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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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38)
2014년 04월 09일 18시 26분  조회:3428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8. 

어느날 양부는 집안사람들만 있는데서 꼴을 보니 일본은 망할날이 오라잖을것 같다고 했다. 제아무리 소식을 봉쇄해가면서 백성들을 기편해도 촉각이 좀만 예민한 사람이면 단말마의 발악을 하고있는 일제의 운명을 얼마든 보아낼수 있었다.

그처럼 승승장구하던 동맹국인 독일군이 1943년 2월에 쓰딸린그라드전선에서 패했고 4월에는 일본 야마모도 련합함대 사령관이 전사했다. 7월에 무쏠리니가 실각하더니 9월에는 이딸리아가 련합군에 항복하고말았다.

1944년 7월 일본군이 사이판섬에서 전멸함과 함께 도죠내각은 총사직을 했고 대신 고이소내각이 성립되였다. 11월에 미국의 B29비행기가 북규슈와 도꾜를 폭격했다. 한편 서방에서는 1월에 쏘련군이 핀란드에 진입했고 6월에는 련합군이 북불(北佛)에 상륙했으며 8월에 빠리의 독일군이 항복했다.

1945년도는 전쟁형세의 전환이 더 빨라갔다. 2월에 미군이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 그곳에 있던 일본수비군은 전멸되였고 4월에 쏘련은 일쏘(日蘇)중립조약의 불연장을 일본에 통고해옴과 동시에 미군은 오끼나와에 상륙, 그곳에 있던 일본군 20만명을 전멸하기 시작했다. 5월에 도꾜와 요꼬하마 등 도시들은 미군의 대 폭격을 받았다. 그리고 8월을 잡아서는 미군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히로시마와 나까사끼 두 도시를 훼멸하고말았다.

한편 1940년 9월에 창립을 보인 광복군은 총사령 리청천의 지휘하에서 대오가 점점 강성해져 1943년 8월 인도, 미얀마전구의 영국군당국과 협의하여 별동대 1지대를 보내여 참전하기에 이르렀고 1945년 2월에는 림시정부가 일본 및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것이다.

형세가 이러했건만 만주국의 협화회는 의연히 선봉이 되어서 일본군은 필승불패하리라느니 대동아의 질서가 유지되리라느니 하고 선전을 해댔다. 그러면서 도시는 물론 농촌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한다면서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게하고 방공훈련을 시키였다. 하지만 그따위 조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쏘련외장 몰로또브는 1945년 8월 9일 0시에 일본에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쏘련원동군 100만대군이 5,000여 킬로메터의 전선에서 14년동안이나 동북에 반거해있은 일본관동군에 향해 전면적인 대진공을 개시했던것이다.

와씰리예브스끼 원수가 총지휘하고있는 이 원동군은 세갈래로 나뉘여 동북에 진입했는데 해림쪽으로 오고있는 부대는 바로 제1방면군의 홍기 제1집단군으로서 보병2개 군과 약간의 직속부대를 합쳐 총병력이 69,000여명이였다.

이 부대는 우뢰울고 번개치면서 억수로 퍼붓는 밤비를 무릅쓰고 동쪽으로부터 우쑤리강을 건너 <<동방의 마지노방선>>이요 <<반년포위에 들어도 끄떡없을 요새>>라며 자랑하던 관동군의 견고한 보루들을 하나하나 까부시고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11일 목릉을 공점하고 12일 아침에는 밀산을, 14일에  목단강을 공점했다. 격파된 일본군은 마치 터진 개미둥지같았다. 해림역에는 기차타고 도주하려고 모여든 일본병사들이 단가마우의 개미같이 바글거렸다. 5,6,7명씩 무리지어 도주하거나 혹은 단신으로 군복을 벗어 던지고 백성으로 가장해서 헤매다가 배고파 인가에 기여드는 자도 있었다.

해림일대에서는 벌써 쏘련군이 이곳까지 밀고오기전부터 사호남구(沙虎南溝), 사호남구전자(沙虎南溝甸子), 전사호(前沙虎), 후사호(后沙虎).... 등 9개마을에서도 한족(漢族)들이 떨쳐나서서 도주하는 일본군들을 잡아치웠다.

그런데 조선마을들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장장 36년간 적잖은 사람들이 반동화상태에 처해있었기에 이젠 나라빼앗긴 설음도 원한도 잊어가고있었기 때문이였다.

<<저놈들을 살려보내다니! 아, 총! 총이 이런 때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 총!>>

김기철로인은 패주하는 원쑤들을 눈을 펀히 뜨고서도 놓쳐버리는것이 더없이 맹랑하고 분했다.

강석이 역시 어른들과 꼭같은 심정이였다. 비밀결사는 독립혁명을 생각한다면서도 태극기만 건사하고 무기는 갖추지를 못했으니 안타까왔다.

