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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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의 血 제1부 19.
2012년 09월 16일 10시 19분  조회:432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19.

 

   1900년은 서일이 내내 협착한 우리에 같혀서 자라난 표범이 그 단단한 체력을 과시하느라 살창을 끊고 밖으로 뛸쳐나오듯한 한해였다. 욕망대로 나서 자란 경원군(鏡源君) 안농면(安農面)의 금희동(金熙洞)마을을 훌쩍 떠나 배움의 새 요람인 경성(鏡城)의 유지의숙(有志義塾)을 다니게되였던 것이다.

    그지간 서일은 제마을의 김노규(金魯奎) 문하에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것은 삼역(三易)의 하나로서 역사상 중국의 주대(周代)에 성행하였다하여 주역(周易)이라 하는데 팔괘(八卦)로써 자연현상, 가족관계, 방위(方位), 덕목(德目) 등에 맞추어서 철학, 윤리, 정치상의 설명과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것을 전공하였다하여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서일을 주역선생(周易先生)이라니 점쟁이라니했다. 하지만 그는 새문화를 배우려는 욕망이 가슴에서 끓었기에 그런 소리는 귓등으로 넘겨버리고 경성(鏡城)에 온 것이다.

   유지의숙(有志義塾)은 바로 이해의 3월에 이운협(李雲協)이 설립한 것인데 그는 함경도지역의 대표적인 계몽운동가였던 것이다.

  《시대에 발을 맞춰야지. 내가 이제는 새 문화를 탐구해보자!》

   서일은 이같이 마음먹고 약속대로 박기호와 함께 공부하러 온것이다. 집이 본지에 있는 성묵이역시 이 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최삼용이를 내놓고 세친구가  다시모여 지내게 되었으니 참으로 즐거운 생(生)이 새로 시작되는것만 같았다. 

 

   동쪽에 무변의 망망한 동해바다가 활짝 펼쳐져 있다. 라남(羅南)의 남쪽 경성만(鏡城灣)에 림하여 있는 경성(鏡城)은 력사가 오랜 구도청소재지로서 내지 그 어디에 비해서나 수륙교통이 발달했다. 그래서 교육도 발전하여 선줄을 끄는가싶었다. 바다를 끼고 있으면 거개가 그러하듯이 이곳의 거리역시 어물전들이 있어서 각종의 해산물을 구경할수 있었다. 그리고 과일상과 채소상들도 많았다. 경성(鏡城)은 려인숙, 여러음식점에다 점포와 전매점, 유락장에다 서점도 갖추어져서 짜장 아담진 도시맛을 풍기니 살기좋은 고장이였다.

   어느 곳에 가든 우선 그 지방의 지리부터 알아두는것이 습관으로 되여있는 서일은 개학 이틀전에 경성으로 와갖고 기호와 함께 사숙을 잡아놓고는 시내구경을 나섯다. 경성(鏡城)에는 명승고적으로 관해사(觀海寺)와 원수대(元帥臺)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 거기부터 가보았다. 그리고 이틑날에는 먼곳을 가지 않고 성묵이까지 해서 셋이 주을천(朱乙川)냇가를 거닐면서 학업과 생활을 론했고 주위의 경치도 흠상했다. 주을천(朱乙川)은 경성(鏡城)의 서북쪽에서 흘러내려와 동해로 들어가는 한갈래의 내였다. 이 냇물을 따라서 42㎞가량 우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가 되는 주을에 이르는데 그 주을읍(朱乙邑)에서 서북으로 10㎞쯤 더 들어가면 철질이 알칼리 단순천으로서 다량의 라듐을 함량한데다 온도가 68℃나 되는 유명한 온천이 있는것이다. 그것말고도 경성(鏡城)근처에 성정온천(城町溫泉)과 온보온천(溫堡溫泉)이 있고 군내에 숭암산(崇巖山)같은 명승지도 있었다.

   《너희들 좀 봐라. 일본에 비해 대체 뭐가 못한가말이다. 삼천리강산 그 어디엔들 좋은 경치없고 명승이 없느냐말이다. 하건만 우리는 왜? 왜서?.... 생각하면 원...임진왜란 때 그 더러운 쪽발이 왜놈한테 이 강산이 심히 유린당한걸 생각하면 지금도 그저 분통만 터진다.》

   주을천을 거닐면서 서일이 내뿜은 말이였다.

   그들은 장차 시간이 허락되면 숭암산도 가보리라 했다.

