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http://www.zoglo.net/blog/jinsongzhu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631 ]

591    위대한 분의 걸작 (2) 댓글:  조회:3276  추천:1  2015-10-20
                                                                     위대한 분의 걸작 (2)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중국의 혁명은 모택동이 혼자한게 아니다.  수없이 많고많은 혁명간부들을 잡아 먹은 불악귀는 누구였는가?                                                                                                                                                                                                         
590    위대한 분의 걸작 (1) 댓글:  조회:2513  추천:2  2015-10-20
                                                                위대한 분의 걸작 (1)                                                                                                                                                                                                                                                                                                                                                                                                                                                                                                                                                                                                                                                                                                                                                                                                                         아래사진. 소설로 인해 반당분자로 몰려 투쟁받은 신진핑의 아버지 습중훈                                     국가 간부로 되어 사업을 열심히들 했는데 꼬깔모자쓰고 개패차고 무쟁받아야 할 리유가 뭣이였는가? 망할 놈의 세상. 
589    모택동의 비극(4) 댓글:  조회:2841  추천:1  2015-10-20
                                               모택동의 비극(4)                                                             김  송  죽   1966년5월29일,청화대학부속중학의 학생들은 비밀리에 이라는 조직을 성립했다. 그리고서는 6~7월간에 그들은 등 3편의 대자보를 만들어냈다. 내용인즉은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였다. 8월1일, 모택동은 편지로 자기는 청화부속중학의 홍위병들을 지지한다고 알리였다. 그 소식이 나가자 북경의 각 학교들에서 학생들이 앞다투어 “홍위병”을 조직했던 것이다. 8월 18일, 모택동이 천안문성루에 올라 홍위병들을 검열 한 후부터 북경의 홍위병조직과 같은것이 재빨리 전국에 퍼졌다. 하여 그것은 “문혁”의 중요한 정치력량으로 되었거니와 “문혁”이 악성스레 “좌적”으로 파도치게 만든 장본인이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조직의 제일 고약스런 파괴가 “혁명”이라는 깃발을 내들고 민족문화를 소탕한 그것이다.   1966년6월1일, 는 전국에다 는 사론을 발표했다. 사론은 전국인민에게 “착취계급이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인민들을 해친 낡은사상, 낡은문화, 낡은풍속, 낡은습관을 철저히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모든 요물잡귀신을 쓸어버리자”와 “퍼쓰쥬”가 “문혁”초기의 중요한 구호로 되었던 것이다.   그 시대를 겪어본 사람이면 다가 알다싶이 문혁(文革)이란건 그를 발기한 자가 불민함으로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것이 중화의 문명에 해를 끼친것을 보면 너무나도 한심하고 혹심해서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그때 공자(孔子)를 비롯한 허다한 선인(先人)의 능묘(陵墓)들이 정도부동하게 털리우고 파궤되였거니와 문물은 대량으로 훼손되였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중국은 제민족의 고유한 경천법조(敬天法祖)의 문화전통을 제절로 부정하고 제손으로 구중천에 내던져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한심한 바보짓이였다!   문화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검열과 지지를 받은 북경의 홍위병들은 샤딩줴신(下定決心)을 부르짖으면서 기차로 산동에 가 공자묘부터 뢰관(雷管)으로 부셔버렸다.   산동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삼공(三孔)"이라 부르는데 공묘(孔廟)는 제를 지내는 곳이고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의 가족묘지가 있는 곳이고 공부(孔府)는 세습적인 연성공(衍聖公) 즉 서한(西漢)때로부터 공자의 처가편의 후예가 거주하는 곳인바 중국에서는 명나라때와 청나라때에 황궁못지 않게 대량의 력사당안과 문물이 보존돼있었다. 그런것이 퍼쓰쥬(破四舊)바람에 맨먼저 파괴되고 도적을 맞아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1966년 8월 23일, 곡부현정부는 외지의 홍위병들이 곧 들이닥치리라는 소식을  접하게되였다. 그러자 곡부제1중학교에서는 "시급히 동원하여 일체 계급적들의 파괴활동을 방지하자!"는 프랑카트를 만들어 교문에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농민들도 신속히 모여와 공부의 문을 지켰다. 미처 붉은완장을 만들어 팔에 낄 새도 없었던 그들은 그저 붉은 천오리에 "빈하중농"이라는 네글자를 써서 앞가슴에 달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분노했다. 홍위병들이 이제 삼공(三孔)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집집의 나무상자들을 거두어 그것으로 삼공(三孔)입구에 있는 돌사자를 가리웠다. 그래놓고는 모택동의 상을 들어다 그앞에 놓고서는 표어를 내걸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그같은 노력은 공자를 반격하는 노조(怒潮)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무기력했던 것이다.   1966년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이였던 진백달(陳伯達)은 북경에서 전보로 "공묘, 공부, 공림을 태우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했던 것이다.   같은날, 중앙문혁소조성원이였던 척본우(戚本禹)는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는 "명대이전의 석패들은 남기고 청대의 석패들은 부수어도 된다.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상방보검(上方寶劍)이라 그같이 상급에서 특허한 권력이 있는지라 북경에서 간 홍위병들은 담이 커질대로 커졌다.   11월 13일에 그들은 공부(孔府)의 대문을 활 열어 제끼였다. 그러고나서 하루지나 15일날에는 대문앞에서 "공가점을 철저히 짓부셔버리는 선서대회"를 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패를 나누어 공묘(孔廟), 공림(孔林), 주공묘(周公廟)에 뛰여들어 비(碑)를 마구까부시고 편액들을 뜯어내리고 조각상들을 뚜드려마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세 흉흉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신주를 모신 감실에 뛰여든 홍위병들은 땅에 떨어진 성현의 머리를 뽈차듯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면서 좋다고 웃으면 서 고와댔다. 이와 동시에 홍위병이 당지의 농민들가운데서 뽑아낸, 손에다 곡괭이와 삽을 든 자들로 무어진 한무리의 "쪼판패"는  공자(孔子), 공리(孔鯉), 공급(孔伋) 조손삼대의 모를 파헤치는 작업을 동시에 벌렸던 것이다.   11월19일, 거대하고 무거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비(碑)를 끌어 엎어뜨리고는 그것을 두동강으로 만들어버렸다. 혁명적인 꼬마맹장들은 그래놓고나서 뢰관(雷管)과 작약으로 공자의 모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막지 포악한 행위였다.  "혁명"이니라 는 패쪽을 내들고 저지른 천추에 용납못할 죄악이였다.   홍위병들은 그렇게 한 후 공림에서 다섯구의 시체를 끄집어냈으니 그것은 75대 적손(嫡孫) 공상가(孔祥珂)와 그의 부인, 76대 적손(嫡孫) 공령이(孔令貽)와 그의 처 외 하나였다. 시체를 꺼내보니 그때까지도 별 손상없이 거의 완정하게 보존돼있은 것이였다. 그런것을 홍위병들은 쇠꽉지로 찍어서 모양없이 만들었거니와 파낸 시체를 그 자리에다 대엿새를 내쳐두었다가 그냥보기사 싫었던지 공림의 동남쪽에 있는 흙구덩이에 가져다 처넣고는 불에 태워버린것이다.   홍위병들이 그같이 모를 파헤친 후 혁명적인 촌민들은 발광적으로 모안에 있은 순장품들을 도둑질해갔다. 그때 밤에 뜨락또르로 모들을 밀어버렸는데 그번 도둑질에 부자가 된 자가 적지 않다는 설이 지금도 나돌고있다.   2천년넘도록 보존되여 내려오던 근 3,000여무에 달하는 공씨가족의 모들은 이렇게 거덜이나고 만 것이다. 말대 연성공(衍聖公)인 공덕성(孔德成)은 공령이(孔令貽)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면서 거의 강박하다싶히 데리고갔다. 그는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륙을 그렇게 떠나간 그가 생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한번도 조상께 제를 지내지 못했거니와 대륙에서는 조상의 모와 시체들이 다 그모양으로 형편없이 만들어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랬은즉 숨이 지는 시각까지 그는 그 모욕과 치욕을 어떻게 참고 받아냈을가?    당년에 혁명자가 퍼쓰쥬(破四舊)를 하고 리쓰신(立四新)을 해야한다면서 철없는 홍위병들을 추기여 저지른 천추에 용남못할 그 죄악들이 이제는 력사에 꼭 기재될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같은 사실들이 많고많지만 나는 다른건 더 말하지 않겠다. "대륙에서 줄기차게 문화대혁명을 하느라 할 때에 대만성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중화문화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1966년 11월에 손중산(孫中山)의 아들 손과(孫科)와 공자의 적손(嫡孫)  공덕성(孔德成) 등이 련명으로 발기한 것이였는데 포괄된 내용은 "대량의 고적(古籍)들을 정리하고, 중국력대의 충효인물(忠孝人物)과 문선들을 편찬인쇄하며, 중국과학기술사총서를 편역하며, 중국인문(中國人文) 및 사회과학총서를 편찬한다" 는 것이였다.                                   (참고자료: )   그리고 장개석은 생전에 미국이 세 번이나 대륙에다 원자탄을 던지자는것을 그러면 절대안된다고 막았다. 그런다면 자기는 민족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였다. "文革"기간에도 그는 쏘련에서 같이 손잡고 대륙을 치자는 제의역시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일축해버렸던 것이다.                             (참고자료 : 文革時將開石拒絶蘇聯帮助反共大陸)                              
588    모택동의 비극(3) 댓글:  조회:2293  추천:0  2015-10-20
                            모택동의 비극(3)                                                             김  송  죽     영명하다는 분이  “계급투쟁을 베리로 해야 한다”는 지시는 사회주의사업을 파괴했을 뿐이다.       1966년5월7일, 모택동은 림표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군대는 응당 대학교가 돼야 하는바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 문화를 배울뿐만 아니라 농부업생산에 참가하고 자그마한 공장도 세워서 자기가 쓸 물품을 만들고 국가와 교환할만한 상품도 생산해야 하거니와 또한 군중공작에도 종사해야 하고 때때로 자산계급을 비판하는 문화혁명투쟁에도 참가해야 한다. 공인역시 이같이 작업을 위주로 하면서 겸하여 군사, 정치, 문화를 배우고 자산계급을 비판하는데 참가해야 하는바 조건이 허락된다면 역시 부업생산에 종사해야 한다. 농민은 농사를 위주로 하면서 림,목,부,어업(林,牧,副 ,漁)을 해야 하거니와 겸하여 군사, 정치, 문화를 배워야 한다. 조건이 허락되면 집체에서 자그마한 공장도 꾸리면서 자산계급을 비판해야 한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학업을 위주로 하면서 겸하여 공, 농, 군사를 배우고 자산계급도 비판해야 한다. 상업, 복무항업, 당정기관인원은 조건이 허락면 역시 그같이해야 한다.      이것은 “문혁”기간에 내린 유명한 “57지시”다.                                    모택동은 이 편지에서 림표가 중앙에다 전할 것이며 월내에 전문을 전당에 전달해야한다고 했다. 전달 통지에 이르기를 “모택동 동지께서 림표동지에게 쓴 이 편지는 역사의의가 있는 매우 중요한 문헌인바 이는 맑스 레닌주의 시대에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문헌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해의 8월1일, 즉 1966년 8계11중 전회의가 열리는 당날로  는 는 사론을 내여 이 편지의 기본정신을 전국에 공포했던 것이다. 사론은 “모택동 동지께서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각종경험을 총결하고, 10월혁명이래의 국제무산계급과 무산계급전정의 여러 가지 경험, 특히는 소련 흐루쇼브수정주의집단의 자본주의복벽을 연구한 것으로써 “모택동동지는 우리나라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각종 경험을 연구하고 총결했으며 10월혁명이래의 무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각종경험 특히는 소련 흐르쇼브수정주의집단이 자본주의 복벽을 실행한 엄중한 교훈과 자본주의복벽을 여하히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창조성적인, 무산계급전정을 공고히 하면서 점차 공산주의로 과도하는 문제를 보정하는 과학적인 답안을 내린 것이다.”    모택동의 승인을 받았다는 이 사론은 바로 그가 정치의 힘으로 계급투쟁을 강화하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표명하거니와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공산주의리상을 실현하는 모드(模式)로 삼았음을 알려준 것이다.       