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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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 (2)
2011년 04월 23일 16시 55분  조회:5189  추천:29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 부록(2)
 

서양성직자의 견증: 장헌충은 발광적인 도살자였다.
  

1.력사상 농민"기의자"는 거의가 건달이였는바 그들은 다가 흉악잔인하게 백성을 도살했다.
  

중국대륙에서는 자고로 크고 작은 도살이 멎지 않고 이어내려왔다. 중국사람의 목숨이라는건 마치 나무, 풀, 돌, 흙같이 무기력해서였던지 그 누구에게나 포위섬멸당하였으니 그 처경이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한무리의 들개와도 같았던것이다....
그 많은 도살을 외국사람이 나서서 한건 얼마안되고 거의다가  제 중국사람이 나서서 한 것이였다. 중국사람으로서 제 중국사람을 죽이는 그따위 행위야말로 더 말할수 없이 흉악하고도 지독하게 참혹했으니 인간성이란건 그야말로 아예 싹다 잃어버리고만 것이였다. 양주(揚州) 10일간도살이나 가정(嘉定)에서의 세 번도살이나 성도성도륙(成都城屠戮) 같은것들을 보면 다가 조대가 바뀔때마다 아래우가림이 없이 한바탕 하는 짓이였다. 기의를 할때마다 무자비한 도살이였다. 마치도 그러한 도살이 잇어야만이, 낡은 왕조를 피로씻어야만이 새 왕조를 세울수 없었던모양이다. 그러한 도살이 없이는, 피로 물들이는 그런한 제사가 없이는 봉기라는 기발을 세울수 없을것 같았던모양이다.

력사상의 농민기의를 볼것같으면 그 본래의 동기와 목적이 압박에 반항하고 밥그릇을 빼앗아오기위해서 왕조를 뒤엎자는것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처음기대와는 왕왕 다르게 변해버렸는바 그들은 처음에 다졌던 맹약같은건 철저히 버리고 피묻은 칼을 백성들게 돌렸던 것이다. 백정의 칼로 백성의 머리는 무자비하게 자른것이다. 그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마구살해하는 폭도(幅度)는 점점 더 넓어졋거니와 그에 따라서 수단도 더더욱 잔인해졌거니와 방법또한 가지가지로 많아졌것이다. 생각해도 끔찍하기만하니 저주를 어떻게 퍼부어야할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보면 그들은 다가 호미를 쥐엿던 손에 칼을 쥐고 반항의 깃발을 올렸지만 후에는 자기의 그 기의목적같은건 인츰잊어버리고 되려 손에 철붙이라곤 쥔것이 없는 백성들에게 칼날을 들이 댄 것이다.
황소(黃巢)는 순전히 제가 시험쳐 미끌어진 일로 하여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있다가 기의를 일으켜 두목으로 된 자였다. 그는 기의하자 발광적으로 성(城)을 들이쳐 도륙을 냈는데 800만이 넘는 무고한 백성의 선혈과 생명으로써 제 개인적인 원쑤와 원한을 푼 것뿐이이지 다른건 없었다.

홍수전(洪秀全)은 어떠했는가? 그는 "누구나 밭을 다룰것이요 다같이 밥도 먹게 되리니 입고 먹는게 넉넉하게되리라"는 기치를 들고 기의를 했지만 남경(南京)을 점령하자 인차 전제(專制)와 피비린 도살을 감행하기 시작한것이다.


리자성(李自成)은 어떠했는가? 농민기의군의 수령으로 된 이 악당역시 온 북중국(北中國)일판에서 도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 고 또 하나 당년에 리자성의 의형제로 된 장헌충(張獻忠)은 어떠했는가? 류망악당으로서 농민기의군의 두목이 된 그자의 반동적인 폭력하에 온 남중국(南中國)은 깎이다싶히 황량해졌다. 어느 한사람이 통계를 내봤는데 장헌충이 남중국에서 도살한 백성이 천만아래의 수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소시적에 력사를 배웠다. 교과서에 농민기의를 언제나 아주 위대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더없이 광휘로운일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이제 다 커서 알고보니 그런게 아니였다. 중국의 그많은 농민기의를 보면 백성을 도살하는데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흉악했는바 지어는 인간성이란건 침략자들만도 더 없었던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늘에 와서 우리 중국의 농민기의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기의가 그래 로고대중을 위해서였던가 아니면 제 개인을 위한것이였던가? 그네들이 들고나온건 도대체 어떤 목적에서였는가? 제 개인의 원쑤를 갑자는건가, 아니면 원한을 풀자는건가? 그러고도 자기는 황제라했다니? 혹자는 제가 세상을 한번 제패(獨覇)하려고 한게 아니였는지?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다싶이 허다한 농민기의가 성공한 후이면 그 잔혹함이 낡은 조대의 그 봉건적인 전제에 비해 더하면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던것이다. 때문에 농민기의는 봉건제도를 뒤엎기는 새려 중국인민들을 봉건통치배들의 통치하에 노예살이를 더하게 만든것 뿐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건만도 우리는 왜 지금까지도 력사를 속이고있는건가? 왜서 잔인에다 분칠을 하고있는가? 또 왜서 폭력을 노래하며 찬양하는건가?  우리가 농민기의를 번번히 도금하면서 찬가를 부르는건 도대체 무슨 어떤한 목적에서인가? 그 한무리의 악당권력자들의 죄를 제멋대로 벗겨주고 애써 감추면서 덮어놓고 면류관을 씌우기까지 하는데 기실 진상을 밝히고 보면 결과는 어떠한가? 지금은 우리를 철저히 실망케하면서 극도로 분노케 하거니와 우리들로하여금 곱절 민주와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서광이 비치여 피뿌린 중국대지를 깨여나게 하는 것이다.

