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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941년 12월 8일에 태평양전쟁이 폭발했다. 일제가 발동한 태평양전쟁이 폭발하자 제2차세계대전이 확대되였다.
이로하여 온 만주가 전쟁기분에 푹 잠기였다.
일제의 괴뢰 강덕황제는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인차 <<시국조서>>를 내렸다.
<<대만주제국황제는
천명을 받들어 만백성에게 고하노라. 동맹국 대일본제국천황페하께서는 본일 미,영 량국에 선전포고를 내리시였나니 선명한 조서는 휘황찬란하고 천리에 합치되였니라. 짐은....>>
각덕황제는 자기는 일본 천황페하와 정신이 동일체라느니 만백성도 그 신민과 더불어 일심동체라느니 공동방위의 대의에 기초하여 생사존망을 분리하지 말라느니 전체 국민이 봉공의 지성을 다해야 한다느니 뭐니 했다.
만주의 백성들은 누구나 조서의 내용을 명심해듣고 기억해야하했고 학교에서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내용이 긴 원문을 그대로 암송하라고 강요했다.
<<우리가 왜놈하고 어떻게 한마음이 될수있나? 어떻게 또 한몸뚱이로는 되나? 전쟁은 사람죽이는 나쁜짓인데 그것을 어째서 지원하겠냐?>>
강석이는 이러면서 자기는 머리가 아둔하게 생겨먹어서 기억못하는양 매를 맞는한이 있더라도 조서를 외우지 않으리라 맘먹었다.
그런데 허수아비인 강덕황제가 일본과 생사존망을 같이하고 대동아성전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전체 국력을 기울이라고 맹세하면서 일제에 아부하고 굴종하는통에 일본조상의 신을 믿고 천황을 숭배하며 일본을 떠받드는 활동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강행되였다.
마을마다 마을밖의 산기슭이나 언덕우에 공중의 경배를 위한 신사(神社)가 세워졌다.
자기의 조상이나 고유의 신앙을 제쳐놓고 일본인의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 마음에 접수되지 않고 감정에 뒤틀리는 일이지만 경찰과 치안유지회와 협화회의 독촉과 감독이 심하니 별수 없었다.
도시는 물론 지어는 편벽한 농촌구석에까지 아침, 점심 두 번은 꼭 밥먹기전에 행사를 치르어야 했다. 그리고나서야 밥을 먹었다.
강석이는 물론 독립군가정들에서는 다가 검사를 올것같으면 눈가림으로 하는척했다. 단군의 후손으로 태여나 남의 조상을 믿는다는건 도저히 될수도없는 반역행위로 간주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종교도가 아닌 사람중에는 민족혼을 너무나 쉽게 잃고<<황민>>이 빨리되자고 제 조상도 팔아먹으면서 친일주구로 돼버리는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자들은 대개가 중처럼 민둥머리를 하고는 협화복을 입었다.
위만(僞滿)초기에 일본침략자들은 두가지 문제를 깨달았는데 그하나는 30여만명이 넘는 반만항일무장이 각지에 널려있어서 동북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하자면 치안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였고 다음의 하나는 동북인민의 반만항일사상이 날따라높아가고있는 정황하에서 무력에만 의거할것이 아니라 강력한 <<사상전>>도 해야한다는 그것이였다.
그래서 벌써 1932년 4월 1일, 관동군참모장 하시모도 도라노스께의 지지하에 만주청년련맹의 두 두 일본인간부가 선두나서서 협화당(協和黨)이라는 것을 조직했던것이다. 그들은 주요하게 선전선무공작(宣傳宣撫工作)을 책임졌는데 성원은 항일진영에 파견되여 반란을 책동하고 투항과 귀순선전을 한것이다.
부의가 당시 협화당을 하나의 당(黨)으로 치부하는데 대해서 겁을 집어먹으면서 반대의견이 있었길래 관동군에서는 그것을 협화회로 고치였다.
하여 1932년 7월 15일에 만주협화회(滿洲協和會)가 정식성립되였다. 그 협화회의 종지는 <<일반국민에게 국민정신을 철저히 보급하며 민족협화를 도모하고 순직선량한 애국국민을 뭉치게 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인 실천조직을 진행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즉 다시말해서 협화회는 <<왕도락토>>, <<일만일덕>>, <<국민정신>> 등을 선전하는 사상적인 실천조직이고 <<민족협화>>를 하고 <<우방>>에 충성하며 <<천황>>에게 충성하며 중화민족의식을 압살하고 망국노의식을 교화하는 실천조직이고 동시에 위만정치와 법령을 집행하고 경제략탈을 하며 정치상에서 동북인민을 압살하고 박해하는 정치적인 실천조직이였던 것이다.
