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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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1)
2015년 03월 07일 14시 44분  조회:213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1) 

 

                                김송죽

 

 

   올해는 세계반파시스전쟁승리, 중국의 항일전쟁승리70주년이 되는 해다. 서방에서 독일의 반성은 허심하거니와 개정표현도 아주좋았다. 그러나 히틀러시대의 독일과 함께 그당시 침략전쟁을 발동함으로 하여 동방에서, 특히는 중국에다 막대한 재난을 들씌웠던 일본은 대체 어떠한가? 일본은 아직까지도 제가 저지른 죄를 모르고있는것 같다. 일본은 자기를 반성 할 대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저히들이 지난날 감행했던 천추에 용납못할 그 침략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나서고있으니 뻔뻔스러워도 한심하게 뻔뻔스럽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일이 아닌것 같다.

   일개 평민백성에 지나지 않은 내가 왜서 이런글마저 쓰게 되는가? 나는 “8‘15광복”이 나던 해에 한 일본장교의 식솔 다섯이 야외에서 가족자살을 하는 소름끼치는 장면을 목격한바 있다. “도대체 왜서? 어떻게 돼먹은 사람들이길래?” 그때로부터 나의 머릿속에 “일본사람은 과연 지독다”고 각인되여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저 일본민족의 전통과 그것을 산생시킨 과정을 놓고 나름대로 일본정신을 분석 할뿐 그 나라국민의 인격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론하는게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의 정신은 모든 국민에게 자유롭게 소유된것이 아니라 한줌도 못되는 통치자에게 너무나 집중되여있다. 

   지난해 중순의 일이다. 나는 일본의 bbs에서 인기가 매우높은 글이라 해서 읽어보았는데 그것은 9년전에 이미 벌써 <<일본문제연구>>지상에 공개 된 것이였다.

   그 글에서 몇단락 추려 보기로 하자.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불공평합니다. 열등민족이 대량의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선진기술, 성숙된 경험, 단결정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편벽한 비좁은 땅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탄식해야합니다.>>       
   <<잠재한 위기의식, 제한된 자원, 잔혹한 약육강식의 수림식 쟁탈전에서 우리는 왕성한 투지와 적당한 야성을 유지하여야 민족의 근본적인 생존을 이어나갈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생존법칙이며 근검 지혜로운 大和人이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같이 전제조건을 내놓으면서 글은 이어서 섬나라의 운명은 최종 바다밑에 종결될 것이라면서 자원의 결핍은 최종 민족의 발전과 전진의 제일 큰 걸림돌이라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공공연히 피력했다. 

   <<성전은 우리의 유일한 출로입니다. 일본이 세계를 정복하려면 아세아를 우선 점령해야 합니다. 아세아에서 중국을 우선 정복해야 하며 그러자면 중국을 반드시 분렬시켜야 합니다.>>

   <<일본은 령토면적이 작은 섬나라이기에 군사전략 여유가 작거나 없습니다. 그래서 강대한 제국함대를 건설하는 것이 성전의 첫발짝인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우환의식을 갖고있는 일본사람이면 거개가 가질수 있는 심정을 그대로 적라라하게 드러냈다고 볼수있다.

   점수를 매긴다면 그 솔직함에 만점을 줘야겠다.

   한데 그가 들고나오는 주장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으니 뺨을 맞을 짓이다..

   <<大和民族의 용감한, 지혜로운 정신으로 아세아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여야 합니다. 몇십년전 실패한 성전(聖戰)의 치욕을 청결하여야 합니다. 대화민족의 우수성으로 기타 열등민족의 우매를 영도하여야 하며 전세계의 진보를 추진해야 합니다. 이것은 천황이 일본에 부여한 사명이며 大和民族의고귀한 존엄을 수호하는 위대한 성전(聖戰)입니다.>>

   분명한바 이런 공공연한 선동은 광신적인 침략자만이 죄칠수 있는 잠꼬대인 것이다. 한마디로 미친자의 망발이라해야겠다!

