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http://www.zoglo.net/blog/jinsongzhu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나의카테고리 : 프로필

음지에 묻힌 비밀(56)
2011년 04월 01일 11시 51분  조회:3997  추천:26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56)        

          (1) 류소기의 딸 정정의 회억
            (2) 기자: 류소기부인과 아들 류원방문기 
   
            
             
                 류소기의 딸 정정의 회억
  

류소기의 딸 류정정이 쓴 회억록을 보면 류소기의 일가는 “문화혁명”에 4명이 죽고 6명이 감옥생활을 했다.    
류정정은 왕광미가 낳은 딸인데 류소기의  여덟번째 자식이다. 제일 망내 류소소(劉瀟瀟)는 왕광미가 감옥가고 자식들이 다 흩어질 때 나이가 6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보모 조숙군(趙淑君)이 가져다 길렀다. 동년시절을 중남해에서 보내면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엄혹한 정치투쟁에서 부모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직접목격했던 류정정은 후에 미국 하브트대학 상학원을 졸업하여 상인으로 성공했다. 1989년에 어머니를 돌보느라 조국에 돌아와 창업했다. 2006년 왕광미는 임종할 즈음에 자기가 심혈을 쏟아부은 “행복공정”을 그한테 맏기였다.    
   
1951년에 북경에서 태여난 류정정은 1954년에 부모와 함께 중남해에 들어왔다. 1967년 9월 13일 오전, 왕광미의 세자녀가 중남해에서 쫓껴가는 그날에 왕광미는 강청, 진백달 등이 꾸며 만든 “미국특무”라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진성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전에 왕광미는 압송되여 류소기의 사무실이 있는 후원에 감금되였다. 하루는 반란자들이 밤에 돌연히 나타나 류소기가 있는 집뜨락에다 담장을 높다랗게 쌓고는 류소기를 담가까이에 한발도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하여 그들 부부는 죽을 때 까지 서로 낯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나이 7순이 된 류소기는 워낙 당뇨병이 있는데다 모택동이 약을 더 쓰지 못하게 해서 병이 심해졌거니와 잔혹하게 매를 맞아 이발도 빠지고 빠지다보니 나중에 7대밖에 남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었다. 설사를 하더니 위병에 걸리였다. 전쟁 때 상을 입었던 손이 발작하여 떨리니 옷을 입기 어려웠거니와 숫갈을 제대로 들수도 없어서 음식이 온통 낯에 게발리였다. 병이 하도 위중하니 그제야 의사가 병을 봐 주는데 진찰할 때마다 투쟁하느라 우선 욕부터 했다.
    “중국의 후르쇼브!”   
 주사를 놓을 때면 사정을 보지 않고 되는대로 침을 콱 찔러 박군했다. 그것은 과연 고형이나 답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류소기를 운동하지 못하게 하느라 두 다리마저 장기간 묶어놓았다. 하여 그의 두 다리는 구불어졌고 근육은 수축됐다. 팔은 주사침자리에 헐고 썩어났다. 
   
“온몸에 온전한 혈관이 하나도 없다.”
    
이는 호사가 기록기록해놓은것이다. 
   

류소기의 장자 류윤빈(劉允斌)은 내몽고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장녀 류애금(劉愛琴)은 “외양간”에서 매를 숱해맞았다. 차자 류윤약(劉允若)은 감옥에서 척추병에 걸려 죽다살아났으며 딸 류평평(劉平平)은 18살이였는데 체포되여 감옥에 같혔다가 후에 산동연해로 쫓겨가 목장에서 로동개조를 했다. 17살에 감옥에 들어갔던 아들 류원(劉源)은 감옥에서 나오자 하향했다. 류정정은 중학을 졸업하고 순의나일롱공장에 분배받았다가 후에는 북경의기의표공장의 보통공인으로 되었다. 
   
