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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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11)
2011년 03월 18일 09시 02분  조회:3092  추천:18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11)

      (1) 로신과 거래있은 우파들의 운명                    
     (2) 한
심한 우파만들기                    
     (3)
반우파후기 “정풍4계단”의 풍파                   
     (4)
“반우”를 겪고 떠오른 생각

            
               로신과 거래있은 우파들의 운명

   1957년  반우투쟁  때 어떤사람,  례를  들면 라직남같은 사람은 로신이  생전에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쓴 것을 고려하여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떻게되었을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파가 되지 않았을 수 있을가?  이 문제는  과연  정확히  말하기는 힘든것이다. 그가 여지껏  살아있다면 정풍의 “대명”, “대방”기간에 표현이 어떠떻겠는가? 글을 그냥 쓸가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니 않을가?  력사는 사실이지 가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거래가 있었던 사람은 이제와서 모두가 우파로  되고말았다는  사실 하나만은 똑똑하다는것을 알고있다. 풍설봉(馮雪峰), 정령(丁玲), 섭감노(聶紺弩), 황원(黃源), 서무용(徐懋庸), 시칩존(施蟄存) 등의 운명이 어떠했다는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것이니 더 말치않고 편폭 제한으로 다섯사람만 더 언급한다.
 

리소봉(李小峰. 1897ㅡ1971)  강소강음사람, 출판가. “54”운동 때 북경대학철학계를  다니면서 신조사성원이 되어 주간을  꾸리였고 1925년 3월,  북경에다  북신서국을 개설했다.  로신의  대부분  저작과 번역들은 북신서국에서 출판한 것이다. 로신은 북신서국을 도와 <<분류>>문학월간을 꾸렸다.  후에 세금을 지불하지 못한 일로 사달이 생기니 로신이 변호사를 구해 고비를 넘겼던것이다. 북신서국은 로신과 관계가 매우 밀접했 던것이다.   해방후 사영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를 하게되니 북신사는 상해의 다른 몇 개 출판사와 합쳐 상해문화출판사를 꾸려 리소봉이 이 출판사를 책임졌던것이다.  후에 리소봉은 중국농공민주당에 가입했고 출판사내 농공민주당지부의 주임위원을 지냈다.  1957년 8월 14일 <<인민일보>>는 <<하나의 지부로부터 본 농공민주당우파의 반동로선>>이란  글을 실었는데 이 보도에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지난해 출판사의 공산당지부에서 민주당파와  좌담회를 열고 그들의 의견을 들으려했건만 이 야심가들은 좌담회를 여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거니와 농공지부주임위원 리소봉은 ‘당을 호상감독해야한다.  공산당이  행동이 많아 착오를 쉽게 범하기 때문이다.”
 

왕첩삼(王捷三. 1899ㅡ1966) 섬서한성사람. 북경대학철학계졸업. 1924년에 서북대학과 섬서성교육청에서 련합하여 강의를 듣자고 로신을 청하였는데 같이 초청받은 사람은 진정모, 리계지 외 두사람이 더 있었다. 당시 그들을 책임지고 초청한 사람이 왕첩삼이였던것이다. 왕첩삼은 그 기간에 로신등에게 북경유람을 시켰다. 로신과 손복원은 사의를 표시하느라 중흥루에서 연회를 차려 왕첩삼을 청하였던것이다. 이일은 일기책에 기록 해놓느것이다. 그후부터  두사람지간에는 여러번 서신거래가 있은것이다.  1957년, 왕첩삼은 서안사범학원언어문학계 교수로 있으면서 민혁섬서성위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5월 15일, <<섬서일보>>의  초청을  받아 좌담회에 참가했던 왕첩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급학교의 행정령도를 당원이 담임하니 정치상에서 보면  대번신을 한것이고 일정한 성적도 있는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학교라는것이 행정기관과는 다르다. 과학의 조예라는건 인차 번신하는게 아닌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각  학과  부문을  조예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맡는것이 좋다는거다.  이는 각급  학교의 교육질량과 직접관게되는 것이다. 학교령도는 응당 그런 사람을 잘 포섭해야 한다. 그들은  당조직에 접근하려하고 지휘를  받으려하니 사상이 진보하는가 하지 않는가하는것은  큰  문제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학술수평이 높은  로교수  로교원은 존중받지 못하고있는데 이는 그들의 적극성을 발휘시키는데 영향을 크게 끼치는 것이다.  한편 방금발을 뗀 젊은이들은 왕왕 자기가 우로 올라가기  위해서  다른사람을  타격하길래 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 입지말아야  할 손실을 입게되는 것이다.   부대적으로 당에서 당원을  흡수하는  문제에 대해 한마디 더 말하 려한다. 어떤 사람은 고급지식분자를 흡수해 입당시키고 민주당파와 장기적으로 공존하면 모순이 생긴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당의 대오를 확대함에 고급지식분자를 질량있게 당에  흡수해야하는 것이다.  1949년 이전에 적과 혈투를 벌렸을 때 입당한 당원들에 대해서는 탄복이 갔지만 지금 입당하는  당원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가지 않는다.  우선 입당동기부터 순결하지 않은것이다.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기를 좋아하고 듣기좋은 소리만 하며 그래서 교원장은 그에 감복하해 하고 령도로서 가짜위신이나 얻으며 사리를 도모하게 되고 그럼으로 하여 서로간에 불신과 모순이 생긴다는것을 모르고있다. 이러한 현상이 중소학교에 더욱 엄중한것이다.  당원과  비당원간에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당의 위신은 내려가고있다. 거기에다 어떤 심뽀나쁜 사람의 기만으로  하여  일을  처리함이  공정하지 않아  없는 모순이 생기게   되고  작은 모순이 커지니 말이아니다. 때문에 나는  당은 고급지식분자중에서 당원을 흡수하 는 문제를 중히 여겨줄 것을 바라는바이다.


