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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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33)
2011년 03월 27일 18시 02분  조회:3217  추천:15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33)
 
               인민예술가 로사의 죽음

【생평】
         
로사(老舍ㅡ1899.2.3~1966.8.24), 원명 서경춘(舒慶春), 만족, 북경사람. 중국현대소설가, 극작가. 일생에 무려 800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써냈고 “인민예술가”칭호를 받았다. 
   
주요저작으로 장편소설 <<말 두필>>, <<묘성기>>, <<락타샹즈>>, <<사세동당>>. 중편소설 <<초승달>>, <<나의 한평생>>. 단편소설집 <<장보러 가다>>, <<앵해집>>, <<합조집>>, <<기차집>>, <<빈혈집>>. 극본 <<룡수구>>, <<차집>>. 그 외에 <<로사극작전집>>, <<로사산문집>>, <<로사시선>>, <<로사문예평론집>>과 <<로사문집>> 등이 있다.
    
로사는 장편소설작가, 극작가로 세상에 알려지고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도시백성들의 생활을 제재로한 것인데 유모아적인 풍격을 갖고 있으며 선명한 지방색채와 농후한 지방취미를 띄고있다. 
   
북경에서 태여나 빈민들이 모여 사는 한울안인 대잡원(大雜院)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로사는 차부와 수공업공인, 소상인, 하등예인, 창기 등 살아가기 위해 버둥이치는 사회의 최하층시민들의 희노애락을 심심히 느끼고 잘 알았거니와 어려서부터 즐겨 듣고 보고 애착을 가졋던 전통예술(곡예, 극)들은 모두가 그가 장차 평민의 생활을 소설로 쓰고 극창작을 할 수 있게 된 원천이였던 것이다. 
     
로사는 1918년에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 5.4운동이 일어날 때 그는 북경공립제17고등소학교의 교장노릇을 했다. 5.4운동은 그의 인생의 길을 개척함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이다. 
   
그는 1924년 여름에 런던대학동방학원에서 중국어문을 교수하면서 한편 소설을 쓰기시작했다. 
   
1926년에 첫장편소설 <<장씨의 철학>>을 <<소설월보>>17권 7호에 련재하면서 원명 서경춘을 쓰고는 8호부터는 로사라는 필명을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로사의 문학창작생애가 시작되였음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조자왈>>, <<말두필>>을 썼다. 이때로부터 현대문학사에 지위를 굳히게 되였다. 
   
1929년 로사는 싱가포르를 거쳐서 귀국했는데 싱가포르에 약 반년가량 머무르는 기간에 중편소설 <<소파의 생일>>을 썼다. 그것은 아동소설로서 그곳에서 사는 화교소년이 피압박민족소년들과 함께 강권노역을 반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단결하고 분투해야만이 나라가 강해져 국민을 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선전 한 것이다. 
   
1930년ㅡ1936년, 로사는 선후하여 산동제로대학과 청도의 산동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6년에 사직하고 창작에 정진하기 시작면서 중국현대문학사상 장편걸작으로 치는 <<락타샹즈>>를 써냈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로사는 제남에서 무한, 중경 등 곳에 가서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의 사업을 책임지고 사업하면서 주은래의 직접적인 관심과 방조하에 광범한 문예사업자들을 단결하고 조직하여 항일구국선전사업을 본때있게 하여 적극적인 공헌을 기여하였다. 
   
1946년에 미국에 가서 교수하다가 1949년말에 귀국하였다. 
   
이 기간에 쓴 <<사세동당>>은 로사가 완성한 작품가운데서 규모가 제일 방대한 장편소설로서 글자수가 무려 100만자에 달한다. 로사가 강렬한 애국주의 감정을 품고 쓴 이 장편소설은 중화민족의 전민항전이 남긴 웅대한 기념비로 인정하고있다. 
   1949년 10월에 조국으로 돌아온 로사는 연극 <<방진주>>를 쓴 뒤를 이어서 1951년에 보통시민의 생활을 반영한 <<룡수구>>를 써 무대에 올렸는데 관중의 환영을 몹시 받았다. 하여 북경시는 그에게 “인민예술가”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그는 무려 20여부의 극본을 썼다.    
“문화대혁명”기간에 그는 홍위병들의 잔혹한 박해를 받다가 자결하고말았다. 향년 67세. 
   