중공“9대”가 끝나자 림표는 왕광미를 사형으로 판결하면서 “즉시집행”하라고 했다. 판결서가 모택동의 손으로 넘겨지자 모택동은 무엇을 고려했는지 “刀下留人”이란 네 글자를 썼다. 칼아래에 사람을 남겨두라는 거다. 하여 왕광미는 목숨을 구한것이다. 하지만 왕광미의 80된 어머니는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자살은 하지 않을테다, 나늘 총살하거나 투쟁하여 죽이면 몰라도.”
    
하면서 굳겅히 살아가려고 결심했던 류소기는 코구멍에 꽂은 고무관으로 음식을 넣어 고갈된 생명을 간신히 유지했다. 
   1
969년 10월 17일, 그는 소산지(疏散地) 정주에서 개봉으로 옴겨졌다. 떠나기 전에 호사가 약물로 신문지에다 “中央決定把你轉移到另一个地方”이라 써서 뵈이니 그는 낯을 돌려버렸다. 신문을 다시 눈앞에 가져가니 그는 얼굴을 되돌렸다. 호사장이 귀에 대고 알려주니 그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말 한마디도 없었다. 밤에 발가벗겨 알몸이 된 그를 이불로 감아 담가에 올려놓은 후 비행기에 실어 개봉의 한 특별감옥으로 옮기였다. 추위에 페염이 발작하여 체온이 40도로 올라 구토했다. 하건만 중앙판공청은 치료를 하지 말라해서 11월 12일 아침 6시에 사망하고말았다. 옷한벌 입히지 않은 알몸에 더러운 냄새났고 코는 삐뚤어졌으며 백발머리는 한자남아 길었다. 시체를 화장할 때 전안조는 렬성전염병이라 허튼소리를 쳤다. 화장명세서에 “류위황(劉衛黃)”이라 쓰고 직업은 없다는 “無”를 써놓았다. 화장 후 골회는 나무로 만든 보통골회함에 담아 오래동안 골회진렬실 124호 더그매에 올려놓았다. 그 누구도 관심하지 않았다. 
   
1971년 가을, 림표사건이 발생한 후, “문혁”에 맨먼저 뚜드려 맞았던 팽진이 처음으로 집식솔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일이 공장에서 일하던 류정정에게는 서광이였다. 그는 모택동에게 4년동안 보지 못한 부모를 보게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송경령이 전해주었다. 모택동은 “父親已死”란 네글자를 써서 주면서 어머니는 만날 수 있다고 허가했다.
1972년 8월 18일, 류정정, 류소소, 류원은 함께 진성감옥에 가 4년만에야 제 어머니를 만나보았다.    
진성감옥에서 왕광미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는 완전히 구부정했고 머리는 허옇게 세였다. 반응도 둔했다. 그가 갇혀있는 감방은 불과 6평밖에 안되였다. 그는 누구와 말할 자유조차 없었다. 하기에 그는 차라리 전안조가 찾아오기를 바랏다. 그들과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지지리 고통스럽고 오랜 세월이였건만 그는 자살하려고는 마음은 먹지 않았다. 류소기는 그보고 “절대 그네들이 결론내리게는 하지 말라”했던 그였다. 그러자면 살아야 했다.

원원이는 1977기대학생이였고 정정이는 1978년에 시험쳐 인민대학에 붙었다. 그해겨울 중공은 11기 3중전회를 열고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했다. 류소기를 평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속에 왕광미는 12년간이나 같혀있었던 감옥을 나와 인간세상으로 되돌아왔다. 1980년 5월 17일, 인민대회당에서 류소기의 추도식이 있은 후 그의 골회는 처와 자식들의 울음속에 조국의 바다에 뿌려졌다. 
 

