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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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2011년 09월 01일 00시 36분  조회:6269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김송죽  

 

세상에 생명가진 동물이란 동물은 다 자기가 갖고있는 눈, 코, 귀, 혀, 살갓따위로 아품이며 차가움이며 닿음같은 것을 알아낼줄을 안다. 말하자면 감각기능을 갖고있다는거다.

동물만이 그러한게 아니다.

원산이 남미주이고 콩과에 속하는 함수초는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지만 분명 감각기능을 갖고있다. 감응초 혹은 미모사라 부르기도 하는 그 식물은 잎을 좀만 건드려도 곧 아래로 늘어지고 소엽도 꼭 닫아버려 마치 부끄러움을 타는것 같아보인다. 그런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거다.

이런 종류의 식물을 감각식물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이를테면 산, 바위, 집같은 부동의 물체마저 감각이 있는게 아니냐면서 거기에다 생명의식을 부여한다.

나역시 감성론자이긴 하지만 무생물의 감각유무(感覺有無)까지 놓고 구태여 옴니암니캐면서 론하고싶지는 않다. 그건 생물학자들이나 연구할 일이니까.

내가 오늘 똑똑히 밝혀두고싶은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 역시 움직이고 말하는 동물ㅡ 사람인것만큼 감각기능을 갖고있는거고 감각기능이 있으니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으니 사유가 있다는 그거다.

사유를 불교에서는 대상을 분별하는 일로 해석하고있다. 즉 성질을 인지하고 판단한다는 말이 되겠다. 사람마다 자기의 감각과 사유가 있고 그것은 또한 분량이 있다. 하다면 나의 감각과 감정, 사유는 도대체 어떠하고 어느정도일가? 그것을 천평우에 올려놓고 달아보긴 어려운일이지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록화를 풀어보면 대략 알수있다.

 

나는 쟈므스(佳木斯)에서 “광복”을 맞았다. 제정때 징병에 뽑혀나갔던 나의 부친님이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훈련을 끝내고 쟈므스철로경호대에 배치되여 근무하다보니 우리는 바로 거기서 살게되였던것이다. 그때 내나이 7살이였다.

한쪽으로 쏘련군이 쳐들어오고 일본군은 도망을 치고 도시는 불바다가 되고... 그야말로 혼란하기 짝이 없는 란장판이였다. 그때 쟈므스철로경호대에는 꼭같은 신세의 동포가 다섯있었다. 그들은 하는수 없이 할빈쪽으로 내빼는 일본군을 따라 차에 올랐다. 그랬다가 그들은 그자들을 그냥 따라가면 끝장이 좋지 못할게 뻔한지라 눈짓으로 서로 약속하고는 차가 도시구역을 채 벗어나기전에 그만 모두 뛰여내렸던것이다.

쏘련군은 차에서 뛰여내린 후 아직 미처 군복도 벗어던지지 못한 나의 부친을 체포했다. 그리고는 총살해버리려고 송화강변으로 끌고갔다. 그런데 말을 시켜보니 조선사람인지라 죽이지 않고 나주었다. 부친은 이렇게 목숨을   진것이다.

 

일본이 망하고 만주국이 붕괴되니 토비가 끓기 시작해서 시국은 더구나 어수선산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토비들은 조선사람은 “작은일본놈”이라면서 북만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로라령을 넘기지 않고 모조리죽여버리리라 했다. 그래서 인심은 더구나 황황 불안해났던 것이다.

이같은 형편에서 그해의 9월을 잡자 내 이모부의 형님이자 항일간부였던 김동철(金東哲)이 역시 자기와 같이 항일을 했던 다른 한 사람 숙친한 김해정(金海靜)과 함께 동포들을 재난의 와중에서 건져내고 보호할 목적으로 손잡고 쟈므스와 벌리, 화남, 의란, 보청 등지에서 600여명의 끌끌한 조선청년들을 모집 동원하여 동북인민자치군 합강군구 1퇀 2영을 창건한 후 토비숙청에 나섰는데 전사들은 싸움마다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쳐 소문이 멀리났거니와 군중의 애대를 몹시 받았다. 항간에서는 이 부대를 습관상 “조선독립영”혹은 “동철부대”라 했다.

