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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13.
피끓는 유생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부도복국(扶道復國) 즉 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며 나라가 제것으로 돌아오는 길을 돕는다는 기치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춘천에서 이소응(李昭應),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 선산에서 허위(許蔿),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관동에서 민용호(閔龍鎬), 호남에서 기우만(奇宇萬), 고광순(高光珣), 여주에서 심상희(沈想熙), 경주 이천에서 김하락(金河洛) 등이 의병을 일으켜 형세를 크게 떨쳤다.
그중에서도 유인석은 지평에서 거의(擧義)한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承禹), 이필희(李弼熙) 등 의병장의 추대로 올 2월 7일에 제천반일의병대의 총수(總帥)가 되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의병의 상징적 존재였다. 유인석은 1842년 1월 27일(음력) 춘천부 가정리에서 태여났는데 1855년 14세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1876년 35세 때에 이항로의 위정척사 정신을 이어받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그는 지난해인 1895년 10월 8일 민비(명성황후)가 일본 랑인에게 시해되자 의거할 마음을 더욱 굳히였다. 그는 민비가 죽기 4개월전이던 6월 7일에 벌써 제자 500명을 모아놓고 의병투쟁을 벌릴 것을 호소한바 있다.
《나라에 조성된 환난을 모르는체 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인심이 위축되여 수습하지 못할것이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망한 민족은 반드시 광복(光復)할 그날이 있지만 아무 저항도 없이 망한 민족은 력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마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유인석은 투쟁결의를 다지고 <<8도 여러 고을 인민들에게 호소한다>>는 격문을 발표한것이다. 제천반일의병대의 그 격문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의병투쟁에 궐기시켰다.
병들고 늙은 몸이 어찌 의병장의 책임을 감당하랴만
부끄럽고 분한 마음 스스로 금할수 없도다
빌리지 못할손 재주라더니 이 무슨 도움되리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서 그대들과 맹세했네
기상은 해빛아래 산악과 같고
마음은 바다처럼 맑고 푸르도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단을 높이 쌓고 절하고 비나니
태평세월 이제 와서 이 나라에 길이 드소.
유인석은 제천반일의병대의 조직과정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취를 취하였다.
먼저 위병대안에 잠입한 파괴분자 이민옥, 최진사, 박주사, 신처사 등 4명을 처단했다. 그리고 유생들에게 서로 시기하면서 대오의 단합을 방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격히 타이르고 의병운동을 서당에서 책읽는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무질서는 점차 가셔지고 대오가 어느정도 정리되였다. 올 1월17일에 조직되여 보름간의 짧은 기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제천반일의병대는 큰 반일의병대로 자라났다....
금희동의 기학, 성묵, 기호, 삼용 이 네동갑의 딱친구를 이제는 소년으로만 보고 아이취급을 할 수 없었다. 16살의 그들은 이미 끌끌한 청년멋을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해전이던 갑오년 때 전봉준이 령도하는 동학당농민군이 관군과 싸우는 소식을 들을 때 처럼 지금은 유린석이 지휘하는 제천의병이 일본군, 관군과 맞붙어 싸우는 소식에 정신팔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워 마음은 들떳다. 그러니 공부가 자연히 잘 돼줄리 없었다.
《곧바로 서울로 가서 왜적들과 역당들을 섬멸하리라!》
제천을 공점한 의병들의 이러한 포고문이 멀리 북쪽 함경도의 구석진 여기까지 날려왔다. 그들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백성들을 의병대에 망라시킨다는지 친일주구로서 범죄행위를 감행하던 역적들을 잡아 처단한다는지 하는 소문이 파다히 나돌았다.
《우리 가볼가?》
성묵이가 움찔했다.
《애두야. 그런다면 감정에 너무들뜨는게 아닐까.》
기학이는 이러면서 그를 눌러놓았다.
제천의병대는 서울공격을 목적하고 먼저 서울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충주를 점령하려하였다. 경부선이 아직 채 부설되지 않아 일본군이 도로를 유일한 교통도로로 리용하고있는 형편에서 이곳은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지점으로 되였던것이다. 한편 또 의병들이 충주공격을 기도한 것은 부산에서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장악하고 서울공격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기 위함이였다.
그들은 우선 통신망과 도로를 차단했다.
