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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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본유학의 길
2013년 01월 16일 15시 19분  조회:2350  추천:3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2. 일본유학의 길
 
일본과의 인연

일본에 대하여는 어릴적부터 동경해 왔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리 마을에 유명한 화백 석희만(石熙滿)선생이 하방(下放)하여 왔다. 그집에는 일본인 부인과 5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 집의 막내 아들은 나와 소학교 때부터 동창생이였기에 가끔 기회가 있으면 그집에 놀러가서 일본인의 가족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석희만화백은 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의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에서 미술을 배우고 나중에는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이 패전한 후에 중국에 돌아왔다. 그의 동생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에서 결혼하고 계속 일본에서 살다가 사망되였다고 들었다.

내가 어릴 때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일본에 대한 인상도 없고 지식도 없었다. 다만 석희만 화백은 대단한 사람이며 그의 월급이 길림성(吉林省) 성장(省長)급 보다도 더 높아 150원이라는 말은 들었기에 그 집은 대단한 부자라는 것 밖에 몰랐었다. 그때 농촌에서 10원만 있으면 대단한 돈이였으니 말이다.

 그후 중일국교가 1972년에 회복되니 석희만 화백의 동생이 일본에서 우리 마을에 있는 형의 집을 방문하러 오게 되였다. 외국손님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온다기에 정부에서는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석화백의 집주위도 정돈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중국 농촌의 초라한 모습을 외국인한테 보이는 것은 중국사람의 낯을 깍아 내리는 것이였으므로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었다.
그때 석화백의 아들인 나의 동창생친구한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수입이 높아서 하루만 일해도 우리의 1년 수입과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그게 어떤 나라이기에 그렇게도 잘 사나? 하고 부러운 심정은 있었지만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럽기는 해도 그림의 떡과 같아 우리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대학시험을 칠 때 외국어로 일어를 선택했다. 형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교과서를 얻을 수 있었다.  헌데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그 때는 록음기도 없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창생친구의 집에 찾아가서 친구의 어머니(석화백의 부인)에게 “일본어를 배우고 싶으니 가나(假名)의 읽음법만 배워주세요” 하고 청을 들었다. 그녀는 쾌히 승낙하고 배워 주었다. 이것도 아마 내 인생의 운명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내가 지금 일본에서 살게된 것이 그때 그런 운명적인 인연이 주어져서 촌에서도 일본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일본어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생산노동을 하면서 짬짬이 일본어를 자습했다. 유감스럽게도 석화백의 아들인 나의 친구나 그의 형제들은 그런 우월한 환경에 있었지만 누구도 대학에 가지 않았거나 가지 못했다. 우리 가난한 농촌집에서는 연이어 대학생이 나왔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4년동안 대학시험 끝에 북경으로 가게 되였다. 일본어도 상당한 수준까지 높아졌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 외국어는 영어가 필수 과목이고 일본어는 선생도 없거니와 과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어를 A,B,C,D로부터 시작해서 2년동안 배웠다.내가  2학년 되던 때에는 후배의 대학신입생 가운데 고중에서 일어를 배운 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었기에 대학에서는 북경외국어학원에서 일본어 선생을 초청하여 일어강좌를 시작했다. 나는 영어를 배우면서도 방청생으로 일본어 강좌도 열심히 듣고 배웠다.

그 때 우리 대학에는 일본에서 온 단기 유학생 10여명이 있었다. 그들은 기본상 사회인이며 일본의 회사나 학교에서 파견해 왔다. 하루는 대학생 운동회를 했는데 운동장에서 일본유학생들이 구경하러 와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으로 그들한테 다가가서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아주 반가워 하면서 앞으로 서로 교류하자고  제안 했다. 그 후부터 마루타니 마사노부(丸谷正延)라고 하는 나보다 한 살 우인 일본인을 자주 만나 일본어 대화를 연습할 수 있었다. 서로 익숙해지니 대학밖의 식당에 가서 식사도 하고 우리 숙소에 와서 요리를 만들어 술도 마시고 하면서 어느덧 딱친구로 되여 버렸다.

아주 빈번한 교류가 되였기에 나의 일본어 회화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갔다. 대학의 일본어 선생은 3학년 때 나를 보고 “너의 일본어 수준은 외국어학원의 4학년생 수준보다도 높다” 고 평가해 주었다. 마루타니씨는 졸업한 후에도 회사파견으로 북경에 근무했기에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줄곧 친구로서 사귈 수 있었고 지금도 계속 사귀고 있다. 그 후에도 나는 일본철학이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북경(국가)도서관내에 있는 일본관에서 일본어로 많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겹쳐서 나의 일본유학을 결단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유학의 장애를 돌파

    지금의 시대와는 달리 그 때 당시에는 유학하려면 많은 장애가 있었다.  먼저 일본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일본친구는 사귀고 있었으나 보증인은 부탁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대방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돈이 없었지만 왜서인지 유학경비 문제는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큰 장애는 중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하는가 하지않는가, 단위(소속대학) 에서 허가를 하는가 하지않는가? 하는 문제였다.당시는 천안문사건이 발생한 후 수많은 대학생이나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출국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중국정부 차원에서 보면 고급인재 유출 붐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것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정부는 새로운 출국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발표하고 시행했다. 그 내용은 대학졸업이나 대학원졸업 후 국내에서 5년이상 근무하여 나라의 대학생 양성비를 갚아야 출국을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89년3월에 나의 셋째 형(연변대학강사)은 처가집이 일본귀국자녀의 조건에 해당되여 일본정부가 책임지고 귀국할 수 있도록 했기에 가족을 거느리고 일본에 영주귀국을 했다. 형은 나중에 동경에 있는 일본어학원에 취직하여 유학생사무 담당을 하게 되였다. 내가 출국 의향을 이야기하고 부탁드렸더니 수속을 해보겠다고 하였다. 또 일본에서 보증인도 찾아놓았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중국의 대학에서는 조건이 구비되지 않아 출국수속을 밟을 수 없었다. 그 때 나의 근무기간은 3년남짓 밖에 되지 않아 출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먼저 안해를 출국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형님한테 상담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안해의 출국수속을 하였더니 인츰 성사하여 안해는 혼자몸으로 1990년12월에 일본동경의 일본어학원에 입학했다. 형의 가족이 있기에 마음놓고 보낼 수 있었다. 안해는 고중과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기에 일본어는 전혀 몰라서 내가 집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워주었다.

나는 계속 갖은 방법을 대여 대학의 인사처를 찾아 다니며 출국수속을  추진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전에 농촌에서 4년간 농업노동에 참가한 기간을 국가에 봉사한 기간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출국허가가 비준되였다. 많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끝내 일본유학의 꿈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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