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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피켈과 백성의 눈
우리는 등산객이 산에 오를 때 바위돌을 시험삼아 떼여내기도 하고 짚기도하는, 손잡이에 망치와 정이 달려있는 지팽이를 보게되는데 그것의 이름이 피켈이다. 피켈은 등산객이 절벽을 오름에 절대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도구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를 하나의 높은 산이고 절벽이라 가정 할 때 인간은 다가 산이나 절벽을 톺아오르는 등산객과도 같은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등산객이 피켈을 갖추듯이 저가끔 수단을 쓰게되는 것이다. 그 수단이라는 것이 곧바로 생계를 위한 각가지의 직업이 아니겠는가.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마다의 직업도 자유적인 선택이 되겠지만 어떤경우, 이를테면 국가간부로 되거나 기업의 책임자로 되는건 그 자신의 욕망의 기초상에서 웃사람의 임명이거나 대중의 의사, 의결에 의하여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권리”란 바로 이래서 생겨지는거다. 국가주석으로부터 국무원 각 부서의 부장은 물론 성장과 시장, 현장 그 아래로는 향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간부가 공무원이면서 실제상 다가 저마끔 다른사람의 머리우에 군림하는 권력자이기도 한 것이다. 촌에서 촌장질을 하거나 회계노릇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바로 이러하다.
국민모두, 대중다가 그들 권력자를 향해 제발 잘해주십사 기대하고 절절히 바라는 것이다. 믿어주기에, 될수록 믿어보자고 하기에.... 그런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참으로 유감스러운것은 저를 믿고 그같이 권리라도 줄라치면 젊잖고 해맑던 사람마저도 어떻게 돼먹은 판인지 심사가 검게 변해버리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되는 그거다. 그래서 국가와 집단에 해가 생기고 상층과 하층, 동지간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며 나아가서는 적대로까지 되고마는 것이다.
30여년전 촌에 있을때의 일이 새삼스례 상기된다. 내가 사촌처남되는 이한테 들은 소린데 그가있는 생산대에서 년말총화를 짓고나서 이어서 회계감을 고르느라 투표를 했더니 거기 한 투표지에다는 “여윈개를 바꿔넣어 또 살찌게 할건 뭔가. 이미 살찐 개를 그냥두는게 좋겠다.”고 쓴 글이 나와서 일장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그저 그렇게 웃어버리기만 할 일이 결코 아니였다. 오죽했으면 그런 해학이 생겨났을가?
패설 견첩록(見睫菉)에 이런 글이 있다. 상공 정제승은 일찍상처하여 과천(果川)서산에 영장할적에 찍어낸 재목이 상당히 많았다. 주택에 본래 외실(外室)이 없었으므로 그 재목을 실어다가 외실을 지으려 할 즈음에 마침 호조파서로 발영을 받았다. 그가 그 재목을 집뒤에 쌓아둔채 종시 집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더니 어떤 사람이 왜 집을 않짓느냐고 물었다. 상공의 대답은 “내가 탁지(度支)장관이 되자 문득 번듯한 집을 세워놓으면 누가 내 뜻을 알겠는가. 의심받을 일은 말아야지”하였다. 그러다가 또 상(相)으로 올라가니 종신토록 외실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읽어볼만한 글이다. 옛사람의 옛일이지만 현세에서 간부노릇을 하는 사람이면 다가 따라배울바가 아니겠는가? 간부라는 직책을 비유하면 등산객이 손에 잡는 피켈과 마찬가지여서 우로 톺아오름에 쓰인다고 할 수 있겠다. 톺아오름은 사업이고 승진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오르는가에 있는 것이다. “시전(詩傳)”에 민구이첩(民具爾睫)이라는 글구가 있으니 그 뜻인즉은 “만백성이 너를 지켜보고있다”는 것이다. 남보다는 어디건 낳은데가있어서 그 직에 올려놓은것만은 사실일거다. 그렇다해서 절대적으로 더 총명한건 아닐것이고 군중이 또한 다가 바보는 아닐것이다. 하니 고관대작이건 미관말직에 있는 자건 다가 이 점을 명기하고 후세에 부끄러울 오명은 남기지 않게끔 자신을 편달함만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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