여지껏 류무허즈(柳木河子)의 산속에 숨어서 숯구이로 살아온 그 7명의 독립군역시 감춰둔 총은 있었건만 탄알이 없어서 안달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 손쓸 기회와 함께 조건을 찾게 되었다. 그네들이 복수를 갈구하던 차 소련군 척후병 한패가 그곳을 지나다가 산속에 숨어든 일본패잔병들의 매복저격에 들어 전몰했다. 이를 직접목격한 독립군들은 저마끔 희생된 쏘련군의 따발총 한자루씩 나무단속에 넣어 쪽지게에 지고는 모여앉은 일본군들 가까이로 접근했다가 불시에 한배짐씩 풀어 그 27명을 몽땅 섬멸해치웠던 것이다. 과연 통쾌하고 속시원했다.

한편 쏘련홍군은 17일목단강으로부터 중동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해림과 횡도하자를 해방했다.

무수한 비행기들이 우릉거리면서 머리우를 날아 서쪽으로 가고있었다.

강석이는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어서빨리 날아가 차타고 도망가는 일본군들의 머리우에다 폭탄을 던지라고 소리쳤다.

<<굉장하오! 사람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구경했다이! 엄지손가락을 빼들고 <쌍고>를 웨치면서 환영했다이!>>

<<깡똥한 군복치마입고 가죽장화신고 뚜르레기를 메고 손에 색기를 든 처녀군대가 글쎄 길을 인도하더라잉!>>

<<마우재들이 물도 안마시구 그저 냅다밀기만 하더구만!>>

해림에 갔다온 사람은 저마다 이러면서 흥분에 잠겨 자기가 본걸 자랑했다.

<<일본은 끝장이다! 망하고있다!>>

<<광복이다! 우리는 해방됐다!>>

해남에서도 신안진에서도 대종교도들은 깊숙이 간직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여직껏 오매에도 그려오던 광복의 날을 문득 맞고보니 오래동안 억압속에 다져진 분노가 환열로 터져올랐던 것이다.

쏘련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뒤를 이어 8월 10일에는 몽골정부가 일본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쏘련홍군은 해, 륙 두방면으로부터 중국의 동북과 조선에 진입했고 일본관동군은 신속히 격파되였던 것이다. 관동군은 일본륙군의 가장 정예한 주력이며 일본의 전략 총예비대였다. 일본은 이 군대에 의지하고 중국 동북 및 조선의 유리한 전략적지위에 의지하여 장기적인 전쟁을 진행하려고 망상하였던 것이다. 쏘련의 참전이 일제의 이 계획을 철저히 파탄시켜서야 일본정부는 부득불 8월 15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투항했다. 이로써 태평양전쟁은 물론 중국의 8년항전도 끝나고 제2차대전도 끝난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이렇게도 빨리 손을 들고 투항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8월 18일부터 쏘련홍군 제26군은 횡도하자에서 일본관동군 제5군단의 대량적인 투항을 접수했다. 14일에 이미 천황이 <<투항조서>>를 내렸건만 그런줄도 모르고 결사적인 대항을 하던 일부의 고립된 부대들은 얼마못가서 전부가 소멸되고말았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과 사무라이정신은 우수운 비극을 만들었다.

계서(鷄西)남쪽 20여리에 있는 철길어구에서 일본녀인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가득 감겨진 트럭 두 대가 발견되였다. 무릎꿇고 앉거나 낯을 하늘로 향하고 죽었는데 한본새로 머리에다 희천오리를 감은것을 보면 그어떤 종교의식을 한것임이 분명했다. 적도(適道)역에서도 시체 200여구나 발견되였는데 모두 배를 가르고 죽었다. 포로한 일본군 참모장을 불러다 심문하니 그의 공술인즉 그것은 그들 자신의 동의하에 병사와 군관들이 살해한것이라 실토했다.

실로 극도의 절망과 한없는 기쁨이 엄연한 대조를 이루고있는 순식간의 변화였다. 일제의 통치하에 14년간 세월! 온 동북인민이 해방받아 기뻐하는 이때 대종교도들은 한가지 따로 더 기뻐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기형을 언도받고나서 액하감옥에서 고역에 시달리던 제3세교주 윤세복이 8월 12일에 최관 등 5명의 교도와 함께 쏘련홍군에 의하여 해방받아 나옴으로써 일제의 탄압속에서 그지간 문이 닫겼던 대종교본사가 다시 부활된것이였다.

김기철은 그네들이 해남에 와 최창진댁에서 2일간 몸을 쉬우는 기간 정성껏 위로하면서 금후의 교회활동에 대해서 토의했다.

8월 22일 총본사직원들은 동경성에 귀환하여 총본사간판을 다시걸었다.