 

당시 중공중앙에서 파견되여 온 장문천(張問天)동지가 녕안에 있으면서 합강, 목단강 두 성의 토비숙청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광복”나던 그해의 8월부터 12월까지는 북만토비숙청의 첫단계로서 전략은 자체의 실력을 확충하면서 토비의 반란을 공제하는 것이고, 둘째단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7월까지 력량을 집중하고 련합하여 토비를 강력히 소멸해버리는것이였다.

합강군구는 방강사령원(方强司令員)의 지휘하에 의란(依蘭)에서 정편(正編)과 훈련을 다그쳐 끝내고 1월 12일부터 토비숙청에 나섰다.

나의 부친은 일본군에서 정기적인 훈련을 받았고 사격술이 좋았기에  교련(敎鍊)이 되어 자기가 소속해있는 독립영의 훈련을 맡아서 지도했고 그것이 끝나자 정찰반장이 되어 부대와 함께 토비숙청에 나섰다. 그때 공산당은 립장이 돌아선 그의 과거를 더 캐지 않고 믿어주면서 이같이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었던것이다.

 

아군은 토비숙청을 벌린 두 번째 단계내에 “중앙군(中央軍)”이요 “선견군(先遣軍)”이요 “정진군(挺進軍)”이요 하는 딱지를 붙인 토비 근 2만여명을 섬멸해버림으로써 한시기 북만을 독천장으로 삼고 살판치던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거니와 계획대로 주력을 기본상 숙청했다. 악명높던 41개의 크고 작은 도당들은 모두 붕괴되였고 그자들의 “4개큰깃발”이라 자랑하던 사문동, 리화당, 송영구, 장우신은 목숨을 살려보려고 잔당을 끌고 산속에 깊이 숨어버렸다.

이해의 8월부터 년말까지 세 번째단계였는데  아군은 구역을 나누고 떼여맡는 방법으로 숨어버린 잔여를 계속 추격, 사출, 소탕하는것이였다.

“동철부대”는 상급지시에 쫓아 화남현에 주둔하면서 금광과 화력발전창을 보위하였다.

11월 16일, 나의 부친은 참모장 김해정의 인솔하에 다른 한 형제반과 함께 적정을 저찰하러 자기 반을 거느리고 영평강(永平崗)에 갔다. 영평강은 완달산중에 있는 자그마한 금광촌이였다. 엄한이 스며드는 그날밤 전사들은 마을과 2리가량 떨어진, 지주가 버리고 달아난 빈집에 들었다. 헌데 리화당(李華堂)비도가 그 마을 고지주의 밀고를 받고는 이틑날 새벽에 잔존기병 100여명을 끌고 와 달려들었다.

이쪽은 포위에 들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허지만 과불적중(寡不敵衆)이요 적은 워낙 수자가 몇배나 많으니 력량이 근본 대비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사결전을 벌린 전사들은 영용히 반격하면서 3시간남짓이 견지했다. 적은 나중에 집에다 불을 질렀다. 이쪽은 사망자가 많은데다 탄알마저 떨어졌다. 하여 17명은 모두 불타는 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원쑤들은 그야말로 단말마적인 발악으로 최후의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후 림구쪽으로 달아난 리화당(李華堂)은 한달도 못되여 12월 12일에 산속에서 아군에게 체포되여 나오다가 말을 놀래여 마차를 뒤번짐으로써 밑에 깔려 자살했고 사문동(謝文東)은 그보다 먼저 붇잡혀 3일에 벌리(渤利)에서 처형되였으며 장우신(張雨新)은 15일날 조령에서 총살당했고 손영구(孫永久)는 명이 좀 더 길어 이듬해의 4월 1일에 벌리에서 처단되였다.

이상의 네 토비두목을 보면 사문동과 리화당은 워낙 항일을 하다가 왜놈앞에 무릎꿇었던 변절한이고 장우신은 한간이며 손영구는 상습비도였다.

 

부친이 희생된 후 우리는 영평강과 장대를 몇 개 사이한 리수거우(돌배나무골)로 갔다. 거기에 부친이 소속했던 한 부대가 주둔하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군인들의 옷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옹근 3년간 그들과 함께 지냈다. 말하자면 부대가 나를 아들같이 자래운것이다.