사론이 발표된 후 “각행각업은 붉디붉은 모택동사상대학을 꾸리자”는 구호를 전국에 울리였다. 이 구호에 따라서 농장, 학교, 간부학교들에서는 “5.7”상표를 달고 “5.7”의 길로 걷는것이 유행되었던 것이다.     “수정주의방지”, 이는 모택동이 “문혁”을 발동한 기본 사상이거니와 당내에서 류소기,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를 대처하는 의념이였던 것이다. 모(毛)의 이같은 착오적인 작법이 나오게 된 기본원인을 보면 그가 류소기, 등소평 등과 사회주의건설사업에서 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잘 알려진 모택동의 “5.7지시”는 류소기와 등소평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상적인 모델과는 달랐던 거다.      새중국이 건립된 후 경제문화가 락후한 중국을 여하히 리상적인 공정, 평등, 순결한 사회주의로 건설하여 사회의 각종 차별과 불평등한 현상을 재빨리 소멸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택동이 지속적으로 추구한 목표였던 것이다. 그 목표는 틀리지 않은 것이였다. 그러나 1958년후부터 이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놓고 그는 일련의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구상을 내놨는데 그것들은 맹목적으로 노동강도를 높혀 생산력을 고속도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였거니와 생산관계를 변화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려했으니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였다. 게다가 더욱 더 엄중한 것은 팽덕회(彭德怀), 장문천(张闻天) 등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은 당내 고급간부들을 일률로 “우경”으로 몰면서 경솔히 배척했거니와 지어는 전 당내에다 “반우경기회주의운동”까지 벌렸기에 더욱더 큰 착오와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리하여 3년간 경제곤난과 엄중한 재해를 빚어냈으니 그것은 그의 생각이 실패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하여 당중앙은 부득불 실천중에서 새로운 길을 더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 자신의 구체적인 사업중에서의 착오를 인정하고 그것을 규정하는라 했지만 “대약진”이라는 그 사회주의경제건설 모드(模式)는 버리려 하지 않았기에 그 자신과 중앙집체령도지간에 심각한 의견분기가 있게되였던 것이다. 그 분기는 우선먼저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인식에서 표현되였다.       대약진이 방금 시작되여서는 류소기 등 여럿이 그것을 동의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1961년도에 류소기가 농촌의 실제형편을 보고나서는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하여 그는 1962년 7천명대회때 지난 3년간의 재해는 “3이 자연재해고 7은 인재(人災)”라고 퉁명스럽게 까밝혀놓았던 것이다.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써올린 만언서에 밝혀놓은 구체적인 사실들도 실제와 맞아떨어진 것이였다. 그는 차라리 인민공사는 꾸리지 말아야 좋았을 것이라 했다.    이들의 견해는 자연히 모택동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였다. 하기에 모택동은 그들의 의견들을 받아주기는 커녕 되려 그들을 우경착오를 범했다고 질타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성근한 전우들을 그같이 적대시했으니 비극일 수밖에!                                                             본문 자료참고 : 胡乔木:《胡乔木文集》                                                                                李   锐:《毛泽东的晚年悲剧》    
587    모택동의 비극(2) 댓글:  조회:2932  추천:0  2015-10-20
                                             모택동의 비극(2)                                                          김  송  죽      1958년 3월, 모택동은 성도회의 때 개인숭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숭배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맑스, 엥겔스, 레닌, 스딸린의 정확한 것이니 우리는 반드시 숭배해야 하거니와 해도 영원히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가 그들의 손에 쥐여있는데 왜서 숭배하지 않겠는가?.... 다른한가지는 틀리는 숭배다. 분석도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된다.                                        江西人民出版社                 재미있는 것은 한때 모택동 본신이 당내에 가능하게 개인숭배가 생기리라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의 위해성을 방지하느라 조치를 댄 그것이다. 연안시기였는데 건국전야에 열린 중공 제7계 2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원은 다가 리자성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한가지 문제를 제의했는데 그것인즉은 어느 지도급 당원이건 보통당원이건간에 무릇 공산당원이면 다가 생일을 번다하게 차리지 말아야 하고 개인의 명의로 지명이거나 거리의 이름을 짖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1956년 중공 8차대회 때 등소평도 당장수개보고를 하면서 엄숙하게 개인숭배문제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 보고에 보면 “개인숭배는 일종의 장원한 역사적인 사회현상으로서 이런 현상이 우리 당내의 생활에서나 사회활동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 할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그는 “이따위 개인숭배현상이 우리 당내에서 발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혁”기간에 이르러서는 대체 어떻게 됐는가? 1970년에 모택동은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와 담화 할 때 “개인숭배가 좀 있어야 한다.”면서 연안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 당시는 내가 개인 숭배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을 지내면서 나는 사실 개인 숭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꼇다.”    그렇다면 모택동이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제창하지는 않았겠는가고 의문을 갖겠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문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믿을만한 집약된 론술이 하나 있으니답변이 될것 같다.      “이 도리는 기실 그렇게 심오한게 아니다. 그 어느 령수건 잘못된 정책을 내놓음으로 하여 그것이 실천을 통해 쓸모없는 재난으로 판명된다면 자기는 필경 다른 지도자들의 저항과 반항에 맏다들게 되여 그 결과는 비참하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자기의 방향은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는데 그러자면 오직 권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길래 개인숭배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권한은 숭배의 무계와 정비례인 것이다. ”                                 (席宣:토론)      모택동사상이란 본래 전당의 지혜를 한데모아 묶어놓은 것이지 그 혼자만의 발명도 창조도 아닌 것이다. 그렇건만 “문화혁명”이 일어나서는 그것이 그이 한몸에 집중되면서 고봉에 올랐으니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해 질 지경 란잡했던 것이다. 우선 개인숭배가 만강의 열의를 갖고 하늘로 하늘로 끝없이 치달아옳랐으니 말이 아니였다. 그 무슨 “만물의 성장은 태양에 의지한다”느니 “그의 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느니 뭐니 하면서 춤을 춰도 “충성무”를 추고 “아침에는 청시, 저녁에는 회보”니 하여 꼭마치도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를 점령했던, 내가 어려서 내 눈으로 친히 본, 일본이 망할 직전에 백성들에게 까지 “궁성요배”를 하게끔 강요했던 모양으로 집집마다 때가 되면 상을 차려놓고도 감히 먹지 못하고 먼저 모택동사진이나 화상앞에 마주서서 빨간비닐뚜껑을 씌운 자그마한 “붉은보서”를 쥔 손을 가슴에 짚고는 어록을 뇌이는 따위의 짓거리를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누구나 다가 앞가슴에 모택동의 배지(像章)를 달아야했고 노래를 불러도 “따하이 항싱 코퉈숴”니 아니면 “그대의 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느니 어쩐다는지를 불렀러야했던 것이다......                                   “문화 대혁명”기간에 가장 돌출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으로서는 마음맞는 혁명자 반란자들끼리 한동아리가 되어서는 그 므슨 이니 이니 이니 뭐니 하는 가지가지 혁명단체를 만들어서 앞다투어 탈권을 하느라 법석거린 것이였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놀아댄 흉맹스런 작태였다. 그들은 다가 자신을 “억만인민 맘속의 붉디붉은 태양” 모주석을 생명으로 보호한다고 맹세했다. 그랬으니 원래의 집권자들은 마음속으로 그전같이 의연히 당에 충성하고 수령을 믿으면서 인민대중을 위해, 집체를 위해 열심히 지방건설에 몸을 다 바쳐왓건만도 꿈결에 날벼락맞듯이 눈깝작새에 혁명대상이 되어서 곡경을 치뤄야했다. 그들 전부가 아무런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채 뚜드려 맞으면서 무단적인 제재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역시 문화대혁명때 발생한 일인데 례를 하만 들겠다. 내가 반생을 지낸 저 북방ㅡ 송화강건너의 한 조선족공사의 반란파 혁명자들은 당지ㅡ 전 공사내의 간부들을 끌어내다가는 공사위원회 앞마당에 둥그런 원형이 되게 줄을 세워 허리를 90도 되게 굽히게 하고서는 교육을 한다느니 징계한다느니 하면서 젊은놈들이 그우에 올라서 돌아가며 등을 밟아놓는 놀음을 놀앗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을 “무산계급혁명”이라 했다. 손을 대여 육체를 잔페로 만드는 짓을 락으로 삼은 것이다. 그야말로 수양없이 돼먹은 무지막지한 자식들만이 할 수 있는 막짓이였다. 내가 본건데 한사람은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한쪽귀가 쭈그러져 병신이 된 것이였다. 1984년도 11월 함강지구조선어문연구회성립회의 일 때문에 거기에 갔더랬는데 그 공사에서 당위서기를 지냈던 안○○로인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락루했다.    돌이켜 보면 “쪼판패”라는 것이 기실은 다가 “무산계급혁명”이라느니 “모택동의 전사”라느니 뭐니 구실을 대고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 구호를 웨치면서 제멋대로 제배짱대로 놀아댄 불법의 조직이였던바 그 성질은 폭도(暴徒)와 조금도 다름없었다. 철없이 무지했던 그들은 의 것이면 덮놓고 그것은 구절두절 다가 “최고지침”이라느니 “진리”라느니 하면서 대규모적인 “군중반란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에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모택동식의 혁명이였다.       지금에 와 보면 그때는 폭력적인 “혁명파”에 의해 국민 거의가 인권마저 박탈당함으로 하여 개인의 사유같은건 표달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까딱하면 끄떡하는 판이라 감히..... 어디에선가는 19살나는 중학생이 강청과 림표를 욕했다가 아버지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계급투쟁”이라느니 뭐라느니 그같이 자칮하면 걸려들고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판이라 맹목적인 억지숭배로라도 우선 내 목숨은 내가 살리고 봐야했던 무서운 시절이였다. 거기에다 선줄을 끌고 부채질하면서 우두머리짓을 한 악한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른자들이 아니라 모택동이 숨을 거두고 저세상에 가버리자 인차붙잡혀나와 끝장을 보고야 만 “4인무리”였다. 그자들은 모택동이 길러낸 한무리의 교활하고도 흉악스러운 앞잡이 개들이였던 것이다,      그런 앞잡이 개들이 거의 발광적으로 “개인숭배”열조를 일으켜 모택동을 하늘높이 쳐올려 세상에 더없는 대구성(大救星)으로 떠받들게끔 만든 것이다. 그통에 모택동은 되려 대구성은 커녕 소구성(小救星)도 못되는 멍청스런 바보독재자 폭군으로 변해버리게 만들고 만 것이다.   수천년의 문명고국이라 자랑해온 중국이 문명시대에 격은 진짜비극이였다!            모택동 그가 발동한 "문화대혁명"이 어떠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세인이 이미 다 알고있는 일이기에 구구히 더 말하지 않고 아래에 엽검영이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사업회의 때 선포한 것을 원문그대로 올리니 보면 좀 더  알게 될 것이다.   “중공중앙은 2년 7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문혁'에 유관한 수자를 핵실했다. 박해받은 사람 745만명, 갇히여 심사받은 사람 425만명, 자살한 사람 172만 8천명, 고급지식분자가 핍박에 못이겨 층집에서 투신하거나 목을 매거나 강에 몸을 던지거나 음독자살한것만도 20만명, 1970년 "一打三反"운동 때 “엄하고 빠르게” 사형판결을 내려서 죽인 “현행반혁명”만도 13만 5천여명, 무단적투쟁에 죽은것이 23만 7천 여명, 불구로 된자 703만명, 철저히 회멸된 가정이 7만 1천 2백여 호, 비정상적인 사망이 적어도 773만명에 이른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잔혹하게 박해받은 사람이 1억이니 전국인구를 9억으로 칠 때 그 비례는 9분의 1이 되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자 2천만을 넘고 손실본 국민경제는 인민페로 8천억원에 달한다.             (엽검영1978년12월13일 중앙공작회의에서 핵실한 수자)                                     관련글:          에드가 스노우:(1905년7월19일ㅡ1972년2월15일), 미국기자로서 중국의 혁명하는데 관한 글을 써 유명해진 사람이다. 생전에 공산당이 탄생해서부터 1930년사이의 사건들을 기록한 를 남겼다.                                                                                                                                                                              2012. 12. 25.                         
