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고중을 졸업하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농촌의 생산대에 돌아와 나의 농민생애을 시작하였다. 소아마비증 장애자인 나로써는 가혹한 인생의 첫 걸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몸으로 농촌의 체력로동을 감당하지 않으면 않되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학교 때 모택동주석은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고 지시를 내려 많은 도시의 고중졸업생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하였다. 우리마을에는 상해에서 지시청년들이10여명 하향하여 왔었는데 바로 우리집 앞에 ‘집체호’가 만들어 졌었다. 또한 당지의 로투구진에서 온 지식청년들도 10여명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족들이기에 당시 나는 중국말을 기본상 할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한족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형님들은 어느 정도 중국말을 할 수 있으니 그들과 친구를 사귀였다. 그 후에 집체호를 해산하여 지식청년들을 각 농가에 입주시켰는데 우리집에도 남성청년이 한 사람이 들어와 1년정도 같이 생활했다. 때문에 조금씩이나마 중국말 련습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계급투쟁도 치열했지만 상해지식청년들과 지방지식청년들 두 그룹간의 싸움도 대단했다. 그들은 밤이면 몽둥이나 농구를 잡아쥐고 무리를 져서 싸우는 것이 진짜 농민전쟁을 방불케 했다. 어린나이에 밖에서 들려오는 ‘싸! 충!’(죽여라! 돌격하라!) 하는 외침 소리에 소름이 끼쳐서 감히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잇따라 “어느누가 피터졌소, 머리터졌소” 하는 소식이 전해져 너무나도 공포적이였다.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 생산대에 돌아와 일할 때는 문화대혁명도 기본상 끝난 시기여서 이런 무리 싸움은 없어졌고 일부 지식청년들은 자기출신지로 돌아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는 농촌에서 닥치는대로 모든 일에 참가했다. 기음매기로부터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토개량’을 한답시고 땅파기를 온 겨울 했다. 언땅을 파서는 논밭에 펴놓아 좋은 농토를 만든다는 것이다. 생산대이니 물론 사원(‘인민공사’이기에 ‘농민’이라 부르지 않고 ‘사원’이라 불렀다)들이 모두 함께 생산대장의 안배에 따라 여러가지 일을 했다. 2년째에는 생산대에서 나를 출납과 회계로 배양한다고 하여 당시 나이먹은 회계를 따라다니며 회계를 배웠다. 기본상에서는 주산을 배우고 기장(장부기록)을 배웠다. 지금 같으면 어느 학교나 학습반에 가서 배웠겠지만 당시에는 ‘실천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모주석의 말씀에 따라 정규적인 회계지식은 배울 수도 없었고 배울 필요도 없었다. 계산만 할 수 있으면 회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농촌에서 일할 때는 매년 열심히 농사를 지어 쌀도 많이 생산했는데도 늘 사원들의 량식이 모자라 농민들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가을에 생산대에서 분배받은 량식은 이듬해 5,6월이 되면 거의 다 먹고 또 식량난이 생기는 것이 당시 농촌의 일반 현상이였다.
왜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당시의 농업정책(지금 알고보니 기실은 농민략탈 정책) 때문이였다. 정부는 농촌의 생산량이 얼마든 관계없이 농민의 식량분배기준을 정해놓고 그외는 모두 공량(정부에 납부하는 량식)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아주 값싼 대가는 치르는데 그것이 생산대의 수입으로 된다).그 때의 기준으로 농민 어른 한 사람당 한 해 분배기준은 벼로360근이다. 그것을 가공하여 쌀을 쪄내면 대략 6,70%가 되니 한 사람당 일년 먹을 쌀은 약 210-250근 정도이다. 1년365일에 하루 평균1근도 않되니 고기도 채소도 풍족하지 못한 농민이 그것으로 1년 살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당시 도시 로동자들은 정량으로 한달에 배급이 30근이니 하루 평균1근이고 한 달에 반근의 고기를 살 수 있었다.
농촌에서 일할 때는 아직 나이 어리고 이런 정책의 본질에 대해 잘 몰랐으나 어떻게 하면 사원(농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었다. 생각한 끝에 묘한 수가 떠올랐다. 생산대 회계라는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생산대장한테 나의 방법을 이야기 했다. 생산대장은 누구도 몰래 잘 해보아라고 지시하였다. 식량분배는 회계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던 수를 쓰면서 식량분배를 사원들에게 많이 하도록 하였다. 방법은 저울추에 20%의 저울돌을 남몰래 달아놓고 분배하였다. 그러니 사원들은 100근의 식량을 분배받아도 기실은 120근을 받아가는 것이 되였다. 모두들 예전보다 많다고 생각은 하나 누구도 질문이나 확인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2년동안 나는 사원들을 속이고 정부를 속이고 농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분배했다. 그러니 당연히 알아차린 농민들은 나를 속으로 좋아하기 마련이다.
허나 이 일을 만일 상급정부나 관계부문에서 알게되면 나는 회계직에서 철직을 당하거나 탐오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사원들속에도 자기가 분배받은 식량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을 분배후이면 상급정부에서 4청대(회계감찰)를 각 생산대에 파견하여 재정검사를 하였다. 마을 간부들이 나와 같은 부정분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에 검사도 엄격히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산대장이나 회계가 처벌받거나 잡혀 가는 일도 많았다. 사원들 가운데서 빨갱이 적극분자들이 생산대장이나 회계를 적발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농민의 리익을 도모하는 ‘반당 반사회주의의 착오’를 범하였다. 만약 지금 내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크나큰 부패 탐오자가 되였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에 와서 스스로 분투하였기에 돈욕심과 권력욕이 없이 사회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순수한 인간이 되였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또한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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