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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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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싸인(1)
2011년 09월 30일 19시 28분  조회:1957  추천:0  작성자: 김영해
싸인

김영해


1
한낮에 불쑥 동생 선영의 전화를 받게 된것은4평방여의 땅을 차지하고 앉은 8~9립방메터쯤 되는 작은 공간의 가게에서였다. 그날도 나는 한껏 들숨을 들이쉬기만 하면 주위가 금방 진공상태로 될것 같은 좁아터진 길녘책가게에서 내 직장이랍시고 자리지킴을 하고있었다. A4용지 종이 두장을 세워서 합친만큼한 여닫이 뙤창문으로 어제와 별 다름이 없는 풍경들을 눈바램하면서 나는 내 직장이 참 근사하다는 생각으로 입귀에 느슨히 웃음 한조각을 베여물고있었다. 남편이나 아이의 뒤치닥거리를 끝마치고 늦은 아침에 도보로 출근하여 열쇠를 열고 덧문을 내리고 길을 향해서 세면에 댄 유리창안쪽에 세줄로 늘여놓은 줄에 알록달록한 표지의 책자들을 집게로 대롱대롱 매달아놓으면 내 하루영업준비는 끝이였다. 그것도 매일 하는것은 아니였다. 팔리지 않은 책자들은 한번 매달아놓으면 팔릴 때까지 내리는 법이 없고 가끔 먼지만 툭툭 털어주면 되기에 드문드문 새로 도착한 책자들만 보충해서 매달아놓으면 되였다. 이름이 책가게지 정해진 쟝르도 없고 정기적으로 비축된 장서도 없다. 시장통에서 열리는 길거리난전이나 다를바없이 행인들의 눈길을 확 끌수 있는 표지들로 장식된 이야기류의 월간잡지나 격월간잡지가 대부분이다. 시내길거리에 흔하게 널려있어 남다를것도 없고 규모도 작아 시시껄렁해보이지만 밥을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을만큼 돈을 벌수 있는것을 보면 아직도 거의 매일이다싶이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속에는 할일없이 볼거리없는 잡지나 보며 시간을 떼우는 사람들이 꽤 많은듯싶다.
나는 매일 아침 여덟시 반쯤에 책가게에 들어가앉으면 오후 네시에 문을 닫을때까지는 신진대사처리외에는 별로 나올 일이 없다. 출입문마저 꽁꽁 걷어닫고 뙤창문만 열어놓은채 누가 지나가다가 “이거 주세요.”하고 가리키면 그 잡지를 집게에서 내려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치뤄주면 입을 열 필요조차 없이 손만 움직이면 될 때도 허다하다. 책을 들여오는 값이 어떠하든 팔 때는 책뒤에 활자로 찍혀진 값대로 받으면 그뿐이고 책을 갖고 값을 흥정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책을 들여오는 일도 몇년을 하고나니 물목이 훤해서 전화 몇통이면 금방 끝나는지라 언변이 없는데다가 말을 하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로 딱인 직장이다. 그날도 오늘은 뭐할가 하는 궁리도 없이 뙤창문으로 익숙하다못해 좔좔 외울수 있는 풍경을 내다보고있었다. 길건너 맞은편엔 “금파도노래방”과 “이뚱보짜장면”집이 나란히 이웃하고 있고 그 좌우에 약방이며 슈퍼며가 질서없이 늘어서있다. 노래방은 오전이면 계절과는 상관없이 허벅지를 드러내놓은채 한들거리는 아가씨들의 모습만 어른거리다가도 점심시간을 약간 넘긴 시간부터는 들락날락하는 사람들로 흥성흥성하다. 가격이 시간당 20원인 싸구려노래방이라 많이는 어디서 술 한잔 거친 평범하다못해 조금은 추레해보이는 들쑹날쑹한 중년남자들이 불깃불깃한 얼굴로 한껏 호기를 부리며 들어가는 모습들이다. 가끔은 기생오라버니처럼 얄팍하게 생긴 얼굴에 넥타이까지 받쳐맨 샐러리맨인듯한 모습도 보이지만 한창 바쁠 오후출근시간에 그곳을 찾는것을 보면 진짜 샐러리맨은 아닌듯싶기도 하다. 반면에 짜장면집은 점심때면 급히 점심을 때우는 고등학교학생들과 직장인들로 북적거리다가도 노래방이 흥성거릴 무렵이면 호적한 기분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약방이나 슈퍼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가끔 들락거리면서 무엇이 들어있음직한 비닐봉지들을 들고나오는데 한산해보이지는 않는다. 다들 밥벌이는 착실히 하고있는 모양이다.
그날따라 겨울에 잡아들어 첫눈이랍시고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있었고 오전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맞은켠 가게들도 문이 별로 여닫히지가 않았다. 출근시간은 지났고 점심시간은 아직 이른 어중간한 시간대여서 길에도 차며 행인들이 조금은 뜸했다. 내가 눈송이들이 뙤창문가에 내려앉았다가 금시 녹아버리는 모습을 허허로운 눈길로 바라보고있을 때 익숙하다못해 내 몸의 일부와 같은 한적한 공기를 깨고 핸드폰이 울렸다. 듣그럽게 울리는 피아노음악소리를 들으며 폴더를 열어보니 액정화면에는 전화번호대신“확인할수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중문이 떠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했다. 전화번호가 현시되지 않는 전화라면 국제전화, 국제전화를 나에게 걸어올 사람은 분명히 한국에 체류하고있는 선영이뿐이였던것이다. 이제껏 밤에만 전화하여오던 선영이가 굳이 낮에 전화해야 할 일이라면? 못된 생각들이 삽시에 몰려들었다. 전화를 받기가 저어되였다. 나는 팔딱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한참이나 길게 들숨을 들이쉰후 숨을 가다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언니, 왜 인제야 전화를 받어?”
신경질적인 선영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선영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팡팡 솟구치고있었다. 난 길게 날숨을 토해냈다.
“넌 왜 한낮에 전화하고 난리니? 갑자기 놀랐잖아.”
“그건 그렇고. 언니, 엄마는 어쩌고 있대? 잘 살고있대?”
거두절미하고 선영이는 직통배기로 엄마부터 묻고있었다. 선영이에게서는 언니는 뭐하냐, 조카와 형부는 잘 있냐 하는 기본적인 인사말은 말치레로조차 들을수가 없었다. 굳이 따져보면 전화하는 매너부터 기본이 안되는 동생이였다. 적어도 내 보기에는.
“머? 엄마 머?”
빠르게 뱉어내는 선영의 말이 무엇을 뜻하고있는지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아닌보살을 했다.
“아~ 잘 살고 있겠지.”
“어디 그런 대답이 있어? 잘 사는지 어쩌는지 가까이에 있는 언니가 늘쌍 들여다보고 똑바로 대답을 해줘야지.”
칼칼한 선영이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하지만 난 정확한 답을 말할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 집에 들어간이후로 난 엄마와 몇번 통화를 했을 뿐 엄마가 살고있는 그 집에 가본 일이 없었다. 통화할 때마다 엄마는 잘 있는다고 했고 가볍고 조용한 엄마의 목소리엔 그늘이 실려있지 않아 나는 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정작 엄마가 잘 있을거라는것은 내 생각일뿐이지 내가 확인한것은 아니니 난 선영이에게도 그냥 잘 있을거라는 추측적인 애매모호한 대답을 할수밖에 없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계시겠지. 그 집엔 너처럼 빽빽거리며 간섭할 딸도 없어.”
“언니두 엄마성질 알면서 그렇게 맘놓구 있어? 엄마야 힘들어도 힘든 기색 안내고 사는 사람이잖아. 엄마는 참을성이 넘 많은게 탈이야. 그러니까 언니가 좀 잘 챙겨. 돈 쓸 일 있으면 말하구. 내가 홀몸으로 이 나이에 돈 벌어 머하겠어? 나두 남의 아들들 못지 않게 엄마를 잘 모실수 있어. 몇년만 꾹 참으면 내가 엄마 남은 여생 호강시킬 돈을 따발로 메고 들어갈건데 엄만 그것을 못참고 기어이 그 집에 들어간대? 아무리 적적하셔도 그렇지. 아니, 아무리……”
또 시작이다. 선영이는 엄마 일로 입을 열었다싶으면 “아무리”를 여라문번씩 곱씹으며 엄마가 혼자서 집구석을 지켜야 하는 매번 반복이 되는 똑같은 리유들을 한보따리씩 풀어놓고야 직성이 풀려한다.
“그만해라. 다 끝난 일이야. 엄마도 한번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게 해야잖니? ”
이때쯤이면 난 엄마의 편이 되여 엄마의 립장을 선영이에게 설득시키기보다 선영이의 입을 막아 시끄러운 내 귀를 쉬게 하는게 더 절실하다.
“그래두……후우~……”
선영이는 몇마디를 더 주절거리다가 전화를 놓아버렸다. 가게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나는 다시 뙤창문으로 차들과 행인들이 오가는 길에 한정없이 눈길을 던지고있었다. 밖에는 눈발이 굵어지고있었고 하얀 눈을 들쓴 차들이 굼뜨게 오가는 대신 머리를 수굿한 채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있었다.
그날은 12월 5일, 내 생일날이였었다.

