 진정 잘 알았던가? 그런것같지 않다. 그가 깊이연구한건 맑스의 저작이 아니고 “자치통감”이였다고 한다. 이건 20여년간을그의 비서로 지내다가 버림받게 되니 서재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전가영이 남긴 말이다. 내가 언젠가 "참고소식"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는 지어 모택동은 세상에서 제일허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모택동 그는 지고무상한 현대의 황제노릇을 하고싶어했던 것이다. 1957년후부터 개인숭배를 반대하면 제 권위를 수립함에는 저촉되고 해롭다는 것을 심심히 느낀 모택동은 1958년 3월에 열리였던 성도(成都)회의때 벌써 개인숭배에 대한 제 개인의 관점을 내비친바있다. 그후 1964년가을,  쏘련에서 쓰딸린의 생전독재를 청산했던 흐루쇼브가 권좌에서 물러났을적에 미국기자 스노가 모택동을 만나 그와 “쏘련사람들은 지금 중국에서는 개인숭배를 하고있다고들 말하는데 그게 사실인가?”고 물은바있다. 이에 모택동은 “흐루쇼브가 내려앉은건 개인숭배가 너무없었기때문이다. 중국에는 확실히 개인숭배가있다. 개인숭배는 좀 있어야한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과연  전당, 전국민이자기를 숭배하게끔 노력한 것이다. 문화혁명이 끝나자 주덕의 비서가 적발한것을 보면 모택동은 1950년도 국경절경축구호를 선정할 때 자신이 “모택동만세!”구호를 가첨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택동의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욕구는 건국직후부터 이미 생겨 쓰딸린과마찬가지로 뿌리박았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벽초부터 림표가 그의 심정에 맞춰서 마치 신을 모시듯이 전국민이 모택동을 숭배하여 받를게끔 운동을 일으켯던 것이다. 로산회의(庐山会议)후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조가 전국범위에서 일어났다. 여러판본의 모택동저작이 나와서 대량적으로 발행되였거니와 전국일판에서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국일판에 모택동의 동상, 석상이 수풀같이 일떠섯고 매일마나 "동방홍"노래소리울리고 충성무가 생겨나 그것이 군중성적인 운동으로 되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지어는 내가 소시적에 직접 목격했던, 일본이 망하면서도 하던 짓거리 궁성요배모양의 삼경삼축(三敬三祝)은 모택동을 신화(神化)했으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한심해서 부끄러운 짓이였던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들으면 그젯날에는 어쩌면 그같이 무지한 일도 다 있었느냐며 웃기나 할 일이였다.   위에 이미 서술된바와 같이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북경의 고등학교와 중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자체로 홍위병을 조직하고는 저들을 가르친 학교령도와 선생부터 진공하기 시작한건데 그 대부분이 폭력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다 모택동은 부채질을 한 것이다. 1966년 8월 1일, 모택동은 청화대학의 부속중학홍위병들에게 편지로 그들이 사람을 붇잡고 때리고 짓부시는 투쟁행위에 대해서 “열열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거니와 “북경뿐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문화대혁명운동을 함에 있어서 그와 마찬가지의 ‘반란행위’에 대해서도 일률로 열렬히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던 것이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들을 접견할 때도 “우리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며 일체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고 요물잡귀들을 타도해야한다”고 했다. 