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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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8)
2014년 03월 05일 01시 18분  조회:3401  추천:1  작성자: 김송죽
 

8. 

 

반일의병운동은 어느덧 전국을 휩쓸었다.  시, 군의 소재지 등 도시들이 위치한 벌방지대에서는 물론 고산재대의 두메산골로부터 바다우의 작은 섬지대에 이르기까지도 의병들의 투쟁장소로 되었다. 의병총수는 7만여명!

일본측의 <<폭도편책>>에 집계된 1908상반년도 각지 의병장수가 연해주와 간도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6명까지 포함해서 모두 442명! 농민출신, 시위대출신, 군인출신, 유생출신, 머슴출신, 포수출신의 의병장들이 이름을 들날렸다. 귀에 쟁쟁한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아주 많았다. 얼핏들어도 믿기 어렵겠지만 친일파인 일진회원이 의병장으로 된것이 있는가 하면 술장사,점쟁이가 의병장으로 된것도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애국심이란 그 하나의 공통한 마음이 있어서 그들은 생사판가리혈전의 한길에 떨쳐나선것이다. 력사가 시작된 이래 이때처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이 열렬하게 벌어진적은 없었다.

좌진은 들려오는 소식들을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시골에만 이대로 눌려있는건 무능한 존재로밖에 되지 않는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촉에 못이겨 서둘러 동생을 장가까지 보내고나니 한시름 놓이면서 그는 부쩍 마음뜨기 시작했다.

남편의 이러한 심기를 알아채고 지켜보던 안해는 남편이 어디로가면 자기도 따라가겠노라고 고집부리며 나섰다.

좌진이는 들어주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되 한가지 약속이 있었으니 무슨일  있든 참아야 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돌아와야한다는 것이였다.

좌진은 갈산을 떠나기로 결정지은 후 학교를 경영할 비용을 얼마가량 장만하여 김석범에게 주면서 그더러 학교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생 동진에게 맡기였다.

그런데 백설총이도 비룡도 다 죽고 지금 집에는 부림말밖에 없어서 좌진은 말 한필을 새로 사서 자기가 타고 안해는 가마에 태워 데리고 서울길에 올랐으니 때는 바로 1908년 4월이였다.

류달리 좋은 봄날씨였다. 이른아침에 가족과 학생들의 전송을 받은 그의 일행이 서산(瑞山)땅에 발을 들여놓으니 어느덧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좌진은 가다가 마침 길가에 술집이 있는지라 한잔 제꺽 할념으로 교군들더러 먼저가라해놓고 잠간 말에서 내렸다.

그가 술마시는 사이 가마는 그냥가서 어느덧 대호지(大湖池)라는 커다란 못가에 이르렀다. 룡봉산(龍鳳山)의 산맥사이에 놓여있는 이 못은 으슥히 외진곳이였다.

주막에서 나와 청처짐 뒤따르고있던 좌진은 문득 고개를 쳐들면서 앞에 가던 가마가 가지 못하고 웬 무장한 자들에게 포위된것을 발견했다. 가마가 불의 변고를 당하고있음을 깨달은 좌진은 말을 세차게 몰았다.

<<에잇, 짐승같은 놈아!>>

그는 말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자기 처를 가마에서 뿌득뿌득 끌어내리우고있는 놈부터 잡아 머리우 공중에 번쩍 올렸다가 활 던져버렸다.

머리우에서 버둥질치던 그자는 저쯤 날아가 딴딴한 땅에 곤두박혔다. 순식간에 당하는 일이라 괴한들은 모두 어마지두에 악연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는 꼴을 보면서 좌진이는 대성질호했다.

<<야, 이자식들아! 너희들은 대체 뭘하는 놈들이냐? 백주에 이따위 작경을 하고있어? 이 못난 놈들아!>>

괴한들은 찍소리 못하고 그냥 떨기만했다.

