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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23.
23.
滿洲! 상고(上古)로 말하면 대황조단군께서 5교와 366사로써 3천여 단부(團部)의 9족을 가르치고 일토산인왕 수긍(一土山人王 受兢)이 기자(箕子)의 망명무리 5천여명 교민에게 5교와 8관법을 가르쳐서 주나라와 무릇 7,8백여년간이나 항쟁을 계속하였고 중고(中古)로는 고려가 수나라 당나라를 상대로 근 백여년동안의 혈전이 있었으며 료나라와 금나라가 송나라를 정복한것과 아이신줴러(愛親覺羅)가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판도를 확장한 것들이 모두 만주에서 발단되여 동양력사의 중요한 부분을 창조한 것이다.
한데 이 만주땅은 너무나도 오랜 시기를 잠자고 있었다. 미개지의 잠자던 땅은 언제나 개척자의 피땀과 생명에 의하여 깨여나고 생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1677년(강희16년)에 청나라정부는 백두산의 량측으로 갈라져 흐르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1천여리 되는 광활한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로 삼아 봉금지구로 정하고 이주하여 가 개간하며 인삼을 캐고 진주를 채집하거나 벌목하고 사냥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또한 저들의 사냥터로 정하여 놓고는 이족의 이주를 엄금하였다.
1860년대에 조선 북부지방에서 년년이 보기드믄 재해가 드는 통에 기아에 모대기던 조선의 백성들이 솔가도주하여 국경너머의 만주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청정부는 이런 이주풍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거니와 이 이주민을 리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제수입을 늘이려는 목적으로 1880대에 이르러 비로서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압록강, 두만강의 찬 물결에 그 어느 날이면 동포의 그림자가 비끼지 않았으랴!? 특히 국치이후부터는 단신으로 혹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부녀대로 살길을 찾아서 강을 건너 만주로 이사오는 이가 급증하여 행렬은 끊기지 않았다. 하여 만주에 거류하는 동포가 어느덧 45만에 이르고있었으니 그들에게 만주땅은 희망의 복지나 다름없는 곳이였다.
서일이 입원치료기간에 그의 가족은 현천묵, 박기호가정과 함께 계화의 부름대로 왕청현 춘명향 덕원리에 안착했다. 그곳은 류수하가 가로질러 건너간 작은 벌판이였는데 량옆에 큰 산이 솟아있고 동쪽으로 마반산이 멀리 바라보이였다. 그리고 북쪽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었다.
이 덕원리가 왕청벌판에서는 제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동쪽으로는 새 마을들이 하나 둘 일어서고 있었다.
30여호 되는 덕원리에 한학서당이 있어서 박승익이라는 청년과 심권이라는 두 청년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생수는 린근마을에서 통학을 하는 애들까지 해서 모두 32명이였다. 이사호가 계속 쓸어들고 마을이 하루다르게 커지고 있으니 학생래원도 자연히 많아져 선생 둘이서는 근본 되지도 않을것이요 교학방법도 당장 현대식으로 고쳐야 할 것이였다. 하여 서일은 병원에서돌아오자마자 그 두 선생과 상론하여 우선 서당을 사립명동학교(私立明東學校)로 고치고 현천묵, 박기호와 그의 처까지 해서 선생 여섯이 학년과 학과를 각각 떼맡아 교학하기로 하였다. 교장은 서일이 되였다.
함일사범을 졸업하고 국립학교에서 정규적인 현대식교학을 해오던 유능한 선생들이 지금 학생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덕원리는 어느덧 별칭이 학교마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름나게 되였다. 그래서 외지의 학생이 점점 더많이 모여들었다.
3월말에 생각밖에 늘 그립던 이홍래가 문득 장기덕과 장사학을 데리고 나타났다. 서일은 현천묵, 이홍래, 계화와 상론하여 그들을 포함한 10명인원갖고 계획대로 “重光團”을 창설했던것이다. 단장은 서일이 되었다. “중광(重光)이란 교문(敎門)이 다시열린다는 것인데 실질은 순수한 무장단이였다.
서일은 이제 교두(敎頭)룰 직접만나서 입교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이홍래는 장사덕과 장사학을 데리고 의병 모집을 나섰다...
9월말의 어느날 봉오동 하촌에서 안무가 최진동의 편지를 한통 갖고 서일을 문득 찾아왔다.