생전에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였고 중국작가협회부주석이였으며 북경시의 문화예술계련합회 주석이였다.          
  

【태평호】
    
지금은 로사가 투신자살한 태평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로사의 아들 서을(舒乙)은 아버지를 회억하여 쓴 <<아버지의 마지막 이틀>>이라는 문장에 이같이 썼다.
    
“태평호비극이 발생한지 12년이 지나, 한번은 내가 우연한 기회에 해방전의 북경지도를 발견하여 그것을 펼쳐보고서야 나는 아버지가 왜서 태평호에 투신하였는가 하는 답안을 찾아내게 되였다. 태평호는 면바로 북경의 낡은 외성밖 서북쪽귀퉁이에 있었다. 그러니 성내의 서직문대가서북각의 관음암골목과 아주가까운 것이다. 그저 성벽을 사이했으니 지척이나다름없었다. 관음암은 할머니가 만년에 들어서 10년을 사신 곳이다. 집도 아버지가 사서 드린 것이다. 
   
나는 이제야 갑작스레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사랑했던 할머니를 찾아간 것이다.”
    

태평호는 갈대가 무성해서 전에는 전원의 정취가 물씬 풍겼는데 후에 호수를 메워버리고 그 자리에 북경지하철차량수리소를 지었다. 하여 지금은 옛자취를 전혀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혈의를 매장】
        

로사의 아들 서을은 아버지가 벗어놓은 피묻은 옷을 들고 국무원접대참을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주은래는 사람을 내놓아 로사를 찾게했다. 그랬으나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 그는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태평호에서 누군가 로사의 시체를 건져낸 것이다. 서을은 캄캄칠야에 혼자 태평호가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지켰다. 그는 손으로 아버지의 차디찬 얼굴을 어루만지였다. 쏟아져 내리는 눈물은 상처투성이가 된 시체에 떨어졌다. 마치 굳어진 시체를 녹여주려고나 하듯이.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인민예술가인 로사는 1966년 8월 24일에 이렇게 비참하게 일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20년이 지나 로사의 아들딸은 북경 팔보산의 혁명공동묘지의 골회당에서 아버지의 골회함을 꺼내여 도보로 멀지 않은 혁명공동묘지 제1구에다 방금만든 무덤으로 갔다. 어머니의 골회와 합장하려는 것이였다. 
   
무덤은 서을이 설계한 것인였는데 묘실이 지면으로 도드라지게 올라오지 않고 짙은 록색화강암이 묘좌둘레의 지면을 덮었다. 왼쪽에 로사의 머리부조상이 있고 낮다란 장방형의 한백옥 두 개가 가지런히 두 개의 묘좌를 덮었는데 하나에다는 로사부부의 각기 생존년월일이 새겨져 있고 하나에는 로사의 부인 호결청(胡潔靑)이 생전에 수를 놓은 국화를 밑바탕으로 하여 로사가 생전에 남긴 말 “문예계의 책임을 다한 소졸이 여기에 잠들었다.” 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서을, 서제, 서우, 서립은 아버지의 골회함을 열였다. 그 안에는 골회가 없었다. 로사가 태평호에 몸을 던져 자결한 후 화장터에서는 그의 골회를 내버렸던 것이다. 당시 북경시문련은 증명을 떼였는데 거기에다는  이렇게 썼다. “나 로사는 스스로 인민을 버리였으니 특별히 증명함.”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여서야 로사는 평판을 받아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있는 한 령당에다 골회함을 두었던 것이다. 정면에 로사의 사진이 박혀있고 그 속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만연필 두 대와 안경 그리고 자그마한 꽃 한송이가 들어 있었다.   
   