좌진의 음성은 조금 누그러졌다. 하고다니는것을 봐서는 당장 모두 때려죽이고싶다만 갈길이 바빠 그러지 못하니 썩 물러들가라했다. 그리곤 녀석 하나를 분김에 죽여버렸으니 유감이지만 어디 따뜻한 자리나 골라서 묻어주라면서 허리에 찬 전대를 끌어 은전 몇잎을 꺼내여 그자들에게 던져주었다.

<<적지만 그걸로 횡사한 너희들 동무 장비에 보태거라. 그리고 한마디 부탁한다. 이 망할놈들아! 육신이 멀쩡한 젊은놈들이 한다는 짓이 겨우 이것뿐이냐? 약한 제 동포나 협박하구 유부녀나 겁탈하다니. 그렇게 살아서는 무엇한단말이냐? 너희들도 사람이거든 정신 좀 차리거라. 허물어져가는 나라를 위해 일을 하던지 아니면 착한 사람이 되어서 농사나 짓던지. 알아들었냐? 김좌진이가 이걸 너희들한테 부탁한단말이다.>>

좌진은 말을 마치고나서 가마를 메라고 교군들에게 이르곤 자기도 말잔등에 오르려 했다.

이때였다. 

<<김선생!>>

숲속으로부터 한자가 달려나오며 부르더니 앞에 와서 엎드리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20여명이 우르르 달려나와 역시 그본새로 땅에 엎드리였다.

먼저나온자가 머리들며 빌었다.

<<난 당신이 김좌진인줄은 꿈에도 몰랐소. 당신은 나를 모를테지만 나는 당신을 조금은 아오.>>

두령임에 분명한 그자는 이러면서 자기는 좌진이가 벌서 어린나일 때 수십명의 종들을 놓아주고 밭까지 나누어주었다는 소식을 판술이한테 들어서 알았노라고, 그때로부터 속으로 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했노라고 실토했다. 판술이란 좌진의 집에 있었던 어린 종이였는데 그한테는 외척의 아우라는거다. 판술이는 가노에서 해방받은 일을 늘 고마워하면서 주인이였던 좌진을 외우군하다가 지난해 봄에 죽었다 한다.

<<이렇게 뵐줄은 천만뜻밖이요. 하도 부평초같이 떠돌아다니는 놈이라 그뒤 당신이 학교세운것도 나는 몰랐소.>>

이러면서 그는 아까 물으니 교군이 학교 교장선생님댁이라 하기에 웬 칠일파량반녀석의 녀편네가 아닌가고 의심했노라했다. 아버지가 론산골 사또손에 억울하게 매맞아죽은 후 이길로 나선지도 어언 20년, 노리는건 언제나 썩은 량반이거나 못된 벼슬아치였지 백성은 아니였다면서 그는 자기가 오늘은 환장을 했던지 <<개가 려동빈도 몰라보고 물듯>>이 좌진의 앞에 큰죄를 지었으니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곰팡이 끼고 썩은 인간은 아니였다. 그래서 좌진이는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일으켰다.

<<자, 긴이야기는 밤에 하기로 하고 벌써 저무는 때니 우리 같이 대호리 객주집으로 갑시다.>>

그날 밤을 대호리(大湖里)에 묵은 김좌진은 객주집에서 그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밤깊도록 한담을 나누었다.

<<선생께서는 급한일이 있으면 언제나 불러주십시오. 이까짓 목숨이라도 쓸데가 있다면 언제든 내던지겠습니다.>>

저쪽의 맹세였다.

좌진은 이렇게 되어 현실의 국난을 외면하고 떠돌아다니면서 로략질이나 해먹고있던 한 도적무리의 도장수(都將帥) 채기두(菜基斗ㅡ 채기중이라고도 함)를 알게 되었다.

이틑날 서울에 당도한 좌진은 가회동 일가친척집에서 멀지 않은 취운정(翠雲亭)밑의 솔밭에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 한 채를 얻어 들고는 곧 활동을 시작했다.