586    모택동의 비극(1) 댓글:  조회:2221  추천:1  2015-10-20
                           모택동의 비극(1)                                                                                  김  송  죽             1976년6월15일,병이 악화되자 모택동은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과 황해용을 불러다 가까이 앉혀놓고는 다음과 같은 “임종유언”을 남기였다.   “인생 70이 고래희라는데 나는 80살을 넘어 살았다, 사람이 늙으면 후사를 생각하게 되는데 중국속담에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뚜껑을 덮은 후에야 내릴 수 있다했네라. 내가 이제는 아마도 다 된것 같구나!”   하고서 그는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음과 같이 이어했던 것이다.    “나는 평생에 두가지 일을 해놓았다. 하나는 8년 항일을 해서 일본사람들을 제 집에 돌아가게 만들고 수십년간을 장개석과 싸워 그를 섬에다 쫒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희들도 다 알다십히 문화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 일은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구나.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평화적으로 넘기지 못하면 피바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될지야 하늘이나 알겠는지 원!”   모택동의 이 말은 죽기 석달전에 한 것아라는데 그의 심리를 잘 드러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사상과 실천에 불만하여 그같이 스스로 속심을 드러낸 것이다. 불안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한때 모택동의 비서를 지낸적이 있는 호교목(胡乔木)은 자기가 쓴 글에다  그같이 기술하면서 만년에 이른 모택동은 사천 신도보광사(四川新都宝光寺)에 있는 다음과같은 한토막의 대구를 읊었다고한다.    “세상밖의 사람은 법을 세울줄을 몰라 법을 어기거늘 하물며 천하일을 알리 있으랴, 그런 사람이야 방해되지 않을것이니 아무것도 아니여라.” (1980년12월22일 호교목ㅡ 기초소조담회,“문화대혁명”의 몇 개문제에 대한 인식.)     세기의 위인이라는 이분이 생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같이 비관에 빠진 것을 보면 자신있게 발동한 “문화혁명”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이룰 마지막 수단으로 여기고 발동한 “문화혁명”이야말로 참으로 옳고 값진것이라고 여긴건 물론이다. 한데 그는 죽음에 이른 순간까지도 그같이 뇌이면서도 문화대혁명은 근본 일으키지 말았어야 할 “혁명”이였다고 반성은 하지 않은 것이다.         “문화혁명”을 발동한 모택동의 주요한 론거를 보면 그가 우리 중국에는 지금 부르죠아지의 대표자가 많다, 반혁명적수정주의분자가 이미 당과 정부군대와 각 문화영력에 침투했다고 하면서 그는 많은 단위들은 령도권이 맑스주의자와 인민의 손에 있는것이 아니라 이미 당내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그들은 중앙에다 사령부를 만들어놓고서는 한갈래의 수정주의적인 정치로선과 조직로선으로서 각 성, 시, 자치구와 중앙 각 부문에다 대리인을 두고있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때의 투쟁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니 오직 문화대혁명으로써 만이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우로 광대한 대중을 발동하여 어두운 면을 적발하게 함으로서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들의 손에서 정권을 빼앗아 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실상은 한 개 계급이 다른 한 개 계급의 정권을 뒤엎는 것으로서 장차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이상의 제 친신들에게 말한 것이다.                                            (참고문헌 )      그런데 모택동이 발동한 “문화대혁명”의 주요론점을 보면 맑스ㅡ레닌주의와는 근본 부합되지 않거니와 국제의 실제와도 역시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히는 그러한 론점이 그당시 우리 나라의 계급형세에 맞지 않은것은 물론 당과 국가정부상황에 대한 평가마저도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참고문헌 )     그런데다 모택동은 더구나 림표, 강청 등을 믿어주면서 그들을 리용하여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이뤄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반면으로 나아가 결국은 전체 국민에게 전례없는 재앙을 들씌우고 만 것이다. 이같은 예상치 못한 역효과가 결국은 영명하다는 모택동 본신으로 놓고보면 역시 영광의 절정에 올랐다가 다시는 회복 할 수도 없을 지경으로 믿바닥에 떨어지게 만든 꼴이니 그것은 오로지 비극적인 색깔을 더했을 뿐이다.   “문혁”기간 10년이나 발양된 개인숭배와 “피크이론(顶峰论)”은 모택동 본신은 물론 수억만 국민에게 이루 혜아릴 수 없는 재난과 고통만을 들씌운 것이다.   그 시대를 지내본 사람이면 후대를 위해서도 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다시한번 사색해볼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숭배는 이미 자신을 해쳤거니와 후대교양에 아무런 좋은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2년 12월 1일      
585    시 소원 댓글:  조회:2751  추천:0  2015-10-16
                                                                                                           소  원                                            불꽃이 되면                                          바람따라 어디에든                                          허지에 내려                                          말라버린 풀 태워                                          새싹이 움트게 하리                                          생명이 피여나게                                          불꽃이 되면 좋겠네                                            불꽃이 되어                                          돌이 된 가슴                                          파고들수만 있다면                                          고동을 멈춰버린 심장                                          태워서 없애리                                          새것으로 부활케 하는                                          불꽃이 되면 좋겠네                                                          불꽃이 되어                                          창공을 난다면                                          어둠의 장막찾아                                          태워서 없애리                                          모든 사람 얼싸안는 기쁨                                          온 누리에 차게 한다면                                          불꽃이 되어                                          아아, 죽어도 좋겠네.                                                              1996. 7. 16 “흑룡강신문” 진달래
584    역사는 잊지 않을 것이다 댓글:  조회:2482  추천:4  2015-10-15
                        역사는 잊지 않을 것이다                          뚜껑을 열어제낀 양현혜(杨显惠)                                                          2003년,양현혜가 쓴 시리즈 컬렉션이  출판되여였다. 그는 에필로그에 협변구사건은 당시 감숙성위 극좌로선의 산물이라면서 그것은 한차례의 엄중한 정치사건이였는바 감숙의 역사상 한페지를 차지하는 비참한 고통이였거니와 2400명이 넘는 우파들의 고통스런 역사라고 했다. 작가는 자기가 친히 조사해 낸 사실로써 이야기를 엮은것이다. 먼지 투성으로 얼룩진 40년간의 중국 한 구석의 역사다. 그는 그같이 참혹한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원하면서 고비사막에 묻힌 영혼들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역사는 협변구를 절대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였기 때문이다!      1965년이였다. 양현혜(杨显惠)가 하향한 감숙성 생산건설 제11사 6퇀 4련은 란주(兰州)에서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Xiaowan(小宛)농장에 갔는데 그곳은 한심한 시골이였다. 그는 가자마자 각지에서 모여온 병탄의 전우들과 같이 매일 쉬지 않고 황무지를 개간하느라 물도랑을 파는 일을 했던 것이다. Xiaowan(小宛)농장에는 그와 같은 젊은이를 내놓고도 외지에서 온 우파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와서부터 그저 일만 해야 할 뿐 집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농장에서 일만 계속해야 했다. 양현혜(杨显惠)는 그네들이 하는 잡답을 듣고서 협변구(夹边沟)라는 세글자가 어떤곳이라는 것을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뚜껑이 열렷다”      1999년,양현혜는 라는 시리즈 컬렉션 집필에 착수했던 것이다. 2000년,상해문학은 그의 시리즈 12편을 연재했다. 그렇게 함으로 하여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협변구에서 피눈물나는 고난의 생을 마친 그 우파들의 후대는 드디여 진상을 알게되여 청명절이 돌아오면 무덤을 찾아가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느라 종이를 태우고는 통곡하고있다.      “소설에 사람고기를 먹었다는데 과연 정말인가?”      는 2004년초부터 시리즈를 연속 발표했다. 그랬더니 한 독자는 전화로 편집부에다 “소설에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 했는게 그것이 사실인가?”고 질문했다. 하여 편집은 자기도  그 대목을 읽을 때 등골이 싸늘하게 얼어들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길래 작가  양현혜(杨显惠)선생께 전화로 물어봤더니 그의 대답인즉은 조금도 허구아닌 사실이라 하더라고 독자에게 그대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작가 양현혜((杨显惠 )는 을 한달가량 쓰고서는 필을 쉬우는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 그 자신이 심장이 떨려나면서 아파나길래 부득불 병원에 입원하여 한주일가량 치료받아야서야 나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써내려갔는데 눈물이 자꾸나서 멈출때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일도 있다니 원, 믿기어렵지!”    양현혜의 글은 여기서 줄이고 몇해전 내가 지난역사를 연구하느라 수집해둔 자료 중에서 먼저 152개만 골라 번역하여 묶어놓은 (5)에 이어서 아래 자료를 첨가하니 보기바란다.                                                  음모전주곡   1956년의 중국은 이미 건국이래에 련이은 “진반운동”, 지식분자의 “사상개조”, “3반”, “5반”과 “호풍반혁명집단”을 비판하는 등 폭풍취우식의 운동을 거쳐 마침내 평화로운 정치환경에 들어갔다. 이해의 4월 28일,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쌍백방침” 즉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내놓았다. 그는 말한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방침인것이다. 예술상에서 백화제방하고 학술상에서 백가쟁명하는것말이다.”.  며칠지나 5월 2일에 모택동은 저명한 외국인사들도 참가한 최고국무원회의에서 한번다시 “쌍백방침”을 공개했다. 5월 26일,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학술계와 문화계일꾼 1천여명이 모인 회의에서 륙정일(陸定一)은 이란 제목으로 보고를 했는데 그는 방침을 계통적으로 천술하면서 당중앙선전부를 대표하여 선포했던것이다.  “누구나 다 독립적인 사고를 할 자유가 있고 변론 할 자유가 있으며, 자기의 의견을 발표할 자유가 있고 자기의 의견을 견지하고 보류도 할 자유가 있다.”   6월 13일자 는 륙정일의 이 보고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쌍백방침”은 평화로운 정치환경을 더 좋게 하는 소야곡이였다. 9월 15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공8차대회에서 모택동은 대규모적인 계급투쟁과 고별한다면서 금후의 사업은 사회주의건설을 위주로 하는 정책을 실현할것이라면서 당내의 주관주의, 종파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정세에서 같은 사회주의진영내의 국가인 폴란드에서 6월에 불쾌한 사건이 생기더니 10월말에는 또 항가리에서 공인들이 거리에 뛸쳐나와 시위를 하면서 경찰과 맞붙어 충돌하여 피까지 흘리는 엄중한 사건이 발생했던것이다.  반우파운동“전야인 1957년초까찌만도 중공의 중요한 결책자인 모택동은 에서 착취계급이 계급으로서 소멸된 이후 인민내부의 모순은 이미 국가정치생활의 주제(主題)로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인민내부의 모순을 해결함에 있어서 잔혹한 투쟁이 아닌 ”단결ㅡ비평ㅡ단결“의 방침을 운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당인사나 민주당파들과도 ”간담상조(肝膽相照), 장기공존(長期共存), 호상감독(互相監督)“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 (百家爭鳴)“의 방침을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57년 4월 30일, 모택동은 천안문성루우에서 민주당과 무당파민주인사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당외인사들이 중국공산당의 정풍에 자원적으로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평하고 의견을 제기하는것을 환영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리하여 북경같은 곳에서는 5월초부터 시작하여 선후 13차나 좌담회를 열고 각 민주당파와 무당파인사들을 초청하여 중공의 정풍을 돕도록 부탁, 동원했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태도가 성근한 것으로 여겨져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은 대담하게 중국공산당을 비평하고 의견을 제기하게되였다.   먼저가졌던 중앙통전부계통의 그 13차의 좌담회에서는 70여명되는 민주당파, 무당파민주인사와 공상계의 인사들이 발언했고 후에 열린 25차의 회의에서는 모두 108명이 발언했다. 당시 중앙통전부장이였던 리유한(李維漢)이 그때의 일을 회상했는데 당외인사들이 그때 제출한 비평과 의견은 대부분이 옳고 정확했으며 좋은것들이였다는것이다. 장계약(張系若)은 “공산당은 교오정서를 자래웠는데 주요하게는 공을 대단히 여기고 눈앞의 성공과 리익에만 급급해 하면서 지난때를 하챃게 여기고 미래를 너무믿는다.”고 지적했고 진숙통(陳叔通)은 “교왕과정(矯枉過正)은 영원한 금과옥률(金科玉律)이 아니겠는가? 희망컨대 중앙은 보수사상이 사회주의건설에 끼친 손실이 크고 맹목적인 모진(冒進)역시 손실을 많이 끼치니 한번 잘 총결지었으면 한다.”고 했다. 