   성묵이가 서일과 기호한테 너희들이 여기에 온것을 삼용이가 아니까 이제 곧 보러 올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이였다. 개학이 되어 3일만에 과연 최삼용이가 친구들을 만나보러 경성에 왔던것이다. 사팔뜨기눈을 더 사팔거릴 뿐 성격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재미있는 친구였다. 군자삼락을 열창(熱唱)하더니 아마 락관을 길러서 그런모양이다. 마침 이날이 주일이여서 서로 상봉의 즐거움을 풀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삼용이는 돈을 만지는 생색을 내느라 까놓고 말해 서생티 물씬물씬 나는 너들같은 글벌레야 언제가야 하면서 정심한끼까지 푸짐히 내는 것이였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였다.

   서일이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그래 넌 지금 대체 무슨장사를 하느냐 물어보았다. 그러니 삼용이는 해물되거리를 하고있는데 올 한해만 착실히 벌면 집살돈은 장만이 되리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밥술을 뜨다말고 되려 친구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난 정말 리해안되는구나. 벼슬길이 빠른 학교가 쌔쿠버렸는데 너희들은 왜서 하필이면 그깟데를 택하느냐말이다, 한학을 죽도록 공부해갖고는 고작 하는게 훈장질이겠지, 그래? 그도 글쎄 락을 크게 보면 몰라도. 훈장의 똥은 개도 안먹는다구했네라.》

  《나라가 없으면 일신일가가 있을수 없고, 민족이 망국노로 돼버리면 일신의 영광이 있을 수 없는거다. 그래서 벼슬생각같은건 아예 싹 집어장지고 이 길을 그냥 택한거다. 민중을 계몽시키는 일 그것말이다. 사범을 나와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켜 우리 이천만의 겨례 모두가 인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건전한 인격자로 되게 만들면 그게 얼마나 좋겠니. 그래서 지망을 이렇게 정한건데.... 너를 내놓고 우리 셋은 소원이 같네라.》

   《정녕그렇다면 너희들은 애국자행렬에 드는거겠지!? 하하하.... 난 정말 리해안된다. 임금님도 어쩌지 못하는 나라일을 너희들이 관여를 한다구 그게 되어갈가? 의병들을 보거라. 들구일어나서는 해놓은게 뭐냐. 제 목숨만 아깝게 잃는 것 밖에는?... 그러니 내말은 아예 제살도리나 하는게 상책이라는거다.》

   서일의 귀에는 그것이 엉성한 설복으로 들릴뿐이였다. 

   그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삼용이를 아스라니 다시쳐다봤다. 솔직함과 담백함이 좋으나 이 애가 그사이 어쩌면 이같이 자사자하게 번졌을가, 나라운명이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소리를 하고있으니 뭐라면 좋을가, 맞받아 통박하자해도 그러면 공연한 입씨름이나 벌어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한데 그가 눈길을 자기쪽에 꽂은채 거두지 않고 대답을 집요하게 바라는지라 서일은 한마디 응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그저 속담 한토막을 외웠다.

   《“소소식 방세뇨 (小小食, 放細尿), 사사지식 가방섬시(些些之食, 可放纖矢)”라 했거늘  “작게 먹고 가늘게 싸거라.  작작 먹고 가는 똥 누지.”》

    너무 그렇게 분수에 넘치게 살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유지의숙은 이운협선생은 과연 결심한대로 수백년을 내려온 구식교학의 틀을 버리고 현대적인 새 교수방법을 전수하기에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있었다.

   신입생을 받아들이고 새학기를 맞이한 학교는 생기가 넘쳐 흐르면서 들끓었다.

   습윤한 동해바람이 8월의 무더위를 몰아가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운동장을 식혀주고있는 어느 일요일의 한낮때, 거리에 나갔다가 책방에 들려보고 돌아오던 서일은 저기 교정의 아름드리나무 그늘아래에 자빠뜨려놓은지 오래되여서 이제는 아예 돌걸상으로나 사용하는 척화비에 중년에 이르는 사나이 하나가 걸터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근엄하게 생긴 그가 바로 이운협(李雲協)이였다. 개학날 한번 학생들의 면전에 피끗 나타나고서는 어디로 출장을 나갓더랬는지 여러날 보이지를 않다가 오늘에야 다시나타난 것이다.

