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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좌진이 9살나던 해인 1897년도는 나라가 천재에 신음하면서도 탈태환골을 해보려고 개명을 한 난망의 한해였다.
하늘마저 어쩌면 그리도 불공평하고 무정할가, 량반관리들의 탐학과 련속부절히 일어나는 란에 민심은 전혀 안정할새 없이 황황한데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해의 6월에 이르러서는 전국 각지에 우박이 퍼부어 농장물과 가축들이 형편없이 해를 입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빈궁에 빠져 헤매고있던 수천만의 백성들은 전보다 더 혹독한 아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기의 팔자를 한탄하기도 하고 천지신명을 우러러 구원을 절절히 빌기도 했다. 한데도 애원성을 들어주는 구세주는 세상에 없었다.
7월에 나라정부를 전복하려고 꾀했던 종진영과 홍현철을 비롯한 몇사람이 잡혀서 처형되였다. 그리고 10월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황제등극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쳐버렸다.
온나라적으로 입은 박재에 좌진이네라고 무사할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이네 집 쌀창고에는 먹을 쌀이 있었다. 예비없이야 그많은 입이 어떻게 살아간단말인가.
이해 겨울의 어느날이였다. 계집아이종이 비럭질을 온 거지할머니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곱게 보지 않았다.
<<부자집이 더 야박하구나.>>
거지할머니는 쌀 한되박 받아 자루에 넣으면서 두덜댔다.
달라는 쌀을 줬으면 감사히 받고 물러가련만 웬 불만인가? 필유곡절이라 좌진의 어머니는 리씨가 이상쩍어 알아보니 쌀에 돌이 섞였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좌진의 어머니는 종년이 모르고 한짓일테니 노여워말라고 사과의 말을 하곤 손수 쌀 한되박 더 주었다.
<<엄마좋네, 마음착해서.>>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하네라. 넌 거지랑 끌어들이지 말라.>>
리씨는 아들에게 짜증섞인 말로 곡진히 부탁했다.
이때에 한마을에서 사는 석범이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약방을 맡아보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갔다가 개화되여 돌아온 이 청년은 자기보다 나이 열 살이나 손아래인 좌진이와 어느덧 극친한 사이로 되었다. 안그럴수있는가. 좌진이야말로 그의 구명은인인데야. 그로놓고보면 백골난망이요 결초보은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한편 또 좌진이는 좌진이대로 그한테 감사한일이 있었다.
시골뜨기인 자기가 깜깜 모르는것을 그는 알고있어서 상종이 잦을수록 귀동냥이라도 할 멋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의 8월, 홍성대원군의 장례가 지난지 석달만에 일본의 전임총리대신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방문왔다. 그러더니 조선정부는 마치 어린아이가 마술사의 홀림에 들기라도한것 처럼 경부선철도의 부설권을 일본에 특허했다.
(여우는 잠자면서도 닭잡아먹을 꿈을 꾼다더라. 왜놈이 어쨌다구 제 땅 아닌 남의 나라에 철길을 놓을가?)
일본을 곱게보지 않은 좌진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의문이 컷다.
일찌기 고종17년(1880년) 11월 16일에 조선주재 일본 초대공사로서 하나부사란자가 부임되여 온적이 있다. 해군의장대에 호위되여 위엄스레 돈화문에 들어선 그는 창덕궁 중의당에서 임금을 배견하고 신임장을 봉정하였는데 고종왕이 근대적례식으로 외국사신을 접견한것은 그것이 처음이였다.
그때로부터 일본공사관으로 정해진 서울 천연정 청수관에는 일본국기가 게양되였으니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쇄국양이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는 상징이기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침략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좌진이 10살나던 1898년의 마가을 어느날, 석범이는 서울 가서 여러날 지내다 돌아오더니 서재필이 고문이 되어 움직이고있는 독립협회가 주체로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노라고 기분좋게 알려주곤 자기 생각하건대는 장차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나라의 개혁이 실시될듯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건 고균(故筠 )백부님께서 바라시던대로 되리라는거겠지!>>
좌진이는 그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기쁨이나 석범의 기쁨이나 다 가랑잎이 바람에 날리듯 인차 날아가버렸다. 10월에 관민합동의 개혁안 6조를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정부는 그를 선선히 받아들이지 않은건 물론 김옥균을 살해하여 그 <<공>>으로 교리(校理)까지 된 홍종우가 리기동 등과 함께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것을 따로조직해 맛서면서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자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해산을 지시했던 것이다.
