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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6.
한편 라철은 이루지 못한 거사(擧事)가 무거운 돌이 되어 늘 가슴을 무겁게 짖누르고 있었다.
을사매국역적을 일거에 없새치우려던 암살계획은 맹랑하게도 실패로 돌아가고말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평리원은 부당하게도 그것을 내란죄로 몰아부치고는 다수의 관련자들을 체포, 판결하였던 것이다.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로 류배되였던 라철은 지난해, 즉 1907년 12월 7일에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였다. 그렇다고 가슴이 개운할 그가 아니였다. 실패로 인한 자책감과 후회는 그의 신체를 허물고있었다.
어느날 거리에 나갔던 라철은 한쪽다리가 절단된 불구의 몸을 지팽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뚜벅뚜벅 마주오고있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아니 저 사람 기산도가 아닌가?... 기산도!》
그는 당장 메일것 같은 목구멍을 텃쳐 그를 불렀다.
저쪽은 고개를 치켜들더니 어마지두에 악연하여 이쪽을 보는데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나요, 나.》
《어이구, 이게 라형아닙니까?!》
기산도(奇山度)는 꿈밖에 숙친한 사람을 만나고 보니 무척 반가운지이라 달려올 것 처럼 지팽이마저 버리여 하마터면 그 자리에 꼭그라질번했다.
라철은 그의 팔을 잡아 부축하면서 다시다시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초라한 몰골이다. 왕년의 팔팔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눈물이 막 쏟아지려는 순간이였다.
을사5적을 사살하려고 박종섭 등과 짜고서 각자 분담한 다음 군부대신 권중현을 전동로상(典洞路上)에서 총격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여 악형에 의해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출옥한 기산도였다.
그는 라철먼저 간신배들을 숙청해보려고 동지몇을 포섭해 결사대를 조직했던 협객이다. 출옥하니 거사를 도모하다 함께 체포됐던 김석항(金錫恒)은 옥사했고 동지들은 다 흩어져버렸다. 하여 내내 모진 고통과 절망에 빠진채 정처없이 이 고장 저 고장 전전하면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오늘 서울로 돌아온건데 자기처럼 거사를 하려다 실패한 라철을 만나니 눌렸던 격정이 폴발하고 있었다.
《우린 어쩜 다 실패만하는지 원! 생각하면... 라형은 그래 무사하십니까? 난 보는바와 같이 그런대로 한쪽다리는 붙어있어서 절망을 안합니다. 악귀같은 그녀석들을... 》
기산도가 저주를 토하는데 두 눈은 어느덧 살기로 번쩍거렸다.
마음이 아직도 죽지 않았으나 그것은 눈물겨운것이였다.
《거기서도 보오만 의병투쟁이 아직 끊지를 않고있소. 이게 다 왜적의 횡포무도한 그 잠식정책에 반항이 생기여 그러는게 아니겠소. 그리구 또한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일신일가의 영예와 부귀만을 탐내여 국가와 민족의 전체존망은 념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왜적의 주구노릇에 눈이 어두운 자들, 온 조정의 저 육식배들을 족히 신뢰할 수가 없어서 지금도 애국용사들은 일어나 혈전분투를 하고있는게 아니겠소.》
《거야 과연 잘하는게지요. 안그렇습니까, 라형?》
《내가 하고푼 말인즉은 그렇게만 할것이 아니라는거요.》
라철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나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피는 피대로 흘리면서 목적은 이루지 못할 것 같소. 우리는 원래 무기가 충분치 못하고 사졸의 훈련도 부족하며 또한 수에서도 강적을 상대키 어려운 형편이요. 뻔하지. 대비가 안되거든. 그럼에도 각 의병진은 단합은 물론 련락도 부족하여 소통이 원만치 않은 형편에서 싸워왔고 지금도 그멋으로 싸우고있단말이요. 그러니 패배야 정해진게 아니겠소, 안그런가?... 그리구 과도한 군자금은 백성을 괴롭히고... 일진회분자를 닥치는대로 살해해서 되려 적의 앞잡이만 증가케하고있으니 명지한 노릇이 아닌가하오.》
라철은 무슨 계책이 나와야 한다. 성패여하(成敗如何)를 불구하면서까지 몸에서 피가 뛰는 동안은 호미와 도끼를 들고라도 사워야한다면서, 하나의 적이라도 죽여야 한다면서 적혈로써 맛서 겨루지만 결과는 참혹지 않으냐면서 최근에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무고한 백성이 학살된 정황을 쭉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싸워보지도 않고 망하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하고말게 아닙니까, 라형? 안그런가요?》
《싸워야지, 물론 싸워야하구말구. 하지만 그 싸움이 지금의 형태로만 유지돼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키 어렵겠다 그거요.》
라철은 이러면서 성공도 못하는 5적암살을 시도하였다가 동지가 희생되고 잔페로 되었음에 몹시 가슴아파 끝내 눈물을 내비치였다.