농민기의가 평민백성들을 도살한 진면모를 가일층 철저히
까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사천으로, 성도로 가서 농민수령이였다는 장헌충의 그 살인백정의 칼이 그 아름다운 그곳의 땅과 도시를 어떻게 오르내리면서 어떻게 무고한 사람들을 찌르고 짜르고했는가를 한번 보기로 하자.


2. 장헌충(張獻忠)이 성도(成都)를 도룩낸 일은 외국의 성직자가 증명했다.


張獻忠, 字秉忠, 號敬軒, 明萬歷古三十四年(1606年) 9月18日에 섬서성 정변현 학탄향 류거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 글을 좀 읽기는했지만 무뢰한, 불량배였고 건달이였다. 그는 군대에서 죄를 졌길래 언녕 목이 잘리울 신세였건만 몰골생김새가 용맹스러운덕에 목숨을 건진거다.


明崇禎(명숭정) 3년(1630), 장헌충은 명(明)을 반대하는 米脂起義(미지기의)에 적극향응했었다. 그후 얼마안가서 그와 李自成 등은 高迎祥(고영상)한테 들어붙어 고영상을 츰왕(闯王)이라 칭하고 장헌충과 리자성은 호(號)를 츰장(闯將)이라했다. 츰장(闯將)이란 막 뛰여드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崇禎(숭정)8年(1635), 장헌충과 리자성은 어느날 자그마한 일로해서 사이가 벌어져 장헌충은 제부대를 거느리고 장강류역을 공격해갓고 리자성은 황하류역으로 공격해 들어간것이다.
그때로부터 중국대지에는 두갈래의 농민기의군이 나져 한갈래는 북방을 한갈래는 남방을 석권하게되였던것이다.

남쪽으로 나간 장헌충은 선후하여 호북,호남일대의 명나라 정부군과 싸우면서 작전상 "적이 진공하면 나는 퇴각하고 적이 퇴각하면 나는 때리는 전술'"과 "적의 주력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찾아 치는 전술"을 썻길래 싸우면 이기고 지는 일이 적었기에 갈수록 세력이 커졌던것이다. 이 기간에 그는 기편적인 정치놀음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明王朝에 가짜로 귀순(歸順)하는 것이였다. 조정은 그의 속내를 모르고 믿어주면서  중임을 맡기였다. 그러자 그는 낯색을 고쳐갖고 돌연히 조정의 군대를 습격해 산산히 부셔뜨린것이다.
좀지나 그는 리자성과 다시손잡고 긴밀히 합작하였는바 말로는 공동히 명왕조를 반격한다했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그는 리자성이 믿어주고 자기와 적극배합하면서 경비를 늦출 때 변덕스레 마음을 달리먹고 인마를 확충하여 제 지반을 닦은것이다. 장헌충은 이같이 간교무치하고 비렬한 수단으로 번번히 군사상의 승리를 거둔것이다. 장헌충은 호남전부를 장악할 생각에 호북의 남부와 광동, 광서북부의 땅을 늘구었던것이다.

崇禎(숭정)17년(1644) 정월, 장헌충은 부대를 거느리고 사천(四川 )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사천에 들어서자 여러 지방무장의 저항을 받게되였지만 강대한 군력을 갖고있는 그의앞에는 거의 무인지경이나답지 않았다.

