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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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5ㅡ7) 댓글:  조회:3289  추천:1  2013-09-15
                                   5        가을철을 잡아들어 찾아온 비는 여름내 쏟아부은 폭염을 한꺼번에 식혀버릴 양 밤새껏 끊지 않고 구질구질 내리더니 새날이 휘영청밝아서야 맥을 버리고 그쳤다.    초가의 처마밑에서는 지렁물이 똑똑 떨어진다.    동산머리에 감빛노을이 비끼더니 해가 떠올랐다.   《꼭-꼭-꼭-》    잠을 일찍 깬 멧새가 이 나무 저 나무 옮아가면서 명쾌한 기분으로 노래를 불렀다.    청신한 아침대기였다.    시르맨커서켠의 울바자안에서 싱싱하게 자라고있는 무우와 가을배추는 마치 록색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이 산듯했고 거기에 이어붙은 개암나무뙈기건너산의 들쑹날쑹한 바위들은 밝은 해빛에 만물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당날로 돌아가리라던 남병호는 박로인을 도와 물고기를 잡아주다보니 꼬박 한주일을 눌러지내다가 마을로 돌아갔다. 그지간 로인과 함께보낸 즐겁고도 유쾌한 시각들은 그의 마음을 점점 더 풀어버리기 어려운 바오리로 묶어 여기에다 잡아두고 있었다. 그는 갈 때 우선 거둘낟알이 거의없을 지경으로 페농이 되고만 논판에다 불을 콱질러놓고는 할빈 큰형님네집에 가 딸을 만나보고다시오리라했다. 와서는 박로인의 바쁜일손이나 더 도와주리라는거다. 박기섭은 그가 아무때찾아와도 자기는 환영하리라했다.    젊은이는 과연 낙언을 지키였다.    서로지간의 신임과 인정은 아마 이렇게 해서 구축되고 도타와지는모양이다.    날이갈수록 가을 빛은 짙어가고 있었다. 여름내내 청일색이였던 온갖나무들이 이제는 저마끔 제멋대로 울굿불긋 아롱다롱한 옷을 바꿔입고 치장을 해서 산간은 여름철보다 한결 화려해졌다. 이것은 오로지 자연의 고칠수 없는 섭리에 따른것이리라.    하다면 자연만 화려할가? 그런건아니였다. 화려함은 인간에게도 있는 것이다. 헌데 그 화려함이 자연에 비겨 대체어떨지?    제일보기실은 것은 렴치모르는 불청객이였다. 그런자는 오지 않아도 여지껏 경건히 살아온 박기섭이였다. 한데 그자들이 나타나면서부터 박기섭의 평온은 위협받고 기분잡치였다.    일은 이러했다.    날이 건뜩들리고 명랑해진 어느날 오전. 생각밖에 이제는 다시오지 않으리라여겼던 부향장이 토지관리일군 김씨와 함께 웬 1남1녀를 배동하여 일호동에 다시금 나타났던 것이다. 정말 반갑지 않았다. 아니 저건 그 녀석이 아니여! 박령감은 저쪽 1남1녀중 사나이는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장용팔의 아들 근식인지라 저으기 놀랬다. 과연 오래간만이다. 그는 지금은 때와는 모양이 다른 상고머리를 했고 입은 옷은 값비싼 검정가죽쟘바였다. 로인은 껍질이 벗은 딱정벌례를 알아보듯 그이임을 첫눈에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건만 저쪽은 흡사 면목을 모르는양했다. 과연 기억에 없어서 그럴가? 남을 해쳐놓은 일로해서 대할 면목이 서지 않을 때 속이 켕기면서도 허심하지 못하다보니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은 반성할 용기가 모자라는 사람이면 거개가 그러하듯이 그도 대하기가 뭣한지라 일부러 자기는 이쪽을 아예 잊은양 아닌보살을 하고있었다. 네놈이 그래도 좋다. 그를 곱게대해줄 박령감이 아니였다. 이쪽은 눈길을 옮겼다. 그의 곁에 붙어 아양떠는 해사스레 생긴 젊은 한족녀인은 아마 비서아니면 정부일 것이다. 성품이 진중치못한 사람은 돈잘벌면 그걸 자랑하기위해서 이런모양으로 냄새피우면서 다니는게 지금은 류행병처럼 되어가고있는 세월이 아닌가. 자식이 네놈이 팔자는 좋은모양이다 멋부리는 꼴보니 하고 박령감은 속으로 뇌깔이였다.   《아유, 참 아름답네요!》    녀인이 사위를 둘러보면서 요란스레 감탄을 뽑았다.   《어때 맘들어? 명당이야.》    상고머리가 입을 그녀귀가에 가져다대며 낮게 말해놓곤 마주보며 헤벌쭉 웃었다.   《무슨수작질이냐. 네년놈들이 감질을 내고있어.. 어리석은 것들, 여기가 네놈들 손에 차레질줄을 아느냐, 흥!》    열어놓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박기섭은 코방구뀌였다.    개가 다시짖어댔다. 무슨일인지 나가말리지 않았다가는 일칠것같았다. 그래서 밖에 나갔더니 왕부향장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왜 또 왔소?》    로인은 그를 시들히 바라보면서 달가와하지않는 투로 물었다.   《내가 접때 가면서 뭐랍디까. 다시오마구하잖습디까. 이건 꼭 해결이 나야 될 일이라서 다시온겝니다. 저 이렇게…》    대방의 쌀쌀한 태도에 부닥친 왕부향장은 신경질이 빡 나는 것을 참고 되도록 부드러운낯색을 지으며 변명쪼로 해석을 했다.   《가만! 해결이 나야 될 일이라니 날 기여히 여기서 떠나라는건가? 아무리어째두 그놈의 해결은 잘 되지 않을거우. 》    박기섭은 여유를 주지 않고 잘라버렸다.    로인의 저력있는 목소리는 단판하러 찾아온 저쪽을 땀을 빼게 만들어버릴 잡도리였다.   《로인님,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구 좀 차견히 잘 토론해봅시다. 제 생각에는 이 일이 얼마든 량편이 다 좋게 협상이 될것같습니다. 》    김씨가 안달증이 나서 참지못하고 나서서 참견했다.   《저번때 뭐라구했소. 향에서는 여기를 팔려구한다했지. 그래 누구한테 팔자는거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구 그냥 이럴판인가?》    박기섭이 그하고 제 조선말로 걸고들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재간이 없는 왕부향장은 낯을 돌려 김씨에게 물었다.   《이 령감이 이제 뭐라했는가?》   《누구한테 파는지를 알자는구만.》   《우리가 아무사람한테 팔든 그걸 알아서는뭘해.》   《난 알아야겠소.》    데퉁바리같은 박령감은 고집스레 나왔다.    심정이 자못 불쾌해진 왕부향장은 사무린눈길로 보다가 입을 열어 알려주었다.   《정 알고싶다면 알려주지. 우린 늪과 저 산을 여기 이분한테  팔겠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보화건축회사 장경리입니다.》   《보화건축회사 장경리라, 장경리가 그래 대체 뭘하자구 이 먼데까지 와서 물웅뎅이하구 돌산을 사잔다오?》   《그것까지 꼭 알아야겠습니까. 그렇다면 알려주지요. 저분은 여기다가 집을 하나 지어볼 계획입니다. 》   《집을 하나 짓는다? 거 참 별랋구만. 버덕은 놔두고 왜 하필 산골에다는 집을 짓는다오?》   《허, 되겐 까다롭게 노네. 남이야 왜서짓던 령감이 그것까지 상관하려들건뭔가.》    젊은사람이니 성미가 달랐다. 전번부터 박령감을 고깝게 여긴 왕부향장은 부아가 동해 끝내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두 사람지간의 입씨름을 듣고만있던 김씨가 이마살을 찌프리며 슬쩍 눈짓해놓곤 무어라 귀속말로 소곤댔다. 아마 그러면 협상도 못하고마니 참으라고 충고하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누구와 잠간 통화하고난 상고머리가 신경을 바싹 도사리면서 왕부향장이 로인과 입겨룸하고있는 것을 옆에서 보고듣더니 상판이 무거운 짐에 깔려 형태를 잃어가는 양철통같이 이그러졌다. 그는 자기가 계획하고 온 일이 그만 뒤틀려지고마는 것 같아서 안달증이 나는지라 그저 참고만있을 수 없어 입을 열고야말았다.   《로인님, 별게아닙니다. 난 여기다 별장을 하나 지으려고 사자는겝니다.》    박기섭은 고개를 돌려 얄밉고 아니꼽살스러운 그를 아느새여겨보다가 물었다.   《뭐라, 별장을 짓는다. 누구핼말인가?》   《거야 물론 내해지요 뭐.》   《임잔 누구요? 장용팔령감의 아들아니여?》   《예. 옳습니다. 제가 그분의 둘쨉니다. 로인님은 저?…》   《자네가 그래 이 박기섭이를 몰라그러는가?》   《뭐랍니까? 아, 그럼 저…하하하! 정말 깜짝 몰라볼번… 이거 참 죄송하게됐습니다.》   《세월이 너무두오래서 그럴수도있겠지. 안그래?》   《그렇습지요. 로인님인걸 제가 진작알았다면야 어째 인사를 올리지 않았겠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기에 그래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왔단말인가? 그럴수가 있을가? 박기섭이 잠간 능청떠는 그를 실까스를 말을 찾느라 함구무언이자 저쪽이 입을 먼저열었다.   《이런데서 어떻게 혼자삽니까, 병나도 그렇구. 안그렇습니까.그러니 임자가 나졌을 때 자리를 제꺽내놓으십시오. 아까워할게 뭠니까. 협상이 제대로만되면야 로인님도 리득을 택택히 보지요. 정말입니다. 내 솔직히 알려주지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니 절대놓치지마시오.》    어쩌면 이렇게 성근한 충고가있을가. 자기는 제법 로인을 생각하는 것 처럼 나오는 그 리면에는 영락없이 대방을 어리숙하게 보면서 감언리설로 얼려넘겨 제 리속을 채우려는 어리석고 비렬한 본바탕이 철판깥이 깔려있었다. 그따위 이뭉수에 호락호락 넘어갈려고 머리백발이 되도록 살아온 령감이 아니였다.    박기섭이 입을 열고 물어보았다.   《자네가 정말 날 생각해 그러는가?》   《그렇잖구요. 전 솔직한 사람입니다.》   《솔직한 사람이라? 좋아.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네. 언제 오토바이를 타고 여길왔다간일이 없는가?》   《내가 오토바일 타고요?》   《그렇네 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였네.》   《아, 그렇지! 있습니다. 저…》   《그때 말리누라 걸어놓은 고기를 가져갔지?》   《예. 그건 저…》   《남은 흙집에서 사는데 돈많이 벌었다구 별장까지 져놓구 살자구드는 사람이 그래 고기를 못먹어서 남의 핼 훔쳐갔나?》    자기의 행실을 고깝게 여겨온 이쪽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태도에 부딧치고보니 가슴이 섬찍해났다. 창피를 당하고 있는 상고머리는 이 자리에서 무여지게 추락되는 자기의 위신을 건지기위해 급급히 발명했다.   《사실은 이렇게 된겝니다. 우린 그날밤에 동창생들이 한데모여 강가에 가 우등불만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마끔 술안주감을 준비해갖고 가기로했습니다. 난 여기에 오면 말린고기쯤은 사갈수 있겠다여기고 그날낮에 내 비서 하나를 데리고 오토바일 타고왔더랬지요. 그런데 와보니 집이 비여있더군요. 그래 주인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서게된건데 마침 장대기끝에 마른고기가 뀀채로있는게 눈에 띄이길래.... 도리대로하면 응당 기다리고있다가 그걸 사갖고가야지요. 그런데 그러자니 시간이 너무갈것같아 에라 주인없으면 뭐라나 우선먼저갔다먹고 후에 값을 곱으로 쳐 갚아주자했지요. 그런것이 그만…..미안하게됐습니다. 미처 사과못한 벌로 값을 열배로드리지요. 그게 모두 스믈다섯마리더군요. 한 마리에 50원씩 쳐서 1250원을 드리면안될까요, 지금 당장말입니다.》    심정이 언녕 토라졌던 박기섭은 상고머리가 제법 사내답게 통크고 대범한체 노는 꼴을 째려보다가 그의 말에 언질잡아 비꼬는 투로 뱉었다.    《값을 열배로주겠다? 돈많으니 과연 못해보는 짓없네. 값을 이제야 주느라 부산떨지 말구 부끄러운대로 도루집어넣게. 내가 그 고기를 개한테 먹인셈치지. 》    《하 이거 로인님이 대단히 노여운모양이네.》    《노엽잖구. 바꿔놓구 자네면 그래 노엽잖겠는가. 어디 대답해봐. 안그런가구.》    《야 이거정말 이러면 단판두 곤난하겠네.》    상고머리는 안달증이 나서 뇌이고는 탐욕이 끓고있는 눈으로 산과 늪을 한 번 휙 쓸어보았다. 박령감의 눈도 따라돌았다.   내놓을수 없었다. 남에게 줄수 없었다. 너무나 정든 곳이였다.   《나하구 뭘 단판한단말인가. 늪을 팔라구? 흥. 꿈은 잘꾸네.  난 도적놈한텐 똥물도 안주는 사람이야. 그렇다는거나알구 망신 더하지 않겠거들랑 오솝소리돌아가, 알아들었는가, 돌아가란말이야, 냉큼!》    정중하고도 어딘가 분노와 멸시가 차있는 로인의 축객령은 비수마냥 대방의 가슴을 콱 찔러놓았다.    어느새 제주인의 의사를 알아채기라도한듯이 개까지 큰입을 사려물면서 으르렁거렸다.   《어! 어! 이 개! 이 개!》    덴겁한 사나이는 자기가 당장 물릴 것만같아서 비실비실 뒷걸음치면서 넋빠지는 소리를 했다.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니 요몇년사이 이러한 변비에도 장사를 하거나 기업을 꾸려 벼락부자로 된 사람이 적잖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사아서 기껏 향락을 누려보자고 한다. 하여 형세를 보고 별장을 지어 팔아서 큰돈을 더 벌던지 아니면 그것을 팔지 못할시는 아예 자기가 향수하려는 것이다. 상고머리가 바로 그러했다. 한데 그는 말도 더 꺼내보지 못하고 그만 물에빠진 장닭모양이돼갖고 돌아ㄱ4ㅏ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돌아간지 얼마안되여 남병호가 경쾌한 오토바이소리를 휘몰아갖고 일호동에 나타났다. 열흘전에 여기에 왔다가 돌아가서는 전처럼 친구들과 휩쓸려다녔건만 어쩐지 가깝고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그를 내재적인 리심력이 여기로 떠민 것이다. 젊은이는 오토바이를 세우자바삐물어왔다.    《그 사람들이 어째 또 왔댔습니까?》   《가는걸봤나?》    예. 까만〈오디〉를 채석장에다 주차해놓구서 여기루 들어왔던모양이죠. 네사람 함께 그것에 앉아가는걸 제가봤습니다.》   《꼴보기싫게 허튼수작들을 하구있어.》    박기섭은 일의 자초지종을 그한테 아려주고나서 의미시장하게 말했다.   《철이 오니 알리는구나. 여름에는 그처럼 청일색이던 나무들이 변해버렸지. 단풍든 잎들이 색갈은 모두 제마끔아닌가. 세월이 달라지니 인간도 량심들이 저모양으루 고약해진거야..》                                                                    6        마가을이 지나고 땅거죽이 꺼둑꺼둑 얼기시작하는 초겨울의 어느날 남병호가 일호동으로 왔다. 헌데 신색이 이전만달랐다.   《 네 모양 어째그래. 옘병하잖았어. 보기가 구차하구나.》   《제가 어떻게요?》    젊은이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울적한 심기는 감추지 못했다.    박기섭은 그가 지금 내신 어떠한 일로 모진고뇌속에서 방황하고있음을 직감했다. 젊은이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머밀머밀하다가 고개만 외로탈아버린다. 아무리봐야 심상치 않았다.   《웬일이여. 무슨일이라도 생긴거아니냐?》    박령감이 바싹 다조져물었더니 젊은이는 뜻밖에 응대는 하지 않고 울었다. 두줄기의 눈물이 핏기없이 매말라가는 그의 뺨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니 사내녀석이 울기는 원.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벙어리속은 난에미도 몰라. 말이나해야알지.》    박기섭은 젊은놈이 바보같이 그러는게 보기가 민망스러워 꾸짖었다.    그제야 젊은이는 입을 열어 제 신세를 하소했다.   《난 이젠 어쩔까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말이다.》    남병호의 손이 호주머니를 더듬다가 그만뒀다. 한국에서 안해가 붙인 편지를 아침에 받아 읽어보았는데 너무나도 믿기어려운 기막힌 내용이라 화김에 찢어던지고말았던 것이다. 안해는 편지에 자기는 그렇게 한국남편을 따라온 후 기실은 갈라지지 않고 그냥 부부로 되여 지금은 사내애까지 하나 낳아 살고있다는 것, 하늘이 정해준 운명인데 이제 더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러한줄을 알고 다시 더 기다리지말아달라는 것, 이전에 아기자기살았던 정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는 것, 딸애의 공부할 돈은 장차 더 부쳐보낼테니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 애정은 가꾸기에 달린것이니 자기보다 더 좋은 대상을 새로얻어 잘살아달라는 것 등이 그 내용이였다.    아무렴 이럴수야있는가, 남병호에게는 그것이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였다.   《그럴줄을 알았어. 내 그래 뭐라던가.》    박로인은 얼굴에 딱한 기색을 지으면서 자기앞에 앉아 여지껏 속히워온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쿨쩍거리는 젊은이를 원망스레 보았다. 네 각시가 어디서 무슨일을 하는가를 알아보라했더니 내보고 사인정탐을 내놓아 뒷조사를 하라는건가 그러면 부부감정이나 벌어지게되는게아니냐며 듣지 않던 그, 자기들은 약속을 단단히 하고 가짜리혼을 했길래 안해가 마음이 절대 돌아지지 않으리라 굳게믿고있던 그, 자기 안해는 이제 돈을 많이벌어갖고 꼭 돌아오리라던 그를 그는 한바탕 되게 꾸짖고싶었다. 그가 만약 남이 아니고 제 자식이라면 야 이 무럼생선같은 녀석아 어른의 말을 들을건 들어야지 고집은 웬 고집이였더냐 하고 따귀라도 한매 불이 펄쩍나게 갈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식이 아니니 그럴수는 없었다. 젊은이는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닥다들이고보니 실망한 나머지 어쨌으면좋을지 몰라 진정못하면서 지어는 생의 용기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박기섭은 그가 고민에 잠겨 모대기는 꼴을 아느새 지켜보고있노라니 가슴이 물큰하도록 측은한 감이 들어 열려던 입을 닫아버렸다. 실은 그만 소매 할 일이 아니였다. 하늘의 조화를 예측키어렵듯이 알기어려운 것이 사람의 속마음이였다. 안해를 고지식하게 너무믿어온 그가 그저 병신스러울뿐이였다. 병신을 왜 병신됐느냐고 욕해선 뭘하는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마음의 아픈상처나 무마해 그것이 되도록 빨리아물게 하는게 보다나은 처사일 것 같았다.   《나하구같이 서남골에나 갔다오자.》   《거기는왜서요?》   《오소리놈 어데숨었는지 정찰해둬야지. 그리구 바람두쐴겸. 그모양돼갖구 집안에만 들어박혀있다가는 울화병날라.》    젊은이는 박령감의 권에 끌려 시르맨커를 나갔다. 헌데 서남골에 들어간 그들은 해종일 헤맸거만 털빛이 새노란 황가리와 뾰족한 주등이가 감실한 족제비만 몇 마리 보았을 뿐 오소리는 구경못했다.   《그따위걸 내놓구는 아무것두없구만요.》    늙은 것은 말이 없는데 젊은 것이 더 지쳐서 주절댔다.   《왜 아무것두없다나? 제대루찾지 못해 그렇지 많구두많아. 각가지 짐승두 있구 약재두 있구. 어디 그것뿐인가 다른 필요되는것들두 있지.》    자연은 완연히 탈바꿈을 했다. 모든게 발가숭이로 돼버렸다. 나무들은 아무것도 없이 뼈만남았다. 겨울은 모든 것을 매몰해서 유(有)를 무(無)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남병호가 시각으로부터 받은 감수이자 인식이였다. 헌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직 농사를 지으면서 돈을 퍼줘야만 비료를 쓸수 있다는 생각과 그런 생각으로 하여 굳어버린 습성때문에 그는 농민이지만 가석하게도 응당알아두어야 할 상식마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풍들어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나무가지에서 말끔히 떨어졌다. 바위산을 내놓고는 다른 산들이 모두 두터운 나뭇잎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나무잎이불이 차츰썩어 부식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름에 계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해면을 밟는것만같은 감을 주는 유기질함량이 많은 그런 검은 흙은 실농군이 얻고싶어하는 좋은 비료였다. 하건만도 젊은이는 그저 잡아팔면 돈가치가 대단히 갈 짐승만을 찾아볼 궁리나했지 그런 흙같은 것에 대해서는 근본 생각지도 않았다. 전혀 애착이 없었던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래 땅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랴. 따져놓고보면 그는 지금 촌에서 살기는하지만 온전한 촌사람도 아니고 도시사람도 아닌 얼간이변종이였다.    시대가 인간을 조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세대의 젊은이들은 시대를 잘만났으니 참으로 행운이다. 그들은 보수적인 환경속에서 속박받으며 살아왔던 전세대의 사람들보다 더 대담하길래 사상을 해방하는 것도 빠르고 신생사물을 접수하는 것도 빠를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박령감같은 늙은이들의 그 나이 때에 비해보면 자주의식도 독립의식도 더 강해진 것이다. 헌데 지금 모든 젊은이가 다 그렇게 되고있을가? 아니다, 그런것은아니였다. 시대가 만들어준 팔부도 있고 기형아도 있는 것이다. 박기섭의 눈에는 남병호가 바로 시대가 만들어준 오작품인 그 두가지중 어느하나같이 보이였다.    그런 오작품을 곁에 두고 속이 뒤번져 어떻게 보고만있겠는가. 박기섭은 남의 일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절망과 타락의 변두리에 이른 사람은 구해내야한다는 인간적인 자각에 의무감에 떠밀려 남병호를 한 번 더 깨우쳐주어 제구실을 하게 만들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서산골에서 시르맨커로 돌아오면서 헐망해진 집을 수리하듯이 젊은이에 대한 개조공정을 벌리였다.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낼테니 어디맛혀보게나.》    《좋습니다 내시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제일불쌍한가?》    《그거야 집도 없이 떠도는 거지지요 뭐.》    《틀렸어.》    《그럼 뭠니까. 거지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있단말입니까.》    《있잖구. 내 알려주지, 세상에 제일불쌍한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일세. 알아들었는가 제구실못하는 사람.》    《아, 그렇습니까!》    남병호는 알았노라하고는 그만 머리를 뚝떨구었다.    박기섭은 수수께끼를 더 내지 않고 그가 홀로 생각에 잠기게 아느새 내쳐두었다.    젊은이는 밤이 되어 자려고 자리에 눕기는했어도 오래도록 속잠은 들지 않고 궁싯거리였다.        날은 점점 더 여물어가고 있었다. 늪에는 살어름이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개가 짖어 남병호가 나가보니 웬 노루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시르맨커에 왔다가 그만 굴속에 엎디여있던 억대스런 개한테 들켜 혼줄이 빠지고 있었다. 개는 노루를 멀리달아못나게 이리쫓고 저리쫓고했다.    이거야말로 절로굴러든 고기덩이였다.    뒤미처 밖으로 달려나온 박령감이 개와 젊은이를 지휘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내가 서쪽을 지키겠으니 넌 북쪽을 지키라! 간다! 간다! 그놈을 늪에다몰아넣어라! 늪에다!》    개가 쫓으며 뒷다리를 물고 사람이 아우성이쳐대면서 앞을 막으니 포위를 뚫지 못해 진퇴량난에 빠진 노루는 하는수없이 끝내 늪에 뛰여들고야말았다.    네다리 다 얼음을 구멍내고 들어간 노루는 그것을 뺄수도 없고 더 뛸래야뛸수도 없어서 마침내 사람의 손에 잡히우고말았다.    《나는 그저 조급할 뿐 미처궁리안납디다. 그런데두 로인님은참 묘합니다. 노루를 늪에다몰아넣어야 잡는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제꺽생각해냈습니까?》    《이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네. 나는 허저족친구네 집 사람들하구 같이있을 때 그들한테서 배웠네. 해마다 물이 어는 이맘때면 우린 바로 이런 방법으루 노루를 잡군했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갖구는 인생을 살아가는것두 그렇네.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게 될 때는 남이 사는걸 보구 따라배워야하는걸네》    젊은이가 묻는 말에 박기섭이 하는소리였다.   《그래야지요. 로인님의 그 말씀이 옳은거같습니다.》    남병호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금신세를 놓고 다시생각하니 문득 새삼스레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반성하게되였다. 수께끼에도 세상에서 제일불쌍한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하지 않는가. 나는 그래 제노릇을 하고살았던가? 그렇지를 않았지. 눈이 멀정해갖고 제 녀편네까지 남한테 떼우구.....이건정말 머저리중에서도 상머저리였지. 언녕 변심한 녀인을 제것이라 굳게믿구 부쳐오는 돈이나 받아쓰면서 그걸 자랑으로 여겼으니.... 남을 얼마나 웃길 노릇이였는가. 사람살아가는 옳은 방법이 무었인것도 모르고있었으니 나는과연  인간구실을 못한게 아닌가..... 남병호의 속쓰라린 깨달음이였다.       첫눈이 내렸다. 그것이 벌방에서는 녹아버려 자취를 감춰버리겠지만 여기는 달랐다. 아예 자리를 잡는 눈이였다. 첫눈인데도 와도 모질게왔다. 그래서 산이며 늪이며가 밤새에 온통 두터운 솜이불을 덮은것만같았다. 이럻게 깨끗할수야있는가! 해가 뜨니 새하얀 눈이 밝은 빛에 반사되여 눈부시였다. 그렇게 정결하고 새하얀 눈으로 단장한 산이며 바위츠렁이며 바위너설로 형태를 이룬 산이며 다가 한결 아름답고 신비해보였다. 그야말로 여기는 사시장철 경치좋은곳인가보다!     박기섭령감은 아침을 먹은 후 다커투에 올라가 착고 세틀과 모양이 활비슷한 사냥도구 두개를 가져왔다.   《이건 뭡니까?》    남병호가 자기는 생전처음보는 물건인지라 호기심갖고 쥐여들고 물었다.   《그것말인가. 그건 허저족이 사냥하느라 옛날부터 써온 서르미라는 걸세. 짐승이 다니는 길에다 그걸 노끈갖구 비끌어매놓고는 뒤를 당겨서 살을 메우는데 짐승이 가다가 길에 느린 줄을 발로 걸어놓게 되면 그놈의 살이 벗겨져 쌩 날아가 맛히게 되어있네.》   《높이는 어느만큼쯤해서 매놓는가요?》   《여우나 승냥이나 놀가지를 잡자는거니까 그놈 짐승들의 키를 가늠해서 매놓네. 이제 내가 그놈을 어떻게 놓는갈 제 눈으루 친히 보구서 배우게.》   《오늘부터 사냥을 나가렵니가?》   《그래볼가구.》    남병호는 기뻤다. 취미를 붙이는데가 있어야했는데.... 박령감의 권유대로 그와 함께 있으면서 겨울한철 짐승잡이나 해서 고뇌풀고 걷잡기어려운 마음도 안착해보려는 그였다.    짐승들이 눈우에다 군데군데 지도를 그려놓았다. 두사람은 황가리나 족제비를 잡아보자고 시르맨커부근에다 덫을 놓고 나서 짐승이 새로낸 눈길에다 작은 디딜착고도 놓았다. 그리고는 승냥이, 여우를 잡을 서르미도 놓고 너구리굴을 들추려고 개를 데리고 서남골로 들어가기도했다. 시르맨커를 떠날 때였다. 남병호가 거기갔다가 만일 곰이라도만나면 어쩔가요해서 박기섭은 그럼 이것을 들라면서 지다창을 하나 주었다. 그건 량변이 칼날같고 끝이 뾰족하며 길이가 한자푼한 창날을 길다란 참나무대에다 꽂은건데 창목에다는 손가락 두넓이만한 가죽오리를 탱탱 감아놓았다. 전에 허조족사냥군들은 곰을 잡을 때 이것을 썼던 것이다. 곰이 일어서거나 덥칠 때 이 창으로 목아래의 허연데를 겨누고 숨통을 드립다찌르는데 우둔한 곰은 창을 쥐여당긴다. 그래서 그걸 쥔 사람도 자연히 앞으로 딸리게되기마련인데 창날만 들어가곤 더 들어가지말라고 그렇게 가죽을 가락지모양으로 감아놓은 것이다. 박령감은 그것의 사용방법을 알려주면서 이런 창을 허조족의 말로는 《지다》라 한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렴치없는 녀석을 오소리잡놉이라구하는데 왜서 그러는지를 아는가?》   《모릅니다. 내가 그런걸 알리있습니까. 왜 그러는가요?》    박령감은 재미있는 이야기 한가지를 그한테 들려주었다.   《내 먼저 너구리얘길하지. 그놈들은 과연 재간둥이들이라네. 그놈들이 제가 사는 굴을 만들어놓은것만 봐도 그렇지. 잠자는   굴, 먹거리를 장만해두는 굴, 똥오줌을 누는 굴 …너구리를 내놓구서야 어느 짐승이면 제굴을 그렇게 층층 만들어놓고살가. 그놈들이 그런 굴을 지을 때는 함께 살 씨족들이 다 동원하는건데 그 가운데는 전문 흙을 파는 놈이 따로있고 판 흙을 나르는 놈이 따로있고 안벽을 두드려 단단하게 다듬고 장식하는 놈이 따로있는거네. 말하자면 각자의 기술과 능력 특장에 따라 분공을 한다는거네. 그놈들이 공정을 어떻게 하는지 아나. 흙파는 녀석이 앞발로 흙을 팔 때 한놈이 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뜩 누워있다네. 다른놈이 파낸 흙을 그놈의 배에다 올려놓고는 눌러놓고 올려놓고는 눌러놓네 그래서 무지가 되면 다른 것들이 누운녀석의 귀를 물어당겨 흙을 다른데에 갖다가 던져버리는거네. 그러니 운반도구로 된 그 너구리가 꼴이 어떻게 되겠나. 공정이 끝나 굴이 다 되면 그놈의 등가죽의 털은 긁히고 째져서 말이아니지. 그걸 보고 여렀은 보기참 안돼서 아프겠구나 이걸 어쩌나 하면서 홀홀 불어준다네. 털빠진 놈은 아프지만 자기는 집체를 위해 헌신했다는 자호감으로 해서 분해하지두않는다네.》   《아니, 고놈들이 어쩜 그렇게! 하하하!》    꾸며낸 동화같지 않았다. 짐승들도 인간을 본따면서 살아가는게 하도기특하고 감탄돼서 젊은이는 소리내여 웃었다. .    박령감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오소리란놈은 어떤가봐. 그놈은 제살굴도 짓지 않구 여름내내 빈들빈들 놀다가는 겨울이 와 추우면 남이 그같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굴에 기여든다네.》    《그래서 오소리와 너구리가 한굴에서 사는모양이죠.》    《그렇네. 렴치짝없는 놈이지.》    《그래서 오소리를 잡놉이라 욕하겠구만요.》    《그렇지.》    이날 그들은 여우가 낸 눈길에다 서르미를 두틀놓고나서 산기슭의 넘어진 오랜고목근처에서 너구리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런데 개가짖어댄데다 남병호가 방법도모르고 지다창을 무턱대고 굴에다 들이민통에 안에 있던 놈들이 앞통로를 제꺽맊고 다른통로로 해서 깊이숨어버린탓에 잡지 못했다. 세밑에 가서야 내굴을 쐬여 몇놈잡았다. 어쨌든 종자는 남긴거다. 그들은 쪽제비와 황가리를 여러마리잡아팔았다. 개와 싸워보자고 찾아온 승냥이를 세 마리잡고 여우도 두 마리잡아 가죽을 벗겨팔았다. 산짐승잡이는 재미 있었다. 남병호는 자동차의 부르릉거리는 소리도 사람의 떠드는 소리도 없이 조용한 산간의 맑고도 아늑한 서정적인 환경속에서 번뇌를 잊고 그 겨울을 박기섭로인과 함께 유감없이 즐겁게 보냈다.                                                                         7      이듬해의 봄. 남병호가 박기섭로인을 찾아와 자기는 이젠 농사지을 생각도 외지에 벌이갈 생각도 없으니 함께있도록해달라 사정했다. 박기섭은 그 청을 선듯받아주지 않고 머리속에 생각을 굴리였다. 함께있으면서 늪에다 양어를 좀 더 크게하면 자기도 덜적적해서 좋지만 젊은이마저 중같이 만들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이보고 자기처럼 늙어죽을때까지 홀아비로 살아갈셈인가 그러지 말고 농사를 계속지으면서 알맞는 색시감이나 얻어 장가나 어서가라했다. 생각해보니 하긴 그것도 틀리지는 않는 말이였다. 이젠 아예 속세를 떠나 중질을 하자고들면모르겠지만 아직 정욕은 펄펄 살아있는 숫놈이였다. 그래갖고 산에만 들어와있는다면 사실 다시장가간다는것도 어려울것이였다. 하여 그는 지금은 우선 박령감의 의사에 쫓도록했다.    여름이 되니 어떻게 여기 늪에 고기가 많다고 소문이 나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낚시꾼이 하나 둘 달려들기시작했다. 그들중에는 자기는 도시에서 일부러찾아왔는데 제발잡게해달라고 비라리청을 하다싶이 사정을 하는 낚시질열성가들도 있었다.    박기섭은 안된다고 딱 막아버리려다가 그러면 먼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사람을 너무나 랭혹하게 대하는 것 같거니와 자기는 그들로부터 괴벽한 깍쟁이라는 나쁜 평을 받을게 빤해서 생각한 끝에 돈을 얼마간씩 받기로 하고 그네들이 늪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허락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어 일호동의 작은 늪은 대외로 개방이 되었다. 헌데 또 정작 그렇게 하고보니 전만 수입은 썩 되는데 돈 몇푼내기실어 도적낚시질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기섭은 그런 사람이 발견만되면 개를 풀어놓았다. 그러면 저쪽은 덴겁하여 달아났다.    여기에는 죽탕같이 발을 어지럽힐 길이 없었다. 일호동에서부터 지금은 돌을 캐지 않는 남쪽의 채석장까지는 자동차는 들어오기 어렵지만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서는 얼마든 다니는 오솔길이 예날부터 나있었는데 그것이 모래길이여서 좋았다.    어느날 남병호는 자기가 다루고있는 논 일곱짐에다 비료와 약을 다 치고나서 일호동에 왔다.    《로인님, 한가지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직은 일러그렇지 이제 좀 더있으면 낚시질꾼이 형편없이 쓸어들겝니다. 》    《그건왜서?》    