류비(劉斐), 양명헌(楊明軒)은 “당과 정부를 갈라놓아야 한다. 당이 정부를 대신하게 말아야 한다.”했으며 웅극무(熊克武) 등은 민주를 발양하고 법제를 건전히해야 한다면서 민법, 형법, 단행법규 등을 틀어쥐고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정풍은 5월중순까지 순조로왔다. 모택동은 “당외인사들이 우리들에 대해 비평이 아주 날카롭기는 하나 기본상에서 성근하고 정확한 것이다. 이런 비평의 90%이상이 우리당의 정풍에 유리롭거니와 우리의 결함을 시정함에 유리롭다고 인정한다”고 말했던것이다. 그러나 점차 일부 당외인사들의 입에서는 첨예하다못해 창궐한 발언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민주동맹중앙 부주석이며 국가삼림공업부 부장이였던 라륭기(羅隆基)는 심지어 “맑스주의 소지식인들이 소자산계급의 대지식인들을 령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들을 령도한다”고 모택동같은 수령인물을 빗대고 공격했던것이다. 보고를 통해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모택동은 지극히 분노하여 5월 15일에 는 글을 써 중공당내의 고급간부들에게 배포했다. 그는 이제는 정풍보다 우파들의 공격을 단호하게 물리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 그렇게 하려고 결심을 내리게 되었던것이다.   1957년 5월 16일, 모택동은 라는 문건을 친히 작성하여 당외인사들이 “마음 대로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잠시 반박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익분자들이 저희들의 반동몰골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1957년 5월중순, 모택동은 상해에서 중공당내의 고급간부들을 향해 말했다.   “잡귀신들을 굴속에서 나와 떠들어대게해야 한다....이는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그믈에 걸리게 하는것이다.”   인사출동(引蛇出洞)이라 뱀을 굴밖으로 유인해 내는 전술이였다.   모택동은 이 전술을 놓고 후에 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음모(陰謀)라는데 우리는 양모(陽謀)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전에 적들에게 잡귀신은 굴속에서 나오게 유인해야 박멸할 수 있고 독초는 땅우에 돋아나게해야 뽑아버릴 수 있음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항가리아에서 정권을 탈취하기위하여 무장폭란이일어난 사실은 모택동을 몹시 놀라게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그런일이 절대 발생하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항아리아같은 사건이 중국에서는 절때일어나지 말아야지! 후르쇼브같은 인물이 절때 나타나지 말아야야지!”   그렇다면 적은 대체 어디에 있단말인가? 장개석이 대륙은 반공하겠다지만 모택동은 그갓건 눈에다 넣지도 않았다. “미제국주의는 종이범”이라고 한 그였으니까. 지주, 부농,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산자료소유제의 사회주의개조가 완성된 후에는 그들 대부분이 그래도 규칙을 지켜나갈것이다, 그들에게는 밑천이라 는것이 없으니까.... 그들의 발밑에는 빈공간밖에 없다.   폴란드, 항아리아사건은 모택동에게 두가지 필요성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당이 총을 끝까지 잡고있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식분자를 개조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모택동은 지식분자를 다루기가 제일힘들다고 여겼다. 그는 문제는 지식분자한테서 생긴다고 생각한것이다. 그들은 아는것이 있어서 공산당의 말을 곰상히 들으려 하지 않을것이라 여겼다. 지식분자에 대한 배척심은 이렇게 생긴것이다. 모택동은 자산계급과 그네들의 지식분자, 상층소자산계급과 그네들의 지식분자, 그들속의 우파와 중간파는 공산당과 무산계급의 령도에 대해 달가와하지 않으며 우파들은 지어 대항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먼저 국부를 혼쌀낸 다음 전부를 혼쌀내우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우선 신문계, 교육계, 문예계, 과학기술계의 령도권부터 손을 대기로 했다. 그리하여 주요하게 지식계가 반우파투쟁마당으로 선정된것이다. 모택동은 먼저 입이 바른 지식분자부터 사정없이  꼭대기를 눌러 기를 꺾어버림으로써 본때를 보일작정이였다. 그의 속심이 이러한것도 모르고 1957년 6월 1일, 93학사의 저안평(儲安平ㅡ당시주필이였음.)같은 사람은 중국통전부에서 “모주석과 주총리에게 의견을 제기한다”는 발언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교적 날카로운 비판을 한것이다   저안평은 이 발언에서 당천하(黨天下), 즉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반대하면서 공산당의 인사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의견을 제기했던것이다.   "지금 종파주의가 불거지고있고 당과 대중의 관계가 나쁩니다. 이는 전국성적인 현상입니다. 공산당은 고도의 조직, 기률성을 갖고있는 당인데 이러한 전국성적인 결함이 그래 당중앙과 령도와 관계가 없단 말입니까? 최근에 사람들은 작은 중들에게는 적잖게 의견을 제기했지만 늙은중들 에게는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한가지 사례를 들어서 모주석님과 주총리님한테 가르침을 받자고 합니다. 해방전에 우리들은 모주석님께서 당외인사들과 함께 련합정부를 조직할 것을 제창 한다고 들어왔습니다. 1949년 개국후, 그때 중앙인민정부 6명의 부주석중에서 3명은 당외인사였고, 4명의 부총리중에서 2명은 당외인사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련합정부의 모양새를 갖추었댔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어떠한가, 정부는 개조를 거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자리에 당외인사의자리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원래 중앙인민정부의 몇몇 비당부주석들은 걸상을 모두 인대상무회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말은 그만두고라도 지금 국무원의 부총리들이 열이나 되지만 그중에는 한 명의 비당인사도 없습니다. 비당인사들 중에서 이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지? 혹은 이러한 직무를 감당할만한 사람을이 없어서인지? 당외인사들을 단결하고 전당을 단결하는 념원으로부터 출발하고, 국내와 국제상의 눈길과 생각을 고려해서라도 이러한 인사배치에 대해서는 좀 연구해봐야한다 고 봅니다.”  저안평의 상술한 발언은 전 중국의 이른바 “우파언론”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것이였다. 감히 발설은 못했지만 중국민주동맹중앙의 부주석 장백균(章伯鈞)이나 라륭기같은 민주당파의 수령들도 저안평의 이러한 생각에 동조했던것이다.  그러나 장백균같은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떠들어대도 되는지 은근히 근심되여 1957년 6월초에 주총리에게 계속 이렇게 명방(鳴放)을 해도 되는가고 물었다. 주총리는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1957년 6월 8일, 모택동은 라는 중공중앙의 지시문건을 작성하였으며 동시에 에서는 “이는 무엇 때문인가?”라는 제목의 사론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마땅히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처리해야 했을 정풍운동은 폭풍취우같은 “반우파투쟁”으로 돌변하게 되었던것이다.   “반우파투쟁”은 중국의 당대사회의 비극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반우파투쟁”에서는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의 방법이 동원되였으며 전장(戰場)은 당내로부터 당외로 확대되였다. 이해여름부터 가을까지 모택동은 지대한 정력으로 “반우파투쟁”을 지휘하면서 그 전과(戰果)를 확대해나갔다.  이해의 5월1일자 에 발표한 “문예보의 자산계급방향을 마땅히 비판해야 한다”는 글에서 모택동은 공개적으로 민주동맹과 공농민주당은 “반당반사회주의”라면서 근본 존재하지도 않은 “장라동맹 (章羅同盟)”을 지명하여 비판했으며 “자산계급우파는 바로 반공반사회주의의 자산계급반동파”라고 락인했다. 그리하여 “적”을 잡아내는 그 운동은 승격되여 대규모의 대중적인 계급투쟁으로 변해버렸던것이다. 형세가 이렇게 되니 장래가 근심되고 불안하여 로심초사 (勞心焦思)하는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지사들은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당시 인대부위원장이였던 송경령(宋慶齡)은 모택동이 “반우파운동”을 전국범위로 발전시키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거니와  몹시놀라 이상하게 여기면서 의아해하였다. 그는 그에게 편지하여 행동이 없는 “반당”적인 우파, 우경인사의 부동한 의견에 대해서는 쟁론으로 처리할것을 촉구했다. 같은해의 6월 10일, 인대부위원장이였던 리제심(李濟深), 심균유 (沈鈞儒), 황염배(黃炎培), 진숙통(陳淑通) 등도 각각 중공중앙정치국과 모택동에게 편지하여 “반우파투쟁”을 전개하는것이  전혀 리해되지 않는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리제심은 이렇게 썼다.  “정치상 제가 한 말을 제가 부인하면서 투쟁기분을 조성해 대립계층을  만들고 있으니 심원한 상처를 가져올 것이다.”   그 에 앞서 1957년 4월 27일, 모택동은 에서 “이번 정풍운동은 응당 한차례의 엄숙하고도 참다우며 온건하고 부드러운 사상교육운동”으로 되어야 한다면서 “응당 손을 놓아 비평을 고무하여 아는것은 다 말하고 남김없이 말하게 하며, 말한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삼가하며,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참고한는 원칙을 견결히 지켜야한다.”고 했다. 그대로만 한다면 모택동이 말한것과 같이 “집중도 있고 민주도 있으며, 기률도 있고 자유도 있으며, 통일된 의지도 있어서 개인의 심정은 유쾌하고 생동활발한 정치국면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거니와 점점 기로에 빠져들었던것이다   까딱하면 꺽떡하는 판이였으니 그야말로 지식분자에 대한 대소탕전이였다. 발언한 사람가운데 우파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전에 우파모자를 쓴 사람을 50만으로 집계했다가 55만으로 된 것을 봤는데 모두 틀린다. 그것은 당중앙에서 세상을 속이는 수작이였다. 실지수자는 400만도 훨씬 넘는것이다.  2006년 1월호 에 공개된 “반우파투쟁당안”을 보면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100년 계속해야한다.”고 했다.   1958년 5월 3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 선포.   우파집단ㅡ 22,071 개. 우경집단ㅡ 17,433 개.    반당집단ㅡ  4,127 개.   우파분자로 정한 자ㅡ 3178,470 명.  중간우파에 든 자ㅡ 1437,562 명.    (그중 당원우파분자 278,932 명. 고등학교교직원 우파분자 36,428 명. 운동중 비정상사망자 4,117명.)   "반우파투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은 지식인들이였다. 지식인들은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을 자산계급과 함께 착취계급의 부류에 집어넣고 불공정하게 대하니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해방초기에 집계된 중국의 지식분자수를 보면 다해봐야 500여만 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파로 된것이 460만도 넘으니 그야말로 대 숙청이요 회멸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모택동은 그들을 “반동파”, “계급의 적”으로 몰아  로동개조를 시키고 강직(降職), 감급(監級), 강신(降薪) 등 엄 중한 처분을 주었던것이다. 모두 확실한 법적의거가 없었으며 법적절차 를 밟지도 않았다. 법이 완전히 무시도고만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반우파투쟁”이 “엄중하게 확대화”했다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일으 킨것은 옳았단말인가? 왜 근본 일으키지말아야 할것을 일으켰다고 철저히 부정하지는 못하는가? 모기 한 마리를 잡자고 온 절간에 불을 놓고도 그것은 “필요한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을가?   모택동은 거대한 승리앞에서 점차 교오자만해지면서 주관주의와 개인독단의 작풍이 팽창되었다. 이리하여 당의 집단지도와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위반하게 되었으며 당내민주와 국가의 정치생활은 말할 수 없게 크나큰 손상을 입게되였던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지식분자를 그렇게 잡아먹었던가?.........통탄할 일이다!                                              
583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당을 허물고 말 것이다 댓글:  조회:2133  추천:0  2015-10-12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당을 허물고 말 것이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원인을 놓고 장애평장군이 한 예언)                                       张爱萍将军                                                                                      독후감  김송죽                                            지난해의 일이다. 한족친구 로조(老曹)가 보라고 준,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판한 를 나는  감명깊게 보았다. 읽으면서 줄을 적잖게 그어놓았다. 그 책의 이야기 줄거리가 지금도 가끔 꿈에서까지 나타나군 한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잠을 설칠 때가 여러번이다. 거의 500 페이지에 이르는 그 책은 그같이 나를 충격한 것이다.   작자 장모리는 전에 총참모국 국장이였는데 그가 제 아버지의 경력이자 지난때의 국사(國史)를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생생히 펼쳐보인 것이다. 피끗봐서는 책제목이 보고문학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기존의 다른 전기와는 어딘가 달랐다. 전기라면 보통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고 보기드믄 대화식의 에피소드에서 직업군인출신의 두세대지간의 정신교류가 이어진 것이였다.   장애평장군(张爱萍将军)은 직업군인으로서 견정한 혁명자였다. 리상이 뚜렷했거니와 추구가 끈질겼던 그는 자신의 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과도 과감히 맛서서 도전하는 열혈남아였던 것이다.  하기에 모택동은 생전에 그를 보고 “일을 칠 사람”이라 단언했고 엽검영은 “온몸에 가시돋힌 사람”이라 했으며 등소평은 그를 의욕적인 사람이라면서 “우리 군대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어디있는가.”했던 것이다.    “문화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가 미칠지경이여서 그야말로 메스꺼웠다. 하여 장애평은 견결히 반대한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썩은것이다. 역사방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러다가는 우리 당을 망하게 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령수라 해서 구역질나게 쳐올리니 정상적이 아니다. 위험한 짓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자기 립장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개인숭배, 개인독재 작풍이 지금 모택동의 한몸에 집중됐다. 