           
기자: 류소기부인과 아들 류원방문기

생사결별할 때 까지 고초를 함께 겪었다.  
“문화대혁명”에 림표, “4인방” 두 반혁명집단은 증명을 위조하여 죄를 만들어 류소기동지를 잔혹하게 박해 했다. 1966년부터 류소기의 운명은 아래로 곧추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당의 8기 11중전회에서 국가의 두 번째 인물이던 그가 여덟번째로 내려간 것이다. 1968년 10월, 중공 8기 11중전회가 북경에서 거행되여 <<반역자, 내부간첩, 공인역적 류소기의 죄행심사보고에 관하여>>를 비준했다.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이래 가장 큰 억울한 안건을 빚어내게 된 것이다. 1969년 10월 17일, 중병을 앓고있었던 류소기는 비밀리에 개봉으로 옮겨져 그곳의 특별감옥에서 생명의 마지막 27일간을 보내고 11월 12일에 원한품은채 서거 한 것이다.
 
  ㅡ기자.
    과연 위대한 녀성입니다. 남편의 두 전처에서 난 자식들을 자기의  친자식같이 여기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으니 과연 용이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다 말합니다, 간단치 않은 어머니라구요. 그리고 류소기동지에 대해서는 시종 충성스러웠구요, 더욱히는 “문혁”기간에 말입니다. 류소기동지가 있지도 않은 죄를 쓰고 모진 릉욕과 타격을 받을 때 견정하게 그와 함께 벗티면서 함께 맛서서 해냈던 것입니다. 종래로 자기 남편을 배반한 적이 없고 자기의 감정을 배반한 적도 없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류소기를 타도하자’고 웨쳤건만 의연히 드팀없이 그를 사랑했지요. 모두들 말합니다, 과연 위대한 처라구요. 류소기동지와 20여년간 같이사는 사이 무한한 영광을 맛보기도 했고 12년간 지긋지긋 한 옥살이도 했습니다. 우리는 왕광미동지의 아픈 상처를 되도록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지난 세월에 겪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려고 합니다. 되겠는지요? 

 ㅡ왕광미.    “문혁”이 시작되여서입니다. 그이가 내보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가 말했지요. “내가 전에 늘 말하지 않았소, 한 사람을 놓고 말하면 가장 행복한 것이 인민의 신임을 받는 것이라고. 오늘 내 한마디 더 보태야겠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인민이 자기를 오해하면 그때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을.” 여기까지 말하는 그의 목청은 떨리였다.    
1966년 8월 중공 8기 11중전회 후 류소기는 비판받고 다시는 중앙의 지도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10월에 전국적으로 “류,등 자산계급반동로선”을 비판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와 그후 한시기는 류소기의 문제를 그래도 당내의 문제 인민내부모순으로 취급하면서 완전히는 타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실제상 1967년 원단부터 중남해의 반란파는 쉬지 않고 우리를 둘러싸고는 공격했거니와 적발하고 투쟁하면서 악독하게 류소기를 습격했던겁니다. 그래도 그이는 아주 적게 말했습니다. 내 보기에도 류소기는 과연 정말 억울하게 당하는게 분명했습니다. 내가 그이를 접촉해서 느낀건 그이가 오직 당중앙만을 중히 여기고 속을 썩히는 그것이였습니다.  그가 쓴 보고들을 보십시오. ‘모주석과 당중앙’이라는 말이 어디  빠진적이 있습니까. 모주석틀 특별히 존중하고 모든 일은 그를 생각해서 한것인데 어쩌면 이제와서는 다 틀린다고 한단말인가?  그때 투쟁받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번은 나를 나와 투쟁받으라는 통지가 왔는데 류소기는 평생처음 나의 행장을 꾸려주었습니다. 옷을 잘 개여 넣었지요. 마지막 몇분동안 우리는 서로 마주앉아있었습니다. 다른 때는 잘 웃지 않던 그이가 ‘우리는 꼭마치 꽃가마를 탄 것 같구만.’해서 나를 웃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류소기와 제일 마지막으로 본건 1967년 8월의 어느 날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중남해의 앞뒤집에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그 뜨락에서 우리를 투쟁하면서 그것을 록음하고  사진찍고 영화로 만들어서 전국에 널어놓자는 목적이였던 것입니다. 
   