1936년 7월 25일, 만주협화회는 개조를 거쳐 이름을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로 바꾸고 강령도 썩 충실하게 고치였다. 그리하여 이 협화회는 위만정부의 <<정신적모체>>로 되었다. 적지 않은 결책들은 협화회에서 제기하여 정부에서 그것을 실시하였고 위만정부의 강령은 의례 협화회가 집행하였던 것이다.
1938년 6월 15일 협화회는 <<청년조직대강>>을 발포하고 협화청년단, 협화소년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한달만인 7월 14일 위국무원은 <<협화의용봉공대(協和義勇奉公隊)>>훈령을 공포했고 협화회는 협화의용봉공대가 광의적(廣義的)협화조직으로서 민간경호조직이고 경호(警護)와 봉사(奉仕)에 종사한다고했다. 그래서 이해부터 즉시 시작해서 성, 시, 현, 기(旗)와 그 아래 유관단위들에서 모두 협화청년단, 협화소년단과 협화의용봉공대를 조직했던 것이다.
회원은 정회원(正會員), 보통회원(普通會員), 찬조회원(贊助會員) 등의 세 부류였는데 총인원은 113,800명. 그중에서 목단강성의 회원은 33,956명이였다. (1938년통계)
1940년 봄, 협화회는 청년자흥운동(靑年自興運動)을 벌리였고 1942년 1월 12일에는 매월 25일을 <<청년자흥일>>로 정해놓고 골간회원을 훈련했다. 그리고 그해의 4월 18일에는 또 <<자흥촌운동>>을 일으켜 한 개 현에 <<자흥촌>> 하나씩 건설했다.
얼핏 보건대 협화회가 만주국을 <<진흥>>케 하는것 같지만 실상에는 일제를 도와서 만주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급선봉의 작용을 놀고있었다.
항간에서는 누런 협화복을 입고 맨머리를 한 협화회 회원을 <<누렁개>>라 부루거나 <<털빠진 개>>라고 욕하는 말이 돌았다.
<<이전에 조선에서 일진회놈들이 저렇게 중대가리를 했네라. 그놈들은 친일파였구 리완용을 추겨서 나라를 팔아먹게 했네라. 그렇게 나쁜놈들이길래 로씨야 연해주에서 사는 동포들은 까까머리 일진회놈은 건너오기만하면 붙잡아 바다에 처넣어 죽이였네라. 여기서 협화회도 일진회와 꼭같은 나쁜것이네라. 그리구 그자들은 모두 특무와 한가지니 너들 말 좀 주의하거라.>>
양모 김분희는 이렇게 자식들에게 알려주면서 각성을 높이라했다.
어느날, 14살을 먹은 강석이는 리달문을 따라서 산시로 갔다. 청산리전투때 눈 하나를 잃은 이 경산도치는 <<8로>>들중에서 강석이가 아동일 때 제일 무서워했던 로인이다. 그러던것이 점점 커가면서 완전히 달라져 무서움은 어느덧 사랑으로 바뀌여져서 강석이는 그가 오기만하면 친할아버지처럼 여기여 응석까지 부리며 좋아했다. 애꾸눈이 되어 험상스레 보이는데다 성격마저 대단히 과격스럽고 거칠어보이는 이 직심스러운 로인이 이날 김좌진의 묘자리를 보러 그의 딸을 데리고 가면서 자기가 청산리전투 때 김장군의 뺨을 쳐놓던 얘기를 했다.
<<너 그 아번진말이다. 검정말을 타고 다녔네라. 그 말 참 좋았지. 주인 꼭 떼닮어서 건실하구 억대셋지. 너 그 아버지 워낙 키가 장승같구. 하, 글쎄, 그런 사람이 말타구 제가 련락을 갔다오잖겠나. 키가 꺼두룩한 녀석이. 그러다가 총알을 맞으면 어쩔라구. 그래서 내가 그만 뺨때기를 한번 답새겼네라. <야 이 창빠진녀석아, 넌 장군이야. 총사령이야. 그러다 죽으면 어쩔라구 이모양이냐? 엉? 너가 죽으면 이 많은 군살 어쩔라, 엉? 이 정신나간놈아!>하면서말이다. 그랫더니 너 그 아버지가 <예, 잘못했수다. 이담부터는 안그러지요.> 하면서 맹세를 하더구나. 안그랬더면 내가 또 한매댓을거다. 너 그 아버지 죽은건 참말루 아깝고 원통한 일이지. 그 나쁜놈들 어쩌면 그리두 무지했나.>>
김장군의 구광은 이장때 파헤친 모양 그대로였다. <<8로>>들은 관뚜껑이 썩지 않게 하느라 콜타르까지 구해다 발라놓았다. 그네들은 여지껏 이 구광을 지켜왔고 장차도 보호할 생각이였다.