2




“엄마, 이거 받아둬요.”
“아니, 얘는?”
엄마는 내가 호주머니에 찔러주는 돈을 한사코 내 손에 다시 밀어준다.
“내가 주는게 아니구 선영이가 주는거라니까. 얼른 넣어둬요.”
나는 다시 돈을 엄마의 손에 쥐여주었다.
“선영이거면 어떻고 니거면 어떻고. 난 돈 없어두 돼.”
엄마는 마구가내로 내 손을 밀어내신다.
“엄마! 자식들 체면 좀 생각해주면 안돼요?!”
난 급기야 버럭 화를 내고말았다. 그러는 내 눈앞에는 운전기사한테 커다란 해산물박스를 들려 들어서던 녀인의 탱탱한 얼굴이 스쳐지나고있었다. 난 어정쩡해진 엄마의 손에 돈을 되는대로 밀어놓고는 급히 앞서가는 아들애의 뒤를 쫓아갔다. 등뒤에서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머리도 돌리지 않은채 뒤를 향해 팔을 저어보이고는 얼른 아들애의 팔짱을 끼였다.
“춥다. 얼른 가자~”
아직 어린애라지만 키가 훌쩍 나를 넘어서니 제법 의지가 되는 아들녀석이다.
“엄마, 이젠 외할머니집에선 못자는건가요?”
“응? 뭐?”
난데없는 물음에 난 어정쩡해지고말았다.
“아~ 거기 외할머니집이 아니야. 나중에 너도 알게 될거야. 왜선지는.”
“그럴가?…… 그런데 엄마, 외할머니가 왜 날 귀여워하셨는지 알아요?”
“외할머니가 사랑하는 딸의 아들이니까 그랬겠지. 왜? 아니니?”
“외할머니가 그러는데 제가 손자여서 이뻐한댔어요. 손녀가 아닌 손자여서. 난 아직도 외할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는데.”
“그럴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들애에게 그럴리가 없다고 말을 하면서도 난 속으로 엄마는 충분히 그럴수가 있었다고 믿고있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고 엄마는 두 딸을 낳으셨다. 내가 태여났을 때 “다음에 아들 보면 되지.”하면서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던 아버지는 동생 선영이도 딸임을 알았을 때에는 갓난애를 들여다보시지도 않은채 휭하니 문을 차고 나갔다가 새벽녘에야 술에 곤죽이 되여 들어오셨다고 하셨다. 내가 열살 때 엄마는 세번째로 임신을 하였다가 류산이 된후 불임을 선고받았다. 그후부터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고 술주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술이 거나해지면 밖에 나가 동네사람들과 걸고들어 싸움질을 하여 식구들의 가슴을 졸였고 겨우 말려서 집에 데려오면 자리에 틀고 앉아서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당금 잡아먹을듯이 욕을 하다가 술이 깰 무렵에야 잠이 들군 하였다. 이불속에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있는 우리를 걷어차거나 엄마의 머리끄뎅이를 잡아끌거나 솥뚜껑이 부엌으로 날아가기도 하는 날들이면 우리 집은 엄마와 우리 자매의 울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였다. 지금도 아버지가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채 입귀에 허연 거품을 물고 욕질로 밤을 새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가 질린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당할 때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그러안고 “다 못난 에미탓이야”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아들을 낳지 못한 죄아닌 죄로 평생 아버지한테 구박을 받은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것이 얼마나 한에 서렸으면 외손군이 남자애여서 이쁘다고까지 하셨을가싶다. 갑자기 찬 공기가 페속으로 훅 흘러들며 아릿한 느낌이 페부에 전해졌다.
“엄마,나 오늘 지나면 또 한살 더 먹는거지? 신난다! 엄마, 나도 다 컸어요. 나도 이젠 다 큰 남자라구요. 이젠……”
외할머니소리를 하다말고 아들애는 생뚱같은 소리를 주어댔다.
“이젠 뭐?”
“아니, 그냥…… 엄마는 몰라도 돼요. 녀자니까. 이히~”
아들애는 거기서 말을 뚝 그치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시물시물 웃었다. 가로등불빛에 이마빡에 난 여드름 두 알이 얼어서 유난히 빨갛게 보였다.


