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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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잊지 않을 것이다
2015년 10월 15일 08시 33분  조회:2484  추천:4  작성자: 김송죽
 

                      역사는 잊지 않을 것이다

                         뚜껑을 열어제낀 양현혜(杨显惠)
                                               夹边沟记事

 

        2003년,양현혜가 쓴 <<협변구기사(夹边沟纪事)>> 시리즈 컬렉션이  출판되여였다. 그는 에필로그에 협변구사건은 당시 감숙성위 극좌로선의 산물이라면서 그것은 한차례의 엄중한 정치사건이였는바 감숙의 역사상 한페지를 차지하는 비참한 고통이였거니와 2400명이 넘는 우파들의 고통스런 역사라고 했다. 작가는 자기가 친히 조사해 낸 사실로써 이야기를 엮은것이다. 먼지 투성으로 얼룩진 40년간의 중국 한 구석의 역사다. 그는 그같이 참혹한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원하면서 고비사막에 묻힌 영혼들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역사는 협변구를 절대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였기 때문이다!

 

   1965년이였다. 양현혜(杨显惠)가 하향한 감숙성 생산건설 제11사 6퇀 4련은 란주(兰州)에서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Xiaowan(小宛)농장에 갔는데 그곳은 한심한 시골이였다. 그는 가자마자 각지에서 모여온 병탄의 전우들과 같이 매일 쉬지 않고 황무지를 개간하느라 물도랑을 파는 일을 했던 것이다. Xiaowan(小宛)농장에는 그와 같은 젊은이를 내놓고도 외지에서 온 우파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와서부터 그저 일만 해야 할 뿐 집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농장에서 일만 계속해야 했다. 양현혜(杨显惠)는 그네들이 하는 잡답을 듣고서 협변구(夹边沟)라는 세글자가 어떤곳이라는 것을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뚜껑이 열렷다”

 

   1999년,양현혜는 <<협변구기사(夹边沟纪事)>>라는 시리즈 컬렉션 집필에 착수했던 것이다. 2000년,상해문학은 그의 시리즈 12편을 연재했다. 그렇게 함으로 하여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협변구에서 피눈물나는 고난의 생을 마친 그 우파들의 후대는 드디여 진상을 알게되여 청명절이 돌아오면 무덤을 찾아가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느라 종이를 태우고는 통곡하고있다.

 

   “소설에 사람고기를 먹었다는데 과연 정말인가?”

 

   <<상해문예>>는 2004년초부터 <<딩시시 고아원 크로니클>>시리즈를 연속 발표했다. 그랬더니 한 독자는 전화로 편집부에다 “소설에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 했는게 그것이 사실인가?”고 질문했다. 하여 편집은 자기도  그 대목을 읽을 때 등골이 싸늘하게 얼어들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길래 작가  양현혜(杨显惠)선생께 전화로 물어봤더니 그의 대답인즉은 조금도 허구아닌 사실이라 하더라고 독자에게 그대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작가 양현혜((杨显惠 )는 <<딩시시 고아원 크로니클>>을 한달가량 쓰고서는 필을 쉬우는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 그 자신이 심장이 떨려나면서 아파나길래 부득불 병원에 입원하여 한주일가량 치료받아야서야 나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써내려갔는데 눈물이 자꾸나서 멈출때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일도 있다니 원, 믿기어렵지!” 

 

양현혜의 글은 여기서 줄이고 몇해전 내가 지난역사를 연구하느라 수집해둔 자료 중에서 먼저 152개만 골라 번역하여 묶어놓은 <<음지에 묻힌 비밀>>(5)에 이어서 아래 자료를 첨가하니 보기바란다.

 

                                               음모전주곡

 

1956년의 중국은 이미 건국이래에 련이은 “진반운동”, 지식분자의 “사상개조”, “3반”, “5반”과 “호풍반혁명집단”을 비판하는 등 폭풍취우식의 운동을 거쳐 마침내 평화로운 정치환경에 들어갔다. 이해의 4월 28일,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쌍백방침” 즉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내놓았다.