두사람은 싸움에서 좌절은 당할수 있지만 싸우지도 않고 물러앉는 민족은 영원히 망해버리고말것이니 원쑤왜놈과는 목숨이 다할때까지 대결해야한다면서 갈라졌다.
이틑날 정훈모(鄭薰模)가 라철을 보러왔다. 늘 만나서는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속을 태워온 동지였다.
《일제의 탄압은 발광적이고 겨레의 피고기는 즐벅히 땅을 적시고있거니 이제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마도 의병항쟁으로만은 이 나라를 구하기가 힘들 것 같구만요.》
정훈모가 하는말이다.
《내가 어제 기산도를 만낫더랬소. 우연히 길에서.... 육체가 불구된 것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구만. 역신놈들을 사살치 못하고...이젠 의병항쟁도 피만 흘렸지 보람없이 그 모양으로 끊나고말것이 번연하니 나도 장래가 우려되면서 안타까움만 갈마드오. 그렇다고 맥을 버리고 주저앉을수야 없지 않소?... 잠이 오지를 않누만. 기산도는 그런 몸을 갖고서도 목숨이 붙어있는한 원쑤와는 대결을 하리라는 결심이였소. 옳지, 옳구말구! 우리는 그래야지!》
《대결이라...하다면 라선생은 어떻게, 무슨 방법으루서?...》
정훈모는 역시 답답함을 못이겨 함께 방도를 찾자는 것이였다.
이에 라철은 입을 다시열었다.
《우리 한번 다시 외교를 해봄이 어떨가하오.》
《무슨 소린지요?!》
정훈모는 대방을 다시본다. 뜻밖이라는 기색이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망국의 일민으로 좌시(坐視)할 수야 없지. 한번다시 우리의 요구를 청구하고 달래여보자는거요.》
미친개를 달랜다고 온순해질리는 없건만 라철은 전에 그가 만나본 일본정객들 거개가 그의 력설에 귀를 귀울이며 동정을 표시하던 일을 상기하고는 한번다시 이 길을 택하여 성공을 보려했다. 그것은 희망이 묘연하면서도 포기하기는 아쉬운 유혹이 담겨진 꿈이였다.
이시각 정순모역시 생각을 다시굴려보았다. 일본정계의 요인들을 재다시 력방하여 그들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현재 한국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무참한 대학살을 우선 제지하고 국면을 돌려세워보자는 라철의 말에 일리가 있는것 같아서 그는 동감을 표시했다.
이리하여 그들 두사람은 행차준비를 했고 그것이 끝나자 이해 즉 1908년 11월 말에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향해 출발했던것이다.
라철로놓고 보면 이것이 네 번째되는 도일(渡日)이였다.
파도세찬 현해탄을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보람이 있겠는지?...
현재 일본에 살고있는 동포수는 다해봐야 459명. 주로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친일정치망명객과 류학생, 외교관, 상인, 로동자와 그의 가족이였는데 그나마 그들은 모여살지 않았다. 도꾜, 오사까, 교또, 히로시마, 후꾸오까, 야마구찌, 나까사끼 등지에 널려있었으니 그야말로 쌀에 뉘라고나할가. 그러니 동포들의 따뜻한 마중이나 집단적인 모임같은건 꿈에서나 바랄일이였다.
두사람의 이번행차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외로운것이였다.
도꾜. 고맙게도 왜국의 이 수도는 구태의연해 정감이 좀 났다.
청광관(淸光館ㅡ 江戶川區 櫻田 本鄕町 13番地)역시 어제날의 그대로였다.
