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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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학시험- 연속 실패속에서 인생의 길을 모색
2012년 11월 14일 09시 45분  조회:3875  추천:7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7. 대학시험- 연속 실패속에서 인생의 길을 모색
 
농촌의 생활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단조로웠으나 또 여러가지 재미도 있었다. 하루의 육체노동을 끝내고 나면 피곤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혈기 왕성한 때니까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나면 친구들이 모여서 트럼프치기나 장기를 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일하게 유감스러운 것은 연애를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유의 하나는 나도 물론 20대의 청년으로서 여성에 대한 추구는 있었으나 여성을 추구할 용기와 담량이 없었고 더구나 나는 신체 불구자이므로 전혀 여자를 끌어당길 매력과 자신이 없었다. 또한 많은 처녀들은 ‘5전짜리 월급쟁이라도 공인(월급받는 노동자)한테 시집간다’는 사람이 많았다.그 때는 연애란 것에 대해서 마을에서 모두 비웃고 놀려주는 풍기가 있어서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정신이 거기에는 쏠리지 않았다.

허나 자기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결혼할 가능성도 적었고 평생 농촌에서 육체로동으로 벌어먹자니 그것도 앞길이 막연했다. 주위에도 나같은 장애자가 적지않았고 그런 어른들을 보면 나의 암담한 미래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고중졸업을 하던 해의 가을에 대학시험이 회복되여 많은 농민청년들은 시험을 쳐보겠다고 야단하고 있었다. 헌데 어쩐지 나는 시험을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같은 신체불구자가 대학생으로 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말 없이 농사일을 꾸준히 하였다. 나의 형이 생산대대 출납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시험을 치른다고 하였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속으로는 은근히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형님이나 누구한데 물어 볼 엄두도 못냈다. 만약 부정 당하면 자존심이 상할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그저 속으로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농촌에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선택이 나의 앞에 차려졌던 것이다. 생산대대에서는 당지부서기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지 대대 이발소를 꾸리겠으니 이발사를 하겠는가? 라는 상담이 왔다. 해볼가고 생각도 했으나 왜서인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양하고 말았다.  내가 고중에 다닐 때 부모들은 나를 의학을 배우면 좋지 않겠는가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크게 흥취를 느끼지 못해서 단념했다. 아버지가 옛날에 사당에서 중의를 좀 배웠다는데 의사는 하지 않았으나 진맥과 침구는 아주 신통하여 촌에서 급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몇이나 침구로 살려냈던 것이다. 한방(중)약 처방도 뗄 수 있고 부황도 붙일 수 있어 가정내에서는 훌륭한 의사로 집식구들은 아버지의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를 보고 아버지의 의술을 물려받으라는 부모의 권고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서 그때 그런 선택을 회피했을가? 나자신도 확답을 할 수 없다. 의사를 하면 직업도 좋고 지금이라면 돈부자라도 될 수 있었을 터인데.

결론으로 말하자면 무엇무엇 해도 내 맘속으로는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형이 77년도 대학시험에 합격되여 길림대학 일어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도 일어를 배워 장래에 일본에 유학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형님한테 편지하여 ‘일어책하나 보내주오’하고 부탁했더니 정말 책 한 권을 보내왔다. 그리고 형님의 회답에는 ‘너와 같은 애들도 대학생으로 되였으니 너도 시험 쳐 보아라’고 씌여 있었다. 아!이게 정말이란 말인가? 나도 가능성이 있다니. 나는 너무나도 흥분되였다. 대학에 가는 것이 그림속의 떡이 아니라 나에게도 기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시험에 도전해 보려고 생산대장한테 2주일 휴가를 맡고 집에 들어 앉아 이전의 고중교과서들을 뒤집어내서 자습하기 시작했다. 대학시험이란 처음으로 체험하는 일이고 또한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대학진학 공부가 전혀 없었기에 대학시험을 어떻게 치르는지? 대학에 들어가면 무었을 배우는지? 전공은 무었을 보고 선택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 때는 공농병대학생을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골라 추천하는 시대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대학시험제도를 페지하고 실천경험이 있는 노동자,농민,군인중에서 우수한 사람(표준은 공산당을 옹호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대학에 추천하고 간단한 시험을 치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여 있었다. 예를들면 장철생(張鐵生)이란 청년이 대학시험에 백지 답안을 냈는데도 대학에 들어 갔다는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여 한 때 논쟁도 있었다.