《내가 요즘 시내에 갔다가 도는 말을 들을라니 거기 낚시협회에서는 올해부터 여기 일호동늪을 자기들의 중점활동장소로   선정하고있답니다.》    《좋아 어디 그렇게만하라지. 나두 손해볼건없으니까. 그런데 그럴려면 그네들이 나하구 협의가 있어야하지.》    《거야물론이지요. 그렇게 않하구야됩니까. 그들도 이제 그러자고할겝니다.》    《내 그 사람들이 어째 여기를 특별히 맘들어하는지를 알만하다. 그건 고기잡이도 고기잡이려니와 여긴 경치까지 유별나게 좋으니까 그러는거네. 작년에 장근식이가 왜 여기를 그토록 욕심냈겠나. 빤하지 않아. 밑천얼마넣어 별장만 하나 지어놓으면야 여긴 좋은 료양지로 되어 영락없이 뗏돈을 벌것같아서였네.》    《그런데 시내사람들은 여기가 좋다는걸 어떻게 알았을가?》    《모르지 그자식이 여기를 달라구왔다가내한테 퇴박맞고는 일부러 훼방을 놀게만드느라 시내낚시질꾼들한테 소문낸것이 이같이 번져가는지두. 아무리생각해봐두그래.》    《정말그렇다면 이건 해가 복으로되는게 아닙니까.》    《세상일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지. 이것두 아마 하늘이 이 령감을 알아주는건가봐.》    《아마그런거같은데 저 로인님.》    《무슨일 또 있나?》    《우리가 여길 아예 료양지로 만들어버리면안될까요.》    《안될거야있나. 그러잖아 작년에 그 일이 있은후부터 나도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가고있는중이네.》    정보를 중히여기고 장래를 설계해보는 이런 대화는 적시적이거니와 중요한것이였다.    박기섭은 가불간 장가를 한 번 다시가야 할 남병호가 그일에 대해서는 대체 어느정도나 신경쓰고있는가를 알아보았다. 남병호는 자기가 보아둔 녀자가 하나있다고 하면서 일이 되겠지요했다.    《제마을녀잔가?》    《아닙니다. 외지녀잡니다.》    《뭐라, 외지녀자라?》    《예. 교련하쪽에 있는데 작년에 본남편과 이맞잖아서 끝내리혼하고 지금혼자살고있습니다. 일곱살난 딸애 하나데리구요.》    박기섭은 그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기웃거렸다.    《교련하쪽에서 이리로 시집오자구한다지. 아마두 딸린 새끼있어 거기서는 재가하기 어려운모양이지.》    《그래그런게 아닙니다. 녀자측이 딸린자식있어도 꺼리지 않으니 같이살자고 청혼들어오는게 여럿된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먼데루 시집오자구하나.》    《거야 연분이 줄을놓아서 그렇겠지요. 올해 나이 서른넷인데 고향에 와서 살고십답니다. 우리는 서로 면목아는사입니다.》    《면목아는사이라?》    《예. 우리가 그쪽에서 살 때 중학을 함께다녔습니가. 그는 이고장서 태여나서 여섯 살 때 그쪽으로 이사를 갔던겁니다. 그리곤 거기서 학교를 다녔구 스므다섯살을 먹어서는 바로 지난해에 갈라진 본남편한테 시집갔던겁니다. 》    《성명이 뭔데?》    《로영애입니다.》    《로영애라!》    박기섭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늘 빨간 명주댕기로 종종머리를 매고다니던 한 깜찍스런 계집애의 동그란 몰골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 계집애가 바로 로명호의 딸이다. 딸만 셋이였던 로명호가 아들생각이 간절해서 뭐니뭐니해도 사람의 인소가 제일이라는 구호를 죄치면서 끈기있게 자식생산을 계속해서 다시본 것이 결국은 제언니들모양으로 달고나오라는 고추는 달고나오지 않고 어미배속에다 떼놓고 나온 그녀여였던 것이다.    남병호가 박기섭이 낯빛까지 흐려가면서 저으기놀라는 모양을 보고 괴이쩍어했다.   《어째그럽니까?》   《대상이 로영애라니 그러네.》   《그럼 로인님도 로영애를 압니까?》   《알다말다. 그게 죽은 로명호의 셋째딸아닌가. 걔가 바로 도시서 살다가 〈하방〉한 이듬해에 태여났지.》   《아, 그런가요! 로인님은 무어나 다 아는구만요!》    이번에는 남병호쪽이 되려놀랬다. 그는 마을사람들한테서 들어 항미원조 때 조선전쟁판에 나가 피흘리며 싸운 박기섭로인이 문화혁명기간 억울하게도 목에 패쪽달고 투쟁받았다는건 알고있어도 그를 그토록만든 장본인이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영애의 아버지였다는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박기섭은 그 일은 말하지 않으리라 작심했다.    남병호는 자기는 아직도 련애중인데 이제 어느때 한 번 자기가 기회를 봐서 대상을 데려다가 꼭 인사를 시키겠노라했다.    이렇게 공교로울변이라구야. 저녀석을 빨리 재처를 하라 독촉했더니만 하필이면 로가놈의 딸을 눈에들어할건뭔가. 과연 말과같이 데려온다면 어떻게 대해줘야하는가. 그를 만나면 자연히 로명호를 또 한번다시 상기하게될것인데 그러는게 결국 무슨 좋은점이있는가. 상처입은 과거는 꿈속에서도 재생되지말아야했다. 이제는 분하고 쓰라린 기분만을 자아내게하는 지난날을 다시회억하기싫었던 박령감은 난감한 일에 봉착하게되였다.      주인이야 어떻든 일호동의 새날은 산새들의 즐거운 노래속에서 막을 올리고 막을 내리였다. 흙에서 진주를 캤다면 누구나 그것이 과연정말 진주일가고 의심할것이고 대체 어떤모양인지 보자고하듯이 일호동역시 상고머리가 갖고싶어서 침을 흘린 곳이라 소문나는바람에 자연히 차츰차츰 여러사람의 안목에 들게되였다. 시내의 낚시질꾼만이 아니였다. 남병호가 왔다간지 한주일만에 저 앞마을의 20여명되는 젊은이들도 자전거를 하나씩 타고 일호동에 나타났다. 일부러 계획하고 원족을 온 것이다. 전에는 이런일이 없었다. 그곳도 산을 의지하고 있는 촌이여서 도시사람들모양으로 산이 그렇게 그리운 것은 아니였다. 그역시 하나의 양생법이라 할가 자아안위라 할가, 어느때부터였는지 그 마을에는 아무데도 벌이를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농한기를 무료하게 그저보내자니 멋없어 계(契)를 묻듯이 제 동갑을 찾아 띠끼리모여노는.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언중에 또래와 또래끼리 마치 경쟁이라도 하다싶이 놀아주는판인데 오늘 그중의 한또래가 이왕과는 색다르게 활동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활동의 조직자가 다른사람이 아니라 여기를 제집같이 드날들고 있는 남병호였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한것은 로영애가 좀 더 두고보자던 청혼을 수락하고 이젠 같이살자면서 교련하에서 일부러 찾아왔기때문이다. 동갑들은 남병호보고 잔치를 하라느니 빨리한턱내라느니 닥달을 놓았다. 이에 당자는 좋다 내마 그깟거야 문제냐. 그런데 우리는 곧 려행잔치를 떠나겠으니 술한잔 얻어먹을 결심이 있거든 어디 따라오라해서 오늘 이렇게 원족이 조직되였던 것이다.    박기덕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조직되여 자기의 독립령지로 놀러온 것을 무척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가 요즘 기억속에 더듬어보았던 녀인이 나타나 그의앞에 다가왔다.   《인사하오, 나를 늘 친자식같이 여겨주고있는 박로인이요.》    남병호는 박령감의 앞에서 자기가 로인의 동의도 수소문도 없이 문득 한무리를 데리고 오게된 연유를 말하고나서 영애를 그에게 인사시켰다.   《네가 로명호의 딸이라지. 그러구보니 어렸적의 모색이 약간알리는구나. 넌 제 누나들보다 어미의 모색을 더많이 닮았네라.  .애기때부터 빨간댕기를 특별히 좋아하구. 내가 누군지 알만하냐. 넌 아마 이 늙은이가 좀 기억날게다. 》   지울수없는 것이 세월이 남기는 흔적이였다. 박령감은 얼굴이 아직은 젊은바탕이나 아이어머니로 되어서 눈가에 벌써 잔주름이 잡히기시작해 초로의 증상이 보이고있는 젊은녀인이 머리를 공손히 숙이여 하는 인사를 받고나서 튀여오르려던 격정을 삭히면서 온화한투로 말했다.    그때는 비록 학령전의 나어린 계집애였지만 벌써 지력이 트기시작한 때였기에 로영애는 얼굴이 강마르고 다리 하나를 살룩살룩 절면서 자기네 집에 자주놀러다니던 한 사람을 지금도 잊지않고 있으리라. 그는 영애를 무척고와했다. 어느핸가 그가 알사탕을 사주어서 영애가 그것을 받아먹은적도있다. 어찌나좋던지. 그래서 영애는그를 좋아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갑자기 발길을 끊고 다니지 않았거니와 목에다 글을 쓴 커다란 패쪽을 걸고 마을사람들한테 자주몰리우기만했다. 그가 왜서 그렇게 험악한지경이 됐는지? 영애가 초중을 다니면서 아버지한테 물었더니 아버지는 계집애가 공부나할게지 쓸데없이 그건알선 뭘하느냐면서 알려는주지도 않고 신경질만 부리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땐가 한 번은 어머니가 아버지보고 당신은 그래 무슨낯짝에 그 사람을 다시대하겠소 하면서 지청구하고는 탄식하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다. 영애는 어머니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다리를 절는 어른이리라여기고  어머니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고 캐물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도 쓸떼없이 네가 그런거나알아선 뭘하는가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영애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세월이 오래되니 한때 의문되고 미타하던 일이 이제는 머리속에서 영잊어지나답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이렇게 만나게될줄이야! 로영애는 물기어린 눈매로 그를 마주보면서 말했다.   《제가 왜 모르겠어요. 로인님께서는 절 무척 고와하면서 사탕도 사주지 않았던가요. 로인님은 정말좋은분이였어요.》   《내가그랬던가, 허허허!》    박로인은 웃음으로 이제 영애를 마나면 하려했던 지난때의 말과 감정을  뭉때리고말았다. 대방이 안겨주는 한마디말에 열층두께의 얼음이 녹고 가슴은 후련해진 그였다.      비누거품같이 떠있는 하얀구름사이로 해가 웃으면서 얼굴을 내미니 맑고 청신한 대기속에 함뿍잠겨있는 일호동의 초가와 늪과 산은 한결 아련한 정취를 자아내고있었다.    놀려고 온 마을의 젊은이들은 시르맨커서쪽의 바위산을 올라가보고 내려와서는 그 산기슭에 있는 한 너럭바위우에다 저마끔준비해갖고 온 음식들을 꺼내여 놓고는 빙 둘러앉았다.    돌을 고이고 걸어놓은 가마안에서는 고기국이 끓고 있었다. 남병호의 결혼잔치삼아 조직된 원족이였다니 아끼고싶지 않았다. 박로인은 물고기가 얼마든지있다 너희들은 오늘 해먹고푼걸 마음껏해먹고가야한다 그러지를 않는다면 이 늙은건 성을 내리라했다.   《로인님,갑시다! 갑시다!》    젊은이 하나가 그를 상석에 모시였다. 그리고나서 결혼례식순서대로 한다면서 남병호와 영애를 끌어다 그의 앞에서 큰절을 하게했다. 남병호와 영애는 오늘부터 정식부부로 된다. 그런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신랑도 신부도 살아있는 친부모는 없었다. 량측 다 형제자매들이있긴해도 그들은 다가 바깥벌이를 하느라 헤매고있으니 없는거나다름없다. 오기어려운 그들을 꼭 생빈으로해야 할 리유가 뭔가. 아무리 윤기간이라해도 인정을 모르면 그는벌써 남이되고마는 것이다. 내가 변을 당했을 때, 고민 할 때, 방황 할 때, 절망 할 때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포섭해 주는 사람― 인애가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친구고 형제고 부모인것이다. 젊은이들은 불행했던 두 사람의 새로운결합을 축하하면서 한결같이 남병호의 얼었던 가슴을 녹여주고 이끌어주고있는 박기섭로인을 높이 칭송했다.     박기섭로인은 전해에 자기가 만들어두었던 말린 산사편을 몽땅 내놓고 그들의 술좌석에 끼이였다.    《이건뭐라는겝니까?》    가마에 쪄낸 아가위를 으깨여서는 꿀을 치고 록말을 넣어서 그걸 끓이면 산사편이 되는데 모두들 생전처음먹어보고 있다.    점심식사가 다되자 록음기에서 유쾌한 음악이 터져나오기시작한다. 오락이 시작된 것이다. 술이 얼근하게 된 젊은이들은 저마다 재간껏 마음껏 노래도 하고 춤도 췃다.   《이눔의 유축에서두 오락을 놀아보는 때가 있구나!》    젊은이들이 많이와서 이렇게 놀아주니 유쾌하고 만족스러운지 로인도 환락과 기쁨에 도취되여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오늘부터 살렵니다.》    이날 남병호는 돌아가지 않고 영애와 함께 일호동에 남았다.     례식을 꼭 올려야 하는건가. 박기섭로인은 새결혼증을 보고는 두말않고 시르맨커를 비우고 자기는 다커투에 올라가 잤다.      가을에 시르맨커를 허믈고 그 자리에 아담한 벽돌집 한채를 일떠세웠는데 호적부에 등록된 이 집의 식솔은 모두 다섯이였다. 젊은부부에 녀자애 둘 그리고 로인한분. 마을의 이름은 여전히 일호동이라했다.                                                                                                할빈에서                                               1997, 10, 4
270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1ㅡ4) 댓글:  조회:3860  추천:0  2013-09-13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   김송죽    1       토끼꼬리만큼이나 짧아 긴 꿈은 꾸기조차어려울 삼복철 한밤. 게으른 부엉이가 심야의 정적을 몇 번 건드려놓곤 지쳐버렸는지 그만 울음을 그쳐버렸다.     괴괴한 정적이 얼마간 흐른 후   《쮸리쮸리―》     이번에는 단잠을 깬 솔새가 단조하고 되알진 목청으로 어뜩새벽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려놓는다.     칠흙같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먼동이 튼다.     미구하여 귀염둥이가 손에쥐고 놀던 고무풍선같은 붉은 해가 동산머리에 불끈 솟아오른다. 그러자 찬란한 햇빛이 온 대지를 찬란히 비추기 시작한다. 그 빛을 받아 삼라만상이 차츰 제 모습들을 드러내기시작한다.     벌방과 사이떠 외인의 발길이 적게 닿고있는 여기 산간벽지에 자그마한 늪을 한켠에 끼고 오두막모양의 자그마한 집 한채가 옹송그리고 있다.     출입문이 삐걱 열리면서 아직은 해빛이 채 들지 않아 어둑시그레한 집안으로부터 70대의 통바지를 입은 거쿨진 사나이가 맨 런닝그바람에 나온다.   《아―하!》     늙은이는 해뜬쪽을 향해 두 팔을 머리우로 올리면서 하품을 요란스레해댔다. 헝크러진 흰 머리카락이 해빛에 반짝거린다. 꺼진 눈확에 박혀있는 두 눈도 반짝거린다. 그 나이면 고령이건만 허리도 그리 굽지 않은 그는 짜장 만고 풍상을 겪어낸 한마리의 완악한 늙은 승양이를 방불케한다. 성명이 박기섭. 홀홀단신인 이 늙은이가 바로 여기 산간의 주인이자 이 일호동을 주재해온 군주인 것이다.   《까악까악―》     산까치 한 마리 머리우를 날면서 울어댄다.   《허허, 자식이. 무슨 좋은소식있다구저래.》     로인은 저기 백양나무가지에 가 앉아서도 꼬리를 달싹거리며 울어대는 산까치를 향해 입가에 잔웃음지으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린다. 꿈을 꾸곤 그걸 해몽하거나 새소리듣고 점을 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굳어진 습성이다. 그의 하루생활은 늘 이런멋으로 시작되고 이런멋으로 반복되여왔다.    거의 망아지만큼이나 트대큰 개가 주인곁으로 다가오더니 꼬리를 저으며 알찐거린다. 귓등과 꼬리 주둥이만 희고는 온 몸뚱이가 새까만 이 개는 생각나면 먹이를 던져주면서 천대스레 자래우다가 출출할것같으면 잡아나먹자고 자래우는 그따위 하찮은 보통 똥개는 아니였다. 마스티브종인 이 개의 원산은 영국인데 크고 사나와 투견으로나 호신경으로 들고난거다. 이 개가 지금의 주인손에서 자란 것이 이미 다섯해나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약 60여리 상거해있는 변방소에서 이런 개를 기르고 있다. 박기섭은 이 개가 제 어미배속에서 나와 어섯눈을 뜨자 거기서 안아왔던거다. 박기섭은 개를 기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이 개가 각가지의 냄새를 제대로 맡아내게하느라 먹이를 주의해 가려먹였거니와 목기운이 세게하느라 오금이 트자부터 나무방망이를 달아주었고 다 커서는 그걸 벗기곤 목사리에다 대신 못을 촘촘히 밖아 만든 가죽띠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여우나 승냥이를 만나 싸울 때 목이 상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주인이 그같이 알심들여 보살폈길래 개는 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가리지 않고 헌신 할수있는 충견으로 자라난 것이다. 박기섭에게는 한가족 성원인 이 개가 곧바로 유일한 말동무이자 친구였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유감스럽게도 사유가 고등이라는 인간이 행실은 털난 짐승보다도 못한 걸 심심찮게 보게된다. 그것을 박기섭이가 친히 목격했던거다. 력사에 류례없다는 혁명이 이 땅에서 휘몰아칠 때였으이니 이젠 어언 30여년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사람들이 어쩌누라 그리도 심한 광열병에 걸렸던지. 이런 변비와 가까이 있는 도시에서도《붉은해양》을 만든다면서 뼁끼를 통드리로 부어 펀펀한 콩트리트벽들을 온통 피칠갑을 한것같이 만들어놓았었고 촌에서는 집집마다 지붕에다 붉은기를 여러개꽂았다. 그리곤 때마다 밥상을 차려놓고는 위대한 그 사람의 초상앞에서 《삼경삼축》을했었다. 그러는 꼴을 박기섭이는 보다못해 이게 무슨짓이여 산사람놓고 제지를 지내는거야 아니겠지, 이런다구 혁명이 되는건가 제정때두 일본은 이러다가 망한거야 라고해서 그만 《반혁명》으로 몰려 변을 당하고말았는데 하마터면 아까운 제 목숨도 건지지 못할번했던것이다.    박기섭이를 놓고보면 남들처럼 시기시기의 기온에 맟추어 놀지 않고 우둔스레 입바른소리를 망탕죄쳤을 뿐이지 사실은 그 본인의 말대로 그 무슨 이단적인 사상이 머리속에 밖혀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절대아니였다. 22살먹고 장가를 간 그는 이듬해에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남먼저 정부의 호소를 받들어 호미자루를 총자루로 바꿔쥐곤 지원군의 행렬에 들어 압록강을 뛰여넘어갔고 가렬한 전투를 여러번 치루면서도 운수좋아 무사했다. 그러던 그는 5차전역때 지금의 휴전선에 위치해있는 어느 한 무명고지를 지켜싸우다가 그만 적탄에 다리를 상하였고 그 상을 치료하느라 후방병원에 왔다가 정전이 되니 전업하여 고향에 돌아왔던거다. 욕망같아서는 향에서 무장조리노릇이나 하고싶었지만 몸이 남같이 성한축이 아니다보니 하는수없이 민정조리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안해가 너절한 상급과 배가 밪아 돌아가니 눈꼴시고여 차버렷거니와  그결에 지지하던 사업마저 집어던지고말았던 것이다. 남들은 관심해서 퇴직금이라도 타먹어야지 아무렴 계집년때문에 그 좋은 철밥통까지 팽가칠건 뭐냐고 권하면서 나무렸지만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거니와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더 추호의 미련도 두지 않은 박기섭이다. 지금도 한쪽다리를 살룩살룩절고있는 그는 오로지 용맹과 회생만이 약속되여있었던 그 가열처절한 전투의 나날에 겪은 가지가지의 일과 추억들을 지금도 의연히 중히 간수하고있는 군공메달 세 개와 함께 가슴속에다 깊이 묻어두고 홀로살아왔던 것이다. 왜서 홀로사는가?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다니? 하면서 그를 리해못하는 사람은 지금도 의연히 그를 괴짜로만 보고있다. 워낙 말수더구가 무거운편인 그였는데 안해의 배신이 괘씸하고 부화가 동해 자주 음질을 쓰면서 심청을 뿌리다보니 성질사나운 남자로 돼버렸고 말새질하기 좋아하는 동네집아낙네들이 그것을 입끝에 올려놓고 찧고까불려서 소문이 좋지 않게 파다히 퍼졌다. 아마 그런 미열이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모양이다..    이런 사람이 문화혁명에 끌려나왔으니 그 꼴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로건달말인가. 그녀석 인피를 썻으니 사람이지 어디 사람인가. 개만두 못해 개만두 못해.》    박기덕이 이렇게 욕하는 로건달이란 몇해전에 위암에 걸려 죽어버린 로명호다. 그는 시내에서 무직업자로 돌다가 60년대초에《하방》바람이 부니 더는 배겨낼수 없어서 잔밥을 데리고 박기섭이네 마을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그런데 털면 먼지밖에 없을지경 사는 꼴이 그야말로 말이아니였다. 형편이 그러하니까 워낙 민정사업을 했던 박기섭인지라 그저 보고만있을수는 없었다. 같은 제 동포요 더구나 한계급내의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나서서 동지적인 우애정신으로 그를 보살펴주었던것이다. 마을의 간부들을 설복해 식량을 무상으로 내주게했고 국가에서 잔페군인에게 내려보내는 정양비를 자기는 쓰지 않고 그에게 주어 그걸로 아이들의 병을 보게하거나 옷을 해입게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서로 가까운사이로까지 되였다. 그래서 한 번은 술마시면서 그런 속맘의 말을 그하고한건데 량심을 떼어 개를 먹였는지 그가 박기섭을 적발했던거다. 그랬은즉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박기섭이는 냉큼 잡혀나와 투쟁대에 올랐고 소문난 건달이였던 로명호는 문화혁명을 위해 한차례 대공세운 “맹장”으로 인정되여 마을의 혁명위원회에 들어갔거니와 거기서도 주요한 지도성원으로까지 발탁되었던것이다. 그래서 개잡은 포수모양으로 대가리를 내저으면서 우쭐거렸으니 과연 소웃다 구럭터질일이였다.      그런일로해서 지금도 가슴에 맺힌 적원(績怨)이 풀리지 않고있는 박기섭이는 누가 로명호의 이름을 거들기만하면 코빠는 애들한테서마저 온갖수모를 당했던 그때의 일이 머리속에서 다시다시 고패쳐 얼굴에 노기를 피우면서 침을 뱉군한다. 그러니 로가는 죽음으로써도 그이 앞에서 지은 죄만은 의연히 씻지못하고만거다.    박기섭이한테는 청매죽마는 아니지만 조선전장에 지원군으로  나가기전부터 면목익히고는 아주가깝게 지내였던, 지금 그가 살고있는 이 집의 원주인이자 성명을 유덕환이라 부르는 허저족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식솔들은 3년재해년간에 살아가는게 과연 말이 아니였다. 그런 꼴을 보고 박기섭은 잠이오지 않았다. 하여 그는 돌아오자 제 배를 채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식량을 모아 그들을 먹으라고 보내주엇거니와 때론 옷가지도 보내주군했다. 오는 정 가는 정이라 유덕환이가 그 은공을 어찌잊으랴. 몇해후의 어느날 그는 안해와 리혼하고 혼자사는 박기섭이를 보러왔다가 마침 목에다 문짝만큼한 패쪽달고 투쟁받는 그를 발견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마을밖을 숨어돌다가 그날밤으로 박기섭을 빼돌려 자기집에 가져다 숨겨두었던거다. 마을에서는 그가 갑작스레 실종되는바람에 한바탕 벅작끓어번졌다. 박기섭이가 투쟁받더니 죄가 두려워 자살해버렸다는 둥 멀리 뺑소니를 쳤다는 둥… 실상 그랬던들 온 나라가 혈안이 돼서 상대자만 나지면 무자비한 전정을 들이대는판인데 제따위가 도망가면 어디에 가 오래배겨낸단말인가. 헤매며 찾느라말고 기다려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그러했다. 살아서는 승천입지(昇天入地)할수없었던 박기섭이는 만 5년만에 마을과 20여리떨어진, 이런 변비의 산속에서 타민족의 집에 숨어지낸것이 끝내드러나게되었던것이다. 허지만 시종 되붇잡히지는 않았다. 유덕환이네 온집식구는 물론 개까지 그를 보호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난날의 한가닥 이야기다.      그 허조족친구는 10년전에 벌써 위암으로 저세상에 가버렸다. 그리고 그가 위암으로 세상뜨자 그의 아들도 이듬해에 거의 한 대를 살아왔던 이 집을 가장어려웠던 나날에 자기네와 고락을 함께 해왔던 이 조선족로인에게 무상으로 념겨주곤 자기는 식솔들을 데리고 현성으로 이사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박기섭이가 이 일호동의 주인이 되어 그냥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배게 누으면 장정 다섯까지는 잘 수 있는 돌구들에 부엌이 달린, 앞쪽에 출입문과 창이 붙어있고 뒷쪽에 뙤창이 있게끔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이런 반토굴식의 집을 허조족들은 시르맨커라부른다. 그리고 집앞에 십여보쯤 떨어져 통나무 네 개를  땅에 밖아 기둥하고 물개암나무를 엮어서 벽을 한 자그마한 다락이 하나있는데 고기를 말리우거나 창고삼아 여러 가지 어수렵도구들을 넣어두기도하는 이런 다락을 허저어로 다커투라부른다. 박기섭은 시르맨커와 이 다커투를 물려받으면서 조대로부터 어업과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로부터 고기잡이술과 짐승잡이술도 배워두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와서는 나라정책에 따라 큰짐승잡이는 그만뒀지만. 변칙적인 운명이랄가 그역시 지금은 옛주인모양으로 반은 어부로 반은 산장이로 살아가고있는 판이였다.    국계인 큰강과 가까이에 있는 여기가 바로 변방지도에서나 향지도에 꼭같이《일호동》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그것은 허저족주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여기로 사람이 퍽 적게다니였었다.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 순라를 할 때 들리거나 되거리장사군이 고기를 사느라 오군했을뿐이다. 잔페군인인 박기섭은 지금도 자기에게 나오는 정양금을 타러 향민정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뉘집에 대사가 있어 부득불 가봐야 할 때를 내놓곤 벌방으로 자주나가지 않는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혼자사노라니 적적하다못해 심하게 느끼군하던 고독감도 세월이 감에 따라 사그라져 이제는 아무렇지도않지만 사교를 그닥즐기지 않다보니 어쨌든 성미가 남보다는 류다른데가있었다.      이러한 그한테도 사귈만한 친구는 있었다. 몇달전부터는 제 안해를《위장결혼》시켜서 한국에 벌이를 내보낸 남병호란 젊은이가 꽤나자주다니고 있다. 처음은 누구의 심부름을 하느라 나타난 것이 지금은 고기잡이에 정신이 팔려찾아오는 단골손님으로 되고말았다. 때론 왔다가 밤을 자고가기도했다. 그럴때는 적적하던 시르맨커에 활기를 더해주군했다. 박기섭은 그러는 그가 좋았다.                                                                                     2.           해가 바지랑대만큼 기여올랐다. 하늘의 한모퉁이에서는 솜같이 뭉실믕실한 더미구름이 떠돌고 있다.    《사람을 삶아낼판이냐. 오늘두 비는 안오겠구나… 통그믈이나 손질해야지…건데 까치놈은 왜 그렇게 울어댔을가?》     박기섭은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다커투에 올라가 망가진 통그믈을 내려오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개가 궁둥이를 땅에 붙인채 제 주인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면서 대가리를 갸우뚱거린다. 말을 알아듣곤 요사스런 까치가 매일 그모양인걸요 뭐 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이자식아. 고놈이 오늘아침은 내 머리우를 날면서 유별나게 울었단말이다.》     개는 참 그랬군요 하고 맛장구를 치듯이 꼬리를 살살 저었다.     박기섭은 집가까이에 있는 아름드리 백양나무그늘에 가 자리잡고 앉자 방금 다커투에서 꺼내온 통그믈을 앞에 놓고 손질하기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코노래를 되는대로 흥얼거렸다.     정오가 거의되어 올 무렵. 날은 찌는 시루같이 무더워졌다.     개가 컹컹 짓다말고 꼬리 젓는다.     《누가왔느냐?》     《내가왔어요, 로인님.》    박기섭이 개와 말했는데 사람의 말소리들려왔다.     그는 일손을 멈추고 고개들어 방금 소리가 날아온 쪽을 보았다.    중등키에 다부지게 생긴 젊은이가 이켠을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늘 다니는 남병호였다. 해가림모를 삐딱히 쓴 그의 울기오른 얼굴은 땀으로 맥질했고 팔짜른 셔츠는 앞단추를 채우지 않아 펄럭거렸다. 손에는 그가 늘 갖고 다니는 쟉크달린 검은색나는 인조가죽가방이 들려있다.     로인은 얼굴에 반색을 지었다.     《어! 자네왔나. 그러잖아 왜 오잖나구그러는데…그래 요새받은 신문은 가져왔나?》     《그럼요. 가져오구말구요, 로인님께서 부탁하신건데 안갖고오면됩니까.》     젊은이는 흐르는 땀도 닦지 않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쟉크를 열더니 갖고온 신문부터 끄집어냈다.    《아니 그건 뭐.》     늙은이는 가방속에 배갈 두병도 들어있는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나도 좀…》    《어 그래?! 하하하…》    로인은 아무리 좋은 술이라 해도 동무있어야 맛이 나는건데 잘됐다면서 입을 뻐개가며 웃었다.    젊은이는 해가림모를 벗어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해댔다    로인은 손을 재게 놀려 하던 일을 매기단하고나서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누워있던 개도 일어나면서 꼬리를 저어댄다.    박기섭은 늪쪽으로갔다. 늪은 시르맨커 바로 동쪽에 있었다. 수면에 피여난 수련이 뜨고 늪가에는 장포와 갈과 여러 가지 잡풀들이 무성했다. 어디선가 물오리들이 박박박 울면서 자맥질하고있었다. 음향과 미묘하게 조화이룬 경물이랄가 작고 고요한 늪은 산간의 자연미를 한결돋구어주고 있었다.     남병호도 어느새따라왔다.    《로인님! 여기 경치가 이리두좋은걸 전엔 왜 몰랐을가요. 》    《생각해보게 왜 몰랐겠는가구. 거야 사람들이 모두 혁명하는데만 정신팔다보니 자연같은건 알아볼 념도 안했기 때문이지.》    《아무렴어쩜…》    전세대의 사람들은 감정이 과연 그리두 말라지냈단말인가. 젊은이는 로인의 말에 리해가 잘안가는지 말을 더 하려다말고 눈만 찡긋했다.    박기섭은 무성한 부들숲가에 이르러 거기 말둑에 매여있는 배를 풀어냈다. 그건 봇나무껍질로 만든건데 길이가 기껏해야 둬발밖에않되였다. 깜찍한 수공예품을 방불케하는 그것이 허저족어부들이 고기잡이철이 돌아오면 누구라없이 요긴하게 사용하는 우머르천이였다.    《건너에 가보렵니까?》    《가보려네. 몇놈들었을텐데.》     로인은 재우쳐 묻고나서 머쓱하니 서있는 젊은이를 의아쩍게 보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왜 그러나?》    《이눔의게 달걀껍질같아놔서 난 정말 …》    《뒤집어질가봐 근심되나?》    《솔직히말해서.....》    《겁쟁이같이!》     여기는 물고기가 흔했다. 이 늪 아니고도 시르맨커 뒤 저기 작은 물동아래 물후미거나 늪이 작은 내와 합치고 있는 물드리에다 낚시를 집어넣어도 길이가 둬뼘씩되는 메사구와 크기가 손바닥만큼한 붕어가 물려나왔다. 남병호는 자기는 낚시를 빌려갖고 차라리 거기에 가서 정심찬거리를 잡아오고싶었다. 그런데 로인이 마지막내던진 겁쟁이같다는 말에 살을 맞아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그는 낯이 확끈해났다. 등신같이 겁쟁이로되다니 원.    《내가 갔다오지요.》    남병호는 용기내여 먼저 성큼 뛰여올랐다    여지것 한사람만 태웟던 봇나무매생이는 심하게 요동쳤다.    《번져질라, 조심해라!. 》    로인은 소리쳐 주의줬다. 그리곤 이런 배는 어떻게 몰아야한다는 것을 알려주고나서 풀어낸 배줄을 넘겨주지 않고 제손에 그냥쥔채 말을 이었다.    《고기잡일 제대루하자면 뭣보다두 이걸 잘 다를 줄을 알아야 해. 병호 너도 우리 이 늪에는 초어가 많은걸 알겠지.》    《알아요.》    《건데 여적 그놈을 한 마리라도 잡기나해봤는가. 못잡았지.》    《예. 못잡았어요.》    《거봐. 남은 잡는 데 왜 못잡았나. 이걸 타구서 고기잡일하자면 먼저 요령부터 장악하는게 관건일세, 알겠나 요령부터 장악하는게 관건이란말이여.》    《그렇지요.》    《적과 싸워 이기자면 우선 정찰을 잘한 기초상에서 작전방안을 잘짜야하는거구 그 기초상에서 또 전투원 각자가 취할 행동을 알아두어야하는거네.》    《그렇겠지요.》    《그렇겠다는게 뭔가. 이게 바로 꼭 알아둬야 할 요령이란말이야. 그놈이 알을 쓸고나서 먹이를 되게 찾을 때는 잡기가 제일 알맞춤인데 어떻게 해야 그놈을 잡는지 알어?》    《모릅니다. 일후 배워주십시오.》    《일후는 일후고 지금부터알아두는것두 괜찮아.》     박기섭은 이러면서 요약해 알려주었다. 우선 초어가 잘 모이는 곳부터 알아두어야한다는 것, 그 정찰이 끝나면 작고 가벼운 우머르천을 썩 바투 소리도 안나게 살살 몰고가 내심하게 기다려야한다는 것, 그리구있다가 초어가 풀잎을 물고는 그것을 대나 가지에서 떼여내느라 흰배를 해뜩 뒤번지면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작살을 뿌려야한다는 것 등등.    제법의 리론강의였다.    