편지의 내용은 서일더러 모든 편리를 돌봐줄테니 자기네 마을에 와서 학교를 크게 꾸려줄수 없겠느냐 하는것이였다. 최진동은 학교도 학교려니와 그보다는 영향혁이 있는 사람을 자기켠으로 끌자는 욕심이였던 것이다.
서일은 믿어주고 생각해줘 고맙다는 답신을 쓰면서 이곳에도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 미안하다는 것으로 그의 청을 좋게 사절했다. 이번 학기까지 보내고나서는 곧 중학반까지 설치해 교육을 승급시키자는 것으로 이미 토론도 되었기 때문이다. “重光團”을 확대발전시키자면 실질적인 일들을 많이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청일대 동포들의 절박한 요구며 기대와 희망이기도했다.
안무가 돌아가자 며칠안되여 이번에는 박순호가 제 사촌동생 박기호를 보러 왕청에 왔다. 그는 가정을 봉오동 하촌에 두고 지금도 의연히 홍범도의병대에 들어있는 몸이였는데 하는 말인즉 자기들은 경원의 일본수비대와 한바탕 싸우고 방금 돌아왔다는거다.
이때는 조선에 진주한 제2사단이 조선주차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환이 이끄는 평산반일의병대를 없애려고 보병 16개중대, 기병 2개중대, 헌병과 경찰 80여명을 동원하여 곡산, 시변리, 금천, 신막을 동부지구로, 이 지역의 서남쪽인 개성, 봉산, 재령, 신천, 태탄을 서부지구로 구분하여 초토화작전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련계를 취하기 어려워 김정환의병대를 도와 홍범도의병대가 협력하려해도 어려울것이였다.
봉오동 하촌의 최진동은 홍범도의병대를 자기 마을에 주둔케했다고 한다. 그를 자기 세력범위내로 꿀어당긴 것은 그곳을 독립항일기지로 만들자는 것도 있거니와 무력단체를 흡입함으로써 동만에서의 자기 지위를 높이자는 속셈도 있기 때문이라고 서일은 분석했다.
《이제 나는 속이 쑤셔나겠는데 어쩌면 좋을까?》
박순호가 근심하는것이였다.
《아니, 어쨌다구 속은 쑤셔납니까?》
서일이 의아쩍어서 물으니
《이젠 어느때 가야 또 나가 싸워볼지 아득해서 그래. 싸움이 없으면 농사질이나 하고 지방보위를 해야 한다나.》
짐승사냥이나 했지 농사일에는 취미없고 깜깜이니 그러는 것 같았다.
《숨도 돌릴겸 그러는것도 괜찮지요. 농사질하건 보위를 하건 그래도 여유시간이야 많을텐데 짬짬이 글이나 더 배우지요. 거기에 취미를 붙인다면 속이 덜쑤셔날겁니다. 늙기전에 많이 배워두는게 랑패없지요. 아는게 힘입니다.》
서일이 충고했더니 박순호는 그 말이 맞겠다면서 허허 웃더니 초달에 매이여 공부하는 서당 초학동이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외는것이였다.
《신령재상 천시천청 생아활아 만만세강쇠》
(神靈在上 天視天聽 生我活我 萬萬歲降哀)
들어보니 대종교 교도들이 봉신성원(奉身成願)의 주송(呪頌)인 각사(覺辭)였다. 서일은 이 교도가 자기의 교를 대체 어느정도 알고나있는가를 알고푼 생각이 나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물어봤다. 그랬더니 박순호는 대답이 막혀 난색을 지으면서 자기와 같은 의병친구 여럿이 홍범도를 따라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모두 이런식으로 우선 암송해놓고 본다는것이였다.
《뜻을 딱히 모르면서 외기만해선 뭘합니까. 자 내가 알려드리지요. 그건 이런 말입니다. <가마히 우에 계시니 한으로 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서일은 알려주고나서 백지에다 한글로 써까지 주었다.
그것을 감사하게 받은 박순호는 돌아가 모두들 이대로 외우게해야겠다면서 서교장은 어느때 입교했는가고 물어왔다. 그의 물음에 서일은 자기는 아직 교도가 아니라 했다. 박순호는 아니 지식이 많고 애국심있는 분인데 왜 아직 대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느냐면서 섭섭해하기까지 했다.
《난 아직 리해가 깊지 못합니다. 생각해보고 맘에 들면 그때가서 입교하지요. 그래도 되겠지요?》
박순호는 되다말다 거야 자유지요 하면서 웃었다.
