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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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의 프로필 댓글:  조회:1903  추천:1  2013-11-14
1959년 연길현 출생 1977년 고중졸업후 로투구진  렴명대대 5대에서 농사지음 1981년 9월-1985년 7월 북경 중앙민족학원(현재 중앙민족대학) 정치계철학전공 1985년 9월-1987년 7월 중공북경시위당교 연구생 공산당건설 연구 1987년 7월-1991년 4월중화전국총공회산하 중국공운학원(中国工运学院,现劳动关系学院) 전임강사 1991년 4월 대학강사 사직하고 일본류학 1991년 5월-1992년 3월 일본동경 ICC일본어학원 학생 1992년 4월-1994년 3월 요코하마(横浜)국립대학 경제학부 연구생(로동경제학전공)  1994년 4월-2000년 3월 립교(立教)대학 경제학연구과 석사/박사과정 (두만강지역개발과 동북아지역경제연구) 2000년 4월-2001년 3월 동아시아종합연구소 연구원 2001년 4월-2003년 3월 동경재단(東京財団) 연구원(동북아개발은행설립에관한 정책연구、일본정부에 정책건의) 2003년 4월-2003년10월  나고야(名古屋)대학 경제학부 국제경제동태연구센터 외국인교수 2003년 11월-2006년10월 종합연구개발기구(NIRA, 일본정부 내각부산하 정책연구소) 주임연구원  동북아지역의 그랜드데자인 프로젝트 연구, 중국정부산하 국가발전개혁위원회산하 국토연구소, 한국국토 연구소 등 정책연구기관과 공동연구, 각국 정부에 정책건의 2006년11월~ 현재 호쿠리쿠(北陸)대학 미래창조학부 교수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石川県金沢市) 사회활동: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일본), 연길시인민정부 홍보대사와 경제특사등 겸임, 남개대학 일본연구원 객원교수 겸임. 연구활동: 일본을 근거지로 중국,한국,조선,로시아, 몽골등 국가를 중심으로 동북아공동체에 관한 연구활동을 진행 2005년 11월에는 연합국공업개발기구(UNIDO,오스트리아의 윈), 2011년8월에는 동북아경제포럼(NEAEF, 미국하와이), 2013년 8월에는 연합국아태경제사회위원회(UN-ESCAP) 등 국제회의에 초청받아 동북아지역협력에 관한 연구발표와 정책제언  가족: 안해와 아들1명(대학생)  취미: 채소밭 가꾸기, 수영, 탁구, 골프등         
21    《나의 동북아 4국지》맺는말 댓글:  조회:2706  추천:3  2013-04-07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맺는말:   2500년전의 성인 공자는 논어를 통해 우리들에게 인간이 갖추어야 할 자태와 모습 그리고 인간의 도덕에 관하여 지침을 제공해 주었다. 그 기본은 인의지례 (仁義智禮)를 지키는 것이다. 그중에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한자해석을 한다면 仁은 사람이 둘이 있다는 말인데 그 의미는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으며 혼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걸어온 반생을 돌이켜보면 공자의 말씀이 너무나도 지당하다. 즉 인간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이 열려지고 만남을 통하여 행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태여날 때는 부모와 형제들과의 만남, 성장하면서 친척들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사회에 진출하면서  상상도 못했던 귀인들과의 만남, 이런 것들이 바로 나의 행복의 원천이며 성공의 원천이다. 제가 아무리 총명하고 잘났다고 해도 이런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진짜 행복을 향수 받을 수 없으며 진짜 성공을 할 수 없다.  또한 제가 잘났다고 해서 유명한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리득이 있는 사람만 만남으로 생각한다면 그 또한 불쌍한 사람이며 인간으로써 존경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불우한 사람 자기가 인생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자기도 똑 같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언제 어떤 장소에서도 ‘나는 촌사람, 시골 사람이다’고 자기를 소개한다. 그러니 촌사람이나 시골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 시골에서 태여나 자라고 북경에서 생활해도 대학의 식당복무원들과도 친근해지고 일본에 와서도 청소부들과 고락을 함께했으며  채소밭을 가꾸며 주위에서 농사하는 촌 할머니들과도 재미있게 이야기 나눈다. 한편 일본의 정치가들이나 학자들과도 똑 같은 마음으로 교류를 하고 있다. 일본에 오기전에는 일본의 청소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일을 해볼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며  일본에 와서 중국, 조선, 한국, 몽골, 러시아, 유럽, 미국의 정치가나 외교관이나 학자들과 만남이 될 수 있다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우기 일본의 정치가나 국회의원 총리급인사들과 만남과 교류할 수 있다고  상상도 해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세계 30여개 나라에 친구가 있게 되고 세계(지구촌) 시민을 만들어가는 네트워크 활동도 빈번하다. 나한테는 조선족 네트워크, 코리안 네크워크, 화인 네트워크, 동북아 네트워크, 지구시민 네크워크가 주어져서 나의 인생을 즐겁게하고 나의 인생가치를 보람있게 하는 것이다. 즉 만남이 인생을 개변하고 만남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끝
20    나와 조선 한국 댓글:  조회:3557  추천:2  2013-03-27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7.네개의 조국을 가진 기쁨과 슬픔2 나와 조선 나의 인생은 많은 조선족과 마친가지로 태여나서부터 조선반도의 정신적 문화적 영향하에서 시작되였으며 조선반도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적 문화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견식을 갖고 있는가?’ 고 물으면 중국에서 태여나 자란 30년간은 기본상에서 지식이 없었다. 조선족에 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조선반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에 와서 공부하면서 두만강지역개발연구를 시작해서부터였다. 1996년에 장춘에서 개최하는 두만강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가한 후 그 길로 연변에 가서 훈춘개발구를 고찰하고 원정리(권하)다리를 건너 조선땅에 첫 발을 밟게 되였다 (기실 조선땅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어릴적 여름방학 개산툰에 있는 누님집으로 놀러 갔다가 가까이에 있는 두만강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대안의 강변까지 건너가 조선사람들에게 장난으로 말을 걸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한창 조선의 라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에 외국투자가 흥성할 때였는데 관광비자로 입국했기에 기본상 정부관원들을 만날 수 없었으므로 말타고 꽃구경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서고 있는 호텔, 공장건물이나 시장을 살펴볼 수 있었고 개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두 번 정도 라진선봉에 고찰을 갈 기회를 가졌다. 본격적으로 조선에 관해 연구하게 된 것은 2001년 가을에 일본 동경재단시기  사사카와(笹川)재단(동경재단의 모재단:母財団)의 요청으로 조선반도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것이 시작이였다. 일본의 조선반도연구 전문가(특히는 경제)들이 모인 연구회였다. 이 연구회의 목적은 2000년6월에 남북정상회담으로 관계가 호전되여 가는 기회에 일본과 조선간의 교류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였는데 이를 위하여 당시 중국국적인 나와 연변대학교수로 동경재단 객원연구원으로 와 있는 강룡범교수를 연구팀에 넣어 주었다. 일본사람과 한국출신의 연구자들은 조선에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 중국국적인 우리들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는 조선경제에 관해서 특히 라진선봉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의 개발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15일은 고김일성주석 탄생90주년으로 평양에서는 큰행사를 준비하고 전세계의 우호국가들에 방문단을 초청했다. 강교수의 알선으로 강교수와 나는 연변대학 교수의 명의로 연대방문단의 일원으로 조선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에 갈 수 있었다. 정부의 초대이기에 고려호텔에 주숙하고 귀빈대우를 받게 되였으며 4.15전후에 정부에서 주최하는 많은 행사와 견학에 참가할 수 있었다. 중앙대회에도 참가하여 육안으로 조선의 고김정일총서기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볼 수도 있었다. 평양시내의 변하고 있는 모습도 많이 보고 거리에 나가 조선의 젊은이들과도 많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한 노동당역사연구소의 간부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우리를 안내하는 안내원(당역사연구소의 연구원)과도 뻐스타는 시간에 많은 의견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조선을 이해하고 조선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그번 방문과 연구회를 통해 나는 조선경제연구의 전문가로 일본사회에서 평가 받았다. 아사히 신문에는 단독 인터뷰기사가 게재되고 여러 연구단체들에서 초청강연을 의뢰받았다. 나는 부득불 조선의 역사나 국제관계에 관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않되였다. 그것을 통하여 조선민족에 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졌다. 조선반도가 역사상 주위의 강대국에 끼여서 유린받고 침략받고 강탈당한 처지에 있었으며 이전에 일본의 한 학자가 ‘조선민족은 고생을 많이 한 민족’이라는 말을 점차 이해하게 되였다. 그것이 나에게 반도의 조국과 민족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그 후에도 동북아시아 관련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할 때면 평양에서 온 연구자와 정부관원들을 만나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또한 재일본 조선총련의 관계자들과도 많이 접촉할 수 있었고 조선대학의 학자들과도 같이 연구프로젝트를 하면서 연구교류를 할 수 있어 조선에 대한 나의 지식을 많이 넓혀 주었다. 한편 1995년 이래 조선의 수재 등으로 동포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났다. 2002년 라진선봉에 방문갔을 때 외국손님들의 관광뻐스 주위에 몰려드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목격하면 정말 목이 메일 정도였다. 국제관계에서도 조선의 핵개발 등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비난받고 왕따당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북쪽의 정책에 문제가 있고 그것을 개변하지 못하면 나라의 존재자체가 위험하기는 하나 한면 대국의 패권이나 갈등속에서 약소한 나라 약소한 민족이 버림받고 고립당하는 그러한 국제정치가 언젠가는 개변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북의 분렬, 대륙과 대만의 분열도 결국은 강대국의 패권과 권익투쟁이나 전쟁의 희생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비애를 낳는 근원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나와 한국 내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그 전까지는 ‘남조선’으로 알려졌으며 중국사회에서 한국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80년대 후반에 한국인들이 북경에 방문오니 여러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주로는 비지네스맨이 많았고 일부분 학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1990년 여름에 북경에서 개최된 아시아운동대회 때 한 친구를 통하여 취재를 온 연합뉴스의 기자를 만났다. 나한테는 처음만나는 한국인이였다. 처음으로 나를 만나자는 외빈이였기에 왕푸징에 가서 조선족고급료리점에서 식사를 초대했다. 식비를 계산해보니 150원이였다. 그때 나의 월급은 겨우 75원 정도였다. 월급의 두배가 되는 식사대접을 인생에 처음으로 해본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뒤로는 동경과 서울에서 한국기자분을 또다시 만날 기회도 있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학자나 상인들이 북경에 오면 만나보고 교류할 수 있었으며 한국에 관한 료해가 조금씩 늘어났다. 1990년대 내가 일본에 온1년 후에 중한수교가 되면서 중국조선족들의 한국방문이 급속히 늘어남과 동시에 약장사 보따리 장사도 많아지니 당연히 여러가지 불쾌한 사건들도 많았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나한테는 실감이 안나고 또한 나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조상의 나라이니 기회가 있으면 한번 여행이나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일본에서 밥벌이에 공부에 여념이 없었기에 한국여행은 뒤전이였다. 그 후 일본에 있는 나의 형과 형의 처남들이 한국에 여행갔는데 한국의 공항에서 출입국관리국에 불리워 들어가 특별한 조사를 받게 된 일이 있어 몹시 불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적은 중국인데 조선말에 일본말을 해대니 의심받았던 모양이다. 고국의 대문에서 나쁜 인상을 받았다고 하니 나도 한국여행을 해보려던 생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친구도 친척도 없으니 마음이 끌리는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2월에 나고야대학의 친구인 히라카와교수가 한국에서 노무현정권이 탄생하게 되여 동북아 개발금융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니 주제보고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요청이 왔다. 고 노무현대통령이 선거 공약중에 ‘당선되면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노사모그룹의 국회의원들과 학자들이 조직한 국제회의였다. 내가 금방 동경재단에서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끝내고 고이즈미수상한테 정책제안을 마친 반년 후였다. 심포지엄에는 한국내 뿐만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학자와 기자들도 참가했고 심포지엄이 끝난 후에는 김대중정권시기 산업자원부 장관을 했던 김영호 유한대총장 (한국에 유명한 경제학자), 중국 료녕대학의 교수 및 한겨례신문이 주최한 3자 정담(鼎談)에 초청받아 동북아지역개발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좌담하여 이튿날 한겨례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되였다. 한국에 처음으로 가게 된 나는 심포지엄에서 한국말로 처음으로 보고하자니 아주 긴장하였다. 그 때까지 나의 조선말은 연변 사투리(방언)가 많았고 20여년 북경이나 동경에서는 중국말과 일본말이 위주였기에 본격적으로 표준한국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한국에 가서 이틀만에 유명한 인사로 되여 심포지엄 기사와 인터뷰기사가 큼직한 사진과 함께 거재되였으니 말이다. 후로는 한국의 정부나 연구소 그리고 대학의 학자들과 빈번한 교류가 형성되였으며  더우기 내가 일본내각부의 정책연구소(NIRA)에서 동북아그랜드데자인 프로젝트를 주최하면서 한국정부의 대통령자문위원회, 동북아시대위원회, 대외 경제정책연구원(KIEP), 국토연구원(KRIS), 개발연구원(KDI) 등 연구소와의 교류사업이 많아지면서 한국을 제집 문앞 지나듯 드나들게 되였다. 당연히 한국말도 제법 할 수있게 되였다. 나의 또 하나의 조국과의 인연은 이렇게 한국의 주류사회와의 만남으로 맺혀졌다.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2005년4월에  일본 NIRA연구소의 파견으로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초청을 받고 방문연구원으로 서울에 1개월 체류하면서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였다. 한국에는 여러번 다녀왔지만 한국의 서민생활체험은 처음이였으므로 나에게는  소중한 1개월이였다.  이 기간 나는 한국의 많은 연구자와 정부관계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또한 강원도 콘도를 걸쳐 조선(북한)의 금강산 여행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내가 제일 격동된 것은 금강산에서 우리 민족들과의 만남이였다. 일반 한국인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고 또 관광뻐스를 모는 운전수들과 식당의 복무원들은 중국 조선족들이였으며 관광지에서 안내하고 관광상품을 파는 사람들은 조선(북한)사람들이였다. 나는 금강산에서 3개국의 한민족동포들과 만나서 여러가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민족이 이렇게 분렬되고 이산되고 각자의 이념이나 행동양식이 서로 다른 민족처럼 변해진 것이였다. 언제가면 우리민족이 하나로 될 수 있을가?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기 짝이 없다. 그 뒤로는 한국에 사는 조선족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005년12월에 일본에서 개최한 조선족국제심포지엄에 한국의 조선족연구를 하는 유명한 학자 이진영교수와 최우길 교수를 초청하게 되였는데 후에 서울에 가니 그분들의 소개로 조선족류학생네트워크의 예동근회장을 만나게 되였고 많은 조선족 류학생들과도 만나게 되였다. 세미나도 개최하여 보고를 초청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수 천명의 조선족 류학생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으며 조선족연구회를 서울에서도 만들어서 일본과 중국과 서로 교류하면서 조선족세계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구상을 젊은 학자들과 밤새면서 의논하기도 했다. 2010년8월에는 예동근 고려대박사의 알선으로 일본의 조선족연구학회와 한국의 재외한인학회가 공동으로 첫 국제세미나를 서울 교려대학의 아시아연구소에서 개최하여 해외한인을 연구하는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였다. 이듬해는 부산의 부경대학에서 역시 예동근교수의 알선으로 제2차국제세미나가 개최되여 많은 학자(한국학자와 조선족학자)들이 서로 교류하는 장으로 되였다. 한국에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족들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그들의 민족의식과 조국관은 어떠한가? 앞으로 풀어가야할 과제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조선족의 글로벌 네트워크 나아가서는 전세계 코리안의 글로벌 네크워크는 중일한을 중심축으로 형성되여가고 있으며 그중에서 두개의 조국, 세개의 조국, 네개의 조국을 가진 초국경적 인간들의 정력적 활동을 통하여 린근 나라와 나라와의 국제적 경제문화 교류가 활성화되고 지역공동체가 추진되여가고 있다. 이 또한 우리 조선족들의 삶의 의의와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면 국제정치나 국제사회에서 서로 이산된 우리민족과 분렬된 민족국가의 갈등과 대립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비극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한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마이노리티로 살아오는 우리 조선족은 너무나 나약하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서 경제교류 문화교류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함으로 국제정치의 흐름을 바꾸어가는 것으로써 우리의 힘을 과시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유대인이 나라의 정치를 무대뒤에서 조종하고 영향주듯이 우리들도 소속되는 각나라에서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19    17.네개의 조국을 가진 기쁨과 슬픔1 댓글:  조회:2839  추천:3  2013-03-19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7.네개의 조국을 가진 기쁨과 슬픔1   나는 자기의 인생을 통하여 ‘동북아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였다. 그 의미는 조선반도는 나의 조상의 나라니 조선이나 한국은 나의 조국이며 중국이나 일본도 나의 조국인 것이다. 이 네개 나라가 모두 나의 조국이다. 일부 조선족학자들이 조선반도는 ‘고국’이고 중국이 ‘조국’이라는 의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조국은 하나뿐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중국인이나 한국인들한테서 ‘어느쪽이 조국이냐, 축구시합하면 어느쪽을 성원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를 변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 밖에 안된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로전쟁 후 살길을 찾아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간도땅에 왔다고 한다. 내가 태여날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중국의 만주땅에서 태여나 자라났으니 중국 또한 나의 조국이다. 21년전에 일본에 이주하여 아들은 일본에서 태여나고 지금은 일본국적이 되였으니 아들의 태여나 자라난 나라는 일본이다. 근대 백여년의 력사는 나의 가족사와 나의 활동범위로 보면 어느 나라나 나의 조국인 것이다. 그 의미는 나는 나의 조국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배반할 수 없고 어느 나라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만약 축구시합을 한다면 나는 약한팀을 응원한다. 약한팀이 열심히 노력하여 강한팀을 이긴다면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한국/조선인들이 전후60년간 자기들을 지켜오고 문화를 지켜온 것은 감사할 일이다. 허나 현실적으로는 재일교포가 2세,3세,4세로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국적을 얻고 일본인으로 전변되는 과정이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정치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의 자연적 법칙인 것이다. ‘반일’이라는 정치속에서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강조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실 두개 또는 세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는 다문화인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조선족들이 처음에는 한국이 조국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 갔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중국이 자기의 조국이라고 재인식하는 과정과 같이, 재일 교포도 한국에 갔다가 역시 일본이 자기의 삶의 터전이라고 인식하는 과정은 거의 일치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50만명의 조선족중 10만정도는 한국국적이나 영주권을 얻어 한국사회에 포용되면 자연히 한국인으로 변화할 것이다. 