맑스주의자는 유물론자다. 진정한 공산당원이라면 그따위는 짓은 버려야 한다.” 장애평장군의 이같은 비평은 진정한 공산당원으로서 당에 대해 고도로 책임지는 태도였던 것이다. “어깨위에다 자기의 머리를 달아야 한다.”  레닌의 명언이다. 장애평장군은 제 어깨위에다 제 머리를 달았던 것이다. 국제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구세주란 종래로 없나니, 신선에게도 황제에게도 의존하려말라”, “진리위해 투쟁하리라!” 장애평장군은 행동으로 국제가의 정신을 따른것이다. “명예와 부귀를 절대 탐하지 않는다.” “노예근성을 버리고 진위를 가린다.” 장애평장군은 이 두가지를 일평생 자신을 편달하는 모토(座右铭)로 삼았던 것이다. 의지가 남달리 굴강한 장애평장군이 생전에 문화혁명을 일으킨 모택동을 놓고 평가하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당을 허물고 말 것이다."는 것이였다. 중국공산당에다 울린 경종이였다.   장애평 략력: 1910년1월9일에 사천성 생우 사달현 장가구에서 출생하여 2003년7월5일에 타계. 젊어서 고향의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들었으며 이듬해에 중국공농홍군에 참가했다. 그때로부터 혁명생애가 몇십년간 이어진 것이다. 토지혁명전쟁시기,공청공청단중심현위서기였고,공청단중앙국비서장,소년선봉대중앙총대훈련부부장、참모장、총대장,홍삼군단제사 정치부주임,십삼단정치위원,군위기병단정치위원、퇀장으로 있었다. 중앙혁명근거지 반"토벌"에 참가했고 장정중 루산관(娄山关)을 탈취하고 준의성(遵义城)을 공략하는 전투를 지휘했다. 항일전쟁시기에는 중공강절성위군위서기를 지냈고, 예환소성위서기,팔로군소환종대 정위, 팔로군제오종대삼지대 사령원,신사군제삼사구려 려장,삼사부사장겸소북군구부 사령원,신사군제사사사장 겸 회북군구사령원이였다. 예환소항일근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전쟁시기에는 ,任华 중군구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고,제삼야전군 전적위원회위원,화동군구해군(현해군동해함대)사령원 겸 정위를 지내면서 도강전역(渡江战役)에 참가했던 것이다.   건국후,제7병단사령원 겸 절강군구사령원을 력임했었고,화동군구, 제3야전군참모, 해방군부총참모장을 지냈거니와 따라서 선후 국무원 국방공판부주석을 겸임했었고, 국방과위주임, 국가과위제1부주임,중공중앙군위과기 장비위원회주임,제1계부터3계국방위원회위원,국무원부총리,중공중앙군위부비서장,국무위원 겸 국방부부장을 지냈다. 1987년에 중고위상위(中顾委常委)에 당선되였던 것이다.   1955년, 상장군함을 수여받았고 일급팔일훈장을 받았으며 일급독립자유훈장, 일급해방훈장을 받았다. 중공제8계후보중앙위원,제11,12계중앙위원,14대 대표, 15대 특요대표, 제5계전국인대상위를 지냈다.   원자탄、도탄、위성 등 연구제와 시험공작에 참여하여 조직령도했던 것이다.  , (1992년)와 (1995年), 등 저작들이 있다.   만년에 이르러 서법을 즐겼기에 “장군서법가”로 불리였다. 그가 항전시기에 찍은 군인사진과 생활사진들은 다가 중국사진당안관에서 중요한 진장품으로 되고있다. 2003년7월5일,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니 향년93세.    부인:리우란. 1942년8월결혼.   장자:장상. 소장군함.   차자:장성. 대교군함.   삼자:장품. 대교군함.   딸 하나있음.                                                                        부부사랑 사진                                          1953년2월, 모주석과 함께 해군함대 검열. 라서경(뒷사람), 장애평(좌)                                                                                      1953년2월23일, 남경시찰 때                     모택동,진의,양상곤,장애평,라서경,진비현 등 함께 찍은 기념사진.                                                                                                      1964년 핵시험장에서 방사선 정장을 착용한 장애평                                                                          호요방과 장애평 서로만나                                                     병사들을 찾아 간 장애평장군
582    모택동이 지모쏸피(鸡毛蒜皮)로 여겼던 일 댓글:  조회:3086  추천:6  2015-10-10
                       모택동이 지모쏸피(鸡毛蒜皮)로 여겼던 일                코어 팁(핵심제시): 대약진 3년재해년간 광할한 중국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때에 있은 일이다. 모택동은  “우경기회주의 분자와 반당분자들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사업의 주류는 보지 않고 지모쏸피(鸡毛蒜皮)의 일을 갖고 위대한 당과 위대한 인민의 사업을 창궐히 공격하니 개미가 나무를 흔들자고 달려들 듯 과연 웃기는 일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에 우리는 많은 성시와 지구들에서 보내는 보고를 받고 있는데 귀주(贵州)에서는 사기(邪气)가 내려가고 정기(正气)가 오르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고 했다. 사전을 뒤져보니 “ 하찮은 일”을 중국말로 지모쏸피(鸡毛蒜皮)라 해석했다.                                                           출처 《염황춘추(炎黄春秋)》2012년 제5기,작자:최민.                       원제목:《귀주의 대기황년대》   1959년부터 1961년사이,귀주성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굶어죽었는가에 대해 말이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굶어죽은 것이 120만이 라 하고 어떤 사람은 150만이라고 한다. 상해교통대학의 교수 조수기(曹树基)는 라는 글에서 “귀주성은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비정상적인 사망자 174.6만명이였다면서 재해전이였던 1958년도 전성 총인구 1700만의 10.23%를 차지했다”고 밝히였다.   그가 말했다. “1959년부터 1979년사이 귀주성공안청(贵州省公安厅)에서 사업했던 동료가 나와 말하기를, 각 지방의 정부기관, 자치주공안처(自治州公安处), 국치안과(局治安科) 디지털 수집에 의하면,1959년부터 1961년사이 전성에서 굶어죽은것이 250만명이 넘어 재해전 전성 총인구의 14.7%를 차지한다고 했다. 이는 관방의 통계수자인 것이다. 그것이 각지 주, 시, 현마다 상부에 보고한 것이였기에 수분이 있겠지만 그 당시 믿어야 할 데이터(数据)는 그것밖에 더 없었던 것이다.”   1961년6월부터 1967년1월 기간 반란파가 권력을 장악할 때 까지 귀주성 공안청 치안처장을 지낸적이 있는 ×××가 증실한 것을 보면 1959년부터 1961년 사이 전성에서 굶어죽은 것이 250만이였는데 귀주성위에서 중앙에다 보고하기를 굶어죽은 것이 210만이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굶어죽은   수자를 40만이나 속인 것이다. 그러니 성위공안청에서도 의연히 그 수자대로 보고를 써서 공안부(公安部)에다 올려보냈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굶어죽은 정황을 보면 아주 엄중했던 것이다. 귀주(贵州)、청해(青海)、하북(河北)、산동(山东)、호남(湖南)、광서(广西) 등 성과 구(区)는 물론 지어는 리치랜드(富庶之地)라는 강소(江苏)、절강(浙江)、광동(广东) 등 성에서마저도 굶어죽은 사람이 적잖았던 것이다. 굶어죽는 현상이 그같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대사를 그같이 봉쇄한데는 “좌적정치로선”을 바싹따른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사천성의 리정천(李井泉),하남성의 오지포(吴芝圃),안휘성의 증희골(曾希圣),하북성의 류자후(刘子厚),귀주성의 주림(周林) 감숙성의 장중량(张仲良),청해성의 고봉(高峰),산동성의 서동(舒同)등 성위의 리더(一把手)들은 다가 모택동의 발걸음을 바싹따랐는바 그같이 바싹따르면 따를수록 재난은 더 커져서 굶어죽는 사람이 갈수록 더 많아졌으니 그것은 법칙으로 되였던 것이다.   주림(周林),귀주인부 사람(贵州仁怀人),1950년 상해시정부비서장에 임명, 1950년6월 귀주성위상위에 임명,1956년7월 성위제일서기 겸 성장으로 임명됨. 주림은 “대약진”년대에,“세폭의 붉은기”를 높이들고 전 성적으로 공산풍을 일으킴으로 하여 거짓과 과장바람, 강박명령바람, 간부특수화바람과 생산 블라인드 명령바람(生产瞎指挥风)을 비롯한 공산풍을 일으켰음으로 하여 농촌들의 생산성을 훼손했거니와 촌락들을 황페하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다가 기근을 유발하고 재난을 유발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되었던 것이다. 양계승(杨继绳)선생의 모노그래프 기록에 보면 주림은 전국에 영향을 비친 두가지 경험이 있었는데 하나는 량식방면의 경험이였다. 당시 귀주성의 어떤 지방에서는 부종환자가 많이 나졌거니와 사람이 굶어죽어가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였건만 “중공귀주성위는 1959년8월27일,중공중앙과 모택동에게 거짓으로 사실을 가리우고 꾸민 요약보고를 만들어 올렸던 것이다.   그 요약보고내용은 이러했다. 1. 량식문제:   “량식의 긴장한 상황을 이미 철저히 해결했음”.   “반드시 일체방법을 다해서 량식생산을 틀어쥐거니와 농작물수확을 확보 할 것이다”       “식품 조달을 한시기 당위의 중심임무에다 놓는다.” 2.시장문제:   “상반년 전성의 시장정황,총적으로 온정되였음. 일용공업품의 품종,수량이 현저히 증가되였음”,   “상업공작은 중앙지시를 진일보 관철할 것이며 우경보수를 반대하고 정치를 틀어쥐고 군중운동을 크게 일으키며 수매와 판매……또한 시장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국경 10주년을 영접한다.”     모택동은 이 요약보고서를 몹시중시하여 1959년8월30일,중공중앙의 명의로 전국에다 전송했다. 였다.  그러면서 모택동은 전국에다 장편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우경기회주의 분자와 반당분자들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사업의 주류는 보지 않고 지모쏸피(鸡毛蒜)의 일을 갖고 위대한 당과 위대한 인민의 사업을 창궐히 공격하니 개미가 나무를 흔들자고 달려들 듯 과연 웃기는 일이다. 최근에 우리는 많은 성시와 지구들에서 보내는 보고를 받고 있는데 귀주(贵州)에서는 사기(邪气)가 내려가고 정기(正气)가 오르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때는 바로 로산회의가 끝난 후였는데 모택동은 이 지시와 반우경투쟁과 량식문제를 련계시켜 그 누가 식량이 곤난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한테 “창궐히 진공한다”는 모자를 씌웠길래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굶어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한가지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기아에서 혜매고있는 판인데도 귀주성위에서는 1960년 2월16일부터 18일까지 지구, 주, 시위의 제1서기 회의를 열고는 주요하게 농촌의 공공식당문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이다. 이 회의는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도 중공중앙에다 를 써올렸는데 그 보고에 “우리 성 현유의 공공식당은 13만개 넘는다. 이미 고정되였거나 기본적으로 고정 된 것이 80%좌우다 라면서 계속하여 특점 다섯가지를 말했던 것이다.    “빈농, 하중농의 령도우세를 공고히 수립한다. 기층간부와 당원 공청단원은 일률로 식당에 들어 군중과 하나가 되며.... 사람마다 정량을 제정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식당은 자체 생산이 있으며.... 가족모양을 갖추고.... 일부는 정치 생산 팀이 되었는바.... 경제,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어 대가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방면에 인민공사는 강화되며.... 그것은 장점과 식당의 중요성을 보여준다,인민공사제도의 주요진지를 확실히 공고하게 하는바…. 새농촌건설의 필요 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귀주성위의 이 보고서는 모택동을 매우 흠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1960년 3월6일에 중공중앙의 명의로 전국 각 성, 시, 자치구에다 다음과 같이 지시했던 것이다. “귀주성위의 목전농촌공공식당정황보고는 잘썻다. 이에 발급하니 연구하고 일률로 본보기로 삼기 바란다.” 모택동은 또 말했다. “귀주성의 이 보고는 과학적인 총결이다.” 독후감: 류소기는 생전에 대약진기간의 3년재해는 자연재해인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였다고 말했다. 한데 모택동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귀주 한개성에서만도 수백만 백성을 굶어죽게 만들어놓고서도 그래 지모쏸피(鸡毛蒜皮)란 말인가?  정신이 옳바른 군주였다면 아마 인간답지 않게 량심없는 그따위 허튼소리는 줴치지 않았을 것이다. 억만인민의 마음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란 것이 그렇단 말인가?....  과연 한심한 일이다!                                                                                                                3000万人活活饿死                                       三年自然灾害死了多少人,数千万人活活饿死                                       
581    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한국사관련 망언 댓글:  조회:3067  추천:0  2015-10-08