그는 겨울이 오면 끝이 뾰족한 빙천을 갖고 고기들이 모여 월동하는 늪의 깊은 곳이나 강에 얼음구멍을 여러개 동그랗게 뚫고 는 그 속에다 이 구멍에서 저 구멍까지 그믈을 넣어 늘이거나 아니면 후리그믈을 넣어 돌려서 잡군했는데 그건 다음날 아무때든 젊은이가 들어두어야 할 강의내용이였다.    건너편물목에 싸리로 튼 통발을 하나 놓은 것이 보였다. 우머르천을 그곳까지 조심스레 몰고간 젊은이는 그것을 들추었다. 그 속에는 손바닥만큼씩 큰 살찐 붕어가 근 20여마리나 들어있었다. 박령감의 표현구대로 말하면 《OK!》였다.    남병호가 통발에서 털어낸 물고기를 갖고갔더니 로인은 보고서과연 만면에 희색을 가득담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튀기였다.    《ok! 오늘점심은 성찬을 차리게됐구나!》    남병호도 웃었다. 그린곤 의아쩍은 낯색을 지으며 물었다.    《로인님은 젊은이들이 쓰는 그런 현대말 언제배웠습니까?》    《현대말이라니? 어느거말인가?》    《ok라는거말입니다.》    《아니 뭐라?!…이런 까막바보라구야 원!》    더 괴이해하는건 젊은이가 아니라 외려 로인쪽이였다.    남병호는 낯이 또다시 뜨거워났다. 아까는 로인한테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까막바보란 말을 듣고 있다.    로인은 무안을 당하고 거북해진 젊은이를 향해 물었다.    《자넨 지금 나이 얼마라지?》    《올해 설흔여덟입니다.》    《음. 그러니까 난 자네가 아직 어미배속에두 있지 않았을 때 벌써 그 외국말 한마디를 배웠던거로군. 조선전쟁판에 나갔다가말이네. 그게 영어가 아닌가. 그런데는?… 내 자네한테 한가지 묻겠어. 외국말이면 다가 현대거로되는건가? 그게 지금 젊은이들의 리해인가? 아주 그럴싸한 사유로군!》    《…  》    남병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시열고 변명 할 재간이 없었다. 무었이라 대구하겠는가. 조소로 벼려진 로인의 말은 실랄한 비난으로 들렸다. 적잖은 사람들이 개혁개방이 시작된지가 이젠 꽤 오래건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외국것이면 다가 좋고 선진적인것으로만 보는데 습관이 되여있다. 지어는 그들의 언어와 문자마저도 신선한것같아서 그것을 현대적인 표징으로 여기고 있다. 색갈도 가릴줄모르는건 오로지 색망뿐이다. 어딘가 병들어 비탈린 사유가 아니겠는가. 수치스러웠다. 남병호는 자기의 무지가 이 자리에서 동배의 젊은이들을 몰잡아 모욕준것만같아서 부끄러웠다.    《이걸루 뭘해먹을가.》    《아무거나하지요.》    《주장을 내놓아보게. 내 오늘은 자네가 먹구푼걸 해줄테니.》    《로인님두 참.》    남병호는 속이 인츰 개운해졌다.    둘은 함께 고기밸을 땃다.    그들은 절반고기로는 생회를 만들고 나머지로는 고추장을 넣어 밭게 끓이였다. 식욕을 일으키는 구수한 물고기국냄새가 방안을그득 채워주었다.    상이 차려지자 젊은이가 병마개를 따서 술을 먼저 로인의 잔에다 부었다. 그리고나서 자기 잔에다도 조심스레 부었다.    《로인님 드셔요.》    박기섭은 술잔을 들려다말고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런데 오늘 이거 어떻게 된 술인지. 알기나하구 마셔야지.》    《다른일아닙니다. 어제 돈 좀 부쳐왔길래…》    《돈이라니 한국간 각시한테서 왔다는말인가.》    《그렇습니다. 5000딸라를 보냈습니다.》    《5000딸라라, 거 적잖은 돈인걸! 집을 떠난지가 얼마라지?》    《딱 여섯달입니다.》    《그러니까 반년이 되는군. 그 돈이면…》    《가느라 꾼돈은 리자까지 다 물어주게됩니다.》     돈이라느것이 무엇인지! 개도 먹지 않는 그놈의 돈때문에 아글타글하느게 인간이요 아웅다웅하는게 인간이요 죽고사는것도 인간이 아닌가! 젊은이는 안해를 이국멀리에 훌 보내놓고는 내내 속빼운 얼간이 같이 허전하면서 무겁던 시름이 인제야 좀 풀려지는지 기쁨실린 어조로 말해놓고는 로인더러 어서 술을 들라고 권했다.    주량이 좋은 로인은 첫잔을 단모금에 비웠다. 그래놓고는 얼굴에 웃음실린 젊은이를 다시금 쳐다보면서 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자네의 소울주(疏鬱酒)를 마시는군.》    《예, 그렇다구할수도있지요. 거기로 건너가서 소식 몇번 오긴했습니다만 사실 벌이를 어떻게 하고있는지 지울 수 없는 근심때문에 울적했던 내 마음이 다소 해소되니까요..》    《이제는 시름이 놓인다 그 말인가?》    《그렇지요. 벌지 않았으면야 돈을 보냈겠습니까. 정말이지 그 돈만 아니보냈더면 이 병호는 한평생 빚더미에 눌려 일어나지도못하고 죽어버고말겁니다. 3만원넘는 돈 몽땅 5푼리자로 꿨거든요.》    남병호는 이렇게 말해놓고는 지금세상에는 돈없는 사람은 똥값에도 못가요 하고 보탰다.    박령감은 미간을 모으고 그를 보았다.   《하긴 그놈것이 없으면야 간장 한봉지두 사먹질 못하지. 안그래? 그렇다구 돈없이살면 정말 모두가 똥값에두못갈까?》    그러했다. 돈이란 있어야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건 필경아니였다. 젊은이는 자기가 은연중 도리에 맞지도 않은 환금만능을 주장한지라 입을 다물고말았다.                                                                                 3  습먹은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날의 어스름저녘켠.    《왝-왝-》    《왜갈왜갈》     늪쪽에서 왜가리들이 유별나게 겨끔내기로 울어댔다.     왕-왕-》     밖에 누워있던 개도 짖었다.    《저것들이 왜 저래?》     벽가에 이불을 꿍쳐놓고 등을 붙인채 비스듬히 누워 반도체라지오에서 나오는 가정프로를 한창듣고있던 박기섭은 이상쩍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 밖에 나와 보았다. 흰 종이장같은 형체가 아직 뚜렸이 보이고 있는 왜가리 두 마리가 늪에 내려와 앉으려다말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 소란떨고 있었다. 다른때는 이러지를 않았다. 더구나 개까지 곁들어 짖어대니 그저일갖지 않았다. 하여 눈주어 늪을 살펴보았더니 저기 통발을 놓은 건너쪽에 무언가 검은 것이 쭈크리고앉아있는것이 분명하게 안겨들었다.    《아니, 저게뭐야, 곰이구나!》     박기섭은 찔끔 놀라 뇌였다.    《허, 그자식이 렴치두 좋다!》     그놈은 분명 고기를 먹자고 통발을 들추고있는중이였다.     여긴 먼 옛날부터 워낙 짐승이 많았다. 늪동쪽도 그렇고 늪서쪽도 그렇고 산고랑을 얼마파고들지 않아도 여우, 승냥이는 물론 노루나 사슴, 메돼지같은 짐승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북으로 한 5리가량 들어가면 로씨야와 중국 량국간의 국계로 금이 그어지는 흑룡강이 있고 남쪽으로 3리밖에 있는 채석장을 지나 20여리를 더 나가면 박령감이 추억을 묻어두고 온 그 조선족동포만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채석장에서 돌을 캐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거의 무인지경모양으로 조용한 산간지대인것이다. 하길래 국가에서 사냥을 금지시키고 채석장에서 울리던 발파소리가 영원히 멎어버린 후부터는 여기가 진정 산짐승들이 안거를 하는 자유의 령지로 되여버린것이다.      《저놈 안되겠구나.》     박기섭은 시르맨커로 제꺽되들어가 양철세수대야를 얼른찾아 손에 들고 나왔다. 생각같아서는 총을 한방 갈겨 그놈을 멀리 쫓아버리고싶었지만 전해에 현공안에서 치안을 위해 사창은 말끔히 걷어들이는바람에 지금 그한테 쓸만한 큰 흉기라고는 칼과 창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 사용할 정황이 아니였다.     박기섭은 주인이 나오니 더 악패듯 짓어대는 개를 우선말려놓고 우머르천에 올랐다. 그리고는 노젓는 소리를 죽여가면서 가까이로 살살 몰고갔다. 그때까지도 곰은 세상모르고 셈평좋게 앉아 퉁발속에 들어있는 고기를 들춰먹고있었다. 로인은 우머르천이 곰의 등을 떠박아놓을지경 바투접근했을 때 갑작스레 소래기를 치면서 세수대야가 깨질지경 마구두드렸다. 그 소리가 꼭마치 폭죽터지는 것 같이 요란했다. 몹시놀랜 그놈은 와닥닥 뛸쳐일어나더니 그만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아 어디론가 멀리사라져버렸다.       통발은 곰발에 뜯기워 영못쓰게되였다. 그래서 박령감은 그 자리에다 전날손질한 통그믈을 놓고는 이틑날 서산에 싸리비러갔다. 통발을 하나 새것을 만들어야하거니와 고기말릴 발도 하나 새로 크게 결어야했다. 하나있긴해도 삭아서 이젠 아궁이에다 넣어버리기나 할 것이였다.    그는 싸리두단을 베여다놓고 계획대로 통발 하나와 발을 하나 훌륭하게 만들었다. 그러고서도 손은 얼마놀사이가 없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한시간가량 낮잠을 자고나서 그는 늪에 나가 거기다 늘여놓은 그믈을 들추었다. 무계가 거의 반근씩은 나갈것같은 초어가 여나무마리나 걸려있었다. 박기섭은 자기가 저녁에 끓여먹을 놈 한 마리와 개한테 줄놈 한 마리만 골라 내놓곤 나머지는 등때기를 갈라 밸을 끄집어냈다. 그런 후 그는 그것들을 싸리꼬챙이에 꿰어 장대기에 높이올리걸었다. 아직은 건들바람부는 한가을철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쉬파리들이 좋다고 달려들어 하루새에 거기에다 후대를 번식하여 개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버릴것이였다.    이틑날도 아침을 먹자 박기섭은 다래끼를 갖고 시르맨커를 나왔다. 머루가 익었을테니 이제는 그것을 딸때가 된거다. 혼자사는 박기섭이한테는 그같은 유취의 일이 곧 소일거리기도했다. 그는 해마다 늪의 고기를 잡아 팔아서 손에 목돈을 쥐거니와 철이 되면 머루와 다래를 따다 팔거나 잣도 따 팔아 소비돈을 장만했다. 그런건 그가 직접 갖고다니며 싸구려를 부르지 않아도 얼마든 처리되였다. 부근의 한족마을에도 향소재지마을에도 해마다 제발로 찾아오는 되거리장사군이 있어서 산을 나가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값을 쳐 넘겨만주면 그만이였던것이다. 박령감이 지금기르는 마스티브종개를 안아오던 전해까지만해도 맡아놓은 임자가 따로없는 그따위 산열매들은 그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였다. 푼전벌이라도하자고드는 한족들이 철이 채 되기전부터 그것을 제가먼저따려고 짓꿎게달려들군했던거다. 그러다가 한 번 그들중의 누구엔가 횡래지액이 떨어져서야 모두 맥을 놓고 다시는 감히 올 념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한 젊은 사나이가 머루따러왔다가 나무에도 바라오를줄을 아는 사나운 달곰을 만났는데 엉겁결에 소래기를 내질러서 짐승을 놀래워놓곤 미처피하지도못하고 그놈한테 잡혀 각을 뜯기웠던거다. 그런 횡사가 있게되니 박기섭이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 지금의 개를 가져다기르게된거다. 전에 개가 두 마리있긴했어도 기운이 세지 못하니 똥개만 별반나은게없었더랬다.    《이놈아, 너도가자!》    박기섭은 개를 집지키게 놔두지 않고 데리고 산속에 들어갔다.    온갖나무들로 혼성림을 이룬 산은 쨍쨍 내리쬐이는 땡볕에 빛을 바래였고 새들은 재잘거렸다.    《저것좀 봐, 고약한 놈들이지. 면목아는 사람왔는데두 나와서 반길 념은 안하구 그늘속에 숨어 떠들기만하는구나.》    박기섭이 새를 놓고 사설하니 개가 컹컹 두마디짖는다. 그러자 새들은 내던 소리를 딱 그친다.    짙은 잎들을 떠인 느릅나무는 묵묵히 서있고 사시나무는 미풍에도 떨고있었다. 박기섭은 참나무에 겨우살이덩굴이 감긴 것을 발견하자 가까이에 다가가서 손을 댔다.   《잘 만났다. 먼저 네 잎부터 좀 뜯고봐야겠구나.》    박기섭은 겨우살이덩굴잎을 차대신쓰고있었다. 한방에서는 잎과 줄기를《인동》이라부르고 꽃은《금은화》라 하는데 약재로쓰인다. 그래서 박기섭이는 한때 품놓고 그것을 전문채집한적도있다. 그것뿐이아니였다. 여기의 산들에는 다른 초약재들도많았다. 그래서 약초캐기꾼과 심마니들이 드나든다.    거기서 몇발짝가지 않아 머루며 다래넝쿨들이 구름처럼 엉킨 숲이 있었다. 박기섭은 발이 먼저간데의 머루부터 따기시작했다.    새콤달달한 머루들은 과연 탐스러웠다. 오로지 따는 품만 팔면 제 입에 들어올 수 있는 고마운 자연의 과실이였다.    시간이 얼마걸리지 않아서 딴 머루가 반다래끼나되였다.    개가 보이지 않고 가까운 숲 어디에선가 쌕-쌕-하는 소리들려왔다.    박기섭은 팔에 끼고있던 다래끼를 얼른내려놓고 달려가봤다.    개가 오소리를 만나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약자인 오소리는 겁을 대단히 집어먹었지만 개가 자기를 건드리느라 앞발을 들때마다 그렇게 소리내면서 입을 사려물었다.   《조 앙증한놈이 대항하는 꼴보지. 그러다가 물릴라! 관둬!》    박기섭은 개를 말렸다. 개는 주인의 명령을 알아듣고는 더 집작거리지 않았다.    굴에서 나왔다가 재수사납게 사지판에들어 하마터면 목숨잃을번 한 오소리는 어디론가 정신없이내뺐다.   《어허. 이거 왜이래!?》    박기섭이 머루를 다 따갖고 시르맨커에 돌아와보니 꼭 닫아놓고갔던 문이 제대로아니였다. 바람이 그럴순없다. 누군가가 열었다가 제대로 닫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제길헐거. 내가 널 데리고갔더니만 이런 일 생겼구나! 어느 몰상식한 녀석이 주인없는 사택을 맘대루건드리는지 원!》    주인의 말에 개도 분하다는 듯 머리를 기웃거린다.    고맙게도 집안의 물건들은 다친것같지 않았다.    헌데 밖에 나가 돌아보니 장대기꼭대기에 달아놓았던 고기궴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도적맞힌거다. 기분잡칠일이였다. 여직 이런 도난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변방순라병들은 들리면 물이나 달라해 마시고갔을 뿐 주인없어 인적기나지 않을 때는 문도 열어보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리고 전에 여기를 찾아오군했던 물고기되거리꾼도 돌캐던 채석장이도 산열매따기꾼도 산장이도 모두 제 볼 일이나 보고 주는거나 받아가질 뿐 감히 더러운손짓은 하지 않았다.  박기섭이 비록 다리는 성하지 않지만 겉모양부터 호락호락하게 생기지를 않고 점잖으니 누구든 그를 허술히 보지 않고 행동거지를 례절바르게 가꾸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일이 발생하다니!.   《내가 정신없었지. 이제는 자물쇠를 사야겠구나.》    결코 태평가만 부를 세월이 아니였다. 로인은 자기가 이제야 우뢰소리듣고 문득 잠을 깬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박기섭이 여직 너무나도 무경각했던 자기를 속으로 한창 책망하고있는데 마침 마을에서 남병호가 왔다. 여기에 왔다간지 열하루만이다.   《로인님 그지간 무사하셨습니까?》    젊은이는 벙글거리며 문안하고나서 검은색인조가죽가방가방 쟉크를 열었다.   《로인님 부탁하시던 전지약을 사왔습니다. 그리구 신문도 빠짐없이 갖고왔구요.》    전번에 갈 때 사오라고 부탁한 물건외에 이번에도 술을 두병갖고왔거니와 깜빡잊어먹고 미처부탁도못했던 정통편까지 1000여알사와서 로인은 더 고맙고 감사했다.   《거 다음번에는말이네 날 자믈쇠 하날 사다주게.》    로인은 젊은이가 갖고온 신문을 읽으려다말고 말을 꺼냈다.    남병호는 대방의 안색이 어딘가 흐려있음을 보아내고 물었다.   《아니 갑자기 자믈쇠는 왜서요? 여기야 문잠그는 법 모르구사는 고장이라면서두?》   《이제부터는 아닐세.》   《이제부터는 아니라니요? 그러니 내없는연에 도적이라도 들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네. 어느 불청객이 와갖고 기분잡칠노릇했네.》    로인은 그한테 머루따러갔다오는 사이에 고기뀀이 읺어진 일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참 깜빡잊었다면서 따온 머루를 먹으라내놓으면서 도적이 어떤녀석인지 모르겠다고 말꼬리를 붙였다.    남병호가 그 말을 듣고보니 문득 생각나는바가 있어서 먹자고 입가로 가져갔던 머루송이를 도루내렸다.   《근식이는 왜 여게왔더랬습니까?》   《근식이라니! 그게 누군가?》   《누구겠습니까, 지금 현에 가있는 근식이지요. 장용팔의 아들을 모릅니까?》   《장용팔의 아들이라?…현에 가있다지?…그럼 그게 장용팔의 둘째아들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지요. 그가 지금 거기가 무슨 건축회살 하나 꾸렸는데 들을라니 돈을 대단히 잘번답디다.》    박기섭의 눈에 어깨가 딱바라지고 철색의 얼굴에 늘 상고머리를 해갖고 다니던 한 사내의 몰골이 밟혀왔다. 잊어지지 않는다. 동란이 한창심하던 때 그는 중학생반란퇀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헤덤벼치던 맹장ㅡ깡패였던 것이다. 박기섭이 향내를 한바퀴 조리돌림하며 투쟁받고나자 그가 학생반란퇀을 대표해갖고와서《계급원쑤》를 현에까지 끌고가 투쟁했던 것이다.   《아니 그자식이 그래 여기루왔더랬나?》   《로인님은 그래 모릅니까, 오토바이뒤에다 웬 사람을 태우고가던데요. 나는 오다가 마주쳤습니다. 그네들이 여길내놓구서는 어디메루왔다가 가갔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로인님!》   《음-도적은 그놈들이였구나!》    로인은 굳어진 얼굴에 노기를 피여올렸다.    점심때가 됐으니 배속에 넣을 것을 넣어야했다. 그래서 남병호는 박로인먼저 서둘러 우머르천을 타고 늪저켠에 가 로인이 새로만든 싸리통발을 털어왔다.   전번과 꼭같은 물고기요리 두가지가 제꺽만들어졌다. 이번의것은 남병호의 솜씨였다.   《요즘은 어떤가? 거 모두들 출국수속하느라 밀어넣구는 가지두못하구 떼운 돈은 그래 찾기나했는가.》   《못찾았습니다. 어떻게 찾습니까.〈보안〉은 해놓았답디다.》   《그놈을 붙잡아야될텐데.》    어쩐지 남의일로만돼보이지를 않았다. 제 동포가 아닌가. 어쩌면 이렇게 되어가고있는가. 할빈어디서 산다는 사람이 사업고찰단을 조직한다 한국가고푼 사람은 기회를 놓지지말고 자보하라 보증코되니 믿으라면서 인당 예약금 2만원씩 열사람치 20만원이나 제꺽챙겨갖고 어디론가 내뺀것이다. 사기꾼한테 속지말라고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그토록 강조했건만 왜 아직도 눈을 펀히 뜨고 그꼴로 당하기만하는지?…로인은 가슴터질 일이라면서 한탄을 뽑았다.    이백여호되는 동네가 외국나들이바람에 한창 두부장끓듯이 끓고 있었다. 로씨야에 간다 리비야에 간다 한국에 간다…이미 가서 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 가자는 사람도 있다. 이 마을도 외현의 여느고장과 마찬가지로 가는 도경이 여러갈래였다. 친척방문으로 가는 사람, 로무로 가는 사람, 연수이름으로 가는 사람, 고찰단에 들어 가는 사람…헌데 진짜는 적고 거의가 가짜였다. 수속이 그렇게 엄함에도불구하고 지난해의 봄을 이어 올년초에도 젊은녀성 둘이 제 남편과 가짜리혼하고는 생면부지의 한국사내를 따라갔다. 하나는 경상도집며느리 봉금이고 다른하나는 남병호의 각시였다. 그런모양으로 가서 만들어낸 비극이 그래 적은가?   《간 사람한테서 요즘은 소식있는가?》   《이천원들이고 전화를 가설했습니다. 제때에 소식알려구요.》   《그래 통화를 해봤는가?》   《저쪽에서 받는 사람은 있는데 본인이 자리를 옮겨 지금 거기에 없다는 답이 왔습니다.》    《그러니 자기사람하구는 말을 못해봤다 그건가?》    《예 아직은 그렇습니다. 이제 소식오겠지요. 제 딸이 보고싶어서도 오래못견딜겁니다.》    《뉘집의 가정보모로 들어갔다했지?》    《예. 건너가자부터 하는 일이 그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가 무슨일을 하는지.... 딸보고싶어서도 이제 소식보내겠지요, 않그렇습니까.》     젊은이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하는 말이였다.    《농사는 잘되여가고있는가?》    《약을 제때 쳐주지 않았더니 벼가 도열이 숱해갔습니다. 》    《저런! 일곱짐논도 제대로 다루지못하다니? 그렇다면야 올해는 페농이 아닌가!》    《그깟거 먹을알도 없는 농산데요 뭐.》    《먹을알도없는 농사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은 가졌는가?》     늙은이는 제 각시를 보내놓고는 안착해서 농사도 제대로짓지 않고 들떠지내는 그가 낯선사람같아 다시쳐다보았다.                                          4        해맑던 하늘에 갑자기 비를 머금은 매지구름이 떠돌고있다.    남병호가 돌아가자 사흘만에 향정부에서 사람 둘이 박기섭로인을 위문하러왔다. 하나는 면목이 아리숭한 한족젊은이고 하나는 향에서 토지를 관리하는 성이 김씨인 조선족 중년사나이였다. 그 둘은 자그마하고 고요한 늪을 품고 있는 수려한 산색에 심취하면서 피서하기 좋은 여기가 휴양지로는 과연 들고났다고 감탄사를 올리기도하고 왜 여직 이런데가있는것도 몰랐을가하기도했다. 헌데 그들이 노는 거지를 보니 말이 위문이지 속은 딴판이였다.    《로인님 그사이 잘 지냈습니까?》    동포사나이가 로인을 찾아 하는 첫 인사였다.    《덕분에 잘있네. 건데 이 사람은 누구요?》    《모르는모양이구만요, 올년초에 새로올라온 부향장인데요.》    로인이 아 그런가고 인사를 차리려는데 저쪽이 대방을 눈빗질해보다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차림했다.    《왕덕보입니다. 늦게뵈여서 참 미안합니다. 응당 진작와봤어야할건데 몸뺄새가 없어서 인제야 이렇게…》    《미안해할거있소 향장분이 나같은 령감을 잊지 않고 먼길도 마다하구 왕림해주셨는데..... 외려 내가 송구스럽구만.》    김씨가 이켠이 말을 끝맺기바쁘게 얼굴에 웃음을 바르면서 입을 다시열었다.    《로인님은 아직두 건재하시군요. 무병하다니 우리도 정말기쁨니다.》    《그런가. 감사하네.》    로인이 만면에 희색이 피자 부향장이 입을 다시열었다.    《그런데 로인님, 로인님은 이젠 년세가 적잖은데 그러다가…지금은 무병한 것 같지만 모릅니다. 혼자 그냥 이런 산지에 있지말고 이젠 벌방에 나가지내는게 어떻습니까.》    《날 여기서 가라는말인가?》    《현에 양로원있는데 거길가면 곁에서 돌봐줄사람이 있지요.》    《그건 나도아네. 그래 날 부양 할 사람 없는것같아서 념려되는가. 있네, 있어. 심양에 내 조카 하나있구 북경에두 하나있네.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구하네. 둘다 여기루 왔더랬지. 심양조카는 지난겨울에 왔다갔구 북경조카는 올봄에 왔다갔지.》    《아 그랬습니까. 그럼 따라가실거지 왜 가지않았습니까?.》    《왜 가지않았는가말이지. 그건 내가 여기서 혼자래두 그냥살고싶어서였지.》    《성미두 참 별낳네. 그래서야되겠습니까. 조카들이 자원해 모시겠다면야 거기루가야합니다. 가시오.》    《안가겠네.》    《안가서됩니까. 가시오.》    《왜 이러는가. 가고 안가는거야 내 일이 아닌가.》    《물론그렇기도하지만 충고하니 로인님은 노여워말고 꼭 들어야합니다.》    《내가 당신의 충고를 꼭 들어야 한다? 대체 무슨 리유에?》    로인의 안색이 좋지 않게 돌변하는 것을 보고 김씨가 왕가먼저 입을 열어 해석조로 알려주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여기를 이젠 우리가 써야겠기에.》    《여기를 쓰겠다? 무슨말인지? 》    《정말입니다. 써야합니다.》    《아니 뭐라? 향에 그래 부쳐먹을 땅없어 나더러 여기를 내놓으라는건가. 보다싶이 여긴 산골이구 있다는건 늪뿐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구온게 아닙니다.》    《그럼? 내가있는 여기 땅속에 꼭 캐내야 할 보배라도 있다는건가. 과연 그렇다면 난 지금이라도 두말않고 떠나겠네.》    《그런게아닙니다. 사실은…》    《사실은 어떻다는건가?》    《향에서 여길 더러 팔아버리자구그럽니다. 늪하고 산 얼마가량을요.》    느닷없이 닥쳐든 골치거리였다. 남의 보금자리를 빼았자고들다니. 심기사 단통 뒤틀린 박기섭은 찌무룩해서 보다가 화가 솟아 토라진 음성으로 캐물었다.    《무슨소린지. 그래 누구한테 뭘 하느라구 팔자는건가?》    《저…잠시 그건 말못하겠습니다.》    《잠시 말못하겠다? 좋아. 그럼 말하지말게. 그런데 자넨 저 늪의 소유권이 누구한테있다는거나 알구와서 이러는가?》    로인이 감사납게 심사를 부리니 김씨는 두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인데. 원래의 주인이 떠나면서 로인한테 넙겨주었으니 지금 소유권이야 물론 박로인께 있지요. 우리도 무리하게 내놓라는게 아닙니다. 늪면적만한 땅을 떼어드리거나 아니면 늪을 돈으로 값을 쳐 드리면안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야 박로인은 리익보면 보지 손해는 절대안볼겝니다.》    《내가 그런걸 따질 사람인가. 돈이 아니라 금덩이를 준대두 난 싫네.》    박기섭은 괘괘떼면서 청간을 퇴박놓고는 두사람 다 두말다시 번지지 못하게 입을 막아보냈다.    향간부 둘은 돌아갈 때 이제 곧 다시오리라 했다. 한데 그리고 간 사람들이 한달이 지나도록 다시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느라니 어느덧 추석이 돌아왔다.    하늘높이 비구름이 깔렸다.    이날 아침 일찌기 남병호가 전에 늘 타고다니던 자전거를 타지 않고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새것이였는데 외국제였다.    박령감이 물었다.   《제건가?》    그것을 신나게 타고온 남병호는 벙글거리며 대답했다.   《예. 제거아니구 남의거겠나요. 하나샀습니다.》    박령감은 담통 큰 자식이 멋이 좋구나 하는 눈매로 그를 피끗훝고나서 차체에 한자(漢字)로《飛燕》이라 씌여있은 것을  보고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비연패라!》   《예. 비연패입니다. 한국제지요.》   《값이 얼만데?》   《이만원입니다.》   《뭐! 이만원이라?》    값이 기껏해야 몇천원일줄로 알았는데 입이 딱 벌어질지경 인지라 박령감은 일시 멍해졌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 돈 안주고야 어떻게 이런걸 만지기나한다구요.〈혼다〉는 한 대에 만원 더 붙어 삼만원인걸요.》    산품자랑인가 값자랑인가? 박기섭은 자전거를 타고서도 얼마든 다니는 시골길에 값비싼 오토바이를 타고 멋부리는 젊은이의 소행이 순간 한심하게만 보일 뿐이다.    전화를 놓고서도 저쪽에서 련락이 없어 취향이 오리무중이여 속을 은근히 태웠던 남병호는 요즘 뜻밖에 또 안해가 부친 돈 2,000딸라를 받았다. 요즘 딸라와 인민페교환시세가 8,2밖에 안되니 그 돈만 갖고는 20,000원짜리 물건을 살수도 없는거다. 남병 호는 부족분은 남한테 꾸어서 보태갖고 그것을 샀던 것이다.    《이제 또 벌어서 붙이겠는걸요 뭐.》     박기섭은 그사이 값비싼 외국제오토바이를 사갖고 그것을 모는 재간을 배우느라 그슬러그런지 아니면 부러 자랑하느라 여기저기를 싸다녀서 그런지 전만 더 감숭감숭해진 젊은이의 얼굴을 다시보며 물었다.    《애의 엄마는 그래 지금 어디에 가 있다는가?》    《서울시 서북구 어디라구 돈깍지에 썼습디다. 》    《전화나 편지로 말은 없구?》    《없습니다. 아무튼 돈을 부치니 됐습니다. 아무렴…》    《그래두 그게 어떻게 무슨일을 해서 번 돈인지는 알구서 써야할게 아닌가.》    《전번같이 또 어느집 보모노릇하거나 아니면 거기 어느 식당에 들어가있겠지요, 뭐.》    《식당일도 여러 가지야. 거긴 말루는 식당이라지만 술집인거  많아 그런데를 들어가서 접대원아가씨노릇이나 작부노릇할지두 모르잖아. 내놓구 사내들의 돈빨아내느라 허리춤푸는 요리간두 아주많다던데.》    《요리간은 몰라두 술집이야 여기두 쌔쿠버리지 않은가요.》    《그래두 환경이야 여기완 판다르지. 사회제도가 달라 거기서는 개방이 돼도 여기서는 안되고 금하는게 있어.》    박기섭은 외국에서는 허락이 되고있는 성자유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비록 나이 많아 늙기는했어도 직감력은 무디지 않고 살아있는 그였다. 리혼했으면 이젠 남이지 뭔가. 뼈마디에 피가 한동이씩 고인 녀석이 제힘갖고 살아가지두못할주제면야 아예 뒤여지기나할거지 분에 없는 향락을 남처럼누려보겠다고 지지 아기자기살다가 불쪽에 달린 제 장기는 쓰지도못하고 가두어 넣고 썩히면서 고운 각시를 생면부지의 한국남자에게 주어 따라보내다니! 애초에 그렇게 해서 돈벌어보자고 타산한것부터가 원체 틀려먹은 한심한 노릇같아 로인은 한마디 일깨워주었다.     《사람의 마음은 바위에 새겨놓은 글이 아니야. 자넨 제 각시가 마음변하지 않을거라구 어떻게 장담을 하는가. 돈보낸다구 그저 시름놓지 말구 어디서 무슨일을 하고있는지를 알아보라구. 면목아는 사람 거기가있는게 여럿된다했지.》    《사인정탐을 내놓으란 말씀인가요. 그렇게 하면 부부지간에 감정이나 상하게 만들지 않을가요. 우리는 정말 가짜리혼을 했습니다. 전 그가 이제 돈 다 벌구는 꼭 돌아오리라믿습니다. 약속을 그렇게 단단히 하고 갔으니까요.》    《그런가. 녀인이 마음 정말 철과 같다면 어디 그렇게 믿어보라구. 늙은 것이 젊은이가 들기좋아하지 않는 말을 곱씹으면 로망으로 보일거니 더 말치않겠네.》    남병호의 귀에는 그의 충고가 과연 쓸데없는 소리로들렸다. 그는 로인한테서 낚시를 달라해서 그걸갖고 시르맨커뒤의 물후미에 가 점심먹을 념도 하지 않고 한나절 혼자서 낚시질만했다.    오후가 되자 날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습기를 머금은 강바람이 북쪽골을 타고 불어왔고 찌프린 하늘밑으로는 해묵은 솜같은 구름장이 몰려다녔다.    《에구, 이거! 빨리 집에나가야겠구나!》    온갖잡념에 몰려 시간가는줄을 모르고있던 남병호는 인제야 정신을 벌떡차리면서 고기잡이도구들을 급급히 거두었다.    《아니, 날이 저무는데 가자구그러는가. 집에 가두 혼자아닌가. 날이 저문데 있게나.》    박령감의 권고였다.    홀아비신세에 이제는 학교를 다녀야 할 딸을 데리고 살아가자니 지겨운일이였다. 그래서 남병호는 학비와 식비를 대주기로 하고 이곱살먹은 딸애는 할빈에 있는 튼형님네 집에 보내여 거기서 학교를 다니게 하고 있다. 하니까 박로인의 말과같이 가봐야 혼자인 것이다. 이제 떠난다면 락자없이 가다가 중도에서 비를 맞을것이다. 그래서 남병호는 가지 않고 묵기로 작정했다.    날은 스산했다. 두 사람은 어둑시그레한 집안에 앉아 바람에 흩날리면서 소란스레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면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지리한 장밤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둘다 일찍부터 드러누워 잠충이같이 잠만잘수는 없었다. 이럴때는 말주머니를 풀어놓는게 상책이였다. 꺼내놓고 할 수 있는 화제거리는 많고많았다. 박기섭은 젊은이의 기분을 잡치우지 않으려고 한국과 거기로 간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더는 입밖에 내놓고 운운하지 않았다. 신문을 보거나 방송을 듣거나 떠도는 풍설만들어도 근년들어 외국에 벌이를 나갔다가는 돌아오지도못하고 잘못된 사람이 적잖았다. 이를테면 어느 신문사의《하해》한 기자가 로씨야에 장사를 갔다가 돈도얼마못벌고 사소한 오해로 인해 마찰이 생겨 그곳의 폭력조직인《마피아》의 손에 살해되여 묶이운채 종이곽속에 들어 쓰레기장에 처밖혀있다가 경찰들에 의하여 발견된 일이며 아재비조카가 거기의《얼모즈》와 짜고 벌이를 나간 제 마을사람들을 털어먹은 일이며 로무로 한국의 원양어로선에 오른 사람이 거기의 뱃놈과 등지고 지낸탓으로 리유불명하게 바다에 떨어져 목숨을 잃은일이며 리비야에 차몰이를 갔다가 정체모를 악당손에 차를 빼앗기우고 목숨까지 빼앗긴일이며…이런것들다가 다시씹어보면서 사고해볼만한 이야기였다.    긴 한담 끝에 남병호가 지금의 자기태도를 설토했다.   《솔직히 말해 전 그래서 지금두 외국에는 돈벌이를 나가고싶은 맘없습니다. 벌어도 안전하게 벌어야지요.》   《그러면 돈벌이를 어디에는 갈수있다는말인가?》   《심수에 가고십습니다. 듣자니 거기는 우리 동포가 가는 교회가 둘있는데 어려운 사람 밥먹여주고 일자리알선도한답디다.》   《그게 어느때의 일인가. 전에는 그랬다는 신문글을 내가 본것같네. 거기에다 밝혔더군 수천명이 맹목적으로 몰려드니 그네들도 받아당하기 힘든형편이라구.》   《그렇다구합디다. 그래서 전 아무리 가고싶어도 거기는 가지 말아야겠습니다. 》    남병호의 결졍이다.    로인이 흥미를 가지면서 캐듯 물었다.   《외국에는 안전이 념려돼서 못가구 심수에는 일자리찾기힘들어서 못가구 그럼 어디루 가기싶은가?》   《북경에 가기싶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사람들이 들어와서 꾸리는 기업이 숱하답니다. 》   《한국기업이야 어덴들없겠나. 산동성 하나에만도 천여개나 된다잖어. 거기 청도나 위해로도 갈수있겠는데 왜 하필 발불이기 제일어렵다고들하는 북경에는 가려는가?》   《거기는 다르지요. 나가서 생활할바에야 차라리 수도가 낫지요. 나라의 지도자들을 볼수도 있구 외국사람두 자주볼수있구… 아무튼 그 어디보담도 볼거리많아 식견도 자연히 더 넓어질것만은 사실이 아닙니까. 안그렇습니까?》   《허허허…》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서 로인은 웃기만했다.    솔직히 말해 일은 하기 싫고 돈은 쓰기싶고 나가벌자니 능력은 없고 그래서 머리통박을 굴려가면서 기껏생각을 했다는 것이 , 궁여일책(窮餘一策)이라는 것이 제 녀편네를 한국에 시집보내는것이였다. 리혼했으면 리혼이지 가짜라는게 뭔가. 법은 그런 사정을 보아주지않는 것이다.    박기섭은 자기를 존중하고 믿어주면서 가까이 접근하는기간에 어느덧 친근한사이로 되여가고있는 이 젊은이가 초중공부까지해서 판무식은 면했지만 허우대뿐 정신은 만신창이니 바보나답지 않은 안타까운 인간존재임을 오늘에야 똑똑히 알게되였다.   《우후ㅡ우후ㅡ》    비는 점점 그쳐가고 어디선가 칡부엉이 운다.     두사람은 장밤 애기하나니 늦잠이 들었다.    