년령이 50대중반인 이마가 쫄딱벗어진 대머리 여관주인도 그대로 정정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구면인 라철과 그의 동행자 정훈모를 친절스레 밪아주었다. 일반적인 보통객으로가 아니라 국사로 오래간만에 다시오는 한국의 민간외교사절로 여겨주면서 례의를 차려서 반가우면서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한, 청, 일 3국이 호상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우의로써 부조하라.>>
이것이 맨처음 왔을적에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정계요로(政界要路)를 역방하면서 호소하고 전달한 의견서의 요지였다.
이또오 히로부미, 오호꾸마 시게루와 모찌스 유다로ㅡ이들은 실제상 대륙침략을 추진한 일본정계요인들이였다. 라철 등이 역방한 사람은 바로 그들이였다. 그때 라철일행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정계의 추이(推移)와 반응을 밀탐하느라 도꾜에 그냥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바라던것과는 아주 영 딴판으로 번지였다. 그 기간에 저주로운 을사조약은 체결되고말았던것이다. 라철은 그 조약을 맺느라 한국에 특파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항의서한을 발송했다. 그리고는 내용이 그것과 같은 항의서한을 또 한통 써서 메이지천황에게도 보냈던것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니 결국은 한강에 돌던진 격이였다...
마쯔무라, 우찌다, 오까모도, 도야마ㅡ 이른바 동양평화론자라는 통감부고문이니 흑룡회의 핵심간부니 하는 그 정객들을 라철은 다시 역방했다. 어떻게 하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한국에서 일본군이 피비린내나는 탄압을 거두고 일본이 늘 말해온, 한국을 독립시켜준다고 한 낙언(諾言)을 지켜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번에도 담벼락과 말한다는것을 몰랐고 소귀에 경을 읽는다는것을 몰랐다. 왜서일가? 그건 바로 자기가 다시찾은 정객들은 다가 양대가리쓰고 개고기파는 승냥이였기 때문이다!
대방의 정체에 대해 이같이 깜깜했으니 행여나 하고 믿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라철과 정훈모는 그 일본정객들을 역방하면서 그래도 순진하게 다소의 희망을 걸고있었다.
그달 12월 5일(음력 11월12일) 아침이다. 뜻밖에도 그들이 숙박하고있는 청광관 옆방에서 한 노인이 이쪽으로 건너와서 단군포명서(檀君佈明書)와 고본신가집(古本新歌集), 입교절차(入敎節次) 등 서적을 전하면서 라철과 말하는것이였다.
《나의 성명은 두일백(杜一白)이요. 나이는 69세인데 백전도사(伯栓道士) 등 32명과 함께 백봉신사(白峯神師)에게 사사(師事)하고 갑진(甲辰) 10월 초3일에 백두산에서 회합하여 일심계(一心戒)를 같이받고 이 포명서(佈明書)를 발행한 것이니 귀공의 금후 사명은 포명서에 대한 일이요.》
《?......》
로인은 이러고는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렸다.
정순모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그렇지만 라철은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이러한 일이 이번만이 아니였으니까. 그를 놓고 보면 이번이 두 번째였던것이다. 1906년 1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그가 서울에 도착하여 서대문에서 세종로방향으로 걸음을 놓고 있을 때 한 로인이 삭풍에 백발을 휘날리며 급히 뒷쫓아와서 그한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대가 라인영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라철은 무심중이라 이상히 생각하며 로인을 바라보았다.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號)는 두암(頭巖)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命)을 받고 라공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
로인은 말하고나서 백지에 싼것을 주고는 총망히 가버렸던 것이다.
오늘 보니 그들 두 노인이 사사(師事)한 신사(神師)도 같았으나 전한 책은 각각 달랐다. 로상(路上)에서 백두옹으로부터 받은 것을 집에 도착해 펼쳐 보니 그것은 <<31神誥>>(삼일신고)와 <<神事記>>(신사기) 각 한권이였다.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서산락일같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혼신의 힘과 노력을 다하는 판이라 그것에 관심이 갈 리가 없다. 그는 전에 받은것도 한구석에 방치해둔채 아직 한번 펼쳐 보지도 않은 것이다.
《내가 언제...》
두 노인이 전달한 것은 종교에 관한 사명인지라 라철은 이 시각에도 역시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보다싶히 당면한 과제가 대일민간외교에 관한 문제인데 언제 그런 것을 다 생각하랴.