한편 이런때에 마을에서는 <<근로봉사대>>나 <<교정보도원>>이나 감옥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왔다. <<근로봉사대>>는 <<노예로동대>>였다. 어떤 사람은 동안성 소왕참툰에 가서 <<국방도로>>를 닦다가 왔는데 목숨이 붙어있을 뿐 거의 페인이나답지 않았다. 가자마자 들판에 잠자리를 정하고 먹이는것도 말할수 없이 험한데다 매일 12시간이상의 중로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들 수천명이 매일 먹는것이란 도토리떡이거나 혼합가루음식이였는데 그나마 많이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강박에 못이겨 <<친방>>과 <<황제>>의 은사에 감사하다고 먹기전에 줄지어 서서 3분간씩 묵도를 했던것이다. 한심한것은 옷도 못입게 발가벗기고 일을 시킨 그것이다. 일하다가 도망칠까봐 한 수작이다.

이들보다 더 참혹한 대우를 받은것은 <<사상불온>>이니 <<사회부랑자>>니 해서 <<교정보도원>>에 끌려들어간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아무러한 보호대책도 없이 위험한 학강(鶴崗)의 탄광에 가 일을 해야했는데 매맞고 굶주리고 혹사당해서 태반이 비참하게 죽어 <<만인갱>>에 묻히고말았다.

1944년의 한해 흑안령, 왕양묘, 군사시설을 위해 각 현에서 징용한 15,000여명의 로무자중 죽은 사람이 6,000여명, 목릉하 개수공사에서 죽은 사람만도 1,700여명이였다.

이러한즉 붙잡혀간이를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있는 집들에서는 다가 울음과 한숨이 바다를 이루었다.

이같이 환희와 비애가 반죽된 이때에 북만주에서는 토비가 갑작스레 생겨나면서 끓기시작했다. 그자들속에는 위만찌꺼기들이 적잖게 있었다. 일본이 망했으니 이젠 위만때 해먹던 인간들이 고개 숙어지리라 했는데 더 사나와지면서 기를 펴니 과연 별일이였다.

국민당은 화북을 통제하고 선손써서 동북을 먼저 차지할 목적으로 대량의 군대를 동북으로 이동하면서 먼저 특무들을 파견하여 이같이 위만때의 벼슬아치나 사회의 찌꺼기나 악당들에게 위임장을 주고는 그자들의 무장을 규합하여 그 무슨 선견군(先遣軍)이요 정진군(挺進軍)이요 광복군(光復軍)이요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이요 보안대(保安隊)요하는것으로 개편했던 것이다. 그 총병력은 21,730여명에 이르었다.

한편 쏘련에 건너가 정돈훈련을 하고있었던 항일련군장병들은 쏘련홍군이 대일작전을 하자 이에 배합하였는바 일부가 북조선으로 가고 대부분이 8월 17일부터 기를 나누어 동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몇 개의 지구위원회와 수십개의 사업지점을 건설했다. 항일련군책임자들은 사업의 편리를 위해 쏘련홍군내에서 각기 사령부의 부사령원과 기타 군관으로 있었다. 어떤이들은 공개적으로 출면하여 <<동북인민민주대동맹>>을 조직했고 어떤이는 암암리에 지하당원들을 찾고 군중을 발동하여 인민무장을 건립해서 팔로군과 신사군을 영접 할 준비를 했다.

9월 2일, 목단강시에서는 민족주의자, 독립운동자와 공산주의자들로 조직된 조선인 각 단체 련석회를 열고 고려인민협회(高麗人民協會)를 설립하였고 11월 10일에는 이 협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으로 발전시켰는바 맹원수는 어느덧 1,000명이 넘었다.

이때는 쏘련이 국민당정부와 우호조약을 맺은 관계로 국민당이 목단강에서 합법적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당은 이미 시정부, 시당부(市黨部), 성당전(省黨專)을 성립했을뿐만아니라 <<합강일보(合江日報)>>를 꾸리여 당세의 위력을 선전했고 300여명의 무장경찰대까지 두고있으면서 시기를 기다리고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인 10월 13일에 중공중앙동북국에서 파견한, 한때 <<평남양>>기발을 들고 용감무쌍하게 일본침략군을 족쳐 이름떨쳤던 항일장령 리형박이 곡환귀로 변성하고 나타났다. 그 앞서 목단강에 와 쏘련홍군사령부의 부사령원으로 있는 조선사람 김광협(金光俠)과 함께 쏘련군과 교섭한 후 묘계로 국민당주구세력을 구축하고 시정부를 접관한 뒤 시장이 되었으며 조선사람 김동렬(金東烈)이 부시장으로 되었다. 목단강시정부는 조선동포들에 대한 사업을 가강하기 위해 정부에 선정과(鮮政科)를 설립하고 안시웅(安時雄)에게 과장직을 맡겼다. 이듬해의 정월에는 조선족이 비교적 많은 동녕현정부에도 민족과(후에 선정과로 고침)를 두었고 9월에 해림에 신해현(新海縣)이 나오면서도 역시 민족과를 두어 전 현의 조선족사무를 따로 장악케 했다.

