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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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25)
2011년 03월 24일 12시 14분  조회:2899  추천:23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25)        

(1)
흐루쇼브는 모택동의 떠보는말에 불평불만        
(2)쓰딸린에 대한 비판: 쏘공20차대회의 대내반응과..
(3)흐루쇼브의 말: 중국은 “황화”     

        흐루쇼브는 모택동의 떠보는말에 불평불만
핵심제시:
    
흐루쇼브는 분개하여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미묘한 국면에 빠졌는가, 한면으로는 ‘쏘련을 위수로 하는’ 따위의 떠보는 말을 듣고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를 말 한마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우리가 담론하는  평등이 그래 무슨꼴인가? ” 
   

모택동 흐루쇼브
        

1957년 11월 2일, 모택동은 중국대표단을 거느리고 모쓰크바에 갔다. 모택동은 비행장에서 간단히 연설했다. 
  
“위대한 쏘련을 위수로 한 사회주의진영은 세계평화의 견강한 보루를 확보했는바 제국주의의 압박과 노역을 당하지 않으려는 모든 인민들의 충실한 벗인것이다.”    
   
모택동이 쏘련땅을 밟자마자 기치선명하게 내놓은 “쏘련을 위수로 한다”는 제기법은 더말할것 없이 쏘련공산당에 대해 유력한 지지를 보낸다는 것을 표명한것이였다. 모쓰크바에 있는기간에 모택동은 여러번 “쏘련을 위수로 한다”는 말을 했다.

“우리 여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고 이렇게 많은 당이 있으니 어쨌든 수령이 하나 있어야 한다. 우리 진영의 내부사무를 볼것같으면 상호조절하고 합작방조하며 회의를 소집하는 것들이니 수령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강한 제국주의진영을 앞에다놓고있는데 그들은 수령을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흩어진다면 힘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 때문에 우리는 꼭 하나의 그런 국가가 있어야 하고  그런 당이 있어서 아무 때건 회의를 열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 즉 “쏘련을 위수로한다”는 제기에 대해서 흐루쇼브는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모택동은 또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중국은 우두머리로 될 수 없다.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이 적다. 우리는 혁명경력은 있지만 건설경험은 없다. 인구를 놓고 보면 우리는 대국이지만 경제는 소국인것이다. 우리는 위성을 반개도 올리지 못했다. 이런 머리를 갖고는 매우 어려운것이다. 회의를 소집해도 남이 들어주지 않을것이니. 쏘련공산당은 40년경험이 있는 당으로서 그 경험은 완전한 것이다.” 
   
중공은 “쏘련을 위수로 한다”고 제출하고는 동구라파 일부형제당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자 모택동은 강화의 분량과 설복력을 높이느라 자기가 직접느낀 감수를 말했다.
    
“나는 모쓰크바에 두 번오는데 첫 번에는 유쾌하지 않았다. ‘형제당’, 그 한마디가 듣기좋아도 실상은 평등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일종의 평등기분을 감촉하게 된다. 례를 들면 우리가 문건을 토론해도 의견을 청취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고있는 것이다. 방금 흐루쇼브동지가 기초위원회를 조직해야하지 않겠는가고 제출하지 않았는가? 채납되지 않는 의견은 가히 두세번 제출할 수 있는것이다. 만약 마지막에 대다수가 채납되지 않는다면 가히 보류하여 구경 어느것이 맞는가를 실천이 증명하게 해야 한다. 만약 실천이 제의한 의견이 맞다고 증명한다면 내가 틀린 것으로 되니 그렇다면 우리는 착오를 승인해야하는 것이다. 이런것이 바로 일종 평등관계인것이다.”
    

쏘공은 모택동의 건의에 그닥 흥취를 느끼지 못했다. 원인인즉 따지고보면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쏘련을 위수로 한다”가 흐루쇼브와 쏘공에 그닥지 흡인력이 없는것이고 다음은 유고슬라비아, 파란과 민주독일 등의 공산당에서는 “쏘련을 위수로 한다”를 견결히 반대했거니와 흐루쇼브역시 실제적인 의의가 그닥지 크지도 않은 일종의 설법을 가지고 미움을 사고싶지 않았기때문이다. 하여 흐루쇼브는 “쏘련을 위수로 하는 사회주의진영”이라는 제기법을 선언에 써넣는것을 반대한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노력과 각국당의 지지로 하여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쏘련을 위수로한다”는 건의가 결국은 절대다수표를 얻어 그것이 사회주의국가 공산당과 공인대표회의에서 통과되여 선언
(<<모쓰크바서언>>이라도 함)에 들어가 “쏘련을 위수로 한다”것이 밖혀진 것이다.    
이같이 되자 11월 18일 회의에서 모택동은 기뻐하면서 “쏘련을 위수로 한다”는것을 거듭 천명했거니와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것이다. 
   
“이번대회는 세계의 무산계급과 인민의 생기가 오르고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는 하나의 형세였다. 따라서 일치하게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승인했는데 이 우두머리가 쏘련, 바로 쏘공중앙인 인것이다.”
        
모쓰크바에 있는 기간에 모택동은 흐루쇼브와 일련의 문제, 이를테면 전쟁과 평화문제에서 존재하는 분기같은것을 놓고 담화했는데 그것이 후에는 중쏘관계발전을 복잡하게 만드는 병집으로 된 것이다. 
   
모쓰크바회의에서 모택동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흐루쇼브의 언론과 맛서면서 후에 흔히 쟁의를 일으키게되는 한단락 말을 내던졋던것이다. 
   
“지금 한가지 정황을 예측하게 되는데 그것인즉 바로 전쟁을 발동하려는 미치광이로서 그들은 원자탄, 수소탄을 도처에 던져.... ” 
   
모택동의 이 말을 흐루쇼브는 리해하기 힘들었다. 평화와 전쟁문제에서 중쏘량당은 분기가 있었던것이다.
    
1958년부터 시작하여 중쏘관계에 또다시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다. 
   