<<우리 여기를 떠나버리기오!》
라철은 그를 거절하느라 숙소를 청광관에서 개평관(蓋平館ㅡ東京 森川町 新坂上)으로 옮겨버렸다.
그러나 로인이 그를 놓아주려하지를 않았다.
닫새만인 12월 9일밤에 그 로인은 다시찾아왔다. 이번에 그는 라철과 동숙하고있는 정훈모를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의 교화(敎化)를 펴시오. 》
그의 말을 듣고 라철도 정순모도 다 숙연해졌다.
로인은 다른말은 더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같이 간곡한 부탁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연히 사라져버렸다.
이날밤 그들은 자리에 누웠어도 도무지 잠을 이를수 없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니 가슴에는 천사만려가 꼬리물고 일어났던것이다.
《국운은 이미 다 하였다... 쓸데없는 일로 다닌다?...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거라?...》
라철은 로인이 한 말을 다시다시 뇌이면서 음미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도 한번 깊이생각해보았다. 국운의 회복이 어느 애국정객이나 지사 몇 사람의 민간외교 또는 매국노암살로 될것이 아니였다. 피를 흘리며 싸우기는 해도 전민족이 거족적으로 일치 단합하지 않고서야 어디될것인가?...안된다, 그러면 안된다! 국파민멸(國破泯滅)의 근본원인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민족전체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모화(慕華), 사대(事大)의 외곡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의당 있어야 할 민족의식이 가리워졌기 때문이 아닌가말이다. 사상적구심체 즉 다시말해 주체적인 자주독립사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가!?....
민족의식을 살려야한다! 라철은 이때에야 비로서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야말로 민족생명의 근본체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자면 그를 지성으로 숭봉(崇奉)하고 그 교화의 대은(大恩)아래에서 신화(神化)의 큰 힘을 입어야할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성취될수 있겠는가? 그는 이 점을 깨달았다.
그렇다, 민족의식을 계발하고 민족을 묶어 세우는 응집력은 바로 그 민족의 종교에서 힘차게 약동하고있는것이다!
《이미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복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할 것이오. 말해보오, 안그렇소? 》
라철이 오랜 생각 끝에 마침내 정리해낸 말이였다.
정훈모 역시 그와 생각이 마찬가지였다.
12월 9일날 밤 개평관(盖平館)까지 찾아왔던 두옹(杜翁)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다. 깨달음을 준 그 한마디ㅡ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라던 그의 힘차고 정성어린 권고야말로 얼마나 값진가! 그것은 어느 한 선견지명이 있는 수도인의 구국방략으로만 볼것이 아니였다. 정녕 그것이야말로 온 민족을 구원해 내시는 거룩한 한배검의 묵시(黙視)라 하겠다!
라철은 흡사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것만 같았다. 이제 가야 할 앞길을 고쳐잡은 그는 정치를 단념하기로 결심하고는 이틑날 정훈모와 함께 귀국했다.
(어서 신교(神敎)를 중광(重光)하자, 종도(倧道)의 재천명으로 민족의 앞날을 바로잡고 병탄(倂呑)당하려는 조국의 애운(哀運)을 회복시키자! 동양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행복을 증진시키자!)
그가 품은 커다란 리념이였다.
어느덧 1909년이 되었다.
정월 15일 자시(子時).
서울시 북부 재동 취운정아래 8통10호 여섯간 초가집에 라철(羅寅永)을 위시하여 오기호(吳基鎬), 강우(姜虞), 최전(崔顓), 유근(柳槿), 정훈모(鄭薰模), 이기(李沂), 김인식(金寅植), 김춘식(金春植), 김윤식(金允植)...등 18명의 생사를 같이하고있는 동지들이 모이였다.
북켠벽에 『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그들은 숙연한 기분속에서 제천(祭天)의 대례(大禮)를 열어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였다.