이런 담화가 있은지 한달만에 왕첩삼은 반우투쟁에 얻어맞았다.

 
송운빈(宋云彬.1897ㅡ1979)  절강해녕사람. 편집가,  문사학가. 1927년 로신이 광주에 가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은지 얼마않되여 손운빈이 <<신시대>>에다 <<로신선생은 어디로 피했는가>>라는 문장을  발표했는데 로신이 “ ‘납함’의 용기를 회복하기바란다”면서 문장을 더 쓰라는것이였다. 로신은 그것이 자기에 대한 희망이거니와 용기를  북돋우어주는 것임을 알고 고마워했다. 편지거래가 있었다.   송운빈은 항전기간에 <<로신어록>>을 편집했다.  1949년 새  정협이 개막되자 송운빈은  구국회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출석했다. 그리고는 잇따라 중앙인민정부출판총서에서 사업하게 되였던 것이다.  후에  그는 절강성문련으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사업하다가 우파에 걸렸다. 자기의 속심을 솔직히 토로한데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도  몇몇  심보나쁜자들이 짜고들어 그를 해친것이다.


  동해감(董海戡.1907ㅡ1980) 절강온주사람. 로신은 1928년 5월 2일 일기에 그가 자기를 방문왔다고 기록했다. 동향친구 김명약(金溟若)이 <<반역자>>를 번역했지만 그것을 찍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하니 동해감이 그를 데리고 자기를 찾아왔다는것이였다. 로신은 그 번역고를 <<분류>>에 련재하게 했다. 1931년말, 동해감은 3막극 <>을 편집하여 미전극단에서 연출하게했는데 욱달부(郁達夫)한테서 로신이 그 극을 보기싶어한다는 소리를 전해듣고는 청해 관람을 시킨것이다.  1957년, 동해감은 광주중산대학중문계교수로 있으면서 중국민주동맹 광동성위원회위원을 겸했다.  5월 19일, 중공광동성위는 대학교측과 함께 대학교수들을 청해 6시간동안 강의를 들었는데 그 회의에서 동해감은 대학교의 대부분 당원들이 두쪽얼굴을 가지고있는데 평시에는 봉건시대때 과부같이 얌전하다가도 운동이 나지면 흉악하게 변하고만다. 그래서 지식분자들은 그들을 몹시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걷과 속이 다르다. 의견을 말하라해놓고는 말하면 꼬리를 잡고 보복하는것 이다. 당위에서 몇 번 회의를 열었지만 다시는 말하려는 사람이 없게되었다. 세 번째는 두가지법률을 쓰지 말기를 바란다. 당원이 착오를 범하면 검토하면 그만이지만 비당원이 착오를 범했다가는 큰일나는것이다. 이런데서 어떤 당원은 착오를 꿈만해 하는 버릇이 생기거니와 당지부는 당원과 비당원을 쪽을 놓고 대하니 사람들은 불평이 많은것이다. 좌담회가 긑날 때 도주(陶鑄)가 태도표시를 했다. 당조직은 그 누구를 보복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것이였다.  6월 8일, “반우투쟁”이 공개적으로 발동되자 민맹중앙의 장백균(張伯鈞), 라륭기(羅隆基)에게 화력이 집중되여 비판받았다.  동해감은 그 두사람의 문제의 성질을 놓고 토론 할 때 그들이 착오를  범했다하여 처분하거나 끌어내리우는 방법을 쓸게 아니라 그들을 방조하여 일어서게해야 한다고 했다.

동해감은 말을 이렇게 했다하여 우파분자로 되고만것이다. 