나의 처제도 일본에 류학왔다가 한국남자와 결혼하여 서울에 가서 살고 있는데 조선족이니 중국사람이니 하는 것은 본인의 마음속에 좀 남아 있을 뿐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들이나 가족은 완정한 한국인인 것이다. 거기에 자녀교육에서 ‘너는 조선족 혹은 중국인의 후대다’ 라는 교육은 할 수도 없거니와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한국의 조선족학자나 지성인들이 자녀교육에서 ‘너는 조선족이다’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 될 것이 아닌가? 일본의 조선족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의 아들애도 ‘너는 조선족이다’라고 하면 아빠가 무슨 옛말을 하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아들애도 이젠 커서 금년에 대학생으로 되는데 앞으로 민족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너는 일본에서 태여나고 일본국적이니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해야하지만 너는 또한 특수한 배경을 가진 일본인이며 너의 뿌리는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으로 뻩혀 있기에 이 나라들이 장래에 너의 중요한 인생 무대가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나 세계를 무대로 할 수도 있다’ 라고 하였더니 대학시험이 끝난 후 자기 스스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도 기실 탈 조선족현상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전국 각지로 확산되는 조선족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2세,3세가 되는 때는 한국이나 일본과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10년전에 미국 워싱턴에 방문조사로 갔을 때 조선반도문제을 연구하는 학자 한분을 만나서 홈파티에 초대 받았는데 그분은 유대인 독일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시민으로 태여났고 안해는 한국인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자식은 어느 나라사람이고 무슨 민족이라고 할 것인가? 고 농담으로 물었더니, 미국사람이며 지구사람이라고 대답하였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21세기의 세계는 글로벌화시대이며 우리의 생활환경은 격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사고방식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19세기나 20세기의 사고방식으로 21세기를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골동품세계나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전에 론문에서 지적한 바가 있는데 100년전에는 ‘중국조선족’이란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10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개혁개방 30년에 조선족이 200만명에서 140만명으로 줄어 들었다. 동북의 전통적 집거구에 남아 있는 조선족은 100만도 안된다. 즉 30년간에 절반의 인구가 조선족집거구에서 중국전토로, 세계로 나가 버렸다. 앞으로도 조선족 젊은이들은 80%이상이 전통적 집거구이외에서 생존의 길을 찾을 것이라고 나는 예측한다.    나와 같이 네개의 조국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의 세대이고 후세의 아이덴티티나 인생은 내가 결정하거나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다만 부모로써 자식들이 자기 부모나 선조들의 슬기로운 인생지혜를 물려받아 훌륭한 인생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18    16. 일본의 조선족사회 댓글:  조회:3063  추천:6  2013-03-09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6. 일본의 조선족사회   나는 일본사회에서 얻은 힘을 조선족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언제나 자기의 직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2001년에 동경재단 재직중 일본에 있는 조선족단체들을 련합하여 공동 이벤트를 하여 조선족사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갈 구상을 하게 되였다. 왜서 그런 구상을 하게 되였는가? 기실 나는 북경에서 일본에 류학했기 때문에 일본에 와서도 조선족들과의 연대관계가 깊지 않았다. 친구들의 대부분은 중국류학생들이였다. 립교대학원에 있을 때는 중국류학생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중국주일본대사관의 교육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1년에 고향을 떠나 북경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이미 조선족사회를 떠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활동하는 범위가 중국인 사회가 위주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사업에 참가한 후에도 조선족 친구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것은 생활 공동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북경에 있을 때는 지식인으로 자처하면서도 나는 조선족이란 무었인가? 조선족사회란 무었인가 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더우기  이런것들이 갖고 있는 의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조선족에 관한 력사나 현황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전공도 조선족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조선말을 할 수있고 김치를 먹으니 조선족이라는 단순한 관념이 있었을 뿐이였다. 나는 연변출신이지만 연변의 농촌사회에서 살았기에 조선족사회라는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고 주류사회와의 관계도 전혀 없었다. 북경에서의 10년간 생활도 조선족활동에는 일부 참가하였으나 조선족주류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우연한 기회에 조선족사회와의 거리가 급속히 가까와 졌다. 1992년봄,나의 형이 일본에서 참여하고 있는 연변대학 교원출신들의 류학생조직인 ‘동방학우회’ (東方学友会)에서 꽃구경 모임에 나를 불러 주었다. 그 후부터 매년 이와 같은 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대학의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였다. 한편 나의 대학원 석사과정의 연구테마가 ‘두만강 지역개발과 동북아시아 경제협력’으로 되였기에 나는 두만강지역과 관련된 연변의 경제와 사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것이였다. 1995년에는 연구자의 신분으로 연변의 훈춘시 및 그 산하  경신향, 방천지역을 방문조사하였다.  1996년에 ‘천지구락부’라는 조선족 단체에서  두만강개발 현황에 관해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조직은 동경에서 류학하는 조선족 젊은이들 5,6명이 1년전에 모여서 만든 단체로서 ‘교류, 협력, 발전’이라는 취지로 매달 교류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북경 등지 출신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여 지역과 관계없이 조선족들이 모이는 장소였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여 관심이 있었고 또 나의 연구에 대하여 보고를 초청받으니 쾌히 응낙하였다. 이 보고회를 통해 나는 많은 조선족류학생들(대부분은 중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경헙이 있는 나와 같은 신분)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연대출신의 친구들도 많이 참가하였기에 여기에서 처음으로 조선족 젊은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을 진행하는 가운데서 1999년1월에 연대출신의 연구자가 중심이 되여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게 되였는데 나도 여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6명이 첫 연구회에 참가하였는데 나를 제외한 5명은 모두 연대교원 출신들이였다. 회장은 리동철(나의 형)이였다. 2,3개월 정도에 한번씩 연구회 모임을 했는데 각자가 자기 연구분야의 보고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연변의 력사나 조선족의 력사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족단체가 이렇게 3개 단체로 발전하였고 나는 어느 단체의 활동에도 참가하는 신분으로 되였다. 천지구락부(2002년에 ‘천지협회’로 개칭) 에서2000년12월 송년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면서 조선족의 현황과 미래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제안이 있어 나한테 토론회를 조직하고 사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다. 메지로대학(目白大学)의 강당을 빌려서 개최한 송년회전의 토론회에는 처음으로 100여명의 조선족 젊은이들이 참가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류학생들이였고 일부분은 회사직원이였다. 열렬한 토론회를 마치고 송년회도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조선족 젊은이들의 정열과 파워를 여기서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조선족들의 파워를 키우기 위하여서는 련대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일본에 있는 3개 단체가 공식적으로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았다. 기실 나는 일본의 학회나 심포지엄에 많이 참가하고 2000년에는 동아시아 종합연구소가 주최하는 대만에서의 심포지엄의 사무국장도 맡은 적이 있어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2001년4월에 나는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되였다. 연구프로젝트의 조직적사무가 많아 나에게는 연구조수를 초빙할 수 있는 자금예산이 주어졌다. 나는 당시 게오대학(慶応大学)대학원 박사과정에 금방 입학한 리성일씨(북경대학출신, 현재 한국동서대학의 조교수)를 연구조수로 초빙하게 되였다. 나는 연구의 틈을 타서 조선족심포지엄을 개최할 기획서를 작성하여 리성일씨가 사무국장을 맡도록 위탁했다. 나는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3개단체의 대표 등 중심적 인물들을 10여명 모아서 제안했다. 참가자들은 ‘좋은 제안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그런 대규모의 활동을 조직할 수 있는 경험도 조직력도 자금도 없어서 성공할 수 있겠는가?’고 반신반의 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에게는 열정이 있고 그 열정으로 조직하면 자금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여 그들도 마지막에는 지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제1차재일본 중국조선족국제심포지엄’이 동경복판의 메지로대학 강당에서 조선족3개단체의 공동주최로 개최되였다. 일본의 유명한 학자나 전문가들도 이 심포지엄에 초청하여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과 조선족의 역할’이라는 공동테마로 열렬한 발표와 토론을 전개하였다. 150여명이 참가한 처음으로 되는 대형활동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여 조선족의 존재를 일본사회에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족연구회도 이 심포지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발전되였다. 조선족연구를 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나 재일본한국조선동포 학자들도 연구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제2차 재일본 중국조선족 국제심포지엄’은 2005년12월에야 기획하였다. 일본에서 우리의 가난한 류학생 단체들이 모여서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은 기실 너무나 힘든 일이였다. 그러니 매년 이런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결국4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준비를 하게 되였다. 제1차는 일본국내(동경권)에 한해서 기획했는데 4년동안 우리의 힘은 어느 정도 성장되여 제2차는 중국과 한국의 학자와 매스컴관계자들도 초청하여 조선족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였다. 일본의 국제교류재단의 자금지원도 요청하고 조선족 기업가들에게도 참조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나고야에 있는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의 류경재소장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더니 전면적으로 지원 하겠다고 답복이 왔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북경의 유명한 조선족학자 황유복교수와 사회과학원의 정신철교수를 초청할 수 있었고 흑룡강신문사의 한광천사장과 연변테레비의 량성철기자도 초청하였다. 또한 연변성보그룹의 사장3명도 초청하여 참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조선족 연구 학자 이진영교수와 최우길교수 2명도 초청하였다. 이 심포지엄은 력사상 처음으로 중일한의 조선족지성인과 연구자들을 한자리에 모이는 장소로 되였다.그것도 선진국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말이다. 또한 일본의 유명한 인사 아사히신문의 후나바시요 이찌(船橋洋一)편집장과 동경대학 강상중 (姜尚中) 교수가 기조강연으로 참가해 주었다. 3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일본의 매체와 화인매체 그리고 재일동포매체도 참가하여 보도를 내보냈다. 2009년12월에 개최한 제3차 심포지엄은 처음으로 일본의 조선족연구학회, 중국의 중국조선민족사학회(회장 황유복교수), 한국의 동북아공동체연구회(회장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등 중일한3개국의 연구단체가 공동주체로 개최되였다. 흑룡강신문의 한광천사장은 많은 기업가들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가했으며 연변 조글로의 김삼회장도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조선족의 국경을 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플래트홈이 되였다. 특히 이번 모임은 조선족 연구학자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기업가나 일반시민, 여성조직, 류학생조직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일본조선족의 최대 행사로 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일본의 최대신문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도 특별취재를 하여 신문1면과2면에 전문보도를 해주어서 조선족들의 활약은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2011년12월에는 교토(京都)에서 제4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일본의 동경지역에는 조선족단체가 많이 활동하고 있으나 관서지역에서는 비록 조선족들이 수만명이 있으나 조선족단체가 없는 상태였으며 2007년12월에 조선족연구학회 관서부회(関西部会)를 교토에서 설립하여 류꼬꾸대학(龍谷大学) 리상철교수가 회장을 맡아 주었다. 처음으로 되는 조선족 관서지역의 활동이며 조선족사회를 네트워크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중일한의 6개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조선족연구학회가 기획 조직하고 공동주최로 중국조선민족사확회, 한국재외한인학회, 류꼬꾸대학 사회과학 연구소, 조글로, 전남대학 한상연구재단 등 단체가 참가하고 중국,한국,미국 등 나라에서 3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및 메스컴 관계자가 참가했다. 연변텔레비방송국 위성방송의 기자3명이 전문취재팀을 구성하여 취재하였으며 2012년2월5일에 ‘두만강’프로그램으로 방송되였다.  이외에도 일본에는 조선족단체가 수년간 많이 형성되였다. 2002년경에는 동북아청년련의회라는 조직이 류학생들의 축구팬을 중심으로 설립되여 10여년간 매주 토요일에 축구훈련과 시합을 위주로 교류활동을 활발이 전개하고 있으며 조선족단체의 국제심포지엄이나 기타 여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근년에는 조선족축구팀이 5,6개가 형성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되여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당시 류학생이였던 젊은이들이 창업을 여기저기서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인맥을 리용하여 조선족의 특색을 살리면서 우후죽순 처럼 기업이 탄생되였다. 주로는 무역업, IT업, 건축설계업, 부동산업, 려행업 등 업종이였다. 또한 조선족 여성기업가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주로는 음식업이였다. 연변요리, 조선족요리, 동북요리 등을 특색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현재 동경시내의 조선족요리점은 30개 정도로 발전하여 조선족들은 고향음식이 그리운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싫어하는 개고기 요리도 당당하게 메뉴로 나오고 있으며 양고기뀀도 특색있는 인기요리로 되였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사람들의 미움을 살가 두려워 개고기 요리는 감히 입밖에도 못내는데 조선족 젊은이들은 용감하기도 하다. 현재는 조선족요리점에 조선족 뿐만아니라 한국인, 중국인 지어 많은 일본인들도 상객 (常客)으로 되였다. 개고기 맛을 붙인 일본인도 적지 않다. 참으로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고 조선족 젊은이들이 일본의 식문화에 큰 쐐기를 박아 넣은 셈이다. 조선족기업가들이 많이 나왔지만 기업인들의 조직이 없으면 기업의 장구적 발전에 불리하니 기업인조직을 만들자고 천지협회 교류회에서 여러번 문제제기가 되였다. 헌데 조직을 하나 세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조선족은 문화와 경제로 자기들의 생존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젊은 인테리나 인테리출신의 기업가들한테서 생겨나고 확대되였다. 이런 와중에 재외한인무역협회(OKTA)라는 조직이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에도 4개지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OKTA동경지회의 회장이 나한테 조선족기업가들도 참가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한국인들의 조직이니 조선족이 그 속에서 발전할 기회가 있겠는가?는  회의적인 생각이였다.  한편 ‘어떤식으로 조선족기업가 조직을 만들 것인가?’ 에 관하여2006년경에 나와 관계자들이 여러번 모임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가을에 나고야에 있는 류경재소장이 OKTA의 한개지부로 설립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거기에 호응해서 천지협회의 이사들의 서로 의견교환한 결과 OKTA치바지부로 출범하기로 했다. 9월26일 치바시의 한 호텔회의실에서 성립대회가 열리고 박경홍 사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나와 천지협회이사들이 이사를 맡아서 출범했다. 나는 기업가는 아니였으나 기업가조직을 만들어 키워가기 위하여서는 직접적으로 조직에 참가할 필요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조직이 너무나 힘이 약해서 금후에도 유지되겠는가? 내외로 근심도 많았다. 한국에 있는 본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동경지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5년간의 노력을 걸쳐 지금은 제3대회장이 탄생했고일본의 유일한 조선족기업가 조직으로 건전하고 활발하게 발전해가고 있으며 차세대무역스쿨도 4년동안 조직하여 젊은세대 기업가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조직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전정선국장도 훌륭한 활동가이다. 일본에 오기전에는 상해에서 기업가로써 성공하고 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니 사업을 그만두고 일본에 이주했다. 전국장은 사무국장을 하면서 한편  2008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여성회를 발족시키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예활동과 어린의들의 조선말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서지역에서도 조선족단체들이 하나 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오사카 경제법과대학(大阪経済法科大学)오홍민 부교수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단체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기실 관서지역에도 수만명의 조선족들이 생활하고 공부하고 있다. 기업가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에로의 조선족진출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학자, 연구자, 류학생들로 시작되여 현재는 5-6만명규모로 되며 일본에서의 조선족사회가 근10년간 형성되여가고 있다. 대부분은 류학생으로 왔기에 중국의 젊은 지식인이나 엘리트들이 많이 와 있다.한면 일본에도 불법입국이나 불법체류로 돈벌이을 위하여 온 조선족들도 있다. 그중에는 3개국언어를 구사하면서 일본의 범죄조직과 결탁하여 비법이나 범죄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일본의 매체에 가끔 보도되고 있다. 근년에는 일본정부의 불법체류자 적발과 축출이 엄해지면서 그런 사람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조선족 발전사도  잘 정리하면 전체 조선족역사의 일부분으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일본사회를 여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한 내용은 전체의 흐름과 현황에 대한 소개이며 론문으로 말하면 서론에 불과하다. 조선족류학생 연구자나 일본의 학자 연구자들 가운데서 일본의 조선족을 여러 측면으로 연구하는 학문도 서서히 전개되여 가고 있다. 
