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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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半島의 血 제1부 29.
2012년 10월 04일 18시 58분  조회:3944  추천:0  작성자: 김송죽
 

  29.

 

    12월초에 김태근이란 청년이 수원을 지나가는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지였다. 이것은 일본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강제로 체결한데 대한 조선인민의 반항심을 표명하는것이였다.

   각 학교들에서는 잠시 중단했던 교학을 회복했다. 

  《서선생님 <통문>이 왔습니다. 보신 후 다른분께 넘겨주십시오.》

   어느날 한학교에서 같이 사업하는 성이 리씨인 중년의 선생이 백지에 활자로 찍힌 새 전단을 주었다. 서일이 받아 보니 그것은 서울에서 13도유생을 대표하여 26명이 련명으로 낸 통문이였다. 원래 통문은 사람들이 서로 돌려본다는 의미에서 회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 일본이 임진년이래 한하늘을 같이 이고 살수 없는 원쑤인데 매국도배는 원쑤임을 잊어버리고 강화하여 갑오년 국보를 빼앗기는 해를 자아냈으며 또 을미년 왕후의 망극한 변을 당한것을 어찌 참아 말하겠는가....지금 사세가 우리 부형을 해치며 우리 자제들을 잡아가두며 우리 처자를 릉욕하며 우리 몸뚱이    를 훼상하는 것이 목전에 박두하였다.... 저놈들이 전국의 요새와 군용지를 점령하고 함부로 량민을 죽이며 무덤과 집을 파고 헐어버리며 화페를 고갈시키는 등 백가지 재난을 들씌우고있다....어떻게 평일의 고정된 의리만 고수하여 팔장을 끼고 물러앉아서 천만고에 없는 비상한 변고를 순수히 받고 필경에는 살        아서 용납할 곳이 없는 사람이 되고 죽어서 돌아갈 데가 없는 귀신이 될가부냐....전국인민이 죽기로써 한몸이 되어가지고 안으로는 선정을 하고 밖으로는 강한 적을 막아내자....>>

 

   이것은 나라와 민족앞에 일대 위기가 조성된 조건하에서 보고만있지 말고 반일의병과 같은 무장활동에 적극적으로 용감히 나설 것을 호소한것이였다.

   이 통문은 문장이 꽤 길었다. 통문에는 또한 일본의 침략적인 만행이 강화되고있는 조건하에서 무장활동만 벌릴것이 아니라 기타 다른 형식의 투쟁도 할 것을 제기하면서 몇가지 지적했다.

 

    ㅡ탁지부고문 메가다는 전국 재정을 통괄하여 화페교환을 한다고 하며 구화페는 전부 일본으로 실어가고 소위 300만원차관조목에 있는 새 화페는 꼴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국고는 비고 상업은 페지되여 가니 메가다의 해임전에는 결전바치는 것을 거부할 것.

    ㅡ일본물산가운데 비록 요긴하게 소용되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무역하지 말 것.

     ㅡ기차와 기선이 비록 편리하다 하더라도 절대 타지 말 것.

     ㅡ전신과 우체는 이미 빼앗겼으니 절대로 리용하지 말 것.

 

   《이건 소극적이구나. 하지만 일본놈들의 간계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그를 반대할걸 것을 호소하니 민족적 각성을 높혀주는게로구나.》

    서일은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통문은 끝으로 전국인민이 침체가 없게 할 것을 요구하면서 반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선민족이 아니라고 각자 타일러주자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의 교인 및 상인, 유람인을 절대 침해하지 말라했다.