    위맹극(魏猛克.1911ㅡ1984) 호남장사사람. 작가, 화가. 그가  로신과  거래하게 된데는 좀 특별한 사정이 있는것이다. 1933년 6월에 출판된 어느 한 그림간행물에 만화가 한폭 실리였는데 만화에 그려진 키작은 사람인즉 바로 로신이였다. 그런데 만화는 키작은 로신을 키큰 고리끼 곁에 세워놓고 제목을 “儼然”이라 단것이였다. 로신은 자기를 묘사한 만화에 인상이 깊었다. 
 위맹극은 로신에게 편지로 자기가 그 만화를 그린 의도와는 달리  편집은 그 만화를 <<론어>>에 붙이면서 제좋은 글귀까지 달았으니 과연  미안하게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했던것이다. 로신은 편지를 받고 인차 그에게 회답하여 관용과 량해의 태도를 표시했다.    위맹극은 중국좌익작가련맹의 동지이기도했다. 그후부터 그와 로신은 거래가 빈번해졌다.   1957년, 위맹극은 호남사범학원의 중문계교수로 사업하면서 성문련을 책임졌으며 중국민주동맹호남성책임자의 일원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그해의 6월 14일에 민맹호남성성위,  장사시위원회는 련합하여 련석확대좌담회의를 열었는데 신문에 난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등  몇편의 반우파사론을 놓고 토론했다. 대부분 사람이 그  사론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위맹극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말했던것이다.   
  “인민일보사론을 보고 나도 자기가 정협회의에서 한 말이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 생각해보았다. 다행히 나는 험한 말은 하지  않은것이다. 사론에 밝힌것이 옳다고 생각되여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인민일보의 매편문장이 완전히 다 옳은것일가? 나는  꼭 그렇다고는 보지 않는다.... 독립사고를 해야하는것이다.  일민일보는  전기통의 문장을 발표하면서도 또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으니 틀리는게 아닌가. .....그래 인민일보의 매 단어 틀린 글귀마저도 완전히 옳다고 봐야하는가?  인민일보의  구체적 작법이 그래 다 옳을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것이다.”   
그는  여러번이나 자기가 한 이 말이 혹시 위험계선을 넘지나 않았나 검사했다. 했건만도 그역시  끝내 우파모자를 쓰고야 말았던것이다.
 

아래 모택동의 말을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있다. 

1958년 5월 8일, 당의 8대 2차회의에서 모택동이 말했던것이다.   
“이 문장은 허다한 사실로 후금박고(厚今薄古)가 우리 나라의  전통임을 증명하였거니와 사마천(司馬遷), 사마광(司馬光)을 끌어내 알려주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끌어내지 않았다.....진시황은 후금박고의 전문가인 것 이다.”
   
이때 누군가 말참견했다.
  
“진시항은 분서갱유를 했소.”
   
모택동은 즉각 호기를 뽑았다.
   
“진시항이 다 뭔가? 그야 기껏해햐 유생 468명을 매장했지만  우리가 매장한 유생은 4만 6천인거야.... 민주인사들이 우리하고  변론했지, 그네들이 우리를 진시황이라 욕하는데 딱 맞는건  아니요,  우리야 진시황을 백배나 초과하지 않는가.  우리를  진시황이요  독재자요 하면서 욕하는데 우리는 다  승인해야지.  헌데 애석하게도 그들은 할 말이 모자라서 왕왕 우리가 보충해야줘야한단말이요.”  (큰 웃음소리)  


지금세대는 세상에 그런일도 있을가고 하지만 중국의 “반우”때는 확실히 그러했던것이다. 그때 없는 우파를 일부러 만들어내는것이 보편화로 되었는데 여기에 총정치부문화부창작실(원래명칭은 중국인민해방군총정치부 문학미술창작실) 하나만을  례로 든다. 려백(黎白)이 쓴 글이다. 

서광요(徐光耀)와 나를 적발비판한 동시에 공류(公劉)는 여러차례나 비판받았는데 그의 “죄상”을 우파로 정하는건 복잡한 일이 아니였다.  
첫째, “명방”회의에서 그는 총정문화부 련화지(蓮花池)숙반에 비평의견을 제출했던것이다. 나도 그 회의에 참가했길래 잘 아는건데 그가 전국의 “숙반운동”을 공격한건 절대 아니였다.  
둘째, 그가 전에 발표한 몇수의 고체시를 정치계선에다 무한히 끓어 올려놓고는 사회주의조국을 악독하게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론리인 것이다.   
셋째, 이미 조직상 결론을 다 지은 그의 지나간 력사문제를 새삼스례 다시 끄집어내여 정하는것은 맞지 않은것이다.