좌진이 다른데로 가지 않고 서울에 오게된것은 바로 자기가 해야할바의 일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보기드믄 장골인 그는 기마와 무예를 열심히 익힐 혈기방장한 젊은이가 아닌가. 그러한즉 의병대같은데 들면야 무엇이 모자라 남한테 뒤지랴. 허지만 그는 싸움판에 나가는것을 급해하지 않았다. 가정재산을 다 털어서 학교를 세웠고 <<기호흥학회>>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으로까지 된 그는 그만큼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격있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하기에 교육자로서의 자기는 이제라도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자각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있는 인재를 빨리 묶어세우고 훈련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통감부에 의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해산되자 한해전이던 1907년에 권동진(權東鎭), 남궁억(南宮檍 ), 장지연, 오세창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있었다. 이는 국력증강을 위한 교육, 산업의 발달을 내세우는 계몽단체였다.

그 중견을 보면 권동진은 정부의 륙군참령을 지낸후 1884년 갑신정변을 당하자 손병희, 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던 사람이고 남궁억은 1898년에 <<황성신문>>이 발간되자 사장에 취임했던 사람이며 장지연은 후에 그 신문의 사장을 지내다가 <<을사조약>>이 있게되니 유명한 론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썻고 1906년 윤효정(尹孝定)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씨베리아와 중국을 방황하다가 귀국한 사람이고 오세창은 고종 23년(1886년) 박문국주사(博文局主事)가 되어 <<한성순보>>기자를 겸하고 그뒤 농상공부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전국통신국장(郵電局通信局長)을 력임한 사람이다. 이같이 그들은 다가 위망과 선망이 있는 출중한 무관, 교육가, 언론가들이였다.

그들의 지도하에 움직이고있는 <<대한협회>>는 이때 의병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고무되여 의병들과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저지 파탄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며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를 분쇄할것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적으로 내세웠다.

좌진은 기껍게 이 조직에다 자기의 몸을 잠그었다.

<<대한협회>>는 그가 서울로 올라오기 한달전이던 3월에 함경북도 경성에다 지회를 내온바있다. 그 회원수는 200여명, 협회지회에서는 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함일학교 등을 세우고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때 애국적인 지식인 서울사람 리남기가 있었는데 그는 1905년 부령, 회령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두만강을 건너가 국내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노랑포수의병대>>의 한 지휘성원이였다. 그는 안중근한테서 국내의 반일의병투쟁정황을 들었고 겸해 <<대한협회경성지회>>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고있다는것을 들어 알고는 이를 반일의병투쟁준비에 리용할 마음을 먹었다.

좌진은 그를 적극 협력해주었다.

그들은 학생모집을 한다는 광고를 낸 후 운동회를 한다는 명목을 빌어 경성의 여러지방에서 온 애국청년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여놓고는 의병에 가입시켰으며 체육을 한다면서 그들에게 총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의병대에서는 또한 학교설비, 경비를 거둔다면서 1만 7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아 그것을 갖고 연해주에 가 무기와 기타의 군수품을 사왔다. 그리고 또 인민들에게 호소해 경성지방에 산재해있는 화승총들을 걷어들이기도했다.

한편<<대한협회>>는 자신의 조직을 급속히 확대하였는바 1908년 7월에는 자기 산하에 30여개의 지회와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애국단체로 성장했다.

좌진은 안창호(安昌浩), 리갑(李甲) 등 몇사람과 손잡고 본래있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함흥학회(咸興學會)>>를 병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설립했다. <<서우학회>>는 애국계몽단체로서 자체로 월간을 간행하고 순회공연 등으로 매일 애국사상을 선전하였다.

이 기간 좌진은 <<신민회(新民會)>>의 창립자중 한사람이며 명망있는 로백린(盧伯麟)과의 우의도 깊어지면서 비록 나이차이는 14살이나되였어도 허심탄회할 수 있는 극친한 사이로까지 되었다. 그렇게 됨에는 로백린이 무관출신이라는데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독립사상이 투철하고 견정하며 따라서 재능이 있는 활동가로 좌진에게 안겨왔기 때문이다.