나는 군인들한테서 글을 배우고 노래를 배웠는데 그들의 전투얘기를 더 듣기 좋아했다.

그때 부대에는 군마가 여러필있었다.

그게 아마 1948년도 봄이라 생각된다. 어느날 앞골이 푸르러지자 사양원아저씨가 털빛이 붉은 절따말 한필을 나한테 주면서 끌고나가 방목하라고 했다.

나는 좋와하면서 말을 끌고 앞골로 갔다. 그리고는 진종일 말잔등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켠이 되어 돌아오니 엉덩이껍질이 다 벗겨져 아파죽을지경이였다.

“야 이놈아, 그 말은 앓아서 등때기가 칼등된건데 네가 그걸 타고 진종일 놀았으니 그놈의 엉치가 무사할리 있겠냐, 이놈!”

군인아저씨들은 내 꼴을 보고 혀를 차면서 웃고 놀려주었다.

그래도 나는 이젠 말을 안먹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원아저씨는 이틑날부터 아예 안장까지 지워주면서 나더러 타고다니며 풀을 뜯기라했다.

나에게는 길이가 한발이나 되는 번쩍거리는 칼 한자루있었다. 그것은 군도가 아니고 자루에 사쿠라꽃을 새긴 일본제의 격검용 장검이였는데 나의 부친이 어느 한 전투때 토비손에서 로획한 것이였다. 그런것을 내가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부고를 받고 부친의 시신을 보러 멍쟈강(孟家崗)에 갔을적에 부대에서 유물이니 두고 기념하라면서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1953년도, 타요자금광국에서 연극을 논다며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죄꼬만 녀석이 제키만큼한 칼을 옆꾸리에 척 차고는 말까지 타고 꺼들거리니 보는 사람마다 “허, 그놈!”하고 탄사를 냈다. 나는 그럴때마다 으쓱했고 그러는 멋에 말타기를 더 좋아했다.

했지만 나는 마을을 나와서는 곧 말에서 내리군했다. 병든 말이 불쌍해서였다. 그 절따말은 총상을 세 번이나 입었는데 엉덩이에 박힌 탄알은 그때까지도 빼내지 못했다고한다. 모두들 하는 말이 그 말은 병들기 전에 아주 용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더 측은했고 어느덧 정이 깊어갔다. 나는 말이 병이 났기를 빌었거니와 신선한 풀을 많이 뜯어먹고 어서 풀살이 오르기를 바랐다. 어느날인가는 내가 먹자고 싸간 반합의 샛노란 강냉이밥을 먹이기까지 했다. 헌데도 웬일인지 말은 종시 푸들념을  하지 않고 점점 더 앙상하게 여위워만갔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의 어느날 그 절따말은 끝내 죽고말았다. 저절로 죽은것이 아니라 사람이 총으로 쏴서 죽인 것이다.

누가 그랬는가? 낯에 마마자국이 덮힌 패장아저씨가 그랬던거다. 그 아저씨는 별명이 “꽃쟁반”이였다. 토비들이 곰보를 “꽃쟁반”이라했다. 편지를 “해엽자”, 양말을 “동동자”, 술을 “반강자”라 하는 것 처럼 그것도  토비들사이 사용하는 은어(黑話)였다.

“빌어먹을 꽃쟁반! 어디보자!”

불쌍한 애마가 그렇게 죽어 속이 끓어올랐던 나는 혼자 울며 음질을 쓰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먹둥구미에다 썬 여물을 담아갔고 가서 낮잠자고있는 그의 머리에다 콱 부었다..... 그것은 감미로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나의 소년시절이였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내 인생에 고초를 안겨주면서 속절없이 흘러갔다. 세인이 다 알고있는 10년동란시기를 나는 그야말로 악몽속에서 흘러보내면서 목숨을 간신히 건지였다.

력사에 류례없다는 그번 “혁명”을 발동한 위대한 분이 눈을 감은 이듬해에야 나는 동란에 곡경을 치르고 제 마을에서는 그냥 살기 어려워 치타이허(七臺河)에 이사간 어머님을 보러 갈 수 있었다.

