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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반도의 혈 제3부
5.
5월초의 어느날 조선에 나갔던 조성환이 만주로 돌아와 왕청에 다시나타났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천지간에 우레소리를 남기는 번개마냥 그의 행적은 신비로왔다. 그렇다고 굳이 알려고 캐물는 사람은 없었다. 독립운동에 몸바친 사람이니 의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고있으리라는 믿음만이 있었기에 그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구면의 사람들은 다가 그를 제집의 식솔로 여기고 유정스레 친근히 대했다.
《그지간 다들 무사히 지내셨습니까? 나 이 성환이는 조선가서 근 달포를 보내고 연해주로 해서 이제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조성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먼저 대종교의 늙은이들부터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리였다.
《이 사람아, 어느새 또 거긴 갔다왔나!》
《과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네 그려!》
《이 사람아, 사타구니에 휘파람소리 너무나다간 뭐가 떨어져.》
이달문도 이동호도 정해식도 김기석도...혀를 내둘렀고 무람없이 롱담을 내던져서 웃기도했다.
조성환은 과연 역말(驛馬)과도 같이 분주히 뛰여 다니는 몸이였다.
그는 <<宗敎統制案>>이 내려 그것이 전반 종교계에 가해진 타격과 남도본사가 그에 대처하여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자기가 본 그대로 알려주었다. 듣는 이들은 모두 그가 종교일로 갔다온줄로 알았다.
사실은 그는 남이 알면 안될 극비의 중대한 일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나갔다가 서대문이 없어지고 뒷이어서 흥례문마저 헐리워 그 자리에 총독부가 일어서리라는 말을 듣자 조성환은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와글와글 끓어 오르는 분을 도저히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하여 그는 전부터 련계가 있었던 대한광복회의 박상진(朴尙鎭) 사령을 찾아가 그의 앞에서 울분을 토해놓았다. 박상진은 귀담아 듣더니 서대문이 없어진 것은 총독의 명령에 의한것이요 김좌진도 이 일을 알고 격분하여 이러다가는 나라의 고적이 결국 그자들의 손에 싹쓸이를 당하고말겠으니 속히 대책을 세워야할게 아니냐고 제의해왔다면서 어찌하면 좋을가 모색중이라했다.
《우리 손으로 고관녀석들을 없애치우기오. 안중근의 본을 받아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될것같애. 계획과 담략만 있다면.》
《좌진이도 조선생처럼 그리말합디다. 나역시도 그 생각이여서... 말이 난김에 설명해드리지요. 이번 제가 조선생님을 이리로 행차케 한 것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연구해보자 함이였습니다.》
박상진이 하는 말이였다.
이에 앞서 김좌진의 제의에 의하여 데라우찌 총독을 비롯한 고관(高官)암살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침내 대한광복회의 행동으로 규정되였던 것이다. 조직의 행동이 초보적으로 구상될 때 대한광복회 사령 박상진은 광복회(光復會) 만주지방기관(滿洲地方機關)의 설치를 책임진 우재용(禹在龍)과 광복회 부사령으로 지금 남만주 회인현에 가있는 이석대(李奭大)를 통하여 련락을 취한 후 신채호를 만나 그와 좀 더 구체적으로 조선총독암살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대한광복회의 황해도회원인 성락규(成樂圭)를 비롯하여 이관구(李觀求), 조성환 등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다.
몇해전에 일본수상 가쯔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거제도에 1년간 갇혀 지냈던 조성환이 이번에는 무단정치를 실시하여 2천만 조선사람을 지옥과도 같은 질곡속에 몰아넣은 흉적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이때 서일은 왕청에 있지 않았기에 조성환은 덕원리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그 이틑날 곧추 화룡으로 향했다. 계화가 함께 동무해주리라며 나서자 나도 가겠다면서 자진해 나서는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조성환에게는 초면인 그는 라중소(羅中昭)였다. 경기(京畿)태생으로서 지식인인 라중소 역시 경술국치후에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다.