              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한국사관련 망언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은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일본인들의 그릇된 역사의식과 역사의식의 결핍에 있다고 하겠지만 의도적인 것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일본인들의 역사의식 결핍과 의도적인 타국사 폄훼는 일부 학자들의 논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관료들의 妄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妄言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구보다(久保田貫一郞) 망언’ 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망언을 살펴보겠다. 이것은 일본인의 한국사 및 한국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점이 있으며, 만약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을 것이다.   ◎ 1963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수상 :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다.     ◎ 1963년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 :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 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신페이(後藤新平)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 1965년 다카쓰키 신이치(高杉晋一)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 36년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  1965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 :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 :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지만, 그 후 한국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 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아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  1979년 사쿠라다 다케지 經團連 회장 :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 36년 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있다.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교육의 결과이다.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 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  1982년 마쯔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 :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 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1986년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문부상 : 한일합방은 형식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합의로 성립된 것이다. 한국에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 한일합방이 없었다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한반도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닌가.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識者率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다. 물론 례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니다.   ◎  1994년 사쿠라이(櫻井信) 환경청장관 : 일본이 침략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된다. 전쟁결과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을 얻었으며 교육이 보급되어 유럽국가가 지배했던 아프리카국가들보다 문자 解得率이 높아졌으며 경제부흥도 이루었다.   ◎  1995년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외무장관 :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합병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1995년의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총무장관 : 다만 한일합병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힌 것이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창끼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2001년 노로타 호세(野呂田芳成) 자민당의원 : 우리가 2차 대전에 참전해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을 아시아에서 몰아냈다.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일본 덕분에 독립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  2003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 도쿄도지사 : 우리는 결코 무력으로 침범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100% 정당화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들(조선인)의 선조에게 책임이 있다. 식민주의라고 해도 매우 앞선 것이었고 인간적이었다.   ◎  2003년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 회장 :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된 것, 한글문자는 일본인이 가르쳤으며 의무교육제도도 일본인이 했다면서, “옳은 것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  2004년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 : 문부과학상이 돼서 맨 먼저 본 게 역사교과서였다. 최근 이른바 종군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표현이 줄어든 것은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 역사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잘못한 것은 반성해야 하지만 모두 나빴다는 自虐史觀에 입각한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후손들에게 자신의 민족과 역사,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살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망언을 분석해 보면, 첫째 19세기 말 20세기초에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러시아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 둘째 일본이 한국을 무력, 불법적으로 강점한 것이 아니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병합했다는 “한국병합 합법론”, 셋째 강점후 식민지 한국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통치 미화론 또는 식민지 시혜론” 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불법 강점한 사실과 민족말살을 감행한 사실을 부정하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주장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에 입각한 “조선침략정당화론(朝鮮侵略正當化論)”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는 “아시아 해방론(解放論)”도 점차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또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營圈)”이라는 기만적인 슬로건 아래 일으킨 만주침략(滿洲侵略), 중일전쟁(中日戰爭)과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아시아인을 구미제국주의자(歐美帝國主義者)들로부터 구하기 위한 “해방전쟁(解放戰爭)”이었다고 정당화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망언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60년동안 이루어져 왔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역사의식의 결여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망언이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의 일본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망언과 최근의 망언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무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의 서술은  약함                                 글쓴이  이만열                                                                  출처 : 국학연구소
580    세계 최대전파 망원경 케이블 링 프로젝트 완료 댓글:  조회:3397  추천:0  2015-10-07
                                 세계 최대전파 망원경 케이블 링 프로젝트 완료                                                                             9월30일,중국과학 아카데미 국립천문대에서는 10kV의 고압력실험으로 구경이 500m, 둘레의 연장길이가 3.5킬로미터인 전파망원경(약어 FAST)케이블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이로서 중국은 마침내 신경계통이 완정한 “하늘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구이저우에 있다.    FAST는 국가의 주요한 과학 프로젝트로서 세계에 제일크다는 미국의 아레시보 천문망원경보다도 더 커서 감광도가 2.25배나 되는 것이다. 중국 과학아카데미 국립천문대 무선부 수석 과학자 리적(李菂)은 중국의 FAST는 세계에서 구경이 가장 큰 안테나 전파 망원경으로서 크기가 축구장 30개만하다고 하면서 FAST는 향후 20여년간은 세계 최고수준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 했다.   FAST의 주요 목적은 우주의 먼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별과 별 사이의 물질구조를 탐사하고 희미한 펄스 스타와 다른 희미한 라디오 소스를 검색 할 것이며 효률높은 과학기술로 지구밖의 생명을 찾아내는 등의 수색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 할 것이라 한다.   FAST의 가장 큰 특징은 그 구조가 자동적으로 조절하게끔 제조되였기에 케이블 중심에 있는 4450개의 반사 패널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온라인 활동을 게속 할 수 있는 그것이다. 독일의 본에 있는 100m만원경에 비하면 감도가 10배나 되는 이 고성능의 “접시만원경” 계약자는 중국전자기술그룹이다.                                                                              출처: 新闻中心 > 央广网国内 > 国内图片                                                                              김송죽 번역
579    반부패투쟁실기 댓글:  조회:2584  추천:0  2015-10-06
                                           반부패투쟁실기       9월말이다. 시진핑은 국가주석으로 되어서는 처음인 정식 미국을 방문을 끝마친 것이다.  이번 미국방문의 첫역전으로 지정되었던 시애틀에서 시진핑은 외국에서까지  관심사로 되고있는 일을 말 했는데 그것인즉은 중국에서 하고있는 반부패였이였다.   시진핑은 약 2분가량 중국의 반부패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는 부패안건을 적잖게 들춰냈다면서 여기에는 “그 어떠한 권력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그가 최고 지도자로서 부패와 권력투쟁에 대해 의논이 있는 각계 각층에다 처음으로 하는 공개적인 응답이였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한시기 우리는 부패안건을 적잖게 찾아내여 ‘늙은범’이건 ‘파리’건 가리지 않고 함께 뚜드렸다.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에 순응한 것이지 그 무슨 카드도 권력투쟁도 아닌 것이다. 중국은 국제사회가 여러면에서 우리의 반부패를 도와주기 바란다. 해외의 국가가 부패분자들이 숨어버리는 피난처로는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을 바란다.”   부패방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시진칭의 어투는 아주 견정했다. 그가 소리를 하고나서 말을 잠간 끊었더니 관객들은 다가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시진핑은 청중을 향해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이란 미국에서 찍은 정치테마 TV시리즈인데 내용인즉은 플레이에 초점을 맞춰서 백악관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고위층의 권력투쟁을  묘사, 폭로한 것이다.   이미 공개된 보도들에는 시진핑이 부패방지와 권력투쟁이야기를 그같이 한줄에다 꿰여서 말한적이라곤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고위관리, 전문가와 여론계에서는 그 일을 놓고 때로는 고위층 “반부패와 권력투쟁”이란 주제토론을 한 것이다. 불순한 동기를 가진 경외의 사람들은 그것을 권력투쟁 공구로 여기고있다.   그것이 과연 권력투쟁일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것 같지는 않다!                                              반부패 실천   반부패 최고지휘기구인 CCDI(中纪委)와 중앙통전부 등에 마저 나떨어진 장관이 있는 것이다. 제 18계 중앙위원회중,선후 령계화와 주본순(周本顺) 등 6명의 중앙위원이 나떨어졌고 양위택(杨卫泽)과 구화(仇和) 등을 포함하여 11명의 중앙후보위원이 나떨어진 젓이다.       중앙정치국 원상위 주영강(周永康)이 나떨어진것은 바로 상하를 가리지 않고 뚜껑을 열어 모자를 씌워 나떨구는 부패방지 패턴이다. 주영강역시 30여년이나 법정재판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관리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잡혀나온 큰 인물짝들이 많고많다. 아래에 몇 사람의 얼굴을 보기로 하자.   2012년12월6일,사천성위 원부서기 리춘성(李春城)이 조사받더니 끌려나왔다.                                                  중앙정부쪽으로,SAC(国资委)를 포함해서 NDRC(发改委)、공공보안 자원부(公安部)、국가보안부(国家安全部)、MEP(环保部)、상무부(商务部)、SAWS(安监总局)과 스포츠관리(체육) 등 국무원 부서 기관들에서 리더(一把手)들이 나떨어진것이 적잖은 것이다.                                                                         주본순(周本顺)   제12계 CPPCC 리더십에(全国政协)에서 23명의 부의장(부주석) 중에서 링 지화(令计划)와 쑤룽샌(苏荣先)이 선후하여 나떨졌다.                   제12계 NPC(全国人大)때 선출된 환경과 자원 보호위원회(环境与资源保护委员会)부위원장 백은배(白恩培)등 그 몇이 역시 나떨어진 것이다.   두 개의 최고지위에 올라있던 자도 불행을 면하지 못했다. 최고법부(最高法副)원장에다 당조성원(党组成员)이였던 해효명(奚晓明)은 7월달을 방금넘기자 잡혀서 검사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 것”(마이크로 편지 ID : gcxxjgzh)가 발견한 것을 보면 군대부패에 대한 종합 조사보고가 전에는 없었는데 18차대회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전에 중앙군위 부주석을 지낸 2명을 포함하여 40명넘는 군단레벨 이상(군급이상)의 “군대호랑이”를 잡아냈다고 한다.  그 둘은 성도군구부사령원이였던 양금산(杨金山)과 란주군구부정위 범장비(范长秘)다. 그 둘은 이미 퇴직을 했지만 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잡혀나온 것이다.                                                                                                 범장비 “공화국의 장남”이라 부르는 국가기업, 더욱히는 중앙규율검사위원회의 조사 대상에 초점을 맞춘 에너지ㅡ 공사, 투자, 통신 등 권력이 상대적으로 집중된 국가기업인 중국 석유 화학공업에서는 락마관원(落马官员)이 줄줄이 나온 것이다.  석유화학그룹회사 전 본부장 왕천보(王天普)、중국제일기차집단공사 원 이사회 의장 서건일(徐建一), 중국 알루미늄 공사의 전 제너럴 매니저 손조학(孙兆学) 등등.                              지역을놓고 보면 현재까지 상해、녕하 등 지에 성급이상 나떨어진 자가 없고 기타 성들에는 부급이상 관원이 이상 나떨어지지 않은 곳이 없고 기타 다른 지방에는 다가 “늙은 범”이 나타난 것이다.   공산당간부의 부패가 이정도라니 과연 신경이 곤두설 일이다,  그래도 입당할적에는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리라 맹세했겠지?  한심하다 !             자료래원: 搜狐 2015-10-04 17:29  国内要闻 > 时事                                          
578     누구에게 포를 쏘는가? 댓글:  조회:2537  추천:0  2015-10-04
