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도는 모택동이 죽으면 후계자로 선정된 림표가 순리롭게 권력을 계승하나 정치재능이 부족하기에 인차 주은래와 손잡게될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전문지식을 갖추고 잇는 주은래의 지지가 없이는 안되니까. 장국도는 주은래의 지도하에 일부 실력가들이 륙속 권력을 회복하여 국가를 챂으로 전진하게끔 떠밀것이라했다. <<歷史開卷有疑>>
1968년 10월 21일, 한번은 향항에 있는 보통민가에서 비밀방문이 진행되였다. 향항에 주재하고있는 미국령사관의 대륙사무책임자가 강직하게 생긴 로인과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있었는데 관원 둘과 한 정치분석가가 열심히 기록했다. 가끔가다 로인의 말을 끊고 몇마디 묻군하는데 록음기테프는 계속감기였다. 그 장면은 신비감을 던져주기도하는데 이 로인은 대체 누구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일가?
미국사람이 이같이 중히 여기는 이 로인은 복잡하고도 독특한 인생경력을 갖고있는데 지금사람들에게는 익숙할 수도 면목이 설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홍4방면군 악예환쏘베트구역의 최고수령이였거니와 또한 중공력사상 유명한 반역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한테는 한때 몸을 혁명에 바친 영웅적인 인생이 잇는가 하면 또한 모든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반역적인 인생도 있는것이다. 늘그막의 처지가 하도 처량하게 되었기에 사람들을 탄식하게 하는 그가 바로 장국도(張國燾)였던것이다.
장국도는 어떻게 되어 향항에 있게되였는가? 또 어찌하여 미국측과 관계를 갖게되였는가? 그가 이번에 취재를 받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가?
1938년, 섬감녕변구의 부주석이였던 장국도는 황제릉을 찾아가 제를 지내는 기회에 서안으로 도망쳤고 그걸음에 무한에 가서 국민당에 빌붙었던것이다. 그때로부터 혁명을 배반한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리용가치가 그닥없었기에 군통은 그를 집어던져버렸다. 하여 장국도는 국민당관리사회에 떠돌면서 한때 이름뿐인 "설계원" 따위의 보잘나위없는 직무ㅡ를 지내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종시 우울함을 면할 수 없었다. 새중국이 성립되자 장국도는 대만에 갓다. 하지만 후에는 떨돌이하기가 지겨우니 향항에 가 자리잡은것이다. 향항에서 장국도는 고맹여(顧孟余), 리미진(李微塵)이 꾸리는 <<중국의 소리>>에 들어갓다가 얼머있지도 못하고 경제불경기로 인하여 나오고야말았던것이다. 그후 장국도는 황금장사를 해보았지만 그것도 되지 않아 미찌기만했다. 게다가 처가 허리뼈가 부러지는 화까지 당하고 보니 곤난이 극에 달했던것이다. 장국도가 이같이 생황의 질곡에 빠져 헤매치고있을 때 미국의 인구기구에서 그를 찾아간것이다. 장국도가 장기간 중국공산당에서 주요한 책임을 맡고있었으니 그가 자신이 격고 지내온 그 단락의 력사를 회고하여 총결한다면 상당한 연구가치가 잇을것 같이 여겼던것이다. 하여 1961년에 미국 칸사스대학명인연구쎈터에서 한 연구원이 장국도를 찾아와 그보고 원고료로 명인쎈터에서 매월 향항돈 200원씩 지불할테니 회억록을 써내라고 약속한것이다.
1966년에 향항의 <<明報月刊>>은 그가 쓴 회억록의 판권을 사들이였다. 하여 그 글은 <<나의 회억>>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련재되였고 후에는 한데묶어서 출판했다. 명인쎈터의 위탁을 받고 회억록을 쓰면서부터 장국도는 미국정부의 주의를 일으켰다. 미국정부로 놓고 보면 장국도가 일찍이 정치중심을 떠났고 지어는 정치를 탈리했다고 볼수 있지만 그는 신분이 특수하길래 중국공산당조기의 력사에 대한 료해가 매우깊거니와 중국조기의 정책이 집행된 정황에 대해서 아주 익숙할것이다. 뿐만아니라 그가 장기간 중공의 지도자들과 교제하였기에 그들의 성격을 잘알고있을것이였다. 하기에 장국도가 그것을 제공해준다면 미국이 중국대륙의 정치국세를 료해함에 참고할 가치가 있는것이다. 하여 미국은 20세기 60년대부터 장국도를 찾아 중국대륙의 시사정치를 분석했던것이다.