    서일은 이 구절을 읽고나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틀렸어. 틀렸어. 일본을 성근하게 보는건 아니겠지. 하다면 왜 이런건 제기하는가? 그자들이 남의 나라를 먹으려고 꾀하면서 림기응변의 교활한 모략과 계책을 쓰고있는걸 모르는군. 타국에 와서 사는 일본인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거의가 정치적 두뇌를 갖고있는 자들일세. 행상군이건 유람객이건 심지어 매음녀까지두 렴탐군질을 하고있는거야. 암암리에 국정을 탐지하고 민정을 료해하며 각 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저희들의 기관에 밀고하니 응당 경계심을 갖고 대하라고 선전을 해야지.》

   《옳은 말씀이요. 왜놈에 대해서는 특히 경계를 해야합니다.》

통문을 주던 리선생이 서일의 말에 동감하면서 여러해전에 김창수(김구)라는 젊은이가  길을 떠났다가 치하포의 배주인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단발을 한 사나이 하나가 조선말을 썩 잘하고있지만 일본 사람인것이 분명해 의심을 품고 자세히 살펴보니 흰두루마기밑으로 칼집이 보이는지라 적개심이 끓어 올라 적수공권으로 달려들어 죽여놓고 보니 아니나다를가 과연 일본군 중위 아무개여서 그자의 피를 먹고 시체는 강에 던져버려 일본 랑인의 손에 비참히 살해된 국모의 원쑤를 값은 일을 상기했다.

   그번의 살인안건이 신문에 공개돼 한때 그토록 들썽했건만 사람들은 벌써 가맣게 잊은모양이다.

   1906년에 들어서자 1월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림시 대리통감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은 소네아라스께와 함께 잠시 조선을 떠나 총망히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가 가자 대리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및 대구 등 20여개소에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되였다.

  《거류민단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쉽게 말해서 그것은 저쪽 섬에 있는 나무를 이쪽의 대륙에다 옮겨 심듯이 바로 일본이 우리의 이 삼천리강토에다 저들 야마도민족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것이다. 그들이 왜서 뿌리를 내릴가? 그건 후대를 번식시키기 위한 작업을 벌리기 위해서다. 그들 야마도민족이 번창하게 될 그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때 가서 우리 조선민족은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제비가 배암이한테 제 보금자리를 잃듯 결국은 그자들에게 제 땅을 빼앗기우고 황막한 어디론가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 지경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없는 민족이 되고마는것이다. 세상에 그래 이런 일이 없었던가? 유태민족 하나만을 보자. 그들도 본래는 국가가 있는 민족이였다. 기원전 11세기에 지금의 팔레스티나지방에다 저들의 이스라엘왕국을 건립하고 유태교까지 창립했었다. 그랬다가 기원전에 바빌로니아인의 입구(入寇)로 멸망하고, 국민은 바빌론에 잡혀갔다가 바빌론이 멸망한 후에야 팔레스티나에다 다시 새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 1ㅡ2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제국에 정복되여 그들의 왕국은 영원히 멸망하고만 것이다. 유태민족은 거의가 자국땅에서 쫓겨나 구라파 각지에 흩어져서 박해받고 도살되거나 아니면 생존부득 타민족에 동화되고말았다.... 보라, 그것이 그래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개미같은 죄꼬마한 미물도 제 굴을 짓고 살거니 짐승도 제 사는 령지는 갖고있는 것이다. 한데도 인간으로 세상에 태여나갖고 살아 제 몸 하나 용납할 곳 없고 죽어도 묻힐 땅조차 없는 처지가 된다면?.... 그 이상 비극은 없을 것이다. 안그런가?》

   서일은 시사강연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사생전체가 집합하고 사회청중까지 많이 모인데서.

  《유태의 비극이 우리 앞에 떨어져서는 아니된다!》

  《민족의 운명을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내 나라 내 당을 빼앗기우지 말고 우리는 지켜야 합니가!》

   ......

   사생과 청중모두가 그의 강연에 감응되여 부르짖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일본경찰에 구속되였던 장지연은 이해의 1월 24일에야 비로서 풀려나왔다. 하지만 그는 사장직을 사임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은 2월 11일에 정간이 해제되여 12일부터 속간했다.