17    15. 일본의 싱크탱크에서 댓글:  조회:2478  추천:1  2013-03-04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5. 일본의 싱크탱크에서   2000년 봄에 나는 박사과정을 졸업하였으나 다음의 발자국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이 때는 일본에서 박사를 졸업해도 취직이 아주 힘든 때였다. 일본인도 취직하기 힘든데 외국인이야 더 말이 있으랴. 또한 내가 연구한 동북아경제협력에 관해서는 일본의 동경권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는 큰 관심이 없는  전공이기에 취직이 더욱 힘들었다.   동아시아종합연구소와의 인연 그러던 중에 동아시아종합연구소(동경)라는 재일한국교포가 운영하는 연구소 강영지 소장과 이전에 니이가타국제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어 찾아 갔다. 이 연구소는 두만강개발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1991년에 당시 재일교포신문사 기자를 하고 있던 강영지 소장이 기자를 그만두고 설립한 민간연구소였다. 강소장은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면서 연구소에서 [북조선년감]을 번역출판할 예정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해 8월에 대만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협력을 테마로 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였는데 준비 사무국장도 맡아달라는 것이였다. 민간의 연구소로 재정이 부족하기에 월급은 얼마줄 수 없다는 것이였다. 일주일에 2,3일 정도 출근하여 밥먹고 살만하면 되니 월급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배울 수 있는 기회이고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면 나한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연구소에서 임시로 일했으나 배우는 것은 많았다. 특히 그해 8월에 대만의 타이페이(臺北)에서 개최하는 동북아국제심포지엄의 준비를 해야했는데 전반사무에 관여했기에 심포지엄의 기획부터 대회를 조직하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였다. 또한 대만에 갈 기회도 얻었고 동북아 각국의 유명한 학자 전문가 외교관 등을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번 심포지엄을 조직한 경험을 빌어 그 이듬해 동경에서 처음으로 조선족 국제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조직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국적인 경우 대만에 입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입국허가를 맏기 위하여 산더미같이 서류를 준비하여 일본에 있는 타이페이 주일본경제 문화교류처에 한달 전에 제출해야 했다. 제출은 했어도 허가가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회의 예정기일이 5일밖에 남지 않아 안달아 하고 있는데 다행이도 입국허가가 내려왔다. 만약 중국대륙에 있었다면 대만 땅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는 나한테 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만에 가서 구경도 잘했고 많은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물론이고 대회에 참가한 외빈들과 함께 대만의 전 총통인 리등휘(李登辉)사무실을 방문하고 1시간가량 좌담회를 가졌다. 리총통은 일본에서 류학하고 박사를 딴 분이기에 일본말이 능통하고 일본문화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웃음소리가 터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좌담회는 진행됐고 나중에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몽골 주일본대사도 이번행에서 친구로 되였다. 그가 공항에 도착하여 언어도 안통하고 길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내가 찾아가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였다. 나중에 몽골을 방문할 때에도 대사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신문기자의 인터뷰도 받아 생각밖에 몽골신문에 게재되였다. 또한 내가 지금 근무하는 호쿠리쿠대학의 이사장도 대회에 참가하여 식자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고 내가 하는 통역과 사무에 대해 높은 평가를 주면서 기회가 있으면 자기네 대학에 와서 사업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6년 후 이 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게 되였다.        일본의 정책연구전문가로 위의 연구소에서 일을 돕는 한편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사무국장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허나 이 연구소도 학회와 마찬가지로 민간조직이기에 재정이 아주 딸렸고 나는 그곳에서 보란티어로 일을 했었다. 그래서 사무국장은 나와 상의하여 연구프로젝트를 신청해 보자고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사카와평화재단(笹川平和財団)의 산하에는 동경재단 (東京財団) 이 설립되여 민간, 비영리, 독립단체로서 일본의 정책연구와 외국의 대학생 수천명을 대상으로 장학금지원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경재단에 연구프로젝트 신청을 했다. 연구테마는 [동북아시아개발은행(東北亜開発銀行) 설립과 일본의 대외정책] 이였다. 국내외에 유명한 학자 전문가 10여명을 조직하여 연구팀을 구성하였다. 그때 당시 나는 아직 무명소졸(無名小卒)의 대학원 졸업생이며 사무국의 보조일군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밖으로 연구프로젝트가 입선되여 3천만엔의 연구비가 지급되기로 되였다. 이 연구비속에는 나를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채용하는 비용도 포함되여 있다고 담당자가 알려주고 만약 다른 직업이 없으면 연구원으로 들어와 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생각밖의 운이 닥쳐와 나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였다. 일시적이기는 하나 나의 직업문제와 생활문제가 동시에 풀린 것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노력하고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에서 열심히 일을 한 것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크나큰 보답을 해주었던 것이다. 드디여 2001년4월 1일부터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일본에서의 첫 출근을 하게 되였다. 우리 연구팀의 대표는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이사장 도조언(대만출신) 교수이고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연구팀 멤버로는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9명의 금융개발 전문가로 형성되여 그야말로 국제적 연구팀이였다. 사무국장인 나는 전력을 기울이여  국제적 조사연구를 조직했다. 우리 연구팀은 분조를 나누어 일본정부의 금융 및 정책관계부문, 동북아 각국의 금융 및 정책관계부문을 방문하고 조사연구를 벌이는 동시에 세계 각 지역의 개발금융 국제기관을 방문조사하였다. 필리핀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 싱가포르의 APEC사무국, 미국워싱턴의 국무성과 세계은행 총부, 뉴욕의 련합국 총부 아시아태평양사무국, 하와이 동서연구센터, 플로리다주의 아시아개발은행 원부총재, 그리고 영국런던의 유럽북흥개발은행 등을 방문조사하여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의 근거와 가능성을 론증하였다. 드디여 조사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일본정부에 정책보고를 준비하였다. 이듬해(2002년) 7월29일 주밀하게 안배된 일정에 따라 연구팀대표와 나는 일본정부 관청에 들어가 내각부 관방장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2007년에 수상으로 됨)씨와 만나 우리의 정책제언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정부가 동북아시아개발은행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요망했다. 후쿠다 장관은 “훌륭한 연구성과에 감사드리며 정부로서 꼭 노력해 보겠습니다”고 전향정 답복을 주었다. 이 회견을 알선한 것은 사회민주당의 2명의 국회의원이였는데 그들은 1990년대에 결성된 환일본해 초당파 국회의원 포럼의 멤버들이였다. 회견이 끝난 후 국회기자 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우리의 정책건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는 처음 체험하는 일이고 또한 일본이라는 외국에 와서 외국인으로서 일본정부의 중추에 들어가 중요한 인물과 회담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드문일이다. 력사의 한페지에 기입해도 될 일이 아닌가.   아시아인개발연구센터 설립 그해 9월 동경재단의 연구과제는 끝나고 나는 다시 실업자로 되였다. 나이 40이 넘어서 박사급으로 일본사회에서 취직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였다. 1년반동안 멎지게 일해왔는데 금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년전에 일본친구를 통해 만났던 스기야마(杉山)라고 하는 작은 회사의 사장한테 연락하니 식사 한 번 하자고 했다. 그 사장이 이전에 만났을 때 ‘동북아시아인’이라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함께 아시아를 위한 사업을 하자고 자기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사장은 당장에서 돈100만원을 내주면서 생활이 곤난할텐데 보태쓰라고 하며 자기의 회사에 나와서 싱크탱크를 설립하여 운영해 달라고 했다. 너무나도 놀랍고 반가운 일이였다. 그래서 그 회사의 사무실 한칸을 내여서 나에서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 그리고 매달 나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둘이서 상의한 끝에 ‘아시아인 개발연구센터’라는 이름으로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사회명류 몇 명을 조직하여 조직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스기야마는 전무리사를 맡아 아시아의 발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여러가지 사업기획을 짜고 활동을 시작하려하는 중에 국립 나고야 (名古屋大学)대학의 히라카와(平川)교수로부터 대학에 와서 반년동안 외국인 연구교수를 맡아 달라는 것이였다. 연구소를 설립하여 사업을 해보려던 나는 망설이게 되여 스기야마사장과 상론하였다. 그는 ‘너한테는 대학에 가는 것이 적합하니 연구소는 업여로 하고 대학에 가는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주어 그 말대로 나는 2003년3월부터 나고야대학으로 들어갔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의 교수들과 똑 같은 대우를 해주고 연구실도 내주었다. 가족은 쉽게 이사할 수 없으니 집을 떠나 단신으로 나고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년동안 자유롭게 자기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NIRA연구원으로 나고야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중에 인터넷에서 인재모집 광고가 눈에 띄웠다. 종합연구개발기구(NIRA: National Inatitute for Research Advancement)라는 연구소에서 지역개발전문의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것이였다. 이 연구소는 일본정부 경제기획청(経済企画庁,중국의 国家发改委에 상당함)이 1960년대에 설립한 국가발전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는 국책연구소로 일본의 최고급 연구기구이며 국제상에서도 유명하다.중국에서 말하면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이나 국가발전개혁위원회산하의 연구소와 같은 위치였다. 국책연구소이니 외국인으로서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모집요항에는 외국인에 관한 제한이 없었다. 동북아지역에 관한 개발연구의 전문가를 모집한다기에 한번 신청해보자고 생각했다. 선제 모집조건은  박사급 40세이하로 영어로 연구교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미43세인 나는 년령조건에서 이미 가능성이 없었다. 허나 정책연구에는 이미 실적이 있고 또 동북아경제에 관한 전문에서도 실적이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사무국장한테 상의하였다. 사무국장이 이 연구기구의 전무리사를 하고 있는 원국회의원 한테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에 답이 왔는데 원국회의원이 NIRA의 이사와 상담해보았는데 일단 년령조건은 제외하고 연구업적과 능력으로 선발하기로 했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인츰 신청자료를 준비하여 보냈다. 1개월가량 지나서 1차의 서류심사에 합격되였으므로 면접시험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젠 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소정한 날에 면접시험에 참가했는데 시험 후 1시간가량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사장이 면담한다는 것이였다. 합격이 되였다는 의미라고 판단하고 마음속으로는 격동됨과 동시에 긴장하기도 하였다. 이사장은 원경제기회청의 사무차관으로서 중국에서 말하면 부부장급의 고관이였다.    이사장사무실에 들어가니 이사장이 상냥하게 인사하고 “이선생의 훌륭한 연구업적으로 우리연구소의 사업에 관하여 많이 지도를 부탁드립니다”고 말하니 너무나 송구스러웠다. 나같은 미숙한 연구자한테 겸손한 어투로 지도를 부탁한다니 말이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제가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본국책연구소의 연구자로 되였다. 이 연구소의 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외국인 연구원이였다.   동북아 공동체의 장래비젼과 ‘동북아인’ 연구소에서의 나의 담당은 동북아 연구였다. 여러가지 연구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조직했는데 핵심적 연구프로젝트는 일중한이 공동연구하는 ‘동북아 그랜드 디자인(원경 발전설계)’였다. 동북아시아 지역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개발계획에 관한 연구였다. 중국과 한국의 연구 파트너로는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산하의 국토연구소와 한국의 국토연구원이였다. 3년간 나는 서울과 북경을 집문앞 나들듯이 출장다니고 몽골의 울란바트와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중국의 동북3성에서도 연구조사활동과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나날들로 숨가쁘게 보내왔다. 또한 련합국 공업개발기구가 주최하는 두만강개발에 관한 국제워크샵에 참가하기 위하여 독일 뮨헨 경유로 오스토리아(오지리)의 윈에도 출장하였다. 이 워크샵에서는 일본을 대표하여 참가하였으며 인생 처음으로 영어로 주제발표를 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참가하는 워크샵도 매년 북해도에서 개최했으며 일중한 FTA(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정책가능성연구도 다년간 진행해왔다. 최근에 일중한 3개국 정상회담에서  3개국간 FTA담판을 2012년중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였는데 그에 관한 기초연구는 우리연구소와 중국의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및 한국의 대외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10여년간 연구해서 매년 3국정상회담에 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일중한 3개국은 력사문제나 령토문제 그리고 국민감정의 갈등이 남아있으면서도 글로벌화 경쟁시대에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가 깊어지고 있으면 장래에도 서로 협력하여 공동발전하는 것이 력사적 추세라고 생각한다. 상호간의 대외무역이나 대외투자로부터 보면 서로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공생관계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이나 몽골, 러시아극동지역도 마찬가지로 동북아시아 각국간의 상호 의존관계는 전례없이 깊어지고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 공생관계가 불가피한 것이다. 10년, 30년, 50년이라는 시간축에서 동북아시아지역의 원경계획을 구상하는 것이 바로  동북아 그랜드디자인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아시아인’이나 ‘동북아시아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수립도 불가피한 것이다. 나는 국제회의에서 발표할 때는 언제나 “나는 동북아인입니다”라고 자아소개하는데 참가자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이 연구소는 젊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연구원을 모집하기에 3년간 계약으로 되여 있었다. 나는 3년간 전력을 투입하여 연구활동에 참가하여 상당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동북아시아 각국의 정책연구자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며 미국이나 유럽과도 많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 뿐만아니라 많은 연구단체거나 시민단체에서 초청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조선족을 일본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으며 또한 언제나 민족적 자부심을 느낀다.
16    14. 내 인생의 길을 바꾼 중요한 만남 댓글:  조회:2340  추천:6  2013-02-13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4. 내 인생의 길을 바꾼 중요한 만남 그러는중에 나한테는 인생을 바꾸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니 내가 찾아냈다. 1995년8월에 일본의 아시아경영학회와 중국 장춘의 길림성사회과학원이 장춘에서 두만강개발을 테마로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기간이라 한번 참가해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아직 알바로 생활하는 학생의 형편이니 한번 출국하여 회의에 참가한다는 것은 경제상으로 부담이 컸다. 허나 이것은 내가 두만강개발 령역에 발걸음을 들여놓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결심을 내리고 참가하기로 했다. 이번 국제심포지엄에서 나는 많은 두만강개발지역에 관한 지식과 개발구상에 관한 정보를 얻을수 있었으며 수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인생선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을 2명 만났다.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 (環日本海総合研究機構)라는 동경에 거점을 잡은 연구소가 있는데 그 연구소의 이사장 도조언(涂 照彦)과 사무국장 누쿠이 히로시(温井 寛) 가 회의에 참가하고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두만강개발을 포함한 동북아경제협력의 중심지가 환일본해 지역이였기에 지금도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연구소나 학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동경에 이런 연구회가 있고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일본해쪽에 가지 않아도 일류의 학자와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이 두분은 대단한 사람이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였다. 도조언 이사장은 당시 나고야(名古屋)국립대학과 교수였는데 대만출신으로서 동경대학에서 박사를 졸업한 일본에서 유명한 국제경제학 학자였고 1980년대에 니이가타(新潟) 대학에서 교수로 있을 때  처음으로 [환일본해국제경제권]을 형성할 아이디어를 논문을 통해 발표한 동북아경제권을 제창한 첫사람이였다. 누쿠이 히로시 사무국장은 일본사회당의 사회신보(社会新報) 편집장을 오래간 담임하고 있어 사회주의권의 여러 나라들을 많이 취재한 경험이 있는 유명한 국제파 기자였다. 1990년대초부터 일본의 정치가들은 [환일본해 초당파국회의원 포럼]을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환일본해 국제경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사회당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의 동북아연구의 일류 학자들과 정치가들을 조직하여 만든 연구소였다. 장춘회의가 끝나자 나는 연변의 훈춘으로 향했다. 연변태생인 나였지만 인생 처음으로 훈춘이라는 곳에 가 보게 되였으며 훈춘경제개발구를 현지고찰하고 조사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그길로 조선의  라진까지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국수속이 순조롭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 국제회의 참가와 현지고찰의 덕분에 나의 석사론문은 식은죽 먹기로 써낼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경에 돌아온 후 나는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누쿠이 (温井) 사무국장을 찾아간 일이다. 다망한 중에서도 기꺼이 나를 만나 주었다. 나는 자신의 상황을 소개드리고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하였다. 누쿠이 선생은 자기의 성이 온정(温井) 이기에 금강산의 온정리가 자기의 고향일수도 있고 자기의 선조가 조선사람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1970년대부터 김일성주석을 3번이나 단독 취재한 일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인자하고 박식한 분이여서 이야기 나누기도 쉬웠다. 나중에 이분이 나의 인생의 길잡이를 해주고 아버지처럼 가족적 관계를 만들어 주기도 한 참으로 내 인생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결혼은 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는데 우리를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한 가족처럼 사랑해 주었다. 설명절마다 자택에 초대해주고 일본의 전통적 설명절 료리를 대접해 주었다. 또한 나의 아들을 친 손자처럼 대해주고 세배돈도 매년 꼭꼭 주었다.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가루이자와(軽井沢)에 별장 한채를 가지고 있어서 매년 여름이면 자기의 별장에 초대하여 3,4일씩 같이 생활하였다.       사업상에서는 나를 젊은 연구자로 길러 주었다. 이 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을 나한테 맡겨주고 많은 지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매년 니이가타에서 개최되는 동북아경제포럼에 나의 려비까지 대주면서 같이 다녔다. 나의 학술적 활동면이 급속히 늘어나고 일류의 학자들과 국회의원들과의 인맥도 급속이 확대되였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원총리들과도 연구회나 학회에서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한편 나는 대학원에서 박사론문에도 정력을 넣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학의 중국류학생회 회장도 맡으면서 중국대사관과의 관계도 넓혀졌다. 형의 관계로 연변대학 일본학우회의가 조직하는 활동에도 가끔 참가하면서 연변출신의 학자교수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생겼다. 1995년에는 천지구락부(天池倶楽部)라는 조선족류학생 단체가 동경에서 성립되였는데 나는 조선족사회와의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이듬해에 연변대학출신의 정선생의 초대로 천지구락부에서 조직한 모임에  보고자로 참가하여 두만강개발상황을 보고 했다. 그후로부터 점차 일본의 조선족 사회와 교류가 많아졌고 천지협회의 부회장도 맡으면서 조선족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15    13. 일본땅에서 새로 개척하는 인생의 길 댓글:  조회:2389  추천:4  2013-01-28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3. 일본땅에서 새로 개척하는 인생의 길   1991년 4월에 일본에 가는 비자를 받고 5월11일의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출국한다고 해도 유학비용이 준비되지 않았다. 그때 나의 월급은 겨우 150여원이여서 아끼고 아껴서 저축을 한다고 해도 출국비용 마련은 불가능 했다. 일본에 가는 편도 항공권이 2400여원이였고 일본어 학원학비 50여만엔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가 출국할 때도 여러 친척들한테서 돈을 빌렸다. 나까지 출국하자니 나의 월급의 50배내지 100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는수 없이 또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손을 내밀어 출국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끝내 일본에로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되는 출국이라 흥분된 기분이였다.     일본의 나리타(成田)공항에서 반년만에 안해와 만났다. 새로운 일본생활이 시작되였다. 안해는 동경신쥬큐의 헐어빠진 목조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일어학원은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있어서 자전거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아파트는 침실한 칸에 작은 부엌 한 칸이 있었는데 낡아빠져서 밤이면 쥐가 천장에서 살판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던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왔으나 나의 눈에 들어오는 첫 인상은 자전거가 생각밖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는 모두 자가용차를 쓰고 있다고 상상했기에 북경의 자선거 세계로부터 선진국의 자동차 세계로 들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동차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자전거가 많다는 것은 상상밖이였다. 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원에 가면 홈레스()가 많이 있었다. 왜서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 집없이 유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거기에다 동경의 중심에서 쥐가 살판치는 주택에서 사니까 선진국이라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북경이 좋다고 생각들 때도 가끔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암흑면에 지나지 않지만.     오전에는 일본어학원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알바 찾기에 열중했다. 