헌데 그번걸음에 내가 꽃쟁반아저씨를 다시만날줄이야! 그때 그분은 이미 70고령이 다 된 늙은이였는데 우리는 꼭마치 생리사별(生離死別)을 당했던 부자간모양으로 부등켜안으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이게 몇해냐, 30년!... 너를 보니 내가 병념이를 다시만나는 것만 같구나!”

나의 부친의 명함이 병념(丙念)이다.

면면한 회포가 가슴을 채웠다. 그날밤 우리는 한이불속에서 자면서 밤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내한테 여물벼락을 맞던 일과 상급의 비준도 없이 자기가 병든 말을 고칠수 없으니 아예 죽여버려 후에 처벌받은 일도 빼놓지 않고 회억했다. 그 일을 어찌 잊으랴.

아저씨가 말했다.

“듣자니 넌 네 아버지의 력사문제 때문에 더 고생했다더구나.”

“예, 그랬습니다. 계급이색분자라구요. 렬사증까지 빼앗기구...”

“미친 녀석들이지!”

아저씨는 몹시 격분하시였다.

그때 혁명열의가 충천했던 “반란자”들은 렬사증만 빼앗은게 아니라 꼭괭이를 들고가 벌리렬사릉원에 있는 나의 부친의 묘를 당장 파던지겠노라 왁작 떠따고우더니 웬 일인지 가지 않고 제풀에 물러앉고말았다. 아마 감히 그럴 담량은 없었던모양이다.

“문화혁명”후에 벌리현에서는 시내안에 있던 17명렬사릉을 다른렬사릉과 합치느라 서산에 옮기면서 나의 부친의 묘에다 높이가 한키나되는 비석(碑石)까지 세워놓았다. 그리고 해마다 청명절이 돌아오면 학생들은 잊지 않고 찬배를 가고있다.

 

나는 내가 “반혁명분자”란 커다란 패쪽을 목에다 걸고 이웃마을에 가 투쟁받던 일을 죽어도 잊을수 없다.

아낙네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이놈아, 네 애비 어떻게 죽었니?”

“토비를 숙청하다가 죽었습니다.”

“네 애비 잘 썩어졌다, 잘 썩어졌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손에 쥐고 나온 꼬챙이로 내 입을 쑤셔놓았다.

지독한 악녀였다.

토비를 잡느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렇게 치떨린단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쌍년아!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개보다못한 년!... 숨이 넘어갈 듯 아파난 나는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뱉으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개는 그래도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

3년전 여름. 전국소수민족작가회의가 있어서 북경에 갔던 나는 회의기간 새로사귄 작가친구들과 함께 개공원을 가보고 놀랬다. 처음이다. 거기에는 내가 평생구경못한 수백종의 개가 있었던것이다. 우리 여기 중국종의 발바리로부터 프랑스 알사스가 원산인 세퍼트, 영국이 원산인 바스티브, 불독, 콜리... 하여간 없는것이 없었다.

털빛이 하얀 세인트버너드란 개는 검고 커다란 귀가 아래로 축 쳐졌는데 다른 개보다 트대가 유별나게 굉장히 컷다. 내가 지금 이런 개를 자래워서는 뭣에 써먹겠느냐했더니 집이 신강 우르무치에 있는 위글족 녀류작가 비리커무 싸디크가 거기 패쪽에다 써놓은 설명문을 먼저보고나서 왜 써먹을수 없다구요, 이 개는 생긴것과 같이 힘이 센데다 후각이 특별히 발달하고 인내력이 있어서 훈련만 잘 시키면 구명견(救命犬)으로 훌륭히 쓴다는군요 하고 알려주었다.

개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함에 제 생명을 바칠줄을 아니 어찌 미물이라하랴!

우리 마을에는 동란이 일어나기 두해전에 쟈므스시내에서 이사를 온 집이 하나 있었는데 잔밥이 많은데다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오자부터 쌀과 남새를 대주었다. 나는 그네들을 가엽이 여기고 무척 동정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가까운 사이로 되었다.

그런데 지내보니 그 호주가 워낙 유별나게 손꿉놀리기 싫어하는 건달이였다. 바탕이 그런 사람이 “문화혁명”이 일어나니 어찌하여 마을에서 “반란파”, “지도급인물”에 들어 머리를 내젓기 시작했다. 과연 소웃다 꾸레미터질 일이였다!

