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6. 일본의 조선족사회
나는 일본사회에서 얻은 힘을 조선족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언제나 자기의 직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2001년에 동경재단 재직중 일본에 있는 조선족단체들을 련합하여 공동 이벤트를 하여 조선족사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갈 구상을 하게 되였다. 왜서 그런 구상을 하게 되였는가?
기실 나는 북경에서 일본에 류학했기 때문에 일본에 와서도 조선족들과의 연대관계가 깊지 않았다. 친구들의 대부분은 중국류학생들이였다. 립교대학원에 있을 때는 중국류학생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중국주일본대사관의 교육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1년에 고향을 떠나 북경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이미 조선족사회를 떠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활동하는 범위가 중국인 사회가 위주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사업에 참가한 후에도 조선족 친구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것은 생활 공동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북경에 있을 때는 지식인으로 자처하면서도 나는 조선족이란 무었인가? 조선족사회란 무었인가 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더우기 이런것들이 갖고 있는 의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조선족에 관한 력사나 현황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전공도 조선족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조선말을 할 수있고 김치를 먹으니 조선족이라는 단순한 관념이 있었을 뿐이였다.
나는 연변출신이지만 연변의 농촌사회에서 살았기에 조선족사회라는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고 주류사회와의 관계도 전혀 없었다. 북경에서의 10년간 생활도 조선족활동에는 일부 참가하였으나 조선족주류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우연한 기회에 조선족사회와의 거리가 급속히 가까와 졌다. 1992년봄,나의 형이 일본에서 참여하고 있는 연변대학 교원출신들의 류학생조직인 ‘동방학우회’ (東方学友会)에서 꽃구경 모임에 나를 불러 주었다. 그 후부터 매년 이와 같은 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대학의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였다.
한편 나의 대학원 석사과정의 연구테마가 ‘두만강 지역개발과 동북아시아 경제협력’으로 되였기에 나는 두만강지역과 관련된 연변의 경제와 사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것이였다. 1995년에는 연구자의 신분으로 연변의 훈춘시 및 그 산하 경신향, 방천지역을 방문조사하였다.
1996년에 ‘천지구락부’라는 조선족 단체에서 두만강개발 현황에 관해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조직은 동경에서 류학하는 조선족 젊은이들 5,6명이 1년전에 모여서 만든 단체로서 ‘교류, 협력, 발전’이라는 취지로 매달 교류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북경 등지 출신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여 지역과 관계없이 조선족들이 모이는 장소였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여 관심이 있었고 또 나의 연구에 대하여 보고를 초청받으니 쾌히 응낙하였다. 이 보고회를 통해 나는 많은 조선족류학생들(대부분은 중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경헙이 있는 나와 같은 신분)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연대출신의 친구들도 많이 참가하였기에 여기에서 처음으로 조선족 젊은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을 진행하는 가운데서 1999년1월에 연대출신의 연구자가 중심이 되여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게 되였는데 나도 여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6명이 첫 연구회에 참가하였는데 나를 제외한 5명은 모두 연대교원 출신들이였다. 회장은 리동철(나의 형)이였다. 2,3개월 정도에 한번씩 연구회 모임을 했는데 각자가 자기 연구분야의 보고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연변의 력사나 조선족의 력사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족단체가 이렇게 3개 단체로 발전하였고 나는 어느 단체의 활동에도 참가하는 신분으로 되였다. 천지구락부(2002년에 ‘천지협회’로 개칭) 에서2000년12월 송년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면서 조선족의 현황과 미래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제안이 있어 나한테 토론회를 조직하고 사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다. 메지로대학(目白大学)의 강당을 빌려서 개최한 송년회전의 토론회에는 처음으로 100여명의 조선족 젊은이들이 참가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류학생들이였고 일부분은 회사직원이였다. 열렬한 토론회를 마치고 송년회도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조선족 젊은이들의 정열과 파워를 여기서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조선족들의 파워를 키우기 위하여서는 련대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일본에 있는 3개 단체가 공식적으로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았다. 기실 나는 일본의 학회나 심포지엄에 많이 참가하고 2000년에는 동아시아 종합연구소가 주최하는 대만에서의 심포지엄의 사무국장도 맡은 적이 있어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2001년4월에 나는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되였다. 연구프로젝트의 조직적사무가 많아 나에게는 연구조수를 초빙할 수 있는 자금예산이 주어졌다. 나는 당시 게오대학(慶応大学)대학원 박사과정에 금방 입학한 리성일씨(북경대학출신, 현재 한국동서대학의 조교수)를 연구조수로 초빙하게 되였다.