    교장선생은 물론 신입생을 다 면목알 리가 없지만 학생으로서 교장선생님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인사없이 지난다면 그건 너무나도 몰상식한 행위라 서일은 다가가서 허리굽혀 인사했다.

   《누구더라?》

    이운협(李雲協)은 인사를 받았지만 기억에 없는 학생인지라 보던 책을 덮으면서 고개돌려 이쪽을 깐깐히 눈빗질했다.

   《저는 방금온 신입생입니다.》

   《오, 그렇길래 면목없지. 여게 와 앉게, 서있지 말구.》

    교장선생은 자리를 내느라 한켠으로 드티여 앉으면서까지 궜했어도 서일은 선듯이 앉게 되지 않았다. 웃어른이, 그도 명성높은 교장선생이 학생을 이같이 무람없이 대해주고있음에 되려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하하하....학생은 왜 이래? 신식을 따르고푸지 않은가? 거리에 뛸쳐 나가서 이 사회를 개혁하자고 부르짓지를 않았던모양이로군!》

   교장선생은 새로 온 이 어린 제자의 지나친 조심스러운 거동이 우수운양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면서 뜻밖에도 이런소리를 하는것이였다. 하여 서일은 적이 놀랜눈으로 그를 다시보았다.

   《선생님, 왜 신식을 따르고싶지 않겠습니까. 그리구 사회개혁은 저도 지극히 바라는바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

   《례모없이 마돼먹은 놈이랄까봐 그러나. 그리생각말고 와서 앉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서있지 말구.》

   서일은 그제야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릎을 꿇지 않고 스승곁에 이렇게 앉아보기는 난생처음이였다. 서일은 자기는 올해 나이 20살이고  고향이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이라는것과 거기서 학문높은 유생 배창식과 김노규선생한테서 한학(漢學)과 주역(周易)을 배웠다는 것을 말했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노규가 추천한 학생둘중에서?...》

   《예, 서일이 바로 접니다.》

   《오, 그래?!》

    이운협교장은 뜻밖에 몹시 반가와하면서 자기는 금희동마을의 소학교선생  김노규와는 죽마구우(竹馬舊友)라 했다. 과연 그들은 지금 서일이 또다시 한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성묵이, 기호와의 관계처럼 친분이 두터웠다. 소시적에 한서당에서 한학을 수련할적부터 사이가 극친했다는 것이다.

   《그래 학생은 왜서 다른학교는 안가고 굳이 여기를 택했는가?》

    진속을 떠보는 말이였다.

   《저는 지금 나라가 망해가는 원인의 하나가 강린(强隣) 왜적의 침략성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먼저는 국민의 무지가 나라를 이꼴로 되게 만든거라 생각돼서 그들을 깨우쳐주고싶었습니다. 유지의숙이 장차는 사범으로 발전이 되리라는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게된겁니다.》

  《오, 그래!? 옳네, 옳아! 과연 맞는 말을 했네!》

   이운협은 초면의 신입생이 하는 답변이 자기 마음에 무척드는지 웃음실린 밝은 얼굴로 대견스레 보면서 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국민의 무지를 절규하고 계몽운동에 착수해야하네.》

   새로만난 사상(師生)은 이렇게 서로 면목을 익히면서 의기상투(義氣相相投)하게 된 것이다.

 

   어느날 아침에 서일과 한반의 사범생들이 교실에서 갈등이 극에 이르러 류혈적인 란투까지 벌어지니 임금이 친히 출면해서 독립, 황국 량협회의 대표를 불러 면약하고 군중을 해산시킨 일을 놓고 왈가왈부 하고 있었다. 임금이 현명하다느니 홍종우가 탁월하다느니 지어 그를 숭배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서일은 그저 듣고 넘겨버릴수는 없는지라 한마디 삐치였다.

   《홍종우가 누구냐? 그게 김옥균을 꾀여다 살해한 흉범아닌가? 그런 살인자가 지금 신용을 얻어 해먹으니 글러먹었지. 김홍육은 또 어떤자냐? 고종황제의 아라사통역관이랍시고 욱일승천의 세력을 뽑내니 어쩌자는건가. 사대당의 잔여가 아직도 남아서 살판치니 세상은 그냥 어두워니는게 아니고뭐야. 서재필 그가 선지선각자일진대 대체 얼마나 뻗쳐낼가고 근심했더니 과연 얼마뻗쳐내지 못하고 가는구나. 다시금 미국으로 망명아닌 망명을 가야하는 신세니 원... 애국자에게는 왜서 액운만 따르는지 우린 다가 한번다시 심사숙고해봐할게 아닌가?.》

   누군가 서일역시 독립협회 사람이 돼서 저러는게 아닌가고 했다.