로백린은 일찍이 일본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서는 관립무관학교(官立武官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그러한 그는 나라의 국권수호는 군대가 하는 것인데 군대를 해산시켜버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느냐고 통탄해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자면 오직 무장투쟁만이 가능하다는것을 주장하고있었다.

이 점은 좌진의 생각과 꼭 같았다.

일제도 역시 이점을 알고있길래 조선의 무장력인 군대를 갑자기 해산시킨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자들은 조선의 군대를 가장 큰 위험물로 보았던 것이다.

박성환의 자결은 적개심에 끓고있던 군인들을 반일무장폭동에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8월 1일, 서울에 있던 조선군인 5,277명중 강제해산시키려는 인원이 3,640명이였는데 그들가운데 50%에 해당되는 1,838명이 군대강제해산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이 치렬한 반일폭동을 벌렸다가 결국은 탄알이 떨어지고 희생이 많게되니 퇴각하여 의병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싸우는지?)

여기 서울의 8.1폭동! 그것은 어느덧 군민일심이 되어 겪어야만했던 가렬처절한 싸움이였다. 서소문보루돌파에 성동했던 <<평양징상대>>병사들, 남성문을 점령코저 적탄의 불비속을 헤치다 쓰러진 군인들, 치렬한 총격전 끝에 벌어진 육박전, 련지동 녀중학생들의 헌신적인 지원.... 폭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싸움의 영상이 눈앞에 겹치면서 조선인민이 나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류혈과 희생이 약속되는 이 길뿐이라고 좌진에게 가르쳐주고있었다.

(동진이는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어머님은 무사한지? 참, 손녀를 보았다고 알리기도하고... )

좌진이는 꽤 오래간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물론 어머니를 보려는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박성태가 서울로 돌아와서 그쪽 학교형편이 어떤지 근심되였기 때문이다. 시국이 자못 복잡한 때라서 학생들이 안착하고 공부할수 없었다. 그래서 좌진이는 석범의 의견대로 한동안 방학하기로했다.

좌진은 돌아올 때 대호리에서 뜻밖에 채기두를 만났다. 헌데 그의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였다. 두볼은 꺼지고 눈은 충혈되였으며 게다가 수염도 깎지 않아 험상해보였다.

<<아니 어찌된일입니까?>>

<<말두마시우, 김선생... >>

채기두는 방가운 끝에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뽑았다. 얼마전 그는 일본 <<토벌대>>의 습격에 들어 부하들을 거의다잃고 겨우살아난 것이다.

<<왜 다른 의병대와 합쳐 싸우지 않고 그럽니까?>>

<<글쎄.... >>

좌진이한테 힐란을 들은 채기두는 인제와서야 단독으로 나다닌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하나뿐이 아니라 다른 의병대들도 그모양인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그러했다. 그 많은 의병대들이 한데 뭉치지 않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었다. 그러니 쓰거운 고배를 마실수밖에.

각지에서 진위대가 해산된 후 군인들이 자기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조성된 정세로 보아 반일투쟁을 벌리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선것이다. 이같이 어떤 군인들은 군대해산을 반대하면서도 폭동은 일으키지 못했으니 맹랑한 일이였다.

그런 때에 조직자가 있었다면 얼마나좋았겠는가.

북청진위대의 부교 조희명은 부대를 해산시키려하자

<<만약 국가에서 비용이 곤난하여 군대를 해산시킨다면 우리는 국가재정 쓸것을 원하지 않는다. 각자가 부담하여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군대해산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 조희명 한사람의 마음이였으랴! 군대는 해산선고를 받았지만 애국심있는 군인들은 총부리를 침략자에게 돌려 군인된직책을 다하려하고있다. 경기도지평,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제천, 등 여러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해산당한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양총을 가지고있으며 일지기 훈련을 받아 규률이 있었다. 일본군대와 싸우면 많이 죽일것 같다. 그 세력이 강대하여 병력수가 거의 4,5천명이나 되었다.>>(<<속음청사>> 권 12. 륭희 원년 8월 19일.)