례를 들면 모택동은 흐루쇼브가 “공동함대”건의를 제출함으로 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이 금문도를 포격데 대한 그의 태도가 다름으로하여, 쏘련이 <<국방신기술협정>>을 찢어버림으로 하여, 후르쇼브가 이름을 찍지 않고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비평함으로 하여, 중인변경충돌이 생기니 쏘련은 인도의 편을 드는 성명을 내린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잘못본것이다. 그러니 중쏘지간 호상신임하는 기분이 엄중히 파괴되였거니와 중국과 쏘련 다가 대내외의 정치협조방면에서 상처만 생기게되였던 것이다. 
   
1959년 9월, 흐루쇼브는 요청에 따라 미국을 방문하고는 쏘미련합공보를 발표했다. 미국을 돌고 귀국한 후르쇼브는 그후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쏘련당정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여 새중국성립 10주년경축활동에 참가했다. 국경초대회의에서 그는 중국은 무력으로 자본주의제도의 온고성(穩固性)을 떠보지 말라고 일깨워주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중국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지였는데 다툼질이 심하게 벌어지고말았던 것이다.
       
흐루쇼브는 분개하여 말했다. 
  
“우리는 얼머나 미묘한 국면에 빠졌는가. 한면으로는 ‘쏘련을 위수로 하는’ 따위의 떠보는 말을 듣고 다른 한면으로는 우리를 말 한마디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니. 우리가 담론하는 평등이 무슨꼴인가?”
        

그후 중쏘량국은 각 령역의 관계가 더 급속히 악화되였다.
         
1960년 2월4일, 와르샤와조약 체결국은 모쓰크바에서 정치협상회의를 열었다. 클리물리궁의 초대회의에서 흐루쇼브는 그냥 불만을 내뿜으면서 “어떤 사람은 ‘쏘련을 위수로해야한다’고 제기했던 것이다. ‘위수’가 우리에게 기껏 가져다준게 그래 무엇이였는가? 물질방면에서 우리한테 소젓과 황유를 갇다주지도 못하고 감자, 채소와 주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도의상 아무런것도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쏘련을 위수로 하여  흐루쇼브를 위수로 하여 하는데 그건 네가 착오를 범하는것을 두고보겠다는것이고 그런후에는 그를 비평하자는 것이다. ‘위수’를 방귀로 여기면서 공용의 가래통으로 써먹으려든다. 아무나 침을 뱉게.”
    
흐루쇼브는 욕지걸이를 할수록 열을 더 올리였다. 창끝이 모택동을 향한 것이였다. 
이는 중쏘관계가 진일보로 악화되였음을 가리키는 사건이였다. 
1960년 10월, 류소기는 중궁중앙대표단을 거느리고 쏘련에 가 모쓰크바에서 열리는 각국공산당과 공인당회의에 참가했다.  론중에 일부국가의 당은 “쏘련을 위수로 한다”것을 성명에다 써넣은것을 동의하지 않으면서 빼버릴 것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중공대표단도 고집할 필요가 없었기에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는 ‘쏘련을 위수로한다’는 제기법이 정확하다고 여기였던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대표가 문건에 써넣지 않는데 동의하기에 우리는 고집하지 않으련다.”
        
이렇게 되어 1957년에 <<모쓰크바선언>>에 써넣었던 “쏘련을 위수로 한다”는 구절이 1960년에 와서 선언에서 지워지게 된 것이다.
 

                          쓰딸린 대한 비판: 
     쏘공20차대표대회 내외반응 중쏘관계    

1956년 2월에 쏘련공산당의 제20차당대표대회를 열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5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번 대회의 총결보고가운데서 국제형세의 새로운 론점과 주장, 특별히는 흐루쇼브가 “개인숭배와 그 후과에 관하여”
(“개인숭배”가 후에 “개인미신”으로 고쳐졌는데 행문의 편리를 봐서 그냥 “개인숭배”로 쓴다.)라는 제목으로 쓰딸린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일인지라 충격이 과연컷다. 력사이래 쏘련내외를 막론하고 그처럼 세상을 깜짝놀라게 한 일은 없는 것이다.    
대회는 쏘공과 쏘련의 발전에 대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세계사회주의전도에 대하여, 중쏘관계에 대하여 모두 심각한 영향을 일으킨 것이다.  
  

             쏘공20차대표대회의 내외반응
    

쏘공이 20차대표대회에서 제출한 일부 국제리론문제에 대해서는 다만 그 후에 국제공산당운동을 하면서 점차 중시하고 돌출해진데 지나지 않는 다. 그 회의가 쏘련의 국내와 국제에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주로 흐루쇼브의 비밀보고인 것이다. 여기서 주로 반응이 컷던 비밀보고에 대해서 언급하고 국제리론문제는 간단히 취급하려한다.
    
쏘공20차대표회의보고에서 국제부분에 새로운 것이라면 후에 주로 쟁의를 일으킨 세가지 문제 즉 두 개의 체제와 화평공처, 당대에 전쟁을 방지 할 수 있는 가능성과 부동한 국가에서 사회주의로 과도하는 형식에 대한것이였다.  
   