뜨락에 가득 심어놓은 과수나무에 열린 과일을 보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류소기가 과일이 다 익으면 따서 유아원에 보내야겠다고 하던 말이 새삼르레 상기되였습니다. 
       
투쟁을 잠시 중단한 사이, 말하자면 그네들이 ‘열의를 더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사이에 나와 류소기는 서재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류소기는 아무말 없이 나에게 물을 먹이였습니다. 투쟁을 다시시작할 때 누군가 류소기를 밀어놔서 혼란이 생겼습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4, 5메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점점 혼란해지는 판에 나는 사람들이 그이를 때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마구달려갓습니다, 그이는 올 수 없었으니까요.  일체를 불구하고 달려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이는 내 손을 어스러지게 잡아주었습니다. 말은 못하고 그저..... 이것이 마지막 결별의 시각인줄이야 어찌알았겠습니까!
 
   ㅡ기자.    “문혁” 때, 류주석은 남편으로서 제 처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식들이 남에게 박해받는 것도 보았으며, 수령으로서 당이 큰 재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으며, 국가주석으로서 국민이 네가 나를 투쟁하고 내가 너를 투쟁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쩌지 못했으니 내심의 고통이 더 이를 데 없었을 것입니다. 그후 류소기동지 때문에 12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옥살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 나날들을 어떻게 견디여 냈는지 세상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생각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류소기동지는 기실 1969년 11월에 원한을 품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서거했다는 것은 어느때 알았는지?    

ㅡ왕광미.
    나는 옥에 갇혀서부터 그저 오전과 오후를 가릴줄을 알고 흐린날과 맑은 날을 가릴 줄만 알았지 어느날이 며칠인지는 전혀 가릴 줄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협착한 감방에 자그마한 뙤창 둘이 있어서 더운날이면 웃뙤창을 열고 아랫것은 열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식들이 몹시 걱정됐습니다. 애들이 살아있기나한지 하고. 후에 관리인원이 내한테 알려주는 것이 모주석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된것은 애들이 모주석께 엄마를 보게해달라고 편지를 썼기 때문이랍니다. 송경령이 그 편지를 전했는데 모주석은 “爸爸以死”라는 글을 써 주면서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나를 보러왔던 겁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서 류소기는 세상을 리별한지 이미 3년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때 그가 차라리 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받으면서 살아서는 뭘 하겠는가. 과연 리해되지 않는 세상이였습니다. 나는 그때 분이 끓어 올라 나를 관리하는 사람을 욕하고 나를 혼내운 자들을 풍자했습니다. 나는 류소기가 죽어 그자들을 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안그러면 그자들이 류소기에게 공통을 주자고 더 악을 쓰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어떤 일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날        
 “....나는 사람들이 이제 나이가 15살밖에 안되는 애가 그같은 장면에서 제 부모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 할 때의 심정을 상상하고 리해나 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30년이 지나갔습니다. 나로 놓고 보면 눈에 찍힌 그 한막이 마음에 깊이 간직되여 명심하게 됩니다. ” 
      
“...... 그때 나는 몹시 긴장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였지요. 말만 하면..... 나는 아버지한테 알려드렸습니다. ‘그들이 날 말못하게 해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 거의 1분동안이나 까딱않고  서있었습니다. 그는 내한테 뭔가 더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긴장해서 낯이 빨개졌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고말았습니다. ”
 