나는 연구의 틈을 타서 조선족심포지엄을 개최할 기획서를 작성하여 리성일씨가 사무국장을 맡도록 위탁했다. 나는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3개단체의 대표 등 중심적 인물들을 10여명 모아서 제안했다. 참가자들은 ‘좋은 제안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그런 대규모의 활동을 조직할 수 있는 경험도 조직력도 자금도 없어서 성공할 수 있겠는가?’고 반신반의 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에게는 열정이 있고 그 열정으로 조직하면 자금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여 그들도 마지막에는 지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제1차재일본 중국조선족국제심포지엄’이 동경복판의 메지로대학 강당에서 조선족3개단체의 공동주최로 개최되였다. 일본의 유명한 학자나 전문가들도 이 심포지엄에 초청하여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과 조선족의 역할’이라는 공동테마로 열렬한 발표와 토론을 전개하였다. 150여명이 참가한 처음으로 되는 대형활동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여 조선족의 존재를 일본사회에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족연구회도 이 심포지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발전되였다. 조선족연구를 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나 재일본한국조선동포 학자들도 연구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제2차 재일본 중국조선족 국제심포지엄’은 2005년12월에야 기획하였다. 일본에서 우리의 가난한 류학생 단체들이 모여서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은 기실 너무나 힘든 일이였다. 그러니 매년 이런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결국4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준비를 하게 되였다.
제1차는 일본국내(동경권)에 한해서 기획했는데 4년동안 우리의 힘은 어느 정도 성장되여 제2차는 중국과 한국의 학자와 매스컴관계자들도 초청하여 조선족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였다. 일본의 국제교류재단의 자금지원도 요청하고 조선족 기업가들에게도 참조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나고야에 있는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의 류경재소장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더니 전면적으로 지원 하겠다고 답복이 왔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북경의 유명한 조선족학자 황유복교수와 사회과학원의 정신철교수를 초청할 수 있었고 흑룡강신문사의 한광천사장과 연변테레비의 량성철기자도 초청하였다. 또한 연변성보그룹의 사장3명도 초청하여 참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조선족 연구 학자 이진영교수와 최우길교수 2명도 초청하였다. 이 심포지엄은 력사상 처음으로 중일한의 조선족지성인과 연구자들을 한자리에 모이는 장소로 되였다.그것도 선진국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말이다. 또한 일본의 유명한 인사 아사히신문의 후나바시요 이찌(船橋洋一)편집장과 동경대학 강상중 (姜尚中) 교수가 기조강연으로 참가해 주었다. 3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일본의 매체와 화인매체 그리고 재일동포매체도 참가하여 보도를 내보냈다.
2009년12월에 개최한 제3차 심포지엄은 처음으로 일본의 조선족연구학회, 중국의 중국조선민족사학회(회장 황유복교수), 한국의 동북아공동체연구회(회장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등 중일한3개국의 연구단체가 공동주체로 개최되였다. 흑룡강신문의 한광천사장은 많은 기업가들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가했으며 연변 조글로의 김삼회장도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가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조선족의 국경을 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플래트홈이 되였다.
특히 이번 모임은 조선족 연구학자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기업가나 일반시민, 여성조직, 류학생조직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일본조선족의 최대 행사로 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일본의 최대신문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도 특별취재를 하여 신문1면과2면에 전문보도를 해주어서 조선족들의 활약은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2011년12월에는 교토(京都)에서 제4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일본의 동경지역에는 조선족단체가 많이 활동하고 있으나 관서지역에서는 비록 조선족들이 수만명이 있으나 조선족단체가 없는 상태였으며 2007년12월에 조선족연구학회 관서부회(関西部会)를 교토에서 설립하여 류꼬꾸대학(龍谷大学) 리상철교수가 회장을 맡아 주었다. 처음으로 되는 조선족 관서지역의 활동이며 조선족사회를 네트워크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중일한의 6개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조선족연구학회가 기획 조직하고 공동주최로 중국조선민족사확회, 한국재외한인학회, 류꼬꾸대학 사회과학 연구소, 조글로, 전남대학 한상연구재단 등 단체가 참가하고 중국,한국,미국 등 나라에서 3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및 메스컴 관계자가 참가했다. 연변텔레비방송국 위성방송의 기자3명이 전문취재팀을 구성하여 취재하였으며 2012년2월5일에 ‘두만강’프로그램으로 방송되였다.