박승익과 심권은 이미 입교한 대종교도였다. 지우 셋중에 대종교인이 먼저된 사람은 현천묵이였다. 그는 만주로 망명오기전에 고향에서 입교하여 지금 포교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도 어느날 서일보고 어서 입교하라 왜 입교하지 않느냐 재차 권유하면서 자기는 그사이 참교(參敎)로 승임(陞任)하기까지 했다고 자랑하는것이였다.
서일은 대종교에 대해 그 어떤 이의를 갖거나 거부감이 있어서 선듯이 들지 않은건 아니였다. 동포계몽을 중시하고 학교건설에만 몰두하다보니 아직은 그쪽으로 생각이 돌지 않은 것이 한 원인이고 다른 한 원인은 그 종교의 교리와 일본의 황실중심주의를 대비적으로 연구하여 우선 량자간의 동일성과 차이점을 찾아낸 후에 보자는 생각이 있기도했기 때문이다.
대종교인이 되었다는 홍범도를 생각했다. 그는 홍범도를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왜놈과 목숨걸고 싸우는 이 포수출신의 의병장을 전부터 맘속으로 은근히 존경해온거다. 이번에는 경원의 일본수비대를 들이치기까지 했다니 자못 감사한 일이라 서일은 궁리하던 끝에 안해가 자기를 입으라고 지어준 조끼를 박순호에게 줘 보내면서 당부했다.
《이 마고자를 홍대장께 갔다드리시오. 경원싸움을 축하해서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몸체가 저만큼하다니 그분께도 맞을겁니다.》
살림살이에 예산이 밝고 남의 인정을 중히 여기는 서일의 안해는 용정에 계시는 이동춘선생의 은혜를 많이 졌는데 자그마한 성의라도 표시해야할게 아니냐면서 그에게 보낼 양털조끼도 하나 이름지어 떠놓았다.
이동춘선생이 손수 만주땅에다 일떠세운 학교만도 수십처되거니와 애국적인 지식인들은 거의가 자기처럼 만주의 곳곳에서 동포계몽사업에 투신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동포가 사는 마을이면 학교가 생겨나고 어떤 곳에는 지어 중학교까지 일어선 것이다. 서일은 그 학교들과 우의를 맺을 겸 학생용 교재문제같아나 용정에 한번 갔다와야했다. 그때 그는 이동춘선생께 드릴 선물을 갖고가리라했다.
한편 이달문은 여지껏 계화의 집에 거접하고 있다가 로시아와 만주를 넘나들던 이동호군수가 서일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덕원리에 오고 담사리의병 장기덕이와 동학당의병 장사학도 덕원리에 오니 이달문은 계화의 집에서 나와 아예 초가집 한채를 짖고 넷이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서일이 이동호군수보고 왜 식솔을 데려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동호군수가 하는 말이 내가 덧에 치일려구 그리로 가겠느냐고 도리질하면서 산 사람이야 제살도리를 하겠지 하는것이였다. 그는 처와 딸 둘을 경원에 버리고 온 것이다. 서일은 그를 념려해 이 일을 계화와 말했더니 계화는 장기덕과 장사학에게 임무를 주어 그들을 데려오도록했다. 그랬더니 그 두사람은 과연 국경을 넘어가 닫새만에 군수의 식솔들을 데려왔던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 한채를 어렵지 않게 지어줘서 이동호군수는 홀아비집단에서 나와 일가가 살림을 따로하게 하게 되였다. 이러자 며칠안되여 또 이덕수라는 양반과 김기석이라는 양반이 덕원리에 와서 이달문 등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다. 그들도 다가 의병출신인데 나이는 중년을 훨씬 넘긴 50대의 점잖고 학식도 대단한 분들이였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대오가 해산되여 흩어져 문전걸식을 하면서 불계지주(不系之舟)의 몸으로 떠돌던 의병들이 하나 둘 왕청 덕원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일은 계화와 같이 그들을 오는 족족 따뜻이 대해주면서 유감없게 안주(安住)시켰다.
왕청은 길림성의 관할내에 들어있다. 길림성은 본래 길림장군(吉林將軍)이던 것을 청나라 광서(光緖) 33년에 지금의 행정기구로 고친것인데 이해 즉 1911년(선통3년)초에 이를 서남, 서북, 동남, 동북 4道로 정해놓고 아래의 10부(府), 1주(州), 5청(廳), 18현(縣)을 관할케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장차 어떻게 변해버릴지 모른다. 한것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바야흐로 자산계급혁명이 발발이 일어나고있기 때문이다. 정권을 뒤엎는 이 혁명 이 동란이 어느때 어떻게 끝날지, 누가 이 땅의 주재자가 될지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였다.