단른 한 사람 심묵군(沈黙君)에 대해서는 세차례 회의를 열고 비판 했다. 그는 “명방”회의때면 말한마디 하지 않았길래 그의 공격언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평상시 그의 작품과 품질을 봐서 우파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우파가 돼야한다고 결정지은것이다. 나는 그래도 뭣도 모르고 “명방”을 반우운동이라 말을 해서 걸렸다지만 한마디 말도 없은 그를 우파로 만드는건 아무리봐야 괴상한것이다.

 그리고 우파분자로 획분된 다른 한 사람은 작가 백화(白樺)다.  그는 창작실의 초청을 받고 북경에 와서 “반우”에 참가한 사람이였다. 그가 한창 다른사람을 적발비판하고있을 때 곤명군구당위에서  전화로 총정치부에 전화를 쳐 그가 곤명군구에 있었을 때의 죄악을 적발하라면서 그를 우파로 획분해줄것을 요구했다. 총정치부는 비준했다. 그리하여 백화는 우파가 된것이지 창작실에서 적발해서 된게 아니다.

반우파운동초기, 작가협회당조직에서는  6월  6일부터 련이어 당조확대 회의를 열더니 8월 6일에야 결속지었다. 8월 7일자 <<인민일보>>는 “‘정령, 진기하반당집단’을 쳐부신 문예계반우파투쟁의 중대한 진전”이라 는 제목의 보도를 실었다.  작가협회당조확대회의는 동시에  “정,진반혁명집단”에 련루되는 인원들을 찾아내여 비판했다.  창작실의 착작원중에서 서광요와 내가 전에 진찰기변구  화북련합대학문학원문학계의 학생이였는데 그때의 계주임인즉은 진기하였던것이다. 서광요는 건국후에 정령이 꾸렸던 문학연구소에서 학습한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두사람은   “정,진반당집단”의 군대내골간”으로 적발되여 비판받았은것이다.   서광요의 “죄상”이라는것이 주요하게는 정령을 편들어 번안했고 경제상에  진기하를  도와주었다는  그것이였다.  그 죄명은 아무런  도리도  없다. 정령을 도와서 번안했다는 것도 보면 다른것이 아니였다.  1956년에 작가협회당조에서는 한통의 공개서한을 보내여  총정창작실당조가  서광요에게 그가 정령이  꾸린  문학연구소에 있었을 때 적발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견해와  증명을 하게끔 하라 요구한것이다. 그때 나는  조직위원이였기에  작가협회당조의  편지를 서광요에게 주면서 그더러 자료를 쓰라했다.  그때 그는 쓸 필요가 없다고 태도표시했다. 나는 그것 이 작가협회당조의 요구이거니와 조직과  조직간에 거래된 편지인것만큼 그래도 쓰는것이 좋겠다고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의  일기를 본 후  실사구시적으로 자료한편을 썼다.  사실이  이러한데  그것이 어쩌면 서광요가 작가당조를 악독하게 공격한것이 되 며 정령을 감싸주면서 번안한것이 된단말인가?  경제상 진기하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있다는것을  동창이 알려줘서 알게되였던 서광요는 선생의 인정을 생각해서라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 모여두었던 원고료  몇백원을 내놓아 잠시 어려움을 면하게 한 것인데 그것이 어쩌면 우파행위가 된단말인가?     
서광요는 1938년, 13살 때 혁명에 참가하여 오랫동안 부대에서 공작하였는데 생활이 소박하고 근엄한 사람이였다. “명방”이 한창일 때 그는 촌에 내려가 생활체험을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북경에 돌아온건데 그는 오자마자 우파로 되었던것이다.  폼덕이며 언행이며 그의 위인됨을 잘알고있는 창작실사람들은  그가  갑작스에 우파로 결정되니 너무나도 뜻밖인지라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와 서광요는 “동범”이였다. 한가지 일을 꼭 말해야겠다. 그것은 회의때 내가 “계통적으로 악독하게 흐루쇼브를 공격했다는  ”죄상“이다.  비판받을  때 내가 내심받은 진동이 그 ”죄상“을  훨씬  초월했던것이다. 창작실의 ”반우“가 후기에 이르자 어떤 작가는 나를 비판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흐루쇼브비서동지의 보고에 역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쏘련공산당을  옹호하고  흐루쇼브동지를 옹 호하니 너와는 다른것이다.  네가 쏘련공산당과 흐루쇼브동지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니 너는  반당사상은 골수에 밖힌 사람이다.“ 라는것이였다.   
나는 그가 전혀 생소해보였거니와 그런소리를 듣고 참을 재간이 없어서 그와 한바탕 다투고말았다.  
그는 나를 전혀 모르고있었다.  나는 우선 착취계급의 자녀가 아니였다. 14살에 혁명에 참가하여 16살에 입당했고 부대에서 공을 세웠지 처분받은적은 한번도 없는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 반당사상이 골수에 밖혔다하다니? 대체 무엇때문에 그같이 악독하게도 돌을 들어  우물에  빠진 사람을 내리치는가말이다? 네가 정녕 당의 리익을 위해 그런단말인가?   솔직히 말해 “명방”기간에 나는 당에 그 어떤 의견마저도 드리지 않았는데? 내가  당신을 노엽힌적이 없으니 개인악감으로 그럴수도 없겠는데 왜 기여이  잡자고 애를 빡빡 쓰는가말이다?    정치풍랑이 이같이 사람과  사람지간을 삭막하게 만들고 험악하게 만드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놓고 반복이 있었다. 창작실의 운동을  이끄는  몇몇  책임자가 애초부너 나를 우파로 하지 않고  중우파로 하여  당내류당차칸 2년이라는 처분을 주기로 했다.  조건이 안되니 죄를 씌우지 않고 경하게 처리한다는거다.  그런데 원총정치문화부의 모 부부장이 작가협회서기로 임명되면서 총정치부담정주임에게 의견을 제기하기를 려백(黎白)은  “정진반혁명집단”이 부대내에다 밖아놓은 골간분자다. 그러니 그를 꼭 우파로 만들어놓아야한다고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에 총 정치부기률위원회서기면서 련락부장이였던 장정양(張楨樣)동지는 그따위 소리를 귀등으로 들으면서  원래 결정지은 그대로 집행하였길래 나는 우파분자로 되지 않은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때 일단 우파로 되기만했더면  일생을  영원히  망쳐먹는다는것을 몰랐던것이다.  력사가 증명하고있다, 무릇 우파로 결정된 사람이면 그가 죽지 않고 다행히 목숨붙어있다해도 20년간은 비인간으로 살아야한다는것을!