                                         누구에게 포를 쏘는가?                                                            출처:简单贺电国庆:中国将有所动作_今日头条_军事头条                                                             번역련재 9                                                                                                     조선의 포격은 한국의 트릭에 "위협"이 되었다   박근혜의 “친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성적은 국가리익을 얻은 것이다. 한국은 중국의 지원으로 하여 변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측은 동족으로서 큰 싸움을 해보려고 도발하는 것이다. 증오심이 끓어올라 최근 남북은 대방을 서로 포격하는 상서롭지 않은 일이 벌어지게 만든 것이다. 조선에서 남한을 향해 먼저 포를 쐈던 것이다. 대방을 협박해서 응하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순 도발행위였던 것이다.    이는 남북양자회담에서 “얼음공주”라 불리우던 박근혜가 “철의 녀인”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정치수단에서 점수를 많이 따게되니 중국의 혜택을 보거니와 남북한의 게임에서도 주도권을 쥐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정부로 놓고 보면 국가경제발전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남북관계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였다. 남북간의 모순이 결국은 내부모순인 것이다. 내부모순은 되도록 좋게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핵무기는 한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면서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고있는 것이다. 조선은 때때로 도발적인 방법으로 한국을 괴롭히고있다.   한편 중국과 한국지간의 관계는 역사상 제일 좋은 시기를 맞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는 한반도의 기분을 음침하게 흐리우고 있다. 한국은 조선의 정치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데다 저쪽에서는 때때로 무력시위를 하군하는 판이다. 이른바 “해볕정책”을 구현한다하여 “진보정부”라 했던 김대중, 로무현의 정권시기나 강인한 대북청책을 쓴 이명박의 “보수정부”시기에도 조선은 때때로 포사격으로 무력적인 위협을 계속 해 온 것이다. 하기에 한국의 “정부 미디어(政媒)” 그 두개의 원은 뒤에서 추겨대는게 아니냐 하면서 꼭같은 동포지간에 불안하게 만들고있는 장본인은 중국이라 인정하고 불만을 품어왔던 것이다.    중국이 국경절에 퍼레이드로 이제는 자체의 무력이 그 누구보다 강해졌음을  보여줌으로 하여 중국은 한국과 조선을 크게 자극한 것이다. 지금보건대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가 조선보다 퍽 더 좋아졌다. 관찰자들이 혹은 홀시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러하다. 이는 중국은 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선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간과 할 수 없는것은 대부분관찰자는 외교관계가 설립 된 이후 양국관계는 진전이 상당히 빠르다고 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조선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점점 더 심하게 냉담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양국관계 균렬에도 불구하고 외교방면에서 조선을 대함에는 옛정을 봐서라도 관계일족의 성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전히 플러스의 예의를 지키면서 그쪽의 얼굴을 봐준 것이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일부 미디어 평가는 최룡해가 “빈손으로”으로 돌아간 것을 의아쩍어 하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세션의 외교 전략이다. 중국과 조선은 이제 더는 외교관계가 없다. 김정일시대부터 시작해서 김가조손시대(金家祖孙时代)는 중국을 대함에 있어서 “불정상적”인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렇다고  제발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  
577    김정은 왜?..중국은 행동할 것이다!(1) 댓글:  조회:2905  추천:0  2015-10-02
                 김정은 왜?..중국은 행동할 것이다!                                      김정은은 왜 국경절에 간단한 메시지만 보냈는가?                                            중국은 행동할 것이다! (번역련재15편)                             简单贺电国庆:中国将有所动作_今日头条_军事头条                                                               1                             김정은이 조선의 최고령도권을 이어받은 이래의 행동을 보면 외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외사활동에 적게 참가하거니와 제 명의로 다른 사람을 보내군한다. 그 자신은 외사활동에 거의 참여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중국 국경절에 마저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 중앙통신 30일 보도에 따르면,조선최고령도자인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위원장 김영남과 내각총리 박봉주를 당날에 파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성립 66주년 경축에 참가하게 하면서 중국의 국가주석 습근평、국무원총리 리극강과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위원장 장덕강에게 축하문을 전달하게 한 것이다.   축하문은 다음다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 66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조선로동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의 명의로 당신들을 통해서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와 인민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부강과 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축원한다.”   오늘의 중국과 조선지간의 관계를 보면 그것이 바로 새 신호로 되고있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을 잡아서 2012년부터 국경절에 시진핑주석에게 축하메시지를 좋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보내는 메시지에 북조선은 중국과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하지 않고있다. 올해에 보낸 메시지는 내용이 간단하고 짧았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냉각상태가 아닌가고 분석하고있다. 이것이 두 나라지간의 관계를 잘 반영하고있는 것이다.   9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성립 67주년 국경절이 돌아오니 시진핑은 금년에도 그날을 기념하여 김정은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냈는데 조선에서는 "로동신문" 첫면에다 러시아와 쿠바지도자들의 메시지를 싣고는 중국에서 보낸 메시지는 뒷면에라 실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과 조선사이의 랭각상태를 그대로 잘 반영하고있다. 중국이 한반도문제에서 한국을 선호하니 조선은 그에 맛서서 불만을 토해낸 것이다.    김정은은 스스로 중국을 방문 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중국에서 항전승리 70주년을 경축하여 열병을 륭중히 거행했건만 그는 그것마저도 와보지 않았으니 출국방문을 아예 하지 않으려는 속셈인게 분명하다. 그러니 국경절에 그가 중국의 최고지도자에게 메시지를 보낸것은 통상적인 관행에 속하는 스타일이였다고 볼수밖에 없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다.   그러나,돌아오는 노동당창건 70주년을 맞으면서 조선에서는 10월 10일을 게기로 전후하여 위성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4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고 관찰가들은 내다보고있다. 조선은 그것으로 국경절에 헌례하려는 것이다.                                              출처: 81군사 뉴스 네트워크  
576    일본스파이 용의자 둘을 체포 댓글:  조회:3088  추천:1  2015-10-01
    일본스파이 용의자 둘을 체포   마이크로 채널스캔 이차원 코드를 사용하여 친구와 친구사이 공유하기. 출처 : 글로벌 네트워크 2015년09월30일   중국은 일본스파이 용의자 둘을 체포했는데 아마도 사형될것 같다고 일본언론이보도했다.      일본"아사히신문" 9월30일 보도에 따르면 이본간첩 둘이 중국경내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중국의 국가안전부에 체포되였다고 한다. 그 둘 일본간첩은 올해 5월달에 각각 료녕성과 절강성에서 붙잡혔는데 하나는 중국과 조선변경에서, 다른 하나는 절강성의 군사기지부근에서 활동했다가 그모양이 됏다는 것이다.  그 뉴스를 낸 사람이 말하기를,중국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케이스는 매우 드물다면서 그 일본사람들이 남의 기밀을 도둑질한것이 어느정도 엄중한지는 몰라도 그들은 다가 일본스파인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보도에 이르기를 올7월에 중국은 제12계 전국인대상무회(全国人大常委会) 15차회의를 열고 중국의 새로운 국가안전법을 투표, 통과했다면서 죄인에 대한 최대 형벌은 그를 죽여버리는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중국법률에 최고형벌은 사형. 일본 외무성해외안전과는 남의 나라의 기밀을 훔치다가 붙잡혀 그곳 보안부문에 여러달 갇혀있는 그 두 일본스파이가 저지른 이벤트의 심각도가 어느정도인지 아직 채 판정되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다고 했다.   관련 뉴스: 일본남자가 중국 감숙성 연진령 일대서 불법측량하다가 잡혀.   “한 일본사람이 중국에서 차 한 대를 고용하여 감숙성의 연진령일대를 측량하고나서 보계에 갓다가 그곳에서 붙잡혔다. 섬서성 관련부분에 의하면 우리성에서는 근년에 측량을 다니는 미국사람과 일본사람 여럿을 붙잡았다. 측량을 다니는 그런 자들을 보기만 하면 즉시로 경찰에 알리기 바란다. ”    외국인으로서 남의 땅을 측량하는 소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전에 중국대륙을 절반이나 그같이 측량했던 것이다. 얼마전에 유관부문에서 그와같은 일본 협의분자를 발견하고 붙잡았는데 그역시 측량설비를 갖추어 감숙의 경양에서 출발하여 연진령일대를 측량한 것이다. 그자는 그 기간에 대중을 속히느라 마치도 려행객인양 나타나 당지에서 차 두 대를 운전수마저 고용하여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보계(宝鸡)의 한 요지에서 붙잡힌 것이다.     그것말고도 또 하나 있다.  중국여자를 배우자로 삼은 한 미국남자는 남편의 신분으로 중국에 와 장기간 체류했는데 그의 수첩에는 많은 량의 데이터(数据)가 조사 기록되여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러한 외국인은 국가 기관에 의해 추방처리 되고있다.     독자는 아마 의문을 사면서 궁금해질 것이다, 지금은 성능이 높고 선진적인 사진기가 발명돼서 고공에 올라 지면의 것들을 얼마든 맘대로 상세히 찍어낼 수도 있는 세월에 하필이면 비밀리에 현장조사를 나다닐건 뭔가고?. 그렇지 않다. “사진이 아무리 명확한들 제눈으로 직접 와 본것만은 하랴.” 책임자의 말이다. 그 책임자는 나라마다 제가끔 자자신의 시스템과 좌표가 있다면서 그것은 극비밀이라 말했다。때문에,외국사람들은 그 위치를 청확히 측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GPS제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외국사람들은 종종 과학연구자의 자태로 나타난다. 최근에 섬서성에서 생긴 지리도용 행위는 매우 은페적이였다. 그 자는 자기는 전부터 모험관광을 즐겨 다닌다는 것이였다,그러면서 종종 우리의 직원을 데리고 함께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우리는 외국사람이 커버를 사용하는 경우 주의 해서 그를 관찰해야 한다.   남의 나라의 지리정보를 도적질하는 자면 보통려행자와 아무튼 다른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일반적으로  길을 가면서도 풍경에 대해서는 그닥지 흥취를 갖지 않는다. 그러면서 군사관리구에 원래있었던 패쪽이 보이지 않으면(군사행정구역패말은 일반적으로 다 영어로 번역되여있다) 의아해하면서 걷기도 하고 자주 서기도한다. 그러면서 유사한 포인팅 장치 또는 나침반 좌표를 잡고 무었을 찾는 듯이 외국어 버전 지형도를 보는 것이다. 이들은 GPS수신기로 모양이 유별난 특색이 있는 가옥이나 홀로선 바위 혹은 외딴나무를 지도에다 표시해놓는다. 그같이 하우징 코너의 분명한 특징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휴대용 GPS수신기들은 휴대전화비슷한데 볼륨이 일반적으로 3-5스마트폰 크기만하다. 부피가 약간 더 두터울 뿐 색깔도 같다. 종종 지도와 함께 사용한다.  군 관리 주변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575    세계 멋진 플래그 10개 나라(사진) 댓글:  조회:3632  추천:0  2015-09-30
                           세계 멋진 플래그 10개 나라(사진)   세계에는 많은 국가들이 있다. 당신은 어쩌면 많은 나라들을 기억하겠지만 그 나라의 국기들을 다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 10개 나라의 독특한 국기만을 설명하련다.   사우디 아라비아    세계에서 주요한 석유생산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기는 파란바탕이다. 。다른 몇몇 나라들의 국기와는 판다르다. 녹색 배경은 이슬람을 나타낸다,칼은 사우디 왕실군대의 상징이다。칼위의것은 샤입인데 그것은 이슬람 신앙의 선언이다。     몽골 몽골의 플래그는 3개의 수직 밴드를 가지고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몽골을 상징한다。그림을 사세히 보면 밀접하게 표시되였고 그 기호에 따라서 기호가 나타내는 의미를 식별 할 수 있다. 불,태양,달,지구,물, 음양기호다.  중간의 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번창 가혹한 환경에서 몽골의 능력을 나타낸다.   모잠비크 이 플래그는 국가의 방어와 경계를 상징한다,AK-47 소총과 모잠비크 플래그 "장식"인데 책은 교육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푸른색은 농업의 중요성을 나타낸나.   부탄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용은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되고있다。부탄은 드래곤을 깃발을 설계하는 데 사용했다. 브론토 사우루스에 드래곤 플래그。노란색 부분은 기존의 시민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레드는 불교의 이상주의를 나타낸다。     키르기스스탄   중간의 그 부분은 반짝이는 테니스처럼 보인다. 큰 태양은 여섯 라인을 통해 표면에 나타났다. 40일을 동일한 라인에 둘러싸였는데 그것은 전설에 있듯이 40개의 부족이 통합되여 몽골에 대항했음을 표시한다.     캄보디아  캄보디아는 국기의 주요 상징같이 구축된 자그마한 국가 중 하나다。국기에 그려진 건물은 앙코르 와트다. 그것은 캄보디아 랜드마크인데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기념물이다。   네팔    네팔의 플래그가 가장 재미있다,그것은 국기가 세계에 유일하게 사각형이 기 때문이다。디자인은 주로 초승달과 태양 기호가 단순히 조합된 하나의 플래그로 구성되어있다。1962년까지, 플래그는 더욱 기괴했다,태양과 달은 인간의 얼굴을 상징,이것은 그들이 윙크처럼 보이게 한다。   케냐    케냐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창 플래그를 가지고있다。가장 눈에 띄이는 빨간색 배너의 중앙 부분,그것은 보호를 상징하며 흘린피는 국가의 독립 전쟁을 상징. 블랙 상단은 케냐를 나타낸다. 녹색 밴드는 국가의 풍경을 나타낸다.     우간다 그레이 크레인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생산。그 중심에있는 우간다의 국기。아프리카 민족을 대표하는 세 가지 색상 (검은색),아프리카 태양 (노란색),그리고 아프리카 형제 (빨간색)。다리를 들어 올린 것은 앞으로 갓ㅡ 국가의 상징이었다。   리비아 1977년과 2011 년 사이에 사용된 플래그,하나의 색상의 국기,어떤 디자인도 없다,어떤 배지도 없다,더 자세한 사항은 없다。리비아 지도자 무아 마르 카다피의 결정에 의해 설계된 순수 녹색,그것은 그의 정치 철학 및 이슬람을 표시한다。2011년에 카다피가 사망했다,국기의 이전 버전을 다시 채택했다。                
