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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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37)
2011년 03월 28일 13시 11분  조회:2857  추천:19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37)
                  
                    문혁때 "검은그림사건"시말

 (황영옥과 그의 그림 부엉이)
예술을 사랑하여 그 길을 걸으면서부터 황영옥(黃永玉)은 마치 부엉이와는 떨어질 수 없는 어떤 인연이라라도 있는것만 같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영옥이 발표한 그림작품들이 수없이 많은데 제일먼저 그린것이 1942년에 그가 아동문학작가 하그렸는데 그 중의 한폭은 <<부엉이>>였다. 

황영옥은 백화사전을 찾아보고 부엉이 한 마리가 1년에 잡아먹는 쥐가 무려 1천여마리되니 인류를 위해 량식을 1톤가량 절약하는 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 그림이 맘에 들어 “1톤”. “5톤”이란 글까지 써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부엉이그림이 그에게 두 번이나 재난을 가져다 줄 줄이야 어찌알았으랴. 


첫 번째로 발생된 것이 1966년 “문혁”이 폭발할 림시였다. 그 착전에 황영옥은 하북성농촌에 내려가 “사회주의교육운동”에 참가했다. (즉 “4청운동”) 여가에 그는 갑자기 한가지 기발한 착상이 떠올라 동물그림이 배합된 “동물이야기집”을 하나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집이 북경의 관아호동에 있었기에 책이름을 <<관아재잡기>>라고 달았던것이다. 그 동물이야기집에 숱한 동물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부엉이가 있다. 
   
부엉이가 말했다. 
  
 “낮에는 사람들이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니 나는 밤이면 나와서 일을 한다.”
    
이같이 유유자적한 마음에서 뛰여난 흥취로 만들어 낸 그림이야기책은 황영옥의 기지와 유모아적인 재능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였다. 그 책은 나오자마자  독자를 끌었고 환영을 몹시 받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니 이 작품은 내막을 아는 자의 적발과 검거에 의하여 “반당반사회주의”독초로 몰리였거니와 지어 황영승은 중앙미술학원에서 연 비판대회에 맨처음으로 끌려나오기까지 한 것이다. 

연후 황영옥은 8년이 지나 그 “부엉이” 때문에 제 몸에 또다시 불이 달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두 번째때는 형세가 전보다 더 맹렬하고 험악해서 앞이 캄캄했다. 

1973년, 황영옥은 하북의 “57간부학교”에서 이름을 달지 않은 로동개조생활을 끝내고 북경에 돌아왔다. 이때 왕부정대가 가까이에다 새 북경호텔을 수건하였는데 그 호텔의 장식문제를 놓고 토론 끝에 주은래총리가 친히 호텔의 미술장식은 화가들을 한패 조직하여 맡기는 것이 좋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별책”에 이름이 올라(別冊ㅡ옛날 강도, 불순분자 등의 호적을 따로 등록한 호적의 일종.)
 
필을 놓은지 오래된 이 화가로 놓고보면 다시금 일어 설 수 있을것 같은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황영옥은 기쁜심정으로 부름에 응하여 온 호텔의 미술설계를 도맡았다. 그는 중앙대청에다는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한폭의 커다란 <<새장강만리도>>를 그리였는데 그것을 명화가들인 원운보(袁運甫), 오관중(吳冠中), 축대년(祝大年)과 황영옥(黃永玉) 네사람이 맡았던 것이다. 
   
1973년 10월에 황영옥은 한차례 북경을 떠나 상해를 거쳐 소주려행을 하고는 장강을 거슬러올라가 삼협에 가 사생(寫生)려행을 했다. 

떠나기 전에 황영옥은 우연한 기회에 오랜친구인 화가 허린로(許麟盧 )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갔다가 손이 가는대로 책 한권을 뽑아 공백지에다 부엉이를 하나 그려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장차 입게 될 필화를 묻어놓은 것이다. 
  
그때 친구 허씨는 그 책은 송문치(宋文治)라는 남경의 화가가 여기다  놓고 간거라면서 그가 자기보고 친구들이 오면 그림을 그리게 하라했노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황영옥은 려행을 떠날 잡궁리에 심정이 온정치않다보니 그린 그림이 잘 되지도못했다. 허씨가 황영옥이보고 당신 맘대로 한번 잘 그려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맘대로”가 훗날 그의 혼줄을 뽑아놓을줄이야 어찌알았으랴!
한달만에 소우(邵宇)가 그 그림을 우에다 “상납”한 것이다..... 
   
려행을 나갔던 황영옥이 돌아와 북경에 들어서기 이틀전에 북경에서는 “검은 그림비판운동”을 시작했는데 전국적인 범위에서 “검은그림”을 조사해낼것이라했다. 이 운동은 강청이 직접 틀어쥐였는데 주요하게 찾아내려는 “검은그림”은 “부엉이 한장”이라는 것이였다.
    
황영옥은 이런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속으로 꿈만해하였다. 
   
“허참, 부엉이가 뭐 어쨋다구 야단인가. 난 그걸 그냥 그려왔는데!” 

   생각밖에 북경에 오니 잡아내자는 사람은 바로 자기 황영옥이였던 것이다. (<<소우와 “부엉이사건”ㅡ 小彈邵宇, 範曾>>)        
“검은그림사건”이 새로 세운 북경호텔의 그림을 견주어 일어난 것이지만 도리대로 말하면 황영옥을 때릴 아무런 리유도 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전부의 그림설계를 맡긴했어도 나쁜 그림을 내놓은것이 없으니까. 개중의 리유라는 것을 “문혁”이 끝나서 그는 한 당안을 보고나서야  똑똑히 알게되였던것이다. 
  