그는 말한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방침인것이다. 예술상에서 백화제방하고 학술상에서 백가쟁명하는것말이다.”. 

며칠지나 5월 2일에 모택동은 저명한 외국인사들도 참가한 최고국무원회의에서 한번다시 “쌍백방침”을 공개했다.

5월 26일,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학술계와 문화계일꾼 1천여명이 모인 회의에서 륙정일(陸定一)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란 제목으로 보고를 했는데 그는 방침을 계통적으로 천술하면서 당중앙선전부를 대표하여 선포했던것이다.

 “누구나 다 독립적인 사고를 할 자유가 있고 변론 할 자유가 있으며, 자기의 의견을 발표할 자유가 있고 자기의 의견을 견지하고 보류도 할 자유가 있다.”   6월 13일자 <<인민일보>>는 륙정일의 이 보고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쌍백방침”은 평화로운 정치환경을 더 좋게 하는 소야곡이였다.

9월 15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공8차대회에서 모택동은 대규모적인 계급투쟁과 고별한다면서 금후의 사업은 사회주의건설을 위주로 하는 정책을 실현할것이라면서 당내의 주관주의, 종파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정세에서 같은 사회주의진영내의 국가인 폴란드에서 6월에 불쾌한 사건이 생기더니 10월말에는 또 항가리에서 공인들이 거리에 뛸쳐나와 시위를 하면서 경찰과 맞붙어 충돌하여 피까지 흘리는 엄중한 사건이 발생했던것이다.

 반우파운동“전야인 1957년초까찌만도 중공의 중요한 결책자인 모택동은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할 문제에 관하여>>에서 착취계급이 계급으로서 소멸된 이후 인민내부의 모순은 이미 국가정치생활의 주제(主題)로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인민내부의 모순을 해결함에 있어서 잔혹한 투쟁이 아닌 ”단결ㅡ비평ㅡ단결“의 방침을 운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당인사나 민주당파들과도 ”간담상조(肝膽相照), 장기공존(長期共存), 호상감독(互相監督)“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 (百家爭鳴)“의 방침을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57년 4월 30일, 모택동은 천안문성루우에서 민주당과 무당파민주인사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당외인사들이 중국공산당의 정풍에 자원적으로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평하고 의견을 제기하는것을 환영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리하여 북경같은 곳에서는 5월초부터 시작하여 선후 13차나 좌담회를 열고 각 민주당파와 무당파인사들을 초청하여 중공의 정풍을 돕도록 부탁, 동원했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태도가 성근한 것으로 여겨져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은 대담하게 중국공산당을 비평하고 의견을 제기하게되였다.   먼저가졌던 중앙통전부계통의 그 13차의 좌담회에서는 70여명되는 민주당파, 무당파민주인사와 공상계의 인사들이 발언했고 후에 열린 25차의 회의에서는 모두 108명이 발언했다.

당시 중앙통전부장이였던 리유한(李維漢)이 그때의 일을 회상했는데 당외인사들이 그때 제출한 비평과 의견은 대부분이 옳고 정확했으며 좋은것들이였다는것이다. 장계약(張系若)은 “공산당은 교오정서를 자래웠는데 주요하게는 공을 대단히 여기고 눈앞의 성공과 리익에만 급급해 하면서 지난때를 하챃게 여기고 미래를 너무믿는다.”고 지적했고 진숙통(陳叔通)은 “교왕과정(矯枉過正)은 영원한 금과옥률(金科玉律)이 아니겠는가? 희망컨대 중앙은 보수사상이 사회주의건설에 끼친 손실이 크고 맹목적인 모진(冒進)역시 손실을 많이 끼치니 한번 잘 총결지었으면 한다.”고 했다. 류비(劉斐), 양명헌(楊明軒)은 “당과 정부를 갈라놓아야 한다. 당이 정부를 대신하게 말아야 한다.”했으며 웅극무(熊克武) 등은 민주를 발양하고 법제를 건전히해야 한다면서 민법, 형법, 단행법규 등을 틀어쥐고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정풍은 5월중순까지 순조로왔다. 모택동은 “당외인사들이 우리들에 대해 비평이 아주 날카롭기는 하나 기본상에서 성근하고 정확한 것이다. 이런 비평의 90%이상이 우리당의 정풍에 유리롭거니와 우리의 결함을 시정함에 유리롭다고 인정한다”고 말했던것이다.