269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댓글:  조회:3569  추천:1  2013-08-30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1959년, 기아가 사천성에 만연될 때 26세의 나이였던 주전삼(朱全森)은 원달현전구 비묘향 중심교교사 (原达县专区碑庙乡中心校教师)였는데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적인 자산계급우파분자였다. 수십년 후 그는 세권의《达州市志》편찬공작을 맡고 대약진 등 그 세월의 각골명심(刻骨铭心)의 정치운동에 대해서 실사구시적으로 밝혀냈다.  (来源:南方都市报)   아래것은 그가 쓴 의 부분적인 글이다. 주전삼은 말했다. “3년재해기간에 달현전구에서는 볓십차례나 사람을 먹는 안건이 발생했는데 지금도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사람을 먹은것이 그 한곳뿐이 아니였다. 그런일이 재해지구에서는 거의다 발생했던 것이다.” 주전삼의 그 말들은 과연 틀리지 않는다. 전에는 탄압을 받을까봐 무서워 감히 말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하나하나 비밀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있다. 류소기부인 왕광미(王光美)와 류원(刘源) 등 사람이 쓴 (河南人民出版社2000年版)에 보면 류소기는 “7천명대회”때 이미 모택동과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사람이 이같이 많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를 기록해놓을것이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있는데 그래 고발이 올라오지 않을수있는가.”   《달주시지(达州市志)》는 1959년~1961년사이 달현전구에서 련속삼년간이나 가물이 들었다면서 그 가물이 1959년 6월 30일부터 시작해서 달현、선한 등지에 련속 49~67일이나 지속됐고 1960년에는 각현에 가뭄이 보편적으로 20일~47일이나 지속됐노라고 밝히였다. 1961년여름에는 중남부에 가뭄이 들었는데(54일간)그로인하여 련3년간 량식이 감산을 하게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전삼은 그것이 순전한 “인화(人祸)”였다고 밝히였다. 한편 그러고는 그래도 물은 있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이였더면 사람이 굶어죽을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것이라면서 원인은 촌마다 강철을 제련하는데 동원되다보니 곡식을 다 지어놓고서도 가을철에 그것을 제때에 걷어들이지 못해 밭에서 그저 썩어버리게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밝혀놓았다. 문제는 에 밝힌것과 같이 그것이 전적으로 1958년 5월에 중공8대 2차회의에서 “열의를 다내여 앞장서기에 힘쓰며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총로선을 내와서 “대약진”을 일으킨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총로선, 대약진에 뒤를 이은 인민공사화를 덛붙여 이른바의 세폭의 붉은기라했는데 그것은 아시당초 만들지도 높이들지도말았어야 했을 것이였다. 아무러한 경제적인 기초도 없이 경험도 없이 더구나 능력도 없이 공산주의에 빨리뛰여든다고 떠따고운것은 순전히 국가발전규률을 무시한 맹용(猛勇)에 불과한 무모한 짓이였던 것이다. 무슨필요가 있었던가? 그것은 그 어떠한 창조도 변혁도 력사적의의도 전혀없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중국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속심말도 감히하지 못했다. 대약진전에 ‘정풍운동’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기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중앙에서 하달하는 지시라면 옳건 그르건 무조건 집행해야했다. 그리하여 기층간부들은 어떻게 했으면좋을지 몰라서 쩔쩔맸다.”   “세폭의 붉은기를 좋다고만해야지 나쁘다했다가는 끝장을 보고마는 것이다.” 이것은 주전삼(朱全森) 그 한사람만의 말이 아니였던 것이다. 민중에 대한 그같은 탄압과 통제는 오로지 상층의 무능한 폭압을 과시했을 뿐 그것을 그 이상의 어떤 유용한 명책(明策)이였다고 할수있는 근거라고는 지금까지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다.   중앙의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아 증구량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엄한 책벌이 내렸다. 하여 그것이 무서워 아래에다 중앙의 지시를 그대로 내리먹인 자의 두손에는 많은 혈채가 묻게되였던 것이다. 그 집행자의 운명은 또 어떠했는가? “1961년, 정책이 좀 돌아져 달현은 기층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체현된 것인데 그것인즉 곧바로 ‘군벌작풍반대운동’이였다. 하여 어떤 사람은 애써 사업하고도 나중에는 비판투쟁을 받은것이다.”라고 하면서 주전삼(朱全森)은 달현 안운공사 쌍하구촌지부서기 정도복(郑道福)의 죽음을 례로 들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였는데  투쟁맞고는 속을 끝내풀지 못해서 현초대소변소에서 목을 매 죽고말았다.”   다음것은 지난해 5기에 난 문장인데 그것을 쓴사람은 최민(崔敏)이고 문장제목은 라는 것이다. 핵심제시(核心提示) “모택동이 내린 장편지시는 이러했다: 우경기회주의분자와 반당분자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주류가 무엇인지 전혀모른다. 그들은 하찮은 일(鸡毛蒜皮小事)을 쳐들고는 위대한 당과 위대한 인민의 사업을 창궐히 진공하니 대부등에 곁낫질하듯 가소롭기 짝없다. 요즘 우리는 많은 성, 시, 구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있는데 그것들은 다가 그릇된 기풍은 적어지고 정기가 오르고있다는 첩보다. 형세가 제일좋은데는 귀주다.”         과연그렇단말인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때 벌써 기황은 광활한 중국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굶어죽는 현상이 가장엄중한 곳은 사천, 하남, 안휘, 감숙, 귀주, 청해, 하북, 산동, 호남, 광서 등 성과 구였는데 예로부터 곡창이라 불리웠던 강소, 절강, 광동 등 성들도 마찬가지로 적잖은 사람이 굶어죽은 것이다. 아사(餓死)현상이 그같이 엄중했건만도  모택동은 정신을 차릴념은 하지 않고 현실반영을 우파의 악의적인 공격으로만 치부했거니와 무자비한 탄압수단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게 그래 지모쏸피(鸡毛蒜皮小事)란 말인가? “귀주성에 굶어죽은 사람이 제일많았다. 가장엄중한 시기는 1959부터 1960년 5월사이였다.... 미담현(湄潭縣)은 지형이 평탄하고 경치가 수려하거니와 귀주의 곡창이라 불렀다. 백성들이 전에는 풍의족식했다. 그러나 ‘대약진’이후부터 이곳의 백성들은 엄중한 재난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위판공실책임자가 소개하는 것을 보면 1958년에 전현의 인구가 62만이던것이 1959년부터 1960년 5월사이 정상적인 사망 1만명외에 비정기적인 사망이 12.5만명이나되여 전현총인구의 20.16%에 달했다. 남은 사람이 49만인데 전현적으로 전멸된 가정이 3001호나 되고 5000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그 외에 외지로 도망친것이 5000명도 넘는다. 전현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지고있다.....정황을 료해하느라 안락공사(安洛公社) 안락대대에 갔다. 그 대대는 모두 29호에 인구가 150명이라는데 가보니 몽땅 굶어죽고 산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금사현(金沙縣)은 실지 8만명이나 굶어죽었건만 조광옥(趙廣玉)은 숫자를 썩 줄이여 4.7만명이 굶어죽었다고 말한것도 죄가 되어 붙들려가 판결받아 8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1961년 3월 12일에 그 사(社)에 와있었던 공작대가 철거하게되자 나는 다른 두사람과 함께 남아서 뒷처리를 했다. 3월 20일, 우리 셋은 현에서 개최하는 정풍에 참가하느라 남개공사(南開公社)를 지나게되였다. 도중 산을 넘고보니 목이 마른지라 물을 먹으려고 길가에 있는 한 농가에 갓더니 거기서 40대의 부녀가 마당에 앉아 채도자(菜刀子)로 어린애의 시체를 찍고 있는것이였다. 이미 팔과 다리각이 떨어졌고 잘라낸 머리는 한켠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각을 뜯고있었는데 보기끔찍했다. 내가 왜서 아이는 죽였는가고 물었더니 녀인은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죽인게아니요, 애가 아침에 굶어죽었어요. 온집사람 다 굶어죽는판인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했다. 그러면서 ‘저 독한 사람이 제새끼를 먹자구해요!’ 하면서 남편을 저주하는 것이였다.....그것말고도 이 마을에는 사람이 죽으면 먹어버리는 일이 벌써 여러번발생했다고 한다..... 나는 1961년5월에 그곳을 떠났는데 전 수성현(水城縣)에 굶어죽은것이 8만명이나 된다.“   등자력(邓自力ㅡ1920—2010)은 사천광안(四川广安)사람인데 193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공작을 했다. 혁명전쟁년대에 그는 섬감녕변구 류수병탄사령부의 정치교원, 연안대학체육지도대지도원, 사회과학원연구실간사, 359려민운고고장, 2야전군민운과과장, 하남로남현현위위원, 사평현위부서기, 호북통성현현장을 지내다가 새중국이 건립되여서는 천남행서합강현위서기,사천성총공회부주석을 거쳐 성문화국국장, 당조서기 등 여러직무를 맡았었고 사천성정협과 인대부주임을 지내다가 3년전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3년재해기간에 사천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면서 자기는 사람고기를 먹은 사람을 제눈으로 직접보기까지했노라했다. “ 기황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했다. 그래서 끝내는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고 그것을 파는 현상까지 발생한 것이다. 의빈시에서는 어린애를 얼려 제집에 데려다가는 죽여 삶아먹었거니와 그후부터는 죽여 삶아서는 토끼고기라 속혀 팔아먹기까지 했다. 사람고기를 먹으면 부증(浮症)을 고친다는 소문이 나돌아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은 사람고기를 찾느라헤맷다. 전국이 식량난에 몰려 아사지경에 이르었건만 그 누구나 감히 입밖에 말을 내지못했다.” 그가 한 말이다.     서방의 어느 한 인사가 중국의 그시기의 력사진상을 언녕밝혀냈다. 그러니 관방에서는 서방의 그 인사는 고의적으로 중국을 모욕하느라 “중국에서는 재황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참상이 생겼다.”고 요언을 날조했다면서 질책했다. 그것이 어쩌면 날조였단말인가?    “1961년3월,흐루쇼브는 우리 나라에 대해 태도를 표시했는데 그것인즉은 대부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에다 밀 100백만톤과 들여온 큐바사탕 50만톤을 공급해줄수있다는 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제2선으로 물러나 사업을 하지 않고 광주에에 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대한 문제는 간섭했다. 주은래, 등소평, 팽진 등은 비행기를 타고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소리를 듣자 단마디로 량식은 싫다 사탕은 받을수 있다면서 남이 던져주는 턱찌끼는 받아먹지 않는다고했다.” (楊尙昆日記) 양상곤이 일기에 쓴것같이 모택동은 자력갱생의지가 과연 견강한것 같아보인다. 그런데 그따위배짱이 도대체 무슨소용이 있단말인가? 큐바사탕이 그래 중국의 아사(餓死)를 해결했던가?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할줄을 아는 부모래야 부모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000만이 넘는 백성의 생명으로 제 패기(覇氣)를 바꾼것밖에 뭐가있는가?!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래 鸡毛蒜皮没小事이란말인가?.....봉건독재자의 랭혹하고도 잔인함 !  
268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댓글:  조회:3220  추천:0  2013-08-30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전에는 옛말에서나 들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세계가 차츰 글로벌화되면서 좀이라도 컴퓨터를 다룰줄을 알면 모르던 세상일을 많이알수 있게되는것이 오늘의 실태다. 정보가 열리여 연줄이 사통발달했다. 보아하니 그래서 이 세상에 아마도 영원히 감춰질 비밀이란 있을것 같지 않다.   문화대혁명(1966년5월16일~1976년10월)이 끝난지도 어언 37년철이 되건만 그 후유증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고있다.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보거나 인터넷을 보면 그때를 회억하고 의론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내가보건대도 그것은 공연히 묵은장부를 뒤집고 되씹는 무료한 짓거리는 아닌것 것 같다. 그당시 광활한 중국땅 각처에서 불상사(不祥事)들이 너무도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바다. 한데 헤아릴 수 없는 그 많고많은 원안(怨案)들 중 여지껏 그 발생원인이 해명되지 않은것, 특히는 인명과 관계되는것들, 이를테면 자살(自殺)이든 타살(打殺)이든 멸족(滅族)이든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않될것들이 많고도 많은 것이다. 이게몇핸가? 문화혁명이 끝난지 오랬어도 꼭마치 뒤를 보고 씻을것을 씻지 않은것 처럼 뒷처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적잖은 문제가 의연히 생기여 꼬리를 물고있다. 하긴 력사의 장하에 비기면 물방울에 불과하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결코 등한히 지내버릴 일이 아닌것이다. 늦기는 해도 지금이라도 밝힐건 밝혀야한다.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는 아무때건 풀이되여야 개운한 것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란 순 유토피아를 꿈꿧던 로망한 독재자의 도용물(盜用物)이였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지? 그어떤 위대한 장거가 아니였다. 그것은 온 나라를 인위적으로 혼란에 빠뜨림으로 하여 하마터면 세상에 천년문명고국(千年文明古國)이라 자랑해온 강산을 망하게할번했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 조작자는 이제 아무 때던 력사의 심판을 철저히 받고말것이다!   장마비에 미친개날뛰는 격이였다. 그때는 자기야말로 위대한분에게 가장 충성하는 “보위자”인양, 무산계급의 철저한 “혁명자”인양 분장하여 나서서 보복적인 분풀에 혈안이 되여 날뛴 악한이 너무나많고도 많않았던 것이다. 뒤에서 철부지 “홍위병”들을 추기고...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어떤 학자는 지난때의 문화혁명을 “애들의 장난” “악한들의 보복놀음”였다고 총괄해 말하기까지 했다. 문자그로 문화적인 혁명이 되지 못하고 야만스런 놀음과 보복이 되고만 그것을 “전대미문의 생사람잡이 혁명”이였다고 평론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기 의도와 좀만 맞지 않아도 배척하면서 펀펀한 사람에게도 죄를 만들 씌워서는 전정대상으로 몰아 목에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 우롱하고 지어는 죽게까지 만들었다. 이 세상에 원귀(寃鬼)가 많아진건 바로 그때문이다. 보복자의 살기가 충천하면서 너울쳤던 그 세월에 어떤곳서는 지어 “사류분자”, “오류분자”하면 아예 멸족까지 시키는 잔인무도한 학살마저 주저없이 감행되였다는것은 이미 들어난 사실인데 온 세상사람이 다 알아야 한다.    한때 당장 공산주의로 돌입한다면서 야만의 짓을 했던 캄보쟈ㅡ 크메르루즈(紅色高棉)를 내놓고는 이 세상에  그런 야만이 더는없는줄로 알았었는데 지내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가 태여나 자란 여기 중국이였다!  협오가 괴여오른다.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하고 내내 불신을 하고 미심쩍어 했던것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해명이 되고있는 것이다. 나는 인민의 복지를 만든다는 사회주의제도하에서야 아무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야 발생했으랴 했는데 오늘에 이르어 알고보니 전혀 그런것이 아니였다. 아직껏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채 점철된 죄악의 사사건건들이 감춰진것이 너무도 많고많다는것을 근년들어서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앞에 쓴 에세이에 처럼 현대식인종으로 살아온 인간이 아직 얼마더있을지...    우리 나라가 왜 그모양 그꼴이였던가? 생각하면 낯이 뜨거운일이라 시야를 돌려 국경너머를 보니 “식인종”의 행실이 결코 우리 중국에서만 생긴건 아니였다. 다른 어느 나라에건 거의 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이 생기게 된 원인과 그 정도는 판달랐고 포악과 잔인의 정도역시 다른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찾아낸 결론이라면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식인사건도 중국에 비하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2002년12월12일,독일의 에 “식인광대작면포권”이라는 모골이 송연한 참안을 보도한바있다. 46살에 나는 아민메이Weisi는 동성련애자였다. 경찰에서는 1997년에 그가 벌써 사람 하나를 먹은것을 알게되였다. 교외에 있는 그의 집 랭장고에서 살점과 사람의 뼈를 조사해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진에서 벌어진 그 “식인광”안건은 그당시 온 독일을 들썽케했다고 한다.   어느땐가 하버드대학에서 사람이 사삼의 고기를 먹는 안건을 놓고 공개적인 변론을 한적이 있는데 강사의 전달에 학생들의 반영은 대단해서 들끓었다고 한다.  안건은 이러했다.  호주를 떠난 “제미요”배가 항행중에 침몰하게 되였는데 선장 더들리, 항해사 스티븐, 선원 브룩스와  17살나는 웨이터 이렇게 넷이 요행살아났던 것이다. 바다에서 한주일이나 표류하다보니 먹을것이 다 떨어졌다. 웨이터는 다른사람의 권념도 듣지 않고 바닷물을 먹어 몸이 형편없이 허약해졌다. 이때 선장이 말하기를 한사람은 죽어야 남은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항해사 스티븐이 반대해나섯기에 결정짓지 못했다. 또 하루지났다. 선장은 항해사가 머리를 저쪽으로 돌려 정신을 딴곳에다 파는 사이 선원 부룩스에게 눈짓하여 웨이터를 죽이게 했다. 물론 선장은 사전에 웨이터를 위해서 기도를 올린 것이다. 항해사는 잔인한 살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살기위해서는 웨이터의 고기를 먹는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들 셋은 다행히 구원되여 마침내 영국으로 가게되였다. 그러나 그들 셋은 다가 체포되고말았다. 살인죄로 기소되였던 것이다.  그들의 변명은 사람하나를 죽였기에 세사람의 목숨은 살려낼 수 있은게 아니야였다. 하지만 법원측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원인이야 어떻던간에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은 모살죄임에 분명하다면서 겨우살아온 그들 셋을 다 사형에 언도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서 개인의 리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도덕론에 드는 하나의 안건을 례로 든 것이다. 내가 만약 피고라면? 내가만약 법관이라면?... 나는 어떤태도를 가질것인가?   미국력사에서 있었던, 사람이 사람을 먹은 안건을 하나 더 알아보다.  전세기 40년대, 미국에서는 서부로 금캐러가는 이민이 붐을 이룬적이 있다. 지점은 캘리포니아였다. 황금몽을 품은 사람들이 사면팔방에서 그리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가 행운의 시기라고 여겼다. 하여 “만족할 때”라 명명한 대오가 형성될 지경 캘리포니아로 진군하는 무리가 형성된건데 그들의 장거리 려정이 기실은 “사망의 길”이기도했던 것이다.   1846년 여름의 어느날, 그들먼저 여러패의 인마가 벌써 포드브릿지에 모여  캘리포니아를 바라고 출발했던 것이다. 한편 이쪽의 “만족할 때”무리에서는 대장 헤이스팅스가 우선 길을 알아봐야겠다며 홀로 먼저떠난건데 그는 지름길을 택했던 것이다.   “만족할 때”대오의 사람들이 포드브릿지에 도착하고보니 만나야 할 사람 헤이스팅스는 언녕가버리고 거기에 없었다. 향도자(向道者)를 만나지 못하게 된 그들은 부득불 자체로 달리 방법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분은 전부터알려진 길을 따라 가고 일부는 헤이스팅스가 택한 지름길로 가기로했다. 그들은 모두해서 87명뿐이였는데 마차 23대를 보유하고있었다. 새로 선거된 대장은 이름이 조지맥도널드라는 중년의 사나이였다.     7월 31일,그들은 포드 브릿지를 떠나 머나먼 장도에 올랏다. 그런데 두주일되자 그 “만족할 때”의 대오는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이 유타바사산에 이르러 보니 산비탈이 몹시 가파롭거니와 너무험해서 마차를 넘기기 과연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등골에 땀을 흘려가면서 모지름을 쓴끝에 6일만에 60Km되는 험지를 끝내넘고야말았다.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그들은 가고가서 9월 30일에는 마침내 네바다주에 이르었던 것이다. 거기는 전부터 알려진 길들의 교합처였다.   그곳을 떠난 그들은 11월1일에 터내기호(후에 “만족할 때 호수”로 고침)에 이르었다. 터내기호는 해발 1800m인지라 10월인데도 벌써 눈꽃이 날리였다. 그달말이면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판이다. 하여 길을 재촉한건데 그들이 높이가 2200m에 이르는 산어구에 닿고보니 때는 이미늦다. 그들은 그곳의 맹렬한 폭풍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별방법없이 기나긴 엄동을 터내기호수가에 되돌아와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보다 더 험악한것은 식량이 다 떨어져 기아를 이겨내기 어려운 그것이였다. 사실은 그들이 터내기호로 되돌아오기전에 벌써 사신(死神)이 덮쳐들기시작했으니 “만족할 때”의  대오는 멸망에 직면한 것이다.   8월 29일,루크하 Luolan이 죽었다. 그는 페염에 걸렸던 것이다. 10월 5일,제임스리드가 자위를 하느라 그만 존 스니드를 죽였다. 3일후,루이스 키스버그가 차를 타지 못한채 뒤에 떨어진 베른쿠퍼라는 로인을 찾자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로인을 찾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로인은 대오를 따라오지 못했다. 아마 홀로헤매다가 죽어버렸을 것이다. 10월 13일이 지난후의 어느날, 그들을 따라오던 두 독일이민이 돈을 빼앗느라 짜고서 저희들과 함께오던 다른 한 독일사람을 죽이였다. 10월 20일,윌리엄파커가 총을 닦던 삼촌이 오발하는통에 그만죽었다.    그밖에 4명의 성원이 먹을것을 구하느라 대오를 떠나 SAT 시험포트에 갓다. 그중에서 찰스 스탠이란 사람이 10월 19일에 돌아왔는데 그는 과연 먹을것을 가져왔거니와 인디안인 둘까지 데리고왔다. 그러고보니 원래의 87명에서 남은 79명에다 인디안인 둘을 더 합쳐져 호수가에서 엄동을 지내게되였던 것이다. 기한을 정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나머지량식마저 다 먹어버리니 극도의 아사지경에 이른것이다. 하여 그들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길러온 개를 잡아 먹었고 나중에는 수레를 끌는 말들을 하나하나 잡아먹기시작햇다. 그러다가 더 잡아먹을것이 없게되니 짐승가죽과 담요를 삶아 묵을 만들어 먹었다.    10월 16일,24살나는 발리 윌리엄이 먼저 굶어죽었다. 그러자 같은날, 성원들중에서 신체가 가장 든든하다는 사람 15명이 어떻게 하나 먹을것을 구해와야겠다면서 엄한을 무릅쓰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났다. 남자열가운데 넷은 식솔이 있었다. 그리고 다섯은 녀성이였는데 그중 셋은 아이를 남기고 떠나온 것이다. 그들이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나온지 6일만에 기진맥진한 스탠튼이 14명을 그냥 앞으로 가라해놓고는 자기는 떨어져 고스란히 죽음의 신을 맞았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다. 떠나온지 열아흐레되니 남은 14명은 자연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을 화제에 올리게되였다. 그결과 그들은 누가 죽으면 누구를 먹어버리기로 결의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별수없었던 것이다. 한데 숨도채 거두기기전에....  23살의 홀몸인 앙투안이 비몽사몽간에 자기의 팔과 어째가 떨어져 불속에 들어가는것을 의식했던지 눈을 떳다감는것이였다. 그모양을 보면서도 누구도 그를 살리주려하지 않았다. 젊은 앙투안은 이렇게 죽고말았다. 이어서 프랭클린 Gelei푸, 그다음에는 패트릭고언, 그리고는 그를 이어서 르 사무엘머피... 산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살코기를 베여내여 불에 구워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제집사람과 친척만은 먹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시체를 그같이 다 먹어버린 후에는 낡은가죽신을 먹었다. 이듬해의 1월 5일에 23살난 르 사무엘머피가 죽었다. 포스터부인은 그의 시체를 먹어버렸다. 이어서 정신이상에 걸린 포스터선생이 인디안인 둘을 잡아먹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15명이던것이 이제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    33일간 세찬 눈보라를 뚫고 나온 나나머지 그 일곱사람은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이르러 백인정착지에 닿고야말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의 1월 31일에 첫패의 구원소조가 “만족할 때 호수”로 갔고 뒷이어 세 개소조가 그리로 구원하러 떠나갔다.   한데 그먼저 두달반사이 훨씬많은 사람들이 사신을 막아내지 못해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2월말에 이르러 호수가 캠프장(营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3월 13일, 윌리엄 포스터가 13명의 구원대원을 이끌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와보니 그사이 두아들은 키스 버그와 다른 사람 넷과  함께 다른데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어서 만나지도못했다. 하여 그는 게속 아들을 찾으러 떠났다. 한편 4월 17일,마지막구원조가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는 숨이 붙어있는것이 키스버그 한사람뿐 그 외는 다가 말라버린 시체였다. 키스버그는 자기가 다른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견결히 부인했다. 결국 "만족할 때"는 성원 87명중에서 죽은것이 40명뿐, 반수이상이 어쨌든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여기서 끝맺고, 아래의 두편은 이미공개된 우리 중국의 사천달주3년재해실기(四川达州三年灾害纪实)중의 단락이다.   1). 포양공사 팔관구 삼대(蒲阳公社八管区三队) 반소화(潘素华) 녀인은  당년에 나이 41살. 가정성분 지주. 본남편은 1951년도 일찍죽었다. 반소화(潘素华)는 군중개조를 피하느라 1952년도에 빈농 당전무(唐前武)와 결혼했다. 하지만 부부감정은 좋지 않았다. .....3월 16일 밤, 남편 당전무(唐前武)가 물에빠져죽었는데 그녀는 이틑날에야 관리구에 와서 관을 만들어 그를 이미파묻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밤 반소화(潘素华)는 슬픈것처럼 울더니 밤중에 채칼을 갈아갖고 가 모를 파헤치고는 남편의 사지를 뜯어내고 살고기를 발라냈으며 내장은 꺼내갖고 집에 돌아와 먼저끓여먹었다. 그리고나서 살코기는 전부삶아 곰고기라 속혀 한근에 5원씩 11근 12냥을 팔았다.....식당사무장 황영태(黄荣太)가 이일을 눈치채고 그의 집을 수색한결과 손과 변비물, 뼈 등이.... 발견되였다. 반소화(潘素华)는 골수에 사무치는 계급한이 있었기에 계획적으로 그런짓을 한것이라 인정된다. 계급의 적을 힘있게 때려엎기위해서 법에 의하여 반소화(潘素华)를 체포했다.      2). 주옥광(周玉光), 녀, 부유중농. 숭의공사삼관구이대(崇义公社三管区二队)사람. 현녕 39세. 남편은 해방전에 군인몸으로 병사했음. 주옥광(周玉光)은 토지개혁시기 사업을 적극했기에 부녀대표로 되었다. 그러나 통구통소를 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이 부단히 신입되고 두갈래길간의 투쟁이 첨예하게 되자 그녀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거니와 자본주의사상이 농후하여 합작화의 길을 가지 않으려하다가 공사화후에야 입사했다....3월 16일오후경 그 대대의 두지전(杜之田)의 죽은지 2일되는 어린애(2살) 를 파내여 그의 머리를 떼내고 사지를 찍어냈고 내장은 강에 버리였다. 그리고는 시체를 집에가져다 삶아먹었다. (四川灌县县委办公室关于“两起不正常死亡事件”给温江地委办公室的报告。 一九六O年三月二十六日)
267    에세이 현대 식인종 댓글:  조회:3969  추천:1  2013-08-24
                                에세이 현대 식인종   지난일요일, 가족별 야외놀이를 가게되였는데 자가용차 한대로는 두집식솔 아홉의 자리가 되지 않아 나와 로친과 큰며느리는 손주녀석을 데리고 부득불 택시에 올랐다. 목적지는 동쪽시교에 있는 대운하삼림공원(大運河森林公園). 택시운전수는 로탕(老湯)이였다. 그는 늘 우리 아파트단지에서 손님을 맞길래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로탕(老湯)은 차가 천진방향으로 뻗은 널다란 국도에 오르자 말문을 여는것이였다. “김선생도 신문을 봤겠지요? 요즘 또 부패분자를 한무리나 잡아냈다고합니다. 과연잘한일이지! 이제 문화대혁명이 다시오면 그런놈들을 싹 다 잡아서 깝지를 발카놔야합니다!”   이건 뭐 잡아낸 부패분자의 깝지를 발카놓기위해서 문화대혁명이 다시와야한다는 말인가?!.... 그 소리를 들으니 속이 꿈틀해났다. 오늘에 이르러 국가의 당정일군가운데서 부패분자가 많이 생겨나고있길래 백성이 텃뜨리는 불만인데 그의 그러한 불만속에는 상상키어려운 살기가 너울치고있었다. 개혁개방을 한 이래 국가의 경제가 고속도로 발전하고있는 반면 당정기관에 부패분자가 너무도많아서 생기는 불만이니 자연스러운데 그렇다고 지나간 문화대혁명이 다시오기를 기대해서야되겠는가? 과연그런다면 그것은 삐뚤어도 한심하게 비뚤어진 사유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당정기관인원이 부패해지는데 대해서 저주하고 격분하는건 옳으나 탕쓰프처럼 문화대혁명을 다시금 불러와서는 절대안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리용가치가 없는 고목이 있다해서 불을 놓아 삼림전체를 태워버리면야 그건 현명한 방책일수 없잖은가? 쓰지 못할 고목만 베여버리면 문제는 해결될 일이라고 본다..   우리 국가가 지금은 이전처럼 개인이 독재를 부려 민주를 압살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만하면 이제는 법제가 제대로세워졌다고 본다. 그러니 법제를 밀어놓고 혼란스러웠던 그 군중의 집체전정을 다시바라는건 력사를 역전시킬뿐이다. 아직까지도 적잖은 사람들이 탕쓰프와 같은 의식에 매이여있는것 같아서 저으기 불안스럽다. 나는 우리 나라는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면서 따라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없애기위해서는 전국민에 대한 한차례 의식정돈이 과연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더더구나 전날 로류(老柳)가 나와 한 말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흉벽을 치고있다. “광서대도살(廣西大屠殺)을 연구해온 사람이 말하는데 글쎄 그가 방문을 한 당년의 식인자(食人者)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죄를 느끼기는 새려 되려 당당해하더랍니다. 뭐라는지 압니까, ‘그때는 계급투쟁이였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는 판인데 그래 살려줘서야되겠는가’하더라나! 그게 사람을 죽인 리유라는게지!” 사실보면 “혁명자”들의 손에 살해된것은 다가 이른바 “흑오류분자(黑五類分子)”아니면 그때 새로나타난 “반혁명”이였다. 그들 대부분이 문화혁명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거나 서로 태도가 다른것이였다. 한데 그들은 억울하게 살해되면서도 거의가 반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녀자면 자기를 강간해도 륜간을 해도 꼼짝못하고 당하기만 했고... 그러다가 결국은 무참히 살해됐고. 살해된자에 대한 만행이 그저 그정도가 아니였다, “혁명자”들은 그들을 살해하고나서 칼을 빼들고 간과 심장을 뜯어내여 그것을 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올해의 2월 에도 그같이 실렸다니 믿지 못하겠거든 한번 찾아 읽어보기바란다.   나는 전에 일제가 동북을 점령하고 대륙을 침략하면서 그같은 식인마(食人魔)의 짓을 감행한걸로 알고있었는데 어쩌면 말끝마다 백성을 위한다는 공산당체제하의 국가에서 그같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험악한 일이 다 발생한단말인가?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무지한들 아무렴 어쩌면 그렇게까지 야만이 된단말인가!?....   어느 문건에선가 통계낸것을 보면 “문혁”기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00만이 넘는데 그 원인과 경위와 형태가 각각이였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내지 못해 자살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혁명자”의 야만스러운 폭팽에 자살로 항거한 이도 있고 “혁명군중”의 시달림에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산계급전정기관에 잡혀 총살당한 자도 있는데 거기다 패거리싸움에 죽은건 숫자를 알아낼 수 없을지경 기지부수라 한다.   우도우(武斗)는 위대하다는 훙태양이 제창한 것이다. 그 무슨 요무(要武)니 문공위무(文攻武卫)니 전면내전(全面内战)이니 “천하가 복잡해져야 천하를 크게다스린다”느니 그 외에도 있다. 위대한 령수의 뜻이라면 백성은 찍소리말고 그대로 움직여야했으니 그의 요구대로 전면내전이 일어나 성마다 거의 패거리싸움 우더우(武斗)를 한 것이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몽둥이로 뚜드려패는것은 너무도 원시적인 놀음으로 치부했던지 무기를 썻다. 각가지였다. 총, 기관총에다 각종대포 지어는 땅크, 군함까지 동원되는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그같은 우도우(武斗)에 그래 죽는 사람이 적을수있겠는가?!   이만줄이고 광서(广西)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일을 좀 더 상세히 말해보자. 그곳에서는 발생한 각가지의 죽음에서도 가장상상키어려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먹히운건데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무섭거니와 참혹하기 그지없는것이여서 누구나 들어보면 가슴떨릴것이다. 사람이 야수에게 먹히웠다면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력사에 기재된것을 보면 농민기의자 황소(黄巢)무리들이 사람을 잡아 고기를 먹었다했고 대약진시절 3년재해기간에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는일이 발생했다고 여러사람이 쓴 자료들이 폭로했다. 한데 그것들은 다가 량식이 없어 극도의 기아상태에서 발생한 것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기간에 광서(广西)에서 생긴 정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것이다. 굶어서 사람고기를 먹은게 아니였다. 그들은 다가 가장위대한분께 무한히 충성하는 군중과 간부로서 그들이 사람을 잡아 고기를 먹은것은 개인감정이 아니라 계급감정과 혁명각성이였다고 지금까지 변명을 한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고 간을 뜯어먹느라 두손에 살인자의 피가 랑자하게 묻었던 자가 지금까지도 벌을 받지 않았거니와 그때의 맘이 퍼렇게  살아 머리를 쳐들고다닌다니 한심한 일이다. 누가 그에게 사람을 잡아먹은 일을 물으면 그는 좀치도 주저없이, 지어는 떳떳이 대구를 하더라는거다. “그랬어, 내가 그를 죽였어. 그누가 물어봐도 난 겁날것없다, 나는 붉은마음갖고 혁명을 했으니까. 온마을 사람들이 나를 옹호한거다. 모주석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를 죽이지않으면 그가 나를 죽인다고! 그때는 너죽고 나죽고하는 판이였지. 계급투이였지!” 그는 사람을 죽여 심장을 뜯어내여 그것을 썰어서는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집에갖고가 먹으라했다고 한다.   광서에서 사람을 잡아먹은건 개별적이 아니고 우연한 행동인것도 아니였다. 그같은 일은 보편적이고 조직적이고 집체적인 것이였는데 지어는 상급의 격려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광서의 상림(上林)、몽산(蒙山)、융안(融安)、종산(锺山)、박백(博白)、령산(灵山)、귀현(贵县)、무명(武鸣)、륭안(隆安)、대신(大新)、무선(武宣) 등 현에서 모두 빼놓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그중에서도 무선(武宣)이 가장흉악했다고 한다.   맨처음에는 몇이서 사람을 잡아먹고는 무서워서 벌벌떨었다. 그랬다가 그들은 차츰 판을 크게벌리고 기세도도해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마지막에는 사람잡아먹는 운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많은 혁명군중과 간부들이 같이먹었다.      그들이 나중에는 사람을 먹는것에 인이 박혀 며칠건너 한패씩 붙잡아 투쟁하고는 꺾꾸러뜨리였다. 그러고는 죽었던 살았던 가리지 않고 살을 베내고 심장을 오려내여서는 말끔히 먹어버렸다. 살, 간, 심장, 신장, 팔, 다리, 손, 발 다 먹어버렸다. 먹는 방식역시 여러 가지였다. 삶아먹고, 끓여먹고, 지져먹고, 볶아먹고, 튀겨먹고... 먹히운 사람은 이른바 “계급적”이라는 지주, 부농, 반혁명, 우파, 반역자, 특무와 대립파의 성원이였다.    “계급적”의 친지들, 말하자면 그의 부모나 자녀들마저 불행을 면치못했다. 지어는 젖먹이 어린애마저도 살려두지 않았다. “계급적”의 보복을 방지한다면서 “계급적”을 잡아먹어버린 후에는 전가족을 죽여버렷으니 그야말로 멸문(灭门), 멸족(灭族)을 한 것이다.    1968년 6월 15일에 무선(武宣)현에서 사람고기를 먹는 대규모적인 야만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오성대대(五星大队)의 “련지(联指)”민병  리곤수(李坤寿), 팽진흥(彭振兴), 리진화(李振华) 등은 “조반대군(造反大军)”의 류업룡(刘业龙), 진천장(陈天掌) 등 네사람을 끌어다 조리돌림투쟁을 하고서는 그들을 때려죽였다. 그리고나서 간을 뜯어내고 살을 베여 대대부(大队部)에 갖고가서 한끼먹었다. 그러고는 그날부터 8월말까지 그 현의 “조반대군(造反大军)”의 간부를 비롯하여 자기들과 관점이 같지 않은 군중 75사람의 심장과 간과 고기를 먹었는데 먹히운사람가운데는 남, 녀, 로, 소 다 있고 공인과 농민, 국가간부와 당원도 있었다.  무선동령중학부교장 황가빙(武宣桐岭中学副校长 黄家凭)은 일찍이 혁명에 참가하여 유격대 18대대장을 했고 해방후에는 창오현부현장(仓梧县副县长)을 지냈다. 그런데 “문혁”이 시작되자 그는 “반역자”로 몰려 7월 1일밤에 학교의 혁주부주임(革筹副主任) 사동(谢东)이 주관하여 연 투쟁비판회의에서 살해되였다. 그런것을 다음날새벽에 황패농(黄佩农)과 장계봉(张继锋) 등 몇이 먹었는데 일부의 골격(骨骼)만을 남겼다. 그같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바람이 온 동령중학교(桐岭中学校)에 불었기에 도처에 벽돌장을 고이고 기와장을 올려놓은 작은 가마들이 생겨나 연기가 하늘로 피여올랐던 것이다.  무선현(武宣县) 무선중학(武宣中学)에서는 후에 선생과 교장을 다 투쟁하고나서는 교정에다 부엌이 있는 간단한 화로를 만들어놓고서는 그들을 하나하나 배를 갈라죽이고는 삶아먹는 참극까지 빚어냈던 것이다. 아직 미혼전이였던 녀민병 하나는 남자만 죽이고는 그의 생식기만을 먹었기에 이름이났거니와 입당하여 관리가 됐는데 무선현혁위부주임(武宣县革委副主任)으로까지 급을췃다.    한가지 더있다. 로파하나는 어디서 사람의 눈알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하루종일 비판투쟁을 하는데만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맛다들면 피해자를 땅에다 엎어뜨리고는 바구니에서 가위를 찾아서는 눈알을 뽑아갖고는 가버렸던 것이다.  령감태기 몇은 전문 사람의 대골속에 있는 뇌장만 빼먹었다. 그들은 가리반(돌이숫둘)에다 갈아서 예리하게 날을 세운 가느다란 철관을 갖고다니면서 사람이 죽은것을 발견하기만하면 대골을 깨고 전문 뇌장을 빨아먹었던 것이다.   무선현(武宣县)에는 잡혀먹힌 사람이 백몇십명되는데 그중에 살코기를 먹히우고나서 머리까지 잘리운 사람이 1명, 심장과 간을 떼운 사람이 56명, 생식기를 잘리운 사람이 13명, 발까지 몽땅먹히운 사람이 18명, 살아서 배를 갈리운 사람 7명이였다.  “有人说,武宣县被吃的人不少于200人。《武宣县志》第418页称全县非正常死亡526人”。   광서의 기타다른현에서도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잡아먹은 숫자가무선(武宣)보다는 못하다. 그러나 잔폭하기는 무선(武宣)만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1968년 4월 25,포북현북통공사정경대대(浦北县北通公社定更大队)에서는 24사람을 네 번에 나눠서 죽이였는데 그들의 배를 가르고 간을 떼여서는 술안주를 했다. 그 공사에서는 180명을 죽이였다. 흉수 류유수(刘维秀), 류가금(刘家锦) 등은 류진견(刘振坚)을 때려죽인 후 17살도 채안되는 그의 딸을 륜간한 후 때려죽였다. 그러고는 배를 가르고 간을 끄집어냈고 유방을 잘라냈으며 음부를 베여냈다. 그일을 조작한 자는 죽은 사람의 처를 재가하라 칙령을 내리고서는 그녀한테서 증명비(证明费)까지 받아냈던 것이다. 이러루한 일들을 라렬하자면 아직많지만 여기서줄인다. 더알겠거든 인터넷을 뒤져보기바란다. 한데 말해둘것은 광서의 그 많은 살인자, 식인자(食人者)들이 아직까지도 처벌을 받지 않았거니와 의연히 권리를 잡고 해먹는다는 그것이다. 광서의 군중들은 이미 “사람을 잡아먹은 자를 다시는 간부를 시키지 말라!”고 강렬히 요구했다. 한데도 광서의 최고당국(듣는말에 의하면 원 자치구혁위주임이며 후에는 해방군총정치부주임으로 오른 韦国清)의 대답인즉은 “왜서 간부질을 계속하지 못한단말인가?ㅡ 사람을 먹은 사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할게 아닌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성은 어쨌든 해야한다. 반성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걷은 사람같지만 의연히 야만인 것이다. 중국은 언제면 백성이 다 깨여날지?  이것이 문제다!  