서일이 마침 청호에 있었다. 요즘 그는 어디든 가지 않고 총본사 古經閣에서 삼일신고의 진리훈을 강해하려고 금방 연구에 착수한 상태였다.
《아니 이거, 조선생님이시구만요! 어떻게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서일은 조성환을 여러달만에 만나는지라 무척 반가와했다.
《난 서선생을 만려구왔지. 경전을 연구하시오?》
《예. 진리훈강해를 집필해볼까구요.》
조성환은 그것참 좋은 일을 하고있다면서 펼쳐놓은 글을 내리읽었다.
《중(衆)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을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墮生長宵)(思邀切) 병몰(病歿)의 고(苦)하 철(喆)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면하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야 반망즉진(返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시(是)니라》
라중소는 한학을 공부하기는했지만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있는지 듣고서는 오리무중이라 눈을 꺼무럭거리다가 목을 빼들고 탁상우에 있는 경전을 다시들여다본다.
조성환이 서일과 물었다.
《서선생은 이 문장에 대해서 풀이를 어떻게 하는게 옳을 것 같소?》
서일은 이렇게 한다면 일반인이 다 알아들을수 있겠는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를 했다.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렵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달길>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아, 자라, 늙어,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부디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 가달을 도리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맞춤이 이것이니라.》
《오ㅡ참말로 그럴 듯 하네그려! 풀이가 적중한 것 같네!》
조성환은 서일의 글재주에 감탄을 금치못한다.
《참말이지, 우리 서선생은 경전을 만들어내야 할 분이라니까!》
계화역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그루박아 말한다.
라중소는 군사학만 연구하는줄로 알아왔던 서일단장이 경전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거니와 박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성환은 서일과 자기는 환국하여 도사교 라철을 만나보았노라 말하고나서 그의 부탁을 전한다면서 닥쳐오는 음력4월중순에 남도본사에서 천궁령선식을 갖게 되니 그 전에 환국하도록 서두르라했다.
서일은 <<宗敎統制案>>이 내린 상황에서 열리는 천궁령선식의 중요함을 스스로 깨닫고 어떻게 하나 제 기한내에 환국할 생각이긴하나 비자를 내자면 시간상 어려운 상황인데 조선생은 어떻게 갔다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성환은 내가 언제 비자를 내갖고 차타고 다녔던가 뭐 하면서 알려주었다.
《나무꾼은 나무꾼의 길이 있고 밀수꾼은 밀수길이 따로있지. 안그렇소? 나는 연해방면으로 해서 길을 열어놓은거요. 니콜리스크를 경유하거나 아니면 하수빠수카야 유정구역방면으로부터 육로국경역으로 되는 포구라니수야부근으로 나와서 국경을 넘는거요. 넘어와서는 어디로 갈가? 둔전영통로를 경유해도 되고 아니면 삼차구를 경유해서 대조사구길로 나와서 수분하를 거슬러오르면 바로 왕청오지 라자구지방에 들어서게 되는거요. 모색하면야 길은 여러갈래가 될수 있지. 》
《아, 그렇습니까. 그럼 나도 그 길을 택해야겠군요.》
《건 념려마오. 내가 국경까지 바래다줄테요.》
조성환이 이같이 자진해 나서는 것을 보고 계화도 라중소도 함께 바래다주리라했다.
그러나 서일이 정작 떠나게 되자 그를 바래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그들 세사람만이 아니였다. 토비가 욱실거리는 때라 아무런 방비순단도 없이 몇사람만 달랑 떠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니 중광단의 무장대 10여명이 함께 호송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결정이 되였다.
길은 조성환이 걸어본 그 길이였다.
서일이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음력 4월 10일, 양력으로는 5월 11일 일요일이였다. 서일은 기독교신자들이 례배당에서 조심스레 일요일례배를 올리고있는 것을 보았다.
조성환의 말과 같이 전해에는 서대문이 헐리웠다더니 올해는 흥례문(興禮門)이 헐리웠다. 그 자리에다 과연 총독부를 지으려는 모양이다. 한데 저건 또 어쩌려는걸가? 여러 인부들이 추춧돌같아보이는 것을 목도하여 어디론가 옮기고있는데 그를 지휘하는 자가 머리에 캡을 눌러쓰고 손톱만큼한 콧수염을 괘씸하게 자래운 왜놈이였다.