   일본민족의 생존, 생로가 과연 그래 그길 하나밖에 없단말인가? 왜서 달리는 생각을 못해본단말인가?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니 나는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몇해전이다. 나는 <<세계문학>>에서 일본의 어느 한 녀작가가 쓴 소설을 보고 놀랍게 깨다른것이 하나있었다. 그 소설은 정사(情思)를 다룬것인데 내용인즉은 일본남자들은 출국만 하면 외국여자를 품에 넣을 궁리부터 한다는 것이다. 여자만 보면 그저 들어붙으려 하니 천성인지 오입질에 찔난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작가는 그것을 그저 폭로하는데만 그쳤지 타매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다 일본종자를 뿌리니 민족의 생존에 되려 공이 되지 않을가 여기는 모양이다. 나의 생각에도 그쪽으로 돌려지게 되였다. 일본은 이제 또 다시금 침략전쟁을 발동하려하지 말고 그 녀작가의 발상대로 차라리 그렇게해서라도 일본사람의 번식능력을 발휘함이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가 한다. 그 모양으로 종자를 불쿤다해서 세계가 그것을 비난하거나 “침략행위"로 까지는 보지 않을것이다.

   세계는 여지껏 전쟁이 재발되는것을 반대하면서 방지해왔다. 평화공처5항원칙에 따라 국가와 국가지간의 우의를 돈독히 키우면서 공존하는것을 목표로 세우고 줄달음쳐 온 것이다. 엄연히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누가 또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재난에 빠뜨려 혼란케 한다면 그것이 허용될가? 불작란을 좋아하는 종족과 그런 종족의 나라는 제가 지른 불에 제가 타죽는 꼴이 되여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전과 달라 세계는 안정을 제일바라기라고 있기에 모다들어 그한테 불벼락을 안길것이니까!

 

   일본을 보면 여지껏 야스쿠니신쟈나 다오제도 등 문제에 대한 변명꺼리를 만드느라 머리악을 무던히 써왔다. 그 표현으로는 그들이 지어 헌법을 개정하는 유희까지 놀고있는데서 찾아볼수있는 것이다. 일본이 말로는 저희들 손에 피해받은 자의 량해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같은 일련의 불협화음이 어떻게 지난날 저히들의 손에 피해입은 아시아 여러 나라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량해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일본은 자신이 호전광의 본색을 버리기 전에는 주위나라들의 호감을 사기도 량해를 구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와서야 드디여 깨닫게되는것이 있다. 무엇인가? 우리는 일본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내자면 그 나라백성이 살아온 역사궤적에서만 찾을것이 아니라 좋기는 여지껏 그들의 심령을 지배해온 근원으로 되고있는 "전통문화"에서 찾아보고 연구해야 옳겠다는 생각이다.

 

   일본의 국립정신은 바로 무사도(武士道)에 뿌리를 박고있다. 박아도 너무나깊이 박고있다.

   무사도(武士道) 즉 사무라이정신이 생기게 된 근원과 그것의 발전, 변화과정은 도대체 어떠한가? 그에 대해서 연구하노라면 우리는 여지껏 군국주의길을 걸어온 일본이 지금물론이고 장래에도 그 길을 버리지 않고 어김없이 계속걸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다면 무사도(武士道)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래에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명하련다.

 

 

                 ㅡ. 무사도의 산생과 특점  

 

 

   원시적인 신앙과 숭배는 언제나 한 민족의 심리에다 뿌리를 깊히내리기에 말그대로 그 값은 옵션(选项)제약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일본신도(日本神道)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려주었다는 세가지 기물이 있는데 그것인즉은 거울(镜), 옥(玉), 검(剑)이다. 그 세가지가지 기물은 지혜, 인자, 용감성을 표명하는데 그에 대한 숭배가 바로 그들 일본사람에게는 민족문화의 뿌리가 되어 오래동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심령을 지배함에 거대한 힘이 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내려주었다는 그 세가지 기물중에서 검(剑)은 용기를 뜻하는데 이는 일본민족이 제일선호하는 것이다. 세상 그 어느 나라, 어느 종족들보다도 그들은 지금까지도 무력을 제일 숭상(崇尙)하고있음을 알려준다. 

옛무덤을 파보면 순장품으로 제일많이 나오는 것이 검, 칼, 갑, 투구, 마구라니 그것들이 곧 일본은 력대로 내려오면서 무력을 가장 숭배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원시적인 신앙이 그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었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무사도(武士道)ㅡ 그것이 지금까지도 일본민족의 힘으로 되고있는 것이다. 력사에 맞추어 보면 여지껏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오래지속될 것이다.