금후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안해는 시부야의 라면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으니 일단 밥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다음학기의 학비를 벌어야 하고 나중에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빚도 갚아야 했다. 무슨 일이나 상관없이 돈벌이를 할 수 있으면 뭐나 다 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로 말하면 일본어학원은 일본에 올 수 있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나한테는 일본어 공부가 거의 필요 없었다. 최고급 일어반에 배치되여도 교실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업만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알바정보책을 찾아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루에도 몇 십번씩 전화하여 찾았더니 드디어 청소공으로 일거리가 생겼다. 신쥬쿠(新宿)의 동경도청과 마주한 곳에 있는 NS빌딩의 청소였다. 아침6시부터 8시까지 오피스청소이니 일찍 일어나서 자전거를 10분정도 타고 갈 수 있었기에 편리했다. 시급과 교통비를 포함해서 2시간에 2500엔이니 괜찮은 알바였다. 또 저녁에도 6시부터 8시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오후시간에도 알바를 찾았는데 포장 폐지를 회수하는 일이였다. 매일 트럭을 타고 상점거리 등을 돌아 다니면서 일했다. 시급은 900엔이였는데 만족되지 않아 또 새로운 일을 찾았다. 이번에는 부동산광고를 배부하는 일이였는데 시급은 1500엔에 하루에 4시간씩 할 수 있었다. 4시간 동안에 광고지6000장을 동경도내의 집집의 우편통에 포스팅하는 것이였다. 때는 삼복철이라 날씨가 무더워 말이 아니였으나 배낭에 10여킬로그램 되는 광고지를 넣어서 메고 걸어다니면서 4시간내에 6000장이나 배부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허나 시간급이 높았기에 이를 악물고 해나갔다. 정오12시면 일어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다음 일장소로 향해야 했으며 4시간동안 달아 다니다 싶이 광고지를 배부하고 그길로 또 저녁 청소일 장소로 달려가야 했다. 그것도 신체장애자의 몸으로. 이렇게 삼복계절에 한달동안 올리뛰고 내리뛰고 했더니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가 터졌다. 그래서 오후의 알바는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신체가 약해졌으니 당분간 오후시간은 휴식하였다. 허나 오래동안 휴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알바 찾기를 시작했다. 어느 일요일에 형의 집에 놀러 갔다가 신문지에 따라온 알바 정보에 나에게 합당한 알바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국제 택배회사에서 해외에 보내는 서류를 포장하고 주소를 붙이는 일이였다. 시간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전화한통에 이튿날 면접하니 곧 오케가 내렸다. 오피스에서 일하고  시급은 1000엔이니 괜찬은 일거리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회사는 TNT Express Co. Ltd.라는 외국회사로써 미국, 영국, 오스토라리아, 홍콩 등에 거점이 있었다. 여려가지 화물이나 서류들을 국내의 회사에서 받아가지고 그것에 수출서류를 작성해서 공항까지 운송하도록 하는 일이였다. 즉 국제무역과 관련된 일이였다. 영어도 필요하고 중국어나 한국어도 필요할 때가 많았으니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일이였다. 결국  이 회사에서 5년정도 알바로 근무했는데 회사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시급도 1200엔으로 오르고 하니 재미있었다. 회사의 인사부장으로부터 취직의향이 있는가고 문의가 있었으나 일생동안 직원으로 일하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허나 여기에서 열심히 일하니 생활하고 공부하는 학비에 빚을 갚고 애를 기르고 할 수 있었다. 안해와 둘이서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나중에는 저축도 되였다. 이 몇년간에 어느정도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닦아 놓았다.    인생의 목표와 선택        경제적으로는 자립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어떤 목표를 정해야 하는가? 나이31살에 북경에서 대학교수까지 했다고 하나 자기의 인생설계는 되여 있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대학원으로 가서 공부하는가? 아니면 취직하는가? 어느 길도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다. 공부를 계속하자니 대학교수까지 한 사람이 더 이상 무슨 공부를 할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고 해도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기는 매우 힘들다고 들었다. 대학교수를 몇 십년 한 후에 박사론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박사공부를 해도 곧바로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취직할 것인가? 기실 취직활동도 해보았으나 나처럼 학력이 높고  사업경험이 있어도 일본회사에서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적절하게 평가해주지 않으며 월급 대우도 일본의 대졸생과 같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제일 이상적인 선택은 중국과 무역을 하거나 중국진출 일본회사에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모로 활동해 보았으나 그런 기회도 아주 적었다. 즉 베스트(最佳的) 선택은 가능성이 거의 제로였다. 그렇다면 아무튼 대학원으로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다른 기회를 찾아보는 길 밖에 없었다.     일본에 온지 4개월만에 대학원 연구생의 길을 선택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정치학을 전공할 생각으로 동경대학 법학대학원의 연구생을 신청했으나 서류의 선고(選考)에서 떨어졌다. 처음 일본에 와서 일본식으로 서류작성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주위에서 누군가 지도해 줄 사람도 없었다. 불합격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반년 후에 또다시 동대연구생을 신청하려고 하니 제도적으로 일년내에 두번씩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제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접수하는 사무원의 태도가 너무나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러니 ‘그까짓 동대에 다시는 발길을 안돌릴 것이다’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다음의 선택을 생각했다.     일어학원의 상해출신 친구가  요코하마(横浜)국립대학에 찾아간다니 그럼 나도 그 대학에 가보자고 생각하고 서류를 작성하여 가지고 대학교 사무국에 가서 문의했더니 연구생 신청을 하려면 지도교수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럼 노동경제학 전문인 코우시로(神代)교수를 찾아 달라고 했다. 예약이 없이 교수면담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사무국에서는 교수한테 연락해 주었다. 내가 노동경제학교수를 선택한 것은 경제학전공을 하려고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국제경제를 배워보려는 생각은 대학입학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철학전공보다도 경제학전공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기에 추상적 이론으로 일관된 철학공부를 하는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와서 경제학을 배우려고 해도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연구생을 지망한다고 해도 실머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노동경제학이였다. 중국에서 공회학 (노동조합)론을 교수한 경험이 있기에 노동과 관계되는 경제학부터 들어가보자는 타산이였다. 코우시로교수가 마침 연구실에 계시였기에 만나주었다. 당장에서 면접하였다. 나의 이력서와 연구계획서를 보고 첫 질문이 “너는 공산당 간부냐?”라는 것이였다. 왜냐하면 공산당대학원의 학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런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관한 연구를 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내가 중국에서 사업한 중국공운학원의 상황을 소개하였다. 그랬더니 교수는 당장에서 사무국에 전화하여 서류를 접수하라고 지시했다. 생각밖으로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연구생이란 일본에서는 대학원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위한 전단계 지도를 하는 과정이였으며 학력으로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업료도 대학원생의 절반정도로 아주 싸게 받는다. 나에게는 이상적인 선택이였다. 왜나하면 일본에 온지 1년도 되지않기 때문에 경제상에서 부담이 적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연구생공부는 학점이 없기에 지도교수의 수업만 출석하면 되는 것이다. 자비유학하는 가난한 나로써는 알바를 하는 시간이 확보되였기 때문이다. 매 주일 지도교수의 수업에 한번 참가하고 그외 시간은 알바에 전력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안해의 체류자격을 가족체류로 바꿀 수 있었다. 그 후부터는 부부둘이서 전력으로 알바를 하여 자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국내에서 진 빚을 갚고 부모의 생활비를 송금하고 가족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2년동안 이렇게 ‘연구생 공부’를 했다. 허나 연구생자격은 2년이상 연장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본에 체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해의 요코하마국립대학원의 경제연구과 입학시험을 보려고 원서서류를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며칠후에 사무국에 갔더니 생각밖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시험자격이 없다는 것이였다. 이유는 대학원에 들어가는 조건은 ‘16년이상의 정규교육을 받은자’로 되여있기 때문이였다. 나는 대학은 졸업하였으나 소학교로부터 고등학교를 다닌 기간이 10년밖에 않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의 교육체제 때문이였다. 나는 학부장을 찾아가 “중국에서는 이런 체제였기에 어떻게하면 좋은가?”고 상의 했으나 이력서대로는 시험자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였다. 일본의 제도는 이렇게 딱딱하구나 라고 생각하였으나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대학원을 찾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력서 작성방법도 일본의 제도에 맞추어 거짓말 절반 16년으로 고쳐 버렸다. 이것은 이력서위조행위로써 발각되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허나 문서주의(文書主義)에 집착하는 일본의 제도이기 때문에 서류상에서 부족하거나 전후 모순이 없다면 순조롭게 통과되는게 또한 일본의 제도이다.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대학원에 들어가는데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려면 영어시험을 보아야 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구미에서 도입된 학문이기에 영어나 독일어로 원전(原典)을 독해(讀解)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게 그 이유였다. 나의 영어지식이라면 대학에 입학해서 2년간 A,B,C,부터 시작한 기초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어시험이 없는 대학원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영어공부에 또다시 도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영어독학(獨學)을 시작한 것이다. 서점에서 영어책과 CD를 구입해서는 전차에서 공부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알바가 많기에 영어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시간이 전차에서만 왕복으로 2시간정도 걸렸다. 그러니 전차가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여유 시간이였다. 그리고 공부결심을 크게먹기 위하여 투자를 한다는 의미에서 영어사전(Randam House)을 1만4천엔 주고 사기로 했다. 이것을 계기로 나의 인생에 꼭 영어라는 관문을 돌파한다는게 나의 결의였다.   나중에 립교대학 경제대학원에 시험을 보았는데 무사하게 통과되였다. 석사과정 에서 박사과정까지 그대로 줄달음쳐서 달렸다.   대학원의 입학통지를 받았을 때는 안해가 임신하여 출산이 가까이 닥쳐온 때였다. 1993년 12월29일에 첫 아들이 출생하여 나는 아버지로 되였다. 대학원입학과 아들의 출생은 두가지 경사가 겹친 것으로써 기쁜 일이였다. 허나 직업도 없이 공부하는 몸으로 어떻게 가족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과제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출생한지 3개월 밖에 되지않는 아들을 고향의 외가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연구테마로 결정된 인생의 목표 방황중에서 대학원에는 들어갔으나 무엇을 공부하고 연구할 것인가? 어떤 장래의 인생설계를 할 것인가? 하는데 관하여서는 여전히 목표가 설정되지 않았다. 일단 노동경제학을 공부한다고 입학계획은 세웠으나 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내가 선택하려고 했던 교수의 연구방향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아서 지도교수를 바꿀 생각을 하고 국제경제학에서 유명한 쿠보타 쥰(久保田 順)교수를 찾아가 부탁드렸더니 허락해 주었다. 기실 그 교수는 맑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였다. 강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였다. 중국에서 맑스주의 철학과 ‘자본론’ 등을 배웠으니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 가서는 맑스주의와는 이별하고 자본주의 경제학이론을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일본에 와서도 맑스주의 경제학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유닉한 일인가?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의 대학에서는 전후에 맑스주의 경제학이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많은 교수들이 사회주의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1950-60년대의 일본의 주요대학들(례를들면 토쿄대학, 쿄토대학등)에서는 대부분 대학생들이 맑스의 ‘자본론’을 공부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이 사회주의 중국보다 더 평등한 분배제도와 복지사회를 실현한 것은 당시의 대학엘리트들이 정부의 관료로되여 정책을 제정할 때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일본의 지성인들한테서 들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제눈으로 보고 친히 체험한 일본사회는 평등을 중시한 복지사회였고 자본주의 사회라는 감각이 크게 없다.   국제경제학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부하게 되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학부생들과 함께 마크로경제학과 미크로경제학 강의를 듣고 나아가서는 경영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일본의 대학원은 강의를 듣는게 위주가 아니라 자체로 책을 읽고 리포트를 발표하고 원생들이 함께 토론하는 형식이 많았다. 또한 자기의 연구방향과 석사론문 계획을 반년간에 결정해야 한다. 무었을 연구할 것인가? 많이 망설이고 있는데 경영학을 교수하는 한 교수님이 아시아경영학회가 있는데 그 학회의 회장 노구치(野口)교수 (게이오대학; 慶応大学)가 두만강개발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에 관한 보고회가 있는데 학생이 연변에서 왔으니 두만강지역의 상황을 보고해 줄 수 없겠는가고 요청을 하였다. 대답은 하였으나 두만강개발에 관한 상황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왜냐하면  연변의 시골에서 태여나 농민의 자식으로 농촌에 관한 체험은 있었으나 그 이상 연변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때는 연변을 떠나 북경에서 10년간 생활하다가 일본에 왔기에 연변과의 인연은 부모친척외에는 거의 없었던 상태였다. 북경에는 인맥관계도 어느정도 형성되고 북경에 관한 지식은 어느정도 있으나 연변에 관해서는 부끄럽지만 아는게 너무나 없었다. 아니, 요해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 봤으나 당시에는 연변에 관한 자료가 일본의 도서관에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내가 체험한 연변의 상황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조선족이 많고 조선어가 중심이며 조선과의 교류가 많다는 점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어릴 적에는 개산툰의 누나집에 놀러 갔다가 두만강에서 수영하고 건너편 대안의 조선땅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야기 정도였다. 이 보고회가 있은 후 나는 두만강개발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자신의 고향과 관계가 깊고 또한 나의 언어우세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두만강개발문제를 연구과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나중에는 두만강개발과 더불어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문제를 나의 일생의 연구과제와 인생목표로 결정했다. 허나 당시 일본에서는  특히 동경권에서는 두만강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일본해(동해) 연안의 니이가타 (新潟)나 토야마(富山)등 지역의 대학에는 연구자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경의 생활기반과 대학원을 포기하고 그 쪽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도 현실적이 아니였다.              
14    12. 일본유학의 길 댓글:  조회:2347  추천:3  2013-01-16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2. 일본유학의 길   일본과의 인연 일본에 대하여는 어릴적부터 동경해 왔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리 마을에 유명한 화백 석희만(石熙滿)선생이 하방(下放)하여 왔다. 그집에는 일본인 부인과 5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 집의 막내 아들은 나와 소학교 때부터 동창생이였기에 가끔 기회가 있으면 그집에 놀러가서 일본인의 가족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석희만화백은 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의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에서 미술을 배우고 나중에는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이 패전한 후에 중국에 돌아왔다. 그의 동생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에서 결혼하고 계속 일본에서 살다가 사망되였다고 들었다. 내가 어릴 때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일본에 대한 인상도 없고 지식도 없었다. 다만 석희만 화백은 대단한 사람이며 그의 월급이 길림성(吉林省) 성장(省長)급 보다도 더 높아 150원이라는 말은 들었기에 그 집은 대단한 부자라는 것 밖에 몰랐었다. 그때 농촌에서 10원만 있으면 대단한 돈이였으니 말이다.  그후 중일국교가 1972년에 회복되니 석희만 화백의 동생이 일본에서 우리 마을에 있는 형의 집을 방문하러 오게 되였다. 외국손님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온다기에 정부에서는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석화백의 집주위도 정돈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중국 농촌의 초라한 모습을 외국인한테 보이는 것은 중국사람의 낯을 깍아 내리는 것이였으므로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었다. 그때 석화백의 아들인 나의 동창생친구한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수입이 높아서 하루만 일해도 우리의 1년 수입과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그게 어떤 나라이기에 그렇게도 잘 사나? 하고 부러운 심정은 있었지만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럽기는 해도 그림의 떡과 같아 우리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대학시험을 칠 때 외국어로 일어를 선택했다. 형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교과서를 얻을 수 있었다.  헌데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그 때는 록음기도 없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창생친구의 집에 찾아가서 친구의 어머니(석화백의 부인)에게 “일본어를 배우고 싶으니 가나(假名)의 읽음법만 배워주세요” 하고 청을 들었다. 그녀는 쾌히 승낙하고 배워 주었다. 이것도 아마 내 인생의 운명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내가 지금 일본에서 살게된 것이 그때 그런 운명적인 인연이 주어져서 촌에서도 일본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일본어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생산노동을 하면서 짬짬이 일본어를 자습했다. 유감스럽게도 석화백의 아들인 나의 친구나 그의 형제들은 그런 우월한 환경에 있었지만 누구도 대학에 가지 않았거나 가지 못했다. 우리 가난한 농촌집에서는 연이어 대학생이 나왔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4년동안 대학시험 끝에 북경으로 가게 되였다. 일본어도 상당한 수준까지 높아졌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 외국어는 영어가 필수 과목이고 일본어는 선생도 없거니와 과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어를 A,B,C,D로부터 시작해서 2년동안 배웠다.내가  2학년 되던 때에는 후배의 대학신입생 가운데 고중에서 일어를 배운 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었기에 대학에서는 북경외국어학원에서 일본어 선생을 초청하여 일어강좌를 시작했다. 나는 영어를 배우면서도 방청생으로 일본어 강좌도 열심히 듣고 배웠다. 그 때 우리 대학에는 일본에서 온 단기 유학생 10여명이 있었다. 그들은 기본상 사회인이며 일본의 회사나 학교에서 파견해 왔다. 하루는 대학생 운동회를 했는데 운동장에서 일본유학생들이 구경하러 와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으로 그들한테 다가가서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아주 반가워 하면서 앞으로 서로 교류하자고  제안 했다. 그 후부터 마루타니 마사노부(丸谷正延)라고 하는 나보다 한 살 우인 일본인을 자주 만나 일본어 대화를 연습할 수 있었다. 서로 익숙해지니 대학밖의 식당에 가서 식사도 하고 우리 숙소에 와서 요리를 만들어 술도 마시고 하면서 어느덧 딱친구로 되여 버렸다. 아주 빈번한 교류가 되였기에 나의 일본어 회화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갔다. 대학의 일본어 선생은 3학년 때 나를 보고 “너의 일본어 수준은 외국어학원의 4학년생 수준보다도 높다” 고 평가해 주었다. 마루타니씨는 졸업한 후에도 회사파견으로 북경에 근무했기에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줄곧 친구로서 사귈 수 있었고 지금도 계속 사귀고 있다. 그 후에도 나는 일본철학이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북경(국가)도서관내에 있는 일본관에서 일본어로 많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겹쳐서 나의 일본유학을 결단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유학의 장애를 돌파     지금의 시대와는 달리 그 때 당시에는 유학하려면 많은 장애가 있었다.  먼저 일본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일본친구는 사귀고 있었으나 보증인은 부탁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대방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돈이 없었지만 왜서인지 유학경비 문제는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큰 장애는 중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하는가 하지않는가, 단위(소속대학) 에서 허가를 하는가 하지않는가? 하는 문제였다.당시는 천안문사건이 발생한 후 수많은 대학생이나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출국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중국정부 차원에서 보면 고급인재 유출 붐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것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정부는 새로운 출국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발표하고 시행했다. 그 내용은 대학졸업이나 대학원졸업 후 국내에서 5년이상 근무하여 나라의 대학생 양성비를 갚아야 출국을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89년3월에 나의 셋째 형(연변대학강사)은 처가집이 일본귀국자녀의 조건에 해당되여 일본정부가 책임지고 귀국할 수 있도록 했기에 가족을 거느리고 일본에 영주귀국을 했다. 형은 나중에 동경에 있는 일본어학원에 취직하여 유학생사무 담당을 하게 되였다. 내가 출국 의향을 이야기하고 부탁드렸더니 수속을 해보겠다고 하였다. 또 일본에서 보증인도 찾아놓았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중국의 대학에서는 조건이 구비되지 않아 출국수속을 밟을 수 없었다. 그 때 나의 근무기간은 3년남짓 밖에 되지 않아 출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먼저 안해를 출국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형님한테 상담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안해의 출국수속을 하였더니 인츰 성사하여 안해는 혼자몸으로 1990년12월에 일본동경의 일본어학원에 입학했다. 형의 가족이 있기에 마음놓고 보낼 수 있었다. 안해는 고중과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기에 일본어는 전혀 몰라서 내가 집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워주었다. 나는 계속 갖은 방법을 대여 대학의 인사처를 찾아 다니며 출국수속을  추진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전에 농촌에서 4년간 농업노동에 참가한 기간을 국가에 봉사한 기간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출국허가가 비준되였다. 많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끝내 일본유학의 꿈을 실현했다.