흐루쇼브는 두가지 체재와 화평공처문제에 관해서 먼저 강조했다.
“사회제도가 같지 않은 여러나라가 평화공처할데 관한 레닌의 원칙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의연히 우리 나라 외교정책의 로선으로 되여있는 것이다.” “평화공처는 침략조취인 것이 아니라 쏘련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인 것이다.” 그는 또 목전의 형세에서 “오로지 두가지 로선 즉 평화공처가 아니면 력사상 제일 훼멸성을 띈 전쟁일 것이다. 세 번째 길은 없다.”고 했다. 흐루쇼브는 평화공처문제를 말할 때 이것이 얼마간 평화적인 경쟁성질을 띄고있다하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국가내부사무에 무장간섭하는것 처럼 승리한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서는 절대안된다고 했다. 흐루쇼브는 평화공처가 로선이라했는데 여기에는 쏘련이 세계를 한번 쥐고 흔들어보자는 속심도 숨어있은 것이다. 평화공처를 당대사회의 문제를 처리하는 고급원칙으로 삼으면서 지어는 피압박인민과 피압박민족이 투쟁을 버리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틀리는 것이다. 쏘련의 평화적경쟁이 실상은 쏘련이 미국과 군비를 다투는 경쟁으로 돼버렸던 것이다.      
당대에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가능성문제를 놓고 흐루쇼브는 보고에서 먼저 일반원리를 말했고 이어서 정황의 근본변화를 분석했다. 그것은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도 이미 강대한 력량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런 진영이 있음으로 하여 평화력량은 침략을 방지할 정신수단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침략을 방지할 수 있는 물질수단까지도 갖춘 것이다. 그외에 또한 인구가 수억이 되는 기타 국가들이 지금 바로 전쟁을 적극반대하고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국가의 공인운동이 오늘은 하나의 거대한 력량으로 되었다. 평화를 옹호하는 운동이 이미 생겨났거니와 하나의 강유력한 인소로 된 것이다. “리경반도(離經叛道)”라 흐루쇼브는 경전(經典)의 말씀에서 벗어나 상도(常道)를 어길 것 같아 두려운것 같이 또 말했던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을 일이킬 수 있는 경제기초를 역시 갖고있는 것이니..... 그러나 전쟁이 결코 불가피면적인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후 국제공산주의운동대론전 때에 흐루쇼브의 비평에 대하여, 주요하게는 그가 레닌이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면적이라고 한 리론을 부정하면서 일체 전쟁을 얼마든지 피면할 수 있다고 선양한것을 비평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 보면 세계전쟁을 피면할 수 없는게 아니라는건 더 시비할 나위가 없는데 문제는 쏘련이 그를 실현하는 방법이 주로 자신의 군사핵무기에 의탁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는 그것이다. 흐루쇼브가 시대의 변화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평화와 발전시대주제의 높이까지 의식문제를 끌어올려 놓고 상응한 정책을 내오지는 못한것이다. 
   
부동한 국가가 사회주의주의로 향하는 과도형식문제에 대한 흐루쇼브의 기본 립론(立論)은 세계무대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기에 여러 국가와 민족이 사회주의로 과도하는 데도 역시 새전경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는 레닌의 유관언론들을 례로 들어 인증(引證)한 후에는 보태여 말한것이다. 
   
“얼마든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장차는 사회주의로 과도하는 형식이 갈수록 다양해진다는 그것이다. 따라서 이런 형식을 실현함에 그 어떠한 정황에서나 꼭 내전과 련계시켜야 하는 건 아니다.” 
   
흐루쇼브는 의회도로를 리용하여 사회주의로 과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무계를 실으면서 오늘의 세계를 말하기도했던 것이다. 
       
흐루쇼브가 한 비밀보고의 영향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우선 충격을  제일 크게 받은 것은 쏘련자신이였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말을 들어보면 흐루쇼브가 쓰딸린이 범한 오유를 폭로비판 할 때 장내는 물뿌린 듯 조용하고 긴장했는데 자극이 얼마나 컷던지 어떤 사람은 당장에서 졸도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의 보고는 쏘련인민의 사상에 커다란 혼란을 빚어냈다. 적지 않은 사람이 보고의 주요론조를 접수하였다. 그것은 쓰딸린이 국가의 죄인이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비밀보고는 쓰딸린을 비방하는 것이다 모든 죄를 쓰딸린에게 덮어씌우는건 불공정하다면서 쓰딸린을 칭송하여 전세계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게해야한다고 했다. 제일돌출한 실례는 1956년 3월 7일부터 9일사이에 그루지야의 티빌리씨시에서 대규모적인 류혈사건이 발생한 그것이다. 쓰딸린을 비판하는데 대해 강열한 불만을 품은 군중이 군경과 맛서서 그들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는데 수백명의 상망을 냈거니와 “사고를 친 사람”들이 많이 붙잡혀 들어가 1년 내지 10년도형에 떨어졌던것이다. 
   
인심을 안정시키고 국면을 온정하기 위해서 흐루쇼브는 선전여론사업을 바싹 틀어쥐었다. 1956년 3월 1일에 비밀보고문과 함께 그의 편지 한통을 쏘공중앙주석단의 위원,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그리고 중앙서기에게 보냈다. 3월 5일, 쏘공중앙주석단은 <<니. 쎄. 후르쇼브동지가 쏘공20차대회에서 한 <개인숭배와 그 후과에 관하여> 보고에 관하여>>를 통과결의하고는 각 주위, 각 변구위원회, 각 가맹공화국중앙은 모든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공인, 직원과 집체농장장원중의 비당원적극분자에게 후르쇼브의 이 보고를 소개해야한다고 했다. 이 결의에 근거하여 각급 당, 단조직의 회의에서는 모두 흐루쇼브의 보고를 읽은것이다. 
   
이어서 <<진리보>>는 3월 28일자 첫면에 <<무엇 때문에 개인숭배와 맑스레닌주의정신은 조금도 맞지 않는다고 하는가?>>라는 전문적인 테마를 실어 조목을 렬거하면서 <<쏘공(볼)당사간명교정>>과 <<쓰딸린략전>> 이 두 책은 다가 쓰딸린이 모든 로동과실을 자기에게 돌린것이라고 질책했다. 이는 쏘련신문이 맨처음으로 이름을 찍어가면서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글이였다. 
   
쓰딸린을 평하는 과정에 어떤 사람은 한걸음 더 나아가 쓰딸린시기의 모든 력사에 대해서 새평가를 내려야한다고 제출했다. 이로하여 쏘공령도집단내부의 분기와 투쟁은 다시금 격화되였다. 쏘공중앙은 <<진리보>>를 통해 당의 그 력사는 모든 시기의 정책이 지나간것이였건 현재의 것이였건 레닌의 정책이였다고 했다. 4월 5일 <<진리보>>는 또 <<당은 지난때에도 오늘에도 다 레닌주의에 의해 승리를 취득하는 것이다.>>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것을 빌어 당의 로선과 성취를 의심하는 것은 절대 용허하지 않는다고 했다. 
   