그러나 점차 일부 당외인사들의 입에서는 첨예하다못해 창궐한 발언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민주동맹중앙 부주석이며 국가삼림공업부 부장이였던 라륭기(羅隆基)는 심지어 “맑스주의 소지식인들이 소자산계급의 대지식인들을 령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들을 령도한다”고 모택동같은 수령인물을 빗대고 공격했던것이다. 보고를 통해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모택동은 지극히 분노하여 5월 15일에 <<지금은 사정이 변하고있다.>>는 글을 써 중공당내의 고급간부들에게 배포했다. 그는 이제는 정풍보다 우파들의 공격을 단호하게 물리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 그렇게 하려고 결심을 내리게 되었던것이다.

 

1957년 5월 16일, 모택동은 <<당전 당외인사들의 비평을 대처할데 대한 중공중앙의 지시>>라는 문건을 친히 작성하여 당외인사들이 “마음 대로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잠시 반박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익분자들이 저희들의 반동몰골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1957년 5월중순, 모택동은 상해에서 중공당내의 고급간부들을 향해 말했다.   “잡귀신들을 굴속에서 나와 떠들어대게해야 한다....이는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그믈에 걸리게 하는것이다.”   인사출동(引蛇出洞)이라 뱀을 굴밖으로 유인해 내는 전술이였다.   모택동은 이 전술을 놓고 후에 <<문회보의 자산계급방향에 대하여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음모(陰謀)라는데 우리는 양모(陽謀)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전에 적들에게 잡귀신은 굴속에서 나오게 유인해야 박멸할 수 있고 독초는 땅우에 돋아나게해야 뽑아버릴 수 있음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항가리아에서 정권을 탈취하기위하여 무장폭란이일어난 사실은 모택동을 몹시 놀라게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그런일이 절대 발생하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항아리아같은 사건이 중국에서는 절때일어나지 말아야지! 후르쇼브같은 인물이 절때 나타나지 말아야야지!”   그렇다면 적은 대체 어디에 있단말인가?

장개석이 대륙은 반공하겠다지만 모택동은 그갓건 눈에다 넣지도 않았다. “미제국주의는 종이범”이라고 한 그였으니까. 지주, 부농,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산자료소유제의 사회주의개조가 완성된 후에는 그들 대부분이 그래도 규칙을 지켜나갈것이다, 그들에게는 밑천이라 는것이 없으니까.... 그들의 발밑에는 빈공간밖에 없다.  

폴란드, 항아리아사건은 모택동에게 두가지 필요성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당이 총을 끝까지 잡고있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식분자를 개조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모택동은 지식분자를 다루기가 제일힘들다고 여겼다. 그는 문제는 지식분자한테서 생긴다고 생각한것이다. 그들은 아는것이 있어서 공산당의 말을 곰상히 들으려 하지 않을것이라 여겼다. 지식분자에 대한 배척심은 이렇게 생긴것이다. 모택동은 자산계급과 그네들의 지식분자, 상층소자산계급과 그네들의 지식분자, 그들속의 우파와 중간파는 공산당과 무산계급의 령도에 대해 달가와하지 않으며 우파들은 지어 대항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먼저 국부를 혼쌀낸 다음 전부를 혼쌀내우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우선 신문계, 교육계, 문예계, 과학기술계의 령도권부터 손을 대기로 했다. 그리하여 주요하게 지식계가 반우파투쟁마당으로 선정된것이다. 모택동은 먼저 입이 바른 지식분자부터 사정없이  꼭대기를 눌러 기를 꺾어버림으로써 본때를 보일작정이였다.