<<今日은 惟我 大皇祖檀君聖神의 4237回 開極立道之慶節也ㅡ라 愚兄等 13人이 太白山(今之白頭山)大崇殿에서 本敎 大宗師 白峯神兄을 拜謁하고 本敎의 深奧한 義와 歷代의 消長된 論을 敬承하와 凡我同胞姉妹에게 謹告하노니 本敎를 崇奉하와 善을 趨하며 惡을 避하 야 永遠한 福利가 自然히 一身, 一家, 一邦에 達하기를 希願하나니다. 嗚 呼라 汪洋한 天派萬流의 水도 其源을 塞하면 渴涸하고 鬱蒼한 千支萬葉 의 木도 其根을 絶하면 枯摧하나니 況千子萬孫의 人族이 其祖를 忘하고 어찌 繁昌하기를 望하며 安泰하기를 期하리오....>>
이로써 고려 원종때 몽골의 침입으로 하여 700여년간이나 페새(閉塞)되였던 신교의 교문은 다시금 열리였다. 이것은 암흑이 뒤덮인 한말(韓末)에 한줄기의 서광이 될 것이였다. 민족의 앞길을 비춰줄 홰불이 될 것이였다. 하기에 이날이야말로 겨례의 새 력사를 창조한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이날이 바로 중광(重光)절이다.
제1세교주는 라철이였다. 그를 홍암대사(弘巖大師)라 불렀다.
중광(重光)이라는 의미는 어둠에 잠겼던 단군교를 다시 밝혔다는 뜻인것이다. 그러한즉 단군교는 라철자신이 창시한 것이 아니라 몽골의 침략으로 700여년동안이나 단절되였던 것을 그가 다시 중광창립한 것이다.
포명서에 밝히기를 모든 물줄기도 그 근원을 막으면 말라버리고 울창한 나무도 뿌리를 자르면 말라버리는 것에 비유하여 모든 동포도 선조 즉 단군국조(檀君國祖)를 잃어버리면 번창할 수도 없고 평안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대처키 위한 장구적인 구국방략으로는 오로지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한 민족종교를 창립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여야만 장차 어느때든 국권회복을 성취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라철이 공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를 만들지 않고 종교단체로 발족한 의도는 다른 것이 아니였다. 이같이 종교를 내세움으로써 일제의 눈을 얼마간이라도 가리워 그자들의 무자비한 피비린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명서에는 또한 단군교를 신봉한 기자(箕子), 고구려 동명성왕, 을지문덕형제, 광개토왕 등은 모두 잘 되었으나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와 신라는 망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대조영(大祚榮)이 단군교를 신앙했기에 발해(渤海)는 300여년간 창흥(創興)한것이고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시대에는 단군교를 신앙하였기에 번성하였다가 불교, 유교로 쇠망하였다는 것을 말했고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가 이 신앙을 독신(篤信)하여 가정의 견문을 승습(承襲)하였으나 그후 몽골의 침략으로 망하게되였다고 하였다. 모두어 말하면 온 조선의 력사를 놓고 보면 단군을 섬기고 단군교를 신앙하면 임금도 백성도 잘되고 외래의 종교인 불교와 유교를 신봉한 자나 국가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포명서에 이렇게 밝힌 것은 한민족 모두를 자기의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신사(信似)하게 만들어 두리에 굳게 뭉치게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때문에 단군교의 교리는 민족주의사상으로 관통된 것이다.
<<大皇祖의 子孫된 兄弟姉妹야 兄은 弟를 勸하며 姉는 妹를 勸하여 一人으로 十人, 十人으로 百千人, 百千人으로 萬億人까지 同心同德하야 兄의 慶이 弟의 喜며 姉의 慽이 妹의 悲니 一弟의 慽으로 衆兄의 悲를 生치말고 一妹의 慶으로 衆姉의 喜를 成케하소서.>>
백봉신사(白峯神師)란 어떠한 인물인가?
홍암대종사(弘巖大師) 라철은 <<두형면담기(杜兄面談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杜翁이 曰 伯佺氏는 33人의 最長兄이니 本是白頭山人이라 道德神明이 白峯道師의 次席이므로 大宗師께서 伯佺으로 呼名하시니 知者는 伯眞人이라 한다. 年齡 90이오 號는 頭巖이니 日行500里하되 其行蹟을 不得見이오 지금 滿洲等地에 住居한다. 又曰 伯眞人의 奉敎修道는 弱冠時부터인데 其淵源이 실로 白峯道士의 傳統이 되지만 伯兄은 固辭不受하고 常曰吾道의 傳統은 必有其人이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백봉신사는 일찍이 남보다 먼저 앞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피하여 백두천산에서 수도에만 힘쓴바 실로 성통의 경지에 이르러 령명(靈命)의 묵시를 받고 1,000여년전에 밀장한 신서를 얻은 후 전수할 주인공을 찾으려고 문도(門徒) 백전과 두일백 두 늙은이를 내놓아 그들로하여금 신출귀몰하게 국내외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라철을 찾아 전명(傳命)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억측으로 허구해낸것도 아니였다.