8월초아흣레날, 장헌충의 농민기의군은 四川의 首(수부)府인 成都(성도)를 공략했다.
성도를 공략하자 장헌충은 즉시 각로(各路)의 제후세력(諸侯勢力)을 뽑아버림으로써 사천의 국면을 철저히 공제한것이다.
국세가 온정되자마자 임금(帝)으로 되고싶었던 장헌충은 급급히 나라이름부터 "大西"라 짓고는 개원(改元)년호를 "대순"이라했고 成都(성도)를 西京(서경)이라 고치여 수부로 정했다. 그런데 大西政權이라는 것이 기구설치나 전제제도나 완전히 력대봉건왕조의 그것대로였지 개혁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다. 장헌충은 그같이 뻐젓이 자칭 황제로 되었던것이다. 그는 정궈늘 공고하게 하느라 자기의 네 양자를 왕자라 하여 손가망을 평동왕(平東王)이라, 류문수를 무남왕(撫南王)이라, 리정국을 안서왕(安西王)이라, 애능기를 정북왕(定北王)라 하여 각각 임명했다. 하여 그때로부터 사천의 동, 남, 서, 북을 그의 양자와 친신들이 맡아서 지킨것이다.
장헌충이 성도를 수부로 정한것은 성도가 보배땅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도평원은 물산이 풍부할뿐만아니라 기후가 일년사시절 봄같은데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좋았다. 산이 병풍마냥 성도평원을 둘러싼것이다. 장헌충은 이런데서 황제노릇을 하게됐으니 자기는 벼개를 높이베고 발편잠을 잘수있다고 생각한 했던것이다.

대서정권을 세우고 황제로 되었건만 싸움질과 살육이 습관으로 되었던 장헌충은 별스레 공허와 정막감에 갑갑해났다. 하여 그는 불교나 믿어 볼가 하는 궁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느날 그는 성도에 있는 대자사(大慈寺)에 분자향하러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높다란 문턱에 걸채여 하마터면 넘어질번했다. 다른사람의 부축을 받은 그는 노발대발하여 그 절에 있는 중을 모조리 죽여버리라 명령했다. 그리하여 아랫것들은 칼을 빼들고 그즉시 절의 중들을 싿 다 죽여버린것이다. 장헌충은 그렇게 절의 중들을 다 죽이고도 성이 풀리지 않아 이번에는 아예 성도주위에 있는 절간들의 중마저 하나 빼놓지 않고 싹 다 죽여버리라 명령한 것이다. 하여 그의 군대는 성도주위의 절들에 있는 중을 도살하는 작전을 벌린건데 삽시간에 살기가 충천하면서 그 많던 절간들은 피로 물들이였거니와 불에 타서 재로돼버린 것이다. 그번에 살해된것이 2000이 넘었으니 장헌충의 한번 노여움에 목숨을 살려낸 중이 거의없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장헌충이 이같이 중을 대량으로 살해할적에 교리를 전도하느라 성도에 와있은 두 외국성자는 이같이 잔인무도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장헌충은 그 소리를 듣자 대노하여 그들마저 죽여버리자고 끌어당겼다. 그래놓고 다시생각해보는 그둘은 다가 외국사람인지라 죽여서는 좋을것 같지 않아 살려준것이다. 하지만 장헌충은 그들을 선선히 놓아주지 않고 줄곧 제 신변을 떠나지 못하게 련금(軟禁)을 했던것이다.

장헌충역시 황제로 되어서는 의례 재지있고 덕행이 뛰여난 사람을 불러들이였는바 科擧(과거)로써 출사(出士)하여 일을 담당할만한 뽑아들이는 것으로 자기의 정권을 튼튼히 하려했다. 하여 그는 방을 내붙이고 광고를 하여 인재를 선발하려한것이다. 사천은 력사이래 재자가인이 운집한곳이라 이같이 놓은 일에 응하는 자연히 떼를 지어 모여들이 마련이였다. 시험에 붙기만 하면 일자반급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응시에 나선 재자들이 사면팔방에서 성도에 모여들었던것이다.
한데 바로 시험을 치는 그날이였다. 시험치러 온 학자 하나가 그만 장헌충을 노엽혔다. 심청이 매우 불괘해난 장헌충은 그즉시로 호령을 내려 시험장에 모인 1만7천명이 넘는 재자(才子)들을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죽여버렸다.
그러노라니 성도의 청양궁내(靑羊宮內) 비여있던 마당에서는 력사에 류례없는, 학자를 살해하는 대규모적인 참극이 발생되였던것이다. 학자들에게  반격능력이라고는 없었다. 하여 칼날이 번쩍일때마다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피발이 공중에 날렸던것이다. 어떤 학자는 도망치려햇지만 거퍼 열발작도 못가 붙잡혀 다리가 잘리였고 배가 갈리여 내장을 뽑히웠다. 혈장이 오장육부와 혼합되여 땅바닥에 흘렀고 사람은 고통속에 죽어갓다. 어떤 학자는 욕설을 퍼부었다가 즉시 혀를 잘리우고 머리껍지가 벗겨지고는  살해되였다. 어떤 학자는 무서워 떨다가 바지에 오줌을 싸고 꿇어엎디여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칼에 찔려 죽었다. 어떤 학자는 제 목숨을 살려보려고 살인자를 도와주는 수를 썻지만 의례 칼을 맞았으니 화를 면치못한것이다. 이번의 학자대도살은 옹근 반나절이나 지속된건데 청양궁은 안팍이 짙은 피비린내에 잠기였고 도살된 시체가 산같이 무지였다. 후에 도살현장을 정리하게되였는데 붓과 벼루를 한데다 모아놓으니 그역시 산같이 커다란 무지가 되었다.