충주에는 일본군 200여명과 친일관료가 장악하는 경군이 400여명, 지방대가 400여명 도합 1,000여명이 수비하고 있었다.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은 의병들의 공격을 막고 나아가서는 토벌하려고 일본군과 공수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병력을 가진 제천반일의병대는 두려움없이 2월 16일 충주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벌리였던 것이다.
《충주가 의병들의 손에 들어갔단다!》
《김백선이 선봉장이 되어 밤에 의병들과 함께 동쪽문 담벽을 넘어 성안에 들어가 반항자들을 죽이고 대문을 열었단다!》
《김백선은 평민출신이란다!》
《일본군은 달아나고 충주부 관찰사는 잡혔단다!》
기학이와 그의 친구들은 모여서 저마끔 들은 소식에다 감탄부호를 찍었다.
제천반일의병대가 큰 도시의 하나인 충주성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은 재빨리 전국에 퍼지면서 회오리바람을 일쿠었다. 영향이 컸다. 각지에서 의병에 호응해나서는 사람이 적잖았다.
《인본군은 막아보지도 못하고 뺑소니를 쳤다는구나. 우리두 나가 해볼까.》
《넌 뺑소니치는 놈하구 해보겠다는거니? 일본군이 뺑소니치지 않고 총구멍이 머리통에 구멍을 냈다는 소릴 들었다면 네가 그때는?...》
《닥쳐라, 넌 내가 그리두 겁쟁이 같아뵈냐. 난 내 머리통에 구멍난대두 나가 싸우고 싶다. 왜놈하구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잖아.》
《너의 각오, 너의 결심이 장하기는 하다만 우리는 더 배우자, 아직은 들떠서 돌아갈 때가 아니잖니.》
이번에도 기학은 이렇게 제법 어른처럼 성묵의 들뜨는 심정을 눌러놓았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니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소. 나도 또한 인간이니 당초에는 왜놈을 죽일 마음을 가졌으나 어느덧 환장이 되었고 이제는 골수까지 왜놈으로 되었다. 우리 가문은 본래 대대로 왜놈과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문이였는데 나는 이를 어기였으니 이것은 나라와 조상을 배반하고 하늘도 무심치 않을 죄를 범하였다. 내가 만일 죽지 않으면 세상에 도리가 없는 것으로 된다.》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이 의병들의 손에 잡혀 목이 날아나기 전에 늦게나마 자신을 뉘우친 이 말은 <<소의심편>>에 적혀진 것이다.
금희동마을 소학교의 머리 큰 학생들이 마음이 들떠 안착하지 않던 차 김노규선생이 과로(過勞)하여 드러누웠거니와 겨울철 방학이 되었다.
이런때에 새격문들이 날리였다.
살아남은 동학당농민군은 거의가 다시일떠나 여러 의병대의 주력이 되었는데 그들이 이같이 의병투쟁에 나선 것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들 처럼 반침략에 참가하는 것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자들의 후손으로서 도리를 지키는 마땅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이럴때 반일의병투쟁에 참가한 유생들은 무장활동보다도 격문작성 등 문필활동을 많이하였다.
<<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은 암암리에 왜적과 내통하며 제몸만 생각하는 놈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되어 내란을 선동한다.>>
북도 여러 고을에 호소한 격문이였다.
<<옛법에 적을 치려는 자는 먼저 그 앞잡이를 쳐야 한다고 한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앞잡이를 치려고 한다.>>
이것은 전국의 모든 관리들에게 다시한번 호소한다는 격문이였다.
민족의 원쑤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사느니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전사(戰死)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라면서 많은 격문들이 일제침략자를 물리치는 투쟁에 예봉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서울가볼가?》
가끔 저돌적인 행동을 좋아하는 성묵이가 다시꺼낸 말이였다.
《그래 가보자! 우린 여적지 서울구경 한번 못해 본 촌뜨야.》
기학이가 이번에는 맞장구쳤다.