중국은 조선과 달랐다. 이 곳에서는 호수가 300여호가 넘는 부락은 촌(村)이라 칭하고 호수가 그 정도에 달하지 못하면 일률로 툰
(屯)이라 불렀다. 덕원리는 호수가 아직은 촌급에는 미달이여서 툰(屯)이라 해야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툰자를 붙이지 않고 습관대로 그냥 덕원리라 불렀다. 그래도 아무튼 툰장(屯長)은 있어야 할게 아닌가.
여지껏 계화가 도맡아서 툰장노릇을 해오나다름없었다. 그것은 이 마을을 그가 손수 개척한거나 다름없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망이 높은 사람을 고를수 없다는것과도 관계된다. 허나 지금와서는 달라지는 형세였다. 호수가 점점 많이 불어나고 주민역시 많아지고있다. 그러니 자연히 다다소소 생기는 일이 많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쌓이였다. 계화 혼자서 마을의 일을 처리할라니 대종교의 일도 돌볼라니...일심양력으로 하건만도 다해내지 못해 헤매치고 있었다. 사람의 능력은 한도가 있는게 아닌가. 혼자서 그렇게 눈코뜰새 없이 허우적이다가는 어느때 맥진해서 쓰러질지 모른다.
이 마을 사람들 마음은 선량하건만 한을 너무 부려먹는구나.
서일이 물어봤다.
《마을의 시교회에 대종교 골간이 몇분이나 됩니까?》
《이민혁이가 있소. 그가 말고도 한씨, 소씨, 김씨... 사람이야 여럿되지. 왜 그러오?》
《마을의 사업을 혼자서 너무 그렇게 무리하게 하지 마시오. 그러다가는 정말 쓰러지고말겠습니다. 신외무물이라 제 몸도 돌보셔야지요.》
서일은 이제부터는 마을의 사업을 분공하여 해나갈것을 제기했다. 어떻게 분공한단말인가? 주민들이 입교하는 추세로 보아서 이 덕원리는 조만간에 대종교마을로 되고말게 아닌가. 그러니 차라리 대종교에서 마을의 모든 일을 떠맡고 계화는 거기서 몸을 빼내여 자기 서일과 함께 학교나 잘꾸리자는 것이다. 단신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의병들을 계속 받아서 “重光團”에 가입시키고 정도에 따라 그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면서.
《아니 뭐라오? 사람웃긴다. 서선생, 나더러 글을 가리치라말구 차라리 거부기등에서 털을 긁어오라하구려!》
계화는 하지도 못할 일을 시킨다며 두손들다.
《아닙니다. 글을 가르치라는게 아닙니다. 중광단원이 계속 늘텐데 합숙을 지어 그들을 합숙에 넣고 관리해얄게 아닙니까. 저의 말은 책임을 져달라 그겁니다. 학교의 모든 후근사업을 말입니다.》
《오 그렇지! 중광단원이 늘면 학교는 후근일이 많아지겠군. 그러니 사람이 있어야지. 관리인원이. 내가 하지. 책임지고 잘할수 있어.》
계화는 그제야 흔쾌히 나섰다.
둘은 의합이 맞아 곧 군중대회를 소집했다.
이번 대회에는 온 마을의 남녀로소가 다 참석했다.
서일은 그들에게 마을이 변해가고있는 실태에 대하여 분석하고 미래의 전망을 말하면서 앞으로 마을의 모든일과 관리를 대종교에서 떠맡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돼야 하는 리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모인 군중들은 두손들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툰장에 참교 한승묵이 추천되고 독실한 교도들인 소진묵, 김려환, 엄호, 이민혁 등이 부촌장 혹은 협조적인 책임위원으로 되었다. 그들은 다가 마을분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잘하리라 결심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서일의 연설을 듣고싶어했다.
서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했다.