 누나나 형들 한테 물어 보려고 해도 전화도 없는 세월이라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저 되는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멋도 모르고 리과시험에 등록했다. 시험결과는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여섯개 시험과목을 치렀는데 수리화 세과목의 점수는 장철생의 백지보다는 좀 나은 편이나 100점 만점에서 17, 18, 19점 밖에 안되였다. 허나 이것은 내가 공부하지 않았거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공부할 환경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의 결과가 나한데 내린 불행한 처벌인 것이다. 대학시험에 실패했으나 나는 아무런 아쉬운 생각도 없었다. 시험이 끝나자 나는 곧바로 생산대에 돌아와 논기음 매는 일을 하였다. 생산대 회계도 그대로 하고 가을에는 량식분배, 겨울에는 년도총결산에 바삐 보냈다. 그러다나니 다시 시험을 쳐 보려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듬해 여름에 대학시험 계절이 다시되니 허나사마(혹시나) ‘한번 또 해볼까?’하는 미련에 이번에는 한달 허가를 맡고 집에서 책을 뚜져 공부를 시작했다. 평생 농촌에서 이렇게 살아가자니 아득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 농촌을 떠나야 했다.

그 시절 농촌을 떠나는 방법은 또 하나 있었다. 군대를 가는 방법이다. 맏형이 1969년에 군대에 들어가고 둘째 형도 참군하려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합격되였으나 농촌 생산대에서는 가족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농촌을 벗어나지 못하여 일생동안 후회하고 있다. 나는 신체가 불구이기에 군대와는 인연이 전혀 없고 대학시험이 나의 인생 전환의 유일한 희망이나 그것 또한 묘망한 희망이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던 끝에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중등전문학교를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전문학교시험 문과에 등록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아주좋은 성적이였다. 전 연길현(현재 룡정시)에서 제일 높은 점수였다. 제1지망은 연변재무학교에 들어가 회계전공을 배운는 것이였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신체검사 불합격(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기회가 있는가해서 룡정의 학생모집 반공실에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당시 금방 설립된 룡정현사범학교에라도 넣어줄 수 없는가?하고 물으니 그것도 안된다는 것이였다. 눈앞이 갑지기 캄캄해졌다. 그자리에서 눈물이 나서 통곡했다. 자살할 생각도 머리속을 스쳐지나 갔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첫 정신적 타격이였다. 그 때까지 자라면서 집이 아무리 가난하고 신체의 장애가 있어도 자기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마련한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였다. 물론 그 때는 하느님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에 사로 잡힌다). 불쌍하고 기구한 내 인생이란 생각밖에 없었다. 이 몸으로 평생 농촌에서 소궁둥이나 두들이고 살 수 밖에 없구나. 이 몸으로 나한테 시집 올 여자도 없을 것이 아닌가. 부모님도 내가 불쌍해서 속이 타고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

인생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으나 나는 하는수 없이 다시 생산대에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밥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시작하니 차차 모든 것이 잊혀졌다. 허나 어떻게 자기 인생을 개변하겠는가? 라는 생각은 머리속에서 떠나지지 않았다. 인생을 개변하려면 병을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기실 나의 병을 고쳐주려고 둘째 누나(자전거 선수로 전국대회 국제대회에서 대회에서 금메달을 탄 운동건장이며 길림체육학원의 교련으로 있었음)는 1969년경에 나를 장춘에 불러다가 군부대병원인 302병원에 데리고 가서 다리교정 수술을 십여번이나 해주었다. 허나 다리는 완전히 치료 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나어린 촌놈이 장춘이라는 대도시를 여러번 체험하고 처음으로 중국말을 해보았다. 물론 간단한 말 밖에 몰랐지만.