다시한번 언급하기싶은것은 내가 최후에 우파로 결정되지 않은것이 그야말로 불행중다행이요 큰 행운이라는 것이다! 나는 면목모르는 장정양 동지에게 다시한번 큰절을 올리는바이다. 

                 반우파후기 “정풍제4계단”의 픙파


1958년초,  창작실의 반우는  한단락 종결지었다. 창작실의 우파분자는 서광요, 애염, 공류, 하공덕, 심묵군, 백화, 오점일, 번빈  등 8명. 서공은 본단위로 돌아가서 우파로 획분되였다. 중우파분자와 처분을 받았거나 처리를 받은 사람이 6명이였으니 전체 창작실인원의  반수를 차지했다. 그외사람 대부분이  투쟁에 적극적이 못되다하여 또한 비평을 받았으니 “반우”에 시달림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그에 앞서 1957년말, 창작실의 반우파운동은 한단락 종결짖고  “정풍”을  시작했는데  요구가 매 사람이 소자보(小字報) 50장을 쓰라는 것이였다. 내용은 제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고험이였다. 그 런데  아무리 고험이라해도 쓸거리가 없는데 어떻게 쓴단말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종이를 아무데나 버리지 말자.”는 글을 쓰고 어떤 사람은 “침을 아무데나 밷지 말자.” 는 따위의 소자보를 써서 붙이였다. 그러는 중에도 어떤 사람은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도 생각없이  령도게  의견을 제기하는 내용의 소자보를 썼다. 한풍은 다른  한 사람과 같이 “타유시 (打油詩)”라는 소자보를 썼는데 “로**는 주견이 없이 늘 **의 엉치만  따라돈다”고 했다. 한풍이 그렇게 한건 악의가 아니여서 우파로 몰아붙일 수도 비판할 수도  없으니 늘 써 온 수단대로 그에게  2년간 류당차칸처분을 주고말았다. 

1958년에 곤명군구소속부대에 하방한 창작실주임 우극(虞棘)은  단위의 사업을 일찌기 개선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당지부서기직무를 박탈당했거니와 정풍운동에 중점대상이 되어  비판을 련속받았다.  후에 병이 돌발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는데도 그에 대한 비판은 걷우지 않았다.   
1958년 5월에 이르러 우파로 획분된 창작실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처분을 받고는 창작실을 떠나갔다. 우파분자들은 정식으로 군적을 떼우고 당적을 떼운 후에는 로개농장이나 아니면 관교단위로 넘어갔고 기타의 사람들은 농장에 하방하거나 아니면 원단위로 돌아갔다. 나머지 사람은  “반우운동”을 령도했던 이들로서 그들은 원단위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부대나 “八一電影制片廠”으로 전근되였으니 창작실은 실제상 이름만남았다가 얼마후 취소되고만것이다.
 