   3월에 이또오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소네 아라스께가 부통감으로 정식부임되여오자마자 주한(駐韓) 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그러면서 이 한달사이에 61,9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조선땅에 끌어들였다. 저들의 거류민단을 보호하는 한편 13도 방방곡곡에서 다시금 발랄해지고있는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백번 죽여 마땅할 저 늙은 여우가 권리를 다 틀어쥐였으니 이제... 조선을 지도에서 마저 색갈이 변해버리게 하자고 박차를 가할것이다.)

   조선침략의 장본인이요 괴수로 여기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해 오니 서일은 더 불안하여 증오했다. 한들 지금은 무슨 수가 있는가? 그는 교학에 열중하는 한편 국세를 연구하느라 매일 여러가지 신문들을 빠짐없이 보았다. 

   이러던 중 어느날 그는 뜻밖에 서울서 오는 편지 한통을 받게 되였다. 발신인을 보니 신채호였다. 편지내용인즉 자기는 근일에 양기탁(梁基鐸)선생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론설기자로 들어갔노라 알려주는것이였다.

  《친구여, 축하한다!》

   서일은 즉각 전보를 날렸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고 있었기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 신문인들 얼마나 무사할지 념려되였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정간이 해제된 두달후인 3월 17일에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이 3일간 정간을 당했다. 그렇게 된 원인인즉 검열에 걸린 기사를 완전히 없새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문의 3월 17일자 문제의 단편란 時事寸言은 어린아이라도 남에게 여러번 속으면 나중에는 만단으로 꾀어도 듣지 않는 법인데 어른이요 또 재상이라는 사람들이 자꾸만 속으니 딱하다는 말로 시작되여 정부에서 내 나라 일을 내 자유로 못하고 남만 철옹성같이 믿더니 믿는 나무 곰쳤다고 비유하여 로씨아만 믿다가 로씨아세력이 약해지니 이제는 일본만 믿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힘을 길러 자주독립을 기하자는 내용이였다.

   그 글을 서일은 다시 한 번 읽어보았었다.

   한데 정간처분을 받았다가 속간된 날자에 발표된 기사 역시 은유적으로 할말은 해서 볼만했다.

   <<.....본월 17일 신문잡보 중 시사촌언이란 구절을 검열에 내지 말라 하여 글자를 뒤집어 놓는 때에 혹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혹 그저 두기도 하여 반박지게 된 까닭에 경무 고문실에서 본 사장을 불러 검열하는 영을 받지 않았다 하고 삼 일 정간을 시키는고로 그 동안 신문을 발간치 못하였다가 작일에 그 기한이 다한고로 금일부터 발간하오니 청위는 조량하시려니와 우리가 한 마디 경고할 것은 어서 학문 힘쓰고 일을 하여 국력이 부강하여 이런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 발간 하도록 하시기 바라압. >>

                                        ㅡ 帝國新聞  1906년 3월 21일

 

    한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전기한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항일적 태도를 보도하였을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한국황제께옵서는 한국독립을 重念(중념)하사 正大(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勅語(칙어)로서 不允(불윤)하셨다.》(1905년 11월 18일)고 보도하는 등 일관해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무효와 반일적인 론조를 거리낌없이 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이와같이 한국민의 통분한 심정을 과감하게 대변하기 때문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이 신문은 여적 극단의 배일언론을 고창해왔어. 양기탁도 그렇구, 신채호도 그렇구, 황의민도 그렇구.... 신랄한 필봉으루 통감부를 공격하고 정부를 공격하니 통감은 머리를 앓고 대신역적은 간담이 서늘할거다.》

    서일이 박기호와 말했다.    

   《거야 물론이지.》

   《한데 이를 받아 보는 독자야 속이 후련하겠만 신문이 그냥 이렇게 나가다가는 장차 어떻게 될런지 그게 은근히 걱정이 되는구나. 보다십히 이 신문은 일제의 침략정책수행에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될테니까.》

   《그러면야 절치부심을 하지.》

   《온갖의 수단을 다해서 해치려할건데....》

   《제발 무사해야하는데.》

    두 사람은 혈맹이나답지 않게 극친한 친구로 사귄 신채호의 신변과 그 신문사에 몸을 잠그고 언론투쟁을 벌려나가고 있는 양기탁 등 담량있는 우국지사들의 신변을 은근히 걱정했다.