《개자식들! 저 추춧돌까지두 략탈하는거냐.》
서일은 욕지기나서 한마디 던져놓고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놨다.
《어이구, 오셨네요!》
라철부인 기고(奇姑)가 서일을 자기 집에 반갑게 맞아들여놓고는 제 아들에게 빨리 아버지를 찾아 기다리고있던 귀한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려 집으로 오도록하라고 시켰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사이 라철부인은 지금 만주에서 살고있는 교도들의 형편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묻고는 총독부의 통제에 들어있는 남도본사의 근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때는 대종교의 핵심간부들인 김 헌(金獻ㅡ金敎獻), 오기호(吳基鎬ㅡ吳赫), 류 근((柳瑾) 등이 라철조교와 함께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장차 구국항일운동을 전개할 지역은 만주지역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많은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게끔 동원시키고있는 상황이였다.
조성환이 말하던바와 기본상 같았는데 <<宗敎統制案>>이 내린 후로 교도들의 반발은 더 커가면서 여러 가지의 종교활동들이 은밀히 계속 진행되고있다는 것이 서일이한테는 귀맛좋게 들리였다.
《암 그래야지요! 머리숙이면 결국 지고마는겁니다. 종교통제안을 내놓긴했어도 일제는 결코 배달의 얼을 멸살하지 못할겁니다!》
서일은 부르짖었다.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조국땅에서 활약하고있는 교도들의 완강한 반항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직접 감지한 것이다.
좀있으려니 라철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와줘서 고맙소.》
《의레 취해야 하는 거동인데 고맙다는게 웬 말씀입니까.》
《나는 아우가 제때에 당도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했었네.》
《조선생께서 수고하신 덕분에 저의 이번 환국은 순리로왔습니다.》
서일은 겸하여 그지간 만주에서는 별 사고없이 대종교의 사업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여 간다고 알리고나서 갑작스레 천궁령선식을 하게 되는 리유가 뭔가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이에 라철은 서일을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고 總本司 典講으로 전임시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典講이면 교리를 연구하는 직책인것으로서 이는 사실상 서일본인도 마음속 바라는것이였다. 라철은 이같이 알려주는 한편 제2의 도통(都統)을 승계(承繼)할만한 적임자문제를 놓고 그의 의견을 청취하려했다.
서일은 량미간을 그러모았다가 입을 열었다.
《도교사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개운치가 않구만요. 왜서 갑작스레 승계문제를 내놓으십니까? 그리해야만 하는 리유가 대체 무엇인데요?》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례의 망케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여 오늘의 업수임을 받고있는거네.》
《그것이 어찌 도사교님 한분의 책임이라 하오리까? 그리 생각지를 마십시오.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봅니다.》
《아닐세.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여덟해에 빌고 원하는대로 한얼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번 입어서 장차 뭇사람을 구할 듯 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갸륵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했네.》
《은혜를 갚지 못한것이 어디 도사교님 한분뿐인가요.》
《온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길에서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것 같네.》
《그리 생각지 마십시오. 사실말해 죄를 받아야 할 사람은 도사교님도 저도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한 사람 바로 우리의 이 대교를 나락에 떨구려드는 적 총독부의 총독 데라우찌 그자인겁니다. 그자의 통제령을 도까비의 호곡성으로 치부합시다. 그러면 단걸요》
《과연 그럴가.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 한데 그놈의 호곡성이 숨통을 죄이니 문제가 된단말이요. 안그런가?.... 그래서 나는 교를 계속 이끌어갈만한 적임자가 있어야겠다고 새로이 생각하게 된거네. 아우를 놓고 보면 모든 면이...》
언중유언(言中有言)이라 라철이 하는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가 자기는 장차 자리를 내야 할 테인즉 도통까지 승계(承繼)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고 속심을 내비치는 것이여서 서일은 단호한 투로 사절했다.