형세의 압력으로 하여 쏘공중앙은 10월 30일에 <<개인숭배와 그 후과의 결의에 관하여>>를 통과했다. 결의는 비교적 많은 편폭에 쓰딸린이 장기간 당중앙총서기를 맡고있은 기간에 다른 동지들과 함께 레닌의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투쟁하였다면서 그는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리론가며 전략가였고 당을 령도하여 뜨로쯔끼분자, 우경기회주의분자, 자산계급민족주의자와의 투쟁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포위음모와 투쟁에서 승리하였다고했다. 
   
결의는 진일보 해석하기를 쓰딸린은 바로 이러한 투쟁중에서 거대한 위신과 성망을 획득한 것이라고 했다. 쏘련사회주의건설의 승리와 그에 대한 찬송은 그의 머리를 뜨겁게 하였기에 그에 대한 개인숭배가 점점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결의는 또 강조하여 제출하기를 쓰딸린의 개인숭배가 당과 국가에 커다란 해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이 우리 시회주의제도의 성질을 개변하지는 못했거니와 개변할 수도 없었으며 쏘련사회는 공산주의를 향해 발전하는 정확한 로선을 떠나지도 않았다고 했다. 회의는 쏘공중앙이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원칙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거듭천명했다. 
  
결의는 또한 사회상에서 제출된 의문에 대한 회답을 했다. 무엇 때문에 쓰딸린이 건재했을 때는 개인숭배문제를 말하지 않았는가? 
  
회의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쏘련인민의 심목중에 쓰딸린은 시종 쏘련을 보호하고 적의 음모를 반대하며 시종 사회주의사업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던것이다. 그는 이 투쟁중에 어떤때는 맞지 않는 방법을 썻기에 레니주의원칙과 당의 생활준칙을 파괴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쓰딸린의 비극이 있는것이다.....  사회주의건설과 쏘련을 공고히 한 성적들은 개인숭배의 작간으로 하여 모두가 쓰딸린 한 사람의 성적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정황이 이러했으니 그에 대한 그 어떠한 반대든 인민은 그것을 리해 할 수 없은것이였지 인민이 본시 용기가 부족한데 원인이 있은 것은 아니였던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이였던만큼 그 누가 쓰딸린을 반대한다면 그는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은것이다.”
    
비밀보고는 사회주의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사회주의국가들 중에서 유고슬라비야가 만장의 갈채를 보내는 외에 기타 국가들은 과반수가 마음속에 의심과 근심을 품으면서 놀라고 망연해하였다. 반응이 가장 강렬한 것은 뽈스까와 웽그리아였다. 
   

1956년 6월, 뽈스까에서 “뽀즈난사건”이 발생했다. 흐루쇼브비밀보고의 영향을 받아 6월상순 뽀즈난쓰딸린기관차차량공장의 공인들이 세금을 낮추고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국에서는 세금을 낮추는것은 고려할 수 있으나 월급을 올려달라는 요구는 거절한다고 표시했다. 공장측에서 와르샤와에 파견하였던 대표단은 정부와 협상을 이루지 못했다.      6월 28일, 쓰딸린기관차차량공장의 1.6만명이 넘는 공인들은 파업을 일으키고 시위행진을 했다. 적잖은 군중이 이에 합류했다. 그들은 대표를 보내여 시위의 령도를 접견하려다 거절당했다. 
   
군중속에서 와르샤와로 파견한 대표들이 억류되였다는 소식이 퍼지는 통에 군중들은 격분했다. 적대분자의 선동을 받아 부분적인 시위자들은 당정기관과 시위대청을 충격했고 무기를 탈취하여 공안인원을 향해 쐇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니 당국은 군대를 풀어 시위자들을 진압했는데 수십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백명이 체포되였다. 
   
6월 29일, 뽈스까지도자는 강화에서 이번의 사건은 “도발분자”가 “제국주의특무와 숨어있는 반동분자의 추김을 받아” “인민정권을 탈취하자고 기도한 것”이라고 했다. 
   
6월 30일, 당국은 조치를 대여 모순을 좀 온화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채취하였는데 그것인즉 기계공업부부장을 철직시키고 쓰딸린기관차차량공장에서 걷우어들였던 세금을 기를 나누어 공인들에게 되돌려주며 사건중에 조난당한 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 등이였다. 
   
소란은 수그러들게 되었다.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뽈스까통일공인당중앙위원회는 새로운 령도핵심을 선출했는데 “쓰딸린분자”라 하여 정치국에서 쫓겨낫다가 선거되여 감옥에서 방금 석방된 거물카가 중앙1서기로 되었다. 거물카는 뽀즈난공인들이 거리에 뛸쳐나와 “항의반대한것은 인민뽈스까가인것이 아니다, 그들이 항의반대한 것은 사회주의의기본원칙에 대한 외곡이다”라고 했다. 
      
흐루쇼브와 기타 쏘련의 지도자들은 10월 19일에 와르샤와로 날아갔고 동시에 쏘련의 땅크병단이 와르샤와로 쳐들어갔다. 이에 뽈스까지도자들은 견결히 저항했다. 중국공산당은 쏘련지도자들에 향해 절대 무력을 사용하지 말고 뽈스까에 들어가 있는 쏘련군은 제 기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뽀즈난사건”이 일어난 후에 동구라파의 일부나라들은 동란이 가심해졌다.       
         

1956년 10월에는 또 “웽그리아사건”이 발생했다. 쏘공20차대표대회이 후 웽그리아로동당내외에서는 라커시 마쟈선을 비판해야 한다는 정서가 날이갈수록 강렬해졌다. 7월, 라커시의 중앙제1서기직무 를 해제하고 사거라 애얼노가 제임했다. 웽그리아의 정치형세는 더더욱 악화되였다. 
   