    한편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 신문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였다. 

   《한국내의 신문이 가진 영향력은 비상한 것이라 이 이또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중에서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정이 있는 일본의 제반악정(諸般惡政)을 반대하는 한국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그는 신경을 세우고 운운했고, 통감부 총무과장은 5월 6일에 이르러 본국의 외무차관에게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영국인 경영자이자 기자인 에네스트 토마스 베델(한국명 배설: Ernest Thomas Bethell)은 배일적인 론조를 펴고있으니 추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강박체결로 인하여 온 국민의 분노와 원한은 극도에 달하고있었다.

   10년전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궐기하였던 제1기의 의병운동이 충주와 제천에서 패한 후에 각지에 숨어서 재기를 노려오던 주모장들은 이번 기회에 다시금일어났다.

   전참판(前參判) 민종식(閔宗植)은 삼남각지를 다니면서 동지를 결합하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 5월에 정재호(鄭在鎬)와 함께 충남 정산(定山)에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본에 선전(宣戰)하였다. 동월 17일에 람포를 점령하고 19일에는 홍주성을 확보하여 군세가 자못 강력하였다. 하지만 항전한지 10여일만에 신식무기로 장비한 적의 련합병을 대적하지 못하여 그만 패하고말았다.

   영덕인 신돌석(申乭錫)은 녕해에서, 이은찬(李殷贊)은 원주에서 각각 기의하였다. 그 외에도 각지 의병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전참판이며 유림의 숭배를 받는 최익현(崔益鉉)은 원래 서울에 올라가 궁궐앞에서 상소투쟁을 하려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석달전이던 3월에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방면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서신을 판서 이용원(判書 李容元)과 김학진(金鶴鎭), 관찰사 이도재(觀察使 李道宰), 참판 이남규(參判 李南珪), 곽종석(郭鐘錫), 전우(田愚) 등에게 보내여 같이 국난을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하였으나 모두 이에 불응하였다.

   1906년 5월 6일에 최익현은 제자 림병찬(林秉瓚)을 비롯한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문생(門生) 80명을 모아놓고 도학(道學)을 강의하면서 국가가 위급존망지추에 있으므로 의병을 잃으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두 선생을 따르겠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고을에 있는 무기를 거두는 한편 23일에는 일본이 저지른 16가지 죄행을 폭로 규탄하는 글을 써서 일본정부에 보냈다. 이때까지 반일의병장들은 인민들을 투쟁에 일떠세우기 위한 격문에서 일본침략의 죄행을 폭로규탄하였지만 정부를 상대로 직접 정치적 공세를 들이댄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 쓴 전사민(全士民)에게 고하는 격고문(檄告文)은 선동력이 매우 강하여 살포되자 린근의 군, 읍이 모두 향응함으로 태인반일의병은 단시일내에 군기와 인원이 급증하여 천여명이 장사진을 이루고 곡성, 순창 등지로 진군하게 되였다.

   최익현은 의병지휘성원들을 고루되 귀천을 가르지 않고 재능에 따라 선발하였다.

  

    <<사람을 쓰는데서 어찌 문벌을 론하랴. 광대나 백정이라도 지혜와 용맹이 있으면 상좌에 맞이한다.>>      (<갑진일기> 2월)

   

   또한 군사규률을 정하고 그를 지키지 않을 때에는 엄격히 처벌하도록 하였다.

         1. 제마음대로 옛습관만을 믿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

         2. 비밀리에 간사한 무리들과 통하여 군사기밀을 루설하는 자.

         3. 진중에서 적과 상대하여 무서워하고 겁내며 뒤로 물러서는 자.