《도사교님의 의사를 충분히 리해할만합니다. 저를 그같이 신임하고 믿어주시니 고마움 이루말할수 없습니다. 한데 저로서는 놓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중광단의 사업 그것말입니다. 저는 맘먹은대로 그것을 완전 무장단으로 만들어내고말겁니다.》
이러자 라철은 량미간을 찌프리며선 안색이 흐려지는것이였다.
《무장단으로 만들어서는?... 환경과 시기에 위배되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 화를 자초할 수 있네. 그래서 나는...》
서일은 저으기 놀래는 눈길로 그를 다시보았다. 전날까지도 중광단이 무장단체로 발전하기를 바라던 사람이 오늘 왜 태도가 급전한걸가?...그가 너무조심하는 것 같으면서 종잡기 어려운 의문이 갈마들기 시작했다.
《한얼님은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르기를 <느낌을 그치고 숨쉼을 고루하며 부딛침을 금하라>하셨으니 그건 정성의 근원이 아니겠소.》
부딛침을 금하라! 라철은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륵한다는건 승산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일로 느껴져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대종교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이 점점 더 가혹해질것이 예상되니 어쩌면 앞이 암담하게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서일은 한번 먹은 마음을 돌릴고싶지 않았다.
《중광단은 민중의 반일단체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무장단체로 태여나야 합니다. 광복은 어느때 가서든 무장투쟁으로만이 이루어질것입니다.》
서일은 속을 박아 말해놓고 도사교께서도 알고계시다싶히 만주에서 구하기 쉬운건 총보다 말이 아닌가 말은 벌써 적잖게 사들이여 그 수가 벌써 거의 500필에 이르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니 그많은 것을 무슨 수로?... 군자금이라도 거두어 들인건가?》
《군자금이라며 거두지는 않았습니다만 대종교인의 자원적인 모금에 의하여 말을 그만큼 사들일수 있었던겁니다.》
《오, 그래? 그런걸 난 모르고있었군!》
라철은 눈확이 점점 붉어났다.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발동되였음에 감격하고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다른말은 더 하지 않았다. 폭력적수단으로 5적암살을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뼈저린 교훈을 갖고있는 그는 내가 못해냈다고 다른 사람도 못해내랴 하는 것 같기도했다.
두 사람은 화제를 종교사업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밤가는줄 모르게 지속된 허심탄회 끝에 대통을 극구 넘길시에는 지금 남도본사에서 도강사(都講師) 직무를 맡고있는 김 헌(金獻)선생에게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으로 의견을 맞추었다. 서일은 그의 위인됨을 알고있다.
김 헌(金獻)은 1868년 7월 5일생으로서 초명은 교헌(敎獻)이고 본관이 경주인바 名門巨族이였으며, 일찍이 18세때에 庭試文科 內科에 급제하였고, 그후 권지부정학(權支副政學), 예조참의(禮曹參議), 예문관검렬(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수찬(修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을 지내다가 36세에 나던 1903년에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을 지냈고 42세때인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奎章閣副提學)으로서 國朝寶鑑印委員 등을 력임하였으며 嘉善大夫까지 승진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倧理와 倧史를 연구하였다.
1912년에 倧經會에서 <<神誥講義>>, <<神理大全>>, <<會三經>>, <<神事記>>, <<朝天記>>, <<神歌集>> 등 간행을 주관하였고 1914년에는 <<神檀實記>>, <<神檀民史>>, <<檀奇古史>>등을 저술했거니와 종래의 사대주의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여 대종교리와 종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연박(淵博)한 학문으로 고거(考據)에도 권위가 있는 그는 韓國史에도 손꼽는 대가였다.
1914년에 尙敎로 陞秩하여 남도본사전리를 1년간 맡았던 김 헌은 지난해에 都講師로 된 것이다.