   이에 서일은 목소리높혀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고 나는 나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산다면 그런 인간은 내가 아니고 남이되는 것이다. 자아를 발로해야한다. 그러는 사람만이 곧 자기인 것이다!》

   억측으로 그를 의심했던 학생은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일이 있은후부터 다시는 공공연히 그를 맛서서 까박하는 학생이 나지지 않았다.  

   1896년 7월에 협약이 맺어졌으니 어언 4년째 된다. 여기 경성도 경원과 마찬가지로 로씨야가 광산채굴권을 얻어 지금 한창 일을 벌렸다고 한다. 남의 나라의 광산을 허물고 뜯어가다니 렬강의 모양이 대체 어떠한지 서일은 제 눈으로 확인하고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격분되고 속만 상할 일이라 그 생각을 그만 지워버렸다. 관리들은 부패무능하여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고 백성은 무지하다보니 리득에 혈안이 되어 뻗쳐온 렬강의 그 탐욕스러운 손이 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물러도 어쩌지를 못한다. 이 렬강 저 렬강이 밀고 닥치는데 따라 오늘은 이무리 래인은 저무리의 꼭두각시대신들이 빈번히 바뀌는 조선이였다. 이제와서야 독립국의 체면을 세워보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기운을 다잃었으니 그저 황제국이란 명색일 뿐 제 살점을 더 험하게 뜯기우면서 파멸에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진종일 교과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조선이 대한(大韓)이라는 굵직한 이름을 달기는했어도 여직 볼만한 간행물이란 거의 없어서 공백이나답지 않다가 이제야 <<매일신문(每日新聞)>>과 <<제국신문(帝國新聞)>>이 더 나져서 쌀에 뉘만큼이나마 구독물을 찾을수 있었다. <<매일신문>>은 이해의 1월 16일에 창간되였는데 그것이 순한글 일간지였다. 그것은 <<협성회회보(協成會會報)>>가 고종의 내명(內命)에 의하여 페간되자 양홍묵(梁弘?), 유영석(柳永錫), 이승만(李承晩) 등이 주동이 되어 민족기관지로 발족시킨 것이였다. 다른하나 <<제국신문>>은 이해의 8월 8월에 창간되였다. 이 신문 역시 한글로 된 일간신문인데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색채가 짙었다. 이종일(李鍾一), 심상익(沈相翊) 등이 중심이 되어 꾸리였다. 서일은 매일 <<독립신문>>과 함께 새로 창간된 이 신문들을 예전의 모양으로 글자하나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래도 눈을 더 둘곳이 없으면 짬을 타 서점에 달려가군했다.

 

   어느날 중년의 서점주인은 서일이 구독물결핍증에 걸린 사범생인 것을 알고 구문(舊聞)이라도 보겠거든 보라면서 구석에 처박았던 낡은 신문 한묶음을 내놓는 것이였다. 서일은 고마워하면선 그것을 뒤지다가 뜻밖에 그속에서 <<독립신문>>창간호를 발견했다.

   그 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것인데 신문은 4면중 3면은 국내인을 위한 순 한글판이였으나 나머지 한면은 영문판으로 발간되였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립장을 외국 사람들에게 대변했다고 할수있다.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오.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페일터이요. 사사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신문은 첫호 론설에서 신문의 사명과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권력과 금력(金力ㅡ무법한 일 하는 사사 백성은 돈있는 경우가 많으므로)>>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혁명가다왔다. 그는 선각자의 안목으로 쓰러져가는 나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여건을 개혁하자는 생각을 한것이고 그러하니 혁명의 한 수단으로 이 신문을 창간한것임을 능히보아 낼 수 있었다. 특히 "독립신문(獨立新聞)"이란 제호(題號)부터가 그러했다.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있으니 이 한 신문만이라도 독립을 위한 전위(前衛)가 되겠다는 표시가 아닐가.

   <<독립신문>>이 창간호론설에서 선언한바와 같이 정부의 잘못을 가차없이 폭로, 비판하고 탐관오리와 약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의 행적을 신문으로 백일하에 드러내보이니 신문은 그대로 민권수호자가 된 것이다.