   ㅡ기자. 
   류소기의 안건은 건국이래 제일 큰 억울한 안건이였습니다. “문혁”이 시작된 후에  류소기는 알지 못할 억울함을 당하면서 줄곧 추격을 받았는데 온 가정식솔마저 재난에 부대껴야했습니다. 부모들은 감금되였고 지난날 사랑해 주던 사람들은 갑자기 가로보기 시작했습니다. 주위환경이 그같이 높던데로부터 아래로 뚝 떨어졌을 때 나이 어렸던 아이들에게 주는 타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일반사람들이 다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ㅡ류원.
    나는 그때 15살이였습니다. 1967년 8월에 천안문광장에서 백만명대회를 하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그날 중남해에서도 류소기, 등소평, 도주를 나누어 투쟁했던 것입니다. 그때 몇백명이 류소기와 왕광미를 비판투쟁했습니다. 그 장면은 그야말로 강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비판투쟁이 당장 고조에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어린애의 울음소리터졌습니다. 모두 놀랬지요. 나는 우는 애가 바로 내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나이가 6살이였습니다. 문가에 서있었던 그는 아버지, 엄마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우고 매맞는 것을 보자 그만 겁을 집어먹고 그렇게 울음소리를 크게 텃쳤던 것입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붙잡으면서 뭘하자고 그러느냐 했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소소가 울고있잖아요?” 하고는 달려가 그를 내 품에다 꼭 끌어 안고 경위가 있는 초소로 가서 울지 말라고 달랬습니다.    
그때는 회장이 이미 혼란해져 란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보무님들은 본래는 4, 5메터가량 사이거리였는데 혼란속에 매를 맞을수록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더니 갑작스레 그쪽으로 덥쳐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의 손을 어스러지게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지막만남이자 생리사별(生離死別)의 순간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손을 굳게 잡았다놓고.... 당시 누군가 그들을 갈라지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것만같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제 나이가 15살밖에 안되는 애가 그같은 장면에서 제 부모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 할 때의 심정을 상상하고 리해나 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30년이 지나갔습니다. 나로 놓고 보면 눈에 찍힌 그 한막이 마음에 깊이 간직되여 명심하게 됩니다. ”
    

그런 후 부모님들은 다시못만나고 영 갈라졌다 
ㅡ기자.    듣는 말에 의하면 류소기주석이 격리된 후 집사람가운데서 거기만이 부친과 접근할 수 있었다더군요. 하면 그지간에 거기서는 어떻게 보냈는지? 부친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정형은 어떠했는지? 

   ㅡ류원.    부친께서 격리된 후에 확실히 내만이 그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어려서부터 면목알고  군대에 갔다가 돌아와서도 주위에 있는 초병이나 위사와 사이좋게 지냈기에 그들은 나에 대한 인상이 매우좋았던 겁니다. 그들은 나를 어려서부터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보았길래 부친께 밥을 나르고 수건을 씻고 약을 나르는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정황에서는 내가 주방에서 밥을 그릇에 떠 놓으면 부친께서 나오고 그러면 나는 물 한고뿌와 수건을 가져다 드립니다. 그러면 그는 식사를 하고 나는 앉아서 기다리지요. 부친께서 식사를 끝내면 나는 밥그릇과 채접시를 가시고 수건을 씻습니다. 그러고나서도 감히 더 가까이 못갑니다. 부축해드리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멀리서 보기만해야지 말을 해서도 안되였습니다. 정말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그저 그가 식사를 할 때만 그렇게 볼 수 있었지 다른 때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식사가 거의끝나는 것을 보고 나는 식당뒷켠에 있는 작은 못에 가 수건을 씻었지요. 한데 돌아오자 그가 갑작스레 묻는것이였습니다. ‘네 엄마는 어데 있느냐?’  나는 몹시 긴장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말만 하면..... 나는 ‘엄마는 뒤에 있어요, 바로 뒤에, 걱정말아요, 그는 좋아요.’ 하고나서  나는 아버지한테 알려드렸습니다. ‘그들이 날 말못하게 해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 거의 1분동안이나 까딱않고  서있었습니다. 그는 내한테 뭔가 더 물어보려 했습니다. 나는 긴장해서 낯이 빨개졌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고말았습니다.... ”
          