하여 그후부터 전국각지에서 홍위병들이 그 누가 전정대상이라 생각되면 쪼판유리(造反有理ㅡ반란에 도리있다)를 웨쳐대면서 제마음대로 사람을 붙잡아 때리고 들부시고 빼앗는 날강도식의 "혁명"을 정식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북경에 있는 어느 한 중학교는 학생이 무려 천여명이 되였는데 그들은어느날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을 전부끌어내다가 운동장에 줄을 세워놓고는 투쟁을 한 것이다. 학생들은 선생마다 머리에다 종이로 만든 높다란 고깔모자를 씌웟고 목에다는 앞가슴을 가리우는 커다란 판지패쪽을 걸었는데 고깔모자와 판지패쪽마다에 그 선생의 성명과 정치죄명이 씌여있었다.     한손에다 작은홍보서(小红书)ㅡ “모주석어록”을 쥔 쪼판파사령(造反派司令)이 “투쟁대회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뒷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구호를 웨쳐댔다. “혁명에는 죄가 없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 “모든 반동적인것은 타도해야한다!” “먼지는 쓸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홍색공포만세!” “그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실테다!”  등등. 당시 그것은 보편적인 형상이였던 것이다. 홍위병사령이 높이웨쳣다. “홍위병전사들, 동학들여! 우리가 그래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보황파, 반동권위, 요물잡귀들이 우리들의 홍색진지를 더럽히게 가만놔둘수있는가?”  그러면 천여명되는 홍위병들이 일제히 웨치였다. “가만놔둘수없다!” 홍위병사령은 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해야하는가?” 전체홍위병들은 운동장이 들성하게 웨쳐댔다. “그자들의 개대갈통을 까부시자!” “땅에다 꼭그라뜨리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꼭그라뜨리자!” “영원히 번신못하게 만들어놓자!” 이같이 종교식의 의식을 한바탕 이루고나서 그들은 잔혹한 투쟁을 시작햇던 것이다.... 대표적인 실례를 보이는 장면이다.   엽영렬(葉永烈)이 쓴 이란 글을 보면 당시 용기가 오른 홍위병들은 배짱이 자랄대로 자라나 지어는 공청당중앙까지 쳐들어가 공청단령도자인 세 호씨(胡氏)ㅡ 호요방, 호극실, 호기립을 붓잡아놓고는 “너희들은 왜서 모택동의 위대한 사상을 높이추켜들지 않았느냐?” 트집잡으면서 투쟁했는데 그자들이 가죽피대로 어찌나 호되게 때렸던지 호요방은 참지 못해 몸부림치고 딩굴었다면서 매질을 한 홍위병들이 그때는 완전히 리성을 잃은것이였다고 호극실은 말했다. 모택동이 일으킨 홍위병들의 작태가 바로 그러했다. 횡행천하(橫行天下)에 당할자없거늘 과연 무법천지로 돼버린 험악한 야만의 년대였다!  刘源上将忆父刘少奇:他被自己塑造的神坛轧死>" />   >" /> >" /> >" /> >" /> >" />      
274    일본녀작가 야마자키 도요 별세 댓글:  조회:4681  추천:1  2013-10-08
        일본녀작가 야마자키 도요 별세   "베이징시간보"에 따르면 방금지난 9월 29일(2013년), 장편소설 을 세상에 내놓음으로 하여 이름을 더 크게 낸 일본의 녀작가 야마자키 도요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떳다.  야마자키 도요는 생전에 대표작으로 되는 말고도 , 을 비롯하여  여러권의 장편을 썻는데 그것들은 다가 영화로 찍거나 아니면 텔레비극으로 각색되여 일본사회에 파문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일본의 소식통들은 야마자키 도요는 몹시쇠약해진 심장피로로 인하여 사망되였노라고 보도했다. 1924년에 오사카에서 내여난 그녀는 스므살나던해인 1944년에 교토녀자전문학교(지금의 교토녀자대학)에서 국문계를 다니고는 사에 들어가 문예부기자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편 저명한 작가이자 문예부부장이였던 이노우에 야스시의 지도를 받으면서 창작활동을 활기차게 계속했던 것이다. 그의 처녀작은 1957년에 발표한 으로서 그 소설은 그 이듬해에  수많은 경쟁자를 젯히고 제29계 나오키상을 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을 내놓았는데 그 소설은 한 녀인이 주인이 되어 손수경영하고있는 한 곡예장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소설역시 나오자마자 자석마냥 많은 독자들을 끌었던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초기작품들은 대부분이 주로는 배와 관련되는 오사카의 풍토와 인정을 묘사한 것이다.             1963년, 야마자키 도요는 장편소설 을 문예지에다 련재하기시작했는데 연출가 지로타미야의 중시를 일으켜 그것이 영화로 각색되었거니와 여러편의 텔레비극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가 쓴 , , , , 등이 재판되였거니와 그것이 영화로 각색되기도했다. 