10월 22일, 뻬도피구락부는 웽그리아당에 “10가지 요구”를 제출했는데 라커시를 출당시키고 나지를 총리로 시키며 평등자유원칙으로 웽그리아와 쏘련관계를 조정하라는 등이였다. 부다페스트는 10월 23일 이른아침부터 먼저는 수천명학생이, 그 뒤를 이어서 약 10여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거리시위를 했다. 대다수참가자들이 착오를 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나지를 총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거라 애얼노는 방송연설에서 시위자들을 견책했다. 그리하여 모순은 더 격화되였다. 
   
당날밤에 한무리의 폭란분자들은 무장으로 국가방송국대청을 습격하고는 이어서 무기창고와 경찰초소, 더 나아가서는 공안부대인원과 공산당사람을 습격했다. 밤중에 웽그리아정부가 개조(改組)되였음을 선포했는데 나지가 총리로 임명되였다. 나지는 전국에 방송연설을 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반혁명사건으로서 정부는 이미 웽그리아에 주둔하고있는 쏘련부대에 반란을 진압할 것을 도와달라했으니 사달을 일으키는 자들은 무기를 놓으라했다. 폭란은 전국으로 파급됐다.
    
10월 28일, 나지는 방송연설에서 쏘련군은 부다페스트에서 물러가며  국가공안국을 해산하고 새정부를 성립한다고 했다.     
   
10월 30일, 나지는 1당집정을 취소하고 3일내에 4개의 당으로 조성된 련합정부를 세우리라고 선포했다.
    
10월 31일, 웽그리아로동당중앙 6인주석단은 웽그리아로동당을 해산하고 웽그리아사회주의공인당을 새로세운다고 선포했다. 
   
11월 1일, 나지는 웽그리아는 와르샤와조직에서 퇴출하여 중립을 지키며 련합국에서 간섭해 줄 것을 호소했다.
    11월 4일 카달을 총리로 한 웽그리아공농혁명정부가 성립되였음을 선포하면서 쏘련부대가 국내의 질서를 회복하게끔 방조해줄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쏘련군은 부다페스트에 진입하여 소란을 진압했다. 나지는 체포되여 처형되였다.     
그후 “웽그리아사건”의 성질에 대한 평이 여러모로 서로 같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사건은 쏘공20차대표대회가 인발한것이란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것이다. 
   

비밀보고는 자본주의국가의 공산당대오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영국공산당중앙은 4월 1일에 한가지 결의를 통과했는데 그것은 쏘공중앙이 흐루쇼브의 보고에 대해 공개성명을 발표해줄 것을 요구한거다.
       

 6월 22일, 영국의 <<공인일보>>는 또 영국공산당정치위원회의 성명을 실어 쏘공중앙이 흐루쇼브의 보고문제에 대해서 아무선 공개적인 성명도 없음에 유감스러움을 표시했다. 
   

6월 25일, 영국공산당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쏘련공산당이 스스로 문장을 발표하리라 여겼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 할 수 없다. 문제를 말하면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증스럽게했든간에 어쨌든 쏘련공산당내부의 일이니..... 모든 착오와 사회주의원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사람에게만 떠미는것은 모든 위대한 성적을 한사람이 걷어가지는것과 같이 착오적인 것이다.”
    
불란서, 이태리의 공산당은 2차세계대전후 한시기는 본국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발돋음했지만 비밀보고가 전파되여서는, 특히 “웽그리아사건”이 생겨서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스스로 탈당하고말았다. 하여 공산당의 력량은 신속히 쇠약해지고 만 것이다. 서번아공산당총서기 더러뢰스 이바루리는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우리는 쏘련지도자가 사람을 깜짝놀래우는 가슴아픈 비밀보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상한 무거운 압박감에 눌리우고말았으니 차라리 무지하게 아무것도 모르는것이 낳았을 것 같았다.”
    
“웽그리아사건”이 발생한 후 전세계 허다한 국가의 공산당이 분분히 퇴당을 선포했는데 가장 저명한것은 당시의 미국공산당당수였던 바스터가 공개적으로 쏘공이 웽그리아인민을 폭력으로 진압한것을 견책하고나서 공산당에서 퇴출한다고 선포한 그것이였다. 
   
아시아주의 각 당은 작법이 아주 심중했는바 례를 들면 조선, 월남과 인도네시아는 당내에 개인숭배문제를 전달하고 토론하는것을 엄격히 제한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적게 받은것이다. 
   
력사사실이 증명하다싶히 비밀보고가 쓰딸린의 개인숭배와 쏘련식페단의 뚜껑을 열어놓아 각국이 저가끔 국정에 맞는 사회주의길을 찾게끔 했으니 일정한 의의가 있지만 실지결과를 보면 부정적 영향도 엄중한 것이다. 관건은 쓰딸린의 문제를 제출하는 방식이 경솔했거니와 쓰딸린의 공로와 과오에 대한 평가가 편면적인데 있는것이다. 쏘공은 충분한 사상준비도 조직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쓰딸린의 문제를 털어냈기에 전달보취가 란잡해졌거니와 넓은 범위에서 사람들의 접수능력을 리탈한 채 빠른속도로 퍼진것이다. 사후에는 주도면밀한 해석과 교육공작도 모자랐다. 이런 정황에서 생겨나는 엄중한 휴유증이 어떠하리라는건 말치않아도 짐작이 가는 것이다. 

   쏘공20차대표대회와 중쏘관계                 

중국공산당은 쏘련공산당과의 관계에 중시를 돌리여 주덕을 단장으로 하고 등소평을 부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쏘련에 보내여 쏘공20차대회에 참석케했던 것이다. 주덕은 대회에서 중공중앙의 축하신을 읽었다.
    