이 모양이 어쩌면 로사의 아버지의 최후신세와 신통히 같기도했다. 1900년에 로사의 아버지는 북경성을 지키는 졸병이였는데 팔군련군의 입침을 향격하여 싸우다가 죽어 유체마저 찾지 못하다 보니 싸우러 나가기 직전에 벗어놓은 양말 한컬레만 유물로 남았던 것이다. 
   
서을은 아버지의 골회함에다 로사의 출생년월일과 사망날자를 쓴 자그마한 나무패쪽과 피묻은 옷에서 떼낸 천쪼박을 넣었다. 그것은 1966년8월 23일 로사가 북경의 공묘에 가서 투쟁받을 때 매를 맞아 흘린피가 배인것였다. 아들은 그것을 39년간 건사해오다가 없어진 아버지의 육신을 대신해  골회함에 넣은 것이다. 그것과 함께 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만연필 두 대와 즐겨마시던 향차(香茶)도 넣고 마른 국화꽃도 한송이 넣었다. 
   
이런 작업이 끊나자 서을은 행사에 참가한 각계인사와 로사부부의 생전의 친구들과 단위의 대표, 로사연구회와 로사기념관의 사업일군, 그리고 일본에서 온 로사생전의 친구들 앞에서 로사가 1938년에 쓴 <<입회가입맹세말>>을 랑독다. 
   
로사는 당년에 전국문예계항적협회에 가입하여 최고득표로 협회의 리사로 당선되면서 이 <<협회가입맹세말>>을 쓴 것이다. 
   
“나는 문예계의 한 소졸로서 수십년간이라도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책상과 쪽걸상에서 필을 총으로 잡고 열혈을 종이에 뿌리련다. 나에게서 자랑스러운 곳은 신근한것이다. 소졸의 마음속에 대장의 도략은 없지만 소졸이 해야 할 일은 내가 다 할것리다. 전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무덤속에 들어가는 그날이 오면 ‘문예계의 책임을 다한 소졸이 여기에 잡들었다’고 새긴 자그마한 패쪽을 함께 넣어달라.” 
   
서을이 <<료망신문주간>>과 말했다.
    
“아버지가 바라신대로 하려는 것이 우리 자식들의 마음이였습니다. 4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골회함을 줄곧 집에다 두었는데 지난해부터 아버지와 합장하려고 맘먹게되였고 마침내는 팔보산혁명공동묘지의 지지를 받게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골회함을 골회당에서 옮겨 공개적인 장소에서 유령제를 지내게되였으니 이역시 이왕년의 유감을 푼것이 됩니다.”
    
로사부부가 안장된 혁명공동묘지 제1구에는 허다한 현대명사들이 잠들고있었다. 임필시(任弼時), 구추백(瞿秋白), 구양여천(歐陽予倩), 리가염(李可染), 후보림(侯寶林) 등. 그들 중에는 로사가 생전에 면목을 알았고  어떤이와는 지교간이였던 것이다.    
    

【로사죽음연구에 곤혹스러운 점】
                                                                                                                                          【
중국현대문학연구원 박광명(博光明)도 팔보산에 와 로사부부의 장례에 참가했다. “로사의 죽음”연구에 들어가서는 그가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는 방금 박사론문 <<로사의 죽음과 구술력사>>를 완성했는데 답변을 통하여 로사의 죽음에 대한 연구로서는 제일 첫 번째로 되는 박사론문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이 학술저작인 <<구술력사에서의 로사의 죽음>>도 이제 곧 나오게 될 것이다. 
     
박광명은 이 연구를 완성하기 위하여 10여년동안에 몇십명에 달하는 목격자들을 방문했다. “처음의 동기는 력사의 서기원이 되어 력사가 남긴 흔적을 찾자는 것이였다.”  박광명이 <<료망신문주간>>과 한 말이였다. 
   