13    11. 천안문사건의 충격과 젊은 인테리의 실망 댓글:  조회:4875  추천:7  2013-01-12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1. 천안문사건의 충격과 젊은 인테리의 실망   1989년 4월 청명절, 그해 봄에 사망된 원 공산당총서기 호요방을 추모하는 수도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여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진을 치고 추모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물론 나와같은 젊은 인테리층들의 대다수는 호요방총서기가 권력 의자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차 있었다. 대학생들의 추모활동은 추모에서 끝나지 않았다. 천안문광장 앞에서 당중앙과 국무원을 향하여 성명을 발표하여 당시에 꼬리치고 늘어나는 부정부패(특히 권력자들)와 고급간부자녀 (高干子弟)들이 부모의 권력을 배경으로 사영기업이나 여러가지 돈벌이를 하는 일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하면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서는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실시해야 한다고주장, 중앙정부에서 답변을 즉시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상세한 정황을 알았지만 그때 호요방 총서기의 후임으로 공상당총서기가 된 조자양(趙紫陽,그전 까지는 국무원총리)이 천안문사건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민주화 정치개혁을 주장했으나 보수파들이 정치개혁을 거부하고 학생운동을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운동으로 판단하여 진압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대학생들이 제출한 정치개혁과 민주화개혁 요구가 공산당과 정부의 전향적 답변을 받지 못하자 대학생데모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되고 그 규모는 북경대학,청화대학,중국인민대학 등 몇개의 주요 대학으로부터 전 북경시의 대학으로 범위를 확산하여 진행되였다. 나중에는 전국각지의 대학에서도 같은 데모가 전개되는 상황이 되였다. 더 나중에는 단식투쟁(絶食鬪爭)으로까지 전변되였다. 북경에 한창 따뜻한 봄이 찾아와 백화만발하는 계절이였으나 대학생들과 정부의 대립은 절정에 도달했다. 5월중순이 되자 데모는 학생데모로부터 지식인을 중심으로한 시민데모로까지  발전하였다. 북경시민과 대학생 200여만명이 데모에 참가했다. 나와 우리대학의 학생과 교원들도 대부분 데모에 참가하였다. 대학캠퍼스를 출발하여 천안문광장까지 20여킬로미터 되는 길을 하루에9시간이상 도보하면서 데모에 참가했다. 대학생의 주장을 지지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대학생데모에 관한 공산당중앙의 내부분쟁이 치열히 전개되여 있었다는 것이 2011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조자양의 비밀회억록(趙紫陽回顧秘錄) 에서도 여실히 폭로 되였다. 내부분쟁의 결과 정부는 5월19일에 계엄령(戒嚴令)을 반포하였다. 즉 군대와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대학생 데모를 해산하려고 한 것이다. 공산당중앙에서는 조자양 총서기에게 계엄령성명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으나 총서기가 그것을 거부했기에 리붕총리가 선포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경찰과 작전부대가 북경주위에 모여 북경시구를 포위하는 상태가 벌어졌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철저히 저항하는 자세를 취하고 무장군대의 북경중심에로의 진군을 저지했다. 중심으로 가는 길은 공공 뻐스나 트럭으로 막아놓고 심지어 일부 시민들(노인들도 있음)은 군대차량앞에 가로누워 목숨을 걸고 군대의 진압을 저지했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북경교구의 군대차량이 정지하고 있는 곳에 가서 직접 군인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인민의 군대이며 총부리를 손에 무기도 없는 인민들한테 돌리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공작을 하였다. 군인들도 우리의 선전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표시하기도 하였다. 5월20일부터 6월3일까지는 이러한 공산당의 군대와 대학생 시민들과의 대치상황이 지속되였다. 북경의 모든 대학의 교학이 중지되였다. 북경시의 모든 공공교통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민들의 데모 때문에 완전히 마비되였다. 그러니 당연히 북경의 기업이나 사업단위들도 교통마비로 인하여 전체 휴식상태에 들어갔다. 전 북경시의 질서가 파닉(혼란)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동도구는 자전거나 도보밖에 없었다. 역사의 대결이였다. 그 무렵 나의 안해는 임신하여 연길에 있는 처가집에 돌아 갔는데 병원에 가 검사하니 8개월되는 태아가 배속에서 태(胎)가 목에 감겨 세상도 구경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안해는 너무나 큰 쇼크를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해를 북경에 불러와서 함께 여행하기로 작심하였다. 80년대 후반기에 조자양 총서기는 주택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나는 대학에 주택제도 개혁에 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출장을 신청했다. 대학의 교학도 중지된 상태이니 사업에 지장이 없었기에 대학에서는 나의 신청을 쉽게 허가했다. 그래서 나는 안해와 함께 남방도시를 향해 5월 30일에 열차를 타고 북경을 떠났다. 목적지는 4개 도시였다. 산동성의 연태, 강소성의 남경, 소주와 안휘성의 풍부(蚌埠)시였다. 명목은 사회조사이나 기실은 여행이였다. 연태를 거쳐 소주(蘇州)에 갔다. 소주에는 대학시절의 동창생 친구가 있어서 그 집에 머물렀다. 6월4일 아침 천안문사태의 소식이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되였다. 또 한번 크나 큰 쇼크를 받았다.  북경에 있을 때는 학생운동이 계엄령과 대치되는 가운데서 금후에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군부대가 탱크나 총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덮쳐들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하였다. 왜나하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은 중국인민해방군은 인민의 군대이며 공산당은 인민의 령도계급이라는 이론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공산당과 인민의 군대가 인민에게 총뿌리를 돌린다면 그것은 인민배반 행위이며 인민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대부분 중국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발생된 사건의 진실앞에서는 이론도 이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학생들이 끝까지 정부와 대립하는 자세를 취한 것도 공산당과 군대가 아무리 어째도 학생과 시민들에게 총은 쏘지 못할 것이라는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대한 최저한도의 신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였다고 나는 생각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산당의 군대가 인민과 대학생을 향하여 총을 쏘고 탱크로 들이민 것은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였다. 천안문류혈사건이 일어 났다고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행객중인 나는 계속 상해로부터 남경으로, 무석의 태호로부터 항주로 안해와 함께 여행이 되여 버렸다. 왜냐하면 천안문사건 때문에 지방정부나 사업단위에서는 사회조사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해, 항주 등 대학생이 많은 도시에서는 계속 데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나 김빠진 공처럼 기세가 아주 약했었다. 6월5일 저녁에 소주에서 항주로 가는 야간운행 려객선을 타고 이튿날 아침에 항주에 도착해보니 항주에서도 대학생 시위데모가 여러곳에서 일어나고 있어 시내교통은 기본상 마비되여 있었다. 할 수 없이 인력차를 타고 서호주변의 여행을 계속했다. 저녁에 시내에 돌아와서 다음 목적지로 가려고 했는데 열차도 운행을 중지하고 있었다. 하루밤 자고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안휘성의 풍부로 향했다. 나에게는 인생처음의 남방행인지라 지도 한 장을 들고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풍부시에 도착하여 호텔을 잡고 시내돌이를 했다. 다음날은 북경으로 돌아갈 예정이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북경의 대학동료한테 전화를 걸어 북경이 안정되였는가? 돌아가도 좋겠는가 문의하였다. 그것이 6월7일이였다. 일단 북경의 시내질서는 어느정도 안정되였으니 돌아와도 되겠다는 대답을 받고 열차표 사러 역에 나가려고 하는데 공안경찰이 호텔로 찾아왔다.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해서 내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사정대로 대답했더니 이번에는 우리 부부의 여행짐을 열어 보이라고 해서 보였더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돌연적인 공안경찰의 수사에 속이 좀 떨렸다. 허나 위법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수 신분이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꼼꼼히 생각해보니 내가 북경의 동료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때 그 전화가 감시당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아마 북경과 관련되니 대학생운동가나 민주운동가로 의심받고 조사를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대학생운동에 관한 비라나 무슨증거가 있었다면 그자리로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다고 나중에 생각하게 되였다. 북경에 무사히 돌아와 동료들한테 천안문사건때 어떤 상황이였는가고 물으니 그날밤 천안문으로 향한 장안거리(長安街)에서 시위데모를 하다가 군대들이 진격해오는 것을 목격하고 뿔뿔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였다. 북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폭풍우가 휩쓸고 간 후의 꽃밭과도 같이 싹 주눅이 들어 있었다. 대학의 교학질서는 차차 회복되였으나 교원과 학생들의 눈에는 정기가 보여지지 않았다. 드디여 공산당의 당내숙청이 시작되였다. 매일이다싶이 당지부회의, 당총지부회의가 개최되여 이번의 대학생을 위주로한 데모행동이 어떻게 위법이고 배후에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뒤엎으려는 ‘민주활동가’가 조직하고 관여하였으며 공산당으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반혁명활동이고 폭동이였다고 당중앙의 지시문건을 학습시켰다. 그리고 공상당당원들은 반드시 자아검토하고 반성하며 그것이 당총지부 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정상적인 교학과 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따라서 ‘당원등기’(즉 당원으로써의 당중앙과 의견을 같이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당원으로 재등록할 수 있었다)를 실시하였다. 중앙정부의 판단에 의하면 대학생운동을 제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참가한 정부부처 6개가 중점적으로 숙청을 필요로 하는 부처인데 그중에는 중화전국총공회가 들어 있었다. 또한 총공회산하의 사업단위가 4개 있는데 그 중에는 내가 소속한 대학이 포함되여 있었다. 즉 이번 대학생시위활동에 제일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업기관으로써 당원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때문에 매일 매일 당원회의가 끝이없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사히 당원등록을 통과했다. 즉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대학의 우리학부(공회학부)에서는 유명한 민주활동가 한명이 있었는데 당장 체포되여 감옥살이로 들어갔다(내가2년후 일본출국 전에는 출옥했음). 학부의 학부장과 교연실주임은 당내 엄중경고 처분을 받고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였다. 즉 감시 대상으로 되여 출국이나 출장도 할 수 없이 계속 당에 향하여 반성을 해야 되였다. 북경 그리고 전국의 분위기는 매일 매일 무거운 구름이 싸여 있는 듯이 찌뿌듯한 감에 휩싸여 있었다.나의 마음속도 똑 같은 심정이였다. 유일한 출로는 출국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였다. 그때 당시의 분위기속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는가? 어떤 자격과 경로로 가는가는 문제가 아니였다. 기회만 있다면 남미주던 아프리카던 상관없이 중국이라는 땅을 탈출하는 것이 최대의 념원이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12    10.수도 북경의 생활과 중국 사회구조에 대한 입체적 관찰 댓글:  조회:4375  추천:3  2012-12-20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0. 수도 북경의 생활과 중국 사회구조에 대한 입체적 관찰   중국공운학원(현’중국노동관계학원’)은 중국의 노동조합총회인 중화전국총공회 산하에서 전국 각 지역 노동조합의 간부를 양성하는 대학이다. 나는 이 대학의 공회학부에 배치받아 전임강사로 철학, 국제노동운동사, 공회학 등 과목의 강의와 반주임(반급담당)을 맡았다. 그 때 당시 우리대학에는 4개의 학부와 고급간부 양성학부가 있었다. 학원들은 전국 각지의 성,시,현의 국영기업이나 정부기관의 공회간부 또는 간부후보자들이 추천과 시험으로 입학하여 2년동안 재교육을 받은 후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들의 평균년령은 약30세로 그 때 27세밖에 안되는 나로서는 형님누나같은 사람들을 교육해야 했다. 대부분 학생은 나보다 사업경험이 풍부하고 사회적으로 일정한 지위가 있는 중견 간부들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급간부 양성학부에는 국영 대기업이나 정부 사업단위의 공회주석, 부주석(노동조합회장 부회장)들이나 처장급 국장급 간부들이 대부분이였고 평균 연령은 약 50세였다. 그들은 반년이나 1년정도 파견받고 이 대학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나의 셋째 매형이 국영기업인 연변개산툰섬유팔프 공장의 공회주석이였는데 우리 대학에 와서 연수하게 되였다. 매형이라고 해도 나보다 20여세 연상이였으나 나의 학생으로 되였기에 고향에 돌아가도 그냥 선생님 취급을 받았다. 대학강사가 된 후에 나는 곧 결혼하게 되였다. 내가 당교에서 연구생공부를 할 때 형님(연변대학교수)이 연길시 모 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던 여성을 소개해주어 2년남짓이 장거리 연애를 한 후 결혼하게 되였다. 결혼생활은 원활하고 행복하였으나 북경과 연길이라는 3천리 떨어진 두 곳에서 살며 부부간에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였다. 그 이유는 중국의 호적제도 때문이였다. 중국에서는 1949년 새 중국이 건립된 이래 도시와 농촌의 인구유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특수한 호적제도를 실시하여 농업호구(호적)와  비농업호구로 나누었다. 농업 호구를 가진 사람은 국가나 지방의 공무원(간부), 군인, 대학생, 전문학교 학생 등을 거쳐 국가공무원이 되면 비농업호구(즉 도시호구)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외의 경우에는 영원히 농업호구를 개변할 수 없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뿐만아니라 도시간의 호구이동과 인구이동도 제한되여 있었다. 특히는 대도시와 중소 도시간에 호구 이동은 상당히 힘들었다.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또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능하였으나 그 반대로의 이동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다. 나의 안해는 비농업 도시호구였으나 연길시에서 북경시로의 호구이동은 거의 불가능 하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호구가 이동되지 못하면 안해는 북경에서 직장을 찾을 수 없고 북경의 직장에 있는 나는 단위(직장)에서 분배해주는 공동주택도 배분 받을 수 없으므로 동거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민간주택을 자유롭게 임대주는 제도도 없었기에 가령 돈이 있다고 해도 주숙할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부부간의 호구가 분리되여 있으면 어린애가 태여나도 아버지의 호적에 등록할 수 없고 어머니의 호적에 등록되는 제도를 실시하였기에 성은 아버지를 따르나 호적은 어머니를 따른다는 모순되는 제도가 되여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령 북경시에서 아이를 기른다고 해도 공립보육원이나 공립유치원에 들어갈 수 없고 공립소학교와 중학교,고중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여 있다. 1980년대까지는 사립유치원이나 사립학교는 허용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 대상자를 찾으려면 같은 도시에서 찾는 것이 제일 합리한 선택이였다. 나도 이런 사안을 고려하여 합리한 선택을 하려고 중매를 통해서 북경에 사는 조선족 처녀들을(인수가 아주 적고 또한 그중에는 조선말도 모르는 2세들이 있었다) 몇 명 선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상적인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때 당시에는 다른 민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관념상으로 접수할 수 없거니와 고향의 부모형제들이 기본상 동의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족과의 문화차이가 너무 많고 (언어는 통한다고 할지라도) 생활습관이 잘 맞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조선족 여성들은 여성다운 수양과 매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족 여성들은 기가 강하고 남녀평등 의식이 강하여 남편을 남편답게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의식이 조선족에게는 특히 남성들의 머리에는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경에서 대상자를 찾기 힘들고 합리한 선택을 하기는 힘들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기회는 적으니까 고향 연변에서 대상자를 소개받고 결혼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3천리 떨어진 두 곳에서 평생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일본으로 출국유학을 선택한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부부별거 생활에 종말을 지으려는 타산과도 관계된다. 북경이라는 대도시에서 대학강사이니 당연히 좋은 직업이였고 안정되여 있었다. 허나 결혼한 부부가 장기적으로 갈라져 살아야하니 가정생활은 안정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생각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시장경제가 중국에서도 침투되기 시작하고 개인(사영)기업이 허용되였으므로 나는 자금을 조달하여 북경에서 안해의 직장으로 식당(레스토랑)을 만들어 주려고 한 때 동분서주 하였으나 여러가지 여건이 잘 맞지않아 결과적으로는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대학의 부속 유치원에 보육원으로 넣어서 임시공(비정식직원)으로 한동안 출근하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분배받은 단신숙소(젊은 교원 2명이 한방임)를 잘 조절하여 일단 부부가 한방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대학교원의 생활은 그래도 재미가 많았다. 강의와 학생관리 등 일을 하는 외에도 매주 대학강당에서 무료로 영화를 구경할 수 있고 매주 대학의 공용뻐스로 해군총부의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할 수 있었으며 주말이면 대학에서 주최하는 댄스 파티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월급은 적었으나(당시돈으로 75원부터 시작되여 4년후에는120원으로 증가됨)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또 대학의 공회에서 계절에 따라 채소나 과일,육류,해산물 등 부식품들을 외지에서 조달해 무료로 공급하였다. 그러니 적은 월급이지만 그것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1990년 8월에 북경에서 아시아 운동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연합뉴스의 기자가 나의 한 친구를 통하여 나를 찾아왔었다. 외국손님이라 중심거리인 왕푸징 일각의 한식 레스토랑에 가서 초대를 했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150원이 나왔다. 내 월급의 두배가 되는 돈으로 외국손님을 접대한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초대도 해보았다. 이것이 북경이라는 대도시의 생활이고, 또한 북경시의 주민이나 직원이 되면 권력의 중심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보장과 사회보장을 잘 받고 있다는 것을 그 때에야 리해할 수 있었다. 연길시나 특히 농촌과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4년동안의 대학강사로써 북경시민으로써의 생활을 거쳐  중국의 차별적 사회구조를 가슴깊이 느꼈으나 나에게는 그것을 개변할 방법은 없었다. 정치가의 꿈마저 접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전세계를 놀래우는 사건이 수도북경에서 또 한번 일어났다. 천안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1    9. 정치가의 꿈과 좌절-공산당 대학원시기 댓글:  조회:2801  추천:5  2012-12-03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9. 정치가의 꿈과 좌절-공산당 대학원시기    내가 대학원(중국에서는 연구생이라 함)을 선택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이대로 졸업하고 사회에 들어간다면 아직도 지식이나 사회인맥의 힘이 부족하기에 좀 더 자기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대학에서 4년동안 리더로 활동하고 2학년 때에 학년에서 첫 공상당원으로 되고 하니 이런 정치 자본을 활용하는데는 정치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대학의 친구와 함께 중공중앙당교에 연수차로 온 연변주정부의 모 간부(나중에 연변주장이 됨)와 함께 식사하고 의화원공원에서 같이 산책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당간부를 양성하는 당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당교에 연구생모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교연구생 시험을 쳐보기로 했다. 허나 당교시험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고 모집 인원수도 10여명 밖에 안되였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결과는 중앙당교에는 입학이 못되고 망설이고 있는데 중공북경시위당교에서 처음으로 연구생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당교 교수의 부인(우리대학의 교수)이 나한테 전해주고 입학할 의향이 있는가고 타진하였다. 나는 서슴없이 ‘예쓰’사인을 보냈더니 일주일 후에 면접을 와 달라는 것이였다. 그 뒤는 순조롭게 통과되여 공산당권력자를 양성하는 당교의 대학원생으로 되였다. 당교에서의 전공은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적사회주의, 당건설, 당사 등으로 나누어졌는데 나는 당의건설(党建)전업에 배치되였다. 철학전공을 지향했는데 당건설 전공에 학생이 필요하니 바꾸어 달라는 것이였다. 당건설이 무얼 연구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의 요구이니 공산당원으로써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그때 당시의 상식이였다. 그리하여 공산당의 역사로부터 집정당의 건설이라든가 령도학이라든가 맑스주의 이론전반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당교에서는 연구생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일반대학의 연구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월한 교육환경이 주어졌다. 일반대학에서는 숙소를 4명정도가 공유하나 당교에서는 2명 1실이고 조학금(助學金-장학금에 상당함)도 대학의 연구생보다 한급 높고 중공중앙의 문헌들도 자유롭게 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당교의 강의도 가서 들을 수 있었다. 대학의 연구생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당교에 와 보고는 ‘당교는 귀족학교네’라고 부러워 하였다.  권력의 중추에 가까워 질수록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피부로 느끼게 되는 시점이였다. 2년동안의 당교생활과 연구는 나의 정신세계를 많이 개변시켰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여러면에서 부족감이 많고 자신감도 모자랐다. 헌데 당교에 들어가 있는 기간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장래의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였다. 그것은 곧 정치가의 길이였다. 그 때 당교를 졸업하면 북경시 당정기관은 물론 중앙당기관에서 자리를 찾을 수도 있었다. 1년 후에 나한테 들어온 소식이 중공중앙 규률검사위원회와 통일전선부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였다. 나는 규률검사위원회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헌데 그 무렵에 중국에서 나의 인생을 바꾸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1월에 호요방(胡耀邦)공상당 총서기가 착오를 범했다고 총서기직에서 사임당했다. 신문매체에서 발표되기 전에 공산당 내부 문건으로 우리들 한테 전달되였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왜냐하면 1980년대 대학생활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떤 정치자본을 얻어보자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다만 공산당이 개혁개방으로 중국에 새로운 광명을 주었기에 자기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의미에서 공산당원에 가입한 것이었다. 즉 공산당이 중국을 개변할 수 있고 국민을 잘 이끌 수 있다는 신임감에서 접근한 것이였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물론 등소평이 실질상에서는 중심에 있었지만)이며 최고지위에 있는 인물이 바로 호요방이며 그는 또한 중공중앙당교의 교장(공산당중앙의 최고지도자로 될 인물이 당교교장을 겸임하는 것이 내부규정으로 되여 있음) 을 한 적도 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민은 물론 젊은 인테리들의 애대와 신임을 받았었다. 그의 현명한 정책하에서 대학생당원으로 되고 또한 내가 배양한 대학생 당원만해도 10여명이나 된다. 즉 나도 당간부 (학생당지부 조직부장)로 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하루아침에 사임당하다니?! 그 충격속에서 나는 랭정히 자신의 미래상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예전의 단순한 생각으로서는 나는 순 농민출신이고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으니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가로 되고 싶다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결론은 ‘나는 정치가로 되기에는 부족하거나 적합하지 않다’였다. 그 이유는 정치가로 될려면 3가지 조건이 필수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조건은 공산당원으로써의 기본수양과 사업능력이고 둘째 조건은 백그라운드(누가 봐주고 길러주고 밀어주는 인맥관계)이고 셋째 조건은 조직이나 상사(上司) 에게 아부할 줄 알아야 하고 너무 솔직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였다.내가 정치가의 길을 선택한다면 첫째 조건에는 부합되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두번째와 세번째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여 대학교에 가서 자유로운 학자로 되자고 생각하고 대학의 취직자리를 자체로 찾았다. 그것이 중국의 공회(노동조합)간부를 양성하는 중화전국총공회 (中華全國總工會)산하의 중국공운학원(中國工運學院)대학이였다. 이렇게 농민으로부터 6년의 시간을 거쳐 대학교수로 탈바꿈 한 것이다.