2월 19일에 <<인민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흐루쇼브의 사업보고에 대해 정면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이 문건이 맑스레닌주의를 심각하게 분석하면서 쏘련의 력사성적을 총결했으며 쏘련인민이 계속전진할 길을 계획했거니와 동시에 각국인민에게 세계평화와 인류의 진보를 쟁취하는 방향을 가르켜주었기 때문이라 했다. 
   
쏘공이 20차당대회를 열기 전이였다. 쏘련측에서는 벌써 중국대표단에 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하리라는 것을 암시했던 것이다. 한편 중공대표단은 중앙에 청시한 후, 쓰딸린을 비판하는 문제에 태도를 표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던것이다. 쏘공20차대표회의 전과정에 중공대표단은 모두 흐루쇼브가 비밀보고를 한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대회가 페막하기 이틀전에 쏘공중앙련락부의 사람이 중공대표단에 흐루쇼브의 비밀보고를 통보했는데 구두로 한바탕 번역하고는 원고를 가져가버렸던 것이다. 
   

쏘공20차당대회 후 당시 중쏘량국의 사이를 감안하고 사회주의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수요로부터 큰국면의 단결을 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여 <<인민일보>>는 미꼬양의 발언마저 포함하여 쏘공에서 공개발표한 소유의 중요한 문건을 전문으로 실었거니와 신화사 <<내부참고>>는 지어 서방신문들이 평화공처방침에 대한 미꼬양의 발언에 대한 평론 및 쏘련이 20세기 30년대에 정치진압을 당한 피해자들을  평판한 정황까지 상세히 보도했던 것이다.
     
중공중앙과 모택동이 최초에 흐루쇼브에 대한 의견이라면 주요하게 그가 20차당대회에서 쓰딸린문제를 제출한 방식에 집중되였던 것이다. 3월 11일과 12일에 중공중앙은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쏘공20차대회가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타파하고 그가 범한 엄중한 착오를 폭로한 것은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그런데 흐루쇼브가 한 비밀보고가 쓰딸린을 전면부정한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오랭서(吳冷西)가 <<10년론전>>이란 책에서 회억한 것을 보면 모택동은 3월 17일에 중앙서기처회의를 소집하고 보고를 토론했던것이다. 모택동은 말하기를 후르쇼브가 쓰딸린을 반대한 비밀보고는 첫째는 뚜껑을 열어놓아 좋은 것이고, 둘째는 문제를 일으켜 전세계를 진감한 것이다. 뚜껑을 연 것도 그렇고 쓰딸린의 착오도 그렇고.... 쏘련의 종종 작법에 착오가 없는게 아니니 각국 당은 자기의 정황에 따라 처리 할 수 있는것이다. 다시는 미신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를 돌연히 습격하는데 각국당은 사상준비가 없은것이다. 이같이 큰 일, 이같이 중요한 국제인물을 각국당과 말도 없이 그러는것은 옳지 않은것이다..... 
  
 사실이 증명하다싶히 전세계공산당은 다가 혼란이 생긴 것이다. 이는 중국방면에서 흐루쇼브가 쏘공20차대표회에서 한 비밀보고에 대한 최초의 권위를 갖춘 평가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또 말했다. “지내보니 후르쇼브는 융통성이 없지 않고 그래도 어느정도 꽤나 령활한 사람이였다. 1954년, 우리 나라 국경 5주년때 후르쇼브는 중국에 방문을 왔었는데 그번 접촉에서 나는 이 사람이 비교적 령활하다고 느꼇던 것이다. 그때 담판을 했는데 그는 우리한테 물건을 더러주었다. 례를 들것 같으면 려순항과 신강의 몇 개 중쏘합영기업을 우리한테 넘겨준것 같은것이다. 우리를 도와서 란주ㅡ 우루무치 아라무투의 철길을 수건해 주고 5억루불을 대불해주기도했다. 15개항목건설을 방조했고 지어는 전에 쓰딸린이 대답했던 141항목까지 합쳐서 모두 156개항목에 이르는 것을 우리 나라 제1차5개년계획의 중추공정으로 정해 도와주기로 한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와 보면 이 사람은 실용주의가 있는 것이다. 권좌에 오르고 보니 우리의 지지를 받아야 될 것 같길래 관계를 개선하느라 좋은 일들을 한 것이다. 그는 쓰딸린의 배타적애국주의(쇼비니즘)를 어느정도 거둬들인 것이다.” 
   

3월 19일과 24일의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는 주요하게 쓰딸릴이 각 시기에 범한 착오들을 내놓고 토론했다. 모택동은 “3.7로 보아야 한다. 성적이 주요하다. 누구든지 사회주의를 해보지 않았으니 착오는 피면하기 어려운것이다”라고 했다. 
   
4월 4일, 모택동은 서기처회의를 열고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에 관하여>>란 문장을 토론하고 발표 할 준비를 했다. 모택동은 쏘공이 쓰딸린을 반대하는 것을 보고 얻게 된 교훈은 독립자주하고 조사연구하며 본국의 국정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리를 우리 나라 혁명과 건설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이 되게 결합시켜 우리의 로선, 방침정책을 제정하는 것이라했던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의 토론을 거쳐 <<인민일보>>의 명의로 발표한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에 관하여>>란 문장은 쏘공20차당대회의 공적을 긍정했거니와 특히는 개인숭배문제를 까밝힌 용기와 아울러 쓰딸린의 문제에 대해서 전면적인 토론을 진행했던것이다. 문장은 쏘련은 세계력사상서 전례없는 무산계급전정의 사회주의국가를 세웠기에 이런 저런 착오는 피면하기 어려운것이라면서 무산계급정권은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기를 바라기에 집중을 편면적으로 강조하면 착오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완전히 리해할만한 것이라고 했다. 쓰딸린은 후기에 엄중한 착오를 법했는데 그랬다하여 그의 모든 착오를 개인숭배에다 몰아붙이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것은 그래도 사상방법문제로서 그건 그가 교오자만하고 신중하지 못하며 개인숭배를 바라면서 전횅독단한 것이라 했다. 개인숭배는 인류력사가 장기간 남겨둔 일종의 썩어빠진  유산으로서 천백만인간의 일종 습관세력이기에 꼭 장기간을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숭배의 교훈으로부터 얻게 되는것은 반드시 교도주의를 반대해야 하고 맑수레닌주의를 학습해야 하는데 (쓰딸린저작을 포함하여) 반드시 중국의 구체적인 정황과 결합하여 독립사고능력과 창조정신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혁명의 력사경험이 증명하는 것이다. 등등.  
   