서일은 라철을 내놓고는 상교 김헌이야말로 도사교에 오를만한 적임자라 여기였기에 이번 天宮靈選式에 그가 뽑히기를 기대했다. 자신이 항일독립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 군사학연구에 몰두하고있거니와 교리에 대해서도 또한 남보다 연박한 지식을 갖고있음을 스스로 자인하면서도 종교직에 높이 오를 것을 바라는 서일이 아니였다. 누가 무엇을 맡던 그것이 잘되여가기만하면 대사필이라 여기였다.
사흘만인 음력 4월 13일에 남도본사에서는 天宮靈選式을 거행하였다. 라철주교를 따라서 이날의 행사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김헌과 최전 그리고 서일해서 모두 네사람이였다. 이 의식에서 大司敎 第二世의 大倧統을 김헌에게 전수함과 동시에 서일은 經閣의 特選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최전은 司敎로 초승(超陞)된 것이다.
라철 조교의 말대로면 이것은 신명(神命)을 묵승(黙承)하는것이였다.
《내 몇가지 간곡한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오. 우리 종문(倧門)의 뒤를 이을 이들은 항상 공경하여 한얼을 받들며 반드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이 교를 널리펴서 한님의 공덕을 빛내주시오.》
《어련히 그래야지요.》
김헌의 응대였다.
《그 업을 좇아서 사람의 벼리를 떨칠것이요 마음을 놓아서 아무나 속이지 말며 기운에 불려서 함부로 떠들지 말아야할것이요.》
《옳은 말씀입니다.》
최전역시 머리를 다소곳이 숙임으로써 귀담아 들음을 표시했다.
《나쁜 생각으로 정치에 덤비지 말며 못된 버릇으로 법률에 범하지 말아야하오.》
《그도 옳은 말씀인가봅니다만 문제는 정치나 법률이라는 것이 누구의 손에 장악되는가 하는겁니다.》
서일은 자기의 견해를 내비치였다. 계급사회라면 정치라는건 자연히 생기게 되는것이고 법률또한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인데 통치수단으로서의 그것은 사실 누구의 손에 장악되는가에 따라서 그 역할도 가치도 달라지는 것이다. “권력은 법률이 아니다”는 독일속담이 있는가 하면 “권력이 있는 곳에 법률이 있다”는 로씨야속담도 있다. 대포앞에서야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절박할 때면 법률도 신앙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서일은 잠간 숨을 드리긋고나서 자기생각을 피력했다.
《일본 죠슈군벌출신의 총독이였던 데라우찌를 보십시오. 그자는 “조선사람은 법을 지키던지 아니면 죽어야한다”면서 혹독한 무단정치를 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자의 폭언을 따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대로 따를 수야 없네만 내 말인즉은 못된 버릇으로 법률에 범해 스스로를 망쳐서는 아니된다 그 소리네. 교인들에게 가르쳐주게. 늘 잊지 않게끔 잘 가르쳐주게.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과 미혹에 가까이말고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즐지 말며 교도들을 믿고서 공론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구차한 것을 없수이 말라고말이네.》
《그리해야지. 명심해 그리해야지.》
《교육은 항상 필요한거요.》
김헌과 최전이 수긍하여 각각 태도를 표명했다.
《사람마다 안정으로써 몸을 닦으며 청직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로써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늘이고 자식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돈독하게 도와주고 안으로는 인지를 닦으며 밖으로는 신의로 사귀여야하는거네.》
라철은 이같이 말하고나서 계속하여 진실한 정성은 일찍 팔관(八關)의 재계가 있으며 두터운 풍속은 또한 구서(九誓)의 예식을 전하였고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물결(慾浪)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覺門)이 열림을 얻게 하라면서 이와같이 한다면 한울에서 복이 내릴것이요 만일 이를 어긴다면 되려 한얼께서 벌을 내릴것이니 조심하고 힘써야한다고했다. 보귀한 타이름이였다.