단군교는 그야말로 다난속에서 명맥을 이어내려온 배달민족의 교라하겠다.
문건기록은 아래와 같이 되어있다.
<<우리 대교는 한배검의 진리의 교훈이신 5훈 366언 (천훈, 신훈, 천궁훈, 세계훈, 진리훈)으로써 교리의 정경을 삼으며 이것이 곧 분3합1의 진종대도(眞宗大道)를 말함이오 또한 본경전이 31신고인 것이다. 31신고는 우리 한배검께서 홍제인세의 대리념으로 팽우(彭虞)에게 명하사 그 가르침을 받게 하시고 고시(高矢)는 동해가에서 청석을 캐어 오고 신지(神誌)는 그들에 고문(古文)으로 새기어 전하니 이것이 신고(神誥)의 고문석본(古文石本)이요 그후 부여조 (夫餘朝)의 법학자 왕수긍(王受兢)이 은문(殷文)으로 단목(檀木)에 새겨 읽게하였으니 이를 은문단본(殷文檀本)이라하는데 석본(石本)은 부여조선 국고에 간직한바되였고 단본(檀本)은 위씨조선시대에 전하여 오다가 모두 병화(兵火)에 소실되였다.
지금 전하는 신고는 고구려조에 한문(漢文)으로 번역한것인바 발해문왕(渤海文王)태조왕(太祖王)의 찬문(贊文)과 야벌님의 서문과 극재사(克再思)님의 강법등을 다시 엮어 봉장기(奉藏記)를 덧붙이니 이것이 어찬진본(御贊珍本)인바 문왕님은 전대에 석, 단 두본이 소실되여 후세에 전치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거금 1,300여년전인 大興 3년 3월 15일에 백두산 보본단(報本壇) 석실중에 밀장하였던 것이다.
소서서(素書序)에 황석공이 장자방에게 소서를 밀전한 후 자방은 이를 받아 정진수련하다가 전할 사람이 없어서 죽을 때 관속에 넣어 간 것을 500년이 지난뒤 어떤이가 그를 짐작하고 파내여 세상에 전하였다는 설도 있거니와 이 신고(神誥)도 발해문왕께서 석실중에 봉장한 이래 1,000여년이 지나도록 알지 못하고 있다가 천행으로 우리 백봉신사께서 백두산에서 10년 도천(禱天)하신 지성의 대공으로 한배검의 묵시를 받아 얻으신 후 홍암대종사에게 밀전(密傳)하시였던바... 오늘에까지 전해온다.>>
단군교가 중광되자 나온 것이 노래 <<단군가>>였다.
노래는 곧 선전이였다. 의병들의 선전은 통문, 격문, 격고문, 방문 등 대개가 종이에 찍거나 쓴 글이였지만 <<단군가>>입으로 부르는것이여서 전달이 빨랐다. 그런것 만큼 선동성도 커서 신도가 많아지기시작했다.
단 군 가
우리 천조단군께서 백두산에 강림하사 나라 집을 창립하여 우리 자손에게 주시였네.
거룩하고 거룩하다. 대황조의 높은 은덕 거룩하다.
모든 고난 무릅쓰고 황무지 개척하사 량전미택 터를 닦아
우리 자손 기르셨네. 잊지마세 대황조의 높은 은덕 잊지마세.
모든 위험 무릅쓰고 악한 중생몰아내사 해와 독을 멀리하여 우리
자손들 살리셨네. 잊지 마세 잊지 마세 대황조의 크신 은정 잊지마세
착한 도를 세우시고 어진 정사 행하시와 대동산하 빛내시고 억조
자손에게 복주셨네.
잊지마세 잊지마세 대황조의 넓은 신화 잊지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대황조의 자손된 자 우리 형제자매들아
백년만첩이나 지내어도 변치마세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겨례 모든 인중 우리 자매형제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으로 빛내보세 빛내보세 대황조의 베픈 신교 빛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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