장헌충이 학자들을 그같이 대도살을 함으로 하여 사천의 지식계는 원기를 잃어 오래도록 춰서지 못했으니 거의 쑥밭이되나다름없었다. 서양으 그 두 성직자는 그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어졌고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속에 죽어갓다"
장헌충은 그 두 외국성직자를 제 곁에 잡아두고 늘 그네들이 포교하는것을 듣기는했지만 천주교의중의 仁愛 즉 어짐과 사랑을 꼬물도 배워내지 못했거니와 되려 더 잔폭한 자로 되고말았다.
그가 말했다.
"구라파 각국의 풍속은 성스러운 법률에서 왔길래 순수하게 아름다운것이다. 그렇길래 그따위 성률은 여기 사천사람에게는 무익한거다. 에덴의 고집은 악과 같으니 성교성령을 따르려말고 나의 칼을 따라야 한다....."

장헌충이 보기에는 승려가 다 악인같아서 어명을 내려 도살하게했다는거다. 바로 이것이였다, 농민기의자는 다가 천하를 얻고나서도 의연히 사면초가를 당한 것만같아 두려워 어찌할바를 모르는 심태였던 것이다. 하여 천사람을 잘못죽이더라도 봉건제왕은 하나도 빼놓지않고 진압해야한다는  수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헌충은 이른바 란당이라는것을 진압하고나서는 그들을 급하게 제꺽 죽여버리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껍지를 바르게했던것이다. 껍지를 바르면서 장헌충은 허다한 규정을 내왔다.
1),껍지바를 때 죽지 말고 고통스레 죽게해야한다. 
2),손이 무르지 말고 맵짜야 한다. 그 누가 손이 무르면 누구의 껍지를 바른다.
3),껍지바르는 시합을 한다. 많이 바르면 상을 주고 적게 바르면 죽인다.
이러한 규정들이 있었기에 껍지바르는데 참가한 자들은 다가 잔인하기 더 말할것 없거니와 동작은 날래면서도 매우조심했던것이다. 담이 약한 자는 인피를 바르고나서는 심리상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서 정신이 붕괴되면서 정신이상에 걸려 스스로 백정의 칼을 놓고는 다시들지 못했다.
그러니 노기가 긇어번진 장헌충은 그들이 지독하지 못한건 란당과 내통하기때문이라면서 칼을 놓은 사람을 하나하나 다 달아매고 깝지를 발랐다.
이같이 장헌충과 함께 기의를 했고 함께 정권을 빼앗아 낸 사람마저도 무참하게 고통스레 죽엇던것이다. 장헌충은 마음이 약한 사람의 껍지를 발랐을뿐만아니라 그의 식솔마저 다 붙잡아다가는 늙건 젊건 녀성이건 아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껍지를 발라 고통스레 죽게했던것이다.
장헌충은 사람의 몸에서 벗겨낸 껍지를 대나무장대에다 널어 말리였는데 거리를 채울지경이엿다. 그리하여 성도의 어떤 거리는 바람이 불면 피가 뻘겋게 발린 인피가 펄럭거리는 소리에 몹시 시끄러웠던 것이다. 하건만 거리마다 인피가 날리는 것을 보는 장헌충의 거동은 떳떳했다. 앞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길을 내게하고 뒤에서는 따라가며 호위해주니 웃음이 끊지 않았던것이다.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은 영아까지도 살해했으니 그가 제일로 여긴건 잔인 그것이였다. 하루는 장헌충이 자기를 반란하는 자의 처를 붙잡앗는데 그녀는 임신한 몸이였다. 임신부의 쑥 내민 배를 보자 불쑥 흥미동한 장헌충은 그녀의 배를 가르고 밴 애기의 모양이 어떤지 보자고했다. 하여 그는 그녀의 배를 가르게 한 것이다.
애기를 끄집어냈다.
장헌충은 그 애기를 보니 기분이 몹시 잡치여 이 애기를 죽여버리지 않았다가는 20년후에는 적수가 또 하나 생길거니 제일 절묘한 방법으로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생각을 굴리였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마침내 그는 칼고 창을 땅에다 배게 세워놓은 후 애기를 공중에 올려뿌려 어떻게 찔려 죽는가를 보았다. 그게 재미있을 것 같앗다. 하여 장헌충은 온 성도시를 수색하여 임신부녀는 모두 붇잡아들이게했다. 붙잡아 온 임신부는 다가 그같이 배가 갈리였다. 장헌충은 이렇게 출생하지도 않은 영아와 부녀를 수많이 살해한 것이다.

