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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되는 <<비밀복무팀>>이 모택동을 위해서 복무했던가?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택동은 생전에 줄곧 특권을 반대했었다. 지난세기 60년대국가가 제일 어려웠던 그 시기에 그의 딸 리민(李敏), 리눌(李訥)마저도 전국인민과 마찬가지로 배를 불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생활질량을 보장하느라 여러면으로 돌본 것이다. 신체조건으로 하여 “특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시 국가에서 여러 가지 복무팀을 내와 그를 돌봐준것은 적시적으로 필요하고도 잘된일이였다.
의료팀
모택동을 위한 의료팀의 인원이 수리로 바뀌였던바 팀이 바뀐것은 두 번이다. 첫 번은 1971년~1972년사이, 말하자면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던 그 한해사이고 두 번째는 1974년부터 모택동이 세상을 떠날때 까지의 사이다. 그 의료조 조장은 리지수(李志绥), 부조장은 서도(徐涛), 변지강(卞志强)、호욱동(胡旭东)이였고 조원으로는 오길(吴洁)、주광유(周光裕)、오계평(吴阶平) 등이였다. 제2차 의료소조가 성립된 구체적인 시간은 1974년 6월중순이였는데 모택동이 사망해서야 그것이 해산되였다.
"큰 활자"그룹
이른바의 “큰 활자그룹”이라는 것은 늘 책을 봐야하는 모택동이 특히는 주석(注释)을 달고나면 글씨가 작기에 큰글자로 바꿔야했던 것이다. 그 “큰 활자그룹”은 1972년가을에 성립되였는데 맨먼저 만들어낸 고적으로는 <<晋书>>중의 <<谢安传>>, <<谢玄传>>, <<桓伊传>>, <<刘牢之传>>이였다. 그 임무를 맡은것은 복단대학과 상해과학원력사연구소의 교수 전문가들이였다.
그같이 주석(注释)이 딸린 책을 출판해내는 "큰 활자"그룹에서는 번마다 15권을 인쇄해냈는데 후에 모택동이 그것을 다른사람도 읽게했다. 그러다가 5책씩 만들게 했는데 그것은 오직 그만이 보는 책이였던 것이다. 모택동이 백내장을 앓으니 "큰 활자"를 “36파운드 왕”으로 잡아 인쇄를 했던 것이다. 당시 그런 활자체가 없었길래 상해오문로(上海澳门路)에 있는 중화인쇄공장에서 모택동을 위해 특별히 복제를 해냈던 것이다.
혼성 그룹(吟唱小组)
"큰 활자"그룹과 마찬가지로 생겨난것이 혼성그룹(吟唱小组)이였는데 그것은 고대의 시를 읇는 소조였던것이였다. 시를 읊고는 번마다 그것들을 "비밀"기록을 해두었다. 문화부부장이였던 우회영(于会泳)이 그 책임을 직접졌던 것이다. 중공당사출판사에서 펴낸 <<모택동의 삶 파일>>에 기재된것을 보면 “북경서원려사에 녹음실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오는 혼성그룹(吟唱小组)의 성원들을 보면 다가 예술계의 가장유명 인사들이였는바 례를 들면 악미제(岳美缇), 채요선(蔡瑶先), 요병숙(姚炳淑) 등과 같은 사람들이였다. 함께 모이군하는 음악 플레이어들을 보면 이름이 더욱 뜨르르한 이들이였다. 비파연원 류덕해(刘德海), 이호(二胡)기자 민혜분(闵惠芬), 플루트 배우 장효휘(张晓辉) 등.
록음을 모두 얼마나했는가? 소산의 갤러리(陈列馆)에 있는 고대시 테이프만도 59상자된다. 혼성그룹(吟唱小组)에 참가한 사업인원은 많았다. 예술가의 의미와 시의 분위기를 보다 높이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북경대학에서 고전문학교수 4명을 청해다 전문 곡조에 대한 강의를 하게했던 것이다. 유명한 것은 1975년에 모택동이 백내장수술을 받으면서 듣게 한 <<만강홍(满江红)>>제작이였다. 그것은 상해 곤극원(昆剧院)의 악미제(岳美缇)를 청해서 록제한 것이다.
드라마 그룹(戏曲小组)
전문 모택동을 위해서 방송하는 TV 트럭이 따로 있었다. 1974년, 모택동이 장사(长沙)에 가 휴양하는 기간에 고든극장(湘剧院), 드럼극장(花鼓戏剧院)의 어떤 연원들은 불리워가서 옛날연극 공연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생사패(生死牌)>>, <<토학전(讨学钱)>> 따위들이였다. 배우들은 문화혁명기간인데도 썩은냄새 나는 옛극을 놀게하는 리유를 몰라 첨에는 검나하다가 화국봉이 말해서야 하는수없이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때 호남(湖南)에는 방송장비가 되지 않았기에 중앙에서 모택동이 듣도록 고유한 디바이스로 전송하였던 것이다. 한데 생각밖에 강서(江西) 등 린근의 분계에 있는 어떤 로간부들은 신호에 덥쳐든 라이브 물건을 보고는 한때 성위에다 호남에서는 복벽을 한다고 분분히 고발서를 올리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시가특별팀(雪茄特制小组)
모택동은 본래 “中华”패담배를 즐겨피우다가 시가(雪茄)로 바꾼건데 화룡(贺龙)의 얘기부터 해야겠다. 1956년 어느날 오후, 화룡이 모택동과 채팅(聊天) 할적에 제손에 있는 시가(雪茄)담배가 여차여차 좋다고 자랑했다. 그는 그 담배가 맛이 좋거니와 솔루션 중독도 없다고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호기심이 동해 한 대피워봤는데 과연 감각이 좋았다. 하여 그는 그 시가(雪茄)담배가 사천의 십방담배공장(什邡烟厂)에서 생산한다는 것 까지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모택동의 신변에 있는 사람은 달마다 성도군구(成都军区)에 가서 시가담배를 가져오면서도 십방담배공장(什邡烟厂)을 놀래우지는 않았다. 한데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하여 차라리 그 공장의 기술골간들로 “시가특별제조팀(雪茄特制小组)”을 따로내오기에 이른것이니 때는 1972년 3월이였다. 시가(雪茄)담배가 채용한 리우 담배 연기와 울로 전문 모택동에게 공급하는 담배만 만들었던 것이다.
1976년9월9일,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니 그 모든 구룹과 팀들도 따라서 전부 해산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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