   1973년 11월 23일 저녁때 북경우의호텔에서 한차례 회의가 열렸다.     

   주은래의 병이 급격히 악화되자 강청일당은 승양이같이 그를 박해하려고 달려들었다. 9월에 써놓았던 이른바 “유법투쟁(儒法鬪爭)”은 원래 벌려오던 “비림정풍(批林整風)”을 “비림비공(批林批孔)”으로 고쳤는데  목적은 병상에 누워있는 주은래에게 잔혹한 “병상토벌”을 하자는데서였다. 그런데 그러자고 보니 생동한 혐의가 없어서 여론을 제대로 일으킬 수 없거니와 군중을 방동하기도 어려웠다. 하여 강청일당은 머리를 짜가며 궁리한 끝에 예술방면에서 돌파구를 열어볼 잡도리를 하고 다시금 꾸며낸 것이 “검은그림사건”이였던것이다.


   이 자그마한 회의에서 소우는 “검은그림”문제를 제출했다. 그리고는 상당히 긴 “적발”을 했다. “죄증”이란것이 황영옥이 송문치의 책에다 그린 그 <<부엉이>>이였다. 


   소우의 이 적발을 강청일당은 주은래를 꺾구러뜨리는데 써먹기로 했다. 그리고 “죄증”을 더 만들기 위해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검은그림”을 찾아내는 활동을 벌리기로 한 것이다.

   “검은그림사건”서막은 이렇게 되여 올랐다.


   1974년 1월 2일, 요문원은 상해에서 <<중국화>>책을 엄하게 비평했는데 그것이 “검은그림사건”이 정식시작되였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했다.

   <<중국화>>책은 주은래의 지시정신에 따라 출국선전을 목적해 당시외국무역부에서 인쇄한 출국화표본이였는바 그 내용에는 출국하는 공예품광고가 많았던 것이다.


    1974년 1월 2일, 요문원은 먼저 상해에서 <<중국화>>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시위에서 개최한 한차례의 회의에서 그는 이 그림책을 꺼내들고 “흑산흑수”, “복벽역류”라고 제멋대로 떠들면서 “이건 서방의 자산계급수정주의물건짝임이 분명하단말이요. 철두철미한 ‘극기복례’를 설교한 그림책이란말이요.” 했다.

   그 화책에는 <<봄맞이>>라는 그림이 한폭있는데 영춘화를 앞에 놓고 목을 쭉ㅡ 빼올린 장닭이 생기있는 기세로 서있었다. 그 자세가 엄엄하고  생동했다. 요문원은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그림은 상단에다 영춘화를 담담하게 그려놓고는 그림전폭에 노기가 충천하는 장닭을 돌출히 했다. 이 장닭이 입을 다물고있는 것을 보라, 높이 우뚝섯고 목과 털은 노기에 빳빳하고 발톱은 땅을 거머쥐고 눈은 사납게 노려보면거 꼬리를 하늘로 치켰으니 아주사나운 자세가 아닌가. 이건 완전히 아무 때건 ‘덥쳐들 봄’을 맞이하자는 형세가 아니고 뭔가. 사회주의 봄을,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난 들끓는 경상을 죽어라고 적대시하는거다. 노기충충 꼬리를 하늘높이 치켜든 이 장닭의 모양에서 우리는 한줌도 못되는 ‘복벽광’들의 어두운 마음구석과 그자들이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고 이제 아무 때건 무산계급과 결사전을 하려고 준비한다는것을 엿볼 수 있다. (<<“사인방”의 “검은그림”비판운동시말>>)    

한차례의 폭풍이 재빨리 북경에 불어쳤다. 황영옥의 <<부엉이>>가 처음에는 “검은그림”에서 7번째자리에 놓여있던것이 어느덧 첫 자리에 놓였다. 출판되지도 않은 그림 한폭이 토벌대상이 되어 100여폭이 넘는 “검은그림”을 잡아냈으니 과연 뜻밖이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상관되는 문화부가 의례 “검은그림사건”을 “내미는 중심”이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국무원의 “문화조”였던 것이다. 잠깐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문혁”이 폭발한 후 문화부는 홍위병들손에 부서져 사실상 존재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국무원에는 이 부분을 관할할 새 기구가 생긴것인데 그것이 바로 “문화조”였다. “문화부”가 다시금 건립된 것은 1975년 1월, 4기인대가 열린 후였다. “문화조”기간에 조장을 담임한 사람은 정치국위원 오덕(吳德)이였지만 그는 북경시위책임자였기에 “문화조”의 일상사업을 관리한것은 우회영(于會泳)이였다. 
   
1975년에 새문화부가 성립될 때 우회영은 부장이 되었다. “검은그림사건”이 발생한것이 “문화조”가 “문화부”로 고쳐지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위승(衛勝)의 토벌격문에는 <<부엉이>>를 창작한 황영옥을 “대포제조자”라면서 맹렬히 비판했거니와 “문화대혁명”전에 그린 “동물이야기”마저 한데 묶어놓고 비판했던 것이다. 송문치의 집에서 공백지에 그린 부엉이가 눈을 하나는 뜨고 하나는 감았는데 부엉이의 생활습성이 워낙 그러한 것이다. 부엉이는 밤에 먹이를 찾고 낮에는 쉰다. 그러면서 경각성을 높이느라 늘 한 눈은 감고 한눈만 뜨는 건데 짐승의 그런 습성마저도 “무산계급문화대혁명과 사회주의를 적대시한 죄”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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