그러자 기호도 삼용이도 얼싸좋다고 호응했다. 하여 그들 네 동갑은 어느날 서울을 향해 먼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날씨는 매서웠다. 서울시내는 한산했건만 시민들은 의연히 볼일을 보느라 거리를 분주히 나다녔다. 이런 거리로 해군복을 입은 1백여명의 키크고 코날이 일어선 노랑머리의 로씨야 군인들이 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있는 정동쪽으로 행진하였다. 처음보는 군대라 시민들은 모두 경아한 눈길로 대했다. 한편 또 불안한 마음에 일본이 판을치고있는데 로씨야 해군은 왜 또 저렇게 버젓이 입성하는걸가, 이제 또 무슨 변이라도 생기자고 저러는게 아닐가 하는 의문이 갈마들기도했다.
서울시민들의 우려가 무근거한 것은 아니였다.
배일적인 민중폭동이 도처에서 일어나니 정부는 황황하여 이를 막아보자고 진위대를 각 지방에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서울은 보위가 허술하게되였는데 이 틈을 타서 로씨야공사 웨베르는 친로파인 이범진과 이윤용, 이완용 두 형제를 조정하여 정국(政局)을 뒤집을 계획을 하고 환관(宦官) 강석호를 통하여 왕에게 자기들의 계책을 알리고는 인천으로부터 저들의 해군을 그같이 끌어들이여 공사관에 머무르게 하는 판이였다. 두꺼비가 궁둥이를 땅에다 붙일때는 뛰자는 궁리일것이다. 전에 민비를 제물로 조선을 손안에 넣어볼려고 했던 웨베르공사는 반일의병이 흥기하고있는 이 때가 절호의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다. 머나먼 저 북쪽 함경도 끝머리의 두만강가 금희동마을에서 온 네친구가 서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로씨야 해군이 서울에 입성한 날이였던 것이다.
시골서 간 네 아니는 여느 길보다는 폭이 썩 넓은 한 거리에 잡아들었다.
《말 좀 물읍시다. 여기사 대체 어딘가요?》
성묵이가 지나가는 행인 하나를 세워놓고 말을 걸었다.
《어디긴 어디, 서울이지.》
행인은 퉁명스레 대구해놓고는 너희들은 자다가 꿈을 꾸지 않느냐고 눈빗질을 했다.
《누군 서울인걸 몰라서 원? 예가 무슨 거린가 말이얘요.》
성묵이는 머리에다 흰 두건을 쓴 그를 힐끗 다시보면서 입속말로 그 주제에 서울놈이라고 텃세부리는가 젠장 하고 구시렁거렸다.
《종로거리다.》
서울 사람은 저쯤가서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던져버렸다.
이것이 종로구나! 넷은 귀에 익은 네거리에 이르었다. 동남쪽에 유명한 종각이 서있고 그와 골목 하나를 사이둔 모퉁이집은 지물전이였다.
《지물전이라! 우리 여기 들어가 구경 좀 하자꾸나.》
삼룡이가 앞장서고 다른 셋은 그의 뒤를 따랐다.
뒷꽁무니에서 지물전으로 들어가고있던 기학이는 벽가에 놓여있는 장방형모양의 넙적한 돌에 눈길이 갔다. 그건 보통의 돌이 아니였다. 석수쟁이 손에 잘 다듬어진 하나의 비석이였다. 눈주어 자세히 보니 비면에는 이런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무심결에 발견한 그것은<<척화비>>였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었던 지난때의 10년간 그가 구미열강들과는 강경히 맛서서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던 그 완고불변의 태도를 표시한 것이다. 대원군의 섭정이 막을 내리자 1872년 2월 민비일파는 종로네게리에 세웠던 이 척화비를 뽑아버리고 대원군에 의하여 철페되였던 만동묘까지 다시 설치할 것을 명령하였을뿐만아니라 서원들을 전면적으로 복구시켰다.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역이였던 것이다.
네 친구는 버려진 <<척화비>>를 보면서 제각기 한동안 면상에 잠기였다. 그러면서 누구도 자기의 감정은 내비치를 않았다. 어쩐지 복잡하고 구슬픈 감정만이 가슴을 파고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왜들 말이 없나? 이 비석을 보고 무감각해진거야 아니겠지? 기호, 네가 어디 먼저 말해보거라.》
기학이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기호를 입열게 만들었다.