홍종우가 좌진이네 가문에서는 철천지원쑤로 되고있다는건 세상이 다아는 일이다.
<<또 그놈이라더냐. 정말 종자도 못받고 뒤여질 놈이구나. 그런데 그 보부상들은 왜 그런 일에 나선다냐. 제 장사나할게지.>>
어머니는 서울소식을 아들 좌진이한테서 들어 알게되자 원쑤를 저주하면서 보부상까지 싸잡아 망종이라 욕했다.
이런일에 보부상들이 다 나서서 갈개군질한다는건 아닌게 아니라 우수운 일이였다.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겨룸이 치렬하게 계속되였어도 국외로는 열강들사이 조선에 대한 쟁탈전이 기복을 이루면서 고조되여가고 있었다.
김좌진은 소년시절을 이같이 피할래야 피할수 없고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국보간난(國步艱難)의 와중에서 보내야했다. 그는 비록 시골훈장이긴 했지만 다문박식한 광호선생한테서 한문(漢文)을 착실하게 배웠다. 그것은 그를 정립시킴에 재산이였다. 한해 두해 나이들수록 키골이 유별나게 장대해진 그는 기호 역시 남과 판판 달랐다. 8살때에 <<통감>>첫권을 독파한 후로부터 <<수호지>>나 <<삼국지>>같은 무협소설을 읽기좋아했고 <<손오병법>>은 물론 <<사마법(司馬法)>>과 <<륙도(六韜)>>와 <<삼략(三略)>>과 같은 병서들을 구해서는 그것을 독파하기에 노력하면서 검술(劍術)도 애써 련마했다.
그런데 좌진이는 그냥 아이로서 갈산을 독천장으로 삼고 뛰놀기만할수는 없었다. 그한테는 그가 7살 때에 벌써 부모들끼리 짝을 정해준 미혼처 오씨가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좌진이보다 두 살 더 많고 이름은 숙근(오숙은이라도 함)이고 역시 꼭같은 량반집의 딸이였다. 남자나이 7, 8살만되여도 족두리쓰고 장가갈 수 있었던 그때 세월에 여자몸으로 나이 15살먹도록 두문불출하고 규방에 갇혀있었으니 무던히도 오래 참아온 셈이다. 좌진은 봉건유제의 속박에서 벗어 못나고 수절하면서 오로지 자기만을 믿고 살아가시는 어머님의 심려와 친척들의 권념에 못이겨 나이 13살나던 1901년 봄에 례를 올리고 오씨를 안해로 맞아왔다. 헌데 그는 결혼한 그해의 8월에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그한테는 형 경진이가 있었지만 그는 어머니곁을 떠나 서울에 있는 일가집에 양자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해 형 경진의 나이 18살이였는데 이듬해는 아버지모양으로 근조말기(近朝末期)의 참봉으로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같은 벼슬을 겨우 한해밖에 못하고 20살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 일찍이 타계의 사람이 되고말았다.
이 안동김씨네 집에 이같이 또 한번 슬픔을 던져준 1904년!
바로 저주로운 그해의 2월 8일에 병든 조선을 삼키려고 오래전부터 혈안이 되었던 두렬강ㅡ 일본과 로씨야간에 끝내 전쟁이 일어나고말았다.
조선정부는 급급히 국외에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일본은 자기들의 륙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겁을 집어먹은 조선정부는 일본과 <<한일협정>>이라는것을 체결하고 경의철도를 일본에 빌려주었고 로씨야와의 조약을 페기해버렸다. 일본의 요구는 점점 사나와갔다. 충청, 황해, 평안도의 어로권을 가졌거니와 황무지개간까지 요구해나섰다. 그러다가 8월에 <<제1차한일협약>>이 성립되고 10월에는 일본인 메까다가 탁지부(度支部)고문에 임명됨과 동시에 일본사령관 하세가와가 입경하기에 이르렀다.
중립을 선포하면 안전하리라여겼던 어리석은 조선, 자주적인 독립을 갈망해온 조선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여 내각의 중요한 자리마다에 왜놈의 고문이 지키고 섰다. 아아, 이것이 그래 통탄할 일 아니고 뭔가?