이것은 조선중부일대에 가장 많이 모였던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넘어갔다는것을 보여준다. 헌데 그들마저도 통일적인 장악이 없이 지방별로 장수별로 제마끔 제멋대로 싸우고있었다.

<<그래갖고서야 어떻게 강적하고 싸워 이길수 있는가? 하나라도 뭉쳐야지!>>

좌진은 한동안 채기두와 함께 동분서주하면서 의병규합에 힘써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쉽게도 별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런일이 있은 후 그는 로백린과 손잡고 경성고아원을 도와나섯다. 라춘수(李春水)라는 사람   개인이 경영하는 이 고아원은 온 조선치고 하나뿐인 고아원이였는데 자금난과 기타일로 곤경에 처해있었다. 좌진은 자진하여 총무(總務)직을 맡고 경제해결을 위해 뛰였다. 그래서 경성고아원은 마침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때 모진 혼란에 빠졌던 서울은 차츰 안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울밖에서는 반일의병투쟁이 의연히 줄기차게 전개되고있었다.

<<매천야록 권 6. 륭희 2년 무신 4월편>>에는 그해의 3월에 강원도지방의병들이 다진 의병결의와 어느 한 의병대가 통감부에 보낸 글 <<투서>>를 기록해놓았는데 4개조항으로 꾸면진 그 <<투서>>의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1. 고종을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치를 하게 하자.

2. 통감부를 없애치우자.

3. 일본관리를 전부 파면시키자.

4. 일본이 1905년에 빼앗은 외교권을 도로 찾아내자.

 

이것은 비단 의병들의 념원이였을뿐만아니라 전조선백성의 념원이기도했다.

그런데 이해의 9월부터는 일본 <<토벌대>>의 발광적인 탄압으로하여 의병투쟁은 더 어렵고도 참혹한 시련을 겪게되였다.

8월하순, 일본의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전라남북도에 림시의 <<토벌대>>를 무어보내는 한편 여기에 제6사단 공병소대, 헌병, 경찰관을 더 증가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들을 지키게하였고<<행동부대>>는 포위선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야수적인 수사와 검거 및 학살만행을 감행하게하였다. 또한 전라남북의 연해에는 해군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하였다.

그자들은 9월 1일부터 <<토벌>>작전에 착수하여 9월 20일경까지 20여일에 걸쳐 제1기 <<토벌>>구역에 대한 <<토벌>>을 끝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토벌>>이 끝난지역에서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동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자 약이 오른 와다나베소장은 예전계획을 변경하여 제3기 <<토벌>>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소수의 력량으로 지키게하고는 제1기, 제2기 <<토벌>>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를 다시했다.

<<토벌대>>는 무리를 지어 매개마을의 주변을 포위하고 경계를 이중삼중으로 한 다음 수색에 달라붙었다. 수색은 먼저 동리의 동장을 불러내여 미리 만들게 한 남자명단과 자기들이 가지고다니는 민적등본을 대조한다음 남자들은 한사람 한사람 골라내여 취조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의병들은 물론 의병투쟁에 참가했을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 의병을 도와준 사람들, 의병참가자 또는 의병참가혐의자들의 부락민들을 남며로소 할것없이 마구끌어내여 총살, 교살, 타살, 생매장, 사지찢기, 가슴도려내기, 눈도려내기 등 가지가지의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으며 <<징계>>니 <<경고>>니 하면서 의병장들의 시체나 의병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니 그야말로 귀축같은 만행이였다! 이리하여 온 강토는 일본침략자의 야주적살인만행이 감행되는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피바다로 변하게되였다.

영국기자 맥컨지는 조선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침략군이 도시와 마을을 소각파괴한 정경을 목격하고 <<이때가지 이렇게 무참하게 파괴된것을 본 일 없다>>고 하면서 충청북도의 <<제천은 지도우에서 사라졌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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