1966년에 "문혁"이 폭발했다. 그후부터 10년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령사관의 외교인원은 장국도를 방문하기시작했다. 그러다 장국도가 향항에 있지 못하고 곧 떠나게 되니 미국방면의 상관인원들은 그를 다시금 방문하여 그가 "문혁"에 대해서 분석판단하게했던것이다. 미국정부비밀문건(1968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령사관이 대만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과 도꾜에 주재하는 미국대사관에 넘겨 정부밀금문건으로 된 항공문건, 항건호 A―819. 편호 POL 1―3 HK/IVR S/S-053-. "解密檔案參考系統")에 보면 채방때 장국도는 자기의 견해를 털어놓았는데 정황을 잊은 부분도 잇고 모욕적인 언사를 쓴데도있지만 어떤 추정은 매우 선견지명이있는것이다.
특히 미국측에서 박절히 알려고하는 모택동이 "문혁"을 발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와 그것이 일후에 어떻게 번지게 될 것인가 하는 예측에 대해서 장국도는 자기분석을 한 것이다. 그는 모택동이 "문혁"을 발동하게 된 것은 두가지고려가 잇었기 때문이라면서 하나는 철학면의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권력면의 사고였는데 주요하게는 전자라했다. 모택동을 대함에 있어서 장국도는 복잡한 심정이였다. 두 사람은 일찍이 5.4운동시기부터 서로알게되여 함게 중공1차대회에 참가한것이고 그 후에는 장기간 쏘베트구역의 중임을 떼여맡고 사업한것이다. 두사람은 몇십년전 장정의 간고한 시련도 겪었다. 어젯날의 동지였던 모택동에 대해서 장국도는 그가 초인간적인 매력과 정치능력을 갖고있지만 농민식의 사회주의자라했다. 농민식의 사회주의자이기에 모택동은 평등에 대한 일조의 갈망이 크고 자기가 세우는 정권에 그것이 이루어지지않고 심지어 그반면의 추세로 돌아질 때에는 시간이 갈수록 박절감을 더 느끼고 비상적인 격렬한 행동으로서 그 목적을 이루려한다면서 모택동이 바로 "문혁"을 일으킨 원인이 "수정주의를 방지"방지하기 위해서라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문혁"을 일으켜 비록 류소기, 등소평을 내리떨구기는 했지만 방식을 좀 다르게 할 뿐 투재은 의연히 존재할것이라했다. 모택동은 "문혁"을 통해 최고권력을 보유했지만 주요목적을 이루지 못한것이라했다. 장국도는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모택동은 "문혁"의 우수한 책략대사이긴해도 전략가는 아닌것이다. 그는 초월성적인 주제를 구비하여 그것을 수립할 수 없거니와 끝까지 관철할 수도 없는것이다. "문혁"당중에 모택동은 늘 정책과 책략사이에 왓다갓다 흔들리는데 그는 늘 하나의 계획으로 목표를 이루려고 시도하면서 동시에 늘 어떤 정서의 영향을 받아 모험적이고도 희극적인 행동을 채취하는 것이다. 장국도는 미국사람에게 알려주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의연히 최고권력을 잡기는하지만 그가 전면적으로 틀어쥐겠는지는 의심이 간다면서 혹은 림표는 아니더라도 다른사람이 그를 기만하는 일이 있으리라했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계속 "혁명"의 길을 걸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효과를 잃을것이고 처은에 설계햇던 목표를 이루지도 못할것이라했다. 미국사람들이 몹시 료해하고싶어하는 모택동의 후계자 림표에 대해서 장국도는 수완이 있고 야심이 발발한 그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으며 함께 사업하기 어려울것이라했다. 림표가 후계자로 뽑히게 된 것이 주요하게는 그가 모택동의 오랜부하로서 오래동안 그한테 충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림표는 모ㅓ택동과 같은 매력과 정치상 천부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것이다. 림표가 만일 등극하게 되면 수선먼저 군사방면과 군대의 리익부터 돌보자고 할 것이라고 장극도는 추측하면서 소화, 양성무, 라서경을 보호하지 못한 사실을 말했다. 림표는 정치세력이 든든치못하고 군대의 힘이 쇠약했길래 그런 사람들이 "문화대혁명"이 발동되자 분분히 타도되엿다는 것이다. 장국도의 눈에는 그들 다가 림표를 지지하는 자로 보였던것이다. 장국도는 림표의 권력이 좀 약하기는 했지만 "문혁"이 발동된 첫 두해사이 군대의 작용을 보면 모택동이 국면을 온정시켜보자던 처음의 의도를 춸씬 초과한것이라했다. 