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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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군항일운동과 토비
2011년 06월 16일 14시 28분  조회:7279  추천:12  작성자: 김송죽
 

      의용군항일운동과 토

       (장편소설 <<관동의 밤>> 머리말을 대신하여)

                               김송죽 


 “9.18사변”이 일어나자 당시 유생력량을 집중하여 반인민적인 내전을 벌리고있던 장개석은 동북군에 “절대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산해관 이남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투항행위였다.

   하지만 일본침략군의 도살과 유린을 받아 망국멸족의 위협을 심심히 느끼고있던 동북 여러 민족 인민의 반일감정은 점점 높아갔는바 드디여는 민족을 불문하고 각 계급과 계층이 항일투쟁에 궐기하는 고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동북군경(軍警)의 부분적인 애국군관 이를테면 마점산(馬占山), 리두(李杜), 풍점해(馮占海), 소병문(蘇炳文), 왕덕림(王德林)과 같은 사람들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구국군(救國軍), 자위군(自衛軍)의 기발을 들고 항전에 나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동북의 광범한 로동자, 농민, 지식분자들은 물론 부분적인 지주들마저 구국군과 자위군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종교형식의 반일조직이였던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槍會)에 들어 항전에 나섰다.

   그들뿐만이 아니였다. 허다한 록림대 역시 분분히 “반일삼림대”의 기발을 들고 침략자를 때려엎는 혈전에 떨쳐나섰으니 1932년 여름까지 상술한 항일무장인원수가 무려 30여만ㅡ 이것이 바로 한때 동북에서 성세호대하였던 의용군 항일운동인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는 록림대란 바로 토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불가사이한 일 같지만 당시는 토비도 항일에 나섰었다. 그때의 의용군성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땅을 잃고 파산당한 농민이 50%, 퇴역군인이 25%, 지식분자가 5%, 토비가 20%였다. 한즉 20%의 그 토비무장력이 동북의 의용군항일운동에서 일으킨 작용을 우리는 결코 도외시할수도 무시할수도 없다는 그것이다.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니 아닌가!

   

   어느때부터인지는 딱히 알수 없지만 인간이 살고있는 이 대천세계에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ㅡ 비(匪)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를 어떤 곳에서는 호자(胡子)나 향마(向馬)라 했고 어떤 곳에서는 토비(土匪), 마적(馬賊) 혹은 비적(匪賊), 봉자수(烽子手), 강도(强盜)라 불렀다.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이 무리들도 점차 변하면서 발전하고 성숙해져 자기들의 조직기구를 가지게 되었고 두령을 선거하는 방법이 있게 되었으며 자기들의 종교와 신앙이 따로 생겨났고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었으며 지어는 자기들만의 언어와 풍속도 따로 생겨나 하나의 “업종”을 이루게되였던것이다.

   

   예전에 동북을 일명 관동(關東), 혹은 만주(滿洲)라 불렀다. 청조말부터 민국년간 여기에 토비가 소털같이 많았다고 하니 그것은 국세가 혼란했던 당시의 형세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중국에는 “개가 급하면 사람을 물고 사람이 급하면 록림객이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사실 틀리는 말이 아니다. 나쁜짓을 하고 쫓기우다 죽을 고비에 이르러 승천입지(昇天入地)를 할수도 없으니 토비로 된 자가 있고 빚을 지고 갚을 길없으니 도망쳐 토비로 된 자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길림회정(吉林滙征>>에 기재된걸 보면 명조(明朝)의 영락(永樂)년간부터 조정에서 일을 저지르고 추방된 죄신(罪臣)들이 관동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산은 높고 황제는 먼지라 그런자들 중 어떤 불량한들은 토비로 전락되고만것이다.

   재물을 탐내여 토비로 된 자가 있는가 하면 벼슬을 하기 위해서 토비로 된 자도 있었다. 오죽하면 “벼슬꿈을 품었거든 토비노릇부터 하라”는 말까지 나놨겠는가!

   한때 동북에서 패왕(覇王)으로 불리웠던 장작림(張作霖)이 바로 그렇게 해서 출세한 사람이다. 그의 출신이 바로 토비였던거다.

   

   토비를 류자(綹子)라 하는데 관동의 토비는 주로 막잡이(遵土匪)와 살부제빈(殺富濟貧) 두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다.