 

   <<사기>>와 <<일본수기>>에 보면 이탈리아 법사 코넛은 문득 지혜가 생겨 신검으로 불신(火神)의 머리를 베여버렸다면서 나중에는 그 신검을 일본의 타케루에게 넘겨주었고 타케루는 그 신검으로 동쪽으로 에조지방을 평정하고나서는 신검을 아츠타신사에 모셔 보관하게했다고 했다. 력사를 보면 고대로부터 그 자그마한 일본렬도에서는 제국간의 싸움이 끊을새없이 빈번했다. 일찍이 8, 9 세기부터 사무라이 무사도가 역사무대에 올라 주인공이되엇던 것이다. 하기에 무력에 대한 숭배가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전국민의 전통으로 되여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검은 살인무기건만 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그것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되고있다. 일본은 바로 검이 빛을 내는 그러한 나라인 것이다.  

   일본에서 가족 개인문화란것은 운운하기조차 어렵다. 력사에 기재된 것을 보면 간사이장군 요리토모 그룹이 관동 라노그룹을 정복해버렸다고 했다. 1185년에 카마쿠라는 군사 독재정부인 막부(幕府)를 세웠는데 일본에서는 그것이 력사상 맨처음의 사무라이 정권이였던 것이다. 일본은 그때로부터 사무라이가 봉건영주로 되었고 일반 사무라이는 그 영주에 충성해야하는 것이 공식적인 기풍으로 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무사도(武士道)는 자기의 정치가를 길러냈다. 무로마치 막부 사무라이의 무사도가 현대 무사도를 개발한 경로를 보면 바로 그러하다.

   사무라이는 그의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급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라이는 전문 군인으로, 막부의 중추지만, 정치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은 정치를 위해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무사도의 본질은 "기사도충성"이다

   그것의 특점들이 어떤한가를 보기로 하자.

   

   (1) 최고의 충성.

   무릇 사무라이면 자신을 소유하고있는 자에게 사심없이 헌신해야 한다.  무사도의 미는 완정한 순종인것만큼 무조건 복종하면서 철저히 복무해야 하거니와 목숨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최고로 되는 고상한 미덕이라 여긴다.

 

   (2) 명예와 죽음 .

   사무라이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을 초개같이 여겨야 한다.  명예를 지키느냐 생명을 보존하느냐가 문제되여 진퇴양난에 빠졌을 경우에 그들은 서슴없이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택하는 것이다. 명예라는 그것이 그 자신의 리해득실과 관계되거니와 가족의 영예와 리익과도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하기에 귀중한 목숨을 서슴없이 버리는 것이다. 무사면 죽음으로 명예를 지킬줄을 알아야 자격이 되였다. 하기에 <<무사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태어난다.>> 는 경구가 생긴것이다. 

   <<헤이케모노 가타리(平家物语)>> 제9권에 기재 된것을 보면 사무라이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것은 “겸손하고 충격적인 희생”이라고까지 좋게 평가했다. 

 

   (3) 무용(武勇)을 지향.

   사무라이는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음을 당하는 살벌한 폭력세상을 지내는것 만큼 반드시 무술이 높아야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라이직책은 곧바로 전쟁이였다. 하기에 내가 사느냐 죽느냐, 승급을 하느냐 못하느냐와 가정의 부귀빈천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무용(武勇)에 달린것이였다. 하기에  군사가족 커뮤니티는 무술과 용기를 가장 존경했고 그당시 사람들의 심목중에 미야모토장군은 영웅의 본보기로 떠올랐던 것이다. 사무리이의 령혼은 바로 칼이였다. 하기에 그것을 손에 잡고 피를 보지 않으면 사무라이가 아니라했다. 무용(武勇)이 없으면 사무라이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4). 똑바른것과 에티켓(礼仪).

   문명(文明)이 혼돈 될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문명일통기(文明一统记)>>에 이르기를 “신(神)은 똑바로 말했나니, 이른바 정직하다는 것은 스트레이트 심장(直心)인바. 마음가짐이 바르고 깨끗한 것이니라” 하면서 더하여 똑바로 말해둘것은 리테이너(家臣)를 대함에 정직해야한다고 했다. 일본의 고대사회력사를 보면 등급관계가 몹시삼엄했다. 사무라이, 다이묘, 장군 층층이 충성해야했던바 각종의 체제가 사무라이로 놓고 보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군주의 은덕에 보답해야지 그를 배신하거나 역행하여 반란을 한다면 그것은 씻지 못할 치욕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5). 미화된 할복자살. 