군대의 지지로 하여 모택동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타도하기 매우 어렵게되엿던것이다. 그렇다고 모택동이 군대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어 예기했던 이르자는것은 그야말로 이루기 어려운 일이라고 장국도는 말했다. 그런것들을 내놓고 미국사람들은 또한 "문혁"시기 중국대륙의 내정외교가 어느쪽으로 갈 것인가, 특히는 문혁위원회와 같은 그런 새형의 조직에 대해서 매우흥미를 가졌던것이다. 장국도는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혁명위원회는 우점을 더 갖고있다면서 그것은 바로 단일한 실체인 혁명위원회를 통해 당과 정부가 갈라지는 현상을 피면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모종의 정도에서 혁명위원회가 그러한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장국도는 이 조직이 장기적으로 가동되여 효력을 낼지는 모르겠다면서 의심했다. 그것은 당조직을 다시금 건설해서 혁명위원회에 하나의 핵심을 제공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국도는 모택동이 당조직을 다시금 건설하자면 더욱히는 이전에 당무를 주관해 온 사람에게 이뢰해야 하는데 이를 테면 진운(陳云)과 같은 사람이라했다. 허나 장국도는 이같이 새로 건설한다는것은 매우 성공하기 어려운일이라는거다.그것은 모택동이 "문혁"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가봐 근심하기때문이였다. 따라서 그가 찾아낸 그 "문혁"이후에 일어난 "신선한 혈액"은 당이 수요하는 은정과 지도자를 제공하기 힘든것이다. 사실이 이러했기에 장국도는 "문혁"기간에는 당조직이 의연히 혼란한 상태에 빠져서 이전처럼 규률성과 권위성을 갖추기는 상당히 어려울것이라 추측했다. "문혁"시기 중국대륙의 외교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해서 장국도는 홍색중국이 확장을 기도하리라고 너무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했다. 그것은 "문혁"이래 모택동의 외교책략은 줄곧 계속되고있는바 그 례를 들면 쏘련에서 체코스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 중국은 쏘련이 사회주의국의 명성을 대단히 나쁘게 만들었다고 견책한것 같은 것이다. 목전 국내의 인소가 국외의 인소보다 현저히 크기는 하지만 모택동이나 기타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제관계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있는 것이다. 지금은 외교사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것이다. 지어 중쏘모순과 월남눈제마저 옆에다 밀어놓는것이다. 때문에 장국도는 기타의 국가, 더욱히는 서방국가와 거래할 시에는 모택동이 채취하는 것이 일종의 실용주의방법이라면서 례를들것 같으면 독일련방공화국에 관신을 돌리는 것 같은것이라했다. 그것은 그 나라가 쏘련을 반대할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수요하는 자원을 갖고있으며 또한 물자를 겅급해주기도하기 때문인 것이다. 독일련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영국, 불란서같은 나라들도 중국과 우호적인 무역관계를 맺으려하는 것이다. 중국이 다시는 정치기후같은건 고려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사람이 관심하는 "문혁"의 추세, 특히는 모택동이 일단 죽게되면 중국의 정치국세는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장국도가 굳게믿고잇었다. 즉 모택동이 죽으면 림표가 순리롭게 권력을 이어받으리라는 것, 하지만 림표는 전치재능이 모자라기에 주은래와 좋게 손잡게 되리라는 것, 그렇게 하여야만 그의 손을 빌어 나라를 다스릴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장국도는 중국에서는 주은래가 매우좋은 관리자라면서 그는 리부춘, 리선념 등과 함께 국가사무를 잘 관리해낼것이라면서 주은래가 끄당기는대로 실력자들이 륙속 권력을 잡고는 국가를 발전시킬것이라고 단언했다. 장국도는 그와 동시에 이때에 이르러서는 "문혁"단체란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며 "문혁"에서 바라ㅗㄹ라가 지위가 높아진 "계승자"와 반란재간을 부렸던 조직자들은 실제상 사업능력이 퍽 모자라기에 되려 부담거리로 되어버릴것이라 했다.