한살 더 먹는다고 신나서 한참이나 떠들던 아들애도 잠이 든지 오래지만 이따금씩 울려퍼지는 폭죽소리로 방안은 한적하지 않다. 문득문득 하늘로 피여오르는 불꽃으로 갑자기 환해지는 밤하늘때문에 방안마저 갖가지 색채들로 아롱거린다. 년말총화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로 곧장 엄마가 살고있는 집으로 오기로 했던 남편은 오랜만에 고향행차를 한 친구때문에 아직도 귀가전이다. 늦은 귀가가 례사로 되여있는 남편은 결국 한해의 마지막날도 이렇게 마침표를 찍을려나보다. 아까부터 나는 전화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다. 혹시나 폭죽소리때문에 못들을가봐 저어되여 아예 전화기앞에 죽치고 앉았다. 깔고앉은 장단지가 슬슬 저려오는것을 보면 그러고 앉은지도 한참은 된것 같은데 오늘 밤엔 전화벨소리가 울릴것 같지 않다. 일부러 전화를 받고 자려고 늦게까지 텔레비죤을 보면서 기다리고있었는데도 열한시가 다되도록 종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란 참 요상하다. 한밤중에 전화가 올 때에는 귀찮아서 이불속에서 한참을 뭉기적거리다가 겨우 전화를 받았는데 정작 전화가 오지 않으니 왜 안오는지 궁금하고 또 기다려진다. 한달째 전화가 없던 선영이지만 날이 날인만큼 섣달 그믐날인 오늘만큼은 꼭 전화가 올것 같아서 선영이가 “아무리”를 곱씹기전에 내가 한참을 떠들 말을 아까부터 속으로 되짚어보고있는중이였다. “아무리 어째도 어떻게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니?”, “아무리 어째도 어떻게 엄마한테 이래라 저래라 분부를 하니?”……하고.
녀인은 해산물박스를 엄마한테 떠밀어맡기고는 “저흰 래일 아침에 늦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손질 잘해둬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줌마!”하며 그 걸음으로 돌따서버렸다. 녀인이 문을 닫고 나가기전 난 이미 벌레를 씹은 얼굴표정을 만들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녀인은 문소리와 함께 올때처럼 씽하니 사라져버렸고 엄마는 해산물박스를 옮기느라고 부산을 떨고있었다.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러요?”
“응.그런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내 눈앞으로 하필이면 한국드라마에서 나이가 지긋한 파출부아줌마들이 머리를 수굿한채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주인집녀자들한테 혼나는 모습들이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나고있었다. 그 시각부터 내 머리속에 엄마를 보내지 말걸 그랬다고 퉁퉁거리던 선영이가 어쩜 옳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슬슬 꼬리를 쳐들기 시작했던것이다. 저녁밥을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었다. 돌아올적에 선영이가 보낸거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기어코 엄마손에 돈을 쥐여준것도 내가 효성이 지극하거나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였었다. 엄마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당당해지고싶었던 내 마음의 발로라고 함이 더 적절했다. 언제부터인가 난 무엇인가에 위축되고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 위축감이 엄마로부터 오는거라고 단정짓고말았다. 오늘은 나도 엄마문제로 한참을 궁시렁거리려고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전화벨소리는 울릴줄을 모른다. 선영이는 뭘 하고있을가? 내 보기에도 안스럽고 답답한 나와는 달리 다혈질인 선영이는 활달하고 텁텁했다. 머리를 동여매고 착실히 책상에 마주앉아 공부하는 성격도 아니였고 누가 끄는대로 졸졸 묻어가는 타일도 아니였다. 선영이의 공부실력이면 무난히 대학에 갈수 있었는데도 고중 2학년까지 다니고는 중퇴를 하고 친구랑 남방으로 진출하고말았다. 호텔이며 려행사며 회사들을 전전긍긍하면서 만나는 남자마다 학력이 어떻소 인물이 어떻소 경제력이 어떻소 하고 딱지를 놓더니 혼기를 훌쩍 넘기고 싱글로 산다고 노래처럼 부르고다녔다. 그러는 선영이를 나는 나름대로 나처럼 엄마와 아버지의 결혼생활에 질려버린것이라고 짐작해버렸고 선영이는 세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살수 있는 용기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는거라고 속으로 은근히 그 용기를 부러워했다. 선영이는 적금도 별로 하는 양이 없이 문득문득 엄마한테로 몇천원씩 송금해오기도 하고 엄마에게 이쁜 한복을 보내오기도 하면서 이쁜 짓을 다하더니만 1년전의 어느날엔가는 갑자기 나 한국가우 하는 소리와 함께 한국행을 하고말았다. 한국에 가서도 성격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이 떠돌면서도 엄마안부전화는 잊지 않고 하는 선영이였다. 엄마가 그 집으로 들어간후부터는 엄마대신 나한테로 전화를 걸어와 닥달하는 선영이때문에 나는 조금씩 지쳐가는 중인데도 오늘만은 선영의 전화가 기다려지는것은 선영에 대한 걱정보다 내 속에 뭉친 응어리를 선영이말고는 마땅하게 터뜨릴데가 없기때문이다.


전화오기는 다 글러먹은 시간대에 전화기를 지키고 앉았지만 선영이를 떠올리다 말고 정작 생각은 자꾸 지금쯤 래일 아침에 들어설 그집 자식들을 위해 해산물손질이 아니면 물만두를 빚고있을지도 모를 엄마쪽으로 굴러갔다. 시간이 묵은 해의 섣달 그믐날 밤에서 새해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시각까지도, 새해가 시작된지 한참이나 되였는 시간까지도 전화기는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 앞에 죽치고 앉은 내 머리는 어느새 하나의 선택제를 갖고 수없이 체크하고 지우고 체크하고 지우고 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엄마는 행복하다? 엄마는 불행하다?......