그는 나에게 나를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며 빼앗기운 원고며 일기책이며 소설책들을 한짐 가득 지우고는 온 공사 6개의 마을을 조리돌림하면서 투쟁했다. 지난날의 정을 봐서라도 어쩌면 그렇게까지야?....제법 말할줄을 알고 시집장가를 갈줄도 아는 사람의 새끼를 만들어낸걸 보면 그가 결코 미물같지는 않았다. 헌데도 어쩐지 나는 개만 보면 오래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를 다시다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사의 깝지를 쓰고 어쩌면 그렇게까지야?....(리성도란 자도 있다. 그역시 외지ㅡ 송화강건너 어느마을에서 이사를 왔으니 초면이였다.)

 

말대갈상의 계집년하나는 이웃에 살면서 아들의 “소설자료수집노트”를 감춰준 나의 어머니를 보황파라 고자질하여 이루형언키 어려운  욕, 곤욕 을 당하게 하고는 그게 너무도 깨고소해서 깔깔거리며 춤까지 추었다. 한쪼각의 인성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추태를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했다. 남의 불행을 자기의 락으로 삼고 거기서 행복을 줏자고 드는 그런 악인에게 무슨 락이 있으며  행복이 있겠는가? 방치돌을 달아매도 늘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통히 현실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는것 같기도하다.

 

나는 학교를 초중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문학을 시작한 나는 마을의 초학자들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해서 주일날이 돌아오면 꾸준히 리론을 학습했고(<<문학개론초고>>) 겨울이면 연출대를 무어 연극을 놀았다.(<<혈해지창>>, <<장백의 아들>>, <<불은신호등>> 등) 그러다가 내 생각에 기초가 일정하게 닦아졌다고 여겨지자 1965년도에 내 평생숙원인 토비숙청을 제재로 한 첫장편을 집필하기 시작했던것이다. 헌데 그것이 남을 그토록 격분시키고 지어는 반당, 반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죄악”으로 되어 투쟁대에 오를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무지의 락원에서 나는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모란 수모는 다 받아보았다.

나도 감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사유가 있는 사람이다.

“야 이놈아, 거꾸로 들고 쪽 훑어봐야 똥밖에 나올게 없는 주제에 네가 소설을 써? 야, 야, 메스껍다!”

마을에서 “참모”노릇을 하는 유식하다는 사람이 이러면서 나를 투쟁했다. 사람의 배속에서 똥이 나오지 않고 그래 꿀이 나오겠는가? 인간에 대한 학대가운데서 가장 나쁜것이 남의 인격을 헐뜯는 것이다. 속담에 “관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했다. 원쑤진 일도 없건만 산사람을 세워놓고 어쩌면 그렇게까지 막말을 한단말인가?... 능구렁이같은 그 령감쟁이는 아직 살수있는 나이건만 내 가슴에 박아놓은 못을 빼지도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물론 죽음이 모든걸 속죄는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란다. 잊다니? 당신이면 그래 잊을수있단말인가? 부처님이나 그걸 잊겠는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부처님으로 태여나지 못했다. 지난날 나를 못살게 군 사람을 다소 용서할수는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한 마음의 상처니 잊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본능을 떠난다면 그건 다 가짜가 되고만다.

그렇지 않은가? 뒤늦게라도 내한테 잘못을 사죄하는 사람이면 그래도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있어서 고마운거고...

더 쓸라치면 장편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둔다.

 

                                         1996년  <<은하수>>  

  

보충글:

광복직후 정치토비들은 북만 각 현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열의가 높아 혁명대오에 용약참가하니  아니꼽게보고  잔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5월 14일 밤중에 왕소정(王小丁)비도 200여명은 목단강시 북쪽에 있는 팔달구촌(八達溝村)에 달려들어 그 마을의 촌장 장정국(張正國)을 비롯한 농회위원 김남수(金南洙) 등 4명을 살해하고 군중 10명에게 중상을 입히면서 현금 7백만원과 옷 1천여견지를 략탈했거니와 촌자위대의 무장을 전부 거두어갔고 달아났다. 