266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2) 댓글:  조회:4250  추천:0  2013-08-21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2)    “성적” 6월 14일부터 9월중순에 이르는 기간, 명령에 의해서 활동을 정지할 때 까지 우랑구에서만도 심신원(审讯员), 간수원(看守员), 순라원(巡逻员)을 포함한 435명에 이르는 전안인원(专案人员)들이 반혁명추종(反革命追從)을 한 결과 “홍위병”, “위병단”, “청년단”, “청년군”, “기의단”, “동맹당”, “신민당”, “자위당”, “백호단”, “맹군”, “홍색전투대”, “방공자위당”, “상서회향단”, “571”, “517”, “703” 등 무려 36종류에 이르는 온갖의 반혁명무리를 들춰냈는데 “반혁명”이라는 딱지를 붙인 검은명단에 오른 사람이 모두 1359명, 그중 우랑구사람이 1253명이였다. 그때 우랑구의 총인구가 35160명이였지만 로동력은 부녀까지 포함시켜 얼마안되였기에 5명중 1명은 “반혁명분자”로 몰린셈이도였던 것이다. (《中共铜仁地委关于松桃苗族自治县牛郎区“追反”冤案平反昭雪情况的报告》,1978年10月11日)   “교대반”에 들어간 “학원”들이 교대한것을 보면 강령이 있어서 군사조직인것 같기는했지만 그 활동과 수단은 꼭마치도 어린애들의 작난과도같았다. 반혁명수단: 1, 간부집의 닭을 도둑질한다. 그러면 간부는 고양이가 닭을 도적질하는줄로 알고 밖에 나올것이다. 그럴때 손쓴다.   2. 집체창고에 불을 지른다. 그러면 간부가 불끄러나올테니 기다렸다가 그때 손쓴다.                [ 转自铁血社区 http://bbs.tiexue.net/ ] 반혁명암호: 왼손을 머리우로 올린다. 반혁명표식: 왼손에다 풀묵음을 쥔다. 반혁명강령: 1. 빈하중농에 나눠줫던 집을 지주한테 되돌린다.   2. 부업을 틀어쥐고 번돈은 꼭 생산대에 들여놓는다.   3. 주민은 공급을 받는다. 4. 새집을 짓는다. 5. 젊은이는 녀편네를 얻게끔한다. 6. 먼저 당원을 죽이고 후에 단원을 죽이며 크고 작은 간부를 다 죽인다음에는 빈하중농 절반쯤 죽여버린다.    “반혁명”성원이 제공한 최고직위는 사장(師長)이였다. 이러한 “반혁명”조직과 “반혁명분자”는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현공안국 형정고 고장 전은지(田银芝)가 1976년 9월 13일에 현위에다 회보한것을 보면 “사패공사‘반혁명’조직명칭은 오헌보로부터 교대한 것이다. 오헌보가 룡무운을 발전시켰다는데 룡무운의 교대를 보면 그런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룡무운이 전명량을 발전시켰다는데 전명량은 말하기를 ‘농민혁명당’이라했다. 전명량은 류상모를 발전시켰고 류상모는 말하기를 ‘민주당반공군’이라 했다. 류상모가 진해성을 발전켯는데 진해성은 말하기를 ‘반공구국군’이라했다. 오헌보가 구륙장과 오병성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민공대’라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오병성은 그것이 ‘지하당’이라했다. 사패공사의 오헌보가 1976년 4월 25일에 교대한 기록을 보면 “심문이 멎지 않고 그냥 계속되는데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니 방법이 없다. 모른다고 하면 상급에서는 믿지 않지 하는수없이 아무렇게나 ‘국민군’이라고 이름을 지어댔다.” 우랑공사 중재대대의 한 간부가 1978년에 성(省), 지(地), 현(縣)에다 바친 자료에다는 다음과 같이 썻다. “7월 13일, 오모(某)와 양모(某)는 회보하러 공사에 올라갓다가 우랑구위서기 룡문비와 마주쳤다. 룡문비는 그를 향해 “전명량이 룡후생을 ‘반혁명’영장이라 적발했다는데 자료는 하나도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돌아가서 자료를 하나 만들어내라구.”했다. 공사의 무장부장 룡모(某)도 “당신들이 단단히 틀어잡지 않구서야 ‘반혁명’을  어떻게 잡아낸단말인가?” 고 했던것이다.  하여 7월 15일밤에 대대지위의 다섯사람이 룡후생을 심문했는데 다른 한 민병소분대의 7명해서 모두 12명이 하나를 놓고 기세를 부렸다. 그들은 담을 키우느라 그전에 돼지고기를 안주하여 술 5근을 마셨다.  마모(某)가 먼저 룡후생을 소학교에 끌어다 높이달아매고 때리면서 단독으로 심문했다. 룡후생은 아픔을 이기지 못해 자기가 영장이 옳다했고 전건화와 전수화도 같은성원이라했다. 민병 양모(杨)가 캐물었다. “영장이라했지? 그렇다면 련장은 느구고 패장은 누구며 반장은 누군가? 또 지도원은 누군지 그것도 대라!” 이에 룡후생은 없는것도 있다면서 대라니 어떻게하라는가했다. “나는 승인하지 않을테다. 너희들이 나를 때리니 승인한거다. 또 나보고 련장, 패장을 대라니....”  양모(某)는 화나서 웨쳤다. “저자식을 죽게 때려라!” 하여 7월 16일새벽 3시좌우에 룡후생은 과연 맞아서 죽고말았다.  우랑대대민병부련장 막강은 “교대반”의 학원을 우선 달아매고 뚜드리기부터했는데 독하기가 그지없었다. 그자는 참대꼬챙이로 호회(胡淮)의 얼굴을 때려 볼모양없게 만들어놓았다. “학원” 서전문(舒典文)이 쪽지를 써서 호회(胡淮)에게 주어 막강전(莫刚前)역시 “반혁명”조직에 가입했다고 물어먹게했다. 이미가르켜준방법 준칙ㅡ 한사람의 공술은 듣기만하고 두사람의 공술은 믿으며 세사람의 공술이면 결정짓는다고 한데 따라서 전안조(专案组)는 막강전(莫刚前)의 입에서 말을 받아내려했던 것이다. 막강전(莫刚前) 하도 억울해서 입을 다물고말았다. 그러니 그들은 두 손목을 뒤로 묶어 달아매고 입을 열때까지 뚜드려팼다. 막강전(莫刚前)은 과연 견디지 못하겠으니 자기가 “반혁명”이 옳다고 “승인”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오른손은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했기에 병신이되고말았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의 “반혁명추적”동기는 무엇이였던가? 사건을 심입조사하라고 우랑에보냈던 현공안국의 형찰고 고장 전은지(田银芝)지가 당시 현상위원이며 현혁명위원회 부주임을 지낸 마수청(麻树清)을 만나자 그한테  한 말을 보면 알수있는 것이다. 마수청(麻树清)은 회억록에다 대개 1976년 8월쯤인데 자기가 장흥에서 현으로 돌아오니 한 공작원이 우랑에서는 “반혁명추적”이 대단하다면서 이미벌써 20명이나 죽었다고 알려주었다했고 이 소리를 들은 마수청은 곧바로 공안국에 가서 전은지(田银芝)를 불러 정황을 물어봣노라했다. 이에 전은지(田银芝)는 그와 아래와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구위서기가 급을 추기위해 성적을 올리느라 막짓을 하고있습니다! 내가 몇 번 궈고했건만 소용없습니다. 듣지 않고 점점 더합니다. 반혁명을 추적하는 일이야 본래는 공안부문에서 맡고 군중을 배합시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데도 룡문비는 지금 군중을 발동해서 ‘반혁명추적’을 한다합니다. 그래서 ‘반혁명’을 이미 많이들춰냈거니와 날이갈수록 자꾸 더 많아진답니다. 무슨 반혁명이 그리많을까? 따라서 매를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하니 그저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빨리 석맹명서기께 알려야겠습니다. 그이만이 룡문비를 말려낼것 같습니다.”  조사 7월 7일,현공안기관에서는 우랑구의 “반혁명추적”방식을 알게되자 당장 “교대반”을 걷어취우라했다. 그러나 현위서기인 룡문비(龙文飞)은 공안국의 의견을 절대접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공안에서 해내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해내는데 뭐가 잘못인가! 끝까지 해낼테야다!” 7월말 8월초에 전현적으로 열린 간부회의기간에 지위서기 위립정(魏立政)이 우연히 룡문비(龙文飞)와 마주쳤는데 룡문비(龙文飞)는 그에게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정황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의 말인즉은 교대반학원가운데서 반혁명명단에 오른것이 600명이 넘는데 죽은것이 8명이라는 것이였다.  이에 위립정(魏立政)은 룡문비(龙文飞)를 향해 될수록 사람은 죽지 않게끔 하라고 했다. 8월 3일,룡문비(龙文飞)는 처음으로 현상무위원회에다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상황을 회보했다. 그는 첫째는 자살한것이 여럿되고 둘째는 죄를 교대하지 않고 도망치려했길래 격분한 군중들손에 얻어맞아죽은것이 꽤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다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이 주대없이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은 성적이 주요하다느니 큰방향은 정확하다느니했고 우랑에는 반혁명조직활동이 확실히 있다느니 600명가운데는 반혁명이 확실한 자가 있는가하면 가짜반혁명도 있을수 있다느니 풍을 쳤으며 “교대반”은 거두지 말고 계속조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느니 사람이 죽게는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했다. 회의는 공안국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우랑의 “반혁명추적”공작을 접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8월 4일,현공안국형정고 고장 전은지(田银芝)가 공안인원4명을 거느리고 우랑으로 갔다. 그가 가보니 마침 그곳의 “교대반”에서 사람을 달아매고 뚜드려패고있었는데 과연 지독했다. 하여 당장거두게하는 한편 8월 11일에 전화로 현공안국장 류장학(刘长学)에게 류청석(刘请石)과 석맹명(石孟明)을 데리고 우랑에 와서 제눈으로한번 보라고했다. 8월 13일,우랑에 온 석맹명(石孟明)은 전은지(田银芝)의 회보를 듣자 몹시화를 냈다. 그날녁에 회의를 열었는데 석맹명(石孟明)은 말하기를 우랑구에는 “반혁명”이 있으니 꼭 밝혀내야지 손이 물러서는 안된다고 했다. 현공안국에서는 한사람더보내여 협조케했다. “교대반”에 든 주요인원에 대해서는 꼭 철저히 밝혀야한다했다. 그러면서 석맹명(石孟明)역시 정책에 주의해야한다, 죽는일이 다시생겨서는안된다고 했다. (《中共铜仁地委关于对石孟明同志在牛郎区“追反”中所犯错误及处理意见的报告》,1978年11月22日)   8월 27일,전은지(田银芝)는 현위에다 지구정법령도의 지시를 전달했는데 그것인즉 우랑에서는 “반혁명추종”을 함에 증거를 중시해야지 강박하여 진술한것을 믿고 증거로해서는 안되거니와 사람이 또 죽어서는안된다, “교대반”은 구1급으로 보류한다, 공사대대의 “교대반”은 전부 걷어치운다는 것이였다. 그때 “교대반”에 의하여 죽은것이 이미 24명이나되였던 것이다.    9월 8일,성위는 동인지위에 전화로 성공안청의 림부처장 등 4명을 송도(松桃)에 파견하여 우랑의 “반혁명추종”정황을 조사하게된다는 것을 통지하면서 “교대반”을 당장거둬야하며 이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겠끔 주의하면서 “교대반”인원을 우선 돌려보내지 않고 정상적인 대우를 해주며 병있는 사람은 치료해줘야야 한다, 령도가 잘못한것은 솔직히 자아비평을 해야한다, 지위는 인원을 파견하여 조사료해하게 하고 상세한 보고자료를 작성하여 성위에 올리고 처리의견을 들어야 한다. 지위는 송도자치현위에 통지하여 성위의 의견을 철저히 관철집행하게 하며 사람이 죽는 현상이 재발하지 않도록해야한다, 현위에서는 우랑에 사람을 보내여 선후사업을 잘하게 해야하고 정황을 상세히 조사하여 지위에 써올리고 처리의견을 들어야 한다.   9월11일,동인지위는 송도자치현위에다 다음과 같이 통지했다. 지위에서는 석맹명(石孟明)동지가 직접 우랑 “반혁명추종”의 공작을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교대반”에서 병이났거나 잔페됐으면 치료해주어야한다. 성공안청 림부처장、지구공안국 륭명성(隆明星)부국장이 송도에 와 현위와같이 련3일간 구헌정(欧献庭), 전은지(田银芝) 등 사람들이 우랑에서의 “반혁명추적”에 관한 상세한 상황회보를 들었다. 이때에 “교대반”에서는 사람이 이미 29명이나 죽은 것이다. 전은지(田银芝)는 회보를 끝내면서 “중국청년당”이란 근본없다, 자료를 보면 맞지않고 서로 모순된다. “복흥당”이라는게 뭔가, 그런것이란 없었다, 다 그렇다, 지금의 자료들은 몽땅 강박적으로 말하게해서 받아낸 증거들인 것이다라고했다. 성공안청의 림부처장이 말했다. “성위의 지시는 ‘교대반’을 전부거두라는 것이다. 회보에 볼것같으면 우랑에는 ‘반혁명’조직이 있다고했다. 그런데 그것을 파내느라 29명이나 죽게만들었으니 이건 전성의 력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이 말했다. “상급에서는 우리보고 중지하라는데 마치우리가하는 일이 다 틀리는것 같다, 그래 조금도 성적이 없단말인가? 너희들이 나를 내려줄러도 나는 굽어들지 않을테다. 너희들이 성위에 일러바쳐 어디 나를 철직시켜보라!”   9월15일,현위에서는 연구를 거쳐 “교대반”의 사업을 전부중지하고 없애라는 상부의 지시에 응부했다. 허나 성과 지구에서 의례 안건전체에 대해서 조사해야 할 것이였다. 만약 그저 죽은 사람에 대한 처리에 그치기만 한다면 실제상 그것은 모든 억울한 사람에게 찬물을 끼엊는 짓으로밖에 되지 않을것이였다. 반면에 또한 군중의 적극성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계급적들의 파괴활동을 타격하자고나선 군중의 적극성을 보호함에 불리할 것이였다. 이럴때 책략이 나와야 했다. 류장학(刘长学)의 회억을 보면 9월 15일후의 어느날(20일전),석맹명(石孟明)이와 류장학(刘长学) 등 우랑에 가서 우랑구위의 회보를 들었는데 우랑구위는 구기관에서 의연히 “반혁명추적”학습반을 꾸려야한다는 것이였다. 이에 류장학(刘长学)은 견결히 반대했고 석맹명(石孟明)은 우랑지구의 요구를 믈리쳤다. 9월 20일,성과 지구의 공작조와 현위부서기 오건덕(吴建德)일행은 우랑에 가서 조사했다.  9월 22일,성과 지구의 공작조는 돌아가고 오건덕(吴建德)과 전은지(田银芝) 등은 우랑에 그냥남아서 조사를 더 깊게했다. 11월 15일,오건덕(吴建德)、정은지(田银芝)등은 조사료해한데 근거하여 정황을 현위에다 보고하였는데 얻어낸 결론인즉은 우랑공사에는 반동조직인 “복흥당”과 “청년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목은 송도인(松桃人)이 아니고 아직도 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였다.  사패공사의 조사를 책임졌던 공안인원 리시발(罗时发)은 회보하기를 사패에는 “반혁명”집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오헌보(吴宪保)、오병성(吴炳成), 구륙장(欧六章)에게는 반혁명언론이 있다. 기층군중의 의견은 오헌보와 오병성 두 사람은 “반혁명”으로 정해야한다고 했다.    은암공사의 조사를 맡앗던 공안인원 사세선(查世鲜)은 회보하기를 은암공사에서는 “반혁명”활동을 발견하지 못했고 “반혁명”언론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어 오병칭(吴炳称)이 “투기도박”을 하고 약담배를 팔았다는것도 다 거짓말이였다. 이때로부터 1976년에 우랑에서 들끓어올랐던 “반혁명추적”운동은 윤수응(尹修应)을 주요성원이라고 했던 “복흥당”과의 그 골간이라는 윤수응(尹修应)을 10년도형에 떨구는 것으로서 일단 혼란을 아퀴지었다. (1978년에 피해자들을 평판하자 윤수응도 따라서 평판을 받았다)   박해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갓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약을 쓰려하니 촌의 어떤 간부들은 의연히 그들을 적대시하면서 약재도캐지 못하게 회방을 놀았다. 상소하다  뻔한일이였다. 죄없이 뚜드려맞고 병신되고 갖은 고통을 받고서도 어찌 묵묵히 그저참고견딘단말인가! “교대반”에서 풀려나간 그들은 다가 가만히 참고있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발신을 써서 유관부문에다 보내기시작한 했던 것이다. 송도현위(松桃)에 올려보낸 고발신은 거의가 구위서기인 룡문비(룡문비)의 손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미 죽도록 박해받았던 사람들은 웃사람의 위협속에 또다시금 박해받을 지경에 아르었다. 이렇게 되자 우랑구의 피해자들은 부득불 이웃현인 동인(铜仁_), 강구(江口) 지어는 호남(湖南)에가서까지 신소장을 올렸다. 했으나 소식은 깜깜하니 바다물에 돌던진 격이였다. 1년넘어 휴양하니 매맞은 상처가 맣이 나아지면서 원기가 회복된 양재덕(杨再德)이 21번째의 신소장마저 소식이 없자 22번째 신소장을 써갖고 자신이 직접 북경을 바라고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피해자가족들에서 그때 돈 79원을 모아 려비로 내놓았던 것이다. 대는 1978년 6월 25일, 동행자는 그와 전흥화(田兴和), 진계창(秦继昌) 세사람이였다. 그돈갖고서는 택부족이였다. 세사람의 차비도모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걸어서라도 수도에 가고말리라는 결심에 모두들 집사람들과 고발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했다.     단거리차표를 산 그들은 렬차에 오른 후 승무원에게 몸에 생긴 상처투성이를 뵈이면서 눈물을 흘려가며 억울함을 하소했다. 모두들 동정했다. 감동된 승무원들은 차비돈을 받지 않았거니와 많은 편리를 주었다. 한 군관의 도움까지 받아 북경에 이르자 그들은 마침내 신소장을 등소평의 판공실에 들여놓았다. 성공이였다!    등소평부주석은 이 일을 화국봉주석과 말해 화국봉주석은 귀주성위에 반영된 사건을 조사해보고 그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원안(冤案)이되니 평판해야하거니와 군중을 해친자에 대해서는 엄숙하게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松桃苗族自治县档案局档案:全宗号23,目录号1;年度1978;案卷号125;标题:县委常委会整风会议记录,1978年7月-8月)   평판  결과가 어떤거야 빤했다. 귀주성위와 동인지위에서는 즉시 공작조를 내와 1976년도에 우랑에서 있은 “반혁명추적사건”을 참답게 조사하고 “반혁명”으로 몰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다 평판하여 억울함을 풀게하며 사망자와 그의 가족에 무혈금을 발급하고 잔페로 된 사람의 생활은 보장하게 만들며  병자는 병을 고치도록하였다. 한편 우랑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책임을 벗어메칠 수 없는지라 1978년 8월 16일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따라서 당적마저 긁히우고말았다. 그 외에 팽충순(彭忠顺)、등구선(滕久先), 오구량(吴求亮) 등8명은 도형에 떨어졌고 송도현위서기노릇을 하다가 그사이에 벌써 급을 올리춰 동인지위부서기(铜仁地委副书记)가 된 석맹명(石孟明)은 직무를 철소당했거니와 1978년 9월 27일, 우랑의 “반혁명추석”을 평판하는 군중대회에 나서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빌게했다. (석맹명은 1981년 11월에 지구행서부전원으로 다시출임하였다가 1983년 5월에 지위부서기、지구행서전원으로 승임하였으니 그 썩 후의 일이다)。   이로서 자라나는 후대들은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 위대하다고 떠따고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그 리성을 잃은 발광적이고도 진부한 몰골의 한 층면과 진리를 씹어버렸던 죄악의 단층면을 얼마든 그려볼 수 있을것이다. 그런 재난이 이제다시와서는 안된다. 영원히 다시오지 말아야 한다!  
265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1) 댓글:  조회:4124  추천:1  2013-08-21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1)    1976년, 귀주동인지구(貴州銅仁地區) 송도묘족자치현(松桃苗族自治縣)의 우랑구(牛郞區ㅡ지금은 우랑진, 내흥진, 사패향으로 나뉘여졌음)에서는 “반혁명”을 잡아낸다면서 한차례 성세호대한 “반혁명추적”공세를 일으켰는데 들춰낸 반혁명조직이 36개, 조직성원은 1359명이였는데 그들중 맞아죽은것이 37명이고 시달림에 몸이 불구로 된 자가 263명에달했다. 반혁명조직이라고는 근본 존재하지도 않건만 그것을 잡아낸다하여 벅작끌었던 큰 원안(寃案)이였다. 귀신이 들어도 놀랠 그런  한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도화선은 다른게아니라 그마을의 지주아들이 뀐 방귀로 인한것이였다. 웃지도울지도못할 그 방귀사건의 경과는 이러하다.     화근 그해의 1월 18일날 밤이였다. 우랑대대 계공전촌 사차대대의 사람들은 피곤한 하루의 공정이 끝나자 저녁을 먹고는 난로주위에 빙둘러서서 불을 쬐였다. 그속에는 그 마을의 지주아들 룡정운(龍政云)이도 끼여있었다. 이날따라 술을 한잔씩 얼근히 마신지라 다들 기분이 좋았는데 누군가 방금 약혼한 룡정운이를 놓고 놀려주었다. 룡정운은 아무런응대도없다가 방구를 “빵”꼇다.  모두들 와ㅡ하하 웃었다. 그래서 무참해진 저쪽은 그 무참을 뭉때리느라 룡정운이를 더 놀려주었다. 룡정운은 그가 하도그러니 밸이 꼬여 “이제 또 더 놀려봐라 싹 다 잡아죽여버리고말테다.”고 했다. 그러서 또 한바탕 웃음이터졌다. 이는 본래 흔히들 하는 작란이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대대의 빈협주임(貧協主任) 전(田)아무개가 씽 달려들어 룡정운의 멱살을 잡고 “이자식 죽고푸냐?”하면서 “공사로 끌어가라!”했다. 다들 장난쓰느라그러는건데 뭘 그렇게까지야 하고 말렷다. 그 자리에 정운룡의 아버지 정덕찬이도있었는데 보아하니 아들이 입을 잘못놀려 경을 치는것같아 사정사정해 빈협주임 전(田)가는 손을 뗏다.   워낙은 이로서 끝내야했건만 누군가 훗날 이일을 공정지휘부에다 고자질을 하는통에 일은 그만 잘못번지고만 것이다. 어느날 룡정운은 공정지휘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기시작했다. 그들은 그를 손쓰지 못하게하느라 뒷짐을 묶어놓고는 그보고 너는 꼭 제무리가있어서 배짱이 세진것 같은데 바른대로대라면서 뚜드려팼던 것이다. 룡정운은 악이 치밭이는데다 아프고 견디지 못하겠으니 아버지 룡덕찬(龙德灿), 숙부 룡년찬(龙年灿), 족형 룡무운(龙戊云)은 다자기가 이렇게 매맞는것을 알면 이제 가만있지 않으리라했다. 그러자 공정지휘부(工程指挥部)에서는 그 세사람마저 잡아다 너희들은 무리를 지은것 같은데 누구누구 또 한편인지 대라했다. 그 셋이 편은무슨편인가, 아무것도 없다하니 그들은 아니다 거짓말이다, 바른대로 대라면서 달아매고 때렸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받아낸 말인즉 먼 사패공사에 있는 룡정운의 고모부 오헌보(吳憲保)도 이일을 안다면 가만있자고하지 않을것이다 이제 천여명이라도 데리고와서 무지하고 지악한 너희들을 때려엎고말것이라했다. (中共贵州省委信访处:,载,上册,群众出版社,1981年)   때리고 핍박해서 그렇게 없는 말을 받아낸 우랑대대의 무장부장은 그것을 선색이라면서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 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에게 회보했던것이다. 구헌정(欧献庭)은 즉시 사패공사에다 전화를 쳐서 오헌보(吴宪保)를 끌어다가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두주일이나 심문해봤자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그들은 오헌보(吴宪保)를 집에 돌려보냈다.   계속조사  1976년 4월 5일,북경에서 각성한 군중들이 “문화대혁명”에 불만하여 항의를 하는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다. 그때는 이 일을 “반혁명사건”이라 결정함으로하여 국세는 한동안 몹시긴장해졌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오헌보(吴宪保)는 다시금 공사에 불려가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심문을 받기시작한 것이다.   4월 12일, 송도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은 성에서 온 촬영기자를 접대하게되였는데 석맹명(石孟明)은 그와 말하기를 “우랑에서는 사업을 잘하고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을 잘틀어쥐요. 듣자니 우랑에는 반혁명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면서 “반혁명은 경솔이볼게 아니니 되게 답새겨야합니다. 첫째는 진압, 둘째는 징벌. 절대 손이 물러서는 안되지요.” 했다.      5월 7일,현위에서는 확대회의를 열고는 “계속심입하여 반혁명정치요언을 조사하고 반혁명파괴활동을 타격하며 심입하여 등소평을 비판하고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투쟁을 해야한다”고 했다. 5월 10일,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은 우랑구위상위회에서 공안부의 “요언을 추격조사”하고 “반혁명을 추격조사”하라는 두가지 긴급통지를 전달하면서 우랑구에는 “확실히 반혁명조직이 있다”고 했다. 5월 19일,송도현삼급간부회의에서 현위서기 석맹명(石孟明)은 “우경번안풍과 반혁명을 계속조사하는 고조를 일으켜야한다”면서 “즉시 군중운동을 발동하라”고 호소했다. 6월 6일과 7일, 우랑구에서는 각공사의 서기들이 다 참가하는 구위확대회의를 열고 반혁명을 “계속추격조사”하는 부서들을 내왔는데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구(區), 공사(公社), 대대(大隊)는 문제를 조사해내는 교대반(交待班)을 내와야한다면서 일반성원은 생산대에서, 골간분자는 공사에서, 주요두목은 구에 잡아다 교대하게끔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인 포치를 한 것이다.   한편 오헌보(吴宪保)는 그전에 벌써 지독한 고형을 이겨내지 못해 따지고 캐묻는대로 근본있지도않는 “지하당”, “민공대” 등 반혁명조직이 있다고 “승인”했던 것이다. 성원은 20명이 더되였는데 매부 구륙장(欧六章), 처자의 족혁 룡덕찬(龙德灿), 룡년찬(龙年灿), 처자족질 룡무운(龙茂云), 중학시절의 동창생 양재덕(杨再德), 향옥후(向玉厚)、서전월(舒典月)、전흥화(田兴和) 등이라 주어댔다。 이상의 잡아낸 사람 20여명의 수자를 갖고서는 전 구(區)의 5개 공사 28개 대대 “교대반”에서 짐작하는 수자에 근본미치지 않았기에 1975년에 이미 찾아낸 동인(铜仁)과 관련이 있은 이른바 복흥당(复兴党)성원이라는 윤수응(尹修应)、양정영(杨正荣) 등 사람과 전에 투기도박을 해서 검거되였던 윤수무(尹修武)、오병칭(吴炳称)을 다시잡아다가 “교대반(交待班)에다 넣었다”. 그러면서  손때매운 혁명자들은 구의 교대반(交待班)을 집접틀어쥐고 생사람잡이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회의때 교대반(交待班)에 들어간 “반혁명분자”는 다섯가지를 꼭 교대해야한다고 했다. 1). 반혁명조직의 명칭을 교대해야하고 2). 반혁명목적이 무엇이며 3). 반혁명강령은 무엇이고 4). 반혁명활동방식은 어떻고 5). 우와 아래의 련계인은 누구라는 것. 공안특파원 구헌정(欧献庭)은 심문할 때는 기록을 잘해야하고 각 공사는 서로 련계를 잘하여 다같이 정황을 제때에 장악해야한다고 강조했다.   7월 10일,우랑공사에서는 “반혁명추적동원대회”를 열면서 동시에 로개석방인원인 룡후생(龙侯生)과 “로실하지 못한 사류분자”를 다시잡아다가 한데넣고 투쟁했다. 이날있은 투쟁대회에 다른 여러공사의 대표들도 참가했는데 구장 룡금명(龙金明)이 집행하고 구무장부장과 “반혁명추적소조”조장인 팽충순(彭忠顺)이 발언을 했던 것이다.   7월 19일 20日,이틀간은 목채공사에서 우랑、사패、목채 등 세 공사의 서기가 참가한 회의를 열었는데 현무장부장이 그 회의를 틀어쥐고 그지간의 “반혁명추적”을 분석하고 한단락의 사업을 총결지었다. 그러면서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우랑공사는 “반혁명추적”에 진보가 있고 효과도 있다했거니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한다고 한바탕 표양도 했다. 그는 다른 한 곳 사패는 일찍이손썻길래 적잖은 선색을 제공했지만 아직까지도 몇사람만이 혁명을 하고있다고 했고 다른한곳 목채공사는 담이 너무약하다했고 또 다른 은암과 대흥 두 공사의 “반혁명추적”을 보면 성적이 하나도없길래 차라리 저쪽으로친다고 불만스러운 소리를 했다.   54가지 혹형,37개 인명 전안조(專案組)는 규정하기를 한사람의 공술은 듣고 두사람의 공술은 믿으며 세사람의 공술은 결정짓는다고 했다. 구위서기 룡문비(龙文飞)는 “초는 불을 달아야 밝아지고 ‘반혁명’은 때리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면서 전안조(专案組)에서는 형구(形具)를 갇추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54가지에 달하는 고형방법이 나왔는데 그것이 “교대반”의 “학원”들을 극도로 못살게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를 대고 형이 동생을 대며 친척이 친척을 대고 벗이 벗을 대여 서로물어먹는 형국이 생기였던 것이다. 목채공사(木寨公社) 모평생산대(毛坪生产队)는 남성주요로동력이 다해봣자 19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12명이나 반혁명으로 되었고 그중 9명은 “교대반”에 들어갓던 것이다. 그야말로 전에없은 혹독한 반혁명추종운동(反革命追從運動)이였던 것이다! (, 1978年10月11日)   석달이나 지속되였던 그 반혁명추종운동(反革命追從運動)으로 하여 선후 486명이 “교대반”에 들어가 그곳의 “학원”이 되었는데 그중 6명이 총살당하고 13명이 학사(虐死)했으며 13명은 자살했다. 그러고도 살해된 자의 친척이라 연루(連累)되여 사망한 것이 5명이였으니 모두해서 37명이나 목숨을 잃은것이다. 매를 맞아 불구로 된것이 263명. 죽이려다가 미처죽이지 못한것이 18명이였다. (《中共铜仁地委关于松桃苗族自治县牛郎区“追反”冤案平反昭雪情况的报告》, 1978年10月11日)    “교대반”에 들어간 사람 대부분이 개인보복에 든 것이였다. 례를 들면 사패공사 홍성대대 량풍요생산대의 진조전(陳祖前), 진인배(陈仁培), 진조무(陈祖武) 삼형제는 전에 당질녀를 묶어놓고 강간하려한 민병련장 진술병(陈述炳)을 혼뜨검내운 일로 하여 잡혀들어가 그자의 손에 매맞아죽었다. 우랑공사 우랑대대의 당지부부서기 향(向)모는 1969년도에 생산대에 진 빚 200원을 몇 년째 종시 값을 념을 하지 않으면서 생산대회계이자 보관원인 호회칭(胡淮称)보고 량식을 그냥달라했다. 이에 호회칭(胡淮称) 규정대로 량식을 주지 않았더니 그는 그를 “교대반”에 잡아넣어 “학원”으로 만들어놓고서는 협박과 고형을 받아 끝내 죽게만들었던 것이다.    은암공사 파동대대의 룡세항(龙世恒)이 죽게된건 전에 지부서기 룡(모)가 어머니를 강간하려다 그한테 들켜 성사못한 일로(당시 룡세항은 14살) “교대반”에 들어 물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일을 잊지 않았던 룡세항(龙世恒)은 커서 몇 번 지부서기 룡(모)를 공산당간부라해도 렴치없고 도덕이 없다했던 것이다. 그비슷한 안건은 은암공사 첨파생산대대에서도있었다. 은암공사 첨파생산대 대장 룡세명(龙世明)은 룡흥무(龙兴茂)의 녀편네와 통간하려다 못하고는 기회가 왔다고 여겨 룡흥무(龙兴茂)를 “교대반”에 너어 “학원”으로 만들어서는 거기서 매맞아죽게하고는 그의 녀편네를 끝내 차지하고말았다.    
264    리삼월 자기시를 론함 댓글:  조회:3810  추천:2  2013-08-17
  리삼월 자기시를 론함     내가 내내 촌에서 살다가 할빈에 이사를 해 거기서 지낸 몇해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류류상종(類類相從)이라 문학을 한답시고 글쓰는 데만 정신팔고 지어는 그것을 종생의 락으로 삼은 우리 글쟁이 몇은 아무 때건 종종 만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손으로 일떠세운 흑룡강성조선족작가소조가 있기는 해도 우리 나머거리끼리의 호흡이 따로있었으니 자연히 별도로 종종 “문학쌀롱”을 가지게되었던 것이다. 발기자는 제일좌상이였던 리삼월(리경희)선생이고 그담은 나였다. 그리고 정기수, 림국웅(한춘)해서 모두 넷이였다. 이때의 우리들  서로간의 믿음은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최대의 보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공식모임은 어김없이 두주일에 한번씩, 돌림식으로 주식(酒食)을 책임졌는데 우리는 만나면 기탄없이 속심을 다 털어 사회를 론하고 인생을 론하고 문학을 론하고 창작을 론했던 것이다.   그때는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 탈고되여였기에 시간이 있는지라 이미 발표된 글들을 한데모아 자체로 을 묶느라 역사를 해던것이다. 그러고있는 판인데 어느날 리삼월선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보고서 “거참좋구만! 내것도 그렇게 만들어주구려.”했다. 하여 나는 흔연히 그러마 대답했던 것이다.   “지금은 자비출판이 유일한 시대다. 나의 안해는 나더러 어느날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빨리 자비로 책을 낼 준비를 하라고 여러번 독촉했다. 나는 그때마다 응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고료를 받는 시절에 두권의 시집을 냈다. 자체발행을 해보고 몽땅 증송도 해보았다. 어차피 자존심만 상하게 하는 일이였다. 그래서 돈이 아까운 것보다 훗처리가 무서워서 자비출판을 포기하고말았다. 이렇게라도 몇책 만들어놓는 것은 몇수라도 가치있는 시가 다시 시의 번영기를 맞는 후세사람들에게 읽힐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나의 자신심의 표현이라 하겠다.”  내가 컴퓨터로 타자해 만들어준 의 머리말의 글이다.  이 책에는 1954년부터 1978년까지의 시들은 한수도 수록하지 않았다. 1979년부터 2002년까지의 작품중에서 558수만을 추려내 한데묶은것이다.  5B용지 246페지.   리삼월선생은 해방후 북방문단에서는 아마 제일먼저 떠오른 밝은별일것이다. 시창작에 대한 그의 견해가 후세에 저그마한 참고라도될것같아서 올리니 시창작자들은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관점이 다를수도있겠지만.                         나와 나의 시                            리삼월   나에게는 시창작에서 시종일관 견지해온 자기나름의 주장이 있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면 독자들이 알아보기쉽게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심각한 함의가 내포된 시를 쓰는 것이다. 어떻게 쉬우면서도 심각한 시를 쓸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것이다. 어차피 매우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이 모순되는 량자를 조화시키지 않으면 나는 결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시의 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시적발견이 없으면 나는 필을 들지 않는다. 일단 새로운 시적발견이 있게되면 령감이 생기고 또 령감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유발시킨다. 나의 경우를 놓고 보면 시적발견은 나로하여금 언제나 개성화되고 격정으로 고양된 심태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미묘한 환경속에 밀어넣는다. 나는 다시 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각도를 찾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물탁상이라는 전통적인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시를 설계하고 시의 집을 짓는 대체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시에는 많은 경우 일정한 서사성분이 세절과 함께 가첨된다. 서정시에 서사성분이 과분하게 가첨되면 알아보기는 쉽지만 감정밀도가 성그러져 서정미에 손상을 주게된다. 나는 이런 위험을 경계하면서 새롭게 신선한 세절에 개성이 강한 정감을 반죽하는 방식으로 결함이 될수있는 가능성을 미리방지하는 것이다.   나는 상기한 창작방법을 거쳐 독자들이 알아보기쉽고 소박하면서도 심각한 함의를 담을 수 있는 나의 문학주장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내가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다고해서 창작실천에서 훌륭한 시를 많이 내놓은 것은 아니다. 실패작도 많은 것이다.   나는 거의 한평생을 편집사업에 종사해왔다. 그것도 동인지가 아닌 국록을 타먹는 문학지를 편집했기에 모든 부동한 창작방법으로 씌여진 시와 시인을 폭넓게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혁”후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이는 내가 부동한 창작방법과 그리고 예술기법 등을 배우고 가늠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했다.   어떠한 창작방법이거나 그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모두 재간을 길러낼 수 있고 어떤창작방법으로 씌여진 작품이던간에 모두 대작이 있으면 졸작도있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계속쓸것이다.        