                  반우”를 겪고나서 떠오르는 생각

   반우운동은 더 말할 것 없이 한차례의 심한 정치운동이였다.    모택동은 자기가 쓴 <<一九五七년하기의 형세>>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산계급우파와 인민내부모순은 적아모순으로서 대항성인것인바  네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하는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인것이다.   이번에  자산계급우파를  비판하는 의의를 적게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정치전선과 사상전선에서의 위대한 사회주의혁명인것이다.”  
  
1957년 9월20일부터 10월 9일까지 사이에  열리였던 중공8기3중전회에서  무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무산계급과 자산계급모순, 사회주의도로와 자본주의도로지간의 모순이 더말할 것 없이 당전 우리 나라 사회의 주요모순인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바로 중공8차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개조를 기본상 완성한 후에는 무산계급과 자산계급모순, 사회주의도로와 자본주의도로간의 모순은 기본상  해결되리라는 예측을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만 것이다.


중국의 광범한 지식분자에 대한 모택동의 예견과 판단은 어떠했고  내린 결론은 어떠했는가? 1957년 7월 9일 그가 상해간부회의에서 한 강화를 후에 모택동선집 제5권에 수록했는데 글의 제목은 <<자산계급우파의 진공을 물리치자>>는 것이다. 그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껍지가 없으면 털은 붙을 자리가 없는데 지난날 지식분자라는 이 ‘털’은 다섯장 껍지에 붙어있으면서 바로 그 다섯장껍지의 밥을 먹고 산것이다. 첫 장은 제국주의소유제. 두 번째장은 봉건주의소유제. 세 번째장은 관료자본주의소유제다. 민주혁명이 세개의 큰산을 뒤엎지 않았는가? 바로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타도한것말이다. 네 번째장은 민족자본주의소유제. 다섯 번째장은 소생산소유제. 곧바로 농민과 수공업자의 개체소유제다. 지난날 지식분자는 앞쪽 석장의 껍지에 붙거나 아니면 뒤의 두장껍지에 붙어 밥을 먹었다. 지금 그 다섯장 껍지가 있는가없는가? 그 껍지들은 다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 결론은 그가 1957년에 말한것이니 건국이 된지 8년만인것이다. 모택동은 전 중국의 모든 지식분자를 가리킨것이다. 그들은 다가 그 다섯장껍지에 붙는것이라니 지식분자가 나라를 사랑하고 당을 사랑하며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것을 그는 모조리 부정해버린것이다. 그러한즉 모택동이 말하듯이 명방을 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고 깊이 유인하였다가 일거에 때려엎는것을 리해하기는 어려운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당정풍을 방조하라는 당중앙의 호소에 적극향응하여 만강의 열성으로 “명방”에 뛰여든 것인데 눈깜짝사이에 당과 사회주의를 악독하게 공격한 것으로 되고말았다.   어떤 사람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자극적인 말은 하지도 않았거니와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우파로 획분되였으니 세상에 그래 이같이 괴이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파로 획분되지 않았다해도 지식분자는 모조리 사상개조를 해야 하고 립장을 철저히 개변해야한다고 했다. 모택동이 그같은 견해를 갖고 반우파운동을 하지 않아도 중국의 지식분자들은 자기의 가치와 위치를 갖고있음이 명명백백한 사실인것이다. 하건만 문화혁명에 이르러서는 지식분자를 지어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 다음에다 놓아 “고린내나는 아홉째”라고 딱지를 붙이까지 한 것이다. 력대봉건왕조시대에 “아래아홉째”라 한것보다도 새중국지식분자는 신세가 그보다 더 험악했던 것이다.

이런 “좌”적인 착오가 국가의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생활에 이르기까지에 끼친 엄중한 후과는 이루헤아릴 수 없다.

당은 11기3중전회에서 틀린것을 바로잡기시작했다.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인것이다. “兩凡是”와 “좌”의 착오를 규정하기 시작했는바 력사가 남긴 허다한 원안과 가짜안건, 틀린안건을 평판하였다. 개별적인 몇사람을 내놓고는 대부분 우파분자가 규정을 받은것이다. 지식분자의 지위와 대우도 많이 제고되였다. 그렇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하는것이 있다. 지식분자에 대한 “좌”적인 정책은 오랜 력사근원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숙청하는 일은 일조일석에 완성하는것이 아니라는 그것!