이번에는 의학이 발전하여 새로운 치료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연변병원에 찾아갔다. 수술을 하고 한 달가량 연길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결과 어느정도 효과는 있으나 여전히 완치는 불가능 했다. 치료 후 또다시 생산대에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어느덧 새해의 대학시험 계절이 또 닥쳐왔다. 어떻게 할것인가? 장춘에 있는 둘째 누님한테 편지를 썼다. 무슨 방법이라도 없겠는가고?. 누님의 회답에 자기가 알고 있는 대학의 교수들한테 사정을 이야기하여  부탁해 보겠다는 것이였다.대답은 시험점수만 좋으면 길림재무학원(대학)이나 사평사범학원에 친구가 있으니 방법을 대겠다는 것이였다. 또다시 한갈래의 희망이 나한테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해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생산대장한테 한달 휴가를 맡고 룡정에 있는 누나의 집에 찾아가서 매형더러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큰 누나는 룡정5중의 수학교원이고 매형은 룡정고중의 역사 교원이였다. 기실 누님이라기보다도 나보다 21세 년상인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매형과 누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습을 했다. 필경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니 진척은 빨랐다.

허나 그 때(1980년)에는 외국어 시험이 추가 되였다. 나는 생산대에서 일하면서 일본어 자습을 시작했었다. 아이우에오는 우리 마을에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일본인이 였기에 염치불구하고 일본어를 좀 배워달라고 부탁하니 쾌히 응해주었기에 문자읽기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되였다. 그 후 형이 보내준 책 한 권(대학교과서)을 매일 휴대하고 일터에 나갔으며 짬을 타서 공부했다. 그 때는 생산대대의 벽돌공장에서 일했는데 매일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면서 휴식시에는 일어단어를 외우고 집에 돌와서는 밤에도 피로한 몸으로 공부를 견지했다. 허나 시험지도를 하는 선생이 없었기에 결국은 대학시험을 쳐도 좋은 성적을 따내기 힘들었다. 겨우 30점 정도밖에 안되였다. 다른 문과과목은 그래도 괜찬은 성적이여서 입학점수선에 거의 접근하였다.내가 맥을 놓고 있을 때 매형은 촌놈이 한달가량 자습을 해서 이 정도 성적이면 머리가 좋는 편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 한마디 말씀에 또다시 희망이 보였다.

그해 가을에는 부모들과 상의하고 또다시 룡정고중에 있는 매형한테 부탁하여 보습반에 편입시켜 달라고 사정했다. 입학허락을 받자 나는 쌀 한 마대(주머니)를 달랑 메고 룡정고중으로 찾아가 등록하고 큰누나의 집에서 하숙하기로 하였다. 누님네도 어려운 상황이였으나(그 때는 식량이나 부식품이 공급제였기에 쌀과 육류 등이 결핍 하였다) 그래도 막내 동생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도와 주었다.
 룡정고중 보습반에 들어와보니 대부분 몇 년씩 대학시험에 합격되지 못한 ‘앉은석동’들이였는데 보습반에서도 몇 년씩 공부하였기에 그들의 수준은 내가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 보였다. 사실 그랬다. 농촌에서 로동을 하면서 그저 몇 주일 정도 책을 보고 시험에 도전하였던 나는 진짜 시골티가 나고 무식한 놈이였다. 처음에는 그만 자신감이 떨어져 당장 그만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매형한테 상의 하였더니 “어쩌다 이런 기회를 얻었는데 열심히 해봐라”고 격려해주기에 다시한번 결의를 다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담임선생이 항상 “너희들은 방석에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다면 자살하겠다’고 써붙혀 놓고 공부해라”고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나에게는 좋은 자극이였다.하여 나는 하루에 3-4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못하면서 죽자 살자 공부에 몰두 했다.

 시험공부도 물론이지만 한어실력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친구의 힌트를 받아서 신화자전(新華字典)과 성어자전(成語辭典)을 한장 한장 암기내고는 찢어버렸다. 너무나도 우둔한 방법이였으나 그래도 효과는 좋았다. 대학입시 한어시험에는 문장을 축소(긴 문장의 의미를 살리면서 짧게 쓰는법)하는 문제가 나왔기에 그 때는 암기냈던 성어(成語)가 크게 힘을 내여 최고성적을 따냈다.

드디여 본시험 한달전에 예비시험이 실시되였는데 나는 전현 문과생 가운데서 2등을 하였다. 담당교원들과 매형은 너무나 놀라했다. 본시험이 닥쳐왔다. 너무나 공부에 몰두하고 영양도 못따라 갔기에 본시험의 첫날 아침에는 긴장감도 있어어 뒤머리가 막 마비되는 감각이였다. 시급히 병원에 가서 30분정도 침구치료를 하였더니 좀 회복되였다.