《동포 여러분! 회고해 보면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연안은 우리들 배달민족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았던 곳입니다. 이 삼대강은 세계에서 4대문화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중국의 황하나 인도의 간지스하나 애급의 나일강이나 메소포다미아의 유푸라테스강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곳인겁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배달민족의 지배하에 있지 못하게 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하면서 왜적을 끌어들인 신라의 죄과였습니다. 동족상잔의 대결이 결국은 조상이 물려준 땅마저 잃고만게 아닌가요?....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력사를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땅을 도루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는 그따위 비극이 이제 다시는 재현되여서는 아니된다 그겁니다. 우리는 그 옛날 선조의 그림자가 비끼였고 발자국이 찍힌 이 력사유구의 땅을 근거로 국권회복의 지(志)를 다시다지고 기(氣)를 키워야합니다... 고향을 사랑하듯 이 땅을 다 같이 사랑합시다!》
서일의 이 호소는 망국한에 잠긴 모든 동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서일은 왕청에 오자부터 사실상 이 지방 동포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인 대종교와 더불어 사상을 이끌어주는 향도자로 부각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있는 박식과 애국심과 동포애와 상하 비천을 가리지 않는 포섭력과 성근한 열정을 사람들은 보았기 때문이였다.
(동포사회를 잘 꾸려야한다. 구국항쟁은 오로지 그 토대우에서만이 효과적으로 해나갈수 있다.)
서일의 절실한 깨달음이였다.
계절은 드팀없이 찾왔다.
나무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산천이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있었다. 이것이 망명하여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이였다. 공기맑아 상쾌한 기분이다. 국치의 한을 이역의 자연이 달래주는가싶었가. 한데 아직 한해도 안되는 사이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오른켠에 높은 산, 앞쪽으로는 벌판이 바라보이는 덕원리는 서일이 길림병원을 떠나와 첫발을 들여놓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것도 자연이요 변화무쌍한것도 자연이로구나!)
동포들의 이주가 이토록 심함이 육안으로 느껴지고있는 어느날, 서일은 마을을 나왔다. 용정으로 가는 것이다. 동행인은 계화였다.
기차도 자동차도 없었다. 질러가도 거진 이틀이 걸려야 하는 먼길을 두 사람은 마차가 있으면 타고 없으면 걸어가기로 맘먹고 떠났다.
그들은 마을밖을 나서자부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리맥이 드는줄을 몰랐다. 길동무가 잘되는 걸음이였다. 그들이 내처 걸음을 놓아 근 백여리길을 줄이였을 때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하는데 저 앞쪽으로부터 난데없이 노래소리들려왔다.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갈수록 종설음 더욱 아프다
조상의 피로써 지킨 옛집을
백주에 남에게 빼앗기고서
처량히 사방에 표랑하노라
눈물을 뿌려서 조상하여라
그것은 듣는 이의 가슴을 애절히 내리훓는 국치추념가(國恥追念歌)였다.
두 사람이 나타났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주향해 오고있었다. 방금 노래를 부른 이들이다. 한데 가까이 온 것을 보니 둘다가 30대의 장년이였다.
《동포구만! 어디로들가오?》
서일이 말을 걸었더니
《발이 가는대로 가지.》
둘중 하나가 마지못해 대꾸하는데 퉁명스러웠다.
《산저쪽에 마을이 있소?》
이번에는 계화가 그들을 향해 물어봤다.
《있습니다. 저 산굽이를 착 돌면 나지지요. 건데 되놈의 부락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젊은이가 알려주고는 걸음을 다시놓으며 노래불렀다.
조국을 잃어버린 류랑족으로
수만리 이역에서 설움받았네
지는 해 돋는 달을 피눈물로써
일시도 잊지 못할 조국의 광복
《저 노래가 가슴을 훑는구만요. 의병일가?》
《감정을 내는 솜씨가 맹물같지는 않네. 독립지사같으군.》
서일과 계화는 걸음까지 머추어 선채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이윽토록 지켜 보면서 나름대로 신원을 졈쳤다. 떠돌이를 하지만 어딘가 어중이 떠중이는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두사람은 다시 걸음을 놓으면서 지금 이 낯설은 만주땅에는 저같이 떠돌이하는 망명 의병과 지사가 얼마나 될가고 점쳐보았다.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주어야 한다. 문전걸식을 하지 말고 안착하여 일하여 자급자족(自給自足)을 하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서일은 여보시오 친구 왕청에 가거든 덕원에 들리라구 거기에 가면 장돌뱅이 모양으로 떠돌이를 말라고 잡아둘거야 하고 일러줬을걸 그랬구나 했다.
그들은 다음날 오후에 용정에 닿았다.