1958년,  중공중앙은  우파분자로 획분된 사람을 죄행의 경중에  따라서  중으로  부터 차례로 경에 이르기까지 로동교양, 감독로동, 남겨 쓰면서 관찰, 철직, 강직강급,  행정처분면제  등  6가지  방법으로 처리했다. 앞의 두부류에 속하는 처벌을  받은 우파분자는 강박에 의해 원래하던 공작강위를 떠나  변강, 농촌이나  감옥에 가서  체력로동을 해야했는데 초부하의 고된 로동은 그들을 지치고 병들고 쓰러지게 만들었다. 후에 3년간 지속된 기황에 거의가 굶어죽고말았다. 도시에 남은 우파분자들도 처벌을 받아 강제로 각종 하기싫은 체력로동을 해야했거니와 청소를 하거나 변소를 치는 등 어지럽고  더러운 일은 거의 그들이 했다. 어떤 사람은 원단위에 남긴했지만 아무런 권리도 없이 남의 기시를 받았다. 개별적인 사람들은 기시와 모욕을 받아낼 재간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거기에 비하면 중앙에서 점을 찍어 영향이  자못  컷던 몇몇 대우파분자 례를 들면 장백균과 라륭기같은 사람은 충격을 적게 받았지만 대부분이 대우가 떨어지고  행정직무를 철소당한것이다. 기층단위에 내려와 묵묵히  사업만해야했던 그들도 역시 운명은 비참하였는바 어떤 사람은 타향에서 죽어 불귀객이 되고말았다. 
  1958년부터 일 부우파들은 점차  “모자벗은 우파”로 신분이 바뀌여졌다. 그렇지만 문화 혁명이 오자 대부분 “우파”, “모자벗은 우파”들은  재차충격을  받은것이다.  반우파운동, 문화대혁명 등 일련의 정치운동후에도 모종의 인소로 하여 모자를 벗지 못한채 눌리워있다가 20년후인 1978년에야 비로서 허리를 편것이다.  살아있은 우파중 평판받은것이 10 여만명.
 
                     우파의 평판(복권)

1977년,  호요방이  중국공산당중앙당교부교장으로 임명되여  당교의  사업을  책임지면서부터 손수 원안과 가짜안건, 틀린안건에  대해서 평판하기 시작했다. 호요방은 중앙당교의 교사들을 조직하여 <<“4인방”이 뒤집어놓은 간부로선시비를 규정해야한다>>를  써서 그것을 <<인민일보>>사론으로     하여 1977년 10월 7일자 신문전면에다 실었다. 그리고는 11월 27일에 또  <<모주석의 간부정책을 반드시 락실하자>>는 문장을 <<인민일보>>에 발표하였는데 이 두편문장은 전국에  전에 없던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원안과  가짜안건, 틀린안건평판이 개시되였음을 선포한 것이다.  1977년12월15일에   호요방은 중앙조직부장으로 되었다.   1979년 봄, 통전부, 공안부, 중조부, 중선부, 민정부는 산동의 연대에서 회의를 열고 전문 반우운동이 남겨놓은 문제를 처리하였다.  연대회의에서 격렬한 쟁론이 벌어졌는데 보수파는 반우운동에서 우파로 획분된 군중과 간부, 우파모자를 벗은 사람은 적당히 안배하고 다시 기시하지 않으면야 이미  다 처리된것이니 원안,  가짜안건, 잘못된안건으로 평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호요방 등 동지들은 반우때의 원안, 가짜안건과 틀린안건은 반드시 철저히 평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에는 보수파가 우세하여 1978년 4월8일에 중공중앙은 통전부에서 올린 <<우파분자모자를 전부벗길데 관한 청시보고>>를 비준했거니와 그것을 1978년의 제11호문건으로 전당에 발급했다. 이 문건에는 “1957년 반우본신은  틀리지  않았는데 문제는 확대화한것이다.”, 틀리게 획분한 우파에 대해서는 정책을 락착하여 적당이 안치하며 직을 올려주고 급을 올려주며 공자를 조정하고 장려하고 직청을 주는 등 문제에서 다른직원과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면서도  보고에는 틀리게 획분한 우파를 평판해야한다는 말은 없었다.   연대회의 후,  호요방은 우파를  전면평판해야한다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냥 내밀었는바 1978년5월에는   <<실천이 진리를 검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문장을 발표하여 진리표준에 대한 대토론을 벌리기에 이르었다.  그 결과  보수파세력은  눌리우고 말았던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중앙의 다섯개 부는 북경에서 제2차회의를 열었는데 두가지 같지 않은 주장은 의연히 날카롭게 대립되였다. 하지만 결국은 우파를 완전히 평판해야한다는 주장이 도리가 있었기에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78년9월17일에 중공중앙은 <<중공중앙이 결정한 우파분자모자를 전부벗겨줄 실시방안을 관철하자>>는 문건을 찍어 돌리였다. 다섯달전의 청시보고에 비해보면 이 실시방안은 우파를 안치하는 정책을 락실함이 더 명확했거니와  세밀하게 규정까지 지은것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무릇 우파로 획분하지 말아야 할 것을 틀리게 획분한것은 응당 실사구시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비준을 거쳐 개정한 사람은 정치명예를 회복시키고 개정단위에서 책임지고 합당한 공작을 분배야 하며 원래의 신봉대우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원래 공산당원인 사람이 새로 중대한 문제가 발견된게 없다면 당적을 회복시켜주어야 하며, 원 공청단원은 단적취소처분을 철수해야 한다.” 