꼭같은 할복이였는데 장헌충이 그번에 한 할복살해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였다. 하루는 그의 수하사람이 그한테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도리를 얘기했다. 장헌충은 잠자코 듣더니 그게 참 좋은것 같다면서 그보고 "네 배속에는 어찌하여 그리 많은 학문이 들어있느냐?" 고 했다. 수하의 그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는줄로 알고 득의연하여 웃었다. 한데 그런것이게 아니였다.
장헌충은 낯색이 돌변하더니 큰 소리로 호령했다.
"여봐라! 이놈의 배를 가르고 그놈의 학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거라!"
그래서 그의 배는 칼날에 갈리운건데 장헌충은 배안을 이리뒤적 저리뒤적 보고는 한마디 내던졌던것이다.
"더러운 냄새만 피우는 밸이지 여기 어디 학문이 있다구, 원!"
장헌충의 그같은 황당무계와 변태는 이미 극도에 이르었던것이다. 그가 하루는 갑자기 녀인의 전족(쪽발)을 보고푼 생각이 나니 그 자리로 령을 내려서는 성도성내 어느 한 녀인의 발목에서 잘라 궁에 들여온 전족(쪽발)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흠상했다. 이틑날에는 그가 들어있는 궁뜰악에 그같이 잘라온 전족이 산처럼 쌓이였다. 장헌충은 제 귀비(貴妃)를 데리고 같이 그것을 흠상했다. 그러다 그는 홀연 그 쪽발산꼭대기를 뾰족하게 하면 보기좋을 것 같으니 칼을 뽑아 귀비의 발목을 잘라 올려놓았다. 그래놓고는 보면서 "하하하..."대소했다.
장헌충의 이같은 행위는 권력이 팽창된 후이면 생겨나는 심리변태로서 일종 철저한 무신앙자(無信仰者)의 꼴이라해야 할 것이다. 전에는 인간대접을 못받아본 사람이, 억압과 고통을 다 받아본 사람이, 릉욕을 받을대로 받아본 사람이 일단 번신하여 주인이 되면 그의 광열, 잔인, 포악과 음험은 수만배의 능량으로 튀여나와 자신이 잃어버렸던 평형을 잡는 것으로 보상을 받자고 드는 것이다. 장헌충은 말할것 없이 그런 인간이였던것이다. 중국의 력사에는 농민기의자가 만았지만 다가 그러했다. 그들이 문명을 압살하고 인성을 허물어버린것을 보면 그 하나하나 더 흉악했던 것이다. 몇천년의 중국력사는 그같이 그 모양의 압살과 훼멸로 악순환을 해왔기에 다가 이 괴벽한 틀을 시종벗어나지 못했던것이다.
장헌충이 사천을 평정하긴했어도 한중(漢中)은 끝내 수복하지 못한것이다. 삼국때부터 내려오면서 한중(漢中)은 사천땅에 든것이였다. 여기로부터 고려해서라도 장헌충은 한중을 수복해야만이 사천을 완전히 얻었다고 볼것이다. 허나 장헌충은 그곳을 수복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말았던것이다. 그때로부터 그는 성도에서 누군가 정보를 내보내고있는게 아닌가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내부간첩을 없애야겠다고 맘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가 내부간첨이고 그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내부간첩이 빠져나가지 못하게하느라 장헌충은 성문을 닫아걸고 대규모적인 도살을 감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외국의 두 성직자는 그 번의 대규모도살도 역시 침히 목격한것이다.
그중 안사탁(安司鐸)이란 중국이름을 쓰던 성직자는 그때의 일을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645년 겨울 11월 22일, 헌충은 먼저 암암리에 한사람을 시켜 거짓말을 꾸며 보고하게 만들어 군중들을 미혹시켰다. 적의 큰 부대가 당장 들이닥칠테니 당장 병마를 조련시켜 적을 막아야 한는것이였다. 담음날, 인마를 집결시키고 보니 당장 전쟁판으로 나가는것만같았다. 장헌충은 자기가 꾸민 악독한 모략을 각 영의 군관에게 통지하여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깨끗이 죽여버리라 명령했다.