바로 이러한 시국이였건만도 좌진은 남들이 보면 거기서 밥나오냐 떡나오냐고 웃을 지경 오기(吳起)의 병서에만 파묻혀있었다.
<<이녀석아, 억강부약이라지? 하하하하! 네놈도 속창은 있는 녀석같은데 크거들랑 의병이나 되거라.>>
어느핸가 마을에 의병대가 왔을 때 그 검정풍안경을 낀 사나이가 너털웃음 끝에 던지던 말이 늘 잊혀지지를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좌진이는 찌들어가는 나라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의병으로라도 나가고싶은 생각이 치밀때가 많았다. 허지만 그는 그 검정풍안경낀 사람처럼 독립협회가 뭔지도 모를 지경 무식하면서 열혈이 식으면 로략질이나해먹는 악한이나 무뢰한으로 되고싶진 않았다.
좌진의 집에는 팔만이라 부르는 30대의 젊은 남자종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무척셋다.
어느하루 좌진은 그가 장작무지를 옮기는 것을 보고 그리로 갔다.
팔만이는 작대기로 받쳐놓은 커다란 지게에다 지게뿔이 넘어날지경 장작토막을 실었다.
<<나 좀 볼가?>>
좌진은 그를 도와줄 겸 힘도 겨뤄보려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팔만이는 절대 그러게 못하게했다.
<<아니 나으리님이? 나으리님이야 글이나 읽어냐지 상놈하는 일을 어떻게 한다구유? 안돼유. 괜히 명분이 없어지겠수다.>>
좌진은 팥죽땀을 흘려가면서도 자기를 량반이고 주인이라 시키지 않고 그 일을 혼자해내는 그가 측은했거니와 이전부터 생겼던 의문이 짙어가면서 반성이 생기게 되었다.
(명분! 명분! 썩어빠진 명분! 그놈의 명분이 대체 뭐냐? 저인간은 무슨 죄졌다고 땀흘리고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 난 또 뭐가 잘나서 놀고먹는단말이냐? 저 사람은 상놈이고 난 량반이란 그 하나의 리유때문에? 량반과 상놈이란 대체 어쩌자는 차별이냐? 행실로 보나 재주로 보나 량반보다 나은 상놈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고루하고 완고한 유자(儒者)나 말공부질이나하면서 당쟁에만 눈이 빨개진 벼슬아치들과 비하면야 그네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가. 그런데도 량반이라해서 그네들의 머리우에 올라앉고 종으로 만들어 천대하고 착취하는건 얼마나 뻔뻔스럽고 죄악적인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이젠 <<서방님>>이니 <<나리님>>이니 하는 소리까지도 듣기 거북해난다. 사람지간에 응당 평등해야 한다. 이놈의 비틀어진 량반의 집에서부터 그렇게 혁명을 해버릴수는 없을가?)
좌진은 속으로 이러면서 아직 살아있는 종할미의 처지를 생각했다. 선량한 종할미! 남의 집 종살이가 고달퍼 자기네도 논마지기만 있었으면 신세고치련만 하고 한탄했던 종할미! 좌진이는 업어자래우는 보상으로 크거들랑 논 백석지기 주마고해서 그를 무척 기쁘게해주지 않았던가. 비록 철부지아이때의 일이긴해도 지금 일가주장이 되고보니 새삼스러워지는 추억이였다.
(이제는 다 컷다. 내가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오늘은 지켜줄수 없을가? 그네들을 진정 기쁘게 해줄수는 없을가?)
좌진이는 사람이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불평등한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자기의 그 생각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하나의 주장이 뚜렸해지면서 결심은 점점 굳어갔다. 가노를 해방하자!
헌데 자신은 결심을 아무리 내렸어도 혼자의 의사대로 제꺽해치울일은 아니였다. 제아무리 일가주장이긴해도 집안대사를 어머니를 기이고야 어이 되랴. 좌진은 어느날 밤 조용한 틈을 타서 어머니에게 자기의 뜻을 내비치였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두말없이 반대하였다. 종을 놓아주다니 그게 무슨말이냐고, 나라에서도 아직 아무말이 없는 일을 네가 하자니 방자한 짓이라고. 더구나 집안어른들이 아직도 살아계시는데 네 맘대로 그게 어디 될 법이냐고 딱 잡아뗐다. 그래서 좌진은 여러밤이나 잠못이루면서 날을 밝히였고 석범을 찾아가 함께 대책을 상의하기도했다.