“력사를 기록하고 력사를 연구해야 력사를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박광명은 이 연구를 시작하고 보니 곤혹스러운 점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빤한 거짓말을 했다. 다시물어보기도 힘들었다. 어떤 사람은 들은 소리를 했으니 진실성이 없었다. 이런 말들은 철학적인 사고를 하기 힘든 것이다. 내가 찾으려는 것은 대조적인 부동한 판본이고 일의 경과를 서술해내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을은 박광명의 박사생도사였거니와 로사죽음에 대한 중요한 견증자였던 것이다. 서을은 아버지가 사망하기직전의 일을 추억하여 쓴 글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버지는 병이 낮자 출원했다. 의사는 집에서 여러날 휴양해야한다고 했건만 그는 듣지 않고 바빠라 출근했다. 운명은 그의 헌신적인 정신을 무정하게 조롱했건만 조급하고 마음이 졸리여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는 끝내 쾌속도로 직접 생명의 종점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1966년 8월 23일은 로사가 병이 나았다고 여기고 출근한 첫날이였는데 홍위병들이 성현가에 있는 공묘에서 경극복장들을 불태워버리면서 단위에 가있는 로사를 끌어다 함께 투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공묘에서 상을 제일 엄중하게 입었다. 머리가 터져 피를 흘렸고 흰 적삼은 벌겋게 피로 물들었다..... 그가 터진 머리를 연극복장에서 찢어낸 흰 소매자락으로 되는대로 감았기에 피가 밖으로 슴배여 나오고 있어서 보기조차 끔찍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시장은 인산인해의 포위권을 뚫고 겨우들어왔지만도 로사가 심한 학대를 받고있는 광경을 그저 멀리서 볼뿐이였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너무나도 무기력해서 북경시에서는 제일 저명하다고 손꼽아 온 이 작가를 모호하지 못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최후로 미약한 힘을 모아 손에 들고있던 패쪽을 땅에다 둘러메쳤다. 패촉은 앞에 있던 홍위병의 몸에 맞아 다시 땅에 떨어졌다. 그는 즉각 침몰되고말았다..... 그렇다, 침몰되고만 것이다..... ”
 
   
이틑날 릉욕을 더는 받아낼 수 없었던 로사는 집을 떠나고말았다.....
 
   
2001년 1월 9일, 박광명은 부인 정신(鄭實)과 함께 당년에 공자묘사건을 일으켰던 북경녀8중의 홍위병두목을 찾아갔다. 50살이 넘는 그녀가 1966년에는 17살이였다. 그녀가 말했다. 
  
 “로사를 때린건 초중3학년의 학생이였어요. 난 로사를 때리지 않고 소군(蕭軍)을 때렸어요.... 난 로사에게는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인명사고가 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박광명이 물었다.
   
 “로사가 자살한 건 어느때 알았는가?”
    
그녀가 대답했다.
   
“훗날 썩 지나서야 로사가 죽었다는것을 알았는데 듣자니 우리한테 투쟁받고서라더군요. 나는 몹시 가책이 되였어요. 후 에 들으려니까 다른 학교에서도 로사를 투쟁했다더군요. 그러니 옹쳤던 마음이 좀 내려갑디다요.”
 
박광명이 물었다.     
“ ‘문혁’후에 그래 로사의 집식솔들을 찾아가 잘못을 사과할 생각은 없었는가?”
    
그녀가 대답했다.
     
“생각했어요. 건데 어떻게 말했으면 좋을지 궁리안나요.”
    
그녀는 말하고는 울었다. 

박광명이 물었다.                 “
이름을 고칠 생각은 없었는가?”
    
그녀가 대답 했다.
    