   막잡이ㅡ 이런 류자들은 기와가마(큰 부호)는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전문 가난한 백성의 물건을 로략질하거나 인질을 잡아갔다. 보통 7,8명이 작당하여(起局이라 함) 싸다니면서 나쁜짓을 서슴없이 감행했는데 지어는 혼자서 이름을 내걸고 해먹는 놈도 있었다. 백성들이 제일 미워하고 중오한것이 바로 이러한 막잡이토비였다. 

   살부제빈ㅡ 이런 류자는 전자와 성질이 확연히 달랐다. 그들이 주로 노린것은 대부호인 “큰 기와가마”였다. 이런 토비는 류자수가 수백명 지어는 천여명에 이르는것도 있었는데 두령은 담략이 있고 수하에 둔 팔대금강(八大金剛)이라는 내외사량팔주(內外四樑八柱)도 모두 지모가 출중한 자들로 지도부를 결성하고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구국구민(救國救民)”의 기발을 들고 나선 토비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까지 토비로 취급하겠는가 하겠지만 실은 당시 동북의 무장실태를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규정짓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개념상에서 절대 틀리지 않는다. 왜서 그들까지 토비 범주에다 넣게 되는가? 주되는 원인이라면 청말이거나 민국초는 물론 “9.18사변”이 일어난 후에도 그들은 어느 한 정당켠에도 서지 않았거니와 아예 정당 같은것은 믿지 않고 나라의 집권계층에 불만을 품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논것은 물론 기국(起局)으로부터 전반에 이르는 습속, 규률이나 조직형태같은것이 모두 류자의 방식을 본땃기 때문이다.

   한편 또 구군대(舊軍隊)중 어떤자들은 수하인원들을 끌고 나와 지반을 닦고 그멋대로 패왕노릇을 했으니 그들역시 토비에 속한것이다.

   

   살부제빈의 깃발을 든 큰 토비무리거나 구국구민의 기발을 든 큰 토비무리를 볼것 같으면 다가 기국 할 때부터 나라의 법 같은건 개떡같이 여기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것을 락으로 삼고 자유를 제창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막잡이 떨거지 토비와는 달라서 일반적으로 백성에게 해를 주지 않고(그들의 10계률을 보아서.) 토호와 대부호 혹은 돈많은 자들만 목표로 삼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지어 도와주었다. 하기에 백성들한테는 미움을 사지 않았다. 그러한즉 따지고 보면 그들 우두머리를 두뇌가 없다고 여길것이 아니였다.

   평상시 그같이 료략질을 일삼아 온 그들이였건만 일단 외적이 국토를 침략하면 종전의 계급모순은 잠시 제쳐놓고 민족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항쟁에 나섰다. 왜서 그렇게 했겠는가? 한것은 바로 그들이 가슴심처로부터 내가 중국사람이 옳으냐? 옳다면 침략자를 몰아내고 내 국토를 지켜야 한다고 자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오가 있음으로 하여 그들은 그 어느 한 정당의 설복이나 고동을 받지 않고서도 자발적으로 외적을 항격해나설수 있은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의로운 애국행동은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념원과 맞는것이다. 하기에 그 행동은 광범한 인민대중의 갈채와 지지를 받게 되었던것이다.

   

   동북 토비가 의용군 항일운동에서 주도적역할을 논것은 물론 아니다. 워낙 인간성이란 꼬물만큼도 없는 적잖은 지방토비들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 같은건 근본 념두에 두지도 않았거니와 불난틈에 도적질하듯 그 혹심한 재난의 와중에도 료락질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질까봐 겁나서 산속깊이 숨어 형세 발전이나 보면서 안일한 나날을 보낸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량심있는 류자들은 그러지를 않았다. “9.18사변”이 일어나자 상점(常占), 청산호(靑山好), 군자인(君子仁), 사계호(四季好), 공평(公平), 로삼성(老三省)을 비롯한 무려 20여개의 이름이 쟁쟁하던 상습토비와 국(局)을 새로 만든 천호(天虎), 조참모장(趙參謀長), 진군(陳軍), 전사령(田司令), 명산(明山)을 비롯한 여러 토비조직들은 용약 항일에 떨쳐나섰던것이다. 성화(聖化)에서 활동하고있던 무송의 왕지도(王志道)와 같은 유명한 토비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 로씨야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용약 떨쳐나서 싸웠을 뿐만아니라 후에는 또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항일운동에서 적극적으로 싸웠던것이다.