좌진이 이번에는 오촌숙부와 의논해보려고 찾아갔다. 오촌숙부 창규와 숙모가 마침 집에 있었다. 좌진은 오랜주저 끝에 무겁게 입을 열어 우선 사회라는건 앞으로 발전하고있으니 이에 발맟추어 우리 자신들도 의식을 고쳐야할게 아니냐고 운을 떼놓고는 지금 가뜩이나 적은 민족을 상놈과 량반으로 갈라놓아서는 안될때이고 또한 인성(人性)은 똑같은데 그네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것은 죄라고 했다.
그제야 조카의 의도를 명백히 알게 된 오촌숙부는 정신차리였다.
좌진이는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어 량반들이 종이다 상놈이다 하면서 그네들을 짓밟아 산송장처럼 만들고 있지만 기실은 량반들이 다 썩고있다는 것, 종도 상놈도 다 놓아주어 그네들도 힘을 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는 이제 상놈과 량반이 합친다해도 까딱하면 나라운명을 건지기 어렵게 되리라고 부언했다.
<<뭐라? 그러니까 날보고 종들을 놓아주라고?>>
잠자코있던 오촌숙부는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화강암같이 굳은 태도였다. 그의 론리인즉 종들은 무식해서 국사에 참견할 자격이 근본 없거니와 만약 너의 말대로 풀어놓는다면 되려 버릇만 잘못 궂힐수 있으니까 가노해방을 궁리하는것부터가 얼빠진짓이라는 것이였다.
좌진이는 오촌숙부가 아무리 격노하여 삿대질해도 지그시참았다가 그가 제풀에 지친 다음에야 입을 다시열어 자기가 찾아온것은 한번 상의해보자함이요 숙부댁에서까지 그리 하라는건 아니니 너무 노여워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기 집 일은 이미 작정한바여서 그대로 집행하겠으니 그리 알라 했다.
조카의 이같이 단호한 태도를 본 오촌숙부는
<<이제 집안 꼴이 잘되여간다. 형님이 살아게셧더면 뭐라고 하겠느냐? 고현놈같으니!>> 하면서 의연히 분기충천하여 다시는 자기 눈앞에 얼씬거리지도말라했다.
좌진은 태연히 참고있다가 두 량주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왔다.
<<두고보십시오. 이제는 어떠한일이 있더라도 내혼자의 힘으로써 해내고야말텝니다.>>
오촌숙부의 집에서 나온 좌진이는 그길로 석범이네집에 들렸다. 그는 거기서 그들 내외간을 독촉해 찰밥을 큰 밥통에다 하나 그득해선 그것을 창호지에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그것을 자기 혼자있을 방에다 감추었다.
좌진이 석범이네 집에 들린사이 오촌숙부가 왔다가서 어머니는 벌써 그곳에 가 되어진 일을 다 알고게셨다. 어머니는 어른들이 안된다고 말하면 그런줄알고 들을것이지 너는 대체 무슨 고집이 그리도 세냐면서 여러대를 내려오며 무사했던 종들을 이제 놓아준다해서 그네들이 더 호강살이 할것 같으냐며 이 일만은 절대안된다고 한번다시 엄포를 놓았다.
<<안되나 두고봅시다.>>
자기방에 들어간 좌진은 문을 꼭 닫아걸고 혹간 랭수나 한사발청해서 마실뿐 때가 되어도 나와 식솔들과 함께 밥먹을 념은 않으면서 벽을 마주하고 앉아 기도드리는지 요지부동이였다.
이러기를 여러날, 어머니는 드디여 아들이 단식하고 죽을것만같아 겁나서 그만 울음을 내고야말았다.
<<좌진아, 네 맘대로 시켜줄테니 제발 어서 문열어다구.... 인제부터 무엇이든 네맘대로 하게 할테니 어서 나와서 무엇 좀 먹어라... 아이!>>
그제야 좌진이는 달려나와 우시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였다.
<<어머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과연 위대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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