1980년5월8일, 우파를 평판하는 사업은 한단락 끝맺었다. 모자를 씌웠던 우파 55만명을 거의 다 평판했지만(구체수자에 의문이 감) 일부 우파는 모자만 벗겼을 뿐 원처리를 개정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중앙에서 인정했던 5명의 우파분자 장백규, 라륭기, 팽문응, 저안평, 진인병 그리고 각 지방에서 인정했던 우파분자 90여명이니 다 합해야 백명도 안되였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11기6중전회에서 반우운동성질을 아래와 같이 규명했던것이다.   “이 한해에 전당은 정풍운동을 시작하면서 군중을 발동하여 당에 향해 비평건의를 하게끔했는데  이것은  사회주의민주를 발양하는 정상적인 보취였던것이다.  정풍운동중에  극소수의  자산계급우파분자는 이른바  ‘대명대방’이란  기회를  타서 제멋대로 당과 신생한 사회주의제도를  향하여  진공을  발동하였거니와 공산당의 령도를 빼앗으려고 꿈꾸었다. 이러한 진공에 견결히 반격한것은 완전히 정확하고 필요한것이였다.  그러나 반우투쟁이 엄중하게 확대화되여 지식분자, 애국인사와 당내의 간부를 ‘우파분자’로 몰았기에 불행한 후과를 가져왔던것이다.”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
   
당년에 반우운동을 지지하고 집행하였던 등소평이 80년대에 이르러 이런 태도였던것이다.
      
평판받은   우파는 대부분이 원공작강위로 되돌아갔고 개별적으로는 더 올랐다.  례를 들면 주용기(朱鎔基)같이 총리로 된 사람.    1989년 “6.4사건”후 언론공간이 죄여들면서 반우운동기간에 관방에서 표시했던 태도를 내놓고는 그 어느 매체에서든 반우운동을 다시 론해서는 안되였다. 중앙의 관점과 상반되는 론조를 내놓는것을 허용하지 않고 일체 엄금하였기에 그 국면이 여지껏 채 풀리지 않고 지속되고있다. 장이(章詒)와 그의 저작 <<往事幷不如烟 >>,<<伶人往事>>를 중선부는 출판못하게 하는것 등.


2005년11월13일, 산동대학교의 퇴직교수 사약평(史若平) 등의 주도하에 여러우파인사와 가족은 련명으로 인대(人大)와 국무원에 공개신을 보내여 중공은 당년에 박해받은 지식분에게 명확히 반성하고 잘못을 빌며 해를 입은자와 가족에게 공평합리한 배상을 해줄것을 호소하였는데 석달사이에 1,500여명이 이에 향응하여 나섰던것이다.   2007년에 반우운동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북경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61명 우파분자가 련명으로 공개서한을 보내여 중앙은 우파를 철저히 평판하라, 잘못을 공개적으로 빌라, 반우운동은 “착오”였다면서도 “확대화”했다는 것으로 반우운동은 필요했다는 유론은 틀린것임을 선포하라면서  우파분자의 정신손해를 배상하라, 언론금구를 풀어놓으라 호소했다.


영향

“반우파운동”이 훗날 중국에 끼친 영향은 이루헤아릴 수 없이 엄중한 것이다. 항미원조가 결속된 몇해사이 중국은 화해로운 분위기속에서 경제를 발전시켜오다가 그것이 반우운동으로 중단되였거니와 중공8차당대회에서 내놓았던 대규모의 계급투쟁은 한단락 종결지었으니 금후의 공작은 사회주의건설이 위주가 되리라던 정책을 중지하면서 그것을 의식형태면에서의 계급투쟁으로 바꾸었기에 경제발전에 커다란 압력을 주었던것이다.  지식분자들이 이제다시는 공산당과 정부에 의견을 제출하려하지 않는다. 각 민주당파역시 더는 공산당을 믿지 않게되였고 참정이식은 쇠퇴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이 당외세력을 겨누고 하던 계급투쟁은 공산당내부의 부동한 로선투쟁으로 변하고말았다.    반우파운동을 걸친 후 중공의 정책은 의연히 정치를 통수로 하고 계급모순과 계급투쟁로선을 강조하는데로 돌려졌다. 공산당원들은 자기가 “우”로 되지 않을가 두려워 모택동의 지시만 “바싹”따르다보니 정치로선상 그를 따라 좌경으로 넘어갔고 모택동은 공산당내에서 영향혁이 진일보 높아지면서 당내민주를 자기 독단으로 바꿔버린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훗날에 “대약진”, “4청운동”, “문화대혁명”과 같은 화근을 심어놓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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