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모주석이다”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4. “나는 모주석이다”-기아와 가난의 시대속의 생존분투
인생의 길은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불도 있고 물도 있어 그야말로 우여곡절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인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이지만.
나는 인생을 돌이켜 볼 때마다 한번 인생의 경로를 그래프로 표현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아마 내가 경제학을 배웠으니 독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알기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수식(數式)을 만들어 그래프를 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이 글을 시작하면서 그런 작업을 해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읽어 본 인생의 회고록 같은 서적에서 그래프로 인생의 경로를 표현하는 수법은 본 적이 없다.때문에 이것도 나의 독특한 Only one의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나의 인생그래프를 해석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나는 중국에서 한창 대약진운동이 시작되던 1958년12월(음력) 중국의 길림성 연길현(현 룡정시) 동불사촌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당시 부친 리선규는 50세, 모친 강영숙은 42세로 초고령 출산이였고 4남4녀의 막둥이였다.
내가 태여난 시대는 우리 가정뿐아니라 중국의 6억농민이 대부분 가난했었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대약진정책을 추진하고 게다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므로 소련의 대중국 지원이 중지되고 대약진운동으로 공업과 농업생산이 많이 정지되고 자연재해 등 원인으로 3년 대약진 기간에 약3천만에서 5천만인구가 사망되였는데 그대부분은 아사(굶어죽음) 하였고 또 그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농민이였다
[1].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대량 아사하였다.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온가족 7명이 하루에 식량500그램을 분배 받았다고 한다. 육류나 부식품도 거의 없는 상황이였다. 1990년대의 중반기 이 후의 조선(북한)의 기근상황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기근속에서 태여나 자라다보니 당연히 죽음이 아니면 심각한 영양불량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태여난 시대가 너무도 기구했었기에 나는 일생동안 영양불량의 체질을 달고 있게 되였는데 한살되는 나이에 소아마비증에 걸렸다. 가난하여 치료도 못받고 그 휴유증이 나의 일생에 장애자의 괴로움을 남겨두고 보통인간으로 성장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였다. 후에 어머니도 제일 큰 근심이 불구자인 ‘막둥이를 열다섯살이래도 먹여놓고 죽었으면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마음속으로는 장가라도 보내놓고 죽었으면 눈을 감겠다고 희망했을 것이다)고 언제나 마을 사람들한테 넉두리처럼 말씀하셨다. 그것은 가난속에서 12명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의 몸은 병투성이여서 언제 자기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나에게서 인생의 첫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어머니가 나를 업고 우사칸 (소사양간) 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1961년에 동불사촌에서 약10리 떨어진 로투구 렴명촌 (인민 공사
[2] 시대이므로 그때는 도원인민공사 렴명생산대대 제5생산대) 에로 친척의 알선으로 이사하려고 낡은 우사칸집에 집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동불사촌은 땅이 척박하고 재해가 많아 가난하기 짝이없는 곳이였다(지금도 이곳은 여전히 빈곤한 촌이다. 너무 가난하여 ‘당나귀가 새끼를 않친다’는 속담까지 전해오는 곳이다). 이사한 렴명촌은 그럭저럭 밥벌이하고 살 수 있는 촌이였다. 또한 1961년에는 모택동의 대약진정책이 비판받고 수정되여 류소기 국가주석과 등소평 부총리의 새로운 산업정책과 농업정책에 의해 공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세살 때의 희미한 기억이였다.
어릴 때의 나의 두번째 기억은 어머니가 누덕누덕 기운 솜옷을 나에게 입히고 마을 부근의 논밭에 모내기를 하러 갔을 때 나를 논두렁 개울물 옆에 앉혀놓고 모내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앉아서 끄떡 뜨떡 졸다가 개울물에 빠졌던 것이다. 같이 갔던 옆집의 일호아매라고 하는 할머니가 “애가 물도랑에 빠졌소”하고 소리치자 주위의 사람들이 달려와서 나를 건져 주었다. 하도 생명력이 강해서인지 생명위험은 없었다. 헌데 어머니는 나를 건져서 논두렁 옆에 않혀놓고는 계속 벼모내기를 하였던 것이다. 네살 때의 기억일 것이다.
세번째의 기억은 어느 하루 집마당 앞의 조짚 낟가리에 굴을 파고 안에 들어가 새감지 놀이를 하면서 석냥을 가지고 불을 달아 놓은 것이다. 불은 즉시에 훨훨 타오르고 집지붕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뺑소니 쳐서 집에 들어가 고방간에 숨어 있었다. 온 가족이 불을 끄고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손에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나 화가나서 “반반(모조리) 싹 죽어벼려라!”라고 한마디 외치고 그 이상 나한테 벌은 없었다. 5,6세의 병신 막둥이 아들을 때려 줄 수도 없고 벌을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장난질로 나쁜 짓을 많이 하였으나 아버지 어머니한테 한번도 매를 맞아 본 기억이 없다. 상냥한 부모였던 것이다.
네번째 기억은 소학교 3학년 기말시험 때 어문시험을 내가 제일 먼저 마치고 퇴장하기 전에 너무나 흥분되여 “나는 모주석이다”하고 주위의 애들한테 소리쳤다. 그랬더니 나중에 누가 선생님한테 고발하였는데 이는 위대한 모택동주석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을 받고 검토서를 쓰지 않으면 않되였다. 그 후에도 그일 때문에 친구들한테 많이 몰려대고 왕따당했다.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철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1] 인구의 대량아사에 관한 중국의 공개자료는 없다. 홍콩이나 해외에서 인구통계를 연구한 결과 이런 수치가 나왔다.
[2] 농업함작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농가의 토지를 집중하여 집단농업을 전개하기 위한 농촌의 조직체이며 한개 마을을 통합하여 [생산대](生産隊)로, 몇개의 마을을 통합하여 [생산대대] (生産大隊)로, 몇개의 생산대대를 통합하여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농촌조직을 편성하여 정부가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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