서일은 초면인 최전(崔顓)을 존경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형께서는 고향이 려주라지요. 약관시 순천 송광사에서 삭발하고 수도를 하셨다는 얘기를 제가 들은적있습니다.》
《그렇소. 나야 한때 중노릇을 했었지. 금암선사 나천여 문하의 고납(高衲)이 되어 경월당덕민(擎月堂德旻)이라는 호명을 받은거요.》
《어제 도사교님께서도 그러시고 저 손암대형(巽庵大兄)께서도 그리하시는 말씀이 을사년간에 도형께서도 그분들과 함께 유신회에 가담하셔 구국운동을 하셨답디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 시절 몸을 고향에 두고 그저 일개 훈장으로 애들에게 글이나 가르치는 정도였습니다. 선배님들의 업적을 따르려면 멀었지요.》
《거 웬 말을 그리하시오. 업적을 따르려면 멀었다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자체가 계몽이였으니 그게 바로 업적이 아닌가. 아우가 이미해온 일과 지금에 하고있는 사업들을 보오만 그 실적이야 누가 따르리오. 나이를 따지면야 글쎄 내가 선배라겠지만 아니되지.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잖소. 아우가 중광단을 세운 그 하나만 놓고 봅세. 그것은 우리 대교의 자랑이자 영광이 아니겠소. 우리한테는 자신의 부대가 있게 되었네. 력사에 이름을 남길 대종교부대가. 그것이 현실로 되어가거늘 대종교에 몸을 담근이 치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으며 자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그래 어디있겠소. 안그런가? 하하하!...》
최전은 스스로 흡족해하면서 파안대소를 하기까지 한다.
《중광단을 그같이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우가 하는 일이면 어쩐지 믿음이 생겨서 해보는 소리네. 우리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대담히 해내게.》
《격려의 말씀으로 줘서 고맙습니다. 의례 그래야지요.》
서일은 기분좋게 응대했다. 그러면서 대종교도들 앞에, 자기를 믿어주는 모든 동포들앞에서 낙언을 지켜내야 할 자신의 책임이 그 누구보다 무거움을 그는 다시한번 절실히 느끼였다.
서일은 天宮靈選式이 끝났어도 남도본사에서 대종교 지도급인물들과 하루를 더 함께 보내면서 장차 해나갈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연구했다. 라철은 안색이 퍽 밝아졌는데 보아하니 행사가 뜻대로 되어 마음이 놓이도록 흡족한 모양이다.
사흩날에 서일은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함흥에 있는 장인과 장모님을 보고 고향에도 들려야했다. 생부생모는 서일이 큰조부님을 모시고 만주로 가자 함흥에서 돌아와 제 땅을 지켜 거기에 남으신 작은할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다시금 시작한 것이다. 가담가담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여러해나 가보지 않아 자식된 직분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 또한 그지없었다. 왔던김에 꼭 들려봐야 했다.
라철은 장남 정경(正經)과 차남 정문(正紋)더러 서선생을 함흥까지 잘 모셔다드리거라고 시켰다. 라철의 셋째아들 역시 대종교인이였는데 이름이 정채(正綵)고 두형과 마찬가지로 參敎였다. 그는 아버지의 신변을 지키느라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곧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게 될 류근(柳瑾) 대형이 자기도 서일을 원산까지 바래다주리라면서 자진 따라나섰다. 서일은 자기보다 썩 년장자인 계세(季世)의 지사(志士)의 바램을 받으니 어쩐지 마치도 태풍에 큰산을 등진 것 같이 속이 든든해지는것이였다. 류근은 龍仁사람으로서 통재(通才)의 석학(碩學)이요 일찍 서일이 그처럼 애독했었던 “皇城新聞”의 主筆 또는 社長을 하다가 中央學校 校長을 지내기도 한 분이다. 그역시 庚戌國恥를 당하자 모든 직을 버리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교의 規制起草委員으로부터 本司典務와 檀祖事考 編纂委員으로 여직 사업을 계속해온 것이다.
《아우는 독립혁명은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 어떠한 청원이나 의회의 투쟁으로는 절대안될것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 육탄혈전만이 가능한것입니다.》
류근은 서일의 결기있는 대답을 듣고 보니 속이 개운한지라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는 어깨를 다독이며 련신말했다.
《옳은말일세! 옳은말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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