3

절그럭거리는 열쇠소리에 잇달아 울리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잠을 깨고말았다. 손을 뻗쳐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끄당겨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새벽네시. 간밤에 양 천마리를 셀 즈음 겨우 잠이 들었던 신경말초들이 한꺼번에 우야우야 소리를 치며 깨여나 어디선가부터 뭉쳐져 목덜미로부터 기여올라 우로 뻗치더니 태양혈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못들은척한채 나는 억지로 숨을 고르고 식지와 중지로 태양혈을 문지르며 양 한마리부터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 5백마리를 세고나서도 정신은 말짱했다. 그대로 누워있을수가 없어서 물이라도 마시려고 거실에 나오니 남편은 쏘파에서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쏘파 가까이에 다가가서 기다란 몸을 아무렇게나 구기고 드러누워 푸하푸하 코를 고는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는 내 머리속으로 “각서”라는 낱말 하나가 튕겨오르고있었다.
아침밥상이 다 차려져서야 깨여난 남편은 족부안마를 받다가 깜박 잠이 들었댔다고 변명삼아 중얼거리며 헛바람소리가 나는 웃음을 저혼자 허허 웃었고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낚시하러 갈 준비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러는 남편의 앞으로 나는 종이장과 볼펜을 내밀었다.
“여기에 각서를 쓰고 싸인해줘요. 오늘부터 퇴근하면 꼭꼭 제시간에 집으로 들어온다고요.”
“뭐?!”
남편은 낚시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희귀동물을 보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도 잠간, 남편의 입귀로 픽~하고 랭소가 흘렀다.
“각서는 무슨? 할일이 그렇게 없어?”
남편은 궁시렁거리며 낚시대를 마저 가방에 챙겨넣었다.
“써줘요. 제시간에 집에 들어온다, 외박 안한다…이런걸로.”
나는 남편의 코밑으로 주춤주춤 종이장을 들이밀었다.
“각서를 쓰고 거기다가 싸인까지? 아니, 당신은 싸인 함부로 하다간 큰 코 다치는줄도 몰라? 안써! 내가 뭐 바보야? 혼자서 이것도 안한다, 저것도 안한다 써놓구 맨날 당신이 그 각선지 뭔지 하는걸 쳐들구 다니며 잴잴거리라구?”
남편은 가소롭다는듯이 코까지 힝힝거렸다.
“그럼 잔소리 안듣구 각서대로 하면 되잖아요. 각서…써요. 네?”
내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왔다. 똑마치 외박을 한 남편에게서 각서를 받아내는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구걸하는 그런 꼴이였다.
“남자가 그럴수도 있는거지. 바람 안피우는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고 살아야지.”
남편은 손놀림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낚시코며 미끼며를 차곡차곡 가방에 챙겨넣고있었다.
“제가 술 마시는거 싫어하는줄 알면서……술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리는데……”
나는 엊저녁 외박을 한것이 내가 되기라도 하듯이 떠듬거리며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이런? 장인어른도 술군이였다면서 무슨 딸이 이래?”
알수 없는 일이라는듯 남편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남편은 쪼르륵하고 가방의 쪼로로기를 잠그고는 손을 탁탁 털어댔다. 그리고는 종이장과 펜을 쥔채 머밋거리며 서있는 날 한참이나 낯선 사람 보듯이 들여다보았다.
“오늘 왜 이래? 그만 하자~ 나 낚시가야 되거든. 마누라가 아침부터 댕댕거리면 재수 꽝인거 알지?”
남편은 낚시가방을 들고 휭하니 나가버렸고 그 서슬에 내 손에 쥐여졌던 종이장과 펜은 바닥에 떨어지고말았다. 나는 잠간 멍청한 꼴이 되고말았다.
한참후 자기 방안에서 동정을 엿듣고있었을 아들애가 스적스적 거실로 걸어나왔다.
“엄마, 이 각서 제가 써줄가요? 꼬박꼬박 공부 잘하겠다고.”
아들애는 방바닥에 떨어진 종이장을 주어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다.”
나는 아들애의 손에서 종이장을 받아 휙 책상우에 던져버렸다. 던지는 힘이 너무 컸는지 종이장은 얼마 못날아가고 되려 뒤걸음질치며 책상아래에 내려앉았다. 아들애는 얼굴에 의문부호를 가득 그린채 종이장을 주어 책상우에 올려놓고는 다시 자기 방안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머리가 욱신거려왔다. 화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화를 밖으로 쏟는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지하고 몸으로 삭여내는데 습관되여있었다. 화가 나서 우당탕거리기앞서 머리가 지끈거리며 화가 나고있다고 신호를 보내왔고 그러면 난 무슨 비법이랄것도 없이 심호흡을 길게 하면서 참자 참자 하며 꾹꾹 내리누르기만 했고 그러노라면 화는 정말로 서서히 서서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군 하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앞에 마주앉았다. 컴퓨터를 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습관때문이지 딱히 컴퓨터를 켜고 할 일이 있는것은 아니였다.나는 잘 운행되고있는 자동시스템처럼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메신저를 로그인하고 사이트를 여는 일들을 순서있게 진행시켜나갔다. 마주앉은 사람모양의 파란 아이콘들이 뱅글뱅글 돌다가 로그인이 완료된 메신저련계란에는 회색아이콘들만 부옇게 떠있다. 나는 메신저를 오프라인상태로 만들어놓고 창을 닫아버렸다. 이미 열어진 공백사이트에 싸이월드사이트주소를 쳐넣고 Enter 을 클릭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몇달째 휴면상태에 빠진 내 싸이홈피는 한적했다. 방명록엔 아무도 새 글을 남기지 않았고 올려놓은지 몇달이나 되는 게시물에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한적하다 못해 썰렁한 홈피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싸이일촌에서 아들애의 홈피를 클릭하였다. 아들애의 홈피의 메인은 10대에 어울리게 화려하고 환상적이였다. 파란색 바탕메인에 별들이 눈부시게 깜박이고있었고 마우스의 움직임을 따라 나비가 팔락이며 따라다녔고 랩을 곁든 배경음악은 적당히 성수나고 격렬했다. 빨간색 표식들을 달고 반짝이는 카테고리들중에서 “쏙닥쑥덕”이 눈에 띄였다. 처음 보는것이였다. 마우스를 갖다대니 “일기장”이라는 중문꼬리표식이 떴다. 보면 안되는데 하는 망설임하나 없이 얼른 클릭했다.

--4월 22일 수요일 날씨 개임
오늘은 기분이 짱이다. 어제 **이한테 사귀자고 쪽지를 보냈는데 오늘 답장이 왔다. 하트가 빵빵 달렸다. 자기도 좋댄다. ㅎㅎㅎㅎ 입이 귀에 걸린다. 여자친구가 생겼다. 푸하하!!! 그리고 비밀 하나 더! 나 겨드랑이에 털 났다? ㅋㅋㅋ 간지러워~ 이히히.

여자친구라?
가슴이 덜컹했다. 아들애한테 녀자친구가 생겨버렸다.이제 막 열네살을 먹은 녀석, 아직 열세돐생일도 안 지난 녀석한테 녀자친구라니?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였다. 아들애는 언제까지고 내 뒤만 졸랑졸랑 묻어다닐줄 알았지 나 아닌 다른 사람때문에 즐거워서 킬킬거릴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잔병치레가 많은 시부모님들때문에 내 손끝에서만 자라온 아들애였고 남편의 잦은 술놀이때문에 대부분시간을 나하고만 보내는 아들애였기에 나한테서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보고싶었다고 슬펐다고 징징거리던 아들애였다. 생김새가 남편을 꼭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애는 “누구 닮았니?”그러면 엄마를 닮았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었고 좋은 이야기, 궂은 이야기도 나한테만 숨김없이 재잘거렸었다. 그런 아들애였기에 아들애앞에서만은 나도 밝게 웃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주고받는 다정다감하고 마음느긋한 엄마가 되여있었다. 그런 날 남편은 “그 무뚝뚝한 얼굴도 애만 보면 딴 사람이 되네.”하고 빈정거렸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아들애만은 언제까지고 내 편으로 내 곁에 있어줄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였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애, 아들애에게 생겨버린 여자친구, 그러고보니 아들애도 슬슬 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있는것이였다. 저러다가 언젠가는 대학간다고 떠날거고 또 어느날은 문득 결혼한다고 다른 여자를 곁에 세워두고 헤벌쭉 좋아할것이였다.
아, 아~ 난 이제 아들애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있어야 하는것이 아닐가?
마음속에 웅크리고앉았던 커다란 무엇이 형체없이 빠져나가버린듯 마음이 허전했다. 나는 한참이나 아들애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다가 말고 댓글을 클릭했다……