이외에도 일본에는 조선족단체가 수년간 많이 형성되였다. 2002년경에는 동북아청년련의회라는 조직이 류학생들의 축구팬을 중심으로 설립되여 10여년간 매주 토요일에 축구훈련과 시합을 위주로 교류활동을 활발이 전개하고 있으며 조선족단체의 국제심포지엄이나 기타 여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근년에는 조선족축구팀이 5,6개가 형성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되여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당시 류학생이였던 젊은이들이 창업을 여기저기서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인맥을 리용하여 조선족의 특색을 살리면서 우후죽순 처럼 기업이 탄생되였다. 주로는 무역업, IT업, 건축설계업, 부동산업, 려행업 등 업종이였다.
또한 조선족 여성기업가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주로는 음식업이였다. 연변요리, 조선족요리, 동북요리 등을 특색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현재 동경시내의 조선족요리점은 30개 정도로 발전하여 조선족들은 고향음식이 그리운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싫어하는 개고기 요리도 당당하게 메뉴로 나오고 있으며 양고기뀀도 특색있는 인기요리로 되였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사람들의 미움을 살가 두려워 개고기 요리는 감히 입밖에도 못내는데 조선족 젊은이들은 용감하기도 하다. 현재는 조선족요리점에 조선족 뿐만아니라 한국인, 중국인 지어 많은 일본인들도 상객 (常客)으로 되였다. 개고기 맛을 붙인 일본인도 적지 않다. 참으로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고 조선족 젊은이들이 일본의 식문화에 큰 쐐기를 박아 넣은 셈이다.
조선족기업가들이 많이 나왔지만 기업인들의 조직이 없으면 기업의 장구적 발전에 불리하니 기업인조직을 만들자고 천지협회 교류회에서 여러번 문제제기가 되였다. 헌데 조직을 하나 세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조선족은 문화와 경제로 자기들의 생존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젊은 인테리나 인테리출신의 기업가들한테서 생겨나고 확대되였다. 이런 와중에 재외한인무역협회(OKTA)라는 조직이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에도 4개지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OKTA동경지회의 회장이 나한테 조선족기업가들도 참가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한국인들의 조직이니 조선족이 그 속에서 발전할 기회가 있겠는가?는 회의적인 생각이였다.
한편 ‘어떤식으로 조선족기업가 조직을 만들 것인가?’ 에 관하여2006년경에 나와 관계자들이 여러번 모임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가을에 나고야에 있는 류경재소장이 OKTA의 한개지부로 설립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거기에 호응해서 천지협회의 이사들의 서로 의견교환한 결과 OKTA치바지부로 출범하기로 했다. 9월26일 치바시의 한 호텔회의실에서 성립대회가 열리고 박경홍 사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나와 천지협회이사들이 이사를 맡아서 출범했다.
나는 기업가는 아니였으나 기업가조직을 만들어 키워가기 위하여서는 직접적으로 조직에 참가할 필요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조직이 너무나 힘이 약해서 금후에도 유지되겠는가? 내외로 근심도 많았다. 한국에 있는 본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동경지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5년간의 노력을 걸쳐 지금은 제3대회장이 탄생했고일본의 유일한 조선족기업가 조직으로 건전하고 활발하게 발전해가고 있으며 차세대무역스쿨도 4년동안 조직하여 젊은세대 기업가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조직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전정선국장도 훌륭한 활동가이다. 일본에 오기전에는 상해에서 기업가로써 성공하고 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니 사업을 그만두고 일본에 이주했다. 전국장은 사무국장을 하면서 한편 2008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여성회를 발족시키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예활동과 어린의들의 조선말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서지역에서도 조선족단체들이 하나 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오사카 경제법과대학(大阪経済法科大学)오홍민 부교수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단체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기실 관서지역에도 수만명의 조선족들이 생활하고 공부하고 있다. 기업가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에로의 조선족진출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학자, 연구자, 류학생들로 시작되여 현재는 5-6만명규모로 되며 일본에서의 조선족사회가 근10년간 형성되여가고 있다. 대부분은 류학생으로 왔기에 중국의 젊은 지식인이나 엘리트들이 많이 와 있다.한면 일본에도 불법입국이나 불법체류로 돈벌이을 위하여 온 조선족들도 있다. 그중에는 3개국언어를 구사하면서 일본의 범죄조직과 결탁하여 비법이나 범죄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일본의 매체에 가끔 보도되고 있다. 근년에는 일본정부의 불법체류자 적발과 축출이 엄해지면서 그런 사람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조선족 발전사도 잘 정리하면 전체 조선족역사의 일부분으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일본사회를 여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한 내용은 전체의 흐름과 현황에 대한 소개이며 론문으로 말하면 서론에 불과하다. 조선족류학생 연구자나 일본의 학자 연구자들 가운데서 일본의 조선족을 여러 측면으로 연구하는 학문도 서서히 전개되여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