장국도는 더욱 대담스레 예측했는데 그것은 모택동이 살았을적에 그의 신변에서 감싸고 돌던 격진파들인 모택동의 처 강청과 진백달, 강생 등은 재빨리 지위를 잃음과 함께 정치영향을 잃고말것이라 했다. 장국도의 눈에 강생은 범속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책과 경제를 통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장국도는 그같은 격진적인 현임지도자들이 세력을 잃은 후이며 중국정치국세에는 가능하게 "林 ←→ 周"합작형식이 나타나 국가의 평온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면서 실력가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시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국도는 말했다. 타도되였던 일부 사람에 대해서도 례를 들면 류소기, 등소평 등등도 기회를 타 다시금 오를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자면 그들처럼 경험이 있고 조직능력이 있는 사람이 잇어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국도의 분석을 다 들은 후 향항에 주재하는 미국총령사관의 관원은 흡족해하면서 돌라갓다. 며칠 후, 이번의 방문담화기록을 정리하여 대만에 주재하는 미국의 대북 "대사관"과 동경에 주재하는 대사관에 보내였으며 그런후에는 미국국내의 유관부문에도 보냈다.
방문전에 장국도부부는 이미 향항을 떠나기로 작정했던것이다. 1968년은 시끄러운 일이 빈번한 해였다. 그해의 5월에 불란서에서 "5월폭풍"이 폭발했고 금방지내보낸 1967년의 "67폭픙"에 향항은 의연히 인심이 황황하면서 세상물정이 흉흉했던것이다. 중국공산당의 반역자몸이였던 장국도는 의심스러운 폭풍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멀리 카나다에 이민으로 간 큰아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카나다의 토론토에서 큰아들과 함께 얼마간을 지낸 장국도는 아들이 경제상 부모를 부양하기 어려워함을 알고는 카나다의 무료료양원에 들어갔다.1976년도의 어느하루 79세에 이른 장국도는 돌연스레 중풍에 걸려 그만 반신불수로 되고말았다. 하여 그는 토론토교외에 있는 로인병원으로 들어간것인데 병원은 환경이 매우좋지 않았다. 의사와 호사가 적어서 병자가 즉시 간호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7,8평방밖에 안되는 협착한 병실에 장국도혼자면 몰라도 다른 한 외국로인과 같이 들어 아주 탐탐했다. 겨울이 돌아왔다. 토론토의 밤에 찬바람이 매짜게 몰아쳤다. 병원은 난방시스템이 제대로되지 않아서 말이 아니였다. 장국도는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구토를 하면서도 자기가 갖고간 탄자로 얼어드는 몸을 감는수밖에 없었다.
1979년 12월 12월 2일, 82세고령에 이른 장국도는 얼어드는 몸에 겨우겨우 초인종을 눌렀다. 하건만 호사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이틑날 새벽 5시에 장국도는 갑작스레 두시간이나 심한 구토를 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인사불성이 되고말았다. 기다리던 호사와 의사가 왓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랬다. 그가 종말을 예측하기 어려워했던 중국대륙의 "문화대혁명"은 3년전에 이미 끝났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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