나는 사이트를 닫고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외출복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아들애는 무엇을 하는지 방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아마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히죽히죽 소리죽여 웃고있을지도 모른다. 웬지 “엄마 , 잘 갔다와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새삼스레 섭섭했다. 아무래도 난 손바닥한 구멍책가게가 제일 맘이 편한 곳일듯 싶다. 난 걸음을 빨렸다. 금방 아빠트단지를 나섰는데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잘 갔다와요~”
아들애가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젓고 있었다.
“그래, 놀지 말구 공부하고있어~”
나는 아들애를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갑자기 울컥해나며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얼른 돌아섰다. 저기 길가에 관상용복숭아나무가 막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왔다. 5월로 치닫는 4월은 아무래도 마음도 몸도 한껏 부풀어오르는 계절인가보다. 무겁게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을 추스리며 나는 걸음을 옮기려다 머리를 돌려봤다. 아들애는 이미 베란다뒤로 사라져버렸었다. 아들애가 비여있는 내 눈은 참 허전할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머리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4
“어떻게 됐어? 장모님은?”
남편은 문을 열어주면서 목을 길게 빼들고 내 뒤를 힐끗거렸다.
“안와요.”
“왜 안오는데? 아~참, 내 그럴줄 알았다니까. 그 집에서 안보낸대? 장모님이 안오신대?......”
내가 신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편은 문어구에서부터 거실을 거쳐 침실로, 침실에서 다시 거실로 내 뒤를 졸랑졸랑 묻어다니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쉴새없이 떠들고있었다. 활기찬 목소리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났다는듯이 한껏 들떠있었고 걱정 한올 실려있지 않았다.
“몰라요. 아무튼 안와요.”
나는 남편을 아니꼽게 찔 흘기였다.
“가만 ,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밑지는건데……”
무슨 대단한 궁리나 하듯이 남편은 제법 이마살까지 찌프리며 내 뒤를 묻어다니던 모양새 그대로 뒤짐을 지고 거실을 왔다갔다 한다. 나는 그 모양이 눈에 거슬려 리모컨을 꾹 눌러 텔레비죤을 켰다. 마침 KBS1채널에서 TV동화 <<행복한 세상>>프로를 방송하고있었다. 그림동화로 보여지는 사연은 <<다시 찾아드린 엄마의 이름>>이였다. 자기의 원래의 이름 대신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불리워오며 이름과 함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잊고살았던 엄마에게 무슨 강좌에 다녀오신 아빠가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며 사랑을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기억속에 아득하게 잊혀졌던 엄마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조용히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리순자~”
발음마저 어색하고 생소했다. 아마 금방 말을 잴잴 번질 때 어른들이 심심풀이로 “엄마이름이 뭐지?”하면 “리순자”하고 또랑또랑하게 주어댔다는 엄마의 기억을 빌어 자기가 기억하기라도 하듯이 알고있는 일까지 빼면 내가 엄마의 이름을 입밖으로 번진 일은 열손가락도 다 차지 않을것 같았다.굳이 엄마의 이름을 이야기하거나 적어야 하는 일이 없었던 탓일것만도 아니지만 난 딱히 다른 리유를 찾아낼수가 없었다. 몇십년동안 자기의 이름을 잊고 살아온 엄마가 로년에 또 아무렇지도 않게 “아줌마”라는 이름 하나 더 자처하시고 사셨던것을 보면 엄마는 애초부터 자기를 잊기로 하셨던것이 아닐가?



늦은 아침에 설겆이를 하고있는데 전화를 걸어온 친구가 왜 아직도 엄마를 안모셔오냐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했고 난 어리둥절해서 “뭐가? 뭘?”하며 얼떠름한 표정이 되고말았다. 그 표정이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놀란 표정으로, 암담한 표정으로 급격하게 변해가는데는 불과 1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살고있는 집의 로인네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워있은지 한달이나 된다는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내 머리속으로 “아줌마”라는 단어가 튀여올라 로그인을 하는 메신저아이콘처럼 수없이 뱅글거리며 현기증이 날려고 하였다. 어딜 가냐는 남편의 물음에 엄마를 데릴러 간다는 소리만 던진채 천방지축으로 문을 나서 무작정 뛰였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달린지 한참이나 되여서야 놀라고 다급했던 가슴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머리속에 한꺼번에 튕겨올라 뒤죽박죽이 되였던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가 되며 엄마한테 가려고 할 때마다 엄마가 로인활동이 있다느니, 가족소풍이 있다느니 하면서 핑게거리를 만들어 못오게 하던 리유를 알것 같았다. 20분쯤 지나서 엄마가 살고있는 집에 도착할 무렵 내 머리속은 이미 엄마를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확고하게 굳어져있었다.
문을 연 엄마의 얼굴은 놀라움이나 반가움, 불안함이나 그 어떤 기색도 없이 비여있는듯이 평온했다. 평온하다못해 무표정한듯한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엄마는 오래전부터 표정을 잃고 살아온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몇년전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도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 두어줄을 단채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때 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슬퍼보이지 않을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았었다. 멈칫거리며 엄마 뒤를 따라서 들어선 로인네의 방안에선 환자특유의 냄새와 늙어가는 냄새, 약냄새와 공기청정제냄새가 섞여서 마음껏 들숨을 쉬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야릇한 냄새가 떠돌고있었다. 로인은 어제밤잠을 안깬건지 아니면 이른 낮잠을 자는것인지 아무튼 자고있었다. 생각외로 로인의 얼굴은 눈이 움푹 들어갔거나 까칠하게 여윈것이 아니라 약간 부은듯하기만 할뿐 몇달전에 본 모습과 별 다름없었다. 평화롭게 꿈나락에 빠져있는 로인을 보면서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어 난 재빨리 방안에서 나와버렸다.
“괜찮아보이지? 처음엔 당금 돌아가실것 같든데 이젠 말도 하고 손발도 움직이고……”
“엄마!”
뒤따라나와서 중얼거리는 엄마를 향해 난 낮게 소리쳤다. 어정쩡해서 나를 쳐다보는 엄마를 외면하고 나는 또박또박 뱉어냈다.
“엄마, 집에 갑시다!”
“뭐라니? 집에 왜?”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의 얼굴에 잠간 의문부호가 그려지고있었다.
“엄마, 이제 이 집에서 그만 살고 집에 가자구요. 못알아들으셨어요?”
“……”
엄마는 눈길을 내리깔고 잠간 무엇인가 생각하는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럴줄 알고 로인네가 아프다는 이야길 안한거다…… 난 못간다.”
“엄마, 가요. 로인은 이 집 자식들이 돌보면 되죠. 엄마가 이 집에 앓는 로인네 병구환이나 할려구 온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가요.”
난 엄마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의 눈속에 비치는 나는 그렇게도 조그마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상할수도 있고 아플수도 있는거다. 그럴 때마다 다 버리고 가면 뭐가 되니? 내가 그걸 감안하지 못하고 재혼한것은 아니다.”
엄마는 재혼이라고 그랬다. 난 한번도 엄마가 재혼한것이라고 생각한적이 없었고 엄마주위의 어느 사람도 엄마가 재혼한것이라고 말한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재혼이라고 그랬다.
“재혼? 엄마가 년세가 얼마라고 재혼이라고 그래요? 60세도 넘으셨으면서. 재혼은 결혼등록도 하고 조촐한 결혼식이라도 치르면서 하는거예요. 엄마같은 년세에 로인들끼리 합쳐서 사는것은 재혼이라 안그래요. 그냥 같이 산다—이렇게 말할 뿐이얘요.”
단숨에 긴 말을 뱉어내고나서 나는 속이 후련했다. 어쩜 그동안 꽁꽁 묻어두었던 말이 삭혀져서 몸속에 흩어지려는 찰나 적당한 시기를 만나서 뛰쳐나온 탓일것이다. 엄마가 로인이 살고있는 집으로 들어온 이후로 난 내내 찜찜하고 불안한 기분이였다.
“세상 별랗게 돌아간다. 로인들은 뭐 소꿉장난이라도 하는줄 아니? 재혼이 아니구 그냥 산다? 그럼 그냥 산다 치자. 그래두 우린 부부다. 부부는 한 사람이 아프다구 다른 한사람은 무작정 버리고 떠나는게 도리가 아니다. 그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엄마는 고집스러웠다. 당신이 술상을 거두라는 말도 하기전에 당신만 남은 술상을 거두었다는 잘못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이불을 들쓰고 있는 엄마에게 난 “엄만 왜 이렇게 살아요? 왜 리혼도 안해요?”라고 바락바락 악을 썼었다. 그때 엄마가 그랬다. 한번 정해진 부부는 쉽게 깨질수 있는게 아니라고. 열여섯살밖에 안되는 내가 그 말을 리해했을리 없지만 그후로부터 난 입을 닫아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싫었고 엄마가 리해되지 않았고 남자가 싫었고 말하기도 싫었다. 엄마처럼 살거면 결혼은 알할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결혼을 한것은 남편이 마음에 들어서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살아야 하는게 법도거니 하는 인식때문이였다. 언제부터인가도 모르게 내 몸속에는 내가 그렇게도 봐줄수 없어하는 인내라는것이 서서히 배여가기 시작했던것이다. 싫다는 소리 안하는 엄마처럼 나도 얼굴의 표정을 서서히 지우고 살아가고있었다. 난 분명 엄마를 닮고있었고 그래서 난 내가 싫었고 그래서 난 구멍책가게에 숨어있는것이 편했다. 숨통 트일 곳이 없는 나처럼 엄마도 답답할거라는 생각에 로인과 결합하는 엄마를 말리지 않았고 별 간섭도 없이 한번쯤은 엄마의지대로 살아보라고 지켜보고만 있은것은 어쩜 엄마로부터 자유로와지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한 욕심이 아닌지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로인들의 자식들은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고있었고 엄마를 돈 안받고 고용하는 파출부대접을 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이제 운신을 못하는 로인네의 병구환까지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병구환도 안해본 엄마한테 안지 몇달밖에 안되는 로인네의 지저분한것들을 치워주며 병구환을 시킬수는 없다는것이 엄마를 데려가려는 내 리유였다면 엄마는 부부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이 집을 떠나지 않을 리유가 충분했다. 난 아침에 친구한테서 로인네가 앓고있은지 한달째나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언녕 엄마가 떠나시지 않을것을 알았어야 했다. 엄마가 떠나기로 마음먹었더면 로인네가 앓고있는 사실을 내가 모르게 할려고 백방으로 노력할리가 없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계셨다. 로인네와 함께 살면 부부인줄만 알았지 지금 로인들도 얼마쯤씩 살다가 탐탁지 않으면 아무일 없이 갈라져버리는줄도, 일방이 중병에 몸져눕기라도 하면 다른 일방은 아무 꺼리낌없이 당연한듯이 떠날수 있는줄도 , 더구나 로인들의 결합은 재혼으로 봐주지도 않는 사실조차도 모르고계셨다. 하긴 자기 의사를 밝힐 자유도 없이 중매결혼을 하시고 리혼은 세상 수치스러운 일로 알고 살아온 엄마세대였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리혼한 녀자들은 용서못할 죄라도 지은듯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던 시대였던 탓에 엄마도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구박을 그렇게 받으면서도 찍소리 안하고 살아왔을것이고 그런 세월을 살았던 탓에 자식들은 “그냥 같이 살고”있는거라고 표현하는 로인네와의 생활을 만년의 재혼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오셨을것이였다. 그런 엄마인줄을 깜박 잊은채 무작정 뛰여온 내가 잘못이였다. 난 갑자기 머리가 서버린듯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안가려는 엄마를 억지로 끌고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렇게 두자니 만만치 않을 병구환에 엄마가 힘들것이 뻔해서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엄마를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길은 내내 무거웠다.