詭言(궤언ㅡ속이는 말)

" '백성들이 적과 내통하여 대군을 사천에 끌어들이여 거사를 도모하려고 하니 비도를 잡으려면 성내의 주민부터 멸해야할것이다. 그런즉 비밀리에 준비를 잘하면서 정보가 새여 나가게 말아야할것이다 ' 운운. 대도살은 래일하련다. 비적을 소멸하고는 즉시 강을 건너 적군을 맞을것이다."

이틑날, 대도살이 시작되였다. 서방의 그 두 성자는 어떻게 했는가? 안사택(安司擇)을 동문의 성루에다는 안배하여 그가 성루에 올라가 보게끔 했고 리사택(李司擇)은 성남의 성루에 올라가 보게했다.
시간이 되자 장헌충은 동쪽성의 공지와 남쪽성의 공지에 나누어서 근 20만에 달하는 무고한 백성들을 무차별적이 대도살을 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안사택(安司擇)은 이렇게 회억했다.
"무고한 남녀백성들이 살해되였다. 그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은 아츠러웠고  비참하기 짝이없어 볼수 없었다. 피가 도랑물처럼 흐르니 가슴은 칼로 에이는 것 같건만 그들을 구원해 줄 발법은 없었다"
이때에 그들 두 성직자는 울음을 삼켜가면서 장헌충에게 제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빌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근본 장헌충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안사택은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붙잡히운 백성이 무수히 많았는데 그들은 남문 제방뚝다리가에 몰켜있었다. 그들은 장헌충이 오는것을 보자 모두 땅에 꿇어엎여 울면서 애걸복걸했다.
'대왕만세! 대왕은 우리가 기다린 왕이요, 우리는 대왕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국법을 어긴적도 없는는 무고한 백성인데 어이하여 죽이는거요? 어이하여 백성을 이렇게 겁먹이는거요? 우리는 병사도 아니요, 우리 한테는 무기도 없습니다. 우리는 적도 아니고 법을 지키는 량민이니 대왕께서 제발 살려주기를 비나이다.' 운운.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게 그런 애걸이 무슨 소용이랴, 인면수심(人面獸心)인 장헌충은 듣는 둥 마는 둥 한마디 물어보는 말도 없이 되려 백성들이 적과 내통했다고 욕을 퍼질렀다. 그러자 말탄자들이 뛰여들어 마구짓밟아놓으면서 미친듯이 을러댔다.
"죽일건 죽여야 한다, 반역자들!"
군사들은 급속히 달려들어 무차별적인 대도살을 감행했다.
과연 원통한 일이였다! 무죄한 백성들이 그같이 참살당하고마니 원성도 사라졌다. 시체는 쌓이여 산이 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이 되었다. 강에 던져진 시체가 물길을 막으니 강은 흐르지 못해 범람하면서 배도 다닐수 없게되였다."

안사택(安司擇)이 도살 전 과정을 다 보고나니 황혼이 되어 해는 서산을 넘고있었는데 처량하기짝이 없었다. 정신이 거의 붕괴의 지경에 이른 그는 허든거리면서 돌아왔다. 그는 오면서 길가에 널린 시체들을 보았는데 아직 채 죽지 않은 어린아이의 신음소리 들리였다. 하여 서양의 이 성직자는 그 아이에게 성수(聖水)를 뿌리여 그 애의 령혼이 천국에 갈것을 빌었다. 안사택(安司擇)은 돌아오는 길에 그런 아이를 열둘이나 보고 설수를 뿌려줬던것이다.
이 두 서양의 성직자는 천주교의를 전하려고 사천에 온것이였는데 천만뜻밖에도 농민기의자두령 하나가 그들 앞에서 일장의 대도살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참혹스러운 비극을 놀아댄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대립되는 두 세계관이였다!
성도에서의 대립되는 이 두 세계관은 최종적으로 문명이 야만에 굴복하는가, 인애가 잔폭에 굴복하는가, 신앙이 망나니에게 굴복하는가, 上帝(상제)가 장헌충에게 굴복하는가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특색이 갖추고있는 인치(人治)였고, 이것이 바로 서양사람으로서는 리해할 수 없는 동방의 포악이였고, 이것이 바로 유가문화(儒家文化)의 침윤(浸潤)하에서 중국의  망나니정권과 악당혁명이였다.