         4. 촌가를 겁탈하거나 남의 부녀자를 음관하는 자.  

                                                    (<갑진일기> 2월)

 

    태인의병대는 5일에는 정읍, 7일에는 순창을 공격하여 적을 쳐부시고 소총 45정, 화약 110근, 납철 두말을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켰다. 이밖에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과 세곡을 빼앗아서는 의병대의 군자금과 군량으로 충당하였다. 일본이 순창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꾸려놓았던 통치체계는 파괴되였고 장악하였던 넓은 지역은 의병수중에 장악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은 의병대를 무력으로 계속 탄압하는 한편 국왕의 이름을 빌려 회유문을 보내는 따위의 기만술을 썼다.

   

  《많은 무리들아, 빨리 마음을 고치고 뉘우쳐서 즉시로 마음을 돌려 더욱 학업에 힘쓸 것이다. ..또 학교규정을 넓혀서 지방선비들로 하여금 나아갈 곳을 알게 하고 때때로 장려하여 실지 사용에 이바지하게 할것이니 모두들 다 잘 알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황성신문> 광무10년 6월 11일)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동요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할 기세로 나왔다.

   일본은 남원과 전주, 광주에 있던 토벌대와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왜가 아닌 같은 동족인 전주진위대, 남원진위대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최익현은 군령을 내렸다.

   《나는 동족끼리 서로 박대하는것을 원찮으니 너들은 즉시 해산하라!》     그러나 유생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마 작별하지 못하여 100여명이 남아 선생을 지키였다. 이날 오후 6시경에 총소리가 련달아 일어나 천지가 진동하게 되자 최익현은 좌우를 돌아보며 타일렀다.

   《여기는 죽는 곳이니 모두 물러가라!》

    탄환은 빗발치듯 날아와 기와가 부서지고 벽이 무너졌다.

    인명피해가 많았다.

    아직 22명이 남아있어서 최익현을 호위하고 떠나지 않았다.

    밤 8시경. 문득 탄환이 벽을 뚫고 날아오더니 청년장교 정시해(鄭時海)를 꺾구러뜨려 숨을 거두게 했다.

    최익현과 함께 살아 남은 사람은 임병찬, 최제학 등 불과 12명. 마침내 일본헌병대의 손에 전원이 체포되여 동월 26일 서울에 있는 일본 헌병사령부를 거쳐서 최익현과 임병찬은 쓰시마(對馬島)로 압송되고 나머지 지사는 혹은 석방, 혹은 단기형을 언도받았다.

    이 쓰시마의 이즈하라(嚴原)에는 이미 홍주의병진의 유준근, 이식 등 9명지사가 구금되고 있어서 신산(辛酸)한 생활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최익현은 식음을 전페하고 임병찬 등에게 유소(遺疎)를 받아쓰게 했다. 한편 일본 수비대장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최익현을 협박, 항일의지를 굽혀보려했으나 허사였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와 위용은 오히려 그자마저 감동케 했다.

   12월 31일 최익현은 적의 땅 감금소에서 한많은 생을 마쳤으니 향년 74세. 그의 곧은 절개와 우국단성(憂國丹誠)은 실로 동서고금에 유례가 흔치않은것이다.                        

  
                        <誓詩>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뛰는 것은

                충성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왜적을 치는 것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그가 생전에 남긴 시다.  또 하나의 다른 시는 이러했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탑낼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최익현과 그가 지휘해온 태인반일의병의 투쟁행적은 늘 신문에 보도되여 온 국민이 다 알고있는 관심사로 되였기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유림의 거두로서 일찍이 대원군을 탄핵하여 정계에서 쫓겨나게 한 인물이다. 대원군을 몰아낼 때 민비일파에게 리용되여 한때 벼슬이 판서에 까지 올랐으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허다한 소장(疎狀)을 올렸다가 간신배의 모략으로 제주도며 흑산도 등에서 귀양살이를 하기도했다. 최익현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친일역당의 무리를 성토하는 문서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십여년간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선봉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내외의 적을 론리적으로 공박성토하였다. 그의 사상체계가 비록 고루하고 보수적이긴하지만 민족심과 애국심은 말할수 없이 강하거니와 절개는 대처럼 곧았다. 하길래 서일은 그를 맘속으로 존경하고 숭배하면서 깊이 따랐던 것이다.   