이 문장과 동년 12월에 발표한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을 다시론함>>은 피동에 빠진 쏘공을 크게 방조했거니와 국제공산주의운동대오에 적극적인 영향을 일으켜 내려덮혔던 자옥한 안개를 일소해 버리는 작용을 했다.        
         

후에 흐루쇼브는 갈수록 허다한 문제들에서 점점 작법이 남달랐기에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은 그를 비평하는 일이 뚜렷이 많아지게 되였다. 두 당은 자주 맞붙붙군해서 결국은 국제공산주의대론전을 이끌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총적으로 쏘공20차대표회기간 중국공산당은 대국을 돌본데서 쏘공과 주도방향인 단결의 만전을 기하기에 힘쓴것이다. 중공중앙은 쏘공20차대표회기간 맨처음에는 의견이 쓰딸린문제에 집중되였지만 후에는 화평과도를 여하히 보는가 하는 등 문제로 돌아졌다. 이는 중공이 쏘공20차대표회의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도 발전변화과정이 있었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1956년 9월, 중공8차대회는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등소평은 <<당의 장정수개보고에 관하여>>에서 “쏘련공산당제20차대표대회의 중요한 공적은 바로 우리에게 개인신화가 얼마든 엄중한 악과를 빚어낼 수 있는가하는것을 알려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에 관하여>>에서 쏘공20차당대회가 “개인숭배를 반대하여 투쟁을 벌린것은 바로 쏘련공산당사람과 쏘련인민이 전진도로상의 장애물을 없애치우는 한낫 위대하고도 용감한 투쟁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을 다시론함>>이란 글에서 쏘공20차대표회의는 “쓰딸린에 대한 미신을 타파하고 쓰딸린착오의 엄중성을 폭로하며 쓰딸린착오의 후과를 없새는 방면에서 거대한 결심과 용기를 표현한 것이다. 전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다가 쏘련공산당이 착오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지지하며 쏘련동지들의 노력이 원만하게 성공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던것이다. 
   
흐루쇼브의 비밀보고는 허다한 결함을 갖고있다. 기중 쏘련대당주의가 언급되지 않았고 대국주의착오라는 이 요해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에 전면이 드러나지 않았다. 대량의 잡다한 개인정서가 섞이여 엄숙치 못한것이 보이였다. 소유의 착오를 그 한사람에게 밀어버리는건 공정하지 않다. 개인숭배원인을 근근히 쓰딸린개인의 품질에만 밀뿐 정치체제의 페단은 분석하지 않았으니 심각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이같이 쓰딸린을 견책하고 비판한다면 각방면에서 쏘련사회주의모식의 페단을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서방에 쓰딸린은 물론 쏘련과 옹근사회주의를 진공할 구실을 달아주어 “뽀즈난사건”과 “웽그리아사건”과 같은것이 폭발하는 도화선이 되며 심지어는 옹근 국제공산주의운동이 분렬되고 말 위험이 있는것이다.
    
쓰딸린에 대한 평가는 응당 하나의 총체적인 설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쓰딸린은 장기간 쏘공과 쏘련의 주요령도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쏘련사회생활과 휴척을 같이했던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응당 그를 력사지위에다 올려놓고 평가해야 한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유과무공론(有過無功論)”으로 쓰딸린을 적으로 치거나 안데르예와모양으로 “유공무과(有功無過)”로 쓰딸린을 “완미한사람”으로 떠받들어 세우는 작법들은 다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공이 과오보다 크다”는 론조는 어떤 중대한 력사사실은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기에 만장의 인정을 받기 어렵고 “과오가 공보다 크다”는 론조에는 편면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보아하니 쓰딸린문제를 연구하자면 자연히 그의 공과 죄를 놓고는 쟁론이 끊지 않을 것 같은데 우선 그가 필생의 정력을 공산주의사업을 위해 바친것만은 사실이니 이 점은 긍정해놓고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경험교훈을 총결해야하는 것이다. 쓰딸린은 거물급의 력사인물이고, 령도재능이 비범한 인물이고, 엄중한 정치착오를 범한 인물이고, 치명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인것이다. 따라서 공로와 과오를 겸하고 승패도 겸하고있는 인물이니 장기적인 쟁의(爭議)는 불가피면적인 것이다. 
   

필자가 <<쓰딸린문제에 관하여>>문장에서 뽑은 글을 아래에 알린다.
     
“흐루쇼브역시 쓰딸린의 공과 과실을 말했는데 그것은 그를 견책하기 위한것이였기에 용어들이 왕왕 랭혹하여 사람들에게 쓰딸린을 전반부정한다는 인상을 던져주었다. 흐루쇼브는 쏘공20차대표회의 비밀보고에서 이렇게 말한것이다.
   