574    시진핑 유엔에서 댓글:  조회:5779  추천:0  2015-09-29
                                               시진핑 유엔에서                                                                                             출처: 피닉스 TV                                                                              시간: 2015년09월28일 23:56   피닉스 국제뉴스에 따르면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북격시간으로 9월28일 밤에 유엔 제70세션(届会议) 일반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세가지를 선포했다고 한다.   (1) 중국은 앞으로 10년사이에 합계 10억달러에 이르는 세계평화를 위한        중국과 유엔의 개발기금을 낼 것이다. (2) 유엔 평화유지 메커니즘에 참여하며 8천명 평화 유지군을 구축한다. (3) 앞으로 5년간 AU에 $1억을 무료로 군사원조 한다.                              习近平晤奥巴马 就下阶段中美关系发展提出六点建议        习近平出席联大一般性辩论并发表讲话(全文)   习近平(中国国家主席):主席先生,各位同事。   70年前我们的先辈经过浴血奋战取得了世界反法西斯战争的胜利,翻过了人类历史上黑暗的一页,这一胜利来之不易。   70年前我们的先辈以远见卓识建立了联合国,这一最具普遍性、代表性、权威性的国际组织,寄托人类新愿景,开启合作新时代,这一创举前所未有。   70年前,我们的先辈集各方智慧制定了联合国宪章,奠定了现代国际秩序基石,确立了当代国际关系的基本准则,这一成就影响深远。   主席先生,各位同事,9月3日中国人民同世界人民一道,隆重纪念了中国人民抗日战争暨世界反法西斯战争胜利70周年。作为东方主战场,中国付出了伤亡3500多万人的民族牺牲,抗击了日本军国主义主要兵力,不仅实现了国家和民族的救亡图存,而且有力地支援了在欧洲和太平洋战场上的抵抗力量,为赢得世界反法西斯战争胜利作出了历史性贡献。   历史是一面镜子,以史为鉴才能避免重蹈覆辙,对历史我们要心怀敬畏、心怀良知,历史无法改变但未来可以塑造,铭记历史不是为了延续仇恨,而是要共同引以为戒,传承历史不是为了纠结过去,而是要开创未来,让和平的薪火代代相传。   主席先生,各位同事,联合国走过了70年风风雨雨,见证了各国为守护和平建设家园谋求合作的探索和实践,站在新的历史起点上,联合国需要深入思考如何在21世纪更好的回答世界和平与发展这一重大的课题。   世界格局正处在一个加快演变的历史性进程之中,和平、发展、进步的阳光足以穿透战争、贫穷、落后的阴霾。世界多极化进一步发展,新兴市场国家和发展中国家崛起已经成为不可阻挡的历史潮流;经济全球化、社会信息化极大解放和发展了社会生产力,既创造了前所未有的发展机遇,也带来了需要认真对待的新威胁、新挑战。“大道之行也,天下为公”,和平、发展、公平、正义、民主、自由是全人类的共同价值,也是联合国的崇高目标。目标远未完成,我们仍需努力。   当今世界,各国相互依存休戚与共,我们要继承和弘扬联合国宪章的宗旨和原则,构建以合作共赢为核心的新型国际关系,打造人类命运共同体,为此我们需要作出以下努力:   我们要建立平等相待互谅互让、互商互谅的伙伴关系。联合国宪章贯穿主权平等原则,世界的前途命运必须由各国共同掌握,世界各国一律平等,不能以大压小,以强凌弱,以富欺贫。主权原则不仅体现在各国主权和领土完整不容侵犯,内政不容干涉,还应体现在各国自主选择社会制度和发展道路的权利,应当得到维护,体现在各国推动经济社会发展、改善人民生活的实践应当受到尊重。我们要坚持多边主义,不搞单边主义,要奉行双赢、多赢、共赢的新理念,扔掉我赢你输、赢者通吃的旧思维,协商是民主的重要形式,也应该成为现代国际治理的重要方法,要倡导以对话解争端、以协商化分歧。   我们要在国际和区域层面建立全球伙伴关系,走出一条对话而不对抗、结伴而不结盟的国与国交往新路。大国之间相处要不冲突、不对抗、相互尊重、合作共赢,大国与小国相处要平等相待,践行正确义利观,义利相间义重于利。我们要营造公平正义、共建共享的安全格局,在经济全球化的时代各国安全相互关联、彼此影响,没有一个国家能凭一己之力谋求自身的绝对安全,也没有一个国家可以从别国的动荡中收获稳定,弱肉强食是丛林法则不是国与国相处之道,穷兵黩武是霸道做法,只能搬起石头砸自己的脚。   我们要摒弃一切形式的冷战思维,树立共同合作可持续安全的新观念。我们要充分发挥联合国及其安理会在止战为和方面的核心作用,通过和平解决争端和强制性行动双轨并举,化干戈为玉帛。我们要推动经济和社会领域的国际合作,齐头并进,统筹应对传统和非传统安全威胁,防战争祸患于未然。   我们要谋求开放、创新、包容、互惠的发展前景。2008年爆发的国际金融危机告诉我们,放任资本逐利其结果将是引发新一轮危机,缺乏道德的市场难以支撑世界繁荣发展的大厦,富者越富,穷者越穷的局面不仅难以持续也有违公平正义,要用好看不见的手和看得见的手,努力形成市场作用和政府作用有机统一相互促进、打造兼顾效率和公平的规范格局,大家一起发展才是真发展,可持续发展才是好发展,要实现这一目标就应该秉承开放精神,推进互帮互助,互惠互利。   当今世界仍有8亿人生活在极端贫困之中,每年近600万孩子在5岁前夭折,近6000万名儿童未能接受教育,刚刚闭幕的联合国发展峰会制定了2015年后发展议程,我们要将承诺变为行动,共同营造人人免于匮乏、获得发展、享有尊严的光明前景。   我们要促进和而不同兼收并蓄的文明交流。人类文明多样性赋予这个世界姹紫嫣红的色彩,多样带来交流,交流孕育融合,融合产生进步,文明相处需要和而不同的精神,只有在多样中相互尊重彼此借鉴、和谐共存,这个世界才能丰富多彩、欣欣向荣。不同文明凝聚着不同民族的智慧和贡献,没有高低之别,更无优劣之分,文明之间要对话不要排斥、要交流不要取代,人类历史就是一幅不同文明相互交流、互鉴融合的宏伟的画卷。我们要尊重各种文明,平等相待、互学互鉴、兼收并蓄,推动人类文明实现创造性发展。   我们要构筑尊重自然、绿色发展的生态体系。人类可以利用自然、改造自然,但归根结底是自然的一部分,必须呵护自然,不能凌驾于自然之上。我们要解决好工业文明带来的矛盾,从人与自然和谐相处的目标实现世界可持续发展和人的全面发展。建设生态文明关乎人类未来,国际社会应该携手同行,共谋全球生态文明建设之路,牢固树立尊重自然、顺应自然、保护自然的意识,坚持走绿色低碳循环可持续发展之路。在这方面,中国责无旁贷,将继续作出自己的贡献,同时我们敦促发达国家承担历史性责任,兑现减排承诺,并帮助发展中国家减缓和适应气候变化。   主席先生,各位同事,13亿多中国人民正在为实现中华民族伟大复兴的中国梦而奋斗,中国人民的梦想同各国人民的梦想息息相关,实现中国梦离不开和平的国际环境和稳定的国际秩序,离不开各国人民的理解支持帮助,中国人民圆梦必将给各国创造更多机遇,必将更好促进世界和平与发展。   中国将始终做世界和平的建设者,坚定走和平发展道路,无论国际形势如何变化,无论自身如何发展,中国永不称霸、永不扩张、永不谋求势力范围。中国将始终做全球发展的贡献者,坚持走共同发展道路,继续奉行互利共赢的开放战略,将自身发展的经验和机遇同世界各国分享,欢迎各国搭乘中国发展顺风车,一起来实现共同发展。   中国将始终做国际秩序的维护者,坚持走和平发展道路,中国是第一个在联合国宪章上签字的国家,将继续维护以联合国宪章宗旨和原则为核心的国际秩序和国际体系,中国将继续同广大发展中国家站在一起,坚定支持增加发展中国家特别是非洲国家在国际治理体系中的代表性和发言权。   中国在联合国的一票永远属于发展中国家。在此我宣布,中国决定设立为期十年总额10亿美元的联合国和平与发展基金,支持联合国工作,促进多边合作事业,为世界和平与发展作出新贡献。我宣布,中国将加入新的联合国维和能力待命机制,决定为此率先组建常备成建制维和警队,并建设8000人规模的维和待命部队。我宣布,中国决定在未来五年内,向非盟提供总额为1亿美元的无偿军事援助,以支持非洲常备军和危机应对快速反应部队建设。   主席先生,各位同事,在联合国迎来又一个十年之际,让我们更加紧密的团结起来,携手构建合作共赢新伙伴关系,同心打造人类命运共同体,让铸剑为犁永不再战的理念深植人心,让发展繁荣公平正义的理念践行人间。          
573    미국에서 날아온 들을만한 소식 댓글:  조회:4118  추천:12  2015-09-27
                     미국에서 날아온 들을만한 소식               미국과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인 것이다. 국제사회는 양국간의 관계를 주의해 지켜보고있다. 우리 두 나라 사이에 긴밀한 협력이 없다면 이 지구의 허다한 주요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부 정치 전문가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중국을 비판하기란 이전처럼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실력이란 기실 나날이 커가는 중국의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두 나라의 경제와 교육은 밀접하게 서로 얽혀있다. 비록 분기가 첨예하기는 하지만 우리 두 나라가 테러를 타격하고 핵 확산을 방지하며 지구 기후의 변화를 해결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꼭같이 관심을 갖고있는 것이다.   미국으로 놓고보면 중국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되는바 이는 우리들의 경제 무역과 중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를 결정하는것과도 관계된다. 우리는 중국 사람들은 의례 매력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핵계획을 설복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네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남중국해에다 인공섬을 구축하는것을 포함한 기후 변화와 테러 등 문제에 대해서도 념려하고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책이 악마화 되어 중국을 멀리해서야 되겠는가? 그런다면 아시아의 안정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전 지구를 다스리고 온정시킴에 공헌 할 것을 바란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이 우리 미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라는 것과 동아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가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중국의 경제는 세계경제의 12%를 차지하는바 이 근년 세계경제 성장에  1/4의 기여를 한 것이다. 중국은 지구 총인구의 1/5을 차지한다 우리는 협상을 통해 중국이 세계은행(World Bank)과 국제통화기금(IMF)에 더 큰 역할을 발휘하게끔 해야한다.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복잡성을 알고 넓고도 깊게 하면서 협력지역을 넓혀야 한다. 맛서는 데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시장이 소비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발전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거니와 그를 지지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꼭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크거니와 경제발전 잠재력이 있는 발전중의 국가인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과의 유연한 외교와 협력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와 이익을 유지하면서, 두 나라 지간에 존재하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한다.                                           미국 9월24일                    원제목 “미국 언론: 미국은 왜 강대한 중국을 응당 지지해야하는가?”                                          (작자 리 · H · 해밀턴  김송죽 번역)
572    중국침략 원흉들의 끝장 댓글:  조회:4952  추천:3  2015-09-27
  중국침략 원흉들의 끝장         84년전, 일본은 9.18사변을 일으켜 동북을 점령했더랬다. 그 사건은 일본관동군이 조심스레 꼼꼼하게 꾸민 침략전쟁이였는바 원동국제군사법정으로부터 갑급전쟁범으로 재판받은 흉수는 셋이였다.                                     미르 군사 네트워크에서 보낸 정보                                           http://www.miercn.com   첫인물ㅡ 이시하라 미소   이 사람은 관동군의 "뇌"라고 불리였던 자다. 그당시 그는 전일본군에서 두 번째 인물로 손가락을 꼽았는데 일본 육군대학출신이다. 머리가 총명하거니와 지혜가 있어서 육군대학에서는 건교이래 제일 처음으로 나타난 “뇌”라고 불리울지경 떠받들린 것이다.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중국을 침략할 궁리만 꽉 차 있었다. 그러던 차 행운스레 일본관동군 참모장으로 임명되니 그는 좋아라고 인차 9.18사변을 조작했던 것이다.                                 둘째인물ㅡ 도이하라 겐지   도이하라 겐지는 특무두목이였는바 일본사람들은 그를 “중국통”이라 불렀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그를 “토비종자”라 했다. 일본에서 그를 “중국통”이라고 한 원인이라면 그가 중국에서 자라 중국말을 아주 잘했기 때문이다. 이 일본특무는 지어 중국의 여러지방 사투리(방언) 까지도 많이 알았으니 웬간한 중국사람은 곁에 붙지도 못할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일본 스파이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는 그 기관의 두목이 된 것이다. 간첩을 많이 길러냈다. 그는 아이신줘러 부의를 부추겨 만주국을 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였다.   셋째인물 이타가키 시로   이 사람은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 관동군의 사령관이였다。그러니 관동군에서는 제일최고인물이였던 것이다. 그는 1930년에 “참모려행”이라는 구실을 대고 할빈, 금주, 려순등지를 돌았는데 기실은 군사정탐이였다. 일본의 군사고위층에서는 그를 “관동군의 칼”이라 비유해 부른 사나운 인물이다.   이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아주 간단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원동국제군사법정은 그자들을 갑급전쟁범죄자로 판결하여 다 똑같이 교수형에 처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인물 셋중 첫째와 셋째만 목을 달아 죽이고 중간사진인물 도히하라 겐지는 목을 매 죽이지 않았어도 방광암말기여서 심하게 앓던중이라 저절로 죽고말았다. 그는 제 권총을 갖고 놀다가 잘못다뤄 그만 방광을 다친것이 암병을 유발했던 것이다.                                                사진은 셋째인물 이타가키 시로를 처형하는 장면이다. 이자는 죽으면서도 세상에다 웃음거리를 남겼다. 이다가키 시로는 태평양전쟁에도 참여했던바 미국사람을 많이 죽였거니와 특히는 전쟁포로를 지독스레 학대했거니와 제손으로 직접 살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자기가 죽을죄를 졌으니 재판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죽음이 너무나 무서워서 어떻게 하나 살아보려고 온갖 머리악을 다 썻다. 그는 남미로 탈출해 볼 엉뚱한 궁리를 하고는 영국 주둔군 사령관 스미스에게 가치가 $ 300,000에 달하는 백금과 다이아몬드를 줬던 것이다. 그러나 한발도 도망치지 못한채 납작 붓잡혀 판결받고 개처럼 바오라기에 목을 달아매는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사진은 방광암에 결려 죽게된 도이하라 겐지다. 목을 달아매지 않았어도 하늘이 죄많은  그를 몇시간 더 살지 못하게 처벌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불질을 좋아하는 자는 좋은 끝장이 없다. 일본은 이따위 흉범들을 더는 길러내지 말아야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명백히 깨달아야  한다.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