《쳐들어 오는 오랑캐는 응당 싸워 막아야지. 이건 내 맘에 드는 구절이다. 그런데....》
《아래구절은 맘에 안든다 그거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거라. 하다면....》
《하다면 어쨌다는거니?》
《문제는.... 생각해봐라, 국가와 국가지간 외교를 건립해 서로간 관계가 좋아진다면, 그래서 국가발전에 유리하다면 화친을 해야겠니 하지 말아야겠니? 내가 보기에는 이 비문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믐 것 같구나, 가장 치명적인!》
《이 척화비에 대원군의 완고한 쇄국사상이 집중돼있구나!》
삼용이가 우쭐 나서며 하는 말이다.
《삼용아, 네가 보겐 쇄국정책이 어떠냐?》
성묵이가 물었다.
《난 이 척화비를 다시금 조선 8도 방방곡곡에 일떠세웠으면 좋겠다. 당장.》
《건 왜서?》
《왜놈이건 양놈이건 안들어오게말이다. 봐라, 그놈들 들어와서 나라가 망태기되고있잖아. 그래서 난....》
《그래서 넌 쇄국주의를 다시쓰자 그 말이냐? 에잇, 바보녀석!》
성묵이는 손가락으로 삼용의 머리를 뚱겨주었다.
《삼용의 주장 영 틀리는건 아니야. 문을 열지 않았더면 오늘같이 이 꼴루는 되지 않았을거다. 개혁을 한답시고 문을 열어 승냥이만 끌어들였지 뭐야. 차라리 척화를 그냥 하기만 못한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기호가 삼용의 역을 들어서 하는 말이였다.
《나라일 글러지는걸 넌 그래 문을 열구 안열구에 달렸다는 그거냐?》
기학이가 캐고 들었다.
《그렇잖구, 조선은 차라리 개혁을 하노라 떠들지두 말았어야 좋았을걸 그랬어. 괜히 죽도 밥도 안되고.... 그통에 외세가 침범해 나라꼴이나 망태기루돼가구.... 안그렇냐?》
《너 그거 잘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냐? 좋다, 그럼 어디 대답해봐. 일본은 쇄국이냐? 개방이냐?.... 우리 보다 형편없이 락후했던 일본, 그 일본은 왜서 발전하게 되었니? 너도 알다싶히 국문을 열고 유신을 해서 발전한게 아니냐. 그런데 봐라 우리는 어떤가구. 국수를 기르나? 개혁을 권장하나?....》
기학이는 변론을 하려고 들면 끝이 날 것 같잖아 여기서 끝냈다.
한강을 건너보고 남대문으로 들어가 덕수궁을 지나니 경희궁이 가까이있었다. 동쪽켠에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오다가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있는 어름에서 종로와 세종로가 합치고 있었다. 북으로 곧게 뻗은 세종로는 경복궁에 이르러 끝나고 있었다. 그 북쪽은 북악산이다. 북악산 뒤 북한산성과 서북쪽의 인왕산에서 계속 이어져서 북으로 들어간 북한산성은 금희동의 네친구가 한번 꼭 돌아보자고 맘먹은 력사유적지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3일간 묵고 돌아갈 계획을 하고 떠나온 것이다.
어디건 가서 아침식사를 때리고봐야 했다. 그래서 음식점을 찾아가려는데 이때 누군가 경무청 어디 종로에 사람의 시체가 나졌다고 해서 그것을 보러 간다고 했다.
《우리두 가보자! 가자! 가자!》
삼용이가 먼저달려가며 팔을 홰 홰 내저었다.
이쪽의 셋은 얼낌덜낌에 뒤를 따라서 뛰여갔다.
과연 종로가에 웬 사나이 시체가 하나 아니고 둘이나 버려져 있었다. 하나는 복부에 칼을 맞고 하나는 뒷잔등을 뚫고 들어간 탄알이 앞가슴을 헤쳐놓았는지 머리를 땅에 박고 엎딘채였는데 시체에서 나온 붉은 피가 바닥에 즐벅했다.
벌써 수많은 구경군이 모여 있었다. 그 두 시체를 맨먼저 발견한 사람은 인력거꾼이라고 한다.
《여기 사람죽었소! 사람죽었소!》
하고 그가 덴겁한 소리를 련속 질러대서 행인들은 모여들었던 것이다.