263    에세이 변태적인 일본사람 댓글:  조회:4338  추천:1  2013-08-13
       에세이 변태적인 일본사람       제2차세계대전을 종결지으면서 벌어졌던 “동경심판”에서 전패자를 변호해나선 인도법관 파얼은 “전체피고는 다 무죄다”고 주장해나섯던 것이다. 그와함께 일을 보았던 네덜란드의 법관 레링의 회억을 보면 파얼의 그같은 주장은 가능하게 일찍부터 생겨난것 같다는 것이다. 파얼은 첫 번의 재판에 나서지 않았다는데 그렇다면 그 기간에는 도대체 뭘했겠는가? 레링은 그 기간에 파얼이 활동을 많이했다는 것이다. 아베가 지금 “동경심판은 승리자의 심판”이였다고 들고나오는데는 인도법관 파얼의 주장에 근거를 잡은것이다. 한데 일본은 인도법관 파얼은 변호에서 패소당했다는것을 잊고있으니 한심한 강떼질이다.   여기서 문제는 파얼이 번연히 패소했음에도불구하고 아베가 이미내린 심판을 고집스레 부정하면서 뒤집자고 드니 결코 그저일이 아니라는 그거다. 근일 일본은 공공연히 자기들도 군대가 있어야겠다, 자위대가 곧 국군이라면서 나서고있다. 일본은 저들이 발동한 침략전쟁으로 인하여 2천5백여만의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게만들었던 지난날의 그 죄악을 가맣게 잊고있다. 이 패전국의 꿈은 도대체 무엇일가? .... 불보듯 빤한 것이다. 일본은 패전의 교훈을 접수하기는 커녕 엉뚱하게도 2차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다시한번 발동해보자고하는 것이다.   세상사람의 비난도 불사하고 야쿠샤신쟈참배를 부덕부덕 행하는 일본우익의 행실을 지켜보노라니 서양사람들이 일본사람에 대해 평가한 것이 새삼스레 상기된다.   그것을 오늘 한번다시 되풀이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ㅡ미국의 전대통령 프랭크린D,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보기에 일본사람은 유사이래 제일비렬하고도 무치한 민족이다.”   ㅡ불란서사상가 콩다몽데스키는 일본사람에 대해 다음과같이 평했다.  “일본사람의 성격은 아주 변태적이다. 구라파사람의 눈에 그들은 피비린내를 즐겨 남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돼보인다. 일본사람은 완고하기짝이없고 제멋대로하거니와 제주견만고집하니 우매무지한 것이다. 상급을 만나면 무릎을 굽혀가며 깝실거리다가도 하급에 대해서는 흉악잔폭하기가 그지없다. 일본사람은 쩍하면 살인하고 자살도 한다. 보아하니 제목숨을 아까와할줄을 모르는 것 같다. 일본은 복수와 살인에 자못 혼란한 나라인 것이다”.  ㅡ불란서대통령이였던 드골역시 생전에 말하기를 "일본이란 이 음험하고도 교활하고 잔인한 민족은 피비린내를 즐긴다. 하기에 네가 만약 그들에게 약하게 뵈여  없신여김을 당하기 시작하면 중세기 때 구라파에서 흡혈귀로 소문났던 더쿠라모양으로 조금도 사정없이 너의 목주래를 물어뜯어 끊어놓고 말 것이다." 고 경고했던 것이다.                   지어 어떤 사람은 일본사람에 대해서 지금도 의연히 이렇게 폄하를 하고있다.   첫째는 인간다운 말을 하지 않고, 둘째는 옳은소리를 할줄을 모르며, 셋째는 횡포하고 무지막지하여 헛소리를 잘치고, 넷째는 미국사람의 바줄에 얽매여 지악스러운 개가 되었고, 다섯째는 싸우다가 질것같으면 독가스를 뿌리린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또오 히로부미나 도죠 히데끼같은 군국주의자ㅡ 갑급전범들의 유령이 살아서 너울치길래 사람들이 년년이 넋을 기리려 야스쿠니신쟈를 다니는 것이다. 이번 8월15일 패전일에도 대다수의 정부고위직 관원들이 야스쿠니신쟈 참배를 하려한다니 과연 고집과 배짱이 이만저만아니다.   우리로서는 심각히 사색하게 되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 일본의 침략행동에 대해 어느정도 리해되는 점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느 한 지리학자가 쓴 론문 한편을 읽어봣는데 그 론문에서 일본이라는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태평양의 단렬대에 놓여있길래 지진이 다발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반면에 이제 아무 때건 끝내는 물밑에 가라않고야 말 거대한 군함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일본종족의 멸망을 지극히 우려한다는 것이였다. 보아하니 일본사람의 침략야심은 아마 이런데로부터 생겨나는 것 같다.   세계문학에 실린 어느한 일본소설에서는 일본남자의 외도를 전문다루고 있었다. 일본남자가 국외에 나가 외도를 해서 새끼를 낳으면 그곳에다 종자를 심어놓는 것이되니 국가는 환영하는 것이요 대외확장을 위해서는 그것이 아주 유효한 장구지계로도 된다는 것이였다. 욕지기나지만 웃지도못할 일이였다. 소설에마저 그정도로 구사될 지경이니 그 민족의 대외확장욕구와 주의가 리해된다. 그렇다고 그래 대외침략을 내내 국책으로 삼아서야 어디될 일인가?   내가 이같이 말하는건  1). 민족원한을 선동하자는 목적이 아니다. 2). 조선사람이건 중국사람이건 세계의 모든 인민은 상술한 그들의 본성과 지난전쟁이 가져다준 고통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것이고 3). 지금의 형세에서 전쟁을 잊으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며  4). 쑈를번꾸이즈는 마음이 죽지 않고 퍼렇게 살아나고있으니 전민은 평화만 부르짖지 말고 어서빨리 정신차리라는 것이며 5). 제2차세계대전과 같은것이 재다시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니 아세아의 국가들은 침략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는거다.   중국은 요즘 개량된 최신의 6K “戰神”폭격기를 대량으로 복역시키였다. 6K형 전략폭격기는 우리나라에서 자체로 연구제작한 신형의 폭격기로서 원래있던 6K계렬폭격기에 든 것이다. 군사잡지 을 보면 이 전략폭격기는 사정거리가 2500Km인 "장검ㅡ10공사순항유도탄" 6개를 달수있다고 한다. 이 폭격기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국은 이미 미국의 괌도와  중도도, 하와이군도를 습격할 능력을 갖고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중국이 이제는 미국의 뒤를 이은 로씨야와 영국다음 네 번째로 장거리폭격기를 갖춘 국가라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과연 참 장한 일을 했다!   내가 언젠가 에서 공개한 김정일의 유서를 본 기억이 새삼스레생각난다. 그 유서가 어떻게 밖으로 새여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44쪽에 이르는 조목중 두가지는 내마음에 깊이 와 닿았기에 오늘 그것을 내놓는다.    (2ㅡ17).  핵, 장거리미싸일, 생화학무기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충분히 보유하는 것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조금도 방심하지 말것. (3ㅡ24).  전쟁을 통한 통일은 아무 의이가 없다. 전쟁을 하는 경우 우리는 남보다 몇 백년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이겨도 결국은 후대들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주는 것이 없음을 명심하고..어떻게 하나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   과연 옳은말이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지 말고 어떻게 하나 평화적으로 통일해야한다. 이제 남북이 서로리해하여 손잡고 굳게 단합하기만한다면 우리 민족은 세상에 무서울게 없을것이다. 이제다시 일제에게 침략당해 노예로 될건가?   일본은 분명 군국주의가 다시금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고있다.  이제 또 전쟁을 발동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면 안된다고 주먹을 들고 물러가라 고래고래 소리칠건가? 준비없는 대응은 자신의 멸망을 자초 할 뿐, 조선이나 중국이나 처지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두말말고 새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게을리말아야 한다. 그런다해서 호전광이라는 비난은 듣지 않을것이다. 이 세상에 구세주는 없다. 구세주는 우리 자신이니 정신차리고 제살도리는 제가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다.  
262    견문록: 선조들의 발자국찍힌 곳에서 댓글:  조회:3694  추천:1  2013-08-08
  견문록: 선조들의 발자국찍힌 곳에서   필회가 있어서 길림에 갓던 나는 마침 기회좋아 력사유구한 룡담산성을 가보았다. 룡담산성은 길림동쪽 송화강건너에 있는데 이 산성은 단산자산성, 구창남산성과 함께 길림에 있는 고구려옛성터로서 지금은 중국의 중점유적보호구로 되어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5백여년전에는 여기가 고구려땅이였다. 4세기중엽으로부터 5세기초까지 걸치는 기간에 북중국일대에서는 전연, 후연, 북연, 북위 등 북방종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련이어 교체되였는데 그중 특히 전연과 후연은 저들이 패권을 잡음에 있어서 위험한 존재로 느껴진 고구려에 대하여 침략전쟁을 끊지않고 발동했던 것이다. 하여 고구려는 료하이동을 장악하자 온나라에다 튼튼한 방어체계를 세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료동반도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서쪽해안과 료하의 동쪽연안을 거쳐 멀리 길림지방에 이르기까지의 수천리구간에다 성들을 수축했던 것이다.   의 기재에 보면 고구려말기에 이르러서는 성이 모두 176개나 되었는데 그것들은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 및 수도방어성 세부류로 나뉘였다고 한다. 길림에 있는 성들은 그때의 전연방어성으로서 주요하게 부여, 말갈, 읍루 등 종족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것이였다. 내가 본 길림의 룡담산성은 높은산인데 서쪽켠이 자못 가파르고도 험했다. 이같은 산세를 리용하여 성을 수축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반침략투쟁을 강화했던 고구려가 강력한 국방체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힘썻는가하는것을 가히 보아낼 수 있고 따라서 고구려인민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과 그들의 창조적지헤 및 그네들의 군사예술의 한 측면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었다.   흘러간 허구한 세월에 옛성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어도 룡담지(龍潭池)와 한뢰(旱牢)만은 아직도 거의 원모양대로 남아있어서 유람객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산속에서도 아래쪽 그윽한 곳에 있는 룡담지는 변두리를 돌로 쌓아서 만든 장방형의 커다란 웅덩이였는데 지금도 물이 그득고여있었다. 왜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재에 보면 그것은 산성을 지키던 고구려병사들이 먹을물을 저장해두었던 곳이라 한다. 사실그래선지 주위의 밀림에 바람한점새여들지 않아 적막하도록 고요한 수면과 깊이를 대중할 수 없는 푸른물이 면면한 회포를 자아내면서 가슴을 애절히 훑었다.   그옛날 고구려병사들이 련병장으로 썻을 평평한 공지를 지나 남쪽산으로 오르는 중턱에 청석을 촘촘히 쌓아서 만든, 직경이 10여메터푼한 둥그런 웅덩이 하나있는데 그것이 한뢰(旱牢)였다. 그곳은 고구려병사들이 옷과 병기를 넣어두던 창고라 한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해 음달지지만 위치로 보나 그 이름으로 보나 과시 그럼직했다.   나는 거기서 한달음에 산꼭대기에 달아올랐다. 자연이 만들어준 봉우리인가, 아니면 인공으로 만들어진 료망대일가! 거기에 오르니 꼭마치도 넓은 벌에 바둑판을 놓은것만같은 길림시내가 한눈에 확 안겨들었다. 부는 바람에 옷자락날리고 가슴은 확 트이는것만같았다. 나는 여기서 새삼스례도 먼옛날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침략자들에 대한 총공격을 앞두고 적장 우중문에게 지어보냈던 시 한수가 떠올랐다.   신통한 전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하였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거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이 얼마나 만만한 도전이였던가! 적장을 제마음대로 조롱하고 야유한 이 시구만봐도 우리는 을지문덕장군의 슬기와 용감성을 넉넉히 보아내고도 남음이있는 것이다. 하다면 왜 그같이 방대한 국토를 갖고 강성했던 고구려가 망하게되였던가?   력사는 우리에게 민족이 단합하지 못하고 분렬된다면, 통치자가 외세에 아부하고 굴종한다면 나라는 쇠락해지고 남의 침략을 당하기 마련이며 나라백성은 망국노의 운명을 면치못한다는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가르쳐주고있다. 외세에 의뢰한 신라의 배족적인 침략, 명장이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한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나라와 민족의 리익도 서슴없이 저버리는 통치배들의 비렬한 정권다툼이 결국은 강성했던 고구려를 망하게 만들고말지 않았던가! 슬픈일이였다!   그 어느나라나 다 마찬가지다. 그 나라가 강성하려면 국민이 한맘으로 단합되여야 하고 집권자집단이 굳게 뭉쳐야함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런고로 국민은 항시 애국의 맘을 지니고있어야 하고 그 어느때든 매국배족적인 분렬주의자가 나타나면 다같이 일떠나 단합해 잡아내여 없애야 한다. 국가와 민족이 살아나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다.                                                    1984년 9월   
261    동철부대 토비숙청기 댓글:  조회:5116  추천:1  2013-08-08
    동철부대 토비숙청기   해방직후의 북만일대에는 사문동, 마희산, 리화탕을 우두머리로 한 토비들이 도처에서 살인, 방화하면서 횡행하였다. 그리하여 피난민들이 쟈므스(佳木斯)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쟈므스(佳木斯)의 김동철, 김명세, 한중선 등은 36명으로 독립대를 조직하였는데 시초에는 총도 몇자루밖에 없었다. 그후 독립대는 600여명으로 급속히 늘어나 공산당이 령도하는 삼강인민자치군 제1퇀제2영으로 편성되였다. 제2영은 조선족영으로서 교도원은 김동철, 부교도원은 김명세, 영장은 연안에서 온 류곤(한족), 부영장은 한중선이였다.   1946년 2월 24일에 삼강인민자치군은 리화탕토비를 숙청할 임무를 맡고 탕원, 의란, 통화, 방정일대로 떠났다. 그런데 부대는 첫출발부터 토비의 교란을 받았다. 부대가 떠난 그날 밤이였다. 강행군하는 대오를 따라 트럭몇대가 군량과 포탄을 싣고 떠났는데 대오가 시가지를 방금 벗어나자 달리던 차 한 대가 번저지는바람에 후송부대의 전사 여럿이 상하였다. 알고보니 그 자동차의 운전수녀석이 아군에 잠복한 토비였던 것이다.   부대는 탕원에 기여든 토비들을 몰아내고 강을 건너 의란(依蘭)으로 진군하여 대구동과 소구동에서 리화탕무리와 처음으로 맞다들었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일부 토비들을 살상하였지만 아군의 김만준, 김만기형제와 변성학, 최남순, 윤승암 등 5명의 전사들이 놈들손에 포로되여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공산당깃발아래 굳게 맹세해 철갑모 머리우에 눌러쓰고서 빛나는 싸움터를 바라보던 굳세고 억세던 혁명5용사......   이 의 노래는 부대의 지식분자였던 문영식이 지은것인데 전사들속에서 재빨리 불리였다.   소구도에서 전투가 있은 이틑날 통하로 진격하다가 아군의 전사 5명이 적이 매설해놓은 지뢰에 목숨을 잃었다. 전우들이 희생되는것을 본 전사들의 가슴마다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전투장에서 총이 없는 전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적의 대갈통을 까고 총을 빼앗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그같은 용감성에 겁을 집어먹은 토비들은 가 왔다는 소리만들으면 접전할 념도 못하고 달아나기부터했다.   방정에서 아군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리화당은 뿔뿔히 흩어진 저의 잔병들을 다시긁어모아가지고 사문동과 합세할 타산으로 조령쪽을 바라고 달아났다. “놈들에게 숨돌릴 짬을 주지 말고 승승장구로 추격하자!”  지휘원, 전투원들은 이렇게 웨치면서 토비들을 추격하고 만나면 족치였다. 그들은 토비들을 한바탕싸우고나서 의란현경내에 있는 삼도강에서 다른부대와 회합했다.   그런데 3월에 삼강인민자치군은 목단강쪽으로 진출하게되였다. 사문동과 마희산무리들이 그곳 산간지대에 출몰하고있었던 것이다. 아군은 화림부근의 투도댄즈라는 마을에서 토비들과 맞다들게되였다. 1개퇀의 토비들은 벌써 그곳에 보루를 쌓아놓고는 주위에다 철조망을 겹겹이느리고 전호까지 파놓았다. 이때 돌격대로 나선 2명의 조선전사가 몰사격으로 적의 화력점을 견제하는 한편 부대의 진격로를 열기위해 가시철망에 널판자를 걸쳐놓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길이 열리였다. 또치카는 이쪽에서 던진 적탄통과 수류탄에 날아났고 혼비백산한 적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두손들고 투항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데 2영에서는 리일병, 허진선 등 용감한 전사 몇을 잃었다.   이 전투가 끝나자 목단강의 순조선동포들로 조직된 제14퇀도 토비를 숙청하려고 이곳에 와서 삼강인민자치군과 합력하였다. 그후 삼강인민자치군 제1퇀 2영은 상급으로부터 사문동토비를 계속추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지체없이 출발하였다. 토비와의 작전에서 뛰여난 재질을 보여준 김동철은 지략으로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는 책략을 썻다. 그때 사문동의 수하에 비교적 전투력이 강한 한 개의 기병퇀이 있었는데 퇀장은 초경재(한족)이고 참모장은 김해정이라는 조선족이였다. 김동철과 김해정은 광복전에 한마을에서 살면서 항일투쟁도 같이한 친구였다. 그는 비밀리에 김해정에게 초경재를 설복하여 하루속히 의거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병퇀은 끝내 아군쪽으로 의거해 넘어왔는데 그후 초경재는 도망치고말았다.   그때로부터 김동철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항간에서는 제2영을 라 부르게되였던 것이다.   삼강인민자치군은 한달남짓한 사이 다른 형제부대와 함께 5천여리의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무려 30여차의 전투를 치르었다. 이런 전투들에서 아군은 토비주력에 큰 타격을 주어 춘기공세를 해보려던 적의 시도를 꺾어놓았다. 따라서 의 이름이 널리퍼지자 열혈이 끓는 조선남아들이 날마다 부대를 찾아와 자기도 입대하겠노라 탄원했다. 이리하여 의 인원수는 점점 더 늘어났던 것이다.   1946년 5월의 어느날, 사문동이 저의 비도들을 거느리고 칠태하(七台河)에 기여들었다는 정보를 받은 삼강인민자치군은 3개퇀을 파견하여 토비소굴인 청룡산(靑龍山)을 포위공격하였다. 그 포위공격전에서 아군은 토비 200여명을 숙청하고 일본군복입고 일본무기로 무장한 손방유기병대 67명을 생포했다.  그러나 사문동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신발툰으로 도망쳤고 자기의 말로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그는 밀산(密山)쪽으로 넘어가 그곳의 비도 곽청정을 추겨 피비린 을 빚어냈던 것이다.   마귀같은 살인백정들의 손에 숱한 조선족ㅡ 남녀로소를 불문한 죄없는 이들이 무참히 살해되였다. 제 동포가 당한 그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는 새로 탄원해나선 130명의 젊은 대원으로 한 개 련을 새로 편성한 후 그들을 데리고 벌리(勃利)로 돌아왔다.   한편 을 조작한 사문동은 조령에 가서 리화탕, 장흑자 등과 함께 흩어진 잔병들을 다시긁어모았다. 이런 적정을 정찰해낸 는 적소굴인 조령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하루에 180여리씩 강행군을 하면서 토비와 싸웠는데 어떤때는 하루에 4차나 격전을 벌리기도했다. 전과가 좋았다. 소판도에서 있은 격전에서만도 이 부대는 단번에 토비를 한 개련이나 전멸한것이다.   그 전투가 있은 후 는 어느 한 산으로 통하는 길을 감시하다가 노새네마리를 메운 차에다 쏘련홍군의 지페를 4마대나 훔쳐 싣고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적들을 섬멸하고 차를 빼앗았던 것이다. 아군은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비행기로 산속에 뿌리였다. 했지만 완고한 적들은 투항하지 않고 완강히 뻣히였다.   는 상급의 새지시에 따라 조령쪽에서 떠나 청산, 호산에 몰려있는 토비들을 섬멸해버리고는 게속해 벌리(勃利)를 거쳐 리련회토비무리추적을 떠났다. 그들은 칠성랍자산에 이르러 그곳에 숨어있던 70여명의 토비를 숙청하였는데 그자들은 거개가 때 살인만행을 감행한 후 밀산에서 쫓겨난 곽청정의 무리였다. 는 그자들을 하나도남기지 않고 전멸하는 것으로서 시원스레 복수를 하고야말았던 것이다.   그곳을 떠난 후 부대는 부금, 집현, 사방대일대에서 2개월가량 토비들을 추적섬멸했는데 그들이 그기간에  격은 고생은 그야말로 형언키어려웠다. 전사들은 무더운 여름철에도 도로기를 신고 하루 백여리씩 걸어야했다. 그러면서 숲속에서 밤을 지새울 때면 모기들의 짓꿎은 성화도 이겨내야했다. 옷과 신발이 해여지고 식량공급이 딸려 어떤때는 옥수수 몇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굶주린 배를 달려야했고 그것마저 없어 굶기도했다. 하지만 그 누구하나 불평불만의 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견지였다!   의 명성은 날이갈수록 높아갔다. 용맹하고도 기민한 그들은 마치 축지법이라도쓰듯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감쪽같이 적진에 뛰어들어 불벼락을 안기군했다. 그리하였기에 토비들은 가 온다는 소리만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 아예 맞붙어볼 궁리도하지 않고 걸음아 날살려라 줄행랑을놓군했다.   1946년 8월 3일, 토비 리련희무리를 숙청하는 간고한 임무를 완수한 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쟈므스(佳木斯)로 돌아왔다. 이날 그곳의 동포조직이였던 민주동맹에서는 음식상을 푸짐히 차려놓고 돌아온 그들을 열열히 환영했다. 그때 삼강성은 합강성으로 명칭을 바뀌였는데 는 그곳에서 휴식정비를 하는기간 대오가 더 늘어났거니와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독립퇀으로 발전했다.   그때까지도 토비들이 채 숙청되지 않앗기에 합강성내의 지방정부와 백성들은 식량난에다 토비들의 위협을 의연히 받고있었다. 수백만백성들을 기근에서 벗어나게하자면 쏘련과 경제무역을 해야했다. 하여 는 9월 3일에 상급의 지시에 따라서 쟈므스(佳木斯) 남쪽의 타요자, 흑배, 리수구, 맹가강, 석두하자, 영평강 등 여러곳에 갈라져 토비들이 략탈하지 못하도록 금광을 보위하면서 그곳에서 나는 황금을 받아들이는 특수한 임무를 맏고는 그것을 전투과업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과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척되여갔다. 그러나 운명이란 예측키어려운것이였다. 1946년 11월 16일, 참모장 김해정은 적정을 정찰하느라 두 개의 정찰반을 이끌고 완달산중에 있는 금광마을 영평강에 갔다. 저믄때라 날은 어둡고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전사들은 마을에서 약 2리가량 동떨어진, 지주가 버리고 달아난 빈집에 들었다. 그들은 몹시피로해진데다 경비를 하느라 장밤을 눈도 붙이지 못했다. 그런차 비도괴수 리화당이 그마을의 고지주가 마을에 지금 소부대가 들어와있다는 밀고를 받고는 즉시 기병 100여명을 끌고와 이틑날 새벽에 집을 포위했던 것이다. 싸움이 붙었다. 16명의 전사들은 김해정의 지휘하에 구들장을 뜯어 창문을 막는 한편 벽에 구멍 두 개를 뚫고 기관총을 내갈겼다. 그들은 근 3시간가량이나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기다림이였다.   게다가 적은 워낙 숫자가 많고 이켠에서는 갇힌데다 인원도 퍽 적었다. 그야말로 엄청한 대비였다. 과불적중(寡不敵衆)이라 전사자가 차츰늘어났다. 이켠의 총소리는 차츰 뜸해갔다. 탄알마저 떨어지고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리화탕은 기뻐날뛰면서 투항을 하라 그러면 죽이지 않겠노라고 소리쳤다. 죽기를 각오한 전사들이 였거니 어찌 그따위소리에 넘어가랴, 적은 그래봤자 아무런 응대가 없으니 나중에는 새단에다 불을 달아 지붕에 올려뿌렸다. 집이 불타기시작했다. 하지만 전사들은 한명도 투항하지 않았거니와 불붙는 집안에서 그냥 대응앴다. 마지막으로 7명이 남았다. 그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있다가 불붙는 집안에서 뛸쳐나가 육박전을 하다가 최후를 마치였던 것이다.   합강성정부는 그들의 장렬한 희생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벌리에다 를 세웠다. (병으로 사망한 녀병1명포함) 그 기념비에 아래와 같은 비문을 써놓았다.   푸로혁명에 피뿌린 17명렬사여 당신들의 피는 천추에 빛나리라! 위대한 정신과 용감한 투쟁은 후세에 유일한 표직이 되리로다.!   그후 얼마안되여 리화탕, 마희산, 장흑자 등 토비두목들이 련속 아군손에 잡혀 처형되였다. 토비두목이며 동북인민의 철천지원쑤였던 사문동역시 민주련군의 손에 잡혀 그해의 12월 3일 벌리에 끌려와 17명렬사묘들에 절을 하고는 처형되였다. 이로써 동북의 토비숙청은 막을 내린것이다. 그후 는 새로운 전투임무를 맡고 남부전으로 나아갔다.   (이 글은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제5권 에 실린 글에 다른 한편문장ㅡ 안옥균, 김송죽, 차수남공저로 된 “영평강 16용사”를 생략해 삽입했음을 밝혀둔다.)         
260    에세이 피켈과 백성의 눈 댓글:  조회:3252  추천:3  2013-08-07
    에세이 피켈과 백성의 눈   우리는 등산객이 산에 오를 때 바위돌을 시험삼아 떼여내기도 하고 짚기도하는, 손잡이에 망치와 정이 달려있는 지팽이를 보게되는데  그것의 이름이 피켈이다. 피켈은 등산객이 절벽을 오름에 절대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도구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를 하나의 높은 산이고 절벽이라 가정 할 때 인간은 다가 산이나 절벽을 톺아오르는 등산객과도 같은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등산객이 피켈을 갖추듯이 저가끔 수단을 쓰게되는 것이다. 그 수단이라는 것이 곧바로 생계를 위한 각가지의 직업이 아니겠는가.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마다의 직업도 자유적인 선택이 되겠지만 어떤경우, 이를테면 국가간부로 되거나 기업의 책임자로 되는건 그 자신의 욕망의 기초상에서 웃사람의 임명이거나 대중의 의사, 의결에 의하여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권리”란 바로 이래서 생겨지는거다. 국가주석으로부터 국무원 각 부서의 부장은 물론 성장과 시장, 현장 그 아래로는 향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간부가 공무원이면서 실제상 다가 저마끔 다른사람의 머리우에 군림하는 권력자이기도 한 것이다. 촌에서 촌장질을 하거나 회계노릇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바로 이러하다.   국민모두, 대중다가 그들 권력자를 향해 제발 잘해주십사 기대하고 절절히 바라는 것이다. 믿어주기에, 될수록 믿어보자고 하기에....  그런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참으로 유감스러운것은 저를 믿고 그같이 권리라도 줄라치면 젊잖고 해맑던 사람마저도 어떻게 돼먹은 판인지 심사가 검게 변해버리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되는 그거다. 그래서 국가와 집단에 해가 생기고 상층과 하층, 동지간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며 나아가서는 적대로까지 되고마는 것이다.   30여년전 촌에 있을때의 일이 새삼스례 상기된다. 내가 사촌처남되는 이한테 들은 소린데 그가있는 생산대에서 년말총화를 짓고나서 이어서 회계감을 고르느라 투표를 했더니 거기 한 투표지에다는 “여윈개를 바꿔넣어 또 살찌게 할건 뭔가. 이미 살찐 개를 그냥두는게 좋겠다.”고 쓴 글이 나와서 일장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그저 그렇게 웃어버리기만 할 일이 결코 아니였다. 오죽했으면 그런 해학이 생겨났을가?     패설 견첩록(見睫菉)에 이런 글이 있다. 상공 정제승은 일찍상처하여 과천(果川)서산에 영장할적에 찍어낸 재목이 상당히 많았다. 주택에 본래 외실(外室)이 없었으므로 그 재목을 실어다가 외실을 지으려 할 즈음에 마침 호조파서로 발영을 받았다. 그가 그 재목을 집뒤에 쌓아둔채 종시 집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더니 어떤 사람이 왜 집을 않짓느냐고 물었다. 상공의 대답은 “내가 탁지(度支)장관이 되자 문득 번듯한 집을 세워놓으면 누가 내 뜻을 알겠는가. 의심받을 일은 말아야지”하였다. 그러다가 또 상(相)으로 올라가니 종신토록 외실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읽어볼만한 글이다. 옛사람의 옛일이지만 현세에서 간부노릇을 하는 사람이면 다가 따라배울바가 아니겠는가? 간부라는 직책을 비유하면 등산객이 손에 잡는 피켈과 마찬가지여서 우로 톺아오름에 쓰인다고 할 수 있겠다. 톺아오름은 사업이고 승진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오르는가에 있는 것이다. “시전(詩傳)”에 민구이첩(民具爾睫)이라는 글구가 있으니 그 뜻인즉은 “만백성이 너를 지켜보고있다”는 것이다. 남보다는 어디건 낳은데가있어서 그 직에 올려놓은것만은 사실일거다. 그렇다해서 절대적으로 더 총명한건 아닐것이고 군중이 또한 다가 바보는 아닐것이다. 하니 고관대작이건 미관말직에 있는 자건 다가 이 점을 명기하고 후세에 부끄러울 오명은 남기지 않게끔 자신을 편달함만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259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4) 댓글:  조회:4752  추천:2  2013-07-15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4)   1981년에 열리였던 중국공산당 11계6중전회는 에서 전민족을 동란에 빠뜨렸던 “문혁”에 대해서 다음과같은 결론을 내리였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사이에 있은 ‘문화대혁명’은 건국이래 당, 국가와 인민에게 가장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문화대혁명’은 혁명 혹은 사회진보에는 그 어떠한 의의도 없거니와 있을수도 없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해야 천하를 크게 다스린다’고 했지만 자신을 큰 혼란에 빠뜨렸을 뿐이다.”  “사회주의조건하에서 진행되였다는 이른바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짚는’ 정치대혁명이라는 것이 경제기초가 없고 정치기초도 없었기에 그 어떠한 건설성적인 강령도 내놓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엄중한 혼란과 파괴와 후퇴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력사는 이미 ‘문화혁명’이란것은 령도자가 잘못발동함으로 하여 그것이 반혁명집단에 리용된것이고 당, 국가와 각족인민에게 엄중한 재난만 가져다 준 내란이였다고 알려주었다.” 당과 국가는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변을 보고 뒤를 제대로 닦지 않은것 처럼 청결이 제대로되지 않아 후환이 생길것 같으니 심히 우려된다.  요즘 어떤 한문판사이트에 보면 지난때 “혁명자”노라 머리를 내저으면서 악행을 서슴치않고 감행했던 어떤 맹장잔얼은 잘못을 깨닫기는 커녕 되려 공공연히 뛸쳐나와 “어디 두고봐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는 자는 좋은끝장이 없을것이다”고 댓글로 으름장을 놓으니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깽깽이 풀 황련의 쓴맛은 그것을 씹어본 사람이 잘안다. 내본신이 지긋지긋한 문화혁명의 맛을 톡톡히 본것이다. 하기에  정치인도 관원도 아닌 일개글쟁이요만은 우리 조선족가운데는 혹시 그같이 못난 얼간이가 머리를 쳐들지나않았나 하는 우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요즘은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주제를 갖고 련속 글몇편을 써 올리고있는 것이다.   새밭에다 불을 지르는 자는 그 새밭을 다 태워버리자는것이 목적이지 다른게아니다. “문혁”이 터지자 수도홍위병퇀(首都紅衛兵團)이 상해에 남하(南下)하여 감행한 각가지의 폭행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니다.   1966년 9월 13일, 수도의 “남하병퇀(南下兵團)”은 상해에 이르자마자 상해의 로동모범, 학련대표(學聯代表)와 좌담회를 열면서 말로는 자기들은 상해에 배우러왔노라했다. 하지만 남하(南下)한 그들ㅡ 북경언어학원과 외국어학원의 홍위병들의 속심은 전혀그런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갖고간 전단(傳單) 인쇄물들을 거리에 뿌렸거니와 공공연히 라는 를 내놓았던 것이다. “지금 상해에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가 있다. 어떤것인가? 그것인즉 어떤 허이방분자(黑幇分子)는 지금까지도 여진히 법밖에 나돌면서 호강살이를 하고있다는 그것이다. 하여 우리는 상해시 전체 홍위병과 광범한 공농병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바이다ㅡ 무릇 요물잡귀신의 월급은  일률로 낮출것이며 은행저툭통장, 텔레비죤, 사진기, 쏘파 등을 일률로 몰수하며 보모는 일률로 해고해야한다. 그들을 고급사택과 별장에서 쫓아내야하며 낮에는 일률로 로동개조를 시키고 밤에는 일률로 사상을 교대하게해야한다. 그자들에게 일률로 ”요물잡귀“라는 패쪽을 목에 걸게해야 하고 자전거도 타지 못하게해야 한다. 요물잡귀는 영원히 번신못하게 만들어야한다.”   이와동시에 상해에 남하한 수도병퇀은 각구와 련계를 달면서 “적정정찰”을 하고는 로만(盧灣), 홍구(虹口), 정안(靜安), 황포(黃浦), 갑북(閘北) 등 구역에 나뉘여 가산을 수색몰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첫날에 수색당하고 털리우는 요물잡귀가 50호였다. 첫날은 그래도 몰수한 재산수를 기록했으나 이틑날부터는 아예기록도하지 않고 빼앗기만했다. “북경에서는 아예 문을 들부시고 들어가는데 이게뭔가, 이러면 너무 례모를 차리는게 아닌가. 혁명은 손님접대를 하는 일이 아니다!” 하면서 그들은 수색과 강탈강도를 높혔던 것이다. 로만구(盧灣區)에 간 130여명의 남하를 한 북경홍위병들은 3패로 나뉘여서 세집을 털었는데 그가운데 하나는 우(虞)아무개라는 집(虞洽卿의 아들)이였는데 홍위병들은 그들 부부의 머리를 깎았다.  그래놓고서는 그들의 딸과 너는 립장이 바로설 수 있느냐고 묻었다. 우의 딸이 바로설 수 있노라하니 좋다 그렇다면 이걸로 너의 아버지를 때리라면서 가죽피대를 주었다. 아무렴 어쩌면 딸이 제부모를 때린단말인가? 그러지 못하겠다고 뒷걸음치니 그들은 그의 머리도 우악스레 잡아 보기사납게 깎아놓았다. 다른한집은 “양노(洋奴)”라는 별명을 가진건데 주인은 나이가 80이 된 반신불수의 로인이였다. 그런것을  그의 아들, 며느리, 딸한테 가죽띠를 주면서 로인을 때리라했다. 그들은 그렇게 못하겠노라 뒷걸음쳤다. 홍위병들은 로인의 아들을 묶어 욕실에 넣고는 실컷때렸다. 그러고나서야 그들은 트럭 3개에다 가장집물들을 걷어싣고 전람을 시킬 목적으로 체육관으로 가버렸다. 30여명으로 구성된 한 홍위병 남하대(南下隊)성원들은 진모(陳謀:  原三靑團分隊長)의 집을 수색할 때 그집의 식솔 다섯의 머리를 다 깎아놓았거니와 혁띠와 자루긴 우산과 불집계와 지팽이로 마구때렸다. 이에 진모((陳謀)가 아품을 참지 못해 “16조에 원더우(文鬪)하고 우더우(武鬪)를 말라했는데 너희들은 왜 이러는가?”항거하니 홍위병들은 “때려죽이지 않으면 그게 바로 원더우(文鬪)인거야.”하면서 사람을 그냥때렸다. 이웃들에서 와보고 너무한다고 하니 홍위병들은 그네들이 보지 못하게 문을 닫아걸고 기껏때렸다.   통계를 보면 9월 15일전에 북경에서 남하한 홍위병들이 10개구에서 모두 90호좌우 수색했는데 서회구(徐匯區)에서 58호가 털리웠을뿐만아니라 홍위병들은 털어간 물건들을 갖고 “자본가착취죄증전람관”을 꾸렸을뿐만아니라 물건을 되돌려주기는새려 집까지 빼앗아내여 그들을 몸둘곳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기간에 우도우가 48차였는데 대상자 98명중 머리를 깎이우고 물매를 맞은 사람이 82명이였다. 마음선량한 시민들은 정책대로 원도우(文鬪)를 해야지 그래서야되느냐 사람은 살게해야지 했다. 그러니 홍위병들은 “원도우(文鬪)”는 투쟁하지 않는것과 같다“면서 ”상해는 너무나조용하다. 이래서야야 어디 혁명이 되는가. 때려죽여도 문제없다. 돈 8원을 쓸뿐이다“했다. 8원은 화장비였다.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의 통계를 보면 북경의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들이 30차의 우도우(武鬪)를 했는데 매를 맞은 사람이 100이상이였다. 우도우(武鬪)는 낮이 아니라 밤에 감행되였는데 문을 닫아걸고 때렸다. 매를 맞은 사람은 옷에 묻은 피를 씻어야 하거니와 아무리 아프고 병신이 되어도 병원에 가서는 안되였다. 그러면서 매맞는 대상자들은 매일 방을 바꾸었다. 때린 죄증을 숨기위함이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의 우도우(武鬪)가 “4류분자”와 “자본가”의 범위를 벗어나 “문제”있는 “사회청년”과 “떠돌이꾼(流民) 등에로 옮기여 발전했다. 그러면서 그 방법도 수색당하는 장소로부터 형실(形室)을 따로 정해놓는데로 변해버렷던 것이다. 북경 남하홍위병(南下紅衛兵)들의 그같은 본새가 어느덧 상해는 물론 전국에 널려있는 수백개도시에 시범으로 퍼지는통에 홍위병들을 더더욱 의지굳고 배짱센 맹장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곳곳에서 북경홍위병들과 련계를 짓는 따촨랜(大串聯)이것이 시작됐는데 그 때문에 “계급각성”을 검증하느라 별의별 인간의 도의(道義)를 벗어난 해괴한 일이 다 발생했던 것이다. 한 경력자가 쓴 (新星出版社)을 보았는데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제일 큰 “홍태양조판총부(紅太陽造反總部)”에서 홍위병끼리 서로 련계를 다는 을 조직한게된건데 사람은 많고 인원수는 제한이라서 참가자를 고르고 제한하느라 내놓은 부대조건이 많았는데 각종 고험을 이겨내야 참가할 자격이 된다는데도 있엇던 것이다. 그 고험이라는 것이 어떤것들이였는가? 사이가 제일가까운 친구의 귀뺨을 때리라면 너는 때려야한다. 네가 좋아하지 않은 선생의 정수리에다 표어를 써 붙이거라. 너의 부모가 끌려나오면 너는 사람들이 제일많이 모여 들끓는 곳에 그를 끌고가야한다. 등등.   부정모혈(父精母血)이라 아버지의 정수와 어머니의 피라는 뜻이니  자식은 부모의 뼈와 피를 물려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 나서겠거든 너는 제부모도 서슴없이 욕보이는 후례자식이 되라는 것이였다.      “대해항행은 타수에 의거하고, 만물의 성장은 태양에 의거한다”면서 “위대한분의 말 한마디가 억만마디를 당한다”고했던 세월, 그년대에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는 지도서(指導書)는 홍보서(紅寶書)라고 불렀던 “어록”책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들고 “충성무”를 췃고 날마다 때시걱전이면 위대하다는 사람의 초상을 우러러 “삼경삼축”을 했다. 신통히도 일본이 망하기직전모양이였다. 그때 내 나이 5~6살이였는데 사람들이 소화천황이 있다는 일본쪽을 향해 밥먹기전에 기도를 하듯 그러는 모양을 본 기억이 났다. 그래 웃음이 나왔지만 속으로 웃었을 뿐 감히 표면에 나타내지는 못했다. 웃을 수 없었다. 앞가슴에다 초상마크를 달지 않아도 딴눈으로 보는 세월이였는데 누가 감히 억만인민의 한결같은 충성심을 비웃는단말인가? 그때는 인간성이란 아예 베버리고 사람잡이에 나서서 활개치는 자를 “혁명자”라했다. 비틀어진 인정에 원안이 쌓이고 쌓여 호곡하는 삭막한 저주로운 세월이였다. 해도 그런자들에게 죄책을 묻고 처벌하기는 어려운것이 아직까지의 실정인 것이다. 강청이 심판석에 올라갖고서도 한마디만은 과연 “명창”을 했다. “나는 주석의 개다. 그가 누구를 물라면 나는 누구를 물었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까지도 그런 구실을 내놓아서야 되겠는가?   “어디 두고봐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는 자는 좋은끝장이 없을것”이라고? 말을 이같이 하는것이 젊은이라면 그는 영락없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전혀모르는 무지한일거고 젊은이가 아니라 나이가 50을 넘긴 사람이라면 그는 꼭 ”10년동란"때 남을 때리고 수색하고 빼앗기각질에 맹장이 되었던 망나니일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정녕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자기가 저지른 일ㅡ  죄를 뉘우칠줄도 모른다면 그는 그야말로 진짜무지한 야만이다.                