 1946년 5월 26일, 곽흥전(郭興典)토비 700여명이 東安市(지금의 密山市)에 달려들어 하루새에 무고한 조선족주민수백명과 한족간부를 학살했다. 내가 조사해봤는데 이웃의 마음좋은 한족이 마른 우물과 천정에 숨겨주고 제 자식인양 옷을 갈아입히고는  낯에 검댕이를 발라 위장해서 겨우살려낸 그 몇몇  어린아이와 어른을 내놓고는 몸을 빼지 못한 동포 300여명이나 생명을 잃은것이다. 곽흥전(곽털보)비도는 그들을 학교에다 몰아넣고는 기관총을 갈겨 무더기로 죽이였는데 붉은피가 도랑물이 되어 밖으로  러나왔다고 한다.  이를 <<동안사변>> 혹은 <<동안참안>>이라고도 한다.

그것뿐아니다. 1946년 6월 16일밤에  곽(郭), 랑(郞) 두 비도무리는 결탁하여 팔면통(八面通)에 달려들었는데 그곳 보안대(保安隊)를 격파하고는 또 다시 동안에서의 모양대로 무고한 조선족을 여럿이나 살해한 것이다.

이같이 참사가 련이어 발생하자  황황불안해난 북만의 우리 동포들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땅과 여지껏 살아온 집을 버리고 쟈므스, 무단쟝, 하얼빈, 치치하얼 등 도시로, 아니면 연변으로 고난의  피난을 시작했던 것이다. 

   
보충글:  김동철, 김해정과 나의 부모님들은 숙친한 사이였다. 그 두분은 다 동립운동가들로서 항일때 동북항일련군 제8군 군장 사문동을 알고 마희산도 알게되었던 것이다. 김해정은 독립운동을 해온 나의 할아버지와는 결의형제를 맺은분으로서 의형제 다섯중 할아버지가 첫째, 그는 망내였다. 나의 이름은 그가 松竹이라 지어준 것이다. 

나는 사문동을 본것이 모두 세 번. 두 번은 무리를 끌고 우리 마을 복가툰(福家屯)에 들어왔을 때고 마지막은 붙잡아 벌리에서 처단 할 때였다. 마희산은 그가 죽어서야 보았다. 그의 머리를 떼여  손영구, 정운봉, 손팡유, 곽흥전, 장락산(독수리)의 머리와 함께 벌리시장에 달아놓았던 것이다. 사문동의 머리는 기차에 달고 다녔다. 한때 살벌한 재난을 몰로고와서 동북인민을 공포속에서 떨게했던 천죄만악의 토비가 이제는 다 숙청되였으니 안심을 하라고 알리는 이쪽ㅡ 공산당의 공시였던 것이였다.  

  

  (관련글)

  合江軍區一團二營 : 1945年 9月, 在共産黨的領導下, 由金東哲, 金海靜等人動員佳木斯市和渤利, 樺南, 依蘭, 寶淸等縣600名朝鮮族靑年參軍, 創建了東北人民自治軍, 合江軍區一團二營. 營長柳坤(從延安來的漢族), 敎導員金東哲, 參謀長金海靜. 人們稱這支隊伍爲 “朝鮮獨立營” 或 “東哲部隊”. 他們在消滅謝文東, 李華堂的剿匪鬪爭中, 不怕犧牲, 英勇戰鬪, 屢建戰功, 多次受到表揚.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87頁)

  

  永平崗戰鬪 : 1946年秋, 合江軍區一團二營進駐樺南縣, 保衛金鑛和火力發電廠. 11月16日, 營參謀長金海靜率2个班的戰士去永平崗偵察敵情. 傍晩, 寒風凜冽, 戰士們住進離屯2里外的逃亡地主的空房子里. 爲警戒敵人, 一夜沒合眼. 17日拂曉, 匪首李華堂得知我方是一支小部隊, 便派100多名騎兵迂廻包圍(延邊軍分區安玉均回憶彔). 戰鬪打響后, 我戰士在金海靜的指揮下英勇抵抗, 堅持了3个多小時, 但因敵衆我寡而失利. 房子被燒, 子彈斷絶, 多人犧牲, 最后剩下的7个人也殘遭殺害. 爲悼念17名勇士, 在渤利縣城建立了 “參謀長金海靜以下16位烈士紀念碑”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9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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