사자(死者)의 입은 옷이 보통사람과는 달라서 모두들 이는 틀림없이 지체높은 고관일거라 했다. 기학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누가 알렸는지 순검 둘이 달려왔다. 인력거꾼은 그때까지도 현장을 피하지 않고있다가 마치도 심문을 받듯이 자기가 이 두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공술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김홍집이 아닌가! 총리대신이 어떻게 이모양으루 됐나?!.... 저건 정병하구!》
행객들 중 죽은 자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웨치는바람에 모인 사람들은 더 크게 놀랬다.
《궁궐에 변이 났다!》
《사변이 났다!》
《이놈의 세상이 어쩔라구 이래?》
《밤자고나면 새 변이니 기가 차서 원!....》
《아무렴 총리대신이 이모양이 되다니!....》
급기야 벌집터진 모양으로 사람들은 중구남방으로 마구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또 무슨 변일가? 아닌게 아니라 밤자고나면 변이 새록새록 생겨나니 실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세월이였다!
부녀, 아이, 로인.... 여럿이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의 식솔들이였다. 소식을 듣자 넋담이 떨어진 그들은 제집사람의 주검을 보더니만 거의 반실신이 되어 엎어지고 매달리며 통곡했다.
《어이구 기차라, 이게 웬 일인고?.... 이게 웬 일인고?....》
《어느 놈이 이런짓을 했나, 어느 놈이?....》
《하늘도 무심하지, 어쩌면 백주에 이런 짓을 한단말이요!....》
살인자를 저주하고 세월을 원망하면서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듣는이들은 구곡간장이 끊어질것만 같았다.
《친일을 했으니 죽어 싸지.》
모여든 사람속에 누군가 이렇게 토라진 음성으로 빈정댔다. 그에게 눈총을 놓는 사람이 적잖았다. 안무렴 이런 장면을 당하여 그따위로 빈정거리다니. 그같이 빈정거림은 인성을 잃은자나 죄칠 망언으로 여겨졌던것이다. 어쨌건간에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삼는 그 자체가 악행이였다.
《김홍집내각이 모두가 과연 친일주구였을가 아니면 일본의 원조를 받아서 혁신을 하려했을가, 그 량자를 똑똑히 갈라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니까말이다.》
기학이는 자기의 생각을 이같이 토로하고나서 계속이었다.
《이 참안은 친로파들이 저지른 죄악일수도 있다. 정치란 야심적이여서 그 어떤 비렬한 수단이든 가리지를 않는거다. 친일파든 친로파든 무릇 외세에 아부하고 굴종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치부될 때이다.》
그는 남의 선전에 쉽사리 미혹되지 말고 자기 견해를 세우고 시세를 랭철히 관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학의 이러한 주장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지난 1월 9일에 웨베르가 교체되여 그의 후임으로 스페르가 조선주재 로씨야공사로 부임되여 왔다. 그러나 웨베르는 로씨야로 인츰 돌아가지 않고 친로파의 첫인물인 리범진 등과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한가지 문제를 밀의하였으니 그것인즉 다른것이 아니라 민비가 생전에 여러해나 신변에 두고있었던 엄상궁을 고종 리희의 품에 넣어 그로 하여금 을미참변을 조작한 일본에 대해 원한을 품게하는 것이였다. 엄상궁은 웨베르가 시키는대로 겁을 집어먹는 고종을 위안했다. 그러면서 한편 일본은 왕까지 해치려든다면서 고종 리희더러 어서 피신을 해야한다고 구슬려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리희는 로씨야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로 돼버린 것이다.
2월 11일, 그들은 로씨야병사 50명을 신무문(神武門)에 밀파하여 궁녀의 가마로 상(上ㅡ고종 리희)을 태워서 정동(貞洞)에 있는 로씨야공관으로 빼돌리였다. 이것이른바 조선력사에서 수치로 기록이 된 <<아관파천(俄館播遷)>>사건인 것이다.
고종은 로씨야공관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이전의 내각성원들을 모두 역적으로 선포하고 나라의 정치가 잘못된 책임을 그들에게 전부 넘겨씌웠다. 위베르공사에 의하여 조작된 연극이였다. 그러면서 고종은 한편 경무사 안환을 불러다 혁신관료 김홍집과 그의 내각의 핵심성원들인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 다섯대신을 역적이라 하여 잡아죽이라고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친로파의 이범진과 이운용, 이완용 형제는 궁중에서 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고종왕이 짜리로씨야 공관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궁궐안으로 들어오는 김홍집, 정병하 등을 체포하여 이를 경무청에 보내여 악한들로 하여금 참살하게 하고 그 시체를 종로에 끌어내다가 던져버린 것이다.