<<여기를 와보면 내가 지금도 그눔아를 만나는것 같구나. 그래서 오고싶구 오면 돌아가기싶지 않구나. 석아, 너 내가 죽거들랑 여기다 날 묻어주겠냐? 그래다구.>>
이날 리달문로인은 몹시 비감하면서 이런 청을 들기까지 해서 강석이는 눈물이 나오면서 목이 메였다. 이 충실한 로인의 원을 자기가 꺼주리라했다.
강석이가 몰랐지 기실은 해마다 8월 29일이나 1월 24일이 돌아오면 여기가 비밀결사를 한 독립군들의 회합장소로되였던 것이다. 8월 29일은 <<한일합방>>이 된 날이다. 독립운동자들은 <<한일합방>>이란 조약을 본래부터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근본 그따위 말은 입밖에 번지지도 않고 이날을 그저 <<국치일>>이라고만했다. <<국치일>>이 돌아오면 독립군가정들에서는 한식날처럼 더운밥도 해먹지 않고 찬밥을 먹으면서 망국의 설음을 삼키였다. 아무 때건 조선이 독립이 되어야 이날에 더운밥을 먹으리라는 그들이였다. 초대의 일본인총독 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한다.>>고 말한바 있었다. 독립군들은 그 말을 상기할때마다 치를 떨었다. 그래서 모임이 있을때마다 잃어버린 내 나라를 잊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후대교양을 잘해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자래우리라는 결심을 내리군 했다.
비밀결사에 가입한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삼일신고>>나 <<회삼경>> 아니면 <<신리대전>>, <<신단설기>> 같은 대종교경서를 들고 다니였다. 하지만 그네들이 종교활동에서 중점적으로 론의되는것은 언제나 시국분석과 반일사업이였다.
강석이는 리달문할아버지를 따라 산시에 갔다온후 얼마안되여 리로인과 정해식로인 그리고 다른 몇몇 로인을 따라서 왕청서대파와 화룡 백운평에도 가보았다. 백운평에서 20여리 떨어진 마을에 독립군가정이 하나 있는데 환갑이 다된 그 집의 주인역시 북로군정서일때의 독립군이였고 청산리전투를 겪은분이였다. 일행은 그의 집에 들리여 하루밤을 지내고 회포에 싸여 전적지를 돌아보았다.
<<우리 그때는 과연 통쾌히 해버렸지. 참 더두말고 한번만 더 그런 싸움 해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이토록 늙어버린게 한이네.>>
모두들 이러면서 용기충천했던 과거를 동경했고 죽은이와 종적없이 갈라진 전우들을 생각하고 그리였다.
그번의 답사에서 강석이는 느낌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답사가 있은후에 그 역시 그네들의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나이가 제일어린 반일성원으로 되었다. 정해식로인이 령도하는 제1분대에 강석이 들고 제2분대에 김장군의 호위병이였던 강익선의 처 김리선녀인이, 제3분대에는 전에 기생집에 팔려갔다가 해방받아 후에 독립군 김자경이란 사람한테 시집간 <<양요리>>라는 녀인이 들었다. 그녀는 노래 <<불평등가>>의 가사중 <<서양요리 배불리먹고>>를 <<양요리 배불리먹고>>로 불러서 그런 별명을 가진것이다.
그들 녀대원 셋은 주로 항일혁명가요들을 먼저배워서 그것을 보급시키는 책임을 졌다. 노래는 등사기로 찍어 책처럼 묶기도하고 한 장으로 찍어서 배운후에는 종이를 없애버리기도했다. 노래는 <<3월1일가>>로부터 <<구일팔사변가>>, <<불평등가>>, <<세계일주가>>, <<용진가>>외에 수십가지였다.
비밀결사는 정식모임으로서 1년에 두차례 있었는데 한차례는 <<3.1>>, 다른한차례는 <<8.29>>였다. 모임활동은 각 분대별로 했는데 장소는 주로 김장군의 묘자리와 팔리평 성동사관학교자리 아니면 교회당이였다. 이 모임때는 태극기를 꼭 사용했다. 단지 그것이 크지 않고 작은것이였으며 때로는 외인이 모르게끔 위장되였을 뿐이였다.
강석이가 비밀결사에 가입해서 모임에 참가해본건 모두 7차였다. 이네들의 제일마지막모임은 1944년도 8월 29일에 있었는데 장소는 바로 수양(綏陽 ㅡ소수분하)남쪽 팔리평골안에 있는 성동사관학교자리였다.