이동춘선생이 마침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어서 왕청에서 간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와 계화는 구면이였다. 계화도 처음 동만에 와서는 그의 신세를 많이 졌노라 말한적이 있다. 서일은 문안인사를 하고나서 갖고간 조끼를 내놓았다. 이동춘은 기쁜 기색이 되어 잘 입겠다며 고맙게 받아주었다.
방안에는 이미 다른 손님 한분이 와있었다. 중등키에 콧수염이 감실감실한데다 얼굴색이 희고 준수하게 생긴 30대초반의 장년이였다. 이동춘은 먼저 왕청에서 간 이쪽 둘을 그한테 소개했다. 그랬더니 그는 먼저 상벌이 돼보이는 계화에게 허리굽혀 공손히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서일의 손을 맞잡으면서 웃음짖더니 무람없이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난 김동삼이요. 무인(戊寅)생이니 나이는 올해 서른셋이구. 듣자니 서선생은 신사(辛巳)생이라며? 사실 그러하다면야 내보다 소금물을 삼년 덜먹은 셈이지. 안 그렇소? 하하하...》
《그렇지요. 김선생이 소금물을 삼년이나 더 자셨으면야 형님벌이 되지요. 난 싫은대로 형님이라 부를수 밖에. 안그렇소? 하하하...》
서일도 따라서 소탈하게 웃었다. 서로가 초면이건만 그들은 이렇게 어느덧 숙친한 친구마냥 스스럼없었다. 동지라면 응당 이러구지내야지 하는 그들이였다.
김동삼(金東三)은 1878년 6월 23일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자(字)는 한경(漢卿)인데 만주로 건너와서 절개를 상징하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맘에 들어 호를 일송(一松)이라 지은거다.
일찍부터 나라의 쇠약이 국민의 무지에 있음을 깨닫고 고향의 완고한 풍습을 혁신느라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던 그는 1908년도에 마침내 유림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교육의 선구인 사립 협동학교(私立協東學校)를 세워 교감이 되어 계몽사업에 힘썼던것이다. 신민회의 골간분자였던 그는 올봄에 독립기지건설과 독립투사 양성기관을 설치할 조직의 결의에 쫓아 평안남도에서 이상룡(李相龍), 이계동(李啓東)과 더불어 열혈청년 7명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와 이회영 형제들이 자리잡은 류하현 삼원보로 간 것이다. 그는 거기서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 선생들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의 일에 전력하고 있었다. 류하현의 경학사가 만주에서 한민족(韓民族)으로서는 자치기관의 간판을 내건 독립운동단체의 효시(嚆矢)가 되는거다.
김동삼은 독립운동에 몸을 내번지고 뛰여 다니는 대단한 열성가였다.
《그러잖아 왕청까지 가려했는데 만났으니 됐소. 올봄에 조성환선생이 북경으로 돌아가시던 걸음에 류하에 들려서 서선생의 얘기를 자상히 하더구만. 왜놈을 피해 만주에 와갖고 제 동포의 손에 그런 변을 당하다니 원. 우린 모두 기가 차서 웃었소...그래 상한 안질은 어떻소?》
《보다싶이 이렇게 불뚝눈이 됐지요. 세상을 잘 보라구.》
서일의 해학적인 어투에 모두들 하하하 웃었다.
《참 이시영선생도 서선생하구는 구면이라구 얘기를 하시더구만. 언제 신채호하고 같이 만난적이 있다며... 그래, 그래, 시영선생도 회영선생도 모두 다 무사히들 지내고 있지. 신채호는 불라지보스톡에 건너갔는데 지금은 거기서 <해조신문>을 발행한다누만.》
김동삼이 알려주는 소리였다.
지난해에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같이 중국에 망명한 신채호는 함께 청도(靑島)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방안을 론의한 바 있다. 그러나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설계를 했으나 자금문제로 착수하지 못하고 신채호는 불라디보스톡에 건너가 이종호(李鍾浩)의 자금으로 “海朝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사상고취와 동지규함에 노력하고있었던 것이다.
김동삼은 이동춘과 지난해에 건립된 경학사의 상황을 소개하던 중이라면서 경학사는 경술국치를 당하고나서는 군사양성이 시급함을 느끼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소장(所長)에 이 광(李 光), 교원에 김창환(金昌煥), 남상복(南相復), 이장녕(李章寧), 이 흡(李 洽)을 두어 로소를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게 하여 올 4월까지 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노라했다.
《대단하네요!... 과연 잘하는구만요!... 》
서일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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