어윤중은 귀향도중에 피살되였다. 이로써 친일파로 여겨온 그 세력은 일소되고 정권은 완전히 친로파가 독점하고말았다. 한데 새로 수립된 정부는 의병들을 도와나설 대신 의병투쟁을 탄압하는데로 나아갔다. 그들은 각 지방에 파견된 정부군으로 하여금 의병들을 계속 탄압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1894ㅡ1895년 중일전쟁에 동원시키였던 정예부대인 위해위점령군의 일부를 조선에 끌어다 50만발의 탄약을 휴대시켜 의병을 토벌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당면 조선의 형세였다.....
한편 금동리의 네친구는 서울시내에 있는 여러궁전들을 수박겉핧듯이 바깥에서 모양이나 대충보는 정도였고 북한성만은 제대로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의정부(議政府)이서 생각밖에 김호선생을 다시만나게되였다. 그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다. 김호선생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전부터 조선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는 로씨야의 야심적인 움직임이며 수완이였다고 찍어말하면서 그 내막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제는 똑똑히 알았습니다. <을미사변>이 일본침략자의 야수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했다면 <아관파천>은 짜리로씨야의 교활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한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기학이는 곰곰히 듣고나서 이같이 결론을 내렸다.
김호는 말은 안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이였다. 속으로 그렇지 너의 판단이 명철하구나 하는것 같았다.
다른애들이 그와 몇몇 인물에 대해서 캐물었는데 김호는 먼저 이범진(李範晋)에 대해서 자기가 아는것만큼 간추려 알려주었다.
이범진은 올해 나이가 43살인데 친로파의 거두로서 그는 문신(文臣)이였다. 훈련대장 이경하의 아들인데 고종 16년에 병과로 급제했고 이번의 <아관파천>을 성사시켜 공이 많은 것이다. 그랬다고 요즘 법무대신으로 발탁이 된 것이다. 그와 반대파였던 어윤중은 귀향하다가 도중 용인(龍仁)에서 붙잡혀 피살되였다. 어유준 그 사람은 자가 성집(聖執)이고 호는 일재(一齋)인데 고향이 함흥이다. 탁지부대신을 지낸바 있다. 그는 병자수호조약후에 일본을 시찰하고 개화파사상을 고취한 것이다. 그리했다고 친일파로 몰린것이다.
금희동의 애들이 종로에서 시체를 본 정병하역시 그러했다. 그역시 개화파사람이고 문신이였던 것이다. 그는 유대치(劉大致)의 문하에서 어윤준과 교유하였으며 전운서(轉運署)에 있을 때 한, 청 량국의 외교에 활약했던 것이다. 김홍집의 삼차내각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되어 개화정책에 힘썼다. 그러다가 잘못된 것이다.
《김홍집에 대해서는 너희들도 잘 알것이니 이만 략하고.... 친로파 내각이 벌써 공포되지 않았냐. 문제의 인물은 올해 28살밖에 안되는 이완용이네라. 미대리공사로 있더니 리부참판에 올랐다가 외무협판으로 더 높이 뛰여올라 이제 더 안하무인격으로 권세를 부리는판인데 사람이 오만하고 답즐질이 있어서 제 일신의 리익을 위해서는 이제 어느때 어떤 철면피한짓을 할지도 모를 인간이네라. 그런자가 왕족이라고 이 나라를 운전하려드니 장차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참으로 근심이 되는구나.》
김호는 이러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관찰로부터 도출해낸 견해인것만큼 그저 참고로 알아두라면서 아무때건 외국에 망명을 갔던 개화당 사람들이 국정을 바로잡아보려고 다시돌아올 날이 있으리라했다.
기학은 자기앞에 나타난 김호를 다시금 여겨봤다. 속으로 네가 대체 뭘하는 사람인데 국가내정에 대해서 아는것이 그리도 많으냐?... 그의 정체를 몰랐기에 의혹이 더 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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