그의 속심이 이러한것도 모르고 1957년 6월 1일, 93학사의 저안평(儲安平ㅡ당시<<광명일보>>주필이였음.)같은 사람은 중국통전부에서 “모주석과 주총리에게 의견을 제기한다”는 발언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교적 날카로운 비판을 한것이다

 

저안평은 이 발언에서 당천하(黨天下), 즉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반대하면서 공산당의 인사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의견을 제기했던것이다.

 

"지금 종파주의가 불거지고있고 당과 대중의 관계가 나쁩니다. 이는 전국성적인 현상입니다. 공산당은 고도의 조직, 기률성을 갖고있는 당인데 이러한 전국성적인 결함이 그래 당중앙과 령도와 관계가 없단 말입니까? 최근에 사람들은 작은 중들에게는 적잖게 의견을 제기했지만 늙은중들 에게는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한가지 사례를 들어서 모주석님과 주총리님한테 가르침을 받자고 합니다. 해방전에 우리들은 모주석님께서 당외인사들과 함께 련합정부를 조직할 것을 제창 한다고 들어왔습니다. 1949년 개국후, 그때 중앙인민정부 6명의 부주석중에서 3명은 당외인사였고, 4명의 부총리중에서 2명은 당외인사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련합정부의 모양새를 갖추었댔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어떠한가, 정부는 개조를 거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자리에 당외인사의자리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원래 중앙인민정부의 몇몇 비당부주석들은 걸상을 모두 인대상무회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말은 그만두고라도 지금 국무원의 부총리들이 열이나 되지만 그중에는 한 명의 비당인사도 없습니다. 비당인사들 중에서 이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지? 혹은 이러한 직무를 감당할만한 사람을이 없어서인지? 당외인사들을 단결하고 전당을 단결하는 념원으로부터 출발하고, 국내와 국제상의 눈길과 생각을 고려해서라도 이러한 인사배치에 대해서는 좀 연구해봐야한다 고 봅니다.”


 저안평의 상술한 발언은 전 중국의 이른바 “우파언론”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것이였다. 감히 발설은 못했지만 중국민주동맹중앙의 부주석 장백균(章伯鈞)이나 라륭기같은 민주당파의 수령들도 저안평의 이러한 생각에 동조했던것이다.  그러나 장백균같은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떠들어대도 되는지 은근히 근심되여 1957년 6월초에 주총리에게 계속 이렇게 명방(鳴放)을 해도 되는가고 물었다. 주총리는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1957년 6월 8일, 모택동은 <<력량을 조직하여 우파분자들의 창궐한 진공에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자>>라는 중공중앙의 지시문건을 작성하였으며 동시에 <<인민일보>>에서는 “이는 무엇 때문인가?”라는 제목의 사론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마땅히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처리해야 했을 정풍운동은 폭풍취우같은 “반우파투쟁”으로 돌변하게 되었던것이다.

 

“반우파투쟁”은 중국의 당대사회의 비극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반우파투쟁”에서는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의 방법이 동원되였으며 전장(戰場)은 당내로부터 당외로 확대되였다. 이해여름부터 가을까지 모택동은 지대한 정력으로 “반우파투쟁”을 지휘하면서 그 전과(戰果)를 확대해나갔다.  이해의 5월1일자 <<인민일보>>에 발표한 “문예보의 자산계급방향을 마땅히 비판해야 한다”는 글에서 모택동은 공개적으로 민주동맹과 공농민주당은 “반당반사회주의”라면서 근본 존재하지도 않은 “장라동맹 (章羅同盟)”을 지명하여 비판했으며 “자산계급우파는 바로 반공반사회주의의 자산계급반동파”라고 락인했다. 그리하여 “적”을 잡아내는 그 운동은 승격되여 대규모의 대중적인 계급투쟁으로 변해버렸던것이다.