엄마는 끝까지 자기의 이름대신 자식들의 엄마로,누군가의 아내로만 살고싶었던것일가? 아무리해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지금 내겐 엄마의 이름을 찾아드리는것보다 엄마를 집으로 모셔오는것이 우선인데 엄마는 그걸 원하지 않으신다.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짙어가는 록음따라 내 걱정거리도 한결 커져만 간다.


5

방안은 금시 수라장이 되고말았다. 아무렇게나 뽑혀나온 책들은 뽑힌 맵시 그대로 방바닥에 널부러졌고 화장품통과 약상자도 뚜껑이 열린채 어지럽게 흩어졌다. 하지만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증발이라도 해버린듯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훑기 시작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길에는 우산을 든 행인들이 급하게 오가고있었고 택시들이 흙물을 튕기며 신나서 빵빵 달리고있었다. 련며칠째 하늘은 비를 퍼붓고 있었다. 묘하게도 저녁무렵이면 비발이 약해지다가 밤이면 비가 긋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간간이 내리고 있기를 거듭하더니 오늘은 드디여 작정을 하고 제법 굵게 비발이 쏟아지고있었다. 가게안은 눅눅한 공기로 반소매아래로 내놓인 팔이 끈적거려왔고 비물에 한껏 불려진 뙤창문은 꼭 맞물리지 않아 약간 틈을 내보인채 허접하게 닫겨있었다. 그 틈새로 가끔 비물이 튕겨들어와 나는 얼른얼른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뙤창문이 똑똑하고 울린것은 그때였다. 비물때문에 얼룩진 뙤창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민것은 아들애였다.
“너?! 왜?”
아들애는 놀란 내 눈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혼자 있어도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도록 좁아터진 공간은 아들애가 들어서자 당금이라도 터져버릴듯이 꽉 차버렸다. 아들애는 비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보며 벌씬 웃었다.
“엄마, 이걸 줄려구요.”
아들애가 쭈밋거리며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내민것은 웬 종이장이였다. 종이장을 펼쳐보는 내 눈은 분명히 커졌을것이였다. 거기엔 각서라고 적혀있었다.

--1.무슨 일이 있든 열심히 공부한다.
--2.무슨 일이 있든 엄마와 이야기한다.