“없었어요. 그정도까지는 엄중하지 않다고 여겼던거얘요. 난 그래도 천고의 죄인은 아닌거예요, 그땐 그래도 속으로는 로사의 태도에 동정했으니까요. 하지만도 난 감각이 심중한 거얘요. 그때의 정황을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구요. 기회를 찾아 소군가정의 식솔과 로사가정의 식솔들 앞에서 잘못을 빌겠어요.”
 
박광명과 정실의 채방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쓴 구절이 있다.   
 “2001년 추석, 우리는 그녀에게 전화로 새해세배를 하면서 알려주었다. 박광연이 이미 그녀를 대신하여 로사와 소군의 가정에 잘못을 사과했다고. 그녀는 매우감격해 하였다.” 


 
  
   【묘좌의 우발사건】 
                                                                            
로사가 죽은지 1년이 되는 날, 태평호가에 자그마한 나무비석 하나가 이러섯다. 나무비석에 씌여진 글은 “人民藝術家老舍先生辭歲處”였다. 인민예술가 로사가 세상뜬 곳이라는 것이였는데 비석을 세운 이는 허림촌(許林邨)이였다. 허림촌이 누구인가? 그는 화가였는데 태평호에서 그리멀지 않은 골목에서 살고 있었다. 훗날 회억가운데 나온 말이였는데 그는 이웃을 잘만나 “문화대명명”때 끌려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비석을 세우기로 맘먹고 밤에 낮을 이어 비밀작업을 했던거다.    이듬해 로사가 죽은 날인 8월 24일이 돌아오자 허림촌은 이른새벽에 나무비석을 메고 태평호가에 가서 데리고 간 한 친구와 함께 거기에다 세웠다. 그리고는 묵도를 드리면서 말했던 것이다.    
“로사님, 선생님의 추도회를 우리 둘만 열게 되었습니다.”
        
로사의 친구인 일본작가가 1970년에 <<술병>>이라는 문장에서 로사를 그리여 기념했는데 그가 마침내 로사가 그들에게 들려준 중국사람은 값이 보배같은 술병이라도 던지여 깨버릴지언정 부자가 건사하게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의 참뜻을 알았노라했다. 그 작가는 로사가 죽은 사건을 제재로 하여 소설 <<부셔진 옥>>을 써 1979년에 우수상을 받았다. 

   
1970년, 북경시에서는 태평호를 헐어낸 성벽으로 메워 없애버렸다. “문화대혁명”바람이 세차게 불어칠 때 적잖은 무고한 사람들이 로사의 뒤를 이어서 태평호에 몸을 던져 목숨을 스스로 끊은것이다. 


한번은 빙심(冰心)이 서을과 한담을 하던 중 말한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잘 아네라, 그는 꼭 물에 뛰여들어 죽을 사람이였네라.” 
   
서을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그녀는 가상적으로 말했다.
    
“그의 작품에 보면 좋은 사람은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면 거의가 강에 빠져 죽는다고 했네라.”  
      

한 작가의 운명이 그가 쓴 작품중 인물의 운명과 련계되는 경우가 많으니 연구가들의 주의를 일으키고 있다. 서을은 아버지가 죽어 20주년을 맞으면서 한편의 문장을 썼다. 
   
“로사선생이 호수에 투신하여 자진한 그때로부터 옹근 20년이 지나갔건만 호수에서 일어났던 우발적인 사건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생생해져 지금에 이르러서는그 물결이  한바퀴 한바퀴 확장되고 있다. 로사의 죽음에 대하여 쓴 작품들이 얼마나 많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물결은 그냥 확장되고있으니 한사람 죽음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생명이야말로 영원히 멈출줄을 모르는 것이다. 


전해에 화란에서는 가극 <<태평호의 기억>>을 상연했는데 그 호수의 우발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룬 것이였다. 극작가 증력(曾力)과 박광명이 손잡고 극본을 쓰고 작곡가 허서아(許舒亞)가 합작하여 “로사의 죽음”을 구라파의 무대에 올린 것이다. 화란의 가수가 한어로 연기를 했는데 극정이 강하여 관중들은 눈물을 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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