 

<<일본인이 비록 가볍고 깜찍하며 무례무의(無禮無義)하여 인도(人道)에 합치지 못하건마는 그 강력(强力)이 독승(獨勝)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능히 그 심력(心力)을 합하여 애국(愛國)하기를 애신(愛身)하기보다 더하는 탓이니  하물며 오민(吾民)은 본래 선왕례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사람 사람의 뇌수속에 용솟음치는 적혈이 저보다 다른것이 없음일까보냐? 그런즉 금일 오인의 최선급무는 천하의 대세를 살피어 필사 할(必死) 필요성을 알음에 있으니 대개 필사할 줄을 안후에야 기력이 스스로 분발하고 심지가 스스로 연마되여 애국의 성을 자연히 발하고 합심의 공은 자연히 나타나리니 이에있어...>>   

    이는 최익현이 생전에 의병을 일으키면서 전사민(全士民)에게 고하던 그 긴 격문(檄文)중의 한 단락이다.

   《천만 지당한 말씀이지요. 만일 2천만 우리 인민이 필사(必死)할 마음을 가지고 두마음이 없이 싸운다면 어찌 역적을 제거치 못하며 국적을 회복치 못하리오? 기억해두시오, 최후까지 싸우다 망한 민족은 반드시 광복할 그날이 있을것이나 아무 저항없이 망하는 민족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을.》

   서일은 사생들에게 이같이 가르치면서 마음들떠서 안착못하는 학생들을 향해서는 자중하거라, 학생은 우선 학업에 힘쓰고 수양을 잘 닦은 연후에 구국의 중임을 질머져야 제대로 되느니라 하고 일깨워주었다.  

   태인지방 반일의병대가 패한것은 안타깝게도 최익현이 어찌 동족상쟁을 하겠느냐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데 주요원인이 있는 것이다.

 

   <<최익현이 패전한데로부터 량호지방의 사대부들은 더욱 사기를 잃고 감히 거의를 론할수 없게 되었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글이다.

 

   항일의식은 유생들만있는것이 아니였다. 농민출신의 의병장들도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순창에서의 전투는 실패하였으나 그에 뒤를 이어 전라도의 각 고을들에서 의병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구레, 장성, 광주, 순천.... 반일의병운동이 앙양되던 시기 일부 의병대들은 산간지대에 의거하여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반대해 혈전을 벌리였다. 이 투쟁에 강원도일대의 의병들이 선두에 나섰다. 적측인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조선폭도토벌지>>와 동아동민협회의 <<조선경관순직사>>에는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신돌석은 녕해에서, 김순현은 영양에서, 정용기는 영덕에서...봉기한 적의 부대는 그 어느것이나 막론하고 가장 작은 부대라도 수백명으로 편성되였다....우리의 소수의 경관대가 수시로 적의 부대와 충돌하였으나.....그때마다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당연하였다》.  

 

   어느날 경원학교의 리선생댁에 몸에 총상을 입은 젊은이가 왔다. 홍주성방어전투에 참가했던 민종식수하 의병장이다. 홍주성안에서 벌어졌던 육박전은 의병투쟁사상 보기드문 격전이였다. 반일의병들은 총가목으로 적들을 얼마나 힘있게 쳐갈겼던지 싸움터에 340여 정의 부러진 총가목이 나딩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병들은 홍주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전투사기만 높으면 되는게 아니다. 작전지휘능력이 중요하지. 력량대비가 안되는 때 성을 그냥 고수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전략이였어.》

   일개 교원에 지나지 않는 서일이 홍주성방어전투의 패배를 이같이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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