서명: 리민수
시간:2009년 5월 10일

각서의 공백부분엔 카네이션 몇송이와 하트가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웃고있는 아들애의 스티커사진도 한장 붙여져있었다.
“웬 일이지? 이런것을 다 주고?”
“아니, 뭐 그냥……”
아들애는 뒤더수기를 긁으며 애꿎은 바닥을 발끝으로 후비고있었다.
“엄마, 절 ……안 욕해요?”
아들애는 힐끗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았다.
“뭘? 이쁜 아들을 왜 욕하겠니?”
나는 서있는 아들애를 끄당겨 내 옆에 앉혀주었다.
“엄마, 내 싸이홈피에 들어와서 댓글 남기신거 봤어요……깜짝 놀래서 며칠은 엄마 눈치만 봤어요……카테고리 비공개한다는게 깜박 잊고……”
아들애는 떠듬떠듬거리며 얼굴이 붉어지고있었다. 그제서야 난 민수의 싸이홈피에서 일기를 읽고 꾸중대신“이건 비공개해야 하는건데”하고 마음에도 없는 댓글을 선선히 남겨놓고 온 사실을 생각해냈다. 정말 그 댓글을 남길 때까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였다. 조기연애를 한다고 한바탕 혼을 내고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아들애또래의 심정과 감정을 알것 같았고 될수 있는 한 리해하려고 했다. 지금 나는 편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한결 차분한 마음이 되여가고있었다.
“엄마는 민수를 욕하지 않아…… 네또래면 그럴수 있어. 여자친구도 사귈수 있고. 처음엔 섭섭했어…… 민수에게 엄마가 모르는 비밀이 이렇게 많나 하고. 후에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축하해줘야겠더라. 민수도 이젠 컸고 훌륭하니까 여자친구도 있는게 아니니?”
“정말이예요?!”
아들애는 금시 얼굴빛이 밝아졌다.
“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러니까 민수야,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 하지만 한가지만 명심해둬. 넌 아직 어리니까 여자친구를 사귀여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 된다는걸. 그리구 엄마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우리 아들 민수가 어느만큼 성숙하든지 늘 엄마와 마음속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걸. 그것뿐이야.”
난 열네살짜리 소년을 상대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어른을 마주하고있기라도 하듯 사뭇 진지했다.
“엄마, 고마와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이 각서에 쓴것 꼭 지킬게요. 이게 어머니명절선물이니까요.”
아들애는 각서를 툭툭 치며 싱글거렸다. 나는 제법 어엿해진 아들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웃었다. 아들애가 지금처럼만 커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것 같았다.
아들애가 돌아가고도 한참동안이나 난 각서를 보며 실실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부랴부랴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뛰여왔던것이다.


그날 곧장 내가 앉은 자리의 테이블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는 그 녀인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턱아래로 보기좋게 늘어진 군살과 윤기도는 얼굴의 오관들보다 몸에 걸친 암록색밍크코트의 윤택이 자르르 흐르는 털들이 내 눈에 비쳐드는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의 리유를 알아버렸다. 며칠동안 왜 그 녀인을 만나 싱거운 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리유를 알수가 없어서 떨쳐버릴수 없는 끈끈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정작 알아버리고나니 웬지 씁쓸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어줍게 얼굴에 알릴듯 말듯 미소를 개여올리며 엉성스레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녀인은 알릴락말락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녀인의 눈길은 솜의 두께만큼이나 부풀어오른 내 솜옷에 잠간 머물렀다가 탁자우에 포개여놓은 메마른 내 손에 한참이나 머물러있었다.녀인의 얼굴에서는 알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서서히 피여오르고있었다. 그러는사이 내 눈길은 녀인의 귀볼에서 대롱거리는 귀걸이와 무명지를 꽉 조이고있는 보석반지와 명품핸드빽사이를 고루 오가고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여서 반가와요.”
조금 부푼듯한 펑퍼짐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녀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네?......네. 저두요.”
녀인은 약간 웨이브를 둔 짧게 커트한 머리를 귀걸이가 대롱거리는 귀밑으로 쓸어넘기고 통통 살이 오른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마른 딱딱한 손을 내밀어 잠간 잡았다가 손을 빼고 말았다. 통통한 녀인의 손은 싸늘했다. 손가락에 맞혀오던 보석반지의 차가움만큼이나.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것은 아닌데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우리도 해야 할것 같아서요.”
녀인은 핸드빽을 열어 종이장을 꺼내놓았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녀인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난 어느만큼 동조하고있는지를 생각하고있었다. 그리고 녀인이 꺼내놓은 종이장에 이름을 적어야 할 내 악필을 근심하였다.
“읽어보고 마음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하세요. 근처에 타자사가 있으니까 금방 가서 고쳐오면 돼요. 근데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맘에 들거예요.”
종이장을 받아들며 내 머리는 녀인의 몸에 걸친 밍크코트를 만들려면 몇마리의 담비가 죽어야 할가는 생각으로 복잡해지고있었다. 나는 “계약서”라고 쓴 커다란 글자에만 눈길을 박은채 내가 처음 싸인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하기전 결혼수속을 하러 가니 결혼전재산공증을 하라고 하였다. 헌데 난 딱히 적을 재산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지 두해째였고 그 두해동안 난 내 월급을 세방살이하는데 꼬박꼬박 탕진하고있었고 가난한 친정집에는 아들맞잡이인 맏딸이 시집을 간대도 쥐여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공증서에 외삼촌이 결혼하면 사준다던 세탁기를 머밋거리며 적었고 남편은 집이며 텔레비죤이며 랭장고며 부모님들이 장만해준것을 제것인듯 스스럼없이 적었다. 그렇게 난 세탁기 한대라는 글씨와 함께 내 이름을 꼬질꼬질하게 싸인을 했었다. 난 그 공증서를 무심코 아무곳에나 쑤셔넣었고 기억력탓이기라도 하듯 지금껏 한번도 어디에 있을가고 생각해본적도 찾아본적도 없었다. 15년전에 행했던 싸인의식을 나는 지금 웬 낯모를 녀인과 낯익은듯이 만나 내가 아닌 엄마를 위해서 치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다 읽으셨어요?”
“네.”
난 서둘러“계약서”라는 글자에서 눈길을 떼여 “갑방”과 “을방”이라고 쓴 서명란으로 옮겼다. 며칠전 받은 전화에서 계약서의 내용을 대충 들었고 그 내용들을 종이장에 옮겼음을것이니 굳이 확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생각이……”
“아니…… 싸인을 하죠.”
나는 서둘러 멜가방에서 수성펜을 꺼내 종이장에 이름을 적었다. 멋있는 흘림체는 아니여도 정자체로라도 반듯하게 쓸려고 노력을 하며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적었다.
“다들 이렇게 한대요. 별로 부담될것은 없어요.”
녀인은 내가 넘겨준 종이장에 자기의 이름을 적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계약서를 작성하는것이 자기들쪽의 의사가 아니라 남들따라 해야만 하는 절차이기때문이기라도 하듯 아까부터 녀인은 “다들 이렇게 한대요.”하는 말을 곱씹고있었다.
“또 만나요.”
체면있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녀인의 뒤모습을 일별한채 또 만날 일이 뭐가 있을가고 싱거운 궁리를 하고있었다.


그 계약서를 찾아내야 했다. 그 녀인과 헤여져 돌아와서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처박았을 계약서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면 어쩜 엄마를 데려올수 있는 리유를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책갈피들도 한장씩 펼쳐보고 옷장안에도 깊숙이 손을 넣어보고 화장품이며 약들도 쏟아내며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었을가?
내가 읽은 책만큼이나 얄팍한 기억력은 도무지 기억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계약서를 둔 곳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눈길은 이제 초점없이 허위허위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보기만 한다.
어디가 숨겨둘만한 곳이지?