형세가 이렇게 되니 장래가 근심되고 불안하여 로심초사 (勞心焦思)하는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지사들은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당시 인대부위원장이였던 송경령(宋慶齡)은 모택동이 “반우파운동”을 전국범위로 발전시키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거니와  몹시놀라 이상하게 여기면서 의아해하였다. 그는 그에게 편지하여 행동이 없는 “반당”적인 우파, 우경인사의 부동한 의견에 대해서는 쟁론으로 처리할것을 촉구했다.

같은해의 6월 10일, 인대부위원장이였던 리제심(李濟深), 심균유 (沈鈞儒), 황염배(黃炎培), 진숙통(陳淑通) 등도 각각 중공중앙정치국과 모택동에게 편지하여 “반우파투쟁”을 전개하는것이  전혀 리해되지 않는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리제심은 이렇게 썼다.

 “정치상 제가 한 말을 제가 부인하면서 투쟁기분을 조성해 대립계층을  만들고 있으니 심원한 상처를 가져올 것이다.”

 

그 에 앞서 1957년 4월 27일, 모택동은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 에서 “이번 정풍운동은 응당 한차례의 엄숙하고도 참다우며 온건하고 부드러운 사상교육운동”으로 되어야 한다면서 “응당 손을 놓아 비평을 고무하여 아는것은 다 말하고 남김없이 말하게 하며, 말한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삼가하며,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참고한는 원칙을 견결히 지켜야한다.”고 했다. 그대로만 한다면 모택동이 말한것과 같이 “집중도 있고 민주도 있으며, 기률도 있고 자유도 있으며, 통일된 의지도 있어서 개인의 심정은 유쾌하고 생동활발한 정치국면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거니와 점점 기로에 빠져들었던것이다

 

까딱하면 꺽떡하는 판이였으니 그야말로 지식분자에 대한 대소탕전이였다. 발언한 사람가운데 우파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전에 우파모자를 쓴 사람을 50만으로 집계했다가 55만으로 된 것을 봤는데 모두 틀린다. 그것은 당중앙에서 세상을 속이는 수작이였다. 실지수자는 400만도 훨씬 넘는것이다.  2006년 1월호 <<쟁명잡지>>에 공개된 “반우파투쟁당안”을 보면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100년 계속해야한다.”고 했다.

 

1958년 5월 3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 선포.

 

우파집단ㅡ 22,071 개.

우경집단ㅡ 17,433 개.   

반당집단ㅡ  4,127 개.  

우파분자로 정한 자ㅡ 3178,470 명. 

중간우파에 든 자ㅡ 1437,562 명.    (그중 당원우파분자 278,932 명. 고등학교교직원 우파분자 36,428 명. 운동중 비정상사망자 4,117명.)

 

"반우파투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은 지식인들이였다. 지식인들은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을 자산계급과 함께 착취계급의 부류에 집어넣고 불공정하게 대하니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해방초기에 집계된 중국의 지식분자수를 보면 다해봐야 500여만 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파로 된것이 460만도 넘으니 그야말로 대 숙청이요 회멸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모택동은 그들을 “반동파”, “계급의 적”으로 몰아  로동개조를 시키고 강직(降職), 감급(監級), 강신(降薪) 등 엄 중한 처분을 주었던것이다. 모두 확실한 법적의거가 없었으며 법적절차 를 밟지도 않았다. 법이 완전히 무시도고만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반우파투쟁”이 “엄중하게 확대화”했다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일으 킨것은 옳았단말인가? 왜 근본 일으키지말아야 할것을 일으켰다고 철저히 부정하지는 못하는가? 모기 한 마리를 잡자고 온 절간에 불을 놓고도 그것은 “필요한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을가?   모택동은 거대한 승리앞에서 점차 교오자만해지면서 주관주의와 개인독단의 작풍이 팽창되었다. 이리하여 당의 집단지도와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위반하게 되었으며 당내민주와 국가의 정치생활은 말할 수 없게 크나큰 손상을 입게되였던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지식분자를 그렇게 잡아먹었던가?.........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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