야마자키 도요가 쓴 소설들의 특색이라면 다가 일본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예리하게 분석하고 질타한 그것이다. 하여 일본에서는 그녀를 “사회소설가”라 불러온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작품들은 다가 치밀한 조사를 거쳐서 씌여진 것이기에 그 내용들이 아주풍부하고 또한 그럼으로해서 독자들을 쉽게 소설에 매료되게끔 하는 것이다. 대표작 은 의학계의 어두운 면과 의료실수를 문제삼고 그를 기탄없이 폭로한 것인데 그것이 영화로 까지 찍혀 나오자 반응이 더더욱 대단했던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다른 한 소설 은 2차세계대전때 중국에 남은 고아의 운명을 다룬건데 그는 친히 중국에 와서 소재를 얻어간 것이다. 그것이 후에 중일 두나라가 합작에 의하여 텔레비련속극으로 만들어진건데 반영이 아주좋다.   우리 중에는 그같이 걸출한 녀류작가 나오지 못할가, 기대하게 된다.           야마자키 도요           사망직전모습   아래에 야마자키 도요와 다른 이름있는 녀류작가의 대표작도 알리니 참고하기바란다.   1. 야마자키 도요  소설ㅡ 2. 쿠니코  소설 ㅡㅡㅡㅡㅡ 3. 요코모리  소설ㅡㅡㅡㅡ 4. 키타가와 에리코  소설ㅡ 5. 지앙카오리  소설ㅡㅡㅡ 6. 무라야마유카  소설ㅡㅡ 7. 아이코  소설ㅡㅡㅡㅡㅡ 8. 리우미리  소설ㅡㅡㅡㅡ 9. 사쿠라바 카즈키  소설ㅡ 10. 미우라  소설ㅡㅡㅡㅡㅡ 11. 카와카미 에이코 소설ㅡ        
273    에세이 얼굴있는 명성황후 민비 댓글:  조회:4076  추천:0  2013-09-29
    에세이 얼굴있는 명성황후 민비     어느날 일본공사관에서는 극비의 회의가 열리였다. 참가자는 모두 5명. 미우라 고로오와 시바시로외에 오까모도, 서기관 스기무라와 구세스였다. 구세스는 일본공사관의 무관이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모의한 끝에 아래와 같은 최후방안을 내왔다.   (1) 임금측의 간신을 제거하고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왕후를 죽여버린다. (2)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들이 정변을 일으킨 듯 가장한다. (3)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랑인들을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수비대가 담당한다. (4) 대원군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한 일본경찰을 동원한다. 《우리들의 이번 작전을 이라 이름짓는다. 천황과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충성다하리라 맹세했으니 각자 부끄러움과 유감이 없도록 행동하라!》 미우라 고로오는 이같이 지시하고나서 지체없이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10월 10일에 여우사냥을 하리라는 전보를 쳤다.   랑인들이 민비를 살해하자면 그의 모색을 알아둬야 했다. 하여 미우라는 미찌꼬를 시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일가족의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일로 해서 미찌꼬는 미우라 고로오의 흉계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것이 민비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었다.   미우라 고로오는 자기의 음모가 탈로난 것 같은 감각이 들자 여우사냥을 돌연스레 2일 앞당겨 10월 8일밤중에 단행키로 맘먹었다.   한편 미찌꼬는 자기의 소행을 미우라가 눈챘거니와 공관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나 평관(平關)의 민비한테도 전할수도 없게 되자 그만 절망 끝에 자결하고말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 일본불량배 60명, 일본군인 50명, 일본경찰대 30명, 훈련대 1,000여명으로 무어진 강도단이 "여우사냥"을 개시했다. 