장헌충(張獻忠)은 성도(成都)에서 그같이 대도살을 하고나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계속하여 또 사천(四川) 각 주(州)와 시(市) 현(縣) 을 다니면서 종족을 멸종시킬 대도살을 했던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남녀로소와 성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여 멸살하려들엇기에 거의 남기지 않은것이다."

그같은 피비린 대도살적인 공포는 온 사천(四川)을 휩쓸었기에 사람들은 사처로 흩어지다보니 땅은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 황페해졌고 쌀뒤주는 비여 가마에 집어넣을것이 없었다. 먹을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잡아먹고 늙은것은 어린것을 잡아먹었으며 너린것은 병자를 잡아먹어 사천이란 이 땅은 처처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던것이다.
장헌충은 사천사람들을 핍박하여 한무리 또 한무리씩 굶주린 승냥이떼로 만들었고 사천사람들을 핍박하여 서로 삼켜버리는 짐승으로 변해버리게 한 것이다.
토지가 황페하게 되니 장헌충(張獻忠)은 군량을 걷어들일 수 없었다. 하여 그는 령을 내려 죽인 사람고기를 절이고 햄을 만들어 구대식용으로 했던것이다. 이 기간에 성도(成都) 각지에 시체들이 널리면서 온역(溫疫)이 돌아 옛적부터 내내 아름답고도 부유해서 천부(天府)의 나라로 불리였던 성도평원은 "만호귀신노래"하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성도성(成都城)의 어떤 시체들은 미처 파묻지 못해 강과 우물에 처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 있는 두갈래의 강은 다가 막혀서 배가 다닐 수 없었다. 그것뿐아니다. 성도성안에 있는 만여개나되는 우물은 시체가 차서 먹을 물조차없었다.
장헌충은 그같이 성도사람을 다 죽이고나서는 한중(漢中)을 수복(收復)하려고 준비했다. 출발전에 그는 온 성도를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기가 들어있었던 궁전마저도 가만두지 않고 온 성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것이다. 그가 그같이 한 목적은 다른게아니였다. 만일 출정이 실패한다면 적에게 성도를 오섭서리 넘겨줘야하니 그렇게는 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때는 벌써 淸大順三年(청대순3년)이였는데 漢中(한중)은 청조의 통치를 받았던것이다.  재다시출발하여 한중(漢中)을 수복하기전 이틀간에 장헌충은 또 두차례나 살인을 했다. 한차례는 군대내에 있는 늙고 병들고   잔약한 자였다. 그는 이런 사람들은 싸움을 해내지 못하거니와 량식만 축낸다는것이였다. 그다음 한차례는 그들의 처와 자식이였다. 그는 그들을 살려주면 적편으로 넘어가 우리와 해내자고 달려들것리라면서 직접 제손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모든게 그가 짐작한바와 같이 이번의 출정은 승리를 걷우지 못했거니와 장헌충은 사천서충현(四川西充縣)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에서 습격해 오는 청군이 마구쏴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2살밖에되지 않았다.
성도의 지식계에 있는 한 로인은 장헌충이 도살을 감행한 후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도는 장헌충의 손에 철저히 회멸되고말았다. 청조관원이 성도에 와 접관하려했지만 성내에서 관청이라고는 찾을수 없었기에 四川省府는 부득불 保寧府(오늘의 랑중현ㅡ閬中縣)을 새로 개설했다가 順治16年(1659) 즉 장헌충이 죽은어 14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서 四川省府를 成都에다 되앉힌것이다. 그당시 四川의 인구는 다해봤자 약 10만여명박에 되지 않았기에 10리가도 인연(人煙)을 볼 수 없었다. 성도전성의 거민을 다해봤자 10호밖에 안되였으니까.(흩어진 인구는 수자에 넣지 않았음)  거리를 가려낼수 없었다. 도처에 잡풀이 무성한데 토끼뛰고 꿩이 날았다. 어떤 사람이 남문성벽에 올라가 하루종일 살피였는데 보이는 것이란 錦江대안에서 호랑이 13마리가 뛰노는것 뿐이였다."
사천은 본시 인구가 많은 성이였건만 장헌충의 롱락과 도살과 폭위(暴威)로 인하여 황페한 거친 벌로 되고말았던것이다.
서양의 성직자 安使擇(안사택)은 회억록에 이렇게 썼다.
"연꽃수놓은 비단같던 성이 황야로 되어버려 사람이 살지 않아 쓸쓸할 뿐이니 어찌 필과 혀로써 이루형용하랴.... 마을과 진과 성의 가옥들은 불을 질러 전부 태워서 없애버렸기에 사방을 둘러봐야 황야뿐 인적이 없었다. 동, 서, 남 세방면이 해를 더 심하게 입고 유독 북쪽만 남아서 그리로 사천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것이다."