   서일은 이 신문이 정부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국민은 어떻게 충군, 애국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보았고 외국열강의 조선침략기도를 가차없이 폭로하는것도 보았다. 독립신문이 때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조선사람에 대한 행패를 규탄하는것도 보았고 우리도 실력을 길러 다른 나라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자고 웨치는것도 보았다.....

   전에 금희동에 와야 할 신문을 어디서 중간챘는지 서일은 이 신문이 생겨서 거의 한달이 돼서부터 구독할수 있었거니와 중간에 이가 빠지는 경우도 가끔있었다. 신문이 오면 그 한 장을 마을사람들이 돌려가며 보다나니 마지막에는 거의 누더기가 되어 원주인의 손에 돌아오는때도 있었다. 그래도 서일은 나만이 알것이 아니라는데서 신문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게끔 선전까지 했던 것이다.

   이같이 영향력이 있는 신문을 부패한 관리들이 고와할 리가 없었다.

   낡은 신문꾸러미에는 지난해의 12월 18일자 신문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지금 대한정부에 박대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몇 사람에게 즐겁지 아니한 일인 듯하고 또 어떤 외국사람 하나도 권리가 있어 우리가 하는 일을 막는것 같으니 우리가 조금치라도 주인이 좋아아니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으리라. 그런고로 얼마 아니되여 신문기재하는 일과 연설하는 사무를 정지하고...>>        

 

  이것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근 2년간 열성을 기울여 나라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탄압을 받고있음을 시사한것인바 이런 정황에서 신문은 더 이상 발간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어떤 외국사람 하나도 권리가...> 이건 누구를 가리키는것일가?...그렇지! 로씨야공사 웨베르겠구나!》

   서일은 지난해의 10월 독립신문에 몇차례 실린 기사들을 새삼스례 상기했다. 독립신문은 조선에서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씨야군관 10여명을 초빙해오는 것을 반대했을뿐만아니라 웨베르의 위협적인 책동으로 정부가 영국인 재정고문이던 브라운을 해임하고 그대신 로씨야인 알렉세예브를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진상은 이러했다.

   영국인 브라운은 1896년에 탁지부(度支部) 고문으로 취임한 이래 불과 1년만에 엉망이던 재정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국채 300만원을 일거에 상환하는 수완을 보인 사람이다. 브라운은 심지여 왕의 사치까지 억제하여 왕실의 불필요한 경비는 공공시설에 투자하도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브라운도 썩은 관리들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되였다. 웨베르는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역리용하였는바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추겨 그를 해임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하는 한편 로씨야인 알렉세예브를 그 자리에 올려앉히도록 책동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내막을 가차없이 폭로한 것이다.

   웨베르의 책동은 영국정부가 강경한 항의와 무력시위까지 벌리는바람에 깨여졌고 브라운은 다시 임명되였다. 그러자 웨베르는 그 보복으로 서재필을 없애려고 맘먹은 것이다. 한데 그러자고 보니 그가 신분이 있는 사람이여서 문제였다. 서재필은 미국 국적에 오른 사람일뿐만 아니라 미국녀자와 결혼까지 한 몸이요 공직으로 놓고 보면 중추원의 외국인 고문이였던 것이다. 반대세력이 야합하여 그를 해치는 방법은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시키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웨베르는 외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을 추기였고 조병직은 그의 추김대로 대한주재 미국공사 알렌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해임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낸것이다. <<독립신문>>에 대한 교묘한 탄압이였다.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직을 맡은 이래 아무런 잘못도 없을 뿐만아니라 그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국민들을 계도(啓導)한 공적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그를 해고할것이 아니라 그에게 오히려 더 많은 일을 맡겨야 마땅하다.... 이제 한국정부가 서재필을 앞으로 필요하지 않는다고 통고해 온 이상 그가 한국을 위해 더 이상 봉사하도록 할 생각은 없거니와 서재필자신도 그것을 원치않고 있다. 그러니 해고를 시키려면 그의 잔여 계약기간분 급료를 모두 지급해야한다.>>

   이것은 알렌의 답신이였다.

   10년계약을 맺고 온 서재필은 조국에서 겨우 2년을 보내고 1898년 5월 14일, 서울 마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고만것이다....

 

   서일은 낡은 신문 무더기속에서 <<독립신문>> 창간호와 서재필의 마지막으로 쓴 글이 실린 신문 그리고 3개월전인 5월 16일자 <<매일신문>> 한 장을 달라해서 가지였다.