   군사가족 커뮤니티(社会)에서의 값은 죽음을 “영광스러운 구호법”으로 여기는 그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런 죽음은 후반생의 안식으로 여긴것이다. 온 사무라이시기를 놓고 보면 그들이 자살하는 유일한 방법이 거의가 한본새 즉ㅡ 할복자살을 하는 그것이다. 사무라이가 할복자살을 할 때면 선자세와 앉음자세 두가지였는데 그 방식은 여러가지다. 一字腹, 二字腹, 三字腹과 크로스 복부(十字腹) 네가지였다. 사무라이의 그같은 할복자살 모델로는 구스노키 마사시게(1294ㅡ1336)때와 히데요시(1522—1591)를 서브(侍奉)했던 그때일 것이다.

   국민은 사무라이들이 활복방법으로 스스로 제 생명을 끓어버리는 행위를 거부가 아니라 칭송과 절찬으로 받아주고 좋게 보았던 것이다. 

 

   에도시대에 일본에 려행왔던 서양사람 미트포드는 사부로 타키자와가 할복자살하는 전과정을 직접보고나서 자기는 하마터면 기절할번했노라고 여행노트에다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장소에 같이 있었던 일본사람들의 반응은 자기처럼 그렇지 않고 그 표정들이 전혀 다르더라면서 그네들은 탄복하고 지어는 선망하더라고 자기의 여행노트에다 감상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할복자살을 그같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니와 지어는 여럿이 모여서 순교의 죽을을 맞기도 하는데 많을 때는 지어 수백명이 한군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자살동기를 보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그런 방식의 죽음을 지어는 영광으로 생각하거니와 완벽한 승화로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은 리해못할 일이다.

 

                  =. 무사도의 진화

 

   유교(儒教)와 선종(禅宗)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일본사람들은 그것을 취사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호상간에 작용을 하다보니 사무라이들의 사상과 행위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중국유학의 핵심 미덕인 “인(仁)”에 반하여 일본유학의 핵심은 “충(忠)”이였다. 중국의 유학이 당연히  “충효(忠孝)”를 말했고 일본의 유학역시 당연히 “인자(仁慈)”를 말했다. 하지만 어느것을 선차적인 위치에다 놓는가에는 대해서는 주장이 달라 각기 저마끔이였던 것이다. 중국은 “인(仁.)”을 첫 자리에 놓았지만 일본은 그것이 아리라면서 “충(忠)”을 첫자리에 놓으면서 유가의 “충(忠)”, “례(礼)”, “지(智)”, “신(信)”을 부대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중국의 유가문화를 대표하는 골수(骨髓)인 “인(仁)”, “의(義)”를 그들은 그것과는 뜻이 전혀다른 “인(忍)”과 “광과용(旷课勇)”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들의 연역과정과 변천을 보면 거기에는 일본사람들은 잔인과 용기를 선호했음을 볼수있는 것이다. 총적으로 사무라이는 아무 때건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맹세를 해야한다는 것이였다. 이로보아서도 일본의 사무라이내에서 수괴(首魁)들은 아래것들을 자기 하나를 위해서는 잔인과 용기를 다할것을 설교(說敎)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아무 때건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할 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일반백성의 생명같은건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평민백성의 목숨은 값으로 치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일본의 지난력사를 보면 그러한데다가 테러가 극단에 이르러 무참한 살인이 끊을새 없었던 것이다.   

   내가 소시적에 들은 사무라이 얘기다.

   어느날 애비가 죽으니 그가 차고다니던 검을 유물로 물려받은 아들은 검을 칼집에서 뽑고보니 피를 볼수 없었다. 그래서 제 어미를 불렀던 것이다. 아들의 낌새를 알아챈 어미는 제 목을 들이밀 수는 없는지라 모이를 쫓고있는 닭을 제꺽 붙잡아 아들한테 던졌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들은 닭을 베여 피를 보고는 시원스레 웃었다는 것이다.

   검을 칼집에서 뽑았으면 피를 봐야 한다는 사무라이의 잔인이 그 정도에 이르었던 것이다. 

 

   “용(勇)”이 사무라의 랭혹한 살육을 부추겼다면 참을“인(忍)”은 사무라이로 하여금 되도록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게끔 억제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볼수있다. 사무라이력사를 보면 섬기는 주인이 갖잖은 사무라이들은 다른무리를 우연히 만나도 칼부터 빼드는 것이 습관이였다. 그러다가 기분이 틀리면 맛붙어 격투를 하기가 일수였으니 그때는 피를 보기마련이였다. 형편이 그럼으로 하여 불필요한 죽음이 자주생겼던 것이다. 하여 일본교는 참을 “인(忍)”을 제창하여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죽음을 의식 할 때는 참는 것으로 자신을 목숨을 불필요한 죽음에서 건지게끔 유도(誘導)했던 것이다.