바로 이같이 그 어디다도 비할데없이 잔인하고 악독하고 제멋대로 날쳐댄 야만적인 장헌충을 우리는 교과서에다 "농민혁명령수"라하니 과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3. 李自成(리자성)이 "밭을 고루나누고 조세를 면제한다"하고 洪秀全(홍수전)이 "조화를 이루지 않느곳이 없을거요, 그 어디서나 따뜻고 배부르게 먹으리라"한것은 다가 가짜구호였다.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그래도 계몽사상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중국의 농민기의자를 놓고 보면 그 어느하나 기편적인수단으로 출세하지 않은게 없다. 례를 더 들면 陳勝吳廣(진승,오광)의 구호는 "진승왕은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이고 張角(장각)의 구호는 "늙은 하늘은 꼭 죽을거요 어린태양은 꼭 일어서리라"는 것이였으며 宋江(송강) 등의 구호는 "천제를 대신해서 덕행을 베푸리라"는 것이였다. .....이러한 구호들은 아닌게아니라 호소력이 아주강하고 미혹성이 있어서 농민기의가 한동안은 기세를  벅작올리군한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봉기를 일으킨 후에는, 더욱히는 천하를 얻고나서는 하나하나 다가 장헌충모양으로 권력이 무한이 팽창됨으로 해서 방향을 을 잃고 자기를 잃으며 히스테리적인 변태광이 되어서는  생명마저도 풀같이 여기고는 무고한 사람을 제멋대로 죽이는 것으로 욕구를 풀었던것이다.
이는 중국농민기의의 비극이거니와 더욱히는 중국문화의 비극인 것이다.
한낫 전제정치를 체계로 한 집단이라면, 한낫 소농경제가 요해인 군체라면, 한낫 유가문화를 신령으로 삼는 민족이라면, 그는 천하를 얻고나서는 중국을 더욱더 유린하게 되는바 인민을 노예로 자기의 정권을 강화하려하는 것이다. 중국의 력사는 바로 이렇게 내려왔길래 개변이 없는 건 더 말할것 없다.
이럴때 농민에 의거하여 기의한 힘으로써는 중국의 문제를 근본 해결할 수 없길래 외래의 문화충격에 의거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결국 중국의 력사상황을 철저히 개변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몇천년간이나 문을 닫아걸고는 주제넘게도 자기만이 제일높이 여기면서 세계문명의 선봉이라했다. 하여 웃대의 어른들은 늘 외국을 오랑캐라 경멸했던것이다. 그러나 이외로 이른바 기의라는 것과 혁명이란 것은 다가 번마다 경제를 어렵게 하고 국력을 쇠퇴시키면서 인구를 대량으로 감소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이같은 정황에서 장헌충같은 자들의 폭압으로 수많은 사람의 머리가 날아나고 땅에 떨어지는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중국의 력사는 이같이 무수한 사람피로 진붉게 물들었은 즉 중국의 문명은 그같이 무수한 백골이 부추기고 벗텨준것이다.啓良(계량)선생은 <<中國文明史>>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력사를 평가하는 각도에서 만약 농민기의가 중국의 력사발전에 미친 의의를 그냥 그저 편면에다만 올려놓는다면 그것의 진면모는 가리우게 되는것이다. 실은 그것이 사회를 앞으로 이끌지 못했거니와 력사를 그저 동란에 맴돌이치게만했기 때문이다. 지어는 중국문명이라는 모식(模式)안에서의 농민투쟁은 본체가 바로 전제주의를 감싸주는 일종의 수단이였다고 가히 말할수 있는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중국대지에서는 번번히 피고기뿌리는 대도살이 생기군했던 것이다. 하여 로신은 말했던 것이다.

"
나는 혁명전에는 내가 노예였다고 생각했으나 혁명이 끝나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내가 노예에게 속히여 그의 노예로 변해버리고말았다는 감각이 든다."

사람들로하여금 마음을 좀 놓이게 하면서 기쁘게 하는건 장헌충이 죽은지 근 300년이지나니 이제는 서양계몽가들의 평등, 자유와 민주사상이 끝끝내 중국에 들어와 수천년이나 깊은 잠을 자고있은 중국사람을 깨여나게 만들고있는   그것이다.                          


 作者 汪建中 2004年 10月 12日 于弄月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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