10    8. 청춘의 절정기-대학시절 댓글:  조회:3620  추천:7  2012-11-24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8. 청춘의 절정기-대학시절   1981년 9월에 나는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21년간 살아온 추억많은 고향을 떠났다. 그것이 영원한 리향(離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 때는 그저 공부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시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되던 시기였고 농촌에는 아직도 인민공사가 남아있고 생산대가 남아있었으니 나를 포함한 대부분 중국사람들은 아직도 기본상 모택동시대의 의식과 사유방식속에 있었다. 농촌에서는 개혁개방이 무었인지 말은 들어보고 신문은 보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농촌을 떠난 후에 농촌에서는 땅을 나누고 농기구도 나눈다는 말을 듣고 중국사회가 무너지는 줄로 알았다. 어떻게 우리가 만든 인민공사가 해체될 수 있는가? 중국이 무슨 길로 가고 있는가? 북경에 금방 간 촌놈으로써는 도저히 리해할 수가 없었다. 북경에 가 봐도 아직 물가는 국가 통제하에 있었고 식량이나 채소 육류도 공급제였다. 한달의 배급은 량표(식량배급권) 30근(15킬로그램)이였는데 그중 세량(細糧-입쌀과 밀가루)과 잡량(雜糧)이 일정한 비례로(5:5)  되여있는데 조선족은 입쌀을 주로 먹는 민족이라하여 조선족 학생들한테는 7:3으로 특수한 배려를 해주었다. 난생처음으로 조선족으로 태여나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였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족이란 무슨 의미인지 민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깜깜부지였다. 그 때 당시에는 집이 가난해도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입학만 하면 학비전액면제 (면제라기보다는 학비라는 개념이 없었다)이고 숙비전액 무료제공이며 한 달에 18원(元)씩 식비를 제공받았고 그 외에도 용돈으로 보조금2원,소수민족 특수보조금2원, 그리고 집이 가난한 학생은 의복(여름,겨울복장으로 나누어서) 도 신청하면 배급받았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군인의 대우와 기본상 같았다. 우리집에서 받은 돈이라면 북경으로 가는 렬차비와 축하금으로 받은 돈 20원이 전부였다. 북경으로 가는 대학생이라고는 하나 위 아래 옷 단벌에 신 한 컬레여서 한번은 축구를 하다가 바지가 동강나니 돈이 없어서 친구한테 5원을 빌려서 바지 한쪽 사서 입어야 했다. 우리반급은 학생이50명이고 전국20여개의 성과 민족자치구에서 23개 민족이 모여와서 하나의 공동체로 되였다. 학교의 관리방식은 군인식 관리방식이므로 수업하거나 여러가지 문화체육 활동을 해도 기본적으로는 한개 반급을 위주로 하고 그 외에는 정치계의 학부적 집단활동이였다. 정치계에는 철학전공반과 정치경제학 전공반 두개 반으로 나뉘여졌으나 같은 학년이면 같이 활동할 때가 많았다. 나는 철학전공반이였으며 나와 귀주성에서 온 여학생이 제일 연상(21세) 이였고 제일 어린학생은 16세였다. 남방에서는 5세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16세면 고중졸업이 된다는 것이였다. 우리반급에는 조선족이 2명뿐이고 그 외에 23개 민족이 4년동안 공동생활하게 되였다. 동북지역에서는 몽골족,만족,오른촌족,조선족 등 민족이 오고 서북지역에서는 회족,장족(티베트족),하사크족(타지크족),러시아족,동족,토가족 등 민족이 왔으며 서남지역에서는 이족,쫭족,묘족,부이족,타이족,백족,나시족 등이 왔기에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학생들이였다. 언어도 다양하고 방언도 많아 처음에는 중국말로 해도 의사소통이 잘 않되였다. 거기에다  중국말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없었고 수업강의를 들을 때에는 노트(필기)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어 수준이였다.       학교생활이 시작되자 반주임선생(귀주성 출신의 묘족)은 나한테 반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반급에서 입학점수도 제일 높고 나이도 제일 많기 때문이였다. 중국말도 변변치 못하고 조직경험도 전혀 없는 나에게는 큰 난제였다. 또한 나는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을 아주 꺼려했다. 허나 거절할 수도 없고 (그때는 당의 지시나 상급의 지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상급의 지시대로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또 실제상에서 열심히 뛰여다니며 반급생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4년동안의 반장직경력과 공산당원 입당 및 당지부 조직위원직 경험이 그 후의 나의 조직력과 통솔력 등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워주는 기초수업이였다고 생각된다. 비록 대학입시에서는 당시 전교적으로 장원급이였으나 한어(중국어)가 따라가지 못하여 첫2년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중국에서는 대학시험에서 민족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나는 100% 조선어로 시험을 치고 한어과목이 추가되였으며 조선어문 시험과 한어문 시험의 평균점수가 어문시험(국어) 점수로 평가되였다. 도시에 살면 그래도 중국말을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농촌에서는 특히 연변지구에서는 온 마을이 조선족이고 학교도 선생과 학생이 전부 조선족이기에 중국말을 쓸 기회가 전혀 없었다. 물론 한어과목이 소학교 3학년부터 설치되여 있으나 누구하나 한어를 잘해서 장래 중국에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경우와 똑 같았다.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지금의 중국에서는 학생들은 영어를 잘 배워서 장래에 세계에서 활약하거나 미국에 유학간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당시에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대학시험 제도가 페지되여 있고 외국유학이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완전히 바깥세상을 모르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중국말을 배우는 의미를 몰랐고 외국어란 수업과목은 더욱 없었다. 중국어수준이 빈약한데다 대학 첫학기부터 영어가 외국어로 필수 과목이였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로 그래도 A,B,C부터 시작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였다.내가 중국에서 배운 영어라면 대학에서 2년동안 초급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니 영어회화는 겨우 ‘굿모닝’ 정도였다. 반급학생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였다. 1978년에 등소평이  복귀되면서  교육제도 정비를 시작해서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외국어를 도입하기 시작했기에 나보다 어린 학생들은 영어를 3,4년동안 배웠다. 또한 소수민족의 많은 지역에서는 본 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없고 민족교육이 발전되지 못한 탓에 소학교로부터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기에 대부분은 나처럼 중국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나는 두개의 큰 언어부족을 보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기에다 이제까지 자습해온  일본어도 버릴 수 없기에 일어자습도 해야 했다. 유일한 방법은 남보다 두세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놀음시간을 없애고 휴식시간(수면시간)을 남보다 할애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모자랐다. 거기다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니 시간이 더욱 딸렸다. 용돈도 없었기에 밖에 나가 술마시고 놀음질할 시간도 없었다. 대학시절의 하루동안 활동범위는 숙소로부터 식당, 식당으로부터 교실(아니면 도서관) 로 되여 있어 3점1면에서 뱅뱅 돌아치는 것이 일수였다. 한어수준이 약하니 ‘고대한어(古代漢語)’를 1부터 4책까지 통독했다. 여름방학에는 고향집에 돌아 갈 때 홍루몽(紅樓夢) 소설책3권을 휴대하고 가서 한어사전을 번져가면서 통독했다. 그리고 또한 시간을 짜내서 당송시사300수(唐詩宋詞300首) 중에서 100수이상 외워냈다. 이렇게 노력한 보람이 2년 후에 나타났다. 한어에 완전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 때문에 4년째에는 치열한 대학원 시험 경쟁에서 중공북경시위당교의 연구(석사)생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또한 외국어인 영어도 같은 방법으로 공략했다. 매일 아침체조(군인식으로 아침6시에 기상하여 집단적으로 반급끼리 대열을 서서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를 해야 했다. 나는 반장이기에 솔선적으로 하지않으면 안되였다.)가 끝난뒤에는 영어책을 들고 캠퍼스에서 공부했다. 그 외 일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형이 일본에 연수로 갔다가 돌아올 때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교과서를 갖고 왔는데 그것을 빌려가지고 자습시간에는 일어 공부를 했다. 이토록 자기가 이제까지 사용해온 조선어는 거의 쓸모가 없고 외국어 3개를 동시에 공부해야 했다. 매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24시간으로 평등하나 나에게는 24시간이 언제나 부족했다. 유일한 방법은 휴식이나 수면시간을 줄이는 수 밖에 없었다. 왜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가? 어떤 이상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그 때는 솔직히 말해서 명확한 이상이나 목표가 정립된 것은 아니였다. 하도 가난하고 또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대학에 가고 싶었고 그것을 위하여 부지런히 공부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자기의 실력이 박약한 부분을 열심히 보완해야 된다는 일념 뿐이였다. 때문에 목표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지적결함을 보충하여 보통인간으로 남한테 뒤지지 않고 부모형제들께 부끄럽지 않는 보통대학생으로 되는 것 뿐이였다. 대학을 졸업할 4학년이 되자 장래의 선택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물론 그 때 당시에는 대학에서 직업을 알선하고 정부에서 분배해주는 형식이였으나 일정한 선택은 가능 했다. 첫 선택은 고향에 돌아가느냐 아니면 북경에서 취직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학급의 간부이고 공산당원이니 당연히 북경에서 직업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도 고향인 연변에 돌아 가려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고향인 연길현 현장(知事)의 명의로 온 초대의 편지에 ‘나무가 3척 커도 잎은 뿌리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고향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힘내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그 편지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했다. 그 때 북경에 있는 졸업생들은 장래에 관한 담론에서 계두우미 즉 닭 대가리가 되느냐 아니면 소 꼬리가 되느냐라는 의미로 대도시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고향이나 지방의 소도시에서 리더로 성장하느냐? 하는 직업선택의 생각방식이 주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두개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한 층계 더 올라 가는(更上一层楼) 대학원의 길을 선택했다.      
9    7. 대학시험- 연속 실패속에서 인생의 길을 모색 댓글:  조회:3872  추천:7  2012-11-14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7. 대학시험- 연속 실패속에서 인생의 길을 모색   농촌의 생활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단조로웠으나 또 여러가지 재미도 있었다. 하루의 육체노동을 끝내고 나면 피곤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혈기 왕성한 때니까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나면 친구들이 모여서 트럼프치기나 장기를 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일하게 유감스러운 것은 연애를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유의 하나는 나도 물론 20대의 청년으로서 여성에 대한 추구는 있었으나 여성을 추구할 용기와 담량이 없었고 더구나 나는 신체 불구자이므로 전혀 여자를 끌어당길 매력과 자신이 없었다. 또한 많은 처녀들은 ‘5전짜리 월급쟁이라도 공인(월급받는 노동자)한테 시집간다’는 사람이 많았다.그 때는 연애란 것에 대해서 마을에서 모두 비웃고 놀려주는 풍기가 있어서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정신이 거기에는 쏠리지 않았다. 허나 자기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결혼할 가능성도 적었고 평생 농촌에서 육체로동으로 벌어먹자니 그것도 앞길이 막연했다. 주위에도 나같은 장애자가 적지않았고 그런 어른들을 보면 나의 암담한 미래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고중졸업을 하던 해의 가을에 대학시험이 회복되여 많은 농민청년들은 시험을 쳐보겠다고 야단하고 있었다. 헌데 어쩐지 나는 시험을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같은 신체불구자가 대학생으로 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말 없이 농사일을 꾸준히 하였다. 나의 형이 생산대대 출납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시험을 치른다고 하였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속으로는 은근히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형님이나 누구한데 물어 볼 엄두도 못냈다. 만약 부정 당하면 자존심이 상할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그저 속으로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농촌에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선택이 나의 앞에 차려졌던 것이다. 생산대대에서는 당지부서기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지 대대 이발소를 꾸리겠으니 이발사를 하겠는가? 라는 상담이 왔다. 해볼가고 생각도 했으나 왜서인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양하고 말았다.  내가 고중에 다닐 때 부모들은 나를 의학을 배우면 좋지 않겠는가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크게 흥취를 느끼지 못해서 단념했다. 아버지가 옛날에 사당에서 중의를 좀 배웠다는데 의사는 하지 않았으나 진맥과 침구는 아주 신통하여 촌에서 급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몇이나 침구로 살려냈던 것이다. 한방(중)약 처방도 뗄 수 있고 부황도 붙일 수 있어 가정내에서는 훌륭한 의사로 집식구들은 아버지의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를 보고 아버지의 의술을 물려받으라는 부모의 권고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서 그때 그런 선택을 회피했을가? 나자신도 확답을 할 수 없다. 의사를 하면 직업도 좋고 지금이라면 돈부자라도 될 수 있었을 터인데. 결론으로 말하자면 무엇무엇 해도 내 맘속으로는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형이 77년도 대학시험에 합격되여 길림대학 일어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도 일어를 배워 장래에 일본에 유학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형님한테 편지하여 ‘일어책하나 보내주오’하고 부탁했더니 정말 책 한 권을 보내왔다. 그리고 형님의 회답에는 ‘너와 같은 애들도 대학생으로 되였으니 너도 시험 쳐 보아라’고 씌여 있었다. 아!이게 정말이란 말인가? 나도 가능성이 있다니. 나는 너무나도 흥분되였다. 대학에 가는 것이 그림속의 떡이 아니라 나에게도 기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시험에 도전해 보려고 생산대장한테 2주일 휴가를 맡고 집에 들어 앉아 이전의 고중교과서들을 뒤집어내서 자습하기 시작했다. 대학시험이란 처음으로 체험하는 일이고 또한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대학진학 공부가 전혀 없었기에 대학시험을 어떻게 치르는지? 대학에 들어가면 무었을 배우는지? 전공은 무었을 보고 선택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 때는 공농병대학생을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골라 추천하는 시대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대학시험제도를 페지하고 실천경험이 있는 노동자,농민,군인중에서 우수한 사람(표준은 공산당을 옹호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대학에 추천하고 간단한 시험을 치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여 있었다. 예를들면 장철생(張鐵生)이란 청년이 대학시험에 백지 답안을 냈는데도 대학에 들어 갔다는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여 한 때 논쟁도 있었다.  누나나 형들 한테 물어 보려고 해도 전화도 없는 세월이라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저 되는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멋도 모르고 리과시험에 등록했다. 시험결과는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여섯개 시험과목을 치렀는데 수리화 세과목의 점수는 장철생의 백지보다는 좀 나은 편이나 100점 만점에서 17, 18, 19점 밖에 안되였다. 허나 이것은 내가 공부하지 않았거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공부할 환경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의 결과가 나한데 내린 불행한 처벌인 것이다. 대학시험에 실패했으나 나는 아무런 아쉬운 생각도 없었다. 시험이 끝나자 나는 곧바로 생산대에 돌아와 논기음 매는 일을 하였다. 생산대 회계도 그대로 하고 가을에는 량식분배, 겨울에는 년도총결산에 바삐 보냈다. 그러다나니 다시 시험을 쳐 보려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듬해 여름에 대학시험 계절이 다시되니 허나사마(혹시나) ‘한번 또 해볼까?’하는 미련에 이번에는 한달 허가를 맡고 집에서 책을 뚜져 공부를 시작했다. 평생 농촌에서 이렇게 살아가자니 아득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 농촌을 떠나야 했다. 그 시절 농촌을 떠나는 방법은 또 하나 있었다. 군대를 가는 방법이다. 맏형이 1969년에 군대에 들어가고 둘째 형도 참군하려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합격되였으나 농촌 생산대에서는 가족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농촌을 벗어나지 못하여 일생동안 후회하고 있다. 나는 신체가 불구이기에 군대와는 인연이 전혀 없고 대학시험이 나의 인생 전환의 유일한 희망이나 그것 또한 묘망한 희망이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던 끝에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중등전문학교를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전문학교시험 문과에 등록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아주좋은 성적이였다. 전 연길현(현재 룡정시)에서 제일 높은 점수였다. 제1지망은 연변재무학교에 들어가 회계전공을 배운는 것이였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신체검사 불합격(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기회가 있는가해서 룡정의 학생모집 반공실에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당시 금방 설립된 룡정현사범학교에라도 넣어줄 수 없는가?하고 물으니 그것도 안된다는 것이였다. 눈앞이 갑지기 캄캄해졌다. 그자리에서 눈물이 나서 통곡했다. 자살할 생각도 머리속을 스쳐지나 갔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첫 정신적 타격이였다. 그 때까지 자라면서 집이 아무리 가난하고 신체의 장애가 있어도 자기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마련한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였다. 물론 그 때는 하느님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에 사로 잡힌다). 불쌍하고 기구한 내 인생이란 생각밖에 없었다. 이 몸으로 평생 농촌에서 소궁둥이나 두들이고 살 수 밖에 없구나. 이 몸으로 나한테 시집 올 여자도 없을 것이 아닌가. 부모님도 내가 불쌍해서 속이 타고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 인생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으나 나는 하는수 없이 다시 생산대에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밥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시작하니 차차 모든 것이 잊혀졌다. 허나 어떻게 자기 인생을 개변하겠는가? 라는 생각은 머리속에서 떠나지지 않았다. 인생을 개변하려면 병을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기실 나의 병을 고쳐주려고 둘째 누나(자전거 선수로 전국대회 국제대회에서 대회에서 금메달을 탄 운동건장이며 길림체육학원의 교련으로 있었음)는 1969년경에 나를 장춘에 불러다가 군부대병원인 302병원에 데리고 가서 다리교정 수술을 십여번이나 해주었다. 허나 다리는 완전히 치료 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나어린 촌놈이 장춘이라는 대도시를 여러번 체험하고 처음으로 중국말을 해보았다. 물론 간단한 말 밖에 몰랐지만. 이번에는 의학이 발전하여 새로운 치료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연변병원에 찾아갔다. 수술을 하고 한 달가량 연길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결과 어느정도 효과는 있으나 여전히 완치는 불가능 했다. 치료 후 또다시 생산대에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어느덧 새해의 대학시험 계절이 또 닥쳐왔다. 어떻게 할것인가? 장춘에 있는 둘째 누님한테 편지를 썼다. 무슨 방법이라도 없겠는가고?. 누님의 회답에 자기가 알고 있는 대학의 교수들한테 사정을 이야기하여  부탁해 보겠다는 것이였다.대답은 시험점수만 좋으면 길림재무학원(대학)이나 사평사범학원에 친구가 있으니 방법을 대겠다는 것이였다. 또다시 한갈래의 희망이 나한테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해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생산대장한테 한달 휴가를 맡고 룡정에 있는 누나의 집에 찾아가서 매형더러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큰 누나는 룡정5중의 수학교원이고 매형은 룡정고중의 역사 교원이였다. 기실 누님이라기보다도 나보다 21세 년상인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매형과 누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습을 했다. 필경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니 진척은 빨랐다. 허나 그 때(1980년)에는 외국어 시험이 추가 되였다. 나는 생산대에서 일하면서 일본어 자습을 시작했었다. 아이우에오는 우리 마을에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일본인이 였기에 염치불구하고 일본어를 좀 배워달라고 부탁하니 쾌히 응해주었기에 문자읽기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되였다. 그 후 형이 보내준 책 한 권(대학교과서)을 매일 휴대하고 일터에 나갔으며 짬을 타서 공부했다. 그 때는 생산대대의 벽돌공장에서 일했는데 매일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면서 휴식시에는 일어단어를 외우고 집에 돌와서는 밤에도 피로한 몸으로 공부를 견지했다. 허나 시험지도를 하는 선생이 없었기에 결국은 대학시험을 쳐도 좋은 성적을 따내기 힘들었다. 겨우 30점 정도밖에 안되였다. 다른 문과과목은 그래도 괜찬은 성적이여서 입학점수선에 거의 접근하였다.내가 맥을 놓고 있을 때 매형은 촌놈이 한달가량 자습을 해서 이 정도 성적이면 머리가 좋는 편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 한마디 말씀에 또다시 희망이 보였다. 그해 가을에는 부모들과 상의하고 또다시 룡정고중에 있는 매형한테 부탁하여 보습반에 편입시켜 달라고 사정했다. 입학허락을 받자 나는 쌀 한 마대(주머니)를 달랑 메고 룡정고중으로 찾아가 등록하고 큰누나의 집에서 하숙하기로 하였다. 누님네도 어려운 상황이였으나(그 때는 식량이나 부식품이 공급제였기에 쌀과 육류 등이 결핍 하였다) 그래도 막내 동생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도와 주었다.  룡정고중 보습반에 들어와보니 대부분 몇 년씩 대학시험에 합격되지 못한 ‘앉은석동’들이였는데 보습반에서도 몇 년씩 공부하였기에 그들의 수준은 내가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 보였다. 사실 그랬다. 농촌에서 로동을 하면서 그저 몇 주일 정도 책을 보고 시험에 도전하였던 나는 진짜 시골티가 나고 무식한 놈이였다. 