6


며칠후 난 허구프게 혼자서 후훗~ 웃어버리고말았다. 계약서는 말도 안되게 내 멜가방속에 들어있었다. 녀인과 계약서에 싸인하고 오던 날 남편은 느닷없이 선물이라며 가방을 내밀었고 계약서가 들어있던 멜가방은 돈지갑이며 디스켓이며가 새 가방으로 옮겨지고 계약서만 남은채 그대로 방치되고말았던것이다. 그 가방이 세일품이였다는것은 터진 실밥을 보고 금방 알게 되였지만 나는 내색을 내지 않고 이제껏 쓰고있었고 그 가방을 볼 때마다 간간이 위안을 느끼고있었다. 세일품의 할인된 가격대쯤으로라도 내가 남편의 마음속에 남아있을거라는 생각때문이였다. 원체 활동적인 성격이여서 늘 밖에서 나돌고 술을 밥먹듯이 거르지 않지만 꼬박꼬박 출근은 하고 다른 녀자들한테도 눈길을 파는 법은 없는 남편이였다. 어쩜 무뚝뚝하고 페쇄적인 내가 아닌 엔간히 애교가 있는 녀자라면 별 탈없이 살아갈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니 해본것도 아니였다. 문제는 남편쪽이 아니라 내 쪽에 있을거라는 생각도 슬금슬금 들었었다. 나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남자라면 쉽게 마음을 줄수 없을것 같았고 그렇게 싫은듯 안싫은듯 생김새까지 닮아가며 엄마처럼 살아갔을것이였다. 어쩜 난 결혼증때문에 남편과 살고있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난 항상 몸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그 울타리밖에서 겉돌고있는지도 몰랐다. 난 이미 내가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보이지 않는 속박때문에 스스로 지쳐가고있었고 그 와중에 터진 엄마문제는 내 가슴을 억누르는 또 하나의 짐이였다. 그 짐을 부릴 열쇠가 계약서가 되여주길 난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나는 계약서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계약서에는 로인 쌍방이 결혼등기를 하지 않는다,둘이 함께 생활하기전의 재산은 각자의 재산으로 한다는것과 같은 중요한 내용들과 더불어 명절이나 생신에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자잘한 내용까지도 곁들여 두 로인이 결합한후 일어날수 있는 일의 모든 가능성을 포괄한 시비거리 처리방식들을 명확하게 분별하여 적어놓고있었다. 당연히 내가 찾으려는 조목도 있었다.
“두 로인중 일방이 중병에 걸려 들어눕거나 사망할 경우 다른 일방은 아무 책임이 없으며 자기 자녀의 집으로 돌아간다.”
계약서의 조목들을 두루 살펴보면 실은 엄마에게 유리한것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에겐 재산이래야 시골에 있는 낡은 벽돌집 한채뿐이니 로인의 난방시설이 구전한 아빠트와 견줄수도 없었고 엄마는 로인처럼 퇴직금이 있는것도 아니였다. 어쩜 모든것을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엄마가 혹시라도 리익을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제한하려고 만든 조목들 같았다. 내가 지금 찾아낸 조목 역시 엄마가 앓아누웠을 경우라면 내가 아마도 그날로 엄마를 데려와야 한다는 소리같았다. 하지만 어느것하나 사리에 어긋나는것은 아니였다. 각자 자녀의 생활이나 각자의 재산이나 하는것들은 일체 관심을 끊고 두 로인이 함께 생활하는데만 전념하라는 뜻이였다. 녀인의 말마따나 “다들 그렇게 한다”니까 누가 선코를 떼였는지는 몰라도 세상은 벌써 그렇게 돌아간지가 한참은 되였던것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녀인에게 전화를 넣었다. 전화발송음악이 울리는 동안 난 무슨 말을 할가고 궁리를 하며 미간을 찌프리고있었다.
“여보세요~”
녀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물기 한점없이 건조했다.
“저……울 엄마 딸인데요……”
나는 갑작스레 당황해졌다. 날 누구라도 설명해야 할지 일순 멍해지고말았던것이다.
“네?......아~ 알만합니다.”
녀인은 정말 아는지 아는척을 했다. 그제야 전화번호를 저장했으면 알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녀인이 날 무슨 호칭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했을지 궁금했다. 녀인의 전화번호는 “담비가죽”이라는 호칭으로 내 전화에 저장되여있었다.
“저……울 엄마 말입니다……집에 와도 되잖을가요?......계약서에, 계약서에 와도 된다고……와도 된다고 있는데……그러니까 그 집 시아버님이 아프니까……울 엄마는……”
나는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이마에서 진땀이 빠질빠질 돋고있었다. 그만큼 나는 누군가와 무엇을 따지는데 서툴렀다. 여태 따져본적이 없고 소리소리 지르며 싸워본적이 없는 나였다.
“아, 네에. 그래야죠. 전 그쪽에서 여태 아무 소리 없으니까 딱히 갈데가 없어서 있는줄로 알았죠.”
녀인의 목소리는 당금이라도 부서질듯이 건조했지만 거침이 없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엄마가 숨기셔서… …금방 알았거든요. 시아버님이 아프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엄마가 안오시겠다고 하셔서……”
“아줌마가 안가시겠대요? 저두 그런 줄은 몰랐는데요.”
녀인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묻어나고있었다.
“그러니까 제 엄마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해주겠어요? 그럼 올지도 모르는데……”
“딸의 말을 안듣는데 제 말을 들을리가요? ……저 그럼 이렇게 하는것은 어떨가요? 아줌마를 그냥 계시게 하고 저희가 월급을 지불하죠. 한달에 천원씩요. 병간호비 다들 그렇게 하시잖아요?”
“네? 뭘 어떻게요?”
난 일순간 어정쩡해지고말았다.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라는데 월급이라니? 병간호라니?
“저희가 보모를 구하는 셈치고 한달에 천원씩 드리겠다고요. 그냥 시아버님댁에 계시라구요.”
“아니, 그건……”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예상치 못한 제의에 눈만 껌벅거리고말았다.


저녁에 난 엄마한테 계약서를 보여드렸다. 계약서를 읽어내려가는 엄마의 눈길이 흔들리고있었다.
한참후 .
“그래 이게 ……우리 둘의 결혼증과 같은거니? …… 너희들이 우리 몰래 이런것을 썼니?”
엄마는 한글자 한글자 힘들게 뱉어냈다.
“결혼증은 무슨? 피차 서로 껄끄러운 시비가 없자고 하는 일이지.”
나는 눈을 내리깐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엄마, 그러니까 이제 갑시다. 집에.”
“내가 안간다면? 이 종이장 들고 법에 고소라도 해서 끌어갈 참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집식구들은 엄말 간병인 취급을 한다고요. 엄만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엄만 파출부노릇을 했다구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간병인노릇까지 해요? 엄마에게 돈을 주겠대요. 월급으로 한달에 천원씩. 이래도 있을텐가요?”
“이 집 며느리가 그러던?...... 원래부터 드문드문 찬바람같이 달려와선 백원짜리 지페 몇장씩 쥐여주고 가는것을 적선이라도 하는 양으로 알길래…… 참 모색한 여자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사람은 돈으로 사는게 아니다. 더구나 부부는. 그 돈 받든지 안받든지는 니 맘대로 하고 . 암튼 난 여기 있을란다…… 선영이에겐 알리지 말거라.”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단단함이 비껴있었다. 아버지와 사실적에 항상 참아주기만 하던 질리도록 보아왔던 가녀린 얼굴이 아니였다. 하지만 엄마는 모르고계셨다. 옛적에 보아오던 착하기만 하던 얼굴이나 지금 보여주는 조금은 고집스러워보이는 얼굴의 내면속에 부부라는 리유때문에 혼인은 깰수 없다는 엄마의 생각은 조금도 변한적이 없다는것을.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뭐든지 혼자서 숙명처럼 알고 지켜가는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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