 ‘이 보고에서 쓰딸린의 평생사적을 전면적으로 평가할 생각은 아니다. 쓰딸린의 공적에 대해서는 그가 살았을 적에 벌써 쓸대로 다 써서 엄청 많은 서적과 소책자들이 나왔고 연구도 충족히 한것이다. 쓰딸린이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한것과 우리 나라가 사회주의를 일떠세우는 투쟁중에서 일으킨 작용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있는 바이다. 지금 말하려는 것은 쓰딸린의 개인숭배는 어떻게 되어 생기였고 그것이 어떻게 되여 한계단 당의 원칙을 엄중히 외곡하고 당의 민주와 법제의 근원을 외곡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보고중 어떤것은 선동하는 언론이였다. 흐루쇼브는 1961년 쏘공22차당대회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배렬하는가 하는 것이다. 레닌주의방식에 따라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치 쓰딸린이 개인미신시기에 범한 착오와 외곡된 현상을 폭로하는가 아니면 일체 창조성적인 사물의 세력이 당내에서 많아지는것을 반대하고 수구적(守舊的)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어구들을 봐서는 쓰딸린을 전면부정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二平’인 <<쓰딸린의 문제에 관하여>>에 흐루쇼브는 내부에서 담화 할 때 눈알을 굴리면서 쓰딸린을 조폭하게 욕했는데 이는 그가 정서가 한쪽으로 돌아질라치면 쓰딸린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한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흐루쇼부는 전후(戰后) 쏘련식행정개혁을 한 선구자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목성과 맹동성을 적잖게 갖고있다는 것도 알고있는 사람이였다. 로씨야에서 나온 <<20세기조국사>>를 보면 흐루쇼브에 대한 대표성적인 평가가 있다. 
   
“후르쇼브가 쏘련력사에서 일으킨 작용은 마치도 그의 흑백대리석묘비와도 같이 량면성을 갖추고있다. 그가 정치생활의 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촉진하고 인민의 생활개선, 수평을 개선하는 방면에서 한 사업에 대해서 사람들은 긍정하고있다. 그러나 농업, 공업과 외교방면에는 거칠기에 철저히 개혁하지 못해서 종종 국가를 막다른 골목에 들게만들었다. 사람들의 심목중에 그의 형상은 쓰딸린과는 달라 때때로 존경아닌 풍자를 받는것이다.”
    

력사는 력사인 것이다. 쏘공20차당대의 력사는 개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력사에 대한 평론은 같지 않으니 실천이 진리를 검험하는 유일한 표준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쏘공20차당대후 국제공산중의운동발전에 따라 평가가 반복되는건 이상한게 아니다. 개인숭배를 반대하는것은 시대의 락인이 있기에 그저 흐루쇼브의 개인행위로만보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동기와 효과가 통일되어야 한다. 흐루쇼브의 거치른 작법은 엄중한 후과를 낳았던 것이다.  
   
심각한 력사교훈이니 값지게 참답게 받아들여야한다.  
                          

흐루쇼브의 말: “중국은 황화”
    

황화(黃禍)란 당대(唐代)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란을 가리킨다. 흐루쇼브는 집권을 잡은 초기 당내에서 겨루는 대상이 많았기에 지위가 온정하지 못해 중국의 지지가 퍽 수요되였던것이다. 그는 중국에 대해 좋은일들을 적잖게 했는바 쓰딸린의 대국쇼비니즘(배타적 애국주의)작법을 규정하였거니와 중국의 건설사업에 대한 원조를 증가했던것이다. 중공중앙은 흐루쇼브에게 여러번 지지를 표시했고 따라서 쏘련이 중국의 경제를 원조해주는데 대해 다시금 감사를 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브가 개인적으로는 중국에 대해 경계하면서 그리좋아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1955년 9월 14일, 쏘련은 련방독일과 외교관계를 건립했다. 련방독일총리는 흐루쇼브의 요청에 의하여 모쓰크바를 방문했다. 그와 담화할 때 흐루쇼브는 “중국은 아주 위험하다. 중국사람들은 황화를 입고있다.”고 하면서 그보고 자기를 도와서 무슨 방법을 댈 수 없겠는가고 했다. 로련한 서방정치가였던 총리는 흐루쇼브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거니와 되려 쏘련은 중국과 관계를 좋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서방의 매체들은 이 담화를 폭로했던것이다. 
   
1971년에 교관화(喬冠華)가 뉴욕에서 열린 련합국회의에 참가했을 때 미국친구와 독일친구가 흐루쇼브가 련방독일총리와 중국은 황화를 입고있다고 말했노라 일깨워주었다.〔필자의 말: 1960년에 중공중앙은 쏘공중앙에 보내는 “답복서”와 1963년 “공개편지를 네번째 평함”이란 글에서 쏘련령도가 선양하는 ‘황화론’을 질책한바있다.〕
    

흐루쇼브는 중국의 질책에 대해서 반박하지 않았지만 만년에 구술한 <<회억록>>에다는 “떠오르는 일화 한가지”란 제목으로 그 일을 회상하면서 들먹이였다.
불란서를 방문하는 기간에 그는 우연히 불란서의 이전총리를 만났는데 그가 중국을 화제에 올려놓고는 그보고서 “당신들은 황화를 근심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그래 위협감을 느끼지 않는단말인가?”하고 묻더라고 썼다. 뒷이어 흐루쇼브는 썼다.
    
“전총리의 말은 나를 깜짝놀라게 했다. 나는 그를 엄하게 질책했던것이다. ‘우니는 남의 안색이 어떤가를 살피지 않는다. 우리의 유일한 구별은 계급구별이다. 중국은 우리의 계급형제인 것이다.’ ”
    
하지만 흐루쇼브는 다른 문장에서는 이같이 말한것이다.
  “얼마전에 나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그가 오래살았더라면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변화된것을 보고 크게웃으면서 두 공산당ㅡ 모택동과 내 본인간에 발생한 일을 놓고 제 분석이 옳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흐루쇼브는 <<회억록>>에 말했다. “1954년에 처음 모택동을 만나보고 나는 중국과는 충돌을 피면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원인은 모택동이 절대 다른 사람은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한가지 긍정적인것은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세계를 통치해 보려는데 먼저는 중국을 통치하고 그 다음은 아세아를..... 그런 후에는 어딜가? 중국은 7억인구가 있는 것이다.... ” 흐루쇼브가 “긍정”한 이런 “중국확장론”과 그가 말한 “황화론”은 서로 인정하는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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