이때 미우라 고로오는 초불을 밝혀놓은 널찍한 방안에 홀로 남아서 무릎꿇고 앉아 두손을 합장하고는 격정에 잠겨 뇌이였다. 《미우라 그는 무사였다! 일생에 단 한번 두려움을 느껴본다! 내 일생의 걸작품! 생각만해도 피가 끓어오른다!》   푸름푸름 새날이 밝아옴을 보고 미우라 고로오는 밖으로 나왔다. 왕궁쪽으로부터 총성이 몇번 들리다 끊어졌다. 훈련대를 앞세웠으니 궁전위병과 충돌이 일어났으니라. 이 시각 그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는 거사를 이루고 있다는 그 하나의 자부에 가슴이 쁘듯할 뿐이였다. 《조선의 가을하늘은 밝기도하구나! 력사란 무엇인가, 력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이때 평복한 순사 자객 등 60여명이 오까모도의 지휘하에 공덕리 아소정에 가 대원군을 억지로 옹호(擁護)해 갖고 경복궁으로 몰려들어왔다. 위병들은 항거하다가 살상된 자가 많았고 련대장은 일본에 매수된 훈련대가 란입하는 것을 꾸짖다가 일병(日兵)손게 피살되고말았다. 자객 수10여명은 칼을 뽑아 들고 전(殿)에 올라갔다. 고함치고 날뛰였다. 혹은 왕의 팔을 잡고 이끌며 혹은 어체(御體)에 비슷이 향하여 권총을 쏴댔다. 궁인들을 왕앞으로 끌고 가 란타(亂打)하면서 중전마마가 어데있는지 대라했다.   궁내대신 리경직(李耕稙)은 어전에서 죽음을 받았다. 어떤 자는 태자를 붇들어서 머리털을 움켜 잡고 단도로 위협하면서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 했다. 외국인사 파진(巴津)은 호위대장으로 전정(殿庭)에 있다가 여러번 힐문을 당하였으나 대주지 않아 몹시 위태했었다.   각 방을 수색하던 자객들은 한 방에서 마침내 왕후를 찾아내여 살해하고는 증건을 없애느라 비단꽃이불로 싸서 널판에 올려놓아 궁궐뜰로부터 록원수림(鹿園樹林)속에 옮겨다 장작을 쌓고는 석유를 뿌려 시체를 태워버렸다.     이윽고 미우라 고로오가 궐내로 들어가 왕을 배알하면서 자객과 일본군인들은 궐밖으로 퇴출시켰다.   봉변을 당한 왕ㅡ리희는 넋이 떨어진 눈으로 그를 멍하니 볼뿐이였다.   명성황후의 몰골은 잃어지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양딸 미찌꼬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갖고있는 “韓國獨立史”에 있으니 장차 기회가 되면 올릴것이다. 독자는 더 상세히 알려거든 내가 쓴 대하력사소설 제1부에서 9절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컴푸터조정이 잘못되여 지워졋길래 다시올림)  
272    수필 사생지간 댓글:  조회:3641  추천:3  2013-09-29
  수필 사생지간   우리 몇은 술상에 둘러앉았다. 대학가는 학생집에서 청했으니 여느술판과는 달랐다. 고마움과 희망, 축복과 기대의 감정이 서로 안고 도는 즐거운 장소라 하겠다. 학생은 잔에 술을 부어 들고 “오늘 저는 여러 선생님덕분에 대학가게됐습니다.”하고 말했다. 헌데 학생이 부어주는 그 인사의 첫잔을 누가 받아야 옳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롱담절반 진담절반 옥신각신하던 중에 내곁에 앉았던 동창생ㅡ 소학교장이 먼저 채여 대접받았다. 계몽스승은 중학선생이 아니라 그래도 소학선생이니 술잔이 먼저 차례지는건 당연하다는 주장이였다. 좌중은 별 시비없이 웃고말았다. 하긴 그럴법도하니까. 우리 모두는 이럴 때 내가 진정 너 대학생의 계몽스승이였으면 작히나 좋으랴 하는 심정이였다. 한 사람이 나라의 동량지재로 자라남에 있어서 계몽스승의 작용은 자못 크거니와 영광스럽고도 존경할만한 위치에 놓여있게되는게 아닌가!   쏘련 까자흐초원의 한 궁벽한 마을에 듀이센이라는 젊은 공산당원이 파견되여 마구간을 학교로 꾸리고 거기서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설복해 가면서 무식한 애들에게 처음으로 글을 가르쳤다. 그런 아이들 중 알찌나라는 녀학생이 후에 모스크바에 가 대학공부를 하고 철학박사로까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마을에도 중학교가 일떠서 새학교입학식이 있게되였을 때 마을에서는 크게 출세한 그녀를 모셔다 제일 귀빈석에 앉히였다. 허나 그 녀인은 쏘독전쟁 때 죽은줄로만알았던 그의 첫스승이자 계몽자인 듀이센이 지금까지 살아있거니와 보통꼴호즈원이며 우편통신원으로 있다는걸 알았을 때는 자기가 받아서는 안될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묵과할수도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는 그만 결연히 떠나가버리고만다. 