그것은 나와 부친이 맨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였습니다. 하기에 지금은 응당 말을 더 했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듭니다. 그때 나는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규률을 위반할가봐 조심했습니다. 자칫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도 없을까봐 겁니서. 어쨌든 그렇게  라도 볼 기회가 있었으니 다행이였습니다. 그때 내가 긴장한 건 무서워서가 아니였습니다. 무서울게 뭡니까, 목숨을 내바치는 판이였는데. 그러나 그렇게라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까봐 무서웠던 겁니다. 결국은..... 이틑날 그는 가버렸습니다.
 

  ㅡ기자.    류소기동지는 줄곧 “인민이 력사를 쓰니 좋다”고 했는데  이 말이 지금와 보면 과연 맞는 것입니다. 류쥬석의 일생이 불우하기는 하지만 혁명신념을 굳게지킨 진실한 모양을 인민이 긍정하고 력사에 기록하게 되였으니까요.  그가 당시 이런 말을 할 때의 정형을 알려줄 수 있는지? 

   ㅡ류원.
    부친이 저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문혁”때입니다. 1967년 초, 그이는 중병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내 혼자서 밥을 날라갔습니다. 그는 침실에서 움직이기조차 어려울정도로 병이 심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그가 간신히 일어나 침대에 앉으면서 나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인민이 나를 때리는건 인민이 나에게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인민은 나에게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나에 대한 의견을 너희들의 몸에 옮길 수도 있다. 너희들은 천만 인민과 대립하지 말하야 한다. 인민이 너에 대한 오해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너희들은 꼭 위축을 견뎌내야 한다. 장래에 네희들 역시 나를 떠날 수 있다. 나를 떠난 후에는 누가 너희들의 부모노릇을 하겠냐?  기억해두거라, 인민은 너희들의 부모라는 것을. 너희들은 앞으로 느끼게 될 것이고 깨닫게 될 것이다, 중국인민은 가장좋은 인민이라는 것을.” 나에기 가장 인상깊은 말입니다.
      

   ㅡ기자 
 류소기주석의 원안을 평판하여 억울함을 풀어드린 후 당과 인민은 그에게 아주 높은 영예를 드렸기에 당신의 신분과 지위에도 모두 변화가 생겼다고 봅니다. “검은무리”자녀가 댓바람에 국가 2호인물의 자녀로 되었으니까요. 부친이 평판받은 후 당신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 

   ㅡ류원.    
나는 우에서 아래로 떨어졌다가 또다시 아래에서 우로 솟올랐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아래에서 우로 솟아오르자니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그러한 고통이 일반사람은 리해하지 못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우에서 넘어져 내려오니 사람들은 리해하고 모두 동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래로부너 우로 올라가니 같지 않았습니다. 례를 들면 그때 나는 바로 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대학문을 들어 썰 때 저의 부친은 아직 평판하지 않았고 동학들은 모두 나에대해 아주 좋았고 대함이 평등했습니다. 우리는 7,8명이 한숙사에 있었고 80명이 한반이였습니다. 숙사에서 밤이면 어떤 애들은 트럼프를 놀고 어떤 애들을 책을 봅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자겠는데 떠들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어떤 때는 손에 만투를 들고 먹으면서 고개숙이고 교실로 가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입니다, 이럴 때는 내가 모르거나 혹은 주의하지 않아 응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리해하고 개의치않습니다. 이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까.그러나 대학을 다닌 지 1년만에 저의 부친이 평판을 받으니 정황은 변했습니다. 우리지간에는 아주 자연스레도 골짜기가 생겨버렸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잠자게 떠들 말라 하면 그들은 무슨눔의 큰 소리냐, 네가 다 뭔데 합니다..... 미움사는 것 같아 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ㅡ기자. 1982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는 응당 북경에 남아야 할것인데 왜 농촌으로 돌아갔는가? 하남 신향현7리영공사관리위원회에서 마지막 부주임으로 되었다지?     