   

   당시 의용군은 주로 백성들의 손에 널려있는 총들을 거둬가지고 자체를 무장해야 했었다. 그러다보니 총들이 각양각색이여서 탄알이 떨어지면 구입하기가 과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하였다. 그들은 총외에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도 갖고있었다. 한데 그 수자가 얼마안되였다. 인원에 비하면 무기는 태부족인 형편이였던것이다. 그 실례로 료녕의용군만 보아도 그러했다. 료녕의용군은 초기 집계된 인원수가 20만명이 넘었는데 총은 13만여자루밖에 안되였으니까. 하여 그들은 부득불 창이나 칼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다.

   

   1932년도 화천현 타요자금광(지금은 화남현에 속함)에서 금광을 지키는 일본군의 손에서 무장을 빼앗아 자기를 무장하고 기국한 기치중(祁致中)의 명산대(明山隊)는 후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일련군 제11군으로까지 발전하였는바 전성기에는 1,200명의 호탕한 기병대로까지 발전했다. 그 대오를 개조하여 강력한 항일무장부대로 만들기 위해 내부로 뚫고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로심초사를 한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치부주임이 되어 26세의 열혈의 생명을 바친 우리 조선족동포청년 김정국(金正國)이다.

   

   항일에 나섰던 오랜 상습토비들은 거개가 총을 잘 쏘는데다 지형에도 익숙하였기에 유격전을 하는데서 언제나 선줄을 끌었다. <<성화료원(星火療原>> 제4집에 실린 “설야에 당니귀를 끌다”라는 글을 보면 1933년도 겨울에 항일군을 소멸하려고 나섰던 300명의 일본군 “토벌대”가 도리여 이쪽의 유인술에 걸려들어 멋모르고 북만의 미궁과도 같은 림해(林海)에 기여들었다가 길을 잃어 나가지도 못한채 엄동설한에 몽땅 강시(殭屍)로 되었는데 이듬해 눈이 녹고 날씨가 더워지니 사체(死體)썩는 냄새가 골안을 꽉 메워 숨쉬기조차 어려워서 거기로는 사람은 물론 지어는 짐승마저도 얼씬하지 않았다고한다.

   하길래 토비는 이켠에서나 저켠에서나 다가 수편(收編)하려는 대상이였다. 명산대와 같이 공산당에 수편되여 항일을 끝까지 견지한 의용군이 있는가 하면 해림(海林)의 8대대(八大隊)처럼 그 어느쪽에도 수편되지 않고 고집스레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방황하다가 나중에는 특무의 간계에 들어 자멸하고 만 의용군부대도 있다. 어떤 토비의용군은, 이를테면 해림 위호산의 장락산(독수리)과 같은자는 몇 번 싸워보고 리득이 없을것 같으니 항일을 하다가 집어치우고는 광복이 날 때까지 산속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선대로부터 해먹던 짓이나 계속하면서 살았다.

   또한 소본량(邵本良)과 같은 토비는 일본군에 수편되여 동변도소비 소장총사령(東邊道巢匪小將悤司令)의 급을 위임받고 일본군이 대준 대량의 무기를 들고 일본군비행기와의 배합하에 항일군토벌에 선두로 나서기까지 했다. 일제는 그자를 충복으로 써먹기 위해 심양에다 “소공관”을 지어주고 시녀까지 여럿을 붙여주었다. 그야말로 령혼까지 적에게 완전히 매수된 무치한 한간이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런자들과는 달리 비록 토비출신이기는 하지만 민족심이 살아있는 의용군용사들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주보중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1939년의 초여름, 한때 수천명의 삼림대를 거느려서 이름이 온 동북땅에 날리였던 토비두령 제영전(濟永全)은 위호령(威虎領)에서 마지막 혼자남을 때까지 단신으로 싸우다가 순난한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발성적인 항쟁이였던 동북의 의용군항일운동은 발기초부터 군사, 정치, 물자공급 등 여러방면에서 허다한 곤난을 갖고있었다. 하여 그 운동은 1933년부터 차츰 가라앉게 된 것이다. 30여만의 대오는 오래가지 못하고 붕괴의 일로를 겉게 되었고 얼마 안되는 부대만이 산속에 들어가 항일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대오들은 동북 각지에서 일본침략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안기였는바 동북의 항일전쟁사상에 그들이 쌓은 불후의 업적은 결코 부정할수 없는것이다. 우리의 사학연구에서 실사구시적인 원칙을 지켜 이 점을 충분히 긍정해주고 이를 사료에 남기는것이 바른 자세가 아닐가고 말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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