258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 (3) 댓글:  조회:4263  추천:0  2013-07-12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 (3)   1991년에 창간된 는 독자가 많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종지로 내세우고 실재한 력사사실들을 파헤치니 아마 볼멋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요즘도 그 잡지에서 가슴을 전율케 하는 글 한편을 보았다. 지난 반우(反右)때 공군에서 우파로 몰린 몇몇 젊은 군관과 병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폭로한 것인데 읽노라니 눈물이 나면서 격분이 솟구쳤다. 일상을 벗어난 그같은 비극이 왜 우리 나라에서 생겼던가?..... 한번다시 숙고하면서 스스로를 심각히 반성해봐야 할 일이아니겠는가? 그 글을 쓴 사람은 양숭성(楊崇誠)인데 그는 언녕 사업터를 떠난 리직간부로서 본직은 공군제1사정치부선전간사(空軍第1師政治部宣傳幹事)였다.   다가 잘알다싶히 지난날 중국에서 벌어졌던 “반우파운동”은 한심하게도 잘못번져진 일장의 큰 재난성적인 정치운동이였다. 그 운동이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억울하게 만들었던가! 하기에 국가가 입은 손실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요 전도는 암담해 그것을 깨달은 공산당은 뒤늦게나마 개정의 길로 나아갔으니 다행인 것이다. 에 실은 글을 보면 2000년도에 생존자몇이 한데모여 지난날을 회억하면서 간단히 통계를 내봤는데 필자인 양숭성(楊崇誠) 본인이 적을 두고 사업했던 공군 1사에서만도 10명은 박해를 받아 이미 죽었고 18명은 살아있다해도 잔페가 되었으며 20명은 도망친것이 행방불명이였다. 게다가 그외의 30명은 련계가 끊어져 찾을 방법도없었고한다. 살아 남은것은 7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가 몸에 병이 있으니 페인이나답지  않는다고한다.   아래는 사망자 몇의 상황이다.   초방(肖方)의 죽음ㅡ 당적과 군적을 떼운 초방(肖方)은 로개농장으로 끌려가면서 너무도 원통해 울며 부르짖었던 것이다. “참군할때부터 죽더라도 당의 생명을 보위하리라 맹세했던 내가 어쩌면 하루밤새에 인민의 적으로 된단말인가?! ” 농장에 간 그는 죽도록 일했다. 그리했기에 그는 표현이 좋다고 1962년에 우파를 면하게되였다. 했지만 그한테는 “우파분자모자를 벗은 사람”이라는 새딱지가 붙어있었다. 하여 그는 계속 고험을 겪어야 한다는 규정하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문혁”이 왔고 1968년에 “계급대오정리”가 고조에 오르니 그는 다시끌려나와 투쟁받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사상보위대”는 매일저녁 그를 끄집어내여서는 자기절로 “새반당죄행”을 교대하라고 족치였다.   그야말로 인간의 자비란 손톱만치도없는 무지한 자들의 집체적인 박해였다. 초방(肖方)은 사실 교대할것이란 없었다. 그럼에도 이듬해인 1969년 겨울의 어느날 밤에는 200여명이 모여 반당죄행을 고백하지 않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그를 몽둥이로 뚜드려팼던 것이다. 살가죽이 다 터져 붉은피가 전신에 랑자했다. 그는 아품을 이기지못해 땅바닥에서 디굴디굴 구을면서 통곡했다. 그랬음에도 리지를 잃은 자들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는 살려니말라면서 그를 두시간동안이나 모택동초상앞에 꿇어엎디여 빌게했던 것이다. 피를 많이 흘린 그는 목이 말라 죽을지경이여서 물을 달라했다. 그러니 그자들은 전정대상은 물먹을 자격도 없다면서 먹겠거든 오줌이나먹으라했거니와 똥을 누겠거든 바지에다 싸라했던 것이다.   혹독한 학대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울분에 터져 나는 정말 죄없다 살려달라고 겁듭거듭 웨치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마음이 선량한 사람들은 보다못해 “모택동사상보위대는 너무잔인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쓰러진 초방(肖方)은 결국 다시일어나지 못한채 그 자리에서 죽고말았으니 그때 나이가 43살이였다. 전정대(專政隊)는 그를 거적에다 말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왕경개(汪慶凱)의 죽음ㅡ 왕경개는 호북사람인데 1957년에 우파분자로 됐다. 그가 과수농장으로 옮겨온 첫날, 공농대장은 그를 세워놓고 한바탕 되게 욕했던 것이다. “너의 그 껍질(군복)을 벗어버려, 꼴보기싫게놀지말구! 너희들은 다 죄인이지 복을 누리자고 온게 아니야!” 하면서 당장 오후부터는 물통을 산에 메여올리라고 명령했다. 한재(旱災)방지에 동원되던 때였는데 그날 오후 100여메터높은 산언덕으로 두지게를 져올리고 난 그는 맥이 지냈거니와 그보다도 심한 모욕과 학대를 차마 더는 받아낼 수 없어서 그만 나무에 목을 매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1살이였다. 농장의 령도는 회의를 소집해놓고 “그는 반동립장을 견지하느라 사상개조에 항거해나선것이니 차라리 잘죽었다!”고 선포했다.   류경요(劉庚堯), 하존국(夏存國), 우학항(于學航)의 죽음ㅡ 그들은 다가 육군사람이였는데 1950년에 부대에서 비행기수리기술을 장악하게 하느라 공군학교에 보낸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부대의 골간이 되였다. 한데 반우(反右)때 우파분자로 몰리여 농장에 내려가 사상개조를 하게되였던것이다. 1970년도 “문혁”이 고조에 치달아오를 때 모택동사상전정대(毛澤東思想專政隊)는 너희들은 새죄악을 고백하라면서 그들을 핍박했다. 그러기를 끊지 않았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일을 하게했고 밤이 되면 회의를 열고 때렸다.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지 못해 절망하고 만 그들은 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류경요(劉庚堯)는 항일전쟁시기에 참군한 로간부다. 여러날 지속적으로 매를 맞은 그는 과수나무에 농약을 치러 갓다가 버려진 페갱(廢坑)에 들어가 농약을 먹고 그만 자살하고말았다. 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썩기시작했는데 그를 파묻자고 파놓은 굴이 작으니 전정대(專政隊)는 그의 다리를 끊어서 파묻어버렸다.   하존국(夏存國)은 여러날 곱잡아 뚜드려패니 매를 더 이기지 못해 어느날 밤중에 물푸는 양수기방에 들어가 목매죽고말았다. 류경요(劉庚堯)와 하존국(夏存國) 그 두 친구가 죽는것을 본 우학항(于學航)은 다음은 자기차례라 여겨 밤중에 집에서 목을 매 죽고말았다. 이듬해 제전(梯田)을 수리하다가 웅덩이체 처넣고 덮어버렸던 우학항(于學航)의 썩은 시체가 나오니 사람들은 그것을 비료로 하고 계급의 적이라 하여 머리에다 “于學航”이란 피쪽을 달아 나무에 걸어놓았다.   공군병사 려명봉(黎明峰), 손창(孫昶), 진청악(陳淸萼)등은 무례하게 강요하는 로동형벌에다 기아를 이겨내지 못해 굶어죽고말았으니 그당시 나이가 각각 26, 25, 26살이였다.  양정파(楊靜波)는 원 공군제5속성중학의 정치교원이였는데 1958년에 우파로 획분되여 농장에 내려가 사상개조를 했다. 그해의 년말에 우파들을 한데다 몰아넣고 저수지를 수건일을 시킬 때 그는 무너져내리는 언 흑덩이에 깔려죽었다.   리덕본(李德本)은 제8항공학교의 레이다교원이였다. 그는 우파가 되어 로동개조를 하면서 시력이 점점 못해져 병원에 가 의사를 보이겠다고 하니 생산대장은 그가 일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면서 종시 청가를 해주지 않았다. 하여 병을 제때에 보일수 없었다. 그후 시력은 점점 더 못해졌거니와 몸을 평형잡기 어려웠다. 하여 그는 자주넘어졌다. 그제야 생산대장이 청가를 해서 병을 보이니 뇌에 류(瘤)가 생겨 신경을 압박해서 그렇다는 것이였다. 하여 리덕본(李德本)은 북경에 돌아와 협화병원(協和病院)에 가 보였더니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수술대에서 죽고말았다. 그때 나이 27살이였다.   인간에게 목숨보다 더 귀중한게 어디있으랴! 하건만 지난날 우리 나라는 백성의 생명을 너무도 귀중히 여길줄을 몰랐다. 도대체 왜서 젊은인재마저 아낄줄은 모르고 귀중한 생명을 그같이 억울하고도 값없이 잃게만들었던가? 그러고도 남한테 위대한 당, 위대한 사회주의국가라 자랑할 수 있단말인가?   중국의 하면 왕진희(王進喜)를 가리키는 것이요 그가 어떤사람이란건 세상이 다아는 일이다. 1960년말에 왕진희(王進喜)는 대경유전에서 시추대의 대장으로 되었고 1965년에는 시추대지휘부의 부지휘로 올리췃거니와 9계 당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던 것이다. 그는 령도강위에 있으면서 시종 기층에 심입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때에 발견하고 처리하면서 영웅의 본색을 지킨것이다. 그는 중국의 석유공업발전을 위해서라면 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으니 세상이 공인하는 공훈(功勳)인 것이다.   “어려운 생활과 고된 일을 겨디여 낸 왕진희동지는 끝내 심한 위병에 걸리였다. 하건만 그는 사업을 완강히 견지했던 것이다. 1970년에 그가 위암이라는것이 확진되여 치료를  받았건만 효험을 보지 못한채 47살나이에 우리곁을 일찍이 떠나고말았다.”                                , 인민출판사.                                    그런 왕진희(王進喜)가 “문화대혁명” 에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보라. 한패의 반란자들은 그의 목에다 커다란 물통을 걸어놓았거니와 머리를 수증기가마에 들이밀어 질식케했으며 불로 지지거나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발등을 찔러놓았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그자들은 그를 어두운 방에 가두어놓고 혹독하게 뚜드려팼던 것이다. 그뿐아니였다. 그자들은 걸상여러개를 높다랗게 쌓아놓은 후 그 꼭대기에 올라가라해놓고는 그것을 발로 차 무너뜨렸다. 그래서는 거기에서 떨어져 딩구는것이 보기좋다고 손벽치며 깔깔거렸던 것이다. 그자들은 그같이 비인간적인 혹형(酷刑)으로 왕진희를 굴복시켜 대경에서 수립한붉은깃발은 붉은것이 아니라 검은 것이라  승인하게끔 만들려했던 것이다. 대경의 깃발은 당중앙과 모주석이 직접세운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한단말인가? 무지한것들이 무엇이나 때려엎으면 그것이 곧 신성한 “혁명”인줄로 알았으니 그같이 야만의 짓밖에 할수 없었던 것이다.         
257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2) 댓글:  조회:5194  추천:1  2013-07-08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2) 할빈시 남강구 대직가에 있는 극락사(極樂寺)가 흑룡강에서는 제일큰 불교사원인 것이다. 내가 내내 쟈므스근처에 있는 향촌에서 살다가 성소재지인 그리로 이사를 하자마자 일부러 품놓고 제일먼저 구경하러 찾아간것이 바로 극락사(極樂寺)였으니 어느새 25년세월이 지났다. 중국에는 그것말고도 불교사원이 여럿되지만 국무원에서는 1983년에 할빈에 있는 그것을 한지불교중국중점사원(漢地佛敎中國重點寺院)으로 정해놓은것이다. 극락사가 생기기는 당천보원년(唐天宝元年)이라니 기원742년이요 당, 송, 원, 명, 청, 민국을 거쳐 오늘에 이른거니 저그만치 1270춘추를 보낸것이다. 그러니 상전이 벽해가 되는 허구한 세월에 흥폐(興廢)의 진통인들 오죽했으랴! 거의 피페해지는것을 1937년에 당시 불교협회회장이였던 원영법사(圓瑛法師)와 고전현상회회장(古田县商会会长) 호진거사(胡震居士)가 돈을 모아 다시금일떠세워 오늘에 이른것이니 명실공히 천년고찰(千年古刹)인 것이다. 극락사(極樂寺)의 건축역시 다른사원과 마찬가지로 주축건물은 남북향으로 배렬이 된건데 그 차례를 볼것 같으면 천왕전(天王殿)다음 대웅보전(大雄寶殿), 그다음은 삼성전(三聖殿), 장경전(藏經殿)이다. 극락사(極樂寺)에서는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봉양하고 서방의 삼성인 아미타불,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양하고있다. 장경루에 들어가봤는데 그곳에 진장된것들 중에서도 이 옹정(雍正)년간의 유물이라니 아마 제일오랄것이다. 삼성전(三圣殿)뒤에있는 그 장경전(藏经殿)은 벽돌과 목재가 결합된 2층집이였는데 송판영인(宋版影印)의 적사장(碛砂藏) 60함(函) 모두 590책, 빈가장《频伽藏》48부; 륭장678부; 속장1750部가 있다고 한다。 극락사는 1983년도에 문을 다시금 연 이래 흩어진 승려들을 속속받아들이였다. 그러면서 아울러 신일대를 배양하여 중국불학원에 보낸것이다. 그런일을 한 극락사가 지금은 대외로 불학원의 구실을 잘하고있다고 한다. 문화교류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셈이다.   극락사주건물 주변의 것들을 볼것같으면 왼편에 안양당(安養堂), 념불당(念佛堂), 종루(鐘樓), 재당(齋堂), 십방실(十方室), 선방(膳房), 사방(司房) 등의 건축물이 있고 오른켠에는 숙사(舍宿), 고루(鼓樓), 불학원교실(佛學院敎室), 선방(禪房), 객당(客堂) 등 당실(堂室)이 있는데 모든 전당과 법상(法像), 법기(法器)들은 다가 화려하고 장엄하거니와 휘황찬란했다. 지장전(地藏殿)에서 나오니 7층으로 만들어진 부도탑(浮屠塔)이 유별나게 눈길을 끄당겨 가까이가보니 과연 찾기어려운 건축물이였다. 그것은 높이가 37메터, 벽돌을 쌓아만든 7층으로 된 팔각형의 탑이였는데 탑처마밑에는 룡, 봉황, 학, 사자 등의 동물이 그려져있는데다 아래쪽 탑체의 둘레에는 30라한의 부각상이 놀랄만큼 기묘하게 조각되여 있었다. 극락사에서만이 볼수있는 경관이 아닐가싶을지경이였다. 아마 그래서 소문이 더난것 같고 따라서 유람객의 발길이 늘 끊지를 않는 것 같았다. 극락사 산문(山門)에 새겨진 “极乐寺”란 세글자는 청대의 장원남통인(状元南通人) 장건(张謇)의 글씨라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날따라 절강에서 온, 그곳 어느 시의 불교협회회장이라는 법사가 밖에 나왔다가 구경을 간 내가 불교를 지극히 관심하는 사람같아 보였던지 내내 무람없이 곁을 주면서 이것 저것 내모르는것들을 차견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는 사(寺)내에 있는 미타(弥陀), 세지(势至), 관음(观音) 삼존동상과 인도의 옥불은 조형이 정미해서 높은 예술가치와 문물적가치가 있다면서 근년에는 해외교포들의 경제지원으로 산문(山門)과 지장전(地藏殿), 방장실(方丈室)을 더좋게 지을거라고 알려줫다. 그러면서 그는 천왕전(天王殿)편액은 려경민적(旅京闽籍)의 서법가 우우(虞愚)의 필적이라는 것과 웅위로운 대웅보전(大雄宝殿)의 편액은 당년 중국불교협회회장인 조박초(赵朴初)가 쓴것이라 알려주면서 옛적에 해지법사(海智法師)가 민공을 거느리고 대웅보전의 기지를 닦을 때 묘하게도 굴속에 도자팔괘패(陶瓷八卦牌)가 하나있는것을 발견한건데 거기에 닭걀같은 샛노란 오매니단(五枚泥蛋)이 함께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런것이 잃어진 후로는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햇다니 과연 유감스러웠다. 절강에서 온 그 불교협회회장이 하는 말인즉은 할빈의 극락사(極樂寺)역시 국내 다른여늬곳의 불교사원과 마찬가지로 문혁(文革)때는 퍼쓰쥬(破四舊)바람에 액운을 면치못했다면서 날강도와도 같은 홍위병들의 손에 속이 다 털리웠거니와 하마터면 모양마저 없게 훼손될번했다는 것이였다. 그럴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형편을 보건대는 극락사가 그만큼이라도 모양을 갖추었으니 그래도 운수대통이아닌가싶었다. 천제님맙시사, 이제다시는 재앙이 없이 세상끝까지 보우하옵소서! 1966년 5월 29일, 청화대학부속중학의 학생들의 비밀리네 “홍위병”이라 이름을 단 조직을 내오고서는 6, 7월간에 선우로 등 대자보 석장을 내다붙이면서 고 했다. 8월 1일, 모택동은 편지로 청화대학부속중학홍위병을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시의 학교들은 분분히 “홍위병”을 조직했고 8월 18일에는 모택동이 천안문에 올라 그들을 검열했다. 그리하여 “홍위병”이라는것이 신속히 전국적범위에서 왁짝생겨났고 그것은 “문혁”의 중요한 정치력량으로 되었던 것이다. 청춘의 열혈이 한창 끓기시작하던때라 그들은 “낡은세계는 짓부셔야한다”, “요물잡귀신은 싹다 쓸어버려야한다”는 자극적이고 선동성이 강한 정치구호에 용기가 들뜨니 히스테리가 발작을 하듯이 사나와졋던 것이다.  그들 “호위병”은 무자비하고도 악렬한 파궤를 도맡다싶이했으니 그들에게는 무서운것이 없고 무르고 센것이 없었다. 무릇 낡은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라면 닥치는 뚜드려부시고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략탈”이라고는 하지 않고 “혁명인 수색”이라했는데 그들의 “수색”에 의하여 제일심하고도 험하게 “소탕”된것이 바로 “극락사(極樂寺)”와 같은 민족문화유물이였다.   우리 나라 중국의 남쪽끝 해남도에 있는 해서(海瑞)의 묘가 훼멸되였거니와 청장고원의 각랍사(覺拉寺)에 있던 장왕송찬간포(藏王松贊干布)와 문성공주(文成公主)의 소상(塑像)도 일부가 훼멸되였으며 하남(河南) 락양시의 룡문석굴(龍門石窟)에 있던 무수한 불상들은 몸체만 남고 머리는 싹다 떼우고말았다. 호남(湖南)에는 중국사람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줄곧 시조(始祖)로 모셔온 염제릉(炎帝陵)이 있었는데 홍위병들의 손에 전부훼멸되고말았다. 절강(浙江)에는 4천여년전 백성들을 이끌고 치수(治水)를 하면서 세 번이나 집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를 않았다는 전설적인 인물 대우(大禹)의 묘가 있었는데 그것을 뜯어 없애버렸거니와 높다랋게 만들어놓은 그의 소상(塑像)마저 뚜드려부수었다. 안휘(安徽)에는 천년 대를 내려오면서 보호하고 제를 지낸 명관(名官) 포청천(包靑天)의 시신이 묻힌 묘(墓)가 있었는데 훼손되였다. “중화민족영웅”으로 칭해온 내몽고의 칭키스칸의 묘도 훼손되였다.   어디그뿐인가, 반복되는 얘기지만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 하여 중국에서는 백성들이 제일높이 받들면서 2천4백년넘도록 제를 지내온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는 그 공자의 묘마저도 깨끗이 털리웠던 것이다.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에 있은 1천여넘는 석패들이 부서지거나 쓰러졋거니와 불에 타고 훼손된 문물이 6천여개넘는다. 불에 태우고 팔프로 처리해버린 책만도 10만권넘어된다. 5천그루가 넘는 고목들이 채벌되였거니와 2천개넘는 묘(墓)들이 도적에게 털리운것이다.    그 모든 것이 국가것이였다. 하건만 문혁(文革)이 끝나야 국가정부에서는 30여만원을 들여 도적맞힌 금은재보들을 얼마간 겨우 겨우겨우 걷어들일 수 있었다. 잃은것에 비하면 그것이 새발의 피나될가. 5천여년을 자랑하며 지켜온 문화재보들을 제손으로 말끔히 훼손해버리고나서 이제는 그것들을 다시 건설을 하느라고 재력을 퍼부으면서 고심한다.   세상을 웃기는 중국식혁명이다!   몇해전이다. 나는 북경에 이사를 오자 일부러 여러날 품놓고 시내구경을 했다. 소수민족작가 제1차필회때 5일간에 명승고적은 그나마 거의구경했어도 시내구경은 못한 나였다. 그래서 나선건데 어느 번화가에는 골동품상점에서는 갖가지의 미륵보살의 머리들만 가득 내놓고 팔고있었다. 분명 그자신이 제조한건아니였다. 그래도 값을 알아보니 비싸기가 입이 벌어질 지경이였다. 올봄의 일이다. 어느날 시장에 갓더니 깥에서 중년을 넘긴 한족부부가 사진두장을 펴놓고 팔고있었다. 보통사진이 아니였다. 큰사진이 너비가 40여센치에 길이는 근 3메터가량되는건데 천명이 넘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 장군급인물들이 통일된 회색장교복을 입고 모택동과 엽검영을 회견하고 찍은 합영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좀 작은건데 그도 근 천여명되는 사람이 중앙의 령도들을 회견하고나서 함께 찍은것이였다. 값은각각  2000원, 1300원이였다. 보는사람마다 그저 희한해 할 뿐 사지는 않았다. 생각들이 자기나 제집식구가 사진에 들어있으면 몰라도....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이 사진 어디서난거야?” 물으니 사나이가 대답은 안하고 팔기를 그만두는것이였다.   한데 그로부터 며칠지나서는 그들 부부가 내가 아침마다 운동하러가는 “만춘원공원”에 나타나 거기 하쪽에서 그것을 내놓고 파는것이였다. “이사람, 자넨 성명이 뭔가?” 전날부터 수상쩍게 본지라 나는 잡담제하고 직방 캐물었다. 그랬더니 저쪽은 사기실으면 사지 말거지 남의 이름은 알아뭣하냐면서 몹시 아니꼬와했다. 그래 내가 말했던 것이다. “공안에서 조사하면 할말이 있어야지, 성이 아무개인 누구한테서 삿다고.” 그 사나이는 급급히 거둬갖고 그만가버리는것이였다. 분명제것이 아니였다. “문혁”을 하느라 남의 집을 털어 손에 넣어 여지껏 보관햇던것을 이제는 때가됐다여겨 내놓고 파는것 같았다. 안그러면 왜서 떳떳이 나오지 못할가? “그놈의 문화혁명은 숱한 도적놈만 길러냈다니까!” 나의 한족친구 로류(老柳)가 하는 소리였다.   아래에 공자상을 올리니 독자는 보기바란다. 사진은 산동곡부의 공묘대성전내에 있었던 공자인데 채색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그 공자상은 문혁(文革)때 북경에서 간 홍위병들의 손에 두 눈알을 빼웟거니와 심장이 도리워진데다 전신은 막된 욕지걸이와 저주로운 악담으로 엮어진 표어들로 어지러워진 채 거리에 끌려나가 회술례를 당하고는 박살이 난것이다. 바로 사람이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표징이다. 
256    에세이 김문학의 “발견”에 대한 반박 댓글:  조회:5040  추천:4  2013-07-04
  에세이 김문학의 “발견”에 대한 반박    김문학이 사이트에 올린 “‘비적원리’의 발견”이란 글을 읽어봣다. 그 본인은 “비적원리”라는 저작을 집필하느라 “중국의 裏구조를 연구”했노라 피력하고있다. 얼핏보아 리유가 정당해 나무릴데없는것 같지만 문장을 자세히 다 읽고나면 의이(疑異)가 생기는 것이다. 김문학에게 묻겠다, 그대가 “비적원리”를 탐구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이였는가?   김문학은 중국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비적”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다수 섭렵햇노라고 한다. 김문학의 말과 같이 중국을 놓고 보면 “정통(正統)사회”라는 표현의 사회외에 리면(裏面)에는 확실히 또 하나의 “비정통”사회로서의 인간층이 중국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과거의 력사가 바로 그러했다.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숨길필요도 근본없는 일이다. 어디 중국만 그러했던가? 조선은 그렇지 않았던가? 일본은 그렇지 않았던가?... 세상 어느 나라면 그렇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런 력사현상을 여하히 대하고 풀이하는가 하는 것이다. 김문학은 “표면인간층을 뒤엎고 새로운 정통사회의 주인으로 되는 중국사회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암장했던 혁명력이 시기를 보아 폭발하여 구(舊)정권을 뒤엎고 새정권을 세움은 당연한 력사규률이고 형상인데 여기에 그 무슨 발견이고 뭐고할것이 있는가? 김문학은 력사규률을 이루는 그만한 사회구조도 여지껏 모르고있었다면 과연 말이되지 않는 슬픈일이다.         . 김문학이 “수호전”을 거들면서 “모택동은 이 력대의 농민반란, 비적원리를 스스로 중국을 구제하는 방침으로 삼았다.”다면서 “문약한 근대 중국지식인의 사대부원리(士大夫原理)에 반기를 든 모택동의 폭력적이고도 획기적인 혁명방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김문학에게 묻겠다. “력대의 농민반란”은 “비적원리”에 의한것이였던가? “혁명”이란 “폭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렇다하여 “비적원리”에 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같이 긍정한다면, 천만에ㅡ 김문학은 력대의 농민봉기의 성질을 몰라도 한심하게 모르고있었다. 은 북송말년의 송강봉기(宋江起義)를 제재로 하여 송조통치자들을 반대하여 일어난 량산박 108명의 봉기자들을 하나하나 그리면서 그것을 유기적으로 련결시키는 형식으로 되었는데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근원을 심각히 밝혔고 농민봉기영웅들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였으며 봉기군의 형성과정, 관군과의 성세호대한 투쟁, 그들의 재능과 지혜, 전략전술을 서술하면서 그들이 종국에 가서 실패하게 된 내재적원인도 밝혔다. 소설은 이러한것들을 통하여 는 사회적현실을 반영하였다.                                        김문학은 “중국사회를 지배해온 수많은 원리중에서 우리가 홀시했거나 간과했던것이 ‘비적원리’였다”면서 “....리면에 반거해있은것은 어느 조대나 공포스런 ‘비적원리’였던 것이다”라고 하는네 그것은 중국혁명들에 대해서 그 실질을 모르고 망녕되게줴치는 소리다. “비적원리”가 아니라 “농민의식”을 벗어못난것이였다면 혹시나 옳을지는몰라도. 김문학은 에 나오는 략상박영웅들을 뭐로알았는가? 철모르는 삼척동자가 아닌이상 그들을 몰밀어 비적(匪賊)이였다고야하지 않겠지. 김문학은 “100년전인 1900년대 초기 신해혁명 1911년을 거쳐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될 때 까지 중국력사에서도 비적이 창궐의 극성에 달한 시기였다.”고 한다. 대체 무슨근거로 그따위 소리는 하는가? 일제가 동북을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는 저들을 항거해 싸우는 모든 항일분자들을 비적(土匪)으로 몰면서 “비적이 창궐해 극성”에 이른다했거니와 가혹한 진압과 토벌과 학살을 감행했던 것이다. 김문학은 침략자의 그 망령을다라서 지금 그대로뇌이고있는게 아니고뭔가? 김문학이 “모택동의 혁명리념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자신의 혁명원리인 비적원리를 근대식 투쟁원리로 승화시킨것이며, 이것으로 그가 중국해방에 성공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근거로 그런 결단은 내리는가? 글을 쓰는 학자라면 근거있는 소리를 해야한다. 모택동이 언제 어디서 “자신의 혁명원리”는 “비적원리”를 바탕으로한것이라했는가? 그것도 “유교원리아래에 연면히 맥을 잇고있는 ‘비적원리’를 바탕으로 한 폭력, 투쟁원리”라고?! 문학이가 대체 비(匪)에 대해서는 얼마나알길래 그런 리론은 펴는건가? 비(匪) 어설피알고 망탕웨지말라. 의 인물ㅡ농민폭동군을 토비와 이어붙이는건 비(匪)에 대해 잘모르는 무지한 자의 오판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얼빤한 자의 억측에 의한 사이비한 론(論)이 결국은 연유를 잘모르는 독자들을 홀려먹으면서 믿게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해로운 일이다. 헛소리아니다. 나는 자신의 노력을 믿고있기에 지금도 의연히 스스로 나자신을 “토비연구가”로 떳떳이 자처한다. 어느 문장에선가 설토했듯이 내가 동북토비에 대해서 전문연구해온것이 장장 30년, 내 평생의 정력은 거기다 거기에 바친것이다. 나는 내 짓궂은 노력으로 토비란 진정 어떤것이였음을 알아냈거니와 그 원형을 그린 책을 알심들여 써낸것이다. 순비(純匪)는 과연 어한가? 몇해전인 2008년12월에는 민족출판판사에 의하여 나의 세 번째장편 (866천자,686페지)이 세상을 보았다. 동북의 전형적인 토비와 독립군의 운명을 다룬것인데 15여년전에 에 발표한, 토비에 대해서 쓴 론문을 머리말대신에 올렸던 것이다. 독자는 한번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생각과는 다른점이 많은것이다. 한단락을 적는다. “어느때부터인지는 딱히알수 없지만 인간이 살고있는 이 대천세계에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ㅡ 비(匪)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를 어떤곳에서는 호자(胡子)나 향마(向馬)라 했고 어떤 곳에서는 토비(土匪), 마적(馬賊) 혹은 비적(匪賊), 봉자수(烽子手), 강도(强盜)라 불렀다.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이 무리들도 점차 변하면서 발전하고 성숙해져 자기들의 조직기구를 가지게 되었고 두령을 선거하는 방법이 있게되였으며 자기들의 종교와 신앙이 따로 생겨났고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었으며 지어는 자기들만의 언어와 풍속도 따로 생겨나 하나의 “업종”을 이루게되였던 것이다.>>   나의 미니홈에 올라있는 가 바로 그 글이니 김문학은 시간있으면 한번 읽어보기바란다. 그러면 비(匪)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반론을 해도 좋다.