여기서 우리는 그 철학박사녀인의 참으로 인간다운 자각ㅡ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높아졌어도 계몽스승에 대한 경모의 심정만은 의연히 변함없는 갸륵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고상한 풍도가 아니겠는가! 헌데 공부많이하고 출세한 사람이라 해서 다 그녀처럼 고상한건 아니다. 준마가 망아지 때 자기를 길러준 사양원을 알아못보듯 어섯눈을 틔워준 스승을 잊고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잘될것을 바라고 잘되면 반가와하지 않을 스승이야 어디있으랴. 누가 만약 출세하면 “그인 내가 배워준 학생이였어.” 하면서 스스로 만족과 자랑감에 잠겨 되뇌여보는 것이 바로 스승이다.   내가 벌리에서 중학을 졸업한지도 어언 30년이 넘는다. 하건만 그때 나를 배워줫던 선생님들 중 지금도 의연히 교단에 오르고있는 이가 몇분계신다. 지금 일어를 배워주고있는 안영곤선생님과 교도주임사업을 하고있는 황동철 이 두분선생님은 내 초중때의 담임선생님인데 인젠 다 로인줄에 올라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 재작년그러께 겨울, 연변작가협회의 회의때 내가 귀향길에  모교에 피끗들렸었는데 모교에서는 모처럼 나를 위해 연석을 베풀엇던 것이다. 그때 황선생님께서 “송죽동무가 학교다닐때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더니만 끝내 성공했구만! 나는 스승으로서 이처럼 리상을 실현한 제자를 만나니 과연 기쁘기가 한량없소!” 하면서 손수 술을 부어 축복해주니 목이 메이도록 감격스럽던 일을 두고두고 잊을것 같지 않다. 자기에겐 푼전 한 잎 차례지는 것도 없건만 제자의 양광스러운 앞길을 성심으로 바라고 기뻐하는 것ㅡ 그것이 바로 스승의  감정이 아니겠는가. 헌데 사람마다가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경모의 감정은 대체 어느만큼이나될가? 나는 내가 목석같이 무감각하고 불민한 인간으로 되지 않은게 참으로 다행인가싶다. 어느해인가, 동생잔치에 상객으로 화남현 풍기촌에 갓을 때 나는 그곳에 내가 소학다닐 때 교장이였던 강현풍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차에서 내리자바람 찾아가 “선생님, 그간 옥체무강하셨습니까, 저는 선생님의 제자 김송죽이 올시다.” 하고 절을 올렸더니 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야, 이거 참 오래간만이구나! ‘문화혁명’에 고생많이했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네라. 그래 몸은 일없게 됐는가?” 하고는 눈물짓는것이였다. 나도 그러했다. 회포인들 적었으랴. 격세해있은 그 몇 년간 가슴속에 묻어왔던 사생간의 그리움은 상봉의 그 시각 실로 진지한 동경과 반가움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엄해룡과 변태국이는 소학시절 내가 배워준 제자인데 지금도 의연히 한 향내에 살고있다. 1974년 겨울철의 어느날, 그들은 무죄판결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내가 이웃마을에 조동되여 다심금 교편을 잡게되자 술근을 받아갖고 일부러 보러왔던 것이다. 여러해나 굴리우면서 짓몰린 끝에 교단에 다시오르기는했지만 아직도 “혁명자”들의 은근한 적대적인 감시속에 들어있은 나한테는 그네들의 그 “스승은 어디까지나 스승입니다.” 하면서 과감한 용기를 냈던 위문이 얼마나 고맙던지! 오는 정, 가는 정ㅡ 그래서 위안과 믿음속에 굳어지는 정. 사생간의 정도 실은 부모자식간의 정만 못지 않건만 그 가치와 귀중함을 사람들은 왕왕 몰라서 놓지거나 잃고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난생 처음 글이라고 써낸것은 두 개의 소절로 꾸며진 “땅크병형님”이라는 짤막한 아동시였는데 그것이 어느 소년간물에 발표된것이 조선전쟁이 바야흐로 끝나고있었던 1953년도 여름이였으니 소학5학년때의 일이다. 나한테 그같이 문학을 열애하게끔 이끌고 아름다운 리상의 싹을 틔워준 계몽스승은 김창민선생이다. 이젠 환갑이 다 되었을 그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묘연하여 나는 지금도 가끔 그리워지군하는 마음이다.                                        199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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