그번에는 비밀결사성원들이 다 모이였는데 사실 다 모여봤자 얼마안되였다. 더러는 죽고 갈 사람은 가서 한데모여도 복잡함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의 팔리평골은 이전만 모양이 퍽 달라졌다. 일제는 만주를 치략하자 대쏘(對蘇)작전을 준비하느라 벌써 1934년도에 이 골안에다 철길을 놓은것이다. 철길은 중동로동단이 거의되는 수양으로부터 남으로 나가서 중쏘국경선에 있는 동녕(신선동)까지였는데 그 첫 정차지점이 팔리평이였고 그 다음은 차례로 토성자, 금창, 싸하자, 도하, 성자구, 동녕이였다. 일제는 동녕에서 삼차구까지 철길을 놓다가 망해버렸다. 그리고 수양부터 동녕까지 놓았던 철길은 해방후 인츰 걷어버렸다.
비밀결사가 마지막으로 집중모임을 가지던 그때까지도 팔리평골안에는 조선동포 농가들이 의연히 몇군데 동네를 이루고있었거니와 그 성동학교 교사로 지었던 <<ㄱ>>자형 초가집도 그대로있어서 교원 넷이 <<팔리평소학>>이라는 간판을 걸고 80여명의 학생에게 6년제의 교수를 실시하고있었다. 물론 그것은 500여명의 사관생을 훈련해내고는 사관학교운영이 더 이상 필요없음으로 해서 그를 페교하고 대신 소학교를 꾸린것이 명을 이어서 내려온 것이였다. 거기 교사의 자그마한 칸을 차지하고 나이 76살이 된 로인이 독신으로 살아가고있었다. 낯이 강마르고 몸이 메마르고 키큰 이 로인이 바로 강석이라 이름지어준 리범윤이였는데 비밀결사대원들은 그를 <<리관리사>> 혹은 <<리고집>>이라 불렀다. 광무 6년(1902년)에 간도관리사로 부임되여 교도보호에 힘썼고 뒤에 통감부에서 간도에 출장소를 설치하자 씨베리에 망명해 수천명의 의병을 모아 그 대장이 되어 함경도에 진출하려 했던 리범윤, 남만주에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해 청산리싸움에도 참여해 공도 세웠던 이 대바르고 강인한 독립군장령은 내내 홀몸으로 지내면서 인정깊은 조카들이 모셔가려해도 듣지 않고 이 집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며 그때까지도 땅고집을 부리고있었다.
비밀결사대원들은 적들의 삼엄한 경계를 피하기 위해 여러길로 나뉘여서 여기에 모이였다. 그러면서 그네들은 저마끔 길이 한자가량되는 흰천오리의 중간에다 한뼘가량되는 검정천과 빨간천오리를 매여 품속에 간수해 오다가 소류분(小流分)에 이르러서는 꺼냈다. 그리곤 바지가랭이 걷고 물을 건너면서 학교쪽을 향해 흔들었다.
<<성동아, 잘있었냐? 네 보고싶어 내가왔다. 풍진세상에 울지말거라, 서광이 비치면 웃을 날이 있으리.>>
그 천오리는 태극기를 상징했다.
그번에 강석이는 리관리사의 등에 업히여 내를 건넜다.
<<이놈아 업히여, 업히란데두. 죽어 귀신이 되면 널 못 업어본다.>>
이러면서 늙은이는 그를 기어이 업었다.
비밀결사대원들은 학교를 돌아본 후 언덕에 올라가 삼각산에 모이였다. 전에 사관생들은 무거운 모래주머니 메고 여기를 오르내리며 훈련했다. 그래서 회포를 자아내는 곳이였다. 모두는 나무숲속에서 팔절지만큼한 태극기를 나무에 매여놓고 그번의 마지막모임을 보냈다.
<<슬프다, 일본의 무력이여!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가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될지어다.>>
집회때면 부르군했던 <<무오독립선언>>의 구절을 외치곤 <<국치일가>>를 조용히 불렀다, 망국의 비운을 쓰라림속에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류분아, 잘있거라. 울며가서 웃으며 돌아올 날 있으리.>>
행사를 끝내고 내를 건널 때 사람들은 다시금 천오리를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3년전, 광복군총사령부는 서안으로 자리를 옮기고 건군공작에 착수한바있다. 북만으로 비밀리에 공작원이 왔었는데 그가 돌아갈 때 몇이 따라갔다. 그리곤 이런 노래가 비밀리에 돌았다.
료동만주 넓은 들을 쳐서 파하고
청천(靑川)강 수병(隋兵)백만 몰살하옵신
동명왕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쑤쳐보세
나아가세 전쟁장으로
나아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나아갈때에
광복군아 용감력을 더욱분발해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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