   선종(禅宗)에서의 생사여일(生死如一)의 리념은 오해되였던바 그것이 지어는 일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되다보니 “제가끔 제멋대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의 경지에 이르어 “죽을 마음은 가졌다면 아주 용감해야한다” 로 풀이되였기에 사무라이를 죽음에 미치게 할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제 목숨을 그같이 값없이 여기는 자가 그래 다른사람의 생명을 아껴줄수 있었겠는가?  아예바랄수도 없었다. 사무라이 자체가 창도(唱導)한 것이 바로그런것이였다. 

   한데 그 창도(唱導)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내려와 이제는 전쟁을 도락으로삼는 군국주의자들의 비위에 맞춰 리용되고있는 것이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토착(土着) 종교다. 일본은 그런 교를 갖고있는 국가인 것이다. 일본사람은 저히들의 국가는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태양손자의 나라라는 거다. 하기에 천황은 하나님같이 떠받들리면서 국민모두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우상으로 모셔지고있는 것이다.

   정치적 기능을 감안할 때 신도교(神道敎)는 황제가 나라를 지배함에 기둥으로 되는 것이다. 국가신도(國家神道)는 일본민족의 우월감과 근대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수립함에 중요한 사상근원으로 되고있다. 그것은 고대에 확고히 뿌리를 밖았음으로 해서 일본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숭배사상은 지어 그것이 종교적인 경지에 까지 이르고있는 것이다. 하기에 그것은 일반 정치 설교보다 더 자극적이다. 흥미로운 것이니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다.

 

   한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일본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복잡하고도 심한 위기감으로 하여 괴로워하고있는것 같다. 앞에 놓인, 국가와 민족의 존재여부를 갖고 bbs에서 공개적인 토론을 벌린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그 괴로움을 풀어줄 사람이 누군가? 내생각에는 오직 맨 웃꼭대기에 앉아있는 그 한사람밖에 없다고 본다. 일본에는 그것의 시범이 될만한 재미나는 례가 하나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일본이 망하면서 그들 자신이 겪어 본 일이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그때의 일본수상 스즈키 간타로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참가자는 전쟁을 지휘한 최고급위원 6명이였는데 론의된 의제는 이제당금 새로 덥치게 될 재난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그날 아침에 160만에 이르는 쏘련군이 만주에 대한 전면진공을 발동했던 것이다. 일본은 저들의 뜻대로 쏘련이 평화조약을 맺을것이라여겼지만 현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스즈키 간타로가 손을 들고 투항하자는 리유는 7월말에 동맹군이 일본에 투항할것을 이미 권고해왔었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전쟁을 그냥 할 수 없다. ‘포츠담공고'를 접수하는 외에 다른출로는 없다.”

   년세맣은 수상은 이같이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부대신(战争部大臣) 아나미 고레치카의 태도는 그와달랐다. 그는 “그 누가 우리는 꼭 패한다고 긍정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수상의 제의에 분노했다. 대가를 그 얼마치르던간에 끝까지 해보자는 것이였다. 하여 6명의 요원은 두파로 갈라졌던 것이다.  

   사흘전에 미국의 첫 번째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져 도시는 훼멸되였다. 한데도 그냥해본단말인가? 미국에서 던진 두 번째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온 도시가 또 훼멸되고말았다. 

   여지껏 실패란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일본국민 전체가 6일간 꼬박 공포와 절망속에서 떨었다.

   이런때에 생각밖에 놀랍게도 영웅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영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로히토 천황이였다. 기원7세기부터 내려오다보니 124대 황제로 된 히로히토는 명예가 천황(天皇)이랄뿐 실상은 여직까지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니 허재비나답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도 수줍고 연약해보이면서 해양생물학이나 연구하는줄로 알았던 44살나이의 이 사나이는 제 민족과 국가가 멸망에 직면했음을 알고는 관건적인 시각에 대담히 나섯던 것이다. 우리는 손을 들고 투항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구하자면 오직 그길밖에 없다고 했다. 하여 일본은 훼멸되지 않았고 그는 구세주(救世主)로 떠받들리게 되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의 일본천황은 아키히토로 알고있다. 지금도 건재한지? 건재하다면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망하기전에 히로히토천황처럼 나서서 제 국민의 구세주가 되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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