   ㅡ류원.    농촌으로 돌안건 내가 전부터 바란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대학교희 동학들이 거의 북경에 남았는데 나도 학교에 남아 조교질을 하던지 아니면 령도의 비서사업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농촌이 나를 수요한ㅁ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농촌에 7년간있었습니다. 17살에 가서 24살에 떠났는데 소박하고 성실한 농민들은 내가 어렵고 가장 절망했을 적에  나를 도와줬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심리고 정상적인 사람의 일종 생존태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기에 늘 그들에게 말못할 어떤 빚이라도 진것 같이 드들 속으로 돌아가고푼 생각이였던 것입니다. 나는 1982년에 하남에 가 줄곧 1992년 까지 있었으니 만 10년입니다. 먼저는 신향현7리영공사에서 17번째간부로 되었는데 내 앞사람은 60여세되는 로간부였습니다. 중앙에서 간부혁명화를 급속히 내놓으면서 젊은이화, 지식화를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당시 공사에 대학생이라곤 나밖에 없었거니와 전 현적으로도 몇이 안되였습니다. 특히는 온정한 정패(正牌)대학졸업생은 없었기에 고르다나니 내가 부향장, 부현장, 현장으로 되었고 나중에는 부시장이 되어 정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ㅡ기자.    부성장으로 당선 될 때 처음에는 후선인에 들지 않았다며요, 듣자니 인대대표들이 련명으로 추천해서 올라간 것이라 하더군요. 이런일이 전국적으로 처음이였고 나이도 39살밖에 안되였으니 제일젊은 부성장였지요. 

   ㅡ류원.   그때 나는 정주시개발구건설을 맡으면서 천진과 대련개발구에 고찰을 갔습니다. 갑자기 부성장으로 추천되였으니 돌아오라는 통지를 받고 놀래랬습니다. ....듣자니 투표해서 올라왔다는 것이였습니다. 말 한마디에 당선되였다니 나는 몇 번 허리숩혀 인사했습니다. 아래 많은 대표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악수했습니다. 너의아버지가 개봉에 갔을적에는 얼마나 추웠는가 너의아버지가 하남성백성들이 너를 선거했다는 것을 알면 기뻐할 것이라했습니다.               
당시 하남성텔레비기자가 나보고 감상을 말하라했습니다. 나는 몇마디했습니다. 저는 내가 선거 된 것은 바로 로일대의 감정을 옮겨 받은 것이라면서 있는 힘을 다해 사업을 잘하고 절대 사리를 도모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당시 나는 확실히 후선인이 아니였는데 대표들이 회의에서 주동적으로 련명으로 서명하였기에 당선된 것입니다. 후에 듣자니 이런 일은 전국에서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때 나는 몹시놀랬거니와 압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부친이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였을 때의 감정도 아마 이러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나의 몸에 큰 기대를 걸고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데 어떻게 로일대를 따라가겠습니까? 나는 올라와서 자칫 잘못하면 로일대의 명성을 깨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큰 압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높은 것 같아서. 그리하여 나는 말했던 겁니다. 오로지 온 힘을 다해 하는것 밖에 없다구요. 
  어머니는 내가 당선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기뻐하면서 잘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리라는 대답 외에는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로일대가 다하지 못한 일을 꼭 잘해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대중이 지지하니 힘이 생깁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6 부질없는 노력은 무용한 것 2010-01-26 32 2869
5 기발한 반론에 탄복한다! 2010-01-26 17 3023
4 미런한 짓을 한 “화요파” 2010-01-26 17 4358
3 근거없는 모독은 하지 말자 2010-01-26 25 3132
2 리광인선생의 글에 답함 2010-01-26 22 3559
1 [re] 물음에 답합니다 2010-01-21 21 3891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