처음에는 그만 자신감이 떨어져 당장 그만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매형한테 상의 하였더니 “어쩌다 이런 기회를 얻었는데 열심히 해봐라”고 격려해주기에 다시한번 결의를 다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담임선생이 항상 “너희들은 방석에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다면 자살하겠다’고 써붙혀 놓고 공부해라”고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나에게는 좋은 자극이였다.하여 나는 하루에 3-4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못하면서 죽자 살자 공부에 몰두 했다.  시험공부도 물론이지만 한어실력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친구의 힌트를 받아서 신화자전(新華字典)과 성어자전(成語辭典)을 한장 한장 암기내고는 찢어버렸다. 너무나도 우둔한 방법이였으나 그래도 효과는 좋았다. 대학입시 한어시험에는 문장을 축소(긴 문장의 의미를 살리면서 짧게 쓰는법)하는 문제가 나왔기에 그 때는 암기냈던 성어(成語)가 크게 힘을 내여 최고성적을 따냈다. 드디여 본시험 한달전에 예비시험이 실시되였는데 나는 전현 문과생 가운데서 2등을 하였다. 담당교원들과 매형은 너무나 놀라했다. 본시험이 닥쳐왔다. 너무나 공부에 몰두하고 영양도 못따라 갔기에 본시험의 첫날 아침에는 긴장감도 있어어 뒤머리가 막 마비되는 감각이였다. 시급히 병원에 가서 30분정도 침구치료를 하였더니 좀 회복되였다. 나중에 시험결과가 나와서 교원들은 또 한번 놀랐다고 하였다. 시험성적이 전 연변주에서 문과 1등이라고 하였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길림성에서 문과 3등이였다. 이 성적이면 중국의 최고대학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허나 나에게는 또다시 신체장애의 걸림돌이 걸려왔다. 입시전에 룡정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소아마비 후유중과 색망(色芒)이 좀 문제로 걸렸었는바 다시 한 번 정밀검사를 한다는 것이였다. 길림대학의 형이 여름방학이였기에 나를 배동하여 길림시 구전(口前)이라는 곳에 가서 신체검사를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결론은 알려주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그래서 시골집에 돌아와 생산대에서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중앙민족학원(대학)의 입학통지서가 도착했다. 정치계(학부) 철학전업이였다. 전문이야 무어든 상관이 있으랴. 대학에 들어가게 되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이였고 또 상상도 못하던 수도의 대학에 록취되다니? 수도 북경! 그것은 꿈에도 가고 싶었으나 실현할 수 없는 꿈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내앞에 닥쳐왔으니,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막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부모형제는 물론 온 마을과 마을의 친구들이 모두 모여서 부러운 마음으로 축복을 해주었다. 소학교의 선생님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이런 때 연인까지 있었더면 더 달콤한 축복을 받았을 텐데. 허나 나같은 신체장애자의 촌놈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처녀는 유감스럽게도 한 사람도 없었다. 소학교부터 한교실에서 같이 공부한 동창생이 우리 마을에만 12명이고 그중에는 여성동창생이 6명이였는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대부분 시내로 시집을 갔었다. 또한 내가 북경에 간다고 하니 하늘에 올라가는 것 같으니 누가 감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귀인이 도와 주었기 때문이였다. 당시 중앙민족학원에서 초생(학생모집)하러 길림성에 간 사람이 정옥순(조선족,당시 학생과 과장이였는데 나중에는 대학의 당지부 부서기까지 되였다)선생님이였다.길림성 초생반공실에서 시험당안(파일)을 체크하다가 나의 당안을 보고 너무나 성적이 높은데 놀라(그해 중앙민족학원 길림성 초생점수선은 400점가량이였는데 나의 총 점수는 434점이였다)  더 자세히 보니 신체검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선생은 소수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신체상 문제가 있는 나의 당안을 뽑아가지고 북경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때 만약 정선생이 아니였다면 나는 북경에 갈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고 대학조차 들어갈 수 있을지 말지 모르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귀인이 나를 도와 주었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예비시험을 보고 지망하는 대학을 써넣었는데 북경대학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용기를 내여 쓴 첫 지망이 길림대학(국제경제계) 이였고 둘째 지망이  중앙민족학원 역사계였다. 그뒤로 연변대학(일반대학)도 지망서에 써넣었다. 만약 대학본시험 결과를 보고 지망서를 쓴다면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도 선택할 수 있었다. 나의 성적이 최고급 대학의 입학선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허나 이것도 운명이였다고 지금은 생각하고 또한 중앙민족대학에 들어갔기에 언제나 제일 높은 성적으로 제일 선두에서 달릴 수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속담에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과정에는 이와 같은 면이 적지 않다. 하나는 내가 신체장애가 없이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많은 농촌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농촌에서 장가들어 농사지으면서 사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또79년도에 전문학교 시험에서 연길현 수석이였으나 전문학교에도 들어갈 수 없는 가련한 운명에 통한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런데 만약 그때 순조롭게 전문학교로 갔더라면 지금 같은 인생길이 없었을 수도 있다. 연변의 어디에서 소학교 교원이나 어느 국영단위의 회계나 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한국붐에 휘몰려 품팔이로 출국했을 가능성도 있었지 않겠는가?성공하기 전에는 인생이 기구하고 전도가 없다고 낙심했는데 성공하고 보니 그것이 나의 불굴불요(不屈不饶)의 강인한 의지를 키워주고  나중에는 오늘의 인생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으로 되였다. 지금은 오직 감사의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8    6.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 댓글:  조회:2961  추천:3  2012-11-02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6.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 4년간의 농민생애   소위 고중을 졸업하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농촌의 생산대에 돌아와 나의 농민생애을 시작하였다. 소아마비증 장애자인 나로써는 가혹한 인생의 첫 걸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몸으로 농촌의 체력로동을 감당하지 않으면 않되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학교 때 모택동주석은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고 지시를 내려 많은 도시의 고중졸업생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하였다. 우리마을에는 상해에서 지시청년들이10여명 하향하여 왔었는데 바로 우리집 앞에 ‘집체호’가 만들어 졌었다. 또한 당지의 로투구진에서 온 지식청년들도 10여명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족들이기에 당시 나는 중국말을 기본상 할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한족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형님들은 어느 정도 중국말을 할 수 있으니 그들과 친구를 사귀였다. 그 후에 집체호를 해산하여 지식청년들을 각 농가에 입주시켰는데 우리집에도 남성청년이 한 사람이 들어와 1년정도 같이 생활했다. 때문에 조금씩이나마 중국말 련습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계급투쟁도 치열했지만 상해지식청년들과 지방지식청년들 두 그룹간의 싸움도 대단했다. 그들은 밤이면 몽둥이나 농구를 잡아쥐고 무리를 져서 싸우는 것이 진짜 농민전쟁을 방불케 했다. 어린나이에 밖에서 들려오는 ‘싸! 충!’(죽여라! 돌격하라!) 하는 외침 소리에 소름이 끼쳐서 감히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잇따라 “어느누가 피터졌소, 머리터졌소” 하는 소식이 전해져 너무나도 공포적이였다.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 생산대에 돌아와 일할 때는 문화대혁명도 기본상 끝난 시기여서 이런 무리 싸움은 없어졌고 일부 지식청년들은 자기출신지로 돌아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는 농촌에서 닥치는대로 모든 일에 참가했다. 기음매기로부터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토개량’을 한답시고 땅파기를 온 겨울 했다. 언땅을 파서는 논밭에 펴놓아 좋은 농토를 만든다는 것이다. 생산대이니 물론 사원(‘인민공사’이기에 ‘농민’이라 부르지 않고 ‘사원’이라 불렀다)들이 모두 함께 생산대장의 안배에 따라 여러가지 일을 했다. 2년째에는 생산대에서 나를 출납과 회계로 배양한다고 하여 당시 나이먹은 회계를 따라다니며 회계를 배웠다. 기본상에서는 주산을 배우고 기장(장부기록)을 배웠다. 지금 같으면 어느 학교나 학습반에 가서 배웠겠지만 당시에는 ‘실천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모주석의 말씀에 따라 정규적인 회계지식은 배울 수도 없었고 배울 필요도 없었다. 계산만 할 수 있으면 회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농촌에서 일할 때는 매년 열심히 농사를 지어 쌀도 많이 생산했는데도 늘 사원들의 량식이 모자라 농민들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가을에 생산대에서 분배받은 량식은 이듬해 5,6월이 되면 거의 다 먹고 또 식량난이 생기는 것이 당시 농촌의 일반 현상이였다. 왜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당시의 농업정책(지금 알고보니 기실은 농민략탈 정책) 때문이였다. 정부는 농촌의 생산량이 얼마든 관계없이 농민의 식량분배기준을 정해놓고 그외는 모두 공량(정부에 납부하는 량식)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아주 값싼 대가는 치르는데 그것이 생산대의 수입으로 된다).그 때의 기준으로 농민 어른 한 사람당 한 해 분배기준은 벼로360근이다. 그것을 가공하여 쌀을 쪄내면 대략 6,70%가 되니 한 사람당 일년 먹을 쌀은 약 210-250근 정도이다. 1년365일에 하루 평균1근도 않되니 고기도 채소도 풍족하지 못한 농민이 그것으로 1년 살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당시 도시 로동자들은 정량으로 한달에 배급이 30근이니 하루 평균1근이고 한 달에 반근의 고기를 살 수 있었다. 농촌에서 일할 때는 아직 나이 어리고 이런 정책의 본질에 대해 잘 몰랐으나 어떻게 하면 사원(농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었다. 생각한 끝에 묘한 수가 떠올랐다. 생산대 회계라는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생산대장한테 나의 방법을 이야기 했다. 생산대장은 누구도 몰래 잘 해보아라고 지시하였다. 식량분배는 회계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던 수를 쓰면서 식량분배를 사원들에게 많이 하도록 하였다. 방법은 저울추에 20%의 저울돌을 남몰래 달아놓고 분배하였다. 그러니 사원들은 100근의 식량을 분배받아도 기실은 120근을 받아가는 것이 되였다. 모두들 예전보다 많다고 생각은 하나 누구도 질문이나 확인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2년동안 나는 사원들을 속이고 정부를 속이고 농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분배했다. 그러니 당연히 알아차린 농민들은 나를 속으로 좋아하기 마련이다. 허나 이 일을 만일 상급정부나 관계부문에서 알게되면 나는 회계직에서 철직을 당하거나 탐오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사원들속에도 자기가 분배받은 식량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을 분배후이면 상급정부에서 4청대(회계감찰)를 각 생산대에 파견하여 재정검사를 하였다. 마을 간부들이 나와 같은 부정분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에 검사도 엄격히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산대장이나 회계가 처벌받거나 잡혀 가는 일도 많았다. 사원들 가운데서 빨갱이 적극분자들이 생산대장이나 회계를 적발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농민의 리익을 도모하는 ‘반당 반사회주의의 착오’를 범하였다. 만약 지금 내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크나큰 부패 탐오자가 되였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에 와서 스스로 분투하였기에 돈욕심과 권력욕이 없이 사회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순수한 인간이 되였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또한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7    5.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라 댓글:  조회:2809  추천:3  2012-10-30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5.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라 -문화대혁명의 풍파속에서   내가 소학교1학년에 입학할 때는 1967년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 후였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마을에서는 옛날의 지주[1] 나 부농[2] ,반혁명분자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워놓고 투쟁대회를 벌렸다. 나는 멋도 모르고 재미있다고 사람들의 무리에 끼여들어 놀음질 했다. 소학교에 입학하여 제일 먼저 배운말은 “모주석 만세!”였다. 그때 당시에는 모택동주석은 ‘중국인민의 태양’이며 ‘세계인민의 태양’이라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위에서 처럼 ‘나는 모주석이다’라는 말이 튀여 나왔던 것은 바로 이런 교육을 받았기에 나도 공부를 잘하니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천진한 마음속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면 ‘모주석은 중국의 태양이지만 세계의 태양은 누굴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루는 집마당에서 넷째누나와 함께 집일을 도우면서 누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누구요?”하고 물어 보았는데 누나의 대답은 “모주석이지 누구겠니?”라고  대답하니 나는 납득이 안가서 머리만 갸우뚱 하였다. 기실 내가 생각한 제일  위대한 사람이란 지금의 의미에서 말하면 세계적 지도자 다시말하면 ‘세계의 대통령’ (현실에는 ‘련합국사무총장’)의 뜻이였으나 그런 지식이 없었기에 그 이상 질문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어린나이에 극단적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나는 세계(글로벌) 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당시에는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모택동주석의 ‘학제는 단축하고 교육은 혁명을 해야한다’는 교육방침과 학생들은 ‘공농병의 교육’ 즉 로동자, 농민, 병사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최고지시’하에 학교교육이 혼란상태에 빠졌던 상태였다. 소학교를 6년제로부터5년제로 단축하고 초중과 고중도 모두3년제로부터 2년제로,   9년제 교육이 실시되였던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는 어릴 때부터 농업을 배우고 농민의 로동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방침이기에 매년 농사가 다망한 시기에는 방학을 하고 생산대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다.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이 오전뿐이고 오후에는 기본상 하학을 하여 숙제도 얼마 없고 하기에 놀음에 열중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기말시험을 치면 언제나 1위나 2위로 되였지만 농촌소학교에서 공부하는 량과 질이 아주 부족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생활이 비록 가난은 하지만 아주 즐거웠다. 지금처럼 컴퓨터게임이나 텔레비는 없었어도 매일 친구들과 뽈도 차고 썰매도 타고 밤이면 새둥지도 들추고 싸움도하고 하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보냈다. 놀음 도구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으니 기본상 자체로 만들거나 아버지한데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무를 깍아서 권총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진흙을 비벼서 놀음다마를 만들고 고무줄과 쇠줄로 새총도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문에 손재간이 늘어나고 창조적 사유가 생겨난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손재간이 괜찮아 채소밭도 가꾸어 연변에서 먹던 채소를 일본에서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자기집 정원도 잘 가꾸어 멎진 화원처럼 만들고 있다. 안해는 나보고 “오또산(당신) 정말 촌놈이네. 부지런하고 재간도 많아요” 라고 놀려도 주고 칭찬도 준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일본사람들과 술마실 때면 농담으로 “나는 진짜 촌놈이요(이나까 모노)”라고 자아소개를 하고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놀음시간은 적어지고 사회노동이 많이 늘어나면서 공부할 시간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봄에는 모내기  2,3주간, 여름에는 기음매기1,2주간, 가을에는 가을 수확돕기 2,3주간,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적비임무(소똥이나 돼지똥 등 비료를 주어 모으는것)가 있으니 공부할 시간은 아주 적었다. 때문에 위에서 말하다 싶이  나의 두뇌는 ‘지식결함품’이였다. 고중졸업 후 내가 농촌에서 일을 하면서도 혹시나 대학시험이라도 쳐보고 싶어서 1978년 처음으로 리과시험을 치렀는데 정치나 어문 한어는 그래도50-60점 정도 맞았으나 수리화과목은 17,18,19점밖에 맞지 못하였다. 중학교 때 물리과 시간에는 손잡이뜨락또르(경운기)에 관해서 배우고 화학시간에는 농가비료 화학비료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배웠으니 그럴 수 밖에.  허지만 그런 환경속에서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모든 일에 임했다. 반급에서 성적도 상위고 반급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소학3학년에는 홍소병[3]에 가입했고 초중1학년에는 홍위병[4] 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고중에 올라가서는 공청단[5]에 가입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계급투쟁’[6]형세하에서 가족이나 친족에게 계급문제가 있다고 의심을 받으면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입단신청을 냈으나 반주임선생은 “동무는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어야 합니다”라고 사상교육[7] 을 했다. 이유인즉 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때 일본에 귀순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였다. 후에 판명된 일이지만 역사조사에서 아버지와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일본에 귀순하여 일본놈의 앞잡이로 악행을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혐의는 아버지가 토지개혁 때 공산당에 가입하였다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공산당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에 자원퇴당을 했는데 그것이 문화대혁명중에서 “왜서 공상당에서 퇴당했는가, 원인이 불분명하므로 혐의대상으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혐의 때문에 순수한 공상당의 후대조직인 공청단에 가입할려면 아버지와 사상상에서 계선을 나누라는 것이다. 아버지인데 어떻게 계선을 나누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도 없었다. 후에 역사조사에서 아버지의 문제가 해명되자 나는 고중2학년에서 졸업을 앞두고 공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역사문제’ 때문에 군인으로 있던 맏형도 공산당입당에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해명되였기에 입당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우리집에는 또 하나의 큰 불행이 들이닥쳤다. 세계급 운동건장으로 활약하던 둘째 누나가 장춘에서 어떤 사람들의 압송하에 우리집으로 왔다. 내가 10세 때의 일이다. 왜서인지 우리 집에는 매일 눈물이 많아졌다. 둘째 누나는 가난속에서도 분투하여 자전거 시합에서 국가대표로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에서 개최된 신흥국가 운동회(올림픽대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주의권과 신흥민족독립을 한 100여개 국가가 개최한 세계대회) 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받았으며 국가급 운동건장이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조선특무(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구류소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결혼을 금방 하였기에 임신한 몸이여서 더 이상 구류소에 감금할 수 없게되자 감시인을 파견하여 본가집인 우리집에 보내왔다. 그리고 생산대의 문혁소조(총칭 문화대혁명령도소조)에 감시를 위탁하였다. 헌데 우리집에서는 당시 문혁에서 활약하는 누나 형님들이 있어 계급의 적대관계가 가족내부에서 발생했다. 혁명을 하고 있는 누나 형님들과 혁명의 대상으로 되는 둘째 누나와의 싸울 수도 없는 갈등이 가족내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이면 식탁앞에서 먼저 모택동에게 충성을 표시하고 식사하였는데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서로간에 눈물로 보내고 있는 장면을 어린나이에 가슴아프게 쳐다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몇 년 후에 둘째 누나의 특무혐의는 증거부족으로 부정되고 가족내 계급투쟁은 끝내 종말되였다. 내가 공청단에 가입할 때는 둘째 누나의 일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공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수한 학생이였으나 그 후의 발전전도는 훌륭한 농민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자식이면 노동자로 취직할 수 있으나 농민의 자식은 시골 생산대에 돌아가 농사짖는 길뿐이였다. 옛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농민의 자식이 농민으로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였다. 하지만 근대화를 시작한 중국사회에서 농민은 실제적으로 사회의 최하층 국민으로 취급받았다. [1] 지주: 토지를 많이가지고 있어 소작농을 고용했기에 다른사람을 착취하였다고 공산당의 진압 대상으로 지정되엿다.   [2] 부유한 농민; 다른사람을 착취하지는 않았으나 보통 농민들 보다 재산이 좀 있고 생활상 여유가있는 사람들로서 역시 경계의 대상으로 지정되였다   [3] 홍소병(紅小兵)이란 공산주의 리념하에 국민의 관리를 군대식으로 생각하여 모주석과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붉은 어린이 병사라는 의미로 우수한 소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문화대혁명 종결후에는 페지되여 [우수 소선대](우수한 소년선봉대)로 개칭함.   [4] 홍위병(紅衛兵)도 마찬가지로 붉은 전위대 병사라는 의미. 문화대혁명 종결후에는 페지됨.   [5] 공청단(共靑團)은 공산주의 청년단의 략칭이다. 공산당조직의 젊은 후대의 양성 조직 으로써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한 조직이다. 공산당에 가입하기전의 관문(關門)이기도 하다.   [6] 전체국민을 9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사람을 분류했다. 좋은 계급부터 순서를 매긴다면 공인(도시로동자)계급, 농민계급, 병사 계급, 학생계급, 그뒤는 잘 기억하지 못했으나 지식분자계급은 9번째 등급에 분류되여 [쿠린내나는 아홉번째로](중국말로 臭老九)로 불리우고 많이 구타당하고 피해를 받았다.   [7] 사상교육(思想敎育)이란 인민들의 사상을 공산주의 의식을 수립하도록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공부하고 공산주의 의식으로 통일할려고 한 문화대혁명 정책의 하나이다.  