이에 앞서서 리형박은 시장이 되면서 동북국민군 목단강지구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직을 맡고 민주동맹에서 모집한 끌끌한 조선남아들을 골간으로 하는 300여명의 무장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시외에 분산되여있는 18,000여명의 무장을 받아들이여 12개 퇀으로 편성했던 것이다.

1945년하순, 이같이 확군과 재편성으로 군사실력이 장대해지고있을 때 팔로군 제359려의 한 퇀이 급행군하여 목단강에 도착해 14퇀으로 되었는바 근 반수이상이 조선사람이였다. 이 부대는 시급히 장대해져서 목단강지구의 토비숙청에서 골간부대로 되었다.

이에 앞서 쏘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총격전을 발동한 이틀후인 8월 11일 12시 주덕총사령은 쏘련홍군이 중국 및 조선경내에 진입하여 작전하는데 배합하라고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던 조선의용군 무정(武亭)사령, 박일우(朴一禹)부사령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과 원 동북군부대와 같이 동북에 진출하여 일본군과 그의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실현함에 리롭게 할것을 명령한바 있다.

이 명령을 접한 조선의용군들은 무한히 격동되여 <<만세!>>를 웨치기도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하였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랴, 이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피흘리며 싸워온 그들인데야!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성의용군부대들은 모두 봉천(심양) 서탑구에 모이여 그곳에서 전군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소수의 로혁명가만 조선에 돌아가고 그 외는 잡시 동북각지에서 재중조선동포들을 발동조직하여 자체의 력량을 확대함으로써 변화화는 장래의 형세에 대응케했다. 이에 전군은 3개지대로 나누어 제1지대는 남만으로, 제3지대는 북만으로 제5지대는 동만으로 분산하여 활동하되 제1지대는 제2지대를, 제3지대는 제4지대를, 제5지대는 제6지대를 확대조직하기로했던것이다.

한편 광복이 나면서 할빈에서는 조선독립동맹북만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여 동포난민들의 귀국과 생활을 돌보앗거니와 동포가 비교적 많은 현들에 독립동맹위원회를 설립하고 산하에 건국청년회와 흥농회(興農會)를 조직하였으며 청년들을 참군시켜 신속히 무장대오를 묶어세웠다. 독립동맹책임자 김택명(金澤明)은 9월초에 항일련군장령 리조린(李兆麟)이 할빈으로 오자 즉시 그의 령도를 접수했다.

그런데 할빈의 조선인정황은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의 지지를 받고있는 고려인회(高麗人會), 고려청년단(후에 한국민회, 한국청년단으로 고침), 대동민주당과 무장대인 한국수련대(韓國修鍊隊)가 조선독립동맹과 맛섰던 것이다. 두 대립진영은 8월말부터 시작해서 1개월이 넘도록 <<공산당령도를 접수해 민족해방길로 가느냐 아니면 국민당의 령도를 받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군중성적인 대변론이 벌어졌는데 결과 고려청년단이 대다수군중의 념원을 리탈함으로해서 종말짓고말았다.

8월 25일 조선독립동맹은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했는데 11월에 이르러 병력이 1,000여명되였다. 이로써 관내에서 나온 19명의 의용군골간이 제3지대를 건설함에 기초를 닦은것이다.

11월말, 할빈시가 국민당 <<중앙군>>에게 점령되자 제3지대는 빈현으로 이동했고 할빈에 남았던 국민당계렬의 조선민족무장중대는 독립동맹 지하공작원들의 반복적인 사상공작끝에 팔로군이 할빈을 공략하기 착 전날이던 1946년 4월 27일 무장을 전부 갖고 제3지대 주둔지인 할빈시교 사만툰(沙曼屯)으로 넘어와버렸다. 이럼으로해서 북만토비숙청을 위한 다른 한갈래의 튼튼한 골간무장이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각지에 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직된 인민무장들이 여럿 건립되였는데 합강군구 1퇀 2영, 흑룡강군구 경위퇀1영, 목릉현조선족독립영, 동북민주련군 호로군1퇀 등은 모두 조선민족 열혈남아들로 주직된 튼튼한 무장대오였다.

이때는 조선의 형세역시 복잡했다.

1945년 8월 22일 쏘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에 진주했고 28일에는 북위 38°선이 설정되여 조선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하아지중장휘하 미군선발대가 9월 8일 인천에상륙하여 38°선이남을 차지하더니 11일에 군정계획발표, 12월 28일에는 3상회의가 개최되여 남조선에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림정은 물론 광복군도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해산되고 개인신분으로 입국했던 림정요인들의 활동으로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여 12월 31일 서울시민의 반탁시위행진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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