   그가 신문을 겨드랑에 끼면서 주인과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데 출입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훌쩍 들어왔다. 서일처럼 중등키에 단발을 하고 몸이 단단하게 생겼는데 두눈에 정기도는 영준한 젊은이였다.

  《아저씨, 그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도 서점주인은 누군지 인차 알아보지 못한다.

  《제가 지난해도 이맘때 이교장선생님을 뵈러 왔다가 여게 들려서 고서 몇권을 사간적있는데요. 기억안나세요?》

  《오ㅡ조부님이 추천하는 학생을 데리구왔던 그 학생이지!?... 그래 이번에도 조부님의 추천생을 데리구왔는가?》

   그제야 생각나는지 서점주인은 반색한다.

  《아직두 추천받아 오는 학생이 있는가, 거 어데서 오는데?》

   서일은 은연중 입을 열며 끼여들었다.

  《누굴 물어보는 말인지? 나를 그러는지? 내 친구를 그러는지?》

   그 젊은이는 서일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나서 되집어 물어왔다.

  《하다면 둘이 한데서 온게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잖구. 난 서울서 오구. 내 친구는 청원서 왔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지금 서울에 있다는 이 젊은이는 청원에서 서당훈장노릇하는 조부님이 사범에 추천하는 제자를 데리고 와서 이운협교장께 맡기고 돌아가는 길이였다.

   조선땅이 졻아서인가 아니면 세상이 작아서인가!? 알고보니 그의 조부님 성우와 이운협교장과 금희동의 김노규는 다가 소시적에 한서당 한스승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한 죽마구우(竹馬舊友)였던 것이다.

   서일이 시원스레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서로 알고지내기오. 난 유지의숙다니는 서일이야.》

   대방역시 벌씬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서일의 손을 잡는다.

  《난 성균관 입학생 신채호요.》

   서일과 신채호는 이렇게 서로 면목알게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 또는 무애생(無涯生)이라 하는데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산대면 도림리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申光植)선생과 밀양박씨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나이 7세나던 해에 부친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함에 조부 성우(星雨)공과 백형(伯兄) 재호(在浩)와 모친으로 가정을 이루었다. 그 뒤 곧 청원군 낭성면 귀개리(歸來里ㅡ고두미)로 이사하여 조부가 가르치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했다. 총명이 과인하여 9살에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10살에 행시를 지었으며 13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모두 신동(神童)이라고 불렀다.

   1897년 형 재호가 요절(夭折)하고 신채호는 조부밑에서 계속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로부터 목천에 있는 대학자 신기선(申箕鮮)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 풍부한 서고(書庫)에서 많은 서적을 독파하게 되었다.

   그는 올여름 서일이 여기 유지의숙(有志義塾)으로 오는 거의 같은 날에 성균관생(成均館生)이 된 것이다.

   《신문은 뭘할려구 그렇게?....》

    신채호는 서일이 겨드랑이에 낡은신문을 끼고있는걸 보고 물었다.

   《볼것이 너무두 없어서 츄려가는거요.》

    신채호가 어디 보자며 한 장 쑥 잡아 뺀 것이 <<매일신문>>이였다.

   

<<.....이 말을 들으매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여 분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는지라, 위선 기재만하거니와 이는 참 대한 신민의 피가 끓을 소문이라, 대소 인민간에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어찌 가만히 앉아있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분발하여 속히 조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신채호가 보면서 소리내여 읽은 구절이다. 이것은 <<매일신문>>이 서재필이 추방당한 이틀후인 5월 16일에 로씨야와 프랑스가 조선의 땅과 광산채굴권을 부당하게 요구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로한 글이였다.

   서일은 신채호와 <<독립신문>>의 정신과 같은 이런 신문이 페간되지 말고 계속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니 신채호는 자기 역시 동감이라면서 서울에 가자마자 "매일신문사(每日新聞社)"를 어떤 분들이 꾸리는가 보려고 일부러 찾아갔다가 거기서 마침 이승만을 만나보았노라면서 그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편집은 내보다 다섯 살 더많은 스믈세살나이였는데. 팔팔하고 지식이 대단한 것 같은데 사람을 대함이 좀...  마음가짐이 후더웠으면 좋겠더구만. 나도 공부 다하고서는 신문사에 들어가 사업을 해볼테요. 기자질을 해도 좋고 편집노릇을 해도 좋고. 거기서 일하는게 아무튼 뻐근할것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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