6    4. “나는 모주석이다” 댓글:  조회:3357  추천:1  2012-10-18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4. “나는 모주석이다”-기아와 가난의 시대속의 생존분투   인생의 길은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불도 있고 물도 있어 그야말로 우여곡절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인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이지만. 나는 인생을 돌이켜 볼 때마다 한번 인생의 경로를 그래프로 표현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아마 내가 경제학을 배웠으니 독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알기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수식(數式)을 만들어 그래프를 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이 글을 시작하면서 그런 작업을 해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읽어 본 인생의 회고록 같은 서적에서 그래프로 인생의 경로를 표현하는 수법은 본 적이 없다.때문에 이것도 나의 독특한 Only one의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나의 인생그래프를 해석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나는 중국에서 한창 대약진운동이 시작되던 1958년12월(음력) 중국의 길림성 연길현(현 룡정시) 동불사촌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당시 부친 리선규는 50세, 모친 강영숙은 42세로 초고령 출산이였고 4남4녀의 막둥이였다. 내가 태여난 시대는 우리 가정뿐아니라 중국의 6억농민이 대부분 가난했었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대약진정책을 추진하고 게다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므로 소련의 대중국 지원이 중지되고 대약진운동으로 공업과 농업생산이 많이 정지되고  자연재해 등 원인으로  3년 대약진 기간에 약3천만에서 5천만인구가 사망되였는데 그대부분은 아사(굶어죽음) 하였고 또 그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농민이였다[1].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대량 아사하였다.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온가족 7명이 하루에 식량500그램을 분배 받았다고 한다. 육류나 부식품도 거의 없는 상황이였다. 1990년대의 중반기 이 후의 조선(북한)의 기근상황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기근속에서 태여나 자라다보니 당연히 죽음이 아니면 심각한 영양불량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태여난 시대가 너무도 기구했었기에 나는 일생동안 영양불량의 체질을 달고 있게 되였는데 한살되는 나이에 소아마비증에 걸렸다. 가난하여 치료도 못받고 그 휴유증이 나의 일생에 장애자의 괴로움을 남겨두고 보통인간으로 성장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였다. 후에 어머니도 제일 큰 근심이 불구자인 ‘막둥이를 열다섯살이래도 먹여놓고 죽었으면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마음속으로는 장가라도 보내놓고 죽었으면 눈을 감겠다고 희망했을 것이다)고 언제나 마을 사람들한테 넉두리처럼 말씀하셨다. 그것은 가난속에서 12명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의 몸은 병투성이여서 언제 자기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나에게서 인생의 첫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어머니가 나를 업고 우사칸 (소사양간) 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1961년에 동불사촌에서 약10리 떨어진 로투구 렴명촌 (인민 공사[2] 시대이므로 그때는 도원인민공사 렴명생산대대 제5생산대) 에로 친척의 알선으로 이사하려고 낡은 우사칸집에 집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동불사촌은 땅이 척박하고 재해가 많아 가난하기 짝이없는 곳이였다(지금도 이곳은 여전히 빈곤한 촌이다. 너무 가난하여 ‘당나귀가 새끼를 않친다’는 속담까지 전해오는 곳이다). 이사한 렴명촌은 그럭저럭 밥벌이하고 살 수 있는 촌이였다. 또한 1961년에는 모택동의 대약진정책이 비판받고 수정되여 류소기 국가주석과 등소평 부총리의 새로운 산업정책과 농업정책에 의해 공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세살 때의 희미한 기억이였다.  어릴 때의 나의 두번째 기억은 어머니가 누덕누덕 기운 솜옷을 나에게 입히고 마을 부근의 논밭에 모내기를 하러 갔을 때 나를 논두렁 개울물 옆에 앉혀놓고 모내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앉아서 끄떡 뜨떡 졸다가 개울물에 빠졌던 것이다. 같이 갔던 옆집의 일호아매라고 하는 할머니가 “애가 물도랑에 빠졌소”하고 소리치자 주위의 사람들이 달려와서 나를 건져 주었다. 하도 생명력이 강해서인지 생명위험은 없었다. 헌데 어머니는 나를 건져서 논두렁 옆에 않혀놓고는 계속 벼모내기를 하였던 것이다. 네살 때의 기억일 것이다. 세번째의 기억은 어느 하루 집마당 앞의 조짚 낟가리에 굴을 파고 안에 들어가 새감지 놀이를 하면서 석냥을 가지고 불을 달아 놓은 것이다. 불은 즉시에 훨훨 타오르고 집지붕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뺑소니 쳐서 집에 들어가 고방간에 숨어 있었다. 온 가족이 불을 끄고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손에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나 화가나서 “반반(모조리) 싹 죽어벼려라!”라고 한마디 외치고 그 이상 나한테 벌은 없었다. 5,6세의 병신 막둥이 아들을 때려 줄 수도 없고 벌을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장난질로 나쁜 짓을 많이 하였으나 아버지 어머니한테 한번도 매를 맞아 본 기억이 없다. 상냥한 부모였던 것이다. 네번째 기억은 소학교 3학년 기말시험 때 어문시험을 내가 제일 먼저 마치고 퇴장하기 전에 너무나 흥분되여 “나는 모주석이다”하고 주위의 애들한테 소리쳤다. 그랬더니 나중에 누가 선생님한테 고발하였는데 이는 위대한 모택동주석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을 받고 검토서를 쓰지 않으면 않되였다. 그 후에도 그일 때문에 친구들한테 많이 몰려대고 왕따당했다.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철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1] 인구의 대량아사에 관한 중국의 공개자료는 없다. 홍콩이나 해외에서 인구통계를 연구한 결과 이런 수치가 나왔다. [2] 농업함작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농가의 토지를 집중하여 집단농업을 전개하기 위한 농촌의 조직체이며 한개 마을을 통합하여 [생산대](生産隊)로, 몇개의 마을을 통합하여 [생산대대] (生産大隊)로, 몇개의 생산대대를 통합하여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농촌조직을 편성하여 정부가 관리하였다.  
5    3. ‘동북아시아인’으로—나의 아이덴티티 댓글:  조회:2934  추천:7  2012-10-06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3. ‘동북아시아인’으로 — 나의 아이덴티티   지금의 시대는 글로벌화 시대고 지역화의 시대이다. 그전까지는 어디서 사나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이 중요한 인생 가치관이였다. 허나 지금의 시대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넘어서는 초민족적 초국가적 가치관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족을 배반하거나 나라를 배반하는 인간은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나를 내렸으매 반드시 쓸 곳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그럼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 태여난 나의 정체성과 나의 위치는 무었인가? 그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40대에 들어선 때였다. 진짜 인생을 알게 된 것이 이때였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나 공자의 말씀에 40에 불혹이라(四十而不惑) 하였으니 공자같은 성인(聖人)도 40대에야 자기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니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10여년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 매김을 ‘동북아시아인’으로 확정하였다. 왜냐하면 나의 출생지는 중국이고 국적도 중국이지만 나의 선조는 조선반도출신의 한(조선)민족이고 한민족의 언어와 문화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중국인으로서의 중국어와 중국문화의 세례를 받아왔다. 일본에 온 20여년간 조선(한국)과 중국의 문화배경을 바탕으로 일본문화와 세계문화의 세례를 받아와 ‘세계인’이나 ‘지구시민’을 지향하였다. 허나 나의 인생문화에서 핵심적인 것은 동북아시아(예전에는 동아시아) 3국이니 또한 동북아시아의 발전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자기의 인생가치와 목표로 생각하고 그것이 또한 나를 Only One(유일한)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50여년의 인생에 지금도 나는 언제나  Only one을 나의 인생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나의 삶의 가치이며 자호감이다. 사회적으로 나는 동북아시아 지역연구와 각종 실무활동에 참가하는데 여기서도 나는  Only one을 나의 인생가치로 생각하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12월에 내가 소속한 일본정부 정책연구소의 출장으로 오스트리아의 윈에 가서 련합국공업개발기구 (UNIDO)의 두만강지역개발에 관한 국제워크샵(研讨会) 에 참가하여 보고를 한 적이 있다. 나의 보고 차례가 되자 나는 자기소개에서 “나는 동북아인 입니다= I am a Northeast Asian”라고 소개하고 서투른 영어로 나의 프레제테션(보고)을 시작했었다. 그 회의에는 련합국관원들과 중국, 한국, 조선, 러시아, 몽골, 일본 등 6개국의 관계 전문가들과 정부관원들이 참석했는데 나는 일본의 유일한 대표로서 참가했다. 하지만 나는 일본인이 아니였고 또 중국인이라고 말하자니 그것도 어불성설이였다. 국적은 중국이나 일본측을 대표했으니까. 거기에 나는 또한 조선(한)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으니 어느 하나라고 딱히 말하기 어려운 것이였다. 코리안의 속성, 중국의 속성 그리고 일본의 속성을 겸한 인간이였던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아이덴티티(自我认同)가 나에게는 ‘동북아인’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일본에 유학한 후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연구테마(주제)가 두만강 국제개발과 동북아시아 지역협력이였기에 나의 생애의 연구과제와 활동과제는 언제나 동북아시아 지역이며 이 지역의 평화와 발전이 있어야 나의 인생도 보람찬 인생으로 될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인생가치는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운명적이다.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연하게 연변이라는 곳에서 태여나 조선어(한글)와 조선문화를 배우게 되였고 또 우연하게 중국땅에서 태여나 중국국민으로서 중국어와 문화를 배우게 된 것이다. 또 우연하게 북경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대학에서 교수직을 찾았으니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려고 촌에서 자습할 때 외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형님이 일본에서 보내준 일어책 한권을 들고 우연히 한 마을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나의 친구의 어머니, 문화대혁명 때문에 연길시에서 우리마을에 하향해서 10여년 거주했음)을 찾아가 아이우에오 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그 후에는 자습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공북경시당교의 연구생에 합격했는데 전공이 우연히 ‘당의 건설’이였으니 세계적으로 공산당국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쏘련(현 러시아)이 맞형이니 당연히 로어(러시아어)를 공부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책 한 권을 사가지고 로어 자습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20년 후 동북아시아 지역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러시아에 가서도 로어 절반 영어 절반으로 통역이 필요없이 큰 불편없이 거리에 나가 다닐 수 있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경제학전공 대학원에 들어 가려고 하니 영어시험을 쳐야 했다. 나의 영어라면 대학에 들어가서 A,B,C에서 시작하여 2년 밖에 배우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당연히 대학원 시험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와서는 일어 공부와 알바의 틈을 타서 영어자습을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석사,박사시험을 무난히 넘겨 합격되였다. 나중에는 UNIDO 국제회의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션까지 할 수 있었고 영어로 논문까지 집필할 수 있게 되였다. 2005년 가을에 처음으로 몽골국의 울란바트르에 출장갔는데 공항에 도착해서 간판을 보니 모두가 로어문자(기릴문자)로 되여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어 너무 놀랍고 기뻤다. 나중에 알아보니 몽골은 근대의 몇 십년간에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러시아의 선진적인 과학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1941년부터 기릴문자를 도입하여 지금까지도 그것이 국어로 되여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몽골국과 중국의 내몽골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말을 쓰나 문자가 서로 다르기에 문화교류에 큰 장애가 생기게 되였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남북이 갈라지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자라났지만 말과 문자가 잘 통하니 다행이라 하겠다. 물론 지금 외래어 남용이나 ‘한자어 한글표기법’으로 인한 적지 않은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이지만.그래서 나중에 몽골정부 외교부의 친구들과 식사할 때 이제부터 나는 몽골어를 배우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물론 친구들은 네가 몽골어까지 배우면 진짜 ‘동북아인’이 된다면서 기꺼히 배워주겠다는 것이였다. 일본에 돌아와서 곧 몽골어책과CD를 사서 자습을 시작했다.  2004년에 동경의 시나가와 프린스 (品川) 호텔에서 아사쇼류(朝青竜) 요코즈나(横綱)의 스모(相撲) 9련승 축하 파티에 초대장을 받고 참가하게 되였는데 나는 아사쇼류의 가까이 가서 “사엔바노”하고 몽골말로 인사를 거니 아주 기뻐하며 몽골말로 대답해주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돌이켜보니 나는 동북아의 6종 언어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소질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였고(로어와 몰공어는 아직도 초급수준에 불과하다) 또 연구분야도 동북아시아 지역이니 나야 말로 세상에서Only one의 리강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나의 아이덴티티이며 나의 인생 가치관인 것이다. 즉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나’ 라는 것이다. 독자들도 인제는 내가 처음에 언급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이라는 노래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이유에 동감하리라 믿는다.
4    2. 못난 송아지도 정성들여 기르면 훌륭한 황소가 된다 댓글:  조회:2501  추천:1  2012-09-12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2. 못난 강아지도 정성들여 기르면 훌륭한 황소가 된다   나는 나의 전반생을 총화할 때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태여나면서부터 불우한 운명을 타고 났지 않았을가. 마치 흉년세월에 태여난 못난 송아지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태여나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불우한 운명으로 인하여 자신감이 없고 큰 꿈도 없이 살았다.  전에 생산대에서 사과배를 따서 시장에 내다 팔기전에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골라 등급을 나누었는데 3등품이 나오면 ‘저 배들도 어쩌면 나와 같은 운명이구나’하고 서글픈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즉 나는 제품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3등 결함상품(缺陷商品)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성인이 되여서 지금까지의 인생은 그래도 열심히 그 결함상품을 수리하고 보완하여 일반 인간 즉 정품 혹은 완성품으로 수정하여 가는 과정이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구태여 ’3등결함상품’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내가 세가지의 큰 결함(핸디)을 짊어지고 살아왔다는 말이다.    첫째, 나는 일찍 동년의 꿈을 맛보기도 전에 소아마비증에 걸려 불구자 신세가 되였기에 처음부터 하느님은 나한테 평등한 인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인간의 본능으로 다른 기능을 개발하여 부족한 기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려고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반급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학교에서 체력로동이 있어도 선생님은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참가했다. 부꾸러움도 모르고 친구들속에 휩쓸려서 뽈도 차고 배구도 치고 탁구도 하면서 뭐나 뒤떨어지지 말자는 일념에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심지어 대학에 입학해서는 불구인 다리로 대학의 마라톤 대회까지 참가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완강한 의력이라 할 수 있고 듣기 싫게 말하면 소문난 악돌이로 이런 성격은 어릴 때부터 길러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내가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고중(고등학교)을 졸업한 시기는 1967년부터77년까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와 기본 일치하다.그 시기 모두 그러했듯이 정규정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나의 두뇌는 ‘지식결함품’일 수 밖에 없었다.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워낙 공부하는 날보다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날이 더 많았고  농촌집에 돌아와도 로동이 많았으니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졸업하여 농촌에 돌아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역시 가혹한 농업 육체로동 뿐이였다. 그것도 신체장애라는 치명적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니.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대학시험을 치렀으나 4년동안의 시험끝에 겨우 겨우 시골에서 수도 북경의 대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은 그 때로부터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였던 것이다. 셋째, 가정생활이 가난하고 신체장애를 가졌기에 그것을 극복하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엄마가 동네에서 막내 아들을 공부 잘 시켜서 청화대학에 보낸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청화대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마을 친구들한테서 ‘청화대학생’이라는 별명이 붙어 왕따 당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때는 ‘청화대학생’이라는 별명이 나에게 그렇게도 치욕적으로 생각되였다. 신체는 부족하고 공부는 잘하니까 주위에서는 동정하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왕따 주고(외목 내고)  깍아 내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난하고 왕따당하니 자연히 심리적 약점이 생겨 ‘심리결함품’이 되여 버린 것이다. 팩한 성격과 자신감의 부족을 가지고 사춘기에 들어섰다. 허나 성년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반급의 리더(반장)가 되여 다른사람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성장되였다. 그후  30여년간에 자연히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인내성도 강해졌다. 50년간의 인생을 총화해 보면 매일매일 자기의 부족을 보완하고 자기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분투였다. 나는 글을 쓸 때 필명으로 ‘민들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수많은 잡초속의 한떨기의 민들레와 같은 존재라고 언제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길가에서 밟히고 밟혀도 아무말 없이 꾸준히 살아가며 수수하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니 나도 민들레와 같은 조용한 풀 한포기이지만 자기의 강인한 생존력과 끈임없는 노력 그리고 자기의 특색을 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Only one의 민들레 였다고 지금은 자부한다.  
3    1.‘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 댓글:  조회:2847  추천:1  2012-08-20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   지난 2011년9월16일에 중국 북경로동자체육관에서 처음으로 공연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일본의 인기 그룹 스맢(SMAP)가 처음 열창한 노래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꽃’이라는 테마(주제)였다. 특별한 노래는 아니지만 나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텔레비에서 북경공연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7년전의 일이 생각났다. 나까카노 라는 한 일본친구가 미국 워싱턴의 부루킹스연구소의 초빙연구원으로 떠나면서 친구들과 모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때 어떤 가수 한사람이 와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친구는 “이 노래는 너무나도 훌륭하고 내용이 좋아서 련합국의 주제가로 추천해야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친구는 원래 련합국에서 10여년간 사업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런 발상이 나왔을 것이다.  그 당시는 나의 천박한 이해력으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었고 또 노래의 의미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10년이상 일본에서 열창된 노래를 이제야 이해하다니. 나의 음악 센스(감각)도 감상 수준도 너무나 문제가 되여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헌데 최근에 이 노래를 다시 들어보니 너무나도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감격을 주는 노래라는 것을 늦게나마 심심히 깨달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No.1(으뜸)이 되지 않아도 좋다. 원래 특별한 Only one(하나밖에 없는)꽃  상점에 진렬된 여러가지 꽃을 보고 있었는데 취미는 각자 서로 다르겠지만 어느 꽃이나 다 아름다워 보인다 이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이라는 다툼도 없이  꽃병에 보람차게 가슴을 확 내밀고 있구나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서로 비교만 하려고 하네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 다른데 왜서 꼭 그중에서 제일이 될려고 하나? 그렇다 우리는 세계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이요  한사람 한사람 서로 다른 씨았을 품고 있으니  그 꽃을 피우는데만 온 정력을 다 기울이면 되는거야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 열심히 핀 꽃은 어느 것이나 아름다워서 어떻게 할라나. 겨우 꽃점에서 나왔다.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색갈이 아롱다롱한 꽃과 기뻐하는 얼굴 이름도 몰랐지만 그날 나한테 웃는 얼굴 보이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피여난 꽃처럼.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꽃이야 작은 꽃 큰 꽃 어느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으니 제일이 되지 않아도 된다. 원래 특별한 Only one(유일) 이니깐.  (作詞/作曲:槇原敬之: 마키하라 노리유키 )   내가 이 노래가사에 감명을 받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또한 나 자신의 특수한 이유도 있다.나의 인생경력과 현재 인생에서 추구하는 인생가치에 관한 생각이 이 노래에 포함되여 있는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우연히도 일치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껏 인생에서 누구와 경쟁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상 없었고  실제로 누구와 경쟁한 일도 크게 생각나지 않는다. 소학교, 중학교, 고중, 대학, 대학원 그리고 유학과 사업의 전 과정에서 누구와 라이벌이라고 경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허나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더잘 나아갈 때도 있고 남보다 실패할 때도 많다. 그것은 시작의 시점에서 의식적으로 경쟁하거나 비교하면서 한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결과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좀 성과가 있으니 나와 겨루어 보려고 한 사람은 있었을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열심히 착실하게 하면 된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또 현재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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