255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된다(1) 댓글:  조회:4354  추천:2  2013-06-29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된다(1)   로류(老劉)는 거의 매일이다싶히 내가 조련장(早練場)에서 만나군하는 한족친군데 그가 어느날 나보고 “김선생, 사람이 무지하면 어떻게 되는겁니까?“ 하고 묻길래 내가 “거야 말할거있습니까, 무지하면 야만이 되지요.”라고 대답했더니 로류는 “옳아, 바로그렇지!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면서 자기가 문혁시절(文革時節)을 보낸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 발생했던 “흑오류멸족사건(黑五類滅族事件)”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였다.   문혁(文革)이 시작되자 많이 생겨난 이러저런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비극중에서도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 발생한 이른바  “흑오류멸족사건(黑五類滅族事件)”은 하마터면 전국범위로 확산될번한, 현대력사에서 첫손을 꼽아야 할 미개하고도 잔인(殘忍)하고 포악(暴惡)한 “중국식생명청산”이였다고 하겠다. 그같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극이 발생기게 된 것은 그당시 라서경을 내리떨구고 공안부 부장자리에 올라앉은 사부치(謝富治)의 한차례 인간성을 잃은 무책임한 강화로부터 시작된 것이였다.   “흑오류(黑五類)”란 해방초기에 획분한 계급성분ㅡ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뿐분자에다 우파분자를 더한것인데 문혁(文革)이 시작되자 어떤데서는 거기에다 지어는 그들의 자녀까지 포함시키켜 “무산계급전정대상”으로 한데몰았던 것이다. 그에 대치해서 생겨난것이 “홍오류(紅五類)”라는것이였으니 그것인즉은 공인, 빈농, 중농, 하중농, 혁명간부에다 그의 자녀들이였다.     1966년 8월, 사부치(謝富治)는 북경공안국에서 개최한 한차례 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지난때 규정한것들, 국가의 것이나 공안기관의 것이나 거기에 구속받을 필요없다. 나는 군중이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을 찬성하지 않지만 그들이 나쁜사람에 대해서는 뼈에 사무치도록미워하하고 증오하니 그러지 말라고 억지로 막을수도없는 것이다. 인민경찰은 홍위병켠에 서서 그들과 련계하고 감정을 같이하면서 그들에게 흑오류(黑五類)의 정황을 알려줘야한다” 라고 했다. 사부치의 이 말이 홍위병은 사람을 맘대로죽여도 죄가없다는 선동으로되였다. 하여 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으면서 다른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무서운 참안이 생기게되였던 것이다.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의 공안계통에서는 사부치의 그 강화내용을  전달받자 신속히 부분적 파출소에다 자기의 관할내에있는 홍위병들게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뿐분자, 우파분자”의 불법행위를 알리여 그들의 증오심을 격발시키라했던 것이다. 한데 흑오류(黑五類)의 불법행위라는것이 기실은 다가 꾸며내거나 아니면 형편없이 과장된것들이였다. 그런것을 철없는 홍위병들은 아무런 분석도 없이 그대로 믿고 과감히 손을 펴 잔인한 대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길지는 않았다.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사이였으니 짧디짧은 5일간이였다. 그사이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는 “오류분자(五類分子)”는 물론 그의 식솔까지 포함해서 22호나 멸족을 당했는데 생명을 잃은 326명중 나이가 많은것이 80살 고령의 늙은이고 제일적은것이 이제 세상에 태여난지 38일밖에 안되는 유아였다. “마침 정의감이 있는 북경시위서기 마력(馬力)이 그 일을 알고 급급히 달려가 제지시켰을망정이지 그러지를 않았더면 그놈의 무지하고도 야만스러운 학살이 얼마 더 지속되였을지 모를일입니다.” 로류(老劉)가 하는 말이였다.   듣기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참안(慘案), 아무렴 어쩌면 인민의 신성한 복지ㅡ 사회주의국가라고 입이 째지도록 자랑고 선전을 해온 중국에서, 그도 자애로운 분, “억만인민맘속의 붉디붉은 은태양”이 계시는 “인민의 수도”곁에서 그같이 끔찍스런일이 다 생긴단말인가!?.....귀신이 들어도 놀라 피똥싸고 통곡할 일이였다!    그같은 학살이 다만 북경시 대흥현(大興縣)현에서만 생긴게 아니였다. 호남(湖南)의 령릉(零陵)지구에서는 우파를 빼놓은 “흑사류분자(黑四类分子)”에 대한 학살이 1966년 8월부터 12월까지 4개월나 지속된건데 통계를 보면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9,093명중 홍위병들손에 학살된것이 7,696명이고 자살한것이 1,397명이며 매를 맞아 불구로 된자가 2,146명에 이르었다.   로류(老劉)가 오늘은 신문을 한장들고와서 주길래 받아보니 올해의 정월 26일자 였다. 거기 한면에 실린 글의 표제인즉은 이라는 것이였다. 도성(屠城)이란 도살도시란 말이다. 문혁(文革)때 광주(廣州)에서 그같이 도살한 대상은 우파분자를 제외한 “사류분자(四類分子)”였다. 따져보면 이미 흘러보낸 세월이 오라니 “사사류분자”라 하면 그 본인은 황천으로 간것이 적지 않을거고 대개는 그 가족이거나 걸레붙이였을것이다. 한데도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멸족을 시키는건가?.....   1967년 8월 광주시에서 발생한 멸종참안은 그 본인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순 “로개범타도고조(打倒勞改犯高潮)”에 연유하건만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책임자가 나서지 않거니와 아예 밝히려는 사람도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이제는 력사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미결원안(未決怨案)”으로 될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신문에 난 글을 보면 이제야 비로서 내막이 공개되고있는 그 사건은 발생자체가 본래 있지도 않은 요언에 연유되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해여름의 어느날 근본 있지도않은 “월북로개범(粤北勞改犯)”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광주시내에 쫙 퍼졌다. 그통에 놀랜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공포속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67년, 그해의 여름을 놓고보면 가뜩이나 전국적으로 패거리싸움ㅡ 우도우풍(武鬪風)이 휩쓸면서 총, 포성이 울리는 속에 열혈이 끓는 홍위병젊은이들이 쓰러져 생명을 잃는 판이였다. 이런때에 그곳의 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리였던 것이다. “.....근래 요사한 구름이 뒤덮은 속에 광주는 공포를 자아내는 내전기분에 휩쌓였는데..... 전정기관은 맥을 잃고 공안계통은 마비되였다! 도적과 건달이 기회를 만났다고 날치니 상점들은 오후 3시되면 문을 걷어닫고 거리는 어두워지면 행인의 발길이 끊긴다.... 수륙교통이 중단되는바람에 운수공급에 영향이 엄중해 온 시내가 긴장한 분위기다.” 형세를 알림으로써 방범(防犯)의식을 증강시키려했지만 이런 보도가 시민들에게 불안을 더해줄뿐이였다. 에 기재된것을 보면 그해 8월 10일, 시수용유송참(市收容遺送站)에서 가두었던 84명을 돌려보내느라 풀어놓은 것이다. 한데 그 일이 한심하게도 이와전와(以訛傳訛)되여 “로개범(勞改犯)이 폭동(暴動)을 일으켰다”로 번져버렸다. “로개범은 마땅히 때려죽여야한다!” 군중들의 사유는 그같이 험한 지경에 이르었건만 나서서 그것을 시정해주는 사람도 막는 사람도 없었다. 가뜩이나 이때는 천안문성루에 오른 “붉은태양”의 접견을 받고 돌아온 홍위병들이 담과 배짱이 바람을 뿔궈넣은 공기뽈같이 커질대로 커져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느니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자”느니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자”느니 하면서 말끝마다 타도를 웨쳐대면서 “혁명은 죄가없다”, “반란에 도리가있다”면서 안하무인격으로 광기를 부리는때라 그들의 가택수색과 폭거는 도적이나  강도행위와 조금치도 다를바가 없었다. 하여 광주의 시민들은 자체보호책으로 생각해낸것이 가두 “련방대”를 조직해서 대처하기에 이른건데 “월북로개범(粤北勞改犯)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나도니 그들은 “로개범은 때려죽여야한다!” , “우선 뚜드려패놓고보자!” 웨치면서 조금치라도 의심나는 사람이라면 마구 붙잡아 심문하고 족치였던 것이다..... 그래서죽으면 위엄과 본때를 보여주느라 행길가의 나무나 전선대에다 달아매놓았던 것이다. 그 시체가 부지기수라 지금까지도 그 수자를 똑똑히 밝혀내지 못하고있다. 죽은건 거의가 제 광주사람이였다.      "10. 11일 광주가두에는 매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장제로(長堤路), 연강로(沿江路)는 거의 가로수마다 죽은 사람을 달아놓았는데 이틀간 내린 비에 시체들이 불어나서 보기만해도 끔찍했다." () 온 광주시내가 그런 판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심한 곳은 문화가 없는 하층시민인 운반공 구리로(咕哩佬), 삼륜차부(三輪車夫), 청소부와 변소치기에 허드레장사꾼 룸뻰이 모여사는 덕정로(德政路)일대였다.      누군가는 1995년부터 이 안건을 조사해왔다. “내형(湯永耀)은 ‘문혁’전에 광주7중을 졸업(1962년)했어요. 초중때나 고중때나 학습성적은 좋았어요, 특히 당시와 송시읊기를 즐겼지요. 한데 가정성분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보니 그만 정신이 정상이 되지 못한건데 그날저녁(아마 8월 11일겁니다)에 밤먹고 나간것이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 온집안이 초조불안해나서 찾은건데 이틑날아침때야 아버지가 동산구 1로차총참가에 있는 전선대에다 매달아놓은 시체를 찾아냈던겁니다. 나도 어머니도 그 소리에 그만 통곡했어요, 세상에 어쩌면.... 시체를 민정에서 처리했는데 골회도 남기지 않았고.... 그후 파출소사람이 와서 돈 백얼마를 뿌려주고말더군요.” 어느 한 사람이 한 말인데 그야말로 피눈물이 고인 공소였다. 왜 이런일이 생길가? 원인은 다른게 아니다. 사람은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것다!    (사부치(谢富治)의 선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그같은 “멸족학살”은 중국의 현대사상 보기드믄 원안(寃案)으로 되였다. “恶有恶报”라 천만다행인건 사부치(谢富治)가 암에 걸려 일찍죽었기에 그같이 한심한 “집단학살”이 더 지속되지 않은것이다. 사부치는 1972년 3월 26일에 죽었었다. “사인방(四人帮)”이 꺼꾸러지자 당중앙은 사인방(四人幇)과 동아리가 되어 공,검,법(公,檢,法)을 부시고 저지른 그의 각가지 죄악에 근거하여 당적을 취소햇거니와 림표,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판결해버렸다.)   사부치  
254    에세이 약소민족의 복을 빈다 댓글:  조회:3997  추천:2  2013-06-16
에세이 약소민족의 복을 빈다   “유태인”이라 하면 제2차세계대전기간 독일의 잔인한 히틀러파시스 손에 살해된것만도 600만이요 하마터면 멸족을 당할번한, 운명이 그야말로 기구하고도 비참한 슬픈 민족이라는 것은 세상 어느누구나 다알고있는 사실이다.   전쟁구름이 온 천하를 꽉 내리덮고있었던 그 무시무시한 세월에 파시스살인마들은 인성이란 손톱만치도 없이 깡그리잃고말았으니 어디 유태인하나만을 그같이 학살했던가? 아니다. 히틀러파시스가 파란에다 세운 1000여개의 집중영중에서도 수도 와르샤와로부터 300Km떨어진 곳에 있는 아이슈비츠집중영은 게슈타포두목 히믈러가 명령을 내려 생긴것인데 그자가 범한 죄악이 극도에 이르었기에 더더욱 악명을 날린것이다. 그 아이슈비츠집중영에서만도 혈안이 된 살인마귀들은 1940년 6월부터 1945년 1월에 이르는 사이 유태인과 집씨인은 물론 독일의 침략을 받은 국가의 포로병과 히틀러를 반대하는 정치범을 체포구금하고는 마구살해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을 비롯한 구미(歐美)와 아세아 10여개국가의 갖잖은 인종의 포로들도 들어있은것이다. 110만여명이나 가둔 아이슈비츠집중영을 “사망공장”이라 불렀다. 한것은 그 집중영내에 있은 독가스실 5개로 하루에 사람의 시체 10만여구나 끄집어내는 기적을 창출하기까지했기 때문이다.   1945년 1월 27일, 쏘련홍군이 아이슈비츠집중영을 해방했을 당시 110만명중 행운스레 죽지 않고 영내에 살아남은건 7000여명뿐, 그중에 어린이가 130명이였다. 거기에 갇혔던 유태인으로 살아남은것은건 하나도없다고 한다. 그러한즉 유태인이야말로 운명이 세상에서 가장 기구한 종족이라하겠다. 한데 그네들이 지금에 이르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민족으로 부활(復活)해서 세상금혈(世上金穴)로 되였기에 세인의 찬탄(讚歎)과 더불어 탄사(歎辭)를 자아내고있다. 명실공히 세상의 “돈굴”로 변하였으니 부러움을 받지 않을리있으랴!  마땅한 일이다!   “이 세상돈이 미국사람의 호주머니에 들어간대도 그것은 유태인호주머니의 돈이 된다”   이라는 책의 첫페지에 적혀있는 글이다.   내가 위언마겔의 편역(編譯)으로 된 그 책이 나오자 사서 읽어보고 감명이 된건데 요즘 또 중신망(中新网)의 기자가 미국의 유태인대회주석 잭 로젠과 한 담화를 보고나니 그 느낌이 한결 새로워지는 것이다.   “유태인은 왜서 총명하고 그렇게 용이하게도 부유해지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잭 로젠의 대답인즉 아주 간단명료했다. “유태인이라고 다른민족보다 더 총명한건 아닙니다. 유태인의 오늘이 있게된건 누구보다 모험을 과감히 하기때문이죠.”   잭 로젠은 오늘날 미국에서는 제일 영향력있는 유태인 다섯명중의 한사람인데 그가 쓴 이라는 책이 이미 북경에서 출판되였다.   “나는 유태인이라 히여 다른사람보다 더 총명한건 없다고봅니다. 우리 이 민족은 고난과 핍박에 못이겨 모험적인 거동을 하게 된 겁니다.” 라고 하면서 그는 력사를 놓고 보면 유태인은 자기의 국토가 없다보니 마음놓고 정착해 살곳도 없거니와 수시로 쫓기는 신세이다보니 어디서 안착해 농사를 지으며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궁리나 하겠는가, 선생질을 할려해도 할수없는 신세다. 그래서 선택하게 되는 직업인즉 거의가 장사 아니면 의사(醫師)나 률사(律師)질을 하는거라했다. 리해되는 말이였다. 보아하니 잭 로젠의 말과 같이 제나라가 없어서 정착민이 될수 없는 처지의 경우라면 유태인뿐아니라 다른민족도 거의가 그모양이 되기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한편 그 민족은 그같이 부득불한 환경에서 거의가 택한것이 모험적인 돈벌이에 몸을 내맏기고있다는 것에 십분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적잖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곱잖게 보면서 없애치우려하니 이스라엘은 모험에 직면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위기를 넘겨야지. 그러자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길밖에 없지요.” 그가 하는 말인데 과연 옳은것이다.   인구가 다해봤자 1300만, 세계인구의 0.3%밖에 되지 않지만 미국의 모든 부자의 1⁄3이 유태인인 것이다.  에서 발포한소식에 의하면 미국 맨위의 갑부들 중에서 1⁄4이 유태인이요 그의 서렬에 선것이 40명이나 된다니 45%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갖고있는 재부가 수억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재부가 그같이 놀랍고도 눈부신데 그래 거기에 눈독들이여 침흘리는 자는 없을가?  잘 살피고 곰곰이 분석해보노라면 알게된다.  까놓고말해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역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동물사회와 조금치도 다를바없는 것이다. 세계의 전쟁사(戰爭史)를 보면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칭송(稱頌)된것들을 내놓고는 거의가 략탈을 목적으로 한 침략에 그 근원을 두고있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다같이 귀중한 것이다. 하건만 세계상 주요하게 종족지간의 모순으로 인한 피비린 탄압과 도살은 끊지 않고 지속되였던 것이다. 그리멀지 않다. 갖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2차세계대전기간을 내놓고도 민족지간의 모순으로 인하여 벌어진 싸움 끝에 거의 전멸에 이른 종족이 여럿되는것이다. 그 중 례를 하나들것 같으면 바로 오스만 토이기정부가 감행한 아미니아인에 대한 대학살일 것이다. 너무나 무자비하고 잔인해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아미니아는 아주(亞洲)와 구주(歐洲)교제처에 있는, 하이플러스 남부의 한 작디작은 나라로서 인구는 다해봤자 380만밖에 되지 않은것이다. 그런데다 토이기는 저들의 영토내에서 대를 이어가면서 살아온 이 민족을 전부구축하고 순토이기인만으로 구성된 국가를 만들려다가 안되니 저들의 국내에서 살아온 100~150만에 이르는 아미니아인들을  전부학살해버린 것이다. 딸따르족은 2차세계대전기간 히틀러를 지지했다가  그 죄로 쏘련땅에서 전부쫏겨나는통에 뿔뿔이 흩어져 그만 류랑족으로 변하고말았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이 세상에서 약소민족의 운명은 아마 거의나가 그렇게 돼먹은것 같으다. 아무튼 동정이 가는 일이기도한데 아미니아인이든 딸따르인이든 신세가 거북하게 된 상황에서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남으려거든 비틀려진 제신세를 한탄말고 오로지 유태인을 본받아 지혜있게 계속분발함만이 살길인것 같다. 나개인의 생각인데 따라서 이 글을 빌어 덛붙혀 한마디 하고푼것은 우리 자체의 처지에 대한거다. 한국나들이가 시작된 이래 우리들의 진영ㅡ 살아가는 사회전도에는 변화가 많거니와 어려움도많은 것이다. 갈사람은 가더래도 땀흘려 개척해놓은 땅을 그저잃지는말아야 한다. 어디선가는 남아있는 촌부녀 혼자서 온마을의 토지를 지켜내고있다는 보도를 내가 들은바있는데 지금까지 의연한지?.... 아무튼 과연 장한일이라 한번다시 두손들어 갈채를 보낸다. 우리 나라의 민족정책을 보면 세계 그 어느나도 비기지 못할정도로 우월한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국가와 정부의 민족정책에 따라서 혜택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이 받을것이니 그에 감사해야할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이 얼마안되더라도 쉽게 동요말고 온건하게 자리잡고 단결해야한다. 단결은 힘이라는 말이 있잖은가. 손에 손을 굳게 잡자. 그러면서 유태인의 지혜를 거울로 삼고 따라배울만한것은 배우자.  허심하면 진보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결심이 굳으면 하는 일이 결코 헛짓으로는 되지 않을것이다!
253    에세이 책도 안보는 얼뜨기학자 댓글:  조회:4377  추천:4  2013-05-30
  에세이 책도 안보는 얼뜨기학자   나는 김문학이 쓴 를 읽어봤다. 문장이 독자들에게 사색의 여운을 던져주니 어느정도 가치가 있어보이는데 뒷 끝에 딸린 맺음글까지 다 읽고나니 협오감이 괴여올라  이 글을 쓰게 된다. 김문학은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하다"면서 "안중근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신이 요망된다."고 했다. 옳은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독자는 아마 거의가 그에 공감 할 것이다. 하기에 추호의 이의(疑異)가 없는데 문제는 그 아래구절에 있는 것이다. 김문학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체 무슨놈의 잠꼬대인지 모르겠디. 이건 자기가 책을 못보았다하여 아무렇게나 망탕줴치는 소리가 아닌가.. 보아하니 김문학이 글을 많이 쓰고 책을 많이 내놨다해도 남이 쓴 글을 참답게 보지는 않고있음이 분명 하다. 그래서 객관에 던져주는 인상인즉은 너무나도 자고자대(自高自大)하여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아는건 자기밖에 없는양 놀아대고있다는 그거다. 안그런가?  김문학의 말과 같이 여지껏 안중근에 대해서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과연 한권도 나오지 않았단말인가?.... 대체 세상일을 어느만큼이나알고 그런 소리는 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것이다! 김문학본신의 열독열이 한쪽으로 만 치우쳐서 그렇지 안중근에 대해서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없는것이 아니다. 문제라면 김문학본신이 찾아보지 않고 깜깜이지 내가 알건대도 안중근에 대한 연구서적들은 언영 여러권이나 나온것이다. 그의 말과 같이 안중근은 실로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하기에 그에 대한 연구는 한국뿐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지어 한족(漢族)들 학계에마저 언녕 연구의 대상이 된지 오랜것이다. 일찍이 량계초의 을 비롯한여 황계강의 , 장태염의 이나 정선지의 을 비롯하여 학자 왕양, 라흡립, 장진청, 진원춘, 사사단, 왕도, 황성아부, 운인 등의 글과 의 여러편의 사설이 나왔거니와 그것들이 책으로 묶어지기도했던 것이다. 안중근에 대한 연구가 우리 민족을 놓고 보면 현세에 들어 더 활발해졌고 성과도 역시 적잖은것이다. 김문학이가 말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일이 아니였다. 지금에 이르러서의 김문학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지성인 학자들이 그의"세계적 보편가치성"에 대해서 알고있었고 , 그럼으로해서  언녕부터 연구를 해왔거니와 지금도 지속적으로 거듭되는 연구와 각가지의 활동들을 해나가고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북경에 오기전에 몸을 두고 있었던, 바로 안중근이 거사를 이룬 할빈에서만도 유지인사들은 일찍부터 그에 관한 연구를 중시하고 깊이 연구를 해왔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하여 여려가지의 활동들을 계속하고있는걸로  알고있다. 그사이 책도 여러권 펴냈다. 그 주요책임자, 증심인물은 성당사연구소의 소장인 정직개결한 김우종교수인 것이다. 김우종교수께서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기에 흑룡강에서는 오래전에 벌써 안중근연구회가 성립되였고 여러학자들의 참여와 협력에 의하여 안중근에 관한 책도 여러권이나 펴낸것이다. 1998년 11월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조선문서적 를, 1999년 3월에는 안중철이 한문으로 번역한,  일본학자 나카노 야스오가 쓴  를 펴냈거니와 김우종선생의 주편이 되여 여러자료들을 한데다묶은  대형화책 외에도 그림책 등이 나온 것이다.  김우종, 리동원의 편저로 무려 370천자, 449페지에 이르는 에는 김우종, 김유혁, 최서면 등 학자, 연구가들에 의한 론문 3편과 장병린, 라남산, 주호, 한염, 고관오, 반상루, 증용 등이 각각 쓴 전기 7편외에도 “안중근전⁄창해로방실고”를 실었거니와 선록으로 독후감⁄청구한인, 을 읽고⁄로유 그리고  이또 히로부미 통감암살안건을 론한 사설 3편외에도 량계초, 황계광, 장태염, 김백영, 주중금, 림수성, 일주, 정선지, 왕양, 라흡림, 장진청, 지원춘 사사단, 왕도, 황성아부, 운인 등 저명인사와 학계의 사람들이 쓴 주옥같은 추모글들을 실었다. 그 외에도 3편의 자료와 안중근공판기록들을 전부실은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거다. 1989년 10월, 길림성사회과학원의 주최로 장춘에서 안중근의사 의거 8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토론회가 열린바있다. 룡강성당사연구고 소장 김우종교수는 그후 성내의 조선족학자로서 한문과 일어에 능통한 흑룡강성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리동원교수와 손잡고 1994년 중국문판 을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출판했다. 이 책은 한문자로 40여만자나 되는, 내용이 풍부한 저서이며 특히 중국에서 발굴된 보귀한 자료가 수록되여있는 것으로 하여 국내외 독자들의 호평을 받은것이다. 이 책이 출판된 후 국내 조선족독자들과 한국, 미국의 학자들로부터 조선글로 출판해달라는 많은 청을 받았다. 하지만 출판비용이 문제점으로 되어 미루어놓고있던 중 미주한인, 미중친선협회회장인 현봉학박사와 이미 한문판 출판시에 큰도움을 준바있었던 우사(尤史)연구회 부회장 김재철 등이 출판경비를 재차도와준 것이다. 그럼으로 하여 김우종, 리동원의 편저로 된 조선문책 가 순조롭게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두책이 지금 나에게도 있다. 내가 김좌진장군의 전기 을 쓸때부터 도움을 많이 준 김우종교수가 친히 증송한 것이다. 그리고 대형화책 도 갖고있거니와라는 그림책도 한권 갖고있다. 144폭의 그림으로 묶어진 그건 동갑친구인 남영(南榮)화가가 손수 창작한 것이다. 사에서 미술편집을 지낸바있은 그가 여기 중국에서는 “21세기 영향력있는 화가”로 손을 꼽고있다. 그가 내생일날에  들고와서 친히 증송하기에 나는 감사히 받아둔 것이다. 할빈에서는 안중근의거 99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독립기념관에서 국가보훈처로부터 1억(한원)을 받아 내놓음으로 하여 그이를 할빌도리구안성가85호 조선민족예술관내에다 “안중근의사전람실”을 꾸렷다가 2006년에 이르러 2층으로 옮기고는 “안중근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꾼건데 기념관내에 90여장의 사진과 유묵 8장을 포함해 110여건의 력사자료들이 보관전시되여있다. 참관자는 안중근의 출생과 성장은 물론 그의 한국내에서의 구국운동, 국외의병활동과 단지동맹, 할빈정거장에서 의거, 심판과 순국, 유묵과 추도 등 귀중한 유물들이 일목료연하게 갖춰져있는 것이다. 더욱히 거기에 가면 안중근이 거사를  이루느라 체류했던 11일기간의 자료들도 찾아볼수 있는 것이다. 김우종선생을 비롯한 할빈의 유지인사들은 민족을 위해서 과연 좋은일들을 많이 해놓았다. 내가 왜 이런것들을 말하는가? 다른게 아니다. 김문학이가 "안중근의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있다"고 한심한 소리를 하니 절대그렇지 않다는것을 알려주자함이다. 보아하니 김문학은 오로지 자기만이 사유가 명철해서 민족을 생각하고 남은 다가 바보아니면 멍청이로 보는것 같으니 그야말로 소웃다 꾸러미터질일이다. 김문학에게 묻겠다. 학자면 의례 책을 많이봐야거니와 필요한 소식정보들도 소홀히말고 챙겨야할텐데 왜서 그모양인가? 력사를 론하겠거든 우선 제민족사는 물론 영웅전기을 포함해 타인이 쓴 글들을 봐야할게 아닌가?  김문학은 대체 몇권이나 찾아서 참답게 열람을 했느냐가 의문이 된다. 그러지를 않고 좌충우돌하면 분별없이 설치는거로밖에 되지 않으니 그러면 결코 좋은일일수 없지 않은가. 듣자니 뭐 “김문학주의”를 세계에다 펼치련다는데 과연 그런지? 듣기만해도 대단하다! 한데 의기와 용기가 좋다만 그것이 변변치 않은 밑천을 두고있을 시 만용으로되고마니 웃음거리를 자초하리라는걸 김문학은 알아둘필요있겠다. 학자이기전에 우선 인간이되여라. 진심으로 충고한다.         
252    국가멸망ㅡ 관건은 통치자의 부패에 댓글:  조회:5627  추천:6  2013-05-09
  국가멸망ㅡ 관건은 통치자의 부패에    리조 500년의 력사가 어딘가, 조선은 너무나 오래고 오랜 봉건세습에 억매여 몽매해진 나라였다. 백성은 다가 철통같이 밀페된 속에서 살다보니 제나라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보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자기만을 알았지 남은 전혀알지 못했다, 근본알수도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눈이 틔이지 못한것만은 사실이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지가 어느때고 벨(Bell,A,G)이 전화를 발명한지가 어느때였는가, 서양에서는 전기가 있어 밤도 대낮같이 환히 보내고 전화를 놓아 먼곳의 소식도 금방알수있고 스티븐슨이 만든 기차가 대륙에서 줄달음쳐 아무리먼곳도 갈 수 있어서 많은 편리를 주고있었다. 하건만 그럴때의 조선은 어떠했던가? 과학이 많이 뒤떨어진 동양의 여러나라들 중에서도 한심하게 뒤떨어진것이 물론 조선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세상이 그같이 발전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뿐 제눈으로 보지 않은이상 그저 머릿속에 상상으로나 그려볼 정도였다. 그런주제에 서양사람이 말한것과 같이 동양의 잠자는 나라 조선은 고작안다는 것이 노새타고 풍월이나 하면 그것을 지고지상의 락으로 여겼으니 몽매해도 한심하게 몽매했다고할수밖에 더 있는가! 량반쌍놈이나 가리다보니 발전하지 못해도 한심하게 발전못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꼭같은 목숨갖고 세상에 태여났어도 조선사람들은 부귀비천이나 비길줄을 아는 세월을 살다보니 웃사람과 아랫사람ㅡ 지배자와 비지배자지간에, 말하자면 계급모순은 점점 쌓이고쌓일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패해질대로 부패해진 봉건관료통치배들의 압박과 착취에다 잔인한 학대가 가해져 년년이 이어지니 임금을 하늘같이 믿고 숭상하는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면양같이 순직했던 백성이였건만 결국은 더 참고 견뎌낼수 없어서 들고일어났으니 곧바로 민란이요 그것은 또한 폭란으로 번지기가 일수였던 것이다. 근대의 조선은 바로 그같이 모순이 점철된 불온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김문학의 서술대로 외국인들의 눈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당연히 온정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깨지못하여 락후한 것으로 보였을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한데 문제는 그렇다고 망국의 책임이 백성의 락후성에 있었다고 질타하하면서 같은 동양국가라지만 한걸음 발전했던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국가들의 비난과 질타를 아주 정당한것으로 인식해야한다는 리론은 맞지 않은 것이다. 락후한 나라면 발전한 나라의 기시를 받기마련인데 그렇다고 반드시 침략을 받아야만이 발전할수 있는건가? 꼭 그렇지는 않은것이다.   김문학의 리론을 보기로하자.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한다." "당시 서양인 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천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아침의 나라로 아직은 전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는건 비유가 맞고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한 사회"였다는것도 맞는말이다. 면바로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표상이 주되었다"는건 틀린다. 력사를 잘 모르고하는 말이다. 김문학의 글에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였다고 함에 나도 동감하나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고 하는건 심히 모순된다. 웨브부부의 그 언론에는 발전한 서양사람의 오만함과 타민족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너무나 로골적이거니와 비렬할정도로 과분한 것이다. 조선사람대부분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산것만은 사실이였으나 과연 "무지하고 미개"했던가?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였던가? 발전하지못한건 사실이였으나 그렇다하여 "무지"하다느니 "미개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한건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지독스런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구나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했다"니 이는 모순되거니와 말한자 스스로가 자가당착(自家撞着)빠지고만게 아닌가. 보아하니 "1911년에 한국에 왔던 그  웨브부부"야말로 판단력이 엉망이면서 무지하기가 짝이 없는 말새꾼임이 분명하다. 웨브부부는 한국에 왔다가 분명 조선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괄시를 받은것이다. 내가 왜 이같이 긍정하는가? 그당시의 외국사람이면 몰밀어 침략자라 여기고 증오하는것이 온 조선국민의 심정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판이였으니 그들도 당연히 의심받아 배격당했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조선이 인상이 좋을리만무인 것이다. 김문학은 아무런 려과도 없이 그런사람의 언론을 론거로 잡고 지금 앵무새같이 되뇌이고있다. 진정 학자라면 자중해야할것이다.   그때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이하여 10여년간의 의병항쟁이 거의끝나가고있는 때였다. 일제의 의병학살상황을 보기로하자.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 1만 1,562명, 1909년 2,374명, 1910년 125명. * (일문),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판,통계자료.           지난때를 평하겠거든 우선 그때의 력사환경을 잘 연구해보고 해야 옳을것이다. 실질을 떠난 평가나 리론은 아무런 가치도없는 것이다. 몇몇 외국사람의 감상적인 그릇된 견해로 엄연한 력사를 일괄하면 잘못된다는것을 김문학은 그래 모른단말인가? 조선의 흥망과 성쇄르 보면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나라백성을 지배해 오면서 썩을대로썩어버린 봉건관리통치배들에게 있지 백성들에게 있는건아니였던 것이다, 물론 백성의 각성이 늦은것을 탓할수도 있겠지만. 우선 이점을 명확히 말해둔다.       19세기말 조선의 정세를 보면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이 로골화되면서 따라서 제국주의렬강의 침략이 강화되엿던 것이다. 는 속담이 있다.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의 기회만 노리고있었던 일본은 1894년 2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 있는 일본거류민들을 해야한다는 구실을 꾸며대고 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무력침공의 야망은 갑오농민군에게 거듭 참패를 당한 리조봉건정부가 봉건중국군대의 지원을 요청한것을 기회로 더욱 로골화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관 서기관(림시대리공사) 스기무라는 다음과같이 말했다. ( 중권. 비서류찬간행회, 1936년판 330~331페지)   일본은 이해의 6월에 7,000여명의 군대를 조선에 침입시켜 왕궁을 점령하고 민비정권을 뒤집어엎으며 친일매국역적들을 정권에 끌어들이려고 책동했다. 그리고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봉건중국과 시모노세끼조약(1895.3)을 체결함으로 하여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력의 확립과 배상금략탈 등 대륙침략의 유리한 조건을 둘러싼 렬강들의 각축전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열강들의 눈에는 조선이 그야말로 쉽게 먹어버릴 수 있는 고기덩이였다. 하여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크게 일, 미, 영을 한편으로 하고 짜리로씨야, 독일, 프랑스를 다른편으로 하는 두 침략집단이 대립하게되였던 것이다.   일본천황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일문), 이와나미서점, 1872년판, 69페지)   보다싶히 일정한 기간 전쟁준비를 다그쳐 힘을 기른 후에 경쟁자 짜리로씨야를 무력으로 타승하고 조선을 강점하자는 일본의 침략야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19세기말에 이르어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 특히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던 시기에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가 더욱로골화되였다. 봉건통치층안에서 사대매국행위는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가로챈 민비일파속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외세에 아부굴종하여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민비일파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제에 반대하여 투쟁할 대신 1876년 체결로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주었고 1882년부터는 구미자본주의렬강과의 불평등조약을 통하여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렬강에게 조선침략을 허용한 것이다. 이어서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통치지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가끔 외세를 끌어들이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지 일신의 안락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각기 외세를 등에 업었으니 그것은 철두철미한 매국배족의 투항주의였던것이다.   친미세력만봐도 의정부 및 외부고문으로 리젠드를, 외부 및 법부고문으로 그레트하우수를, 군부고문으로 다이를, 학부고문으로 길모아를, 궁내부고문으로 산도를 받아들이여 내정을 감독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정치를 그릇된 방향에로 이끌게하였던 것이다. ( 권3, 1898년 2월.)   조선은 1894년 7월에 일본에 철도부설권과 전선의 가설권을 내맡기였으며 구미에는 광산채벌권과 목재채벌권 등을 넘겨주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그것을 일본이나 구미의 선의적인 지원으로 볼건가? 아니다. 그런것이 아니였다. 승냥이가 왜서 문을 긁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답안은 인츰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외래제국주의자들의 리권략탈행위와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로 하여 나라의 주요경제적 리권들이 모두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거니와 외국의 경제적략탈이 더욱 강화되였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건만 김문학의 말처럼 외세의 침략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할수 있을가? 번연한 사실을 갖고도 외곡하는것은 오로지 일제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것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사람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로인하여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범하니 조선의 방방곳곳에서 제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은 들고일어나 손에 무장을 잡았다.  이라고 인정하고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할데대한 결심을 다지였던 것이다.    ( 을미 2월 11일)  그들 농민군의 반일애국사상은 1894년 9월이후 일제무력침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단계에 이르러 더더욱 뚜렸이 나타났다. 농민군은 1894년 11월 12일(양력 12월 8일) 론산에서 국문으로 발표한 호소문에서 라고 웨치였다. 이것은 그당시 나라에서 조성된 민족적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선차적이며 중요한것인가를 옳게 판단하고 제기한 반일애국구호였다. ()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투쟁을 시작한 농민군은 전주감영에서와 리조봉건정부에서 보낸 관군을 련속격파하고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던 봉건통치기관인 관청들을 모조리 파괴소각하였고 악질관리와 량반들을 처단하였으며 감옥을 마스고 죄없이 감금당하였던 인민들을 석방하였다. 한편 인민탄압과 억압에 써먹던 문건들을 불태워버리였고 전라도의 전지역과 도소재지인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무력침공자들의 침략적만행이 감행되고있는 위급한 시기에  농민군은 이와같은 반봉건투쟁만을 계속 벌리고있을수는 없었다. 하여 대담하게 투쟁방향을 바꾸어 반일투쟁에로 검어갔던 것이다.     ( 1895년 2월 8일.)   력사는 이러하다. 그런데 김문학은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이라면서 "세상의 채찍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 것은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면서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자질을 가지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맞는가? 김문학에게 묻겠다, 그대는 외국 특히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권을 왜서 뺏아갓는지를 아는가모르는가?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이 없었다니 므슨소리를 하는가? 그야말로 김문학의 입에서나 나올수 있는 허튼소리다. 애국심이 없으면 온 나라에서 의병투쟁이 줄기차게 일어났을 가? 력사를 아는가 모르는가?   김문학은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 동안 한번도 외양간을 청소한적이 없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아우게아스담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 할 수 있는 자는 일본뿐이라 판단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은 정당화하는 제속심을 내비치지 말라.   미국의 전임총통이였던 프랭클린D 루즈벨가 일찍이 일본에 대하여 “일본인은 유사이래 내가 본중에서는 가장 비렬하고 가장 무치한 민족이다”라고 질책한바있다. 100%정확하다고할수는 없겠지만 일본이 지금까지도 고집스례 과거사를 반성할줄을 모르고 뻣히는 꼴을 보면 그의 질타와 비난은 틀리지 않은것 같으니 김문학은 일본국적에 올랐다하여 제민족의 과거마저를 잃어가면서 량심없이 너무 일본의 우익세력에 빌붙어놀아대지말기를 바란다. 충고한다.     일본땅에 지금도 조선사람에게는 영원한 철천지원쑤로 되고있는 豊臣秀吉 ㅡ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금은 으로 이름이 고쳐진 이 있으니 한번 가보기 바란다. 그리고 아래의 전쟁범들의 위패가 야쿠샤신사에 있으니 가서 참배하고 아베 신조의 품에 안겨 그를 애비로 받아주고 차라리 조상을 바꾸기를 바란다. 그러지를 않고 생명을 이어간다면 그건 개목숨이될거다. 조선사람의 망신이다.     일본의 전범들     伊藤博文 ㅡ 이토 히로부미 大由岩 ㅡ  니이오 시와 裕仁天皇 ㅡ 히로히토 천황 東条英機 ㅡ 도조 히데키 岡村寧次 ㅡ 오카무라 梅津美治郞 ㅡ 우메즈 요시하루郞 谷壽夫 ㅡ  도시오 土肥原賢二 ㅡ 도이하라 켄지 石井四郞 ㅡ 이시이 네郞 野田ㅡ 노다 石原慎太郞 ㅡ 이시하라 마코토 前原誠司 ㅡ 마에하라 세이지 李登輝 ㅡ  리노보르끼 玄叶光一郞 ㅡ 현광일란 岡 田克 ㅡ  오카다 카쯔 石破茂 ㅡ 이시바 시게루 森本敏 ㅡ 모리모토 사토시 藤村修 ㅡ 후지무라 오사무 韦伯 ㅡ  하쯔 德尔 ㅡ 톡 罗萨里奥 ㅡ 사도오쯔 小野寺五典 ㅡ  오노 데라 麻生太郞 ㅡ  아소 태랑  岸田文雄 ㅡ  기시다 후미오 谷內正太郞 ㅡ 다이니     豊臣秀吉 ㅡ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는 어느 한 네티즌이 정리해낸 글인데 김문학은 보면 리성을 잃어 추악해진 제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김문학은 2004년 《미친듯이 일본을 반대하는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東京 祥傳社 2004년) 이라는 책을 일본에서 출판하였다. "중국의 교과서들과 선전부문들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절대 악’을 부풀려 선전한다. ……중국교과서들에서 사실을 외곡하고 허튼소리를 소리를 친 것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P.43) ‘침화일군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을 세운것은 지극히 우둔한 짓거리로서 국제적인 웃음거리를 제공했을 따름이다.”(P.68) “삼광정책(三光政策)‘은 순전한 날조로서 중국 쪽의 상상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전후에 몰수된 일본군의 문건에서 ‘삼광(三光)’ 정책이라는 낱말이 없다. 만일 일본어로 표술한다면 ‘삼광(三光)’ 정책은 마땅히 ‘삼진(三盡)’ 정책으로 되어야 할것이다. 즉 살진(殺盡), 소진(燒盡), 창진(搶盡)으로 되어야 할것이다. ‘삼광(三光)’ 정책은 중국 쪽의 신문, 잡지들에서 제일먼저 나타났다. 그러므로 ‘삼광(三光)’ 정책은 중국인들이 날조한 것으로서 일본인을 추악화 하기 위한데 그 목적이 있다.”(P.164) “나는 전반적으로 부정을 당한 나치스 독일의 전쟁에도 정의와 비정의를 초월하는 공헌이 있다고 인정한다.” (P.99)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아세아주에 대해 거대한 공헌을 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전쟁, 특히는 일본의 ‘침략전쟁’ 역시 간단하게 ‘절대 악’ 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전반적으로 긍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마땅히 진솔하게 그 적극적인 면이 아주 많았음을 긍정해야 한다. 이래야만이 비로소 공정하다.” (P.98) “일본의 침략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사실을 승인하지 않는 중국과 한국의 비열함이다.” (P.104) “일본의 ‘침략전쟁’은 세계사, 근대사의 의의에서 말할 때 수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국과 한국은 영원히 일본과 친선관계를 맺을 수 없다. ‘침략전쟁’이 초래한 살육, 폭력, 착취 따위의 가지가지의 나쁜 점은 이미 너무 곱씹어서 이제는 신물이 난다. 금후에는 마땅히 ‘전쟁’의 적극적 요소를 긍정하여 량호한 관계의 전제를 구축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P.105) “중국에서 야스구니진쟈 참배를 반대하는 리유는 ‘갑급전범(甲級戰犯)’을 제사 지낸다는 점이며 참배는 전쟁을 긍정한다는 것과 련계되여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갑급전범’ 자체는 실제상에서 전승국 입장에서의 견해에 불과하다. 일본의 립장에서 생각할 때는 자기의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승국에 의해 처형된 희생자들이며 애국영령들인것이다. 이러한 시점을 홀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정신문화의 차이를 알지못하고 자기의문화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타국의 습속을 존중하지 않는 오만이다.” (P.110) “만주국의 건설은 일본에게 있어서는 아주 드문 체험이였으며, 아세아와 세계에 은혜를 가져다 주었다.”(P.128) “우리 중국인들은 마땅히 당당정정하게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공헌을 긍정해야 한다.” (P.145) “내가 생각하건대 만일 만주국이 지금까지 줄곧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더라면(오늘의 조선반도를 포함하여) 만주는 반드시 일본 같은 강국으로 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대일본제국의 붕괴로 말미암아 그 꿈이 깨여지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국의 리념과 정신은 의연히 오늘날 글로벌화 시대에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P.145) “일본점령구는 ‘락원’이였다.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해방구와 국민당통치구역을 ‘락원’이라고 하고 일본점령구역을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상에서는 어떤 상황이였던가? 그 진면목을 알려면 력사 자체에로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 력사 사실을 발굴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만일 중국의 두 대도시 상해와 북경 같은 일본이 점령했던 도시들을 공산당이 통치한 해방구--연안과 비교한다면 이 량자 사이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P.146) “도우죠 히데키(東條英機)는 진정한 애국자이다.”(P.230) “이미증명되였는바 원동국제군사법정의 심판은 부당하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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