나중에 시험결과가 나와서 교원들은 또 한번 놀랐다고 하였다. 시험성적이 전 연변주에서 문과 1등이라고 하였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길림성에서 문과 3등이였다. 이 성적이면 중국의 최고대학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허나 나에게는 또다시 신체장애의 걸림돌이 걸려왔다. 입시전에 룡정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소아마비 후유중과 색망(色芒)이 좀 문제로 걸렸었는바 다시 한 번 정밀검사를 한다는 것이였다. 길림대학의 형이 여름방학이였기에 나를 배동하여 길림시 구전(口前)이라는 곳에 가서 신체검사를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결론은 알려주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그래서 시골집에 돌아와 생산대에서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중앙민족학원(대학)의 입학통지서가 도착했다. 정치계(학부) 철학전업이였다. 전문이야 무어든 상관이 있으랴. 대학에 들어가게 되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이였고 또 상상도 못하던 수도의 대학에 록취되다니? 수도 북경! 그것은 꿈에도 가고 싶었으나 실현할 수 없는 꿈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내앞에 닥쳐왔으니,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막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부모형제는 물론 온 마을과 마을의 친구들이 모두 모여서 부러운 마음으로 축복을 해주었다. 소학교의 선생님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이런 때 연인까지 있었더면 더 달콤한 축복을 받았을 텐데. 허나 나같은 신체장애자의 촌놈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처녀는 유감스럽게도 한 사람도 없었다. 소학교부터 한교실에서 같이 공부한 동창생이 우리 마을에만 12명이고 그중에는 여성동창생이 6명이였는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대부분 시내로 시집을 갔었다. 또한 내가 북경에 간다고 하니 하늘에 올라가는 것 같으니 누가 감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귀인이 도와 주었기 때문이였다. 당시 중앙민족학원에서 초생(학생모집)하러 길림성에 간 사람이 정옥순(조선족,당시 학생과 과장이였는데 나중에는 대학의 당지부 부서기까지 되였다)선생님이였다.길림성 초생반공실에서 시험당안(파일)을 체크하다가 나의 당안을 보고 너무나 성적이 높은데 놀라(그해 중앙민족학원 길림성 초생점수선은 400점가량이였는데 나의 총 점수는 434점이였다)  더 자세히 보니 신체검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선생은 소수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신체상 문제가 있는 나의 당안을 뽑아가지고 북경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때 만약 정선생이 아니였다면 나는 북경에 갈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고 대학조차 들어갈 수 있을지 말지 모르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귀인이 나를 도와 주었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예비시험을 보고 지망하는 대학을 써넣었는데 북경대학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용기를 내여 쓴 첫 지망이 길림대학(국제경제계) 이였고 둘째 지망이  중앙민족학원 역사계였다. 그뒤로 연변대학(일반대학)도 지망서에 써넣었다. 만약 대학본시험 결과를 보고 지망서를 쓴다면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도 선택할 수 있었다. 나의 성적이 최고급 대학의 입학선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허나 이것도 운명이였다고 지금은 생각하고 또한 중앙민족대학에 들어갔기에 언제나 제일 높은 성적으로 제일 선두에서 달릴 수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속담에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과정에는 이와 같은 면이 적지 않다. 하나는 내가 신체장애가 없이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많은 농촌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농촌에서 장가들어 농사지으면서 사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또79년도에 전문학교 시험에서 연길현 수석이였으나 전문학교에도 들어갈 수 없는 가련한 운명에 통한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런데 만약 그때 순조롭게 전문학교로 갔더라면 지금 같은 인생길이 없었을 수도 있다. 연변의 어디에서 소학교 교원이나 어느 국영단위의 회계나 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한국붐에 휘몰려 품팔이로 출국했을 가능성도 있었지 않겠는가?성공하기 전에는 인생이 기구하고 전도가 없다고 낙심했는데 성공하고 보니 그것이 나의 불굴불요(不屈不饶)의 강인한 의지를 키워주고  나중에는 오늘의 인생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으로 되였다. 지금은 오직 감사의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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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경의
날자:2012-11-15 09: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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